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논문
麗末鮮初 乳牛所의 성격 변화와 우유 생산 / ’YUWOOSO’ and Milk Production in late Goryeo and early Joseon
Document Type
Dissertation/ Thesis
Source
Subject
Language
Korean
Abstract
이 글은 여말선초 우유의 생산 배경과 제도, 소비되는 양상 및 우유 가공법에 대해 논의하였다. 원의 영향이 있기 이전부터, 동물의 젖을 먹는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었고, 젖은 신성하고 귀한 약재로 취급되었다. 그러나 당시는 우유의 활용도가 높지 않았고, 국가적으로도 우유를 위한 소를 사육하고 있지는 않았다. 그러나 원 간섭기를 거치며 원의 공주와 케링구[怯怜口] 등 원의 사람들이 다양한 통로를 통해 고려로 들어오고 몽골혈통의 고려왕들이 탄생하면서, 원의 음식문화가 전래되었고 원의 주식인 우유에 대해서도 국가적인 수요가 발생하였을 것이다. 원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우유 가공품은 원의 藥膳書인 를 통해 그 품목을 확인하였다. 이러한 배경을 통해 고려 말 특수행정구역 所가 사라지는 흐름에도 불구하고, 우유를 정기적이고 안정적으로 생산하기 위하여 고려 왕실은 현 파주에 유우소를 설치하였을 것이다. 또한 원 간섭기 이전에는 우유를 오직 약재로 섭취하다가, 유우소가 설치되자 음식을 담당하는 관직 膳夫가 우유를 조리한 것으로 보아 식재와 약재의 경계에 위치하게 되는 것으로 우유의 기능이 변화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이후 조선 초가 되면 원으로부터 영향은 벗어났으나 우유 생산은 전례대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특히 조선 초 酥油赤는 우유 가공품을 생산하는 특수 신분으로, 이들의 존재는 원으로부터의 영향이 잔존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조선 초 유우소는 여전히 우유 생산을 담당하였지만, 도성 내에 유우소가 이전하게 되면서 특수행정구역 所보다는 일반 기관으로 그 성격이 변화된 것으로 보인다. 유우소는 세종 20년 폐지되는데, 우유는 생산 기간이 한정적이기 때문에 소가 출산을 더 이상 하지 못하게 되면 乳牛로 분류될 수 없다. 따라서 새롭게 乳牛를 공급받을 체계가 구축되어 있지 않았던 유우소에는 乳牛가 아닌 소들이 누적되면서 유우소의 기능을 제대로 할 수 없게 되었고, 더불어 유우소를 대체할 기관이 존재했기에 유우소는 폐지되었다. 유우소가 폐지된 이후 우유 생산을 담당한 기관은 전국의 목장을 기반으로 하여 乳牛를 계속 공급할 수 있었던 사복시였다. 조선 초 이후의 우유 생산은 분업화되어, 사복시에서 乳牛를 계속 공급하지만 우유의 가공과 진공은 내의원이 담당하게 되었다. 또한, 조선 초 의서인 을 통해 조선 초의 우유 가공품이 다양해진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酪·酥·醍醐 등의 우유 가공품을 이해하고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지만, 그 조리법은 통일되어 있지 않고 용어도 혼재하여 사용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