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도서관 독후감 공모전

2021.11.16

선정도서 6종 240권
참가대상 부산대학교 학부생, 대학원생 및 부산 지역 주민
참여방법 도서관 독후감 선정도서(1인 1책, 선착순)를 수령 후 자유롭게 독서하고 해당 도서의 독후감 제출
참여기간 2021년 9월 15일 ~ 10월 28일
시상내역 총 8편(부산대 총장상 및 도서관장상, 총상금 160만원)

※ 본 사업은 부산대학교 국립대학육성사업(REN)의 예산을 지원받아 운영되었습니다.

우수 독후감 선정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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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 이름 학과 선정도서/독후감제목 보기
최우수 김*진 예술문화영상학과 도서: 있지만 없는 아이들
독후감: 슬픔을 발견하는 눈에서 연대하는 손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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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주변에서 미등록 이주민을 본 일은 없는 것 같다. 오다가다 마주친 사람 중 섞여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이들을 그냥 지나쳤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이 책을 본 이후 에야 하게 됐다. 그들의 존재를 인식하게 되니 이제서야 미등록 이주민에 대한 이슈를 볼 수 있게 됐다. 얼마 전 서울에 있는 친구집을 놀러 갔다가 횡단보도 앞에 걸린 현수막에 걸음이 멈췄다. ‘불법체류 외국인도 비자확인 없이 무료로 검사가 진행되니 안심하고 코로나19 검사받으세요.’라는 문구 때문이다. 이 말은 불법 체류 외국인이라 면 안심하고 코로나 19 검사도 받을 수 없던 상황이 기본이었음을 드러낸다. 정부가 불법체류외국인 통보 의무 면제 제도를 실시하며 코로나 확산을 방지하고 그들을 보호 하려는 방책을 냈지만, 이는 당장의 불길만 끄기 급급할 뿐이지 않은가 생각했다. 횡단 보도를 건너 친구의 집에 도착할 때까지‘불법체류’라는 단어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이탁건 변호사는 책에서‘불법체류자’라는 용어가 제공하는 고정관념을 지적 한다.“‘불법체류’라는 말이 애초에 법을 어긴 사람들이라는 이미지가 있어요. 존재 자체가 불법이니까 또 다른 불법도 저지를 수 있다고 생각하죠. 영화를 비롯한 대중매 체도 부당한 이미지 형성에 기여하지 않았을까요.”
리베카 솔닛은『이것은 이름들의 전쟁이다』에서“무언가를 정확한 이름으로 부르는 행위는 무대책・무관심・망각을 눈감아주고, 완충해주고, 흐리게 하고, 가장하고, 회피 하고, 심지어 장려하는 거짓말들을 끊어낸다. 호명만으로 세상을 바꿀 수는 없지만, 호 명은 분명 중요한 단계다.”라고 얘기한다. 저 현수막에는 불법체류 외국인이 아니라 미등록 이주민이라고 적혀야 한다. 이전에는 생각하지 않았을 일이다. 내가 전이었다면 그냥 지나쳤을 것을 발견하고, 생각하고, 걸음을 멈추게 만든 책 <있지만 없는 아이들>을 소개하고자 한다.이 책은 미등록 이주아동과 미등록 이주노동자가 겪는 현실을 다룬다. 사실 이주노동자가 겪는 차별 문제를 여태 한 번도 듣지 못하고 살았던 사람은 드물 것이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괴로움과 고통을 겪는지는 잘 알지 못 할 거다.
2002년 몽골에서 부모님을 따라 7살에 한국에 들어온 민우는 미등록 이주청소년이라 는 이유로 10년을 살았던 나라에서 부모님과 떨어져 홀로 쫓겨났다. 사건은 2012년에 일어났다. 민우가 알고 지내던 몽골 아이들 중 하나가 몽골로 돌아가게 돼서 송별회를 하던 중 지나가던 한국 청소년들이 욕을 했다. “몽골 새끼,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
시비가 붙어 한국 아이들과 몽골 아이들이 싸움이 났고 민우가 옆에서 싸움을 말리는 사이에 누가 신고를 했다. 경찰이 오자 다른 애들은 다 도망가고 민우만 잡혀갔다. 경찰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민우는 비자가 없는 게 드러나 바로 다음 날 외국인 보호소로 이송되어 구금됐다. 경찰에 잡힌 날짜가 10월 1일이었고 민우는 사흘만인 10월 5일 강제출국을 하게 됐다. 민우의 담임선생님은 추석 연휴가 끝나고 학교에 가자 민우가 없어서 민우의 행방을 수소문했다. 담임선생님이 경찰에 연락하자 경찰이 민우가 외국인보호소에 있다고 알려줬다. 추방 예정인 사람과는 면회가 되지 않지만, 선생님이 항의하여 외국인보호소 측에서 선생님과 민우를 만나게 해줬다. 다음날 인천공항으로 간 선생님은 승합차에 앉아있는 민우를 보았다. 민우는 같은 몽골행 비행기를 타고 갈 사람들끼리 도망가지 못하게 수갑을 엇갈려 차고 나란히 앉아 있었다. 많이 먹으면 화장실 간다며 하루 종일 먹을 걸 안 줘서, 새벽 일찍 나올 때 빵 한 조각 먹고 자기가 타고 갈 비행기가 올 때까지 온종일 승합차에서 대기했다고 한다. 민우를 보내고 민우의 담임선생님은 몇몇 단체를 찾아가며 상담했고, 사회단체의 노력으로 민우는 어렵게 정부의 입국허가를 받을 수 있었다. 이 일을 계기로 재학 중인 미등록 이주아동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아동과 부모를 추방하지 않고 교육권을 보장한다는 방침이 만 들어졌다.
나와 나이가 같은 이주아동 페버는 한국에서 태어나 9년간 합법적으로 살았지만, 2008년 아버지가 본국인 나이지리아로 갔다가 돌아오지 못하면서 가족의 체류자격이 상실됐다. 페버는 고등학교 3학년 때 유리 공장에서 일하던 중, 불시단속을 피해 도망 치다가 잡혀 청주외국인보호소로 구금됐다. 보호소에 있는 동안 페버는 제대로 된 의 료적 조치도 받을 수 없었다. 천식을 앓고 있는 페버를 위해 어머니가 보호소로 호흡 기약을 전해 주었지만, 일주일 넘게 그 약을 받을 수 없었다. 보호소에서는 일주일에 한두 번 오는 의사에게 약을 확인하고 나서야 전달받을 수 있는데, 그주에 의사가 오 지 않아서 일주일 넘게 페버에게 약을 주지 않은 것이다. 페버는『동아일보』의‘그림 자 아이들’ 보도 후 시민 1,650명에게 탄원서를 받아 극적으로 석방됐다. 페버는 비자 가 생기고 나서야 학교 수업 과제를 이메일로 보낼 수 있고, 운전면허도 딸 수 있게 됐다. 이전에는 할 수 없었던 일들이다. 아직 보호받아야 할 학생을 강제로 추방하고, 추방하는 과정에서도 반인권적인 행위들을 행한 국가가 내가 살고 있는 나라가 맞나 싶어 머리가 얼얼하다. 이 사람들의 고통이 어떤 깊이를 가지는지 알게 된 이상, 사람 은 그렇게 살 수 없다고 어떻게 사람을 그렇게 대하냐고 분노했다.미등록 이주아동들이 겪는 어려움은 당연한 것으로 여겨 생각하지 못한 부분에서조차 발생한다. 본인 명의의 핸드폰 개통이 어렵고, 봉사 사이트 1365자원봉사포털에 가 입하지 못하고, 티켓 예매 사이트 회원 가입이 안 돼서 좋아하는 아이돌 콘서트에 가지 못한다. 친구들과 떡볶이를 사 먹고 엔 분의 일을 할 때도‘계좌이체’를 할 수 없어 현금을 꺼내야 한다. 의료보험도 되지 않아 감기에 걸리면 그냥 참아야 한다. 그동안 이 아이들이 겪는 고통을 알지 못했고, 이제와 알게 되어 마음이 답답해진다. 그 고통을 알게 된 나는 이제 무엇을 할 수 있을까?“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한 이유로 행복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 하다”레프 톨스토이의 『 안나 카레니나 』 의 유명한 첫 문장이다. 하지만 나는 불행에서 어 떤 비슷한 흐름을 본다. 그 불행은 내가 겪는 고통과 비슷한 결을 공유하는 것처럼 보 인다. 나 또한 항상 들어야 할 사람이 아니라 목소리를 내야 할 사람이 되기도 하는 지위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이 교차점에 존재하는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헤아릴 수 있 는 능력을 이미 가지고 있다.
어떤 이들은 알면 고통스러우니 차라리 모르겠다고 얘기한다. 우리는 타인의 슬픔에 빚지며 살고 있지만, 그 사실을 모르거나 또는 외면하며, 그 슬픔을 누구에게 빚지고 있는지도 모르고 더러는 알려고 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자 해야 한다. 고통스러워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타인의 고통을 더 들여다볼 수 있도록. 우리는 용기 내서 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마땅히 고통스러워해야 할 때 고통스러워하며 슬퍼해야 할 때 슬퍼함을 우리는 용기라고 부른다. 타인의 슬픔에 값싼 동정을 얹는 일이 두려워서 아예 말하지 않기보다, 연대의 방법을 알고자 용기 내는 일이 내게 첫 번째 문턱처럼 느껴졌다. 수잔 손택은 자신의 저서 『 타인의 고통 』 에서 이렇게 말 했다.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한,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런 고통을 가 져온 원인에 연루되어 있지는 않다고 느끼는 것이다. 우리가 보여주는 연민은 우리의 무능력함뿐만 아니라 우리의 무고함도 증명해 주는 셈이다. 따라서 연민은 어느 정도 뻔뻔한(그렇지 않다면 부적절한) 반응일지도 모른다. 특권을 누리는 우리와 고통을 받는 그들이 똑같은 지도상에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의 특권이(우리가 상상하고 싶어 하 지 않는 식으로, 우리의 부가 타인의 궁핍을 수반하는 식으로)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 보는 것, 그래서 전쟁과 악랄한 정치에 둘러싸인 채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둔다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과제다.”
짧은 연민을 넘어서야만 슬픔을 발견하는 눈에서 연대하는 손으로 이어질 수 있을 것 이다. 그들의 슬픔이 나의 슬픔으로만 남지 않게 하기 위해서, 쉬운 동정과 시혜를 넘 어서 그들의 생존권과 존엄성에 대한 사유가 필요하다. 존재를 인식하는 일부터 언어를 시정하는 일로, 그들의 삶에 관심을 가지고 작은 목소리라도 보태는 일로 나아가야한다. 오랫동안 미루어져 왔던 일이다.
우수 정*리 언어정보학과 도서: 몽우리돌의 바다
독후감: 우리는 무엇을 그리고 어떻게 기록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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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우 작가와의 인연
김동우 작가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유 퀴즈 온 더 블럭’이라는 프로그램을 시청하고 난 후였다. 작가의 이름을 검색해보던 중 부산진구청에서 ‘2020 부산진 갤러리 기획전시 『뭉우리돌을 찾아서』 김동우 작가 사진전’이 진행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였고 친구와 가족들을 이끌어 부산진구청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작가님을 직접 만나고서는 작품 해설을 들었던 것이 작가님과의 내적 인연을 쌓아 나가는 시작점이었다. 뭉우리돌이라는 단어를 처음 듣고 책날개에 있는 뭉우리돌 단어의 역사를 살펴보았다. 서대문 형무소에서 투옥하고 있던 김구에게 한 일본 순사가 “지주가 전답의 뭉우리돌을 골라내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냐!”라는 이야기를 하였다. 이에 김구는 오히려 자랑스럽게 여기며 “오냐, 나는 죽어도 뭉우리돌 정신을 품고 죽겠고, 살아도 뭉우리돌의 책무를 다하리라”라고 답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이 책의 제목은 전 세계 곳곳에서 뭉우리돌처럼 박혀 대한독립을 위해 생을 바친 그들을 기리며 지었다고 한다. 10년이 넘는 학생의 시절 동안 한국사를 그렇게 공부해 왔지만 정확하게는 한국 내에서 발생한 한국의 역사만을 다루어 왔다. 김동우 작가를 알기 전까지는 국외에서의 독립운동이 진행된 사실 자체를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으며 국외 독립운동에 대하여 설명해보라고 한다면 중국에서 전개된 독립운동 몇 가지를 나열해보는 것이 전부였다. 그동안 국외에서의 독립운동에 무심하였던 자신을 성찰하면서 김동우 작가가 찾아왔던 국외 독립운동 역사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조금씩 찾아보기 시작하였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난 현재, 부산도서관에서 진행되고 있는 ‘관심 없는 풍경: 뭉우리돌을 찾아서 부산 경남 편’ 특별 기획전(2021.08.03.~2021.09.30.)에도 다녀온 후 학교도서관으로부터 『뭉우리돌의 바다』를 품에 안았다. 국외 독립운동의 지식을 통해서 할 수 있는 역사적 인물의 재평가 도산 안창호는 멕시코와도 인연이 있었다. 통합 교민단체인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의 초기 중앙총회장이었던 안창호는 해외에서 거주하고 있는 한인들이 독립운동의 핵심적 역할을 수행해 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의처우를 개선하고자 국외로 나가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 여정 중의 한 곳이었던 멕시코는 당시 한인들의 노동문제가 화두였던 지역으로 안창호는 한인들의 노동문제를 해결하고자 직접 멕시코로 출국하였다. 그곳에서 애니깽(Anniquin, 우리말로 용설란이라고도 하며 잎은 청백색이며 잎 가장자리에는 날카로운 가시가 있는 모양이다. 선박에서 쓰이는 밧줄의 원료로 사용되었고 현재에는 주로 술을 빚는 용도로 사용되는 식물이다.) 농장 주들과 한인 노동자 간의 부당한 관행을 완화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이외에도 멕시코 내에 흩어져 있는 한인들에게 독립운동 참여를 독려하고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등 국외에서 독립을 위한 노력을 전개해 나갔다. 안창호의 멕시코 일정이 끝나고 미국으로 돌아가려 할 때, 당시 대한제국이 일제의 식민지였으므로 일본이 발급한 여권이 있어야 한다는 이유로 인하여 비자 발급을 거부당한다. 안창호는 해외로 나가 대한제국의 독립운동을 알려야 했으므로, 즉, 더 넓은 무대로 향하기 위하여 중국인으로 귀화한 후 여권과 비자를 발급받았고 미국으로 돌아가 독립운동 전개에 힘을 보태게 된다. 안창호가 중국인이 되었던 사실은 당시의 배경을 비롯하여 국외 독립운동의 지식을 통해서 알 수 있게 된다. 물론 안창호가 우리나라 사람이며 국내외 독립운동에 힘썼다는 사실은 많은 사람이 알고 있지만, 혹여 중국인 안창호라는 말만 듣고 평가를 하는 사람이 있다면 국외 독립운동의 지식을 통해 안창호가 중국인으로 귀화할 수밖에 없었던 현실을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2016년 독립기념관에서는 안창호가 국적으로 인하여 어려움을 겪을 당시 묵었던 프란세스 호텔을 밝혀내었다. 호텔 1층 벽면에는 안창호의 얼굴과 그를 설명하고 있는 동판이 부착되어 있었는데, 김동우 작가는 프란세스 호텔의 모습과 1층 벽면에 부착된 동판 사진을 책에 실었다. 정확하게는 안창호의 얼굴이 새겨진 동판을 한 남성이 보고 있는 모습이다. 지금 당장 멕시코에 갈 수는 없지만, 안창호를 마음으로나마 만나보겠다는 이유를 들면서 멕시코로 향하여 이 프란세스 호텔에서 머물러 볼 수 있기를 희망한다. 한국의 정신을 이어나가기 위한 국외에서의 노력 해외의 많은 독립사적지를 다니고, 독립운동가들의 후손을 만나는 과정에서 김동우 작가는 한국의 문화들을 하나둘씩 발견한다. 멕시코의 살리나크루스에서 발견한 태권도 도장과 태권도를 배우는 아이들, 메리다 대한인국민회에서 듣게 된 아리랑의 가사와 선율, 미국 리들리에서 만난 독립문, 국외 독립운동사적지를 다니며 곳곳에서 만났 던 태극기, 묘비에 새겨진 한글, 독립운동가 후손들이 간직하고 있는 우리말, 한복, 그리고 김치와 고추장, 된장, 비빔밥 등 음식 문화까지 지구 반대편에서 만날 수 있었다. 세계 각국에 남아 있는 독립운동의 역사는 20세기 이민의 순간을 간직한 것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것을 기점으로 하여 이민자들의 기쁨과 슬픔, 외로움과 괴로움, 공허함과 허탈함 등 삶 속에서 느낄 수 있는 감정들의 순간까지 겹겹이 쌓아 올려져 간직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우석은 청산리 전투에 참여하여 마지막 생존자로 알려진 인물이다. 미국의 뉴욕 한 인교회에서 만난 인연으로 이우석의 딸인 이춘덕 후손을 만날 수 있었다. 이춘덕 여사는 아버지가 독립운동가였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그 자긍심을 가지고 살아왔지만, 날이 갈수록 목숨을 바쳐 헌신한 독립운동이 자녀들에게 남겨준 것이 무엇인지 의구심이 든다는 말을 전하였다. 독립운동가의 후손이라는 자긍심을 가지고 살아왔다는 이 말이 나에게는 크게 와닿았다. 비록 그러한 자긍심이 실제 어떤 도움을 주었다는 것으로 명확하게 정의 내려질 수는 없지만, 그 마음가짐으로 인하여 주변의 독립운동가 후손들을 비롯하여 지금의 우리에게까지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다. 이춘덕 여사는 김동우 작가와의 만남 후에 돌아가셨지만, 만약 죽음 이후의 삶이 존재한다면, 이춘덕 여사를 비롯한 모든 국외 독립운동가들과 그 후손들이 어떠한 제약에 부딪히지 않고 고향에 가보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작가는 독립운동사적지를 탐사해 나가는 과정에서 국외 독립운동의 역사는 지금까지도 이어져 가고 있음을 증거로 남기고자 한다. 국외 독립운동가, 그들의 나이듦과 죽음으로 인해 이민의 역사가 정지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들에게 그 현장을 직접 찾아가 보도록 하고 그곳에서 이민의 순간을 느낄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결국 그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것이었다. 책을 읽다 보면, 이 책과 함께 비행기를 타고 국외의 독립운동가 후손들을 만나 보고 싶은 생각이 불쑥 파고든다. 글과 사진으로 보는 것에서만 그치지 않고 오감을 활용하여 한인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는 그 현장을 느끼고 싶다. 어쩌면 김동우 작가는 이러한 점을 의도하고 『뭉우리돌의 바다』를 출판하였는지도 모른다. 사진으로 기록하는 역사 사진작가의 책을 읽다 보니 ‘사진’에 대한 크고 작은 생각들이 들었다. 우리가 읽고 있는 책의 저자들은 대부분 글을 통해 자신의 업적을 남겨왔을 것이다. 『뭉우리돌 의 바다』의 저자는 사진작가라는 직업의 장점을 이용하여 ‘뭉우리돌 찾기’라고 하는 국외 독립운동의 역사 기록과 그에 따른 자신의 업적을 사진으로 남겨오고 있다. 책 속에 사진이 있다는 것은 여러 측면에서 유용하다. 역사의 한 장면을 읽어 가는 독자의 관점에서 사진이 포함되어 있으면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장소를 상상해볼 수 있고, 글로는 모두 표현할 수 없는 내용을 설명할 수 있으며 사진작가의 촬영 기법을 결 과물로 확인하면서 때로는 글을 뛰어넘는 울림을 주기도 한다. 김동우 작가는 사진을 흐리게 찍는 기법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데, 이는 잊혀져 가는 역사를 표현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이것을 역설적으로 생각해보았을 때, 잊혀지면안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이라 생각된다. 나뿐만 아니라 주변의 많은 사람들은 사진이라는 수단을 자주 활용한다. 어쩌면 자주 사용하는 단계를 넘어서 항상 사용한다고 보아도 무방할 정도이다. 우리들은 무엇을 잊지 않기 위해 사진을 찍는것일까. 사진은 본인이 원하는 장소에 직접 가서 눈으로 보아야만 비로소 사진으로 완성되어 남겨질 수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사진은 어느 정도 신뢰도를 확보한 전달 수단이며 다양한 표현 방법을 통해 작가가 의도한 바를 생생하게 시각적으로 보여준다는 장점이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사진의 기능을 생각해 볼 때 김동우 작가의 작품들은 잊혀져 가는 역사를 기록한다는 주제를 명확히 드러내고 있으면서도 흐리게 표현하는 창의적 인 방법을 통해 역사를 잊지 말자는 의도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누군가가 사진을 찍는 목적을 물어본다면 ‘기록’하기 위한 것이라고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무엇을 기록할 것인지를 물어본다면 그 대답에 대해서 고민 없이 이야 기 해 볼 수 있는 사람은 과연 몇 명이나 될까. 위 문단에서의 질문을 다시 던져보자 면 우리는 지금부터 무엇을 기록해 나가야 할까. 모두가 할 수 있는 일상의 기록을 넘 어서 나만의 독특한 주제를 설정하고 그것을 기록해보는 경험을 몸소 체험해야 할 것 이다. 국외독립운동사를 마주하는 사람들의 올바른 자세 독립기념관 국외독립운동사적지 정보는 정확하지 않은 것이 많다는 이야기를 책 속 에서 전하고 있다. 처음에는 실수이겠거니 생각하였으나 국외독립운동사적지를 찾아가 는 활동을 진행하면서 정확하지 않은 정보들이 다수 있음을 발견한다. 독립기념관에서 제공하는 정보를 바탕으로 하여 작가가 해당 장소에 도착하였을 때는 이미 없어진 곳 이거나 주변이 다른 곳으로 변하는 등 실제 위치와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였다. 국가보훈처에 국외독립운동가 후손의 명단을 요청하였지만, 개인정보라는 이유로 쉽게 얻을 수 없었고 따라서, 현지에 도착하여 묻고 또 묻는 과정을 거쳐야만 했다. 이러한 현실을 보면서 우리나라는 학문으로서의 역사만 중요시 여기고 실제로서의 역사에는 비교적 중요성을 두고 있지 않은 듯한 느낌을 받았다. 우리들이 관심을 가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이전에 국가에서 국외독립운동사를 잘 정리하여 사람들에게 홍보하는 과정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이 책에서는 인도와 멕시코, 쿠바, 미국에서의 국외독립 운동사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지만, 우리가 알지 못하는 나라들에서의 독립운동은 어 떤 모습으로 진행되었을지 관심을 가지고 조사하며기록해 나가야 한다. 미국 뉴욕의 한인회에서 만난 한 남성은 김동우 작가의 활동에 비관적인 시선을 보냈다. 대기업의 지원을 받지 않고 개인적으로 찾아와 국외독립운동에 관해 물어본다는 이유로 불친절한 태도를 보였고, 역사적 장소를 찾아가 보기 위하여 물어본 질문에도 무시하는 태도로 일관하였다. 먼 나라에서 한인이라는 한 가지의 공통적 요소만을 가 지고 먼 곳까지 발걸음 해 준 사람에게 지식을 나누지 않으려는 자세는 결국 본인에게 로 돌아올 것이다. 우리가 국외독립운동의 역사를 마주할 때는 열린 마음가짐으로 받 아들여야 하며 누군가가 나에게 도움을 요청한다면 기꺼이 나의 경험을 나누어 주는 자세가 필요하다. 김동우 작가가 두 발로 뛰어다니며 찾은 귀중한 자료들은 독립기념관에서 제공해주 는 것 이상으로 더욱 정확하고 생생하게 정보를 전달해준다는 점에서 분명히 그 가치 가 있다. 누가 나서서 국외 독립운동의 이야기를 사진과 함께 전달할 것인가. 또한, 국 외독립운동 역사를 찾아가는 활동은 나아가 독립운동사에 대해 연구해 볼 미래 세대를 양성해낼 수 있으며 그들이 새로운 지평을 개척해나갈 수 있도록 한다는 점에서 의의 를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뭉우리돌을 찾아가는 모습을 보며 우리들은 그동안 알지 못했던 역사에 귀를 기울여 볼 수 있고, 우리가 진정으로 마주해야 할 역사는 무엇인 지를 생각해보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으며, 알려지지 않았던 독립운동가들의 이야기를 발굴해 내는 데에 일조할 수 있고, 작가를 포함한 수많은 독립운동가들과 그 후손들에 게 든든한 지원군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현재는 하루아침에 발생한 것이 아니다. 내가 편하게 지낼 수 있 는 이유는 누군가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 역시도 미래 세대에게 도움이 될 만 한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맡은 일에 책임을 떠안아야 한다. 어떤 분야에서든 나에게 주어진 책임을 실현하기 위하여 그것을 기록하는 작업이 중요하다. 김동우 작가는 국 외에서의 독립운동 이야기 외에도 국내 여러 지역에서의 역사를 기록하기 위하여 삼각 대 위에 카메라를 올리고 셔터를 누르고 있다. 가장 최근에는 부산·경남 지역에서의 독립운동가와 일제강점기의 흔적을 기록하여 부산도서관에서 전시회를 진행하였다. 나 는 부산시민으로서 그 기록의 현장에 함께 있다는 자긍심과 부산 지역의 역사에 대해 서 자세히 공부해보아야겠다는 관심을 기를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부산대학교 도서관에서 김동우 작가의 책 『뭉우리돌의 바다』를 ‘사서 가 추천하는 올해의 추천 도서’로 지정하고 이를 나누어 준 것에 대하여 감사 인사를 전하면서 독후감을 마무리하겠다.
우수 채*미 지역주민 도서: 싸움의 기술
독후감: 그래, 사랑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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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학교에서 이런 거 한대. 책 선착순으로 나눠주고 읽고 독후감 내면 시상도 하구. 엄마 관심있는 책 있으면 가 보는 것도 좋을 듯. 나도 가 볼까 생각 중!”
책 좋아하는 엄마에게 딸이 보내 온 문자를 받았다. 국립대학 육성산업 ‘책읽는 대학’의 일환으로 2021 ‘부산대 사서가 추천하는 올해의 책’독후감 공모전을 진행한다는 것이다. 올해의 책으로 선정된 여섯 권의 도서 중 한 권을 읽고 독후감을 써 보는 일이다. 중학교 때 위인전 ‘신사임당’을 읽고 써낸 독후감으로 상을 받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즐겁고 편하게만 읽어오던 책을, 다 읽고 감상을 적어내야 한다는 게 조금은 부담스러웠지만, ‘하지 않던 일도 새롭게 해 본다’는 취지로 한 권 받아 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여섯 권 중 어떤 책을 고를까 살펴본다. 선정된 책은 문학, 역사,인문,과학,사회 분야가 골고루 구성되어 있다. 나는 평상시 가장 선호하는 분야인 인문 쪽의 ‘싸움의 기술’을 선택했다. 처음 들어가 본 부산대학교 도서관은 그 규모가 대단했다. 웅장한 분량의 책들 사이로 지식과 탐구의 에너지가 너울대는 멋진 공간에 들어서니 기분이 참 좋았다. 3층 기획홍보팀을 찾아가 책을 요청하니 상큼한 민트색 표지가 예쁜 책을 내어 주었다.
‘싸움의 기술’이라는 제목 아래 조그만 글씨로 ‘모든 싸움은 사랑이야기다’라고 씌여 있다. 싸움이 사랑이야기라니 어쩌면 알 것도 같은 이 문구는 작가의 이야기에 호기심을 갖기에 충분했다. 첫 페이지의 들어가는 말에서 이미 내 마음은 공감의 극치를 달리기 시작했다. 싸움을 진짜 못해서 누가 큰소리로 뭐라고 하면 눈물부터 나서 반격도 못하고 나중에 답답해 한다거나 벼르고 벼르다가 큰소리를 내게 되면 숨고르기 없이 갑작스럽게 으르렁대거나 너무 심한 말을 하고 죄책감을 느낀다는 것이 꼭 나를 대변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욕구를 뒤에 숨기고 살도록 교육받기 때문에 자신이 불편한 이유를 세세하게 모르기 십상이며, 싸우는 과정에서 하악질과 함께 불편한 마음을 일으키는 내면의 깊은 욕구가 드러나게 된다는 말이 묘한 위안을 가져다주었다. 이 책에서 말하는 ‘싸움’은 두 사람이 동등한 위치에 있어서 한쪽이 일방적으로 다른 쪽에 해를 가할 수 없을뿐더러, 이미 관계 안에 들어가 있는 사람들 사이의 싸움이므로 일방적으로 한 사람만 다칠 수도 없다는 것이나, 상대방을 굴복시키거나 항복시키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자기주장을 펼쳐서 서로가 원하는 것을 조정하며 갈등을 표면화해 꼬이고 얽힌 부분을 푸는 것이 목표이다라고 하는 부분에서 머릿속에 제일 먼저 떠오른 사람이 있다. 내 지나온 시간 속에서 싸움의 가장 큰, 그리고 거의 유일한 상대였던 남편과의 일상이 이 몇 줄의 문장으로 다 표현되고도 남는 것이었다.
싸움은 나쁜 것이고 하지 말아야 더 좋은 것이며 가장 가까운 배우자와의 싸움은 하면 할수록 나를 더 큰 자괴감에 빠지게 할 뿐이라고 생각했던 나에게 가슴 뭉클한 울림이 전해왔다. 싸움은 갈등을 넘어서서 관계의 성장과 자기 이해이고 싸움을 할 때 서로에게 화살을 들이민 게 아니라 상대가 스스로를 바라보도록 거울을 내미는 것이었다니, 들키기 싫은 서로의 어두운 모습을 아주 불편하고 거친 방식으로 보여주는 것이고 내가 미처 알지 못한 내 안의 깊숙한 내면 아이를 보여주는 것이었음을 알고 나니 마음에 충만한 평화가 올 지경이 되었다. 게다가 자기 내면에 있는 미해결 과제와 자신의 가장 연약한 부분을 드러내 서로 보듬을 기회를 준다니 우리 부부에게 있어 싸움은 너무나도 필요한 것이었다는 걸 알았다. 같이 살아가고 사랑하기 위해서 그렇게 싸움을 해왔던 것이다. 맞다. 모든 싸움은 사랑 이야기였다.
작가는 책의 전반부에서 우리는 왜 싸울까에 대해 이야기하고, 후반부는 싸움의 기술을 설명하고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우리가 왜 싸우게 되는가에 대한 내용이 더 흥미롭고 공감이 많이 갔다. 싸움의 기술들에 대해서는, 우리가 알면서도 실천하지 못하는 것과 어렵지만 새로 알게 된 기술들을 앞으로 열심히 실생활에 적용해서, 필요한 싸움은 건강하게 계속해 나가기로 마음먹었다. 물론 싸움을 최소화하여 평화를 우선적으로 염두에 두고 말이다.
친구의 소중함에 대해 이야기한 부분은 특히 공감을 주었다. 자칫하면 우울해질 수 있는 갱년기를 맞은 나에게, 정성으로 값을 치르고 마음을 열어서 기꺼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친구가 두엇쯤 있다는 것이 너무나 안심이 되었다. 결국은 늙을 것을 알면서도 꿈을 꾸는 우리는 불완전한 삶 속에서도 기쁠 수 있다는 말에, 나는 매사에 ‘완벽한’ 어떤 것에만 의미를 두고 있는 사람이었음을 깨달았다. 작가의 말대로 너무 완벽한 만족을 바라지 말고 지금 가질 수 있는 희망을 스스로 버리지는 말아야겠다. 나이가 드니 아이들이 다 성장하여 생활에 여유를 갖은 대학 친구들이 서로를 찾는다. 여행도 같이 가고 얘기도 나누고 싶어 한다. 옛친구가 좋기는 하지만 나는 오랜 시간 동안 각자 생활이 바빠서 몇 년에 한 번씩이나 만났던 친구들과는 서로의 공백이 너무 크다고 여겼다.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고 이제 얼마든지 충분히 가꿔나가고 나눌 수 있는 관계임을 다시 생각했다. 완벽하지 않아도 의미 있고 즐거울 수 있다는 것을.
남편과 싸울 때를 떠올리면, 상대방을 공격하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그 사람이 내 편이기를 바랬다는 말이 꼭 들어맞는다. 관계에서 어떤 욕구를 가지고 있는지는 양육자와 맺은 애착유형이 요인이라는 설명 부분에서는, 사랑을 갈구하는 불안형과 일정한 거리를 원하는 회피형이 서로 ‘밀당’을 하는 패턴을 ‘사랑’이라고 여기게 된다는 것이 꼭 남편과 나의 모습 같았다. 우리가 기억하지 못하는 아기 시절에 부모로부터 어떤 양육을 받았을지에 대해 항상 궁금했는데 이렇게 상반되는 유형끼리 끌리게 되는 것이 당연하다니 우리는 정말 자연스러움 속에 살아온 것이다. 하지만 이제 되풀이되는 패턴을 내려놓아야 건강한 사랑을 할 수 있다니 갈 길이 멀다.
관계에 특히 많은 문제를 일으키는 투사에 대한 부분도 흥미로웠다. 어린 시절 부모와의 관계에서 각인된 것들이 가장 깊고 고통스러운 갈등의 원인이 되고 부부관계에서 더욱 그러하다니 각자의 부모 이미지를 서로에게 투사하여 무의식적으로 어린 시절 부모에게서 받지 못한 사랑을 배우자로부터 받거나 해결하지 못한 갈등을 풀어서 유년기의 미해결 과제를 끝내려고 한다는 말이 정말 와닿았다. 이마고 부부치료법인 반영하기, 인정하기, 공감하기의 방식대로, 갈등상황에서 서로를 탓하거나 공격하는 대신 상대방이 하는 말을 그대로 따라 해 주거나, 내가 동의할 수 없다 하더라도 그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럴 수 있겠다고 표현해 주거나, 궁극적으로는 상대방의 감정을 존중하고 그의 입장이 되어 그가 느낀 감정을 느끼는 대화법을 실천해야겠다. 어쩌면 우리는 해결하고자 무의식적으로 찾고 있던 숙제를 드디어 찾은 것인지도 모른다는, 내 소울메이트가 아니라 소울프라블럼을 찾은 것이고 풀어야 할 숙제를 찾았다면 그것을 풀수 밖에 없다는 말은, 배우자라는 존재는 정말 오묘한 인연이고 숙제이며 계속 풀어야 하는 존재라는 것을, 이 사람을 만날 수밖에 없었고 사랑할 수밖에 없었고 많은 것을 교류하며 얽히고설켜 꼬이기도 하지만 결국 그걸 풀어 가는 게 내 인생이구나 싶었다.
나 역시 가끔, 알고 지내는 사람들 속에서 그 사람에게서 느끼는 불편함이 찾아올 때가 있다. 내면에 있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은 욕구를 타인에게 투사하는 나를 발견한다. 타인에게서 발견되는 불편함이 사실은 내 안에 있는 것이라는 점을 인정하기는 어렵지만, 자꾸 상기하면서 나를 다스려 해결해야겠다. 투사는 매우 다루기가 어렵고 다루는 과정도 몹시 고통스럽다는 말이 큰 위로가 된다. 또, 자신이 원하는 자아상이 밝게 조명될수록 그림자는 더 짙어진다는 것, 선함이나 정의로움을 강조하면 할수록 내면에 자신도 알지 못하는 그림자가 더 어두워진다는 것을 읽고, 나에게 그림자가 튀어나오는 계기를 만들어 준 타인을 줄곧 공격하며 살아왔음도 인지하게 해 주었다.
그동안 힘들었지만 싸움을 하길 잘했다. 별로 싸울 줄 모른다고만 생각했던 나는, 사실 치열하게 싸움을 계속해 온 것이었다. 내 인생을 사랑하고 나를 사랑하는 나는, 앞으로도 좋은 싸움을 해나갈 것 같다.
장려 이*실 사학과 도서: 있지만 없는 아이들
독후감: 새롭고 희망찬 나 자신의 구운몽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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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 책을 집은 거야.’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스스로 의 선택에 의문을 표했다. 부산대 도서관에서 올해의 책 여섯 권의 리스트가 발표됐을 때 가장 먼저 시선을 사로잡은 책은 올 초부터 베스트셀러에 이름을 올린 SF소설이었다. 인기도 많고 재미도 보장된 도서라 마음이 끌렸다. 다음으로 보인 건 AI를 주제로 세계 석학들의 통찰을 담은 과학 교양서였다. AI는 근래 전 학문 분야의 관심이 쏠리는 뜨거운 소재가 아닌가. 이 두 도서 중 하나를 고르리라 마음먹고 집을 나섰다. 웬걸, 두 도서 모두 동이 났다. 오 분 동안 낯선 네 권의 책을 뒤적이다 끝내 제목만 슬쩍 본 이 책과 함께 찝찝한 마음으로 도서관을 나왔다. 난 왜 이 책을 선택할걸까?
단지 재미를 충족시켜주지 못하리란 낮은 기대감 때문만은 아니었다. 나는 난민 수용 반대자다. 또 이주 노동자 문제에 대해 자국민의 권익을 더 중시하는 방어적인 정책들을 지지했으며, 다문화 가정에 대해서도 아직은 낯설다는 막연한 느낌만 가져온 토종 한국인이었다. 나는 기독교인이다. 내게는 이주민들이 가슴에 품고 오는 타종교와 문화가 내 종교와 갈등을 빚으리란 확신 비슷한 것이 있었다. 그럼에도 이 책이 끌린 이유는 표지에 적힌 ‘아이들’과 ‘아동’이라는 단어 때문이었으리라. 지금껏 내 머릿속이주민 이미지는 나보다 나이가 많거나 아니면 내 또래 정도의 남성들로서 한국에서 번 돈을 고향으로 송금하며 끼리끼리 모여 꺼림칙한 불안감을 조성하는 이들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주 노동자들이 한국에서 아이를 낳는다면, 그대로 한국에서 기른다면, 그 아이들이 한국어를 유창하게 말하고, 한식을 좋아하며, 방과 후 한국 애니메이션을 보며 깔깔댄다면, 그 아이들은 누구일까. 짧은 순간에도 그들을 차마 이방인으로 규정할 순 없었다. 혐오와 편견 그리고 아이들을 향한 연민이 실타래처럼 엮긴 채‘있지만 없는 아이들’탐독이 시작되었다.
미등록 이주아동들의 존재를 몰랐고 우리 사회의 보살핌을 받지 못하는 우리의 이웃들이 있다는 사실을 외면해왔다. 그저 종교적 신념과 약간의 무관심을 바탕으로 그들을 이방인으로 여겼을 뿐이었다. 등잔 밑은 어두웠다. 듣지 못한다 할지라도, 그곳에 목소리는 있었다. 이 글을 통해 늦게나마 알게 된 미등록 이주아동들의 이야기를 살펴보고 이를 바탕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진정한 종교생활이란 무엇인가와 대한민국의 희망에 관해 생각한 것들을 나누고 싶다.은유작가는 총 아홉 명의 대상자를 인터뷰하고 그들의 시점으로 이야기를 정리했다. 미등록 이주아동 다섯 명과 이주아동 부모 한명, 그리고 이들을 돕는 이주인권활동가 두 명과 변호사 한 명이 이야기에 참여해 이주아동들의 어려움과 이들을 돌보는 현실을 생생하게 전달해 준다. 미등록 이주아동에 관해 전혀 알지 못했던 나와 같은 이들도 쉽게 이해하도록 친절한 설명이 곁들여진 덕에 무리 없이 읽어 나갈 수 있었다.
우선 놀란 건 이들의 규모였다. 우리나라에 미등록 이주아동은 무려 이 만. 작년 기준 부산대 전체 재학생 수가 20,502명이라고 하니 딱 부산대 재학생 정도의 규모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숫자의 아이들이 부모를 따라 이주했거나 대한민국 땅에서 태어났고, 그저 보호되지 않는 수준이 아닌, 주민으로 등록조차 되지 않은 채 살아가고 있다는 말이다. 보통 아이들이 불이익을 받는다면 부모가 나서 보호자가 된다. 그러나 이들의 부모는 자녀들이 겪는 문제에 개입조차 어렵다. 부모 또한 ‘미등록’이주 노동자이기 때문이다. 부모가 스스로를 드러내면 불법체류자임이 드러나고 추방까지 감수해야 한다. 사정이 이러니 이들은 겨우 초등학생만 되어도 오히려 사회적 소외와 싸우는 동시에 부모의 통역까지 맡아야 한다. 이들의 존재는 꾹꾹 눌러지고 당면한 다수자의 문제에 소리도 없이 밀려나 켜켜이 쌓이고 쌓여 이만 명에 이르게 되었다.
이 아이들은 국민으로서 태어난 것이 아니기에,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없다. 살면서 마주치는 수많은 갈등 앞에서 그들은 머리를 조아리며 간곡히 부탁하거나 눈치를 보고 좌절하는 일을 일상처럼 겪는다. 몽골 국적의 부모가 한국에서 낳은 마리나는 의료보험이 없어 아파도 참는다. 한국에서 태어나 나이지리아 부모를 둔 페버는 신분증이 없어 축구선수의 꿈도 해외 스카우트 기회도 접어야 했고, 신분증명이 필요한 자격증 시험을 볼 수 없었다. 이란인 아버지를 따라 일곱 살에 한국에 입국한 이민혁은 휴대폰개통이나 은행업무를 볼 수 없어 난처할 때가 많았다.
이 아이들이 불법체류자임이 노출되면 어떻게 될까. 설마 선진국 대한민국에서 말 하나 통하지 않는 곳으로 한국에서 초등학교까지 나온 청소년을 기어이 돌려보낼까? 하지만 현실은 더 냉혹하다. 이민혁은 일곱 살부터 한국에서 살았지만 열여섯에 대법원으로부터 ‘2주 안에 한국을 떠나라’는 선고를 받는다. 페버는 19살 때, 유리 공장에서 잡혀 보호소에서 50일을 잡혀있었다. 대부분 보호소에서는 길면 일주일 안에 본국으로 송환되는데 페버의 경우는 특수했기에 50일이라는 긴 시간을 잡아둔 것이다. 강제 출국당하는 어른들을 보며 페버는 감히 자신의 앞날을 예측할 수 없었다. 몽골 학생 민우는 고등학교 1학년 때 경찰서에서 비자가 없는 것이 드러났을 때, 10월 1일에 잡혀 불과 4일 만인 10월 5일 강제 출국을 당할 뻔했다. 주변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출국은 무마 되었지만 이 아이들의 삶은 언제고 어른들이 너의 본국이라 일컫는 나라로 돌아가야 할지 모르는 조마조마한 생활이다. 그러나 한국에서 나고 자란 이 아이들에게 부모님의 모국은 생각지도 못한 낯선 나라일 뿐이다. 그렇게 강제로 ‘외국’에 내던져진 아이들이 아무런 기반도 없이 살아가도록 하는 일은, 한국인 청소년을 상대적으로 소득수준이 낮은 나라에 혼자 내버리는 일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책에 나오지 않은 아이들은 저런 상황을 삶으로 겪었으리라. 꽤 많은 관심을 받았고 적극적인 도움으로 난민인정이나 체류자격을 얻은 책 속의 아이들과 달리, 많은 아이들이 한국에 살다 며칠 새 추방당했다. 미등록 이주아동도, 아이의 부모도. 가장 힘들게 여기는 건 주변의 곱지 않은 시선이다. 세금도둑, 이슬람교를 향한 혐오, 범죄자라는 낙인과도 같은 시선들을 이미 아이들도 알고 있다. 그래서 친구들과도 거리를 둬야했고,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자신의 정체가 밝혀질까 조마조마한 삶에 갇혀 살 수 밖에 없었다.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이주 노동자들이 몇 십 년을 살아갈 수 있었다는 건, “한국도 이 사람들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라고 이탁건 변호사는 말한다. 실제로 우리나라의 지방 곳곳의 생산 공장들이나 광업, 농축산업 등의 분야에서는 외국인 근로자가 없이는 사실상 운영이 어려워 생산이 중단될 수준이다. 대부분의 선진국들은 아동의 경우는 심사를 통해 체류자격을 부여한다. 유독 한국은 엄격하게 작년까지 심사도 없이 획일적으로 강제퇴거명령을 내렸다. 작년 저출산 예산 42조를 집행하며 아이 한명 한명을 소중하게 생각하겠다는 나라가 대부분의 삶을 한국에서 보낸 아이들을 내쫓고 있다니. 안타까운 자가당착이다.그러나 책 곳곳에는 정직한 이들이 내뿜는 빛이 있다. 위기 속에 아이들에게 손을 내민 사람들. 이주민들의 산후 조리를 돕고, 입학을 거절당한 아이를 데리고 교장실을 두드리고, 성인이 되면 본국으로 소환될 거라 삶을 포기한 아이들에게 꿈을 가지도록 붙들어 주는 활동가들. 딱한 사정을 듣고 학교 학생들과 함께 국민청원과 피켓시위를 진행한 선생님. 미등록 이주 아동을 받기 위해 여기 저기 수소문한 청소년 방과 후 아카데미. 탄원서를 함께 모아주고 집까지 찾아와 살펴주며 본국을 떠난 이들에게 도움을 줄 것이라 추천하는 그 곳, 교회. 이들을 돕는 교회를 보며 나의 신앙생활과 확연한 이질감을 느꼈다. 나의 마지막 봉사활동은 쉼터에 사는 중학생의 수학과외를 해주는 일이었다. 벌써 6년 전이다. 종교인으로서의 사명감과 받은 사랑을 나누고 싶은 마음이 동기였다. 그 이후 바쁘다는 핑계와 종교생활의 기본은 집회 참석과 성경읽기라는 핑계로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일을 계속 미뤄왔다. 빛을 어두운 곳에 비춰주지 않으면 사람은 어두운 곳을 잘 모르게 된다. 잘 모르면 무작정 꺼리고 멋대로 판단하게 된다. 잘 모르는 것을 미워하는 일은 너무나 쉽다.
예수가 준 교훈에 비추어, 나와 행동하는 교회의 차이를 비교해 보았다. 아주 유명한 비유다. 종교학자 한명이 예수에게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지 물었다. 예수는“신을 마음 다해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꽤 유명한 말로 답한다. 학자가 다시 질문한다.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이어 예수는 비유로 답하는데 그 비유가 흥미롭다. 어떤 사람이 여행길 중 강도를 만나 재산을 다 뺐기고 맞아 거의 죽기 직전에 버려졌다. 종교지도자와 유대교 사제가 그를 보고 방향을 바꿔 비켜갔다. 이어 이방인 혼혈이라 멸시받는 사마리아인이 쓰러진 자를 발견하고 가엾은 마음이 들어 응급조취를 한 뒤, 여관에 비용을 지불하며 부탁하는 이야기다. 동족인 유대교 사제와 종교지도자보다 이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말로 이웃이라 부르기에 알맞은 사람이고, 사마리아인처럼 남들에게 행하라는 말로 교훈은 끝난다. 진정한 신앙은 눈앞에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를 절대 내버려두지 못한다. 나는 그동안 신앙인의 허울을 쓰고 예수의 가르침을 따른다며 자부해왔다. 또 그 가르침을 외우고 남들에게 전파해 왔지만 정작 말씀을 내 삶에 어떻게 적용시켜야 할지 생각해보지 않았다. 외부에서 들어오는 난민도 아닌 이미 우리나라 안에서 태어난 아이들조차 품지 못한다면 누가 나의 이웃이겠는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내 권익이 침해당할 까봐 시간과 비용을 들여 내 몫을 나눠야할 까봐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을 모른 체 한다면, 강도만난 유대인을 버려두었던 그의 동족들과 다를 것이 무엇이겠는가.
작가는 로버트 D 퍼트넘의 말을 빌려‘얼굴을 내밀어주는’의지할 만한 어른되어 달라 요청한다. 이는 빛이 필요한 사람에게 빛을 비추어 보게 해주고, 소금을 주어 맛을 느끼게 해주고, 먹이고 마시게 하고 입히라는 직접적인 선행을 베풀라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일맥상통한다.
‘있지만 없는 아이들’에게 나는 ‘있지만 없는 어른들’중 한 명이었을 것이다. 신기하다는 듯이 쳐다만 볼 뿐, 어떠한 관심이나 도움도 주지 않은 채, 집에서는 불법체류자의 문제에 대한 뉴스를 보며 정부의 미온적인 태도에 불만을 표하는. 수많으면서도 하나도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존재하면서도 부재하는 모순적인 인간이었을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우연히 이 땅에 태어난 행운을 권리라 부르며 결단코 나눠주지 않으려 하는, 그 집단적 이기심의 일부로서 더해져 부풀어 올라 이 땅의 변두리에 내몰린 아이들을 끝내 밀쳐내 버리고 마는, 무형무체의 압박으로서 가해졌던, 없지만 있는 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어쩌면 없지만 있는 한 어른이었을 것이다.‘있지만 없는 아이들’은 가슴에 묵직한 메시지를 얹는다. 약자들을 돕지 않은 행동은 게으름이나 부족한 여건 때문이 아니라 이기심에 불과함을, 그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핑계는 정말 몰랐던 게 아니라 애써 무시한 결과임을. 모순, 무엇이든 뚫는 창과 무엇이든 막는 방패가 동시에 존재할 수 없듯이, 존재와 부재의 속성을 동시에 가지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아이들은 사회, 복지적 제도의 시선에서 부재하지만 분명히 실존한다. 또 나와 이들의 거리는, 이웃이라 부를 만큼 가깝다. 나는 이 이웃을 어떻게 여기고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나는 예수의 말씀에 가책을 느꼈지만, 신앙이 없는 이들도‘있지만 없는 아이들’이 분명한 우리 이웃이라는 사실을 느낄 수 있다. 우리 함께 이 아이들의 선한 이웃이 되자. 우리가 할 일을 외면하고 묵인하지 말고, 다친 이웃을 연민하며, 이해와 다양성의 다음 세대를 열어나가자.
장려 정*한 영어영문학과 도서: 혐오자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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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서론
지구상의 생명체들은 지금껏 다양성을 증가시키는 방향으로 진화해왔다. 하나의 종 안에서 개체 들간의 차이가 작으면 작을수록 그 종은 전염병에 취약하다. 인간의 유전자는 이를 막기 위해 끊임없이 분열되고 전사되며, 다시 무작위로 재조합되어 다양성을 확보해왔다. 살아남기 위해 서로 달라지기를 택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는 ‘우리’와 다른 것을 배제한다.Ⅱ. 본론
“나영에게 국내 거주중인 외국인들은 그런 이미지였다. 그곳에 있지만 인식할 수 없는 대상. … 나영이 아는 사람들 중에는 동남아 출신 사람들과 대화를 하는 것도, 그들과 함께 있는 것도 견디지 못할 만큼 꽉 막힌 사람들이 많았다.”(조영주, 2020, p.79) 내가 외국인을 생각하면, 두 분류가 떠오른다. 설명하지 않아도 모두가 머리 속으로 같은 기준으로 두 그룹을 나눴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무의식적으로 떠오르는 이 생각은 우리가 어렸을 적부터 몸으로 습득한 것이다. 대놓고 표현하지는 않아도 그들을 둘러싼 사람들의 어색한 분위기와 태도를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을 똑바로 마주하지 않는 사회에서 자란 나는 그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아직 모른다. 겉모습으로 출신을 가늠하는 시대는 지났고 지구는 거대한 하나의 멜팅팟이 되어가고 있지만, 아직 한국이라는 나라는 융합에 익숙하지 않은 것 같다. 나영 역시 나와 같은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나영은 네 건의 자살이 연쇄살인이라고 추리했지만, 준혁의 죽음을 조사하면서 네 건의 자살은 서로 아무런 연관 없는 개별 사건임을 알게 되었다. 여기서 나는 책 제목이 왜 혐오자살인지 깨달았다. 자살이면 자살이고, 혐오살인이면 몰라도 왜 ‘혐오자살’일까? 나영은 자살한 4명이 외국인, 난민이라는 이유로 그들이 혐오의 대상이 되어 살해되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사람들도, 그리고 나도 그렇게 믿었다. 우리는 자살한 이들을 강제로 연쇄살인 피해자로 둔갑시켜, 죽은 이후에도 가만히 놔두지 못하고 혐오의 대상으로 끌어와 앉혔다. 각자 나름의 이유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들은 억울해하겠지만, 죽은이는 말이 없다. 만약 연달아 죽은 4명이 백인이었다면, 나영은 그들의 죽음을 연관지었을까?혐오의 근원을 따지자면, 그것은 무지로부터 오는 공포이다. 예를 들어 여성이 대표적인 혐오 대상인데, 신화, 소설, 영화에서 귀신이나 괴물은 대부분 여성으로 등장한다. 구미호, 메두사, 인어, 마녀, 심지어 저주인형까지 우리는 여성의 외형을 가진 괴물을 잘 알고 있다. 이는 이야기에서 ‘인간’이 남성에 국한되기 때문이다. 남성은 생명을 창조하는 여성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을 두려워하지만, 그 사실을 부정하기 위해 여성을 굴복시키려 한다. 그래서 여성 괴물은 아름답지만 위험하고, 신성하지만 잔혹한 이미지로 표현된다. 그 외에도 어린아이, 노인, 장애인 등 일반적으로 혐오의 대상이 되는 이들은 남성 중심적인 시각에 의해 이해될 수 없기 때문에 혐오적인 존재로 그려진다. 그만큼 혐오의 기준을 정하는 데에는 남성의 영향력이 강하다. 그런데, <혐오자살>에서는 학벌 좋고, 신체 건강한 30대 남성 준혁이 혐오 대상이다. 책의 중반부까지 나는 그가 왜 그런 취급을 받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준혁이 주변 인물들로부터 왜 동정 혹은 경멸을 받는지는 소설 후반부에 가서야 정확하게 드러난다. 작가는 준혁이 동남아지역 외국인임을 최대한 늦게 밝힘으로써 중요한 부분을 지적했다. 그것은 혐오 그 자체가 아니라, 혐오의 이유가 매우 불합리하고 비이성적이지만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준혁이 외국인임을 알기 전까지 나는 준혁이 받는 타인의 적대감에 계속해서 의문이 들었었다. 그러나, 준혁의 출신이 드러나는 순간, 나는 그 혐오에 타당성을 부여하고만 것이다. “혐오(嫌惡): 싫어하고 미워함.” 인간이 어떤 대상을 혐오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땅콩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이 땅콩을 기피하는 것처럼 인간은 생존하기 위해 혐오라는 방어기제를 가지는 것이다. 누군가는 뱀을, 누군가는 범죄자를, 누군가는 폭력을 혐오한다. 또한 혐오는 전쟁의 역사 혹은 국가 간의 정치적, 경제적 관계에 의한 감정일 수도 있다. 우리는 이런 혐오에 동의하고 존중한다. 그러나, 혐오는 여기서 더 나아간다. 누군가는 동성애자를, 누군가는 아이를, 누군가는 그냥 누군가를 혐오한다. 아파트 주민들이 준혁을 피하는 이유는 준혁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김준혁이라는 사람은 그냥 존재했을 뿐이었다. 존재한다는 사실이 이유가 될 수는 없다. 그렇기에 이 이유 없는 혐오가 위험한 것이다. 또한, 그것이 쉽고 간편하다는 점 역시 중요하다. 1408호가 준혁을 죽인 것은 그게 쉬운 방법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공장에 취직했을 때 자리에서 밀려난 사람들은 못 본 척 했으면서, 다른 이들에게 밀려 토사구팽당한 자신의 처지를 스스로 불쌍하게 여긴다. 1408호는 공장의 높은 분에게는 항의하지 못하고, 자신 대신 들어온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화살을 돌렸다. 그 화살은 재떨이 공장의 외국인 노동자와 비슷하게 생긴 준혁이 대신 맞았다. 얼마 전, 아프간 난민들이 한국에도 입국했다. 탈레반에게 정부가 무너지고, 하루아침에 국가를 잃어버린 아프간 국민들은 난민이 되었다. 이에 관한 커뮤니티 글에 달린 댓글을 읽어보니, 기분이 묘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진만 보고 왜 우리 동의 없이 아프간 난민들을 받아주냐, 우리가 낸 세금을 왜 외국인들에게 쓰냐고 했다. 그러다가 난민들이 모두 의사, 통역사, it 기술자 등 고급인력들과 그 직계가족이라는 댓글이 달리자 반응이 180도 달라졌다. 혐오는 약자에게만 잔인해진다. 혐오 자체는 대상이 잘나거나 못나거나 상관없이 공평하게 주어진다. 그러나 대상에 따라 그 혐오가 얼마나 노골적으로 드러나는가에는 확연한 차이가 있다. 대부분의 혐오는 자격지심과 무의식에 잠재되어있는 우월감에서 기인하기 때문이다. 준혁은 딱 좋은 먹잇감이었다. 그를 샤덴프로이데라고 부르는 교수부터, 대학 동기, 직장 동료, 아파트 주민, 그리고 연인인 명지까지 모두가 만만한 그를 혐오했다. 퇴사하기 전까지는 준혁은 자신을 향하던 혐오에 무덤덤했다. 의식하지 않으려 했다는 것이 더 맞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껏 주변의 혐오를 어느 정도 막아주던 돈, 지위가 사라지자 노골적인 혐오에 무력하게 노출되었다.그렇다고 준혁이 무고한 피해자이기만한 것도 아니다. 줄곧 혐오의 대상이었던 준혁 그 역시 누군가를 혐오했다. “준혁은 말 대신 옆을 흘깃거렸다. 명지가 고개를 돌려보니 옆자리에 동남아시아 지역 출신으로 보이는 커플이 앉아 있었다. 준혁의 고질병이 도졌다. 준혁은 단번에 티가 날 정도로 동남아 출신이나 조선족 등 외국인을 혐오했다. 명지는 그런 준혁이 싫었다.”(조영주, 2020, p.64) 자기 자신을 외국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거나, 자기와 같은 이들을 혐오함으로써 자신이 받는 혐오를 부정하려 했을지도 모른다. 준혁은 그토록 사랑했던 명지 마저 자신을 떠나려하자 혐오했다. 사랑이 변질 된 혐오가 더 위험한 법이다. 연예인 혹은 셀럽들에 대한 대중들의 심리가 이와 비슷할 것이다. 대중들은 그들을 사랑하고 부러워하면서도 동시에 그들의 고통을 기꺼워한다. 이 역시 혐오의 편리성과 관련 있다고 보는데, 자신이 부러워하는 대상과 같은 위치로 직접 올라가는 것보다 그 대상을 자신의 위치로 끌어내리는 게 더 편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빛나던 이들의 추락을 환영한다.모두가 혐오의 가해자였고, 피해자였으며 등장인물 중 그 누구도 완벽하게 무고한 사람은 없다. 작가는 책에서 두 가지 키워드를 제시했다. 샤덴프로이데, 그리고 파르헤지아. 샤덴프로이데는 타인의 불행에서 느끼는 기쁨을, 파르헤지아는 두려움 없이 진실 말하기를 뜻한다. 샤덴프로이데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감정이다. 우리는 다른 이의 샤덴프로이데는 비판하고, 자신의 샤덴프로이데는 철저히 숨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대로 파르헤지아는 자신이 받을 위험과 고통을 감수하고 밝혀야만 하는 진실을 드러내는 행위이다. 작가는 준혁과 명지를 샤덴프로이데의 대상으로 설정했다. 이는 책 속에서 확실히 드러나는 부분이다. 그리고 나는 레드가 파르헤지아를 행하는 인물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만이 진실을 입 밖으로 낸 인물이기 때문이다. 준혁은 자신이 혐오를 받는 이유를 모르는 듯 보였다. 모든 이들은 준혁에게 진실을 숨긴 체 불쌍한 준혁을 보면서 희열을 느꼈다. 레드는 준혁에게 블랙이라는 별명을 붙였다. 유일하게 레드만이 그에게 진실을 말했다. 비록 그 진실이 잔인하고 불친절할지라도 말이다. 준혁에게 레드의 파르헤지아는 충격일지언정 거짓은 아니었다. <혐오자살>에서 파르헤지아에 대한 작가의 생각이 잘 드러난 장치가 있는데, 바로 냄새다. 책 속에서 준혁에게서 지독한 냄새가 난다는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한국인은 다른 국가 사람들에 비해 겨드랑이 냄새를 유발하는 유전자가 거의 없어 냄새가 나지 않는다는 인터넷 기사를 본 적이 있다. 나도 지하철에서 외국인의 체취를 맡아본 적이 있는데, 인생에서 처음 맡아보는 냄새라서 자리를 피한 적이 있었다. 준혁의 암내는 그가 우리나라 사람이 아니라는 힌트이자 그를 향한 혐오에 타당성을 부여하는 핑곗거리이다. 영화 <기생충>에서도 박사장은 기택에게서 설명하기 어려운 묘한 냄새가 난다고 했었다. 그리고 그 냄새가 선을 넘는다고도 했다. 체취는 스스로 선택하거나 통제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확실히 주변에 있는 이들에게 불쾌감을 주기도 한다. 사람들은 냄새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 대신 그냥 조용히 자리를 피한다. 체취를 풍기는 외국인은 근처에 있던 사람들이 자신으로부터 슬금슬금 멀어지는 것을 보고 의아해할 테지만 그 이유를 알진 못 할 것이다. 아무도 말해주지 않을 테니까. 이 외국인은 샤덴프로이데의 주인공이 되거나, 파르헤지아를 통해 알게 된 진실을 받아들일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혐오의 대상이 되었을 때 선택할 수 있다면 어느 쪽을 택할까? 나라면 이 사회에서 동떨어진 섬이 되어 샤덴프로이데가 되기 보다는 후자를 택할 것 같다. 작가는 이 불편하지만 필수적인 말하기 과정의 중요성을 전달하고 싶었던 것 같다.Ⅲ. 결론
마지막까지 혐오의 굴레는 확실하게 끊어지지 않았다. 준혁을 죽인 범인이 1408호인 것을 나영이 의심하기는 하지만 그 의심이 확인될 길은 없어 보인다. 혐오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이제는 혐오에 동조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세상이다. 노키즈 존은 유행처럼 번져가고, 사람들은 혐오가 마치 취향인 것처럼 말한다. 혐오 자체는 인간에게 필수불가결한 요소이며, 우리는 혐오와 공존해야한다. 단지, 자신의 마음 속에서 자라나는 혐오를 경계하고, 타인을 향한 혐오를 굳이 꺼내보일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 파르헤지아는 전달해야만 하는 진실을 말하는 것이지, 모든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파르헤지아는 침묵한 채 뒤돌아서지 않고, 마주보며 제대로 소통하는 것이다. 혐오를 입 밖으로 꺼내 말한다는 것이 동방예의지국인 우리나라에서는 큰 실례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히 존재하는 것을 영원히 외면할 수는 없다. 이 책은 나에게 혐오를 대하는 새로운 태도를 제시해주었다. 혐오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장려 최*은 생명시스템학과 도서: 혐오자살
독후감: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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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독후감에는 책 내용의 스포일러가 담겨 있습니다)
최근 몇 년간 우리 사회를 가장 뜨겁게 달구는 주제인, 혐오를 전반에 제목으로 내세운 책은 도대체 무슨 내용일까 하는 생각과, 소개글의 “어젯밤, 내가 남자친구를 죽였다.” 에 홀랑 마음을 빼앗겨버린 나는, 여러 책 중에서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조영주 작가의 ‘혐오자살’을 선택해 읽게 되었다. 그리고 역시, 책을 손에 쥔 그 순간부터 미동도 없이 앉은 자리에서, 거의 책을 삼키듯이 읽어 내린 것 같다.
이 책은 시점과 시간 순서가 뒤죽박죽으로 구성된 스릴러 추리 소설로, 김준혁이라는 두 남성 동명이인이 등장하며, 백명지라는 여성이 등장하고, 이 둘 사이에서 하루 사이에 일어난 사건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간다. 웬만한 추리물은 전부 읽어본 추리 덕후인 나는 처음 책을 잡을 때 “이런 1인칭 추리 소설의 트릭 따위, 내가 읽으면서 간파해버리겠다!” 하며 읽기 시작했지만, 챕터가 넘어갈수록 점점 나의 추리는 미궁으로 빠졌고, 설상가상 나중에는 동명이인인 두 김준혁의 묘사가 머릿속에서 시간순으로 나열되지 않고 뒤섞여버려서, 잠시 읽는 것을 멈추고 다시 이전 챕터로 돌아가서 이 김준혁이 저 김준혁과 동일인인지 아닌지 판단하는 시간을 가져야 했다. 또한, 백명지의 시각으로 진행된 챕터와 동일한 시간대를 김준혁의 시각으로 다시 진행하는 챕터에서는 손가락을 백명지 챕터에 끼워 두고 페이지를 이리저리 넘기면서 읽기도 했다(개인적으로는 이런 행동들이 종이책의 묘미라고 생각한다).
읽으면서 혹시 백명지가 혼혈이 아닐까 생각하긴 했지만, 설마 김준혁도 혼혈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초반부에 나온 둘의 데이트 장면에서 김준혁이 외국인 노동자를 향한 혐오를 드러내는 장면이 있었기 때문인데, 다시 생각해보니 이것도 결국 내 안에 잠재되어 있던 차별적 시선이 아니었을까 생각하게 되었다. 결국 김준혁은 혐오를 하는 사람임과 동시에 혐오를 받는, 아주 현실적인 인물이었다. 또한 백명지와 김준혁 각각의 시선에서 진행되는 챕터에서는 (이렇게 피부색으로 표현하는 방법이 매우 좋지 않다는 것을 알지만 책에서 언급하는 방식대로 표현하자면) 백인과 동남아인을 대하는 한국인들의 태도 차이를 매우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둘은 같은 대학, 같은 과를 졸업한 같은 혼혈이지만 둘을 대하는 주변인들의 태도는 매우 다른데, 이는 소설적 과장이라고 표현하기에는 현재 우리 주변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인종차별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을 볼 수 있다.
이 책이 이렇게 현실감을 끌어올리는 데에는 묘사 방식도 한몫을 했는데, 카카오톡으로 연락을 주고받는 등장인물들, 서울대를 졸업했지만 동남아 혼혈이라 정리해고를 당한 김준혁, 젊은 여성이라 수업 시수를 동료 교수에게 빼앗긴 백명지, 극심한 층간소음과 쓰레기 투기, 가정폭력, 늦은 밤 혼자 다니는 여성에게 위협이 되는 길거리나 엘리베이터 등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고 겪는 일상이 소설에 녹아들어 있었다. 읽는 동안 이 책이 혹시 실화를 바탕으로 쓰인 것은 아닌지, 현실이 아니라 소설이 맞는지를 인지하기 위해 책 표지를 들여다보기도 했다.
이 책은 시작부터 살인사건을 보여주면서 시선을 사로잡는다. 그리고 그 과정을 살인 용의자(라고 추측되는 인물)인 백명지의 시선으로 풀어내는데, 그래서 당연히 독자들은 시작부터 함께한 백명지의 생각과 감정에 이입하게 되어서 후반부의 반전을 예상하지 못한 상태로 맞닥뜨리게 된다. 그러면서 추리 소설의 묘미인 반전의 짜릿함을 살리고, 김준혁의 자살 이유가 된 사회적 혐오 역시 강조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다른 화자인 형사 나영의 시선에서 바라본 사건은 ‘자살을 빙자한 살인 사건’으로 묘사되어서, 마치 아직 밝혀지지 않은 엄청난 흑막이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게 분위기가 진행되지만 실제로 밝혀진 진실에서는, 흑막이 어떤 개인이 아닌 사회의 불합리하고 혐오적인 시선과 분위기라는 것을 알려주면서 주제 의식을 강하게 환기해 준다.
혼혈 김준혁과 동명이인인 과외선생님 김준혁은, 처음에는 독자들에게 이름과 시점으로 인한 혼란을 야기하는 인물이고, 나영의 시점에서는 가장 의심스러운 사건의 최종 흑막처럼 묘사되며, 후반부에는 독자들로 하여금 “저 김준혁의 그 레드가 이 김준혁이었어!?” 하고 기겁하게 만들고, 최종적으로는 살인사건의 피해자가 되어 버린 어린 시절의 가해자로 남게 된다. 이를 보면 확실히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가 명확해지는데, 혼혈 김준혁은 어린 시절 혐오와 차별을 받는 피해자임과 동시에 나중에는 본인이 차별을 수행하는 가해자가 되었으며, 결국은 사회적 차별로 인해 자살하는 피해자가 되었다. 그리고 레드 김준혁은 어린 시절 블랙 김준혁을 왕따시키는 가해자였으며 성장한 후에는 친구가 되었고, 종국에는 친구의 자살에 의구심을 품고 사건을 파헤치다가 살해당한 피해자가 되었다. 그리고 두 김준혁의 목숨을 앗은 것은 결국에는 우리 사회에 공공연하게 퍼져 있는 차별적인 시선인 것이다. (사족으로, 김준혁의 블랙이라는 별명 때문에라도 자살한 김준혁이 혼혈이라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내가 본 히어로물-슈퍼전대-에서 주인공은 레드이고, 동료는 핑크/옐로우/블루/그린인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물론 예외도 있다는 것을 잘 안다.)
최근 전 세계적인 열풍을 몰고 있는 넷플릭스의 ‘오징어게임’에서도 동남아 출신의 외국인 노동자 캐릭터가 나오며, (나는 시청하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주위 시청자들의 말에 의하면) 오징어게임에서도 남아시아계 이주노동자에 대한 차별과 혐오를 대놓고 드러내고 있다고 한다. 처음 이 말을 듣고 나서, 이 드라마가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과연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인종차별로 비난을 듣지는 않을지 생각했었는데, 정작 미국과 유럽 등에서는 주로 미디어에서 아시아인을 나타내는 스테레오타입이 테러리스트 또는 사회 하층민이라서 오징어게임에서 보여주는 정도의 인종차별적 묘사로는 턱도 없다는 말을 듣고 기겁했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실제 대한민국에서의 외국인들이 받는 취급과 별반 다를 바가 없어서 크게 뒷말이 나오지 않는다는 얘기도 들었다. 이런 사회 고발적인(?) 작품이 세계 1위를 하고 있다고 하면, 우리나라의 인종차별과 성차별, 노인혐오 등이 전 세계에 알려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부끄러울 법도 한데 전 국민이 오징어게임 1위에 축배를 들고 있는 분위기라서 우습기도 하고, 다들 이 정도의 차별은 차별로 여기지도 않는 듯해서 참담한 기분도 든다.
외국인(정확하게는 비백인계 외국인) 혐오는 우리나라의 미래와도 밀접하게 맞닿아 있는데, 우리나라의 출생률은 갈수록 감소하고 있음에도 외노자/동남아/조선족/중국인/흑인/노인/장애인/여성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차별과 혐오는 갈수록 심해지고 있으며, 오히려 점점 부끄러움을 잃은 채 양지로 나오고 있는 듯하다. 이를 개인의 문제라고 치부할 수도 없는 게, 국가기관이 주도하는 동남아매매혼은 아직도 성행하고 있고, 심지어 이런 21세기형 인신매매를 국세로 지원하고 있으며, 지금도 시골에는 ‘도망 안 가는 예쁜 동남아 처녀 아가씨’라는 말이 버젓이 길거리에 플래카드로 붙어 있다. 다문화가정의 고부갈등을 보여주는 유명 TV 프로그램에서도 결혼이주한 동남아 여성에게 순종적이고 말 잘 듣는 고분고분한 이미지를 요구하며, 자신의 의견을 내보이거나 남편의 말에 토를 다는 행동을 할 경우 아직 보수적인 한국 문화에 길들여지지 않은 나쁜 며느리로 묘사된다(심지어 이 프로그램은 공영방송에서 제작되고 있다).
이러한 현실로 인해, 이 ‘혐오자살’이라는 소설은 소설로 남을 수 없으며, 혐오가 만연한 사회에 대한 고발문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국가에서는 인구 소실을 걱정할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으려고 노력해야 하고, 혐오와 차별에 대한 법적인 제재가 필요할 시점이지만 차별금지법 제정은 벌써 몇 년째 발이 묶여 있다. 누군가를 차별한다는 것이, 누군가를 혐오한다는 것이 부끄러워해야 하는 행동이 되어야 하는데 우리 사회는 점점 혐오를 공공연하게 드러내면서 스포츠화해서 즐기고 있는 분위기가 되어가고 있다. 누군가가 나와 다름을 용인하지 못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그것은 결국 본인들에게 돌아올 비수가 될 것이며, 이는 미래 사회에 커다란 빚이 되어 남을 것이다. 미래 사회까지 가지 않더라도, 혐오는 절대 당당하지 않으며 올바르지 않고 자랑스럽지 않다.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고 대한민국 헌법 제10조에 명시되어 있다. 하지만 과연, 현재의 대한민국이, 모든 국민이 가지는 기본적 인권을 보장할 의무를 제대로 지고 있는지, 백명지와 김준혁은, 혼혈과 같은 사회적 소수자들은 대한민국의 ‘국민’으로 ‘인정’되지 못하고 배척 받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장려 김*휘 기계공학부 도서: 인공지능은 무엇이 되려 하는가
독후감: 가볍게 다룰 수 없는 인공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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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인공지능이라는 것에 처음으로 관심을 가져서 직접 찾아보게 된 계기는 세계를 뜨겁게 달군 사건 중 하나인 2016년 이세돌과 구글의 딥 마인드에서 개발한 바둑 인공지능인 알파고(AlphaGo)의 대국이 있었던 때이다. 우리는 이 사건 이전에도 인간과 컴퓨터의 대결을 한 적이 있다. 일례로 세계 체스 챔피언 가리 카스파로프와 딥 블루의 대결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이 사건이 유독 나에게 관심을 갖게 한 이유는 이전까지 대부분의 사람들이 한 입 모아 ‘바둑과 같이 너무 변수가 많은 게임에서는 인공지능이 사람을 이기긴 힘들 것이다.’라고 말해왔고 이러한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나는 내 두 눈을 통해서 직접 이세돌이 패배하는 장면들을 보며 더 이상 내가 믿던 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진 순간 신선한 충격에 휩싸이게 되었다.
이러한 경험 이후로 나는 인공지능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한 주위 사람들의 질문을 받으면 항상 다음과 같이 답해왔다.“분명 우리의 삶을 편리하게 해주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언제 우리의 삶 마저 앗아갈진 모른다”이러한 대답의 이유는 바로 내가 기술적 특이점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저자가 책을 집필하게 된 이유는 ‘노버트 위너’가 쓴 다양한 저서와 그가 새로 만들어낸 사이버네틱스 혹은 인공두뇌학이라고 불리는 것에 상당한 감명을 받아서이다. 노버트 위너가 쓴 책 중 하나인 <인간의 인간적 활용>에서 제기한 문제 중 하나는 인류의 운명을 기계에 양도해버릴 가능성에 대한 것이다. 나는 이러한 점이 정말로 기술의 발전에 있어서 중요하게 생각되어야 할 점이라고 생각한다.주디아 펄과 같은 과학자들은 인공지능은 분명히 인간을 닮아갈 순 있지만 어딘가에 항상 한계가 있다고, 이 한계를 계속 돌파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인간이 인공지능에 추월당할 걱정을 크게 할 필요가 없다는 관점을 가진 과학자들도 여럿 있다. 이런 관점이라면 분명 우리가 인공지능에 대해 경계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실제로 수십 년이 지났지만, 똑바로 걸을 수 있는 로봇도 아직 쉽게 제작하지 못 하는 판국이니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의견이라고 생각한다. 또 한편으로 나와 비슷하게 인공지능의 발전에 대해서 위험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관계자들이 여럿 있다. 대표적으로 스튜어트 러셀, 스티븐 호킹, 일론 머스크, 빌 게이츠 등은 초지능 인공지능에 대한 위험성을 계속하여 지적하였다.
인간이 만든 인공지능과 기계가 가진 가장 큰 특징이라면 입력한 것만 실행한다는 것이다. 여기엔 감정이나 다른 잡념은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서 하나의 문제점이 발생한다. 인간이 시키는 대로 행동한다면 인간에게 어떠한 위험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실제는 이와 다르다. 올바른 목적을 입력하는 ‘가치정렬’이 기계의 입장에서 사람처럼 융통성 있게 잘 수행되지 않는다. 우리는 교육을 통해서 자동차 면허를 취득하고 운전을 한다면 당연히 보행자를 차로 쳐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굳이 가르치지 않아도 알고 있다. 반면 기계는 무엇이 올바른 행동이 모르기 때문에 자율주행을 하더라도 사람을 다치게 하면 안 되므로 피해간다는 내용을 직접 입력해 주어야 한다. 이처럼 우리가 당연하게 기계가 이렇게 행동할 것이라는 생각하는 것 자체가 위험한 경우가 많음을 시사한다.
가치정렬 문제 이외에도 자기 복제, 제어와 같은 다양한 문제도 도사리고 있다. 그중에서 인공지능의 정수라고 할 수 있지만, 아직 현실에서 존재하지 않아서 SF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강한 인공지능 또한 큰 문제가 될 수도 있다. 그 반대인 IBM의 왓슨이나 알파고 같은 것들은 약한 인공지능으로 불리며 단순히 한 분야에서의 전문가 수준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강한 인공지능의 경우 스스로 사고도 하고 다양한 데이터를 통신을 통해 직접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아주 강력한 존재라고 볼 수 있다. 우리가 이를 통제할 수 있다는 보장이 없을뿐더러 낙관적으로 이런 존재가 사람과 사이좋게 지낼 수 있다는 것 또한 보장할 수 없다. 그렇다고 문제가 생겼을 시에 이것을 파괴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에 대해서 대다수의 과학자, 철학자들은 힘들다고 대답한다. 그 이유는 하드웨어적인 것을 파괴하더라도 소프트웨어, 데이터의 형태로 충분히 남을 수 있으며 이것은 거의 제거하기가 불가능하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공지능의 개발에 있어 더욱 고지능, 자율적인 사고를 추구할수록 이런 기술 개발에 있어서 더욱 엄중하게 관리되고 조절될 필요가 있다.인공지능에 위와 같이 무서운 문제점들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인공지능은 인간이 해낼 수 없거나 직접 하기에 너무 효율이 나쁜 것들을 빠르게 해결해줄 수 있다. 예를 들어 수치적 해석 같은 경우는 인간이 하는 것이 불가능한 영역이다. 따라서 이러한 분야에서 우리는 계산에 대한 큰 틀을 세우면 컴퓨터가 반복적인 계산을 통하여 결과를 나타내게 된다. 이보다 더 나아가 우리가 설계조차 하기 힘든 문제를 해결하고 그 결과를 알려줄 수 있는 인공지능을 만들게 된다면 인류의 발전에 엄청난 도움이 될 것이다. 특히 우리가 지구를 넘어 우주로 나아가게 된다면 우리의 능력 밖에 존재하는 문제들을 인공지능의 도움을 받아 해결한다는 긍정적인 미래를 꿈꿀 수도 있다.나는 분명 사이버네틱스의 도움을 받아 내가 가지고 있는 사진과 비슷한 사진을 인터넷에서 쉽게 찾고, 대중교통을 이용하려고 지도 앱을 열어서 최단거리와 환승 방법을 알아서 삶을 편리하게 살고 있다. 그 외에도 교육, 문화, 서비스, 의료 할 것 없이 분명 알게 모르게 도움을 받아 편리한 삶을 영위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아직 스스로 생각하긴 커녕 우리가 원하는 단순한 일조차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벌써 너무 두려움의 존재로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냐고 여길 수도 있다. 이전에 나는 ‘공학윤리’라는 강의를 들은 적이 있다. 거기서 배운 공학의 정의는 ‘과학과 기술을 이용하여 인간에게 유용하고 편리한 것을 개발하는 것’이라고 배웠던 것이 아직 어렴풋이 기억난다. 하지만 인공지능의 개발이 우리 삶에 지금까지 편리함을 주었던 것은 맞지만 어느 한순간에 이 모든 것을 다 앗아간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인류의 존속에 대한 기회는 단 한 번뿐이다. 나도 한 명의 공학도로서 기술의 개발은 중요하고 이것이 우리의 삶을 이전보다 편리하게 해주었다는 사실에 적극적으로 공감하지만, 인공지능의 연구와 개발에 대한 것은 냉전시대 때 개발된 대량살상무기(핵무기)와 현재의 지구 온난화 문제 다음으로 전 지구적으로 진지하게 토론되어야 할 주제라고 생각한다.나는 사실 누구보다 스티브 오모르 훈드가 말한 ‘지능을 갖춘 독립 개체는 항상 자신의 존재를 보존하려 한다’라는 말에 충실한 존재인 듯하다. 이러한 나의 걱정은 전혀 이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미래는 언제나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코앞까지 닥쳐왔으니까. 매년 새로운 전자기기를 구매하는 것을 즐기고 최신 기술을 자주 찾아보며 애초에 기계공학을 전공으로 배우는 입장으로써 일방적으로 인공지능에 있어서 러다이트 운동을 하는 것도 아니다. 그냥 진심 어린 걱정이다. 며칠 전에 길을 가다 공사현장에 ‘일에는 베테랑이 있어도 안전에는 베테랑이 없다’라는 문구를 보았다. 이는 인간의 존속 여부와 크게 다르지 않은 말이라고 생각한다. 아직은 우리가 지구에서 군림하고 있을지 몰라도 우리가 만든 문화에 우리가 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은 충분히 예상 가능한 사실이다. 우리는 우리의 미래를 아직 스스로 결정할 수 있고 올바른 선택을 내릴 수 있는 시간이 남아있다. 늦었다는 것을 눈치채기 전에 많은 사람이 인공지능 기술 개발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아야 할 차례라고 생각한다. 아직은 낙관적으로 볼 수 있겠지만 언제까지나 아직은 미숙하다는 이유만으로 낙관적으로 볼 수 없지 않겠는가?
장려 나*경 제약학과 도서: 미드나잇 라이브러리
독후감: 지금 현재를 살아가는 인간, 현재완료적 존재 포스트휴먼을 들여다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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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스는 쉬운 게임이지. 하지만 잘하기는 어려워. 네가 수를 둘 때마다 완전히 새로운 가능성의 세상이 열리거든.”. 죽음과 삶의 경계에서 마주한 도서관에서 노라가 엘름 부인을 처음 만나 긴 여정을 함께 할 대 항상 부인의 곁에는 체스가 있었다. 초반에는 지루할 때 으레 하는 가벼운 손장난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지만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렸지만, 오른손에 남은 페이지들이 얇아질 즈음에는 체스가 미드나잇 라이브러리 자체를 나타내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체스는 무수한 경우의 수를 고민하고 끊임없는 선택의 과정을 통해 곁가지들로 뻗어 나가는 가능성을 가장 쉽게 느끼는 방법이었다. 노라 스스로조차 인지하지 못한 삶에 대한 내면의 강한 의지를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책을 펼치면 겪을 수 있었던 또 다른 노라의 삶뿐만 아니라 체스판 위의 폰의 이야기도 영향을 주었다는 생각을 한다.
사르트르의 명언, “인생은 B(Birth)와 D(Dead) 사이의 C(Choice)이다.”라는 우리가 살면서 얼마나 많은 선택을 하고 있는지 또, 우리의 삶이 얼마나 많은 선택으로 이루어져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런 인생을 살아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선택 장애’를 겪고 있는 나는 꽤 오래전부터 최선의 선택을 할 수만은 없을까, 라는 고민을 해왔다. 어쩔 수 없는 선택에 따른 결과들이 예상치 못하게 흘러갈 때면 후회의 글들이 겹겹이 쌓여서 내 머릿속을 깜지 마냥 가득 채워버렸기 때문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냥 주어진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선택하고 털어버리는 게 맞다.
노라가 자정의 도서관에서 마주한 가장 두꺼운 책은 ‘후회의 책’이었다, 마지막 순간 가장 먼저 재가 되어버린 것도. 노라가 죽기로 결심하기 세 시간 전, 그녀는 온몸이 후회로 욱신거린다고 한다. 그녀에게 한꺼번에 닥쳤다고 느껴지는 악재들이 자책과 후회로 얼룩져서 계속해서 번져나가고 있었다. 대부분은 그때의 내가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이었다. 하지만 책을 통해 다른 선택을 한 노라의 삶에 들어갔고 원래의 삶에 없었던 것이 있기도 했지만 있었던 것이 없기도 했다. 선택은 또 다른 선택지들을 만들기 때문에 어느 것도 당연한 것은 없었다.
그래서 후회를 해야 할 것만 같은 상황이 왔을 때 나의 선택은 다시 그 상황을 떠올려보는 것이다. 그 전의 대화들, 당시 나의 경험과 기분을 생각해보면 다시금 똑같은 상황으로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그 안의 내가 내릴 수 있는 판단은 하나였다는 결론으로 모이게 된다. 그때의 내가 최선의 선택을 했다는 확신이 생기고 나니 더는 그 선택이 후회되지 않았다.
어느 순간, 노라는 후회들을 되돌리기 위해 선택한 삶들이 다른 이들의 꿈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노라가 빙하학자가 되지 않고, 작곡을 멈추고 수영을 그만둘 때는 나름의 타당한 이유가 있었다. 그 꿈들은 노라가 진정으로 바라던 것들이 아니었고, 설령 이룬다고 해도 또 다른 무언가를 잃을 것이란 것을 조금은 예감했을지도 모른다. 나의 경험들을 떠올리며 노라가 가진 후회의 민낯들을 하나씩 벗기니 날 집요하게 괴롭히던 모습과는 달리 정말 초라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후회하지 않을 자신은 없지만, 더 잘 지워내는 방법들은 배운 것 같다.
노라는 시행착오 끝에 마침내 자신이 진정 바랐던 이상적인 삶을 찾게 되지만 자꾸만 이 삶에 속해서 자연스럽게 살지 못할 것 같다는 불안함을 느낀다. 사랑하는 남편과 아이에 대한 이전의 기억은 없는 채 왔기에 그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서투른 자신이 불편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속은 빈 채로 껍데기만 같은 또 다른 노라의 삶을 빼앗은 것 같다는 생각과 공허함이 계속해서 밀려왔다. 혼란스러워하던 노라는 도서관으로 돌아와 마침내 자기가 원하는 삶은 원래의 삶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예전과 같은 삶으로 돌아갈 때 그녀는 가장 큰 변화를 겪는다. 관점의 변화이다. 노라가 가장 바라고 가고 싶었던 곳이 그녀 스스로가 끝낸 곳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은 나에게도 꽤 충격이었다. 죽기로 마음먹은 몇 시간 전의 행적을 함께 한 나에게도 노라의 삶은 희망도 기대도 찾을 수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와 다른 삶을 탐색하는 여정을 함께 한 후에 나에게도 이 삶이 가장 희망차고 기대되는 삶으로 바뀌었다. 마음가짐을 바꿔야 한다는 숱한 연설들이나 조언들을 듣는 것보다도 훨씬 진한 여운과 영향을 준 책이 아닌가 싶다.
이야기의 전개와 내용의 다채로움에서 소설의 즐거움도 느낄 수 있었지만, 그 모든 과정에 함께하면서 성장하는 노라의 모습을 통해 나의 경험을 반추할 수 있어서 자기계발서만큼이나 내면의 힘을 기를 수 있었다.
자정의 도서관을 묘사할 때에 책에서는 이런 설명을 한다. 인간은 복잡하게 얽힌 세상을 매사에 간단하면서 이해할 수 있는 무언가로 단순화해버린다고. 늘 일반화하며 마음속 구부러진 길을 억지로 펴기 때문에 길을 잃는다고. 도서관은 인간이 이런 식으로 단순화할 수 없는 삶과 죽음 어느 것도 아닌 무언가, 시계의 숫자 사이 초침이 스쳐 가는 그런 영역이라고 말해준다. 이 구절이 나에게는 가장 인상적으로 남았다. 6~7살 정도의 아이들이 자연을, 또 상황을 묘사하는 표현들이 나한테는 단 한 번도 생각지 못한 관점인 것 같아서 감탄했던 기억이 있다. 기억은 희미하지만 내가 어렸을 적에도 보고 느낀 그대로 툭 내뱉은 말들을 엄마가 듣고 어른들을 만날 때마다 자랑이 섞인 말투로 이야기를 했던 기억도 있다. 당연하고 일반적인 것들이 아이들에겐 그렇지 않다는 게 이제는 내심 부럽기도 하다.
일반화와 단순화는 얽혀있는 일들을 간단하게 설명해주고 이해할 수 있게 만들어준다는 장점도 있지만, 정의 내릴 수 없는 복잡한 무언가를 강렬하게 느낄 때 그것이 무엇인지를 인지할 때에는 방해가 된다. 배너지 씨가 더 약국에서 약 받아와달라는 부탁하지 않아도 되겠다고 말했을 때 좋은 소식인 듯 알려주는 그의 상기된 모습에 반해 노라는 아무도 자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 필요 없는 존재가 되어버렸다고 느끼며 더는 살고 싶지 않다고 생각한다. 나의 필요성을 설명할 수 있는 이유는 셀 수 없이 많은데도 단순히 누군가 나를 덜 찾게 된다고 해서 그 뿌리가 흔들린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데 그 찰나의 순간에는 빠르게 흑백 논리처럼 결론을 내리는 것이다.
인간관계들을 돌이켜 보았을 때 악어와 악어새처럼 공생 관계라면 필요성을 따지는 관계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소시오패스가 아닌 이상, 관계를 맺는 데에는 큰 이유가 없고 상대방에게 바라는 별도의 목적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나 자신이 그렇게 여긴다면 상대방도 분명 그러리라는 믿음을 가진다면 내 존재 이유를 타인에게서 찾는 조급함은 느끼지 않아도 될 것이다. 이러한 단순화 과정들이 인간이 스스로 한계를 만들어내는 어리석은 방법이라는 생각에 깊이 공감한다.
“우리가 정돈해놓은 체스판을 보렴. 게임이 시작되기 전인 지금은 얼마나 질서 있고 안전하고 평화로워 보이니. 아주 아름답지. 하지만 동시에 지루하고 죽어있어. 그러다 네가 체스판의 말을 움직이는 순간 상황은 변하지. 좀 더 무질서해져. 네가 말을 한 번씩 움직일 때마다 그 무질서는 점점 쌓이는 거야”.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생기지 않는다는 말처럼 통제할 수 없는 무질서에 대한 두려움에 걱정만 하고 있다면 평화로워 보이지만 죽어있는 것과는 다름없는 정적인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다. 우리가 하는 무질서들이 무수히 많은 곁가지를 만들어내지만, 그 모든 과정에서 나에 대해 확신하고 앞으로 나아가기만 한다면 그 삶이 주체적인 내가 원하고 향유하는 삶이 될 수 있다. 정답이 없으니까 체크 메이트를 해야 한다는 생각에 머리를 싸맬 필요도 없다.
책이 한 사람에게 주는 울림이 얼마나 깊고 큰 원을 그리는지 알고 있었지만, 예상보다도 더 많은 울림을 얻게 된 책이라 더욱 뜻깊었다. 가벼운 소설의 형태를 하고 있지만 ‘인생에서의 선택’이라는 주제가 각자가 놓인 환경과 가치관에 따라서 자유자재의 해석을 낳을 수 있기에 되도록 많은 이에게 추천해주고 싶다. 특히 지금 나아가는 방향에 대한 확신이 없거나 불현듯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고민의 시기에 빠진 이들이 읽어보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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