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도서관 독후감 공모전

2017.11.16

선정도서 10종 200권
참가대상 부산대학교 학부생(재학생)
참여방법 도서관 독후감 선정도서(1인 1책, 선착순)를 수령 후 자유롭게 독서하고 해당 도서의 독후감 제출
참여기간 2017년 9월 11일 ~ 10월 29일
시상내역 총 8편(부산대 총장상 및 도서관장상, 총상금 160만원)

※ 본 사업은 ACE+의 예산을 지원받아 운영되었습니다.

우수 독후감 선정작
돋보기 버튼을 누르면 독후감 내용을 보실 수 있습니다.
수상 이름 학과 선정도서/독후감제목 보기
최우수 김*우 경제학부 도서: 조선에 온 서양 물건들
독후감: 기술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
search
1. 들어가면서: 조선과 과학 기술
조선은 성리학적 지배 질서에 근거해 세워졌으며 통치 과정에서 이를 구현하려 했던 국가다. 많은 사람들이 지닌 조선에 대한 대표적 선입견 중 하나는 조선 사회가 과학 기술을 천시했다는 것이다. 아마도 ‘사농공상(士農工商)’이라 불리는 계층 질서 속에서 조선은 과학 기술을 멀리하고, 현학적이고 고담준론에 몰두하는 선비들의 사회라는 이미지가 형성된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조선 전기는 이전에 한반도에 세워진 국가에서 전례를 찾을 수 없는 ‘과학 기술’의 황금기였다고 한다. 물시계인 자격루를 발명한 장영실이 활약한 것도 전기 세종 때의 일이다. 민생을 잘 살피는 것이 성리학적 통치의 주된 목표였다면, 과학 기술 발전은 농사에 도움을 주는 각종 문물을 개발하여 민생을 평안히 하려는 성리학적 통치의 구체적인 실현 방안 중 하나였다.
이러한 패러다임이 깨지고, 오늘날 ‘폐쇄적이고 보수적인 성리학적 질서에 집착하느라 과학 기술 발전을 경시했던 결과 근대화에 실패했던’ 조선의 이미지는 오히려 후기에 형성된 것에 가깝다. 양란 이후 성리학적 통치 질서는 더욱 보수적인 성향을 띄면서 과학 기술은 침체에 접어든다. 이러한 과정에서 실학 사상가들로 불리는 일부 지식인들은 사변과 당파적 논쟁에 몰두하는 기득권 층에 반발한다. 또한 새로운 조선의 청사진을 제시하기 위해 변화하는 서구의 문명과 문물을 소개하고 다양한 사회 개혁책을 제시하는 등 다양한 시도와 노력을 벌인다. 하지만 조선 후기는 동시에 그들과 당대 사회의 한계, 좌절을 확인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조선에 온 서양 물건들>은 조선 후기 양반과 지식인 계층으로 구성된 주류 사회가 서양 문물을 수용하는 양상과 그것이 조선 사회에 미친 영향을 보여준다. 안경, 망원경, 유리거울, 자명종, 양금이 그 예다. 새로운 문물의 등장은 단순히 과학 기술의 발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과학 기술의 발전은 그것을 추동하는 사회적 요구, 변화에 응답한 결과이며 때로는 과학 기술의 발전이 시대를 움직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새로운 문물은 당대의 시대 정신과 과학 기술의 유기적인 결합물이다. 후대의 사람들은 이를 통해 당대의 과학 기술 수준은 물론, 사회·문화적 과제와 특징, 그리고 그 시대를 살아가던 이들의 인식관까지 엿볼 수 있다. 특히 어떤 문물을 외부로부터 받아들이는 경우라면, 그것이 수용되는 과정에서 변화하는 세계 문명과 변하지 않는 인식 사이의 간극을 다차원적으로 보여준다. 조선 후기에 들어 서양 문물이 조선에 유입되고 수용되는 양상을 살펴보는 것은 당대의 생활 양식과 세계관, 과학관을 유기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유용하다.2. 왜 안경은 ‘완소’했고, 자명종은 ‘완물상지’가 됐는가: 조선 후기 시각의 가치와 시간의 가치
안경없는 세상을 상상해 본 적 있는가. 시계가 없다면 세상은 어떻게 될까. 오늘 날 안경과 시계 중 어느 것이 삶에 더 중요한지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 두 물건 모두 생활의 편리 수준을 넘어 한 가지 물건이라도 없으면 일상 생활이 불가능한 수준에 이르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시력이 좋지 않은 이들에게 안경없는 세상은 ‘어둠으로 가득한 세계’이며, 오늘 날 자본주의 체제는 분, 초를 넘어 더욱 세밀한 단위의 시간을 요체로 작동한다.
하지만 조선 후기의 사정은 조금 달랐던 것 같다. 안경은 “어두워진 세계에 다시 빛을 가져다”(36p) 준 물건으로 조선의 주류 지식인 사회를 넘어 민간에 까지 확산될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다. 반면 날씨나 그 밖의 조건과 상관없이 정밀하고 높은 수준을 계측이 가능한 자명종은 지식인 사회에서 조차 큰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다. 오늘 날 신체의 일부처럼 자리잡은 두 물건이 조선 후기엔 상반된 대접을 받은 이유는 무엇일까.-안경과 시각
기본적으로 발달된 기술 문물이 사회에 도입되면, 그 사회 구성원들의 생활에 편의를 제공한다. 유교적 질서가 지배하는 조선 사회의 특성 상 새로운 문명의 이기를 쉽게 접하고 이용할 수 있는 계층은 주류라 할 수 있는 양반과 일부 중인을 포함한 ‘지식인’ 계층이었다. 조선에 도입된 서양 문물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안경이다. 안경은 노화나 각종 질환으로 시력이 낮아진 당시 양반과 지식인 계층으로부터 큰 인기를 끌었다. 평생을 농업에 종사해야 하는 대다수 기층 민중과 달리 그들이 생산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 근거는 그들이 이상적이고 우월한 행위라 여겨지는 ‘학(學)’에 전념하기 때문이다. 조선을 지배하는 유교적 질서는 바로 이 ‘배움’에 종사하는 계층에게 우월적 권리를 부여했으며, 이들이 배움을 행하는 실체적 행위가 바로 읽고 쓰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들에게 더 이상 읽고 쓸 수 없다는 것은 그들의 존재 근거를 흔들 수 있는 위험성을 지닌다. 안경은 이러한 위험성을 크게 낮추는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당대의 지식인들에게 큰 사랑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안경은 계급을 넘어 민간에 까지 널리 쓰임이 있었고 그 구성이 단순하였다. 저자는 새로운 기술 문명의 수용 정도를 결정하는 요건으로 보편적 수용가능성과 구성의 복잡성을 제시한다. 안경의 보편적 수용가능성이란 저자의 분석처럼 “시력이 나빠지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으니 가장 보편적으로 수용될 가능성이 있었던 것”(286p)을 의미한다. 또한 안경은 자명종과 달리 장치의 구성이 단순하다는 특징을 지닌다. 구성이 단순하다는 점은 특히 기술 문물이 소수 지배 계층을 넘어 다수 기층 민중에 까지 확산되는데 영향을 미친다. 19세기 들어 안경에 대한 수요는 화가나 수공업자를 비롯하여 여성을 아우르는 민간으로 확산된다. 이러한 상황에 안경을 제작하는 안경방이 서울 곳곳에 들어섰다는 기록은 안경 장치가 지닌 단순함이 유행의 주요한 조건 중 하나였다는 점을 보여준다.

-자명종과 시간
많은 사람들이 간과하지만, 중요한 사실 가운데 하나는 시간에 관한 것이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시간은 본래부터 주어진 개념이라 생각하고, 그것에 ‘근본적’인 의미를 부여하기도 한다. 하지만 ‘시간’은 정말 자연적인 개념인가. 아니다. 시간에 대한 인식은 분명 ‘발명’되고 발전한 것이다. 인간이 자신들의 필요와 편의에 따라 인위적으로 규정했다는 뜻이다. 문명과 문화가 발전하면서 이전 세대 혹은 다른 문명과 문화권과는 다른 시간에 대한 인식이 드러난다. 가령 농업이 주된 경제적 토대이고, 그것에 기반한 문명권에서 시간은 계절의 변화 단위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반면, 산업 자본주의 사회에서 시간이 계절 수준에 머무른다면 크게 곤란할 것이다. 공장 노동의 생산성을 구성하는 시간 단위당 생산량을 관리하기 위해서는, 갈등론적으로 표현하자면 착취를 더욱 고도화하기 위해서는, 정확하고 세밀한 수준의 시간 측정이 필수적이다. 따라서 이 때 시간은 시(hour)는 물론 분, 초를 다퉈야 할 것이다. 이처럼 어떤 세대, 문화, 문명, 국가에서 보이는 시간관(觀)은 문명의 특징과 발전 수준을 드러낸다. 그리고 그것을 측정하는 기술이 물리적으로 집약된 시계는 당대의 시대상을 표상하는 것이다.
정밀하고 계측 수준이 높은(분, 초 등 더욱 세밀한 수준까지 측정 가능한) 시계는 일반적으로 과학 기술의 진보와 그것을 도입한 국가의 문명 수준을 평가하는 척도다. 시간을 발명한 것은 인간이고 역사적으로 문명은 보다 정확하고 높은 수준의 계측이 가능한 시계를 요구해왔다. 조선도 자명종으로 대표되는 정밀하고 높은 계측 수준을 자랑하는 시계를 외국을 통해 들여온다. 하지만 시계가 당장 조선 사회에 큰 변화를 가져오지 못했다. 이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조선은 농업 국가였고, 조선인들의 의식을 지배하는 시간 관념은 농사에 큰 영향을 미치는 24절기에 기반한 계절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조선 시대는 새로운 시계라는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기 너무나 이른 것이었다.

왜 조선은 본격적인 기술 근대화로 나아가지 못했는가
양금을 제외하면 이 책에서 언급하는 물건들은 모두 서양 근대 문명사에서 중요한 의의를 지녔다. 이러한 물건들이 조선에 유입되었지만, 결과적으로 조선에서 서민층에 까지 확산된 것은 안경이 유일하다. 나아가, 조선은 이러한 문물에 불구하고 이후 근대적인 과학 기술 체제에 편입되지 못했다. 근대화를 추동하는 주요한 요소에 과학 기술이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는 조선의 근대화를 가로막은 주요한 원인에 대한 분석이기도 하다.
이에 대해 저자는 ‘기술 원리에 대한 무관심’과 ‘’완물상지(玩物喪志)’라는 도덕적 경계‘를 지목한다. 지배층과 피지배층 두루 확산되어 인기를 끌었던 안경이지만, 어떤 원리에 의해 그것이 작용히고 시력을 교정하는지에 대한 탐구는 부족했다. 유리거울과 망원경도 마찬가지 였다. 이는 독자적인 과학 기술 발전과 문물을 제작하는 노하우가 형성되지 못하도록 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제조와 작동 원리에 대한 몰이해는 공통적으로 나타났다. 물론 이는 당대 조선 사회의 맥락에서 이러한 기술들이 서구 문명의 쓰임과 동일한 쓰임을 갖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러한 점을 인정하더라도, 기술 원리에 대한 무관심은 근본적인 과학 기술 발전과 축적, 나아가 근대화를 늦추는 원인으로 볼 수 있다.
그러한 인식 근본에는 새로운 기술 문물을 완물상지, 즉 “쓸모없는 물건을 갖고 노느라 정신을 팔고 중요한 본심을 놓친다”는 경계가 있다. 앞서 조선 전기 과학 기술에 대한 언급에서 알 수 있듯이 당대 조선의 지식인들은 과학 기술과 그 근간이 되는 자연에 대한 학문적 관심을 지녔다. 하지만 “그것은 인격 수양과 정치에 비하면 부차적인 것이었다.”(298p) 이러한 인식에 필자는 여기에 ’서민의 삶에 미치는 영향‘이라는 변수를 덧붙이고 싶다. 책에 소개된 물건 대다수는 기층 서민의 삶과 직결되지 않았다. 오늘날 기술의 진보가 생활 수준의 향상과 맞닿아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자신의 삶과 무관한 물건에 민중들이 얼마나 큰 관심을 지니고, 나아가 장기적으로 발전에 영향을 미쳤을지는 미지수다.

나오면서: 4차 산업혁명이라는 유령을 마주하며
조선 말기 실학자이자 과학사상자인 최한기는 <명남루수록((明南樓隨錄)>에서 당대의 서양 문물 수용 양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나라의 제도와 금법에 막혀 천하의 유능하고 빼어난 지식인을 직접 만나서 보고 느끼는 것이 있을 수가 없다. 망원경과 화륜선 등의 기계에 대해 전해 들은 희혹을 풀기 어려우니, 이것이 두 번째 불행이다”(307p) 저자는 이에 대해 “서양의 물리적 실체성, 서양 문화의 객관적 존재를 의도적으로 부정한 데 대한 냉정하지만 객관적인 평가”라며 “실재하는 서양을 의도적으로 외면한 것은 쇠락하는 사족 체제였다”고 덧붙인다.
최한기와 저자의 진단을 오늘 날 한국 사회에 적용해 보는 것은 무리일까. 근래 4차 산업혁명과 그로 인해 달라질 것으로 예측되는 삶의 양식에 대한 전망만큼 극명하게 갈리는 것도 드물다. 한 쪽은 4차 산업혁명이 과학 기술 발전의 열매이며 인류의 전반적인 삶의 수준이 이전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아질 것이라고 주장한다. 반대 쪽은 인류가 로봇과 인공지능 대체로 인한 대량실업의 위기에 놓였으며, 새롭게 등장할 기술 문물은 오히려 인간의 고유한 가치와 존엄성을 파괴하는 기폭장치가 될 것이라고 경계한다.
4차 산업혁명과 기술 문물에 대한 장밋빛 전망과 디스토피아의 양 극단만이 존재한다. 하지만 다가올 미래는 둘 사이 어느 지점에 있을 것이다. 막연한 기대감, 두려움 모두 내려 놓아야 한다. 오직 상황의 실체와 본질을 “다른 말로 꾸미지 말고 정면으로 응시해야 한다”(308p) 급변하는 기술 문명에 대한 막연한 기대나 두려움보다 분명하게 마주할 이성과 용기가 필요한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조선 후기, 결과적으로 당시의 지배층은 부상하는 새로운 과학 기술 문물에 현명하게 대처하는데 실패했다. 대체로 서양의 기술 문물이 지닌 위험성은 애써 외면했고, 가능성에 대한 부분은 성리학적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판단은 장기간에 걸쳐 파국으로 귀결됐다. 그렇게 수 세기가 지났고, 다시 판단을 요한다. 눈을 감을 것인지, 뜰 것인지.

우수 최*현 사회학과 도서: 마음을 실험하다
독후감: 심리학이 내려주는 내 마음 처방전 -‘마음을 실험하다’를 읽고-
search
“하나의 유령이 대학가를 떠돌고 있다, 대2병이라는 유령이..” 북한의 김정은도 무서워한다는 ‘중2병’은 소위 질풍노도의 시기라고 불리는 청소년기에, 중학교 2학년 학생들이 반항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을 희화화해서 부르는 말이다. 그렇다면 대2병이란 무엇일까? 중2병이 중학교 2학년 학생들이 겪는 병이라면, 대2병은 대학교 2학년 학생들이 겪는 병일 테다. 최근 들어 캠퍼스에 이 ‘대2병 환자’들이 속출하고 있다.
대2병이란 ‘대학에 진학했으나 장래에 뭘 해야 할지 몰라 불안한 상태’를 뜻한다.( 타율적 목표 ‘입시’ 사라지자 무기력해진 ‘대2병’, 류석상, 한겨레, 2017.05.30) 고등학교 때까지 부모와 학교의 요구에 부응해서 열심히 입시에 전념하여 일단 대학에는 왔는데, ‘그 이후’를 고민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 고민을 해야 하는 시기가 왔을 때 매우 큰 혼란과 방황에 마주하게 된다는 것이다. 대학에 처음 입학한 소위 ‘새내기’ 시절에는 고등학교 때까지 누리지 못 했던 자유도 맘껏 누리고, 새로운 사람들도 많이 만나며 즐거운 적응의 시간을 보내기 때문에 이런 고민이 덜하다. 하지만 대학 2학년이 되면 본격적인 전공 공부가 시작되면서 전공이 자기가 생각했던 것과 많이 다르거나 적성에 맞지 않다는 점을 깨닫게 되기도 하고, 점차 취직 문제와 취직을 위해 준비해야 하는 공모전이나 각종 자격증 등에 대한 고민과 두려움이 많아진다. 남학생의 경우 군 입대와 시기가 맞물리기도 하며, 이 시기의 많은 학생들이 전과나 편입, 반수, 더 흔하게는 휴학을 고민한다. 심리적으로는 다급함과 불안함을 느끼지만 실제로 준비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자괴감 대문에 자존심이 떨어지는 것이 주요 증상이다.
나 역시 2학년이 된 올해 1학기에 들어서서, 얼마 지나지 않아 이 ‘대2병’을 경험하게 되었다. 전공 공부는 1학년 때 맛만 본 전공기초와는 차원이 다르게 어려웠고, 과제는 너무 많았다. 1학년 때 함께 놀던 많은 동기 친구들은 이제 ‘정신을 차리고’ 열심히 공부해서 ‘설렁설렁’해도 ‘적당히’는 성적이 나왔던 1학년 때처럼 해서는 안 될 것이라는 조바심이 늘 들었다. 하기 싫어 늘 미뤄 두었던 과제들이 점점 쌓이고, 중간고사에 대한 스트레스까지 폭발했을 때, 농담 삼아 얘기하는 대2병의 수준을 지나, 나 자신이 어느새 우울증을 겪고 있음을 깨달았다. 결국 중간고사가 끝나는 대로 학교 문창회관 2층에 위치한 효원상담원 심리상담부를 찾아 이번 여름방학이 끝날 무렵까지 총 12회기의 상담을 받았다.
12회기의 상담은 결코 그리 긴 기간은 아니다. 더구나 상담사 선생님께서는 나처럼 ‘사회에서 요구되는 사항을 무리 없이 수행할 정도로 정상적으로 기능하고 있는’ 내담자의 경우에는 그 스스로가 내적으로 우울과 불안에 시달리고 있더라도 외적으로는 아무 이상이 없기에 주변의 지지를 받기도 어렵고, 극적으로 우울감이 사라지기도 어렵다고 하셨다. 하지만 12회기의 상담을 통해 내가 분명하게 얻은 것이 있다. 바로 나의 우울함의 원인을 찾은 것이다. 나는 늘 나의 ‘우울’을 걱정하고 두려워했으나 상담과 각종 심리검사를 통해서 나는 우울보다 ‘불안’이 더 심각한 수준이고, 우울은 이 불안의 부산물임을 알게 되었다. 나는 늘 스스로를 남들과 비교하면서 남들보다 더 잘 해야 했고, 항상 ‘뭐든지 잘 하는 이미지’를 유지하고자 전전긍긍했다. 뭔가를 잘 해내도 늘 나보다 잘 하는 사람이 있었기에 나는 언제나 부족한 사람이었고 그래서 늘 불안했다. 이 해소될 수 없는 불안이 결국 우울증으로까지 이어졌던 것이다. 사실 이 불안은 상당 부분 사회 구조적인 문제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고등학교 때, 아니 어쩌면 그 전부터 꾸준히 나는 입시 위주의 경쟁적인 교육 제도 하에서 ‘남들보다’ 잘 하기를 요구받았다. 이는 대학에 와서도 마찬가지였으며 오히려 취업 문제와 맞물리면서 스트레스는 더 심해졌고 나는 늘 불안했다. 그렇다면 이 상당수 구조적 문제에서 기인한 이 불안을 해소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사실 거기에 대해서는 뚜렷한 답을 얻지 못 했고 나는 아직도 늘 고민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단지 이 우울, 불안의 해결책이 아닌 ‘원인’을 찾았을 뿐인데, 훨씬 마음이 편해졌음을 느꼈다. 이 원인을 밝히고 나서 나는 좀 더 나에게 너그러워졌고, 내가 겪고 있는 문제는 사회적인 문제이며 나만 이런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안심할 수 있었다. 명확한 해결법이나 결론이 아닌 ‘원인’의 제시만으로 이러한 변화가 나타났다는 점에서 놀라기도 했다.
이번에 읽게 된 책 ‘마음을 실험하다’는 마치 내가 상담을 통해 경험한 바와 같이, 많은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특정한 행동이나 그들이 겪고 있는 심리적 문제에 대해 ‘원인’을 제시해주는 책이다. 책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례를 먼저 보여준 후 심리학적 개념으로 그 사례를 설명하고, 원인을 제시하고 있다. 예를 들어 ‘미디어 심리학’ 부분에서는 아이돌에 푹 빠져 온종일 그 아이돌이 나오는 TV 프로그램을 돌려보고, 그 아이돌의 음반과 기념품 등을 사는 데 용돈을 몽땅 써버리는 한 청소년의 사례가 나온다. 저자는 이러한 행동을 ‘유명인 숭배증 (Celebrity Worship Syndrome)’이라는 개념으로 해석하면서, 최근 유명인에게 과도하게 집착하는 이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고 설명한다. 이 분야는 아직 연구 초기 단계에 있어 명확한 원인을 규정짓기는 어렵지만, 한 연구에 따르면 핵가족화와 개인화로 접촉할 수 있는 인간관계의 범위가 좁아지면서 롤모델이나 관심의 대상이 미디어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유명인으로 옮겨갔을 수 있다고 한다. ’사회심리학‘ 부분에서는 미국에서 유독 흑인을 대상으로 자주 발생하고 있는 경찰의 과잉진압 문제를 ’내재적 편견‘으로 설명하고자 한다. 이중 처리 이론에 따르면 편견에는 우리가 인지할 수 있는 외재적 편견과 인지할 수 없는 내재적 편견이 모두 존재하는데, 후자의 경우 본인조차 인지하지 못 하는 경우이므로 연구하기 더 어렵고, 그래서 더 위험할 수 있다고 한다. 미 경찰의 경우 ’흑인은 나쁘고, 범죄를 저지를 확률이 높을 것이다‘라는 내적 편견, 즉 인종과 범죄율에 대해 내적 연관성을 갖고 있었기에 흑인에 대해 과잉진압을 한 것이다.
이렇게 책은 우리의 심리나 행동에 대해 원인을 제시하고 이를 설명해 준다. 책을 읽으면서 일상에서 쉽게 접하거나 행할 수 있는 여러 행동에 대해 다시금 고민하고 생각해 볼 수 있어 좋았다. 원인이 제시되니 마치 내가 상담을 하면서 그랬던 것처럼 뭔가 불안이 해소되는 기분도 들었고, ‘나만 그랬던 게 아니구나’하는 마음이 들면서 안심되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챕터마다 적절한 일러스트가 삽입되어 있어 이해도를 높였고 문장도 쉽고 간결해서 가독성이 좋았다.
다만 책은 에피소드 식으로 구성되어 여러 현상들을 설명하고 있는데, 개별 에피소드의 분량이 너무 짧고 산발적이어서 현상의 원인이나 해결책에 대해 충분한 정보를 제공해주고 있지 못한 점이 아쉽다. 또한 현상의 원인을 제시할 때 종종 사회 구조적 원인을 간과하고 그것을 개인의 문제로 환원한 점도 다소 부족한 분석이 아니었나 싶다. 앞서 흑인과 범죄율에 대해 내적 연관성을 갖고 있었던 미 경찰의 예시를 보자. 그러한 내적 연관성은 그 경찰 한 명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흑인에 대한 차별적 편견은 사회 전체에 내재하는 것이며 일종의 사회 규범으로서 개인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이다. 마치 나의 우울과 불안이 사회 구조적 문제에 기인하는 것이고 많은 이들이 나와 같은 ‘대2병’을 겪고 있는 것처럼, 개인적 문제로 보이는 어떤 심리나 행위를 사회 구조와 연관지어 분석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러한 점들에서 책의 한계가 존재하기는 하지만, 이 책은 ‘나는 왜 이럴까?’하는 질문에 대해 원인을 제시해 주는, 일종의 심리학 처방전이자 사전으로서 훌륭하다. 자신의 어떤 마음이나 행동의 원인이 궁금했고 그것에 어떻게 대처하면 좋을지 늘 궁금한 사람이 있다면, 이 책을 추천하고 싶다.
우수 임*희 물리학과 도서: 수학에서 꺼낸 여행
독후감: 수학에서 꺼낸 여행
search
유럽과 미국의 수학사를 배경으로 여행지를 소개하나, 여행지를 배경으로 수학사를 설명하나 저자의 의도를 잘 모르겠다. 서문에서 밝혔듯이 저자가 처음 쓴 책의 이름이 “배낭에서 꺼낸 수학”이고, 첫 책의 출판이후 두 번째 책을 기다리는 독자들을 위해 이번에는 유럽과 미국을 여행하며 쓴 책이다. 수학사 책이라기엔 너무 부족하고 여행기라고 하기는 민망하다는 느낌을 부정 할 수가 없었으나 주요 독자가 청소년인 것을 생각하면 가벼운 지식을 위해 쓴 책이라 생각된다.

새내기 때 도서관에서 수학사, 물리학, 수학에 관한 교양서적을 꾀나 많이 읽었던 것 같다. 어떤 책들은 페이지를 넘길 때 코끝에 전달되는 종이향기와 함께 이성의 만족도 느낄 수 있어 특별했다. 표지는 단순하다 못해 빛바래고 낡았지만 페이지를 넘긴 후에는 이 책에 쓰인 종이가 죽은 나무라는 생각이 무색할 정도였다. 아직도 내게 여운을 주는 그런 책들을 생각하면 죽은 나무가 살아있는 나무보다 더 낫다는 말도 가능 할 것 같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이 책을 다 읽고서 처음 받은 느낌은 새내기 때 도서관에서 책을 읽으며 그 순간에 느꼈던 감동과 지적만족, 자극에 대한 아련한 생각이다. 전역하고 전공공부시간이 늘어나면서 읽어야 하는 책에 제한을 두기위해 나름대로의 가정을 세웠다. 교양서적에서 얻는 지식은 체계적인 지식보다 지적만족을 주는 것에 가까워서 남는 지식이 많지 않으니 교양서적을 읽을 시간에 전공공부를 하자고 마음먹고 그 이후로 교양서적을 거의 읽지 않았다. 지금에 와서 그 선택이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지만, 오랜만에 수식으로 가득차지 않는 서적을 읽은 후에 과거 읽은 책들이 생각났다. 비록 이 책 자체로 내게 어떠한 여운을 남기는데 실패했지만, 이 책의 목차에 따라 독후감을 써보고자 한다.

책의 목차는 간략히 프랑스-영국-미국이다. 각 나라마다 2개의 챕터로 나누어서 수학에 관련된 이야기를 한다. 예를들어 프랑스에서 유명한 에펠탑과 나폴레옹을 수학과 연관시켜 무언가를 말하고, 영국에선 세인트폴대성당과 뉴턴, 미국에선 금문교.. 각 나라마다 유명한 수학자나 건축물을 수학과 연관시켜 무언가를 설명한다.

기억나는 부분은 프랑스와 영국 수학자들의 족보이다. 그것은 글 자체에 흥미가 있기 보다는 눈에 익숙한 인물들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물리학을 전공하다 보면 방정식에 자주 등장하는 몇몇 이름이 있는데 뉴턴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프랑스 사람들이다. 순수수학에는 독일출신 수학자들의 이름이 많은 반면에, 응용수학(물리학) 방정식에는 유난히 프랑스 출신 수학자들의 이름이 많이 등장하기 때문에 자연스레 익숙해지는 이름들이 있다. 푸리에, 푸아송, 라그랑지, 라플라스, 라게르, 르장드르.. 이들이 이 책의 프랑스 부분에서 등장한다. 그러나 수식이나 수학이론의 설명없이 단지 수학사의 한 장면으로 등장한다. 이들이 어떠한 사제 관계인지, 즉, 수학자 족보와 그들의 업적과 관련된 간단한 일화를 소개하고 빠르게 다음 여행지로 지나간다. 사실 푸리에와 라플라스는 공대생들에게도 적분변환(푸리에 변환, 라플라스 변환) 또는 열전달 방정식 등등에 자주 등장하는 이름이라 그들의 수학이 무엇에 관한 것 인지 간략하게라도 소개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영국부분에서 눈에 띄는 인물은, 그 인물과 어떤 건축물이나 지명이 관련지어졌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베르누이와 뉴턴이다. 사실 베르누이는 수학사에 있어 엄청난 명성이 있는 수학자 가문이다. 그냥 베르누이라고 말하면 “어느 베르누이를 말입니까?”라고 물어야 할 만큼 유명한 베르누이 수학자를 많이 배출했다. 물리학에서 유체방정식, 미분방정식에서 베르누이 방정식, 다른 수학이나 응용분야에 가문 전체가 골고루 기여를 한 탓에 베르누이 가문만 다뤄도 책 한권으로 모자라다. 여기서 말하는 베르누이는 영국의 유명한 물리학자이자 철학자이자 수학자인 아이작-뉴턴과 관련된 베르누이다. 뉴턴은 한 사람만으로도 베르누이 가문에 버금가는 인지도와 명성을 생전과 생후에까지 누리는 인물이고, 그가 묻힌 장소가 그것을 잘 말해준다. 베르누이가 뉴턴과 관련되게 된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선 또 한명의 유명한 인물을 소개해야만 하는데, 바로 라이프니츠이다. 많은 사람에게 라이프니츠의 이름은 알게 모르게 익숙한 이름이다. 이과와 문과의 구분 없이 고교과정에서 기초 미적분을 필수로 배우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한번쯤은 들어보게 된다. 바로 미적분에서 사용하는 기호가 라이프니츠 기호체계이기 때문이다. 여기서도 베르누이-뉴턴-라이프니츠 위대한 세 사람이 미적분이라는 수학을 둘러싸고 서로 연관된 배경과 일화를 소개한다. 그렇지만, 세 사람 모두에게 좋은 결말로 맺어지지는 않는다.

이 책에서 자세히 다루지는 않지만, 베르누이는 수학의 패권을 두고 벌이는 가족 간 경쟁과 갈등으로 인해 행복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고, 여기서 베르누이라고 한 것은 베르누이 가문의 수학자 대부분의 삶이 부모 또는 형제간의 수학으로 인한 갈등으로 비참했었다. 라이프니츠는 미적분의 소유권을 두고 뉴턴과 벌이는 싸움에서 패배한 이후 비참하고 초라하게 삶을 마감했으며, 뉴턴은 말년을 제외하고 항상 수학과 물리학의 소유권 분쟁으로 동료 학자들과의 다툼과 갈등이 끊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무튼, 베르누이가 미적분학의 싸이클로이드 문제를 뉴턴과 라이프니츠에게 편지로 보내어 미적분학 창시자가 누구인지 시험하려 했다는 사실은 수학사에 유명한 일화이다. 이 책에서도 베르누이의 싸이클로이드와 뉴턴과 라이프니츠의 미적분학을 둘러싼 일화를 소개한다.

추가로 영국편에서 언급하고 싶은 수학자는 엘런 튜링이다. 엘런 튜링은 현대 응용수학분야의 너무나 핵심적인 인물인데다, 세계2차대전 당시 암호해독으로 연합군의 승리에도 핵심적인 기여를 한 영화주인공 같은 현대수학자이다. 실제로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으로 영화주인공이 된 몇 안되는 수학자중 한명이다. 튜링의 업적으로는 컴퓨터 알고리즘의 바탕이 되는 튜링기계, 그리고 응용수학의 매트릭스 컴퓨테이션, 언어철학, 등등.. 학문에 바탕이 되는 중요한 수학들이다. 튜링은 세계대전과 나치즘, 또는 동유럽 공산주의 확산으로 인해 미국에 정착한 유럽의 천재 학자들이 대거 모여있는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에서 폰 노이만, 비트겐슈타인과 함께 연구를 한 것으로 안다. 이 책에서도 짧게 설명한다.

마지막 여행지는 미국이다. 미국의 자연과학은 사실 세계2차대전 전후에 급속한 속도로 발전했는데 가장 큰 요인 중 하나가 바로 유럽에서 미국으로 대거 건너온 유대인 학자들, 유럽의 학자들 때문이다. 예를들어 쿠랑, 아인슈타인, 노이만, 페르미 등등.. 사실 그 전만해도 미국은 자연과학에 그렇게 뛰어난 업적이나 두각을 나타내는 학자가 없었으며, 학문적인 계통도 없었으나 전후시대와 이어진 냉전시대를 거치며 무서운 속도로 유럽을 따라잡고 추월하기도 한다. 독일의 나치즘이 유럽을 휩쓴 이후 재건이 채 되기도 전에 소비에트의 공산주의 사상이 바통을 받아서 무서운 속도로 동유럽권을 삼키려 하는 유럽에서 아마도 학문연구에만 집중하거나 제대로 된 대학시설, 경제적 지원을 기대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반면에 미국은 그들을 위한 자리를 만들어가며 그들을 환영했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 책에서 미국과 연관해서 소개하는 수학분야는 기하학이다. 여행지 미국과 연관되어진 수학을 한번 살펴보면, 비 유클리드 기하학, 위상수학, 4색 문제, 등등.. 비 유클리드 기하는 가우스와 그의 제자 리만에게 거의 모든 공로가 있으며, 위상수학은 프랑스의 천재 수학자 푸앵카레의 자식과도 같은 수학이다. 위에서 말했듯이, 유럽에서 시작 된 수학은 수학자들의 이동과 함께 미국에서 좋은 열매를 맺기도 한다. 가장 적절한 예가 4색 정리인데, 미국인이 컴퓨터로 최초증명을 하였다. 내게는 가장 재미없고 지루했던 챕터였기에 여기서 짧게 맺도록 하겠다.

사실 프랑스에서 이미 등장해야 했지만 마지막을 위해 아껴둔 한 수학자가 있다. 그의 이름은 에바리스트 갈루아다. 21살 젊은 나이로 비운의 죽음을 맞이한 천재 수학자이다. 그는 그의 천재성에 적절한 위치에서 공부하지 못했으며, 여러 가지 정치적 상황에 휘말렸으며, 당시의 위대한 수학자들에게서 조차 거절당했으며, 결국 사랑하는 여인에게도 거절당하고 사랑 때문에 휘말린 결투에서 입은 총상으로 쓸쓸하게 사망했다.
그러나 그를 일찍이 땅에 묻은 이러한 비운조차도 그의 천재성은 묻어버리지 못했는데, 그의 업적은 사망이후에 적절하게 평가받는다. 21살 나이에 수학사에 한 획을 그은 위대한 업적을 이룬 갈루아의 삶은 마치 괴테의 작품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 등장하는 주인공과도 같다. 만약 괴테가 베르테르의 직업을 젊은 예술가가 아닌, 젊은 수학자로 생각했다면 갈루아의 삶과 비슷했거나 아니면, 괴테조차 젊은 베르테르의 삶을 갈루아의 삶처럼 비극적으로 만들기에 실패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갈루아 같은 수학자는 자신의 삶으로 수학사에 위대한 작품을 남긴 수학사의 대 문호이다.

수학사는 어떠한 대 문호가 쓴 작품보다 더 아름답고 매력적인 부분이 있다. 분명히 그런 것은, 작품과도 같은 삶이 한 인간으로써의 수학자가 실제로 살았던 삶이기 때문이다. 한 인간이기에 삶에서 마주해야했던 사랑, 우정, 다툼, 배신, 비극, 우연, 천재성, 열정, 그리고 죽음.. 그 삶이 글로 전해지는 덕분에 그들이 품고 탄생시킨 방정식과 수학이론은 자신의 출생과 여정을 지금도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 한명 한명이 자신의 삶으로 수학사를 채우지 않았다면 수학사는 단지 계보와 연보로 가득 찬 지루한 백과사전으로만 남았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수학자로 살면서 수학을 연구하며 발견 했을 뿐 아니라, 결국 죽음을 마주해야 하는 한 인간으로써의 삶을 살다간 수학자들을 생각하며 이 글을 끝맺는다.

장려 전*미 사학과 도서: 마음을 실험하다
독후감: 休心時間 – 우리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심리학이 있다. –
search
최근 심리학에 관한 관심이 더 높아졌다. 사회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심리학은 우리 사회의 아픔이나 문제를 풀 하나의 알고리즘처럼 사람들 틈 속으로 파고들었다. 내가 처음 심리학에 관심을 가졌던 것은 자기계발에 한창 열을 올리던 시절이었다. 고군분투하는 개인에게 있어 유명 인사들의 자극적인 동기부여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앞서 개인의 심리를 파악하고 앞으로 어떻게 성장할 것인가는 매우 중요한 사안처럼 느껴졌다.
개인의 성장 동기와 관련된 심리학뿐만 아니라 사회적 병폐와 관련된 심리학에도 관심이 증가하고 있다. 최근 부산에서 발생한 여중생 폭행 사건을 보고 간단하게 법적으로 대응할 문제가 아니라 요즘 청소년들의 심리상태를 분석할 필요성이 있다고 느꼈다. 14살 어린 여중생을 선배 중학생들이 피범벅이 되도록 폭행을 행사한 후 SNS에 사진을 찍어 올린 일이 과연 정상적인 사고방식에서 가능한 일일까? 이뿐만 아니라 세계 각종 범죄자들의 심리 분석은 늘 중요시됐다.
<마음을 실험하다>의 저자인 강사월 작가는 심리학을 막연히 동경하기 시작한 10대 소녀였지만 지금은 조회 수 500만이 넘는 인기 연재 ‘소소한 심리학’을 정기적으로 연재하고 있는 작가이다. 그녀는 사람들에게 심리학을 더 쉽고 명확하게 전달하는 심리학 칼럼니스트를 꿈꾸며 이 책을 출판했다. 또한, 일러스트를 담당한 민아원 작가의 경우 2015년 캐나다 일러스트레이션 어워드에 당선이 되었을 정도로 실력 있는 일러스터이다. 심리학을 쉽게 풀어주고 싶은 작가와 글을 좀 더 명확하게 전달해 주는 일러스터가 만나 매력 넘치는 도서가 탄생한 것이다.
심리 서적을 집어 든 까닭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중 하나가 살기 힘들어서가 아니겠냐고 자신에게 묻게 된다. 팍팍해진 세상 속에서 내가 어떤 사람인가 제대로 인지하지 않으면 금방 난파선이 되어 버린다. 주변 사회에 관심을 두지 않으면 들판에 홀로 핀 한 송이 이름 없는 꽃과 같은 외톨이가 되어 버린다. 존재 자체로 아름답지만 그만큼 고독하다. 살아가는 데 있어 심리학은 결코 먼 곳에 있는 외딴 학문이 아니다.
심리학의 사전적 정의를 살펴보면, 심리학(心理學, psychology)은 인간의 행동과 심리과정을 과학적으로 연구하는 경험과학의 한 분야를 뜻한다. 인간과 동물의 행동이나 정신과정에 대한 다양한 질문의 답을 찾는 과학 중의 하나가 바로 심리학이다.
심리학은 일상생활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현상에 대한 실험이 결과로, 우리들의 마음이나 행동을 한 번 더 생각해 보고 이해를 넓힐 수 있는 빗장이 된다는 점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저자가 의도했듯이 심리학을 조금이나마 더 명확하게 이해하고, 나아가 일상을 풀어갈 때 한 줌의 빛이 되길 바라며 책을 읽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나 자신을 돌아 볼 뿐만 아니라 타인과 자신에게 심리학에 관한 이야기를 좀 더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지식을 얻고자 하는 마음도 있었다.
심리학이라는 말을 듣고 흔히들 하는 착각이 있는데, 심리학을 전공한 사람에게 지금 자신의 심리가 보이는지 묻는다. 하지만 심리학은 천문학이 점성술과는 거리가 먼 것처럼 사람의 마음을 읽는 독심술이나 마법과는 사뭇 다른 학문이다.
심리학도 종류가 다양하다. <마음을 실험하다>에서는 제1장부터 제8장까지로 목차를 나누어 인지 심리학, 미디어 심리학, 소비 심리학, 발달 심리학 등을 쉽게 풀어서 일상과 접목해 책의 내용을 풀어나간다.
살다 보면 어렴풋하게 알고는 있지만, 자세히 알지 못하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 그게 무엇이었는지 혹은 그것이 어떤 현상이었는지 생각은 나지만 또렷한 설명이 되지 않을 때가 있다. 저자는 다양한 심리학을 일상생활에서 접할 수 있는 소소한 일상과 잘 어울려 설명한다. 인지 심리학에서 이러한 현상과 뇌, 기억에 대해 간단명료한 설명을 했다. 개인적으로 간단하게 인사를 하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알아보지 못하는 편인데 그냥 집중력이 부족한 탓인 줄만 알았다. 하지만 이 책의 설명에 따르면 일종의 안면 인식 장애라고 한다. 또한, 크로스 레이스 효과라고 다른 인종의 얼굴을 구별하는데, 어려움을 겪는 현상에 대한 것도 알게 되었다. 외국 영화를 보면서 비슷한 느낌의 인물들이 나오면 누가 누구인지 헷갈려서 다시 돌려봤던 적이 있다.
비록 일상에서 생활하기에 심각한 편은 아니지만, 단순히 주의력 탓만은 아님을 알게 되었다. ‘주위에 관심이 부족하다.’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단순한 ‘관심’과는 다른 현상임을 알게 된 것이다. <마음을 실험하다>를 읽으면서 평소 내가 잘 알지 못했던 나에 대해 알게 되었다. 주의력 부족 혹은 관심 부족인 줄 알았던 현상들엔 다른 이유가 있었다. 한 가지 이 책의 아쉬운 점은 현상에 대한 깔끔한 설명은 잘 되어 있지만, 그에 따른 해결책이라든가 앞으로 어떤 도움을 받으면 좋을지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이 부족했다. 이런 점이 더 보완되었으면 좋을 거 같다.
18세기 후반부터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 이후 세상은 급격히 발전했다. 20세기에 들어 마이크로소프트를 설립한 빌 게이츠(Bill Gates) 이후 아이폰을 창시한 스티브 잡스(Steve Jobs)와 같은 천재들이 등장하며 21세기 미디어 발달은 우리의 생활을 더욱 편리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만큼 삭막해진 것도 사실이다. 특히 페이스북을 창시한 마크 저커버그(Mark Zuckerberg), 트위터 최고 경영자 잭 도시(Jack Dorsey) 덕분에 직접 찾아가 만나지 않아도 세계 곳곳에 친구를 만들 수 있는 환상적인 세상이 도래했지만, 그만큼 개인의 사적인 공간이 침해받기도 하고 중2병, 관심병 등 곳곳에서 안타까움을 자아내는 단어도 탄생했다.
이와 관련 있는 미디어 심리학을 통해 일상을 돌아보고 주변의 서글픔을 돌이켜 볼 수 있었다. 현대인들에게 쉼표가 필요하다. SNS 그 자체가 문제가 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 미디어를 제대로 다룰 줄 아는 성숙함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흔히들 말하는 페이스북 우울증의 경우 더 많은 시간을 사용하는 이용자일수록 페이스북 우울증을 겪을 수 있는 확률이 높아진다고 한다. 발전하고 진보된 문명을 즐기되 우리는 그 속에 적당한 휴식을 취할 줄 아는 여유를 배울 필요가 있는 게 아닐까. 실시간으로 올라오는 SNS 속 남들의 행복은 현실의 나를 초라하게 만든다. 남들은 행복한데 나는 왜 이럴까. 꾸며진 행복 속에 진짜를 알 수 없으니 그런 우울함을 느끼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과 자신의 상황을 비교하지 않기 위해서는 자존감을 높이는 일이 중요하다. 최근 베스트셀러 중 하나인 윤홍균 저자의 <자존감 수업>이 불티나게 팔리는 이유가 뭘까? 먹고살 만하면 살기 좋던 시대는 지났다. 현대인들은 자아를 돌아보고 존중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다. 그렇기에 심리학은 삶에서 결코 멀어질 수 없는 학문으로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 있다.
<자존감 수업>뿐만 아니라 <미움받을 용기>, <나를 사랑하지 못하는 나에게>, <너는 나에게 상처를 줄 수 없다>, <불안이라는 위안> 등은 요즘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는 저서들이다. 제목부터 지친 사람들의 눈길을 끈다. 특히 기시미 이치로(岸見一郎) 저자의 <미움받을 용기>는 바다 건너 일본에서 온 책인데도 한국 사회에서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심리학 서적이 계속해서 인기를 얻고 있는 이유가 단순히 재미와 유행 때문은 아닌 거 같다. 그만큼 오늘날 우리 사회에 아픈 개인과 사회 그 차제의 아픔이 존재하는 것이다. 타인에게 말하기 두렵지만 스스로 이겨내야 하는 자신의 감정들을 돌아보고 자신을 더욱 사랑하기 위해서 우리는 심리학을 곁에 두고 친해져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마음을 실험하다>라는 책은 심리학을 좀 더 가볍고 재미있게 접할 수 있었던 책인 거 같다. 후회만 하고 있을 오늘을 한 단계 더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심리학이 아닐까.
정호승 시인은 ‘풀잎에도 상처가 있다’라고 했다. 상처 없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마음에 상처는 보이지 않는다. 굳이 말하지 않으면 알 수도 없다. 지금 내 앞에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상처가 있는지 신이 아닌 이상 알 수가 없다. 몸이 아프면 의사를 만나면 되고, 입원하면 문병 오는 사람이라도 있다. 하지만 마음이 아프다고 해서 제대로 알아주는 사람은 드물다. 남들에게 나를 좀 알아달라고 호소해도 처음엔 이해해 보려고 하지만 결국 남의 일이라 쉽지가 않다. 나는 당신이 될 수 없고, 당신은 내가 될 수 없다. 그렇게 우리는 거리를 두곤 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 자신의 상처를 돌아보고 스스로 치유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나를 먼저 돌아보고, 내 상처를 인지하면 타인의 마음에 대한 이해도가 좀 더 커진다. 비슷한 일을 겪은 사람에게 우리는 더 큰 공감을 느낀다. 때로는 따뜻한 말 한마디, 작은 친절이 타인에게 치유가 될 수 있고, 힘이 될 수 있다. 어쩌면 병문안을 가는 것보다 때론 타인의 마음을 안아주는 일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자살을 시도하는 사람을 결코 미친 사람이 아니다. 마음이 아픈 사람이고, 그 상처를 다룰 줄 몰라서 방황하는 사람이다. 심리학을 알면서 나 자신뿐 아니라 주변을 돌아보고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여유가 생기는 것 같다. 책에서도 밝혔듯이 심리학은 과학과 수학과 같은 학문과는 달리 정확한 정답은 없다. 하지만 사람들의 마음이나 행동을 한 번 더 생각해 보고 이해를 넓힐 수 있다는 데 의의를 둘 수 있다는 저자의 의견에 동의한다.
성격심리학 중 인격 장애에 관한 내용을 읽을 때 한때 인기 웹툰으로 드라마까지 만들어졌던 순끼 작가의 <치즈 인더 트랩> 이하 <치인트>이 떠올랐다. 지난 몇 년간 완결까지 지켜보면서 여자 주인공인 ‘홍설’에게 애착이 갔다. <치인트>를 읽으면서 홍설이 주변 사람들을 살피고 신경 쓰고 혼자 골치 아파하는 모습에 공감했다. 하지만 정작 남자 주인공인 ‘유정’에게는 정감이 가지 않았다. 내 눈엔 그가 ‘인격 장애’를 가진 무서운 존재로 보였기 때문이다. 팬들도 ‘로맨스 스릴러’라고 할 정도로 유정은 꽤 치밀하고 이중적인 모습을 보였다. 타인을 싫어하면서도 남들 앞에서는 잘 웃고 늘 완벽한 모습으로 다른 사람들을 교묘하게 이용해 싫어하는 사람을 망가트린다. 여자 주인공에게도 처음부터 다정다감한 사람은 아니었다. 오히려 심리적으로 괴롭히면 괴롭혔지 달콤한 남주인공과는 거리가 먼 모습이었다.
‘장애’라는 말이 부정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지만, 몸에 상처가 나듯 정신과 인격에도 그럴 수 있다. 반사회성 인격 장애, 분열성 인격 장애, 의존성 인격 장애, 자기애성 인격 장애 등 인격 장애도 종류가 다양하다. 한 개인을 완벽하게 하나의 인격으로 구분할 수는 없겠지만, 이런 글을 통해 혹시 내가 이런 면이 있지 않을까, 이럴 땐 어떻게 해야 좋을지 그 출발점이 될 수는 있다.
<치인트>에서 유정은 홍설을 만나 그의 아버지도 이상하다고 느꼈던 자신의 성격에 대해 조금씩 변화를 겪는다. 유정에게 홍설과의 만남과 그녀의 사랑은 자신의 내면을 치유할 수 있었던 매개체가 된 것이다. 이렇듯 우리도 우리의 문제를 알고 그 문제에 대한 치유책을 찾을 수 있다고 믿는다.
한국인 관광객이 일본에 가면 꼭 사 오는 필수품 중 하나인 휴족시간(休足時間)이라는 패치가 있다. 힘들고 지친 발에 붙여주는 제품인데, 발이 피곤할 때 피곤을 덜어주는 제품이 존재하듯 심리학은 우리의 마음에 쉴 곳을 주는 하나의 패치가 아닐까 생각이 든다.
내 마음이 지치면 일상이 지친다. 내 마음이 비빌 언덕이 없으면 현실이 지옥 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현대인들은 지쳐있다. 나 또한 그렇다. 지쳐서 더는 어디로 가야 좋을지 방향을 잃은 사람들이 많다. 그들에게 하나의 심리 처방이 될 수 있는 심리학 실용서인 <마음을 실험하다>를 읽으면서 심리학이 우리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장석주 시인은 <대추 한 알>이란 시의 첫 구절에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라고 했다. 대추뿐만 아니라 사람도 저절로 괜찮아지고, 좋은 사람이 될 리가 없다. 내면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과 땡볕 한 달 그리고 초승달 몇 날이 깃들어야 마음이 건강할 수 있다. 그렇게 해야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 대추도 그렇듯 사람도 그렇게 성장한다. 심리학은 이렇게 삶의 행복과 성장의 가치를 깨닫게 해준다.
멀다고 느껴지는 심리학은 결코 멀리 있지 않다. 항상 일상에서, 우리 주변에서 서성인다. 자신의 내면으로 떠나는 여행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멋진 여행이라고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말했다. 상처받은 사람, 지친 사람 혹은 지금 행복한 사람도 누구나 심리학을 접하고 그 매력을 느낀다면 우리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심리학이 있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삶과 주변 사람들의 마음을 좀 더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게 될 것이다.
장려 변*윤 국제학부 도서: 유학자의 동물원
독후감: 인간이 우등하다고 할 수 있는가
search
영화 ‘혹성탈출’을 보면 인간보다 지혜로운 침팬지가 등장한다. 말을 하고 생각을 하는 것은 물론, 자신의 가족을 죽인 인간을 용서하는 지혜까지 겸비한 이 침팬지는 인간의 끝없는 욕심이 낳은 동물실험의 결과물이다. 우리는 동물실험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인다. 오히려 동물에게 약물을 투여해서 결과를 보아야 검증되었다고 여기는 사람들도 많다. 하지만 실험을 행하는 과학자들을 비난하고, 잔인하다고 규명하는 것은 정말 위선적이기 짝이 없는 일이다. 연구자들이 내놓은 결과를 적용시키고, 소비하는 주체는 바로 우리들이지 않은가? 동물실험을 반대한다고 시위하고, 저녁 반찬에 불고기를 내놓는 것은 정말 소름끼치지 않는가?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는 까닭은 인간이 동물보다 우등하다고 여기는 잘못된 인식 때문이다.
채식주의자가 된 지 일 년이 흘렀는데, 사람들은 매번 내게 같은 질문을 한다. “가축용은 먹어도 되는 고기잖아? 그러려고 키웠는데 먹는 게 잘못 된 거야?”그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대체 누가 그런 기준을 정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개는 애완용이라는 이름으로 오냐오냐하며 키우고, 소나 돼지는 가축용이라며 가둬놓고 키우다가 도살해야 한다는 규칙은 누가 세운 것인가? 인간이 정말 다른 동물을 먹을 자격이 있기는 할까? ‘유학자들의 동물원’을 읽으며 이런 철학적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다. 몇 백 페이지를 읽으면 찾은 가장 근접한 답은 유학자들이 스스로를 벌레와 같이 여겼다는 “만물평등주의”에서 찾았다.
현대인들은 조금이라도 남들보다 우등하게 보이려고 안간힘을 쓴다. 저자 최지원은 인간들의 인정받으려는 욕구를 선천적인 것으로 보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남을 “열등하게”만드는 것이라고 한다. 진화에서‘적합도’도 중요하지만, 기회가 주어지려면 누군가는‘실패’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들끼리 인정받기 위해 피비린 내 나는 다툼을 하는데, 이 사이에 동물이 낄 틈은 없다. 동물이 열등하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많은 면에서 동물이 훨씬 우등하기 때문이다.
유학자들이 관찰한 동물들의 면모를 살펴보자. 일단, 동물들은 재해를 피하는 특수한 능력이 있다. ‘예측 동력’으로 일컫어 지는 동물들의 지혜에 감탄한 실학자 성대중이 ‘청성잡기’에서 이렇게 기록했다. “옥당의 수각이 불어난 물 때문에 무너지기 하루 전 큰 뱀이 처마를 타고 내려왔는데 수많은 뱀들이 뒤따라 내려와 시내를 따라 가버렸다. 이튿날 밤 폭우가 쏟아져 궁궐의 도랑이 넘쳐흘러 수각이 마침내 떠내려가고 말았다.”이런 뱀의 슬기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이 만약 기술적 진보를 이루지 못했더라면 어떠했을까? 조선시대 발명품인 자격루나 측우기에 의지해서 현재를 살 수도 있었을 것이고, 별을 보며 점쳐서 날씨를 예측해야 했을 수도 있다. 만약에 그러했다면 우리 인간도 동물들과 같은 감각이 조금은 더 발전하지 않았을까? 이런 생각을 하다보면 빠른 기술적 진보가 좋았다고만은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인공위성까지 띄우는 등 온갖 기술을 이용하는 지금도 재해를 피하지 못하진 않은가. 일본의 대재앙과도 같았던 지진이 오기 전에 동물들의 움직임을 관찰했더라면 피해를 조금은 면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또한 동물들이 어떻게 상처를 치유하는 지 관찰하면 배울 점이 정말 많다. 실학자 이수광은 감탄하며“새끼 쥐가 뱀에게 물리면 어미 쥐가 콩잎을 씹어 물린 곳에 발라주면 모두 살아난다. 일찍이 꿩이나 숭어는 상처가 생겼을 때 모두 송진을 그 상처에 붙인다”라고‘지붕유설’의‘식물부’에 기록했다. 이덕무 역시‘청장관전서’에서 “동물들은 병이 들면 재빨리 어떤 것이 약이 된다는 것을 자연히 안다”라고 말한 바 있다. 이런 것을 본능이라고 하는데, 그 본능은 환경에 의해 발현되는 게 아닐까? 인간이 기술에 의지해서 재해를 피하는 감각이 발달하지 못한 것과 같이, 의학자들과 그 연구에만 의지하기 때문에 고치지 못하는 병이 남아있는 것이 아닐까? 자연에 몸을 맡기기에는 위험부담이 큰 면이 없지 않아 있다. 하지만 산 속에 들어갔다가, 몇 년 후에 암이 나은 환자들도 있고, 목초액에 매일 목욕해서 만성 피부질환을 치유한 사람들도 있다. 우리가 만들어 놓은 이 살기 좋은 환경이 정말 살기 좋은 환경인지, 보편적인 인식에 무감각해 진 것인지 모르겠다. 나 또한 아토피라는 피부 질병을 앓고 있는데, 동물들과 같은 지혜가 없어서 인공적인 약에만 의지한지 십년이 다 되어 간다. 한약이 자연적 힘을 빌려서 약초로 병을 다스린다고는 하지만, 어쨌든 나는 그 한의사라는 사람에게 의지하는 것이 아닌가. 어째서 인간은 스스로 위험을 감수하고 시도하려는 의지가 부족한 걸까. 도전하는 인간상을 추구하는 우리가 동물에게 배워야 할 점인 것 같다.
위의 두 가지 면에서 동물이 감각적으로 인간보다 우등하다는 것은 검증되었다. 그렇다면 인간임에 자부하는 ‘사고’의 힘이 동물보다 얼마나 고차원적인지 책에서 살펴보자. 우리는 흔히 동물들은 사고의 힘이 부족하다고 여기고, 없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이덕무는 동물의 지능에 대해 관찰하는 것을 좋아했는데, 그의 저서 ‘청장관전서’ 제 48권에 기록된 쥐가 계란을 옮기는 이야기를 보면 동물이 하는 생각의 힘을 보여준다. “한 마리 쥐가 닭장에 침입하여 네 발로 계란을 안고 누우면 다른 쥐가 그 쥐꼬리를 물어 당겨서 닭장 밖으로 덜어진다. 그리고는 그 쥐꼬리를 다시 물어 당겨서 쥐구멍으로 운반한다.”이를 보면 쥐가 본능적으로 생각이라는 것을 했음을 알 수 있다. 배우지 않아도, 보고 듣지 않아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생각이 아닐까. 이런 쥐의 지능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행동심리학자 바탈과 그 외의 연구에서 쥐들이 얼마나 의리가 강한지 볼 수 있다. 두 마리의 쥐가 서로를 마주보고 작은 감옥에 갇혀있는데, 한 마리는 묶여 있고, 한 마리는 풀려있는데 감옥문은 밖에서 열 수 있게 되어있다. 우리가 열등하다고 여기는 이 쥐들은 눈앞에 있는 초콜릿 칩을 선택할까, 아니면 초콜릿을 포기하는 대신 갇혀있는 동료를 구할까? 놀랍지 않게도 실험결과는 후자였다. 인간을 대상으로 이 실험이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만약 실험집단에 속했더라면 인간들은 자신의 배부터 채우고 상대방을 도왔을 것 같다. 인간이 고차원의 사고를 하긴 하지만, 그 능력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만 쓰진 않는지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인간이 동물로부터 배울 수 있다는 사실이 우리가 더 우등하지 않다는 주장을 뒷받침한다. 실학자 김성일은 자신의 아버지가 불행한 제비 가족사에서 교훈을 얻어 자신의 가족을 지킬 수 있었던 이야기를 ‘학봉집’에 기록했다. “수놈 한 마리가 다른 암놈을 데리고 와서 두 마리가 함께 제비집으로 들어갔는데, 제비 새끼들이 모두 먹이를 달라고 입을 벌리다가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아버지께서 가서 살펴보니, 새끼들이 모두 부리에 쪼여져 있었다. 뒤에 데리고 들어온 제비가 새끼들을 해친 것이다.”그의 아버지는 어미니 민씨가 병으로 죽은 후 첩을 들였는데, 그 광경을 목격하고 혹여나 자식들을 해칠까 걱정하여 즉시 시 한 수를 지어 좌우에 걸어 놓아 계모들이 감복하게 하고, 더욱 부지런히 자식들을 보호했다고 한다. 인간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최소의 단위가 가족인데, 하찮은 동물에게 가족을 어떻게 꾸려나갈지 배울 수 있었던 것을 보면 동물들이 인간과 평등한 위치에 있다는 생각이 든다. 또한 실학자들이 동물을 관찰한 것부터 시작해서 지혜를 얻고, 삶에 적용시켰다는 사실이 감격스럽다. 인간임에 자만하지 않고 자신보다 작은, 약한 존재로부터 배움을 얻었다는 것은 현대 사회의 맥락으로 봤을 때, 높은 지위에 오른 사람이 초심을 잃지 않고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는 것과 같다.
분명 모든 동물들이 이렇게 현명한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모든 인간들이 훌륭한 사고를 하는 것 또한 아니다. 대학생이 되고 난생 처음으로 다른 나라에서 온 친구들을 만났는데, 일반화를 시키는 오류를 많이 범했다. 돈을 아끼는 독일인 친구를 보면 “역시 독일인이네”라는 말이 나오기도 하고, 사생활을 중시하는 스위스 친구를 보면 책에서 본 거랑 똑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독일인과 스위스인의 티끌만큼도 관찰하지 않고서 일반화시키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마찬가지로 동물들 마다 행동 방식이 다르기 마련인데 이 동물 집단은 멍청하고, 저 동물 집단은 의리가 없다는 섣부른 판단을 하는 것은 인종 간에 범하는 실수와 같은 것이다.
저자 최지원이 적은 바와 같이 유학자들은 스스로를 벌레에 불과한 존재로 인식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면서도 인간이 동물을 다스려야한다는 엘리트주의를 공고히 했기에 오늘날 우리가 동물 도살과 실험을 아무 죄책감 없이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쯤에서 나는 이런 생각이 든다. 동물이 인간보다 열등함을 내세우는 것은 인간이 동물과 경쟁했을 때 분명히 질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우리는 ‘동물보다 못하다’는 말을 욕으로 쓰지만,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게 맞을 수도 있다. 우리가 뱀보다 날씨 예측을 잘하는가? 꿩이나 숭어처럼 본능적으로 상처를 치유할 약을 찾을 수 있는가? 혹은 배고픔을 견디고 동료를 구하는 쥐보다 의리가 있는가? 인간은 동물보다 못할 때가 많다. 그리고 우리가 자부하는 그 사고의 힘이 우리를 더 열등하게 한다. 만약 고차원의 사고력이 축복이었다면 인간들은 다툼도 분쟁도 없이 평화로웠어야한다. 그런데 지금 21세기 지도자라는 사람들은 핵무기라는 살상무기를 눈 앞에 두고, 그 고차원의 사고력으로 ‘전쟁’이라는 언어를 쉽게 내뱉지 않는가. 우리 인간들은 동물이 더 열등하다는 증거를 조사하기 이전에, 우리가 어느 부분을 보완해야 더 나은 고차원 동물이 될지를 고민해야한다. 진정한 발전은 상대를 깎아 내림이 아니라 자신의 가치를 높이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발전은 우리가 더 우등하지 않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에서 시작할 것이다.
장려 박*호 철학과 도서: 82년생 김지영
독후감: 82년생 김지영
search
어떤 주의주장이 넓게 퍼지게 되면, 그 주의주장 내에 구별이 가능한 스펙트럼이 생긴다. 페미니즘도 마찬가지다. 처음 입학했을 때와 달리 요즈음에는 학교에 오가면서 페미니즘과 관련된 현수막이 걸려 있는 것을 항상 보게 된다. 현수막을 걸어놓은 사람들은 어떤 페미니스트인가를 질문하게 된다.
내 관심은 이 작품의 내재적인 요소에 대한 분석보다도 작품의 의도와 그것에 의해 파생되는 정치적 효과에 미쳤다. 가까운 과거에 대한 이해하기 쉬운 연대기적 서술, 주석에 달아놓은 통계 자료, 얇은 책의 두께, 작가의 노골적인 인터뷰를 보면, 『82년생 김지영』이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쓰였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의도를 숨기려는 제스쳐는 보이지 않는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정치는 대의제 민주주의 하에 운위되는 협소한 정당정치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소수자를 응원한다고 말하지만,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페미니즘에 관한 이야기를 하거나 페미니스트를 대면할 때에는 계면쩍어했던 기억이다. 내가 책을 읽으며 생각한 것은 그런 것이다. 이 에세이는 『82년생 김지영』에 대한 감상이자, 내가 미뤄왔던, 페미니스트를 대하는 ‘태도 결정’을 위한 생각들이라고 말해도 좋다. 당연히 나 역시 시대착오적인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닌가, 어쩌면 괜히 ‘적의’라고 불릴 만한 태도를 취하고 있는 건 아닌가, 유의하면서 글을 읽고 썼다.
일본의 비평가 가라타니 고진은 근대문학이 끝났다고 선언한 적이 있다. 가라타니는 문학의 닫힌계 내에서만 사고하지 않았다. 그는 자본과 네이션 체제에 대한 사유에서 문학의 종언 테제를 도출했다. 근대문학에서‘풍경’, ‘내면’, ‘깊이’는 ‘근대국가’가 되기 위한 도정에서 출현한다. 근대문학의 상상력은 거기에서 나타난다. 그러나 이제 문학의 정치적인 상상력과 전위는 끝났으며, 오락으로 남았다는 것이다. 지금은 문학이 과거에 가졌던 정치적, 윤리적 지위는 ‘잔영’만이 남아있을 뿐이고, 그리고 그렇다면 과분한 대우를 받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겠다. 그는 근대 문학의 정치성은 소설로 대표된다고 보았고, 그 때문에 종언 테제는 소설로 한정하고 있다. 표적이 된 것은 일본의 문학일 뿐만이 아니라 한국의 문학이기도 했다. 지금 문학계의 자세한 사정이야 모르지만, 문학 관련 종사자들이 이를 반갑게 여기지는 않을 법하다. (가라타니 고진을 체계적으로 번역하고 있는 조영일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최근에 발표된 한 논문을 보면, 가라타니 고진은 최근 20년간 한국문학 연구자들이 가장 많이 인용한 외국학자였다. 그런데 그와 같은 인기는 최근 들어 많이 주춤한데, 그것은 아마 『근대문학의 종언』이 국내에 소개된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문학이 끝났으니, 자신은 다른 것을 하겠다는 선언은 그동안 그에게 호의적이었던 많은 문학연구자나 비평가들에게 깊은 배신감을 안겨주었다. 그래서 최근 약 5년여 간 한국의 문단이나 학계에서는 이런 그의 주장을 비판(부정)하는 것을 글의 서두로 삼는 게 유행 아닌 유행이 되기도 했다.”, 가라타니 고진, 「옮긴이 후기」,『세계사의 구조』, 조영일 역, 도서출판 b, 2012, p475)이런 오래된 이야기를 꺼낸 것은, 『82년생 김지영』이 어떤 위치에 있는가를 사고하기 위해서다. 『82년생 김지영』이 정치적인 의도를 갖고 쓰였다면, 이런 종류의 작품은 문학의 정치적 책무를 다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러니까, 가라타니의 종언 테제를 비껴갈 수 있을까?
칸트는 판단력을 규정적 판단력과 반성적 판단력으로 나누었다. 이미 구성된 규칙을 적용하는 것이 규정적 판단력이라면, 반성적 판단력은 새로운 규칙을 구성해서 사태를 이해하는 판단력이다. 예술이 다른 영역에 미치는 효과로서가 아니라 예술 자체로 창조력을 갖는다면, 반성적 판단력과 관계하는 지점이라야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82년생 김지영』은 남성 중심적 이데올로기와 그 때문에 피해자가 되는 여성의 구도를 반복하고 있다는 점에서 작가는 규정적인 판단을 했다고 보아야 한다. 이는 이미 확립된 네이션 체제 바깥에 대한 상상이 없는 것이다. 문학이 문학 자체의 창조력을 갖는 동시에 정치적 책무를 다한다는 것은 반성적 판단력이 작동하는 지점, 즉 새로운 정치적 상상력을 만들어내는 데에 있다. 창조력 있는 여성주의 소설이라면, 기존의 남성 중심적 이데올로기 뿐만 아니라 기존의 여성주의적 시각도 넘어서는 주체를 주조했어야 했다. 실패로 끝날 시도일지라도.
아쉬운 대목을 말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김지영이 부푼 꿈을 안고 대학에 입학한 무렵, 그 시절에 대한 묘사로 IMF 이후 상승한 등록금에 대한 이야기와 취업난에 대한 대학생의 부담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런 것에 대해서는 인물들의 비판의식이나 적의는 보이지 않는다. 곧바로 어려운 시절에 괜찮게 지냈던 김지영 집안의 경제 수준에 관한 이야기 이어진다. 여기서는 어김없이 아버지와 어머니의 대결 구도가 등장해서, 부당한 아버지의 공치사에 대한 비판이 묘사된다. (조남주, 『82년생 김지영』, 민음사, 2016, p84-89) 김지영과 친구들이 취업준비를 하는 대목에서는 비정상적인 학벌과 스펙에 대한 묘사는 있으나 역시 문제의식은 없고, 남자와 여자의 단순한 대결 구도로 끝맺는다. (조남주, 『82년생 김지영』, 민음사, 2016, p95-97)이러한 단순한 구도에서도 대한민국의 성차별은 분명히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누구나 알고 있는 것을 다시 폭로하는 데 자족하면 안 된다. 문학의 종언 테제를 부정하는, 문학의 존엄을 이어가는 작품이라면 다른 상상이 있었어야 했다. 일국 내의 자신의 교환관계에서의 부당한 처지만을 인지하는 주체는 그의 윤리적 타당성을 금방 잃어버린다. 작품 내의 여성들은 시종일관 체제 내에서의 인정투쟁, 곧 자본의 인정을 받고 싶어 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를테면, 작품 속의 인물이 대한민국에서만의 문제가 아니라 인류 일반에 있어 나타나는 성차별적 부조리, 나아가서 그것을 만드는 요소이자, 여타 문제의 주요한 요소인 자본에 대한 문제의식을 서술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김지영을 비롯한 인물들은 노동시간 단축에 대해 고민을 해볼 수도 있었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진다면, 남자와 여자로 구분되는 통념적인 대립을 무화시키고 약자 일반에 보편적인 윤리의식을 담지하는 강력한 정치적 주체가 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런 문제의식에 관해, 성별 분업에 대한 내 생각을 예로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선진국을 보면 성별에 따른 분업이 지양되고 자유로운 선택에 따라 직업을 선택하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한 국가의 차원으로 보면 성별 분업이 극복된 듯이 보일지라도 거시적으로 보면 그렇지 않다. 선진국에서 성별 분업이 줄어든 듯 보인다고 해도, 그것은 출산을 하지 않는 대가로 얻은 일이다. 개발도상국의 노동자는 일자리를 찾아서 선진국으로 떠난다. 선진국은 개발도상국에서 부족한 인구를 유입시켜서 인구의 부족분을 조율한다. 또한 선진국을 보면 노동시간이 줄어서 육아와 노동의 병행이 쉽게 된 환경이 만들어진 듯이 보이나, 선진국의 개선된 노동 환경은, 세계화된 자본이 한 국가 내에서 자급자족하는 시스템을 붕괴시키고 한 국가 내의 산업 구조가 외국에 의존하도록 만듦으로써, 개발도상국 혹은 개발도상국의 국민이 선진국의 국민이 피하는 업종을 도맡게 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총체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선진국은 성별 분업을 착취로써 지양하고 있다. 실천의 심급은 여기까지 미쳐야 한다.
문학 자체의 창조력을 포기하고 정치적 의도만을 달성할 셈이라면, 문학이 가진 상투를 벗어내는 것이 정직하다. 대신에 데모를 할 수도, ‘내러티브 탐사 보도’를 할 수도 있을 것이다.(가라타니는 인도인 작가 아룬다티 로이의 예를 들고 있다. “인도인 작가 아룬다티 로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녀는 1997년 영국의 부커상을 받았는데, 그 작품이 베스트셀러가 되어 매우 유명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처녀작으로 상을 받은 후, 소설은 쓰지 않고 인도에서 댐건설 반대운동, 반전운동 등으로 분주합니다. 발표하는 저작도 그런 종류의 에세이뿐입니다. 구미에서 인기를 얻은 인도 작가는 아메리카나 영국으로 이주하여 화려한 문단생활을 보내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왜 소설을 쓰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로이는 자신은 소설가이기 때문에 소설을 쓰지 않는다. 쓸 것이 있을 때만 쓰며, 이런 위기의 시대에 무사태평하게 소설 따위를 쓰고 있을 수는 없다는 식으로 답하고 있습니다.
로이의 언동은 문학이 책임지고 있던 사회적 역할이 끝났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문학으로 사회를 움직일 수 있는 것처럼 보이던 시대가 끝났다고 한다면, 이제 진정한 의미에서 소설을 쓴다는 것도 소설가라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그렇다면 소설가는 그저 직업적 직함에 지나지 않는 것이 됩니다. 로이는 문학을 버리고 사회활동을 택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문학’을 정통으로 계승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가라타니 고진, 『근대 문학의 종언』, 조영일 역, 도서출판 b, 2006, p63-64)
문학의 ‘잔영’이 만들어내는 시차를 이용해서 자신의 의도였던 ‘내러티브 탐사 보도’를 했던 것이라면 영리한 전략이다. 작가는 가라타니의 종언 테제를 비껴나가지 못했거나, 종언 테제를 받아들이고 문학을 수단으로 이용했다. 그러나 작가가 가졌던 정치적 의도는, 적어도 지금의 네이션 체제의 근본적인 변화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긍정할 수가 없다. 『82년생 김지영』은 자족하고 위로받을 여성들, 우리 사회의 교양을 내면화할 남성들에게 필요한 소설에 다름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새로운 정치적 상상력을 불어넣는 글쓰기는 어떻게 가능한가? 발터 벤야민은 쓰고 있다.“사적 유물론자는 역사의 서사적 요소를 포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역사는 그에게 어떤 구성의 대상이 되는데, 그 구성의 장소를 이루는 것은 공허한 시간이 아니라 특정한 시대, 특정한 삶 그리고 특정한 작품이다. 그는 그 시대를 사물화된 ‘역사적 연속성’을 폭파하여 거기에서 끄집어낸다. 그래서 이런 식으로 그는 한 시대에서 한 특정한 삶을, 필생의 업적에서 한 특정한 작품을 캐낸다. 이러한 구성에서 얻어지는 수확은, 한 작품 속에 필생의 업적이, 필생의 업적 속에 한 시대가, 그리고 한 시대 속에 전체 역사의 진행 과정이 보존되고 지양되어 있다는 점이다. […] 역사학의 대상은 어떤 단순한 사실들의 뭉치가 아니라 오히려 과거라는 씨줄이 현재라는 직조 속에 엮어 넣어진 상태를 나타내는 일군의 소수의 실들이다. (우리가 이처럼 엮어 넣어진 상태를 단순한 인과율적 결합과 동일시한다면 그것은 잘못일 것이다. 그런 상태는 오히려 일종의 변증법적 직조이다. 그 실들은 수백 년 동안 잊혀질 수도 있지만, 현재의 역사 진행은 그러한 실들을 비약적으로 또 눈에 띄지 않게 다시 붙잡을 수 있다.) 순전한 사실성에서 벗어난 역사적 대상은 어떠한 ‘기리는 평가’(Würdigung)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러한 역사적 대상은 현재성(Aktualität)과의 애매모한한 유사점들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현재성이 해결하지 않으면 안되는 엄밀한 변증법적 과제 속에서 구성되기 때문이다.” (발터 벤야민, 「수집가이자 역사가 에두아르트 푹스」,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폭력비판을 위하여/초현실의 외󰡕, 최성만 역, 도서출판 길, 2008, p261, p280)

모든 사태를 기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글쓰기는, 가치판단에 따라 사태의 경중을 고려하여 사태를 기입하거나 빼는 ‘체계’를 갖추어야 한다. 체계는 체계성을 갖는다. 체계성을 가능하도록 하는 것은, 칸트 식으로 말하자면, 우리의 이성개념, 곧 이념이다. 칸트가 직접 말하진 않았지만, 이념을 추동하는 것은 비의식(무의식이라고 말해도 좋다.)이다. 그는 이론이성과 이념의 한계를 규정했지만, 실천이성의 요청에 따라 다시 폐기했던 이념을 불러온다. 이념의 실재성은 도덕법칙의 표상으로 구제되는데, 그 표상이 어떻게 가능한가를 따져 물으려면 우리는 의식에 현전하지 않는 어떤 것을 추적하는 과정, 이를테면 정신분석과 같은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벤야민은 인용문에서 역사를 서술하는 비의식적 주체가 탄생하는 과정에 대한 분석까지 나아간다. 역사는 구성의 대상이라고 말하는데, 상대주의적 관점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사물화된 역사적 연속성을 폭파하여야 끄집어낼 수 있는 어떤 특정한 ‘장소’는, 전체 역사의 진행 과정을 재배열할 가능성으로서의 ‘내적인 분열’이다. 내적인 분열을 해소하는 것은 그 장소를 역사에 기입하는 것인데, 그러려면 전체 역사의 과정은 재배열되어야 한다. ‘장소’는 역사가의 현재성에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될 무엇으로 위치하는, 어떤 비의식적 동기다. 벤야민의 그것은 물론, 벤야민식의 사적 유물론의 체계성의 분열일 것이며, 그것을 해결하고자, 벤야민의 비의식적 주체가 탄생한다. 이런 점에서, 역사는 해결해야 할 현재로부터 구성된다. 타자(‘특정한 작품’)에게서 분열되어버린 동일성을 탈구축하는 운동. 그것이 벤야민이 말하는 사적 유물론자가 포기하지 말아야 할 서사적 요소다. (벤야민이 말하는 글쓰기를 육화하고 있는 작가의 예로, 이청준이 적당하다. 조남주의 글쓰기와 좋은 대조를 이룬다. 인용한다. “소설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마다 매번 곤혹감을 느끼는 것은 우선 ‘소설이 무엇이냐’라는 물음에 대한 시원한 대답을 마련할 수 없다는 점이다. 그야 소설이란게 원래 그런 것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 바꾸어 말해 소설은 우리 삶의 반영이자 꿈의 표현이 아닐 수 없으므로, 그 삶을 몇 마디 간단 명료한 수사로 정의내릴 수 없듯이 소설의 이해 또한 각자의 모색과 발견의 과정을 드러내 보일 수 있을 뿐 영구불변의 본질적 정의는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는 이야기다. 의미론상으로 우리 삶에 대한 최종적 이행 도달할 때 그 확정의 삶은 더 이상 지속될 가치가 없는 것처럼, 소설 또한 우리의 미확정의 삶과 함께 영구한 모색과 논의의 열린 도정에 있어야 할 정신 상태의 한 표현 기제라는 점에서 더욱 그러할 터이다. […] 하지만 소설 일이란 원래 그 같은 삶의 질곡과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견디고 이겨 넘으려는 희망(전망)과 도전의 여정 아닌가. 더욱이 소설을 자기 삶의 길로 선택한 사람은 그의 삶이 아무렇게나 끝날 수 없음처럼 그것이 아무리 어렵더라도 계속 그 길을 가야 한다. 그것이 비록 별 성취를 거둘 수 없을 때라도 자신의 삶 때문에 계속 소설을 써야 한다. 그리고 나는 지금까지 대개 그렇게 해온 셈이다.”, 이청준, 「나는 왜, 어떻게 소설을 써왔나」, 신화의 시대, 물레, 2008)

이런 관점에서 평가해 볼 때, 높이 평가할 만한 여성주의 소설이라면 새로운 여성상을 기입하는, 그래서 우리의 통념 전체를 재배열하게 할 수 있는 소설이라야 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어찌 글쓰기뿐이겠는가. 우리 일상에서의 판단에도 이질적인 새로움, 즉 타자에의 개방성은 기존의 어떤 이념보다도 윤리의 기본 조건일 것이다. 윤리는 정치의 빈틈에 자리한다. 에마뉘엘 레비나스에 따르면, 정치는 어떤 경제성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그러나 윤리는 다르다. 레비나스에게 경중을 따질 수 있는 ‘도덕성’은 윤리에 속하지 않는다. 순수하게 윤리적인 사태는 경제성을 벗어난다. 계산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계산이 불가능한 타자의 얼굴에 응답하는 것이다.
레비나스는 정치가 반드시 순수한 윤리적 사태, 즉 타자에의 책임에 감시를 받아야 한다고 말하지만, 정치를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었다. 정치가 없는 순수주의는 악의를 가진 이들의 먹잇감에 다름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정치에 참여할 수밖에 없으며 그것이 가진 경제성의 폭력 속에서 무한한 업보를 쌓게 된다.
자크 데리다는 레비나스의 윤리학을 수용하지만, 순수주의에 매몰되지 않는다. 그는 자기 동일성이 이질적 타자와 마주한 지점에서 겪게 되는 아포리아에서의 ‘결단’을 요구한다. 그것은 기존의 합리적 질서, 즉 규정적인 판단을 존중하면서도 타자와의 마주침에서 필요한 반성적인 판단을 해야 하는, 두 판단이 교차하는 좁은 문을 지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실존적인 삶의 상식과도 부합하지 않는가.
그 동안 여성들이 받아온 차별을 만회하기 위해 페미니즘에 무조건적인 지지하는 것, 혹은 소수자를 위한‘정체성 정치’가 아니라 체제의 모순을 가능하게 하는 물적 토대를 바꾸려는 움직임. 이것들은 모두 업보를 각오한 결단이어야 하는 셈이다. 우리는 언젠가 윤리와 정치가 불화하지 않을 수 있는 ‘도래할 민주주의’를 꿈꾸며 결단의 순간들을 지나야 한다. 타자를 만났을 때의‘태도 결정’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언제나 나의 태도를 부스러뜨릴 각오를 한다는 데 있다.

장려 김*지 정치외교학과 도서: 어쩌다 한국인
독후감: 대한민국에서 한국인으로 살아간다는 것
search
어쩌다 한국인으로 태어난 걸까. 늘 생각해 봤다. 국가에 대한 개념조차 흐리던 어린 시절에는 전혀 고민하지 않았던 주제였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내가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에 살고 있다는 사실과 대한민국 이외에 다른 많은 국가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밤늦게까지 학교에 묶여 있어야 했던 시절에 다른 나라들은 이렇게 청소년을 괴롭히지 않는다기에, 처음으로 대한민국과 한국인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봤었다. 나는 어쩌다 대한민국에 태어나 한국인으로 살고 있는가. 한국인의 모습은, 그리고 나의 모습은 어떠한가.
물론 그렇지 않은 것도 있었지만 책의 많은 부분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특히 한국인의 문화심리학적 특성들을 정말 잘 짚어내고 있었다. 주체성, 가족확장성, 심정중심주의, 관계성, 복합유연성, 불확실성 회피가 그것이다. 단어가 조금 생소할 뿐, 그 안의 내용은 우리가 이미 충분히 경험하고 또 공감하는 것들이었다. 한국인은 한국인만의 독특한 심리들로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를 움직여가며 하나의 정체성을 형성해온 것이다. 책 속의 사례들이 다 비교적 최근의 일들이라 더 깊게 이해할 수 있었다.
이전까지는 우리가 겸손한 민족이라기에 그러려니 하고 살았었다. 그 판단이 서양 사람들을 기준으로, 일본을 표본으로 한 것을 알고 나서야 일본인과는 다른 한국인과 중국인만의 모습이 있다는 것을 다시금 떠올렸다. 확실히 중국은 놀라울 만큼 국민 개개인에게 중화사상이라는 자국민 중심주의가 내재해 있고, 한국에는 어디서든 자신의 모습을 담는 셀카 열풍이 분 지 오래다. 한국과 중국은 주체성을 중요하게 여긴다.
또한 한국인과 정의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오류를 최소화하는 것이 사법부의 본질인데, 우리 한국인들은 자신들이 법 위에 있다고 생각한다. 온라인상에서만 봐도 사법부의 판단에 왈가왈부하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으며 사법부와 정부, 의회에 대한 불신이 팽배해 있다. 나와 남에게 다르게 작용하는 이중 잣대 역시 한국인의 특성이었다. 자신이 법을 어기면 그것이 범법적인 것이라 생각하기보다는, 합리적인 판단에 근거한 더 나은 결정이라고 느낀다. 또한 자신과 다른 판단은, 아무리 공적으로 타당한 것임에도 정의롭지 못하다고 느끼는 것이다. 현재 한국사회에서 어느 한 사람을 매장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사람들은 댓글 하나, 말 한마디를 거들며 자신이 어떻게든 영향을 미치는 사람이길 바란다. 자신의 행동으로 인해 뭔가가 바뀌고 있다는 것을 체험하고 싶은 것이다.
이러한 독특한 특성들을 가진 한국인에게 군대는 힘든 곳이다. 책에서 군대 사례를 언급할 때, 학교도 별반 다를 것이 없다고 보았다. 군인이든 학생이든 그들의 개별적인 정체성을 억누르고 한 공간에서 똑같은 일을 하기를 강요받기 때문이다. 군대는 국가 안보를 위한 막중한 공적 임무를 위한 것이지만 우리에게 그러한 임무가 자랑스러운 개념으로 다가오지도 않을 뿐더러 그 처우는 범죄자보다도 못한 것만 같다. 때문에 그 역할에 대한 거리낌이 생기는 것이다. 군대와는 조금 다른 양상이지만 요즘 학생들이 자신의 꿈을 찾지 못한 것도, 획일적인 교육시스템의 폐해 탓이 크다고 생각한다.
군대와 학교에서의 공통점은 그 속에서도 한국인은 사적관계를 찾는다는 것이고, 자신만의 가족을 구성한다는 것이다. 작가는 군대 내부 문제와 관련해 군대라는 곳의 집단적 정체감 정립이 어느 정도의 해결책이 될 것이라 말한다. 군인이라는 대상 자체의 인식이 바뀌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학교는 학생이라는 신분이 자신의 미래를 위한 단계라는 것을 명확히 인식시켜 그 기간이 쓸데없지 않은 것이라는 생각을 심어 주는 것도 하나의 방안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꿈이 없는 대부분의 아이들에게 미래를 위한 현재의 희생을 강요하는 것은 잔인한 일이며, 공부만이 그 수단이 되는 것 역시 잔인하다. 이 과정에서 공부는 어떻게 하든 수단에 불과하게 된다. 그렇기에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아이들의 개별적인 주체성을 더욱 존중해 줄 사회를 만들어 가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건전한 갑을관계라는 단어가 신선했다. 어떤 사회에서든 완전히 평등한 관계를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우리는 민주주의 국가로 이행하면서 분명 이론적으로는 모두가 평등한 사회를 그렸겠지만, 고대 그리스의 직접민주주의 아래에서도 우리는 평등하지 못했다. 마르크스가 발견한 것도 생산력의 경제적인 소유관계로부터 나오는 생산관계이다. 생산력을 어떤 형태로 소유하느냐에 따라 계급이 나뉘는 것이다. 생산력과 생산관계가 모순되어 새로운 생산양식으로 변모하더라도, 결국 또 다른 형태의 생산관계가 생겨날 뿐인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건전한 갑을관계라는 말이 가장 현실적인 대안인 듯하다. 한국사회를 막연한 유토피아로 그려내지 않았다는 것이 주목할 점이다. 작가는 냉정하게, 부정적이지 않게, 게다가 근거 없이 긍정적이지도 않게 우리 사회를 파악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최대한 객관적이고 정확한 판단에 근거해야 미래의 우리 사회의 모습을 제대로 그려볼 수 있을 것이다.
휴대전화부터 가전제품에 이르기까지 많은 기술이 발전한 세상이다. 그렇게 빨라진 세상 속에서 우리의 삶은 더 여유를 되찾았을까. 아니면 그렇게 생겨난 시간을 또 다른 일들에 쏟아 붓고 있을까. 아마도 대부분의 한국인은 후자일 것이다. 나 역시도 쉬지 않는다. 이건 사람들이 느려져야 해결될 문제이다. 한편, 미국의 중산층의 기준은 물질이 아니다. 삶의 의미와 가치를 찾는 사람들이 진정한 중산층이다. 물질적인 부가 아닌 정신적인 가치를 좇는다는 것이 와닿지는 않는다. 솔직히 말하면 두렵다. 물질적인 부가 어느 정도는 충족되고 나서야 정신적인 가치를 좇는 것이 바람직한 순서일 것만 같다. 가장 기본적인 욕구는 채워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이러한 생각이 물질에 집착하는 첫 단계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물질에 대한 과도한 집착은 버리고 세속적인 성공을 넘은 그 무언가를 꼭 찾았으면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가장 뜨끔했던 부분은 살아가면서 무엇 하나를 포기하는 것이 힘들다는 것이다. 인생은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가능성을 포기하는 것이라는 점을 새삼 깨닫는다. 대학에 다니는 동안 공모전이며 대외활동이며 계속해서 무언가를 하려고 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고등학교 때부터 하고 싶은 것은 다 해야 직성이 풀렸기에 대학교에 와서도 그렇게 살아왔다. ‘피로사회’의 진단은 무엇보다도 한국인에게서 심하게 나타난다. 성과를 위한 끊임없는 자기 착취. 한국인의 모습과 일맥상통한다. 휴일이 되어도 마음 편하게 쉬는 사람은 많지 않다. 미래를 위해 현재를 포기해야 하는가. 처음 자기 착취라는 진단을 받았을 때는 그래도 이 삶을 온 힘을 다해 즐기겠다는 입장이었다. 미래를 위해 지금을 희생한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일종의 합리화일진 모르겠지만 사회의 주어진 범위 내에서 나는 최대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한다고 여기고 있다. 하지만 제어장치 하나 없이 이대로 계속 달리게 된다면 그것은 오히려 희생의 연속이 될 것만 같다. 어쩌면 이제는 잠깐 쉬어서 조금 더 진지하게 먼 미래와 최종적인 목표를 생각하는 시간이 필요한 듯도 하다.
실은 책을 읽으면서 또 한 번의 무력감을 느꼈다. 나를 본질적으로 규정해 버리는 것들 앞에서 무슨 반응을 보여야 할지 항상 난감할 뿐이다. 처음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라는 책을 접했을 때도 비슷한 기분이었다.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여서 더욱 우울함을 느꼈었다. 유전자에 의해 모든 것은 결정된다고 보고, 열심히 살아가던 내가 이기적인 유전자의 숙주에 불과하다고 했었다. 부정하기도 어려운 것이, 유전자는 분명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어쩌다 한국인’은 조금 다르게 그때의 기분을 떠오르게 하였다. 책을 읽으며 느낀 것은 나에게 전형적인 한국인의 특성이 곳곳에 있다는 것이다. 숨기고 싶었던 부분까지 다 파헤쳐진 것 같아 부끄럽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이것조차 어쩔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정하고 싶었지만 정말 한국인으로서의 자신은 이미 다 들통이 난 터였다. 태어난 그 순간부터 나는 한국인이었고, 한국에서 자랐으며, 앞으로도 한국인일 것이다. 그래도 위안이 되는 것은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와 그 속의 개개인, 우리 한국인들은 얼마든지 변화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대한민국은 지금 사춘기에 있다. 그리고 그 혼란의 공간에서 나는 사춘기를 겪었고 아직 완전한 어른이 되지는 못하였다. 이왕 한국인으로 태어난 거, 씩씩하게 살아보겠다. 서구화의 물결 속에서 우리의 가치를 깎아내리는 짓은 더는 하지 않을 것이다. 한국인은 한국인이다. 책을 읽으면서 느낀 점은 내가 전형적인 한국인이라는 것이다. 한국인인 게 꼭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지만 좋든 싫든 이 나라에 태어난 이상 혼란과 좌절의 사춘기를 이겨내는 멋진 한국인으로 한번 살아볼 생각이다. 청년 대한민국의 모습은 좀 더 건강한 모습이기를, 그리고 나의 사춘기도 멋지게 타오르며 계속해서 빛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장려 김*훈 고고학과 도서: 직업의 이동
독후감: 직업의 이동
search
1. 행복, 그리고 직업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 수 있을까?”
‘행복’이라고 하는 것이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가치 중 하나로 급부상한 현대 사회에 있어서 모든 사람들이 한번쯤은 해봄직한 고민일 것이다. 하지만 책의 도입부에 제시된 대한민국의 저조한 행복지수는 우리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그 해답을 찾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는 그만큼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복잡한 무엇인가가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책은 그 난해만 물음에 과감하게도 ‘직업’이라고 하는 간단한 답을 내놓으면서 그 서장을 열고 있다.
확실히 우리의 행복 즉, 우리의 삶의 질은 직업과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있다. 우리는 깨어있는 시간 중 가장 많은 부분을 일을 하는 것에 할애하고, 그것을 통해 획득한 돈을 바탕으로 삶을 꾸려나간다. 또한 우리가 맺고 있는 많은 인간관계들 역시 가족과 몇몇 친구들을 제외한다면 지금 가지고 있는 직업과 관련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삶의 질을 결정짓는 여러 중요 요인들 중 대부분이 결국 직업과 연관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저자는 다소 색다른 질문을 하면서 우리 스스로가 지금 행복한지 묻고 있다, ‘당신의 직업, 안녕하십니까?’라고.
불행하게도 행복을 선사해주어야 할 우리의 직업들은 지금 안녕하지 못하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 스스로가 자신의 직업이 안녕하지 못하다고 느끼고 있다. 저자가 말하였듯 행복이 삶과 가장 깊은 관련이 있다고 하였을 때, 우리의 직업들이 안녕하다면 우리는 지금 행복하여야만 하지만, 지금 우리는 그러지 못하기 때문이다. 앞에서 언급하였던 저조한 행복지수가 이를 증명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직업들은 왜 안녕하지 못한 것일까? 이것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다지만, 우선 우리 스스로가 우리의 직업을 ‘좋은 직업’이라고 느끼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좋은 직업’이란 무엇일까? 행복에 관한 질문과 마찬가지로, 이 질문 역시 그 답을 내놓기가 쉽지만은 않다. 좋은 직업이란 사람마다 생각하는 것이 천차만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좋은 직업’을 정의하기 위해서는 우선 사람들의 직업 가치관을 이해하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것에 관련하여 책에 나와 있는 2014년 한국고용정보원에서 실시한 직업가치관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평균적으로 직업 안정성, 몸과 마음의 여유, 성취 그리고 금전적 보상의 순으로 직업의 가치를 매기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실제로는 어떠할까? 많은 사람들은 여유 있고 성취감을 느낄 수 있는 안정적인 직장을 가장 선호할까? 그렇다면 만약 취업을 준비 중인 대학생들 앞에, 연봉이 3천만 원쯤 되는 도서관 사서와 연봉이 1억쯤 되는 대기업 사원이라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대부분 전자를 택할까? 취향에 따라 차이는 있을 수 있겠지만 생각보다 많은 대학생들이 후자를 선택할 것이며, 나 또한 그러하다. 이것은 결코 도서관 사서라는 직업을 무시해서가 아니다. 그것은 분명 충분히 안정적이며, 여유롭고, 경우에 따라 성취감을 줄도 있다. 다만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여유나 성취 같은 것을 높게 평가하더라도, 실제로 직업을 선정하는 것에 있어서만큼은 금전적 보상이 더 우선시 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러한 판단은 평소 생각하던 ‘좋은 직업’과 실제 자신의 직업 사이에 간극을 형성하게 되고, 결국 직업으로부터 행복을 얻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나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적어도 저자 역시 이러한 생각을 바탕에 깔고 있을 확률이 높다. 직업 가치관 순위표를 제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직업의 세계를 설명하는데 있어서 직업 가치관에서 고작 4순위를 차지한 금전적 보상 즉, 연봉을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만약 가치관에 부합하면서 금전적으로도 많은 보상이 뒤따르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면 그 사람의 직업은 무조건 안녕하다고 볼 수 있을까? 안타깝게도, 그 사람은 안녕하다고 느낄지 모르겠지만, 직업 그 자체가 정말로 안녕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이 책의 제목이자, 저자가 본질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직업의 이동’과 관련이 있다.

2. 직업의 이동

‘직업’이라고 하는 개념이 생긴 이래로 직업의 세계는 끊임없이 변화해왔다. 가장 최초의 전문직이라고 볼 수도 있는 석기나 토기 제작공인들은 몇몇 장인들에 의해 간신히 명맥만 유지하고 있으며, 한때 국민들 중 절대다수를 차지하였던 농업 관련 종사자들은 이제는 시골로 찾아가지 않는 이상 쉽게 찾아 볼 수 없다. 어떠한 직업은 아예 멸종하기도 하였고, 어떠한 직업은 새롭게 생겨나기도 하였다. 그리고 인간은 그러한 끊임없는 직업의 이동에서 살아남아 왔다. 자신의 직업이 무언가에 의해 대체되면 그것이 할 수 없는 다른 일을 찾고,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새로운 직업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당금 직면한 직업의 이동은 심상치 않다. 인구변화와 기술의 진보라는 두 가지 요인은 앞섰던 산업혁명들에 이어 또다시 대규모의 직업 이동을 예고하고 있다. 수많은 직업들이 사라질 위기에 처해있고, 당장은 위기에 빠져있지 않은 직업들도 그 미래를 장담하기 힘들다.
우선 인구변화를 살펴보았을 때, 당장 직업의 세계의 영향을 끼칠만한 사항을 꼽아보라면 급격한 출산율 감소와 초고령화 사회 진입을 들 수 있다. 기술과 사회는 끊임없이 발전해나가는 데, 그러한 발전에 비교적 둔감한 노년층은 두터워지고, 그러한 발전을 누려야 할 청년층은 갈수록 줄어든다는 의미이다. 직업이라는 것이 결국 기술과 사회의 산물이라는 것을 고려하였을 때 이는 정말로 심각한 문제이다. 만약 이러한 현상이 지속된다면, 새로운 직업이 생겨났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수행할 능력을 지닌 사람이 부족해 직업이 소멸할 수도 있으며, 언젠가는 더 이상 인간이 할 필요가 없는 업무능력만 지닌 인간들만이 남게 될 지도 모른다. 인간 스스로가 이루어낸 진보에서 인간 스스로 도태되는 것이다.
사실 더 큰 문제는 기술의 진보 그 자체이다. 기술은 계속하여 진보해왔지만 인간은 늘 ‘인간은 할 수 있지만, 기계는 못 하는 일이 있다.’며 스스로 자위를 해왔다. 기계는 감정과 창의성이 결여되어 있어 결국 인간보다 못한 판단을 내릴 것이라고 생각해 온 것이다. 하지만 정말로 그러할까? 2016년 3월, 이러한 생각을 뒤집을 수밖에 없는 사건이 일어났다. 바로 이세돌과 알파고의 바둑 대결이다. 판단과 전략·전술의 정수라고 여겨온 바둑에서 인간이 인공지능에 대패한 것이다. 슬프게도, 기계는 인간을 뛰어넘었다. 비록 아직은 최첨단 시스템에 한정된 결과이기는 하지만, 머지않아 우리의 일상 곳곳에서 인간보다 더 나은 판단을 하는 기계를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곧 합리적인 판단을 필요로 하는 수많은 직업들이 더 이상 인간의 전유물이 아니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고 하여 희망이 없는 것만은 아니다. 위기는 기회라고 했던가, 인구변화는 여러 직업을 앗아감과 동시에 새로운 직업을 창출하기도 하였다. 기술의 진보 역시 마찬가지이다. ‘아직’은 기술의 진보가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인간은 언제나 그래왔듯 기술의 진보를 피해 또 다른 직업의 세계를 만들어내고 있다. 가령, 인구변화는 바이오 헬스 산업의 부흥을 알리고 있으며, 기술의 진보는 아직 인간의 능력을 필요로 한다. 윤리성이나 효율성 등 측면에 있어서 기계는 아직 더 많은 발전을 필요로 하며, 상용화를 이루기까지는 아직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적어도 아직은 피할 곳이 남아있는 것이다.

3. 이동의 끝

요즘은 어디서든 4차 산업혁명이나 사라질 직업들, 전망이 밝은 직업들에 관한 연설이, 강의, 책 같은 것을 쉽게 접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것들의 공통점은 직업의 세계에 위기는 있지만 결국 또 다른 기회가 있을 것이라며 우리를 안심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이 책 역시 마찬가지이다. 저자는 위기의 직업을 한 장에, 기회의 직업을 두 장에 걸쳐서 이야기하고 있다. 이는 얼핏 위기보다 기회가 크다는 느낌을 준다. 하지만 책을 읽어본다면 누구나 알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독자들을 우롱하는 착시에 불과하다는 것을. 저자는 인구와 기술의 변화가 바이오 헬스 산업과 IT 산업의 밝은 미래를 이끌어 낼 것이라고 우리를 위로하고 있다. 하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 거의 모든 분야에서 직업들이 사라져가고 있는 가운데, 두 가지 분야만 살아남은 것에 불과하다. 사실 이것도 ‘아직’ 살아남아 있는 것에 불과하다. 기술은 더욱 더 우리의 직업 세계를 죄여 올 것이며, 우리들은 몇몇 일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아등바등 싸워나갈 것이다.
내가 이 책을 읽고 나서 가장 처음 든 생각은 바로 ‘왜’이다. 왜 인간은 직업으로부터 행복을 얻어야하고, 왜 인간은 직업의 이동에 전전긍긍해야하는가? 나아가 본질적으로는 왜 일을 해야 하는가? 거듭 이야기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직업을 통해 행복을 얻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업무가 주는 스트레스나 직업 가치관과 실제 직업의 간극, 육체적 피로 등의 고통이 성취나 보상보다 훨씬 크게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에 직업의 이동이라는 골칫거리가 바로 눈앞까지 다가온다면 그 고통은 더욱 커질 것이 자명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만 하는 것일까? 답은 간단하다. 직업을 놓아주는 것이다.
최초의 도구가 무엇이었을지는 명확하지 않다. 하지만 적어도 그것이 왜 발명되었는가는 명확하다. 바로 인간의 편의를 위해서이다. 기술이 발전하여 도구의 기능과 형상이 아무리 진화하더라도 그 목적만큼은 변하지 않는다. 설령 그것이 마침내 인간을 뛰어넘더라도 마찬가지이다. 기술의 진보는 인간의 직업을 빼앗아 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편의를 위해 노동을 대신 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 인간이 살아남기 위해 해야 할 일들을 모두 기계가 대체할 수 있을 정도로 기술이 진보할 날이 머지않았다. 우리가 할 일은 지긋지긋하게 인간을 괴롭혀왔던 노동을 기계에게 떠넘기는 것뿐이다. 그리고 아무런 죄책감 없이 삶을 즐기기만 하면 된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말도 있건만, 정작 우리는 왜 즐기기 위해 만든 것들을 피해 도망치고 있단 말인가.
저자는 책의 말미에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 대비해, 우리가 가져야할 자세들을 언급하고 있다. 인문학적 사고, 폭넓은 사고, 비판적 사고 등이 바로 그런 것이다. 좋은 말이다. 이것들은 분명 4차 산업혁명을 피해 직업의 세계에 남아있기 위한 중요한 키워드들이다. 하지만 그뿐이다. 이러한 자세들로 4차 산업혁명을 무사히 피해가더라도, 다가올 5차, 6차 산업혁명마저 피해가리라는 보장은 없다. 기술은 끝없이 발전해나갈 것이고, 기나긴 직업의 이동은 결국 기술의 승리로 끝을 맺을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그들을 지긋지긋하게 괴롭혀온 직업과 노동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될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생각하였을 때, 미래를 대비하는 것에 있어서 반드시 우리가 가져야할 것은, 오히려 직업을 서서히 놓아주려는 마음가짐이 아닐까?

Comments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