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도서관 독후감 공모전

2018.11.18

선정도서 10종 250권
참가대상 부산대학교 학부생(재학생)
참여방법 도서관 독후감 선정도서(1인 1책, 선착순)를 수령 후 자유롭게 독서하고 해당 도서의 독후감 제출
참여기간 2018년 9월 10일 ~ 10월 20일
시상내역 총 8편(부산대 총장상 및 도서관장상, 총상금 160만원)

※ 본 사업은 ACE+의 예산을 지원받아 운영되었습니다.

우수 독후감 선정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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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 이름 학과 선정도서/독후감제목 보기
최우수 김*훈 고고학과 도서: 우연의 설계
독후감: 우연의 설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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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을 일주일 앞둔 어느 날, 웬일로 힘이 솟아 밤늦게까지 시험공부를 이어나간다. 새벽 1시 무렵이 되어서야 피곤에 절어 평소 꼬박꼬박 맞추던 알람도 깜빡한 채 단잠에 빠져든다. 아침나절, 힘겹게 언덕길을 오르는 오토바이 소리에 운 좋게 잠에서 깬다. 부랴부랴 외출 준비를 마치고 정류장으로 뛰어가니, 때마침 마을버스가 모습을 드러낸다. 뜀박질에도 불구하고 강의실에 5분 늦게 도착했지만, 다행히 교수님 역시 늦게 들어와 출석체크를 놓치지 않는다. 정신없이 하루를 보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목, 피자집 유리창 너머로 3년 넘게 보지 못하였던 고등학교 동창을 마주친다. 집으로 향하는 버스에서는 이상형에 가까운 이성이 옆자리에 앉는다. 기분 좋게 버스에서 내려 아파트 주차장에 들어서니 곧바로 빗방울이 바닥을 때린다.’
의식하지 않는다면 기억에 남지도 않을 평범한 일상처럼 보이지만, 그 면면을 들여다보면 놀랍도록 많은 우연이 연속되어있다. 깜빡하고 맞추지 않은 알람과 같이 스스로에서부터 기인한 우연에서부터, 많은 빈자리 중 굳이 옆자리를 차지한 이상형과 같이 타인으로부터 기인한 우연, 실내에 들어서기 무섭게 쏟아져 내리는 빗방울과 같이 그야말로 자연스럽게 일어난 우연에 이르기까지, 무엇 하나 우연이 아닌 것이 없어 보인다. 영화나 드라마가 아니고서야 하루라고 하는 짧은 시간 동안 이처럼 많은 우연이 일어난다는 것이 가능하기나 할까? 하지만 놀랍게도 그 답은 ‘가능하다’이다. 위의 상황들이 영화나 드라마가 아닌, 바로 내가 직접 경험한 하루라는 사실이 그것을 증명해준다. 심지어 먼 과거의 특별한 어느 날도 아닌 바로 어제의 일이다. 어떻게 이러한 일이 가능한 것일까? 이 모든 것이 단순한 우연일까? 아니면 누군가 의도적으로 나의 삶의 개입한 것은 아닐까? 이러한 생각들에 빠져 있다 보면 마치 <트루먼 쇼>의 트루먼이 된듯한 착각에 휩싸이기도 한다. 하지만 더욱 놀라운 점은 누구나 이러한 하루를 겪을 수 있다는 것이다. 아마 의식적으로 하루하루를 되짚어 본다면 이러한 우연들이 일어나지 않는 하루를 찾는 것이 더 힘들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모두 결국 누군가의 트루먼인 것일까? 마크 뷰캐넌을 비롯한 사회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이 ‘우연’에 관해 한 이야기들을 엮은 책, 『우연의 설계』는 이러한 의문점들을 다루고 있다. 우주의 탄생에서부터 지금 이 순간에 이르기까지 ‘나’라는 존재가 얼마나 많은 우연이 겹쳐진 결과인지, 지난주 당첨된 로또 당첨자가 얼마나 큰 우연을 겪은 것인지, 저녁내기 가위바위보에서 이기려면 무엇을 내야 하는지, 더 많은 행운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 모든 것을 읽고 난다면 아마 우리는 앞서 느꼈던 의문점들에 대해 나름대로 합리적인 답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그 자세한 내용을 알아보기에 앞서 ‘우연의 설계’라고 하는 제목에 대해 살펴보자. ‘우연’이란 사전적으로 ‘아무런 인과 관계가 없이 뜻하지 아니하게 일어난 일’이라는 정의를 가진다. 그리고 ‘설계’란 ‘계획을 세우는 행위 또는 계획 그 자체’를 의미한다. 이러한 점을 생각해본다면 ‘우연의 설계’라고 하는 제목은 대단히 모순적이 아닐 수 없다. 우연은 설계될 수 없고, 설계된 순간 그것은 우연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저자는 왜 이렇듯 오묘한 제목을 사용한 것일까. 사실 책의 원제목은 ‘우연의 설계’로 번역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는 ‘Chance’라는 한 단어이다. 그리고 이 ‘Chance’는 우리나라 말로 ‘기회’, ‘가능성’, 그리고 ‘우연’으로 번역할 수 있다. 책의 원제를 내용과 관련지어 직역하면 ‘우연’ 정도로 해석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그런데 왜 역자는 여기에 더하여 ‘설계’라는 말을 덧붙인 것일까? 정확한 의도는 알 수 없지만, 책을 다 읽고 난다면 그러한 이유를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여러 파트로 나누어서 설명하고 있지만, 이 책은 기본적으로 우연으로 보이는 현상들이 왜 일어난 것이며, 그러한 우연이 또다시 일어날 확률이 얼마나 될지를 분석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실제로 많은 우연들이 그러한 방식을 통해 분석이 되었으며, 이러한 분석들은 우리 일상 속에서 충분히 이롭게 사용될 수 있다. 즉, 하나의 ‘우연’가 ‘기회’나 ‘가능성’으로 비추어질 수도 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해 볼 때, 역자는 ‘우연’이 어떻게 ‘설계’되어 있는지를 파악함으로써, ‘우연’을 ‘기회’나 ‘가능성’으로 바꿀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우연의 설계』라는 책이 우주의 탄생부터 시작하여 우리가 겪어온 수많은 우연들을 어떻게 풀어나가고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우주의 탄생은 양자 요동의 불규칙성 속에서 우연히 시작되었고, 무분별하게 일어난 초신성 폭발과 적색거성이 만들어낸 빛과 열로 태양계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어쩌다 지구의 궤도에 걸려든 운석 조각으로 인해 달이라는 위성이 조성되었고, 즉흥적으로 일어난 행성들의 핀볼 게임으로 지구에 생명체가 탄생할 환경이 조성되었다. 또, 아미노산이라는 조그만 벽돌들이 원시 지구의 다이너마이트 같은 에너지 폭발에 우연히 단백질이라는 집이 되었으며, 이와 비슷한 과정으로 핵산 분자들이 변이와 복제를 거쳐 DNA와 RNA가 되었다.
수많은 우연 속에서 탄생한 단순세포들이 복잡한 진핵세포로 나아가는 것에는 역시 크나큰 우연이 작용하였다. 진핵세포는 단순한 유기분자에 비해 막대한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막대한 덩치를 유지하고, 무엇인가 기능하기 위해서는 당연한 과정일 것이다. 그렇다면 진핵세포는 이러한 에너지를 어떻게 수급할 수 있게 되었을까? 약 20억 년 전, 한 세포가 다른 세포를 포획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포획당한 세포는 살아남기 위해 에너지 생산과 복제를 위해 필요한 요소를 제외한 나머지를 벗어던졌고, 하나의 소형 발전기로 진화하게 되었다. 오늘날 ‘미토콘드리아’라고 부르는 이 세포는 숙주세포에게 막대한 에너지를 제공해주었고, 숙주세포는 마음껏 덩치를 부풀릴 수 있었다. 그 결과 복잡한 생명체가 탄생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놀라운 점은 한 세포가 다른 세포를 포획한 사건이 약 40억 년의 지구 역사 동안 단 한 번만 발생하였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큰 우연인가!
아직 ‘나’라는 사람이 되기는커녕 인류의 탄생에도 도달하지 못하였지만, 이미 셀 수 없는 우연들이 겹치고 겹쳐졌다. 최초의 진핵세포에서 새로운 종이 분화하고, 그러한 계통수가 갈라져 유인원 단계까지 도달하고, 6가지의 극적인 변화로 인간이라는 존재가 탄생하고, 마침내 ‘나’라는 존재가 되고. 뒤이어 일어날 우연들까지 생각한다면 ‘나’는 그야말로 0에 수렴하는 확률을 뚫고 존재하게 된 셈인 것이다. 시간을 한 뭉텅이 잘라내어 우주의 탄생으로 돌아가 재생 버튼을 누른다면, ‘나’는 다시 존재할 수나 있을까? 만약 재생 버튼을 누를 때마다 시간이 매번 새로운 경우의 수를 향해 내달리도록 설정되어있다면, 몇 번을 되돌려야 다시금 ‘나’라는 존재로 되돌아올 수 있을까? 아마 영원에 가까운 반복 뒤에야 그러한 순간이 올 것이다. 어쩌면 영원히 도래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나’라는 존재는 그만큼 극적인 우연이 만들어낸 결과물인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극적인 우연은 아이러니하게도 필연을 떠올리게 만든다. 누군가의 의도가 개입되지 않고서 이러한 우연이 연속될 수 있단 말인가. 인간이 ‘신’이라는 존재를 떠올리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할 결과일지도 모른다. 전지전능한 ‘신’의 존재야말로 ‘나’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가장 간단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신’을 등장시킴으로써 자신을 증명하려고 든 것은 아니다. 물리학과 수학이라는 조금 더 복잡한 방법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물리학은 세계의 질서에 관한 여러 이론을 내놓았으며, 수학은 확률과 통계로써 그것들을 보완하였다. 그 결과 앞서 설명한, 우주의 탄생에서부터 인류의 탄생에까지 이르는 거대한 설계도가 완성되었다. 비록 설계도가 너무 탄탄해 보여 일부 과학자들은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 담긴 정보 속에 생명의 탄생에 호의적인 내재적 편향이 존재한다고 믿기도 하였으나, 신에 대한 도전이 시작된 것이다.
현대에 접어들어 한층 발전한 물리학과 수학은 결국 이 공고한 체제를 무너뜨리는 것에 성공한다. 양자역학과 무작위성, 카오스이론, 결정론은 신의 의도가 끼어들 틈을 완전히 메워버렸으며, 신의 역할을 축소하는 결과를 낳았다. 신의 권위는 한없이 추락하였고, 그 피조물인 인간 역시 무한한 안배 끝에 만들어진 존귀한 존재가 아닌 우주의 탄생과 동시에 결정된 수많은 경우의 수 중 하나에 불과하게 된 것이다. 일리야 프리고진의 표현을 빌리자면, “신은 이미 모든 것이 적혀 있는 우주 역사책의 페이지나 뒤적거리는 문서 보관 담당자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렇다면 이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어제의 그 많은 우연들은 다 무엇이었을까? 책의 내용에 따르면 내가 그러한 우연들을 겪을 수 있었던 것에는, 좀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그러한 것들을 우연이라고 여길 수 있었던 것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정확한 예측을 가능하게 할 정보들을 파악하지 못하였기 때문이고, 둘째는 내가 그것들을 우연이라고 믿고 싶었기 때문이다. 습도와 바람, 구름의 상태 등을 완벽히 파악한다면 비가 언제 내릴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으며, 내가 실내에 들어서지 않았더라도 그 순간이 되면 비는 쏟아졌을 것이다. 단잠을 깨운 오토바이는 사실 매일 그곳을 다니며, 배차 간격이 10분 밖에 되지 않는 버스가 정류장에 도착한 순간 모습을 보일 확률은 생각보다 높다. 우주와 인류의 탄생 역시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어마어마한 경우의 수가 존재하지만, 결과적으로 그 경우들 중 하나는 반드시 발생한다. 우리는 그 결과물에 불과하다. 혹스가 “일이 다 벌어진 다음에 전체 과정을 뒤돌아보면 마치 놀라운 일련의 사건이 벌어졌던 것처럼 보이기 마련입니다.”라고 말했듯, 그리고 또 우리가 그 주인공이기 때문에 우리의 역사가 한층 특별해 보이는 것뿐이다. 많은 과학자들이 “모든 자연은 그대가 알지 못하는 예술일 뿐이며, 모든 우연은 그대가 보지 못한 방향이며, 모든 불협화음은 이해하지 못한 화음이다.”라는 알렉산더 포프의 말에 공감하는 것이 단순한 우연은 아닐 것이다.
미국의 유명한 SF 소설가인 테드 창의 소설 『당신 인생의 이야기』를 보면, 한 사람의 인생 전체의 내용을 담고 있는 책에 대한 이야기가 언급된다. 누군가 만약 그 책을 보게 된다면 책의 중간쯤에서 『당신 인생의 이야기』를 읽고 있는 자신이 등장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고, 자신이 어떠한 삶을 살아갈지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는 조용히 그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처음 이 소설을 읽고 느낀 것은 정말 기발하고 흥미롭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우연의 설계』를 읽고 난 지금 그러한 감상은 바뀔 수밖에 없었다. 과학이 우리에게 일깨워준 사실들을 생각해본다면, 이것이 단순한 흥밋거리만은 아니지 않을까?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
기술이 발전해나감에 따라 우리가 우연이라고 믿고 있던 많은 것들의 인과 관계가 밝혀지고 있다. 양자적 존재들만큼은 완벽한 무작위성이 지배하는 영역 속에 존재한다고 하지만, 더욱 기술이 발달하면 그마저 사라질지도 모른다. 통계론과 확률론은 우리의 미래를 예측 가능한 무수히 많은 경우의 수로 정리해 놓았다. 우연의 종말은 점점 가까워져 오고 있으며, 어쩌면 일상생활에서 우연은 이미 종말을 맞이한 것일지도 모른다. 아인슈타인의 말처럼 물리법칙에 주사위 놀이란 없는 듯 보인다. 심지어 우연을 상징하는 주사위 놀이마저 주어진 힘과 방향만 정확히 측정할 수 있다면, 그 결과를 예측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어쩌면 어느 깊은 골짜기에 ‘신’이 문서 보관 담당자로 일하는 허름한 도서관이 있고, 그 한구석에 『당신 인생의 이야기』가 꽂혀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 책을 읽고 나니 뭔가 세상의 큰 비밀 하나를 깨달은 듯한 기분이 든다. 책의 내용은 잘 응용해, 주어진 정보들을 잘 이용할 수 있다면 ‘우연’을 ‘설계’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만은 아닐 것이다. 로또의 번호를 다 맞추지는 못하더라도 보다 많은 상금을 받을 수는 있을 것이고, 가위바위보로 저녁을 쉽게 얻어먹을 수도 있을 것이며, 스포츠복권을 통해 반드시 돈을 딸 수도 있을 것이다. GPS에서부터 책 추천에 이르기까지 여러 기술이 등장해 우리 삶의 모든 것을 정확하고 예측 가능하게 만들고 있다. 언뜻 편리하게만 보이는 삶이다. 하지만 그러한 삶을 과연 행복하다고 할 수 있을까? 모든 것이 결정되어 있고, 그것들을 알고 있다면 우리의 삶은 더욱 나아질까? 사람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적어도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세계를 이해하기를 원하지만 이해하게 된다면 뜻하지 않았던 사건으로부터 얻는 즐거움이 사라져버릴 것이다.
세상에 우연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우연이라고 믿는다면, 나에게 우연은 일어난다. 실제로 우연을 받아들일 준비가 된 사람들이 더 많은 우연을 느끼는 것처럼. 물론 그러한 우연이 항상 좋은 결과를 낳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때때로 우리를 고통스럽게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한 우연으로부터 오는 즐거움이, 심지어는 고통이 우리 스스로를 인간이라고 느끼게 해주는 것은 아닐까? 세계라는 거대한 기계의 톱니바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보다, 차라리 우연을 바라고 즐거움과 고통을 감내하며 사는 것이 인간답지 않을까?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우리는 잠시나마 주사위 놀이에 몸을 맡겨도 괜찮지 않을까? 나는 설령 『당신 인생의 이야기』가 눈앞에 주어지더라도, 페이지를 넘겨보지 않을 것이다.
우수 임*현 재료공학과 도서: 엔지니어 히어로즈
독후감: 엔지니어 히어로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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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렸을 때부터 영웅들을 많이 동경했다. 같은 사람이지만 특별한 능력이나 재능을 가져 남들과 다른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숙명이 부럽고 멋있어 보였다. 그들이 하는 모든 행동은 혁신 그 자체였지만 그들이 겪는 외로움과 괴로움은 그들의 능력에 비해 사소해 보였기 때문이다. 이 책 제목을 보고 대단한 재능을 가져 성공한 엔지니어들을 복잡한 전문용어로 ‘특별함’을 자랑하는 책일 것 같아 읽고 싶지 않았다. 혹은 같은 사람으로 태어났지만 그들은 가졌고 나는 가지지 못한 재능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내 첫인상과 달리 책 내용은 쉬웠고 공학적인 내용보단 그들이 겪은 삶을 설명한 자서전에 가까웠다.
저자가 이 책을 쓰게 된 이유는 엔지니어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엔지니어들 스스로의 자긍심을 높이기 위해서였다. 인터넷이 활성화되면서 청소년 인기 장래희망은 연예인이 되었다. 그 외에 만화가, 작곡가, BJ 등 엔터테인먼트에 관련된 직업이나 공무원 등이 주를 이뤘다. 공무원은 부와 명예보단 사회적 불황에 따른 안정적인 직업에 대한 바람이 투영된 직업이기 때문에 납득이 됐지만 연예인은 리스크가 큼에도 뛰어들 만큼 왜 그렇게 매력적인지 궁금했다. 나도 내가 여건이 된다면 연예인 되고 싶단 생각을 했고 단순히 화려한 삶 때문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복권에 당첨되면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지만 우리 또래에서 복권을 주기적으로 구매하는 사람을 찾긴 힘들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왜 엔지니어는 다른 직업에 비해 매력이 없게 느껴질까?”에 대한 이유를 생각해봤다. 첫째로는 엔지니어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저자가 이 책을 쓴 이유와 같다. 한국 정서는 다른 문화권 보다 학문에 비해 기술을 얕잡아 보는 경향이 강하고 기술을 다루는 공학자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다. 기술보다 학문을 중시하는 현실은 대학 진학률이 한국에서 유독 높은 것이 이를 간접적으로 대변하는 증거라고 생각한다. 공과대학에 사람들이 입학하지만 실제로 그들이 열광하는 것은 대학교 이름(수능 성적)과 취업하는 기업 이름(돈)에 열광하는 것이지 엔지니어 그 자체에 대한 인식이 높다고 말하기 힘들다. 이는 결국 기술이 아니라 학문(수능 성적)에 대한 인식의 반영이라고 생각한다. 나 또한 사회가 열광하는 직업을 따라 공대에 진학했다.
두 번째는 접근성이다. 장래희망을 정할 때 우리가 생각하고 그릴 수 있는 직업을 선택한다. 초등학교 때 장래희망을 써낼 때 다른 친구들이 적어낸 직업 중 생각나는 직업은 태권도 사범님, 축구선수, 선생님, 프로그래머, 만화가, 의사, 회사원 그 외에 가족들이 가지고 있는 직업이나 유행하는 웹툰에서 본 직업을 써낸 아이들이 많았다. 여기서 느낀 공통점은 우리가 간접적으로나 막연하게 상상하고 경험할 수 있는 직업들을 적어냈다는 점이다. 이는 가족이나 TV 속에서 쉽게 접하고 동경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내가 멘토링을 하면서 만난 중학생들에게 꿈을 물었을 때 물리치료사, 댄서, 만화가, 프로그래머 등이 있었고 딱 한 명 요트를 수리하거나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했고 이 직업 명칭은 조선공학자였다. 이 학생의 아버지는 배에 관련한 직업을 가지고 계셨다. 따라서 관심 분야가 공학자와 일치하는 경우는 수능을 준비하는 한국 사회에서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가 접하는 공학자는 아인슈타인이나 스티브 잡스 정도이다. 현실에서 공학자라는 직업의 심리적 거리는 우리와 아인슈타인 정도의 거리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그를 특별한 천재이며 대단하게 생각하지만 그를 동경하는 사람은 찾기 힘들다. 따라서 보다 보면 정든다는 말처럼 직업의 접근성과 매력도는 크게 기여한다고 생각한다.
나도 공대에 입학했지만 학문에 대한 큰 열의도 없었고 이 직업이 참 난해하고 멋없는 직업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대학원 진학을 준비했고 면접장에서 떨어졌다. 사실 전문연구요원으로 인한 군 면제와 진학을 원했던 대학교 이름, 박사 학위에 뒤따르는 명예가 멋있어 보여서 지원했었다. 참으로 어리석고 바보 같은 판단이었지만 그 당시에 별다른 꿈이 없었고 막연하게 취업을 목표로 했기 때문에 돈이나 사회적 지위에 관심이 갔고, 돈을 크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아서 이러한 판단을 했었다. 학과에 관심이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대학원 지원 당시에 과에서 1등이었고 당연히 학점이 좋았다. 그리고 나는 학부 연구생도 하면서 어느 정도 공학적인 능력을 갖춘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대학원 면접장에 들어서면서 나는 능력을 갖춘 사람이 아니라 시험을 잘 본 사람이라는 것을 느꼈다. 이 책 속 화낙 기업의 경영이념인“다능(多能)은 군자의 수치(羞恥)다.”라는 말을 읽을 때 누군가 내 가슴을 찌르는 것 같았다. 내 대학생활은 관심분야가 없었고, 아니 애초에 찾을 생각이 없었고 학점을 잘 받을 수 있을 것 같은 ‘전공 선택’을 골라들었다. 그리고 학부 연구생 연구 주제는 최신 트렌드에 벗어난 주제였고 관심 분야 밖의 연구 주제였지만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해 지원했었다. 그 외에 동아리 활동, 대외활동도 많이 하고 누구보다 열심히 지냈지만 모든 활동에 연관성이 없었다. 그리고 시험 기간이 아니면 전공에서 최대한 멀어지려는 듯 독서도 철학이나 심리학 관련 책을 주로 읽었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느꼈지만 애써 외면하며 대학원에 합격하여 훗날 보상받길 바랐다. 돌이켜 보면 나는 공대생이지만 열심히는 살고 싶었고 하지만 공대가 너무 미워서 최대한 공대생이 아닌 것처럼 살고 싶어 하는 사람 같았다. 어쩌면 이 책을 처음 읽기 싫어했던 이유가 엔지니어라는 단어가 불편해서 읽기 싫었을지 모른다.
이 책을 읽고 나서 나는 그동안 공학자는 특별한 사람만 될 수 있고 나는 재능이 없어서 될 수 없다는 생각을 내면에 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 열등감 때문에 학교 공부는 도리어 악착같이 하곤 “왜 나는 아무것도 만들지 못하는 거지”라고 늘 한탄했던 것 같다. 책 속 다이슨은 “엔지니어는 학위나 논문이 아니라 문제 해결을 위한 정신 상태”라고 말한다. 내가 했던 건 학위 획득이었지 문제 해결이 아니었다. 그리고 독후감을 쓰면서도 나는 공학자와 회사원을 달리 생각했다. 기업에 들어가서 제품을 개발하는 것도 공학자인데 회사원은 기업의 톱니바퀴, 부속품과 같은 부정적인 말들을 많이 듣다 보니 기업에 들어가는 건 삶을 포기하는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이 책을 읽는 내내 저자는 끊임없이 나에게 “너도 할 수 있어.”, “네가 생각하고 있는 것과 달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학창시절 성적이 좋지 않아도, 대학원을 가지 않아도, CEO가 되지 않아도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든다는 엔지니어적 마음만 있다면 가능하다고 외치는 것 같았다. 책을 읽으면서 공학자에 대한 인식도 개선됐고 공대생임에도 멀게 느껴졌던 엔지니어가 한 발짝 가까워진 것 같다. 공학자라는 직업이 가치 있고 멋있는 직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자는 “혁신은 중요해 보이지 않는 자잘한 개량이 쌓이고 쌓여서 발생되며, 단지 사람들이 그 중간 과정은 보지 않고 결과에만 열광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그래서 “대부분 사람들이 끝까지 가지 못하고 포기한다.”고 한다. 먼저 상황에 따라 수동적이었던 나를 반성하고 앞으로 내가 무엇을 할지 다시 생각해봐야겠다고 느낀 대목이었다. 그리고 스탠퍼드 대학교수인 세바스찬 쓰룬은 “연구논문을 쓰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실제로 만들어 상용화해야 세상을 바꿀 수 있다.”라고 말했는데, 학점이나 논문 수에 연연하는 것이 아니라 실용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부분이었다. 엔지니어 정신에서 “어려운 일은 즉시 하고, 불가능한 일은 시간이 조금 더 걸려서 한다.”라는 부분은 포기하지 않고 어떻게든 해내는 것이 공학자에게 중요하다고 느꼈다. 그리고 이 책은 여러 공학자들을 통해서 공학자가 가져야 하는 정신들을 배울 수 있는 책이었다. 수업시간에는 “공학은 과학과 달리 실용적인 학문이다.” 혹은 “Cost 감소를 위한 경제적인 학문이다.”라고만 배우지 공학자가 어떤 생각을 가져야 하는지는 배우지 않았다.
이 책은 엔지니어에 대한 인식 개선이나 흥미 유발 보다 엔지니어로써의 마음가짐을 배울 수 있다는 점이 나에게 더 힘이 되고 가치 있게 다가왔던 책이었다. 그리고 한국 입시제도에서 취업이 잘 된다는 이유로 혹은 수능 성적에 맞춰서 공대에 진학한 학생에게 가치 있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우수 화*민 의예과 도서: 우연의 설계
독후감: 우리는 우연에 관해 얘기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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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삶에 관해 얘기할 때, 우연의 역할을 결코 빼놓을 수 없다. 사람들은 인간의 자유의지가 갖는 가치를 강조하며 우연의 존재를 애써 무시하려 하지만, 여전히 우연이 우리 삶에 끼치는 영향력은 실로 막대하다. 개인의 진로나, 살면서 겪는 다양한 사건들이 우연의 간섭 아래 있음은 물론이고, 우주의 탄생부터 시작해서 지구라는 이상적인 환경의 조성, 생명체의 탄생, 그리고 고등생물의 출현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을 모두 우연의 산물로 인정하는 시각도 존재한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존재 수준에서 이미 우연에 큰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막상 우연에 관해 본격적으로 이야기하고자 하면 우리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된다. 첫 번째로는 “우연”이라고 하는 말이 실제로 무엇을 가리키는지가 불분명하게 느껴지기 때문이고, 두 번째로는 우연은 통제 불가능한 것이므로 그것을 논의하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바로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었고, 그래서 우연에 관해 얘기하는 것은 떠들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소모적인 화제에 불과할 뿐이라고 여겼었다. 또한, 우연이 내 삶에 끼치는 영향을 인지하면서도 그것을 별로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대입 시험, 좋은 사람들과 친구가 된 일, 그리고 면접에서 합격한 일 등 내가 성취해왔다고 여기던 사건들을 우연의 산물이라고 인정하는 건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요소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는 건 망망대해에서 표류하는 기분만 불러일으킬 것이고, 나는 그와 같은 막막함을 느끼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이 책을 처음 집어 들었을 때, 나는 상당히 방어적인 태도였다. 책의 내용이 무엇이든 그것을 받아들일 생각이 별로 없었다. 다만, ‘우연히’ 우연에 관한 책을 읽게 된다는 사실이 재미있다는 생각으로 읽기 시작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책을 읽는 동안 나는 깊은 감명을 받았고, 어린 시절 대학생 형, 누나들이 캠퍼스 생활에 관해 들려줄 때 느꼈던, 알지 못한 세계에 눈을 뜨는 그 기분을 내내 느낄 수 있었다. 왜 내 생각이 이토록 급격하게 바뀌었는지 설명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 책의 구성 방식을 소개할 필요가 있다.
책의 내용에 관한 간단한 정보를 들었을 때, 상술한 거부감 외에도 책의 완성도에 대한 상당한 우려 혹은 불신이 있었다. 이처럼 광범위한 주제를 다루는 경우, 지나치게 지엽적인 부분에 집중한 나머지 처음의 목적성을 잃어버리거나, 혹은 너무 광범위하게 접근한 끝에 두루뭉술한 암시만 잔뜩 던지는 것으로 만족하는 경우가 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책은 훌륭한 접근 방식으로 나의 우려를 불식시켰다. 우연에 관한 여섯 가지 대주제 아래 핵심적 논의들을 빠짐없이 포함 시켰고, 각각의 대주제를 다시 서너 가지 단계로 분할 함으로써 어떤 논의도 놓치지 않고자 하였다. 또한, 23명에 이르는 각 분야의 전문가에게 할당한 영역의 서술을 맡김으로써 각각의 소주제에 있어서 서술의 충실함도 이루었다. 덧붙여서, 이렇게 방대한 주제와 다수의 집필진이 참여하는 상황에서 긴밀한 유기성을 끌어냈다는 점에서는 뉴사이언티스트지의 기획력에 감탄을 보낼 뿐이다.
기술적 뛰어남을 차치하고서도, 이와 같은 구성이 갖는 함의는 꽤 의미심장하다. 특히 이 책이 과학도서로서 이 같은 서술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동료 과학자 간의 검토와 경쟁으로 만들어내는 객관성과 합리성이 현대 과학의 가장 큰 장점이자 본질이라는 점을 떠올려보자. 이 책에 참여한 다수의 저자는 어떤 공통의 결론을 도출하지 않으며, 그러기 위해 애쓰지도 않는다. 그러나 그들이 각자의 분야에서 최선을 다해 집필한 조각조각이 모여 큰 그림을 이루고, 그 결론 없는 그림을 바라보는 우리는 일종의 진리에 더 가까이 다가섰다고 느끼게 된다. 이는 실제로 과학이 진리에 접근하는 방식을 보여주는 것만 같다. 다시 말해, 이 책의 형식은 과학자 정신과 긴밀한 연관을 가진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과학이 무엇인지, 과학적인 물음이란 어떤 것인지 나는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내가 갖고 있던 회의주의가 얼마나 게으른 것이었나 하는 것을 자각하게 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저자들은 그야말로 치열하게 자신이 아는 바를 털어놓고 있었고, 그들 이전의, 또 이후의 수많은 과학자가 마찬가지의 열정으로 진리에 다가가고자 애쓸 것이다. 그 열정 앞에서 나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내가 그러했듯, 질문하기를 멈춰서는, 진리에 가까워질 수 없다. 진리란, 단지 복잡한 방정식을 풀어서 얻은 명쾌한 답 뿐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보다 사실은 질문을 던지는 행위가 이미 과학이고 알지 못하는 것에 다가가고자 애쓰는 태도가 과학이며, 서로의 말에 귀 기울이는 것이 과학이다. 그리고 그게 실제로 인류의 앎이 진보해온 방식이었다. 이 지점에서, 불분명한 것들에 관해 얘기하길 꺼리고 무용하다고 치부했던 나의 판단이 도전받았다. 나는 내 오만한 태도를 반성할 수밖에 없었다.
예를 들어 보자. 우연이라는 말이 정확히 무엇을 가리키는가? 인간이 해독할 수 없는 복잡성을 우연이라고 하는가, 아니면 우연이란 본질에서 무작위적인 것인가? 이에 관해서는 이 책에서도 언급되는, 역사적인 논쟁이 존재한다. 우연이란 없으며 우리가 해독할 수 없는 복잡성이 있을 뿐이라는 과학계의 전통이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양자역학이 태동함에 따라 우연의 중요성과 그 존재에 대한 변론이 다시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수백, 수천 년에 걸친 논쟁 끝에도 우리는 여전히 우연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그렇다면 인류가 우연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수행해온 많은 탐구와 논쟁들은 모두 무의미했던 것인가? 그렇지 않다. 내가 알고 있는 범위의 경계를 찾아내는 것, 내가 무엇을 얘기할 수 있고 무엇을 할 수 없는지 구별하는 것. 내가 무용하다고 생각했던 그 일들이 사실은 과학의 본질이다. 성취보다 중요한 것이 앎을 향해 다가가려는 인류의 순수한 열정과 태도라는 게 내가 지금 가진 결론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동굴에서 불을 피우고 살던 생활을 벗어나 오늘날 비행기를 타고 태평양을 건너갈 수 있게 만든 원동력이다.
이제 우연에 관해 질문해야 할 당위는 정립되었다. 우리는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질문해야 한다. 그러나 이 당위는 지극히 학문적인 당위이다. 조금 더 실용적인 질문을 해보자. 우연에 대해 아는 것이 나의 작은 삶에 도대체 무슨 쓸모인가? 나는 어쨌든 그것을 통제할 수 없을 것이 뻔하지 않은가? 이것은 내가 책을 읽으며 스스로 곰곰이 생각해보았던 질문이고, 숙고하는 가운데 중요한 통찰을 하나 얻었다.
나의 대답은 다음과 같다. 설령 당신이 우연을 통제하지 못할지라도 당신은 그것을 못 본 척하는 대신 그 존재를 포용하는 삶의 태도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Elephant in the living room이라는 영어 표현이 있다. 거실 한 가운데 코끼리가 있는데, 도무지 그것을 어떻게 처리할지 엄두를 낼 수 없어서, 코끼리가 마치 존재하지 않는 듯이 못 본 체한다는 뜻이다. 나의 태도가 바로 그랬었다. 우연이 그토록 비대하게 내 삶에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었다. 그것을 인정하는 순간 나는 내 집의 거실이 우연이라는 코끼리에게 무단점령되었다는 사실에, 그리고 내가 그것을 쫓아낼 수 없다는 사실에 한없는 무력감을 느끼게 될 것이 불편했다.
그러나 사실은 우연을 그렇게 취급해서는 안 된다. 코끼리를 못 본 체한다고 코끼리가 사라지는 게 아니듯이 말이다. 우연 역시도 내가 딛고 살아가야 할 발판이고, 그것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회피는 어떤 건설적인 결과도 만들어낼 수 없다. 세상을 인과와 노력 같은 키워드만 가지고 설명하려 애써서는 안 된다. 대자연의 어머니가 우연이라는 이름 아래 사정없이 던져대는 삶의 비극 앞에 우리는 ‘우연’이라는 단어를 빼놓고 도대체 어떤 대답을 할 수 있는가? 두려운 마음이 들 때도 진실을 똑바로 바라볼 것. 거창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내가 반성 끝에 내린 결론이다. 게다가 진실을 똑바로 응시할 때, 우리는 분명히 더 나은 해법을 찾을 수 있다. 이 책의 마지막 장은 우연을 통제하는 방법에 대해 제안하고 있는데, 통계학, 수학, 심리학과 같은 학문의 도움을 받으면 당신이 상상치도 못한 방식으로 우연에 개입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그렇다, 다시 한번, 우리가 앎을 추구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여기까지가 내가 책으로부터 얻은 깨달음이다.
마지막으로 덧붙이고 싶은 말이 있다. 이 책은 과학이 대중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할지를 보여주는 모범적인 예라는 것이다. 현대사회에 들어서면서 과학은 점점 더 복잡해졌고, 교양 수준의 지식으로 최신의 과학 결과물을 이해하는 것은 정말로 불가능해졌다. 대중 교양 수준을 모든 과학 분야의 원리를 이해하는 데까지 끌어올려야 한다는 주장은 전혀 현실성이 없고, 반대로 자신이 사는 세계와 문명에 한없이 무지한 채로 남는 것 또한 답이 될 수 없음은 명백하다. 그 점에서 이 책은 훌륭한 해결책을 제안한다. 이 책은 양자역학, 통계학, 카오스 이론 등 평범한 사람의 지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이론들과 현실 속 우리 삶의 접점을 포착한다. 그리고 이론의 A부터 Z까지를 설명하는 대신, 우리가 궁금해하는 물음에 대해 이론이 갖는 함의를 알려준다. 가령, 자유의지가 무엇인지, 인간은 진화의 산물인지와 같은 물음들은 단지 과학자들의 연구주제가 아니라 태곳적부터 우리의 조상들이 끊임없이 제기해왔던 물음이며, 철학적 과제이고, 우리 모두의 개인적인 숙제이기도 하다. 대중은 과학의 모든 결과를 이해할 수 없고 그것이 필요하지도 않지만, 이렇게 ‘우연의 설계’가 훌륭하게 해내고 있듯이, 최신의 과학적 성취가 내 삶에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 전달해줄 중개자가 필요하다.
장려 성*국 불어불문학과 도서: 아이언맨 수트는 얼마에 살 수 있을까?
독후감: 아이언맨 수트는 얼마에 살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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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대 도서관 독서력 UP 독후감 공모전을 통해서 좋은 책을 접하게 되어서 감사합니다. 본 책을 비롯한 다른 다양한 책들이 많이 있었지만, ‘아이언맨 수트는 얼마에 살 수 있을까?’라는 매우 인상 깊고, 흥미로운 제목을 보고, 이 책을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호기심이 별로 없는 탓에, 이러한 질문을 평소에 거의 하지 않습니다. 누군가 질문을 하게 되면 그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것이 일상이었습니다. 이 책의 제목은 정말 흥미롭고, 관심이 가는 질문이었습니다. 영화 <아이언맨>을 흥미롭게 보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지, 이것을 경제 지식과 접목해 생각하다니, 정말 신기하고 놀라웠습니다. 제목이 이렇게도 흥미롭고, 놀라운데, 책의 두께를 보아하니, 이 질문 이외에도 다른 흥미로운 것들이 가득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망설임 없이 이 책을 선택했습니다.

예상대로 아이언맨 수트는 얼마에 살 수 있을까? 하는 질문 외에도 ‘빙하 타고 온 둘리는 누구에게 차비를 내야 할까?’,‘토르와 헐크는 왜 힘을 합쳐야 할까?’, ‘놀부는 흥부를 보고 왜 배가 아팠을까?’ 등 정말 흥미로운 질문과 답들이 있었습니다. 어렸을 적부터 지금까지 들어보거나, 읽어봤음 직한 이야기들에 대한 경제학적인 접근, 정말 참신하고 흥미로웠습니다. 고등학교 3학년, 대학교 2, 3학년 때 경제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그때 수업으로 접근한 경제는 무척이나 어렵고 딱딱했습니다. 그래서 경제학에 대한 흥미도가 떨어졌습니다. 그래도 시험을 치고, 평가를 받아야 했기에 공부를 하기는 했으나, 시간이 지나고 머리에 남는 것은 그렇게 많지 않았습니다. 반면에, 이 책은 아기공룡 둘리, 아이언맨, 흥부와 놀부 등 접근하기 쉬운 소재들을 가지고, 기초적인 경제 지식을 알기 쉽게 알려주어서, 흥미도가 매우 높았고, 한 번 읽고 그치는 책이 아니라, 계속 소장하고 있으면서, 반복해서 읽고 싶은 책이었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고등학교 때 배웠던 경제에 대한 개념들이 새록새록 떠올랐습니다. 희소성, 배제성, 경합성, 비교 우위, 외부효과, 인플레이션, GDP 등등 당시에는 한없이 어렵고 외우기 급급했던 개념들이었습니다. 이렇게 재미있게 공부할 수 있는 책이 있었다면 그때 경제를 조금 더 재미있게 느끼고, 더 깊게 공부하지는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기도 합니다. 그만큼 이 책을 읽으면서 경제에 대한 기초지식을 다시금 잡는 좋은 기회가 되었습니다.

24년의 삶을 돌이켜보면, 호기심이 배제된 학습이 다반사였습니다. 주어진 커리큘럼대로, 학습계획표대로 따라가기에만 바빴습니다. 그것마저 힘들다고 느꼈습니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생이 되었습니다. 대학생이 되어도 취업이라는 다음 관문이 기다리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호기심에서 비롯되는 학문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조차 궁금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주어진 대로 열심히 최선을 다해 사는 삶을 살았습니다. 열심히 최선을 다해 사는 부분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그저 주어진 대로’라는 부분을, ‘내가 정말 하고 싶어 하는 일을 찾아’로 바꾸고, 그것을 위해 열심히 최선을 다해 사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 몸은 음식물을 섭취하면 자연스레 그것이 소화되어 영양소를 몸에 흡수시켜 몸의 일부가 되게 합니다. 제가 그간 해왔던 24년간의 학습의 경우와는 다른 것입니다. 그간 제가 해왔던 것은 음식물을 계속해서 섭취만 하고, 소화를 제대로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제가 학습했던 지식들은 망각의 늪을 건너, 소화 기관에서의 소화 과정이 원활히 이루어지지 않아 다수의 것들이, 배설물로 나가는 것이 다반사였습니다. 이제는 이것이 크게 잘못되었음을 진단했습니다. 이 책을 보고 경제에 대한 호기심이 생기고, ‘경제에 대해 조금 더 재미있고, 깊이 있는 공부를 하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처럼, 원활한 소화 과정이 존재하는 학습, 흥미도와 호기심을 정말 자극하면서 진정으로 학습에 대한 열망을 가진 채 이루어지는 학습을 위해 노력하려 합니다.

이 책이 제 생각의 변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유발한 것은 아니지만, 요즈음 이러한 생각이 조금씩 들고 있던 와중에, 그 생각이 더욱 강해질 수 있도록 하는 촉매제 역할을 해주었습니다. 앞으로는 경제에 대해 더욱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려 합니다. 또한, 이 책 이외에도 많은 책이 경제학을 쉽고 재미있게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경제 분야 이외에 다른 분야에도 이 책과 같이 그 분야를 쉽고 재미있게 배울 수 있도록 해주는 책들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생각들을 바탕으로 다양한 책들을 앞으로 읽어 나갈 것입니다.

‘공부는 학창시절에는 하는 것이 아니라 평생하는 것이다.’라는 말을 많이 들어왔습니다. 맞는 말이지만, 그간 학창시절의 공부라 함은 학창시절에 했던 시험치고, 점수내고, 결과에 따라서 보상을 받는 일련의 과정들로만 생각했기에, 공부가 흥미롭게 느껴지지는 않았습니다. 인생 전반에 걸쳐 그것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저 말은 끔찍하게 느껴지기까지 했었습니다. 평생 공부라는 것이 정말 저것과 동일하다면 해내기 힘들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호기심을 가지고, 재미있게 공부가 가능하다면, 평생 공부는 전혀 힘들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찾아야 할 것이고, 다양한 분야의 책을 접하고, 활동을 하면서, 직·간접적으로 그것을 찾을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흥미를 잃지 않기 위해 본 책과 같은 책들을 읽거나, 영상들을 찾아보는 등의 노력을 기울일 것입니다.

비록 부산대학교 도서관 행사를 통해, 단 한 권의 책을 읽고, 독후감을 쓰면서 생각을 정리했을 뿐이지만, 이것이 훗날 인생이 변하는 하나의 큰 지점으로 삼을 수 있기도 하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중간고사가 다가오기에 우선 시험을 재미있고, 지혜롭게 대비하는 방법을 고심하고 실천하러 가겠습니다. 이렇게 좋은 책을 주시고, 책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볼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이러한 행사들이 지속적으로 개최되어서, 많은 사람들에게 변화의 기회를 주는 좋은 행사가 되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장려 이*현 불어불문학과 도서: 그림의 맛
독후감: 그림의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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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책 중 이 책을 고른 이유는 많다. 전공이 불어불문과인데 프랑스가 미식과 미술 분야에서 유명하지만 미식과 예술 분야에 교양이 거의 없다. 미식하면 수요 미식회 프로그램에서 본 것이 다고 미술하면 학교의 과목 이름일 뿐이다. 제 전공임에도 프랑스 예술 관련 얘기가 나오면 한 마디도 끼어들지 못했다. 인터넷에 책 소개를 찾아보니 이 책을 읽으면 한 마디라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골랐다. 고르려고 생각하니 책 제목도 재밌었다. 그림은 보는 건데 그림의 맛은 무슨 뜻일까? 수험생 시절 자주 보던‘푸른 종소리’같은 표현을 여기서 곱씹어보니 기분이 좋지 않으면서도 궁금했다. 미술과 음식의 한 상은 교양이 넘쳐 보여서 느끼할 것 같지만 한번 읽어보면 의외로 잘 맞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어서 꼭 고르고 싶었다.

글을 읽고 나니 현대 미술과 미식의 각각 지식을 읽기 좋게 썰고 구운 요리들을 받은 느낌이었다. 미술과 미식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흥밋거리 기사처럼 쉽고 재밌게 읽었다. 애초에 맛있는 음식을 먹는 거나 좋은 그림을 보는 것에 근본은 즐기는 것이 아닌가? 취향에 안 맞을 수는 있어도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나 음식을 만드는 사람은 결국 작품을 취하는 자의 즐거움을 위하는 것이다. 작가는 요리에 대한 분야도 엄청 겪어보고 이제 미술도 요리만큼 엄청 겪는 중인 것으로 보였다. 그래서 음식과 미술을 같이 엮은 이 책도 즐거움을 위한건지 읽는 내내 재밌었다.
왜 이 이야기를 하냐면 글을 읽는 것을 잘 못해도 이 글은 잘 읽었기 때문이다. 처음에 읽을 때에는 이 글이 무슨 맛인지도 모르고 글을 읽었다. 왜냐면 독후감을 써야하니까 작가의 의도나 글의 구성이 어떤지를 파악해야 하나 싶어 긴장하며 읽었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사실들이나 경험담에도 무언가 놓칠세라 눈에 힘주며 읽었다. 중학교 졸업 이후로 읽은 책이 손가락 총 개수보다 겨우 넘는다. 독후감을 진지하게 썼던 적은 그보다 훨씬 적다. 이제 머리에 남아있는 글을 읽는 방법이라곤 국어 모의고사 문학 지문 읽는 방법과 비문학 지문 읽는 방법이 다였다. 그처럼 읽을수록 책이 힘들었다.
하지만 읽으면서 느낀 것이 글 읽는 태도를 바꾸게 했다. 글에서 설명하는 미술 작품의 제작자나 음식의 제작자는 심오한 의도를 담았을지언정 결국 작품들의 1차적 목표는 취하는 사람의 즐거움이 아닌가? 또한 이 글을 쓰신 분도 책을 읽는 데 딱딱하고 긴장한 마음으로 읽는 시선이 달갑지는 않을 것이다. 결론은 긴장 풀고 재밌게 읽었다는 것이다. 미식이라는 분야도 실은 낯설고 현대미술은 훨씬 더 먼 거리에 있다. 하지만 자꾸 경험담과 쉽게 설명된 글 덕택에 금방 글을 읽게 했다. 독후감을 써야하는 데 이렇게 글을 읽으면 독후감에 뭐라고 써야할지 엄청 걱정했다. 말고도 현대 미술과 미식은 심오할 것 같은데 이렇게 금방 금방 읽으면 뭐가 남는 지 초중반에는 엄청 걱정했다. 이러한 고민들은 반성할 계기를 주었다. 누가 문제를 풀라고 한 것도 아니고 획일화된 답을 찾으란 것도 아닌데 왜 글 읽는 것조차 머리를 싸매며 읽는 지 말이다. 미식과 미술을 체험하러 비싼 5성급 레스토랑을 가란 것도 아니고 원화를 보기위해 유럽으로 가라고 등 떠민 적도 없는데 말이다. 미식과 미술 둘 다 충분히 감상하고 즐기는 여유 속에서 작가의 의도도 생각해볼 수 있고 재료나 제작 방법도 유추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작가는 요리에 대해 잘 나가는 레스토랑을 경영해봤을 만큼 잘 알고 미술도 각종 전시회도 가보고 논문도 읽어서 그만큼 잘 알고 그 전에 매력을 맘껏 느꼈을 것이다. 왜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냐면 미술과 음식의 연결고리 때문이다. 나의 경우 수학에서 처음 보는 문제를 풀 때 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확인하고 구하는 것은 미적분을 필요로 하는지 확률 계산을 필요로 하는 지 따지며 풀었다. 그처럼 미술과 미식의 연결고리도 그 둘을 연결하는 데 현대 미술의 어떤 것과 미식의 어떤 것이 맞는 지 따지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려면 수학을 공부할 때 백 몇 십 페이지의 정의와 원리와 공식을 이해하고 외우고 연습했던 것처럼 미술과 미식의 본질인 즐기는 것을 오랫동안 하지 않았을까? 즐기는 것은 마음의 여유가 있어야 되던데 여유가 부족해서 처음엔 읽기 어렵다고 느낀 것처럼 말이다.
사람들이 미식과 미술을 어렵다고 느끼는 것은 실제로 미적분도 거뜬 해내던 사람들이 그게 정말 내용이 어렵다기 보다는 작가의 의도나 예술의 정도를 느끼기에는 여유가 없던 건 아닐까 싶었다. 왜 다른 사람들은 맘껏 느껴볼 여유가 없는 지는 금방 답을 하기 어렵다. 빈부격차라기에는 이 작가도 어떤 가정에 자랐는지 함부로 말 할 수 없고 어느 정도 사는 집도 미식과 미술에 대한 교양을 천하거나 쓸모없는 것 정도로 여기기도 하니 말이다. 나 자신에 대해 그 이유를 생각해보자면 예술과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에 대한 로망은 있었다. 하지만 직접 접하는 것들은 이 책만큼의 수준의 지식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좋아하는 작품들은 스토리가 좋고 설정이 세세한 만화나 게임이고 좋아하는 음식이나 식당은 고기 음식이나 요즘 인스타그램에서 예쁘게 플레이팅하는 식당이다. 이에 대해 그저 1회성 즐거움은 느꼈지만 곰곰하게 내 취향이나 요즘 세대의 유행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었던가? 없었다. 연결하려 해 본 적도 잘 없었다. 이 책은 레토르트 음식과 레디메이드나 레이디가가 등 어쩌면 접해보았을 것들도 얘기하는 걸 보면 어려운 것은 아닌 걸로 보인다. 이번 독서를 기회로 삼아 마음이 풍요로운 방학에 현대 미술의 해석에 대해 도전할 것이다. 여유가 있을 것이니 현대 미술을 이제는 직접 감상하고 재미를 느낀다면 새로운 취미 분야 개척에 성공한 것이고 실패한다면 왜 현대미술은 어렵고 힘든 분야인지 그거라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인상 깊은 부분은 미술에 관한 설명을 할 때이다. 먼저 다니엘 스포에리의 작품에 대한 이야기에서 먹는 것에 대한 예술에 감명을 주었다. 똥에서 그 이전의 단계인 사람의 위장에서 고기가 소화되는 장면, 그 다음 단계는 사람이 고기를 씹는 장면, 소가 도축되는 장면, 다음은 소가 풀을 뜯는 장면 마지막은 소의 똥이다. 이에 대해 먼저 삶과 죽음이 순환됨을 먼저 생각할 수 있다. 또한 고기를 먹는 것은 보통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데 결과는 똥이 되는 것에 대해 식욕을 비롯한 사람의 욕구에 허무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마지막으로 똥이 풀밭에 있음은 결국 이 순환이 자연의 일부 과정임을 생각할 수 있다. 다니엘 스포에리는 고기의 섭취를 통해 보여주었다. 이 장에서는 처음에 고기의 숙성이나 더 까다롭게 먹는 방법을 설명했다. 이걸 보면서 고기도 이렇게 먹는 다니 소고기 음식이라면 갈비나 갈비탕 정도로 분류하는 나와는 다른 세계라고 느끼면서도 드라이에이징한 고기 먹어보고 싶다고 단순히 느꼈다. 그러나 미술에서는 고기의 섭취에서 삶과 죽음의 순환과 인간의 욕심과 자연을 얘기하는 데서 미술하는 사람들의 통찰력을 더 맛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다 읽고 나서는 처음 이 책에 대해 생각했던 것과 달라 실망한 점이 조금 있다. 모든 장들이 맛과 미술이 끈끈하고 레고 블록 착착 맞추듯 이어진 게 아니라는 점이다. 하지만 미술과 미식에 대해서 재미있고 가볍게 잘 먹었다. 특히 미술 분야는 겉보기엔 이해 못할 괴짜들의 모임이라고 봤는데 세상을 통찰력 있게 보고 자신의 생각을 미술로 표현한 작품들이라고 시선이 달라졌다. 세상은 확실히 예쁘고 고상한 것이 아니며 사람의 의식 속도 괴상한 부분이 많은데 예쁘게만 즐길 수는 없을 것이다. 앞으로 여유가 생긴다면 괴상망측한 현대 미술의 작품 하나라도 오래 감상하며 즐긴 다음 내가 먹은 것이든 아는 것이든 연결해보고 싶다. 적어도 그저 이상한 것이라고 여기지 않고 이해하고 즐기려고 노력하다 보면 한 가지의 새로운 의견은 들을 수 있지 않을까싶다.

장려 강*수 나노에너지공학과 도서: 그녀의 창업을 응원해
독후감: 그녀의 창업을 응원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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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대학교 도서관에서 주최하는 ‘독서력 UP’ 독후감 공모전활동을 위해 책을 받으러갔다. 내가 원하던 3권의 책은 이미 다른 학생들이 들고 갔고 전혀 관심 없었던 분야인 역사와 창업에 관한 책이 남겨져있었다. 대학교에 와서 독후감을 쓸 기회가 전혀 없었던 터라 한 번쯤 써보자고 이미 마음먹었기 때문에 여성 창업에 관련된 책인‘그녀의 창업을 응원해’라는 책을 집어 들었다. 창업에 관한 흥미가 하나도 없었던 나로서는 쉽게 읽어 나가가기에 힘들 것 같았지만 많은 스타트업 여성 대표들의 경험을 통해 인생에 대한 조언을 얻고자 선택하게 되었다. 또한 어떤 아이템으로 창업을 도전하게 되었는지, 왜 회사의 직원이 아닌 창업을 선택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유들도 궁금하여 이 책을 선정하였다.
책을 읽기 전 책의 표지와 뒷면을 살펴보았다. 역시 창업에 관심이 있는 여성분들에게는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은 책이었다. 책 뒷면을 통해 책을 읽지는 않았지만 다양한 창업분야의 스타트업 대표들의 이야기가 있다는 것을 예측할 수 있었고 창업 동기나 퇴사의 이유와 같이 20인의 창업자들의 다양한 사례가 책에 들어가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겉표지에서 아쉬운 점은 책의 출판년도가 2017년, 비교적 최근에 나온 책임에도 불구하고 책의 내용이 여성에 관한 것이기에 표지의 전체적인 색깔이 분홍색이라는 점이다. 지금도 활발히 페미니즘활동이 진행되고 있고 여성과 남성은 성에 의해서 차별받지 말아야 한다는 현대사회에서 여성에 관한 책을 분홍색으로만 나타냈다는 것은 너무 구시대적인 발상이지 않나 싶다. 여성과 남성의 차별은 큰 이슈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사소한 색깔의 구분이 여성과 남성을 무의식 적으로 나누게 되는 것 같아 아쉬울 뿐이다.
나는 보통 책의 내용에 본격적으로 들어가기 전 표지와 뒷면을 살펴본 뒤 이 책을 쓴 저자가 어떤 사람인지 이해하고 책을 읽는 방향을 설정하기 위해 반드시 저자의 글을 꼼꼼히 읽어보는 편이다. 2000년 기준으로 전체 벤처기업 중 여성벤처기업의 비율이 8%에 그치고 있으며 여성이 창업현장에 들어가는 자체가 힘들고 전쟁과도 같은 창업현장에서 살아남기 힘들다고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저자가 책을 통해 하고하자 하는 말은 대한민국 여성들이 도전하고 성취하며 세상의 변화를 주도하는 주체자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책을 집필했다고 한다. 나도 역시 학창시절부터 동료을 이끌고 나가는 리더쉽에 관해 관심이 많아서 반장이나 과대, 동아리 회장 같은 학생회 활동에 많은 참여를 했다. 창업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저자의 글은 나에게 여성 스타트업 대표들이 어떤 방식으로 리더쉽을 발휘하고 있는지 어떻게 리더가 되었는지 등 많은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책은 20명의 대표들의 이야기를 각각의 목차로 이루고 있기 때문에 마치 20명의 단편자서전을 읽는 듯 한 느낌을 주었다. 책 속에는 다양한 창업분야가 나와 있어서 처음 책을 읽을 때는 모든 대표자들의 에피소드를 읽있고 두 번째 세 번째, 책을 반복해서 읽을 때는 내가 관심 있는 분야와 비슷한 창업을 하고 있는 대표자들을 골라서 읽었다. 그 중 지금부터 의미있게 읽었던 3명의 대표자들 이야기를 중심으로 서술해 나가고자한다.
첫 번째로 얘기하고자하는 내용은 두닷두의 대표 심소영님의 에피소드이다. 심소영 대표는 어렸을 때부터 수학을 좋아해 고려대 수학과에 진학했다고 한다. 휴학 후 미국여행 후 실리콘밸리에 관심을 갖게 되어 실리콘밸리에 연수를 가게 되고 그때 만났던 선배와 파트너가 되어 두닷두를 이끌어 가고 있다고 한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다른 과목에 비해 수학과 과학을 좋아하여 공대를 진학했다. 현재 하는 공부가 힘들지만 관심이 있기 때문에 열심히 전공공부에 노력하는 중이다. 하지만 구체적인 목표를 설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공부에 대한 동기부여가 없는 것 같다. 심소영 대표님은 미국여행이 자신의 터닝포인트라고 말한다. 나도 내년 여름 40일동안의 유럽여행을 계획 중인데 이 경험이 나의 터닝포인트가 되어 전공과 연결되는 동기부여를 얻고 싶다는 바람이 있다.
심소영 대표님은 기회를 잘 이용하는 것 같다. 미국여행 후 복수전공을 하던 과에서 실리콘밸리 연수를 두 번이나 떠나게 된다. 물론 떠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을 것이다. 루이 파스퇴르의 명언인‘기회는 준비된 자에게 온다’라는 말이 뇌리를 스친다. 기회가 눈앞에 와도 망설이다가 놓치는 사람도 수없이 많고 준비되지 않아 기회를 잡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기회를 잡기 위한 꾸준한 자기계발이 필수인 것 같다. 나는 나중에 어떤 기회가 올지 모르지만 현재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대단한 목표는 없지만 나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전공공부 외에 발표동아리 활동이라든가 외국어 공부, 독서 등을 하고 있다. 앞으로 특히 영어에 좀 더 치중을 하여 미래를 위한 준비를 해나가야 할 것 같다.
두 번째로 이야기 할 것은 튜터링의 대표 김미희님의 내용이다. 먼저 ‘튜터링’이라는 모바일 앱은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대표자들보다는 친숙했다. 김미희 대표님은 현재 대학교 2학년인 나에게는 꿈의 기업인 삼성전자를 박차고 나와서 창업을 시작했다고 한다. ‘왜 회사를 나왔을까?’라는 의문의 연속 이였다. 김미희 대표님의 말씀으로는 자신의 창의성을 발휘하기에는 조직이 너무 거대하고 답답할 때도 있었다고 한다. 카이스트 MBA과정 중 한 사업모델을 발표했는데 반응이 좋아 창업을 결심하고 사표를 냈다고 한다. 무언가에 확신을 가지고 결정을 내린다는 것이 얼마나 많은 감정적 소모가 있었고 얼마나 끊임없이 생각을 했는지 가늠도 할 수 없다. 나는 작은 일에도 지레 겁을 먹고 망설이다가 기회를 놓친 적이 많은 것 같다. 이 책을 읽으면서 든 생각인데 내가 당시 겁을 먹은 이유는 그 기회에 대한 자신감이 없었던 것이다. 김미희 대표님도 삼성에서 사업아이템을 발표했을 때는 미끄러졌지만 MBA에서는 호평을 받고나서 사업에 확신이 생긴 것 같았다. 뭔가 자신감에 근거가 생긴 것이다. 나도 뭔가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한번 떨어졌다고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도전해서 하고 싶은 일에 대한 자신감의 근거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느꼈다.
근거 있는 자신감이 발휘되는 곳은 바로 파트너를 찾을 때 인 것 같다. 김미희 대표님도 한양대 선배에게 찾아가 창업 파트너를 제안 했지만 대기업에서 나온 후배를 걱정하기만 할 뿐 같이 창업할 생각을 하진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사업에 자신감을 가지고 있던 김미희 대표님은 선배를 충분히 설득했고 현재 튜터링을 함께 설립했다고한다. 자신의 강점이 무엇이고 약점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판단이 되어있었고 자신이 약점인 부분을 채워줄 파트너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결과가 나온 것이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나의 강점과 약점을 잘 정리하고 많은 사람들을 만날 때 그 사람의 강점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을 많이 해야겠다.
마지막으로 논의할 내용은 떼오로의 대표 강혜정님의 에피소드이다. 이 챕터에서는 잊혀 지지 않고 머릿속에서 계속 맴도는 두 가지 문장이 있다. 하나는 강혜정 대표님의 아버지가 말씀하신 ‘너는 얼마든지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 다만 선택에 대한 책임도 네 몫이다.’라는 것과 강혜정 대표님이 말씀하신 ‘거창하게 시작하지 말고 찬찬히 올라 가세요’이다. 이 대표님의 성장배경은 나와 확연히 다르다. 어렸을 때 외국에서 몇 년 동안 지냈다는 사실이 부럽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처럼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에는 저 두 가지 말을 실천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스스로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라고 느낀다. 혹여 그 일이 나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 아닐지라도 뭔가 주어진 일이 있으면 몇 날 몇 일 밤을 새서라도 작업을 마무리한다. 그래서 첫 번째 문장은 지금까지 잘 노력해 오고 있는 것 같다. 두 번째 문장은 항상 생각하지만 잘 지켜지지 않는다. 작게는 시험계획 세우는 것부터 크게는 미래 계획 세우는 것 까지 목표치를 너무 높게 잡다 보니까 목표를 다 달성하지 못하면 스스로 하찮은 존재라고 느껴질 때가 많다. 내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분석을 해서 목표를 어느 정도 잡으면 성취도를 높일 수 있는가에 대한 노력을 많이 해야할 것 같다고 느꼈다.
책에 나오는 대표자들의 공통점은 열정과 노력이다. 뻔하디 뻔한 성공 스토리처럼 보일 수 도 있지만 각자의 사연이 다르고 창업을 하게 된 계기나 방식이 모두 다르다. 책을 읽고 크게 느낀 점은 아무 목표 없이 열심히만 하는 것이 아닌 인생의 구체적인 목표를 세워야겠다는 것이다. 내가 이때까지 한 것은 무엇인지에 대한 것과 나의 가치관에 대해 정리를 하고 앞으로 무엇을 하며 살아갈 것인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필요한 시기인 것 같다. 흔히들 대2병(대학에 진학하였으나 앞으로 내가 무엇을 하고 살아야 되는지 해답을 얻지 못한 상태)이라고 한다. 보통 이런 상태가 대학교 2학년에 많이 분포되어있다 고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여진 것 같다. 내가 이러한 상태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미래에 대한 끊임없는 고민과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한 자기계발을 소홀히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무언가에 열정을 가지고 밤낮으로 미친 듯이 노력한다면 안 될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노력하자. 열심히 살자. 기회를 잡자.
장려 이*재 기계공학부 도서: 역사의 시작은 현재다
독후감: ‘역사의 시작은 현재다’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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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라는 과목은 흔히 암기할 내용이 많다, 지루하다, 재미가 없다 등등의 평가를 받는 과목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를 왜 배우는가, 즉 역사 공부의 동기가 항상 강조되는데 제가 가장 많이 들었던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과거를 알아야 미래를 준비할 수 있다. 이것과 비슷한 내용을 나열해보면 과거를 알아야 똑같은 실수를 미래에 반복하지 않을 수 있다, 과거로부터 교훈을 얻어야 한다, 옛날 사람들의 지혜를 배워야 한다 등이 있습니다. 저는 위와 같은 말에 동의는 하지만 크게 와닿지 않았습니다. 역사를 왜 배워야 하는가에 대한 명확한 답이 나오지 않아서 백범 일지, 세계사를 주제로 한 책등 쉽게 접할 수 있는 책을 찾아 읽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부산대학교 도서관을 통해 이 책을 알게 되어 역사를 보는 시각이 크게 변하였습니다.
이 책은 제가 평소에 읽던 책들과 다른 역사를 다루고 있었습니다. 제가 읽었던 책들은 대부분 세계사, 한국사, 조선시대, 고려 시대 위인 등 역사적 사실에 대해 다루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책은 역사 그 자체와 역사학을 다루고 있었습니다. 책에서 묻는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역사의 정의란 무엇인가? 진정한 역사란 무엇인가? 무엇을 역사라고 할 수 있고 무엇을 역사라고 할 수 없는가? 역사로 포함하거나 배제시키는 기준은 무엇일까? 역사의 정의는 어떻게 변화해 왔는가? 역사 기록의 한계는 무엇이고 우리는 그에 대해 어떠한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그런데 책의 앞부분에서는 권태를 느꼈습니다. 왜냐하면 생소한 내용을 다루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비슷한 말을 반복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랬던 만큼 더 잘 이해하기 위해 느리고 꼼꼼히 읽었습니다. 그리고 중간부터는 여러 가지 예시가 제시되면서 전개되었기 때문에 속도를 내서 읽을 수 있었습니다.
안에는 제가 궁금해하던 진정한 역사의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한 다양한 사람들의 의견 제시되어 있었고, 역사란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서 무엇이 역사가 아닌가를 이용한다는 흥미로운 방법도 제시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가장 인상적이었던 구절은 ‘인간과 관계되는’이었습니다. 그 어떠한 일이라도 인간과 관계가 없다면 역사로 인정받지 못한다는 점이 흥미로웠습니다. 예를 들면 화산 폭발이나 해일과 같은 자연재해도 그 자체로는 역사로 인정받지 못하지만 그로 인해 인명피해가 생기는 등 인간에게 영향을 미치면 역사로 인정받습니다.
주관성과 객관성. 저는 이 책과 이 책을 통해서 다시 한 번 돌이켜본 제 경험의 핵심 두 단어를 선정하라고 한다면 주관성과 객관성을 선택하겠습니다. 제가 항상 고민해왔고 이 책에서 가장 중요시 다루어지는 소재들입니다. 언제나 주관성과 객관성의 경계를 찾아왔던 저에게 있어서 그것은 답이 없는 상황에서 답을 찾는 상황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 이유를 아래에서 설명하겠습니다.
누군가 저에게 학창시절 가장 기억나는 것을 이야기하라고 한다면 고민할 겨를도 없이 ‘인간관계’라고 답할 것입니다. 제가 기억하는 한에서 저를 크게 나누어보라고 한다면 21살 전후로 나눌 것입니다.
21살 전의 저는 글자 그래도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해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요즘에 흔히 화두가 되는 그러한 사람. 남에게 미움을 받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사람. 모두에게 좋은 평가를 받고 싶어 하는 사람. 착하다는 말을 듣고, 칭찬을 들으면 삶의 보람을 느끼는 사람. 그리고 그러면서 점점 자신을 잃어가는 사람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거기에 완벽주의가 더해져 그 누구보다 철저하게 자신을 죽이고 남의 눈치를 보며 남의 평가에 신경 쓰는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그러나 ‘그 일’이 있은 후부터 많은 것이 변화했습니다.
그 일을 요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한 친구와 갈등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재수를 시작하게 되어 갈등을 해결하지 못한 채 8개월이라는 긴 시간을 흘렸습니다. 수능이 끝난 후 그 주말 갈등이 있었던 친구에게 연락을 하였습니다. 화해를 요구하는 저의 의도와는 다르게 예상하지도 못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는 제가 저지르지도 않은 행동에 대해서 책임을 묻고 저에게 도덕적인 비난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너무 당황한 나머지 일단 알겠다고 하고 그가 한 말을 바탕으로 여러 가지를 추론하였습니다. 그 후 관련 있는 친구들을 여럿 만났더니 사건의 경위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제가 그 친구와 갈등이 있은 후 그는 많이 힘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던 때 저와 가장 가까웠던 다른 친구가 그 친구에게 저에 대한 부정적인 말을 건넸다고 합니다. 그런데 저희는 저, 그 친구, 다른 친구를 포함한 무리에 속해 있었습니다. 저와의 소통이 끊긴 동안 그 이야기에 살이 붙고 와전되면서 8개월이라는 긴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러다 보니 8개월 후 저는 무리 안에서 붙잡을 수없이 구제불능이고 흔히 말하는 ‘쓰레기’라는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친구가 저에게 그런 식으로 말했던 것이었습니다.
제 개인적인 추측으로는 그때 제가 들은 이야기와 지금 알고 있는 이야기를 합해보아도 전체 이야기의 빙산의 일부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충격은 아직도 잊히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극단적인 선택을 할 뻔했는데 지금 되돌아보면 정말 아찔합니다. 결과적으로는 건강하지 못한 인간관계를 정리하였고 혼자서 견디고 해결하는 방법을 터득하게 되었지만 길지 않은 인생에서 중요한 터닝포인트였음에는 틀림없습니다.
이러한 일이 있은 후부터 제가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 사실 혹은 진실이란 무엇일까?입니다. 제가 실제로 생각한 것과 행동한 것? 아니면 저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것? 아니면 남이 알고 있고 기억하고 있는 것? 남이 들은 것? 남이 추측한 것? 저는 무척이나 혼란스러웠습니다. 제가 생각하지 않고 행동하지 않은 것이 분명한데 누군가는 제가 행하였다고 믿었습니다. 다른 누군가는 이야기의 일부분만을 듣고 빈 공간은 자신의 입맛에 맞는 대로 채워 넣고 그것을 사실이라고 믿었습니다. 또 다른 누군가는 자신의 일이 아니라 딱히 관심이 없고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겼습니다.
사건이 발생한 후 얼마 지나지 않으면 신속한 소통을 통해 오해를 바로잡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특정 순간부터는 이른바 ‘진실’이라는 녀석이 늘어나고 또 늘어나서 나중에는 이야기를 아는 사람의 수만큼 많아지게 됩니다. 제 능력으로 감당할 수 없는 이러한 진리 앞에서 저는 좌절했습니다. 아마 모든 사람에게 좋은 사람으로 남고자 하는 목표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남에게 나쁜 평가를 받지 않기 위해 철저하게 절제하고 때로는 잔혹할 정도로 이타적으로 행동했는데 남의 말 한마디에 저의 노력이 와르르 무너지는 광경을 보고 진리를 인정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위 사건과 대조적인 사건이 비교적 최근에 발생했습니다. 얼핏 보면 비슷해 보이지만 큰 차이점이 하나 있습니다. 지금부터 그 사건을 서술하겠습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친구 A와 B를 설정하겠습니다. 저는 A와 친밀한 관계였습니다. 그러던 중 A와 B가 단기간에 깊은 관계로 발전하여 저도 B라는 친구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 후 저와 B가 코드가 잘 맞아 빠른 속도로 친해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A라는 친구가 저와 B의 관계를 제멋대로 해석하여 큰 착각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 후 A는 저와 A가 속한 무리에 저를 모함하였습니다. 여기까지는 위 사건과 비슷한 전개를 보이지만 저는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이 시점에서 저는 큰 변화를 가져올 선택을 합니다. 저에게 있어서 과거의 경험을 반복하는 것은 정말 피하고 싶었기에 모함한다는 사실을 안 후, 가장 빠른 시일 내에 A와의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서로의 오해를 풀고 잘 마무리하였지만 한편으로는 두려웠습니다. 다행히 과거와 비슷한 전개로 흘러갈까 하는 두려움은 작은 두려움으로 끝났습니다. 그 후 뒷말은 나오지 않았고, 남아 있던 오해들도 제3자들과 직접 대화하여 풀어나갔습니다. 물론 제가 오해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인식할 수 없고, 모든 사람에게 가서 오해를 풀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가깝고 알고 있는 사람들과는 소통을 하였습니다.
당사자와 직접 이야기하고, 제3자들과 이야기하면서 데자뷔를 느꼈습니다. 처음부터 당사자와 직접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는 남에게 잘못된 이야기를 들어서 오해하기도 하고 자신이 보고 싶은 대로 봐서 오해한 것이었습니다. 이 행동에 대해서 저렇게 오해하고 저 말에 대해서는 또 다르게 오해하고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 부분은 바르지 않은 시선으로 만들어진 퍼즐로 채워나갔던 것입니다. 여기에 처음 언급한 사건의 무리에 포함되지는 않았지만 그 무리의 말 옮기기 좋아하는 친구에 의해 그 사건을 알게 된 친구가 과거 그 사건을 이야기하였습니다. 제3자들은 하나하나 알고 있는 사실이 달랐습니다. 중간중간에 있는 내용을 빼먹은 채로 알고 있는 친구도 있었고, 아예 다르게 알고 있는 친구도 있었습니다.
전에는 이 두 사건을 통해서 알게 된 인간관계의 특징이나 중요한 점이 역사와 어렴풋이 비슷하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책을 읽는 동안은 역사와 인간관계를 하나로 보았고, 책을 읽기 전에는 몰랐지만 읽은 후 역사가 인간관계를 포함한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 명확해졌습니다. 바로 역사의 특징을 인간관계를 통해 심도 있게 이해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저의 경험과 책의 내용을 합하여 뽑아낸 역사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역사에서는 어떤 사실이 일어났는지 보다는 어떤 내용이 어떤 방식으로 남겨졌는지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 점은 역사에서는 객관성보다 주관성의 비중이 크다는 것을 명백히 보여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역사에 대한 태도가 강조됩니다. 우리는 역사에 대한 객관성의 한계를 인식하고 주관성을 인정하면서 최대한 객관성을 가지도록 노력해야 한다. 또한 역사는 그 내용을 최대한 빨리 기록으로 남겨야 합니다. 왜냐하면 시간이 지날수록 내용이 희미해지고 바뀌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확실하지 않은 부분은 바꿀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어야 합니다. 그 부분을 애매모호한 방식으로 서술하거나 출처를 밝히는 방법을 사용하여 나타내야 합니다.
그리고 이 기회에 확실하게 세워진 삶의 태도도 있습니다. 주관성, 객관성과 관련 있는데 바로 ‘내가 아무리 바르고 당당해도 오해는 생길 수밖에 없다. 그러니 이 사실을 인정하고 최대한 바르고 당당하게 살 수 있도록 노력하자’입니다.
역사 책에서 이러한 깨달음을 얻을 거라고 기대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깨달음을 얻게 되어 이 책을 오랜 시간 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장려 도*원 치의학과 도서: 당신은 모를 것이다
독후감: 당신은 모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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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원(悲願)’, 꼭 이루고자 하는 비장한 염원이나 소원을 뜻한다. 저자의 비원은 무엇이었을까 하고 생각해본다. 그의 소설 비원(秘苑)에는 그와 똑 닮은 남자와 그 남자를 닮은 여자가 나온다. 같은 병을 안고 있는 안쓰러움 뿐 아니라, 다음 날을 생각할 때 한없이 두렵다가도 공허한 것, 걸을 때 발걸음이 향하는 곳, 이름도 모른 채 뒤돌아서는 모습까지도 닮았다. 작가는 소설로 자신을 드러낸다는데, 저자는 그렇게 같은 비원(悲願)을 품고 비원(秘苑)을 거닐 누군가를 찾기를 바랐던 것은 아닐지. 10만 명 중의 한 명이 되어 자신이 지고 있는 고통과 같은 고통을 진 사람을 보며, ‘혼자가 아니구나.’ 하고 짐을 잠시 내려놓은 듯한 기분을 바란 것인지.
타인을 통해 이루려 하고 남의 손을 빌려 무엇인가 해보려 하는 것은 참으로 공허하다. 그래서 일찌감치 저자는 자신과 똑 닮은 타인을 통해 위로받고자 하는 마음에 ‘비원(悲願)’이라는 이름을 붙였나. 나의 고민을 타인에게 말하면 덜어질 거라는 믿음, 나의 고민을 들어주는 그도 나와 똑같이 느낄 거라는 기대. 그러나 맥주잔을 부딪칠 수 있는 나이가 되자, 잔을 타고 마음의 짐도 넘나들었다고 믿을 수 있는 것은 취기에 휩싸인 그 날 밤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음 날이 되면 나는 한 숟갈도 덜어지지 않은 나의 짐을 지고 또 가던 길을 가고 있었다. 저자는 삶이란 각자의 고통을 짊어지고 각자의 길을 가는 것이라고 했다. 저자의 정신 빼고 모든 것이 되어주는 아내가 그 말을 타이핑하면서 여간 서운하지 않았겠구나 싶다. 고통의 ‘자기 몫’이라. 어찌 보면 영웅적이고, 달리 보면 매몰찬 말이다. 저자의 아내는 그 말을 들으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저자의 몫을 나누어 그와 한몸이나 다름없이 되어가 지금은 허물어져 내리는 것이 저 육체인지 자신인지도 모를 지경인데, 남편이 미웠을까? 아니면 지금 자신의 상황이 바로 자기 몫의 고통이구나 하고, 수발을 들며 부쩍 대범해진 그 내면으로 담담히 견뎌냈을까?
내 것 하나 없는 세상에, 내가 짊어진 고통만은 내 것인 것은 나의 등만 봐도 알 수 있다. 온전히 내 것으로 주어진 짐은 타인에게 하소연하고 어딘가에 기대어 봐도, 내 등딱지처럼 붙어서는 떨어질 줄을 모른다. 그 고통은 나의 일부 그리고 끝내 내가 된다. 아일랜드 출신의 시각장애인 여가수는 한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다.
“나의 맹목이 지금의 내가 되게 했어요.”
그녀 역시 저자와 같은 평범한 일상 속의 누군가였다. 특별히 눈길 한 번 더 받지 않던, 남에게는 ‘아무’였는데, 어쩌면 병을 확진 받기 전까지는 자신에게도 ‘아무’였는지 모른다. 아홉 살이 되던 해, 시야가 점차 흐려져서 병원에 가보니, 유전적 원인으로 인해 앞을 못 보게 될 것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어떤 진단은 진단이라기보다는 ‘선고’에 가깝다. 저자가 남은 생을 말라비틀어지는 육체 속에 감금되는 종신형을 선고받았다면, 그녀는 평생을 어둠 속에 갇히는 형을 선고받았다. 그런데 그 형벌이나 다름없는 맹목이, 자신이 되게 했단다. ‘고통’이라고 짊어지고 자신의 길을 갔는데, 알고 보니 그것은 열매 맺는 씨앗이 한가득 든 자루였다. 짊어진 등으로 토해내듯 쏟아낸 땀을 먹고, 한낮에도 부지런히 걷는 나의 등 위로 쏟아지는 햇빛을 받고, 아무 데나 내팽개쳐지지 않아 상한 데 없이, 고통이라는 자루 속에서 씨앗은 숨을 쉬고 더 통통하게 차오르고 있었다. 씨앗은 어느덧 내가 가는 길에 뿌려져 한껏 금빛 왈츠를 그려내고 있었다. 그녀는 이제는 ‘아무’가 아니게 된 것이다.
‘나는 울고 나서야 그대의 눈물을 이해하게 되었다.’
한때 디즈니의 삽화 작가로 일했던 한 여성의 말이다. 눈물의 슬픔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나도 울어봐야 한다. 고통의 무게를 가늠이라도 해보려면, 나도 같은 짐을 져봐야 한다. 그러나 조물주는 슬픔이나 기쁨 같은 감정은 나눌 수 있게 하셨으나, 궁극적으로 한 사람이 져야 하는 짐은 나눌 수 없게 하셨다. 그것은 신이 그에게만 불어넣는 영혼 한 줌이기 때문이다. 계주를 할 때, 넘어진다고 해서 그 자리부터 다른 사람이 뛰어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나의 몫은 내가 완주해야 한다. 자신의 병을 그렇게 완주하고 싶다고 했던 저자도, 그런 저자의 마음을 알면서 묵묵히 또 소변 통을 가져다주는 아내도. 각자의 짐을 짊어지면서 그것이 곧 내가 되는 것임을 알았나 보다. 그러니 그렇게 담담하고 담대하다. ‘고통’이라고 나에게 온 그것은 저자의 종신형처럼 영원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영원히 고통의 이름만 달고 있지는 않다. 기쁨과 슬픔, 영광과 절망, 소망과 비원으로 피어난다. 그리스 신화 속 분노의 여신과 미의 여신 모두, 모든 이가 짊어지고 사는 하늘의 하늘 신 우라노스에게서 태어났듯이.
저자의 말대로 우리는 각자의 짐을 지고 각자의 길을 간다. 저자와 그의 아내와는 다른 짐을 지고, 그 둘은 모르는 곳에서 다가오는 시험을 준비하는 나와 내 벗들도 각자의 길을 간다. 계절은 가을로 접어들어 무척이나 검은 주황빛으로 날로 깊어져 감을 산과 들에 펼치는데, 우리도 학년이 술의 숙성 연도처럼, 그 숫자가 우리의 깊이도 나타내주는가 싶다. 그러나 정작 깊어지는 것은 한숨인가. 시험과 면접을 준비하며 소망이 점차 비원으로 바뀌는 친구를 보고 있자니, 내가 대신 져줄 수 없는 짐임을 잘 알기에 더 안타깝다.
그의 짐을 들어줄 수는 없으나, 그가 가는 길에 피어 때로 웃게 하는 잘은 꽃이 될 수는 있겠지. 저자와 함께 웃고, 특별한 날이 되어 준 많은 문인 후배들과 누님처럼. 친구의 길에 슬픔이 한껏 비를 뿌릴 때 그의 우산을 들어주는 것 정도는 해도 되겠지. 저자와 함께 울고, 그의 일상이 되어 준 아내와 아들처럼. 인생 각자 짐을 지고 각자 걷는다. 짐을 덜어줄 수는 없지만, 그가 짐을 질 힘이 되어줄 수는 있다. 친구야, 일어나서 걸어라, 뛰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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