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논문

조선시대 국난극복을 위한 신상(神像): 서울 관왕묘의 <관우도>
Painting of Guan Yu of the Kwanwang Tomb in Seoul
Document Type
Article
Source
강좌 미술사 / THE MISULSA (The Art History Journal). Dec 31, 2021 57:185
Subject
관우
關羽
관우도
關羽圖
무신도
巫神圖
관왕묘
關王廟
관성교
關聖敎
관제
關帝
삼국지연의
三國志演義
Guan Yu
Guan Yu Painting
Guan Di
Kwanwang Tomb
Guan-sung Taosim
Shaman Spirit Painting
Romance of the Three Kingdoms
Language
Korean
ISSN
1226-6604
Abstract
이 글은 서울 관왕묘에 봉안된 <관우도>가 중국의 전통적인 관우 도상의 수용과 변화를 거쳐 조선식으로 토착화되는 과정을 알아보는 글이다. 조선 시대 국가 주도로 건립된 서울의 관왕묘는 총 4곳으로 건립된 시기는 다르지만 건립과 관우도 제작 목적은 역사적으로 국가가 위기에 처한 위중한 사태에 국난의 극복을 위한 매개체로 활용되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조선 전반기 선조대에 중국의 요청에 의해 건립된 남묘, 동묘의 <관우도>는 당대 문헌 기록을 통해 살펴본 결과 중국에서 유입된 관우도나 삽화가 포함된 『삼국지』류의 소설 등의 도상과 관련 있음을 알 수 있다. 전통적인 관우 도상은 숙종의 어제시 표현대로 큰 키, 대춧빛 붉은 얼굴에 봉황의 눈, 누워있는 누에 같은 눈썹, 삼각으로 길게 뻗은 수염을 하고 청건에 녹색 전포를 입고 지물로는 『춘추』와 청룡언월도를 갖추고 적토마를 곁에 두고 있다. 즉 이 시기 <관우도>의 유형은 유존작과 문헌기록을 통해 보면 3가지로 요약된다. 앞에서 언급한 도상형식을 갖춘 ‘전신 단독상’과 삼국지 주요 이야기가 도상화된 ‘고사인물도상’ 및 윤두서의 작품으로 전하는 ‘반신 성현초상류’로 나눌 수 있다. 또한 ‘甲冑 장군상’ 등의 유형이 존재했을 가능성도 있다. 근대기 남묘, 동묘 및 고종대에 건립된 북묘와 서묘의 <관우도>는 도상과 성격이 유사하다. 필자는 북묘, 서묘 조각상과 아울러 근대기 사진으로 전하는 관우도상을 적극 분석하였다. 이를 통해서는 북묘와 서묘의 관우도가 이전 시기 3가지 유형을 유지하면서도 좀 더 분화된 유형과 양식을 갖추고 있음을 알았다. 그 이유는 당시 유행한 관성교와 같은 관우를 신앙하는 천수사나 충진사 등의 종교단체나 조직의 경전이나 판화와 같은 인쇄물에 묘사된 관우 도상을 따랐기 때문이다. 이 시기 관우도상의 특징은 유비, 장비를 같이 그리거나 소나무, 춘추가 올려진 바위 등의 배경에 관평과 주창 등의 협시가 같이 등장하는 ‘삼존상’, 관우와 주창을 그린 ‘이존상’ 및 ‘전신단독상’, ‘반신상’ 등으로 제작되었다는 것이다. 조선 전반기 관우도가 장군의 모습을 한 무장이나 충신상이 주류였다면 근대기의 관우상은 巫神圖의 성격과 양식으로 제작된 황제나 왕의 복식을 한 군왕상이 많다는 것이다. 또한 예배상인 조각상 뒤에 영정을 걸어 전당을 장엄하였다. 당시 관우상의 복식은 청대의 것을 모방하기보다 조선의 복식과 지물 및 장식, 문양을 융합해 조선화된 관우도를 제작하였다. 특히 익선관, 금관, 빗관, 면류관에 황색, 홍색 곤룡포나 면복 등 고종과 순종의 복식을 형상화한 도상이 주목된다. 근대기 관우도상의 이러한 특징은 고종이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로 등극한 후 1901년 관왕묘를 관제묘로 격상시키고 악장을 새로 제정하여 관우 신앙을 위태로운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방편으로 삼았던 시기와 일치한다. 특히 왕실 주도로 창건된 관왕묘에 무당을 祭主로 두면서 관우가 武神, 장군신, 재물신 등 기복 신앙의 예배 대상으로 민간층으로 급속도로 확산되는데 서울 관왕묘의 <관우도>는 그러한 변화를 반영하고 있다.
This study is the research on Guan Yu's faith and Painting of Guan Yu of the Kwanwang Tomb in Seoul. This article identifies the political character of Guan Yu's faith, which was used as a medium for overcoming national difficulties by the ruling class in the Joseon. Historically, Guan Yu died in spite of numerous meritorious deeds and achievements, which became popular as Guan Yu's folklore and religious belief since his death. Since then, after the popularity of the novel "Romance of the Three Kingdoms," its prestige has expanded, becoming one of the most popular objects of worship in shamanism as an all-around god who is versatile and achieves all wishes. In this regard, Guan Yu looked into the causes and processes worshipped in China as the god of loyalty, the god of war, the god of wealth, and the god of protecting the country. And it was politically utilized by King Sukjong, King Yeongjo, King Jeongjo and King Gojong during the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 and at the request of China. In Joseon era, 'Icon of Guan Yu' was designed to decorate or honor Guan Yu Shrine, with illustrations and scrolls drawn for the enjoyment and understanding of novels due to the influx and trend of the Three Kingdoms. This paper focused on the process of changing the "Portrait of Guan Yu" of Gwanwang Tomb in Seoul, which is used for the political purposes of the royal family, into a Joseon style. Through this article, the types and characteristics of the paintings of Guan Yu which were produced in the Joseon era, were identified to examine the process of integrating Confucianism, Buddhism, Taoism with the folk shamanism and becoming indigenous to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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