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도서관 독후감 공모전

2023.11.22

선정도서 6종
참가대상 부산대학교 학부생, 대학원생 및 부산 지역 주민
참여방법 도서관이 선정한 올해의 책 6권 중 1권을 자유롭게 읽고 해당 도서의 독후감 제출
참여기간 2023년 8월 7일 ~ 10월 29일
시상내역 총 11편(부산대 총장상 및 도서관장상, 총상금 210만원)

※ 본 사업은 부산대학교 국립대학육성사업의 예산을 지원받아 운영되었습니다.

2023년도 공모전 선정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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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 독후감 선정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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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 이름 학과 선정도서/독후감제목 보기
최우수 이*국 스포츠과학과 도서: 사이보그가 되다
독후감: 장애, 기술, 의학 삼자대면 한 번 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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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 다리가 없는 사람이 인공 다리를 자신의 다리에 결합해 세상과 교류한다. 이 사람은 다리가 없지만 걷는데 아무 지장이 없어 보인다. 인공 다리가 마치 진짜 그의 다리가 된 것 같다. 역시 기술이 대단한가 보다. 나날이 발전하는 기술과 의학이 이제 곧 장애를 종식시킬 것 같다. 장애인들이 분명 좋아할 것이다. 이제 그들은 팔과 다리가 없어도, 앞을 볼 수 없어도, 귀가 들리지 않아도 세상을 잘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해피엔딩이다. 끝. 이렇게 마무리되었다면 이 책은 세상에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기술이 이제 장애를 없앨 수 있다고 말하지만 장애인들은 거리로 나와 시위를 벌인다. 그리고 수많은 장애 학자들은 여전히 기술과 의학을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도대체 왜 그럴까? 이 물음에 답을 해줄 책이 있다. 바로 김초엽, 김원영 작가의 ‘사이보그가 되다’라는 책이다.

당신은 장애가 어떻게 기술을 바라보고, 또 기술은 장애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한 번 생각해 본 적 있는가? 부끄럽지만 난 지금까지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조금 극단적으로 말하면 기술 발전 = 장애의 궁극적 치료 = 모두의 평화, 행복이라는 공식 아닌 공식으로 가볍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 책은 나의 이러한 가벼운 생각에 무게 추를 달아줬다. 이 무게 추는 곧바로 나의 지식이 되어 지금까지 내 머릿속을 맴돌고 있다. 관심을 가져본 적도 없고, 가질 생각조차 안 했던 장애라는 분야. 그 깊은 어딘가에 나를 일깨워주는 보물이 있을 거라고는 꿈속에서조차 생각하기 어려웠다. 장애에 대해 조금 더 알고 싶은 사람, 기술과 의학이 장애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알고 싶은 사람, 장애인들이 궁극적으로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싶은 사람은 이 책을 꼭 한 번 읽어보길 바란다. 아 책을 읽기 전 이 글을 보고 입가심을 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다.

우선 책 제목과 작가에 끌려 앞뒤 안재고 책을 선택한 나 자신을 되돌아보며 글을 시작한다. 평소에 김초엽 작가의 SF 소설을 즐겨 읽던 지라 ‘사이보그가 되다’라는 책 제목은 나를 설레게 하기 충분했다. 제목만 봤을 때는 김초엽 작가가 SF 소설을 쓰게 된 계기나 책을 쓰는 방법에 대해 쓴 책인 줄 알았다. 김초엽 작가와 같이 책을 집필한 김원영 작가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어서 제목만 보고 책 내용을 지레짐작했던 것 같다. 물론 표지와 띠지를 보고 내 지레짐작이 잘못됐다는 걸 바로 깨달았지만 말이다.

책을 앞뒤로 몇 번 살펴보니 장애인을 상징하는 단어가 사이보그라는 것을 단번에 눈치챘다. 추가로 김초엽 작가가 청각장애인이고 김원영 작가가 골형성부전증을 가진 장애인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를 토대로 장애인이 사이보그가 되어가는 과정을 풀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 생각 역시 틀린 생각이었다. 책은 사회가 어떻게 장애를 규정하는지 설명하고 장애인을 둘러싼 각종 기술에 대한 비판이 주 내용을 이룬다. 추가적으로 기술을 통해 장애인이 정체성을 형성하는 과정을 바늘에 실 꿰매듯 섬세하게 설명해 주며 책의 깊이를 더한다.

먼저 장애와 기술에 대해 두 작가가 가지고 있는 생각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김초엽 작가는 기술이 발전할수록 장애인과 사이보그의 연관성이 뚜렷해진다고 한다. 인공 와우, 인공 심장을 이식한 사람들이 대표적인 예이다. 하지만 우리는 사이보그를 상상하며 장애인을 떠올리지 않는다. 그리고 장애인들도 자신들을 사이보그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아무래도 블록버스터나 SF 영화에 나온 사이보그를 현대의 장애인으로 규정짓기에는 힘든 부분이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김초엽 작가는 보청기를 끼고 있는 자신이 사이보그, 즉 포스트 휴먼이 아닐까라는 생각에 정체성을 고민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지금 이용하고 있는 기술이 장애인의 삶을 어떻게 더 향상시켜줄지 생각하게 되었다.

이러한 고민의 결과 장애인을 위한 기술은 기계 팔이나 인공 다리처럼 까마득히 멀리 있는 미래 기술이 아니었다. 점자 보도블록을 정비하고, 키오스크 음성 안내를 포함하는 건 미래의 뛰어난 기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흔히 사람들은 장애를 치료할 ‘위대한’ 기술에 희망을 갖고 환호하지만 멀리 가지 않아도 장애인들의 삶을 개선할 선택지가 있다. 문제는 신경 쓰느냐, 쓰지 않느냐이고 우선순위가 높으냐, 높지 않냐이다. 장애인들에게 지금 당장 필요한 건 치료와 회복보다 의사소통을 원활하게 하는 기술이 먼저이지 않을까? 미래의 회복과 치료에 모든 초점을 맞추면 사람들이 가진 희망은 점점 더 볼 수 없는 미래로 유예될 것이다. 미래가 아닌 지금 이곳에서 조금 더 잘 살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기술과 의학이 장애를 바라보는 시선에 대해서도 말을 덧붙이겠다. 난 현재 기술과 의학이 장애를 교정, 치료의 대상으로만 보는 것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보내고 싶다. 장애는 배제되어야 하고 고쳐야만 하는 것으로 보는 게 타당한가? 이 물음에 난 선뜻 YES라고 대답할 수 없다. 난 기술과 의학이 장애를 교정의 대상으로만 보는 것에서 멀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사고는 비장애 중심주의적 사고에 불과하다. 누군가에게는 시각적 장애를 가진 몸이 당연할 수도 있다. 그에게는 앞이 안 보이는 몸이 ‘표준’ 신체인 것이다. 그 신체를 비장애인 관점에서 반드시 교정, 치료해야 할 대상으로 봐서는 안될 것이다.

실제로 한 시각장애인이 수술을 통해 시력을 회복한 사례가 있다. 그들의 가족은 모두 시력을 되찾은 그를 보며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그는 기쁘지 않았다. 혼란스러웠다. 수술 이후 그는 색상과 움직임, 형체를 볼 수 있었지만 그것을 인식하는 시각 기억이 없었다. 시력을 되찾았지만 그는 보이는 세계에 오히려 당혹감을 느낀 것이다. 그에게 시력 회복은 낯선 자극의 혼란이었다. 다시 시각장애인으로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수 없는 일. 결국 여러 문제로 갈등하던 그는 폐렴과 합병증으로 2차 실명을 맞는다. 비장애인 입장에서 실명은 절망 그 자체다. 하지만 시각이 아닌 촉각의 세계로 다시 돌아와 그가 느낀 감정은 절망이 아니라 편안함 이었다. 자기 집에 온 것 같은 기분으로 그는 다시 살아갔다. 이와 같은 사례를 보면서 장애인에게 무조건적으로 치료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잘못된 편견이 아닐까라고 생각했다. 장애인 고유의 정체성을 인정해 주고 다양성을 존중해야 하는 건 아닐까?

그렇다면 왜 기술과 의학은 장애를 교정과 치료의 대상으로 볼까에 대한 생각을 안 할 수 없다. 난 사회가 강요하는 ‘정상성’이 큰 역할을 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회는 이동에 어려움을 느끼는 장애인에게 오로지 ‘걷기’만이 정상적인 이동 수단이라고 말한다. 그들에게는 ‘걷기’만 있는 게 아닌데도 말이다. 그들은 휠체어나 롤 레이터, 스쿠터 등을 이용하여 자신에게 맞는 이동 수단을 경험으로 터득한다. 사회가 강요하는 ‘걷기’라는 ‘정상성’에서 한 발자국 떨어진 다음 장애인 입장에서 무엇이 필요한 지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장애인이 직접 지식을 생산하고 기술을 설계하는 ‘크립 테크노 사이언스’라는 분야에 대해 더 알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애인이 중심이 되어 장애 기술을 추구하는 것이 어떻게 보면 바람직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잠깐 해본다. 장애와 기술의 긍정적 관계는 비장애 중심주의와 사회가 강요하는 ‘정상성’의 규범에서 멀어지는 것부터 시작하는 게 아닐까? 물론 지나친 장애 중심주의는 오히려 역풍을 맞을 것이다. 장애 기술을 대할 때는 오로지 장애뿐 아니라 여러 정치적, 사회적 문제가 있다.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이 전장연의 지하철 시위에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는 것도 여러 관계가 얽매여 있어서 그럴 것이다. 단지 난 장애와 기술이 나아가야 하는 방향을 한 번 더 생각해 보면 좋겠다는 말을 하고 싶을 뿐이다.

‘장애는 몸의 특정한 기능이 결여된 상태가 아니라 ‘정상이 아닌 몸’이라는 사회적 평가를 획득한 일종의 신분에 가깝다’. 김원영 작가가 책에서 한 말이다. 이 말을 보고 참 많은 생각을 했다. 신체의 결함을 장애로 낙인찍고 그들에게 ‘정상성’을 강요하는 태도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낙인이란 무시무시한 효과를 발휘한다. 어떤 사람의 정체성을 낙인 한 번으로 규정지을 수도 있다. 단순히 몸의 결함이 아니라 ‘정상이 아닌 몸’이라는 낙인을 찍고 그들에게 ‘장애인’이라는 신분을 쥐여주면 그들은 영원히 정상인 몸을 가지지 못할 것이다. 이미 한 번 낙인찍었기 때문에 다시는 그 낙인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낙인이란 그런 것이다. 애초에 ‘정상’이라는 것의 기준조차 모호하지 않나라는 생각을 한다. ‘정상이 아닌 몸’이 있다면 ‘정상인 몸’은 무엇일까? 앞을 보고 길을 걸으며 주변의 바람 소리를 듣고 손으로 글을 쓰는 내가 ‘정상인 몸’인가? 내가 ‘정상인 몸’이라면 내 몸이 정상이라고 누가 정의했지? 이 모든 물음이 사회가 지금까지 강요해왔던 ‘정상성’의 범위에서 벗어나지 못한 증거이지 않나 생각한다. 사회에서 당연하다고 말하는 것들이 생각해 보면 당연하지 않을 때가 많은 것 같다. 복잡하게 얽힌 장애와 기술의 관점. 내가 이 속에 들어가 발을 디디고 옳은 눈으로 바라볼 수 있을까에 대한 생각을 한다. 나에게 생각할 수 있는 눈을 하나 더 갖다 준 ‘사이보그가 되다’에 진심으로 감사한다. 더불어 김초엽 작가와 김원영 작가의 생각과 신념을 응원한다.

우수 정*정 아동가족학과 도서: 만일 내가 인생을 다시 산다면
독후감: 펼쳐진 손에 온전히 쥐어지는 나의 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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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시간을 되돌릴 수 있을까.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그때와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질문을 던지지 않고는 참을 수 없는 순간이 있다.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순간이 있다. ‘왜 나에게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걸까.’ ‘이 모든 게 무슨 의미가 있는데’ 앞만 보며 달려가기도 부족한 시간에 중요한 걸 두고 온 마냥 두리번거린다. 몇 차례 찾아온 침묵을 울음으로 토해내고 고개를 들어 질문의 마침표에 시선이 도착했을 때, 마음속의 무언가가 죽고 새로 태어난다. 광명과 함께 찾아온 통찰, 그제야 구원받는 것이다. 비로소 스스로가 답 그 자체가 되는 것이다. 이 책은 삶이라는 여정을 달리는 한 마라토너의 이야기다. 자기 생애에 주어진 길을 온몸으로 겪어본 사람의 이야기다. 가시밭길, 진흙탕 등 온갖 고비를 넘고 드넓은 광장 아래에 도착한 사람, 각자 자신의 여정을 걸어가는, 혹은 갈 준비를 하는 다양한 사람들과 모여 앉아 숨을 돌려가며, 읊조리는 한 마디는 “만일 내가 인생을 다시 산다면”. 책은 그렇게 시작한다.

 

그녀의 글은 험난한 길을 나아갈 소중한 사람의 손에 쥐여주는 따뜻한 도시락 같았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미처 전하지 못한 고백 같기도 했고 늦은 밤, 촛불 아래서 홀로 자기 자신에게 쓰는 편지 같기도 했다. 처음 5가지 챕터와 8~9개로 나뉜 단락으로 이뤄진 한 권의 생애가 내 손에 쥐어졌을 때, 느껴지는 묵직함이 꽤 마음에 들었다. 표지에는 보름달과 황혼 아래에서 바다를 바라보는 한 여인의 뒷모습이 담겨있다. 황혼과 보름달이 만나는 순간, 부서지는 파도. 그건 마치 간절히 만나기를 바라는 마음속의 어떤 순간처럼 느껴졌다. 책의 첫인상은 그러했다. 내가 이 책을 선택한 이유는 ‘정신분석’ 테마에 있었다. 책의 저자는 정신분석 전문의로 12년간 수많은 내담자를 만나고 연구하고 공부했다. 방학 동안 집에서 온종일 정신분석에 관한 책을 읽었을 정도로 관심 있는 주제였기에 자연스레 눈이 갔다. 계속 공부하고 싶은 분야에 오랫동안 몸을 담은 사람이 자신의 삶을 녹여서 쓴 글을 읽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앞으로 걸어갈 예정인 길을 먼저 거쳐 간 누군가가 전해주는 메시지. 어쩌면 난 이 책을 미래의 내가 지금의 나에게 전해주는 편지 한 권이라고 여겼는지도 모른다. 그 마음은 여기에는 그토록 찾고 싶었던 무언가 있을 것 같다는 섣부른 기대가 있었다. 한편으로는 이제껏 거쳐 간 어른들을 향한 반항적인 마음도 있었다. 힘든 마음 몰라주고 반갑지 않은 조언을 덥석 내밀며 내 인생이 자기들과 똑같기를 바라는 거 아닌가. 어디 무슨 말을 하는지 지켜보자, 하는 치기 어린 오만과 투정도 섞여 나왔다. 저자를 처음 만났을 때 솔직한 나의 마음이다.

 

혼탁한 마음으로 의도치 않게 텍스트를 왜곡하는 일을 지양하기 위해 저자를 깊이 이해할 필요가 있었다. 더욱이 한 개인의 삶이 녹아든 자서전일수록 문장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무리 약이 되는 교훈이어도 사람마다 처한 상황과 조건은 다르기에 모두에게 똑같이 적용되지 않는 법이다. 그러니 저자의 생애과정의 맥락과 겹쳐보며 어떻게 나의 것으로 가져올지 계속 고민해야 했다. 두 세계는 분리되어 있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도록 접촉해야 했다. 이를 유념한 채 읽어내려갔다. 저자는 고등학교 2학년 겨울방학 때 친언니를 교통사고로 잃었다. 첫 아이를 응급실 환자를 돌보는 도중에 유산했고 ‘누군가’의 무언가로 바쁘게 살다가 파킨슨병을 진단받았다. 병을 진단받기까지 그녀의 삶은 투쟁의 연속이었다. 정신과 분석 전문의로, 두 아이의 엄마로, 시부모님을 봉양하는 며느리로, 싸우고 지키고 극복하고 이겨야 했다. 자신이 망가지는 지경이 되더라도 손에 쥔 것을 어떻게든 지켜내고 싶었다. 갈수록 많은 것을 취했지만, 대신 그만큼의 자신을 바쳐야 했다. 삶의 소소한 행복과 즐거움, 여유와 추억, 사랑하는 사람들의 성장, 모든 것을. 그녀는 인생을 역할을 지키기 위한 숙제처럼 살아오다 보니 정작 누려야 할 삶의 즐거움들을 너무 많이 놓쳐버렸다고 한다. 더 견디기 힘들었던 건, 자신이 없는데도 세상이 너무나 멀쩡하게 잘 돌아간다는 것. 챕터마다 인생의 고비를 넘기는 과정에 대한 솔직하고 담담한 자기서술은 그녀의 삶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도록 도와줬다. 과장된 표현으로 감정을 극대화하지도, 극복을 강조하려 그 고통을 축소하지도 않았다. 그저 묵직한 단어를 담아 단조로운 어조로 자신을 덮친 재앙을 서술해갔다. 편안하고 잔잔하지만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었다. 그건 수차례 울음을 게워내고 비워진 상태에서 내려놓는 기나긴 한숨에 가까웠다. 아무리 들여다봐도 나로서는 미처 모두 가늠할 수 없는 한 개인의 회한과 설움의 깊이 아래에서 울적하고 애틋한 마음이 들었다. 저자가 전하려는 메시지에 시선을 더 모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하나의 문이 닫히면 또 다른 문이 열린다. 그러니 더는 고민하지 말고 그냥 재미있게 살았으면 좋겠다.” 힘들고 외로운 사람들에게 해주고 싶은 한 문장이 있다면, 이렇게 전해주고 싶다고 했다. 아무리 괴로워도 벗어나고 싶지 않은 방이 있다. 살을 베는 칼날이라도 꽉 쥔 채 놓고 싶지 않은 무언가가 있다. 이는 머리로 다짐해서 바꿀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마음이 붙잡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지금 내가 발붙이고 있는 공간이, 손에 쥐어진 무언가가 진정 내가 원해서 주어진 것들일까. 그걸 원하는 이유가 뭘까, 어쩌다가 그걸 원하게 되었을까. 하나씩 짚어가며 욕망의 근원을 찾아가야 한다. 쉽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괴롭고 쓰라린 과정이다. 그러다 보면 폐허더미에서 울고 있는 작은 아이가 있다. 상처받아 아프고 두려운, 그래서 원하는 것을 원하지 못한 채 웅크리고 앉아있는 아이가 있을 것이다. 그 아이의 옆에 오랫동안 머물러주어야 한다. 얘기도 들어주고 안아주고 사탕도 주며 달래가며 계속 같이 있어 줘야 한다. 그러니 그건 내가 나의 부모가 되어주는 것이다. 아이가 무럭무럭 자라 충분히 용기를 낼 만큼 성장했을 때 손을 잡고 함께 폐허를 나올 수 있다. 그 문을 걸어 잠그고 나온다면, 전혀 다른 세계가 삶에서 펼쳐질 것이다. 생생하게 살아 숨 쉬는 것들이 가득한 공간, 아이는 즐겁게 뛰어놀 것이다. 삶의 진수를 느끼고 받아들이며 현존하는 것이다. 손에 쥐어진 것, 내가 있는 공간, 모든 게 온전히 나의 것이라는 감각. 주어진 것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 것이다. 그 전에 놓치지 않으려 고군분투했던 것이 무엇이었나 기억조차 나지 않을 만큼. 앞서 말한 모든 과정이 정신분석이다. 과거에 묶여 꼼짝도 못 하는 사람들이 스스로 문제가 있음을 깨닫고 문제를 해결해 나갈 수 있도록 돕는 것, 저자는 그렇게 설명한다. 원치도 않는 일이(엄밀하게 말하면, 그렇다고 믿고 있는 일이), 끔찍한 일이 끝없이 반복되는 이유는 내면의 상처 입은 어린아이가 성장하고자 몸부림치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와 똑같은 상황을 재현함으로써 그것을 없던 일로 만들거나 극복하려고 애를 쓴다. 그러니 그 아이를 만나야 할 필요가 있다. 아이를 힘껏 껴안아, 슬픔과 두려움을 눈물로 게워가면, 감정적 통찰이 이뤄진다. 그 순간이 얼마나 빛나는지 난 알고 있다. 책의 막바지에 다다랐을 즈음, 저자는 어느 순간 마음속에서 내가 걷고 있는 길을 앞서 거쳐 간 ‘선생님’이 되어있었다. 그저 같은 공부를 하는, 되고 싶은 역할이나 직업이라서 머리로 인식하는 윗사람이 아니라, 마음으로 느껴지는 진정한 선생님이었다.

 

마지막 장을 넘기고 돌려서 책의 앞면을 찬찬히 살펴봤다. 처음 마주했을 때 눈에 담긴 순간을 재현해보고 마치고 싶었다. 마지막 인상만큼은 온전히 나의 해석으로 남기고 싶었고 저자의 세계가 나에게 어떻게 전해졌을지 궁금도 했다.

달이 뜬 황혼, 빛과 어둠의 경계가 사라진 하늘 아래 찬란한 달과 그 빛과 함께 부서지는 파도. 그건 자신의 결여와 상처, 어리고 아픈 마음을 만나 엉엉 울고 난 뒤 찾아온 마음속 어떤 순간 같았다. 삶의 고통을 끌어안고 한껏 울고 있을 때는 바닷속에 잠기는 기분이다. 심해 속 바닥을 치고 올라오면, 짠 내 가득한 먹먹한 상태가 오래 지속된다. 훌쩍일 때마다 파도 소리가 난다. 파도와 함께 마음속의 어떤 것이 하얗게 부서지는 기분이다. 그러다 보면 찬란한 빛이 떠오르는데, 그게 마치 표지의 장면과도 같았다. 그 장면을 바라보는 여인은 혼자라도 외롭지 않다. 온전하고 넉넉하다. 찬란하게 아름다웠다. 제목은 저자가 번역하여 그림책으로 낼 정도로 좋아한 시에서 가져왔다고 한다. 미국 산골에 살던 할머니가 85세가 된 해에 쓴 시라고 한다. 생의 마지막에 꽃봉오리 피어나듯 터져 나온 시 한 편, 죽음 앞에서 살아나는 생의 역동성이었다. 그건 어떤 시작보다 강렬한 불꽃 같은 에너지였다. 그녀의 말대로 참 닮아있는 마음이었다. 죽음과 친해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는, 그러니 더는 두려울 게 없는, 온몸과 마음을 다해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의 것과.

우수 김*희 경영학과 도서: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독후감: 기적(奇蹟), 기적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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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일견 선로 위의 기차를 닮았다. 셀 수 없을 만큼 어지럽게 교차하는 ‘삶’이란 선로 위에서 우리는 앞으로만 하염없이 달리고 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여정들이 교차하는 철로들의 갓길, 보이는 무수히 많은 간이역들. 모두 각양각색의 모양으로 손을 흔들며 지친 열차들에게 잠시 쉬었다가도 좋음을 넌지시 알린다. 간이역의 주인들은 원한다면 자신들의 경험과 생각으로 채색된 배경을 감상하고 가도 좋다며 흔쾌히, 때론 퉁명스럽게 제안하기도 한다. 수많은 쉼터 중 이번에 정차한 역의 주인은 ‘에릭 와이너.’ 활짝 웃으며 건네는 환영 인사에 홀린 듯 나의 열차에서 내린다. 허락을 구하고 간이역 뒤편에 사각 모양으로 유리된 기찻길 위,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에 몸을 싣는다. 각기 모양과 색깔이 다른 선로를 붙여놓은 것 같은 특이한 선로가 눈에 들어온다. 주변엔 나와 같이 와이너의 환대 속 탑승한 많은 승객들이 자리해있다. 에릭은 탑승자들에게‘새벽’과 ‘정오’, ‘황혼’을 지나는 만 하루의 짧은 여정이 우리 앞에 있음을 알려준다. 지금은 어두운 밤, 미약한 기적소리가 열차의 출발을 알린다.

 

  1. 새벽

 

열차가 출발하고 얼마나 지났을까, 어슴푸레 밝아오는 하늘이‘새벽’이 왔음을 알린다. 오랜만의 여유에 취한 승객들은 햇살을 피하기 위해 이불속으로 파고든다. 그때 조그마한 소리로 열차의 스피커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더 나은 인간이 되기 위해, 스스로를 더 사랑하기 위해서 침대 밖으로 나오세요.”대관절 이게 무슨 소리인가? 수마에서 벗어나지 못한 시선들은 소리를 따라 앞을 향한다. 승객실의 맨 앞쪽 스크린에 새벽에 진행될 강연의 목차가 적혀있다. ‘침대에서 나오는 법, 궁금해 하는 법, 걷는 법, 보는 법, 듣는 법’, 지나치게 평범한 주제들에 승객들은 웅성거린다. 소란이 커지기 시작할 때 기관사의 기차를 빌어 잠시 모습을 보인 위대한 스승들의 모습을 드러낸다.

 

‘우리는 왜 따듯하고 안전한 이불 속에서 일어나야만 할까? 사람은 행복하기 위해 태어났다고들 말하는데, 그럼 침대에게 나를 맡기는 행위는 오히려 행복을 추구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 아닐까?’ 실없지만 한 번쯤은 해봤음직한 질문이다. 다만 그런 고민은 오래 이어지지 못한다. 우린 관성적 타협과 함께 질문을 멈추고 침대에서 일어난다. 로마의 황제였지만, 우리와 똑같이 침대에서 벗어나기 힘들어한 사람은 위의 질문들에 타협하지 않고 숙고했다. 그는 말한다, “자신의 사명을 저버리고 침대 속에서 머무는 것은 극도의 이기심을 표출하는 것이며 자기혐오 행위이다.”

 

나는 마르쿠스의 주장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사회적 동물’의 개념을 떠올렸다. 인간은 더 나은 삶을 위해 사회를 필요로 한다. 그리고 사회엔 각자의 역할이 있다. 집단의 구성원들이 각자의 역할을 올바르게 수행할 때 개인의 효용은 사회를 통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 사람을 사회적 동물로 정의할 때, 이불 밖으로 나오지 않는 것은 의무로부터 도망치는 것. 타인일 생각하지 않는 이기심의 발로다. 또한 이것은 자신감의 부재에서 비롯된 책임의 회피다. 본인의 일에 자신 있는 사람은 결코 도망치지 않고 오히려 일을 통해 행복을 느끼고 사명을 찾는다. 즉, 잠자리에 머무는 것은 자신의 일과 인생에 대한 불신의 모습을 띈 자기혐오다. 아우렐리우스는 침대 밖으로 한발 나아가 일상을 사는 것에 이토록 큰 의미가 있음을 알려주고 격려한다.

 

열차가 잠시 멈춘다. “아주 좋습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질문을 경험하셨습니다! 멈추지 마세요. 정답이라 여기지 마세요. 대화를 나누고 끊임없이 궁금해 하세요. 정답을 찾는 것에 매몰되지 마세요! 고민과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 속에서 자신이 다만 모른다는 것을 알아 가시길 바랍니다. 세상을 이해하려는 외침이 아닌 자신을 이해하려는 외침에 귀를 기울이세요!소크라테스, 질문을 사랑한 사람. 지식의 불완전성을 직시하고 지혜를 아꼈던 철학자가 우리에게 말한다. 그런 소크라테스 뒤로 세 명의 인영이 보인다. 낡은 신발을 신고 있는 ‘루소’, 검소한 차림의 맑은 눈을 가진 ‘소로’, 음울한 인상의 ‘쇼펜하우어.’ 소크라테스와는 대조적으로 그들은 말이 없다. 대신 손가락으로 밖을 가리킨다. 정차한 열차의 문이 열리고, 승객들은 머뭇거리며 열차 밖으로 나간다.

 

처음으로 눈에 들어온 것은 루소의 발자국이 남아있는 흙길이었다. 승객들이 모두 땅에 발을 디디고 나자 루소는 앞장서 걸어가며 읊조린다. “자유는 걷기의 본질입니다. 걷기는 자극과 휴식, 노력과 게으름 사이의 정확한 균형을 제공합니다. 너무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시간과 공간의 변화를 만끽하시길 바랍니다.” 그의 말을 되새기며 신중하게 앞선 발자취를 쫓다 보니 점점 짙어지는 안개에 주변을 돌아본다. 어느새 다른 승객들은 보이지 않고 자연과 나, 그리고 고요만이 있었다. “고독을 통해 보세요. 고요를 빌어 다른 사람의 생각에서 벗어나 오직 자신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세요.” 소로가 말한다. “눈앞의 대상을 이해하고자 하는 강박을 멈추어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당신은 온전히 보기 시작할 수 있게 될 겁니다.” 혼란스러웠다. 내 눈앞엔 특별한 것이 없는 나무와 짙은 안개밖에 보이지 않았다. “과연 그러합니까?” 소로가 질책한다. ‘나무, 안개’, 우리는 단어로 대상을 규정함으로써 일반화한다. 범주화된 대상은 우리의 머릿속에서 상투적 이미지로 변환되고, 존재의 개별성으로부터 우리의 시야를 가린다. 관념과 가치판단으로부터 벗어나 오직 나만의 시선과 주관으로 대상을 관찰하는 것, 그것이 소로가 말한 진정한 ‘보기’의 본질이다.

 

“보기만 아니라 듣는 것 역시 그러해야 합니다. 하지만…” 교향곡을 닮은 목소리, 관념론자 쇼펜하우어다. “진정으로 듣기 위해선 판단을 유보해야 합니다. 세계는 단지 내가 만들어낸 상상일 뿐, ‘개별자’란 관념 역시 신기루에 불과합니다. 결국 세상의 모든 존재는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우린 물리적 실체가 없는 소리를 들음으로써 타자의 본질에 더욱 깊숙이 다다를 수 있습니다. 결국 귀를 빌려 주는 것은 궁극적인 연민의 행위, 내가 아닌 우리로 세상을 들으세요.” 그의 말에서 불교의 ‘자비(慈悲)’와 ‘고해(苦海)’가 느껴진다면 지나친 억측일까. 아련한 기적소리가 짧지만 영원과도 같았던 스승들과의 만남에 끝이 다가왔음을 고한다. 머물고 싶지만 앞으로 나아가야만 하는 우리의 인생을 상기시키듯. 아쉬운 마음을 뒤로한 채 열차에 오른다. 더 이상 자신의 모습을 숨기지 않는 태양이 하늘 한가운데 떠 있다.

 

  1. 정오

 

열차가 출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앞에 하얀 벽으로 둘러진 공간 내부에 정차한다. 그곳의 건물들은 조금 특이한 모양을 지니고 있었는데, 그리스의 신전과 같은 기둥 위에 동양식 지붕이 올라가 있고 대리석과 나무가 조화롭게 벽을 이루고 있다. 이곳의 이름은 ‘케포스(Kepos)’, 에피쿠로스가 만들었던 공동체의 명칭이며, 이름 그대로 여러 생각들이 자유롭게 드나드는 정원이다. 새벽과 달리 케포스에선 스승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다만 벽 곳곳에 적혀있는 글귀들이 마치 자석처럼 우리를 끌어당긴다. 승객들은 열차에서 내려 각자 홀린 듯 흩어지기 시작한다. 누군가 부르는 것만 같은 끌림을 따라 얼마나 걸었을까, 에피쿠로스의 말들이 음각된 벽 앞에 멈춰 섰다. 사람들은 해롭지 않은 것을 두려워하고 필요하지 않은 것을 욕망한다. 자연은 반드시 필요한 욕망은 채우기 쉽게, 불필요한 욕망은 채우기 어렵게 만들어 놓았다.”

에피쿠로스는 일반적으로 우리가 상상하는 즐거움이 아닌 ‘결핍과 부재의 측면’에서 쾌락을 정의했다. 우리를 만족으로 이끄는 것은 어떤 것의 존재유무가 아니라 불안의 부재, 현재에 대한 감사. 에피쿠로스는 이러한 상태를 아타락시아(ataraxia)라 불렀다. 에피쿠로스의 감사와 만족의 철학이 세상에 등장한 지 수십 세기가 지난 현재, 우리는 어떤 쾌락을 추구하는가? 너무도 쉽게 우린 전시된 경쟁의 승리와 황금으로 올린 바벨탑을 볼 수 있다. 대중들은 발전된 문물을 통해 그것들에 더욱 민감하게 반응하고, 자괴감을 느끼는 한편 동경한다. 스스로 불필요한 불안을 만들어낸다. 경쟁과 재화를 추구하는 것이 그릇된 것은 아니다. 문제는 우리가 지나치게 ‘보편적으로 생각되는 행복’에 매몰되어 있다는 점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만족은 스스로 느끼는 것이 아닌 남과의 비교를 통해서만 얻어지는 비틀린 과육으로 변질됐다. 서로를 바퀴 삼는 ‘쾌락의 쳇바퀴’ 위에서 우리는 ‘충분히 좋은 것’에 감사하는 마음을 잊어버렸다. 역설적이게도 행복에 대해 너무 열심히 생각하면 행복은 사라진다.

 

마치 선악과라도 먹은 듯, 평소의 행실을 떠올리다 치미는 수치심에 에피쿠로스로부터 고개를 돌린다. 막막한 심정으로 벽을 따라 걸어가다 프랑스의 불운한 철학자, ‘시몬 베유’의 말이 보인다. “가장 큰 희열은 가장 온전하게 주의를 기울였을 때 찾아온다.”시몬의 글 아래에서 일본 헤이안(平安) 시대의 궁녀 ‘세이 쇼나곤’이 첨언한다. “삶은 수만 가지 작은 기쁨의 총합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래, 나는 관심을 기울이는 법을 잊어버렸다. 항상 새로운 물건, 더 큰 목표, 더 많은 재화. 어느새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잊어버렸다. 나는 완벽하진 않지만 충분히 건강하다. 나에게 사랑을 주는 사람들이 있고, 나의 말에 귀 기울여주는 친구들이 있다. 충분히 좋다. 아직 보고, 듣고, 만질 수 있다. 자연과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보고,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필기감이 좋은 볼펜이 종이를 가로지는 기쁨을 느낄 수도 있다. 대단하진 않지만 충분히 좋은 식사를 할 수 있다. 이미 주변은 이토록 ‘작은 행복’들로 가득하다.

 

중요한 건 대상들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관심을 기울이는 것. 집중은 수축한다. 관심은 확장한다. 집중은 생각을 한 곳에 모으는 것이다, 관심은 생각을 유보하는 것이다. “바로 그겁니다!”어디선가 소로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베유는 말한다. “가장 강렬하고 너그러운 형태의 관심은 사랑입니다. 보답에 대한 기대 없이 타인에게 온전한 관심을 쏟을 때에만 우리는 진정한 사랑이란 이름의 관심을 줄 수 있게 됩니다.” 기독교의 ‘사랑’, 불교의 ‘자비심’, 공자의 ‘()’, 간디의‘비폭력’ 외에도 셀 수 없이 많은 성현(聖賢)들의 가르침엔 항상 사랑이 있었다. 비약일 수 도 있지만, 그들이 말한 사랑은 시몬이 말한 나와 타자(他者)에 대한 지극한 관심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전보다 가깝게 들리는 기적소리에 고개를 들어 하늘을 처다 본다. 나의 부끄러움을 비추었던 태양은 어느새 자취를 감추고 그 흔적만이 붉게 남아 하늘을 물들인다.

 

  1. 황혼

 

색을 잃어가는 하늘이 여정의 막바지를 알린다. 어둑해지는 창밖에 하나, 둘 보이기 시작하는 묘지들을 지나 멈춰서는 열차. 낯설지만 익숙한 공포가 승객들 사이에 안개처럼 퍼지다. 꺼림칙한 기분으로 내리는 승객들의 눈에 보이는 것은 수많은 사람의 일생을 투영하는 원형의 고리. 헤아릴 수 없는 무덤과 고리 중심에서 신을 부정한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가 자신의 ‘영원회귀(永遠回歸)’를 노래한다. “상상해 보세요!! 당신의 삶이 조금의 변화도 없이 똑같은 궤도를 맴도는 것을. 반복한다는 인지조차 없이 그 많은 고통과 상실을 영원히 반복하는 당신을!” 이건 철학이 아니라 저주가 아닌가? 아연한 마음으로 환하게 웃고 있는 니체를 보았다. 누구보다 많은 불행을 안은 남자가 온전한 기쁨으로 행하는 인생에 대한 찬미. ‘아모르파티(amor fati)’ 고통스러운 삶마저도 사랑하는 운명애(運命愛). 고통은 필연적으로 우리를 찾아온다. 자신이 아끼는 모든 사람과 사물은 결국 사라지고, 종래엔 다가오는 죽음 앞에서 한없이 무력해질 것이다. 가혹한 운명 앞에 선 니체는 말한다. 고통에도 불구하고 인생을 사랑하지 말라고, 바로 그 고통으로 말미암아 인생을 사랑하라고.

 

니체 철학의 핵심에는 ‘완벽한 불확실성의 세계에서 자신의 방향성을 바꾸려는 시도’가 있다. 사람들은 확실한 것을 추구한다. 우린 운명에 쓸려 다니지 않기 위해 재물을 모으고 힘을 기른다. 자연적 변수를 통제하기 위해 사회를 형성한다. 안정적인 길 위로 올라타기 위해 노력하고, 불확실성으로부터 최대한 멀리 떨어지길 원하다. 각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노화, 질병, 재해 등 항거할 수 없는 운명은 불숙 우리를 향해 고개를 든다. 니체의 영원회귀는 피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발상의 전환을 촉구한다. 우리는 확실성이 아닌 정반대에서 즐거움을 찾기로 선택할 수 있다. 그럼에도 시련은 언제나 아프기에 스토아 철학자 ‘에픽테토스’는 우리에게 진통제가 있음을 알린다.

프리메디타치오 말로룸(premeditatio malorum)’, 항상 최악을 상상하라는 에픽테토스의 정신적 예방주사. 스토아 철학의 핵심에는 깊은 숙명론, ‘수용’과 ‘자발적 박탈’을 통한 자유가 있다. 통제할 수 있는 자신의 가장 중요한 것, 정신과 감정적 삶에 집중하고 모든 순간 최악을 가정해 다가올 고통으로부터 무뎌지는 것. 무언가를 잃어버렸다면 그 슬픔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가질 수 있었던 시간에 감사하는 것. 니체처럼 현상의 호오(好惡)를 판단하지 않고 수용하며 사랑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에픽테토스는 강조한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노력 밖의 것들은 담담히 받아들이자. 이것이 스스로의 운명을 사랑하는 방법이다. 에세이(essay)를 만든 철학자 몽테뉴가 마지막 한마디를 더한다. “죽음과 절망 모두 같은 약을 필요로 한다. 수용이다.

 

힘찬 기적소리가 여행의 끝을 마침표를 찍는다. 아쉬움 가득한 마음으로 기차에서 내린다. 아주 오랜만인 것처럼 느껴지는 내 열차에 올라 내부를 둘러본다. 익숙함의 마비에 빠져 놓쳐버린 소중함이 홍수처럼 나에게 범람해 온다. 나만의 것이라 생각한 공간에서 소중한 인연들과 가르침의 흔적들이 소용돌이친다. 철학은 우리에게 6번째 감각을 열어준다. 조심스럽게 열차에 시동을 걸어본다. 익숙한 기적소리가 들린다. 그렇구나, 지금까지 들려온 기적소리들은 내 안에서부터 들려왔던 소리. 보지 못했던 것들, 잊어버리고 잃어버렸던 것들이 돌아오는 소리.

 

앞으로의 여정이 순탄치만은 않을 것을 아는지 열차는 조금 굼뜨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다가올 아픔이 비록 영원히 찾아올 지라도 나를 반겨줄 삶의 작은 행복들 역시 그러할 것이기에. 밝아오는 새벽, 배웅하는 와이너를 뒤로 한 채 삶이란 기적(奇蹟)이 허락하는 장소까지, 어쩌면 무한히 반복될 그 길 위로 살아난 기적을 울린다.

우수 이*민 기계공학부 도서: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독후감: 개인으로 존재할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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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주 전, sns에서 한 학부모 회의 영상을 봤다. 라틴계 학부모가 자식이 학교에서 인종차별을 받고 와서 울었다는 증언을 하자, 뒷자리에서 누군가가 “그러면 멕시코에서 계속 살지 그랬어?”라며 비아냥댄다. 그러자 놀랍게도 모든 학부모가 그 즉시 비꼰 사람을 쳐다보며 탄식을 내질렀다. 한 사람은 일어나서 “아이들이 겪은 차별이 바로 이런 겁니다.”라며 차별임을 지적했다. 영상은 거기서 끝났지만, 그 이후로 그 사람의 발언이 용납되었을까?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는 제목부터 낯설다. 21세기에 접어들며 우리에게 적자생존이라는 말은 곧 약육강식과 같이, 경제적 또는 신체적 능력이 개개인의 인격을 보장해줄 잣대로 쓰였다. 그러나 작가는 전혀 다른 말을 내던지고 있으니, 우리는 속절없이 책의 논리를 쫓아가게 된다.

책은 크게 세 가지 흐름으로 전개된다. 진화인류학자인 작가가 인간과 다른 동물들 간의 협업을 토대로 관측한 동물의 가축화, 인간 역사에 빗대어 본 자기가축화의 과정, 마지막으로 이러한 유전적 특성이 함의하는 사회의 방향성에 대한 고찰이다. 후술될 내용도 이 흐름을 따라가고자 한다.

우리는 어떻게 상대방이 슬픈지 알까? 상대방이 보여주는 모든 것(말, 눈빛, 행동 등)을 토대로 상대방의 마음을 짐작하는 능력을 ‘마음이론 능력’이라고 한다. 이것 덕분에 인류는 더없이 정교한 의사소통이 가능하다. 반면 동물은 어떨까? 현대 사회에 반려동물이라는 개념은 친숙하지만, 불과 20년 전만 해도 강아지가 총명하며 가족처럼 여겨진다는 생각은 생소했다. 사람들에게 유전적으로 더 가까운 것은 침팬지나 오랑우탄같은 영장류이며, 개는 그 연관성이 낮으니 유전적 우월성 또한 낮다고 보았다. 그러나 강아지를 키우던 작가는 침팬지를 대상으로 하던 마음이론 실험을 강아지에게 시도해봤고, 놀랍게도 강아지는 침팬지에 훨씬 월등한 결과를 보여주었다. 첫째로 사람이 자신에게 도움을 주고자 하는 의도를 파악했고, 둘째로 그 행동이 눈짓이든 손짓이든 이해할 줄 알았으며, 무엇보다 인간의 행동을 경계하지 않았다. 반면 침팬지는 실험자가 어떤 손짓을 하든 결정에 반영하지 않았다. ‘협력적 의사소통’에 대한 이해가 전무했던 것이다. 이러한 마음이론 능력은 이른 바 가축화된 동물들에게만 나타나는 특성이었다. 야생 여우는 낯선 인간을 경계했으며 손짓을 알아듣지 못했지만, 친숙한 특성을 보이는 여우만을 교배해 만들어진 여우는 금방 다가왔으며 손짓을 알아들었다. 축사 안의 동물들이 멍청하다고 여겼던 통념을 배신하고 그들은 작은 뇌와 짧은 주둥이, 작은 이 등과 함께 협력하는 특성을 발달시켜왔던 것이다.

이러한 특성은 인위적으로 자라났을까? 개는 오래 전부터 인류와 함께 했지만, 초기 인류의 특성 상 거친 늑대를 억압하고 강제 교배시키는 일은 어려웠을 것이다. 대신 작가는 그들 스스로 ‘자기가축화’되었다고 예측했다. 사람들이 버린 쓰레기나 남기고 간 음식물에 접근하는 늑대는 상대적으로 침착하고 용감하거나, 보다 인류에게 친밀했을 것이다. 그렇게 인간과 공생하며 이득을 얻은 친화력 좋은 개체들이 또다른 종으로 분과하여 현재 우리에게 익숙한 개가 되었다는 모델이다. 여기서 나는 궁금해졌다. 그러한 자기가축화 또한 결국 인간에 의해 촉발된 것 아닌가?

사려깊게도 책은 바로 그 다음 장에서 보노보의 사례를 보여준다. 인류없이 긴 시간 살아온 보노보. 그들의 가장 특이한 성질은 바로 무리 내의 가장 우대받는 개체가 아기라는 점이다. 침팬지 사회에서 아기는 필요에 의해 쉽게 죽고, 강자의 보호가 있어야 살아남을 수 있다. 그렇기에 우두머리 수컷의 지위는 나날이 강력해지고 암컷은 강한 수컷에 의존해야만 에너지를 비축하며 자손을 키울 수 있다. 반면 보노보 수컷은 다르다. 만일 그들이 아기 보노보를 죽인다면, 온 사방에서 암컷 보노보가 뛰쳐나와 그를 내쫓거나 죽일 것이다. 그들은 유전적 근연도에 관계없이 서로를 보호한다. 이러한 친화성은 수컷 보노보가 자신의 유전자만을 남기려 다른 아이를 죽이는 행동을 막고, 공격성이 낮은 수컷을 택하게 만든다. 자연스레 보노보의 협력 능력은 자연선택되는 것이다. 이들은 음식을 나누어야 할 때 갈등이 생길 것에 대한 스트레스를 받아(코르티솔 호르몬 증가) 음식을 나누었으나, 침팬지는 폭력성이 증가하며(테스토스테론 농도 증가) 음식을 독점하려 경쟁했다. 생리적 기제부터 보노보는 타인과 협력할 태도를 갖추고 태어난 것이다. 그들은 새로운 무리에 속하든, 보상이 적어지든 간에 관계없이 늘 협력했다.

그렇다면 인류도 보노보와 비슷하지 않을까? 우리에게 익숙한 원숭이가 점차 몸을 일으켜 인류가 되는 그림은 마치 현생 인류인 호모 사피엔스가 네안데르탈인이나 호모 에렉투스같은 다른 사람 종에서 향상된 종이라는 인식을 심어준다. 그러나 이 셋은 사실 우열을 가리기 어렵다. 그들도 사피엔스만큼이나 정교한 도구를 사용했으며 비슷한 음식을 먹고, 심지어 비슷한 언어능력과 자제력을 가졌을 거란 추측도 있다. 딱 하나 다른 점이라면, 호모 사피엔스는 ‘우연히’ 협력적 특성이 강했다. 감정반응이 격하지 않고 관용이 높았을 것이다. 그들은 미래의 이득을 위하여 현재의 감정을 억누르고 선심을 베풀 줄 알았다. 이로 인해 급격히 집단이 확장되고, 거대한 집단은 기술의 폭발적인 발전을 불러온다. 이러한 추측은 두 가지 과학적 분석에 의해 뒷받침되었다. 현생 인류는 눈썹활 높이가 낮아지고, 두개골 모양은 동그랗게 변했다. 이는 공격성을 키우는 테스토스테론 농도가 낮아지고, 포용성을 높이는 세로토닌과 옥시토신 농도가 높아진 결과와 일맥상통한다. 무엇보다 사람 종이 가진 가장 큰 차이는 눈의 여백이다. 우리는 너무나 당연하게 딴청을 피우거나, 화가 났거나, 기뻐하는 등 다양한 감정을 상대방의 눈으로 읽는다. 그럴 때 흰자위가 얼마나 큰 역할을 하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모두가 알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정말로 협력적인 종이라면, 어째서 세상에 전쟁과 폭력이 아직도 남아있을까? 더 많은 개체를 나의 무리로 받아들이는 만큼, 옥시토신은 그렇지 않은 개체에 대한 적개심이 커지게 만들었다. 쉬이 들리는 “인간도 아니다”라는 말은 사실 내집단과 반대되는 외집단을 ‘비인간화’하고 있음을 내포한다. 상대의 인격을 박탈함으로서 함께 협력할 필요가 없는 존재로 저평가하는 행위 말이다.

이러한 비인간화는 상대가 나를 적대적으로 바라볼 때 나 또한 적개심을 가지게 되는 보복성이 특징이다. 외집단의 비인간화는 단순한 인격 박탈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외집단은 더 이상 이해할 존재가 아니며, 기존 질서에 편입될 필요가 없음에도 질서를 와해하거나 위협하는 반목의 대상이 된다.

비인간화가 우리 사회에서 효과적으로 사용된 예시는 쉽게 떠올릴 수 있다. 앞서 언급한 “인간도 아니다”라는 말이나, “개만도 못한”, “짐승같은”, “야만인”과 같은 수식어는 상대를 사람으로 대우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이는 권위주의자나 사회지배주의자들에게 좋은 전략이 된다. 그들에게는 일원화된 방향성이 존재하며 그 외의 반동이나 예외는 비인간화함으로써 공론장에서 배격하면 되기 때문이다. 작가는 지난 미국 의회의 역사를 일례로 보인다. 1995년 깅그리치 의원의 비인간화 전략은 친목했던 의회장을 전쟁터로 만들었다. 몇십년의 협상과 타협 대신 단 시간에 스며든 혐오가 오고갔다.

이토록 쉬운 폭력을 우리는 어떻게 막을 수 있단 말인가? 이 대목에서 나는 두려움을 느꼈다. 방법이 없기 때문이 아니다. 책에서는 분명한 방향성을 제시해준다. 소셜 믹스, 즉 외집단으로 여겨지는 개체를 내집단에 자주 노출시키고 함께 생활하도록 하면 집단 내의 혐오와 거부감은 줄어든다. 태도부터 바꿔야 행동이 우러나온다고 생각하지만, 역으로 행동하게 되었을 때(함께 생활할 때) 태도는 자연히 변화했다. 또한 평화 시위는 폭력 시위에 비해 화제성이 낮지만 위협으로 인한 보복성 비인간화를 줄인다. 그렇기에 느리더라도 위험하지 않음을 보이며 다가가면 된다. 그러나 이런 노력이, 누군가 선전하는 근거없는 불안함에 휘말린 사람에게도 가닿겠는가?

민주주의 사회에서 단 하나의 해법은 없다. 500명이 있다면 500명의 가치관과 말이 있다. 이들은 때로는 규합되기도 하나 갈라지기도 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의견을 대표할 정치인을 뽑고, 거리로 나서 시위를 하기도 하며, 민원을 넣어 방법을 요구하기도 한다. 중구난방이라는 말 그대로 다양성은 사회에 혼돈을 가져올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다양성 없는 인간 종은 어떻게 되었던가? 호모 사피엔스에게 내려진 사회 연결망의 확대라는 기회는, 협력과 이해라는 준비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리고 이러한 포용이 가져온 발전은 우리 모두가 누리고 있는 인류 공동의 영광이다. 우리가 왜 다양성을 수호해야 하는지는 역사가 이미 말해주었다.

현재도 여러 국가에서 혐오 발언과 동물에게 가해지는 폭력적인 행위를 비인간화를 촉발하는 계급주의적 사고의 산물로 보고 법으로 규제하고 있다. 초반에 언급했던 학부모 회의장으로 돌아가보자. 그곳에서 라틴계 학부모는 이어서 인종차별 경험에 대해 증언할 수 있었다. 그리고 혐오를 내뱉은 자는 반발이 두려워 같은 말을 하지 못했다. 어떤 의견이든 좋으나, 그것이 타인의 자유를 저해해서는 안된다는 인식이 어떤 사회에서는 이미 정립되어 있다. 역설적이게도 때로는 행동의 규제가 존재의 자유를 보장한다. 그리고 그것이 반감 대신 무감을 만들고, 외부자가 내집단으로 편입되기 수월하도록 돕는다.

코로나가 휩쓸고 지나간 거리에는 외로움만이 남은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집밖을 내다봐도 텅 비어있는 거리에, 모두가 얼굴을 가리고 조용히 걷는 세상은 참 적적했다. 팬데믹 이후로 성인 우울증은 2배로 뛰었다. 핸드폰으로 세계 어디든 연결되어 있는 세상이지만, 온기를 느끼고 면대면으로 마주하는 행위가 전무한 세상이기도 했다. 사람들은 얼굴 없는 글에 셀 수 없는 혐오를 담았다. 또한 인터넷의 범람이 불러온 도파민은 인간의 자제력을 낮췄으며 심리적 불안감을 키웠다. 인류를 다시 협력할 수 없는 전시 상태의 뇌로 만들어버렸다.

다행히도 우리에겐 이 책이 있다. 그리고 지긋지긋한 코로나와의 전쟁도 끝이 났다. 책을 읽으면서 머릿속 혐오라는 정의는 모양을 바꾸어갔다. 단순히 누군가를 싫어하는 감정이 아니다. 내 삶에서 누군가의 자리를 지워버리고 싶은 것. 나에게 거슬리지 않는 상태로 만드는 것. 그런 혐오의 감정이 난무하는 사회에서 나는 딱 하나만 말하고 싶다. 누구나 그 자리에 존재할 자유가 있다. 그로써 당신도 존중받아야 마땅함을 명심하자. 우리는 그렇게 ‘자연선택’된 종이기 때문이다.

장려 이*환 정치외교학과 도서: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독후감: 철학이라는 내비게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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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

 

인생에 풍파를 여실히 맞아가며 자라온 우리는 질문하는 법을 까먹었다. “힘들게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회사를 왜 가야 하는 것인가? 무엇을 위해 시루떡 전철을 견뎌야 하는 것인가? 닷새를 일하면서 왜 이틀만 쉬어야 하는가?” 이런 질문들은 마음속에서 끝도 없이 떠오르지만 다들 그렇게 지내니깐, 그냥 당연한 것이니깐 이라고 취급해버리고는 다시 출근길 열차에 몸을 내던진다. 반복되는 지친 하루하루에 정당성을 찾지 못한 우리는 부조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버렸다.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 시스템이 변화해야 한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지만 이를 고민하기에는 침대가 너무 따뜻해서, 나름 만족해버려서, 더 이상 생각하기 머리 아파서 질문을 깊숙이 묻어두고 산다.

 

본 책은 어린이의 투정과 같은 질문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본다. 침대에서 일어나야 하는 이유나 친절을 베풀어야 하는 이유 등은 그저 명령으로만 느껴졌다. 엄마가 일어나라고 하니 일어났고, 남들에게 친절히 하라고 하니깐 마지못해 친절을 몸에 익히며 살아갔다. 왜 일어나야 하지? 왜 친절해야 하지? 라는 궁금증을 가지는 것은 헛된 망상이나 혼잣말 정도로 취급되었고, 정언명령을 의심하는 것은 에너지 낭비로 여겨졌다. 하지만 이 책은 보편 준칙이 되어버린 정언명령들을 샅샅이 뜯어본다. 실존주의이니, 형이상학이니 온갖 단어들을 써서 고매한 위치를 유지하려는 기존 철학책에 돌멩이를 던지며 철학은 단순한 질문에서 시작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상기시킨다. 침대에서 일어나야 하는 이유를 찾는 단순한 질문을 시작으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며, 어떤 죽음을 기원해야 하는지 진지하게 고민해보자.

 

부조리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변화에 뒤처진 시스템을 유지하는 것은 질문하지 않는 우리의 잘못이다. 우린 무엇을 추구해야 하며,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지 명확히 파악하고 길을 재촉해야 한다. 부산대역에 내려서 오르막길만 올라간다면 부산대가 나온다는 믿음을 가지고, 서면역에서도 부산대에 가기 위해 오르막길만을 찾으면 안 된다. 마치 내비게이션을 꺼놓고 당당히 이 길이 맞다 우기며 우회전만 반복하는 꼴이다. 인생을 살며 수많은 교차로와 골목길을 마주칠 것인데 내비게이션에 목적지만 정확히 찍어 놓았다면 걱정할 필요가 없다. 인생의 내비게이션을 만들기 위해 평생을 노력했던 철학자들의 이야기를 엿들으며 각자의 내비게이션 버전을 업데이트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인생을 사는 것은 우리가 모두 철학자가 되는 일이다.

 

우선 철학이라는 내비게이션을 설치하기 전에 자동차를 점검해보아야 한다. ‘나’라는 자동차에 기름도 충분하고, 엔진도 멀쩡해야 굴러갈 것 아닌가. 기름은 ‘지식’이고, 엔진은 ‘지혜’이다. 기름을 아무리 넣어도 엔진이 고장 났다면, 엔진이 멀쩡해도 기름이 없다면 차는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는다. 흔히들 지식과 지혜를 동일시하는 오류를 범한다. 지식은 아는 것이고 지혜는 이해하는 것이다. 둘은 종류가 다른 것이다. 지식이 많은 노인이 오히려 꼰대가 되지 않는가. 지식이 늘면 덜 지혜로워질 수 있다. 지식은 소유하는 것이다. 지혜는 실천하는 것이다. ‘라 캄파넬라’의 악보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안다고 해서 파가니니보다 바이올린을 잘 켤 수 없다. 지혜로운 철학자들을 결코 지식으로는 따라갈 수 없다. 실천을 통해 습관을 만들고, 습관을 모아서 지혜라는 부스러기를 조금씩 주워나가야 한다.

 

  1. 어떻게 물어야 하는가.

 

즐겨보는 TV 프로그램 중 ‘꼬꼬무’라는 방송이 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를 줄여서 꼬꼬무라고 흔히들 부른다. mc와 게스트가 서로 질문을 주고받으면서 그날의 이야기를 재구성해보는 방식이다. 김신조 사건이나 KAL기 사건 등 시선을 끄는 사건들을 구술로 전해 들으니 귀에 쏙쏙 들어온다. 이처럼 꼬리에 꼬리를 무는 것은 사건을 이해하는데 너무도 좋은 방법이다. 생각은 화물열차처럼 하나하나 앞뒤로 연결되어 있다. 원인에는 결과가 있고, 행동에는 대가가 따른다. 인과관계와 선후관계를 알아버리면 그 많은 이야기들을 따로 외우지 않아도 술술 말할 수 있게 된다. 철학의 힘은 여기에서 나온다. 바로 궁금해하는 것이다. 모든 위대한 발견과 돌파구는 궁금해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우리는 늘 질문을 하기보다는 문제를 해결해왔다. 교실에 앉아서 미적분에 관해 묻지 않는다. 그저 숫자를 대입하여 답을 맞히기 바쁘다. 홍범도 장군이 왜 공산당에 가입했는지 묻지 않는다. 그냥 가입했던 전적이 있다고 듣는다.

 

우리는 대화를 잃어버렸다. 미적분이 왜 생겼는지는 모르는데, 미적분을 이용하여 함수 문제를 풀 수 있다. 홍범도 장군을 이해하지 못하면서 흉상을 어디에 두는 것이 정신을 기리는 것인지 아웅다웅한다. ‘왜’라고 묻지 않는다. 문제만 해결하면 끝이니깐.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지식은 철학이 아니다. 지식은 곱게 늙지 않는다. 때로는 고약한 냄새를 풍기며 썩기도 한다. 우리는 대화를 통해 썩은 지식은 도려내고, 선후관계를 알아차려 맥락을 이해하며, 인과관계를 알아차려 현재를 파악하고 미래를 예측해야 한다. 대단한 통찰력도, 대단한 학문 수준도 요구되지 않는 단순한 ‘대화’가 우리를 더 높은 수준으로 올려놓는다. 철학은 질문을 던지는 기술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질문을 해야 하는가? 이는 소크라테스가 자세히 알려주고 있다.

 

소크라테스를 설명할 때 변증법, 엘렌쿠스(elenchus), 귀납적 추론 등 온갖 고매해 보이는 단어를 붙이지만 사실 그는 대화를 좋아하는 사람에 불과하다. 다만 그는 수많은 사람들과 잡담을 한 것이 아니라 진지한 주제로 대화를 했다. 소크라테스는 모두가 안다고 생각하는 단어를 골라 검토하고 뜯어보고 여러 각도에서 찔러보았다. 단어가 걸어온 길을 지독하게 되짚어 본다. 누구나 성공하고 싶어 한다. 내가 성공하고 싶다면 이렇게 물어야한다. “성공은 어떤 모습인가?”이 질문을 상대방에게 던진 후 집요하게 파고 들어야한다. “왜 성공하고 싶냐?, 얼마나 성공하고 싶냐”는 핵심 질문이 아니다. 남이 해답을 찾는 과정을 보며 내가 성찰할 수 있게 질문을 하는 것이다. 침묵이 돌아와도 괜찮다. 질문은 문제를 풀어해치기 때문에 상대가 재구성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멍청한 질문은 없다. 우리가 제대로 대답할 능력이 없는 것 뿐이다.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면서 우리의 무지가 드러나는 것이다. 매일매일 발전하기 위해서 질문이 우리를 덮치게 두어야 한다. 질문을 안고 살아가면서 대답을 찾는 것이 인생이지 않을까. 발전하기 위해서 질문이 우리를 덮치게 두어야 한다. 질문을 안고 살아가면서 대답을 찾는 것이 인생이지 않을까.

 

  1. 결국 침대에서 왜 일어나야 하는가.

 

앞서 말했듯이 멍청한 질문은 없다. “내가 왜 침대에서 일어나야 하지?”라는 졸린 어린아이의 질문에 우리는 그럴듯한 대답을 할 수 있는가. 대답할 가치도 없다, 귀찮게 굴지 말라고 어린이를 타박할 게 아니라 그럴듯한 대답을 할 수 없는 우리의 무지를 성찰해야 한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고통스러운 세상과 마주하는 게 침대에 있는 행복보다 좋은가. 우리는 반박할 수 없다. 질문 속에 담긴 단어를 풀어야 한다. 거창한 지식만으로는 침대에서 일어나게끔 어린아이를 설득할 수 없다. 그렇다면 지식이 아닌 지혜로 해결해보자.

 

지혜는 실천이다. 그렇기에 지혜는 거창한 것이 아니다. 양자역학을 이해하는 것이 지혜가 아니고, 오히려 침대에서 일어나 이불을 개는 것이 지혜인 것이다. “나는 이불 아래 파묻힌 채 나를 때려눕히려고 마음먹은 적대적인 세상을 떠올린다.”이 말은 영국부터 이집트까지 대제국을 건설한 로마 황제 아우렐리우스가 한 말이다. 침대에서 나가야 하나? 우스울 수 있지만 이 질문은 진지한 철학 문제다. 침대에서 벗어나는 것이 정당하지 않다면 이 세상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일단 사지가 멀쩡한 이상 물리적으로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그렇다면 “반드시 침대에서 나가야 하는가?”가 문제다. 침대에서 나가는 게 피시방에서 게임도 할 수 있고 영화도 볼 수 있다. 그렇다고 마땅히 나가야 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이불 속에 있는 게 그 무엇보다 좋다면 누가 뭐라고 하리.

 

아우렐리우스는 내가 왜 침대에서 나가야 하는가를 진지하게 고민했다. ‘누워있어야 한다 vs 일어나야 한다’를 치열하게 생각해본 것이다. 아우렐리우스 세상에는 역병과 반란, 전쟁이 끊임없이 있었을 것이고 침대에서 일어나는 것은 이를 마주하는 것이다. 침대에 누워있으면 편안한 감정이 유지되는데 왜 일어나야 하는가.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무수한 이유에 대해 아우렐리우스는 ‘이기심’을 가져와 내리꽂는다. “침대에서 누워있는 것은 오로지 나 자신만 생각하는 것이다.”이를 깨달으니 침대 밖으로 가는 것은 의무가 아니라 사명이 되었다. 침대에 누워서 자신만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이기적이다. 침대에서 일어나 자신과 타인을 같이 드높이는 것이 더 고상한 가치라 생각한 것이다. 자신만을 생각하지 않고,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우리를 생각했던 아우렐리우스의 ‘침대 벗어나기 논리’는 아침에 일어나는 단순한 행동을 한 인간의 사명으로 탈바꿈하였다.

 

“왜 침대에서 일어나야 하는가?”에 대한 단순한 질문은 아침을 마주하는 우리의 태도를 의무에서 사명으로 바꾸었다. 이것이 철학의 힘이다. 철학은 궁금해하는 것, 즉 질문이라고 했다. 본 책은 거추장스러운 변증법이니, 실존주의니 하는 단어들을 꺼내지 않는다. 그저 삶의 질문들에 옛날 사람은 어떻게 대답했는지 보여준다. 아침에 일어나는 것에 대한 아우렐리우스의 대답, 산책을 왜 하는지에 대한 루소의 대답, 후회에 대한 니체의 대답을 보며 삶에 의미를 찾아준다. 내가 살아가는 것이 대단한 일처럼 보이도록 해준다. 자살하지 않는 것이 대단한 용기이자 기개라고 칭찬해준다. ‘철학은 탁상공론이다’라는 오해는 본 책을 통해 과감히 벗겨진다. 삶을 더 열심히, 더 보람차게 살 수 있게 하는 철학이 어찌하여 탁상공론이란 말인가. 철학은 어떠한 논문보다도 세상을 잘 설명해주고, 어떠한 에세이보다 우리를 애정 어리게 토닥여주고, 어떠한 자기계발서보다 동기부여를 잘 해주는 훌륭한 어른인 것이다.

장려 류* 영어영문학과 도서: 만일 내가 인생을 다시 산다면
독후감: 행복한 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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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킨슨병을 앓고 있는 저자는 자신이 살면서 미리 알고 있었다면 좋았을 생각들을 나열합니다. 제목이나 저자의 상황을 고려하면 후회로 가득 찬 저자의 절망감을 예상할 수 있었습니다. 놀랍게도, 글을 읽어가며 수많은 감정과 생각들이 머릿속에 떠올랐지만, 그 중 후회는 없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생각했을 때 ‘만일 내가 인생을 다시 산다면’이라는 말에는 ‘인생을 다시 살고 싶다’는 전제를 기반으로 하는데, 저자의 문장들에서는 시간을 돌리고 싶다는 의지가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역설적이지만 저자가 너무나 평온한 상태라고 느껴졌습니다. 그 점이 책장을 계속 넘기게 만들었습니다. 책을 고를 때부터, 저자의 상황을 알게 되었을 때부터 나의 머릿속에는 ‘후회’라는 하나의 큰 편견이 생겼습니다. 첫 장을 채 끝나기도 전에, 당연히 저자가 후회로 가득 찬 사람일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다 그 생각을 좀 더 곱씹어보게 되었습니다. 후회는 무엇인지 그 본질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미 지나간 과거의 일에 대해, 내가 한 선택과는 다른 선택을 했을 때의 결과를 예상해 보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후회는 절대적으로 부정적인 것인지에 대한 의문으로 이어졌습니다. 생각해보면 살면서 단 한 번도 후회라는 말을 할 때 부정적인 말투를 넣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책의 마지막 장을 넘길 때까지 가장 궁금했던 건 도대체 어떻게 저자는 ‘후회’라는 두 글자를 책 한권 분량으로 풀어쓰면서 부정적인 마음을 담지 않을 수 있었는지 입니다. 생각해보면 오히려 글을 읽고 있는 내 자신이, 그런 부정적인 마음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나는 정말 처절하게 후회하는데, 당신은 그렇게 평온하게 후회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왜 나의 후회는 부정적인지 질문을 던졌습니다. 먼저, 현재에 대한 불만족이 시작입니다. 과거, 현재, 미래 중에서 가장 만만한 과거에 눈을 돌립니다. 미래를 바꾸려면 현재를 바꿔야하고, 현재를 바꾸기엔 지금 당장 자리에서 일어나서 한 걸음 내딛어야 합니다. 그 한 걸음을 내딛을 수 있는 의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이미 움직이는 중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과거로 눈을 돌립니다. 하지만 과거는 바꿀 수 없기에, 나의 머릿속에서 모든 것이 이루어집니다. 현실에서는 ‘나’와 상호작용하는 각각의‘타자’들이 존재하기에 결과를 예측할 수 없지만, 나의 머릿속에서는 오직 ‘나’만이 존재하기에, 아무리 과거로 돌아가더라도 모든 상황의 전제는 현재에 대한 불만족을 기반으로 합니다. 그렇기에 내 머릿속에서 재구성된 과거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은 언제나 부정적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럼 후회가 부정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현재에 만족하지 않기 때문이고, 현재가 불만족스러운 원인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이 그 다음입니다. ‘현재가 만족스럽지 않다.’라는 말에는 ‘누구 보다’라는 말이 생략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에는 나 혼자만 존재하지 않고, 사회의 거의 모든 부분들은 상대적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 상대성은 우리의 위치를 정의합니다. 우리가 ‘만족’을 찾을 수 있는 가장 큰 부분인 의, 식, 주 의 측면을 봐도 그렇습니다. 몇 만원의 외투와 수십 배 가격의 외투, 단출한 동네 식당과 고급 레스토랑, 지방의 원룸과 수도권의 고층 아파트. 내가 너보다 비싼 옷을 입고, 너보다 비싼 음식을 먹고, 너보다 비싼 집에 삽니다. 그리고 또 다른 너는 나보다 비싼 옷, 음식, 집을 가집니다. 이러한 상대성이 개개인의 위치를 규정하고, 그 위치가 다시 개개인을 규정합니다. ‘나’들로 이루어진 사회는 수직적인 형태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수직적인 구조의 특성상 ‘나’보다 위에 있다고 규정한 존재를 ‘올려다’보게 됩니다. 다른 존재를 나의 위에 둔다는 것은 나를 그 존재보다 밑에 두는 과정을 포함합니다. 마찬가지로, 다른 존재를 나의 밑에 두는 것은 나를 그보다 위에 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형성되는 위치에너지는 나를 그 위치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막는 하나의 철장으로 작용합니다. 특히나 우리나라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는 특성상, ‘올려다’보아지는 시선의 우월감과 ‘내려다’보아지는 시선의 열등감은, 그들이 가하는 위치의 에너지는 더욱 더 우리를 현재 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겠구나,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뭔가 잘못됨을 느낀 것은 이 부분이었습니다. 정말 그 ‘철장’이라는 것이 존재하는지, 그 철장 사이의 틈이 내가 못 지나갈 정도로 촘촘한지, 수직적으로 되어있는 계단, 혹은 사다리가 단 한사람만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좁은 것인지에 대한 의문점들이 끊임없이 떠올랐습니다.

사실 그러한 사다리와 철장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라고 희망적이고 긍정적인 말을 하고 싶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분명 사다리와 철장은 존재합니다. 하지만 ‘나’의 위치를 어디로 정의하느냐가 중요합니다. ‘나’를 철장 ‘안’에 넣을 것인지, 밖에 넣을 것인지, 나를 사다리의 높은 곳에 올려놓을 것인지, 밑바닥에 놓을 것인지가 중요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누군가의 밑에 위치해있다고 해서 꼭 그를 ‘올려다’볼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미 정해져있는 나의 물리적인 위치와 정신적 위치를 동일시 할 필요는 없습니다. 세상에는 숫자로 측정되는 것보다 측정할 수 없는 것들이 더 많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자신의 상황을 알게 된 후 사람들을 ‘올려다’보았고, 자신의 위치를 확실하게 인지하는 과정을 거쳐, 내 위치가 밑에 있다고 해서 생각도 밑에 있는 사람처럼 할 필요는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저자의 후회는 부정적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앞서 얘기했듯이, 저자는 자신이 인생을 살면서 미리 알고 있었다면 좋았을 조언들을 나열합니다. 분명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말이지만, 저자 자신 또한 미리 이 조언들을 알고 싶을까요? 미리 안다고 해서 자신의 삶에 그것들을 적용할까요? 만약 저였다면, 미리 알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지금까지 한 모든 행동들은 ‘무지’의 상태로 했기 때문에 현재의 결과를 낳은 것이고, 그렇기에 의미가 생기는 것입니다. 저자의 글을 읽고 있으면, 마치 어머니가 딸에게 건네는 손 같은 느낌이 듭니다. “나는 지금까지 이렇게 살아왔어. 너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볼래?”라고 말하는 저자의 목소리가 따뜻하게 감싸는 듯합니다. 지난 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제목의 영화를 보고 왔습니다. 영화를 다 보고 나니, 문득 이 책이 생각났습니다. 영화의 감독과 마찬가지로, 저자 또한 글에 자신의 삶, 걸어온 발자국, 그 발자국에 남아있는 향기, 분위기, 맛, 그 모든 것을 담고 있습니다. 저자는 우리에게 이렇게 저렇게 살아가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자신은 지금까지 이렇게 살아왔다고, 그렇게 살면서 내쉰 한숨만큼 웃음도 많았다고, 사는데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들이 얼마나 되겠냐고, 그대들도 나처럼 살아간 후에 행복한 후회를 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까지도, 제가 과연 정말 ‘잘’ 살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살라는 책들, 영상들이 넘쳐흐르는 세상에서 살고 있지만,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학점을 잘 받는 방법, 시험에 합격하는 방법, 돈을 많이 버는 방법은 오히려 쉬워 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잘 사는 법은 너무나 어렵습니다. ‘잘’이라는 것이 사람마다 달라서 그런지, 이미 저의 안에 존재하는 방법을 제가 직접 찾아야 하는 것 같습니다. 잘은 몰라도, 이 책을 읽고 한 가지는 확실해졌습니다. 나중에, 정말 시간이 충분히 흐른 후에, 그때의 제가 마음껏 행복한 후회를 할 수 있게, 지금은 그저 제 마음대로 제가 하고 싶은 것들을 해야겠습니다.

장려 박*은 영어영문학과 도서: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독후감: 우리는 다정함으로 진화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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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는 거라곤 다정해야 한다는 거예요. 제발 다정함을 보여줘. 특히나 뭐가 뭔지 혼란스러울 땐.”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중 한 장면이다. 혐오가 팽배하는 현대 사회에선 타인에 대한 공감이 무뎌지기 마련이다. 측은지심을 가지고 남을 배려하는 행위는 번거롭고 피곤하며 감정소모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내가 왜 귀찮게 남한테 다정해야 하는데?’식의 의문이 들 수 밖에. 반면에 무관심과 적대감은 놀라울 정도로 단순하고 편리하다. 전장연은 출근길을 방해하는 이기적인 집단, 노키즈존은 시끄러운 어린이를 치울 수 있는 좋은 규칙. 이러한 간단하고 무정한 사고방식이 ‘왜 타인을 위해 내가 손해를 봐야 하는가’라는 이기주의로 이어지면서 우리 사회는 점점 배타적인 모양새로 변하고 있다. 그리고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는 이 차가운 딜레마에서 벗어날 다정한 해법을 전달한다. 사실 인류의 생존 근간은 폭력과 차별이 아니라 친절과 유대라는 것을, 그러니 우리는 협력하고 관용을 베풀어야 함을.

오늘날 ‘적자생존’은 공격적이고 힘이 센 존재가 자연에서 살아남는다는 뜻으로 통용되고 있지만, 이것은 매우 잘못된 확대해석에 불과하다. 다윈에게 ‘적자’는 생존 가능한 후손을 남기는 능력을 가리킬 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또한 그는 오히려 자연에서는 협동적인 개체가 많은 공동체일수록 후손을 많이 남겼다고 밝혔다. 이 책의 핵심 가설인 자기가축화 가설 역시, 호모 사피엔스가 다른 사람 종과 달리 멸종하지 않고 현생인류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친화력이라는 협력적 의사소통 능력 덕분이라고 주장한다. 가설에 따르면, 인류는 친화력을 통해 다른 무리와 교류하면서 더 큰 사회연결망을 구축했고, 이 확장된 사회적 연결은 기술 발전 속도를 끌어올리며 식량 문제를 해결하는 등 생존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정리하자면, 백만 년 전부터 인류는 타인에게 공격성보다 자상함을 보여주는 것이 살아남는 데 도움이 됐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현재 서로를 죽이고 혐오하는 걸까?

안타깝게도, 인간의 친화력에는 무서운 이면이 있다. 내집단에게 발생하는 친화력이 외집단에게는 무자비함으로 돌변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특성 탓에 외부인에게 공감 스위치를 꺼버리고, 심지어는 그들을 같은 인간으로 취급조차 하지 않을 수 있다. 대표적인 예시로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가 유대인을 바이러스 취급하고 ‘인종청소’라는 명목으로 일으킨 홀로코스트가 있다. 오늘날 대한민국 사회에서도 이 어두운 측면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지난 대선의 ‘갈라치기’ 선거 전략은 매우 효과적이었고, 전장연 소속 평화 시위자의 휠체어가 경찰의 폭력진압으로 파손됐다. 학부모가 교사를 내 자식을 괴롭히는 아동학대범으로 내몰고, 지하철에서 일면식 없는 타인에게 무차별적으로 그리고 연쇄적으로 흉기를 휘두른다. 이 모든 사회 문제의 중점에 바로 이 친화력의 ‘비인간화’가 있다.

친화력의 비인간화는 외집단에 대한 인권침해를 정당화하고 그들에 대한 잔혹성을 증가시킨다. 인간이 아니기에 그들을 향한 도덕적 의무가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노예무역이나 제노사이드가 바로 이 논리로 발생했다. 뿐만 아니라 비인간화는 그 대상에게 보복성 비인간화를 발생시킨다. ‘나를 먼저 인간으로 대우하지 않았으니 너 역시 짐승으로 간주하겠다’는 식의 사고다. 그리고 현재 대한민국에서 보복성 비인간화가 ‘사이다’ 또는 ‘참교육’의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우리 사회에 해를 끼친 존재에게 똑같이, 혹은 그보다 더 잔인하게 해를 입혀 그를 ‘참교육’시키는 대응 방식은 특히 인터넷 상에서 매우 폭발적인 지지를 받는다. 그러나 이 폭력적 문화는 최근 국제 사회의 거센 비판을 받고 있다. 한국의 한 인기 웹툰이 ‘평범한’ 한국 학생을 괴롭히는 흑인 다문화가정 학생에게 백인 혼혈 교사가 매우 인종차별적인 욕설로 ‘참교육’하는 내용을 담아 큰 논란이 되었고, 이에 북미 플랫폼에서는 사과문과 함께 이 웹툰을 연재 중단시켰다. 학교폭력 가해자에게는 인종차별을 해서 혼내줘도 괜찮다는 생각은 매우 위험하다. 개인이 자경단처럼 폭력을 휘둘러 정의를 구현하는 것이 사이다처럼 통쾌하게 느껴질 수 있으나, 이러한 보복성 비인간화는 인류의 생존에 위협일 뿐이다. 한 교사 자살사건의 가해자로 추정되는 학부모 가족에게 계란테러를 감행한 사건 역시 마찬가지다. 가해자인지 확실치도 않지만, 설령 진짜 가해자라 하더라도 그들에게 케찹을 뿌리고 계란을 던져도 괜찮다는 사고방식은 인류 진화 방식에 맞지 않는다. 우리는 위협에 대한 보복을 통해 생존하지 않았다. 외집단을 향한 비인간화를 멈춰야 한다. 그렇다면 인류는 어떻게 친화력의 단점을 극복할 수 있을까?

저자는 집단 간의 비인간화를 해결할 유일한 방법은 ‘접촉’이라고 주장한다. 접촉은 거창한 형태가 아니더라도 가벼운 대화나 심지어는 상상이나 가상의 인물을 통해서도 공감을 일으킨다. 1940년대에 흑인 이웃을 둔 백인 주민이 인종통합 주택을 지지하고, 르완다 대학살 이후의 한 연속극이 종족 간 갈등을 감소시켰다. 유대인과 우정을 나눴던 사람들은 나치로부터 유대인을 보호했다. 이렇게 집단 간의 교류와 소통은 타인에 대한 감수성을 향상시켰다. 나는 특히 가상의 접촉도 내집단 편향을 줄여준다는 점에 주목하고 싶다. 이 사실을 통해 매체 속 ‘PC(political correctness, 정치적 올바름)’가 가지는 엄청난 잠재력을 파악할 수 있다. 현재 EBS 어린이 프로그램 ‘딩동댕 유치원’에는 멕시코인 엄마를 둔‘마리’와 휠체어를 탄 ‘하늘,’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가진 ‘별이’가 등장한다. 이러한 PC에 대해 ‘왜 모든 컨텐츠에 정치를 묻히냐’는 비난은 항상 있어왔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점은, 사람은 나와 다른 존재와 교류하고 연대하는 방식으로 진화해왔고, 우리의 생존을 위협하는 사람 간의 혐오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접촉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회에 실재하는 다양성을 쉽고 자주 접촉할 수 있는 환경에서 인류는 서로가 한 공동체임을 상기할 수 있다. 그러니 우리는 비장애인 이성애자 중산층 핵가족 캐릭터로 가득한 방송보다 ‘딩동댕 유치원’의 존재를 더 환영해야 한다.

혐오범죄가 나날이 증가하는 현대 사회에서 우리의 마음은 지쳐간다. 뉴스를 틀면 인간의 밑바닥은 추악하고 끔찍하다고 눈앞에 들이미는 듯한 사건들이 가득하다. 사람 간의 사랑이 존재하기는 하는지 의심스럽다. 내 코가 석 자라 남의 일에 눈돌릴 수는 없지만 손해는 절대 보고싶지 않아 서로 해치고 상처 입힌다. 그런 너덜너덜해진 현대인의 마음에 이 책은 너무나 따뜻한 위로를 건넨다. 우리 인류는 서로에게 다정함을 통해 생존하고 진화했다고. 그러니 우리에게 자연스러운 감정은 증오와 냉대가 아닌 친절과 사랑이라고. 그리고 깨닫는다. 우리 사회는 친절하고 자상한 사람들로 굴러간 것을. 노키즈존 가게로부터 쫓겨난 어린이들을 위해 가게에“어린이 환영”문구를 붙이는 사람들, 연이은 교사 자살사건에 대해 근조리본을 달고 평화적 시위에 참여하는 사람들. 대한민국 사회에는 여전히 수많은 혐오가 존재하지만, 그에 대항하는 수많은 다정이 있다. 정말로 우리의 삶은 타인을 적이 아닌 친구로 만드는 힘에 집중해야 한다. 특히나 뭐가 뭔지 혼란스러운 지금 이 때에 말이다.

장려 설*성 지역주민 도서: 만일 내가 인생을 다시 산다면
독후감: 지금 살고 있는 삶에서 아쉬움이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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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삶이나 인생에 대한 고민이나 아쉬움 없이 살아가고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지 않을까 생각된다. 늘 아쉬움 있는 삶이다 보니 다시 인생을 사는 것에 대한 목마름이 있던 터에 이러한 주제로 이야기를 풀어낸 저자가 어떤 상황인지 궁금했고, 나와 어떤 공통점이 있을까 싶어 책장을 넘기게 되었다. 책을 펼친 후 몇 페이지를 넘기기도 전에 저자가 내 생각과는 너무도 다른 삶을 살아왔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녀의 직업은 의사이다. 요즘 초‧중‧고 학생들이나 이런 자녀를 둔 부모들이 생각하는 가장 좋은 직업으로 손꼽을 수 있는 직업을 갖고 있다. 하지만 그녀는 40대에 갑작스레 통보받은 파킨슨병-신경전달물질을 생산하는 뇌 조직의 손상으로 인해 손발이 떨리고, 근육이 뻣뻣해지며, 몸이 굳어지면서 행동도 느려지고 말까지 잘 나오지 않는 증상이 나타나는 퇴행성 질환-으로 인하여 삶 자체가 통째로 바뀌어 버렸다.

모든 동작이 조금씩 느려지는 질병 특성상 일상에서 가볍게 생각하는 일들이 너무 오래 걸려서 1분이면 도착할 화장실을 5~10분 이상 걸린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그녀는 좌절하거나 그저 의미 없는 하루를 보내기보다는 삶에서 얼마의 시간이 남았을지 모르지만, 그 시간을 소중히 여기고, 1분 1초까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찾아가는 모습을 볼 때마다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청난 충격이 되었을 질병 선고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마음을 먹느냐에 따라 남은 삶의 방향이 너무나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준 것이다.

과연 나라면 어땠을까 하고 잠시 생각해본다. 저자에게 갑작스레 통보된 파킨슨병과 같은 질병을 ‘만일 내가 질병 선고를 받는다면 어떤 느낌일까, 저자처럼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조금씩 노력하면서 극복할 수 있을까’하고 말이다. 오히려 좌절하고 나의 삶을 괴로워하며 하나님을 원망하고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짐이 될 수 있음을 생각하며 죽음에 대한 고민까지도 하지 않을까 싶다.

저자는 이런 말도 한다. 우리는‘아무리 착하게 살아도 불행이 찾아올 수 있다’. 이 말은 나에게 너무나 공감이 되었다. 나 또한 착하게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에게 최대한 피해를 주지 않고 남을 돕는 삶을 살고 있다. 그런 나에게도 불행이 찾아올 수도 있다는 것은 내 마음을 쇳덩이가 무겁게 누르는 것처럼 가슴이 답답해진다.

가끔 그런 불안감은 든다. 갑작스러운 질병 선고나 사고 발생으로 내가 불행해지는 상황이 생기면 어쩌지, 그러면 너무 억울하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어쩌면 저자는 독자들이 아직 불행한 상황을 겪지 못한 상황에서 불행의 한복판에서 새로운 목표를 설정하고 그에 맞춰 자신의 삶을 재설계 하는 힘을, 그리고 방법을 자신의 사례를 통해 알려주고 있다.

우선 나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을 버려야 할 것이다. 내가 모든 일을 다 한다는 생각을 하기보다 시간적 한계로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구분하고 가족에게 도움을 청하는 방법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가정 내에서 해야 하는 많은 일을 혼자서 모두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나 또한 일터와 가정에서 정신없이 시간을 보내다 보면 내가 뭘 위해 사는 건지 하는 허무함이 드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럴 때는 저자도 후회했건 것처럼 아이들과도 일을 나누어 서로 협력해서 나만의 시간을 조금이라도 가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라는 건 두 번 말할 필요도 없다. 그리고 습관적으로 매일 해오던 일을 하루 정도는 하지 않는다고 해서 큰일이 나는 것도 아닌데 우리는 그러한 루틴에 맞춰 생활하지 않으면 큰일이라도 나는 것처럼 생각하고 그 일들을 해내기 위해 우리의 많은 에너지를 쏟게 된다.

특히, 아이들을 다그치기보다 아이들과 눈을 맞춰주고 꼭 안아주는 것, 따뜻한 말을 건네는 것이 지금의 삶을 후회하지 않는 유일한 방법일 것이라 생각한다. 내가 지금 아이들과의 관계를 돌아보면 소중한 부분을 놓치고 있지는 않나 하는 생각과 함께 아이들과 눈을 맞추고 일상을 함께 보내고 이러한 것이 어쩌면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닐까 하고 잠시 생각해보지만 실제로는 바쁘게 지내며 아이들에게 찡그린 표정으로 잔소리하는 나를 떠올리게 된다.

 

책 내용에 빠져들다 보니 자연스레 내 주변을 둘러보았고, 음식물쓰레기 버리는 일과 같은 집안일에 있어 순서를 정하고, 가족들이 돌아가면서 참여하는 규칙을 정하는 것부터 실천해보았다. 그 이후 아이들에게도 나에게도 조금씩 변화가 찾아왔다. 내가 모두 해야만 했던 일들이었지만 덜어내고 나니 우선 나의 몸과 마음이 조금은 편해졌다. 또한, 아이들도 가정 내에서 자신의 역할을 조금씩 하게 됨으로써 당당히 뭔가를 요구하는 것이다. 스마트폰 이용시간을 30분 연장해달라거나 용돈을 더 달라고 하는 것인데, 초기 단계이다 보니 어느 정도의 보상이 있어야 동기부여가 될 것이지만, 아이들도 익숙해지면 이러한 보상 없이도 자연스레 참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누구나 해봤자 안 될 것이 뻔하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지만, 저자는 그런 말은 하지 않기로 조언해준다. 어떤 상황에 놓이든 간에 우리는 선택권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질병으로 몸이 움직이기 힘든 상황에서도 무기력하게 멍하니 누워만 있을지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일을 찾아볼 지에 대한 선택권이다. 이러한 선택에 대한 책임은 늘 자신의 몫인 것이다.

나도 어릴 땐 서둘러 어른이 되고 싶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어린아이일 때가 더 좋았던 것 같다. 그땐 걱정거리가 없었고 복잡한 고민거리나 복잡한 관계에 얽히는 경우도 물론 없었다. 지금은 나의 자녀들의 삶이 부러울 때가 있다. 하지만 아이들은 내가 어렸을 때처럼 공부가 싫어서 서둘러 어른이 되어 그러한 상황에서 벗어나길 원한다. 시간이 지나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 세상에 그대로 맞서다 보면 그리고 맘대로 되지 않는 일이 이렇게나 많다고 느낄 때쯤이면 내가 그랬던 것처럼 지금의 어린 시절을 그리워하지 않을까 싶다.

가끔 과거에 이렇게 했으면 지금의 결과는 아닐 텐데 하는 후회를 하게 된다. 하지만 현재는 현재고 과거는 과거이다. 과거의 영역이 현재를 지배하게 놔둬 버리면 나의 현재는 과거에 구속될 수밖에 없고 긍정적인 변화를 기대할 수 있는 기회 마저도 놓치게 된다. 우리는 과거는 기억하되 현재의 다양한 결정에 있어 방해가 되도록 놔두지는 않아야 한다.

독립과 고립에 대해 혼동하고 있는 것을 지적한 부분이 나온다. 독립은 타인에게 의존해야 할 때 의존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내가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내가 잘나서 모든 일을 내가 다 할 수 있을 것만 같지만 막상 살다보면 남의 도움이 필요할 때가 있다. 이런 경우 독립적인 사람은 남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고립적인 사람은 그냥 포기해버리게 되는데 이는 혹여 자신의 주도권을 뺏길까봐 도움을 요청하는 것조차 포기해버리게 되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요즘 직장 내에서 협조적인 직원들도 많지만 자신의 일 이외의 일은 이유를 물어보며 하지 않으려는 직원들을 보고 있노라면 고립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에 떠오른다. ‘저 직원도 도움이 필요한 상황에 처하게 되면 혼자 끙끙대며 애를 쓰고 있지 않을까 하고.’ 이러한 직원으로 인해 사무실 분위기까지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독립적이고 합리적인 사람일 경우 억울하게 오해를 받을 수도 있겠으나 이러한 경우에는 이렇게 구분이 가능할 것이다. 도움의 교류 없이 혼자가 편한 사람들은 아마도 3가지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1. 관계 유지에 에너지를 쓰거나 신경을 쓰는 게 싫은 경우
  2. 내가 모두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가득찬 경우
  3. 내가 도움을 줬지만 내가 필요할 때 도움을 주지 않을까 우려하는 경우

 

욕심이라는 녀석은 소중한 것을 느낄 기회조차 없애버린다. 내가 원하던 것을 얻게 된 경우에도 더 큰 것을 원하게 된다. 내가 얻은 것에 만족하고 주변을 둘러본다면 내가 가진 행복을 충분하게 확인하고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앞만 보며 달리기만 한다면 많은 것을 이룰 수는 있겠지만 정작 다 이룬 순간에는 허무함이 찾아올 수 있는 것이다.

부부는 시간이 지날수록 모르는 것이 많아진다고 한다. 서로 보낸 시간은 많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궁금한 것이 줄어들어 굳이 얘기하지 않으면 서로에 대해 모르는 것이 늘어난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나도 그런 것 같다 ‘이건 얘기하지 않아도 알겠지’ 라고 생각하거나 배우자의 얘기를 나도 모르게 제대로 귀담아듣지 않는 경우가 있는데, 이게 결국에는 부부싸움으로 번지게 되어 엄청 곤란한 경험을 하기도 했었다. 부부의 기간이 늘어날수록 서로에 대해 작은 것에도 궁금해하고 마음속에 있는 얘기들을 서로에게 해주는 것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저자는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어떠한 환경을 제공해주어야 하는 것과 무엇이 더 중요한지를 다음과 같이 말해준다. “좋은 부모란 아이의 필요를 언제 어디서나 항상 충족시켜 주는 부모가 아니라 성장에 필요한 결핍과 좌절을 경험해야 하며, 결핍되고 상실한 것을 스스로 찾아 메우려는 노력은 성장하는 데 필요하다는 것이다. 부모가 모든 것을 다 충족시켜 주면 아이는 성장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게 되지만 부모가 아이에게 감당할 수 있을 정도의 좌절을 주면 아이는 서서히 좌절을 견디는 법을 배워 나가고, 현실감을 얻게 되며, 스스로 필요한 것을 찾아가는 법을 배우게 된다. 그러면서 한 사람의 건강한 어른으로 성장하는 것이다.”

“부모가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줄 수 있는 만큼의 사랑, 할 수 있는 만큼의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그리고 아이들이 부모의 곁을 떠나갈 때 잘 떠나보내는 것이다. ”

자녀를 키우는 부모로서 참으로 공감이 가는 내용이다. 할 수 없는 것까지 해주려고 안간힘을 쓰기보다는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도와주고 어느 정도의 결핍을 경험할 수 있게 해주는 것, 그와 함께 많은 사랑을 주는 것이 좋은 부모가 해야할 역할인 것이다.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을 즈음 많은 생각이 스쳤다. 이 책을 통해 나는 어떻게 변화되어야 할 것인가였다. 무엇보다 내가 진정으로 원하고 행동에 옮기고 싶은 것들을 참지 말고 해보는 것이다. 가족들이나 다른 이유로 미뤄왔던 일들을 작은 것부터 해보는 것, 그리고 주변의 소중한 가족과 주변 사람들을 진심으로 대하며 나를 그대로 드러낸 채 그들과 마주하는 것, 앞으로의 행복함을 누리기 위해 조금씩 내가 할 수 있는 것에 대해 노력하는 것, 그리고 그냥 삶을 재미있게 살아가는 것 등이 변화의 시작일 것이다.

 

끝으로, 질병을 통해 많은 것을 깨닫고 새로운 행복을 느끼며 살아가는 저자를 보며 나 자신을 되돌아보게 된다. 세상을 살아가며 많은 도전을 해보지 않고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레 일어나는 문제들을 그때마다 해결하며 살아가는 나로서는 남은 삶을 새롭게 볼 수 있는 눈을 뜨게 해주었다. 몸이 점점 굳어가는 파킨슨병이 부러운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질병을 통해 기존에 살아왔던 삶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가는 그녀가 그 속에서 행복을 찾아가면서 살아가는 모습은 나에게 특별하게 다가왔다. 그녀의 삶을 통해 인생에서 돈을 많이 벌고 성공하고, 그로 인해 행복해지는 것 이외에도 우리가 느낄 수 있는 행복의 종류가 많다는 것을 알게 해준다. 단순히 자동차로 가면 빨리는 갈 수 있지만 걸어가면 많은 것을 볼 수 있고 기어가면 더욱 많은 것을 볼 수 있듯이 느린 가운데에서도 다른 느낌을 살 수 있고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그녀는 행동이 느려진 자신을 달팽이로 비유하는데, 우리들의 지금의 일상의 속도가 바뀌어 버리면 똑같은 공간이라 하더라도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올 듯하다. 지금부터라도 남은 인생을 다시 산다는 마음으로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며 나만의 버킷리스트를 작성해본다. 이루기 힘든 일도, 바빠서 못했던 일도 할 수 있는 것부터 조금씩 해 나가보리라 하고 스스로에게 약속해 본다.

장려 이*서 지역주민 도서: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독후감: 우리 열차는 잠시 후 소크라테스 역에 도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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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나는 인생의 전환기에 서있다. 내 앞에 불확실성과 미지만이 가득하다. 나중에 모든 것이 밝혀지겠지만, 지금 알 수는 없다. 미지의 안개를 헤쳐 나갈 무언가가 필요하다. 불이든, 전등이든, 휴대폰의 플래시든. 그렇기에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표지에 문구에 꽂혔다. ‘인생에서 길을 잃는 수많은 순간마다 이 철학자들의 목소리가 들려올 것이다’ 내 앞에 길은 놓여 있다. 문제는 한 치 앞의 길만 보인다. 이런 나에게, 과연 어떤 철학자의 목소리가 들려올까? 책을 펼쳐 목차를 살펴본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소크라테스, 루소 … 몽테뉴. 이 책으로 방문할 정거장을 살펴보며 경로를 확인한다.

책은 출발, 새벽, 정오, 황혼, 도착으로 나뉘어 있다. 사람의 하루를, 인생을 빗댄 것이리라. 아침, 침대에서 빠져나온다. 오늘 무슨 일이 일어날지 궁금해 하고, 걷고, 보고, 듣고. 점심, 즐기고, 관심을 기울이고, 싸우고, 친절을 베풀고, 작은 것에 감사하고. 저녁, 후회하지 않고, 역경을 넘어서며, 늙어가고, 죽음을 맞이한다. 출발만 살짝 훑어본다. “배가 고프다.” “우리는 지혜를 원한다.”“지식은 소유하는 것이다. 지혜는 실천하는 것이다.” 의문을 떠올려본다. 철학자 특급 열차를 타고 철학자들을 방문하는 저자의 방식으로 표현하자면 나는 소크라테스처럼 궁금해 하기를 하고 있다. 의문은 간단하다. 나는 그동안 지식을 갈구해왔다. 왜? 미래에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해서. 그래서 지식욕이 넘친다. 언제 읽을지 모를 책을 사고 빌린다. 그런데 지혜는? 지식이 많으면 지혜로울까? 지식은 기억이라는 형태로 소유한다. 그런데 지혜는? 지혜욕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 있는가?

지식은 풍부하지만 지혜는 부족한 존재가 있다. 바로 ChatGPT다. ChatGPT 4.0 버전에게 변호사 시험, 의사 시험을 치르게 해봤더니 사람보다 나은 점수를 냈다는 뉴스를 봤다. 그러나 내가 아는 ChatGPT는 놀라울 정도로 똑똑한 멍청이다. 방대한 지식을 몇 초안에 출력해내고 글을 쓰면 비평도 해준다. 그러나 ChatGPT는 내가 입력한 프롬프트 안에서만 답변해준다. ‘A와 B 둘 중 하나를 골라줘.’ ChatGPT가 답변한다. ‘선택지 A는 이런 장단점이 있습니다. 선택지 B는 저런 장단점이 있습니다. 선택은 당신 몫입니다.’ ChatGPT는 지능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 지식만 담은 기계일 뿐이다. 지혜를 위한 자리가 없다. 에릭 와이너는 아이폰의 시리를 사례로 들었다. ChatGPT나 시리나 결국 ‘기계,’ 즉 사람의 도구다. 덕분에 에릭에게 동질감을 느끼며 그의 철학 특급 열차 여행에 쉽게 올라탔다.

열차에 오르면서 예전 독서 토론 때 읽은 책을 떠올린다. 피에르 아도가 쓴 『고대 철학이란 무엇인가』다. 아도에 따르면, 고대 그리스, 로마의 철학은 일상에서 실천하는 삶의 태도였다.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는 피에르 아도의 연장선에 있다. 에릭 와이너는 전 세계, 여러 시공간에 걸친 철학자들을 방문하여 철학자들의 삶의 태도를 알아간다. 난해한 사상이 아니라, 현실에서 실천할 수 있는 지혜를 알아간다. 매 장 초입부에서 에릭 와이너는 철학자와 관련된 장소로 기차를 타고 간다. 그리고 철학자의 책을 읽고,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철학자의 삶과 말을 곱씹고 사유한다. 그러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 삶의 태도를 조금씩 바꿔 나간다. 차츰 지혜를 깨닫는다. 에릭 와이너와 동행하는 나 역시 나의 생활 방식과 삶의 태도를 돌이켜 보게 된다.

에릭의 열차가 방문한 첫 정거장은 로마의 5현제 중 마지막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다. 로마 황제라는 이미지에 걸맞지 않게 마르쿠스는 잠꾸러기였다. 그에 반해 나는 한때 올빼미형 인간에서 지금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오전 5-6시 사이에 일어나는 아침형 인간이 되었다. 마르쿠스가 한낮에 미적거리며 침대에서 빠져나올 때, 나는 아직 어두운 5시 반 무렵, 침대에서 최대한 허리에 무리가 가지 않게 조심조심 몸을 일으켜 세운다. 그리곤 아이패드를 켜서 외국어 공부 어플을 실행시켜 외국어를 공부한다. 외국어 공부 어플로 공부한지는 어언 3년. 이렇게 아침에 일어나 공부하는 것은 수개월 차. 무엇이 나를 매일 이렇게 일으켜 세우는 것일까? 미래의 나를 위해서?

다음 정거장은 소크라테스 역이다. ‘소크라테스처럼 질문하는 법.’ 에릭 와이너와 같이 소크라테스의 거취를 살펴보면서 나를 돌이켜본다. 나는 아무래도 뒤집어서 질문하기를 좋아하는 것 같다. 전제를 뒤집고, 명제를 뒤집고, 문장의 주어와 목적어를 뒤집어서 질문해본다. 그런 식으로 인생의 답은 아니더라도 어떤 시점에서 난관에 부딪쳤을 때 돌파구를 찾았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내 미래에 대해서는 소크라테스처럼 질문하지 않았던 것 같다.

이어지는 정거장은 루소와 소로다. 소로에 비해 루소는 비교적 안다. 『에밀』의 저자, 프랑스 혁명에 영향을 끼친 사상가, 자식을 버린 철학자. 에릭과 함께 방문한 루소는 조금 다르다. 전립성 비대증 환자에, 엉덩이를 까고 얻어맞기를 좋아하는 루소. 그런 루소는 걷기를 사랑했다. 걸으면서 자연을 느끼고, 잠깐이나마 자연 속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나도 걷는다. 루소처럼 사회에서 벗어나 자연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아니다. 일차적인 이유는 건강 때문이다. 허리 디스크 때문에. 역류성 식도염 때문에.

이번에는 쇼펜하우어 역에 정차한다. 쇼펜하우어는 몸에 이상은 없었던 것 같은데, 부모와 관계가 좋지 못해 정신적으로 힘들었던 모양이다. 이 염세주의자는 플루트를 불었다. 음악을 들으면서 에릭 와이너는 음악에 침잠하는 수준을 넘어 음악이 가져다주는 어떤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한다. 마치 루소처럼 걸으면서 느꼈던 무언가처럼. 한때 음악을 들으면서 집 근처 하천을 따라 매일 산책했었다. 다른 운동은 생각에 잠길 틈이 없다. 걷기는 그렇지 않다. 매일 조금씩 달라지는 풍경을 소로처럼 봤다. 어제는 길거리 화단을 날아다니는 나비를 보고, 오늘은 하천가에 윙윙대는 날벌레 떼를 봤다. 음악이 클라이맥스에 이를 때 에릭 와이너와 비슷한 걸 느꼈다. 안타깝게도 나는 에릭 와이너처럼 수첩을 들고 다니며 메모하진 않았다. 그 때 그 기분, 감정만 잔재처럼 남아있다. 수첩이 있었어도 글로 표현하지 못했을 지도 모르겠다.

안내 방송이 나온다. ‘우리 열차는 잠시 후 에피쿠로스 역에 도착합니다.’ 에피쿠로스도 다른 책을 통해 잘 알고 있다. 에피쿠로스의 유물론은 르네상스 시대 휴머니스트 포초 브라촐리니의 손을 거쳐 세상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물론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에피쿠로스의 삶의 태도다. 에피쿠로스는 쾌락을 냉철히 계산하고 추론하라 말한다. 나는 이와 비슷한 문제에 직면한 적이 있다. 커피의 가격이 5,500원. 햄버거의 가격도 5,500원.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의 가격이 18,000원. 인터넷 서점으로 구매시 10% 할인이 적용되서 16,200원이다. 대략 커피 3잔, 햄버거 3개 값이다. 그럼 이 책이 가져다줄 수 있는 쾌락은 얼마로 환산할 수 있을까? 인간의 사유를 돈이라는 추상적 기호로 환산이 가능할까?

시몬 베유 역. 이번 정거장은 관심이 가득하다. ‘시몬 베유처럼 관심을 기울이는 법.’ 관심은 신기하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만들기 때문이다. 약자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시몬 베유의 모습에서 한 신화 속의 인물이 떠오른다. 간단한 질문을 던지기 주저해 한참 동안 모험에 나서야 했던 기사, 파르치팔이다. 그가 어부왕에게 조금만 더 관심을 기울일 줄 알았다면, 어부왕에게 관심을 표현할 수 있었다면 파르치팔은 고생하는 일 없이 어부왕을 치유하고 성배의 수호자가 되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파르치팔은 그러지 못했고, 5년 간 황야를 헤맨 후 어부왕에게 질문을 던질 수 있었다. 그러자 어부왕의 상처는 치유되고 파르치팔은 성배의 수호자가 되었다. 이 신화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알려준다. 주변에 관심을 조금만 기울이라고. 멀리 돌아갈 길을 바로 갈 수 있으니까. 그렇지 못했더라도 좌절하지 말라고. 언젠가 그 길로 갈 수 있을테니까.

이어서 간디, 공자, 쇼나곤 역을 지나쳐 간다. 갈수록 인명 살상 무기의 위력은 높아져만 가고, 사람들 간의 대립도 극심해지는 이 시대, 편리를 대가로 어느새 성큼 다가온 기후 위기의 시대에 세 사람은 의미가 있을 것이다. 폭력은 누구나 알 듯이 연쇄적이다. 한 번 폭력이 개입하면 폭력의 굴레, 증오의 사슬이 계속 이어진다. 간디처럼 싸울 때 그 사슬이 끊긴다. 인지언어학자 조지 레이코프는 나와 견해가 다른 사람의 생각을 바꾸려 들지 말고 그를 존중하라 했다. 공자가 강조하는 예절은 타인에게 베푸는 친절을 전달하는 수단이자, 타인을 존중하는 좋은 수단 중 하나다. 마지막으로 쇼나곤. 와이너는 쇼나곤의 즈이히츠를 실천해보는 게 어떠냐고 말한다. 효율과 결과를 중시하는 사회에서 불확실성은 효율과 결과를 알 수 없으니 배척된다. 그런데 인생은 불확실성 그 자체 아닌가? 인생을 즈이히츠하면 나중에 인생이 아름답게 보이지 않을까?

니체역. 불확실성을 받아들이라는 니체가 마음에 든다. 내 인생이 지금 불확실성 속에 있기 때문에. 니체역에 내린다. 니체도 이 책의 다른 철학자들처럼 고통에 시달렸다. 루소, 소로처럼 걷기를 좋아했다. 니체가 알려주는 삶의 태도는 영원회귀다. 이 모든 순간이 사실 반복되고 있다면? 우리가 《매트릭스》처럼 통속의 뇌도 아니고, 미래의 컴퓨터에 의해 시뮬레이션 된 존재도 아니고, 매 순간을 똑같이 반복한다면? 그런데 어느 경우든 상황은 달라지는 게 없다. 결국 현재가 중요하다. 바로 앞에서 파르치팔의 사례를 들었다. 눈앞의 목적지를 두고 빙빙 돌아갈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내가 나아가는 길로 나아가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런 과정이 반복될 것이다. 좌절할 필요도, 분노할 필요도 없다. 그저 나아가면 된다.

다음은 에픽테토스 역. 지금처럼 돈이 중요한 시대에 스토아철학은 유용한 지침이 될 것이다. 나 같은 경우에는 17,100원 주고 책을 사놨다가 중고서점에 팔러갔더니 균일가로 1700원만 되돌려 받았다. 아무리 나에게 소중한 소유물이라도 타인의 입장에서는 남의 손을 거친 중고품이다. 내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해서 내 책에 서명한 후 중고서점에 가면 어떨까? 중고서점에서 책을 매입할 때 서명은 ‘낙서’로 취급된다. 그렇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단지 그 가치가 떨어지는 순간 나의 감정에 나 자신이 휩쓸려가게 만들지 않는 것뿐이다. 누구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아마 움베르토 에코일 것이다) 차라리 책에 밑줄을 마구 그어서 책의 소유권, 책이 담은 지식의 소유권을 확실히 하는 게 낫다고 했다.

노화를 다룬 보부아르 역. 보부아르는 늙어가는 것을 두려워했다. 노화라는 개념은 상대적이다. 나이를 먹어서 생기는 신체 기능의 저하는 노쇠다. 반면 내가 거울 속에 비친 나를 보고, 남들이 내 모습을 보고 나이 들었다고 생각할 때가 노화다. 에릭은 머리가 벗겨지고 배가 나온 중년이라 노화를 달리 받아들인 듯하다. 나는 그 만큼 늙지 않아서 노화에 대해 그렇게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나에게는 노쇠가 더 중요했다. 별로 나이가 든 것도 아닌데 몸 여기저기서 아프다고 아우성을 쳐대니 처음에 적응할 시간이 필요했다. 지금은 좀 적응이 돼서 그럭저럭 넘기는 편이다.

이어서 마지막 파트, 몽테뉴와 죽음. 몽테뉴는 신장결석에 시달렸고 편도선염으로 인한 농양으로 사망했다. 죽음. 삶의 끝. 딱히 죽고 싶지는 않다. 왜 죽고 싶지 않을까? 이룬게 없어서? 쾌락을 즐길 수 없어서? 그런 것들은 삶에서 잠깐 스치고 지나가는 것들이다. 생각 끝에 내가 도달한 지점은 의외로 간단했다. 생명이 어쩔 수 없이 꺼져야하는 경우를 빼면, 스스로 생명을 박탈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몽테뉴가 겪었던 것처럼 생명의 위협, 혹은 죽음의 체험도 딱히 겪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죽음을 막연하게 두려워하고 싶지도 않다. 곰곰이 생각한 끝에 나는 삶의 여정은 언제든, 어디서든 끝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뿐이다.

마지막, 열차에서 내린 에릭은 휴대폰 액정을 깨뜨린다. 그리고 철학자들의 목소리를 듣고 외친다. 다 카포! 다시 한 번. 다시 한 번 책을 돌이켜 본다. 이 책의 철학자들이 겪은 고통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나도 고통 덕분에 삶의 태도를 바꿨다. 언제 재발할지 모르는 역류성 식도염, 족저근막염 때문에 가끔 찾아오는 발바닥 통증, 의자에서 일어나게 만드는 허리 디스크 돌출. 하나 같이 평소 생활 습관이 가져다 준 질환들이다. 언젠가부터 내 몸이 달고 사는 질병을 다르게 보기 시작했다. 몸이 의식에게 보내는 경고. 이대로 살면 더 고통을 겪을 테니 좋게 말할 때 삶의 방식을 바꿔라. 어느 순간부터 고통을 받아들이는 방식을 바꿨다. 누구의 목소리를 들었던 것일까? 에릭이 방문한 철학 정거장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나 역시 에릭처럼 철학자 역을 방문하면서 나만의 삶의 방식, 삶을 바라보는 태도를 수용하고 바꾸어왔다.

책을 읽으면서 내가 타고 온 나만의 특급 열차를 돌이켜 본다. 내 열차는 에릭의 열차와 때때로 겹치곤 했다. 에릭이 방문해 인상 깊게 여겼지만, 나에게는 그리 인상 깊지 않았던 역도 있었다. 나의 열차가 정거장에 머무를 잠깐 동안 환승을 한 셈이다. 책을 덮는 순간이 왔을 때, 이제 다시 나의 열차로 돌아 가야할 때임을 알게 되었다. 돌아가면서, 소크라테스처럼 스스로에게 물어 본다. 새로운 목소리들을 들었다. 나는 무엇을 얻는가? 앞으로 누구의 목소리가 들려올까? 나는 지혜에 더 다가갔는가?

이 책의 철학자들은 완벽과 거리가 멀다. 이번 열차 여행에서 알게 된 사실이 있다면 이 철학자들은 다들 하자 하나씩 있는 평범한 인간들이었다. 단지 조금 독특한 사고방식, 삶을 향한 조금 다른 태도를 지녔을 뿐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그들을 보고 ‘놀랍다,’ ‘대단하다’는 식으로 감탄하곤 한다. 에피쿠로스의 사례를 들어보자. 에피쿠로스의 철학은 고대 이후 잊혔지만 포초 덕분에 되살아났다. 그런데 에피쿠로스는 그 사실을 예견했을까? 포초의 존재를 알고 있었을까? 근대인들이 자신의 사상적 바탕인 유물론을 받아들일 것임을 알고 있었을까?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 에피쿠로스는 살아 있을 동안 현재, 고통이 없는 ‘지금’에 충실하였을 것이다. 그 후에 일어난 일은 후대 사람들의 일이다. 미래가 현재에 도달하기 전까지, 내 삶의 종착역에 도착할 때까지, 나는 꾸준히 누군가의 목소리를 들으며, 에릭 와이너처럼 다 카포!를 외치며, 미지의 안개 속을 뚫고 지나갈 나의 특급열차에 몸을 기대는 수밖에 없다.

장려 이*민 경제학부 도서: 연수
독후감: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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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격! 시동 끄고 내리세요!” 이 구절을 보고는 흠칫했다. 「연수」의 주인공 주연을 괴롭히는 목소리이지만, 동시에 나를 괴롭히던 목소리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운전병으로 군대에 지원하기 위해서는 일반적으로 “1종 보통”이라는 운전 면허가 필요하다. 미성년일 때부터 자동차 운전을 열망하기도 했고, 운전자 보험료 감면 등 여러 혜택이 있다는 말에 나는 대입 시험 직후 면허 시험장으로 향했다.

주연과 마찬가지로, 별것 아니라고 생각했다. 남들 다 따는 게 운전 면허인데. 이미 SNS를 통해 주변 친구들이 소위 말하는 “합격 인증샷”을 올린 것도 여러 차례 보고 난 후였으므로, 자신감 있게 시험을 치러 갔다.

그 자신감이 무색하게도, 첫 시험에서 보기 좋게 탈락했다. “괜찮아. 첫 시험이니까 떨어질 수도 있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두 번째도 탈락하자, 조바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남들이 다 딴다는 이야기는 자신감에서 압박감으로 바뀌어 나를 옥죄기 시작했다.

나는 어릴 때부터 나 자신이 긍정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해 왔다. 무슨 일이든 잘될 거라고 생각했고, 다른 사람들을 독려하거나 나 자신에 관해 이야기할 때에도 동일한 태도로 접근했다. 주변인들은 내가 이른바 “성공할 만한 마음가짐”을 지녔다고 칭찬해 주었다. 하물며, 긍정적인 마음가짐을 누가 나쁘다고 하겠는가?

하지만, 성인이 되면서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운전 면허 시험뿐만 아니라 흔한 자격증 시험에서도 여러 번 고배를 마시면서, 그 “긍정적인 생각”이 나도 모르게 나를 압박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사실 나는 온전히 긍정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긍정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으로써 보이고자 했던 것이다. 처음에 긍정적으로 접근했음에도 불구하고 원하던 결과가 나오지 않자, 그 과정에 대한 성찰은 없이 여유를 잃고 좌절하는 일이 반복되었다. 그전까지는 부모님과 친구들 사이에서 온실 속의 화초처럼 지내 왔지만, 본격적인 경쟁 사회에 직면하면서 비로소 어긋나 있던 나의 모습을 되돌아볼 수 있었다.

이때 생각했다. 이러한 경쟁적인 사회에서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속세를 떠나지 않는 이상, 경쟁은 불가피하다. 하지만, 단순히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면, 경쟁사회에서 나를 최대한 잃지 않고 올바르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 답을 이 책, 『연수』를 통해서 찾고 싶었다. 『연수』는 일련의 단편들을 통해서 각 주인공들이 경쟁사회에서 고군분투하는 모습들을 보여준다. 솔직히 첫 단편 「연수」를 읽기 시작했을 때는, “~해도 괜찮아” 식의 흔한 힐링 소설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주연이 운전 연수를 받게 되면서 고백하는 삶의 고민들은 나에게 굉장히 흥미롭게 다가왔다. 대입부터 취업까지 문제없이 성큼성큼 걸어왔다가, 예상치 못하게 운전이라는 요소 앞에서 좌절하고 본인을 되돌아보는 모습이 남의 일 같지 않았다. 경쟁 끝에 남부럽지 않은 학벌과 직장을 얻었지만, 주연은 기뻐하는 어머니로부터 전혀 보람을 찾지 못하며, 자신이 살아온 경쟁적 사회 제도에 대한 차가움을 느낀다.

이러한 경쟁사회의 냉기는 다른 단편들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동계올림픽」에서, 촉망받는 스케이트 선수 백현호는 어린 나이부터 태극마크를 달고 세계 무대에서 경쟁하며, 사람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는다. 그러나 국제대회에서 백현호가 부상을 입고 넘어지자, 그전까지만 하더라도 백현호의 집에서 진을 치고 있던 기자들은 순식간에 썰물처럼 빠져나간다. 예상치 못하게 우승한 다른 선수를 취재하러. 남은 것은 아들의 부상에 충격받은 부모뿐이다. 현호의 가족들은, 그리고 그 옆에 서 있는 인턴 기자인 주인공은 아이스링크보다 더 차가운 현실을 마주한다.

냉정한 사회는 이른바 “공정”이라는 미명하에 경쟁을 부추기는 모습도 보인다. “아마 나는 죽을 때까지 못 할 거야. 가사도 모르면서 사람들 앞에서 영어로 노래를 부르는 그런 일은. 이찬휘가 너무 싫어 죽겠는데, 동시에 또 너무 부러웠다. 왜 나는 죽어도 할 수 없는 일을, 저 애는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게 된 거지?”

「펀펀 페스티벌」에서 지원은 이찬휘와 분명 동일한 기회를 받았지만, 각 사람들마다 특성이 모두 다르며 심사위원의 눈에 띄는 역할은 한정되어 있다는 점, 화려한 과거를 지녔다는 이유로 이찬휘가 사실상 팀 운영을 좌지우지하는 모습은 과연 이 합숙 면접 자체가 공정한지에 대한 의구심을 갖게 만든다.

나아가 「라이딩 크루」에서는 이렇게 공정하다는 착각에 빠져 있을지도 모르는 우리에게 시사점을 던진다. 다리가 불편해 모터를 달아야만 자전거를 탈 수 있는 도헌과 그를 견제하는 크루장. 논쟁 끝에 옷을 전부 벗고 기본 자전거인 따릉이로 경주를 시작하는 장면은 한편으로는 우스꽝스러운 장면이지만, 한편으로는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장면이다. 현대 사회는 공정하게 경쟁할 수 있는 사회인가? 또, 공정한 경쟁을 위해 마련된 사회적 장치들을 우리는 아무렇지 않게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가?

한편, 「미라와 라라」는 그 경쟁에서 엇나간 이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 준다. 직장 생활 중에도 소설가의 꿈을 버리지 못한 미라는 언젠가는 자신도 좋은 작품을 쓸 수 있을 거라며 항상 긍정적으로 저작에 임하지만, 결국 혹평을 받던 와중 타인의 작품을 사실상 훔치게 된다. 매주 글짓기로 경쟁하던 이들 사이에서 미라는 사실상 추방된다. 하지만 글쓰기에 대한 그녀의 열망은, 전업 작가가 되고자 하는 주인공도 아직 가지고 있지 않은 필명을 손수 지어 작품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는 장면에서 안타깝게 드러나기도 한다.

이처럼, 본 작품의 저자는 서늘한 현대 경쟁사회를 배경으로 한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통해 필자를 비롯한 사회 초년생들에게 말을 건네고자 하는 듯싶다. 특히 이번 작품의 경우, 제목에 대해서 비교적 오랜 시간 동안 반추해 볼 수 있었다. 『연수』는 표면상으로는 다 다른 내용의 단편이 모여 있는 소설집인 만큼, 저자가 왜 제목을 하필 “연수”라고 지었을지 고민해 보았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것은, 각 단편들이 모두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각 주인공들은 전부 나름 자신이 잘하고 있다고 믿는 긍정적인 사람들이었지만, 자신보다 훨씬 강한 “외래종”이 등장함에 따라 그를 경계하고, 낙심하는 과정을 거친다. 일부는 상대방을 경쟁자로 삼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아울러, 이들 모두 어떤 목표로 향하는 여정에 놓여 있는 초보자들이며, 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연수”의 과정을 거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제목이 모든 단편들을 감싸 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무엇보다 『연수』의 묘미는 동호회, 취업 준비, 직장생활 등 우리가 사회에서 흔히 경험할 수 있는 여러 이야기들을 소재로 함에 있다고 생각한다. 저자는 “독자가 책에서 위로 같은 감정을 느끼기를 바라지 않는다. 사람마다 느끼는 감정이 모두 다를 수 있기 때문에, 그저 느껴지는 대로 느끼기를 바란다”고 말한다. 만약 저자가 책에서 “실패해도 괜찮아. 다시 하면 되지.” 식의 피상적인 위로를 건넸다면, 오히려 반감이 들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저자는 형식적인 위로가 아니라 취업 면접, 대학 생활 등 우리가 현재 실제로 체험하고 있는 삶의 현장에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녹여낸다. 또한 저자는 사회가 마냥 아름답지만은 않다는 불편한 사실을 숨기지 않으며, 그에 따라 사람들이 옳지만은 않은 선택을 하는 모습이 드러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 주인공들은 각자 낙심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자신을 반성하여 다시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아울러 나 또한 단순히 긍정적으로만 생각하려 했던 과거의 결과 지향적인 자세에서 벗어나기로 결심했다. 경쟁사회는 냉정하며, 불공정한 면도 존재한다. 이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내가 현재 걷는 길이 또 다른 연수의 과정임을 인지하고, 약간의 여유를 가지고 인내하는 것은 어떨까? 기존의 내가 가지고 있던“잘 될 거야.”는 결과론적인 긍정에 불과하지만, 목표를 향해서 서두르지 않되, 멈추지 않고 전진하는 것이 사실상 진정한 의미에서의 긍정적인 자세라는 점을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그럴 때마다 겨우 이런 일이, 결국은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의 손끝에서 결정되어 버리는 일이, 일생의 가장 기쁜 순간씩이나 되는 그런 삶은 결코 살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하곤 했다.” 주연은 이렇게 다짐한다. 하지만 난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 내 손끝에서 결정되면 좀 어떤가? 여러 단편들을 읽으면서 느낀 점은 결국 우리는 경쟁하는 현대사회에서 공생하여야 한다는 점이다. 각자가 서로 경쟁하며 고군분투하고 있지만, 종종 우리는 타인과의 교류를 통해 삶의 여유를 잠시 가지기도 하고, 다시 한 걸음 내딛을 원동력을 얻기도 한다. 그러다 보면 우리는 본인도 모르게 인생 최고의 순간을 서로에게 만들어 줄 수도 있다. 궁극적으로는, 우리는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조선 후기의 문인 이양연의 작품 『답설야중거(踏雪野中去)』를 보면, 눈 내린 들판을 걸어갈 때 발걸음을 함부로 어지럽히지 말라는 표현이 나온다. 그 이유는, 오늘 내가 걸어간 발자국이 뒷사람의 이정표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도 이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어떤 목표에 도전하는 이들은 비록 앞이 잘 보이지 않는 눈길이라 하더라도, 현재 본인이 연수의 과정임을 인지하고 차분히, 여유를 가지고 나아갔으면 한다. 또한, 그 연수의 과정을 이미 겪어 먼저 한 발자국 앞서 있는 사람들은 다른 “연수생”들이 자신의 뒤를 잘 따라올 수 있도록 독려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비록 라이벌이 즐비하고, 차가운 면도 존재하는 것이 현대 사회지만, 연수의 과정을 차근차근 밟고, 여유 있는 긍정적인 태도를 견지한다면 반드시 현대 사회에서의 건설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장려 황*영 실내환경디자인학과 도서: 사이보그가 되다
독후감: 세상의 모든 사이보그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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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보그’와 명사를 결합하여 쓴 책들은 많이 봐왔지만, ‘사이보그가 되다’처럼 동사와 결합하여 쓴 책은 생소하다고 느껴졌고 제목 그대로 왜 사이보그가 된 것인지 궁금했기 때문에 이 책을 선정하게 되었다.

이 책은 청각장애인으로 보청기를 사용하는 사람과 지체장애인으로 휠체어를 타는 사람, 총 두 명의 저자가 함께 구성하였다. 그래서 두 사람이 번갈아가면서 하나의 장을 채우는데, 책의 첫 장을 읽는 순간 책에서 말하는 사이보그는 단순히 로봇을 상상했던 나의 예상과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 책의 저자들은 기술과 결합한 장애인들의 모습과 그를 넘어서 현재를 살고 있는 모두를 사이보그라고 보아 이러한 제목을 붙인 듯 했고, 과연 어떠한 요소들이 우리를 사이보그라 칭하게 한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평소의 나는 장애에 대해서 일상생활에 있어 많은 불편함을 주고, 그들의 자율성을 저해할 수 있는 요소이기 때문에 가능하다면 그것은 극복되고 정복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래서 과거부터 지금 현재까지도 다양한 장애 요소들에 대한 연구 역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며 그것이 장애를 가진 당사자들에게 큰 희망이 되는 부분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이 어쩌면 비장애중심주의적인 생각일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저자가 말하기를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바라는 것은 획기적인 기술의 발전으로 빠른 시일 내에 극복되는 것이 아니며 그것이 이루어지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안다고 하였다. 그래서 장애의 정복보다는 표준적인 몸상태의 사람들에게 맞추어진 사회 안에서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더 편하게 지낼 수 있는지였다. 처음 이 구절을 읽었을 때 사뭇 놀랐지만, 다시 한 번 읽은 후에는 그 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이 살고 있는 곳은 현재이며 불완전하고 불확실한 미래만을 바라본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또한, 장애를 극복해야 한다는 것 자체가 비장애중심주의에 기반을 두고 정상성을 강요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할 수 있었다. 장애를 극복하는 기술을 개발하는 것은 오랜 시간과 고도의 기술이 요구되는 영역이지만 현재 구축된 인프라들에 그들을 위한 편의를 더하는 것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학 기술이나 의료계에서는 장애는 극복되고 치료되어야만 하는 것으로 본다는 문제가 있음을 저자는 지적한다. 분명 치료나 극복이 불가능한 장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장애와 더불어 현재를 살아가는 것은 고려하지 않고 미래에 도래할 치료 기술에만 신경을 쏟으며 희망을 가질 것을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이것 역시 비장애중심주의적 사고에서 기반하여 장애인들에게 정상성을 강요하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를 들어 직립보행하는 것만을 정상적인 이동방식으로 여기며 다양한 이동방식을 존중하지 않고, 그들을 위한 인프라를 구축하기보다는 걷게 만들 수 있는 기술에만 집중을 하고 있다는 지적처럼 말이다.

이러한 그들의 현재 불편함에 도움을 주고자 사용되는 것들이 있다. 이 책 속에서 대표적으로 다루어진 것으로는 보청기와 휠체어가 있는데, 저자는 보청기를 ‘값비싼 낙인’이라는 표현으로 정의했다. 짧지만 매우 직관적인 표현이 단번에 나를 이해시켰다. 자신의 생활에 도움을 주지만, 값비싼 가격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그 보청기를 착용하는 순간 타인의 눈에 보이지 않던 자신의 장애가 가시화되기 때문이다. 우리의 사회는 그렇지 않다고 하지만 장애에 대한 낙인이 존재한다. 다양한 특성을 가진 사람일지라도 그 사람이 장애를 가지고 있다면 그것에 시선과 관심이 쏠리는 모습을 우리는 꽤 자주 확인할 수 있으며 종종 그 장애에 대한 인식이 당사자를 무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보청기 광고들은 기능보다 그것이 숨겨질 수 있음을 강조하며, 주소비자들 역시 그 제품들을 주로 선택하는 경향을 보인다고 한다. 나는 이러한 현상이 벌어지는 이유를 잘 이해함과 동시에 참 아이러니하다는 감정을 느꼈다. 보청기는 불편한 청각에 도움을 주기 위해, 잘 듣기 위해 사용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타인의 시선에 구애받지 않도록 숨기기 위해 불편함과 성능 저하를 감수해야 한다는 점 때문이다. 즉 그들은 자신의 선호가 아닌 사회적 선호를 따르게 된다고 정의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맥락으로 보청기가 청력의 향상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라면 안경은 시력의 향상을 위해 사용하는 것인데, 왜 안경은 잘 보이는 것뿐만 아니라 패션의 한 종류로 보일 수 있지만 보청기는 그럴 수 없는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되는 것에 대한 아이러니 역시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이러한 아이러니가 생기는 사회적 이유를 생각해 본다면 장애를 드러낸다는 것은 키가 크다거나 달리기가 빠르다는 것처럼 개인의 특성을 드러내는 것과 다르다는 생각이 작용하기 때문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할 수 있었다.

이를 통해 장애는 사회가 만드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처음부터 보청기에 대한 낙인이 없었다면 보청기는 안경과 다를 바 없었을 것이고, 보청기를 착용하는 사람들도 청력이 약한 것을 자신의 수많은 특성 중 하나로 인식할 뿐 그것을 숨겨야 하는 장애로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른 장애 역시 그렇다고 생각한다. 장애가 개인의 고유한 하나의 특성이 될 수 있었음에도 사회가 그것을 비정상적으로 간주하며 이러한 아이러니가 만들어진 것이다. 또한, 장애는 공간에 따라 재규정될 수 있다는 저자의 말에 동의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의 집과 같이 자신의 뜻대로 정돈과 배열을 할 수 있는 공간에서는 자신의 불편함에 따라 공간을 구성 및 수정하기 때문에 그곳에서는 큰 불편함을 느끼거나 위험에 당면할 경우가 현저히 줄어들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그 공간에서만큼은 장애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현재 사회가 미래에 개발될 치료제에 불확실한 기대를 걸기 보다는 현재 그들이 살고 있는 환경에 그들의 생활에 저해를 줄일 수 있는 인프라를 구축한다면 그들의 장애는 그 공간의 새로운 특성에 따라 재규정, 재정립될 수 있을 것이다. 장애인들을 고려한 사회적 인프라를 구축하는 것은 오히려 역차별이 아닌가라는 의견이 나올 수 있으나, 그것은 그들에게만 한정적으로 향유되는 요소가 아니다. 책 속에서 제시하는 예시 중 하나인 주름 빨대를 통해 살펴봤을 때 그것은 환자가 쉽게 물이나 음료를 마시기 위한 목적으로 개발되었지만, 결국 다양한 연령층에게 보편적으로 편리하게 쓰이는 물건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장애인에게 도움이 되는 구조라면, 또 다른 취약 계층뿐만 아니라 모든 이들에게 긍정적인 영향과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보았을 때 우리가 원하는 것은 결국 모두를 위한 기술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결과적으로 모두를 위한 기술임에도 불구하고 왜 이것이 장애인에게 먼저 향하는 기술이 되면 항상 온정적이고 시혜적으로 변하는가에 대한 저자의 지적이 있었다. 나 역시 그 생각에 동의한다. 비장애인들을 위해 인프라를 구축하고 기술을 개발하는 것은 당연한 과정처럼 여기지만 장애인을 위한 인프라를 구축하고 기술을 개발하는 것은 마치 넓은 아량을 베푸는 것처럼 반응이 나타난다. 책 속의 예시인 기업의 청각장애인을 위한 목소리 제작 사업에 대해 많은 이들이 감동적이다, 좋은 기업이다라는 등의 반응처럼 말이다. 정작 그것이 당사자에게는 당장 필요한 것이 아닐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것에 대해 청각 장애를 가지고 있는 저자는 오히려 해당 기업이 올린 영상에서 제작된 목소리가 나오는 순간 자막이 없어지면서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고 말했다. 이것은 자신뿐만 아니라 그 목소리 제작의 당사자 역시 추후에 느낄 수 있는 당혹감일 수 있다고 언급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정상성을 선물하고 감동을 유도하는 구조 즉 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태도가 동정과 시혜적으로만 한정지어지는 현상은 변화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앞서 어떤 요소가 우리를 사이보그라 칭하게 한 것인지에 대한 의문을 표현했었는데 책을 읽어본 결과, 표면적으로는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자신의 신체적 한계를 보완하기 위해 보청기나 휠체어, 의수, 의족 등과 결합한 모습이 마치 사이보그같다는 의미로 그것이 시작된 것 같다. 즉 그들은 장애와 기술을 결합한 사이보그라 정의하는 것이다. 그러나 장애인들 뿐만 아니라 비장애인들 역시 현재 발전되고 있는 기술과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를 형성하고 있으며, 그러한 기술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에 장애의 유무와 관계없이 우리 모두는 사이보그이며 사이보그가 될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리고 기술뿐만 아니라 타인과 연결되어 서로 영향을 주고 받고 있기 때문에라도 우리는 사이보그가 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어쩌면 이 책의 주요 키워드라고 할 수 있는 장애인과 사이보그를 보고서 그들만이 사이보그라고 생각했던 것은 또 다른 편견이자 편협한 사고였다는 깨달음을 다시 느낄 수 있었다.

보통의 장애를 주제로 쓴 도서들은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며 과거와 현재의 불합리한 사회현상을 꼬집는 방식으로 전개되곤 한다. 그러나 이 책의 경우, 자신의 경험 뿐만 아니라 다양한 사회현상이나 소설, 영화 등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독자의 호기심을 이끌어낸 후 그와 관련된 장애에 대한 사회적 물음을 건넨다. 저자가 정해진 답을 주기보다는 독자 스스로가 그것에 대한 답을 생각할 여지를 준다. 그래서 그저 읽고 지나가는 것이 아닌 내가 경험해온 모습들을 천천히 되돌아보면서 문제의식을 갖게 한다. 그래서 매우 설득력있게 느껴지며 더 큰 반성과 노력을 촉구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이 책을 읽는 내내 나는 부끄러움을 느끼며 깊은 자기 반성을 했던 것 같다. 나는 장애인의 삶과 어려움, 그것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지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스스로 자부하며 살아왔지만 내가 인지하고 있는 것은 그들의 삶에 극히 일부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도 모르게 모든 것을 비장애중심주의적 사고로 판단하며 구성해왔음을 저자의 언급으로 인해 깨닫게 되었고, 아직도 우리 사회에는 비장애중심주의적사고가 만연하다는 것 또한 알 수 있었다. 과거에 비해 많은 점이 변화하고 인식이 긍정적인 방향으로 성장했지만 아직도 여전히 우리 사회에는 많은 수정과 논의가 필요하다. 또한, 세상에 똑같은 사람이 없듯이 같은 유형의 장애라고 할지라도 발현되는 형태는 셀 수 없이 다양하다. 그러므로 그것을 하나의 범주로 묶어 행동을 취하는 상황은 점차 줄여나가면서 지금 현재의 사회 속에서 지원되는 제도나 장치들이 그들에게 과연 적합한지, 그저 형식적인 것에 불과한 것인지 재검토의 필요성이 대두된다. 사회가 점차 고령화되어가는 만큼 장애인 사이보그에 대한 고려는 먼 나라의 이야기가 아님을 다시 한번 깨닫고, 비장애인들이 추구하는 정상성을 더 이상은 그들에게 강요하며 억압하는 경우는 발생되어서는 안된다. 저자의 말처럼 현실의 우리는 누구도 취약함에서 자유롭지 않기 때문에 더욱 더 그 필요는 강조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함께 성장하는 사이보그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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