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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실크로드의 중심, 돈황의 역사와 문화를 따라서
학과: 사학과, 이름: 황*봉, 선정연도: 2015
추천내용: 현재 수강 중인 한 강의에서 이 책 『돈황의 역사와 문화』를 읽고 내용 요약 및 감상을 쓰는 과제를 받았다. 사실 강의시간 중에 돈황이 어떤 곳인지에 대해 여러 차례 언급되었기에 아주 생소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 이전에도 고등학교 국사 수업 당시 간략하게 돈황이라는 곳에서 혜초 스님의 『왕오천축국전』이 발견되었고 그 책이 현재는 프랑스 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있다는 내용을 들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세계지도를 펴놓는다고 가정해봤을 때, 돈황이 어디쯤 위치해 있는지, 그 지역의 역사는 어떠하였는지,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는지 등에 대해서는 사실상 아는 바가 하나도 없다고 보는 게 맞을 정도였다. 그렇기에 과제로 접한 『돈황의 역사와 문화』은 돈황에 대해 잘 알지 못했던 내게 많은 것을 알려주었다. 제목 그대로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돈황이 어떻게 역사적으로 발전 및 쇠퇴해왔는지, 이 지역에는 어떤 문화가 어떻게 형성되어왔는지를 서술하고 있고, 특히 이곳에서 발견되어 세계적 주목을 받게 된 수많은 막고굴과 고문헌들에 대한 내용이 써져있다.
돈황은 황하의 서쪽, 즉 하서의 끝에 위치해있다. 이곳은 중국과 서방세계를 잇는 실크로드 상에 있는 수많은 오아시스 중에서 아주 중요한 도시이다. 북으로는 고비사막이, 남으로는 티베트 고원이 있으며, 서로는 타클라마칸 사막이 있으며, 기후도 완전한 내륙성 기후로 건조하고 삭막한 기후를 가진 오아시스이지만, 예부터 많은 사람들의 노력으로 생성 및 발전해왔다. 내륙아시아로서는 비교적 풍족한 자연조건을 가지고 있어 많은 사람들이 머물러 거주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곳에는 예부터 한족문화를 비롯한 이란 문화, 티벳 문화, 그리고 서역 문화까지 다양한 문화가 왕성하게 유입되어 혼재해 왔다.
한편, 돈황에는 유명한 막고굴 천불동이 있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에 만들어진 크고 작은 600여 개의 동굴은 4세기 중엽부터 13세기까지 파여졌고, 돈황의 역사가 그대로 그려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대와 함께 변해간 불교신앙, 사람들의 취향, 서민의 생활과 애환이 선명하게 투영되어 있다. 1900년 우연히 이곳에서 발견된 수많은 고문서들은 수 백 년 간 잊혀졌던, 중국 서북쪽 끝의 작은 오아시스 돈황을 일약 세계의 주목을 받는 곳으로 바꾸었다. 이들 돈황 문서는 현재 런던에 약 1만 점, 파리에 약 5천 점, 북경에 약 1만 점, 레닌그라드에 약 1만 점, 일본에 약 1천 점으로, 총 4만 점 가까이 남아있다. 이 고문서군의 분석 결과, 정사에는 없는 고대돈황의 일상생활 모습이 또렷이 살아나게 되었고, 바싹 마른 석굴 내의 공기가 천 년 전의 옛 문서들을 거의 그대로 현대에 남겨주어 귀중한 실물을 직접 볼 수 있는 기적을 가져다주었다. 이처럼 돈황 문서의 발견은 금세기 동양학 발전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던 사건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만큼 돈황에 대한 서양 열강의 약탈적이며 비윤리적인 문화침략으로 이어졌다. 물론 외국인 탐험대와 고문서에 관한 관심이 없었다면, 동양학 전반에 있어 커다란 진보로 이어지지 못했을 것이지만 말이다.
돈황의 막고굴에 대한 설명 뒤에는 돈황의 역사와 그 속에서 꽃피운 문화에 대해 시간 순으로 서술하고 있다. 선사시대의 돈황 지역에 대해 밝혀진 것은 현재 거의 없는 상황이지만, 확실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3-4천 년 전부터 하서 지방 오아시스에 농경 정착문화가 나타났다는 것이다. 이 지역에는 월지라는 민족이 유사 이전부터 동서 교역에서 활발히 활동하였으나, 기원전 3세기에 이르면 흉노에 의해 위협을 받기 시작했고 기원전 1세기 공격을 받아 흉노가 이 지역을 지배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후 한 무제의 토벌로 흉노는 이 지역에서 물러나게 된다. 새로운 지배자가 된 한은 이곳에 무위(양주), 장액(감주), 주천(숙주), 돈황(사주) 4개의 군, 즉 하서사군을 설치하여 대서역 무역로 확보 및 흉노, 티베트족을 견제하였다. 대체로 전한과 후한시대, 즉 기원전 2세기부터 기원후 2세기까지 약 400년 동안 유지되었다. 그러나 3세기 이후 동아시아 정세가 크게 바뀌어 중국은 삼국의 분립, 5호16국 시대, 남북조의 대립이라는 분열기를 맞게 되었고, 하서 지방은 점차 중원 왕조의 지배에서 벗어나 분리·독립하게 된다. 화려한 서역 무역의 이윤을 한손에 거머쥔 풍요로운 오아시스로, 많은 학자와 명승을 배출하는 문운이 넘치는 도시가 된 돈황은 종교적으로도 중심 지역이 되었다. 이후의 수당시대는 중국사에서 고대문화의 완성기이며 동아시아 사상 가장 화려한 시대로, 이 시기 돈황은 미증유의 번영기를 맞이했다.
비교적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을 무렵인 11세기, 하서 지방 동부에서는 탕구트족의 강력한 서하 왕국이 발흥하고 있었다. 서하는 약탈보다는 중계무역을 통해 세력을 키움으로써 국력이 충실해졌고, 더불어 군사적으로도 크게 성장하여 1036년경에 하서 지방 전역을 제압하였다. 그토록 빛나는 발전을 보였던 돈황은 1036년 서하 공략 이후 역사 속에서의 모습을 거의 감추고 있다. 사료가 대단히 적어지고, 빛나던 오아시스 도시 돈황의 모습도 완전히 사라져 버리고 만 것이다.
13세기 초 서하는 신흥 몽골에게 멸망당하였고, 13세기 말 이후 돈황 지방에는 점차 몽골 유목민의 모습이 많이 보이게 되고 이 경향은 15세기 이후 더욱 더 농후해졌다. 16세기에는 투르판 세력이 급속히 강해져 돈황도 그들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후 200여 년의 기나긴 투르판의 지배는 불교도시 돈황의 많은 문화재를 훼손시켰고, 종교와 문화를 이슬람교의 것으로 많이 바꾸었다. 돈황이 다시 한인의 손에 되돌려진 것은 18세기 이후의 일이었다. 19세기에는 군비를 충실히 함과 동시에 하서 각지에 주민들을 이주시켜 식민 정책을 추진하였다. 한편, 돈황의 막고굴도 이 시기에 다시 주목받기 시작하였고, 앞서 살펴본 중요한 인물인 왕원록에 의해 되살아났다. 그러나 청 왕조의 뒤를 이은 중화민국에게 중일전쟁과 제2차 세계대전의 참화는 너무나도 컸기에, 돈황의 학술조사로는 아무래도 손이 미칠 수 없었다. 1940년 봄에야 장대천의 조사로 이 지방에 대한 관심이 부활하였고, 1942년에는 서북과학고사단의 조사에 이어 1944년 국립돈황예술연구소가 설립되면서 벽화의 모사·수리·보관이 행해지게 되었다. 1951년 이 연구소는 돈황문물연구소로 개명되었고 현재까지도 이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현재 돈황은 옛 문화가 온전히 보존된 곳으로서의 의미뿐만 아니라 실크로드의 근대적 부활로 또 다시 새로운 세계를 여는 중요한 거점이라는 의미로 비상하려 하고 있다.
이렇게 이 책은 돈황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지금까지 밝혀진 거의 모든 것을 알려주는 좋은 책이었다. 돈황 지역에서 융성했던 문화가 어떻게 발전해왔는지를 서술하는 부분에서는 강대국 또는 문화적 중심지의 좋은 모범을 제시해주었고, 어떻게 쇠퇴해갔는가를 보여주는 부분에서는 그 어떤 문화도 영원한 융성은 없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과 같이 글로벌한 시대가 수 백, 수 천 년 전에도 있었다는 것은 내게 신선함으로 다가왔다. 또 서하의 공략 이후 드러나지 않은 부분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밝혀야할 부분이 많다는 뜻이기에 이에 대한 아쉬움의 측면보다는 새로운 발굴과 문헌 해독에 대한 기대와 관심을 끌기에 충분한 것 같다. 현재 진행되는 많은 발굴과 연구로 돈황에 대한 더 많은 역사와 문화에 대한 것들이 새로이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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