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도서관 독후감 공모전

2020.11.16

선정도서 10종 200권
참가대상 부산대학교 학부생, 대학원생 및 부산 지역 주민
참여방법 도서관 독후감 선정도서(1인 1책, 선착순)를 수령 후 자유롭게 독서하고 해당 도서의 독후감 제출
참여기간 2020년 9월 8일 ~ 10월 25일
시상내역 총 8편(부산대 총장상 및 도서관장상, 총상금 160만원)

※ 본 사업은 부산대학교 국립대학육성사업(REN)의 예산을 지원받아 운영되었습니다.

우수 독후감 선정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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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 이름 학과 선정도서/독후감제목 보기
최우수 김*경 외국어로서의 한국어교육 전공협동과정 도서: 유전자는 네가 한 일을 알고 있다.
독후감: 유전자를 극복하는 능동적 주체로서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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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고난 유전자는 극복 가능한가?
나이가 들고 결혼을 하는 친구들이 늘어날수록 유전자의 힘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된다. 친구들의 아들, 딸들은 친구의 작은 분신처럼 닮았다. 얼굴 생김뿐만 아니라 표정, 습관도 닮았다. 우리 선조들이 자녀를 결혼시키면서 상대방의 집안과 부모의 됨됨이를 본 것은 아마도 이러한 이유 때문일 것이다.
유전자는 힘이 세다. 타고 난 유전자가 나의 모든 것을 결정한다면, 내 삶의 가치는 어디에 있는가? 학창시절 ‘리차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The Selfish Gene)』를 읽으며, 충격을 받았다. 내가 정말 유전자의 운반체에 불과한 존재라면 왜 살아야 할까? 유전자가 내 육신을 희생시켜서라도 자신의 자손을 남기려는 이기적 행위를 한다면 나의 결혼이나 출산도 유전자의 명령에 따른 행위에 불과할까? 그렇다면 나의 삶은 너무 허무한 게 아닐까? 유전자는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부모의 선택에 따라 나에 게 주어진 것일 뿐인데, 내 삶에서 내가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가? 내가 처음부터 유전자에 의해 프로그램 된 기계에 불과하다면 왜 살아야 할까? 리차드 도킨 스는 사춘기의 나에게 존재에 대한 근원적 회의를 불러 일으켰다.
이후 ‘유전자는 극복 가능한가?’에 대한 의문은 마음 깊은 곳에 화두로 자리 잡았다. 부모님의 모습 중에 닮고 싶지 않은 부분을 닮은 나의 모습이 불편했다. 유전자는 힘이 몹시 세어 보였고, 미약한 나에게 유전자를 극복할 힘은 부족해 보였다. 때로는 이것이 자신에 대한 부정이나 자학의 근원이 되기도 했다.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하는 사람이 또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건 그로부터 십 수 년이 더 흐른 뒤에 ‘유시민’의 『어떻게 살 것인가』를 읽으면서 였다.
유전자는 딸 아들에서 손자로, 다시 그 딸의 아들과 손자로, 인류가 존재하는 한 끝까지 죽지 않는 ‘불멸의 코일’이다. 그러나 유전자의 영생은 생물학적으로 의미가 있을 뿐 철학적 가치 는 없다. 유전자는 기억하지 않으며 사유하지 않는다. 유전자가 영생한다고 해도 자기 자신을 ‘나’로 인식하면서 살아가는 삶의 주체, 지성을 가진 자아는 언제나 단 한번만 존재한다. 유전자는 유전자일 뿐 ‘나’가 아니다.
언젠가는 죽어야 하고 잊혀질 수밖에 없는 것이 숙명이라면,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오직 하나 이다. 살아 있는 동안, 지금 바로 여기에서, 나를 ‘나’로 인식하는 철학적 자아가 삶의 기쁨 을 누리는 것이다. ‘나는 왜 자살하지 않는가? 무엇을 할 때 살아 있음을 황홀하게 느끼는가?
지금 하고 있는 이 일이 내가 진정하고 싶은 것인가? 내 삶은 나에게 충분한 의미가 있는가?’ 스스로 이렇게 물어야 한다.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없다면 인생의 의미도 존엄도 없는 것 이다.
나는 유시민 작가의 답이 마음에 들었다. ‘나를 ‘나’로 인식하는 철학적 자아가 삶의 기쁨을 누리는 것’. 그것을 위해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고, 내가 언제 행복한지 고민하면서 나에게 주어진 생을 누리는 것이 좋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이러한 결론은 사실, 유전자의 불변성과 기결정성, 극복 불가능한 강력한 힘을 인정하면서, 나에게 주어지는 작은 행복을 찾는 일에 불과하다. 마치 구입 불가능한 주택 가격과 좁은 취업문, 작은 월급 앞에서 결혼도, 연애도, 출산도 포기한 우리 젊은 세대들이 ‘소확행’을 즐기기로 결심하는 것 마냥 임시변통인 것이다.
그러나 드디어, 화두에 대한 답에 가까이 온 것 같다. ‘네사 캐리’의 『 유전자는 네 가 한 일을 알고 있다 』 를 읽으면서, 우리의 경험이 유전자의 스위치를 반대로 돌릴 수 있다는 희망을 얻었다. 즉, 우리가 태초에 – 어머니의 난자와 아버지의 정자에 무한 대 분의 1의 확률로 조합된 그들 각각의 유전자의 결합으로 수정란이 되었을 때 – 그 찰나의 결합이 이후의 전 생애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행위가 우리의 유전자 에 역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길이 아직 열려 있다는 희망을 본 것이다.
비로소 나는 ‘유전자의 운반체로서 프로그램 된 기계’가 아닌, 삶을 능동적으로 선 택하고 변화시킬 수 있는 주체가 된 것이다. 물론 이미 물려받은 DNA 자체를 바꿀 수 는 없다. 그러나 DNA의 일부를 메틸화 시키거나, 메틸화를 풀어냄으로써 유전자 명령서의 어느 부분이 발현될지, 또 어떤 부분을 암호화 시킬지 조절할 수 있다는 변화의 가능성을 본 것이다. 우리는 생물학이나 발생학이나 유전학 시간에 동일한 DNA를 물려받은 개체라 할지라도 발생 과정에서 유전자 교차에 의해 무한대의 확률로 다양한 조합의 개체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을 이미 배웠다. 여기에 다시 그 개체의 생애 동안 메틸화를 통한 발현 부위의 조절이라는 놀라운 변수가 생긴 것이다. 결국, 일란성 쌍둥이라 할지라도 동일한 개체는 하나도 없으며, 또 우리의 경험과 삶이 유전자에 역으로 영향을 미치는 과정을 통해 다른 개체로 거듭날 수 있다.
사실 유전자가 모든 것을 결정하고 지배한다는 믿음 아래서 나의 전공인 교육학은 쓸 모없는 학문이 되어 버린다. 이미 타고 나버린 DNA를 교육이 무슨 수로 바꾼단 말인가. 이 후성유전학의 기조 아래에서야 비로소 교육이든, 교정이든, 종교든, 바르게 살아 보려는 인간의 미약한 노력들이 작은 가능성을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나는 또 다른 숙제를 발견했다.
임신 초기 3개월 이내에 모체 내에서 겪었던 태아의 영양실조와 스트레스는 태아의 생애 전반에 전 생애에 걸쳐 영향을 미친다. 임신 3개월 이후 영양이 회복된 경우라고 하더라도, 이 아기들은 생후 평균보다 높은 비만율을 보였다. 더욱 놀라운 일은 임신 초기 석 달 동안 영양실조를 겪은 여성의 손자들도 이러한 경향성을 보인다.
어린 시절에 학대나 방임을 경험한 사람은 우울증에 걸리거나 자해 또는 자살, 약물 남용에 빠질 위험이 매우 높다. 어른이 된 후, 학대나 방임을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라 할지라도, 평생 동안 정신적, 정서적으로 후유증을 앓는다.
즉, 우리가 의도하지 않게 경험한 것들이 우리의 다음과 그 다음 세대에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소름끼치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후성유전학은 더 나아질 가능성을 보여주는 희망의 학문인 동시에, 우리가 우리 다음 세대의 삶에 불행을 추가할 수도 있다는 책임감도 부여한다.
유전자는 신이 내린 불변의 고리가 아니라, 태초부터 선조들이 경험한 기억들이 알알이 새겨진 역사서로 내 안에 존재하고 있다. 유구한 역사 동안 몽고의 침입으로부터, 왜적의 침입으로부터, 또 식민지 시대에, 6.25 전쟁에 겪었던 선조들의 공포와 고통들 또한 나의 유전자에 아로 새겨져 있을 것이다. 나의 선조들이 배고픔 없이 먹고 입게 된 것은 불과 50년도 되지 않았다. – 인류의 역사에서 배고픔과 전쟁이 없는 시기는 거의 없었다. – 바로 우리 조부모 세대와 부모 세대가 겪었을 식민지 말기의 혼란과 전쟁 이후의 배고픔을 상상해 보면, 부모님의 이해하지 못할 행위들에도 동정 어린 시선이 생긴다. 그들도 어쩌면 어머니의 뱃속에서 영양실조를 경험한 태아였을지 모른다. 나의 경험이 아니었던 일들이었지만 나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러면 나는 이제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떻게 살아야 아로 새겨진 선조들의 상처로부터 자유로워지고, 또 후손들에게 상처 없는 삶을 물려줄 수 있을까?
첫째, 자책하거나 자학하지 않고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자 한다. 이미 결정되 어 내 안에 존재하는 유전자를 부정할 수 없다. 조부모나 부모들도 스스로 불행한 경험을 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저 상황과 역사의 거대한 소용돌이 안에서 고군분투 하며 미숙함 속에서 나를 낳고 길렀다. 그들의 노력과 노고에 감사하며, 나의 상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싶다.
둘째, 스스로의 상처를 치유해 나가고 싶다. 남들보다 잘 키워보려는 부모의 의지가, 내 자식이 제일이었으면 하는 부모의 기대가, 자녀에게는 상처와 부담이 될 수 있다. 부모도 신이 아닌 사람이었으므로, 때로 감정적이었을 것이며, 밖에서 노동에 시달리다 돌아온 그들이 늘 자상하고 온화한 모습만으로 우리를 대하기 어려웠음을 이해한다. 자녀들이 ‘학대와 방임’이라는 프레임 속에서 생각하는 부모의 모습이 진정 부모의 의도였던 경우는 많지 않다. 부모는 그들이 겪은 방식으로 우리에게 행동할 뿐이며, 경 제적으로 갑작스레 유복해진 평화의 시대에 태어난 우리에게 부모의 치열하고 전투적인 삶의 배경이 폭력적으로 느껴지는 경우도 많을 것이다. 우리의 부모 세대는 우리가 겪은 것보다 훨씬 힘들고 격동적인 삶을 살아왔음을, 그리고 그들의 부모는 생사를 오 가는 위기를 겪었음을 기억하며, 내가 상처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준 사람은 없고 받은 사람만 있는 무상한 것임을 자각하고자 한다.
셋째,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다. 타고난 것이 천성이라지만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고 싶다. 다른 이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 방식으로 살고 싶다. 감사한 마음 으로 사는 사람이 되고 싶다. 일회용품을 덜 쓰고, 쓰레기를 줄이는 작은 노력을 하는 지구인이 되고 싶다. 경제적으로 부유하지 못하게 자랐으나, 꽃이 피고 새가 우는 모습 에 행복해 하는, 마음이 부자인 사람이 되고 싶다. 흥청이고 화려한 삶보다, 고요한 명 상 속에서 스스로를 바라보고 반성하며, 오늘 하루 세 끼 밥을 먹을 만큼 세상에 도움 되는 일을 하였는가 돌아보며 살고 싶다. 더 오래 사는 일에 집착하지 않고 담담하게 인연 따라 몸을 맡기고 조용히 머물다 가는 여행자가 되고 싶다. 다가오는 인연에 순 응하고, 떠나가는 인연에 집착하지 않는 평화로운 나그네가 되고 싶다.
나의 경험들이 내 유전자에 작은 기록들을 남긴다니. 조금씩 변한 나의 유전자들이 혹여 있을지 모를 후손들에게도 더 나은 삶을 선물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오늘도 나는 거대한 유전자의 힘 앞에서 조용하게 한 걸음을 내딛어 본다. 내가 사는 매일 매 일이 실록의 한 페이지가 되어 세상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잊지 못할 것 같다. 내 행위의 영향을 생각해 보면, 하루도, 한 순간도 허투루 살아서는 안 될 것 같다. 지금도 나의 유전자는 내가 하는 일을 기록해 나가고 있다.
우수 황*성 경제학부 도서: 복잡하지만 단순하게
독후감: 복잡한 게 아니라, 복잡하게만 보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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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는 호황인 게 좋을까요, 불황인 게 좋을까요?” 한 경제학 교수님이 수강생들에게 물었다. 내가 신입생일 때 다른 교수님도 같은 질문을 하셨고, 그때 나는 속으로 ‘호황’이라는 답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생뚱맞게 “균형이 좋습니다.”라는 말씀을 하셔서 당황했는데, 지금은 당연하다는 듯이 질문의 답으로 ‘균형’을 떠올린다. 두 교수님 모두 반쯤은 농담이라는 듯 웃으며 말씀하셨지만, 나는 그 답이 일말의 진리를 담고 있다고 여겼다. 사실상 정부는 경제 안정, 한국은행은 금리·물가 안정을 말했고, 내가 보기에 모두가 불확실성을 피하고 위험을 줄이려고 애쓰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균형’이라는 상태는 내 삶을 고민할 때에도 그럴듯해 보였고, 지향점으로 삼았었다. 심리학 교양 수업에서 자신의 일생을 감정의 높낮이로 나타내는 활동을 했던 적이 있다. 그때 가파르게 오르내리는 곡선을 보며, 어떤 충격에도 흔들리지 않는 게 ‘내적 균형’을 유지하는 삶의 자세라고 여겼다. 주식 시장이 올라가면 거품이 터질까 불안하고, 내려가면 공황에 빠질 것 같아 두려운 그 마음을 덜어내는 게 행복의 열쇠라고 여겼다. 그러나 마음가짐만으로는 그 열쇠를 지키는 게 어려웠다. 나를 탐구하는 시간을 많이 가졌음에도, 내 마음은 변덕을 부렸다. 세상 돌아가는 원리를 알면 더 의연해질 거라고도 생각했다. 하지만 잡다한 지식들을 쌓아갈수록, 오히려 너무 복잡해서 알 수 없는 영역이 많다는 인상이 강해졌다. 그러던 중『복잡하지만 단순하게』(닐 존슨)가 ‘지금 당장은 알 수 없는 영역을 대하는 방식’을 보여줬고, 나는 고민 해결의 실마리를 얻었다.
책이 사실 그대로 보여주는 현실 세계는 복잡한 요소가 여러 갈래로 얽혀 있다. 회사원 A와, 그가 다니는 회사, 그가 속한 사회 모두 단일한 개체이기도 하면서 시스템이기도 하다. 책은 이들을 복잡계라 부르며, 복잡계 연구가 내놓은 성과를 간략하게 소개한다. 예컨대, 당신이 회사원 A를 부하로 두고 있는 상사라고 하자. A가 서류 정리를 당신의 마음에 들게 해낼지 여부는 예측하기 어렵다.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변수가 산재하고 있어, 복잡해 보이기 마련이다. 하지만 연구를 통해 서류 정리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변수를 단순화할 수 있다.
우선 A의 서류 정리가 매일 동일한 패턴을 보이는지, 그렇지 않다면 질서와 무질서 중 어디에 가까운지, 얼마나 자주 질서와 무질서를 오가는지의 순서로 그의 작업 방식을 분석해본다. 그러면 그의 행동, 그와 관련된 변수의 영향과 같이 크게 두 가지로 분리할 수 있다. 이제 시스템의 오류를 유발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A에게 제약을 가하고, 당신이 원하는 상태로 결과를 유도할 수 있다. 변수의 영향을 줄이고 A의 행태를 편향되게 만드는 것이다. 이를 조향 효과라고 하며, 개인의 행동양식뿐만 아니라 사회 시스템에도 적용할 수 있다.
처음에 나는 이와 같은 복잡계 연구 결과가 ‘성과’라고 할 만한 것인지 의아했다. 언제나 상황의 원리를 완결되게 설명하고 명료한 해답을 내놓는 수학의 방정식과는 달랐기 때문이다. 수학을 사용하는 모든 자연·사회과학이 그렇듯, 일련의 가정과 실험을 통한 가설의 검증은 복잡계학 또한 가지고 있다. 하지만 과학 이론서가 설명하는, 물체 및 현상의 본질과 원리는 이 책에서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런 원천에 대한 논의는 접어두고, 시스템에 내재한 상호작용에 초점을 두었다. 분석 결과는 결코 단순한 사실이 아니었고, 미완의 결론이라는 점은 또 다른 복잡성이 존재함을 시사했다.
미적지근한 결론이 주는 아쉬움과 함께, 복잡계학과 내가 배운 경제학을 비교해봤다. 내게 경제학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지만, 적어도 풀고 나면 만족할 만한 결론을 주기 때문이었다. 주류 경제 이론은 합리적인 개인을 기본 가정으로 삼고, 이들이 사적으로 행한 선택이 사회적으로 조화를 이루며 최적의 상태가 달성된다고 말한다. 애덤 스미스(A. Smith)가 지적한 ‘보이지 않는 손’이 시장을 ‘균형’상태로 이끈다는 조화론이 전제가 된다. 그 덕택인지 신기하게도 개인의 최적 선택, 부분 균형, 전체의 균형 상태가 동시에 존재하는 세계가 존재한다. 맨눈으로는 그 세계를 관찰할 수 없지만, 수학으로 증명되는 경제학 이론 체계를 통해 조화로운 세계를 포착할 수 있다. 반면 복잡계가 보여준 세상은 채색 없이 밑그림만 겨우 그려진 상태였다.
이와 같은 완결성은 내가 경제학을 배우게 만든 가장 큰 매력 요소였지만, 차츰 그 색이 바랬다. 경제학은 이론이 현실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는 비판을 받는다. 그렇지만 이론을 통해 보는 세계와 맨눈으로 보는 세계를 비교함으로써, 현실을 분석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 있다고 봤다. 문제는 그 비교가 상당히 많은 데이터와 아직 내게는 외계어 같은 통계 처리 과정을 요구한다는 점이다. 그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경제학은 단지 세상을 ‘빨간색 아니면 파란색’으로 보여줄 뿐이었다.
경제학을 비롯하여 나를 탐구하기 위해 배운 심리학, 인문학 등의 지식 모두가 그런 모호함을 안고 있었다. 지식을 배울 때는 완벽히 맞아떨어지는 것 같았고, 경이롭다고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경이감과 함께 불어난 기대는, 그 지식을 현실에 적용할 때에는 거의 충족되지 못했다. 예컨대 계획대로 살자는 다짐이 3일 만에 무너지는 내 행태는, 부족하게 취한 수면, 어젯밤 자기 직전에 먹은 야식, 편하고자 하는 욕구 등 많은 요소가 원인이 될 수 있었다. 굳이 무엇이 주된 원인이었는지를 찾는 일은 불가능할뿐더러, 과도한 시간과 노력을 필요로 했다. 흔들리지 않으려면 자신을 잘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일순간의 나조차 설명되지 않아 답답했다.
정리해보면 책을 처음 읽었을 때는 복잡계학도 다른 학문과 마찬가지로 불만족스러운 것이었다. 다른 학문이 이론적인 완결성을 띰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론과 현실의 간극을 메울 수 없었던 반면, 복잡계학은 완결되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는 차이가 있다.
그런데 복잡계학에 대한 실망은 오래가지 않았고, 새로운 기대가 생겼다. 책은 복잡계 연구의 방법론을 소개하는 한편, 그런 연구 사례를 통해 현실 세계를 복잡계라고 볼 수 있음을 증명한다. 세포의 운동부터 인간의 선택, 사회의 움직임 모두를 0과 1로 구분할 수 있다. 인간이 내린 0과 1 사이의 선택은 사회적 연결망을 통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하나의 사회적 선택으로 통합된다. 통합의 과정에서 개인이 가진 특수성이 상쇄된다. 따라서 개별 요소의 본질·원천에 대한 고찰 없이, 상호작용과 되먹임(Feed-back) 현상을 관찰하는 것만으로도 전체적인 움직임을 분석할 수 있는 것이다.
0과 1이라는 구분은 언뜻 양자택일의 문제로 보이지만, 관찰 이전에는 혼재하는 것일 수 있다. 복잡계 연구는 양자역학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한다. 양자는 관찰 이전에는 그것이 존재하는 형태를 명확히 규정할 수 없다. 예컨대 빨간색일 수도 있고, 파란색일 수도 있는 것이다. 양자 간에 나타나는 얽힘이라는 현상과 복잡계 구성요소의 상호 연결·되먹임 현상에서 유사점을 찾을 수 있다. 개별 요소들을 일일이 다 파악하여 고려하는 것은 아직 어렵지만, 이들이 어우러져 발생하는 창발 현상을 우리가 관찰할 수 있다는 점이다.
내 생각에 결국 복잡계학은 ‘알 수 없음’을 인정하지만, 그렇다고 더 알아가는 것을 포기하지는 않는다. 경제학은 인간의 선택에 합리성이라는 색깔을 입히고 전체를 색칠해 온 반면, 복잡계학은 인간의 선택이 ‘이것과 저것 모두’ 가능하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그 선택이 어떤 색을 띠는지는 개별적으로 규정할 수 없지만, 개별로부터 시야를 확장해 전체를 조망할 수 있다. 0과 1로 표현되는 무수한 선택은 전체를 볼 때 상쇄되어, 0.5 또는 그 근처의 어떤 숫자로 표현되는 사회 시스템의 움직임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물론 아직은 복잡계학의 역사가 길지 않은 탓에 남은 과제가 많지만, 아직 살펴보지 못한 복잡성의 영역을 과학기술의 발전과 함께 살펴볼 가능성이 열리는 중이다.
책을 통해 본 복잡계 연구는 대상을 완벽히 설명하려고 하는 욕구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 욕구는 단지 내가 경제학을 통해 일시적으로 충족했던 것일 뿐, 유의미한 결과를 위해 필수적인 요소는 아닐 성싶다. 모든 것을 자신의 인식 체계에 포함시키고자 하는 욕구는 『모든 것은 빛난다』(숀 켈리 등 2명)이 언급한 ‘태양을 삼키려는 욕망’과도 같다. 인간이 섣불리 다가가기 어려운 신의 영역이 존재하며, 인간의 합리성을 맹신하고 모든 우주를 인간의 영역에 포함하려는 갈망을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내 개인적 경험이나 경제학에 대한 비판이 보여주듯, 인간의 인식과 실재 사이에는 채워질 수 없는 간극이 존재한다.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되기 위해 설정한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목표는 내게 너무 과중한 요구였던 것이다.
내가 현실 세계를 얼마나 잘 이해하고 예측하는지와 관계없이, 세상은 저절로 굴러 간다. 전통적인 학문이 각각의 원천으로부터 세계를 일관성 있게 설명해왔다면, 복잡계학은 세계가 일관되지 않을 수 있으며, 그때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정보를 얻을 수 있는지를 예증한다. 예컨대 잘 돌아가는 시장이 ‘보이지 않는 손’ 때문이거나, 복잡계 연구의 숙제로 남겨져 ‘아직은 보이지 않는 무언가’ 때문일 수 있다. 이번 탐구를 통해 학문은 인식과 실천을 위한 매개일 뿐, 아무것도 떠먹여 주지 않는다는 점을 깨달았다. 세상이 복잡하다고 여겨왔지만, 내가 세상을 대할 방식은 이전보다 명쾌해졌다. 눈에 보이는 것을 아는 것에 끼워 맞추려 하지 않고, 눈에 보이는 그대로를 면밀히 살펴보는 것이다. 복잡계 연구가 그렇듯, 나름의 방법론까지 설정한다면 더욱 좋겠다.
세상이 복잡하다는 진술은 지나치게 단정적이다. 그것은 사고의 틀, 내가 이해한 세상, 내가 직면한 삶, 그 어디에서도 찾지 못한 균형에 대한 변명을 위해 설정한 벽과 같다. 세상은 복잡한 동시에 단순하기도 하다. 그렇게 얼핏 모순되게 존재하지만, 내가 세상을 체험하는 방식에 따라 명확한 한 가지 특성으로 나타난다. 복잡계 연구자들이 인정한 ‘아직 불완전한 인간’을 인식하고, 그들이 그것의 극복 과정에서 보여준 ‘편견 없는 태도’를 실천한다면, 혹시 모를 일이다. 복잡하게만 여겨졌던 세상을, 내가 직접 단순하게 볼 수도 있는 일이다.
우수 김*원 독어독문학과 도서: 언어의 온도
독후감: 말, 아름답고도 위태로운 줄타기 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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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는 곧 그 사람을 나타낸다.”는 다소 진부한 격언이 있다.
진부한 것은 오래된 것이지만 보편적인 진리를 내포할 때가 많다. 그리고 나는 이 격언을 믿는다. 난생 처음 마주한 사람이 있다고 하자.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그가 내뱉는 언어와 평소 언어 습관을 잘 살펴보면 대충 그 사람의 성향과 나아가 가치관도 어렴풋이 파악할 수 있게 된다. 물론, ‘어렴풋이’다. 처음 만난 낯선 타인과 한 시간 남짓한 대화로 상대방을 모두 파악했다고 예단하는 것은 성급한 일이다. 그렇지만 상대에 대한 호감과 비 호감, 적어도 이것은 ‘또렷이’ 결정된다고 할 수 있다.어째서 그럴까?
우리는 말, 언어에서 어느 정도의‘온도’를 느끼며 살아가기 때문이다. 온도라니, 언어가 뜨겁거나 차가우며 때로는 미지근할 수도 있다는 것인가? 그렇다. 언어는 분명 온도를 가지고 있다.
“차가운 말투로 쏘아붙였다.”, “따뜻한 위로의 한 마디를 건넸다.”와 같은 문장을 접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만약 이 두 문장을 “따뜻한 말투로 쏘아붙였다.”와 “차가운 위로의 한 마디를 건넸다.”로 바꾸어 버린다면 문장이 어색하기 그지없다. 아마 이런 문장은 본 적이 없을 것이다. 사람들의 일반적인 정서에 “따뜻하게” 쏘아붙이는 것과 위로가 “차갑다”는 것이 쉽사리 이해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처럼 언어는 맥락 속에서 자신만의 온도를 지니고 사람들에게 보편적인 감정을 전달하는 역할을 해낸다.언제부터 내가 이러한 언어의 온도와 그 차이를 느끼며 살게 된 것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어느 순간부터 타인이 뱉는 언어에 내가 감정적 영향을 받고 있음을 깨닫고, 내 언어 습관도 돌아보면서 수시로 ‘말조심 하자’ 고 되뇌었던 것 같다. 한 사람이 내뱉은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입에서 나온 순간 공중에서 분해돼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가슴에 푸욱 꽂히고 만다는 것은 어쩌면 슬픈 일일지 모른다. 그런 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그런 말을 듣지 않았더라면 상황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텐데, 안타까웠던 적이 수도 없이 많았다. 오가는 언어 속에서 상황은 온실이 되기도, 살얼음판이 되기도 한다. 너무 뜨거운 온도의 언어도, 너무 차가운 온도의 언어도 사람을 아프게 한다. 그리고 나도 그렇게 살아왔을 터다. 그래서 이 책을 고르게 되었다. 당신의 언어 온도는 몇 도쯤 되냐고 묻는 작가의 책을 읽어보고 싶었다. 나는 내 언어 온도를 잘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글을 쓰는 사람 대부분이 그러하다고 생각하지만, 이 책의 저자 역시 일상생활에서 마주치는 상황, 사람, 사물, 드는 감정과 생각 등을 세심하게 관찰하고 기록한다. 기록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나아가 본인이 기록한 것을 독자로 하여금 공감할 수 있도록 글 말미에 발판을 마련해 놓았다. 작가가 써놓은 300여 개의 에피소드는 대부분 가볍게 읽을 수 있는 것들이라 자칫하면 빠르게 읽고 다음 에피소드로 넘어가고를 반복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이 본인이 직접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경험에서 얻은 생각을 작성한 글이라 저자의 생각이나 사상을 엿보는 재미에 빠져 독서를 할 수 있었다. 타인의 생각을 알고 나면 나 스스로의 생각도 톺아보는 경우가 종종 있지 않나. 나에게는 이 책이 그러한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수많은 에피소드를 통해 언어 사용의 중요성과 소중함을 끊임없이 일깨워 주지만 작가 역시 입을 닫기 힘들고 혀를 감추지 못하는 날이 있다고 한다. 입술 근육을 좀 풀어줘야 직성이 풀리는, 그래서 필요 이상으로 말을 많이 하게 되는 그런 날. 그러고는 ‘언총(言塚)’에 대해 소개한다. 언총은 말 그대로 ‘말 무덤’이다. 경북 예천에 위치한 언총은 달리는 말(馬)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말(言)을 파묻는 고분이란다. 우리는 종종 “이 말을 해도 될지 모르겠지만…”이라거나 “있잖아. 네가 이 말 듣고 기분이 안 좋을 수도 있는데…”와 같이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인 것을 알면서도 남에게 말을 걸고야 말 때가 있다. 이처럼 남을 비난하거나 노파심이라는 미명하에 행하는 참견의 말을 한데 모아 이 언총이라는 구덩이에 파묻었다고 한다. 말의 장례를 치르고 난 후에는 신기하게도 사람들 사이의 언쟁과 다툼이 줄어들었다고 한다. 그렇다. 우리는 늘 말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고 무엇을, 어떻게 말할까 생각하며 살아간다. ‘언어 습관’이라는 용어도 사실상 말을 내뱉는 행위에 초점이 맞추어져있다. 말을 내뱉지 않는 행위 역시 언어 습관에 포함된다는 것을 우리는 간과한다. 때로는 무엇을 말할까, 어떻게 말할까보다 어떤 말을 하지 않을까가 더욱 중요하며 어려운 법이다. 말을 많이 하다보면 가끔 아차, 의도치 않은 실언을 해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작가는 이렇게 표현한다.
‘말 무덤에 묻어야 할 말을 소중한 사람의 가슴에 묻으며 사는 건 아닌지….’
참 마음에 와 닿았던 구절이다. 말 무덤으로 갔어야 할 얼마나 많은 말들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가슴 속으로 가버렸을까. 말 무덤이라는 것이 일반 무덤과는 달라서 그곳에 한 번 묻힌 말은 다시 파낼 수도 없는데, 나는 얼마나 후회를 하려고 이 말을 내뱉어 버린 것일까. 남은 후회는 내 몫이었다. 또 내 가슴에는 나를 아프게 하는 말이 얼마나 많이 묻혀 있을까. 우리는 모두 각자의 언총이 필요하다. 그리고 주기적으로 이 언총에 들러 쓸데 없는 말을 묻어야 한다.나의 엄마는 아빠로부터 ‘말로 인한 상처’를 많이 받았다고 수 없이 내게 말했다.
말로 인해 받은 상처는 그 말을 내뱉은 사람으로부터만 치유될 수 있는 것이라고 덧붙이기도 했다. 언어가 너무 차갑거나 뜨거우면 정서적 동상을 입기도, 화상을 입기도 한다. 그러나 적당한 시원함을 담은 언어는 상대방의 기분을 상쾌하게 만들어 주며 적당한 온기를 품은 언어는 상대의 꽁꽁 언 마음을 감싸 녹여준다. 과연 내 언어의 온도는 몇 도였을까? 상대방에게 적당했을까? 책을 읽으며 내가 위로받기도 하고, 그 과정에서 내 언어의 적당한 온도를 찾아가는 연습을 할 수 있었다. 마음이 불편할 때에는 먼저 미안하다고 사과할 수 있는 용기와 더불어 상황에 따라서는 말을 아끼는 것이 위로의 말보다 낫다는 것을 깨닫는 혜안을 가질 수 있길.많은 사람들이 말에 상처를 받고 또다시 그 상처를 되갚으며 살아간다.
어쩌면 내가 상처받지 않기 위해 상대에게 상처를 주는 행동을 저지르는지 모른다. 그 과정을 차분히 들여다보면 그 중심에는 언어가 자리 잡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뭐든지 말로 뱉어버리는 것이 가장 빨랐고, 속 시원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렇게 쉬이 뱉어진 말을, 내 가슴 속에 파묻힌 말을 꺼내보는 것은 무척이나 아픈 일이다. 그럼에도 그 말들을 마주할 때에 비로소 내 감정을 스스로 정리할 수 있는 힘이 생길 때가 있다. 어쩌다, 와서는 안 될 말들이 내 가슴 속으로 와 버렸다면 그리고 아무도 그 말들을 꺼내주지 않는다면 내가 한번 꺼내보자 시도해 본다. 이 언어가 차갑다, 뜨겁구나, 따뜻하네, 미지근하다고 알아차릴 때 나도 비로소 적당한 온도의 언어를, 적당한 누군가에게 건넬 수 있을 것이므로.
장려 이*호 디자인학과 도서: 구운몽
독후감: 새롭고 희망찬 나 자신의 구운몽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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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 시절 서역의 중인 육관대사는 신임하는 젊은 제자 성진에게 동정호의 용왕에 게 감사 사례를 보내는 심부름을 보낸다. 이 즈음에 남악 위진군 낭랑의 팔 선녀가 대 사의 안부를 묻고 선물을 보내는 심부름을 끝내고 돌아가다가 성진과 한 석교에서 만나 언어로 수작한다. 이를 안 대사는 성진과 팔 선녀를 염라에게 보내서 인간계로 환 생하는 죄벌을 행한다. 양소유로 태어난 성진은 인간계에서 과거를 합격도 하고 임금의 사위로도 지목되고 변방에서도 승리를 이끌며 승승장구한다. 이 과정에서 2명의 부 인과 6명의 첩을 두며 환생한 팔 선녀와 세속의 영화를 누린다. 그러나 이 부귀 번화 에도 인생무상을 느낄 즈음, 노승의 판사봉에 깨어나 보니 이 모든 것이 일장춘몽이었 음을 알게 된다. 성진과 팔 선녀는 이후 불도에 매진하여 보살의 도를 얻어 함께 극락 세계로 간다.
고전은 오랜 시간을 거쳐도 그 가치를 보존하며 내려오고, 읽을 때마다 새로운 느낌을 준다고 한다. 어렸을 때는 삽화 있는 동화책으로, 학창시절엔 시험을 위한 국어 공부를 위해 접해 왔고, 이번에는 완전한 나의 선택으로 책을 읽었다. 이 책으로 고전은 시대와 세대를 아우른다는 말의 의미를 실감했다. 한자적 표현이나 대화체의 시대적 이질 감으로 도대체 무슨 말인지를 몰랐던 학창시절에는 국어 선생님의 설명이나 필기로 대충의 이해와 암기를 했었지만, 이제는 더 쉽게 번역된 책이 많이 나오고 머리도 더 커 서인지 이해력이나 작가의 의도를 접하는 것에 훨씬 편안함을 느꼈다.
개인적으로 구운몽을 접하거나 소리만 들어도 고 3때의 나 자신의 일장춘몽이 매번 떠오른다. 수시 6개와 정시 3개의 파란만장했던 나의 구운몽은 주체가 빠진 실체 없는 알갱이로 잡히지 않는 모래알처럼 내 손에서 빠져나갔고, 말 그대로 뜬구름이었고 덧 없는 일장춘몽이었다. 비록 성진은 일장춘몽을 느끼기까지 세상의 부귀번영을 다 누리 고 다시 본연으로 돌아오고 극락하지만 나 자신은 현실을 자각하면서 방황하고 힘들게 재수 생활을 거쳐 대학에 들어왔으며 대학이 내게는 극락이었다. 비록 또 다른 난제가 새로운 극락을 찾는 것을 막고 있지만, 지금까지의 간접지식과 경험, 노력으로 성진처 럼 극락세계로 나아가도록 힘을 내야 함을 깨닫고 있다.
한국사를 읽다보면 조선시대 소설은 일반 평민에 유행했던 문학으로 당시의 서포 김만중과 같은 사대부 가문의 양반이 소설을 창작했다는 것은 드물고도 천대받는 일이었 다. 유복자였던 그가 조정을 비판하여 유배지로 버려지면서 그리운 어머니를 향한 효 심으로 주변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아녀자가 볼듯한 소설을 지어 당시엔 사회에 반 항하는 듯 했지만, 지금에서는 서양의 세익스피어 고전만큼이나 우리나라의 위대한 고 전소설로 구운몽이 외국에도 번역되어 출판되고 있다. 내용에서는 양소유가 온갖 세속 을 다 누리고 있으며 마치 애정 결핍과도 같은 다중연애에 집중하고 결국에는 이 모든 것이 다 허망함을 느끼며 한탄하는 것이 그의 홀로 되신 어머니에게 부부간이나 이성 간의 애정도 결국에는 덧없음이니 외로워 마시고 잘 사시라는 메시지를 주는 듯하다. 구운몽에서는 양소유의 입신양명 과정의 갈등이나 노력은 거의 다루지지 않고 있다. 이에 개인적으로, 팔 선녀가 환생한 여성들과의 혼인이나 애정 문제에 내용의 초점이 맞춰져서 자칫 당시의 과거시험이나 출세가 쉬운 걸로 외국인들에게 인식되지 않을까도 걱정된다. 한국사를 공부해서 시대적 특징을 알고 있는 우리들도 갸우뚱하게 하는 이 고속도로식 출세는 지금의 취업 준비생들의 로망일 수도 있으나, 당시 일부다처제의 남성 편향적 사회를 비판하게 만드는 성차별적 요소가 많은 작품일 수도 있다. 그 러나 반대로, 구운몽을 통해 당시 조선의 일부다처제적 유교상을 비판하고 한 명의 남성과 다수의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인생무상을 드러냄으로써 당시엔 미래의 여성 상위 시대상을 미리 그려봤다는 관점으로도 볼 수 있다.
또한 대부분의 조선시대 소설 이나 사화들을 읽어보면 처와 첩들의 낭군에 대한 애정 싸움이나 갈등, 질투 등으로 난투극이 벌어지는 반면, 여기서의 여인들은 아주 사이가 돈독하며 더 나은 처자를 찾으라고 칭찬이나 소개를 해주면서 서로가 모여들고 도와주는 독특한 설정을 보여주며 독자로 하여금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시대적 아이러니도 느낄 수 있다. 마치 ‘피할수 없으면 즐기라’는 말처럼, 일부다처제의 당시 체계를 즐거이 받아들여라는 듯하다.
어차피 여러 명의 여자가 한 낭군을 섬겨야 한다면 ‘이러이러한 괜찮은 여성을 찾아오세요’라고 말하는 듯하며, 책 속의 여주인공들은 아예 여성 독자들의 투기를 차단시켜 버리는 듯한 대화를 한다. 자신의 몸종을 소개시켜 주거나, 본인이 말로만 듣 던 명기나 풍류에 능한 여인네를 알려주며 원하는 구성원을 꾸려서 그들의 집단을 만 들어 행복하게 살려는 기이한 현상에서 책을 통해 그릇된 일부다처제를 옹호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비판적 생각도 갖게 해준다. 구운몽을 읽으며 영화 ‘인셉션’이 생각났 다. 이 영화도 정말 처음에는 이해하기 힘들었는데, 명절에 반복해주는 영화 중 하나로 계속 몇 번 보다 보니 그제서야 작가나 감독이 표현코자 하는 것을 알 수 있었던 것처럼, 구운몽도 반복을 하다 보니 이제야 작가의 취지나 책 안의 시대상이나 표현 등을 알 수 있었다. 얼핏 보면, 조선시대 사대부 양반 남자의 허울좋은 일부다처제와 과거 합격을 통한 입신양명을 내세운 가부장적 남성 우월 소설 같지만 모든 것이 허망하다는 일장춘몽의 덧없음을 교훈으로 조선시대 음지의 여성들에게 유교 윤리적 사회임에 도, 그럼에도 여성들의 삶을 잘 영위해 열심히 살아가라는 취지의 여성소설 같이 느껴 진다. 이는 김만중이 유배지에서 남편도 아들도 없이 살더라도 어머니의 소중한 인생을 열심히 살라는 메시지를 재미있는 여성소설을 통해 효심을 담아 전하는 그의 진심인 듯하다. 마치 내가 군입대 때 헤어지면서 빨개지던 눈시울을 보인 어머니를 보며 처음 느꼈던 내 안의 효심처럼 김만중도 어머니와 헤어지면서 본인이 가장 어머니를 위해 해드릴수 있는 것이 뭘까를 고민하며 창작을 했으리라. 양반으로서 아녀자의 소설을 지으면서 주위의 비판도 고려치 않고, 내용도 출세의 쾌거를 위한 과정을 최소화 한 채, 당시의 아녀자들이 읽기 쉽고 접근키 쉬운 애정 소설로 집필한 김만중이 심히 존경스럽다.
이 작품을 통해 조선후기에 유교, 불교, 도교 사상이 혼합해 들어와 있음을 알게 되었고, 대사와 염라대왕, 환생, 극락이라는 말들을 통해 윤회 사상과 선과 악 의 권선징악과 당시에도 사후 세계에 대한 경외심이 있었음을 지각할수 있어 좋았다. 복학을 하면서 빨리 학교에 가고 싶었고, 한번씩 휴가때 나와서 보이는 대학생들의 바쁜 발걸음이 너무도 부러웠다. 입대전 못 느꼈던 대학생활의 행복함이 입대후에는 얼마나 부러웠는지. 그러나 지금 복학하고도 코로나로 인해서 학교에 거의 못가고 있 고, 모든 강의는 거의 사이버로 듣고 중간고사에 그나마 교정을 밟았다. 코로나로 친구 들과도 교류가 거의 없는 지금, 이 많은 시간에 나는 책을 읽는다. 그때는 어렵고 이해 하기 힘들었던 책들이 이제는 읽힌다. 세월이 흐르고 군 생활로 바깥 사회가 너무나 그리웠기에 책들도 이렇게 잘 읽혀지는지도 모른다. 입대 전이면 절대, 독후감도 써보 지 않았으리라. 학교의 모든 활동에 참여해보고 싶고, 새로운 동아리도 들어보고 싶지 만 못하는 지금, 많은 책을 통해 간접경험을 쌓고 마음을 다독여야겠다. 구운몽을 정리 하는 좋은 시간을 가졌고, 독후감이라는 기록을 남기게 되어 정말 흐뭇하다. 나만의 구운몽을 위해서 이번에는 고3의 슬픈 기억이 아닌 행복한 구운몽을 위해 힘쓰는 내가 되어야함을 깨닫게 해준 좋은 책이었다. 구운몽의 좋은 기운이 널리 퍼졌으면 좋겠다.
장려 박*경 교육학과 도서: 언어의 온도
독후감: 보통의 존재로 함께 살아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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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9월은 나에게 특별하다. 시작과 끝을 다 경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공부를 다 시 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도전한 박사과정이 시작되는 달이기도 하고, 4년 동안 상담 하였던 나의 내담자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은 9월이기도 했다. 설렘과 씁쓸함이 함께 공존하는 나의 마음에 무엇이라도 채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던 중 2020 도서관 독후감 공모전에 언어의 온도라는 책이 독후감 리스트에 있는 것을 봤을 때 이 기회를 통해 평소 읽고 싶었던 언어의 온도 책을 보면서 내 마음을 좀 돌아보고 싶다 는 생각이 들었다. 이기주 작가의 말처럼 자신만의 리듬을 유지하기란 생각보다 어려 운 일이다. 세상이 우릴 가만 내버려두지 않고, 외부의 리듬이 틈틈이 우리 안으로 틈입해 내부의 리듬을 방해하고 무너뜨린다. 하지만 살면서 한번쯤은 삶의 리듬을 점검 해보거나, 오래전부터 어딘가에 존재했을 고유한 리듬을 발견하기 위해 마음을 걷어붙여야 하지 않나 싶다.

나는 죽으려고 자살을 시도한 대상자를 만나는 사례관리자로 일을 하고 있다. 정신건강분야에서는 총 18년을 하였고, 자살시도자를 대상으로 일을 한 건 8년 정도 지나고 있다. 평소에 ‘죽음, 자살, 절망, 끝’이라는 단어에 대해 크게 생각하며 살지 않았는 데. 자살시도자를 만나는 일을 하면서 삶과 죽음에 대해 많은 생각과 고민을 하였던 것 같다. 그러면서 오히려 죽음에 대해 회피하려고 하는 나의 모습을 종종 보기도 했다. 나의 업으로 삼고 있는 일이기 때문에 오히려 더 무감각할 때가 있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기도 했다. 그러던 중 최근에 4년 동안 만났던 자살시도자가 지난달에 자살 재시도하여 끝내 사망하였다. 그 분은 평생 인생의 쓸쓸함에 대해 괴로워하던 사람이었다. 뭔가 머릿속이 복잡하고 한편으론 회피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 [언어의 온도] 책을 펼쳤다.

[심리적 허기는 주변인들의 신뢰와 사랑으로 채우고, 내면의 성찰을 통해 성공이나 명성 이외에 자아를 실현할 수 있는 것을 찾아야 한다.]
내가 만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심리적 허기를 무척 심하게 느끼는 사람들이다. 그것을 자살시도라는 도구를 통해 표현하는 사람들도 종종 만난다. 이들에게 ‘내가 어디 까지 그들의 심리적 허기를 채워줘야 하나’라고 답답해했던 적도 있었던 것 같다. 사실 내가 모든 것을 채워줄 수도 채워주지도 못하면서 말이다. 어쩌면 심리적 허기를 가진 사람에게 심리적 안정감을 느낄 수 있게 옆에서 묵묵히 버텨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마음에 새겼다.

[당신의 고통에 관해 알고 있다고 말하고 싶지 않다. 이해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지도 않다. 그건 기만이다. 우린 늘 무엇을 말하느냐에 정신이 팔린 채 살아간다. 하지만 어떤 말을 하느냐보다 어떻게 말하느냐가 중요하고, 어떻게 말하느냐보다 때론 어떤 말을 하지 않느냐가 더 중요한 법이다.]
이 글귀에 한동안 머물러 있었다. 어느 순간 나는 쉽게 상대방의 고통에 대해 이해한 다고 판단한 적이, 이해하고 있다고 얘기했던 적이 있었다. 그런 나를 돌아보게 하였다. 섣부른 위로보다는 오히려 침묵이 더 위로가 되어줄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기억 하고 또 기억해야겠다.

[그냥 한번 걸어봤다. 퇴근길에 부모는 “그냥 걸었다”는 말로 자식에게 전화를 걸고 연인들은 서로 “그냥 목소리 듣고 싶어서”라며 사랑을 전한다.
“그냥”이란 말은 대개 별다른 이유가 없다는 걸 의미하지만, 굳이 이유를 대지 않아 도 될 만큼 충분히 소중하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후자의 의미로 “그냥”이라고 입을 여는 순간 ‘그냥’은 정말이지 ‘그냥’이 아니다.]
청년들을 만날 때 자살 혹은 자해 시도를 하였을 때 어떤 이유 때문이었냐고 물어보면 “그냥요”라고 대답할 경우가 많았다. 물론 책에서 나온 내용과 지금 내가 경험한 상황이 다를 수도 있겠지만 “그냥요”라는 대답에 조금 더 머물러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상대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식과 기술보다 상대방을 진심으로 알고자 하는 마음이 더 중요하다는 것일 테니깐.

[헤아림 위에 피는 위로라는 꽃. 위로의 표현은 잘 익은 언어를 적당한 온도로 전달할 때 효능을 발휘한다. 짧은 생각과 설익은 말로 건내는 위로는 필시 부작용을 낳는다. ‘아는 행위’는 사물과 현상의 외피뿐만 아니라 내부까지 진득하게 헤아리는 걸 의미 한다. 위로는, 헤아림이라는 땅 위에 피는 꽃이다. 상대에 대한 ‘앎’이 빠져 있는 위로는 되레 더 큰 상처를 주기도 한다. 상대의 감정을 찬찬히 느낀 다음, 슬픔을 달래줄 따뜻한 말을 조금 느린 박자로 꺼내도 늦지 않을 거라고 본다.]

업무가 밀려있어서, 늘 반복되어 특이할거 없는 내담자의 대화라고 나의 속도대로 그들에게 섣불리 위로했던 내 모습을 떠올렸다. 그리고 한 번 더 마음속에 되새겼다. 상대에 대한 앎이 빠진 위로는 되레 더 큰 상처를 주기도 한다는 것. 이것은 꼭 직장에서뿐만 아니라 친구들, 가족들에게도 적용될 것이다.

[인류의 불행 중 상당수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선을 긋는 행위에서 비롯되지 않던가.] 정신과적인 어려움을 가진 사람들은 대부분 사람들을 만나고, 사귀고, 함께 나누는 것을 어려워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그런 경험자체가 다른 사람들보다 적었기 때문일 수 도 있다. 우리는 나와 생각이, 모습이, 행동이, 학력이, 자라온 환경이, 지적 능력이, 지위 등등 나와 다른 사람에게 쉽게 옆 자리를 허용하지 않는다. 내가 직장에서 만나왔던 많은 사람들은 사람을 그 누구보다 만나고 싶어 하고, 관계하고 싶어 하고, 함께하고 싶어 한다. 그렇다면 나는 나와 사람사이에 선을 긋고 있나? 잠시 생각해보았다. 적어도 직장 안에서는 직업의식으로 선을 긋지 않으려고 하지만, 내 삶에서는 나도 의식 하지 못했지만 선을 긋고 살고 있었다. 나와 다른 정치성향을 가진 사람, 다른 배경에서 자란 사람, 가치관이 다른 사람 등등과는 굳이 관계하지 않으려고 했었다. 나의 이 중성에 부끄러워졌다.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직업을 가진 내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선을 긋고 있었으니 말이다. 쉽게 바뀔 것 같진 않지만, 기억하며 살아야겠다. 선을 긋지 않는 사람이 되어 보자고 말이다.

[언어의 온도]라는 책은 매일 아침 업무 시작 전에 조금씩 읽었다. 한꺼번에 다 읽어버리는 게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서 꾹꾹 누르며 아껴서 읽었다. 이 책은 진짜의 나로 살 아야겠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진짜처럼 보이기 위해 꾸며서 어딘가 부자연스럽고 필요 이상 화려한 사람이 아니라 그냥 자연스러운 사람으로 말이다. 일터에서도 나의 삶 에서도 그냥 진짜로 살고 싶다. 그리고 지금보다 나에게 더 따뜻한 언어로 내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다가가라는 메시지를 주었다. 일에 대해 가슴 뛰거나 열정가득 했던 20 대 때의 “나”도 너무 좋았지만 40대인 지금의 “나”에 대해 조금은 천천히, 거짓 없이,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것을 기대하게 된다. 내가 만나는 자살시도자 그들의 모든 자살을 막을 수는 없겠지만 조금 더 따뜻한 사람으로 따뜻한 언어로 그들에게 보통의 존재로 옆에 있어주고 싶다.

장려 김*정 광메카트로닉스공학과 도서: 좋은 디자인의 10가지 원칙
독후감: 하루를 바꾸는 디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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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물건이 좋은 물건일까? 곧 이사를 앞둔 자취생으로서, 그리고 디자인과는 다소 거리가 먼 공학과 학생으로서 미적으로 아름다우면서 사용하기에도 좋은 물건을 알아보기란 하늘에 별 따기 수준이다. 자취생활 n년차인 지금은 물건을 사는 기준이 아주 조금일지언정 생겼지만, 처음 새로운 물건들을 접하던 순간에는 말 그대로 보는 눈이 없었다. ‘이왕이면 예쁘고 귀여운 거’를 외치고 다니던 때를 시작으로, 넉넉지 못한 주머니 사정으로 인해 ‘이왕이면 값싼 거’를 외치기도 했다가, 몇 번 쓰고 나면 누구 보여주기 부끄러울 정도로 칠이 벗겨지거나 헤지는 물건들을 본 이후로는 ‘그냥 쓰기 편한 게 제일’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이제야 느낀다. 세 가지 다 너무 중요하다는 것을. 심지어, 고려하지 못한 요인들이 더 많았다는 것을.
<좋은 디자인의 10가지 원칙>은 말 그대로 좋은 디자인이 가지는 10가지의 원칙을 이야기한다. 1. 좋은 디자인은 혁신이다. 2. 좋은 디자인은 제품을 쓸모 있게 만든 다. 3. 좋은 디자인은 아름답다. 4. 좋은 디자인은 제품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5.좋은 디자인은 지나치게 화려하지 않다. 6. 좋은 디자인은 정직하다. 7. 좋은 디자인은 오래 간다. 8. 좋은 디자인은 마지막 디테일까지 빈틈없다. 9. 좋은 디자인은 친환경 적이다.
10. 좋은 디자인은 최소한의 디자인이다. 각각의 원칙에 해당하는 디자인 제품들을 소개해주는 형식이다. 디자인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도 편하게 읽을 수 있도록 쉬운 표현 들을 사용했고, 이미지가 함께 있어서 직관적으로 어떤 디자인을 이야기하는 것인지 바로 알 수 있어서 좋았다. 그동안은 접해보지 못했던 다양한 디자인들을 접할 수 있어서 재미있었다. 특히 인상 깊었던 디자인 3가지를 소개해보고자 한다.
첫 번째는 라이프 클락이다. 경기도 주식회사에서 일련의 자연 재해들을 겪고 난 후 ‘재난 안전 용품’을 의뢰하여, 산업 디자인 스튜디오 SWNA에서 디자인한 제 품이다. 일상에서 접해본 재난 안전 용품은 탈출용 망치와 소화기, 넓게 보았을 때 화 재 감지 센서나 스프링 쿨러 정도가 고작인 것 같다. 유독 자연 재해가 많았던 올해여서일까. 산불이 번지거나 폭우로 인해 침수되거나 하는 뉴스들을 보면서 안전 용품이 필요할 것 같다는 생각은 했었지만, 뭘 사야하는지부터 조금 막막했다. 마음을 먹고 재 난 용품을 찾다보면 실측 사이즈가 다소 거대하거나, 너무 많은 용품들이 들어가 있어서 사용법조차 알기 어려워 보였다. 몇 가지를 훑어보다, 이내 구석진 창고에 박아두는 아버지의 낚시대 같은 처지가 되어버리진 않을까 싶어 인터넷 창을 끄던 기억이 어렴풋 스쳤다.
그래서 더욱 이 디자인이 인상 깊었다. 작은 사이즈에, 매뉴얼을 비롯하여 ICE 카드나 응급도구들-보온포, 조명봉, 압박붕대, 깃발과 호루라기- 등이 들어있을 뿐만 아니라, 시계의 기능을 가지고 있는 라이프 클락을 보며 정말 사용자의 입장에서 필요 한 물건이라고 느껴졌다.‘어떤 공간에나 필수적인 물건인 시계를 사용함으로써 비상 상황의 가능성을 인지하고, 구명 도구를 집안의 손닿는 곳에 두도록 했다’는 대표의 의도를 읽으면서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사실 재난 대비 물품은 그 사용의 특성상 기능적인 부분이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된다. 하지만 지금 당장 쓰지도 않을, 어쩌면 조 금 안일하게도 재해가 일어나지 않으면 영영 사용하지 않을 재난 ‘대비’ 물품을 구 매하는 일은 선뜻 손이 가지 않는다. 집안에 꼭 필요한 물품인 만큼, 어디서나 필요하 고, 어디서나 눈에 보이는 물건과 접목시킨 아이디어와 의도가 좋았던 디자인이다.
두 번째는 마르크 베노와 앙투안 레쥐르가 디자인한 페스티벌이다. 페스티벌이라는 이름만으로는 예측할 수 없게도, 지팡이이다. 디자이너들은 디자인, 편리함, 인체 공학의 3가지를 핵심으로 뽑는다. 기존의 투박한 지팡이들과 다르게 페스티벌은 가늘 고 단단하고, 모양도 예쁘다. 신발장 옆에 세워놓으면 지팡이가 아닌 장식용 물품처럼 보일 정도이다. 단순히 예쁠 뿐만 아니라, 굴곡, 크기, 손잡이는 개인의 신체와 취향에 따라 조절이 가능하다고 한다. 디자인이라고 하면 지금 당장 내 주변의 것들을 생각했 었는데, 지팡이를 디자인했다는 것을 보고 좁은 세계 하나가 깨지는 기분이었다. 미래의 나에게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한 제품들을 디자인해서 내어놓는다는 생각 자체가 충 격적이었다. 마르크 베노의 경고처럼‘내일 우리는 더욱 늙을 것’이고, 지팡이는 ‘우리가 노인이 되었을 때의 필수적인 동반자’인데도 말이다. 경험해보지 않은 불편함을, 사회에서 발견하고 해결하고자 디자인했다는 행동 자체가 대단하다고 느꼈다.
특히 지팡이를 인체공학적으로 만드려고 노력하는 부분에서, 공학과 디자인의 상관관계에 대해 고민해보게 되었다. 마르크 베노는 수학과 물리학을 공부한 후에 산업 디자인을 공부했다고 한다. 어떻게 수학과 물리학을 공부하던 사람이 디자인을 했 을까. 감탄스러웠다. 공학을 공부하면서 기술적인 부분의 중요성을 배웠지만, 상대적으 로 디자인에 대해 고려해본 적은 거의 없었다. 학문의 경계를 넘나들며 사람들에게 필 요한 디자인을 만들어 낸 점이 멋있었다. 이번 디자인을 접하며 기술력과 디자인의 힘이 합쳐졌을 때 큰 시너지 효과가 나올 수 있음을 배울 수 있었다. 디자인이 우리와 함께 늙어 가야할 동반자임을 느낄 수 있었던 좋은 디자인이다.
세 번째는 아디다스의 3D 프린터로 만든 해양 플라스틱 신발이다. 최근 환경에 대한 뉴스를 많이 보는데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지구는 점점 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병들어가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더욱 아디다스에서 이산화탄소 배출량과 함께 버려진 플라스틱 사용량 줄이기를 제품 생산의 목표라 선언한 것이 반갑다. 해당 운동화는 윗부분은 해양 플라스틱을 사용한 재료로. 중창은 재활용 폴리에스터와 자망을 사용하여 3D 프린터로 출력한 새로운 운동화이다.
바다에 버려지는 플라스틱 쓰레기는 연간 8백만 세제곱미터로 추정된다고 한다. 1분 마다 쓰레기 수거 트럭만큼의 양이 바다에 버려지고 있는 것과 같고, 30년 후인 2050 년에는 무게 면에서 물고기보다 플라스틱 쓰레기가 더 많아질지도 모른다고 한다. 지 금도 바다를 둥둥 떠다니고 있을 해양플라스틱을 수거 및 재활용하여 새로운 제품을 만들어낸다는 시도가 중요하다. 아디다스의 해양 플라스틱 운동화는 효과적으로 해양 쓰레기를 줄일 수 있는 실질적인 해결책이다. 지금 당장 모든 자연환경을 예전처럼 돌 릴 수 없을지라도, 우리 인간들이 오염시켜놓은 자연들을 차근차근히 원래의 모습으로 돌려놓을 수 있는 방안들이 더욱 생겨나길 바라게 되었다. 지구 환경과 우리의 미래에 대해서 고민해볼 수 있는 좋은 디자인이었다.
책을 읽고 나서 주변을 둘러보니 수없이 많은 물건들이 일상을 빼곡하게 채우고 있었다. 눈을 뜬 순간 마주하는 천장의 조명부터 아침밥을 먹던 식기, 앉아있던 의자, 휴지를 버린 쓰레기통, 옷매무새를 가다듬기 위해 바라본 거울까지. 짧은 순 간에도 나열하고자 하면 끝없이 없을 정도이다. 눈을 뜨기만 하면, 하루에도 수백 수천 개의 물건들을 만난다. 어떤 것들은 익숙하게 사용하고, 또 어떤 것들은 조금 불편할지언정 그냥 참고 쓰기도 한다. 단순히 예뻐서 행복하게 해주는 물건도 있고, 자주 사용 하는 것 자체에 의의를 두기도 한다. 너무 편리해서 다음에 또 살 것을 다짐하며 쓰게 되는 물건들도 있다.
우리의 삶은 디자인의 연속이다. 결국 좋은 디자인은 좋은 세상을 만들 것이다. 나는 오늘도, 예전에 사둔 작고 예쁜 머그잔 하나에 물을 담아 마시며 행복을 느낀다. 디자인은 문제점을 개선해주기도 하고, 다양한 사람들에게 더욱 편리한 생활을 제공하기도 하고, 심지어 환경과 더불어 살아갈 방법도 제시해준다.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다 함께 질 높은 삶으로 가는 최고의 해결 방법이 디자인에 있음을 느꼈다. 이미 예쁘고, 편리한 이 머그컵이 환경을 생각한 재료이기 까지 했다면 지금보다 더 행복할 것 같다 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작은 행동이 세상을 바꿀 수 있게 되도록, 세상이 더 아름다워 질 수 있는 디자인들이 많아지기를 염원한다. 나는 앞으로 어떤 물건을, 어떤 디자인을 나의 하루에 채워 넣을 것 인지를 고민해볼 수 있었던 책이다.
장려 이*수 한문학과 도서: 질문하는 미술관
독후감: 대한민국 혐오사회의 현주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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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겐 저마다의 고유한 색이 있다. 밝은 에너지를 내뿜는 사람에겐 유채꽃과 같은 노란색이 떠오르고, 우수에 젖은 눈빛과 쓸쓸한 낙엽이 연상되는 사람을 보면 가을을 상징하는 갈색이 떠오르기도 한다. 이처럼 우리는 그 사람만의 색을 두고 개성이라 표현하며 각자의 매력에 흠뻑 빠져든다.
사람이 고유한 색깔을 지닌 것처럼 그림 역시 ‘색’이 만들어낸 작품이라 말할 수 있다. 빨주노초파남보의 무지갯빛 물감과 무채색의 물감, 종이의 질감과 물과 기름의 농도가 한데 어우러져 하나의 걸작을 탄생시킨다. 이렇듯 그림은 색의 ‘조화로움’을 통해 완성된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사회는 조화롭지 않은 모습을 종종 띤다. 개인이 지닌 색이 강렬하다 보니 주위 사람들과 조화되지 못한 채 자신만의 색을 더 강하게 채색할 뿐이 다. 즉 빨간색을 지닌 사람은 노란색, 초록색, 파란색의 사람과 장벽을 쌓곤 더 붉어지기만 하는 것이다. 하나의 색을 지닌 사람이 지배권을 행사하게 되면 문제는 더 커진다. 그 예로 빨간색의 사람이 한 사회의 주류 집단이라면, 그 외의 색을 지닌 사람은 사회에 동조되지 못했다는 생각에 소외와 외로움을 겪는다. 이와 같은 소수자의 소외와 외로움은 주류집단의 ‘혐오’와 ‘차별’을 통해 더욱 공고해진다. 다르게 말하자 면 서로의 색을 존중하지 못하는 사회는 혐오를 낳고 혐오는 차별과 불평등을 야기하는 데 이르는 것이다.
우리는 이와 같은 문제를 인식하고는 있지만, 뚜렷한 방안을 찾지 못한 채 애써 외 면해 온 듯하다. 책 『질문하는 미술관』 은 우리가 외면한 혐오와 차별의 현실을 직시하게 함과 동시에 사회의 고질적인 문제를 새로운 시각으로 전달한다. 이 책만의 차별 성이라고 한다면 사회문제를 다룬 시중의 서적과 달리 세계적인 명화를 소개하고 재해석함으로써,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성을 나아가야 좋을 지를 이야기한다는 점에 있다. 그 예로 밀레의 <이삭줍기>를 빈부의 노동 측면에서 해석하고 있으며, 반 고흐의
<감자를 먹는 사람들>에 등장하는 가족의 도란도란한 모습을 통해 식사의 경건함을 잃어버린 ‘먹방'(폭식 방송)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이처럼 『 질문하는 미술관 』 은 우리 사회의 문제를 차별, 혐오, 불평등, 위선, 중독, 환경오염 등의 8가지 갈래로 나누고 그 분류를 토대로 명화 속의 함의를 낱낱이 파헤친다. 필자는 그중에서도 대한민국에 만 연한 차별과 혐오의 모습을 작품과 결부시킨 부분이 인상 깊었다. 이를 중심으로 우리 사회의 모습을 다시 돌아봤다.
우선 필자는 ‘혐오’라는 단어를 들으면 가장 먼저 남성 혐오와 여성 혐오가 떠오른 다. 특히 여성 혐오는 꽤 오래전부터 존재했던 개념이었던 것 같다. 책의 첫 작품으로 소개된 그리스 로마 신화 속 <메두사>가 그 예시다. 오비디우스의 《 변신 이야기 》 에 는 메두사라는 여인이 등장한다. 그는 아름답다는 이유로 포세이돈에 의해 성폭력을 당했을 뿐만 아니라 흉측한 얼굴을 가진 괴물로 변하고 만다. 성폭력 피해자가 오히려 ‘괴물’이 되는 순간이다.
이는 비단 신화 속 이야기가 아니다. 2018년과 2019년 대한민국에는 미투 운동이 사회적으로 큰 물결을 일으켰다. 정치, 사회, 문화계를 막론하고 많은 여성들이 자신의 아픈 경험을 꺼내며 세상에 울분을 토했다. 이들의 목소리는 억압과 차별의 성적 문제 를 사회의 수면 위로 떠오르게 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었다. 그러나 이들의 용기는 ‘꽃뱀’이란 단어로 치부되어버리기도 했다. 이들의 아픔을 공감하지 못한 사람들은 오히려 성폭력 피해자가 남성을 유도한 것이라며 피해자에게‘꽃뱀’이라는 이름을 달았던 것이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펜스 룰’을 만들어 여성-남성의 경계를 가시적으로 확인시켜줬을 뿐만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한남’, ‘꼴페미’등으로 부를 정도로 혐오가 극에 달한다.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공감은 온데 간데 없고 모두에게 상처만이 남은 듯한 모습이었다. 필자는 이 현상을 지켜보며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모든 남 성이 그렇지 않다’는 이유로 피해자의 아픔을 외면하는 모습과 여성이 그간 ‘김치녀’ 등으로 불렸단 이유로 똑같이 ‘김치남’이라 부르는 모습이 좋아 보이지는 않았 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장면은 2020년의 오늘까지 연출되고 있다. 언론마저도 자극적인 기사 제목으로 남성과 여성의 싸움을 부추긴다. 과연 남성과 여성 혐오는 멈추어질 수 있을까. 이미 곪아버릴 대로 곪아버려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순간에 봉착해 있는 듯하다.
성별에 대한 혐오만큼 기득권의 차별과 혐오가 만연한 모습은 성소수자에게도 나타난다. 성소수자는 흔히 동성애를 한다는 이유로 ‘에이즈의 원흉’이라 뭇매 맞는 것 이 현실이다. 그러나 과거에는 동성애가 오히려 자연스럽고 당연한 모습으로 여겨졌다. 그리스 신화 속 아폴론은 소년 히아킨토스를 사랑했으며 <정원의 사포와 에리나>에 나 오는 여성들은 레스보스섬에 모여 여자들끼리의 사랑을 만끽했다. 남성 또는 여성의 동성애가 아주 자연스러운 ‘사랑’의 한 형태였던 것이다.
반면 2020년의 대한민국에서 성소수자로 살아남기는 매우 힘들다. 이는 최근에 코로 나19로 일어난 이태원발 집단감염에서 확연히 드러났다. 한 확진자가 이태원의 게이클 럽을 다녀왔다는 이유로 ‘성소수자는 문란하다’며 비난의 대상이 됐던 것이다. 언론 역시 여기에 가담해 ‘게이클럽 다녀온 확진자’ 등으로 헤드라인을 뽑으며 확진자의 성적 지향을 비난하는 듯한 행보를 보였다.
대부분의 선진국이라 불리는 나라들은 동성결혼을 합법화했을 뿐만 아니라 이들의 인권이 ‘보통으로 여겨지는’ 이성애자와 동등하게 보장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러나 우리나라는 퀴어퍼레이드조차 사회에 혼란을 줄 수 있을 것이라는 추측으로 허가 하지 않은 경우가 있을 뿐더러 <차별금지법>에 ‘성적 지향’이 조항에 속해있다는 이 유로 제정에 어려움을 겪는다. 이처럼 대한민국 사회 속 성소수자는 자신의 성적지향을 존중받지 못한 채 벽장 속에서 자신의 아픔을 감내하고 있다. 혐오와 차별의 시선 속에서 이들이 존립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속히 우리의 고정관념이 깨질 필요가 있을 듯하다. 이성애자가 서로를 사랑하는 것처럼 성소수자의 사랑이 아주 자연스럽고 당연한 모습으로 자리잡길 바란다.
마지막으로 주목해 볼 혐오의 형태는 ‘노인 혐오’다. 이는 청년에게 두드러지게 나타난다는 점에서 고민해볼 필요가 있을 듯하다. 렘브란트는 <자화상>을 매해 그림으로써 자신이 늙어가는 모습을 가감 없이 기록했다. 그의 마지막 <자화상>은 피부색을 잃어버릴 만큼 자글자글한 주름이 얼굴을 뒤덮고 있긴 하지만 담담한 모습이 느껴진 다. 렘브란트의 <자화상>처럼 인간이라면 이미 노인이 되어 있거나 앞으로 노인이 될 것이다. 즉 모두가 나이를 들어감에 따라 신체적으로 ‘노화’라는 변화를 겪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노인을 탐탁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본다. ‘틀딱충’, ‘꼰대’등 이 대표적인 단어다. 이는 결국 세대 간의 갈등을 양산하고 혐오를 부른다.
특히 코로나19로 취업시장에 한파가 불어오면서 청년들의 마음은 더 팍팍해진 듯하다. 최근 감염지로 꼽혔던 사랑제일교회, 광화문 집회 등의 감염자 중 노인이 많다는 이유로 ‘노인 포비아’가 더 횡행해진 것이다. 노인이 자신의 옆자리에 오는 것을 꺼 리고 무서워하는 현상이 그 예다.
통계청의 분석에 따르면 2025년에 대한민국은 고령 인구가 전체 인구의 20% 이상을 차지하는 초고령 사회에 돌입할 가능성이 높다. 초고령 사회가 도래하기 전에 모든 연령 의 사람이 조화롭게 살 수 있는 사회가 마련되길 바랄 뿐이다.혐오의 세 형태를 중심으로 우리 사회의 현주소를 살펴보았다. 성별 혐오, 성소수자 혐오, 노인 혐오 외에도 혐오의 장면은 곳곳에서 목격할 수 있다. 난민, 다문화 가정, 장애인, 어린 아이(노키즈존)에 대한 시선까지. 혐오는 우리 사회에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다. ‘혐오는 차별을 낳는다’는 저자의 말처럼 혐오는 개인의 감정에 그치지 않고 사회의 날 선 행동양식으로 어쩌면 또 하나의 반문화적 형태로 남게 된다.
마르틴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인간은 공동 존재로 ‘공동 사회’ 속에서 존재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야 한다. 나 홀로 살 수 있는 사회는 지구의 탄생 이래로 찾기가 어려울 정도다. 서로에 대한 격렬한 미움 대신 고유의 자아와 개성을, 그 사람의 색을 존중해주는 것이 어떨까.
다가오는 2021년의 대한민국은 혐오사회가 아닐 수 있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장려 정*민 예술문화영상학과 도서: 포스트 휴먼
독후감: 지금 현재를 살아가는 인간, 현재완료적 존재 포스트휴먼을 들여다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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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포스트휴먼이라는 단어는 미래지향적이지만 구체적으로 파악되지 않는 단어였다. 최근 각종 미디어에서 앞으로 AI시대, 미래 시대를 어떻게 살아나갈 것인가? AI시대에는 인간만의 감성적인 영역에 주목해야한다! 등의 소식을 접한 나로서는 지금 과는 다른 생활방식과 사고방식이 필요하겠구나 하는 생각은 들지만 그것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는 몰랐고 그것이 궁금했기 때문에 이 책을 읽게 되었다. 그리고 각각 현재와 현재완료로 지금의 인간과 포스트 휴먼을 비교한 이유는 이 책의 포스트휴먼에 대한 생명과 죽음에 대한 관점 때문이다. 현재완료는 무수히 많은 영어시간에 배웠던 것처럼 과거의 일이 현재에 영향을 미쳐 계속 이어진다는 개념이다. 이 개념이 포스트 휴먼에게 어떻게 적용이 될까? 지금부터 책을 통해 알아볼 것이다.
이 책은 포스트휴먼 시대로 나아가기 위해서 우선 지금까지의 고전적 휴머니즘과 현대 사회의 문제점들을 성찰하고 이를 해결할 수 있는 이론들을 제시한다. 이 책의 결론부터 말하자면 저자는 포스트휴먼 시대를 맞이하기 위해서 생명체를 역동적이고 발생적인 힘인 ‘조에’로, 인간을 넘어 정의한 후 이들이 사는 유토피아적 세계를 기획해보자고 주장한다. 또한 지금까지의 인간중심주의가 인간과 자연을 이분법적으로 나누었던 것에서 탈피하여 종횡단적인 사회를 상상해보자고 주장한다. 이 저자의 주장은 지금의 사회가 어떤 점에서 비인간적인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고전적 철학이 어떤 점에서 문제인지,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 지금의 기술 발전은 어디까지 도달했는지를 통해 파악할 수 있다.< 포스트휴먼 사회의 생명정치적 차원에 대해서>우선 저자는 지금 우리 시대의 비인간적인 측면에 집중한다. 우리 시대의 비인간적 측면은 살아있는 모든 것을 과학적이고 경제적으로 통제하고 상품화시키기 위해 투자하고 그로써 이익을 얻는 생명정치적 차원이다. 동물의 경우를 먼저 살펴보자면 동물 매매이다. 고대부터 동물은 인간을 위한 노예로 고된 노동에 이용되었고, 인간의
사치품으로 이용되었다. 또한 오늘날 그들은 화장품 산업, 제약 산업 등을 위해 동원되고, 돼지와 쥐 같은 동물들은 인간을 위한 장기를 생산하기 위해 유전자가 변형된다. 이렇듯 동물들은 생명으로서 존중받기보다는 일종의 상품으로 전락해버렸다. 동물 및 식물, 다른 무생물들에게 인간의 열망을 투사하는 데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
인간 역시도 마찬가지이다. 각종 다이어트, 성형, 미용 산업, 유전자 검색 등 인간의 몸 역시 산업화된지 오래다. 또한 개인의 유전공학정보, 신경정보, 매체 정보에 대한 각종 데이터가 오늘날의 진짜 자본이 되어 수많은 산업에서 인간의 라이프 채굴에 뛰어들고 있다. 인간의 몸에 대한 정보는 시민 사회에서 그리고 테러와의 전쟁에서 즉각 작동할 수 있는 감시기술이다.
이렇게 현재 자본주의의 생명정치적 차원이 우리 시대의 비인간적인 측면이다. 이러한 생명정치적인 사회는 인간중심주의를 바탕으로 작동되기 때문에 그 문제는 더욱 커진다. 고전적 휴머니즘은 휴먼을 백인의 남성성, 정상상태, 젊음과 건강이라고 정의하며 백인이 아닌, 남성이 아닌, 젊지 않은, 건강하지 않은, 신체에 장애가 있는 사람 들을 타자로 간주하며 이들을 정상성의 바깥으로 내몰게 된다. 그래서 저자는 인간중심적이고, 젠더화되고, 인종화된 관점에서의 전환을 시급하게 요청한다. 왜냐하면 이러 한 관점은 결국 모든 생명체를 정상, 비정상 범주로 나누게 되고 어떤 집단들의 건강한 삶이 건강하지 못한 이들과 퇴화된 존재들의 죽음을 이끌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생명정치적 차원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심층 생태학적으로 접근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심층 생태학은 총체성을 되살리고 지구 전체를 하나의 신성한 유기체로 보자고 제안하는 지구중심적 이론이다. 따라서 소비주의와 기술 문화를 강하게 고발한다. 그러나 이러한 기술 혐오는 이미 기술이 지배하고 있는 이 세상을 사는데 크게 도움이 되지 않을뿐더러, 역설적으로는 자연과 문화를 이분법적으로 나누게 된다. 또한 인간과 인간이 아닌 존재들 사이에 등장하는 유대 맺기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며 환경을 인간화시키는 문제가 있다.
또한, 동물권 운동가 및 에코 페미니스트들이 인간을 위험에 빠진 종으로 부정적으로 재구성하는 방향 역시 바람직하지 않다. 이들은 오늘날 전지구적 환경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 보편적인 휴머니즘 가치들로 복귀해야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휴머 니즘으로 복귀한다고 해도 성별, 인종 등이 바탕이 되는 권력 격차 문제는 해결되지 않으며, 차이와 배제는 새로운 형태로 재생산되게 된다. 예를 들어 선진 유전공학 자본 주의에서 유전자 정보를 알 수 있는 사람들은 한정적이기 때문에 이는 결국 배제와 차 이로 이어진다. 그러므로 저자는 이러한 휴머니즘에 기초해서는 포스트휴먼 시대를 맞이할 수 없다고 본다.
따라서 저자는 주체가 이미 규범이 되어버린 전통적 가치들에 대해 ‘거리를 두고’, ‘낯설게 바라보면서’, 스스로의 위치를 근본적으로 재설정할 것을 요청한다. 즉, 앞으로의 포스트휴먼 주체들은 일원론을 바탕으로 의식적으로 자신을 낯설게 바라보며 다수의 타자들과 상호작용을 하자는 것이다. 일원론은 스피노자에서 비롯되었으며, 이 원론과 반대되는 개념이다. 따라서 인간과 자연을 구분해서 생각할 것이 아니라 종을 횡단하며 다수의 타자들과 상호작용하자는 의미를 포함한다.
또한, 낯설게 하기 방법론과 더불어 포스트휴먼시대로 나아가는데 도움을 주는 현 시대의 철학이론들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그것은 바로 각종 동물, 식물, 무생물의 권리에 대한 논의와 식민주의, 페미니즘 등에 대해서다. 각종 생명체에 대한 논의는 생명체로써 그들의 삶의 방식을 존중하기 위해 필수적인 논의이다. 식민주의와 페미니즘 이론은 현재 우리 시대의 대규모 재난 및 범죄에 대해 비판적 이론을 제공하고 고통과 상처를 치유하는 기능을 수행해왔다. 소수민족, 장애, 비유럽문화 등에 대한 연구는 낯설게 하기 방법론을 실천하는 철학들이다. 그러므로 저자는 이들 철학이 현재의 인간중심적 사회에서 벗어나 사회적 변화를 이끄는데 도움을 준다고 본다.
이렇게 저자는 일원론을 바탕으로 생명을 역동적이고 발생적인 힘인 ‘조에’로, 인간을 넘어 정의한다. 생명체를 생기 있고 자기 조직적인 물질로 보는 것이다. 들뢰즈 는 이 생기 에너지를 거대한 동물이자 우주적 기계라고 말한다. 이 ‘조에’ 개념이 저자가 앞으로의 포스트휴먼 시대를 바라보는 데에 있어 중요한 개념이다. 그리고 생명에 대한 물질적 개념이 유전공학을 만나면서 유전자 정보가 불평등하게 제공되어 차별을 만들게 된다는 것이 포스트휴먼 조에 정치학의 비인간적, 비인도적 측면이다. 유전자 정보는 개별 주체의 신체가 없이도 통계적 수치와 각종 데이터로 파악될 수 있기 때문 이다. 그렇기에 내가 나의 신체정보에 대해서 모른다고 해도 데이터와 이를 관리하는 사람은 알 수 있게 되며, 사회 시스템은 퇴화되었다고 판단되는 존재들을 죽음을 이르게 한다. 이 점이 우리가 유의해야 할 포스트휴먼 시대의 비인간적 측면이다.
그리고 저자는 유전공학과 인간 및 생명체의 신체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오늘 날 몸을 가진 인간의 신체는 시각적 관찰의 대상이 아니며, 시뮬레이션화 되고 내적으로 분열되어 정신분열증적이 되었다. 즉,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신체로써의 중요성은 이미 없어진지 오래고 우리의 신체 마저도 마치 가상현실을 구현한 것처럼 현실을 대체하고 있는 이미지가 신체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장 보드리야르는 원래 대상을 제1의 시뮬라크르, 존재하는 대상을 모방한 것을 제2열의 시뮬라크르라고 하였다. 그리고 원본 없는 이미지가 현실을 대체하고 현실을 지배하는 것을 제3열의 시뮬라크르라고 하였다. 즉, 이 제3열의 시뮬라크르가 인간의 신체 개념에도 적용이 된 것이다. 이렇게 신체는 유령과 같은 잠재적 시체가 되고, 유전공학과 관계를 맺은 신체는 글로벌 경제 시스템에 포획된 시각적 상품으로 재현되고 관리된다.< 포스트휴먼 사회의 죽음정치적 차원에 대해서 >따라서 앞으로 맞이할 사회에서 살아있는 것들의 생명정치적 관리는 종 횡단적이고 조에 주도적일 뿐 아니라, 본질적으로 죽음과 연결되어있게 된다. 생명권력은 죽 어감의 관리를 포함하며, 생명의 통치 문제는 멸종의 문제도 포함한다. 이미 우리 시대 에는 영원한 젊음이라는 사회적으로 강요된 이데올로기가 있는 한편, 다른 편에서는 안락사와 조력자살이 벌어진다. 또한 합법적인 약과 불법적인 약이 모두 유통되면서 자기파괴와 유행에 따른 행동의 경계를 흐린다. 하지만 저자는 이렇게 대립되는 행위들을 ‘살아있는 모든 것을 상품화하는 정치경제와의 상호작용과 그에 대한 저항이 규범 중립적으로 표현된 것으로 보자’고 제안한다. 이는 ‘생명자체’의 정치시대에 살아있 기와 죽어있기의 사회적 관계가 변화했음을 보여준다.
또한, 저자는 이제는 기존의 휴머니즘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인간의 죽음을 부정 적으로 바라볼 것이 아니라 죽음을 생성적인 과정의 또 다른 단계로 바라보아야한다고 주장한다. 기존의 휴머니즘에서 자기애적인 인간이 나의 현존재 없이도 생명이 계속된 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다. 따라서 ‘나’ 혹은 어떤 ‘인간’을 중심에 가지고 있
지 않은 생명을 생각해야하며 이에 정면으로 대면해야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기술적 매개의 규모와 그 정교함은 죽음의 개념을 모순적으로 만든다. 예를 들면 원격 관찰자들이 벌이는 기술에 기반한 전투다. 이 전투는 조종자들이 사무실 에 앉아서 한순간에 원하는 표적을 죽음에 이르게 한다. 이렇듯 인간의 취약성을 증가시키는 기술이 발전하면서, 죽음은 새로운 살인기술의 위협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럼에도 저자는 새로운 사회적 감수성으로 각양각색의 죽어가는 방식들에 대해 더 열심히 연구해야한다고 말한다. 죽어가는 방식을 연구하는 과정에는 당연히 폭력과 질병, 가난, 사고와 전쟁, 재난, 지속되는 정치적 폭력 및 정의로운 전쟁에 대해서 논의하는 것이 포함된다. 이러한 죽음정치적 접근은 우리 시대의 주체들이 어떻게 상호작용을 하고 어떻게 서로 죽이는지, 즉 우리 시대의 복잡성과 끔찍함 둘 다를 바라볼 수 있다.
이렇게 각양각색의 죽음을 연구해야하는 이유는 죽음은 인간만의 특권이 아니기 때문이다. 포스트휴먼 관점에서 생명의 비인격성을 강조하는 것은 죽음의 비인격성을 강조하는 것과 연결된다. 기존 휴머니즘적 관점에서는 인간은 죽음이 있기 때문에 삶에 충실해야한다고 보았다. 하지만 포스트휴먼 시대의 인간은 죽을 운명이므로 죽음 은 우리의 타임라인을 구성하는 ‘하나의 사건’이며, 이를 한계로 바라볼 것이 아니라 죽음은 ‘현재완료적’으로 ‘이미 발생한 것’으로 바라보아야 한다고 본다. 즉, 죽음에 대 한 관점에서 포스트휴먼은 생명과 죽음을 하나의 이어지는 현재완료적 상태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포스트휴먼을 함축적으로 나타내는 키워드라고 생각한다. 즉, 죽음이 공포와 두려움의 원천이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실존의 선조건이며, 미래의 선조건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삶을 소유하지 않고, 자신을 생명체에 잠시 머무르는 방문객으로 이해해야하는 것이다. 이는 죽음이 있기 때문에 인생을 더욱 열심히 살아 야한다는 죽음에 대한 휴머니즘적 사고방식과는 아주 반대지점에 있는 것이다. 생명은 본질적으로 자신을 표현하고자 하는 욕망, 결국 엔트로피 에너지로 작동하는 욕망이며, 자신의 목적을 다하면 사라진다. 결국 인간이 열망하는 것은 우리 자신 의 생명공간에서 각자의 스타일대로 사라지는 것이다. 이는 허무주의적 관점이 아니라, 죽는 것은 우리의 본성이고 자신의 죽음의 형태를 스스로 만드는 것이 우리의 가장 깊 은 욕망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저자는 포스트휴먼 죽음 이론은 결여가 아닌 풍요로움 과 넘쳐흐름이라고 말한다. 즉, 죽음에 대한 논의에서 저자가 말하는 진정한 의미의 ‘비인간적’인 측면이 무엇인지가 분명해지며, 현재완료적 존재라는 의미가 분명해진다.< 결론 및 현재완료적 포스트휴먼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이렇게 저자는 포스트휴먼 시대의 생명과 죽음은 함께 가는 것이며, 생기론적이고 물질적인 생명, 조에가 생명체의 개념을 대신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또한 각종 유전공학 및 기술의 발전으로 포스트휴먼 조에 사회로 가는 과정은 필연적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사회의 긍정적인 관점에 더욱 주목하자고 한다. 지금까지 각종 미디어 에서는 기술이 지배한 비인간적 사회의 암울한 미래를 보여주고, 그러한 사회를 탈출 하는 디스토피아적인 모습을 많이 보여주었다. 특히나 영화 <아일랜드>, 드라마 <블랙 미러>가 대표적이다. 하지만 이와는 반대되는 관점의 이 책을 보고 앞으로 포스트휴먼 사회의 명과 암에 대해 균형을 잡을 수 있었다. 분명 이 책이 제시한 내용과 기존의 미디어가 제시한 기술지배 사회의 모습 모두가 현실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미래에 대한 모습을 정교하게 그려보는 시도를 한다는 점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또한 저자는 적극적으로 전통적 휴머니즘 개념을 해체시키고 비인간적인 사회 가 어떨 것인지를 그려보고 있다. 나는 이것이 내가 전공시간에 배웠던 포스트모더니 즘 개념과도 유사하다고 생각한다. 미술사적으로 포스트모더니즘 개념을 정의할 때는 이것이 모더니즘, 즉 근대 사회에 반발하고 대항하는 것인지, 모더니즘 이전으로 돌아 가자는 것인지, 모더니즘을 계승시키는 것인지 등에 대해 학자들 간 의견이 분분하다.
이를 바탕으로 보면 인간을 생기론적 물질적 조에로 정의하는 저자의 주장은 기존 휴먼 개념에 반발하는 개념이라 볼 수 있다. 따라서 저자의 의견에서 우리가 주목해야할 점은 기존 근대적 관습의 폐해를 적극적으로 이야기한다는 점이다. 전통적으로 정상성 규정에서 벗어난 자들에 주목하고, 기술적으로 이미 연결된 사회에서 더욱 더 넓은 개념의 생명체들끼리 어떻게 연결되고 상호작용할 것인지에 주목했다는 점에서 지금의 우리 사회에 큰 의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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