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도서관 독후감 공모전

2016.11.30

선정도서 15종 375권
참가대상 부산대학교 학부생(휴학생 포함)
참여방법 도서관 독후감 선정도서(1인 2책, 선착순)를 수령 후 자유롭게 독서하고 해당 도서의 독후감 제출(1인 1책 이상 필수)
참여기간 2016년 10월 17일 ~ 11월 20일
시상내역 총 8편(부산대 총장상, 총상금 120만원)
※ 본 사업은 ACE+의 예산을 지원받아 운영되었습니다.
우수 독후감 선정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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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 이름 학과 선정도서/독후감제목 보기
최우수 최*현 문헌정보학과 도서: 간송미술 36
독후감: 간송미술 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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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래된 나와의 만남
꼭 2년 반 전이다. 4월, 참 쨍쨍하고 날씨 좋던 그 봄날 나는 입대하였다. 그러나 문득 입대하기 전, 간송문화전 전시가 열린다고 여러 곳에서 안내를 받았다. 평소에 간송 전형필 선생의 사립 미술관인 보화각은 1년에 며칠 열지 않기에 늘 궁금증이 있었다. 그러던 중 보화각의 여러 작품을 한 번에 나눠서 공개한다는 소식을 듣고서, 동대문디자인플라자의 간송문화전 전시가 보고 싶었다. 그렇게 무언가에 이끌리듯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간송문화전을 살펴보고 왔다. 그러나 제일 기대하던 『단오풍정』은 하필 내가 입대한 이후에 전시를 한다는 것이었다! 영롱하던 여러 장의 그림 속에 끝내 보지 못했던 『단오풍정』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휴가를 나오고서야 비로소 운 좋게 다시 전시 대상이 된 『단오풍정』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기다리던 『단오풍정』을 보던, 참 길고 길지만 짧았던 순간을 기억한다. 그 기분과 순간, 그리고 나올 때의 기억이 좋았다. 그래서 늘 휴가 때마다 빼먹지 않고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 들렀다. 그리고 그 순간으로부터 2년이 흘렀다. 이번 “혼책남녀”행사를 통해 다시금 스쳐간 여러 그림과 마주할 수 있었다. 비록, 『단오풍정』은 『간송미술 36』 책에 실려 있지 않았지만, 그간 간송문화전을 꾸준히 다니며 본, 그러나 기억하지 못했던 스쳐간 여러 장의 그림을 다시 볼 수 있었다. 그 속의, 입대하기 전, 전시회를 기웃거리던 ‘오래된 나 자신’을 다시 한 번 만나면서.-『풍죽』, 낯선 그림 속 익숙함
책을 받아보고서 크게 책의 그림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그리고 이내 책을 처음부터 읽기는 했지만, 마음에 꼭 드는 그림이 몇 점 있었다. 그 중,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그림은 이정의 『풍죽』이다. 이 그림은 현장에서 보자마자 너무 놀란 그림이었다. 마치 진짜 그 자리에서 바람이 불 듯, 정말 생생했기 때문이다. 그 뒤로 이 그림에 대해서 잊고 있다가 다시 책을 통해서 만나니 참 반가웠다. 마치 강풍을 맞듯 아슬아슬하게 버티는 대나무, 분명 조선시대의 오래전 풍경이었을 것이다. 낯설지만 익숙했다. 산에 오르면 이런 풍경쯤은 늘 볼 수 있으니까. 하지만 이 풍경은 오래전이라서 낯설었다. 그리고 다시 가만히 그림을 보니, 얼마 전에 지나간 태풍도 생각나고 이리저리 쓰러져있던 불쌍한 나무도 생각이 났다. 아직도 음악관 앞에는 태풍에 쓰러져 이리 저리 기대어 있는 몇 그루의 나무가 있다. 가만히 기억을 되짚어보니, 당시 전시회에서 첨단 기술과 결합하여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듯 묘사한 영상도 생각이 났다. 음악이 나왔는지는 가물거리지만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LED 영상 속, 바람 부는 대간송미술 36 나무 숲이 떠올랐다. 다시 그림을 보니 바람 불며 흔들리던 그 그림이 생각났고, 오래간만에 이런 풍경을 보러 산에 가 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 참 갖고 싶었던 그림, 『황묘농접』
간송문화전을 다 관람하고 나오면 꼭 끝에는 각종 관련 도록과 상품을 파는 곳이 있었다. 『황묘농접』을 보고 옛 생각이 떠올랐다. 공책이었는지, 엽서였는지 인쇄된 그 예쁜 그림. 그리고 이 그림이 김홍도의 작품이라는 것을 안 순간 참 기묘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알고 있던 김홍도는 『씨름』뿐이었다. 그 당시에는 그저 스쳐지나가고, 그냥 ‘김홍도가 그렸구나…’라는 생각을 가지고 넘어갔나보다. 하지만 이번에 다시 이 그림을 보니, ‘아니, 이 그림이 김홍도 그림이라니!’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기존에 내가 알고 있던 김홍도의 화폭과 판이하게 달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만히 이 그림의 이곳저곳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따스한 색감과 고양이, 나비가 어우러진 구도… 고양이가 나비를 놀리는 것이란 뜻인데, 오히려 저자가 쓴 나비가 고양이를 놀리다라고 바꿔야 한다는 해설이 더 맞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무튼 따스한 색감과 그림의 섬세함이 마음에 들어서였을까, 그 날 이 그림을 보고서 공책이나 엽서가 그렇게 사고 싶었나보다. 문득, 『황묘농접』을 다시 보니 기념품을 사고 싶어서 주저하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리고 다음 장을 넘겨보니 변상벽의 『국정추묘』가 보였다. 똑같은 고양이라는 소재지만, 참 다른 느낌이었다. 이처럼 같은 소재라도 보는 사람에 따라 제각기 다른 방식으로 그림을 그려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 고요한 밤길을 걸어본 적이 언제였을까. 『마상청앵』
고등학교 3학년, 햇빛을 본 날이 참 적었다. 늘 적적한 밤거리는 이미 익숙해진지 오래였다. 『마상청앵』을 보니 예전 내 고3 시절이 떠올랐다. 선비는 말을 타고 걷던 중 나무 위 새의 지저귐에 나무 위를 쳐다본다. 나는 이런 낭만적 기억은 없지만, 문득 고등학교 3학년이 떠오른 이유는 이와 같을 것이다. 비록 말은 없었지만 늘 승용차가 내 옆을 지나갔고, 찾아보기 어려운 별도 있었으며 길가에는 고양이도 많이 있었다. 이 그림을 보면서 내 고3시절이 떠올랐고, 늦은 밤을 학생이 거닌 것은 오래 전이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이 그림, 선비가 나무 높이 새를 우러러 보고 있다. 나 역시 고3 시절 집에 갈 때, 길을 거닐면서 하늘을 물끄러미 본 기억이 있어서인지 더 공감되었다. 물론 이 그림처럼 적막하지도 않았고, 별이 보일만큼 낭만적인 하늘은 아니었다. 그저 옆은 도로였고 빛 공해에 하늘의 별은 찾아볼 수 없었지만. 다만 여기 그림을 보며, 해석이 더해지니 그림이 다르게 보였다. 선비가 하늘을 보는 줄로만 알았는데 새를 보는 것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동양화 속 인물은 시각을 전해주는 지시자 역할을 한다. 내가 선비의 시각에서 본 하늘은 어때 보였을지, 그 풍경은 어떨지 곰곰이 생각해보게 되었다.

– 길은 하나가 아니었구나
급한 마음에 늘 길은 오직 딱 하나 뿐이라고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다. 부끄럽지만 지금도 그 마음은 여전하다. 나 자신을 보채고 보채며 더 여유조차 주지 않던 나 자신의 모습… 책 곳곳에 간송 전형필 선생이 각 그림을 어떻게 가져오게 되었는지, 당시 물건의 가치를 지금 시대에 알맞게 설명하는 친절함 종종 살펴볼 수 있었다. 상상조차 되지 않을 가격이었다. 그리고 가히 미래를 엄청나게 멀리 내다본 해안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나라가 융성하고, 부강해지면 분명 문화에 대한 욕구가 샘솟을 것이다. 전형필 선생은 이런 식견을 가지고서 묵묵히 여러 문화재를 모았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 오늘날을 살아가는 나는 그 뛰어한 혜안 덕분에 이런 ‘호사’를 누릴 수 있었다. 분명 독립운동을 한, 나라를 생각한, 무수히 많은 선인들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방법으로 독립운동을 해왔다. 그러나 전형필 선생은 조금 다른 방식, 다른 길을 통해 독립운동을 하였다. 분명 어떤 것이 옳거나 우위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저 사람들은 걸어온 길이 달랐던 것이다. 이 간단하면서 복잡한 것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던 독립운동을 하고 나라를 생각한 사람뿐만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도 나라를 생각한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고 싶다.

– 해설이 꼭 필요할까?
이 책은 그림 해설서다. 저자가 분명 책 앞머리에 그림을 볼 때 외부적 지식은 방해가 된다고 했음에도, 이 책은 각종 그림을 설명한다. 그것이 때론 방해가 되기도 하였지만, 그림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기도 하였다. 저자의 말처럼 그림을 이해하는 데에는 한 가지 방법만 있는 것이 아니다. 내 마음대로 그림을 온전히 이해하고, 느끼며 받아들이면, 그 역시 그림을 즐기는 한 가지 방법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만 ‘그림 공부’가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림을 마주하고, 내가 살아온 대로 그림을 온전히 읽어내는 것은 분명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작가를 알고 그가 밟아온 궤적을 알면 그림이 더 큰 의미로 다가온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김홍도’하면 『씨름』만 떠올리는 것에서 벗어나, 더 많은 작품을 기억할 수 있게 되고 『씨름』은 단지 김홍도의 수많은 작품 중 유명한 한 가지 뿐이란 것도 알게 되었다. 내가 더 많은 것을 알고자 한다면, 이번에 읽은 해설서도 살펴보고, 스스로 알아가고자 공부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책을 덮으면서 들었던, 간송문화전 전시에서 끝끝내 맞추지 못했던, 옆의 그림 설명만으론 부족했던 몇 가지 그림이 온전히 다가왔다. 저자는 그림 해석과 해설이 꼭 필요하다고 하진 않았지만, 더 큰 그림을 보기 위해선 필요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도 만날, 수많은 그림이 참 기대가 되었다. 그리고 이 책 말고도 종종 전시회를 가기 전이나 다녀온 후 이 책과 같은 해설서를 챙겨봐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림 자체를 마주하는 과정과 시간도 소중하지만, 그림 이면에 있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보는 것 역시 재미있기 때문이다.

우수 배*인 영어영문학과 도서: 예술가의 지도
독후감: 예술가의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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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청년들은 요즘 한국을 헬조선으로 표현한다. 자신들을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 3포 세대(혹은 그 이상을 포기한 세대)로 명명하면서까지 이 시대의 한국 젊은이들은 취업에 목을 멘다. 그뿐만 아니라 각종 어학점수, 해외봉사경험, 특별한 이력, 심지어는 유렵 배낭여행도 취업을 위한 결정적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스펙 쌓기에 여념이 없다. 그러한 스펙쌓기를 뒤로한 채 학생들은 자신의 자아를 찾기 위해 책을 보고 좋아하는 일을 한다든지 자신의 친구를 만나 수다를 떤다든지 하기 보다는 누군가는 책과 강연을 통해 꿈을 찾고 견뎌라, 자신의 바라는 바를 위해 더욱 노력하라는 말로 지친 청년들을 위로하려 하지만, 그들의 말은 잠시 마음의 평안함을 느끼게 해주지만 진짜 현실을 바꾸어 주지 못하는 또 다른 소주 한 잔으로 작용하고 만다. 이러한 말들이 한 때는 힐링을 화두로 이 시대 지쳐있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치유하는 효과를 나타내는 듯 했으나, 이제는 그 본 의미와는 달리 힐링이라는 단어는 현실에 지쳐 자신의 삶의 여유조차 생각할 수 없는 청년들이 마음에 허황된 희망만을 불어넣고 화를 더욱 돋우는 부작용을 초래하고 있다.

1980년대 본격적으로 레이건 미국 대통령과 대처 영국 수상에 의해 시작된 신자유주의 체제 하에 많은 사람들은 조직이 아닌 개인으로 파편화되었고, 그 개개인조차 극심한 경쟁상태에 놓여 스스로를 잃어가고 있다. 사회, 특히 권력을 쥔 국가나 기업과 같은 세력은 본질적인 구조적 문제점을 개선하기보다는 개개인의 역량이 부족한 것을 비판하며 이를 키울 것을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사회에서 청년들은
어떤 것을 기대하고 있을까?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기를 역사는 반복된다고 한다. 각각의 시대와, 그 형태, 제도, 사건, 사람들은 똑같은 것이 아무것도 없지만, 문제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때 드러나는 실상과 모습은 과거와 현재를 아우르는 양상을 띤다. 그래서 오늘날 현재 일어난 역사를 통해 현재를 바라보며 좋은 것은 취하고 또 바로 잡아야할 것은 바로잡아야 한다는 등의 이유로 역사공부의 중요성과 역사책 독서하기 등이 중요시되고 있다. 요즈음 한국사 열풍으로 몇 달 간 한국사 관련책이 계속해서 잘팔리는 책 순위에 오르고 있는 사실이 이를 잘 대변해주고 있다. 그런데 생각해볼 점은 모든 역사가 한 시대와 현실에 딱 들어 맞다기보다는 특정한 시대의 일과 특정한 사건이 현실의 그것들과 겹치는 부분이 많다는 것이다. 이는 과거의 사건과 기록들이 미래를 염두하여 의도적으로 발생하지 않은 것은 물론이거니와, 우연이라는 0과 1이라는 숫자들이 한데 모여야지 이를 역사라는 거대한 소프트웨어라고 부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전에 일어난 역사적인 수많은 사건들을 통해 현재를 보는 시각을 바른 방향으로 취사선택할 수 있는 힘을 기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우리는 주어진 현실에 대해 치밀하게 고민해야 한다.

필자가 읽은 ‘예술가의 지도’라는 책은 과거 특정한 한 시대를 중심으로 많은 예술가들이 겪은 이야기를 서술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책에 주로 기술된 7명의 여성 예술가들은 모두 벨 에포(Belleépoque)라 불리는 시대와 관련이 있다. 벨 에포크는 많은 나라 중에서도 특히 프랑스와 관련이 있는 용어로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반 산업혁명으로 인한 경제적 성장기를 일컫는 말이다. 주목할만한 점은 프랑스의 수도 파리가 경제의 중심지 역할을 하기 보다는 전 세계 예술가들이 집중적으로 몰려든 집결지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책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 시기 파리는 예술에 죽고 살며 예술이 생활이 되며 생활이 곧 예술이 되는 그러한 곳이었다. 무용가, 소설가, 화가 등 직업과 주 분야를 막론하고 모든 영역의 예술인들이 파리에 모여 자신의 예술관에 대해 고민하고 작품 창작활동에 몰두했다.

그런데, 벨 에포크라는 말이 예술가들의 잠재해있던 재능들이 폭발하는 시기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실은 시대 분위기가 늘 훈훈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물론 기존의 사회와는 달리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향한 혁명적 변화가 일어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산업의 발전으로 경제적인 가치가 이전보다 더욱 중시되면서 자본의 논리가 세상을 점차 지배하기 시작했던 시대 또한 바로 이 벨 에포크였던 것이다. 이에 따라 당시 실용적인 삶이 지배하는 미국의 예술과는 달리 좀 더 고상하고 예술을 위한 예술이 무엇인지 고민했던 프랑스에 있던 예술가들은 경제적 논리에 의해 다루어질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이 추구했던 예술은 돈이 되지 않거나, 혹은 기존의 사회가 지향하지 않던 바를 행하려 했기에 – 예를 들어 무상 교육 시스템을 가지고 러시아에서 무용 학원을 운영했던 이사도라 던컨처럼 – 이윤을 내기는커녕 지출만 너무 컸기에 철저히 무시당했다. 또한, 책의 나오는 예술가들은 우리 흔히 생각하는 정상적인 가정을 유지하기보다는 이혼과 재혼을 밥 먹듯 하는 인물들이었고 그들의 정신세계 역시 건강한 사람들 찾는 것이 매우 힘들 정도였다. 신기한 것은 이 시기의 예술가들을 보면 대부분이 언급하면 우리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적어도 짧은 외마디로 탄식을 자아내는 훌륭한 인물들이 많다는 것이다. 피카소, 스콧 피츠제럴드, 헤밍웨이는 물론, 니체, 리스트, 베토벤, 그리고 프로이트 같은 사람들도 바로 이 시대의 사람들이다. 무엇이 이 시대 예술을 이토록 풍성하게 하여 오늘날까지도 많은 영향력을 미치며 이 책을 통해 무엇을 시사하고자 하는 걸까?
그 핵심은 바로 ‘관계’에 있다. 책 서두에 나타나는 실제 예술가의 지도를 보면 우리가 아는 대부분의 예술가들은 매우 복잡하다. 오늘날의 사회가 소셜 미디어를 통해서 수많은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는 것과 매우 흡사할 정도로 그들의 지도는 실타래처럼 얽혀있다. 그런데 중요한 점은 이 지도를 보면 예술가들끼리 매우 친밀하고 가까운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는 점이다. 거트루드 스타인의 살롱에서 헤밍웨이와 피츠제럴드가 함께 모여 사교모임을 가질 때 피카소도 참여했고, 톨스토이를 만나러 가는 라이너 마리아 릴케를 기차에서 만난 어린 소년이 훗날 ‘닥터 지바고’라는 소설을 집필한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였으며, 에드가 엘랜 포의 영향을 받아 ‘검은 고양이’라는 카바레에서 연주하던 에릭 사티의 연인이 르누아르의 여러 작품의 대상이 된 쉬잔 발라동이라는 사실은 직접적이면서도 간접적으로, 그리고 복잡하면서도 끈끈한 그들만의 관계가 잘 구축되어 있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이러한 끈끈한 관계는 현실적인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서로 노력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추구하고자 하는 바를 예술로써 승화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바로 이 관계 덕분에 우리는 벨 에포크 시대를 경제적인 중흥기보다는 예술의 부흥기로 기억하고 있고 또 기억하려 하는지도 모른다. 저자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벨 에포크는 전쟁이 없는 태평성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사람을 이끌어주고 그 관계를 통해 서로가 아름답게 개화되던 시대를 의미했다.

이 책을 읽고 다시 한 번 내가 살고 있는 2016년을 바라보게 되었다. 여전히 청년들은 취업난에 신음하고 있고, 부모님 세대의 경제적인 간극도 계속해서 커질 뿐만 아니라 그들 역시 노동 유연화, 정년퇴직이라는 벽에 부딪혀 또 다른 어려움에 마주하고 있다. 특히 수많은 2, 30대는 열심히 준비해도 스펙이 좋은 경쟁자에 밀려 취업이 되지 않는 현실을 부인하며 공무원 쪽으로 그 방향을 틀고 있다. 그러나, 이들 대부분 역시 모두가 공무원이 될 수 없다는 현실을 하는 수 없이 인정하면서도 그저 또 다른 경쟁사회로 밀려난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는 사실에 다시 한 번 절망하고 만다. 그들의 인생을 바라보며 이를 대처하고 극복할 수 있는 실제적인 대안을 궁리하는 정치인은 찾아볼 수 없고, 시대의 잘못된 흐름을 비판하는 어른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라고 한국의 젊은이들은 체념하고 있다.

필자가 이 책을 통해 관계에 대해 다시 생각해본 것은 이러한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경쟁화된 사회에서, 비정상적인 관행이 정상이 되어버린 사회에서 개개인은 철저히 자신만의 세상을 구축한 채 이 세상을 살아가기 때문이다. 무서운 점은 이러한 생각이 우리가 사회에 대해 비판하는 모든 것들이 옳은 것이라 여기기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즉, 흔히들 얘기하는 노오력에 대해서는 비판할 수 있어야 하지만 정작 우리에게 진짜 필요한 부모님의 진심어린 일침들 – 예를 들어 친구들과 깊은 관계를 만들고, 남을 먼저 생각하며 서로 돕는 사회를 만들라 등의 충고들 – 역시 등한시할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점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현실을 이렇게 만든 사회에 대해서 고민하는 한편 우리가 이 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사람으로서도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이 더 나은 사회를 위해 개인이 할 바를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 필자가 현재 생각하는 바다. 물론 같은 청춘으로서 관계에 대해 목소리를 내는 것은 참 바보스러운 것일 수 있다. 아르바이트로, 학점 만들기로, 스펙 쌓기로, 취업난으로 인해 고통받는 젊은 세대에 깊은 관계를 구축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뿐더러 사치스러운 말로 들린다는 것을 너무나도 공감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후손들에게 주어진 역사를 통해 우리는 현실을 직시해야할 필요성이 있다. 비정상을 정상으로 바꾸는 것은 정상적인 일이 정상적인 것으로 인정받도록 끊임없이 노력할 때
발생하기 때문이다. 벨 에포크 시대의 예술가들이 힘든 상황 속에서도 서로 간의 관계를 바탕으로 그들의 사상으로 녹여낸 수많은 예술작품들이 오늘날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듯이, 현재 자본주의 논리에 휘둘리는 수많은 사람들이 관계, 혹은 관계와 같은 인간들이 살아가는 사회에서 꼭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그 무언가를 끊임없이 지키고, 보존하고, 유지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하지 않을까? 사실 이 책을 여럿 사람에게 딱히 추천하고 싶지는 않다. 내용이 반복되는 부분이 많을뿐더러 오타도 제법 있고, 또한 작가의 어법 자체가 그리 매력적이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잊고 살았던 관계라는 소중한 가치 하나를 ‘예술가의 지도’에서 언급하고 있다. 필자에게도 그랬던 것처럼 이러한 소중한 가치 하나가 여유가 없는 상황 속에서도 불투명한 앞날을 위해 오늘도 도서관에 틀어박혀 취업을 준비하는 청춘을 위한, 그리고 이러한 부조리한 세상에서 소중한 가치들을 계속해서 마음에 품고 살며 이를 고민하는 청춘들을 위한 따갑지 않은 따뜻하고 따사로운 일침이 되었으면 좋겠다.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술가들이 서로를 돕고 함께 발전하며 거대한 물결을 이루었다는 것”처럼 말이다.

우수 박*희 사회학과 도서: 내 인생에 너만 없었다면
독후감: 도망칠 수 있는 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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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에 관계가 있었다. 사회적인 동물인 인간의 생은 필연적으로 타인과의 교류를 동반한다. 하지만 사람을 사귀고 만나는 과정이 항상 긍정적일 수는 없다. 힘들고 불편하며 때론 어색하고 괴로운 인연을 조우하지 않은 사람이 과연 세상에 존재나 할까. 우리는 남들과 부대끼면서 서로를 받아들이는 사회에서 살고 있다. 이곳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나와 다른 남을 이해할 수 있는 가슴과 머리를 가져야 한다.

하지만 성격은 인간이 가진 본래적 성향과 각자의 특수한 상황과 결부되어 형성되는 주체성이다. 당연히 개개인의 성격은 모두 다를 수밖에 없고 타인들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어렵다. 다른 것을 이해하고 인정하는 것보다 잘못되었다며 틀리다고 하는 것이 더욱 편하기 때문에 인간은 종종 타인을 배제하기도 한다. 이성과 감정의 공간 밑에서부터 장벽을 치고 자신과의 연을 맺으려는 사람들의 접근을 막는 것이다.

‘힘든 성격’의 정의 자체가 이러한 구조 내에서만 유효하다. 사실 존재론적으로 보자면 개인의 입장에서 힘든 성격 따위는 없다. 실존하기 위해 실존하는 개인에게 그들의 성격의 어떻고를 비난할 수 있는 자격은 그 누구도 가지지 못한다. 오직 인간은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가치가 넘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관계로 시작하여 관계로 끝나는 삶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때문에, 힘든 성격은 인간의 여정 도처에 위치하여 기습을 가한다. 주위를 괴롭히고 지치게 만드는 이 폭력적인 존재를 인간은 피할 수 없다.

그런데 과연 힘든 성격이란 무엇일까? 사회를 지배하는 패러다임에 따라 다른 양상을 보이겠지만 공통적인 분모는 바로 관계에 있다. 사회 내에서 관계 맺기에 어려움을 겪게 만드는 것이야말로 시대를 아우르는 힘든 성격이라고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 시대가 흘러 바뀌는 이데올로기와는 달리 관계는 태초부터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 내가 정말 좋아하는 표현이지만 상황에 따라서는 최악의 말이 되기도 한다. 특히 복잡한 인간관계에 관해서라면 더욱 그렇다. 우리는 힘들고 피곤한 관계만큼은 최대한 피하고 싶어한다. 타자와의 만남이 극성을 이루는 현대 사회에서 사람을 가리고 가려서 자신이 선호하는 관계만을 맺고자 하는 것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욕구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인연을 끊기가 무척이나 힘든 관계는 항상 존재해 왔기 때문이다. 인간사의 탄생 이래로 가족이 그 대표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고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개인의 생존이 걸린 직장 내의 관계가 그렇다. 만약 개인이 어떤 사람과의 관계를 청산하고 살아가기가 무척이나 힘들지만, 그렇다고 끊지 않고 살아가기에도 엄청 괴로운 상황이라고 생각하는 딜레마에 놓여있다고 치자. 우리는 이 사람을 힘든 성격에 시달리거나 혹은 힘든 관계에 놓여있다고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내 인생에 너만 없었다면’은 이러한 힘든 성격과 관계를 간추려 정리하고 독자에게 설명해주고 있다. 저자는 자신을 힘들게 하는 사람이 있고 관계가 피할 수 있는 것 의 종류가 아니라면 우선적으로 그 사람을 이해해야한다고 말한다. 사람 행동과 의식 바탕에 깔려있는 가치관을 파악하고, 그에게 맞는 행동 방식으로 힘든 상황을 바꾸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 인간 사이에 승리라고 부를 것은 없지만 싸움은 있다. 우리는 인간의 투쟁적인 관계에서 피해를 보기를 원치 않는다. 결국 타인을 알고 나를 알아야 서로를 좀먹는 힘든 관계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성격을 파악하는 정확한 기준은 없다. 대략적으로 유형을 구분할 뿐이지 정답은 아니라고 설명한다. 성격은 복합적으로 나타나는 경향도 존재하며 상황에 따른 일시적인 상태인지 혹은 그 사람의 특성인지를 구분하는 것에도 어려움을 겪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을 지배하는 특성이 살아가는 모든 상황에도 나타날 때, 우리는 비로소 그것을 성격이라고 부를 수 있다.

힘든 성격에는 중요한 특징이 있다. 행동에 밑바탕이 되는 성격이 극단을 향해 달려간다는 점이다. 실제로 모든 사람은 공통된 성격과 감정들을 가지고 있다. 우울함과 기쁨, 경계심과 분노, 성취욕과 과시욕 등 인간이기에 소유하고 있는 기본적인 상태들이 있는 것이다. 다만, 사람에 따라 정도의 개인차가 존재하고 표현하는 방식과 받아들이는 태도 등이 다를 뿐이다. 힘든 성격의 문제는 일련의 상태들이 심각하게 편향되어 파멸적인 상황으로 이끄는 것이다. 기뻐해야할 상황에서 의심하거나 우울한 감정을 불러온다. 때로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일에 집착하여 불안한 상태를 벗어나지 못한다. 자신뿐만 아니라 주위를 피폐하게 만들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한다. 그들은 정도를 벗어나 갓길에서 난폭하게 주행하는 음주운전자의 상태와 비슷하다.

책에서는 힘든 성격의 유형을 소개하며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할 것을 소개한다. 그 방법은 성격에 따라 다르겠지만 최종적인 방향은 관계의 개선이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우리는 그들과 신뢰를 공유해야 한다. 믿을만한 사람이 되어야지만 무엇을 하든 반감이 덜하고 힘든 유형의 사람들이 마음을 열고 우리를 받아들이기 더욱 쉽기 때문이다. 결국 관계는 신뢰를 토대로 쌓이는 건물과 같다. 기본 골격이 튼튼해야 건물이 쉽게 무너지지 않는 것처럼 우선 신뢰가 굳건히 쌓여야지만 우리의 관계는 견고하고 안정한 상태로 갈 수 있다. 그런 다음에서야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이 커지고 적절한 행동을 취할 수 있다. 물론 이것은 피할 수 없는 관계일 때에만 한정되는 해답이다. 피할 수 있는 힘든 관계는 가능하면 피하는 것이 좋다. 구태여 자신의 가치를 낭비하는 관계를 지속할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나의 생을 되돌아보면, 나는 피할 수 없는 관계가 힘든 경우였다. 그 분을 이해할 수 없었고 받아들이기도 버거웠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것이라는 생각은 나의 안일함에서 비롯된 착각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지만 상황을 돌리기에는 늦었다고 생각했다. 조금씩 이해하기는 했지만 관계를 개선할 의지는 생기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그저 피하고 싶었을 뿐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책의 제목처럼 그저 그 사람만 없었다면… 이라고 의식 깊은 곳에서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이 책을 보고 싶었던 이유는 나의 경험과 무관하지 않았다. 처음엔 단순히 처세술을 배우기 위한 수단과 정신분석에 관심이 많았던 나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책을 읽으면서 생각이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책에서 나오는 유형을 나의 상황과 접목시키기에는 딱 들어맞는 답이 없었다. 대신에, 나는 나를 힘들게 했던 그 분의 믿음이 어떠한 종류의 것인지 일부 알게 되었고 나의 행동이 잘못된 관계를 더욱 악화시켰던 사실 역시 깨닫게 되었다. 고단한 관계는 오로지 그 분의 잘못만이 아니었다. 관계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던 나 역시 힘든 상태에 책임이 있었던 것이었다.

항상 힘겨운 관계를 생각하며 책을 읽었던 것은 아니다. 저자가 책의 서두에서 밝혔듯이 타인뿐만 아니라 스스로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기대도 있었다. 과연 나는 어떤 믿음을 기준으로 삼으며 타인을 대해 왔는가. 그리고 그것이 내가 생각했던 나의 모습이 맞는지에 대해 고찰하기 시작했다. 자가진단을 하면서 퍼즐을 맞추어본 결과 나의 예상과 크게 빗겨가지는 않았다. 하지만 나조차도 모르고 지냈던 나를 움직이는 방어기제도 일부 파악할 수 있었다. 본능적으로 거부감이 들었던 그 대목을 보면서 나는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피하고 싶고 덮어두고 싶었던 과거의 향기가 무의식에서부터 피어오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타인과의 관계를 향한 질문은 다시 나에게로 돌아왔다. 내 자신이 힘든 성격이 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나는 사회에서 정상이라고 판명되는, 감정과 상태들을 어떻게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이는 곧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로 귀결되고 있었다. 책을 관통하는 주제였던 관계에 대한 걱정은 실존에 대한 고민과 맥락을 같이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회로부터 그리고 스스로에게로부터 개인은 소외당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나와 타인 혹은 나와 나의 관계에서 우리는 홀로 버려진 상태로 존재함을 두려워하고 불안해한다. 이것은 실존주의가 인간을 이해하는 방법의 첫걸음이다.

실존주의는 불안과 초조함을 당연하게 여긴다. 존재의 근원에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하고 구원을 모색하는 인간에게 영원한 안식과 평온은 불가능한 것이다. 허무주의에 빠지는 대신에 실존주의는 삶이 끝날 때까지 불안정함을 받아들이고 구원을 쟁취하는 방법을 모색하라고 주장한다. 인간의 생은 구원을 얻기 위한 투쟁의 연속인 까닭에 도착지는 없다. 하지만 구원의 장소에 도달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과정이야말로 실존하는 인간이 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다. 한마디로 인간은 최선을 다해 살아야하는 것이다.

나 역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최선을 다해 삶을 살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고귀하고 숭고한 삶을 사람이야말로 행복함을 만끽할 줄 아는 여유를 가지는 것이 틀림없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는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이면서 저절로 경건해졌다. 나는 가치를 매길 수 없이 흘러가고 있는 일 분 일 초의 소중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가. 그저 흘러가는 대로 살았던 것은 아닌가.

하지만 인간은 간사해서 자신을 속이는 것에 능숙하다. 나는 여전히 자기중심적이고 그분과의 교류를 원치 않는다. 생각의 변화가 조금 일어났다고 하더라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다. 여전히 나는 피할 수 없는 관계였던 것을 원망하고, 피할 수 있는 관계로의 전환을 꿈꾼다. 가슴으로는 받아들였지만 머리는 아직 거부감을 표시하고 있는 것이다. 모두들 나중에 후회한다고는 하지만 내가 소유한 시간은 나와 내가 아끼는 주위 사람들에게 할애하기도 바쁜 실정이기에 망설임은 없다. 죄를 미워하되 인간은 미워하지 말라고 했던가. 이 말을 이해는 하되 행하기에는 아직 역부족이었다. 나는 성인군자의 길을 걸으며 구원을 추구하는 것은 사양하고 싶다.

어쩌면 나도 누군가에게는 힘든 성격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언젠가 타인을 고통스럽게 하는 사람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자기반성을 통해 과거를 되돌아보지만 그것이 나의 아집에 갇혀 타인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는 추측도 충분히 가능하다. 하지만 나는 인간에게 완벽한 성격과 관계는 없다고 확신한다. 불완전한 인간이기에 스스로와 혹은 타인과의 만남에서 불안에 떨며 고통스러워하는 과정을 겪는다. 때문에 구원이라는 개념이 나타났다. 각자가 추구하는 자신과 관계의 이상향을 목표로 힘껏 달려가는 것이다.

구원을 얻으려는 방법은 모두가 다르다. 다만 힘든 관계에 놓여있는 사람들일수록 조금 더 자기중심적인 방향으로 애를 쓰는 것이 좋아 보인다. 지나치면 독이 되지만 힘든 상황에서 자기애는 삶의 의지를 끌어올리는 역할을 해주기 때문이다. 이는 나의 과거 경험에서 비롯된 현재의 나를 돌이켜본 결과이기도 하다. 나는 나만의 방식으로 구원을 추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 결과는 타인에게 해를 가하지 않는 이상 문제가 될 것은 없다. 어차피 책임은 실존하는 각자가 지는 것이다. 구원을 성취하는 방식에 비난은 끼어들 여지가 없다.

남과 더불어 사는 것이 강조되는 사회지만 그럴수록 스스로에게도 관심을 가지고 집중해야 한다. 건강한 실존주의적 사고는 건강한 성격으로, 건강한 관계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니체가 말하길, 살아야 하는 이유를 아는 사람은 무엇이든 견딜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실존의 에너지가 힘든 상태를 견디는 것에만 쓰이길 바라지 않는다. 피할 수 없는 힘든 관계를 피할 수 있는 관계로 바꾸는 것도 나쁜 생각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힘들면 도망치라는 말은 나약하고 비관적인 말이 아니라 오히려 구원에 가까워지려고 노력하는 용기 가득한 안식의 위로이다.

장려 천*정 사회학과 도서: 집에 들어온 인문학
독후감: 인문학을 통해 읽은 나의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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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책남녀’ 공모전 대상도서 목록 중에서 ‘집에 들어온 인문학’이라는 책을 선택한 이유는 단지 ‘인문학’이라는 단어 하나 때문이었다. 나는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문송합니다(문과라서 죄송합니다)’, ‘인구론(인문계 졸업생의 90%가 논다)’과 같은 말들을 접하게 되었다. 사회학도인 나에게 이런 말들은 그저 웃어넘길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대학에 입학하고 얼마 안 된 1학년 때에는 다른 대학의 사회학과가 취업률을 제고시키겠다는 이유로 통폐합 되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내 선택으로 사회학과에 진학하게 된 것이었지만, 이런 말들을 들었을 때에는 내가 한 선택이 잘한 결정이었는지, 청년 실업률이 사상 최고치를 기록하는 이 시기에 사회학을 공부하겠다는 것은 무모한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뉴스만 보면 등장하는 ‘인문학의 위기’, ‘실업률 사상 최대’라는 말들은 점차 전공 공부에 흥미를 잃게 만들었고, 그 시간에 자격증을 따거나 토익 공부를 하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이런 이유로 한 동안 토익 공부, 자격증 따기, 대외활동 참가 등에 빠져있던 나였지만, 최근에 나는 다시 사회학을 비롯한 인문학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나보다 더 높은 토익 점수, 더 높은 학점, 더 많은 자격증을 가지고 있는 선배들도 줄줄이 취업에 실패하는 것을 보았다. 토익, 자격증이 해답이 아니었다. 더 이상 뭐를 더 준비해야 되는지 갈피를 못 잡고 있던 때에 인문학은 나에게 약간의 해답이 되어주었다. 인문학을 통해 내가 지금 이렇게 우왕좌왕 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 별다른 일이 없는데도 항상 불안한 이유가 무엇인지, 이제는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지도 잘 판단이 안서는 이유는 또 무엇인지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했다.

‘집에 들어온 인문학’은 사람과 세상이 담긴 공간, 집에 대한 인문학적 해석을 시도한 책이었다. 내가 하루하루 거쳐 가는 공간들에 대한 인문학적 해석을 보면서 깊이 공감하게 되었고, 나를 둘러싼 공간들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배울 수 있었다.

자취를 하고 있는 나에게 가장 공감이 되었던 부분은 역시 청년들의 주거 공간에 대한 해석이었다. 나는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대학을 다니게 되어 자취방을 구할 수밖에 없었는데, 방을 구하는 과정에서 정말 많은 스트레스와 부담을 겪은 기억이 난다. 또 방을 구했다고 해서, 주거공간에 대한 스트레스와 부담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대학에 다니고 있는 3년 동안 지금 지내고 있는 방을 포함해 세 군데 방에서 생활해왔다. 첫 번째 방은 지금까지의 방 중에 가장 넓고 깨끗했으나 월세가 너무 비싸 생활비가 빠듯했다. 두 번째 방은 첫 번째 방보다 훨씬 싼 방이었으나, 그 방에서 지낸 1년간은 나에게 너무 힘든 시간이었다. 수시로 방 안에 들어온 도마뱀, 습기, 곰팡이로 인해 늘 스트레스였고, 여름엔 덥고 겨울엔 추웠으며, 보일러는 제대로 가동되지 않아 가스요금은 많이 나오면서도 겨울 내내 벌벌 떨며 지내야 했다. 두 번째 방의 계약 기간이 끝나고 새로운 방을 구할 때에는 기필코 지금 방의 월세와 비슷하면서도 사람이 살 만 한 방을 구하겠다는 생각으로 몇날며칠을 발품을 팔았던 기억이 난다.

두 번째 방에서 세 번째 방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정말 많은 경험을 했고 많은 생각을 했다. 부동산 업자가 내가 제시한 가격으로 구할 수 있는 정말 좋은 방이라며 보여줬던 방 중 하나는 침대와, 금방이라도 쓰러질듯 한 철제책상이 들어가 있었는데 약간의 가구를 제외한 공간에는 겨우 사람 하나 정도 서있을만한 공간밖에 없었다. 그 방을 보여주며 괜찮은 방이라 말하는 부동산 업자에게 나는 알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또 다른 방의 주인 아주머니는 본인의 건물처럼 잘 지어진 건물이 없다고 했다. 부산대 앞 원룸 중에 불법 건축이 안 된 방이 없는데, 자신의 건물은 그런 건물들에 비해 건축법을 잘 지켜서 세웠다고 했다. 건축법 지키는 건 당연한 건데 그것을 왜 자랑처럼 말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런 과정을 거쳐 지금의 방에 이사를 다 끝냈던 날 여러 가지 생각을 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것이 집인데, 방 하나 구하는데 왜 이렇게 많은 부담과 노력을 들여야 하는지, 나보다 더 살림살이가 빠듯한 친구들은 어쩌란 말인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과 동시에 든 또 다른 생각은 수요가 공급에 비해 많으니 월세가 비싼 건 어쩔 수 없는 일일지도 모른다는 것이었고, 형편이 안 되면 형편에 맞게 소비해야지 불평하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집에 들어온 인문학’에서는 지금 내가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 원룸에 대한 역사적 과정에 대해 말해주었다. 우리나라에서 주택을 공급하는 최대 주체인 국가와 대형 건설사는 오로지 아파트 건설에만 매진했고, 단독주택은 점차 일부 중산층이 건축가에게 직접 의뢰해 짓는 고급 주택이 되었다고 말했다. 이러한 틈바구니에서 이른바 ‘집 장사’라 불리는 개인사업자들이 지어 팔았던 주택이 바로 다가구․다세대․연립주택이었다. 수요는 많고 공급은 부족한 상황에서 영세한 개인이 급히 지어 팔았던 주택이고, 그러다 보니 ‘날림 공사’가 적지 않다고 했다. 그리고 이렇게 지어진 건물에 대학에 진학하거나 취직을 하거나 갓 결혼한 신혼부부들이 들어서는 것이었다.

게다가 요즘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대학을 가고, 취직을 준비하는 기간이 길어진데다, 취직을 하고도 결혼을 늦추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1인 가구의 수가 급격히 증가하고 있는 추세이다. 이런 상황 때문에 앞서 말한 ‘날림공사’로 지어진 건물들에 대한 수요도 훨씬 많아지고 많은 젊은이들이 고시원, 원룸, 오피스텔 등지로 내몰리고 있는 것이었다. 청년들이 장기간 실업 상태에 놓이면서 찾는 숙소, 실직이나 이혼 등으로 혼자가 된 사람이 우선 찾는 숙소 그것이 오늘날의 고시원이고 원룸인 것이다.

이 책에서는 또한 청년들 사이의 경제적 계급이 숙소를 통해 드러나게 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반지하방, 옥탑방 등에 사는 청년들은 오피스텔에서 혼자 사는 부유한 청년들에게 열등감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책을 통해 나에게 정말 많은 스트레스를 안겼던 원룸 방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 만들어졌는지를 알게 되었고, 청년들의 주거 공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해 보게 되었다. 국가와 대형 건설사들이 제공한 주택이 아파트에 집중되어 있었고, 영세한 개인들이 ‘날림공사’로 지은 것이 지금의 고시원과 원룸이라면, 이제라도 국가가 젊은 세대를 위한 건물을 지어서 제공하면 될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날림공사를 방지하기 위한 규제도 만들어질 필요가 있으며, 건물 시공사에서 제대로 규제를 지키는지를 감독할 수 있는 행정적 방안도 마련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세 번째 방의 이사를 끝내고 생각했던 것처럼 방에 대한 수요가 높으니 월세가 올라가는 것이 당연하고 형편에 맞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 일견 타당한 부분이 있을지라도, 애초에 주택공급의 역사가 이런 식으로 이루어져 왔던 것이라면 청년층에게 온전히 문제의 부담을 지우는 것이 옳지 못하다는 생각이 확고해졌다.

청년층의 주거문제는 높은 비용 부담과 열악한 환경 그 자체도 문제이지만, 이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책에서 언급된 것처럼 결혼, 출산 등 생애주기의 중요한 부분까지 포기하게 만드는 데 있다. 또 글쓴이가 주거환경이 청년들에게 열등감을 유발한다고 말했던 것처럼, 나 역시 자취방을 구하는 과정에서 오피스텔이나, 부모님이 마련해준 아파트에서 자취 생활을 하는 친구들을 보며 열등감까지는 아닐지라도 부러움을 느낀 적이 있다. 글쓴이의 결론처럼 1~2인 가구에게 필요한 고시원, 오피스텔, 원룸 등 ‘작은 집’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절실하게 들었다.

다음으로 책에서 인상 깊었던 부분은 카페에 대한 글쓴이의 견해였다. 글쓴이에 따르면 카페가 생겨난 이유는 커피 수요층 자체가 늘어난 점, 저렴한 커피를 선호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있는 점, 취업난에 시달리는 청년층과 은퇴한 장년층의 사업으로 카페 운영이 인기를 얻고 있는 점 등이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카페 인기의 가장 중요한 이유는 ‘열악한 주거 환경’이었다.

우리 주변 풍경을 살펴보면 대학가의 생활도로는 물론 주택가의 골목길에도 어김없이 조그만 카페가 들어서 있다. 카페 이용자들은 주로 혼자 앉아 책을 읽거나, 인터넷 서핑을 하거나, 공부를 하고 있다. 예전 같으면 집에서 했을 일을 굳이 집 밖으로 나와 카페에서 하는 이유는 점점 열악하고 협소해지는 주택 문제의 영향이 크다는 것이 글쓴이의 견해였다.

4~5인 가구가 일반적이었던 과거와 달리 현재는 1~2인 가구가 과반을 차지하면서 가구당 주택 면적이 차츰 작아지게 되었다. 좁고 답답한 곳에서 혼자 살다 보니 하루 중 잠시라도 햇빛이 잘 드는 넓고 쾌적한 곳에서, 사소한 일일지라도 사람들과 어울려 함께 하고 싶어진다는 것이다. 책에서는 카페가 각종 음료, 간식을 파는 음식점 같이 보이지만 동시에 공간을 임대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카페에 대한 글쓴이의 위와 같은 견해는 나에게 꽤 신선한 충격이었다. 나도 지금까지 카페를 즐겨 찾으면서 내가 왜 카페를 방문하게 되는지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글쓴이의 견해를 보고 있자니 정말 나에게 딱 들어맞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역시 주말에 혼자 있을 때는 가방에 책 한 권을 넣고 자취방 근처에 있는 카페에 종종 간다. 카페를 가는 것과 내가 생활하는 공간 사이의 연관성에 대해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책을 읽고 내가 카페를 가는 이유를 생각해보니 정말로 공간의 영향이 큰 것 같았다. 지금 생각해 보니 가족들과 함께 아파트에서 시간을 보낼 때는 카페에 갈려는 생각이 들었던 적이 없었고, 시간이 나면 카페에 가기보다는 집에서 나의 일상적 활동들을 했었다. 하지만 자취방에 있을 때면 유독 카페 방문이 잦아졌는데, 답답한 공간에서 벗어나겠다는 생각이 무의식적으로 들었던 것이다.

언뜻, 카페에 대해 생각해보면 커피 한잔, 책 한권과 함께 낭만적 공간이라는 생각이 든다. 친구 혹은 가족과 함께 수다를 떠는 공간, 잠깐의 휴식을 취하는 공간 등 카페라는 공간은 일반적으로 우리에게 긍정적 이미지로 더 강하게 다가오는 것 같다. 하지만 이런 카페의 이미지가 만들어 질 수 있었던 것은 오히려 카페 밖의 공간과 일상이 너무 고단하기 때문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시내에 즐비한 카페를 들여다보면 낭만보다는 고단한 일상이 엿보인다. 카페는 사람들의 고단함을 덜어주는 공간으로서 생겨난 것이다.

대학 생활을 하며 내가 자취방만큼이나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공간은 역시 학교일 것이다. 글쓴이는 학교에 대해 교사 한 사람이 수십 명의 학생을 가르쳐야 하는 공간이라며, 많은 사람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장치인 판옵티콘적 요소가 존재한다고 말하였다. 감시와 통제가 이루어지는 공간이라는 것이다. 글쓴이는 강의실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대화나 소통은 학생과 교사 사이에만 인정되며, 학생 상호간의 의사 교환은 허가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었다. 감옥이 감시에 의한 통제를 한다면, 학교에서는 정보의 허용과 차단 여부로 학생들을 통제한다는 것이다. 책에서는 우리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대학을 졸업하는 날까지 판옵티콘 구조로 이루어진 학교에서 하루의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며, 이후 회사에 들어가면 또 다시 변형 판옵티콘에서 상사로부터 감시와 관리를 받게 된다고 말하고 있었다.

학교라는 공간에 대한 글쓴이의 견해에 대해 나도 상당부분 공감할 수 있었다.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의 시간 동안, 그 중에서도 특히 고등학교를 다닐 때에는 정말 학교가 감옥 같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나는 교칙이 엄한 학교에 다녔었는데, 머리 길이조차도 담임선생님이 자를 들고 길이를 재어서 일정한 제재를 가하는 학교였다. 그때도 학교가 답답하고 감옥 같다는 생각은 했었지만, 학교의 그런 방식의 통제에 대해 옳지 못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학교의 교칙은 당연히 따라야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대학에 와서 공부를 하면서, 특히 사회학을 공부하면서 부터는 그 때 학교 공간에서 나에게 가해지던 감시와 통제에 대해 뒤늦게 반감이 생기게 되었다. 특히 사회학과의 교수님들은 학생과의 민주적 관계를 위해 많이 노력하시고, 수업 시간 중에서도 학생들의 수업 참여와 자유로운 토론을 권장하시기 때문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와서의 학교생활은 숨통이 트이는 느낌이었다. 대학생활을 하면서부터는 그 전에 비해 감시와 통제에서 많이 벗어났기 때문에 대학교가 글쓴이가 말했던 것만큼 판옵티콘 공간이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는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아직도 많은 생활공간이 판옵티콘으로서 우리를 감시하고 있다는 것은 약간은 두렵기도 하다.

‘집으로 들어온 인문학’을 통해 집, 카페, 학교 외에도 여러 공간들의 사회적 의미에 대해 알게 되었다. 우리 주변의 모든 건물들이 인간의 삶, 총체적인 생활들과 연관되어 있었고 사람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들이었다. 또 집과 건물들의 변화가 우리 사회의 움직임, 역사적․경제적 흐름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배웠다. 내가 아무 생각 없이 생활하는 여러 공간들에는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하는 세상에 대한 지식이 담겨있던 것이다. 다양한 공간들에 담긴 사회적 의미를 통해 세상을 조금이나마 더 깊이 이해 할 수 있는 기회가 된 것 같다.

장려 장*화 경제학부 도서: 언제라도 티타임
독후감: 언제라도 티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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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자취방에는 유통기한이 지난 꽃잎차가 있다. 예전에 차를 마시는 사람이 되자라는 생각으로 인터넷에서 구매한 것이다. 사고나서 한 달 동안은 열심히 먹은 것 같다. 그 뒤로는 생각이 잘 나지 않는다. 사실 언제 내가 그것을 우려서 마셨는지 자체가 나의 기억에는 없다. 차를 마시고 화장실을 자주 갔던 것 같고 생각 외로 끝 맛이 텁텁했던 것 같다. 샀으니 버리기는 아깝고 안 마시는 것보다는 낫겠다 싶고, 건강을 위해 먹었던 것 같다. 그러나 나는 곧 꽃잎차를 잊고 살다가 최근에 부엌 찬장을 정리하면서 그것의 존재를 깨닸았다. 나에게 꽃잎차가 있었다는 사실에 놀랐고 그것의 유통기한이 지나버렸다는 사실에 더욱 놀랐다. 아.. 그거 사는데 돈 좀 들였는데! 라는 아쉬움이 컸다. 그런 우울했던 경험을 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나에게 들어온 책이 노시은 작가님의 ‘언제라도 티타임’ 이라는 책이다. 나와는 결국에 친해지지 못했던 차라는 존재가 어떤 이에게는 글쓰는 소재거리가 될 수 있고 인생의 동반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 보다는 그냥 무감각하게 다가왔다. 책을 대충 훎어보니 형형 색깔의 사진이 수록되어 있었고 글도 적혀있었다. 이 책의 겉표지는 보고 처음 든 생각은 정말 가볍게 읽을 수 있을 것 같다라는 거다. 더불어 책은 나에게는 돈낭비 대상이 된 ‘차’라는 게 어떻게 묘사되었는지 라는 궁금증을 자아냈다. 그러나 나는 공부를 해야한다라는 핑계를 대며 늦장을 부려가며 거북이 걸음처럼 책을 구경했다. 압도적으로 아름답거나 대자연의 풍치를 느낄 수 있는 그런 사진이 아니라 일상의 소소한 모습을 담은, 그러나 그 주체가 인간이라기 보다는 차에 중점이 치우쳐져 있고 더불어 차를 둘러싼 모습들이 담겨진.. 그런 사진들이여서 책을 읽었다라기 보다는 구경했다고 표현하고 싶었다.

사실 나에게 책을 읽는다 라는 것은 언제나 부담으로 다가온다. 읽는 행위를 통해서 무언가를 얻고자 하는 마음때문일까? 나에게 독서는 어느 새 그런 행위가 되어 있었다. 금방 흘러가버리는 시간이 책을 읽으면 더욱더 빨리 흘러버리기 때문에, 뭔가 아까웠다. 정착 책을 읽지 않는 시간에는 빈둥대며 놀기 바쁘지만 책을 내 앞에 두는 순간에는 시간이라는 놈을 담보로 무언가를 해야겠다 라는 생각이 너무나도 커져서 책을 점차 읽지 않았다. 그러나 사진이 많고 가볍고 편하고 무언가를 추리할 필요가 없고 암기할 필요가 없다라는 생각으로 ‘언제라도 티타임’을 읽기 시작하자 시간 낭비라는 생각은 어느새 자취를 감추었다. 비록 어느 한 순간에 책을 다 읽었다거나 한 문장 한 단어를 새새하게 음미하며 보지는 않았더라도, 좀 대충 읽었더라도, 쫒기는 마음으로 읽지는 않았다. 그리고 나는 책을 다 읽고 난 다음에 책을 읽고 평소에 느껴지지 않았던, 조금은 색다로운 감정을 감지했다. 그것은 부정적인 부러움과 동감하지 못하는 마음이었다.

작가는 삶의 터전뿐만 아니라 전 세계를 여행하며 자신이 사랑하는 차를 마신다. 언제나 차를 마실 수 있는 도구를 들고 다닌다. 차가 맛있기 때문에 차를 마시고 차를 마시며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한다. 사람들을 만나고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사람들과 감정을 공유하며 추억을 만들어 나간다. 나는 그것을 보면서 나도 언젠가는 그럴 수 있을 거야! 라는 마음보다는 나는 지금 뭐하고 있는거지, 뒤처진 것 같군, 나는 저렇게 되려면 도대체 뭘 어떻게 해야하지, 나는 왜 이렇게 사는 거지 등의 비탄에 빠진 생각과 더불어 그냥 이미 무언가를 이룬 작가가 부럽기만 했다. 노력없이 살고 싶다라는 생각과 나에게 바로 주어졌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 물론 작가 그녀는 자신의 삶을 얻기 위해 노력하고 자신이 좋아하는게 무엇인지 제대로 인지하기 위해 노력하고, 끊임없이 노력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나에게는 그 노력보다는 그녀가 얻은 결과물만 보일 뿐이다. 그래서 부러운데 그 부러움이 좋은 부러움은 아닌 것 같다. 내가 이 책을 읽고 느낀 부러움이 나를 압박하는 것 같다. 사실 압박하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 내가 책을 읽고 그로 인해 감정을 느끼고 그 감정을 곧이 곧대로 해석하다가.. 시간이 흘러 점차 나의 현 상태와 맞물리면서 그 감정이 부정적으로 왜곡된 결과가 압박감일 수 있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지금의 나는 너무 이도저도 아닌 모습이다. 누구나 동일한 경험을 해도 동일한 생각을 하고 느낌을 갖고 도출을 하는 게 아니다. 그리고 선험적으로 예상했던 결과가 실제로 발생하지 않을 수 있다. 예상을 빗나간 결과에 당황해서 그런걸까. 또는 남들이 느끼지 않고 내가 예상했던 결과가 나타나지 않아서 당황하고 그 당황스러움이 증폭제가 되어 압박감으로 나타났을 수 있다. 나는 이 책을 읽기 전에 차를 대하는 다른이의 태도에 대한 궁금증과 여유에 대한 갈망으로 이 책을 선택했다. 궁금증이 풀릴 것이고 여유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예상을 했다. 물론 다른 사람들도 나와 같은 예상을 했을 수도 있고 대부분은 이 책을 다 읽고 여유로움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예상 외로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고 여유로움을 얻지 못하고 궁금증은 그냥 궁금증 그 자체의 상태로만 남아있을 뿐이다. 나에게는 없는 무언가를 작가 그녀가 타고나서 저런 결과를 얻은 게 아닐까 라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내 몸은 아주 부정적인 생각으로 범벅된 것만 같다. 그 이유가 도대체 무엇일까.

궁금증은 해결되지 못한 채 오히려 작가를 이해하지 못하는 상태에 빠졌다. 작가 그녀는 맛있어서 차를 마신다고 했다. 사람이 좋아서 사람을 만난다고 했다. 풍요로운 여행은 아니더라도 여행을 다닐 수 있는 작가 그녀. 나에게는 그녀가 하고 싶은 건 다 하는 사람으로 밖에 안보인다. 사람은 욕구의 동물이다. 사람은 무언가를 얻고자 하고 무언가를 하고자 한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는게 아니다. 그래서 이성이 필요하다. 하고싶은 거 다 할 수 있는 세상은 피로 얼룩지고 그 끝은 멸망일 것이다. 물론 욕구와 실행의 정도에 따라 그 결과는 달라지고 작가 그녀가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한다고 해서 누군가 피를 흘리거나 세계가 멸망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여행을 하면서 어울렸던 이들과 좋은 감정을 공유함으로써 세계에 긍정 에너지를 불어넣었을 것이다. 작가 그녀의 행위는 적어도 타인에게 해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그녀가 원하는 걸 하는 게 나쁘지 않다. 그러나 나는 그녀가 원하는 걸 할 수 있는 상태가 부러울 뿐이고 누구는 그걸 얻지도 못하고 나는 그걸 얻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해야할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 그리고 그녀의 동기는 정말 낙원같은 소리다. 좋아해서 한다라니. 나는 무언가를 좋아해서 행할 수 있는 사람은 소수라고 생각한다. 누구나 그런 기회를 얻지는 못한다. 주위에서 받쳐주고 주위를 신경쓸 필요가 없는 사람들이 아닌 주위를 받쳐줘야하고 주위를 신경쓰며 살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은 행동에 제약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좋아하는 것, 하고 싶은 것을 아는 사람도 소수라고 본다. 그 소수에 소수라고 볼 수 있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정말 타고난 사람이다. 나는 작가 그녀가 그런 사람이라고 여겨진다. 나와는 거리감이 있고 그냥 이상적인 사람이라고 밖에 보이지 않는다. 나와는 완전 다른 사람이 쓴 글이라고 생각되서일까. 나에게 이 책은 100%의 이해를 불러일으키지 않았고 오히려 부담감과 부러움, 압박감만은 자아낸 것 같다.

사실 위의 내용처럼 책을 느낄 생각은 없었다. 가볍고도 가볍게 읽으려 했고 나의 안타깝게 생을 마감하게 된 꽃잎차들을 위로하며 그런 결과가 나오지 않도록 다짐하고 작가의 모습을 보며 자극을 받으려 했다. 그러나 그 자극이 좀 이상한 방향으로 휩쓸려버린 것만 같아서 너무 안타깝다. 오랜만에 읽는 암기 대상이 아닌 책인데 이 결과가 나버리다니!! 현재 나의 상태가 심해 저 밑바닥을 뚫고 들어갈 기세로 침체되었기 때문일까. 공부를 해야 하는데 미루고 미루다가 몇 년이 흘러버려서 남들과 동떨어진 현재 나의 모습 때문인 걸까. 나의 감정상태가 호전되고 긍정적인 마음가짐으로 가득찬 상태에서 이 책을 보면 지금과는 다른 느낌과 생각이 들고 감정을 느낄 것이다. 나는 그걸 확신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밝은 상태가 오래 유지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하는지 잘 모르겠다. 작가 그녀처럼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면 된다는 걸 안다. 방법만 알면 뭐할까. 그걸 실천할 자신감도 없고 추진력도 없다. 그것들이 나에게서 닳고 닳아서 없어진지 꽤 오래되었다. 몇 년은 되었다. 도대체 그걸 어디서 얻어야 하는지 고민을 해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의 다음 독서 대상 또한 나에게 부정적인 생각만을 가져다 줄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장려 이*민 경영학과 도서: 언제라도 티타임
독후감: 내 기억 속의 티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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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logue
찻잎을 적당한 온도에 적당한 시간만큼 우려내면 한 잔의 차가 만들어진다. 이 차 한 잔을 보면서 이 차는 세계 곳곳에서부터 어떤 여행을 거쳐 나에게로 온 것일까 하는 생각을 가끔 하곤 한다. 선물로 받은 차를 마시면서는 내게 차를 선물해 준 사람을 생각하기도 하고, 가끔은 순간을 기억하는 방법으로 차를 마시기도 한다. 그러나 대학에 입학한 뒤 학교에 가고, 수업마다 강의실을 옮겨 다니고, 주말에도 동아리 활동이나 과제를 하다 보니 차 한 잔을 우려내어 마시는 것보다도 금방금방 나오는 커피 한 잔이 더 편하게 느껴졌다.
‘언제라도 티타임’이라는 책은 내가 한동안 잊고 있었던 차의 시간을 떠올리게 했다. 차가 먼 곳에서부터 여행을 거쳐 나에게로 오듯이 작가는 여러 나라를 여행하며 차를 마셨다. 책은 작가가 경험한 여행에서의 티타임을 소개하는데, 책을 읽으면서 나는 마치 내가 여행을 하는 것만 같은 느낌을 받기도 하고 내가 여행했던 곳, 내가 마셨던 차에서 같은 경험을 했던 작가를 보며 피식 웃기도 했다. 그러면서 내가 했던 여행과 그 여행의 순간을 함께했던 차가 조금씩 떠올랐다.나의 첫 아이스티
책에서 작가가 어릴 적 일본에 가서 마셨던 아이스티의 순간이 나온다. 한국에서 먹던 달달하고 새콤한 아이스티를 생각하고 아이스티를 골랐던 것이다. 그런데 앞에 놓였던 아이스티는 상상했던 맛과는 너무나도 동떨어진, 싱겁고 떨떠름한 맛이었다는 에피소드였다. 이 에피소드를 읽으며 나는 나와 너무나도 똑같았던 경험에 내가 잊고 있었던 나의 첫 아이스티가 떠올랐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일본 나라여자대학 부설중등학교에 교환 프로그램에 참가하며 나라 지역으로 여행을 간 적이 있었다. 학교 프로그램이 이틀, 관광이 이틀로 배정되어 있었는데, 학교 프로그램은 정해진 반에서 일본 학생들과 같이 수업을 들으면서 서로의 다른 문화에 대해서 이야기도 해 보고 근처의 문화유적 견학도 다니면서 하루를 보내는 것이었다.

그날은 정말 더운 여름날이었다. 홈스테이를 하게 된 일본 친구는 내가 일본에 가기 전 지금 오사카는 정말 덥고 습하다며 꼭 준비를 해 오라고 했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는 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그날의 오사카는 정말 너무나도 더웠다. 그런데다가 땡볕이 내려쬐는 절과 공원, 무서운 사슴들을 거치고 나니 나는 진이 한참 빠질 수밖에 없었다. 더위가 피크에 다다른 오후 3시쯤, 우리 조의 한 일본 친구가 학교에서 맛있는 걸 사먹으라고 얼마를 줬다며 함께 카페에 가서 시원한 걸 먹자고 제안했다. 햇빛과 더위에 완전히 방전된 우리는 얼른 가자며 그 친구가 안다는 좋은 카페에 가서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카페는 시원했고 아기자기하니 예뻤던 기억이 난다.

메뉴를 정하는 순간이었다. 일본 친구들은 카키고오리라는 빙수를 시켰는데, 일본 빙수는 우리나라의 부드러운 빙수와는 달리 그냥 얼음을 드르륵 간 것에 과일 맛이 나는 시럽을 쭉 뿌린 것이었다. 시원하긴 했지만 너무 달아서 내 입맛에는 맞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다른 것을 시키기로 하고 메뉴판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딱히 끌리는 메뉴가 없어서 메뉴판을 계속 읽어 내려가던 중 ‘아이스티’라는 단어가 내 눈길을 잡아끌었다. 한국에서 먹던 복숭아 아이스티, 레몬 아이스티를 생각한데다가 ‘아이스’라는 너무나도 시원해 보이는 단어에 끌린 나는 아이스티를 주문하겠다고 했다. 그러자 일본 친구들이 어른 같다면서 신기하다는 반응을 보이는 것이었다. 친구들이 왜 그러는지 어리둥절했지만, 그 이유는 메뉴가 나온 뒤 알게 되었다.
기다란 원통형 유리잔에는 연갈색 액체가 담겨 있고 시원해 보이는 얼음과 레몬 한 조각이 동동 떠 있었다. 유리잔의 표면에 송골송골 맺힌 물방울을 보니 아직까지 가시지 않았던 더위가 싹 가시는 것 같았다. 손에 감기는 차가운 기운을 즐기며 한모금을 마셨다. 그런데 그 아이스티는 전혀 달지도, 상큼하지도 않았다. 그저 어딘지 모르게 약간 향기로운, 그렇지만 입 안이 얼얼하도록 시원한 맛일 뿐이었다. 익숙하지 않은 맛에 띄워진 레몬을 꾹꾹 눌러 레몬즙으로 아이스티를 가득 채웠지만 여전히 맛은 익숙해지지 않았다. 그런 내 앞에서 다른 친구들은 너무나도 맛있게 달콤한 카키고오리를 한 스푼씩 떠먹고 있는데 그때 얼마나 부러웠던지 모른다. 작가는 앞에 앉았던 어른이 다른 차를 시켜주기라도 했지만 나는 카키고오리를 맛있게 먹는 친구들 앞에서 왠지 어른이 된 것처럼 맛없는 아이스티를 쭉쭉 마실 뿐이었다.

굿나잇 티타임
차에는 커피만큼은 아니지만 카페인이 있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작가는 하루를 마무리하는 시간에는 카페인이 적은 카모마일이나 루이보스와 같은 차를 마신다고 한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나는 호주에서의 첫 밤이 생각났다.

대학교 단기파견 프로그램에 참가해서 호주로 5주간의 어학연수를 떠난 적이 있다. 그때 홈스테이를 했던 집은 대만에서 호주로 이민을 온 가족의 집이었는데, 출발 전에 선물을 준비하기로 했다. 아무래도 비슷한 문화권이니 차가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오랜 시간동안 백화점 차 코너를 돌아다니며 향을 맡아보고 시음을 해 가면서 다른 문화권에서도 좋아할 수 있을만한 차를 찾아다녔다. 두 시간을 돌아다닌 끝에 감귤향을 가향한 홍차를 준비해서 가기로 결정하고, 겹보자기를 만들 천을 사서 뿌듯한 마음을 안고 집으로 돌아갔다.
홈스테이 집에 도착한 첫날 밤, 직접 만든 겹보자기로 포장한 차를 건네자, 홈스테이 가족이었던 셜리와 제임스는 기대했던 것보다도 정말 많이 기뻐하고 고마워했다. 차를 찾아다니면서 힘들었던 마음이 사르르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셜리는 곧 부엌으로 나를 데리고 가더니 여기 있는 차는 언제든 먹어도 된다며 그 집의 차 찬장을 보여주었다. 살면서 본 것 중 가장 많은 종류의 차들이 있던 그 찬장에서 셜리는 ‘Good sleep tea’라며 티백 하나를 꺼내주었다. 다른 차들은 카페인이 많아서 잠자는 걸 힘들게 할 수도 있다면서 밤에는 이 차를 마시면 정말 좋다며 꼭 먹어보라고 연신 엄지를 치켜들었다. 바로 먹어보자는 내 말에 셜리가 금방 우려 준 Good sleep tea는 따뜻하고 편안한 향이었다. 한 모금씩 마실 때마다 마음 위로 따뜻함이 방울져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곧 마음이 따스해졌다. 셜리가 직접 뜬 담요를 둘러쓰고 마신, 낯선 곳에서 처음 만나는 익숙한 차 한 잔은 호주에서의 첫 밤을 따뜻한 Good sleep으로 보낼 수 있었다.

맛보다 멋
책을 읽으며 내 마음에 가장 크게 다가온 점은 작가가 차가 있던 그 순간들에 의미를 두었던 것이었다. 작가는 많은 경우에 차를 맛있게 먹었고, 행복한 티타임을 경험했다. 그런 경험을 보면서 나는 내 기억 속 차는 맛이 없었지만 행복했던 티타임이 떠올랐다. 이 경험을 떠올리면서 차란 그 맛보다도 순간을 담는다는 작가의 말에 한 번 더 공감할 수 있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는 1학년 때와 같이 일본으로 수학여행을 가게 되었다. 그렇지만 1학년 때와는 달리 도쿄로 갔기 때문에 설렘을 가득 안고 또다시 일본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두 번째 날 밤이었는데
원래 가기로 했던 호텔에 문제가 생겨 다른 호텔로 갑자기 변경이 되었다. 여행사 측의 실수 때문이었다며 더 높은 등급의 호텔로 가게 되었던 것이다. 무거운 캐리어를 질질 끌며 피곤한 얼굴로 방에 들어간 친구와 나는 전날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안락하고 고급스러운 방에 환호성을 지르며 침대에 뛰어들어 뒹굴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즐거움이 가신 뒤 우리는 방을 구석구석 탐색하기 시작했다. 텔레비전도 틀어보고, 샴푸와 린스를 열어서 킁킁 향을 맡아보기도 하고 서랍도 열어보던 우리는 작은 냉장고 위에 정갈하게 뒤집어져 놓여 있는 찻잔 두 개, 그리고 티백으로 보이는 작은 녹색 꾸러미 두 개를 발견했다.
하루 종일 놀이공원에서 뛰어다닌 피곤한 다리를 위해 족욕을 하며 차를 마시는 즐거운 티타임을 상상한 우리는 서로 마음이 통했다는 눈빛을 교환했다. 포장지와 적혀있는 한자들로 맛을 추측한 우리는 ‘매(梅)’라는 단어와 꽃 그림, 그리고 초록빛인 포장 색깔에서 ‘이것은 녹차와 매화차를 섞은 맛일 것이다!’하는 결론을 내렸고 이 차를 마시기로 결정했다. 욕조에서는 따끈한 물이 포슬포슬 김을 내며 차오르고 있었고 커피포트에서도 보글보글 조용히 물이 끓는 소리가 들리며 티타임이 준비되었음을 우리에게 알려 왔다.

따뜻한 물에 발을 담그고 차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찻잔에는 진한 녹색의 따끈함이 찰랑거리고 있었고 분홍색 덩어리가 떠다니고 있었다. 왠지 상상했던 모습은 아니었지만 그때는 마냥 기분이 좋았기 때문에 이상함을 전혀 깨닫지 못했다. 향을 맡아보자 어디서도 맡아보지 못한 향이 났다. 이게 무슨 향일까 기억을 더듬어보다가 문득 미역이나 다시마와 같은 해조류의 향이 지금의 향과 비슷하다는 생각에
미쳤다. 그렇지만 이 차가 녹차와 매화차를 섞은 것이리라고 강력하게 판단했던 내 머리는 해조류의 향을 기억에서 떨쳐냈고 드디어 찻잔을 입에 대고 한 모금을 머금었다.
그제서야 머리가 원래의 기능을 하기 시작했다. 차에서는 뭐라고 형용할 수 없는 맛이 났다. 비릿한 것 같으면서도 향으로 맡을 때 느꼈던 다시마의 향이 입 안 가득 퍼졌다. 짭짤한 맛이 혀를 긁어내렸다. 결국 친구와 나는 견디다 못해 첫 한 모금을 뱉어 내고 더 이상 차를 마시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매(梅)’는 사실 ‘해(海)’가 아니었나 싶다. 낯선 곳, 낯선 공기에 마냥 설렜던 고등학생 두 명에게 조그만 한자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중요했던 것은 따뜻한 차와 족욕으로 여행의 하루를 마무리하겠다고 마음먹었던 순간이었고 차의 맛이 어떠했든 그 순간으로 인해 그 여행과 그 차의 맛, 차를 머금었던 서로의 표정은 7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선명하게 남아있다.

Epliogue

‘언제라도 티타임’이라는 책은 내가 살아온 시간에 있던, 행복했던, 그렇지만 기억하지 못했던 티타임을 떠오르게 해 주며 다시 한 번 여행을 하는 기분을 느낄 수 있게 해 주었다. ‘한 잔의 차는 매번 상상의 여행을 보여준다’는 작가의 말을 처음에는 그저 어느 정도 겉멋이 든, 뻔한 문장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책을 다 읽은 지금, 이 말만큼 정확한 말이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한 잔의 차, 그리고 이 한 권의 책은 내게 기억과 상상의 여행을 보여주었다. 차가, 그리고 티타임이 행복할 수 있는 것은 이런 여행을 통해 지금의 나를 위로해 주고, 또 하루를 살아가면서 행복을 찾을 수 있도록 위로해 주는 데에 그 이유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Good sleep tea는 없지만 이 책 한권을 마신 오늘 밤은 좋은 잠을 잘 것 같다.

장려 김*우 조선해양공학과 도서: 읽는 인간
독후감: 거울의 기사, 돈키호테 그리고 말 – 오에 겐자부로의 『읽는 인간』을 읽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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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중반기에 올바른 길을 잃고 헤매는, 어두운 숲 속 가운데 있는 듯한 이가 있었다. Karl. 그의 친구들은 K라고 친근히 부르지만 그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 친구들의 자랑이자 인정받는 작가인 그는 얼마 못 가 글쟁이로써의 자신의 삶이 끝날 것을 알고 있었다. 책들은 여전히 잘 팔리지만 그는 필연적으로 알 수 있었다. 더 이상 그는 읽는 인간이 아니기에. 더 이상 책은 자신의 인생이 아니기에. 무슨 책을 보아도 여전히 어리석은 선택을 하고, 재미가 없고, 울림이 없으며 자신의 책을 봐도 그저 나무와 잉크들에 미안할 뿐이었다. 그는 이제 글쟁이라는 숲 속 한 가운데 있는 늪에 빠진, 아주 천천히 그 늪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는 불쌍한 어떤 이일뿐이었다.

이미 낙을 잃어버린 K는 단골 카페에 들려 허망한 눈빛으로 자신의 노트북을 응시하면서 늪의 더 깊은 곳으로 몸을 던지고 있었다. 그에게 오히려 그 곳은 천국이었고 더 빠르게 들어가고 싶어서 허우적거리는 그였다. 그때 우악스러울 정도로 힘이 센 팔이 그의 두 다리를 쥐고 한 번 비틀어, 자유로운 뭍으로 꺼내주는 듯한 목소리가 그의 귀에 들어왔다.

“오랜만이네.”
고개를 들어 눈이 마주친 곳에는 그가 반가워할 수 없는 이가 서있었고 당황스러움과 부끄러움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뭐야, 오랜만에 사람을 봤으면 말을 해야할 거 아냐. 내가 항상 별로 안 반가워도 반가운 척 하랬지?”
“아…오에, 언제 들어온거야?”
“어제. 넌 항상 이 곳에 있더라. 여기 커피 맛없다고 내가 맨날 그렇게 말해도 여기 오는 이유가 뭐야? 좀 다른 곳도 앉고 그래. 이 의자 아주 닳겠어.”
그와 같이 일을 했던 출판사의 편집장이자 옛 연인이었던 아오에 였다. “여긴 웬일이야? 혹시 책 때문에 그런 거면 이번 책은 이미 출판사가…”
“일 때문에 온 거 아니야. 걱정하지마. 그냥 당신 보고 싶어서 온거야.”
한 편으로는 좋았지만 내색할 수 없는 수백만 가지의 이유가 그의 얼굴을 채 덮기도 전에 아오에의 머리가 들어왔다. “All right. then I’ll go to hell(그래. 좋다, 나는 지옥으로 가겠다)이라… 뭔가 첫 문장 치고는 강렬한데? 이번 책 우리 출판사에서 해줘도 좋을 것 같은데?”
그는 그녀를 밀어내며 급하게 노트북을 닫았다.
“계약 때문이 아니면 정말 온 이유가 뭐야?”
“에이~ 까칠하긴. 남들은 옛 연인이 오면 가슴이 다시 뛰고 그런다는데 당신은 그런 낭만이 없어. 낭만이.”
“일없으면 나 먼저 일어날게. 원고 써야되서.”
일어나려고 하는 K를 그녀의 말이 잡았다. “요새 책 안 읽지?”
그녀의 그 한 마디에 그는 마취총을 맞은 듯 했다. “당신, 요즘 책 보고 알았어. 그 많던 지적 허영심들은 다 어디가고? 아니면 이제 자만심들이 꽉 들어찬 거야? 당신 글이 최고라 생각하는 건가?”
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의 비밀을 들킨 것보다도 그녀만은 몰랐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그는 아무 대꾸를 할 수 없었다. “내가 놀아달라고 할 때는 지적 흥분이 어쩌니 책을 읽는 게 정보를 얻는 것과는 같은 레벨이 아니라고 그러고 진정한 자신과 만나는 것이 가능하다니 별 고귀한 얘기는 다 하면서 아주 고귀한 돈키호테인
척 하면서 책만 읽더니… 이제 내가 없으니 고귀한 척 할 필요도 없는 거야? 좀 무슨 말이라도 해봐.”그녀의 입에서 그의 귀로 날아드는 칼들이 그의 모든 말들을 처치하고 있었다. 다 짓밟히고 나서야 숨어있던 단어 하나가 나올 수 있었다. “…비탄(grief)…”
그리고 그가 숨겨놓은 단어가 그녀의 말을 드디어 멈출 수 있었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그다지 많은 고전을 읽지 않지. 하지만 난 달라. 난 읽을 만큼 읽었어. 근데 생각나는 단어는 저것 하나야. 너가 예전에 그랬지? 고전이 풍부한 경험을 준다고. 맞아. 난 이제 노년이나 마찬가지 인 것 같아. 많은 경험을 했어. 더 이상 남은 게 없어. 난 40년동안 오로지 읽고 쓰기만 했어. 근데 남는 단어가 비탄(grief)뿐이야. 돈키호테? 그럼 아마 책들은 거울의 기사야. 그리고 난 돈키호테가 아니라 그냥 그의 말이였어!”
“말이 아니라 당나귀야.”
“…그…그건 뭐 내가 도와줄 수 없구만. 아무튼 핵심은 난 이제 읽고 싶지 않아. 더 이상 그들의 얘기를
듣고 싶지 않아.”
“당신 우쭐하는 건 여전하네. 내가 말한다고 자신을 돈키호테에 빗대다니(웃음). 뭐 무슨 일인지는 이제
대충 알겠네. 당신의 그 지적 허영심을 채워줄 게 없다는 거네… 근데 진심으로 그러는 거야?(웃음)”아오에는 웃으면서 그에게 얘기했지만 K는 그럴 수 없었다. 그는 진지했다. 그는 더 이상 책이 재미가
없었다. 그것이 그의 작가 인생을 언젠가(아마도 곧) 끝낼 것을 그도 알았지만 그저 싫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이 사실을 알아차린 그녀에게 그는 부끄러움을 느낄 수 있었다. “자, 이것들을 봐. 이럴 줄 알고 이 종이 쪼가리들 챙겨왔어.”
그녀가 내민 찢어놓은 메모지들에는 그가 예전 그녀에게 적어준 것들이었다. 대부분 그가 읽은 책의 구절들이었다. “당신이 유명해지고 나서 팔까 생각도 해봤는데 꽤 유용하더라구. 그리고 당신 생각도 나고… 그래도 돌려줘야 될 것 같아서 가지고 왔어.”
그는 메모지들을 하나씩 펼쳐보았다. ‘네가 올라가 저들 옆으로 가기 원한다면 그곳에 나보다 더 나은 영혼이 있으리라. 우리는 헤어질 때가 왔으니 너를 여기에 두고 가겠다.’
‘인생의 중반기에 올바른 길을 잃고 헤매던 나는, 어느 어두운 숲 속 가운데 있었다.’
‘친애하는 신이시여, 온 마음을 다해 기도합니다. 부디 제가 작품에 질서를 부여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or I am lost.’
‘나는 직감한다. 나는 어떤 사람들 속에서든 예외 없이 고독한 혼자이며, 추방된 이방인이어야 한다고, 그럴 수밖에 없다고…’
‘네가 올라가 저들 옆으로 가기 원한다면 그곳에 나보다 더 나은 영혼이 있으리라. 우리는 헤어질 때가 왔으니 너를 여기에 두고 가겠다.’
그것들을 볼 때마다 그는 이제는 옛 것들이 떠올랐다. 그의 열정들, 그의 재미들, 그의 생각들, 그의 책들, 그의 삶들. “당신 이거 주면서 출판사 직원이 책도 잘 안 읽는다고 면박 준 거 기억나지? 내가 이거 볼 때마다 얼마나 화가 나는 줄 알아? 그래도 내가 여기까지 올라오는데 꽤 많이 도움되더라. 근데 지금 당신 꼴을 보아하니 이젠 당신 스스로가 써야겠네.”
K는 그저 종이들을 매만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그는 하나에 눈이 갔고 그 자신도 모르게 읽었다. “…지키지 못한 유년시절의 맹세…”
아오에는 미소 지으며 얘기했다. “당신 어릴 때 노벨상 타겠다고 그랬다며. 근데 노벨상 근처도 못 갔으면서 벌써 이러면 어떡해. 나중에 노벨상 수상자랑 자는 사이였다고 자랑하고 다니려고 그랬는데 이러면 내 계획이 어긋나잖아. 좀 더 분발해봐”
미소 짓는 그녀를 보며 Karl도 미소 지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다 그녀가 놀란 얼굴로 메모지 하나를 챙겼다. “아, 이건 내가 이것들 가지고 왔으니 교통비 값으로 내가 가질게!(웃음)”
급하게 챙긴 것을 숨기는 아오에였지만 그는 이미 본 메모지였다. “알겠어(웃음). 이것들 챙겨 와줘서 고마워.”
“그럼…난 이것들 전달했으니 가볼게.”
“벌써? 아직 커피도 안 먹었잖아?”
“그거 주러 온 거였어. 아! 진짜 이번 책 우리 쪽이랑 하면 안 될까?(웃음)”
“아오에…안 되는거 알…”
“알겠어. 알겠어. 농담이야. 그럼 난 가볼게. 잘 있어…”
“잠..잠깐! 아오에! 잠시…!!”
그렇게 눈을 떴을 때, Karl은 그의 책상에 엎드린 채였다. 그리고 그는 그와 팔짱을 끼고 활짝 웃고 있는 그녀의 눈이 마주쳤고 그녀의 눈 옆으로 ‘돈키호테’ 책이 보였다. “당신은 여전하네. 여전히 거울의 기사야. 그렇다고 내가 돈키호테라는 얘기는 아니야. 그냥. 말이나 할게. 아! 그래. 당나귀. 아무튼 당신이 거울의 기사도 하고 돈키호테도 다 해. 당신은 그런 사람이니깐. 내일 봐.”
활짝 웃는 그녀의 얼굴을 보며 그도 웃어보였다. 다음 날, 그는 여전히 웃고 있는 그녀 앞에 섰다. “내가 한동안 안 와서 삐졌지? 그래서 내가 선물 가지고 왔어. 당신이 몰래 챙겨놓은 거… 내가 모를
줄 알았지?(웃음)”
그는 주머니 속에서 정성스럽게 접힌 메모지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나는 앞으로 수많은 곳을 가겠지만 내 영혼은 언제나 여기로 돌아올 것이다. 이 곳을 그런 장소로 삼고 싶다.’
그는 메모지를 아름답게 웃고 있는 그녀의 사진 옆에 붙였다. 그리고 그는 안주머니에서 메모지 하나를
꺼내 붙이며 말했다. “그리고 이거는… 내가 당신 몰래 챙겨놓은 거야. 몰랐지? 도움 많이 된다며. 이것도 아마 많이는 아니더라도 꽤 도움이 되길 바랄게(웃음).”

메모지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그럼에도 나의 영혼은 기억한다.’

장려 최*석 환경공학과 도서: 세계 경제를 바꾼 사건들 50
독후감: 나는 ‘경제’가 어려운 공대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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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공대생이다. 나는 경제에 대하여 쥐뿔도 모른다. 하지만 경제에 대해 알고 싶다. 그래서 교양으로 ‘생활과 경제’ 수업을 들었다. 그래도 모르겠다. 현실의 경제는 단순히 수요-공급 곡선으로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하다. 나는 공대생이다. 이론적인 내용보단 현실에 적용 가능한 예를 좋아한다. 책의 소개에 복잡한 수학 없이 사건 기술적 언어로 되어서 쉽고 재밌다고 한다. 그래서 많은 책 중 이 책을 골랐다. 첫 장을 폈다. 서브 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검은 월요일이… 그렇다. 나는 공대생이다. 모르겠다. 각종 뉴스를 통해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에 대하여 수많은 이야기를 들었지만 서브프라임 모기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몰랐다. 1페이지를 읽는 데 5분이나 걸린다. 그렇게 읽어도 이해가 안 된다. 결국, 책을 덮고 검색을 시작했다. 서브프라임이 뭔지, 그것이 어떤 문제를 일으켰는지 10년이 다 지나서야 알게 됐다. 하나씩 찾아보니 흥미가 생기고 관심이 생긴다. 책을 덮고 반나절 동안 인터넷을 뒤져서야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에 대하여 이해했다. 50가지 사건 중 겨우겨우 하나를 이해하고 다음 장으로 넘어갈 수 있었다.먼저,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와 같은 익히 아는 주제로 책에선 흥미를 돋운다. 그리곤 재산권, 화폐의 출현, 농업·산업 혁명, 러다이트 운동 등 경제사에 빼놓을 수 없는 이야기가 진행된다. 그 중 러다이트 운동은 산업혁명 시절에 일어난, 기계가 사람이 하는 일을 대체하기에 기계를 파괴해야 일자리가 늘어난다는 기계파괴운동이다.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기계가 있기에 생산량은 극적으로 늘어났고, 새로운 일자리도 크게 불어났다. 기계를 파괴함으로써 일자리를 지키는 시대착오적 운동이었다. 그 당시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이 어쩌면 멍청하다고까지 생각된다.

하지만 나는 러다이트 운동이 현대에도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한다. 2012년, 대형마트를 규제하는 조례가 통과한다. 이에 대형마트는 영업시간이 제한되고, 월 2회 휴무를 의무적으로 강제당한다. 그 이유는 소비자가 전통시장을 이용하는 것보단 대형마트를 더 선호하기에, 대형마트의 운휴를 통해 영세상인과 대형마트의 상생을 장려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과연 그것이 의미가 있을까? 전통시장이 과거의 시장이라면 대형마트는 현대의 시장이다. 소비자가 대형마트를 이용하는 이유는 그것이 편하기 때문이다. 전통시장은 카드결제를 거부하는 경우가 빈번하다. 그리고 야채가게, 떡가게, 철물점 등 자신이 필요로 하는 곳을 따로 찾아가야 한다. 가게를 돌면서 일일이 가격을 비교하긴 번거롭다. 주차가 불편한 경우도 있고, 화장실이나 기타 편의시설의 이용이 힘들다. 비가 오면 더욱 불편할 수 있고, 쇼핑카트가 없으니 짐은 무겁다. 냉난방 시설이 따로 없어 여름과 겨울엔 덥거나 춥다. 하지만 대형마트는 주차시설, 편의시설, 식당 등 한 장소에서 모든 걸 해결할 수 있고, 심지어 요즘은 집으로 배송서비스도 운영 중이다. 소비자는 전통시장과 대형마트 중 자신의 편의에 따라 물건을 어디서 살지 결정한다. 전통시장의 불황을 대형시장을 규제함으로 타파하면 안 된다. 전통시장을 개혁하여 소비자가 전통시장을 선호하게끔 해야 할 것이다. 대형마트가 전통시장의 불황을 초래했다고 대형마트를 배척하는 것은 하나만 보고 둘을 못 보는 일이다. 전통시장에서 파생되는 일자리의 수는 대형마트에서 파생되는 일자리의 수에 미치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이것이 현대판 러다이트 운동이라 생각한다. 기계가 인간의 일자리를 뺏어 일자리가 줄어든 게 아니듯, 대형마트가 전통시장을 잠식하여 일자리가 사라지지 않는다.

책에서는 전체적으로 케인스학파의 이론을 비판한다. 불친절한 이 책은 케인스학파가 뭔지 설명도 안 해주고 이야기를 진행한다. 이럴 때 구글은 나에게 아주 유용한 나침반이 되었다. 케인스학파 또는 케인스이론은 시장의 자율 회복 기능을 믿지 않는다. 그들은 시장경제에서 완전 고용은 아주 특별한 경우에 불과하고, 대부분 불완전 고용이 일반적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시장의 불완전함을 해결하기 위해 정부가 시장에 개입하여야 한다는 것이 케인스학파의 주장이다. 하지만 정부가 모든 시장을 예측할 수 없고 계획할 수 없다. 인간의 지식은 현실 경제에 대하여 한계를 지닌다.

나는 이것이 마치 주식 가격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주식 가격은 일반적으로 오르락내리락한다. 처음에 주식 가격이 저렴할 때는 사람들이 신경을 안 쓴다. 주가가 오르면 “잠깐 오르다 말겠지.”라는 생각에 다시 신경을 접는다. 그러다가 주가가 꾸준히 오르면 사람들은 그 주식에 관심을 가지고 구매한다. 그러나 그땐 그 종목의 주가엔 버블(거품)이 낀 상태가 된다. 결국, 주가는 정상가격으로 돌아가게 되고(주가가 내려가고), 개미는 돈을 잃고 소주를 마신다. 이후, 이런 상황을 판단하고 분석하는 것은 간단하지만, 당시 그 주식에 대한 평가를 내리는 것은 몹시 어렵다. 이렇듯 개미 투자자가 주식을 사고 파는 것처럼, 정부 역시 시장에 언제 개입하고, 얼마나 개입하고, 어디에 개입할지 정해야 한다. 그러나 적절한 정부의 개입은 대단히 어렵고 섬세한 지식을 요한다. 현재 지식의 한계로 정부는 적절하게 시장에 개입하지 못하고, 과연 적절한 개입 시점을 알더라도 그건 과거의 지식에 불과하게 된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손’인 자유 무역주의는 알아서 적절한 균형을 유지할 것이다.

하나의 예로, 스위스가 가장 저렴하게 밀을 생산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정답은 스위스에서 직접 밀을 생산하는 것이 아니다. 스위스에서는 시계를 잘 만든다. 스위스에서 생산한 시계를 캐나다에 수출한다. 캐나다에 수출하여 번 돈으로 캐나다가 잘 생산하는 밀을 저렴한 가격에 사는 것이다. 이게 자유 무역이고 애덤 스미스가 말한 ‘보이지 않는 손’이다. 이것이 이 책의 큰 주제 중 하나다. 자유무역이 경기를 부흥시키고, 자원을 효과적으로 분배한다.

근대 들어 경제사에서 가장 큰 사건을 하나만 꼽으라고 하면 대부분 사람들은 1930년대 대공황(이하 대공황)을 꼽을 것이다. 커다란 사건이었던 만큼 이 책에서는 5번에 걸쳐 대공황을 설명한다. 사실 내가 대공황에 대하여 아는 것은 별로 없었다. 중학교 2학년 사회시간에 대공황으로 인해 실업률이 급증하고, 상품은 안 팔리는 경제적 불황 정도로 배웠다. 이 책에서는 대공황의 원인에 대하여 분석한다. 그중 보호무역에 관한 견해를 비판한다. 많은 정치인이 표를 얻기 위해 달콤한 말로 유혹하곤 한다. 1930년 이전에, 미국의 농산물은 1차 세계대전으로 피폐해진 유럽에 인기리에 팔렸다. 그러나 곧 유럽은 전쟁의 피해로부터 회복하였고, 유럽의 곡창지대는 제 기능을 하기 시작한다. 그러자 미국의 농산물 수출은 줄어들기 시작했고, 농민의 피해는 커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후버 대통령 역시 표를 얻기 위해 달콤한 말로 민중을 꾀었다. 스무트(Smoot)-할리(Hawley) 관세법이라 일컫는 법을 제정했다. 스무트-할리 관세법의 목적은 “정부 수입을 늘리고, 외국과의 통상을 규제하며, 미국의 산업을 장려하고, 미국의 일자리를 보호하는 등의 목적을 위한 법”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실제 법의 이름은 “정부 수입을-생략-위한 법”이고, 법의 이름이 너무 길어 스무트-할리법이라고 일컬어진다), 외국(당시 유럽)에서 미국으로 수입되는 농산물과 제품에 높은 관세를 메겨, 결과적으로 자국의 기업과 농민을 보호하겠다는 것이었다. 좋다. 법의 목적과 내용만 보면 자국민을 보호하는 아름다운 법이다. 그러나 과연 이 법은 성공했을까? 결과는 “No”다. 유럽 국가는 바보가 아니다. 미국이 자기 나라의 물건엔 높은 관세를 메겨 수입하지 않고, 미국의 물건을 유럽 국가에 판다. 이렇게 되면 유럽의 입장에선 손해를 본다. 따라서 유럽도 이에 맞서 미국의 수출품에 대한 관세를 높인다. 그러면 세계의 수출입은 줄어든다. 이에 따라 세계적으로 물건이 안 팔리고 재고는 늘어난다. 불황이 시작됐다. 물론 단순히 스무트-할리 관세법의 제정으로 인해 대공황이 발발한 것은 아닐 것이다. 수많은 요인이 대공황을 유발했지만 스무트-할리 관세법 역시 그중 하나이다.

스무트-할리 관세법에 대하여 알게 되니 러다이트 운동과 비슷한 생각이 들었다. 정말 멍청한 법이라는 생각이다. 경제에서 자주 하는 말 중 하나가 소비자는 합리적인 선택을 한다는 것인데, 스무트-할리
관세법은 그것을 생각하지 못했다. 보복 관세로 이어지는 관세 전쟁으로 인해 세계경제는 피폐해졌다. “설마 이런 일이 현대에도 또 일어나진 않겠지”라는 내 생각은 러다이트 운동 때와 같이 빗나갔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이런 일이 2000년대에 또 일어났다. 흔히 중국 마늘 분쟁이라 일컫는 사건이다. 중국에서 저렴한 마늘이 많이 수입되자 우리나라의 마늘은 가격 경쟁력을 잃는다. 이에 농민이 피해를 보자, 중국의 마늘에 대하여 315%라는 어마어마한 관세를 메긴다. 국내 마늘 시장의 규모가 약 890만 달러였다. 한국에서 관세 폭탄을 먹이자 이에 대한 보복으로 중국은 폴리에틸렌과 휴대전화기기의 수입을 금지했다. 그 시장의 규모는 5억 달러였다. 시장의 규모가 약 60배 차이 난다. 890만 시장을 구제하고자, 5억 달러의 시장을 포기한 셈이다. 농민이 피해를 본다는 것은 너무나도 마음이 아프다. 그러나 시장의 규모에서 비교가 안 된다. 휴대전화 시장은 계속 성장하고 있고, 마늘 시장은 한계가 있다. 이것이야말로 소탐대실의 예라고 생각되고, 현대판 스무트-할리 관세법이라고 생각된다. 우리는 과거의 사실로부터 현재를 통찰해야 한다.

또한, 일부 사람들은 세계 2차 대전이 대공황을 끝냈다고 믿곤 한다. 이것은 통계적 오류에 기인한 미신이다. 1929년 3.2%였던 실업률이 1933년 25%까지 치솟았다. 4, 5명 중 한 명은 실직자인 상태가 10년 이상 지속됐다. 이런 상황에서 전쟁이 발발하고, 1944년엔 실업률이 1.2%까지 떨어졌다. 또한, GDP는 1940-43년 동안 84%나 증가했다. 이런 통계적 수치만 보면 전쟁이 대공황을 해결한 것 같은 착각이 든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미국은 전쟁을 위해 일할 수 있는 인력 중 20%가량을 군인으로 징집했다. 군인이 된 사람은 실직자가 아니므로 실업률이 급감한 것이다. GDP는 특정 기간 동안 생산된 최종재화와 서비스의 총량이다. 총, 탱크, 전투기 등 군수물자를 생산하는데 많은 자본이 사용되었기 때문에 GDP는 증가하였다. 하지만 이렇게 증가한 GDP는 민생에 실질적인 도움이 되진 못한다. 쌀이나 밀의 생산이 증가하거나, 자동차, 컴퓨터, 에어컨 등 국민들이 사용하는 제품이 생산되어 GDP가 증가하면 그것은 민생에 도움이 되지만, 군수물자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과 관련된 예로는 경제학자 프레드릭 바스티아의 ‘깨어진 유리창’의 예가 있다. 어느 아이가 일부러 제과점의 유리창을 깼다. 지나가던 사람들은 제과점 주인을 불쌍하게 생각한다. 이때 어느 사람(사이비 경제학자)이 저 아이가 유리창을 깼기 때문에 유리장수는 돈을 벌고, 유리장수가 번 돈을 정육점에서 쓰고, 정육점 주인은 식당에서 쓴다. 이렇듯 돈이 돌고 돌아 경제가 활성화된다고 한다. 이런 식의 논리라면 일부러 유리창을 깬 아이는 경제를 활성화시킨 착한 아이가 된다. 하지만 우리의 상식은 그렇지 않다. 물론 사이비 경제학자가 한 말이 모조리 틀린 말은 아니다. 그 아이가 창을 깼기에 유리장수는 돈을 벌었다. 하지만 제과점 주인은 그렇지 않다. 제과점 주인은 그 돈으로 구두를 사려고 했지만, 창이 깨져 어쩔 수 없이 유리창을 수리한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제과점 주인은 새 구두를 가질 수 있지만, 유리창이 깨짐으로써 구두를 가질 수 없다. 즉, 사회의 자원이 의미 없이 소비됐다. 만약 사이비 경제학자의 논리가 사실이라면, 우리는 특별한 경제 정책이 필요 없다. 단순히 경제를 활성화시키기 위해 유리창을 깨면 된다. 이처럼, 전쟁이 대공황을 끝냈다는 주장 또한 매우 위험하다. 그 주장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전쟁을 일으켜 경제를 활성화시키면 된다. 이것은 굉장히 어리석은 생각이다. 전쟁은 파괴를 가져온다. 전쟁은 자본과 부를 축적하는 사건이 아니라, 자본과 축적된 부를 파괴한다. 전쟁이 없었다면 군수물자를 생산하는 돈은 다른 생산적인 활동에 사용됐을 것이다. 죽음과 파괴는 결코 번영을 낳지 않는다.

내 생각엔 이 책을 읽는다고 해서 경제에 대한 이해심이 깊어지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책의 주장만 믿고 따르는 것도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50가지 사건이 나오지만 많은 부분의 교훈은 자유 무역주의의 옹호와 케인스이론에 대한 비판이다. 나는 자유 무역주의를 옹호는 입장이지만 무조건 그것만이 옳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 책 외에도 다양한 논점을 가진 책을 읽어보고 자신의 견해를 만드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좋았던 것은 경제에 대한 흥미를 불어넣어 주었기 때문이다. 경제에 관심조차 없던 공대생을, 1년에 1권의 책도 안 읽는 내가 1주일 동안 잡고 읽을 수 있었던 건 재밌었기 때문이다.

사실 이 책은 공대생이고 경제에 대하여는 문외한인 나에겐 불친절한 책이었다. 앞에서 말했듯, 경제에 대한 지식이 전무한 나에겐 경제 용어들 하나하나가 어려웠고, 경제적 인과관계에 대하여 파악하기 어려웠다. 금본위제,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스태그플레이션, 대처리즘, 케인스이론 등 많은 용어가 나오지만, 설명조차 안 하고 이야기를 풀어가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정부의 긴축정책이 왜 그런 결과를 일으키는지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 그러므로 번거롭더라도 스스로 더 찾아보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우리는 미래를 ‘알’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과거는 알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과거의 사건으로부터 미래를 ‘예측’할 수는 있다. 과거에 기계를 파괴하여 일자리를 찾으려고 한 러다이트 운동이 현대로 이어져 전통시장을 지키려 대형마트를 규제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과거에 자국 농민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스무트-할리 관세법이 현대로 이어져 중국과 마늘 분쟁을 일으켰다. 모든 결과로 경제를 피폐해졌다. 우리는 과거의 사건으로부터 미래를 예측해야 하고, 과거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아야 한다. 그것이 이 책이 주는 교훈이며, 우리가 역사를 공부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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