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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원인 감동공유 추천글
제목: 낙타샹즈(骆驼祥子)
학과: 중어중문학과, 이름: 한*익, 선정연도: 2012
추천내용: 최근 들어 정치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개인의 역량만으로 꿈을 이루기 어려워진 현실에 대한 불만이 정치에 그대로 투영되고 있기 때문이다. 구조적 모순을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위기의식.<낙타샹즈>가 내게 가져다준 충격이자,대학생들에게 추천하는 이유이다. <낙타샹즈>는 ‘샹즈’라는 중국의 20세기 초 인력거꾼에 관한 이야기이다.
자신만의 인력거를 갖는 꿈을 가진 샹즈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절대 한 눈 파는 일 없이 인력거를 끌지만,사회는 그의 삶 앞에 무심한 도돌이표를 놓으며,그를 번번이 좌절 시킨다.누구보다도 성실했던 샹즈가 꿈을 잃고 좌절하는 모습을 보면,사회의 벽 앞에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을 느낀다.
“비는 부자에게도,가난한 사람에게도 내린다. 의로운 이에게도 의롭지 못한 이에게도 내린다.그러나 사실 비는 공평하지 않았다. 본래 공평하지 않은 세상에 내리기 때문에.”-<낙타샹즈>중에서.
사회가 점점 더 개천에서 용이 나기 어려운 구조로 바뀌어 간다는 얘기를 종종 듣는다.양극화는 심해지고,소수의 1%가 가져가는 부의 총량은 점점 더 늘어나고 있다.사람들은 꿈을 가지라고 너무도 쉽게 말하지만,내리는비조차도 공평하지 않은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다.이런 상황에서 우리 대학생들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샹즈처럼 앞만 보고 달려가다가는 사회가 우리 삶 앞에 언제 도돌이표를 놓을지 모른다.수많은 대학생들이 밤새워 꿈을 향해 달려가면서도,자신이 뛰어야할 필드의 룰이 어떤지는 관심이 없다면 우리는 결국 샹즈의 운명을 벗어날 수 없다.
<낙타샹즈>를 읽고 나면 가위에 눌린 것처럼 불쾌하다.구조적 모순 아래 개인의 노력이 얼마나 헛된 것인지,우울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그래서 너무 우울할 때 이 책을 읽는 것은 권장하지는 않는다.하지만 이러한 위기의식에 대한 공감대가 있을 때야만,우리는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낙타샹즈>는 그러한 공감대 형성할 수 있는 좋은 책이다.
독후감 공모전 우수작
제목: 낙타샹즈
학과: 신문방송학과, 이름: 배*희, 선정연도: 2015
내용: ‘경험은 삶의 비료 같은 것이다. 어떤 경험을 하느냐에 따라 사람들은 각기 다른 모습으로 변한다. 사막에서 목단이 자랄 수 없다. 샹즈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낙타샹즈>는 1930년대 중국 북경의 인력거꾼 샹즈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쓰여진 소설이다. 사실 우리나라에서는 인력거꾼 하면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을 떠올리곤 한다. 나 또한 그러했다. 인력거꾼의 이야기를 다룬다는 점에서 하층민의 비참한 삶을 다양한 방면에서의 역설로 표현해낼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책을 펼쳐 읽는 순간 나는 나의 생각이 틀렸음을 알게 되었다. 이 소설은 샹즈라는 인물에 대해 아주 사실적으로 표현한다. 이에 역설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샹즈의 인생이라는 사실이 서술되어 있을 뿐이었다. 소설의 내용은 이러하다. 샹즈는 젊은 인력거꾼이다. 시골에서 올라와 부모님도, 친구도 없이 오롯이 혼자서 북경에서 살면서 자신의 인력거를 갖겠다는 일념 하나로 3년 동안 아파도 참고 먹는 것, 입는 것도 줄여가며 겨우겨우 돈을 모아 자신의 인력거를 마련하게 된다. 하지만 전쟁으로 인해 자신의 인력거를 빼앗기고 군대에 끌려가게 된다. 다행히 그는 혼란을 틈타 낙타 3마리와 함께 탈영하여 다시 북경으로 돌아오게 된다. 하지만 그의 탈영 과정은 만만치 않았다. 하루를 꼬박 걷는 동안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못해 살아있는 시체의 모습으로 북경으로 돌아와서는 낙타를 시세보다 훨씬 싸게 팔고 받은 돈으로 여인숙에 머물렀다. 그는 이미 많이 지쳐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며칠을 아파서 누워있었다. 몸이 어느 정도 낫자 샹즈가 이전에 인력거를 끌 때부터 알았던 류쓰예를 찾아가 자신의 돈을 맡기고 류쓰예가 운영하는 인력거 대여점에서 인력거를 다시 끌게 된다. 그의 목표는 단 하나, 자신의 인력거를 사는 것이었다. 그는 인력거를 사기 위하여 파렴치한 짓도 마다하지 않았다. 남의 손님을 빼앗거나 손님을 바꿔치기 하는 등 돈을 모으기 위해 악착같이 일했다. 하지만 그의 내면에는 이런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다. ‘열심히 일을 한들 무슨 소용이겠는가?’ 이미 빼앗긴 인력거로 인해 그는 독하게 마음먹는다는 것 자체가 힘들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래도 그는 그의 인력거를 사기 위하여 부잣집의 인력거를 끌기도 했지만 주인의 야박한 인심에 3일 만에 그만두고는 다시 류쓰예의 인력거를 끈다. 류쓰예에게는 외모나 심성이 그리 곱지 않은 딸, 후니우가 있었다. 그녀는 내심 샹즈를 좋아하고 있었다. 그래서 후니우는 아버지가 집을 비운 사이 샹즈를 유혹하여 하룻밤을 보낸다. 이에 마음이 무거워진 샹즈는 차오선생의 집에서 인력거를 끌기로 하여 그곳에서 기거하며 그 집의 일을 하였다. 그곳에서 그는 새로운 인생을 살리라 마음을 먹고 인력거를 위해 열심히 돈을 모으고 있었다. 그런데 불쑥 찾아온 여인이 있었으니 그녀는 바로 후니우였다. 그녀는 샹즈에게 샹즈의 아이를 가졌다며 책임을 지라는 말을 하기 위하여 찾아온 것이었다. 그는 앞이 깜깜해졌다. 그러는 와중에 설상가상으로 차오선생이 공산주의를 설파한다는 이유로 차오선생을 쫓아오던 형사와 마주치는데 그 형사는 자신이 예전에 끌려갔던 군대의 상사였고, 그는 샹즈에게 너만은 살려줄테니 그 대가로 돈을 달라고 하여 샹즈는 자신이 모아둔 돈을 빼앗기게 된다. 그 사이 차오선생이 다른 곳으로 도망가는 바람에 그는 또 모든 것을 잃게 되었다. 그래서 샹즈는 다시 류쓰예의 집에 들어가게 된다. 하지만 조금 다른 모습이었다. 그의 눈에는 영혼이 없었고, 그저 시키는대로 일할 뿐 이었다. 그러다 류쓰예의 생일이 되었고, 그때 후니우는 샹즈의 아이를 가진 것을 아버지께 이야기 하였다. 그 결과 부녀간에 싸움이 일어나게 된다. 류쓰예는 샹즈가 내심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그가 인력거꾼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부녀간의 싸움으로 후니우와 샹즈는 류쓰예의 집에서 쫓겨나게 되었고, 둘은 결혼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결혼과 동시에 후니우의 임신이 결혼을 위한 거짓말이었음을 알게 되고, 크게 상심한다. 그간 마음속에 있었던 책임에 대한 무게감이 아무런 의미가 없어진 것이다. 그는 다시 삶에 대한 의욕을 잃고 살아갔다. 인력거를 끌힘이나 의욕은 예전만하지 못한데 부양가족은 늘어났다는 점이 샹즈를 크게 압박하였다. 그러다 이웃으로 샤오푸즈라는 여자가 오게 되는데 이 여자는 이미 장군의 첩으로 들어갔다가 돌아온 사람이었다. 어린 두 동생과 알코올중독 아버지를 위해 무슨 일이라도 해야 했지만,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고 그녀는 결국 몸을 팔게 된다. 이 일을 후니우가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다. 그러던 중 후니우와 샹즈 사이에 아이가 생기게 되는데, 후니우가 임신해있는 동안 운동량은 부족한데 너무 많이 먹어서 아이가 우량아가 되었고, 그로 인해 출산에 어려움을 겪다가 그만 아이를 낳는 중에 산모와 아기 모두 죽고 만다. 샹즈는 다시 또 모든 것을 잃었다. 그에게 남아있는 것은 후니우의 돈으로 마련하였던 인력거 두 대 뿐이었다. 그는 후니우의 장례를 위하여 인력거를 팔았다. 그러곤 여느 인력거꾼과 다름없이 그저 하루를 살기 위해 인력거를 끌었다. 그에게 더이상의 꿈과 희망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우연히 전에 도망갔던 차오선생을 다시 만나 재기를 꿈꾸게 되었고, 후니우가 죽은 뒤 자신에게 관심을 보였던 샤오푸즈가 기억이 나 그녀를 데리고 차오선생의 집에 들어가려고 하였지만, 샤오푸즈는 이미 사창가에서 자살을 한 지 오래된 후였다. 그는 정말 일말의 희망마저 잃어버린 채로 그저 하루를 위해 인력거를 끌고 세상의 법규나 경찰의 제지는 모두 삐딱하게 대응하며 골칫덩어리가 되고 만다. 그는 스스로 키가 크고 힘이 좋기 때문에 함부로 제지할 수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샹즈는 하루 벌어서 하루 쓰는 생활도 모자라 돈을 빌려서 갚지 않기 시작하고, 여러 사람에게 사기를 치고, 결국은 롼밍이라는 사회주의 운동가를 경찰에 일러바쳐 돈을 번다.(이 당시 중국은 사회주의가 아니었고, 강한 사회주의 설파는 불법이었다.) 그에게 더이상 불로소득이나 더러운 돈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처음 이 책을 다 읽고는 먼저 라오서라는 작가에게 감탄하였다. 사실 우리는 현대 중국의 소설을 접할 기회가 많지 않다. 우리는 대부분 미국이나 프랑스 등 서구 중심의 현대소설을 주로 읽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개인적으로 현대소설에 크게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편이었다. 대부분의 현대소설이 수식이나 꾸밈보다는 사실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주인공의 내면이나 사회적인 상황을 덤덤하게 표현하는데, 이런 점에서 소설의 내용이 머리로는 이해가 되지만 주인공들은 왜 그랬을까에 대해서는 단편적으로만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라오서는 샹즈의 이야기를 아주 사실적으로 이야기하지만 아주 문학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샹즈의 삶이 얼마나 힘들었을지, 그가 그 삶을 이겨내고자 어떠한 노력을 얼마나 하였는지를 문학적 수식방법을 통하여 표현하고 있다. ‘초가을 늦은 밤, 별빛 반짝이는 나뭇잎 사이로 산들바람이 불어오자 샹즈는 고개를 들어 아득히 먼 은하수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처럼 시원한 날에 그의 가슴 또한 그처럼 넓기만 한데 그는 마치 공기가 부족한 것처럼 가슴이 답답했다’ 이 문장에서 보듯이 먼저 초가을의 계절과 샹즈가 바라보는 하늘을 묘사하여 그의 내적인 감정을 더욱 깊이있게 표현하고 있다. 사람의 감정을 단편적인 한 문장으로 드러내는 것 보다 비유를 통하여 풍부하게 감정을 표현하여 소설 속 샹즈의 삶을 더욱 부각시키는 효과를 가져온 것 같다. 그 다음 내가 생각한 것은 ‘이 책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이 책은 열심히 노력하면 보상받는다는 법칙을 산산히 부숴버린다. 샹즈는 열심히 노력했지만 결국 사회에, 사람에, 상황에 발목 잡히고 만다. 특히 샹즈는 사람에게 많은 배신을 당하게 된다. 그가 아무리 인력거라는 목표를 가지고 이를 위해 살아도 그의 상황은 도무지 나아지는 것이 없었다. 그를 좌절시키는 요소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이를 통해 작가는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 나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다 라오서가 한 말을 우연히 발견하게 되었다. '개인을 위해 노력하는 이는 어떻게 하면 개인을 파멸시킬 수 있는지를 안다.' 이 말을 통해 라오서는 이 책으로 한 개인의 극단적인 개인주의의 말로를 말하고자 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책은 3인칭 전지적 작가시점에서 쓰였다. 작가가 인물 모두의 감정을 알고 있고 표현할 수 있다. 하지만 전지적 작가 시점임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철저히 샹즈의 입장에서만 이야기하고 있다. 상황 설명이 필요한 부분에서 전지적 작가 시점임이 드러날 뿐, 샹즈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이야기를 진행할 때에는 어찌보면 관찰자 입장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샹즈 외의 인물의 감정에 대해 제대로 표현하지 않는다. 대부분 샹즈의 감정만을 표현할 뿐이었다. 이를 통해 라오서는 샹즈의 삶이 왜 이렇게 되었는지를 말하고자 하였던 듯하다. 이 말은 샹즈가 다른 이들의 감정을 이해하려하지 않았음을, 샹즈는 자신의 생각을 위해서 살아가는 인물임을 서술방식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샹즈는 자신외의 누군가에 대해서 감정을 소비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 외의 어느 누구에게도 큰 관심을 가지지 않았고 게다가 그가 누군가에게 호의를 베푼다는 행위는 아주 드문 일이었다. 그가 차오선생을 다시 만났을 때, 후니우의 임신소식을 들었을 때에도 그에게 중요한 것은 나, 인력거를 살 돈. 그것만을 생각했다. 누군가에게 크게 마음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힘들어도 의지할 사람이 없었고, 지푸라기라도 내밀어 준 차오선생의 호의는 스스로가 생각한 조건에 맞지 않아 시원하게 걷어 차버리고 거리의 골칫덩어리로 전락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내가 처음 샹즈의 몰락을 이해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그 이유를 우리 세대의 대부분이 샹즈와 같은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다. 나도 샹즈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열심히 노력하면 반드시 그 보상은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 책의 결말이 이해가 가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샹즈가 참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몇 번이고 쓰러져도 다시 일어나고, 다시 희망을 가진다는 점에서 정말 의지가 강한 사람이구나, 본받고 싶다 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책에서 샹즈의 결말은 볼품없다. 그는 모든 것을 잃고 사람을 팔아넘겨 받은 돈으로 그저 하루를 살아간다. 책을 다 읽은 순간 정말 혼란스러웠다. 이 책은 샹즈처럼 열심히 인생을 살아도 결국은 목적과 꿈이 없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을 샹즈의 개인주의적인 생각이 불러낸 처참한 결과라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는 라오서가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였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라오서의 생각에 공감하지 못하고 있었다. 왜 그런가 생각해보니 샹즈는 바로 나의 모습이었고, 우리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 세대는 단군 이래 최고의 스펙을 가지고 있지만 높아져만 가는 기준에 의해 취업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러한 우리 세대를 지칭하는 말에는 사토리 세대, 달관 세대 등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가슴 아픈 말은 바로 N포세대 인 것 같다. 따로 목표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저 살아가기 위해서 수많은 것을 포기한다. 나 하나 취업하고 살아가는 것도 힘들기 때문에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 데 이어 내 집 마련과 인간관계, 게다가 샹즈는 그래도 마지막까지 지키려 했지만 우리는 이미 포기하고 있는 꿈과 희망까지. 우리가 나 하나를 위해서 포기한 것은 어마어마하다. 샹즈가 모든 것을 잃고 그저 하루를 살기 위해 ‘나’라는 존재외의 모든 것을 포기했던 것처럼 우리 또한 그저 나 하나 살아가기 위하여 많은 것을 포기하고 있다. 우리의 삶이 샹즈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래서인지 샹즈가 그래도 잘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샹즈는 결국 자신만은 절대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였지만, 혹여나 그렇게 되면 어떡하나 걱정했던 그저 그런 인력거꾼이 되고 만다. 우리 세대 또한 꿈을 위해 대외활동, 학점, 토익, 자격증 등을 준비하며 열심히 발버둥 친다. 하지만 그 꿈을 이루는 것은 극히 소수에 불과하고 처음 목표를 위해 시작할 때 자신만은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삶, 그 삶을 살며 큰 희망이나 꿈 없이 하루를 살아가는 달관세대가 되어버리고 만다. 1930년대, 2010년대 숫자만 바뀌었을 뿐, 우리는 2010년대의 샹즈인 것이다. 샹즈의 삶이 극단적인 개인주의로 인하여 몰락하였다는 라오서의 말에 따라 지금과 같은 우리의 삶 또한 극단적인 개인주의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우리 세대도 그렇고 샹즈가 그렇게 파멸하게 된 것이 샹즈가 자신만을 위해 살아서라는 말로 결론짓고 싶지 않다. 물론 샹즈는 스스로를 위해 살았다. 스스로의 꿈과 목표를 위해서만 살았다. 그는 지나치게 그 자신만을 생각했다. 하지만 이것이 샹즈를 파멸로 이끈 모든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나는 개인은 거스를 수 없는 사회구조적인 문제가 반드시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사회구조적인 덫이나 벽을 넘어 자신의 꿈을 이룬 사람이야 말로 위인이 되는 것이고, 그 벽을 넘지 못하는 우리와 같은 평범한 사람들은 그 벽 앞에서 꿈과 희망, 의지, 목표 등을 내려두고 그저 살아가는 데에 집중하게 된다. 샹즈는 류쓰예처럼 인력거를 소유하여 다른 인력거꾼들에게 인력거를 빌려주고 그 돈으로 살아가기를 꿈꿨었다. 하지만 샹즈가 류쓰예와 다른 점은 류쓰예는 이미 꽤 많은 자금을 가진 사람이었고, 샹즈는 혈혈단신 거의 고아처럼 자라 가진 것이라곤 나이와 체력뿐인 젊은이였다는 것이다. 사막에서 모란이 자랄 수는 없는 것처럼, 그는 이미 남들보다 척박한 사막에서 시작하였고, 잠시 인력거를 구입함으로써 비옥한 토지를 만든 듯 했지만, 그 마저도 사회의 요구에 따라 허무하게 빼앗기고 만다. 그는 인력거를 되찾아올 힘이 없었다. 그가 군대에서 도망쳐 다시 재기하기 위해 악을 쓰고 돈을 벌어도 그에게 돌아오는 것은 자신보다 높은 사회적 신분을 가진 사람들의 횡포뿐이었다. 돈을 모아야겠다고 마음먹을수록 그 돈을 가져가는 것은 모두 샹즈보다 사회적 신분이 높은 사람들이었다. 샹즈에게 불어오는 사회구조라는 바람은 샹즈의 토지를 다시 척박한 사막으로 만들었다. 그 사막 속에서 끝까지 꽃을 피워내고자 했지만, 그래도 샹즈는 사회적 약자였고, 그를 보호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결국 스스로 아무것도 가지지 않음으로써 더 이상 뺏기는 것도 없는 상태가 되길 자처했다. 이는 사회라는 커다란 구조만 볼 때는 볼 수 없는 사회적 약자의 삶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샹즈의 삶은 철저히 외면당한 사회적 약자의 삶이다. 누구도 그에게 단비를 내려주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샹즈를 이런 사회구조 안에서 자신만의 꿈을 이루려고 스스로를 위해서 살았지만, 고질적인 사회구조적 문제를 결국엔 넘지 못하고 보호받지 못하는 약자의 삶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게 된 것으로 결론짓고 싶다. 인력거꾼이라는 직업과 신분으로는 넘을 수 없었던 벽 뒤에서 자신 스스로를 위해서만 살아갔던 샹즈, 그의 삶은 개인주의의 말로이자 사회구조적인 문제의 결과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샹즈와 같은 삶을 살고 있는 우리가 이렇게 많은 것을 포기하고 달관하게 되는 것은 개인의 문제 뿐 아니라 개인으로서는 해결하기 힘든 사회구조적인 벽에 의해 나타난 결과라고 본다. 책을 읽는 내내 샹즈의 삶을 응원했다. 목표는 다르지만 그 목표를 위한 과정이 너무나 비슷했기 때문이다. 샹즈가 꼭 성공하길 바랐다. 하지만 나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샹즈의 삶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하루를 살아가는 하층민으로 마무리 되었다. 책을 읽고는 '앞으로는 나 스스로만을 위해서 살지 말아야겠다.'라는 생각보다는, ‘샹즈와 같은 삶 또한 잘못되지 않았다’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오히려 샹즈의 삶이 현실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래도 생각해보면 내가 샹즈의 삶을 응원했듯 소설 속의 샹즈가 우리의 삶을 본다면 우리를 응원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들었다. 뿐 만 아니라 차오선생이 제공해 준 소중한 기회마저 함께 살기로 마음먹었던 샤오푸즈가 죽었다는 이유만으로 거절하는 샹즈를 보며, 답답해하는 나 자신은 과연 그런 일이 없었을까 하는 생각을 가지게 하였다. 나도 나에게 좋은
기회가 주어져도 그것을 좋은 기회라고 여기지 않은 적이 있지 않았을까 하며 나 자신을 냉철히 되돌아 볼 수 있었다. 나뿐만이 아닌 우리 세대와 참 많이 비슷한 샹즈라는 인물을 통해 나 자신은 저렇게 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고찰을 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샹즈의 삶이 개인의 생각과 행동에 의해서만 결론이 난 것은 아니라는 것, 그의 삶이 결코 헛되지 않았다는 것, 우리와 샹즈에게는 스스로의 힘만으로는 넘기 힘든 벽이 존재한다는 것, 그 벽을 넘지 못하는 것이 결코 잘못된 것은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이 책을 주위 친구들에게 추천해주었다. 친구들이 이 책이 재밌냐고 물어보면 이렇게 대답한다. "이 책
주인공이 우리랑 많이 닮았어. 그래서 슬퍼.”
우연히 얻은 기회로 굉장히 소중한 책을 얻어, 나를 돌아보는 좋은 경험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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