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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감 공모전 우수작
제목: 우연의 설계
학과: 고고학과, 이름: 김*훈, 선정연도: 2018
내용: ‘시험을 일주일 앞둔 어느 날, 웬일로 힘이 솟아 밤늦게까지 시험공부를 이어나간다. 새벽 1시 무렵이 되어서야 피곤에 절어 평소 꼬박꼬박 맞추던 알람도 깜빡한 채 단잠에 빠져든다. 아침나절, 힘겹게 언덕길을 오르는 오토바이 소리에 운 좋게 잠에서 깬다. 부랴부랴 외출 준비를 마치고 정류장으로 뛰어가니, 때마침 마을버스가 모습을 드러낸다. 뜀박질에도 불구하고 강의실에 5분 늦게 도착했지만, 다행히 교수님 역시 늦게 들어와 출석체크를 놓치지 않는다. 정신없이 하루를 보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목, 피자집 유리창 너머로 3년 넘게 보지 못하였던 고등학교 동창을 마주친다. 집으로 향하는 버스에서는 이상형에 가까운 이성이 옆자리에 앉는다. 기분 좋게 버스에서 내려 아파트 주차장에 들어서니 곧바로 빗방울이 바닥을 때린다.’
의식하지 않는다면 기억에 남지도 않을 평범한 일상처럼 보이지만, 그 면면을 들여다보면 놀랍도록 많은 우연이 연속되어있다. 깜빡하고 맞추지 않은 알람과 같이 스스로에서부터 기인한 우연에서부터, 많은 빈자리 중 굳이 옆자리를 차지한 이상형과 같이 타인으로부터 기인한 우연, 실내에 들어서기 무섭게 쏟아져 내리는 빗방울과 같이 그야말로 자연스럽게 일어난 우연에 이르기까지, 무엇 하나 우연이 아닌 것이 없어 보인다. 영화나 드라마가 아니고서야 하루라고 하는 짧은 시간 동안 이처럼 많은 우연이 일어난다는 것이 가능하기나 할까? 하지만 놀랍게도 그 답은 ‘가능하다’이다. 위의 상황들이 영화나 드라마가 아닌, 바로 내가 직접 경험한 하루라는 사실이 그것을 증명해준다. 심지어 먼 과거의 특별한 어느 날도 아닌 바로 어제의 일이다. 어떻게 이러한 일이 가능한 것일까? 이 모든 것이 단순한 우연일까? 아니면 누군가 의도적으로 나의 삶의 개입한 것은 아닐까? 이러한 생각들에 빠져 있다 보면 마치 <트루먼 쇼>의 트루먼이 된듯한 착각에 휩싸이기도 한다. 하지만 더욱 놀라운 점은 누구나 이러한 하루를 겪을 수 있다는 것이다. 아마 의식적으로 하루하루를 되짚어 본다면 이러한 우연들이 일어나지 않는 하루를 찾는 것이 더 힘들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모두 결국 누군가의 트루먼인 것일까? 마크 뷰캐넌을 비롯한 사회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이 ‘우연’에 관해 한 이야기들을 엮은 책, 『우연의 설계』는 이러한 의문점들을 다루고 있다. 우주의 탄생에서부터 지금 이 순간에 이르기까지 ‘나’라는 존재가 얼마나 많은 우연이 겹쳐진 결과인지, 지난주 당첨된 로또 당첨자가 얼마나 큰 우연을 겪은 것인지, 저녁내기 가위바위보에서 이기려면 무엇을 내야 하는지, 더 많은 행운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 모든 것을 읽고 난다면 아마 우리는 앞서 느꼈던 의문점들에 대해 나름대로 합리적인 답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그 자세한 내용을 알아보기에 앞서 ‘우연의 설계’라고 하는 제목에 대해 살펴보자. ‘우연’이란 사전적으로 ‘아무런 인과 관계가 없이 뜻하지 아니하게 일어난 일’이라는 정의를 가진다. 그리고 ‘설계’란 ‘계획을 세우는 행위 또는 계획 그 자체’를 의미한다. 이러한 점을 생각해본다면 ‘우연의 설계’라고 하는 제목은 대단히 모순적이 아닐 수 없다. 우연은 설계될 수 없고, 설계된 순간 그것은 우연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저자는 왜 이렇듯 오묘한 제목을 사용한 것일까. 사실 책의 원제목은 ‘우연의 설계’로 번역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는 ‘Chance’라는 한 단어이다. 그리고 이 ‘Chance’는 우리나라 말로 ‘기회’, ‘가능성’, 그리고 ‘우연’으로 번역할 수 있다. 책의 원제를 내용과 관련지어 직역하면 ‘우연’ 정도로 해석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그런데 왜 역자는 여기에 더하여 ‘설계’라는 말을 덧붙인 것일까? 정확한 의도는 알 수 없지만, 책을 다 읽고 난다면 그러한 이유를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여러 파트로 나누어서 설명하고 있지만, 이 책은 기본적으로 우연으로 보이는 현상들이 왜 일어난 것이며, 그러한 우연이 또다시 일어날 확률이 얼마나 될지를 분석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실제로 많은 우연들이 그러한 방식을 통해 분석이 되었으며, 이러한 분석들은 우리 일상 속에서 충분히 이롭게 사용될 수 있다. 즉, 하나의 ‘우연’가 ‘기회’나 ‘가능성’으로 비추어질 수도 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해 볼 때, 역자는 ‘우연’이 어떻게 ‘설계’되어 있는지를 파악함으로써, ‘우연’을 ‘기회’나 ‘가능성’으로 바꿀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우연의 설계』라는 책이 우주의 탄생부터 시작하여 우리가 겪어온 수많은 우연들을 어떻게 풀어나가고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우주의 탄생은 양자 요동의 불규칙성 속에서 우연히 시작되었고, 무분별하게 일어난 초신성 폭발과 적색거성이 만들어낸 빛과 열로 태양계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어쩌다 지구의 궤도에 걸려든 운석 조각으로 인해 달이라는 위성이 조성되었고, 즉흥적으로 일어난 행성들의 핀볼 게임으로 지구에 생명체가 탄생할 환경이 조성되었다. 또, 아미노산이라는 조그만 벽돌들이 원시 지구의 다이너마이트 같은 에너지 폭발에 우연히 단백질이라는 집이 되었으며, 이와 비슷한 과정으로 핵산 분자들이 변이와 복제를 거쳐 DNA와 RNA가 되었다.
수많은 우연 속에서 탄생한 단순세포들이 복잡한 진핵세포로 나아가는 것에는 역시 크나큰 우연이 작용하였다. 진핵세포는 단순한 유기분자에 비해 막대한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막대한 덩치를 유지하고, 무엇인가 기능하기 위해서는 당연한 과정일 것이다. 그렇다면 진핵세포는 이러한 에너지를 어떻게 수급할 수 있게 되었을까? 약 20억 년 전, 한 세포가 다른 세포를 포획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포획당한 세포는 살아남기 위해 에너지 생산과 복제를 위해 필요한 요소를 제외한 나머지를 벗어던졌고, 하나의 소형 발전기로 진화하게 되었다. 오늘날 ‘미토콘드리아’라고 부르는 이 세포는 숙주세포에게 막대한 에너지를 제공해주었고, 숙주세포는 마음껏 덩치를 부풀릴 수 있었다. 그 결과 복잡한 생명체가 탄생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놀라운 점은 한 세포가 다른 세포를 포획한 사건이 약 40억 년의 지구 역사 동안 단 한 번만 발생하였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큰 우연인가!
아직 ‘나’라는 사람이 되기는커녕 인류의 탄생에도 도달하지 못하였지만, 이미 셀 수 없는 우연들이 겹치고 겹쳐졌다. 최초의 진핵세포에서 새로운 종이 분화하고, 그러한 계통수가 갈라져 유인원 단계까지 도달하고, 6가지의 극적인 변화로 인간이라는 존재가 탄생하고, 마침내 ‘나’라는 존재가 되고. 뒤이어 일어날 우연들까지 생각한다면 ‘나’는 그야말로 0에 수렴하는 확률을 뚫고 존재하게 된 셈인 것이다. 시간을 한 뭉텅이 잘라내어 우주의 탄생으로 돌아가 재생 버튼을 누른다면, ‘나’는 다시 존재할 수나 있을까? 만약 재생 버튼을 누를 때마다 시간이 매번 새로운 경우의 수를 향해 내달리도록 설정되어있다면, 몇 번을 되돌려야 다시금 ‘나’라는 존재로 되돌아올 수 있을까? 아마 영원에 가까운 반복 뒤에야 그러한 순간이 올 것이다. 어쩌면 영원히 도래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나’라는 존재는 그만큼 극적인 우연이 만들어낸 결과물인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극적인 우연은 아이러니하게도 필연을 떠올리게 만든다. 누군가의 의도가 개입되지 않고서 이러한 우연이 연속될 수 있단 말인가. 인간이 ‘신’이라는 존재를 떠올리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할 결과일지도 모른다. 전지전능한 ‘신’의 존재야말로 ‘나’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가장 간단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신’을 등장시킴으로써 자신을 증명하려고 든 것은 아니다. 물리학과 수학이라는 조금 더 복잡한 방법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물리학은 세계의 질서에 관한 여러 이론을 내놓았으며, 수학은 확률과 통계로써 그것들을 보완하였다. 그 결과 앞서 설명한, 우주의 탄생에서부터 인류의 탄생에까지 이르는 거대한 설계도가 완성되었다. 비록 설계도가 너무 탄탄해 보여 일부 과학자들은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 담긴 정보 속에 생명의 탄생에 호의적인 내재적 편향이 존재한다고 믿기도 하였으나, 신에 대한 도전이 시작된 것이다.
현대에 접어들어 한층 발전한 물리학과 수학은 결국 이 공고한 체제를 무너뜨리는 것에 성공한다. 양자역학과 무작위성, 카오스이론, 결정론은 신의 의도가 끼어들 틈을 완전히 메워버렸으며, 신의 역할을 축소하는 결과를 낳았다. 신의 권위는 한없이 추락하였고, 그 피조물인 인간 역시 무한한 안배 끝에 만들어진 존귀한 존재가 아닌 우주의 탄생과 동시에 결정된 수많은 경우의 수 중 하나에 불과하게 된 것이다. 일리야 프리고진의 표현을 빌리자면, “신은 이미 모든 것이 적혀 있는 우주 역사책의 페이지나 뒤적거리는 문서 보관 담당자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렇다면 이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어제의 그 많은 우연들은 다 무엇이었을까? 책의 내용에 따르면 내가 그러한 우연들을 겪을 수 있었던 것에는, 좀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그러한 것들을 우연이라고 여길 수 있었던 것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정확한 예측을 가능하게 할 정보들을 파악하지 못하였기 때문이고, 둘째는 내가 그것들을 우연이라고 믿고 싶었기 때문이다. 습도와 바람, 구름의 상태 등을 완벽히 파악한다면 비가 언제 내릴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으며, 내가 실내에 들어서지 않았더라도 그 순간이 되면 비는 쏟아졌을 것이다. 단잠을 깨운 오토바이는 사실 매일 그곳을 다니며, 배차 간격이 10분 밖에 되지 않는 버스가 정류장에 도착한 순간 모습을 보일 확률은 생각보다 높다. 우주와 인류의 탄생 역시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어마어마한 경우의 수가 존재하지만, 결과적으로 그 경우들 중 하나는 반드시 발생한다. 우리는 그 결과물에 불과하다. 혹스가 “일이 다 벌어진 다음에 전체 과정을 뒤돌아보면 마치 놀라운 일련의 사건이 벌어졌던 것처럼 보이기 마련입니다.”라고 말했듯, 그리고 또 우리가 그 주인공이기 때문에 우리의 역사가 한층 특별해 보이는 것뿐이다. 많은 과학자들이 “모든 자연은 그대가 알지 못하는 예술일 뿐이며, 모든 우연은 그대가 보지 못한 방향이며, 모든 불협화음은 이해하지 못한 화음이다.”라는 알렉산더 포프의 말에 공감하는 것이 단순한 우연은 아닐 것이다.
미국의 유명한 SF 소설가인 테드 창의 소설 『당신 인생의 이야기』를 보면, 한 사람의 인생 전체의 내용을 담고 있는 책에 대한 이야기가 언급된다. 누군가 만약 그 책을 보게 된다면 책의 중간쯤에서 『당신 인생의 이야기』를 읽고 있는 자신이 등장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고, 자신이 어떠한 삶을 살아갈지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는 조용히 그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처음 이 소설을 읽고 느낀 것은 정말 기발하고 흥미롭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우연의 설계』를 읽고 난 지금 그러한 감상은 바뀔 수밖에 없었다. 과학이 우리에게 일깨워준 사실들을 생각해본다면, 이것이 단순한 흥밋거리만은 아니지 않을까?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
기술이 발전해나감에 따라 우리가 우연이라고 믿고 있던 많은 것들의 인과 관계가 밝혀지고 있다. 양자적 존재들만큼은 완벽한 무작위성이 지배하는 영역 속에 존재한다고 하지만, 더욱 기술이 발달하면 그마저 사라질지도 모른다. 통계론과 확률론은 우리의 미래를 예측 가능한 무수히 많은 경우의 수로 정리해 놓았다. 우연의 종말은 점점 가까워져 오고 있으며, 어쩌면 일상생활에서 우연은 이미 종말을 맞이한 것일지도 모른다. 아인슈타인의 말처럼 물리법칙에 주사위 놀이란 없는 듯 보인다. 심지어 우연을 상징하는 주사위 놀이마저 주어진 힘과 방향만 정확히 측정할 수 있다면, 그 결과를 예측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어쩌면 어느 깊은 골짜기에 ‘신’이 문서 보관 담당자로 일하는 허름한 도서관이 있고, 그 한구석에 『당신 인생의 이야기』가 꽂혀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 책을 읽고 나니 뭔가 세상의 큰 비밀 하나를 깨달은 듯한 기분이 든다. 책의 내용은 잘 응용해, 주어진 정보들을 잘 이용할 수 있다면 ‘우연’을 ‘설계’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만은 아닐 것이다. 로또의 번호를 다 맞추지는 못하더라도 보다 많은 상금을 받을 수는 있을 것이고, 가위바위보로 저녁을 쉽게 얻어먹을 수도 있을 것이며, 스포츠복권을 통해 반드시 돈을 딸 수도 있을 것이다. GPS에서부터 책 추천에 이르기까지 여러 기술이 등장해 우리 삶의 모든 것을 정확하고 예측 가능하게 만들고 있다. 언뜻 편리하게만 보이는 삶이다. 하지만 그러한 삶을 과연 행복하다고 할 수 있을까? 모든 것이 결정되어 있고, 그것들을 알고 있다면 우리의 삶은 더욱 나아질까? 사람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적어도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세계를 이해하기를 원하지만 이해하게 된다면 뜻하지 않았던 사건으로부터 얻는 즐거움이 사라져버릴 것이다.
세상에 우연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우연이라고 믿는다면, 나에게 우연은 일어난다. 실제로 우연을 받아들일 준비가 된 사람들이 더 많은 우연을 느끼는 것처럼. 물론 그러한 우연이 항상 좋은 결과를 낳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때때로 우리를 고통스럽게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한 우연으로부터 오는 즐거움이, 심지어는 고통이 우리 스스로를 인간이라고 느끼게 해주는 것은 아닐까? 세계라는 거대한 기계의 톱니바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보다, 차라리 우연을 바라고 즐거움과 고통을 감내하며 사는 것이 인간답지 않을까?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우리는 잠시나마 주사위 놀이에 몸을 맡겨도 괜찮지 않을까? 나는 설령 『당신 인생의 이야기』가 눈앞에 주어지더라도, 페이지를 넘겨보지 않을 것이다.
독후감 공모전 우수작
제목: 우리는 우연에 관해 얘기해야 한다
학과: 의예과, 이름: 화*민, 선정연도: 2018
내용: 인간의 삶에 관해 얘기할 때, 우연의 역할을 결코 빼놓을 수 없다. 사람들은 인간의 자유의지가 갖는 가치를 강조하며 우연의 존재를 애써 무시하려 하지만, 여전히 우연이 우리 삶에 끼치는 영향력은 실로 막대하다. 개인의 진로나, 살면서 겪는 다양한 사건들이 우연의 간섭 아래 있음은 물론이고, 우주의 탄생부터 시작해서 지구라는 이상적인 환경의 조성, 생명체의 탄생, 그리고 고등생물의 출현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을 모두 우연의 산물로 인정하는 시각도 존재한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존재 수준에서 이미 우연에 큰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막상 우연에 관해 본격적으로 이야기하고자 하면 우리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된다. 첫 번째로는 “우연”이라고 하는 말이 실제로 무엇을 가리키는지가 불분명하게 느껴지기 때문이고, 두 번째로는 우연은 통제 불가능한 것이므로 그것을 논의하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바로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었고, 그래서 우연에 관해 얘기하는 것은 떠들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소모적인 화제에 불과할 뿐이라고 여겼었다. 또한, 우연이 내 삶에 끼치는 영향을 인지하면서도 그것을 별로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대입 시험, 좋은 사람들과 친구가 된 일, 그리고 면접에서 합격한 일 등 내가 성취해왔다고 여기던 사건들을 우연의 산물이라고 인정하는 건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요소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는 건 망망대해에서 표류하는 기분만 불러일으킬 것이고, 나는 그와 같은 막막함을 느끼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이 책을 처음 집어 들었을 때, 나는 상당히 방어적인 태도였다. 책의 내용이 무엇이든 그것을 받아들일 생각이 별로 없었다. 다만, ‘우연히’ 우연에 관한 책을 읽게 된다는 사실이 재미있다는 생각으로 읽기 시작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책을 읽는 동안 나는 깊은 감명을 받았고, 어린 시절 대학생 형, 누나들이 캠퍼스 생활에 관해 들려줄 때 느꼈던, 알지 못한 세계에 눈을 뜨는 그 기분을 내내 느낄 수 있었다. 왜 내 생각이 이토록 급격하게 바뀌었는지 설명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 책의 구성 방식을 소개할 필요가 있다.
책의 내용에 관한 간단한 정보를 들었을 때, 상술한 거부감 외에도 책의 완성도에 대한 상당한 우려 혹은 불신이 있었다. 이처럼 광범위한 주제를 다루는 경우, 지나치게 지엽적인 부분에 집중한 나머지 처음의 목적성을 잃어버리거나, 혹은 너무 광범위하게 접근한 끝에 두루뭉술한 암시만 잔뜩 던지는 것으로 만족하는 경우가 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책은 훌륭한 접근 방식으로 나의 우려를 불식시켰다. 우연에 관한 여섯 가지 대주제 아래 핵심적 논의들을 빠짐없이 포함 시켰고, 각각의 대주제를 다시 서너 가지 단계로 분할 함으로써 어떤 논의도 놓치지 않고자 하였다. 또한, 23명에 이르는 각 분야의 전문가에게 할당한 영역의 서술을 맡김으로써 각각의 소주제에 있어서 서술의 충실함도 이루었다. 덧붙여서, 이렇게 방대한 주제와 다수의 집필진이 참여하는 상황에서 긴밀한 유기성을 끌어냈다는 점에서는 뉴사이언티스트지의 기획력에 감탄을 보낼 뿐이다.
기술적 뛰어남을 차치하고서도, 이와 같은 구성이 갖는 함의는 꽤 의미심장하다. 특히 이 책이 과학도서로서 이 같은 서술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동료 과학자 간의 검토와 경쟁으로 만들어내는 객관성과 합리성이 현대 과학의 가장 큰 장점이자 본질이라는 점을 떠올려보자. 이 책에 참여한 다수의 저자는 어떤 공통의 결론을 도출하지 않으며, 그러기 위해 애쓰지도 않는다. 그러나 그들이 각자의 분야에서 최선을 다해 집필한 조각조각이 모여 큰 그림을 이루고, 그 결론 없는 그림을 바라보는 우리는 일종의 진리에 더 가까이 다가섰다고 느끼게 된다. 이는 실제로 과학이 진리에 접근하는 방식을 보여주는 것만 같다. 다시 말해, 이 책의 형식은 과학자 정신과 긴밀한 연관을 가진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과학이 무엇인지, 과학적인 물음이란 어떤 것인지 나는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내가 갖고 있던 회의주의가 얼마나 게으른 것이었나 하는 것을 자각하게 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저자들은 그야말로 치열하게 자신이 아는 바를 털어놓고 있었고, 그들 이전의, 또 이후의 수많은 과학자가 마찬가지의 열정으로 진리에 다가가고자 애쓸 것이다. 그 열정 앞에서 나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내가 그러했듯, 질문하기를 멈춰서는, 진리에 가까워질 수 없다. 진리란, 단지 복잡한 방정식을 풀어서 얻은 명쾌한 답 뿐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보다 사실은 질문을 던지는 행위가 이미 과학이고 알지 못하는 것에 다가가고자 애쓰는 태도가 과학이며, 서로의 말에 귀 기울이는 것이 과학이다. 그리고 그게 실제로 인류의 앎이 진보해온 방식이었다. 이 지점에서, 불분명한 것들에 관해 얘기하길 꺼리고 무용하다고 치부했던 나의 판단이 도전받았다. 나는 내 오만한 태도를 반성할 수밖에 없었다.
예를 들어 보자. 우연이라는 말이 정확히 무엇을 가리키는가? 인간이 해독할 수 없는 복잡성을 우연이라고 하는가, 아니면 우연이란 본질에서 무작위적인 것인가? 이에 관해서는 이 책에서도 언급되는, 역사적인 논쟁이 존재한다. 우연이란 없으며 우리가 해독할 수 없는 복잡성이 있을 뿐이라는 과학계의 전통이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양자역학이 태동함에 따라 우연의 중요성과 그 존재에 대한 변론이 다시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수백, 수천 년에 걸친 논쟁 끝에도 우리는 여전히 우연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그렇다면 인류가 우연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수행해온 많은 탐구와 논쟁들은 모두 무의미했던 것인가? 그렇지 않다. 내가 알고 있는 범위의 경계를 찾아내는 것, 내가 무엇을 얘기할 수 있고 무엇을 할 수 없는지 구별하는 것. 내가 무용하다고 생각했던 그 일들이 사실은 과학의 본질이다. 성취보다 중요한 것이 앎을 향해 다가가려는 인류의 순수한 열정과 태도라는 게 내가 지금 가진 결론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동굴에서 불을 피우고 살던 생활을 벗어나 오늘날 비행기를 타고 태평양을 건너갈 수 있게 만든 원동력이다.
이제 우연에 관해 질문해야 할 당위는 정립되었다. 우리는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질문해야 한다. 그러나 이 당위는 지극히 학문적인 당위이다. 조금 더 실용적인 질문을 해보자. 우연에 대해 아는 것이 나의 작은 삶에 도대체 무슨 쓸모인가? 나는 어쨌든 그것을 통제할 수 없을 것이 뻔하지 않은가? 이것은 내가 책을 읽으며 스스로 곰곰이 생각해보았던 질문이고, 숙고하는 가운데 중요한 통찰을 하나 얻었다.
나의 대답은 다음과 같다. 설령 당신이 우연을 통제하지 못할지라도 당신은 그것을 못 본 척하는 대신 그 존재를 포용하는 삶의 태도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Elephant in the living room이라는 영어 표현이 있다. 거실 한 가운데 코끼리가 있는데, 도무지 그것을 어떻게 처리할지 엄두를 낼 수 없어서, 코끼리가 마치 존재하지 않는 듯이 못 본 체한다는 뜻이다. 나의 태도가 바로 그랬었다. 우연이 그토록 비대하게 내 삶에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었다. 그것을 인정하는 순간 나는 내 집의 거실이 우연이라는 코끼리에게 무단점령되었다는 사실에, 그리고 내가 그것을 쫓아낼 수 없다는 사실에 한없는 무력감을 느끼게 될 것이 불편했다.
그러나 사실은 우연을 그렇게 취급해서는 안 된다. 코끼리를 못 본 체한다고 코끼리가 사라지는 게 아니듯이 말이다. 우연 역시도 내가 딛고 살아가야 할 발판이고, 그것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회피는 어떤 건설적인 결과도 만들어낼 수 없다. 세상을 인과와 노력 같은 키워드만 가지고 설명하려 애써서는 안 된다. 대자연의 어머니가 우연이라는 이름 아래 사정없이 던져대는 삶의 비극 앞에 우리는 ‘우연’이라는 단어를 빼놓고 도대체 어떤 대답을 할 수 있는가? 두려운 마음이 들 때도 진실을 똑바로 바라볼 것. 거창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내가 반성 끝에 내린 결론이다. 게다가 진실을 똑바로 응시할 때, 우리는 분명히 더 나은 해법을 찾을 수 있다. 이 책의 마지막 장은 우연을 통제하는 방법에 대해 제안하고 있는데, 통계학, 수학, 심리학과 같은 학문의 도움을 받으면 당신이 상상치도 못한 방식으로 우연에 개입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그렇다, 다시 한번, 우리가 앎을 추구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여기까지가 내가 책으로부터 얻은 깨달음이다.
마지막으로 덧붙이고 싶은 말이 있다. 이 책은 과학이 대중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할지를 보여주는 모범적인 예라는 것이다. 현대사회에 들어서면서 과학은 점점 더 복잡해졌고, 교양 수준의 지식으로 최신의 과학 결과물을 이해하는 것은 정말로 불가능해졌다. 대중 교양 수준을 모든 과학 분야의 원리를 이해하는 데까지 끌어올려야 한다는 주장은 전혀 현실성이 없고, 반대로 자신이 사는 세계와 문명에 한없이 무지한 채로 남는 것 또한 답이 될 수 없음은 명백하다. 그 점에서 이 책은 훌륭한 해결책을 제안한다. 이 책은 양자역학, 통계학, 카오스 이론 등 평범한 사람의 지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이론들과 현실 속 우리 삶의 접점을 포착한다. 그리고 이론의 A부터 Z까지를 설명하는 대신, 우리가 궁금해하는 물음에 대해 이론이 갖는 함의를 알려준다. 가령, 자유의지가 무엇인지, 인간은 진화의 산물인지와 같은 물음들은 단지 과학자들의 연구주제가 아니라 태곳적부터 우리의 조상들이 끊임없이 제기해왔던 물음이며, 철학적 과제이고, 우리 모두의 개인적인 숙제이기도 하다. 대중은 과학의 모든 결과를 이해할 수 없고 그것이 필요하지도 않지만, 이렇게 ‘우연의 설계’가 훌륭하게 해내고 있듯이, 최신의 과학적 성취가 내 삶에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 전달해줄 중개자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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