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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감 공모전 우수작
제목: 이방인
학과: 의류학과,이름: 김*희,선정연도: 2013
내용: 우리는 살고 있다. 너무 당연해서 두 번 말하면 우스운 이야기다. 무엇을 살고 있는가? 삶을 살고 있다. 삶은 무엇인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영위하는 순간들의 연속인 전 생애다. 단어의 정의는 잘 알고 있을 테지만 실제로 정의가 가리키는 본질을 체험한 적이 있는가? 살면서 이것이 바로 자신의 삶이라고 인정한 적은? 삶이 자신을 이끄는 만큼 자신도 삶을 살아간 적은? 삶의 기저를 이루는 것의 존재를 알지 못하는데 그것은 살아가는 것인가, 살아있는 것인가?
살면서 이런 순간이 있다. 자신을 느끼는 순간, 이 시간 이곳에 있는 자신을 적나라하게 인식하는 순간 말이다. 그 순간은 자신을 제외한 다른 모든 세계와 상관 없게 된다. 그리하여 온전한 자신을 자각한다. 이 순간만큼은 어떤 것도 자신을 비집고 들어올 수 없다. 자신이 온통 자신으로 충만하기 때문이다. 이내 다른 세계가 의식을 잠식하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다. 만약 이 순간들을 사진으로 남긴다면 죽을 때 몇 장이나 움켜쥐고 있을런지.
나는 짧은 소설을 좋아한다. 그냥 짧은 소설이 아니라 한 단어, 한 문장이 허투루 쓰이지 않고 작품의 농도를 더해주어 농밀함이 전해지는 소설 말이다. 대개 그런 작품은 숙련된 글을 쓰는 작가가 남긴다. [이방인]은 연마된 다이아몬드 같은 소설이다. 얇은 책에 담긴 글들은 응축되어 다이아몬드의 가치를 지니며 한없이 빛난다. 표지에는 담배를 입에 문 작가 카뮈가 미간에 주름진 표정으로 한 점을 응시하고 있다. 그의 작품, 세계관, 그 자체에서 어떤 종류의 강한 느낌을 받는다.
[이방인]의 시작은 ‘오늘 엄마가 죽었다.’ 그런데 주인공 뫼르소는 보통 사람의 반응과 다르게 시종일관 무덤덤하다. 엄마의 죽음보다는 장례식에서 만난 사람들이 슬퍼하는 모습을 그저 관찰하거나 잠을 못 자 피곤해할 뿐이다. 장례식을 마치고 열 두 시간을 잘 수 있어 기쁘기까지 하다. 다음날 만난 여자 친구 마리가 소식을 들었을 때 흠칫하는 반응이 오히려 적절할 것이다. 그가 상황을 받아들이는 태도는 기이하다. 보통 사람라면 응당 그래야 할 일을 뫼르소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다른 것을 관찰하거나 자신의 욕구를 느낄 뿐, 어떠한 사고나 판단도 내리지 않는다. 그러곤 장례식 후의 나날을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는 하루라 여긴다.
그는 수동적인 인물로 보인다. 포주업자 건달인 이웃 레몽이 친구하자고 하니 친구가 되지 않을 이유가 없으므로 친구가 된다. 근무하는 회사 사장이 향상된 일거리를 제안했을 때 이러나저러나 마찬가지라서 생활을 바꿀 이유가 없다고 말한다. 마리의 구애에 사랑이란 말은 아무 의미도 없지만, 그녀가 원한다면 결혼할 것이라 한다. 그러고는 레몽의 일에 휘말려 자신과 아무 관계 없는 아랍인을 총으로 쏴 죽여 버리고 재판을 받는다. 그는 죄를 모른다. 묻는 말에 솔직하게 답하고 사형을 선고받는다. 이만하면 자아가 없는 사람 같다. 여기까지는 [이방인]을 피상적으로 다룬 글이다. 이뿐이면 별것 아닌 의아한 소설이 된다. 그럼 이제 조금 더 안으로 들어가 보자.
이해의 핵심은 뫼르소라는 전무후무한 캐릭터다. 그는 타인에 대한 감정도 의지도 확실치 않으며 의사표현도 거의 안 한다. 살고 있긴 한데 살고 있는 것 같지않다. 뭔가 의아하다. 그의 입버릇은 ‘이러나저러나’, ‘아무 의미 없는’, ‘귀찮아서’ 물론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는다. 말 그대로 귀찮기 때문이다. 소설은 뫼르소의 시각으로 전개되는데 보통사람이 일상을 말하는 것과 확연히 다르다. 상황 속에서 본인의 마음이나 의문을 구체화하지 않는 단편적인 그의 서술에서 독자는 오히려 그가 세상과 동떨어진 이물적인 존재임을 알 수 있다. 동시에 한 치의 가식도 없는 그에게서 신선함을 느낀다.
재판은 사건 그 자체보다 뫼르소의 인물됨에 관해 전개된다. 예심판사, 검사와 변호사, 재판장과 배심원들, 신문기자들은 모두 제 입장에 몰입하여 진실 따윈 아무래도 상관없다. 마치 역할놀이를 하는 것 같다. 피해자에 대한 언급은 일절 없으며, 피고에 대해서는 오직 유죄를 주장하기 위해 증언을 재구성하여 만든 흉악범과 무죄를 호소하기 위해 어설프게 만들어진 성실한 사람밖에 없다. 그로서는 자신을 빼놓고 자신에 관해 이야기하는 재판이 답답하고 따분하기만 하다. 말을 할라치면 변호에 도움이 안 된다며 제지당한다. 겨우 하는 말이 태양 때문에 사람을 죽였다는 말과 일부러 죽일 의도는 없었다는 피고라는 역할에 맞지 않는 그의 진실이다.
그는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슬퍼하지 않았다. 어머니의 나이도 모르며 어머니의 얼굴을 보지 않은 채 어머니의 관 앞에서 담배를 피우고 밀크커피를 사양하지 않았다. 장례식 다음날 옛 여자 동료와 우연히 만나 희극영화를 보고 정교를 나눴다. 포주 업자 친구가 있으며 그의 치정 사건에 가담했다. 태양 빛 때문에 사람을 죽였다. 시체에 네 발의 총알을 마저 박았다. 사회 통념상 인간적이라 불리는 부분이 예와 같이 결여되어 보이면 사이코패스로 간주되기 십상이다.
세상은 규격화되어있다. 여럿이 바쁘게 살아가는 세상에서 규격이란 일정수준 필요하긴 하지만, 왠지 누군가가 편하기 위해 획일화되어가는 느낌이다. 규격을 거부하는 개인과 규격을 필요로 하는 개인의 집단인 세상의 간극에서 갈등이 생기고 이는 양쪽에게 부조리가 된다. 뫼르소는 역할놀이에 동참하지 않고 자신을 고집한다. 피소자로서 참여하지 않았으므로 그는 사형을 선고받는다. 어떻게 보면 결여된 것은 뫼르소가 아니라 진실을 알지 못하거나 알려 하지 않은 채 모든 것을 규격에 맞추려는 재판정의 사람들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 이유를 어렴풋이 안다. 그리고 재판정의 사람들은 사회 규격에서 일그러진 부분의 은유다.
뫼르소는 타인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으며 단지 자신에게 자연스러운 사람이다. 찌를 듯한 태양에 대한 불쾌감, 본능에 충실한 정욕, 귀찮음. 아랍인을 죽인 이유도 본능에 충실해서 그렇다. 바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다. 그는 온전한 자신의 눈으로 세상을 받아들이고 행동한다. 다른 것과 연결되지 않았으므로 그에게는 자신에게서 기인한 것 외의 이유가 없고 어느 것도 두려워야 할 필요가 없다. 흡사 백지상태의 아이, 순수한 본능의 동물, 껍데기를 쓰지 않은 원형과도 같다. 또한, 어머니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았거나 감정이 없는 것이 아니다. 인습을 필요하게 여기지 않았을 뿐이다. 그런 그는 세상의 규격에 자신을 맞추지 않아 부조리하게 죽게 된다.
재판을 받는 뫼르소를 보며 어렸을 적 부모님께 혼났던 기억이 떠올랐다. 어릴적 나는 크게 말썽 피우진 않았지만, 고집불통인 부분이 있어서 그 부분은 계속 혼났다. 어련히 혼날만했으므로 혼났겠지만 내가 전적으로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속으로는 절대 수긍하지 않은 부분이 있었다. 그 부분은 내 중심이 되어 자신을 알기 위한 길잡이가 되었고, 어떤 상황에서도 잃지 않게 되었다. 물론 잠재적 흉악범이 될 부분은 아니다. 덕분에 나는 그럭저럭 잘 자란 것 같다.
판결 후 뫼르소는 감옥에서 온갖 생각을 하며 자신은 죽을 수밖에 없다고 마음 먹는다. 그는 인간이라서 교도소에서 느꼈던 억제된 욕구에 대한 괴로움도 있고 판결 후 뜬 눈으로 새벽을 새우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있다. 상고와 특별사면 따위를 떠올리지만, 그것은 자신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기 위한 연습이다. 그는 일련의 과정을 거쳐 상고를 거부한다. 상고 거부 직후 부속사제가 그를 찾아오는데, 늘 그래 왔듯이 자신의 신앙으로 불쌍한 죄인을 교화시키려 한다. 그는 뫼르소를 구슬리며 스스로를 놓고 하느님에게 모든 것을 맡기라는 식이다. 뫼르소는 알량한 신념으로 자신을 회유시키려 하는 부속사제에게 고함친다. <사람은 죽으므로 다른 삶은 무의미하지만, 나에게는 나의 죽음을 확신하는 삶이 있다. 내가 이 삶을 확신하므로 다른 이와 다른 삶은 무의미하다. 살아있다는 것에 대한 확신도 없는 다른 이가 나의 삶을 부정하는 것은 건방지기 짝이 없다.>며 억눌린 것들을 쏟아낸다.
근본적으로 사람은 결국 죽기 때문에 삶은 부조리하다. 사람은 사형수라는 뫼르소의 생각도 여기서 기인한 것이다. 그러던 그는 부조리에 자신이 사형당할 것이란 삶을 확신함으로서 저항한다. 그는 부조리에 저항하면서 비로소 자신을 똑바로 보고 그 나머지인 세계 역시 똑바로 볼 수 있게 된다. 뫼르소가 갖는 죽음에의 확 신이 안타깝거나 불행한 성질은 아니다. 죽음은 삶의 반대가 아닌 삶에 종속된 필연적인 과정이다. 어둠이 짙은 만큼 빛이 밝은 것처럼, 죽음을 늘 옆에 두고 의식해야 무의미한 삶을 무의미하지 않게 뜻할 수 있다. 결국, 죽음과 친구가 되어 평생 그것에 저항해야 하는 것이 삶이다. 그리고 그는 죽음을 확신함으로써 삶을 다시 살아볼 마음을 먹는다. 세계와 화해하고 개별적 존재이면서 동시에 세계와 하나가 된다. 그의 죽음은 필연적이며 숙명적이다. 스스로 필연적이며 숙명적이게 신념을 지녔다. 그의 삶이 그를 이끈 만큼 그도 삶을 선택하여 살아간 것이다. 이 것이 바로 사람마다 유일하게 가질 수 있는 죽음까지 이어지는 단 하나의 삶이다. 카뮈는 자신의 인물을 통해 우리에게 어울릴지 모를 그리스도를 그려보려 했다. 뫼르소는 죽음을 관철하여 세계와 삶의 부조리에 저항했다. 그의 거룩한 순교는 일상 속에 매몰된 삶이란 덩어리를 꺼내어 그것을 돌이켜 보도록 한다. 그가 우리와 동떨어진 존재로서 일절 깨달음을 줄 의도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반면 부속 사제의 자세는 안타깝다. 우리는 많은 사람과 관계를 맺고 교류하며 사는데, 사회는 사실관계이므로 정해진 규칙이 있다. 대신 규칙이 정확하지 않은 나머지 관계에 대해서는 타인의 삶에 어떤 것도 요구할 수 없다. 자신의 욕망이나 진리를 원할 수 없다. 스스로 열릴 때까지 기다리고, 기다리는 동안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에 대해 후회 없이 노력하는 것이 전부다.
[이방인]을 자아 성장 시기에 잘못 받아들여 맹목적인 반항의 변명으로 쓰이거나 무의미를 오해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명 중2병이라 불리는 상태 말이다. 주변인이라 불리는 청소년기는 참 멋지고 위험한 시기다. 아이의 순수함과 어른의 규칙 사이에서 끊임없이 고민하기 때문이다. 차츰 세상을 알아가면서 순수한 시각으로 온갖 오류를 발견하고 거부감과 실망감에 저항이 생기거나 무기력해진다. 나는 이런 성질의 중2병을 응원하고 싶다. 혹자는 오글거린다는 평을 달지만, 언제 사람이 이 시기만큼 다시 모든 것을 순수하게 고민하고 받아들일 수 있으려나. 사실 이 이야기는 [호밀밭의 파수꾼]에 어울리겠다. 어쨌든 맹목적인 저항은 곤란하며 무의미를 진리의 도달점으로 이해해서도 안 된다. 니체의 초인정신과 허무주의가 해석되는 맥락과 마찬가지로 각성을 위해 부조리에 저항하고 원형으로서의 허무로 향하여 재생하기 위함이다. 그러려면 [이방인] 외의 다른 책을 읽고 끊임없이 고민하고 타인과 교류하고 행동해야겠다.
뭔가를 설명하려면 반대되는 것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있어야만 한다. [이방인]은 부조리에의 저항을 그렸지만 카뮈의 부정, 긍정, 사랑 3부작 중 첫 번째인 부정의 소설에 해당할 뿐이다. 뫼르소의 저항은 거룩하되 삶은 우리에게 적당치않다. [페스트]에서는 극한의 절망 속에 고립된 사람들이 비치는 없앨 수 없는 삶에의 긍정을 그렸다. 현실 세상에서 카뮈는 손 놓고 있지 않았다. 더 괜찮은 세상을 위해 창작하고 토론하고 연대했다. 결국, 우리는 철저히 열려있고 또한 철저히 닫혀있는 모순적인 상태여야만 하는 것이다. 자신의 세계를 온전히 보존하면서 나머지 세계와 연대를 형성해 부조리에 저항하는 것 말이다. 어려운 일이나 뭐 어쩌겠는가. 할 수밖에 없다.
고대 그리스 즈음부터 원리를 탐구하기 위한 철학은 형상을 띄게 되어 다양한 질문과 답으로 변모되어왔다. 진리, 이성, 근원, 형이상학, 쾌락, 회의, 신학, 인본, 국가권력, 과학, 계몽, 자연, 사회, 경험, 인식, 관념, 자유의지, 절대정신, 본능, 욕망, 합리 등. 긴 세월 동안 사람들을 거쳐 이러한 언어로 정제되고 여러 분야와 융합되어 역사적 대사건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리고 근대에 이르러 실존주의가 대두되었다. 철학의 중심을 세상에 견주면 한없이 미미하지만, 자신으로서 사실 그것밖에 없는 본인의 존재에게 집중시킨 것이다. [이방인]에 적용하고 싶은 실존주의는 신의 유무를 떠나 살아가는 일상 속에서 언제나 본인의 존재를 잃지 않고 자신의 삶에 충실하여 후회하지 않기 위함이다. 철학은 점점 섬세하게 다듬어지긴 하지만 언어 차이일 뿐이다. 지레 겁먹지 말고 자신 속 언어 이전의 세계에 존재하는 자신을 움직이는 어떤 원리를 인식해보라.
워낙 내적 의의가 깊은 소설이라 이제야 운을 떼지만 [이방인]은 소설적 기술에서도 빛을 발한다. 모든 것은 첫 줄에 나타난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이만큼 짧고 강렬하지만 무미건조하고 당혹스러운 도입부는 본 적이 없다. 작품의 분위기와 주인공의 캐릭터를 단번에 전해준다. 미니멀리즘의 극치이다. 또한 살인까지의 1부와 살인 후의 2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1부의 뫼르소는 순간의 욕구를 해소하며 나머지 일은 아무래도 좋은 파편적인 일상을 보낸다. 이러한 습성은 그를 살인으로 이끈다. 그러나 2부에서는 살인 후 욕구에 제약이 걸리면서 이제까지와는 달리 온갖 부조리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한다. 그리고생의 극한에 도달하여 존재를 각성한다. 간결한 구성 속 극단으로 뒤집히는 상황은 독자를 얼떨떨하게 하면서도 깊숙이 몰입시킨다. 백미는 마지막 부분이다. 극 작가이기도 한 카뮈는 끝에 자신의 사형선고에마저 의미를 두지 않았던 뫼르소의 격양된 모습을 유일하게 보여준다. 소통에 대한 의지라곤 털끝만치도 없었던 서술자의 목소리는 급변하여 소설 전체의 공기가 격동한다. 비로소 마지막 몇 페이지에서 독자는 온몸에 혈류와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된다. 짧은 소설이지만 군더더기를 쳐낸 만큼 어느 작품보다도 묵직한 울림을 준다.
여러 책을 읽진 않았지만 [이방인]은 양서 중에서도 제법 삶의 원초적인 것을 그린 소설이다. 어떤 사람들은 철학이나 사유 같은 어려운 단어와 친하지 않다. 우리의 시대는 대체로 덜 진지한 시대로서, 하루하루 신 나고 즐겁게 보내면 그만이지만, 욕망을 가지고 사는 한 한 세계는 다른 세계와 언젠가 갈등이 생긴다. 자 신의 욕망을 구현하기 위해 갈등을 해소할 정신적이고 행동적인 노력을 하기보다는 다른 이의 삶에 자신의 욕망을 투영하기 때문에 자신의 삶을 온전히 살지 못한다. 다른 이가 의도한 틀 속에 갇히거나 보이지 않는 족쇄를 찬 노예가 된다. 언젠가는 많은 것이 무의미해지고 가짜로 변할 것이다. 또는 그조차 직시하지 않은 채 불만족스러운 삶을 산다. 결국, 삶은 흐지부지되어 남는 것은 흐릿한 자화상뿐이다.
뫼르소는 죽음에 직면하여 삶의 확신을 얻었지만, 우리에게는 시간도 기회도 많다. 그의 죽음에 대한 확신은 우리에게 삶에 대해 재고하도록 한다. 너무 많아서 어디 다 어떻게 써야 할지가 오히려 문제긴 하지만, 없기보다 있는 편이 나음은 말할 것도 없다. 자신이 뭔지 모르며 정말로 무엇을 하고 싶은지 확신하지 못하고 부유하는 삶이 많다. 평생동안 자신의 삶이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은 채 사는 것은 너무 딱하다. 그것은 산 것인가? 카뮈는 어떤 철학적 질문보다도 ‘왜 자살하지 않는가?’만이 의미 있다고 했다. 질문의 주체가 먼저 존재해야 나머지 질문들이 소용 있기 때문이다. 수용하는 본인 존재가 없다면 다른 모든 것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살아있기 때문에 당연하게 살고 있지만, 실은 당연하게 태어나지 않았다. 이유 없이 태어난 후 생각할 수 있을 만큼 머리가 자라고 경험이 쌓이면, 자신을 솔직하게 마주하여 삶을 택하고 이유를 만들어야 한다. 본인의 삶은 본인만의 한정판이라서 타인의 것이 될 수 없다. 본인은 자신이 택한 삶을 살기 위해 어떤 것과 얼마나 어떻게 싸울지 스스로 정해야 한다. 남의 말을 따라 외지 말고 자신의 말을 하라. 어디에도 기대하지 마라. 스스로 존재하라.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있다가 가지 마라. 투박하게 적어놓았지만 대단하게 살라는 것이 아니다. 삶의 목적은 스스로 만드는 것으로 ‘그저 그런 삶을 살겠다!’고 확신해도 상관없다. 그것은 온전히 당신의 것이므로 남이 왈가왈부할게 아니다. 카뮈는 우리에게 죽음을 권하는 것이 아니다. 평생을 어떤 마음으로 살아야 할지 일러준 것이다. 껍질을 벗고 원형을 획득하고 매 순간 자신을 자각하며 올바르게 설정한 부조리에 저항하는, 드문드문한 사진이 아니라 죽 이어져 하나의 덩어리를 이루는 영상 같은 삶 말이다.
긴 글의 끝에 와서 말하는 거지만, 삶의 형태는 천차만별이며 나는 당신의 세계에 속해있지 않으므로 내가 하는 어떤 말도 당신에게는 소용없겠다. 앙드레 지드의 [지상의 양식]이 바랐던 바와 같이 이 글을 읽고 망각 속에 집어 던져라. 자신의 언어로 체득하는 편이 빠르리라. [이방인]은 단숨에 읽는 것이 좋다. 주말 예능을 제쳐 두고 두세 시간이면 다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읽고 나면 당신은 여태껏 형성했던 관념의 틀이깨지는 것을 볼지도 모른다. 전에 읽었더라도 고단한 삶 때문에 자각이 마모되어버렸다면 다시 읽어보아라. 바쁜 와중에 곁에 두고 되새길 삶의 지침서란 ‘몇 세에 해야 할 몇 가지’ 같은 책을 읽고 맹목적으로 따라 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본질을 찌르며 실존할 것을 촉구하는 바로 이 책을 두고하는 말이다. 나와 무관하며 알지도 못하는 당신에게, 마음으로 주고 싶은 나의 확신이다.
독후감 공모전 우수작
제목: 이방인
학과: 철학과, 이름: 조*영, 선정연도: 2011
내용: 8월의 한 낮 땡볕 더위가 따갑다. 커다란 피켓을 드는 팔의 감각은 사라진지 오래다. 괜히 높은 구두를 신었나. 아까부터 발바닥이 쑤셔온다. 이 더운 날씨에 괜히 나왔나 보다. 더위로 붉게 달아 오른 얼굴이 자꾸 신경 쓰인다. 시원한 건물 | 안에 들어가 쉬고만 싶다. 하지만 그럴 수 없지. 나는 1인 시위 중이다. 오고가는 사람들 시선 속에 나는 없다. 그들에게 나는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존재인가 보다. 누가 나를 보고 고개라도 한 번 끄덕여 주면 좋겠다. 아니다. 지금으로썬 나한테 욕을 퍼부어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다. 무관심한 사람들에게 소리치고 싶다. 나를 봐달라고, 내가 들고 있는 피켓을 봐달라고. 하지만 수많은 인파들은 나를 스쳐 지나간다. 흘끔 보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람도 있다. 나 혼자만 이렇게 비분강개하는 건가 씁쓸해진다. 누군가 나를 봐주기만을 기다리는 시간 동안 나는 여러 가지 감정을 느꼈다. 그 중 가장 강하게 와닿았던 감정은 외로움이었다. 나는 문득 그들도 나와 비슷한 감정을 느낄 거라 생각했다. 아무도 자신을 바라봐주지 않는 데서 오는 외로움 말이다. 그 2009년 1월 20일 용산에서 '사람'이 죽었다. 그리고 시간이 한참 지난 후에 뉴스에서 그들의 통곡 소리를 들었다. 불법 시위자들에게 유죄 판결을 내린다는 뉴스였다. 나도 모르게 다리에 힘이 쭉 빠졌다. 나는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 없단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피켓을 들고 거리로 나왔다. 카뮈의 '이방인』은 바로 이 시기에 나를 찾아왔다. 책의 내용은 간단하게 요약할 수 있다. 주인공 뫼르소의 엄마가 죽었다. 그리고 그는 장례식에서 울지 않았다. 작렬하는 태양에 눈이 멀어 살인을 저지른다. 탕!탕!탕!탕! 불행의 문을 네 번 두드린다. 그래서 프랑스 인의 이름으로 공공 광장에서 목이 잘리게 될 거란 선고를 받게 된다. 사람들은 뫼르소에게 특정한 반응을 원한다. 뫼르소가 모친의 장례식에서 울기를 바라고 살인에 대해선 죄책감을 느끼기를 바란다. 하지만 뫼르소는 '이방인' 이다. 즉 사회적 통념 즉 보편적인 윤리에서 뫼르소는 멀리 떨어져 있다. 카뮈는 뫼르소가 이방인인 이유를 그가 게임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 설명한다. 여기서 게임은 무엇일까?
사회는 일종의 시스템이다. 이것은 약속으로 이루어져 있다. 카뮈에 따르면 인간은 자신의 힘으로는 세계의 진실을 사유할 수도 없고 감당해 낼 수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세계의 진실에 대해 일정한 방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하기로 약속을 한다. 그러나 이 거대한 약속 체계, 즉 도덕 체계는 우리가 죽음을 앞두고 있다는 존재 즉 부조리의 진실을 가려 버린다. 인간은 세계 속에 던져진 존재이다. 부조리란 바로 인간은 태어나서 언젠간 죽는다는 사실로부터 출발한다. 언뜻 보기에 뫼르소가 이방인인 까닭은 그가 모든 것에 무관심하기 때문인 것처 럼 느껴진다. 하지만 뫼르소의 삶의 태도는 무관심보단 무차별함에 더 가깝다. 뫼 르소는 이것과 저것에 차이를 느끼지 못하는 인물이다. 모두가 죽어야한다는 단 하나의 진실, 곧 삶의 부조리 앞에서는 모든 것이 같은 가치를 갖는다.
사르트르의 말마따나, “도대체 <악령>을 쓰는 카페오레를 마시는 모든 것은 같은 값"을 갖는 것이다. 이 세상에 던져진 인간은 아무것도 정당화 할 수 없고 책임질 수 없다. 따라서 뫼르소에게 모든 것은 허락되어 있다. 우리가 가진 일반적인 규칙에 따라 뫼르소를 바라보자. 그는 모친의 장례식에서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은 냉혈한. 장례식 다음날 정부와 해수욕을 즐기고 영화를 본 후 섹스를 즐긴 부도덕자. 포주와 친구로 지내고 살인까지 저지른 파렴치한, 아랍인의 죽음을 확인한 뒤에도 연이어 네발을 더 쏜 악랄한 범죄자다. 이것은 법 정에서 검사가 뫼르소를 정의한 것과 유사하다. 사회적 시스템은 개인에게 일정한 잣대를 들이댄다. 사법 시스템이 뫼르소의 사형을 결정하기 위해 정교히 돌아가는 동안에도 뫼르소는 철저히 이방인인 것처럼, 사회적 시스템의 잣대에 의해 개인이 규정되고 판단되는 과정 속에 개인이 끼어들 여지는 없다. 인간은 보편적인 것을 갈망하지만 결코 보편에 닿을 수 없다.
그래서 일종의 게임 규칙을 만든다. 인간이 만든 게임 규칙은 개인을 규정하고 제한한다. 그리고 이 기준에 맞지 않는 오류들을 과감히 제거한다. 모든 것의 차이를 제거하고 동일 성을 요구하는 인간의 노력은 폭력이다. 뫼르소는 자신의 인격을 멋대로 규정하는 사람들에게 분노를 느낀다. 뫼르소의 삶의 태도는 차이를 거세하여 개인을 사회 질서 속에 포섭하려는 사회를 위해 한 개인을 단두대에 끌고 가는 게임 질서에 대한 반항이다. 혼히, 우리가 사는 시대를 포스트모던의 시대라고 칭한다. 포스트모던 시대에 어 울리는 것은 아마도 '차이에 대한 예민한 감수성'일 것이다. 타자들에 대한 폭력을 우리 사회에선 너무나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나와 너는 다르고 따라서 너는 나를 너의 잣대로 판단 할 수 없다는 외침은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렬하게 다가온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혼란스럽다. 어디까지 차이를 인정해야 하는 걸까? 뫼르소처럼 모든 것에 무차별한 태도는 옳은 것일까? 사르트르의 말처럼 <악령>을 쓰든 카페오레를 먹는 모두 동일한 가치를 갖는 것일까? 그렇다면 선과 악도 단순히 메커니즘의 하나인 것일까? 1인 시위는 앞으로 내가 취하고 싶은 삶에 대한 태도의 반증이다. 어떻게 살 것 인가? 이 물음에 대한 나의 답변은 올바르게 살겠다는 다짐이었다. 내가 옳다고 믿는 가치들을 지키겠다는 다짐이 나를 거리고 내몰았다. 하지만 부조리 앞에서 모든 가치가 열려져 있는 것이라면, 내가 믿는 가치는 오늘 저녁에 치킨을 먹을지 피자를 먹을지 고민하는 것과 하등 차이가 없다. 카뮈에 따르면 인간은 모두 사형 선고를 받고 살아가고 있다. 오늘 죽든 내일 죽든 인간에게 모든 것은 열려져 있다. 나의 행동을 정당화해줄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은 세계 앞에 던져진 존재이다. 선과 악, 윤리는 인간이 만든 게임 규칙에 불과하다. 보편적인 윤리가 존 재하지 않는 다면 용산에 사람이 있든 말든 그것은 상관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선 과 악, 옳고 그름이 단순한 사회적 시스템이라면 나의 신념에서 정당성을 찾을 수 없다. 카뮈의 절망은 세계는 존재하지만 그 존재 이유가 없는 것으로부터 비롯되었다. 나는 왜 존재 하는가? 신이 존재하지 않다면 나의 존재를 누가 근거 지어줄 수 있을까? 인간은 이 질문들에 답할 수 없음을 깨달을 때 당혹감을 겪는다. 때문에 카뮈의 절망은 곧 나의 절망이기도 하다. 모두가 죽어야 한다는 사실만이 단 하나 의 진실이다. 카뮈에 따르면 윤리, 선과 악과 같은 가치들은 사회적 시스템 속에 서만 의미를 갖는다. 하지만 아무리 정교한 사회적 시스템이라도 인간은 모두 죽 는다는 사실을 가릴 수 없다. 삶의 부조리 앞에서 모든 것이 같은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뜻은 결국 모든 가치를 부정하는 것이다. 개인이 가진 신념은 삶의 진실을 가리기 위해 인간들이 임의로 세워놓은 메커니즘 속에서만 의미를 갖는다. 결국 카뮈의 말대로라면 나의 1인 시위는 본질적으로 아무런 의미를 가질 수 없다. 아니 애초에 올바르게 살고자 했던 나의 다짐 자체가 공허하다. 부조리한 세계에 '올바름'의 기준이 존재할리 만무하다. 이것과 저것의 차이가 사라진 세상에선 그 무엇도 가치를 가질 수 없다. 회의주의란 땅에서 윤리가 설 자리는 뿌리부터 흔들 린다. 회의주의는 윤리를 구원할 수 없다. 하지만 나는 카뮈의 「이방인」에 쉽사리 동의할 수 없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사형선고를 언도받았다. 나 또한 가끔씩 내가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몸 서리치 곤 한다. 하지만 삶이 부조리하단 진실 하나로 모든 가치를 무의미하게 만들 순 없다. 선과 악, 윤리와 도덕, 법과 질서는 모두 유한한 인간이 만들어낸 유한한 가 치들이다. 하지만 이것들은 모두 보편적인 가치를 추구한다. 현실은 이상이 될 수 없지만 이상은 더 나은 현실을 위한 발판이 된다. 인간의 유한성이 결코 무한한 가치를 향한 열망을 꺾을 수 없다. 나는 문득 뫼르소를 향한 대중들의 분노는 한 개인을 향한 분노가 아니라, 사라 져가는 인간성에 대한 분노란 생각이 들었다. 뫼르소의 모습은 현대인의 모습과 무척 닮아있다. 뫼르소는 타인의 고통에 쉽게 침묵하는 우리의 자화상이다. 신도 부조리한 삶의 진실도 인간적 가치들을 구원할 수 없다. 카뮈는 항상, 부조리의 발견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하나의 출발점이라고 말했다. 부조리를 발견한 지점에서 우리의 사유를 멈출 때 우린 회의주의에 빠질 수밖에 없다. 중요한 점은 부조리를 발견한 이후 내딛는 발걸음이다. 부조리한 삶의 진실 위에서 인간적 가 치들을 어떻게 세울 것인가? 그것이 우리가 고민을 시작해야 할 지점인 것이다.
카뮈의 『이방인」을 읽고 난 후에 나의 머릿속은 더욱 복잡해졌다. 나의 작은 노력들이 궁극적으론 무의미하단 생각에 맥이 빠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뮈는 나를 혼란에 빠뜨렸을 뿐 나를 설득하지는 못했다. 「이방인」을 읽고 나는 인간 적 가치들의 토대가 반드시 존재해야 하는지 생각했다. 우리는 흔히 무언가가 바로서기 위해선 흔들리지 않은 토대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간적 가치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나는 선과 악, 윤리를 보장하는 근거가 변치 않아야 한다는 통념에 의문이 들었다. 카뮈의 말처럼 인간은 세상에 내던져진 불완전한 존재이다. 그러므로 인간적 가치들은 변치 않는 토대 위에 서있을 수 없다. 오히려 이것은 실패와 희생 위에 위태롭게 서있다. 보편적인 가치를 찾기 위한 인간의 노력은 모 두 실패로 돌아갈 것 이지만 진정한 인간성은 이 실패 속에서 찾을 수 있다. 인간은 신이 아니기에 완벽한 '선'에 도달할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린 멈춰 서야 하는 걸까? '선'에 도달하기 위한 노력을 멈출 때 우리가 대면하는 것은 비인간성 이다. 부조리의 인간, 카뮈의 분석은 정확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카뮈의 분석을 출발점으로 삼아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보편적인 가치를 찾기 위한 노력은 모두 실 패할 것이다. 문제는 불변하는 가치를 찾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 하면 부조리 속 에 매몰 되지 않고 인간답게 실패할 것인가. 이것이 우리가 화두로 짊어지고 갈 질문이다. 인간은 과감히 실패함으로써 앞으로 나아갈 수 있고, 그럼으로써 더 잘 실패할 것이기 때문이다.



독후감 공모전 우수작
제목: 우린 이방인이 될 수 있을까
학과: 주거환경학과, 이름: 박*진, 선정연도: 2011
내용: 이방인을 만났다. 그와 나는 세 번 만났다. 그와 처음 만난 것은 고등학교 때였다. 이방인은 커녕 카뮈에 대해 알지도 못했던 그때의 나는 책장에 꽂혀있는 낡은 세계명작세트 중 가장 끌리는 제목의 책 한권을 골랐고 그 책이 이방인이었다. 하 지만 이방인에 대한 나의 첫인상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따뜻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슬프지도 않았다. 셰익스피어의 희비극이나 호밀밭의 파수꾼과 같은 성장소 설에 익숙했던 내게 이방인은 제목 그대로 이방인이었다. 소설 속 뫼르소의 행동 은 도무지 내게 이해되지 않았고 그의 사고 또한 내가 납득하기 어려웠다. 결국 나는 그에게서 아무것도 보지 못한 체 그를 떠나보내야 했다. 이방인과의 두 번째 는 만남은 대학교 1학년 때였다. 한창 허영심으로 가득 차 있었던 나는 나름 고상 한 척, 문화인인 척 하기 위해 여러 종류의 책을 손에 들었다 놓았다 했고 그중에 이방인이 끼여 있었다. 두 번째 그를 만날 때의 나는 불행인지 다행인지 이방인과 카뮈에 대하여 약간의 배경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방인이 실존주의 문학의 대표 적 작품으로 부조리한 현실과 이에 대한 반항을 그리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덕분에 뫼르소의 행동은 더 이상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행동들이 아니었다. 나는 그러한 뫼르소의 행동들이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반항이라는 것을 너무나도 정확히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게 책을 읽는 동안, 아니 책을 읽기 전부터 나는 뫼르소의 편에 서서 그의 시선으로 소설을 읽었다. 잘못된 것은 뫼르소가 아니었다. 사람을 죽이긴 했지만 그것은 우연한 사고에 불과했고, 그보다 더 나쁜 것은 그들만의 시선으로 뫼르소를 사형으로 몰아가는 부조리한 사회였다. 나는 그 의 어깨를 두드리며 그를 위로한 뒤 그와 헤어졌다. 그리고 세 번째, 이번 독후감 공모를 준비하기 위해 다시 그를 만났다. 그는 여전히 고집스럽게 신부의 기도를 거부하고 사형 집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옛말에 '아는 만큼 보인다. 라는 말이 있다. 많은 선생님들이 인용하는 말 중 하 나며 많은 사람들이 이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나 또한 이 말을 부정하지 않는다. 실제로 우리는 아는 만큼 본다. 잘 알지 못한 상태에서는 세계적인 추상파 화가의 작품도 네 살짜리 꼬마 아이의 낙서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으며 오랜 시간을 견뎌온 역사적인 건축물 역시 그저 낡은 건물에 불과할 뿐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커다란 함정이 하나 숨어있다. 우리는 아는 만큼 보이지만, 또한 아는 대로 본다는 것이다. 내가 얼핏 보기에는 이방인과 전혀 관련 없을 것 같은 이 말을 꺼낸 데에는 이유가 있다. 나는 위에서 이야기 한 대로 독후감공모에 제출할 독후감을 적기 위해 이방인을 손에 들었다. 내가 이방인을 읽으면서 머릿속을 한 생각은 어떤 식으로 글을 풀어나갈 것이냐 하는 것이었다. 이미 책의 줄거리는 다 알고 있었다. 그리고 독후감은 요즘 초등학생들도 줄거리를 나열한 뒤 자기 생각을 조금 넣는 식의 구성으로 글을 쓰지 않는다. 그렇다면 자신의 생각과 책의 내용과 의미를 잘 버무려 글에 녹여 내느냐가 관건이다. 이방인은 실존주의 문학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주제는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통찰이다. 따라서 실존주의 철학과 부조리한 사 회에 대하여 반항을 보여주는 뫼르소의 행동에 대한 나의 생각을 적는 것이 유리하다. 책을 읽음과 동시에 머릿속에서는 그런 계산이 펼쳐지고 있었다. 나이를 먹 으면서 아니, 12년의 초중고 교육과정과 몇 년의 대학 과정을 겪으면서 정답을 찾 는 데 익숙해진 나는 이번에도 최선의 모범답안을 찾고 있었다. 이번 11월에 열린 대학가요제의 참가팀 대부분이 현재 20대의 키워드인 청춘을 가지고 지겨울 만큼 반복해서 노래했듯이 실존주의 문학가인 카뮈의 이방인에 대한 독후감에는 그의
실존주의에 대한 생각과 뫼르소의 행동을 부조리에 대한 반항과 연결시켜 글을 쓰는 것이 가장 정답에 가깝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나는 이러한 생각들을 머릿속에서 굴림과 동시에 책의 이부분 저부분을 살피며 독후감에 쓰일만한 대목을 찾는데 열중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다른 생각이 들었다. 보통 우리는 책을 읽을 때 그 책에 대해 알지 못하고 읽는 경우가 많다. 대충 흥미를 끌기 위해 표지에 쓰여진 몇 줄의 줄거리나 책 소개를 위해 짧게 쓴 기사, 믿어야 될지 말아야 될지 모르는 다른 이의 추천 정도만 듣고 책을 펼치는 경우가 많지, 그 책을 쓴 작가의 사상과 책이 담고 있는 심오한 주제를 파악한 후 책을 읽는 경우는 드물다. 조그마한 호기심으로 집어든 책에서 우리는 작가가 그려놓은 세상 속으로 들어가 웃기도, 울기도 하며 화도내고 즐거워도 한다. 이러한 우리의 행동과 감정들이 작가의 의도와 맞아 떨어지든 아니든 간에 일단 타인의 생각이 배제된 자신 만의 관점으로 책을 만나고 이야기한다. 그 뒤 작가가 그 책을 쓴 의도와 작품들 속의 장치들을 알아가는 것은 독자들 각자의 자유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이러한 자유를 빼앗기고 있다. '이 책은 이러한 관점으로 쓰여 졌으니 이렇게 읽어야 한다.'는 형태의 누군가가 정해놓은 틀 안으로 들어가서 책을 읽고 있는 것이다. 이건 비단 책뿐만이 아니다. 영화, 음악과 같은 문화부터 음식과 쇼핑 과 같은 소비, 정치적 신념과 종교, 심지어는 남녀 데이트 시 비용 부담과 같은 사소한 행동들 하나까지도 우리는 보이지 않는 사회의 메커니즘에 따라 움직이고 있다. 자신의 눈으로 보고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정해놓은 일반적이고 상식적인 기준에 의해 모든 것이 좌우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처음 본 뫼르소의 행동은 이해되지 않는 행동들 뿐 이었다. 어머니가 돌아 가셨음에도 불구하고 뫼르소는 그다지 슬퍼하지 않으며 어머니의 시신 앞에서 담 배를 피운다. 심지어 그는 어머니의 장례를 치르는 것조차 귀찮아하는 듯이 보였다. 그리고 그는 장례식이 끝난 지 며칠 되지 않아 여자와 함께 밤을 보낸다. 또, 태양이 강렬했단 이유만으로 총으로 사람을 쏘아 죽였으며 이미 죽은 시체를 향 해 네 번의 방아쇠를 더 당긴다. 그의 행동 하나하나는 나뿐만이 아니라 일반적인 상식, 세상의 보편적인 방식에서 한참 벗어난 행동들이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 도 나는 두 번째 이방인에서 본 뫼르소의 행동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뫼르소의 행동은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반항의 한 형태로 실존주의 철학에 입각하여 해석하여야 하며 우리는 이를 통해 부조리에 대한 통찰을 하도록 만들어 준다.'는 단편적인 앎을 통해 나는 뫼르소의 행동이 가지는 진짜 의미를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렇게 나는 무지의 한꺼풀을 벗고 새로운 눈으로 이방인을 보게 된 것이 다. 하지만 과연 나는 이방인을 제대로 본 것일까? 아이러니 하게도 우리는 아는 것을 통하여 새로운 것을 보게 되었지만 우리는 결국 아는 것, 우리의 지식이 되어버린 ''이라는 틀에 갇혀버리고 말았다. 아는 만큼만 보고, 아는 대로 판단하는 것이다. 카뮈와 이방인의 대해 알게 된 후 우리는 더 이상 뫼르소를 비정상적인 사람이라 부를 수 없게 되어버렸다. 우리는 더 이상 뫼르소의 행동을 이해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버렸다. 뫼르소의 행동에 의의를 제기하거나 비난하는 사람은 |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되어 버린다. 이방인을 읽는 사람의 관점은 카뮈와 이방 인에 대한 지식을 가지게 된 순간부터 실존주의 철학과 부조리의 틀을 벗어날 수 없게 된 것이다. 물론 카뮈의 대표적인 작품들이 부조리의 사색을 통해 쓰여 졌으며 이방인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 아니다. 이러한 상식, 지식이라는 불리는 사회의 메커니즘을 통해 우리의 삶은 사회가 요구하는 커다란 틀 안에 갇혀버리는 것이다. 이방인 속 뫼르소는 사회가 요구하는 상식과 관습을 계속하여 거부한다.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울지 않으며, 여자 친구에게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으며, 신을 믿는다고 하지 않는다. 그러자 사회는 이러한 뫼르소의 행동을 하나씩하나씩 엮어 인과 관계를 만들어 나가고 | 결국 뫼르소에게 사형을 선고한다. 합리적인 인과관계를 거부한 그는 사회에서 배 척당하는 이방인이 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사회의 틀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할 수 있을까. 그렇다고 할수 없다. 어머니의 장례식에 우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지 는 몰라도 당연한 일이 아니다. 눈물은 자연스러운 감정에 의하여 발생하는 행동 이며 이것이 자주 일어나다 보니 보편적인 통념이 되어버린 것이지 사실 당연한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상황에 따라서, 예를 들어 평생 자신을 학대한 어머니이거 나 어릴 때 자신을 버렸던 어머니라면 자식은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 울지 않을 수 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일반적인 상식에 따라 눈물 한방울 흘리지 않는 뫼르소를 비난하며 불효자라는 낙인을 찍는다. 다른 것 역시 마찬가지다. 이방인에서 나온 것처럼 우리는 회사에서 열정적이고 야심 있는 회사원의 모습을 보여야 하며 애인에게는 비록 그것이 빈말일지라도 사랑한다는 말을 속삭여야 한다. 오직 단편적인 모습만으로 사회적 상식이라는 기준에 의해 평가가 내려진다. 이런 것들 모두가 사회 속에 깊이 뿌리박힌 우리는 관리하고 통제하는 메커니즘들이다. 사회의 요구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문학을 이해하는 관점이라는 틀 속에서 이방인 속 뫼르소를 안아 줄 수 밖에 없다. 그에 대한 우리의 생각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는 실존주의 문학의 대표적 작가인 카뮈가 만들어낸 부조리한 현실에 반항하는 영웅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는 과연 실제로 우리 주변에 뫼르소와 같은 이방 인을 우리는 과연 따뜻하게 안아 줄 수 있냐는 것이다. 아마 우리는 불행히도 소설 속 배심원들처럼 그에게 사형선고를 내릴 확률이 높다. 우리는 이미 스스로가 모르는 사이에 무지막지한 사회적 메커니즘에 꽁꽁 묶여 길들여졌기 때문이다. 언제부터 만들어졌는지 모르는 이 무시무시한 관념들은 벗어나기는커녕 자각하기조 차 쉽지 않다. 그리고 이를 자각한다고 하더라도 이 사회적인 틀에서 벗어나기란 쉽지 않다. 우리는 매순간 이성적인 사회의 눈에 의해 감시당하고 있다. 이방인에 는 뫼르소를 응시하는 눈에 관한 묘사가 많이 등장한다. 뫼르소의 어머니가 머물 던 양로원 원장의 눈, 어머니의 시신 앞에서 졸고 있던 뫼르소를 응시하던 어머니 의 친구의 눈, 모든 행동이 정확하고 계산적이던 키가 작은 여자의 눈. 이들의 눈 은 사회의 질서와 어긋나는 행동을 하는 뫼르소를 주시한다. 즉, 그들의 눈은 이 성적인 사회의 감시자로써 뫼르소를 감시하는 것이다. 신속하고 정확하며 철저하게 정해진 행동을 하며 타인에게도 자신과 같이 상식적인 행동을 요구하는 그들 . 은 뫼르소가 사형을 선고받는 그 순간까지 그를 주시한다. 불행히도 현실 속에도 이러한 눈은 존재한다. 지금 이순간도 우리들이 정해진 사회의 규범을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감시자의 역할을 하고 있다. 현실에서는 우리 모두의 눈에 감시자의 역할이 담겨있다. 거리를 걸어다는 낯선 사람도, 10년을 넘게 사귄 친구도, 동기 도, 교수님도, 심지어는 이 글을 쓰고 있는 나 또한 때에 따라 철저하게 감시자의 역할을 수행한다. 누군가가 일반적인 상식을 벗어나는 행동을 했을 때, 모두의 눈 이 그를 향해 쏠리듯 우리는 서로를 감시함과 동시에 서로에게 감시당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감시를 벗어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방인은 대표적인 반항의 문학이라고도 불린다. 그리고 뫼르소는 그 반항의 대 표적인 상징이다. 과거 청춘은 반항과 저항의 상징이었다. 사회는 그들에게 히피, 오랜지족, X세대, N세대와 같은 이름을 가져다 붙이며 그들을 정의하였다. 그들은 철저하게 기성세대를 부정하며 사회와 정치, 예술 전반적으로 다양한 형태의 반항을 보여주며 그들의 문화를 만들어 갔다. 하지만 요즘 사회는 지금의 20대 청춘들 에게 반항정신을 잃은 순종적인 세대라고 말한다. '아프다.”, '연약하다.” 라는 말들을 붙여주며 우리를 위로하려 한다. 취업전쟁과 스펙관리, 등록금마련 등 갖가지 문제를 외치며 우리를 다독인다. 혹은 '피나는 노력의 필요를 역설하며 우릴 다 그친다. 2010년대에 살아가는 20대 청춘들은 어느새 아픈 것이 당연한 그런 세대 가 되어버렸다. 신입생들은 들어오자 말자 스펙을 위해 학점을 관리하고 토익을 준비하며 방학에는 다음 학기를 위한 등록금마련을 위해 아르바이트를 한다. 그리고 그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20대의 청춘들은 이렇게 또 하나의 큰 틀에 갇혀버렸다. 아프고 위로해주고 싶은 청춘이라는 부조리한 틀 말이다. 우리는 여유롭고 태평해서는 안 되며, 즐거워서도 안 된다. 큰 꿈을 가져야 하며 치열하게 노력을 해야 하고 도전적이고 창의적이어야 한다고 강요당한다. 넘쳐나는 자기계발서들은 서로 다른 듯 같은 이야기를 반복해서 말하며, 아픔과 불안이라는 집단 최면 빠진 청춘들은 이런 책들을 마치 성경이나 되는 듯 한두권씩은 꼭 가지고 다닌다. 하지 만 결국 그 속에서 우리들이 얻을 수 있는 것은 하룻밤 자고 일어나면 모조리 사라지고 마는 이미 성공한 그들의 무용담뿐이다. 지금의 우리들은 이렇게 사회가 마음대로 이름 붙인 아프고 위로 받아야 하는 청춘이 되어 살아가고 있다. 반항마저 반항적인 것으로, 창의마저 창의적인 것으로 규정지어 그들의 커다란 틀 속에 넣어버리는 사회. 과연 뫼르소라면 어떻게 했을까. 그는 어떤 형태로 현재의 시스템 속에서 반항이라는 몸부림을 보여주었을까. 그리고 이시대의 뫼르소를 지켜보 는 나는 어떤 마음으로 그를 지켜볼까. 과연 우린 이 거대한 사회의 틀을 벗어나 이방인이 될 수 있을까. 솔직히 말하면 나는 자신이 없다. 자신이 달리는 곳이 쳇 바퀴인 것을 알고 있음에도 계속 달릴 수밖에 없는 다람쥐처럼 나는 아직 이 두텁고 단단한 청춘의 틀을 벗어날 자신이 없다. 나는 아직 이 사회를 향해서 '아니오.'라고 외칠 용기가 없다. 이건 무척 슬픈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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