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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감 공모전 우수작
제목: 혐오 말하기
학과: 영어영문학과, 이름: 정*한, 선정연도: 2021
내용: Ⅰ. 서론
지구상의 생명체들은 지금껏 다양성을 증가시키는 방향으로 진화해왔다. 하나의 종 안에서 개체 들간의 차이가 작으면 작을수록 그 종은 전염병에 취약하다. 인간의 유전자는 이를 막기 위해 끊임없이 분열되고 전사되며, 다시 무작위로 재조합되어 다양성을 확보해왔다. 살아남기 위해 서로 달라지기를 택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는 ‘우리’와 다른 것을 배제한다.

Ⅱ. 본론
“나영에게 국내 거주중인 외국인들은 그런 이미지였다. 그곳에 있지만 인식할 수 없는 대상. … 나영이 아는 사람들 중에는 동남아 출신 사람들과 대화를 하는 것도, 그들과 함께 있는 것도 견디지 못할 만큼 꽉 막힌 사람들이 많았다.”(조영주, 2020, p.79) 내가 외국인을 생각하면, 두 분류가 떠오른다. 설명하지 않아도 모두가 머리 속으로 같은 기준으로 두 그룹을 나눴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무의식적으로 떠오르는 이 생각은 우리가 어렸을 적부터 몸으로 습득한 것이다. 대놓고 표현하지는 않아도 그들을 둘러싼 사람들의 어색한 분위기와 태도를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을 똑바로 마주하지 않는 사회에서 자란 나는 그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아직 모른다. 겉모습으로 출신을 가늠하는 시대는 지났고 지구는 거대한 하나의 멜팅팟이 되어가고 있지만, 아직 한국이라는 나라는 융합에 익숙하지 않은 것 같다. 나영 역시 나와 같은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나영은 네 건의 자살이 연쇄살인이라고 추리했지만, 준혁의 죽음을 조사하면서 네 건의 자살은 서로 아무런 연관 없는 개별 사건임을 알게 되었다. 여기서 나는 책 제목이 왜 혐오자살인지 깨달았다. 자살이면 자살이고, 혐오살인이면 몰라도 왜 ‘혐오자살’일까? 나영은 자살한 4명이 외국인, 난민이라는 이유로 그들이 혐오의 대상이 되어 살해되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사람들도, 그리고 나도 그렇게 믿었다. 우리는 자살한 이들을 강제로 연쇄살인 피해자로 둔갑시켜, 죽은 이후에도 가만히 놔두지 못하고 혐오의 대상으로 끌어와 앉혔다. 각자 나름의 이유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들은 억울해하겠지만, 죽은이는 말이 없다. 만약 연달아 죽은 4명이 백인이었다면, 나영은 그들의 죽음을 연관지었을까?

혐오의 근원을 따지자면, 그것은 무지로부터 오는 공포이다. 예를 들어 여성이 대표적인 혐오 대상인데, 신화, 소설, 영화에서 귀신이나 괴물은 대부분 여성으로 등장한다. 구미호, 메두사, 인어, 마녀, 심지어 저주인형까지 우리는 여성의 외형을 가진 괴물을 잘 알고 있다. 이는 이야기에서 ‘인간’이 남성에 국한되기 때문이다. 남성은 생명을 창조하는 여성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을 두려워하지만, 그 사실을 부정하기 위해 여성을 굴복시키려 한다. 그래서 여성 괴물은 아름답지만 위험하고, 신성하지만 잔혹한 이미지로 표현된다. 그 외에도 어린아이, 노인, 장애인 등 일반적으로 혐오의 대상이 되는 이들은 남성 중심적인 시각에 의해 이해될 수 없기 때문에 혐오적인 존재로 그려진다. 그만큼 혐오의 기준을 정하는 데에는 남성의 영향력이 강하다. 그런데, <혐오자살>에서는 학벌 좋고, 신체 건강한 30대 남성 준혁이 혐오 대상이다. 책의 중반부까지 나는 그가 왜 그런 취급을 받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준혁이 주변 인물들로부터 왜 동정 혹은 경멸을 받는지는 소설 후반부에 가서야 정확하게 드러난다. 작가는 준혁이 동남아지역 외국인임을 최대한 늦게 밝힘으로써 중요한 부분을 지적했다. 그것은 혐오 그 자체가 아니라, 혐오의 이유가 매우 불합리하고 비이성적이지만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준혁이 외국인임을 알기 전까지 나는 준혁이 받는 타인의 적대감에 계속해서 의문이 들었었다. 그러나, 준혁의 출신이 드러나는 순간, 나는 그 혐오에 타당성을 부여하고만 것이다. “혐오(嫌惡): 싫어하고 미워함.” 인간이 어떤 대상을 혐오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땅콩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이 땅콩을 기피하는 것처럼 인간은 생존하기 위해 혐오라는 방어기제를 가지는 것이다. 누군가는 뱀을, 누군가는 범죄자를, 누군가는 폭력을 혐오한다. 또한 혐오는 전쟁의 역사 혹은 국가 간의 정치적, 경제적 관계에 의한 감정일 수도 있다. 우리는 이런 혐오에 동의하고 존중한다. 그러나, 혐오는 여기서 더 나아간다. 누군가는 동성애자를, 누군가는 아이를, 누군가는 그냥 누군가를 혐오한다. 아파트 주민들이 준혁을 피하는 이유는 준혁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김준혁이라는 사람은 그냥 존재했을 뿐이었다. 존재한다는 사실이 이유가 될 수는 없다. 그렇기에 이 이유 없는 혐오가 위험한 것이다. 또한, 그것이 쉽고 간편하다는 점 역시 중요하다. 1408호가 준혁을 죽인 것은 그게 쉬운 방법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공장에 취직했을 때 자리에서 밀려난 사람들은 못 본 척 했으면서, 다른 이들에게 밀려 토사구팽당한 자신의 처지를 스스로 불쌍하게 여긴다. 1408호는 공장의 높은 분에게는 항의하지 못하고, 자신 대신 들어온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화살을 돌렸다. 그 화살은 재떨이 공장의 외국인 노동자와 비슷하게 생긴 준혁이 대신 맞았다. 얼마 전, 아프간 난민들이 한국에도 입국했다. 탈레반에게 정부가 무너지고, 하루아침에 국가를 잃어버린 아프간 국민들은 난민이 되었다. 이에 관한 커뮤니티 글에 달린 댓글을 읽어보니, 기분이 묘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진만 보고 왜 우리 동의 없이 아프간 난민들을 받아주냐, 우리가 낸 세금을 왜 외국인들에게 쓰냐고 했다. 그러다가 난민들이 모두 의사, 통역사, it 기술자 등 고급인력들과 그 직계가족이라는 댓글이 달리자 반응이 180도 달라졌다. 혐오는 약자에게만 잔인해진다. 혐오 자체는 대상이 잘나거나 못나거나 상관없이 공평하게 주어진다. 그러나 대상에 따라 그 혐오가 얼마나 노골적으로 드러나는가에는 확연한 차이가 있다. 대부분의 혐오는 자격지심과 무의식에 잠재되어있는 우월감에서 기인하기 때문이다. 준혁은 딱 좋은 먹잇감이었다. 그를 샤덴프로이데라고 부르는 교수부터, 대학 동기, 직장 동료, 아파트 주민, 그리고 연인인 명지까지 모두가 만만한 그를 혐오했다. 퇴사하기 전까지는 준혁은 자신을 향하던 혐오에 무덤덤했다. 의식하지 않으려 했다는 것이 더 맞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껏 주변의 혐오를 어느 정도 막아주던 돈, 지위가 사라지자 노골적인 혐오에 무력하게 노출되었다.

그렇다고 준혁이 무고한 피해자이기만한 것도 아니다. 줄곧 혐오의 대상이었던 준혁 그 역시 누군가를 혐오했다. “준혁은 말 대신 옆을 흘깃거렸다. 명지가 고개를 돌려보니 옆자리에 동남아시아 지역 출신으로 보이는 커플이 앉아 있었다. 준혁의 고질병이 도졌다. 준혁은 단번에 티가 날 정도로 동남아 출신이나 조선족 등 외국인을 혐오했다. 명지는 그런 준혁이 싫었다.”(조영주, 2020, p.64) 자기 자신을 외국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거나, 자기와 같은 이들을 혐오함으로써 자신이 받는 혐오를 부정하려 했을지도 모른다. 준혁은 그토록 사랑했던 명지 마저 자신을 떠나려하자 혐오했다. 사랑이 변질 된 혐오가 더 위험한 법이다. 연예인 혹은 셀럽들에 대한 대중들의 심리가 이와 비슷할 것이다. 대중들은 그들을 사랑하고 부러워하면서도 동시에 그들의 고통을 기꺼워한다. 이 역시 혐오의 편리성과 관련 있다고 보는데, 자신이 부러워하는 대상과 같은 위치로 직접 올라가는 것보다 그 대상을 자신의 위치로 끌어내리는 게 더 편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빛나던 이들의 추락을 환영한다.

모두가 혐오의 가해자였고, 피해자였으며 등장인물 중 그 누구도 완벽하게 무고한 사람은 없다. 작가는 책에서 두 가지 키워드를 제시했다. 샤덴프로이데, 그리고 파르헤지아. 샤덴프로이데는 타인의 불행에서 느끼는 기쁨을, 파르헤지아는 두려움 없이 진실 말하기를 뜻한다. 샤덴프로이데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감정이다. 우리는 다른 이의 샤덴프로이데는 비판하고, 자신의 샤덴프로이데는 철저히 숨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대로 파르헤지아는 자신이 받을 위험과 고통을 감수하고 밝혀야만 하는 진실을 드러내는 행위이다. 작가는 준혁과 명지를 샤덴프로이데의 대상으로 설정했다. 이는 책 속에서 확실히 드러나는 부분이다. 그리고 나는 레드가 파르헤지아를 행하는 인물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만이 진실을 입 밖으로 낸 인물이기 때문이다. 준혁은 자신이 혐오를 받는 이유를 모르는 듯 보였다. 모든 이들은 준혁에게 진실을 숨긴 체 불쌍한 준혁을 보면서 희열을 느꼈다. 레드는 준혁에게 블랙이라는 별명을 붙였다. 유일하게 레드만이 그에게 진실을 말했다. 비록 그 진실이 잔인하고 불친절할지라도 말이다. 준혁에게 레드의 파르헤지아는 충격일지언정 거짓은 아니었다. <혐오자살>에서 파르헤지아에 대한 작가의 생각이 잘 드러난 장치가 있는데, 바로 냄새다. 책 속에서 준혁에게서 지독한 냄새가 난다는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한국인은 다른 국가 사람들에 비해 겨드랑이 냄새를 유발하는 유전자가 거의 없어 냄새가 나지 않는다는 인터넷 기사를 본 적이 있다. 나도 지하철에서 외국인의 체취를 맡아본 적이 있는데, 인생에서 처음 맡아보는 냄새라서 자리를 피한 적이 있었다. 준혁의 암내는 그가 우리나라 사람이 아니라는 힌트이자 그를 향한 혐오에 타당성을 부여하는 핑곗거리이다. 영화 <기생충>에서도 박사장은 기택에게서 설명하기 어려운 묘한 냄새가 난다고 했었다. 그리고 그 냄새가 선을 넘는다고도 했다. 체취는 스스로 선택하거나 통제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확실히 주변에 있는 이들에게 불쾌감을 주기도 한다. 사람들은 냄새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 대신 그냥 조용히 자리를 피한다. 체취를 풍기는 외국인은 근처에 있던 사람들이 자신으로부터 슬금슬금 멀어지는 것을 보고 의아해할 테지만 그 이유를 알진 못 할 것이다. 아무도 말해주지 않을 테니까. 이 외국인은 샤덴프로이데의 주인공이 되거나, 파르헤지아를 통해 알게 된 진실을 받아들일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혐오의 대상이 되었을 때 선택할 수 있다면 어느 쪽을 택할까? 나라면 이 사회에서 동떨어진 섬이 되어 샤덴프로이데가 되기 보다는 후자를 택할 것 같다. 작가는 이 불편하지만 필수적인 말하기 과정의 중요성을 전달하고 싶었던 것 같다.

Ⅲ. 결론
마지막까지 혐오의 굴레는 확실하게 끊어지지 않았다. 준혁을 죽인 범인이 1408호인 것을 나영이 의심하기는 하지만 그 의심이 확인될 길은 없어 보인다. 혐오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이제는 혐오에 동조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세상이다. 노키즈 존은 유행처럼 번져가고, 사람들은 혐오가 마치 취향인 것처럼 말한다. 혐오 자체는 인간에게 필수불가결한 요소이며, 우리는 혐오와 공존해야한다. 단지, 자신의 마음 속에서 자라나는 혐오를 경계하고, 타인을 향한 혐오를 굳이 꺼내보일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 파르헤지아는 전달해야만 하는 진실을 말하는 것이지, 모든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파르헤지아는 침묵한 채 뒤돌아서지 않고, 마주보며 제대로 소통하는 것이다. 혐오를 입 밖으로 꺼내 말한다는 것이 동방예의지국인 우리나라에서는 큰 실례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히 존재하는 것을 영원히 외면할 수는 없다. 이 책은 나에게 혐오를 대하는 새로운 태도를 제시해주었다. 혐오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독후감 공모전 우수작
제목: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학과: 생명시스템학과 , 이름: 최*은, 선정연도: 2021
내용: (아래 독후감에는 책 내용의 스포일러가 담겨 있습니다)
최근 몇 년간 우리 사회를 가장 뜨겁게 달구는 주제인, 혐오를 전반에 제목으로 내세운 책은 도대체 무슨 내용일까 하는 생각과, 소개글의 “어젯밤, 내가 남자친구를 죽였다.” 에 홀랑 마음을 빼앗겨버린 나는, 여러 책 중에서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조영주 작가의 ‘혐오자살’을 선택해 읽게 되었다. 그리고 역시, 책을 손에 쥔 그 순간부터 미동도 없이 앉은 자리에서, 거의 책을 삼키듯이 읽어 내린 것 같다.
이 책은 시점과 시간 순서가 뒤죽박죽으로 구성된 스릴러 추리 소설로, 김준혁이라는 두 남성 동명이인이 등장하며, 백명지라는 여성이 등장하고, 이 둘 사이에서 하루 사이에 일어난 사건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간다. 웬만한 추리물은 전부 읽어본 추리 덕후인 나는 처음 책을 잡을 때 “이런 1인칭 추리 소설의 트릭 따위, 내가 읽으면서 간파해버리겠다!” 하며 읽기 시작했지만, 챕터가 넘어갈수록 점점 나의 추리는 미궁으로 빠졌고, 설상가상 나중에는 동명이인인 두 김준혁의 묘사가 머릿속에서 시간순으로 나열되지 않고 뒤섞여버려서, 잠시 읽는 것을 멈추고 다시 이전 챕터로 돌아가서 이 김준혁이 저 김준혁과 동일인인지 아닌지 판단하는 시간을 가져야 했다. 또한, 백명지의 시각으로 진행된 챕터와 동일한 시간대를 김준혁의 시각으로 다시 진행하는 챕터에서는 손가락을 백명지 챕터에 끼워 두고 페이지를 이리저리 넘기면서 읽기도 했다(개인적으로는 이런 행동들이 종이책의 묘미라고 생각한다).
읽으면서 혹시 백명지가 혼혈이 아닐까 생각하긴 했지만, 설마 김준혁도 혼혈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초반부에 나온 둘의 데이트 장면에서 김준혁이 외국인 노동자를 향한 혐오를 드러내는 장면이 있었기 때문인데, 다시 생각해보니 이것도 결국 내 안에 잠재되어 있던 차별적 시선이 아니었을까 생각하게 되었다. 결국 김준혁은 혐오를 하는 사람임과 동시에 혐오를 받는, 아주 현실적인 인물이었다. 또한 백명지와 김준혁 각각의 시선에서 진행되는 챕터에서는 (이렇게 피부색으로 표현하는 방법이 매우 좋지 않다는 것을 알지만 책에서 언급하는 방식대로 표현하자면) 백인과 동남아인을 대하는 한국인들의 태도 차이를 매우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둘은 같은 대학, 같은 과를 졸업한 같은 혼혈이지만 둘을 대하는 주변인들의 태도는 매우 다른데, 이는 소설적 과장이라고 표현하기에는 현재 우리 주변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인종차별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을 볼 수 있다.
이 책이 이렇게 현실감을 끌어올리는 데에는 묘사 방식도 한몫을 했는데, 카카오톡으로 연락을 주고받는 등장인물들, 서울대를 졸업했지만 동남아 혼혈이라 정리해고를 당한 김준혁, 젊은 여성이라 수업 시수를 동료 교수에게 빼앗긴 백명지, 극심한 층간소음과 쓰레기 투기, 가정폭력, 늦은 밤 혼자 다니는 여성에게 위협이 되는 길거리나 엘리베이터 등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고 겪는 일상이 소설에 녹아들어 있었다. 읽는 동안 이 책이 혹시 실화를 바탕으로 쓰인 것은 아닌지, 현실이 아니라 소설이 맞는지를 인지하기 위해 책 표지를 들여다보기도 했다.
이 책은 시작부터 살인사건을 보여주면서 시선을 사로잡는다. 그리고 그 과정을 살인 용의자(라고 추측되는 인물)인 백명지의 시선으로 풀어내는데, 그래서 당연히 독자들은 시작부터 함께한 백명지의 생각과 감정에 이입하게 되어서 후반부의 반전을 예상하지 못한 상태로 맞닥뜨리게 된다. 그러면서 추리 소설의 묘미인 반전의 짜릿함을 살리고, 김준혁의 자살 이유가 된 사회적 혐오 역시 강조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다른 화자인 형사 나영의 시선에서 바라본 사건은 ‘자살을 빙자한 살인 사건’으로 묘사되어서, 마치 아직 밝혀지지 않은 엄청난 흑막이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게 분위기가 진행되지만 실제로 밝혀진 진실에서는, 흑막이 어떤 개인이 아닌 사회의 불합리하고 혐오적인 시선과 분위기라는 것을 알려주면서 주제 의식을 강하게 환기해 준다.
혼혈 김준혁과 동명이인인 과외선생님 김준혁은, 처음에는 독자들에게 이름과 시점으로 인한 혼란을 야기하는 인물이고, 나영의 시점에서는 가장 의심스러운 사건의 최종 흑막처럼 묘사되며, 후반부에는 독자들로 하여금 “저 김준혁의 그 레드가 이 김준혁이었어!?” 하고 기겁하게 만들고, 최종적으로는 살인사건의 피해자가 되어 버린 어린 시절의 가해자로 남게 된다. 이를 보면 확실히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가 명확해지는데, 혼혈 김준혁은 어린 시절 혐오와 차별을 받는 피해자임과 동시에 나중에는 본인이 차별을 수행하는 가해자가 되었으며, 결국은 사회적 차별로 인해 자살하는 피해자가 되었다. 그리고 레드 김준혁은 어린 시절 블랙 김준혁을 왕따시키는 가해자였으며 성장한 후에는 친구가 되었고, 종국에는 친구의 자살에 의구심을 품고 사건을 파헤치다가 살해당한 피해자가 되었다. 그리고 두 김준혁의 목숨을 앗은 것은 결국에는 우리 사회에 공공연하게 퍼져 있는 차별적인 시선인 것이다. (사족으로, 김준혁의 블랙이라는 별명 때문에라도 자살한 김준혁이 혼혈이라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내가 본 히어로물-슈퍼전대-에서 주인공은 레드이고, 동료는 핑크/옐로우/블루/그린인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물론 예외도 있다는 것을 잘 안다.)
최근 전 세계적인 열풍을 몰고 있는 넷플릭스의 ‘오징어게임’에서도 동남아 출신의 외국인 노동자 캐릭터가 나오며, (나는 시청하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주위 시청자들의 말에 의하면) 오징어게임에서도 남아시아계 이주노동자에 대한 차별과 혐오를 대놓고 드러내고 있다고 한다. 처음 이 말을 듣고 나서, 이 드라마가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과연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인종차별로 비난을 듣지는 않을지 생각했었는데, 정작 미국과 유럽 등에서는 주로 미디어에서 아시아인을 나타내는 스테레오타입이 테러리스트 또는 사회 하층민이라서 오징어게임에서 보여주는 정도의 인종차별적 묘사로는 턱도 없다는 말을 듣고 기겁했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실제 대한민국에서의 외국인들이 받는 취급과 별반 다를 바가 없어서 크게 뒷말이 나오지 않는다는 얘기도 들었다. 이런 사회 고발적인(?) 작품이 세계 1위를 하고 있다고 하면, 우리나라의 인종차별과 성차별, 노인혐오 등이 전 세계에 알려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부끄러울 법도 한데 전 국민이 오징어게임 1위에 축배를 들고 있는 분위기라서 우습기도 하고, 다들 이 정도의 차별은 차별로 여기지도 않는 듯해서 참담한 기분도 든다.
외국인(정확하게는 비백인계 외국인) 혐오는 우리나라의 미래와도 밀접하게 맞닿아 있는데, 우리나라의 출생률은 갈수록 감소하고 있음에도 외노자/동남아/조선족/중국인/흑인/노인/장애인/여성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차별과 혐오는 갈수록 심해지고 있으며, 오히려 점점 부끄러움을 잃은 채 양지로 나오고 있는 듯하다. 이를 개인의 문제라고 치부할 수도 없는 게, 국가기관이 주도하는 동남아매매혼은 아직도 성행하고 있고, 심지어 이런 21세기형 인신매매를 국세로 지원하고 있으며, 지금도 시골에는 ‘도망 안 가는 예쁜 동남아 처녀 아가씨’라는 말이 버젓이 길거리에 플래카드로 붙어 있다. 다문화가정의 고부갈등을 보여주는 유명 TV 프로그램에서도 결혼이주한 동남아 여성에게 순종적이고 말 잘 듣는 고분고분한 이미지를 요구하며, 자신의 의견을 내보이거나 남편의 말에 토를 다는 행동을 할 경우 아직 보수적인 한국 문화에 길들여지지 않은 나쁜 며느리로 묘사된다(심지어 이 프로그램은 공영방송에서 제작되고 있다).
이러한 현실로 인해, 이 ‘혐오자살’이라는 소설은 소설로 남을 수 없으며, 혐오가 만연한 사회에 대한 고발문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국가에서는 인구 소실을 걱정할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으려고 노력해야 하고, 혐오와 차별에 대한 법적인 제재가 필요할 시점이지만 차별금지법 제정은 벌써 몇 년째 발이 묶여 있다. 누군가를 차별한다는 것이, 누군가를 혐오한다는 것이 부끄러워해야 하는 행동이 되어야 하는데 우리 사회는 점점 혐오를 공공연하게 드러내면서 스포츠화해서 즐기고 있는 분위기가 되어가고 있다. 누군가가 나와 다름을 용인하지 못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그것은 결국 본인들에게 돌아올 비수가 될 것이며, 이는 미래 사회에 커다란 빚이 되어 남을 것이다. 미래 사회까지 가지 않더라도, 혐오는 절대 당당하지 않으며 올바르지 않고 자랑스럽지 않다.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고 대한민국 헌법 제10조에 명시되어 있다. 하지만 과연, 현재의 대한민국이, 모든 국민이 가지는 기본적 인권을 보장할 의무를 제대로 지고 있는지, 백명지와 김준혁은, 혼혈과 같은 사회적 소수자들은 대한민국의 ‘국민’으로 ‘인정’되지 못하고 배척 받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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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진짜 진실’과 마주하는 시간
학과: 국어교육학과, 이름: 최*리, 선정연도: 2021
추천내용: 타인에 대한 혐오가 만연한 사회, 그 속에서 우리는 산다. 당장 오늘 아침에만 해도 그랬다. 습한 날씨 탓인지, 사람들로 붐비는 학교 순환버스를 타며 옆 사람과 옷깃만 스쳐도 인상을 쓰는 내 모습에 스스로 흠칫했다. 남을 향한 이러한 마음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얼마 전에 읽은 조영주 작가의 <혐오자살>은, 최근 이러한 내 상태를 간파하기라도 한 듯 섬뜩하게 다가왔다.
소설은 준혁이 1408호 남자에게 살해당하는 게 ‘전부’이지만 우리가 그 ‘진실’에 다다르기까지의 행로는 결코 단순하지 않다. 다양한 인물들의 시각에서 사건을 풀어가면서도 무엇보다 가해자의 입장까지 헤아리고 있는 것이 신선했다. 가해자는 왜 준혁을 살해한 것인지, 그 혐오의 원인을 작가는 추적하고 있다. 사람들도, 언론도 하나같이 피해자의 편에만 서 있지, 가해자의 목소리는 들으려 하지 않는다. 하지만 작가는 (물론 그 비중이 크지는 않지만) 가해자의 목소리를 끊임없이 들으려고 한다.
사건의 전말이 진실이라고 한다면 준혁이 괴롭힘을 당하다가 살해당했다는 것이 다일 테지만 우리는 인물들의 말을 통해 ‘진짜 진실’과 마주하게 된다. 어린 시절부터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온갖 차별을 받아야 했고 그것은 준혁이 서른 중반이라는 젊은 나이에 죽음을 맞는 순간까지도 꼬리표처럼 그의 뒤를 따라다녔다. 이처럼 다른 사람을 향한 편견과 혐오의 파편들이 보이지 않는 곳곳에 숨어 한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놓는 소설 속 이야기는, 그것이 소설이기만 한 것은 아니라서 더욱 소름끼친다. 오늘 아침에도 만원버스에서 날씨 핑계를 대가면서, 옆사람과 부딪혀 인상을 썼다고 고백한 나만 보더라도 말이다.
그러나 이런 모습은 비단 내게서만 보이는 것은 아닐 거라는 확신이 든다. 개인주의가 만연해지고 생태계의 약육강식의 체계를 인간계에도 적용하면서 비판해 온 목소리는 어제 오늘의 그것이 아니다. 특히‘나만 아니면 돼’라는 식의 사고가 2000년대 초반 어느 예능 프로그램에서 화제가 되면서 나만큼은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각의 구조가 대중에게 더욱 가깝게 다가온 점도 무시할 수 없다. 온라인에서 올바른 댓글문화를 이끌어가자는 공익광고가 늘고 ‘묻지마’ 범죄가 잇따라 보도되던 때를 떠올려보면 타인에 대한 혐오는 심각한 수준이다. 이처럼 다른 사람을 향한 증오심은 우리 사회 곳곳에 깊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책을 읽는 내내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보았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책을 효원인과 함께 읽고 싶은 이유는, 이 책은 단순 호러 영상물과는 ‘분명히’ 다르다는 데 있다. 준혁이 위층 남자에게 살해당한다는 ‘사실’그 뒤편에는 우리사회에 만연해 있는 불편한 ‘진짜 진실’이 숨어 있는데, 효원인들도 그것과 마주하게 되는 소중한 시간을 가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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