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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감 공모전 우수작
제목: 당신은 생각보다 힘이 세다
학과: 경제학과, 이름: 김*우, 선정연도: 2015
내용: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한국 교육 예찬론’은 이미 유명한 이야기다. 지난 2009년 취임한 이래로, 그는 수차례 한국의 우수한 교육 체계와 높은 교육열을 추켜 세워왔는데 그 중 특히 강조한 것이 교사의 역할이다. 그는 한국의 교사를 ‘국가 건설자’로 표현할 정도로 그 역할에 각별한 의미를 부여했다. 유능하고 헌신적인 한국의 교사들이 학생들에게 양질의 교육 서비스를 제공하고 그 학생들이 고급 인적 자본으로 성장해 사회 각 분야, 산업에서 국가 발전을 이끌어 왔다는 것이다. 인적자본을 공급한다는 관점에서 볼 때 한국 교육은 모범사례가 될만하며 그 최전방에 우수한 교사가 있다는 것이 오바마 대통령의 일관된 견해로 보인다. 그에 따르면 한국의 교사들은 ‘의사에 버금가는 소득과 사회적 지위’를 지닌 직업으로 사회적으로 높은 존경과 선망을 받고 있다. 그러한 이유로 인재들이 앞다퉈 교사를 지망해 왔으며, 높은 수준의 인적 자원이 양질의 교육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라는 것이다. 반면 미국의 사정은 조금 다르다. 미국 초기 교사는 개척 시기 농한기에 자제의 교육을 위임받은 고용인에 불과했다. 하지만 19세기 후반부터 사범학교의 정비 ·확충, 나아가 대학으로의 승격과 같은 제도적 변천을 거치면서 사회적 평가도 상대적으로 높아졌다. 따라서 과거 미국 사회에서 교사는 크게 존경받거나 높은 대우를 받는 직업이 아니었지만 최근 들어 명문 아이비리그 대학 출신 졸업생들이 유입되고 있고 만족도와 사회적 평판이 높아지고 있다. (두산백과, <교사의 사회적 지위> 참조) 오바마 대통령이 한국 교육의 성공으로 우수한 교사를 지목한 것은 미국 내 교사의 처우 개선과 지원 강조로 이어진다. 오늘날 미국 사회에서 교사의 사회적 평판이 높아지는 추세지만 여전히 낮은 교사의 지위를 향상해 더욱 우수한 인재를 공교육으로 유입시켜 언론에 ‘평준화 실험의 실패’ 등으로 비판받고 있는 공교육 강화 정책에 힘을 실어주고자 하는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대다수 한국 언론은 오바마 대통령의 표현 하나하나에 큰 의미를 부여하며 ‘오바마 한국 교육 극찬’‘오바마도 인정한 한국 교사의 우수함’ 등의 제목을 달아 앞다퉈 기사를 내 왔다. 하지만 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한국인들은 얼마나 될까. 여러 가지 교육 통계나 연구 결과를 인용하지 않더라도 한국 교육의 현실을 마냥 긍정적으로 보는 시선은 많지 않다. 높은 학업 성취도와 비교하면 턱없이 낮은 학업 의욕. 정확히 그에 비례하는 스트레스와 그로 인한 자살률. 대학 진학률과 그로 인한 입시 경쟁과 사교육비 문제. 무너지는 교권과, 고통받는 학생들. 선생님과 학생, 그리고 학부모까지 교육의 직접적인 당사자 누구도 행복하지 않은 한국 교육은 명암이 공존하되, 때로는 어둠이 빛을 잠식하는 게 아닌지 걱정이 될 정도다. 너무나 중요하기에 쉽지 않은 문제다. 때로 어려운 문제일수록 답은 가까운 곳에 있다. 『프리덤 라이터스 다이어리』 속 그루웰 선생님과 ‘자유의 작가들’은 미국 내 공교육의 성공사례를 보여준다. 미국 대통령의 예찬과 역설적이게도 한국의 교육 정책이 미국의 교육 정책을 닮아간다는 점을 참고하면, 한국 교육 현장에 시사하는 바도 크다. 사실 『프리덤 라이터스 다이어리』 속 여러 일기들이 쓰인 배경이 되는 그루웰 선생님과 윌슨고등학교 203호 학생들의 이야기는 지극히 ‘미국적’인 성장담, 성공담으로 볼 수도 있다. 다양한 인종의 문제아들로 이뤄진 학급인 윌슨고등학교 203호. 이곳 학생들은 폭력과 마약, 음주, 흡연, 총격, 살인, 낙태, 강간이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환경에서 방황하며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이곳에 갓 임용된 국어 교사 에린 그루웰이 부임한다. 학생들은 ‘당연히’ 그를 경계하고 어떠한 기대도 하지 않는다.
그 역시 다른 선생님과 마찬가지로 적당히 시간만 보내다 가겠지. 그 역시 다른 선생님처럼 자신들을 경계하며 비딱하게 보겠지. 하지만 그루웰 선생님은 달랐다. 그녀는 203호 학생들을 똑같은 ‘사람’으로, 그만큼 존엄하고 행복해야 하는, 성장해야 하는 사람으로 보았다. 그리고 그 사실을 그들도 자각하도록 헌신적으로 노력한다. 그들의 마음을 여는 열쇠가 바로 ‘프리덤 라이터스’ 스스로 자유의 작가가 되어 자신들의 상처와 고통을 직시하고, 나아가 타인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글쓰기다. 자유를 위한 글쓰기, 글쓰기를 통한 자유. 그루웰 선생님은 그들이의 자유를 얻기 위한 여정에 든든한 조력자가 된다. 그들을 둘러싼 시선은 편견으로 가득하다. 흑인들은 모두 술과 마약에 찌들었으며, 히스패닉은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시한폭탄이다. 원래 그들은 그렇기에 어떠한 방법도 소용이 없다. 그저 일이 너무 커지지 않도록 적절히 통제하는 것만이 최선이다. 그러므로 한정된 예산과, 교육적 지원을 좋은 대학에 진학할 만한 ‘우수한’ 학생들에게만 맞추는 교육 현실은, 어딘지 낯선 풍경은 아니다. 어쩌면 그들을 괴물로 만든 것은, 아니 괴물로 머물게 한 것은 어른들의 비뚤어진 시선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흑인이니까 어차피; ’그래봤자 히스패닉이니까‘ 하는 만들어진 믿은은 그들 스스로의 삶을 제약한다. 그들은 소수계 문제아들로 이뤄진 학급이라는 편견을 극복하기 위해, 정상적인 삶을 살아갈 수 없을 것이라는 편견을 이겨내기 위해 함께 문학을 읽고, 글을 쓴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상처를 직시하고 그것에서 벗어나는 용기를 얻는다. 그리고 세상을 감동을 준다. 졸업은커녕 생을 걱정해야 했던 그들 중 상당수는 무사히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한다. 여기까지라면 전형적인 미국식 드라마의 플롯이다. 물론, 그런 평범한 이야기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 미국 교육 현장에서 일어난 성공 사례라는 것이다. 자유의 작가들이 남긴 기록은 예외적이고 일회적인 이벤트가 아닌, ‘프리덤 라이터스 교육법’이라는 지속 가능한 교육법으로 자리를 잡았다. 나아가 자유의 작가들은 그들이 경험한 치유의 글쓰기와 따뜻한 환대를 후배들에게 돌려주기 위해 자유의 작가 재단을 설립한다. 희망은 이렇게 이어져 나간다. 그루웰 선생님의 수업은 무엇이 달랐을까. 우선 그곳엔 밑줄이 없고 풀어야 할 문제가 없다. 핵심어와 주제를 찾아 밑줄을 그을 필요가 없다. 작가 자신도 모른다는 작가의 의도나, 전혀 의도하지 않았다는 화자의 의도 등을 찍어내기 위해 애쓸 필요도 없다. 수업은 단순하다. 함께 문학을 읽고 사유하고, 글을 쓴다. 그리고 그것을 나눈다. 때로는 책을 바탕으로 연극을 하거나 영화를 만들기도 한다. 어쨌거나 그들이 함께 읽는 문학은 자신들이 딛고 사는 현실과 동떨어진 아름다운 이야기들만이 아니다. 그들처럼 고통스럽고 괴로운, 어쩌면 더욱 잔인한 상황에 부닥친 사람들의 이야기들이다. 그들은 문학 속 이야기에, 주인공에 공감하고 위로받고 용기를 얻는다. 안네 프랑크, 즐라타 필리포비치 등이 그들의 친구가 된다.
타인의 이야기지만 그곳에서 자신을 발견한다. 그것을 글로 쓰고 나누면서 한없이 무겁고 벗어날 수 없을 것만 같던 삶의 무게를 객관적으로 느끼게 된다. 무엇으로든 표현할 수 있다면, 표현되는 순간, 고통은 더는 고통이 아니다. 글쓰기는 고통을 표현하고 감당할 수 있게 만드는 효과적인 방법이다. 그리고 그들은 흑인 차별에 항의하는 목소리를 내며 미국을 여행한 ‘자유의 여행자’에서 모티브를 얻어 차별과 편견, 폭력에 맞서는 ‘자유의 작가들’이 된다. 자신을 스스로 치유한 것을 넘어 세상에 희망의 증거가 된 것이다. 그들은 깨닫는다. 총격과 집단 구타가 난무하는 공포 속에서 자신을 진정 지키는 것은 총이 아니라 용기와 희망이며, 고통은 술이나 마약으로 잠시 잊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직시함으로써 맞서야 한다는 것을. 진정한 자유는 거리를 방황하는 것에 있지 않고 자신을, 타인을 발견하고 ‘좋은 삶’을 향해 주어진 시간을 충실히 활용하는 것에 있다는 것을. 사실 그루웰 선생님과 함께 했던 ‘자유의 작가들’모두가 좋은 대학에 가거나, 행복을 찾았다는 마냥 그런 밝은 이야기는 아니다. 이 책에는 미처 실리지 못한 이야기도 분명 많을 것이다. 누군가는 여전히 방황하고 있으며 고통스러운 현실에 괴로워하고 있을 테니까. 하지만 그들에게도 ‘자유의 작가’로서 경험한 시간들이 헛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자유의 작가로 활동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법, 살아내는 법을 배웠기 때문이다. “만약 지옥을 통과하고 있다면 계속 가라”(윈스턴 처칠) 어쩌면 사람이 불행한 이유는 지옥 같은 환경 그 자체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지옥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사실에 절망해 그 자리에 주저앉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어차피 난 안될거야. 진정한 교사는 그들이 스스로 그 자리에서 일어나 묵묵히 가던 길을 나아가는 힘을 길러주는 것이다. 그렇게 그들도 결국 긴 터널을 지나 새로운 세상에 발을 내디딜 것이다. 암울하고 고통스러운 고백들로 가득한 전반부를 지나 후반부로 갈수록 일기의 내용은 희망과 용기로 점점 채워져 간다. 이제 그들은 절망스러운 현실에서 벗어나는 힘을 얻고 밝은 미래를 꿈꾸기 시작한다. 학생들은 너무나 중요하고 당연하지만 잊고 살아온 사실들을 발견한다. "우리는 기꺼이 사회적 꼬리표나 숫자 혹은 통계치 일부가 되었고, 그것이 당연한 현실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앞으로 누군가 나의 인종을 묻는다면 즐라타처럼 “전 그냥 사람입니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188p) 그리;고 자연스럽게 새내기 교사인 그루웰 선생님도 성장해간다. 진정한 교육은 가르치는 이도 함께 성장시킨다. 당장 필자의 지나온 시절 교실 속 풍경을 떠올려 본다. 늘 성실히 수업에 임하지만 무언가 힘이 없어 보이던 선생님들. 사교육에 길든 학생들은 학교 수업보다 학원에, 인터넷 강의에 의존한다. 그럴 수밖에. 고등학교 교육은 이미 좋은 대학에 입학하기 위한 과정에 불과했다. 글쓰기는커녕, 교과서나 참고서 이외에 소설이나 교양 서적을 읽으면 눈총을 받아야 했다. 그런 학생들을 알면서도 애써 외면해야 했을 선생님들, 독서를 장려하기는커녕 당장 수능에 도움이 되지 않으니 혼내야 했던 선생님들. 필자가 본 것은 그분들의 의기소침함이었을지도 모르고, 그 의기소침함은 교육 현실과 그곳에 속한 자신에 대한 자괴감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물론 한국의 이런 교실 풍경은 선생님 개개인의 잘못만은 아닐 것이다. 그보다 더 크고 근본적인 교육의 문제, 더 나아가 그것을 둘러싼 사회 구조의 문제다. 교육이 이미 한정된 자원을 획득하기 위한 선발의 기능만을 수행하는 남아버린 상황에서 학교에서 친구와 진정한 우정을 쌓거나 선생님과 진지한 지적 교류를 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풍부한 독서와 다양한 경험을 통해 나를 인식하고, 자유롭게 사유하고, 자신을 표현하고, 진로를 탐색하는 시간을 기대하는 것은 더욱 무리다. 그런 상황에서도 선생님들은 최선을 다했고 필자에게 많은 힘과 용기를 주셨다. 그분들에게 받은 배움이 오늘날 나를 이루고 있을 테니까. 다시 지난날의 선생님들을 만난다면 고마움과 함께 위로를 전해드리고 싶어졌다. 지난날 내가 받았던 위로와 격려처럼. 그리고 함께 고민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것은 결코 그들을 못 믿어서가 아니라 모두가 함께 고민해야 하는 문제기 때문이다. 교육은 그들만이 짊어져야 하는 고민이 아니라 함께 나누는 고민이어야 한다. 지금도 어딘가에서 혼자 외롭게 고민을 짊어지고 있는 선생님이 있다면 그루웰 선생님과 자유의 작가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 당신은 생각보다 위대하며, 한 인간의 삶을 바꿀 수 있다고.
이 글을 쓰던 중 경기도의 어느 고등학교에서 기간제 교사가 학생들에게 빗자루로 폭행을 당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자신이 가르치는 제자에게 폭행을 당하며 아픔과 그보다 큰 비참함을 느꼈을 선생님을 떠올리면 분노와 슬픔이 교차한다.
그럼에도 섣부르게 가해 학생에 대한 강력한 체벌 허용(부활)만이 유일한 해법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교실에서 벌어지는 교사에 대한 폭력을 단순히 개인의 일탈로 치부해 매로 다스리기엔 이미 너무나 많은 일탈이 벌어지고 있으며, 그 강도도 이미 어떤 매보다 더하다.
게다가 체벌 강화를 근본적인 대책으로 제시하는 것은 교육 문제에 대한 해결책임을 교육 현장의 교사에게만 전가하는 것이다. 분명 교육의 주체는 교사와 학생이다. 하지만 교육 문제는 다양한 요건에 영향을 받으며, 다양한 주체, 나아가 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친다. 교실은 교육 문제의 최전선이며 실제로 교육이 일어나는 공간이다. 교실의 문제는 교육의 근본적인 실패에서 비롯된다. 그런데도 교육의 복합적이고 총체적인 특성을 외면한 채 무턱대고 ‘사랑의 매’만 다시 꺼내드는 것은 알레르기성 비염 환자에게 하릴없이 코만 풀도록 하는 겪이 아닐까. 결국, 이것은 교육을 둘러싼 당사자들이 함께 고민해야 할 문제다. 우리는 왜 지난날 ‘사랑의 매’를 부러트렸는가. 교권 추락이 아니라 교육의 추락이 문제다. 교육을 회복해야 한다.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교육은 만능열쇠가 아니다. 어떤 점에서 교육이, 교사가 학생에게 미칠 수 있는 영향은 생각보다 아주 제한적인지도 모른다. 말을 물가로 끌고 갈 수는 있어도 물을 마시게 할 수는 없듯이. 그럼에도 우리는 교육에 무엇을 기대해야 하는가. 교육만능주의는 경계해야 하지만 교육만이, 교사만이 할 수 있는 영역이 여전히 존재한다. 우리의 과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그루웰 선생님과 자유의 작가들은 그러한 질문에 대한 좋은 답을 하나 보여줬다. 문제의 답은 하나가 아니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글쓰기는 힘이 세다. 그리고 당신은 생각보다 더 힘이 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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