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小訥 盧相稷의 年譜 󰡔先府君編年󰡕은 그의 아들 成齋 盧家容(1893∼1940)이 엮은 것이다. 小訥 盧相稷의 서거 후 그의 遺文을 수습해서 文集을 편찬하던 1932년경에 엮어서, 文集 발간 뒤에 다시 挽祭文 등과 함께 附錄으로 간행할 계획을 가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그러한 계획이 여의치 않았던지, 上欄에 年月과 事跡 등에 대한 수정사항 일부가 기록된 筆寫本의 상태로 남아 있다. 小訥 盧相稷의 연보는 부산대학교도서관소장 小訥文庫의 󰡔先府君編年草記󰡕와 개인소장 󰡔先府君編年󰡕의 두 種이 존재한다. 둘 다 모두 끝의 考終과 初喪 등을 기록한 부분이 缺落되었다 그중 이 󰡔先府君編年草記󰡕는 개인소장 󰡔先府君編年󰡕으로 加減되기 이전의 年譜草記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개인소장 󰡔先府君編年󰡕보다 훨씬 더 많은 小訥 盧相稷의 생애관련 정보를 담고 있다. 年譜 본문 항목 외에도, 필요한 경우 그 본문 항목에 雙行의 細註를 붙여 놓아, 현재 전하는 小訥 盧相稷에 대한 가장 내용이 풍부하고 신뢰할 만한 생애자료이다. 그 내용을 抄出해서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 1855년(철종6, 1세) 을묘
11월 21일 申時에 金海府 生林坊(翰林面) 金谷里 집에서 태어나다.[부친 克齋 盧佖淵(1827∼1885)과 모친 淑夫人 昌寧成氏(1821∼1886) 사이에서 2남으로 태어났고, 나중에 季父 愚堂 盧滈淵(1843∼1868)에게 양자[祭養]를 갔다. 모친 숙부인 창녕성씨는 巨人이 대문으로 들어오는 태몽을 꾸고 府君을 가졌는데, 태어날 때 紫黃色 기운이 방을 둘렀다고 한다. 자는 致八, 호는 小訥ㆍ訥人ㆍ紫巖病叟, 본관은 光州이다.] ※ 伯兄 大訥 盧相益(1849∼1941)
◎ 1856년(철종7, 2세) 병진
◎ 1857년(철종8, 3세) 정사
◎ 1858년(철종9, 4세) 무오
◎ 1859년(철종10, 5세) 기미
부친 克齋公에게 󰡔孝經󰡕을 처음으로 배우다.[극재공은 가르치는데 몹시 엄격하여, 외우는 것이 한 글자라도 틀리면 종아리가 부르트도록 회초리를 맞았다.]
◎ 1860년(철종11, 6세) 경신
작게 만든 책자를 발견하고, 소매 속에 넣고 다니면서 틈이 나는 대로 수시로 꺼내서 읽다.
◎ 1861년(철종12, 7세) 신유
󰡔少微通鑑󰡕을 읽다.[文理가 통해서 長者가 설명해 주지 않아도 다른 사람에게 고금 역사의 興亡治亂에 대해 자신의 말처럼 외어서 말해줄 수 있었다.]
◎ 1862년(철종13, 8세) 임술
겨울, 도둑이 밤에 집에 들어왔다가 발각되어 놀라 달아나다. 다음날 아침, 도둑이 흘리고 간 신발을 보고는 근심스러운 얼굴로 말하기를 “이렇게 추운 겨울밤에 발은 상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라고 하다.
◎ 1863년(철종14, 9세) 계해
여름, 金海 金谷 龍鳳齋에서 夏課를 하다.[作文을 함에 도도하게 수천 자에 이르는 글을 문득 지어내니, 함께 하과를 하던 서재의 노소 제생들이 모두 ‘글항아리(文甕)’라고 일컬었다.]
◎ 1864년(고종1, 10세) 갑자
克齋公에게 󰡔中庸󰡕과 󰡔大學󰡕을 배우다.
◎ 1865년(고종2, 11세) 을축
󰡔論語󰡕와 󰡔孟子󰡕를 읽다.[이로부터 長者에게서 가르침을 받지 않고도 능히 깊은 뜻을 알 수 있었다. 克齋公은 드러내놓고 칭찬하지는 않았지만, 크게 성취할 것으로 기대하였다. 이때 性齋 許傳(1797∼1886) 선생이 김해부사로 와서 자신의 사저 公餘堂을 개방하여 인근지역의 학자들을 맞이하였는데, 가르침을 받으러 오는 사람이 많았다. 극재공은 執贄의 禮로 배알하는데 부군이 陪從하였다. 성재선생은 부군을 총명하고 영특하다고 하면서 몹시 사랑하였다.]
◎ 1866년(고종3, 12세) 병인
克齋公을 따라가서 性齋先生을 公餘堂에서 뵙다.[지난해 가을 성재선생이 제생들과 金海 涵虛亭에서 강학하면서 唱酬詩帖을 남겼는데, 부군은 그 자리에 참여하지 못하였다. 이로부터 15년이 지난 경진년(1880년, 고종17), 성재선생을 漢陽의 不倦堂에서 다시 뵙고 가르침을 받을 때, 함허정 창수시첩을 보고는 그 原韻에 차운한 詩(「敬次性齋許先生涵虛亭講會韻 幷敍」)를 지어 성재선생에게 의귀해서 도를 배우겠다는 뜻을 밝혔다.] / 󰡔詩傳󰡕을 읽다.
◎ 1867년(고종4, 13세) 정묘
󰡔書傳󰡕과 󰡔周易󰡕을 읽다.
◎ 1868년(고종5, 14세) 무진
4월, 季父 愚堂公이 돌아가시다.[이때는 우당공에게 血續이 있어서 아직 양자를 가지 않았기 때문에 斬衰의 상복을 입지 않았다.]
◎ 1869년(고종6, 15세) 기사
처음 鄕試에 응시하다.
◎ 1870년(고종7, 16세) 경오
◎ 1871년(고종8, 17세) 신미
여름, 金海 燕子樓에서 夏課를 하다.[이때 璞園 鄭顯奭(1817∼?) 공이 김해부사로 와서 관내 자제들을 모아 하과를 열었기 때문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 겨울, 長水黃氏(1853∼1886)와 혼인하다.[사헌부집의 歸園 黃起源(1794∼1862)의 손녀이고, 통덕랑 黃棨의 따님이다.]
◎ 1872년(고종9, 18세) 임신
가을, 晋州를 유람하다.[矗石樓 題詠이 있다.]
◎ 1873년(고종10, 19세) 계유
8월, 家兄 侍講公(大訥 盧相益)을 따라 漢陽의 새문밖에 가서 性齋先生을 뵙다.[성재선생은 “新進의 젊은이들이 자신의 뜻을 잃어버리고 時學을 좇는 병통이 있는데, 배우는 사람은 뜻을 세우는 것이 소중하다.”라고 하시니, 부군은 듣고서 더욱 신뢰하게 되었다.] / 尙州 洛東에 가서 洛坡 柳厚祚(1798∼1876) 선생을 뵙고, 그 자제 溪堂 柳疇睦(1813∼1872) 선생의 상에 곡을 하다.[克齋公이 일찍이 계당선생을 사사했기 때문에 이번 행차를 하게 된 것이다.]
◎ 1874년(고종11, 20세) 갑술
󰡔光山文獻考󰡕를 엮다.[10세조 沃村 盧克弘(1553∼1625), 종9세조 月村 盧世厚(1583∼1663, 沃村의 子), 8세조 菊潭 盧垓(1598∼1663, 沃村의 孫) 세 선생의 逸稿를 엮은 것이다.] / 10월, 맏아들 寔容이 출생하다.[가형 侍講公의 後嗣가 되었다.]
◎ 1875년(고종12, 21세) 을해
1월, 大邱의 選士白日場에 응시하러 가다가 말이 병이 나서 돌아오다. / 여름, 金海 養士齋에서 夏課를 하다. / 5월, 󰡔顧諟錄󰡕을 엮다.[부군은 그 序文에서 “나는 5세에 󰡔孝經󰡕을 배우고 10세에 󰡔大學󰡕과 󰡔中庸󰡕을 배웠지만 과거공부에 꼭 도움이 되지는 않겠다는 생각에 깊이 탐구하지 않았는데, 19세에 성재선생 문하에서 가르침을 받게 되면서 처음으로 자신의 德性을 함양하는 爲己之學에 대해 듣고 비로소 그 요체가 孝親ㆍ率性ㆍ明德 등임을 알게 되어, 그 3종의 책을 차례차례 자세히 읽고 보고서야 立身行道하고 存養省察하고 治國平天下하는 근본이 모두 갖추어져 있음을 알게 되었기에, 작은 卷子를 만들어 그 내용 중 요체가 되는 것을 抄錄해서 󰡔書經󰡕 「商書 太甲上」의 ‘하늘의 밝은 명령을 늘 살펴본다.(顧諟天之明命)’라는 뜻을 취하여 󰡔顧諟錄󰡕이라고 했다.”라고 하였다.] / 8월, 族兄 主事公 盧相說과 居昌의 鄕試에 응시하다.
◎ 1876년(고종13, 22세) 병자
咸安 立谷의 廬陰精舍에 가서 一山 趙昺奎(1846∼1931)를 만나다. / 󰡔小華詩選󰡕, 󰡔學要選󰡕, 󰡔兵學要選󰡕을 엮다. / 󰡔心經󰡕을 초록하다. / 장조부 歸園 黃起遠 공의 遺稿 󰡔歸園遺集󰡕을 編校하다.
◎ 1877년(고종14, 23세) 정축
◎ 1878년(고종15, 24세) 무인
봄, 漢陽의 畜洞에 가서 性齋先生을 뵙고 󰡔大學󰡕을 배우다. / 󰡔四書疑解󰡕를 짓다.
◎ 1879년(고종16, 25세) 기묘
3월, 󰡔明史總要󰡕를 抄節하다. / 12월, 克齋公의 명에 따라 昌寧 菊洞으로 還居하다.
◎ 1880년(고종17, 26세)
2월, 定軒 李鍾祥(1799∼1870) 공의 改葬에 挽詩를 짓다. / 4월, 慶科 監試(初試)에 합격하다. 6월, 會試에 낙방하다. / 9월, 克齋公이 昌寧 菊洞으로 還居하다. / 가을, 漢陽 畜洞 不倦堂에 가서 性齋先生을 뵙고 󰡔論語󰡕를 배우다. / 11월, 性齋先生이 「九思箴」을 지어주며 학문을 면려하다. / 司諫院正言 三元堂 許元栻(1828∼1892)의 時弊疏를 읽고, 그 뜻에 크게 감동한 심회를 적은 詩(「題許拾遺時弊疏後三首 幷敍」)를 짓다.
◎ 1881년(고종18, 27세) 신사
2월, 생모 淑夫人 昌寧成氏의 61세 생신(회갑)을 축수하다. / 여름, 漢陽 畜洞에서 夏課를 하다. / 5월, 󰡔志感詩帖󰡕을 엮다.[이조판서 蓉山 鄭健朝(1823∼1882)가 上奏해서 증조부 默窩公(盧禹壽, 1778∼1848)과 조부 道川公(盧奉文, 1807∼1855)이 각각 학행과 효행으로 사헌부감찰에 추증되니, 당시의 많은 사대부들이 詩를 지어서 축하하였다. 그 시들을 모아서 엮은 것이 󰡔志感詩帖󰡕이다.] / 10월, 고향 昌寧으로 돌아오다.[性齋先生이 贈序를 지어 송별하면서, 과거시험에 낙방한 것을 위로하는 한편, 그에 구애되지 않고 학문에 더욱 열심히 노력하는 것을 칭찬하였다.] / 겨울, 󰡔夏城徵信錄󰡕을 짓다.
◎ 1882년(고종19, 28세) 임오
2월, 漢陽 畜洞에 가서 性齋先生을 뵙다. / 3월, 가형 侍講公이 別試文科 乙科 第1人으로 급제하다. / 5월, 東堂試(初試)에 합격하다. 10월, 會試에 낙방하다. / 11월, 果川 麥溪에 가서 性齋先生을 뵙고 집으로 돌아오다.[이때 성재선생은 도성이 임오군란으로 소요했기 때문에, 맏아들이 수령으로 있는 과천 淸溪山 기슭 맥계의 崔氏 田莊을 세내어 지내고 있었다.] / 󰡔左海瑣聞󰡕을 짓다. / 겨울, 靑下 趙濟華(1816∼?) 공에게 愚堂公의 墓碣銘을 지어줄 것을 부탁하다.
◎ 1883년(고종20, 29세) 계미
1월, 조모 淑夫人 坡平尹氏(1807∼1883)의 상을 당하다. / 여름, 昌寧 菊洞의 追遠齋에서 夏課를 열다.[찾아와서 배운 사람이 30여 명이나 되었다.] / 8월, 漢陽 새문밖 冷泉洞에 가서 性齋先生을 뵙다. / 11월, 應製試에 응시해서 給分을 얻다. / 겨울, 穌齋 盧守愼(1515∼1590) 선생, 寒岡 鄭逑(1543∼1620) 선생, 西厓 柳成龍(1542∼1607) 선생, 旅軒 張顯光(1554∼1637) 선생, 愚伏 鄭經世(1563∼1633) 선생, 眉叟 許穆(1595∼1682) 선생의 文廟 從祀를 청원하는 疏廳에 참여하다.[이때 부군은 直日로, 평소 나라 안의 文獻에 익숙하였기 때문에 그 자리에 모인 수천 명의 성명을 上疏文에 막힘없이 기록하니, 명성이 당시에 더욱 높아졌다.]
◎ 1884년(고종21, 30세) 갑신
2월, 󰡔孟子󰡕를 읽다. / 여름, 昌寧 菊洞 追遠齋에서 강학하다.[찾아와서 배우는 사람이 더욱 많아졌다.] / 6월, 漢陽에 가서 侍講公을 뵙다.[이때 시강공은 성균관전적에서 사헌부지평으로 자리를 옮겼다.] / 8월, 昌寧 菊洞의 집으로 돌아오다. 󰡔詩選󰡕을 엮다. / 9월, 漢陽에 갔다가 갑신정변을 겪다. 󰡔明史󰡕를 읽다. / 10월, 정부에서 日本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는다고 하여 그 문제점을 지적하려고 上疏文을 초했다가, 벼슬을 하고 있지 않은 선비가 時事를 논하는 것은 무익할 뿐만 아니라, 도리어 이름을 구한다는 비판을 받을 것이라는 말을 듣고 그만두다.
◎ 1885년(고종22, 31세) 을유
4월, 克齋公의 상을 당하다.[이때 부군과 시강공은 漢陽에서 奔喪하였는데, 侍病과 臨終을 하지 못한 것을 지극히 애통해 하였다.] / 10월, 漢陽 새문밖 冷泉洞에 가서 性齋先生을 뵙고, 克齋公의 墓碣銘을 지어줄 것을 부탁하다. / 11월, 廬幕으로 돌아오다.
◎ 1886년(고종23, 32세) 병술
1월, 부인 孺人 長水黃氏가 별세하다.[壙記(「故室孺人黃氏壙記」)가 있다.] / 7월, 생모 淑夫人 昌寧成氏의 상을 당하다. / 9월[22일], 性齋先生이 별세하다. 부음을 듣고는, 設位하고 곡을 하다.[心喪을 하였다.] / 12월, 「性齋先生行狀擬草」를 짓다.[모두 13,600여자이다.]
◎ 1887년(고종24, 33세) 정해
7월, 性齋先生의 靈筵에 곡을 하다. 祭文을 지어 치제하고, 果川 霜草里(瑞草里) 묘소에 성묘하다. / 性齋先生의 조카 許運(1847∼?)과 선생의 문집 초본 󰡔庸語󰡕 33책을 校勘 編定하다. / 󰡔性齋先生年譜󰡕를 엮은 뒤, 글을 지어 性齋先生의 影幀에 고유하다. / 「儀契約」을 짓다.
◎ 1888년(고종25, 34세) 무자
1월, 金海에 가서 愚堂公의 묘소에 성묘하다. / 2월, 母夫人 全州李氏(1838∼1888)의 상을 당하다.[전주이씨는 洛洲齋 李水+旛(1578∼1638)의 후손이고, 李鋌宇의 따님이다.] / 4월, 母夫人 全州李氏를 昌寧 大谷에 장사지내다. / 여름, 「克己齋學約」을 만들다. / 󰡔訓蒙帖(克己齋訓蒙帖)󰡕을 엮다. 「庭揖禮圖笏」을 만들다. 󰡔家禮󰡕를 抄하다. 「兄弟繼立同昭穆說」을 짓다.
◎ 1889년(고종26, 35세) 기축
1월 1일, 元朝에 「自警文」을 짓다. / 1월, 󰡔女士須知󰡕를 엮다.[부녀자가 배워야 할 󰡔列女傳󰡕, 󰡔小學󰡕, 󰡔三綱行實󰡕 등의 내용을 간추리고, 여기에 우리나라의 嘉言과 善行을 續錄으로 덧붙인 다음, 그것을 원문과 함께 한글로 번역해서 엮었다. 그 편찬 취지를 序文(「女士須知序」)으로 밝혔다.] / 8월, 金海에 있는 愚堂公 묘소를 이장해서 昌寧 大谷의 母夫人 全州李氏 묘소에 합장하다. / 가을, 󰡔做人要編󰡕을 엮다.
◎ 1890년(고종27, 36세) 경인
5월, 母夫人 全州李氏의 삼년상을 마치다. / 9월, 晋陽河氏(1873∼1939)와 혼인하다.[學生 河泰兢의 따님이고, 晩軒 河錫鳳(1800∼1872)의 손녀이다.] / 가을, 克己齋에서 鄕飮酒禮를 행하다. / 晩醒 朴致馥(1824∼1894)과 함께 5道 士林에게 주창해서 丹城 法勿에서 󰡔性齋先生文集󰡕을 간행하기로 하다.
◎ 1891년(고종28, 37세) 신묘
4월, 丹城 法勿의 麗澤堂에 가다.[이때 󰡔性齋先生文集󰡕의 판각을 마치고 講堂이 신축되어 鄕飮酒禮를 행하였다.] / 󰡔光州世稿󰡕를 편집하다.[東岳 盧善卿, 墨齋 盧㻶(1464∼1532), 參奉 盧秀民, 小菴 盧遂, 立齋 盧欽(1527∼1602), 和菴 盧偉(1531∼1584), 沃村 盧克弘(1553∼1625), 梅竹窩 盧克誠(1555∼1629), 月華堂 盧克復(1573∼1635), 月村 盧世厚(1583∼1663), 菊潭 盧垓(1598∼1663), 四梅堂 盧壎(1598∼1646), 望湖亭 盧坫(1600∼1671), 松川 盧碩垕(1631∼1694), 芳谷 盧碩賓(1639∼1705), 海隱 盧漢碩(1622∼1702), 松陰 盧漢輔(1635∼1710), 滄浪 盧嶷(1653∼1732) 선생의 逸稿를 합편하니 모두 4책이다.] / 8월, 坊里의 儒生을 追遠齋에 소집해서 紙牌로 先聖과 先師를 배알하고는, 講席을 열어 考講하는데 善惡籍을 두다.[이때 監司의 지휘를 받아 선발에 응해 講長이 되었다.] / 9월, 다시 諸生을 克己齋에 모아서 考講하다.[聽約한 사람은 100여 명이었지만 講席에 나온 사람은 46명이었다. 그중 󰡔小學󰡕을 가지고 나온 사람이 반을 차지하여, 제생에게 󰡔소학󰡕의 의미를 올바르게 알고 실천하면서 읽었는지 묻겠다고 하고는 고강을 진행하였다.] / 10월, 族叔 盧應禧, 族孫 盧在馨과 星州, 安東, 禮安 등지에 가서 여러 先賢의 祠院에 謁廟하고, 여러 長德을 만나고 돌아오다.[34일 간 800여 리의 여행길에, 高靈 館洞에서 晩求 李種杞(1827∼1902), 陽亭에서 顧軒 鄭來錫(1808∼1893)을 만나고, 星州 枝村의 寒岡 鄭逑(1543∼1620) 서원과 유적지를 들리고 후손을 만나고, 梧峴 東岡 金宇顒(1540∼1603) 묘소에 성묘하고, 奉化 酉谷의 冲齋 權橃(1478∼1548) 종가와 묘소 등을 들리고 頤齋 權璉夏(1813∼1896) 등 후손을 만나고, 安東 河回의 西厓 柳成龍(1542∼1607) 종가와 屛山書院을 들리고 후손을 만나고, 禮安 兎溪의 退溪 李滉(1501∼1570) 종가를 들리고 龍山 李晩寅(1834∼1897) 등 후손을 만나고, 下溪ㆍ遠村 등의 퇴계 이황 후손을 만난 뒤 陶山書院을 들러 「陶山圖」를 그리고, 汾川의 聾巖 李賢輔(1467∼1555)의 유적지와 사당을 들리고 후손을 만나고, 安東 金溪의 鶴峯 金誠一(1538∼1593) 종가와 사당을 들리고 종손 西山 金興洛(1827∼1899)을 만나고 돌아왔다. 紀行詩가 있다.] / 「沃野面講約契立議」와 「沃野面講約契約條」를 만들다. / 「門黨約束」을 만들다.
◎ 1892년(고종29, 38세) 임진
1월, 글을 지어 坊里 제생을 효유하다. / 門黨들과 의논해서 追遠齋에서 󰡔光州世稿󰡕를 간행하다.[後識가 있다.] / 夙夜室이 완공되다.[매달 講約禮를 행하였다.]
◎ 1893년(고종30, 39세) 계사
2월, 寔容이 應製進士試에 합격하다. / 3월, 아들 家容이 출생하다. / 4월, 顧軒 鄭來錫(1808∼1893)의 會葬에 참석하다.[祭文(「祭顧軒鄭公文」)이 있다.] / 沃村(盧克弘), 菊潭(盧垓), 海隱(盧漢碩) 세 선생의 墓碣後識(「十世祖考沃村先生墓碣後識」, 「八世祖考菊潭先生墓碣後識」 등)를 짓다.[이때 조정에서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킨 공훈으로 沃村先生을 이조참판에 추증하였고, 또 儒疏로 菊潭先生을 이조참의에 추증하고 그 자제 海隱先生을 이조판서에 추증하였기 때문에 後識를 지어 墓碣銘 뒤에 적게 된 것이다.] / 7월, 昌寧鄕校에서 제생의 講을 받다. / 사간원정언 石梧 權鳳熙(1837∼1902)와 守坡 安孝濟(1850∼1916)가 直言으로 時弊를 논하다가 海島에 圍籬安置되자, 그들을 격려하는 詩(「寄贈權正言法岡黑山島籬中」과 「寄贈安正言舜仲楸子島籬中八首」)를 지어서 부치다.
◎ 1894년(고종31, 40세) 갑오
9월, 晩醒 朴致馥(1824∼1894) 공의 죽음에 곡을 하다.[挽詞(「挽晩醒朴公十首」)와 祭文(「祭晩醒朴公文」)이 있다.] / 11월, 侍講公을 따라 가족을 데리고 金海의 옛집으로 피난하다.[이때 동학란이 일어나 마을이 소요했기 때문에 피난한 것이다.] / 󰡔參三錄󰡕을 엮다.
◎ 1895년(고종32, 41세) 을미
2월, 密陽 金谷에 寓居하다. / 4월, 錦山書堂이 완공되다.[우거하고 있는 곳이 협소하고 또 書齋도 없어서 초가 하나를 빌리려고 하자,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일이라고 하면서 힘을 모아 이 서당을 지어주었는데, 원근에서 믿고 따르는 이들이 찾아왔다. 退溪 李滉(1501∼1570) 선생의 詩 「陶山卜居」에 次韻한 詩(「錦山書堂新成用李子陶山卜居韻」)를 지어 앞으로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에 매진할 뜻을 밝혔다. 古琴 孫彙秀(1827∼1896)가 記文(「錦山書堂記」)을 지었다.] / 5월, 古琴 孫丈(孫彙秀)과 籠巖에 놀면서 詩를 짓다.[佔畢齋 金宗直(1431∼1492) 선생과 寒暄堂 金宏弼(1454∼1504) 선생이 遊賞하던 곳이다. 이때 함께 유상한 사람들의 題名錄의 序文(「籠巖題名序」)을 지었다.]
◎ 1896년(고종건양1년, 42세) 병신
侍講公을 따라 密陽 蘆谷에 터를 잡다.[金谷에서 동쪽으로 10리 떨어진 곳이다.] / 9월, 󰡔克齋集󰡕을 간행하다. / 紫巖草廬가 완공되다.
◎ 1897년(고종광무1년, 43세) 정유
봄, 󰡔光州世稿續󰡕을 간행하다.[6세조 噤谷 盧文弼(1650∼1714), 5세조 樂齋 盧振巘(1689∼1756), 고조 林菴 盧思程(1738∼1814), 증조 默窩 盧禹壽(1778∼1848), 조부 道川 盧奉文(1807∼1855)의 逸稿를 합편한 것이다.] / 여름 怡怡亭이 완공되다.[侍講公이 金海 慕禎 강가에 이 정자를 짓고는, 서쪽 門楣에는 大訥房이라는 편액을 걸고 동쪽 문미에는 小訥房이라는 편액을 거니, 형제가 화락하게 지낼 곳이 있게 되었다. 記文(「怡怡亭記」)과 雜詠(「怡怡亭雜詠」)이 있다.] / 「孔子不師老聃說」을 짓다. / 12월, 아들 定容이 출생하다.[양자 가서 高祖의 宗統을 이었다. 이보다 앞서 三從 宗兄 相憲(1854∼1886)이 후사 없이 죽고 종형의 종질도 또한 아들 하나밖에 없었기 때문에, 宗兄嫂 昌寧曺氏(1853∼1906)가 양자를 달라고 해도 허락하지 않았다. 종형수는 일신을 의탁할 곳이 없어 울부짖기를 그치지 않자, 부군이 자신이 또 아들을 낳으면 양자를 줄 것이니 안심하라고 하였는데, 이해에 정용이 출생해서 양자를 주게 된 것이다.] ※ 侍講公이 密陽 蘆谷에 蘆花亭을 짓다.[記文(「蘆花亭記」)이 있다.]
◎ 1898년(고종광무2, 44세) 무술
尙州 道會에 가서 東洛書院의 通文을 작성하다.[이 행차에 門生 盧在憲(1874∼?, 字 聖章, 本 光州, 族孫)과 柳震玉(1879∼1928, 字 元振, 號 居仁, 本 文化)이 배행하였다.]
◎ 1899년(고종광무3, 45세) 기해
󰡔翼陽紀年󰡕을 엮다. / 봄, 「冠山齋重建上樑文」을 짓다. / 󰡔紫巖日錄󰡕을 쓰기 시작하다.[이때 먼 곳에서 배우려는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부군이 제생들에게 “벗 사이 경쟁함에 영명이 있나니, 사귀면서 영합하길 일삼아야 되겠는가. 말과 행동 기록해서 바로잡고 경계하여, 잠시라도 나쁜 마음 생기지 말게 하라.(令名蓋在友之爭 相接那曾事合迎 籍記云爲規且警 須臾勿使惡心生)”라는 詩를 지어 보여주고, 또 훈시하시기를 “마땅히 장부 하나를 비치하여 매일 각자의 善惡을 기록해서 惡을 없애고 善을 좇는데 도움이 되도록 해야겠고, 또 일을 처리하고 사람을 대하는 것을 아울러 기록해서 그 합당한 지의 여부를 살필 수 있게 해야겠다.”라고 하였다.] / 銅山의 바위를 ‘懶巖’으로 명명하다.[바위는 나무그늘 속에 있는데, 제생들이 이곳에서 쉬다가 간혹 덥고 피곤해서 威儀를 갖추지 못하는 일이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을 붙인 것이다.] / 下齋의 門을 ‘警睡門’으로 명명하다.[上齋ㆍ中齋ㆍ下齋에서 지내는 제생들 가운데 늦게 일어나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누가 문종이에 ‘睡窩’라고 써서 넌지시 꼬집었다. 부군이 보시고 말씀하기를 “잠자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이 문종이에 쓴 것을 보고서 경계하지 않겠는가.”라고 하시고는, 曺夔鍾(1880∼1919, 字 舜欽, 號 餘菴, 本 昌寧)에게 그 문에다 ‘警睡門’이라고 크게 써서 붙이게 하였다.] / 5월, 容衆所가 완공되다.[제생들을 수용할 수 없어서 紫巖草廬 앞에다 임시가옥을 지었다. 李弼昌(1871∼1911, 字 文極, 本 驪州)이 동쪽 門楣에다 ‘容衆所’라고 쓰고, 曺正煥(1875∼?, 字 義卿, 號 南崗, 別稱 曺珍, 本 昌寧)이 남쪽 문미에다 ‘避暑臺’라고 쓰고, 李炳務(1877∼?, 字 裕仲, 本 驪州)가 서쪽 문미에다 ‘遊詠臺’라고 쓰고, 許銜(字 樂潤, 本 金海)이 북쪽 문미에다 ‘棲息寮’라고 썼다. 부군이 조정환에게 말씀하기를 “임시가옥을 增修한 뒤로 제군들이 편액을 고치기를 청하기에 ‘柳港詩广’으로 했으면 한다고 답하였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詩’라는 글자는 한쪽으로 치우쳐 있다.”라고 하였다. 조정환이 말하기를 “처음에는 비록 임시 가옥이었지만 지금은 樓亭의 체제를 갖추었고, 제생들도 이곳에서 늘 바람을 쐬면서 시를 읊조리니 ‘風詠樓’로 편액을 걸었으면 합니다.”라고 하였다. 부군이 말씀하기를 “‘風詠’이라는 두 글자는 너무 지나치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조정환이 말하기를 “沂雩의 기상은 배우는 사람들이 모두 함께 흠모합니다. 오직 어리석고 하찮은 저희들의 志業이 옛 사람에게 미치지 못하는 것이 걱정입니다만, 누정의 이름으로 붙이는 것이 너무 지나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라고 하였다. 부군이 말씀하기를 “‘風詠’이라는 두 글자를 누정의 이름으로 한 곳이 많이 있으니, 나도 또한 너무 지나친 것이 아님을 모르지는 않는다. 그러나 요즈음 세상에서 남의 말을 하기 좋아하는 사람들 중에는 손가락질하면서 구설에 올릴 사람도 있을 것이고, 또 이 건물은 몹시 낮고 좁아 보잘것없으니 꼭 이렇게 과장해서 편액을 걸어야 할 것은 아닐 듯하다.”라고 하였다. 盧在悳(1879∼1900, 字 敬章, 號 銑谷, 本 光州)이 말하기를 “이미 너무 지나친 이름을 붙이는 게 아니라면 손가락질하는 사람이 참으로 망령된 것이니, 낮고 좁아 보잘것없는 것이야 문제될 것은 아니겠습니다.”라고 하였다. 許鉀(1882∼?, 字 德常, 號 中窩, 改名 鉐, 本 金海)이 말하기를 “이 건물은 본래 제생들을 수용하기 위해 지은 것이지, 제생들로 하여금 이곳에서 遊賞하도록 하려고 지은 것은 아닙니다. 曾點이 늦봄에 시를 읊조리며 돌아온 것은 그 기상은 비록 좋지만, 유상은 유상입니다. 지금 우리들이 공부하며 지내기 위해 지은 건물을 유상하기 공간과 동일한 곳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은 너무 혐의스럽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허함이 말하기를 “鉀의 말이 옳을 듯합니다.”라고 하였다. 盧宅容(1878∼1948, 字 贊允, 號 述齋, 本 光州)이 말하기를 “그 말이 꼭 근거가 없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이병무가 말하기를 “鉀의 말이 나을 듯합니다.”라고 하였다. 조정환이 말하기를 “우리들이 이곳에서 바람을 쐬고 이곳에서 시를 읊조리므로 ‘風詠’으로 편액을 거는 것이 불가할 것은 없겠지만, 선생님이 이미 구설을 걱정하시는 데다 衆論이 일치되지 않으니, 다른 좋은 이름으로 바꾸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하였다. 허갑이 말하기를 “꼭 다른 이름을 찾을 것이 없이 저번에 弼昌이 정한 ‘容衆所’가 합당할 듯합니다.”라고 하였다. 盧性明(1878∼?, 字 德哉, 改名 性日, 本 光州)이 말하기를 “두 말이 모두 불가할 것이 없으므로 둘 다 남겨, 한 칸은 ‘容衆所’라고 적고 다른 한 칸은 ‘風詠樓’라고 적어서, 제생을 널리 수용하고 우뚝한 기상을 본받게 하는 뜻을 보이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였다. 李炳濩(1881∼?, 字 殷伯, 本 驪州)가 말하기를 “작은 건물에 두 개의 편액은 합당하지 않을 듯하고, ‘容衆’이라는 두 글자는 그 뜻이 참 원만합니다.”라고 하였다. 許重(1881∼? 字 厚哉, 改名 瓘, 本 金海)이 말하기를 “같은 집이므로, ‘風詠’이라고 하면 함께 풍영하면 되고, ‘容衆’이라고 하면 함께 용중하면 됩니다. 용중소에 거처하는 사람이 함께 풍영할 수 없겠으며, 또 풍영하려는 사람이 함께 섞여 용중할 수 없겠습니까? 이 집이 비록 작기는 하지만, 풍영하는 사람을 수용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수용하는 집에 무게를 두어야겠습니까, 아니면 수용되는 사람에게 무게를 두어야겠습니까?”라고 하였다. 孫上鉉(1878∼1961, 字 亨九, 改名 柄鉉, 改字 謙受, 本 密陽)이 말하기를 “弼昌의 편액이 아주 꼭 들어맞습니다.”라고 하였다. 盧寔容(1874∼1912, 字 伯能, 號 志堂, 本 光州)이 말하기를 “여러분들이 이곳의 편액에 대해 서로 의견이 분분한데, 저는 그 뜻을 알 수 없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容衆’이라는 것이 아주 합당하니, 그것이 이 건물을 세운 본래의 뜻이 아닙니까?”라고 하였다. 모두들 좋다고 하여 ‘容衆所’라는 편액을 걸기로 결정되었다.] / 盧性明에게 講會 일자를 써서 벽에다 붙이게 하였다.[제생들이 姓名을 列書하여 󰡔同講帖󰡕(󰡔紫巖契帖󰡕?)이라고 하고, 봄 3월과 가을 9월의 上甲日을 會講 일자로 정하였다.] / 錦洲 許埰(1859∼1935)가 찾아와서 鄕飮酒禮를 행하다. / 7월[16일], 默山(默漢, 沐山) 李景九(1856∼1921), 그리고 제생들과 赤壁灘에서 놀다.[적벽탄 신령에게 고유하는 글이 있다.] / “艮, 進, 毅, 堅, 平, 存, 訂, 明, 振, 勉, 謙”의 11글자를 택해 제생들로 하여금 銘을 지어 서로의 부족한 점을 권면하게 하였다.[曺正煥은 「艮銘」을 지어 許銜에게 주었고, 허함은 「進銘」을 지어 金琫運(1879∼?, 字 應天, 本 瑞興)에게 주었고, 許鉀은 「毅銘」을 지어 曺夔鍾에게 주었고, 閔珝植(1879∼?, 字 舜會, 本 驪興)은 「堅銘」을 지어 許重에게 주었고, 김봉운은 「平銘」을 지어 許鎔에게 주었고, 李弼昌은 「存銘」을 지어 盧寔容에게 주었고, 허중은 「訂銘」을 지어 李弼良(1880∼1957, 字 相殷, 本 驪州)에게 주었고, 노식용은 「明銘」을 지어 盧正容(1875∼1933, 字 聖行, 號 林叟, 本 光州)에게 주었고, 盧宅容은 「振銘」을 지어 成一慶(1881∼1955, 字 萬祚, 號 愚軒, 本 昌寧)에게 주었고, 조기종은 「勉銘」을 지어 노택용에게 주었고, 조정환은 「謙銘」을 지어 허갑에게 주었다.] / 蒙齋가 완공되다. / 細谷精舍가 완공되다.[제생들을 侍講公의 蘆花亭과 默山公의 沐山亭에 나누어 거처하게 하고도 또 모두 수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시강공이 이 집을 지었다.] / 11월, 省齋 鄭在夔(1851∼1919)가 찾아오다.[성재공이 집으로 돌아가실 때, 부군과 제생들이 萬柳門 밖 시내 반석에서 전송하였다. 그때 부군이 성재공에게 그곳 시내의 이름을 지어줄 것을 청하자, 성재공이 처음에는 ‘洗耳澗’으로 지었다가 다시 ‘洗心澗’으로 고쳐 지어주었다.]
◎ 1900년(고종광무4, 46세) 경자
1월, 世譜 四刊의 일로 昌寧 追遠齋에 가다. / 「江林齋紙牌焚黃儀」를 만들다. / 萬柳門 밖의 다리를 ‘斷塵橋’로 명명하다.[이곳 蘆谷이 密陽 읍성에서 30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朱子의 詩 「瑞巖」에 “세상의 티끌을 삼십 리나 멀리하니, 휜 구름 누런 잎이 다 함께 유유하네.[隔斷紅塵三十里 白雲黃葉共悠悠]”라고 한 말에서 취해서 명명한 것이다.] / 입춘[1월 5일], 벽에다 “노인의 독서 늘 잊음이 없어야 하고, 아이의 독서 늘 빠뜨림이 없어야 하리. 붕우들 찾아와서 가지 않으니, 산중의 세월은 많기만 하네.(翁讀常無忘 兒讀常無闕 朋友來莫去 山中多歲月)”라고 써서 붙이다.[또 “네 실심에 힘쓰고 네 실병을 없애라.(務爾實心 去爾實病)”라고 써서 붙였다. 蒙齋의 벽에는 󰡔詩經󰡕 「大雅 抑」의 “네 안색을 온화하게 하여, 어찌 허물이 없겠는가 하며 자성한다오(輯柔爾顔 不遐有愆)”라는 글귀와 “네 발언을 삼가고, 네 몸가짐을 삼가라.(愼爾出誥 敬爾威儀)”라는 글귀를 써서 붙였다. 또 “천년 일월성신의 나라, 만세 요순공맹의 글(千年日月星辰國 萬世唐虞孔孟書)”이라는 두 구를 기둥에 써서 붙이고는, “이것은 내가 젊었을 때 꿈속에서 지은 것인데, 그 뜻이 입춘의 축사에 맞을 것 같기에 적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門楣에는 “내 잘못을 보고도 바로잡아주지 않는 사람은 들어오지 말 것.(見吾過不規者勿入)”이라고 써서 붙이고, ‘敬’자를 써서 항상 눈에 띄는 곳에 내걸면서 말씀하기를 “일찍이 ‘敬’자를 내걸어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게 하였지만, 바로잡아지지 않아서 다시 내거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 “어린이는 각기 장성하고, 붕우들은 날마다 강건하기를 바란다.(童穉各長成 朋遊日彊健)”라는 두 구를 上齋와 下齋, 蘆花亭과 細谷精舍 등의 벽에 써서 붙이게 하였다.] / 「蒙齋小學講錄」을 엮다.
◎ 1901년(고종광무5, 47세) 신축
4월, 祭文(「祭頤齋權公墓文」ㆍ「祭龍山李公墓文」ㆍ「祭西山金公文」)을 짓고, 朴景在(1881∼?, 字 孟三, 本 竹山)와 孫柄鉉(1878∼1961, 字 謙受, 初名 上鉉, 初字 亨九, 本 密陽)을 보내 頤齋 權璉夏(1813∼1896)ㆍ龍山 李晩寅(1834∼1897)의 묘소와 西山 金興洛(1827∼1899)의 靈筵에 치제하게 하였다. / 朱子가 자신의 맏아들 受之에게 보낸 편지(「與長子受之書」)를 쓴 書帖을 抄하고 그 뒤에 짤막한 後識(「略抄朱先生與長子受之書示書社諸君」)를 붙여 書社 제생들에게 보여주다. / 博約門에다 朱子의 詩 「博約」의 “일이 오면 예에 따라 일신을 실천하고, 일이 가면 학문으로 마음을 가져가네. 판이 짜여 다시는 다른 틈이 없나니, 이 두 가지 얻어서 늙어갈 것이로다.(事來身向禮中行 事過將心去學文 局定更無他罅隙 得斯二者老吾身)”라는 글귀를 써서 걸다.[그 後識(「書博約門揭朱子詩後」)에서, 孔子가 사람을 가르친 것이 “글을 널리 배우고 예로써 단속한다.(博學於文 約我以禮)”라고 한 ‘博約’ 두 글자에 모두 담겨 있기 때문에 그 뜻을 부연한 주자를 시를 써서 건다고 하였다.] / 󰡔大嶺人物誌󰡕를 엮다. / 11월, 慶州 崔希永[止軒 崔孝述(1786∼1870)의 현손이다.]에게 출가한 딸이 출생하다. / 「家兄寫眞記」를 짓다. ※ 侍講公이 密陽 蘆谷에 다시 風雷亭을 짓다.[記文(「風雷亭記」)이 있다.]
◎ 1902년(고종광무6, 48세) 임인
詩(「示諸生」)를 지어 제생에게 보여주다.[그 시에 “재기 있는 소년들 모두가 당당하니, 시절 맞아 기쁜 눈빛 한낮이 더디다오. 학문함에 특이한 일 찾지를 말 것이라, 방안에 빛이 남을 하남선생 허여 않네.(少年才氣摠堂堂 靑眼逢時白日長 爲學休尋奇特事 河南不許室中光)”라고 하였다.] / 5월, 晩求 李種杞(1827∼1902)의 죽음에 곡을 하다.[挽詞(「挽晩求李丈」)와 祭文(「祭晩求李公文」)이 있다.] / 朱子의 「敬齋箴」과 「求放心齋銘」 2편을 종이에다 쓰고 기름을 먹여서, 휴대하고 다니면서 늘 보고 경계할 수 있도록 하였다.
◎ 1903년(고종광무7, 49세) 계묘
봄, 密陽郡 講長을 사직하다.[이때 밀양군수 趙鍾緖가 文敎를 일으키는 일에 힘을 쏟아 부군을 밀양군 강장에 천거하였지만, 服人이라서 사직하였다.] / 4월, 蘆谷 風雷亭에서 󰡔性齋先生文集續編󰡕과 󰡔性齋先生文集附錄󰡕을 간행하다.[性齋先生의 족질이자 門人인 진사 梅岡 許邇(1862∼1920)가 성재선생의 續集ㆍ年譜ㆍ挽祭錄 등을 가지고 와서 간행하려고 하자, 부군 형제와 許錦洲(許埰)가 연보 판각 비용을 부담하고, 성재선생 문인 집안에서 속집과 만제록 판각 비용을 부담하였는데, 舫山 許薰(1836∼1907)ㆍ約泉 金鎭祜(1845∼1908)ㆍ一山 趙昺奎(1849∼1931)이 번갈아 왕래하면서 刊事를 살폈다.] / 11월, 󰡔朱子性理說節要󰡕를 엮다.[跋文(「朱子性理說節要跋」)이 있다.] / 性齋先生 諡號 ‘文憲’의 諡號註 “勤學好問曰文”을 그 學德에 맞게 “道德博聞曰文”으로 수정해 줄 것을 청하는 上疏文(「請改先師文憲公性齋許先生諡註疏」)을 짓다. 󰡔歷年提綱󰡕을 엮다.
◎ 1904년(고종광무8, 50세) 갑진
1월, 󰡔常體便覽󰡕을 엮다.[跋文(「跋常體便覽」)이 있다.] / 晋州 士林들에게 편지를 보내 󰡔朱子語類󰡕 간행 문제를 논하다.[이듬해 大源菴에다 간행소를 차렸다.] / 가을, 󰡔古鏡重磨方󰡕을 중간하다.[사람들이 배우러 오면 이 책으로 먼저 가르쳤는데, 家藏 寧邊本 한 책은 종이가 해지고 글자가 지워져서 읽을 수 없었기 때문에 중간하게 된 것이다. 跋文(「古鏡重磨方重刊後識」)이 있다.] / 경상남도순찰사 金璉植이 密陽에 왔다가 存問하다.[김연식이 부군의 중망을 듣고 먼저 존문한 뒤에 조정에 상주하려고 하였지만, 정부가 바뀌며 체직되어 돌아가게 되자 그대로 할 수 없었다.] / 󰡔駕洛事實略󰡕을 엮다. / 10월, 아들 察容이 출생하다.
◎ 1905년(고종광무9, 51세) 을사
󰡔東國歷年指掌󰡕을 엮다.[序文(「東國歷年指掌序」)이 있다.] / 軍用鐵道建築班에 편지를 보내 6세조 噤谷公(盧文弼)의 묘소를 보전해 줄 것을 간청하다.[철도 푯말이 금곡공 묘소를 침범하자, 부군이 편지를 보내 간청한 끝에 겨우 보전할 수 있었다.] / 8월, 아들 審容이 출생하다.
가을, 昌寧 선영에 성묘하다. / 12월, 정부에서 일본의 핍박으로 을사조약을 체결하다.[의병장 丹吾 鄭鏞基(1862∼1907)에게 답한 편지에서, 나라가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되찾기 위한 계책을 도모하지 못하고 있으니 평소 배운 학문이라는 것이 모두 헛된 것이겠지만, 배우기 위해 찾아온 제생을 돌려보내지 않고 있는 것은 우리 조선의 근본인 유학의 맥이 끊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하였다. ○이보다 앞서 대신이 누차 경연에서 아뢰어 고종황제가 부군의 성함을 써서 대전 벽에 써 두자, 조정에서는 부군이 곧 등용될 것으로 알았다. 그러나 이제 나랏일이 그릇되고 마니, 아는 사람들은 모두 애석하게 생각하였다.] 密陽 三浪津의 萬浪亭에서 侍講公을 모시고 지내다.[만랑정은 삼랑진에 있는 시강공의 別業이다. 시강공은 을사조약이 체결된 뒤, 나라에 변고가 생기면 급히 상경하려고 철도역이 가까운 이곳에 나와 있었다.]
◎ 1906년(고종광무10, 52세) 병오
侍講公이 헌병대에 구금되었다는 말을 듣고, 곧바로 달려가 곁에서 떠나지 않고 지키다.[이때 이토 히로부미가 일본에서 한양으로 가는데, 시강공이 철도역 가까운 곳에 있었기 때문에 위해가 될까 두려워 구금한 것이었다.] / 3월, 7일 講會에 멀리 사는 門生들이 적게 오자 詩(「丙午三月講會」)를 지어 한탄하다. / 柳震玉에게 답장(「答柳元振」)을 보내, 대마도에서 殉死한 勉菴 崔益鉉(1833∼1906)의 죽음에 치제하는 것의 가부에 대해 물은 것에 답하다.[면암 최익현은 을사조약이 체결된 뒤 의병을 일으켜서 항쟁하다가 대마도로 잡혀가서 순사하였으므로 그 의리는 대단하지만, 그가 올린 「癸酉上疏」로 대원군이 실각하면서 척화정책이 무너진 것이 그가 대마도로 잡혀가서 순사하게 된 근본 원인라고 전제한 다음, 그가 고종이 친정하면서 高官에 기용되어 한 일은 자신의 사사로운 이익을 도모하는 것이 아님이 없는데다, 그가 권세가의 사주를 받아 葛菴 李玄逸(1627∼1704) 선생의 시호를 환수하게 한 장본인이기에 南人의 입장에서 원한이 없을 수 없으니, 원한을 가지고 그의 靈前에 치제할 수는 없는 일이라고 하였다.]
◎ 1907년(고종광무11, 순종융희1, 53세) 정미
6월, 高宗皇帝가 태자에게 선위하니, 연호를 隆熙로 고치다.[16일 脯時(저물녘)에 햇빛이 검붉은 색을 띠었다.] / 병으로 누워 제생들에게 韻字를 부르게 하여 高宗皇帝의 선위와 망국에 대한 소회를 담은 詩를 즉석에서 짓다.[시에 “사람들을 만나면 서울의 일 묻게 되나, 왜인들을 심하게 죄줄 필요 없으리라. 재앙이 신하로부터 나올 줄 알았으랴. 경각 사이 나라는 넘어지고 말았다오. 선양하던 시대 먼데 이름 외려 남아 있어, 난신적자 손을 빌려 자못 성세 떨친다오. 서생에게 군사 논의 못하게 한 이 누구인가. 한 치 단심 한 치 홀만 그저 갖고 있다오.(逢人輒問帝京事 不須深罪頑酋突 豈圖孼從臣僕出 頃刻之間大廈蹶 禪受世遠名猶存 賊子藉手頗揚扢 孰使書生不談兵 只有寸心與寸笏)”라고 하였다.] / 金約泉(金鎭祜)과 趙一山(趙昺奎)의 편지에 답장(「答金致受趙應章」)을 보내 󰡔士儀󰡕를 舊本대로 간행하자고 청하다. / 󰡔士儀󰡕 간행소에서 詩(「奉示士儀重刊所諸公」)를 지어 諸公에게 보여주다. / 許舫山(許薰)의 죽음에 곡을 하다.[祭文이 있다.] / 12월, 󰡔氏族攷(東國氏族攷)󰡕를 엮다.[跋文(「跋氏族攷」)이 있다.]
◎ 1908년(순종융희2, 54세) 무신
「深衣編」(「深衣考證」)을 짓다. / 3월, 本生 형수 淑人 廣州安氏(1847∼1908)의 죽음에 곡을 하다.[侍講公의 부인이다. 祭文(「祭本生兄嫂淑人廣州安氏文」)이 있다.] / 󰡔舫山集󰡕을 編校하다.[跋文(「跋舫山集」)이 있다.] / 12월, 󰡔祗從日錄󰡕을 쓰다.[이 日錄은 순종황제가 남쪽 지방을 순행하려고 기차를 타고 釜山에 왔을 때, 侍講公을 따라 부산에 갔다가 돌아올 때까지의 과정을 기록한 것이다. 시강공은 이튿날 大駕를 호종해서 馬山으로 가고, 부군은 집으로 돌아왔다.] / 「巡狩攷」를 엮다.
◎ 1909년(순종융희3, 55세) 기유
「曆攷」를 짓다. / 7세조 判書公(盧漢錫, 1622∼1702)의 焚黃祝文(「七世祖贈吏曹判書海府君焚黃告由文」)을 짓다. / 「慕禎壇契帖序」를 짓다.[慕禎壇은 바로 판서공의 杖屨所인데, 비석을 세우던 날 선비들이 모여 치제하고 修契하였다.] / 11월, 侍講公의 61세 생신(회갑)을 축수하다.[詩(「壽家兄六十一歲生朝」)가 있다.] / 12월, 慶州 玉山書院에 가서 體仁廟에 謁廟하다.[16韻 32句의 長詩(「玉山行」)를 지어 소회를 피력하는 한편, 󰡔求仁錄󰡕를 구하고 「玉山圖」를 그려서 돌아왔다.]
◎ 1910년(순종융희4, 56세) 경술
「歷代國界攷」를 짓다. / 봄, 慵齋 李宗準(1458∼1499) 선생과 訥齋 李弘準(?∼1523) 선생 형제의 逸稿 󰡔慵訥齋兩先生遺稿󰡕를 編校하다.[跋文(「跋慵齋訥齋伯叔逸稿」)이 있다.] / 󰡔小學節要󰡕를 엮다. / 達西齋 蔡先修(1568∼1634) 공의 逸稿 󰡔達西齋文集󰡕의 跋文(「跋達西齋逸稿」)을 짓다. / 7월, 大韓帝國이 망하다.[부군은 이때부터 약물을 폐하고 제생을 사절하였다. 韓東愈(1885∼1961)에게 답한 편지(「答韓一初乃文」)에 “우리들의 운명이 박복하여 故國의 역사를 지키지 못하였으므로 살아 있어도 살아 있는 것이 아니고, 학문을 해도 학문이 될 수 없습니다. 이미 죽을 자리를 얻지 못하였으니, 오히려 마땅히 우리 先王께서 敎育으로 自强을 꾀한 방책을 지켜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 󰡔國朝聞人生卒錄󰡕을 엮다. / 11월, 侍講公이 倭人의 옥에 구금되다.[이때 시강공은 은사금을 거부하고, 갇혀서도 음식을 먹지 않으면서 왜인을 꾸짖었는데, 부군은 며칠 동안 지친 기색도 없이 옥 밖에 지키고 서 있었다.]
◎ 1911년(57세) 신해
四友堂 曺爾樞(1661∼1707)의 󰡔四友堂文集󰡕의 跋文(「跋四友堂集」)을 짓다. / 11월, 侍講公이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망명하다. / 12월, 가족을 데리고 侍講公을 따라 만주로 가서, 安東縣 興隆街에 거처를 정하다.[67수의 연작 紀行詩(「辛亥紀行」)가 있다.]
◎ 1912년(58세) 임자
선조들의 金海鄕案 立案 사실을 밝힌 󰡔金海郡案及邑誌節略󰡕을 발간할 때 그 序文(「金海鄕案及邑誌節略合刊序」)을 짓다. 昌寧의 儒들이 훼철된 燕巖書院의 遺墟碑를 세울 때 그 碑文(「燕巖書院遺墟碑」)을 짓다. 奉天 淸나라 궁전 寶庫의 임자년 조사보고서(󰡔奉天淸朝宮殿新調査寶庫類誌󰡕) 後識(「書奉天淸朝宮殿壬子調査寶庫類誌」)를 짓다. / 晦堂 張錫英(1851∼1926), 弘窩 李斗勳(1856∼1918)과 安東縣 元寶山에 가 보다.[鴨綠江 가에서 헤어질 때 詩(「鴨綠江上別張舜華李大勳」)를 지어 송별하다.] 參書 壽春 李敏應(1876∼1955)과 安東懸 接梨樹에 가 보다.[詩(「接梨途中贐李參書」ㆍ「次李參書接梨詩三首」)를 지었다.] 奉天으로 가는 李圭煥, 朴鳳烈, 族孫 盧在圭를 보내다.[글을 지어 송별하였다.] / 중국인 劉心一과 溫次琴의 流落하는 처지에 공감하여 증별하는 글[「贈溫次琴序」]을 지어 주고, 또 온차금의 詩에 和韻하다. 중국인 銘軒 孫新德이 편지와 함께 부채를 보내 詩句를 써주기를 청하기에 그에 응해 詩(「孫銘軒發書寄扇要寫詩句仍作三絶」)를 짓다. 중국인 錢培墊을 글을 지어 송별하다. / 5월, 손자 在爀이 출생하다. / 7월, 密陽 蘆谷으로 돌아오다.[이때 寔容이 昌寧 菊洞에서 병(紅疹)으로 몹시 위독하였기 때문에 侍講公의 명으로 가족을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얼마 안 있어 시강공이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고 곧바로 安東縣에 갔다가, 8월에 시강공의 병이 나아서 다시 창녕 국동으로 돌아왔다.] / 11월, 寔容이 安東縣에서 죽다.[식용은 병이 더욱 위중해지자, 부군에게 거듭 “이곳에서 죽어도 어버이가 계시지 않는 곳이니 객지입니다.”라고 하면서, 병을 무릅쓰고서라도 覲親하러 만주에 가겠다고 하였기 때문에 부군이 데리고 안동현으로 오게 된 것이다. 12일은 侍講公의 생신이라, 술상을 차리고 故國의 知舊들을 청해 망명하신 시강공의 심사를 위로해 드리는데, 어버이가 걱정하시지 않도록 여러 날 신음 소리를 입 밖에 내지 않았다. 14일에 세상을 떠나고, 이틀 뒤 元寶山에 가매장하였다.] / 12월, 還國하여 부인 孺人 長水黃氏의 묘소를 昌寧 菊洞 巽坐 등성이로 移葬하다. 다시 만주 安東縣으로 가서 侍講公을 모시고 지내다.
◎ 1913년(59세) 계축
1월, 祠版을 받들고 密陽 蘆谷으로 돌아오다.[兩代 孀婦를 고국에다 홀로 둘 수도 없고, 또 망명지로 데려갈 수도 없었기 때문에 侍講公의 명으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 2월, 중국 安東縣 元寶山에 가매장한 寔容을 返柩해서 密陽 蘆谷에다 장사지내다.[이때 부군의 병이 위중해서 家容 등은 侍病하느라 갈 수 없었기 때문에 고종형 安鍾達이 만주로 가서 반구하였다.] / 5월, 侍講公의 문집 󰡔大訥手卷󰡕을 編校 淨寫하고는, 그 뒤에 그 跋文(「大訥手卷跋」)을 붙이다. / 7월, 侍講公을 뵈러 만주 安東縣 接梨樹로 가다.[이보다 앞서 시강공은 안동현 興隆街에서 接梨樹로 이주하였다.] / 止止堂 金孟性(1437∼1487) 선생의 行狀(「止止堂金先生行狀」)을 짓다. 󰡔止止堂詩集󰡕을 重刊할 때 그것을 編校하고, 跋文(「止止堂詩集重刊跋」)을 짓다.
◎ 1914년(60세) 갑인
4월, 侍講公을 뵈러 만주 安東縣 接梨樹에 가다. 전 홍문관교리 守坡 安孝濟(1850∼1916)의 詩에 和韻하여 詩(「和安舜仲二首」)를 짓다. 또 같은 韻字로 詩(「用前韻上家兄二首」ㆍ「復用前韻呈接梨樹僉公」)를 지어 시강공에게 드리고, 또 접리수에 살고 있는 분들에게도 드리다. / 10월, 紫巖書堂이 신축되다.[낙성하는 날 鄕飮酒禮를 행하고, 󰡔大學󰡕을 강의하다. 「紫巖書堂記」, 「紫巖書堂新成行鄕飮禮講大學」, 「紫巖書堂雜詠」 등의 작품이 있다. 또 「자암서당기」는 부군의 것 외에도 1915년 8월에 晦堂 張錫英(1851∼1926)이 지은 것과 1916년 7월에 耕齋 李建昇(1858∼1924)이 지은 것이 더 있고, 醇齋 金在華(1887∼1964)의 「紫巖書堂上樑文」)이 있다.] / 進菴 鄭墧(1799∼1879) 선생의 문집 󰡔進菴集󰡕을 編校하다.[墓碣銘(「進菴先生鄭公墓碣銘」)을 지었다.]
◎ 1915년(61세) 을묘
4월, 侍講公을 뵈러 만주 安東縣 接梨樹로 가다. / 󰡔大東風雅󰡕의 序文을 짓다. 格齋 孫肇瑞(1412∼1473) 선생 문집 󰡔格齋集󰡕의 三刊 跋文(「格齋集三刊跋」)을 짓다. 西岡 金係錦 선생 문집 󰡔西岡逸稿󰡕의 重刊 跋文(「西岡逸稿重刊跋」)을 짓다. / 겨울, 金海 荷溪에서 性齋先生의 影幀에 치제하다.[이때 士林이 성재선생의 영정을 昌原 赤峴의 麗澤堂에 봉안하기 위해 서울에서 옮기는 도중 김해 하계의 廣州安氏 재실에 잠시 모셨기에 가서 치제한 것이다.] / 11월, 家容 등이 회갑연을 열자고 청하였지만 허락하지 않다.
◎ 1916년(62세) 병진
선조 侍中公(盧仁正)의 墓閣 浮海亭(固城 堂項山)의 記文(「浮海亭記」)을 짓다. 小菴 李邁久(1841∼1927)에게 답하여 穌齋 盧守愼(1515∼1590) 선생의 학문 연원을 논하다.[盧穌齋는 退溪 李滉(1501∼1570) 선생의 제자가 아니고, 晦齋 李彦迪(1491∼1553) 선생의 제자임을 변증하였다.] 勸懲 조목을 써서 夏山同約會에 주다.[跋文이 있다.] / 7월, 侍講公을 뵈러 만주 安東縣 安民山에 가다.[이때 시강공은 接梨樹에서 10리 떨어진 이곳 安民山으로 이주하였다.] / 眞幀(影幀)을 만들다.
◎ 1917년(63세) 정사
봄, 省軒 李炳憙(1859∼1936), 錦洲 許埰(1859∼1935)와 함께 京鄕 士林들에게 주창을 해서 󰡔星湖先生文集󰡕을 密陽 退老에서 간행하기로 하다. / 4월, 侍講公을 뵈러 만주 安東縣 安民山에 가다. 安守坡(安孝濟)의 죽음에 곡) 하다.[挽詞(「挽安舜仲」)와 祭文(「祭安舜仲」)이 있다.] / 貞武公 潛窩 崔震立(1568∼1636) 宗家 사랑인 欽欽堂의 重修記文(「欽欽堂重修記」)를 짓다. 󰡔一蠹鄭先生事實略󰡕과 󰡔守愚堂崔先生事實󰡕을 編校하다. 「就正補遺契約束」을 만들다. 海峯 南浩良(1876∼1942)의 부탁으로, 寧海의 英陽南氏 所藏의 宣祖大王 御製 󰡔桃花宸帖󰡕에 次韻한 詩(「敬賡昭敬王桃花詩帖二首」)를 짓다. / 가을, 京鄕 士林에게 편지(「與京鄕士林)」)를 보내 󰡔下廬先生文集󰡕의 간행을 촉구하다. / 겨울, 昌原 赤峴의 永慕閣에서 󰡔下廬先生文集󰡕을 간행하다.[跋文(「下廬先生文集跋」)이 있다.] / 12월, 󰡔東賢學則󰡕의 跋文(「東賢學則跋」)을 짓다. 󰡔大嶺勝覽󰡕을 엮다.
◎ 1918년(64세) 무오
「聖廟及從祀位牌尺度粉書墨書考」를 짓다. 寧無成齋 河應圖(1540∼1610) 선생의 逸稿 󰡔寧無成齋先生逸稿󰡕의 序文(「寧無成齋逸稿序」)을 짓다. / 4월, 侍講公을 뵈러 만주 安東縣 安民山에 가다. 이 달 󰡔光州世稿續󰡕을 엮어서 간행하다.[風軒 盧時鍵(1630∼1705), 詠歸亭 盧爾柙(1709∼1756), 農窩 盧尙普(1775∼1841), 小醒 盧基弼(1826∼1885) 네 분 선조의 合稿이다. 이 해 密陽 蘆谷 風雷亭에서 간행하였는데, 本孫 根容(1884∼1965)이 와서 그 일을 주관하였다.] / 12월, 高宗皇帝가 德壽宮에서 승하하다.[侍講公에게 편지를 올려 純宗皇帝의 國喪에 服을 입어야 하는 것이 당연함을 말하다.]
◎ 1919년(65세) 기미
3월, 한국의 독립를 청원하는 巴里長書에 문하의 제자 李定厚(1871∼1950), 李學奎(1876∼?), 安鍾達(1878∼1928), 孫上鉉(1878∼1961), 姜信赫(1879∼1966), 柳震玉(1879∼1928), 安孝珍(1879∼1946), 朴尙允(1880∼1938), 許坪(1882∼1929), 盧燾容(1883∼1952), 朴正善(1884∼?), 金定基(1885∼1946), 裵鍾淳(1890∼?)의 13인과 함께 서명하다. 이 달 󰡔下廬先生文集󰡕 藏板閣 長山齋가 昌原 赤峴에 지어지자 그 上樑文을 짓다. / 가을, 家容에게 만주 安東縣 安民山에 가서 侍講公을 뵙고 오게 하다. / 9월, 泗淵 秣方으로 이거하다.[蘆谷에서 몇 리 떨어진 곳이다.] 이곳에 서당 泗南書庄을 짓다.[「泗南書庄雜詠」이 있다.] / 三足堂 金大有(1479∼1551) 선생의 行狀(「三足堂金先生行狀」)을 짓다. 󰡔李子粹語󰡕를 編校하다.[泗南書庄에서 起菴 李中業(1863∼1920)과 그 疑條에 대해 論定하다.] 敬齋 河文孝公(河演, 1373∼1453)의 문집 󰡔敬齋先生文集󰡕의 跋文(「敬齋河文孝公文集跋」)을 짓다. 「禮林壇規」를 定하다.[密陽의 士林들이 禮林書院 舊址에 壇所를 세우고 佔畢齋 金宗直(1431∼1492) 선생, 迂拙齋 朴漢柱(1459∼1504) 선생, 松溪 申季誠(1499∼1562) 선생을 祭享하려고 단소를 세웠기에 그 壇規를 정하게 된 것이다.] 禮林書院 壇所 설립 告由祝文(「佔畢齋迂拙齋松溪三先生告由文」)을 짓다.
◎ 1920년(66세) 경신
濯纓 金馹孫(1464∼1498) 선생 문집 󰡔濯纓先生文集󰡕의 四刊 跋文(「濯纓集四刊跋」)을 짓다. 定菴 郭越(1518∼1586) 선생의 行狀(「通政大夫守黃海道觀察使贈資憲大夫禮曹判書兼知經筵春秋館事世子左賓客定菴先生郭公行狀」)을 짓다. 眉叟 許穆(1595∼1682) 선생의 影堂 奉安文과 常享祝文(「眉叟先生影堂奉安文 常享祝文」)을 짓다. 󰡔東國儒賢編年󰡕을 엮고, 그 序文을 짓다. 朱子가 魏應仲에게 준 서간을 抄節해서 泗南書庄 東室 方齋에 걸다. 定容과 乙鉉에게 만주 鳳凰城에 가서 侍講公을 뵙고 오게 하다.[이때 시강공은 만주 安東縣 安民山에서 이곳으로 이거하였다.] / 12월[30일], 除夕에 꿈에서 깨어나 소회를 詩(「庚申除夕夢罷書懷上家兄六首」)로 적어 만주에 있는 侍講公에게 부치다.
◎ 1921년(67세) 신유
󰡔鳳凰城志󰡕를 엮고, 그 序文을 짓다. 「金海鄕校重修記」를 짓다. 「長山齋釋菜常享祝文」(「下廬黃先生釋菜常享祝文」)을 짓다. 「禮林壇享儀」를 만들다. 乙鉉에게 만주 鳳凰城에 가서 侍講公을 뵙고 오게 하다. 泗南書庄 우측에 廣疑問齋를 짓다.[上樑文이 있다.] 知申事 盧公(桑村 盧嵩, 1337∼1414)의 實記를 엮고, 그 跋文을 짓다. 晩修齋 李時佐가 내방하다. 「武屹書堂重建上樑文」을 짓다. 󰡔豐川盧氏世稿󰡕의 跋文(「豐川世稿跋」)을 짓다.
◎ 1922년(68세) 임술
3월, 󰡔鳳巖同泛錄󰡕을 엮다. / 12월, 出系 子婦[寔容의 아내] 光州安氏(1874∼1922)의 죽음에 곡을 하다.[祭文(「祭出系子婦安氏文」)이 있다.] ※ 侍講公이 還國하다.
◎ 1923년(69세) 계해
泗南書庄에서 󰡔眉叟先生年譜󰡕를 重刊하다. / 2월, 󰡔洙泗言仁錄󰡕과 󰡔五服沿革圖󰡕를 간행하다.[慕溪 金容禧(1862∼1942)가 刊役을 주관해서 그 板木을 紫溪書院에 옮겨서 보관하였다.] / 󰡔寒岡先生續集󰡕과 󰡔寒岡先生文集附錄󰡕을 編校하다. 「至聖祠奉安文」을 짓다. 「東山書堂上樑文」을 짓다. 󰡔盛京省誌󰡕를 엮다.
◎ 1924년(70세) 갑자
詩(「題廣疑問齋壁」)를 지어 廣疑問齋 벽에 쓰다.[그 시에 “이룬 게 하나 없이 칠십 나이 되었나니, 그저 서책 가지고서 혼자 정신 즐긴다오. 풍운의 일월은 중원갑자 돼 버렸고, 재지 있고 총명한 상학할 인재라오. 산 바깥 일 입을 닫고 언급을 하지 않고, 골짝의 봄 문을 열고 넘치도록 즐긴다오. 울긋불긋 온갖 꽃들 모두 다 내 소유라, 천옹의 길러주는 인을 깊이 믿는다오.(一事無成到七旬 秖携黃卷自怡神 風雲日月中元甲 才智聰明上學人 閉口不言山外事 開門剩賞洞中春 千紅萬紫皆吾有 多賴天翁育物仁)”라고 하였다.] 警齋 郭珣(1502∼1545) 선생의 實記(󰡔警齋先生實記󰡕)를 엮고, 그 序文(「郭警齋先生實記序」)을 짓다. / 봄, 溪堂 柳疇睦(1813∼1872) 선생의 문집 󰡔溪堂先生文集󰡕을 編校하다. / 古巖 金世洛(1854∼1928), 晩修齋 李時佐, 二江 柳萬植과 尙州 道南書院에서 놀다. 西坡 柳必永(1841∼1924)의 죽음에 곡을 하다.[挽詞(「挽西坡柳丈」)가 있다.]
◎ 1925년(71세) 을축
守坡 安孝濟의 墓誌를 짓다. 󰡔夏山勸懲案󰡕의 後識(「書夏山勸懲案後」)를 짓다. 󰡔周禮私議󰡕(「六官私議目錄」?)를 엮고 그 跋文을 짓다. 󰡔己卯錄󰡕, 󰡔政經󰡕, 󰡔勸學錄󰡕을 엮다. 「晩醒朴公行狀」을 짓다. / 여름, 開寧 甘文에서 溪堂 柳先生, 柳疇睦이 편집한 󰡔全禮類輯󰡕을 編校하다. / 8월, 柳二江(柳萬植)이 찾아와서 󰡔溪堂先生文集󰡕의 疑條에 대해 질의하다. / 가을, 患腫 때문에 侍講公을 모시고 溫泉에 가다.[좇아온 원근의 士友들이 몹시 많았다. 온천욕을 하는 여가에 寒岡先生의 󰡔蓬山浴行錄󰡕을 열람하고는, 모두들 동의해서 景賢契를 결성하고 그 序文을 짓다.] / 11월, 患腫이 더욱 심해져서 다시 溫泉에 가다.[이번 행차에는 家容, 定容, 李炳祺가 배종하였다. 3일을 온천욕을 하니 환종이 나았고, 10여 일을 머물다가 돌아왔다.] / 겨울, 秣方에서 蘆谷으로 돌아오다.
◎ 1926년(72세) 병인
봄, 泗南書庄에서 지내다. 紫巖書堂을 重修하다.[上樑文이 있다.] 金海 山海亭의 諸公과 南冥(曺植) 松溪(申季誠) 두 선생의 釋菜儀禮를 論定하다.[許㙏의 물음에 답하여(「答許大來」), 山海亭에서는 남명선생이 생전에 道義之交를 나누어 “오당의 인물들 가운데, 신군이 최고였다오.(吾黨有人 申君爲最)”라고 허여하고, 사후에 書院(新山書院)에서 聯享(幷享)하였다면, 남명선생의 뜻과 서원 享祀儀禮에 따라 남명선생만이 아니라 송계선생에게도 釋菜禮를 올리는 것이 마땅할 것이라고 하였다.] 二江 柳萬植의 죽음에 곡을 하다.[祭文(「祭柳建一文」)이 있다.] / 3월, 昌德宮에서 純宗皇帝가 승하하다.[國祚가 영영 끊긴 것에 통분해서 여러 날 문을 닫고 손님을 사절하였다.] 「歷代著述先聖先儒姓諱總錄」을 작성하다. / 5월, 溫泉浴을 가다.[이때 金古巖(金世洛)과 密陽의 士友들이 함께 가서 酬唱하였다.] / 7월, 「性齋先生金海影堂上樑文」을 짓다. / 「家世十遷圖屛」과 「紫巖書堂十曲圖屛」을 만들다.[我石 金鍾大(1873∼1949)의 그림이다. 題詩(「題家世十遷圖屛」과 「題紫巖書堂十曲圖屛」)가 있다.] 張晦堂(張錫英)의 죽음에 곡을 하다.[挽詞(「挽張舜華三首」)가 있다.]
◎ 1927년(73세) 정묘
崇禎 隆熙 시대에 殉國한 諸賢의 事行을 기록한 󰡔禎熙錄󰡕를 엮다.
◎ 1928년(74세) 무진
1월[1일], 元朝에 自警文(「戊辰元朝自警」)을 지어, 73년 동안 살아오면서 했던 일의 그릇됨을 반성하고, 남은 생에는 그릇됨이 없기를 각오하였다.[지난 73년을 돌아보건대, 소시에 글 읽기를 부지런히 하지 않은 것, 장년에 名利를 구했던 것, 과거를 그만두고도 文詞에 마음을 써 왔던 것, 師門의 가르침을 服膺하지 못했던 것, 朋友에게 도움을 주지 못하면서 講學을 소임으로 했던 것, 闡發하지도 못하면서 남의 文字를 지었던 것, 辭受에 신중하지 못했던 것, 慶吊를 살피지 못했던 것, 書籍을 좋아해서 財力이 다하는 것을 걱정하지 않았던 것, 자손들을 번거롭게 부려서 그 학업을 방애했던 것이 그릇되었다고 하고는, 어찌하면 남은 생에는 그릇됨이 없을지 반성하였다.] / 昌寧의 漁村 楊喧(1597∼1650) 선생의 光山壇所(光山書堂) 告由祝文(「漁村先生楊公光山壇所告由文」)을 짓다. 蠹窩 崔興璧(1739∼1812) 선생의 墓誌銘(「蠹窩先生崔公墓誌銘」)을 짓다. 󰡔我我錄󰡕 중 寒岡先生 癸丑疏에 대한 誣陷을 辨誣하다.[檜淵書堂(檜淵書院) 首席(堂長)으로 회연서당 士林과 연명해서 󰡔아아록󰡕 간행소에 發文(「與我我錄刊所」)하여 변무하였다.] / 봄, 金海 就正堂에 가서 性齋先生의 影幀을 奉安하다.[「先師文憲公性齋許先生就正堂影幀奉安文 常享祝文」을 지었다.] / 여름, 昌寧 追遠齋에서 世譜를 교정하다.[4월에 갔다가 6월에 돌아왔다. 돌아올 때 詩(「余以譜役戊辰四月到追遠齋六月將還諸宗來餞」)를 諸宗과 전별하였다.] / 조선 개국부터 1906년까지 相臣과 各道 監司를 연대별로 정리해서 수록한 󰡔國朝出治錄󰡕을 엮다.[1930년 泗川 朴彩奎가 晩巖堂에서 간행하였다.] 「寒岡先生四禮彙類跋」을 짓다.
◎ 1929년(75세) 기사
1월[1일], 元朝에 詩(「己巳元朝書懷」)를 지어 회포를 적다. / 黃江 李希顔(1554∼1559)의 精舍 黃江亭 重修記(「黃江亭重修記」)를 짓다. 󰡔國朝進文蒐錄󰡕을 엮다. 澗松 趙任道(1585∼1664) 선생의 續集 跋文(「澗松續集跋」)을 짓다. / 8월, 金海 金谷에 가서 侍講公을 뵙다.[시강공은 이때 81세였는데, 還國 이후 자손들의 봉양을 받지 않은 채 절이나 섬에서 지내다가, 금곡 선영 아래에 터를 잡아 天山齋를 짓고 여생을 보내려고 하였다.] / 百弗菴 崔興遠(1705∼1786) 선생의 杖屨所 大邱 夫仁洞(옻골마을)에서 놀다.[詩(「夫仁行」)를 지어 소회를 적다. 同話錄이 있다.] 佔畢齋 金宗直(1431∼1492) 선생의 사당에 謁廟하다.[詩(「謁佔畢先生廟」)를 지어 소회를 읊었다. 그 시에 “늦게야 근원 찾아 도의 못에 도달하여, 정자에 올라서자 서원에서 뵙게 된 듯. 영남 지역 곳곳에 광휘 두루 비쳤나니, 쇄락한 오월양풍 사백 년이었다오.(晩始尋源到道淵 登亭如拜禮林筵 山南處處光輝遍 梧月楊風四百年)”라고 하였다.] 高靈 桃津의 高靈朴氏 齋室 文淵齋를 방문하다.[酬唱한 詩(「文淵齋酬諸君子」)가 있다.] 寒岡先生의 사당에 알묘하고, 「月朝約會儀」를 행하다.[이때 부군은 約長이 되었는데, 士友 50여 명이 모였다.] 鳳岡書堂을 방문해서 相揖禮를 행하고, 󰡔大學󰡕과 󰡔中庸󰡕을 강의하다. 󰡔文獻公實記󰡕를 新刊함에 增刪한 條目에 대해 질의하다.[檜淵書堂(檜淵書院) 首席(堂長)으로 회연서당 士林과 연명해서 灆溪書院 諸公에게 發文(「與灆溪書院諸公」)하여 질의하였다.] 深齋 曺兢燮(1873∼1933)이 晩醒 朴致馥(1824∼1894)의 墓碣銘(「晩醒先生墓碣銘」)에서 南人의 학문을 嶺學(嶺南南人의 학문)과 畿學(近畿南人의 학문)으로 구분한 것을 강력하게 비판하고, 이 둘 모두가 퇴계(退溪)→정주(程朱)→공맹(孔孟)으로 통하는 동일한 법도(法度), 동일한 심법(心法)에서 나온 것이 아닐 수 없음을 천명하였다.[「答鄭聖國」(1929년), 「晩醒朴公行狀」(1925년) 등.]
◎ 1930년(76세) 경오
1월, 蘆溪 安遇(1449∼1527) 선생의 講道處 滄浪亭의 重修記文(「滄浪亭重修記」)를 짓다. / 祭文(「祭盧參判景涵文」)을 지어 欽齋 盧泳敬(1845∼1929)의 靈筵에 곡을 하다. 涵齋 鄭恩錫의 죽음에 挽詞(「挽鄭謙叟 恩錫 三首」)를 지어 애도하다. 昌寧 追遠齋에서 世譜를 간행하다. 「追遠齋記」를 짓다. 󰡔世譜要編󰡕을 간행하다. 󰡔屯山同話錄󰡕과 󰡔續屯山同話錄󰡕를 엮어 花樹의 정다운 모임을 기록으로 남기다.[序文(「屯山同話錄序」)이 있다.] / 7월[26일], 鳳谷, 竹田, 大谷 親塋에 성묘하다.[詩(「七月二十六日省親壟」)를 지어 소회를 적었다.] / 10월[30일], 馬山 寓第로 돌아오다. 출발할 때 根容(盧根容)이 준 詩를 미쳐 펴 보지 못했다가, 昌寧에서 열차가 두어 시간 정차할 때 펴 보고서 급히 和答해서 부치다. / 11월, 馬山 寓第에서 며칠 머문 뒤 密陽 蘆谷으로 돌아가려다가 날씨가 추워서 그만두다. 雪窓 河澈(1635∼1704) 선생의 行狀(「贈嘉善大夫司憲府大司憲雪窓先生河公行狀」)을 짓다. / 12월, 默山(默漢, 沐山) 李景九(1856∼1921)의 遺稿를 編校하다.
◎ 1931년(77세) 신미
1월, 元朝에 侍講公의 83세를 祝壽하다.[詩(「辛未元朝壽家兄八十三歲三首」)가 있다.] 22일(갑자), 처음 아프기 시작하다. 이날 저녁 紫巖 趙性源(1838∼1891)의 行狀을 抄하다가 마치지 못하고, 극심한 통증으로 자리에 눕다. 24일(병인), 통증이 줄어들어 家容 등에게 在燁의 四星單子와 「花堂裵公實記序」를 쓰게 하다. 25일(정묘), 患候가 다시 더해져 家容에게 명하여……[※ 이하 考終과 初喪 등을 기록한 부분이 缺落되었다. 許鉐의 「小訥先生狀草」, 盧根容의 「小訥先生遺事」, 安朋彦의 「小訥先生墓碣銘」, 그리고 후손의 증언 등으로 보충하였다.] 30일(임신), 馬山 寓第에서 서거하시다. / 3월, 12일(갑인)에 金海 金谷 함박산 寅坐 등성이에 장사지내다.[會送한 사람이 수천 명이었고, 加麻한 門人이 수백여 명이었다. 日人이 3량의 임시열차를 내주어 馬山에서 金海 慕禎으로 운구하였다. 장례 당일 끝없는 問喪 행렬로 白衣의 물결이 金谷에서 進永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4월 10일(임오)에 같은 함박산 甲坐 등성이에 改葬하였다가, 2009년 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으로 移葬하였다.]
◎ 1933년 계유 門人들이 紫巖書堂에서 文集(󰡔小訥先生文集󰡕) 48권을 간행하다.
◎ 2003년 계미 건국포장[3.1운동]이 추서되다.
6) 석문:
◎ 哲宗英孝大王六年乙卯(1855, 1歲)
十一月庚寅(二十一日申時) 府君生于金海府金谷里之第
[盧氏籍光州 中世自草溪移昌寧 至府君七世祖判書公諱漢錫 徙居金海 小宗屋廬宏偉 而爲鬼火頻生 不能保守 因門黨之推祖考道川諱奉文入居之 火竟息之 又有術者言 此基必生血食君子云 考諱滈淵 號愚堂 妣全州李氏 學生鋌宇女 本生考諱佖淵 號克齋 僉知 本生妣昌寧成氏 節制使郁鎬女 淑夫人 成氏夢巨人入門 感而有身 及生 紫黃之氣繞室 諱相稷 字致八 號訥人又小訥 府君伯仲言訥 故人以訥大小訥稱之]

◎ 七年丙辰(1856, 2歲)

◎ 八年丁巳(1857, 3歲)
[淑夫人患乳腫 見其苦口+楚之像 至瘳不吮]

◎ 九年戊午(1858, 4歲)

◎ 十年己未(1859, 5歲)
始學孝經
[克齋公敎法嚴峻 一字錯誦 輒施罰兩脛腁胝 或雪朝負車黜之 淑夫人亦見而不止之]

◎ 十一年庚申(1860, 6歲)
見書冊之小䌙 則輒藏于袖中

◎ 十二年辛酉(1861, 7歲)
讀少微通鑑

◎ 十三年壬戌(1862, 8歲)
有賊乘夜入室 爲人所驚而走 翌朝見其遺履 愀然作色曰 如此凍夜 其足豈不傷乎

◎ 十四年癸亥(1863, 9歲)
夏課于龍鳳齋
[屬文輒成數千言 塾中老少稱以文甕]

◎ 太皇帝元年甲子(1864, 10歲)
受庸、學于克齋公

◎ 二年乙丑(1865, 11歲)
讀論、孟
隨克齋公往謁性齋先生于公餘堂
[時許先生來守本府 開公餘堂以待學者 負笈請業者日益衆 以至不能容]

◎ 三年丙寅(1866, 12歲)
隨克齋公又拜性齋先生于公餘堂
讀詩傳

◎ 四年丁卯(1867, 13歲)
讀書、易

◎ 五年戊辰(1868, 14歲)
四月 愚堂公卒
[時愚堂公有子 故姑未入承]
夏 從族兄相八氏 課于安平書塾

◎ 六年己巳(1869, 15歲)
始赴鄕試

◎ 七年庚午(1870, 16歲)
閏十月 哭定軒李公鍾祥于普門

◎ 八年辛未(1871, 府君十七歲)
夏課于燕子樓
[時璞園鄭公顯奭來守本府 聚境中子弟以課之 府君得與焉]
冬 聘于長水黃氏之門
[執義起源之孫 通德郞棨之女]

◎ 九年壬申(1872, 18歲)
秋 登矗石樓有詩

◎ 十年癸酉(1873, 19歲)
八月 從本生兄侍講公 謁性齋先生于新門外
[許先生曰 新進輩喪志之患 易從詩學中出 又曰 學者貴立志 府君聞而益新之]
往尙州 謁洛坡柳相公 哭溪堂柳先生靈筵
[克齋公嘗師柳先生]

◎ 十一年甲戌(1874, 20歲)
光山文獻考成
[十世祖沃村、從九世祖月村、八世祖菊潭三先生逸稿]
四月 赴東堂農務策
秋 編次三賢逸稿
抄集黙窩、道川散稿
十月 長子寔容生
[入承侍講公後]

◎ 十二年乙亥(1875, 21歲)
正月 往赴大邱選士 駄疾而還
夏課養士齋
五月 顧諟錄成
[按府君所撰序 略曰 相稷五歲 受孝經 十歲 讀大學、中庸 自以爲未必有效於公車業 不屑屑玩究 十九 造拜性翁之門 始聞爲己之方 其要乃孝親、率性、明德數件事也 誠能從事於斯 捨是書奚求 因卽取次而詳讀之 立身行道、存養省察、治國平天下之本皆備焉 作小卷子 鈔出三箇書 合而目之 曰顧諟錄 取太甲顧諟明命之意也]
八月 與族兄主事公相說 赴居昌試

◎ 十三年丙子(1876, 22歲)
訪趙進士昺奎于廬陰精舍
小華詩選成
兵學要選成
抄心經
校歸園黃公遺稿
秋 與河野朴文範講質四子書

◎ 十四年丁丑(1877, 23歲)

◎ 十五年戊寅(1878, 24歲)
春 謁性齋先生于畜洞 受大學
四書疑解成

◎ 十六年己卯(1879, 25歲)
三月 抄節明史總要
十二月 還居昌寧菊洞
[從克齋公命]

◎ 十七年庚辰(1880, 26歲)
二月 挽定軒李公鍾祥改葬
四月 赴慶科監試漢城二所
六月 屈禮圍
九月 克齋公還居菊洞
秋 更謁性齋先生于不倦堂 受魯論
敬次性齋先生涵虛亭講會時韻
[詩曰 抱笈劬劬誓此心 定知吾道極精深 陶薰豈獨涵亭會 不倦堂高士似林]
十一月 性齋先生作九思箴以贈之
壽性齋先生八十四歲生朝
[事師如事親 晨夕侍在傍 此席無疆祝 壽與道心長等句]
冬 題許拾遺元栻時弊疏後
[詩曰 蔘朮隨方進 蒼生賴保元 不煩而不迫 有道者之言]

◎ 十八年辛巳(1881, 27歲)
臨歸 伏呈性齋先生
[詩曰 從師西到已多時 舊簡新編取次披 洙泗源流千古接 程朱心法一言垂 尋奇漸有前程翫 立志那隨外物移 欲學未能旋拜退 都門夕日短驢遲]
二月 壽淑夫人成氏六十一歲生朝
[有詩曰 人道吾孃德潤身 自求遐福享長春 兩庭白髮猶無恙 八耋賢姑八耋親]
夏課于畜洞
五月 志感詩帖成
[吏判鄭健朝以默窩公學行、道川公孝行啓于朝 俱贈司憲府監察 一時賢士大夫 多以詩賀之]
十月 還家
[臨歸 性齋先生以序贈之曰 嶠南猶有君子遺風 生是邦 擩染家庭之學 其性純實 其志堅確 訥於言而敏於行 年少有志於學 其大人昔從我遊 因托其子 不遠千里 往來問業 去年春發 蹶於南省 因留于不倦堂 着力課工 惟日孜孜 秋歸覲 未幾復來 讀論語一部 間以鈔集成書 焚膏繼晷 耐飢寒忘寢食云云]
冬 夏城徵信錄成

◎ 十九年壬午(1882, 28歲)
二月 謁性齋先生于畜洞
三月 侍講公擢別試文科乙科第一人
五月 中東堂試
十月 屈禮圍
十一月 往拜性齋先生于果川木溪 仍還第
[時許先生長子安山公辵+翼守果川 而都下騷擾 故賃屋於淸溪山下 請爲先生便養]
十二月 哭道齋文公郁純
左海瑣聞成
冬 乞愚堂公墓銘于靑下趙公濟華

◎ 二十年癸未(1883, 29歲)
正月 遭祖妣淑夫人尹氏喪
夏 設課于追遠齋 從學者三十餘人
八月 謁性齋先生于冶洞
冬 參諸先正請廡疏廳
十一月 赴應製 獲給分
十二月 哭鄭進士思容

◎ 二十一年甲申(1884, 30歲)
二月 讀孟子
夏 講學于追遠齋 從者益衆
六月 覲侍講公于都下
[時侍講公以成均典籍遷司憲府持平]
八月 還第
詩選成
九月 入京 遭玉均亂
讀明史
十月 聞政府又與日本通和 擬陳疏構草而止[頭註: 當更稟于天山齋懸註]

◎ 二十二年乙酉(1885, 31歲)
四月 丁克齋公憂
[時府君與侍講公在京 戴星而歸 以不及侍劑爲至痛 哀毁逾制]
上性齋先生
[書略曰 爲本生不杖朞 以不貳斬也 而相稷於所後父 終祥後出系 旣不得服斬 今於本生 又不得服斬 則終無服斬之日矣 爲人子不服一斬者 是豈倫理中人也 通典晉王冀云 不及其所後制服 則宜還爲其親服斬 又有後周柳慶遭本生喪服斬之事 以是自慰 方欲稟行 先就士儀考之 王冀之說、柳慶之事 決不可從 不待稟白而已斷 之矣 及見是書 還復臆塞 叩地叫天 靡所逮及 抑又有一說暴白 理亶出於窮迫之至 伏乞矜惕而垂覽焉 某所後考棄世時 有一塊遺孤 未期年不幸菌化 門黨人咸勸取族人子子之 先人曰 不可捨從子而取族子也 蓋於所後考從子而可系者 只某一人 故一家人皆以某目之以出系而已 未曾有公私禮案 又未有分門異居之時 又未有所後黨親受服之日 則姑無所後家承統之顯跡 固如是矣 今日爲本生父服斬 他日承統於所後之家 夫豈有貳統之嫌也 伏望特賜定論 獲伸人子至恨 其非名敎中一事乎]
十月 謁性齋先生于京 請克齋公墓銘
十一月 還廬

◎ 二十三年丙戌(1886, 32歲)
正月 夫人黃氏卒[有壙銘]
七月 丁淑夫人成氏憂
九月 承性齋先生訃 爲位哭 服心喪
十二月 性齋先生行狀成[凡一萬三千六百餘言]

◎ 二十四年丁亥(1887, 33歲)
七月 哭性齋先生靈筵 爲文以祭 因省拜于霜草麓 與先生從子運 勘正庸語二十三冊
性齋先生年譜成 爲文告影幀
謁石山金公益容 乞克齋公文集序 又請行狀于懋齋李命九
自京歸路 與晩求李公、弘窩李斗勳講論禮疑
十一月 設講于克己齋 使諸生每五日習禮
儀契約成

◎ 二十五年戊子(1888, 34歲)
正月 省愚堂公墓于金陵
二月 丁大夫人李氏憂
四月 葬大夫人于昌寧大谷
夏 克己齋學約成[約凡勸善懲惡各二十條]
彛訓成
述日用十箴戒諸生
作克己齋春帖
[帖曰 夙興夜寐 灑掃庭內 溫恭朝夕 執事有恪 愼爾出話 敬爾威儀 無貳無虞 上帝臨汝]
訓蒙帖成
庭揖禮圖笏成
抄家禮
作兄弟同昭穆說

◎ 二十六年己丑(1889, 35歲)
元朝 有自警文
正月 女士須知成
[序略曰 女士之所可學 則列女傳、小學及我東三綱行實是也 雖然力有所不能遍焉 蓋不納酒漿 無以觀祭祀 不治絲繭 無以衣室中長幼 不具鷄黍 無以供賓客 凡此數事 關係甚繁 固何暇焚膏繼晷 咿唔不絶乎 此須知之所以無其簡也 其目有二 曰立敎、曰稽古 實卽取小學也 續之以東國之嘉言善行 取其近而易知也 譯之以國文 慮女士之識字者不常有也 乃令子之婦及息女受之 藏之紝器 隨暇隨讀 冀或有補於事父母、事舅姑、事君子、敎子姪之道也]
秋 做人要編成
八月 奉愚堂公緬轝 合祔大谷山

◎ 二十七年庚寅(1890, 36歲)
四月 服闋
九月 娶晋陽河氏之門
[學生泰兢之女 晩軒錫鳳之孫]
秋 行鄕飮禮于克己齋
同晩醒朴公致馥 倡五道士林 刊性齋先生文集于丹城法勿

◎ 二十八年辛卯(1891, 37歲)
四月 往麗澤堂
[時性齋先生文集剞役已訖 講堂新成 行鄕飮禮]
編光州世稿
[東嶽、墨齋、參奉、小菴、和菴、沃村、梅竹窩、月華堂、月村、菊潭、四梅堂、望湖亭、松川、芳谷、海隱、松陰、滄浪諸先生逸稿合四冊]
八月 集坊里儒生于追遠齋 以紙牌拜先聖先師位 因開席考講 置善惡籍
[時因巡使指揮 府君應選爲講長]
九月 更集諸生于克己齋
[聽約者百餘人 謁講席者四十六人 而所執冊子 小學居半 府君語諸生曰 若輩棄舊讀 以此來試 欲求合於主訓者 所嗜夫如是 書自書而已 曷嘗有反復入身之效哉 小學先灑掃 諸生能之乎 篇終特書咬菜 諸生能之乎 能此數箇事 立敎、明倫、敬身之要 次第可究 而勸德業、規過失、交禮俗、救患難之道 亦在乎此 諸生知所以讀小學 則可以體認乎講長之義矣]
十月 與族叔應禧、族孫在馨 往星州、安東、禮安 謁諸先生祠院 拜諸長德
[紀行略曰 至館洞 訪晩求 至陽亭 謁顧軒鄭丈 詣檜淵講堂 拜先生龕室 與佐極、景珍、仲極、子善 登鳳飛巖 入百梅園 與敎官丈及殷賚 往夙夜齋 登寒岡臺 至梧峴 謁東岡先生墓 到安東龜潭 自龜潭東去十里 乃河回也 入柳都事丈書室 以禮謁請敎迪 柳丈曰質卑識淺 有何敎人之方 執事必誤請遊談 枉費勞攘也 抵屛山書院 謁西厓先生位版 抵金溪 入西山金臺丈宅 金丈赴酉谷 謁鶴鳳先生祠廟 至榮川 路遇西山丈 班荊而小敍 約回途晋謁 抵酉谷 謁頤齋權丈 至冲齋先生讀書舊室 尙無恙 登靑巖亭 權氏諸公來見 頤翁亦來 詣冲齋先生祠堂 行瞻謁禮 訪江左翁宗家 賀恩典 與權景博時淵、權景興詩夏、權武京相鎬、權孝源友淵及禹敍 往石泉亭 攷冲齋集政院日記 記載墨齋召對時事實 頤齋丈以古詩一篇贈之曰楚楚南州英 訪我茶溪屋 老樹委空山 安有幽花摘 連夕共談論 才資何密博 儒風日以萎 願子崇令德 小壯不可恃 及時須努力 歲暮難久淹 送君情何極 崦嵫餘景短 何以留佳約 南風吹雁過 時可寄遠牘 乃和呈曰朝隮白石梁 暮宿靑巖屋 幸玆得中行 不復憂冥擿 有斐頤齋叟 道尊而文博 玉帛賁邱園 朝家尙耆德 憫余學迷方 繾綣勉餘力 要看藏密處 六合浩無極 人事卽天理 願言禮以約 詩中有眞詮 兢兢書諸牘 贊叟次其叔祖韻以贈之 詩曰我是山中人 不出山中屋 棄捐芻豢味 上山醋梨摘 夫君自南來 口吸滄溟博 貽我光明珠 勸我崇明德 明德詎不愛 所憂不自力 君心切以惠 感歎情何極 歲暮催歸轅 前期杳難約 山下縱脩夐 猶能寄素牘 與景博、英一、冲一、友三、舜八 往拜冲齋墓 入兎溪 謁先生墓 詣秋月寒水亭 至下溪 訪李承宣響山丈 到遠村 訪李小監龍山丈 李鞏鎬、李中吉來見 向陶山 至天淵臺 謁尙德祠 因周覽院中 寫陶山圖 有詩曰欲學朱夫子 先須學退陶 寤寐雲谷意 寫出陶山圖 入巖棲軒 奉玩靑藜杖、璇璣玉衡、梅花灯、硯匣、茶器、木燈、秫箒、岸席、粧板紙 往汾川 登愛日堂 謁聾巖廟 敬審八十八歲眞像 訪李承旨晩由氏、李校理晩鉉氏 到溪南 訪李仲圓、中轍 到金溪 西山丈出門延入 敍日前霎拜之悵 達夜陪話 問後生中誰可倚仗 臺丈曰金時洛、李中業、李中轍、權相翊、金瀅模數人而已 請終身佩服之言 臺丈曰自治而後治人 吾黨無自治之術 奚暇有治人之方 尊應加意於朱書及大學或問之中進修之法 專在於此 訪金瀅模不遇 首尾凡三十四日 周行並八百餘里]
沃野面講約契立議成
沃野面講約契約條成
門黨約束成

◎ 二十九年壬辰(1892, 38歲)
正月 爲文諭坊里諸生
議門黨 刊光州世稿于追遠齋 撰後識
夙夜室成
[每月行講約會 ○ 與權頤齋書曰 妄作書室之役 日事土木 費心尤多 惟幸茅楹草檻 正合措大棲息 屋已就而扁未具 姑以平生所自祈之夙興夜寐四字 識于室奧常目之地 冀或有進於時分之工 如得門下箴警之語 則尤爲持守之要也]

◎ 三十年癸巳(1893, 39歲)
二月 [出系者]寔容中應製進士
三月 子家容生
參南冥集重刊校正[頭註: 未詳 當刪]
四月 往哭鄭顧軒禮葬 爲文祭之
撰沃村、菊潭、海隱三先生墓碣後識
[時朝廷錄辰巳義勳 贈沃村吏曹參判 又因儒疏 加贈菊潭吏曹參議 贈海隱吏曹判書 故書于碣後]
七月 以鄕直月受諸生講于校宮
與朴晩醒書
作詩寄贈權正言(鳳熙)、安正言(孝濟)籬中
[寄安正言詩曰 一言纔出動三韓 盛代良臣不素餐 天心未欲容妖物 十載勞君作諫官 又曰 堂堂法服象元初 前後疏章案上儲 誠心報國那無日 長物君家寸舌餘]
題加味正心丹後

◎ 三十一年甲午(1894, 40歲)
元朝書警
[古人四十不動心 今人四十始求心 富貴貧賤淫而移 嗟嗟三十九年心 人生八十前期定 後四十年誓存心 存心之要豈他求 遏人慾處卽本心]
九月 哭晩醒朴公
[有挽詩、祭文]
遊籠巖
十一月 從侍講公乘舟 避地于金陵舊第
[時東匪猖獗 村里騷擾]
與李晩求書
冬 參三錄成

◎ 三十二年乙未(1895, 府君四十一歲)
二月 寓接于凝川之金谷
四月 錦山書堂成
[按孫古琴彙秀有記 略曰 乙未仲春 致八自夏之菊洞 搬寓于密之金谷坊 坊之人聞來而已耳聳焉 旣來而咸心悅焉 有若親戚之析而復合然者 里中童孺 則雀躍相語曰 吾隣先生來矣 以致八之訥 而謙之德居常以內 而不出爲事 而使百里外素不相習之人 親之如是 以至童孺而亦如是者 夫所謂不可揜者是耶 抑有不言而飮人以醇者耶 新寓隘陋艱容膝 尤以賢器上舍 無誦讀之所 擬僦一蔀茅 居人相議曰 是吾事也 因齊心協謀 侑基於燈夕前二日 告訖於是月未晦之前 以小端陽而落之 謂之不日成可也 是固非威勢所能致 亦非誘募所能得 誠之感人 捷於影響 抱鼓者不誣也 四十年劬書日進之力 庶其少見於今日也歟]
與古琴孫丈遊籠巖有詩[佔畢、寒暄先生遊賞之地]

◎ 建陽元年丙申(1896, 42歲)
從侍講公卜地于蘆谷[自金谷東距十里]
九月 刊克齋集于蘆谷
紫巖草廬成
哭孫古琴彙秀[有祭文, 頭註: 當書于丙申]

◎ 光武元年丁酉(1897, 43歲)
春 刊光州世稿續
夏 怡怡亭成
[侍講公就金陵慕禎江上 結構是亭 扁西楣曰大訥房 東楣曰小訥房 有兄弟湛翕之所 有記文及雜詠]
與李晩求書
作孔子不師老聃說
十二月 子定容生
[入承繼高祖之宗 先是三從宗兄相憲無育而卒 惟有從姪而亦單孑 故宗嫂曺氏以乞養不見許 且無庇身資 號泣不已 府君慰之曰 我又生子 使嫂有後 願安心焉 是歲定容生]

◎ 光武二年戊戌(1898, 44歲)
赴尙州道會 製通東洛文
[族孫在憲、柳震玉陪往]
九月 哭申仲雲泰龍[有挽詩]

◎ 光武三年己亥(1899, 45歲)
翼陽紀年成
春 撰冠山齋重建上樑文
紫巖日錄始
[時遠方學者坌集 府君以詩示之曰 令名蓋在友之爭 相接那曾事合迎 籍記云爲規且警 須臾勿使惡心生 又曰 宜置一籍 每日各書善惡 或可爲去惡從善之助也 亦可並記事物應接 以觀其當理與否也]
定言志契契憲
[略曰 契會日 先行庭揖 序齒列坐 討論經傳 誦藍田鄕約、白鹿洞規及古人箴戒等各一篇 翌日行庭揖 或飮禮有暇 則拈韻共叙]
命銅山石爲懶巖
[巖在樹陰之中 而諸生發舒于斯 或因暑困 有不攝威儀者 故以是錫名 黙山李景九記其事曰 丙申秋 小訥居士卜居于蘆山之下 扁其廬曰紫巖書庄 越四年己亥 學徒多集 日講業其中 余以懵陋 幸與之爲隣 每造其廬而參聽緖論焉 一日適見其日錄中有所謂懶巖者 因問懶巖之義曰 是巖也 本無名矣 居於斯 錫之以紫者 似無意義 而今忽以懶易之者 抑有說歟 居士曰 始吾見此巖之盤礡環抱 實爲此里之主案 使廬有幽阻之勢 而上有薈蔚叢雜 可以遊食 然其體勢之可據處 橫斜欹側 不堪坐臥 固無德而可稱 故只取其色而名之以紫矣 今諸公之從我遊者 每風詠于玆巖 而有或弛其拘束於其志意慮 將因循以至懶懈 故名其巖以示戒也 余曰 懶者 人之大患也 凡天下之事 成於勤而廢於懶 懶豈可以不戒 然竊觀諸公之從事於斯者 讀古書 作古詩 時分有警 地頭有箴 自朝至夕 莫敢遑息 且揖庭飮旅而習其禮 抽栍錄疑而考其業 日記其所行之善惡 惡者改而善者勉 雖有懶怠之心 何從而肆之乎 而或閒以遊詠 發舒其精神 疏通其湮鬱者 猶謂之懶 則不其近於過督歟 居士曰 不然 安逸者人之所易縱也 刻勵者人之所難勉也 爲學之法 必于其所難而先用力焉 不有切己之戒 隨所遇而常目之 則手足動靜之際 適爲心病者 恐不免投閒而抵隙矣 余曰 善哉 子之敎迪也 一念之差而必警焉 一事之繆而必糾焉 如非有得於存養省察之工 烏能精密懇到之至此哉 吾將見諸公望此巖而惕然戒懼 坐此巖而肅然整飭 孜孜矻矻 日新不已 則此巖之名 足以當一篇座右銘矣云云]
命下齋門曰警睡門
[諸生分居上、中、下齋者有晏起 故有人書睡窩而諷之 府君見之曰 嗜睡者盍於此紙而警之哉 仍使曺夔鍾 大書其門曰警睡門]
以柔字錫姜信喆[使曺正煥作柔說]
五月 容衆所成
[諸生不能容 設假家于草廬之前 李弼昌書東楣曰容衆所 曺正煥書南楣曰避暑臺 李炳務書西楣曰遊詠臺 許銜書北楣曰棲息寮 府君語正煥曰 假家增修後 君等請改定其扁 故以柳港、詩广應之、更思之、詩字偏矣 正煥曰 初雖假家 今成樓制 且諸生於此 每風乎詠而 則請以風詠樓扁之 府君曰 風詠二字 不其濫乎 正煥曰 沂雩氣像 學者之所共慕也 只患蒙陋輩志業之不及古人 而不患樓扁之涉於濫着也 府君曰 風詠二字扁之者 蓋種種矣 余亦非不知其不涉濫着 然近世或有好事者 指摘而脣舌之 且此構甚湫劣 恐未必如是張大而扁之也 盧在悳曰 旣非濫着 則指摘者固妄矣 湫劣又不足爲嫌也 許鉀曰 此構本爲容衆而設 非欲令諸生遊賞於玆 蓋點也暮春之詠氣像雖好 而遊賞則遊賞也 以今日吾輩課讀容衆之設 而同歸於遊賞者 其不嫌碍耶 許銜曰 鉀言似是 盧宅容曰 未必不爲無據也 炳務曰 鉀說似勝 正煥曰 吾輩風於是 詠於是 風詠之扁 未有不可 而先生旣疑其脣舌 且衆論不一 易以他扁則好矣 鉀曰 不必更求他扁 嚮日弼昌所定容衆所三字似稱當也 盧性明曰 兩說俱無不可 請兩存之 題一架曰容衆所 題一架曰風詠樓 以示廣靑衿像千仞之義如何 李炳濩曰 斗屋雙扁 亦似未稱 容衆二字 其義甚圓 許重曰 同一室矣 則風詠則同風詠 容衆則同容衆矣 居容衆所之人 不可與同風詠乎 欲風詠之人 不可混與容衆乎 此室雖小 足以容風詠之人矣 容之者歸重乎 容之之者歸重乎 孫上鉉曰 弼昌之扁 已得中矣 寔容曰 僉公之互相紛紜於玆扁 未知其義也 寔容之意則甚合容衆 無乃設始之本意耶 僉曰 諾矣 乃扁之曰容衆所]
使盧性明書講會日字 付于壁上
[諸生列書姓名 名曰同講帖 以春三、秋九上甲 定會講之日]
許錦洲埰來訪 行鄕飮禮
七月, 與李黙山及諸生遊赤壁灘[有告灘靈文]
擇艮、進、毅、堅、平、存、訂、明、振、勉、謙十一字 使諸生互相作銘 勉其不足
[曺正煥作艮銘錫許銜 銜作進銘錫金琫運 許鉀作毅銘錫曺夔鍾 閔珝植作堅銘錫許重 琫運作平銘錫許鎔 李弼昌作存銘錫寔容 重作訂銘錫李弼良 寔容作明銘錫盧正容 盧宅容作振銘錫成一慶 夔鍾作勉銘錫宅容 正煥作謙銘錫鉀]
八月 覲仲父于金谷 往外洞 壽柳氏姑回甲
[有記行 按記行曰 曺丈鍾應以克齋集中西岡事蹟、戒子規詩載莊陵誌云云爲疑曰 此詩若載陵誌 則西岡當爲六臣之一 府君曰 金白村事蹟 多載陵誌 猶未參六臣之列也 又曰 先人所錄 似是據州誌也 先人集中節士宋公事蹟有曰 純廟朝賜祭云云 而考邑誌及本家文字 皆無是語 故心常以失實爲憂 近見國朝寶鑑 果有是事 子規詩亦安知不載於莊陵諸書中乎]
蒙齋成
細谷精舍成
[諸生分居蘆花亭(侍講公燕居)、沐山亭(李景九所居)而又不容 故侍講公築是舍]
鄭省齋在夔來訪
[臨別 偕至萬柳門外 仍共翫柳間小溪瀑氵+布及盤石 府君語省齋曰 吾間日盤桓于此 而欲錫澗名未及矣 幸爲我惠之 省齋曰 澗之水 足以洗耳 以此名之 豈不相符於主翁之意乎 府君曰 耳不到可洗之事 無所洗而洗之 與無洗同 省齋曰 以心改耳何如 府君顧諸生曰 宜識之]

◎ 光武四年庚子(1900, 46歲)
正月 以世譜四刊往追遠齋[有紀行]
江林齋紙牌焚香儀成
命萬柳門外橋曰斷塵
[蓋取義於朱先生隔斷紅塵三十里之句義也此距郡城三十里故也]
立春日 書壁
[翁讀常無忘 兒讀常無闕 朋友來莫去 山中多歲月]
小學講錄成

◎ 光武五年辛丑(1901, 47歲)
二月 會言志契于蘆山
四月 遣朴景在、孫柄鉉 爲文祭權頤齋、李龍山墓及金西山靈筵
與李響山書
[書略曰 滿肚疑案 無因折衷 謦欬之違 尋常爲恨 遂慨然策勵于中曰 縱此無分於時賢 猶可尙師於千古 旣不生在中華 宜先求之東賢 乃節取先夫子書中小、大學、論、孟、庸、詩、書、易等篇說到處 又以太極、四七、重磨方三件 別又各立一目 而竝分類成編 要作自己指南之方 而學蔑識淺 節略之際 十不得其一二 亭當把筆 惴慄便欲中止 然若以是而不敢焉 則有誰矜此寡陋 輒隨疑隨證於許多諸書之中耶云云]
略抄朱先生與受之帖 示書社諸君
博約門敬題朱子詩句
[事來身向禮中行 事過將心去學文 局定更無他罅隙 得斯二者老吾身 識略曰 顔子曰夫子循循然善誘人 博我以文 約我以禮 程子曰聖人敎人 惟此二事而已 朱子此詩 亦所以示學者身心決當終始于禮與文 而俾無他罅隙也 竊嘗見退陶手墨有博約二字 退陶所以書此者 亦夫子、顔子、程子、朱子之意也]
大嶺人物誌成
十一月 女子子生
[長適慶州崔希永(止軒孝述玄孫)]
作家兄寫眞記
[記略曰 家兄貌淸無浮肉 眼有光 眉疎而揚 頂平耳高 準厚口濶 不邪視不跛立 此其肖者 晩始鬚僅三數十莖在頤者尤歷歷 不過八九年 今五十三 猶蒼蒼然無一絲化者 此不見其眞 頤下所有密鬚樣者 乃頤之陰而歷歷者反昧昧 眼上及右頰有微黑氣 皆非眞 蓋取影時影未周者爲陰也 且工人所用只白黑 故殊未肖其貌色也 如用軟綠和粉 庶或獲覩眞面焉 家兄今雖晦跡田野 亦嘗立朝侍聖主矣 不敢以措大巾服示後人 故舍緇冠、深衣、大帶 而用紗帽、團領、角帶 工是遠國人 不肯輸其器械而來 乃就其所館而寫之 故傍有數本花木 而未及乎所嗜書史也]

◎ 光武六年壬寅(1902, 48歲)
作詩示諸生
[詩曰 少年才氣摠堂堂 靑眼逢時白日長 爲學休尋奇特事 河南不許室中光]
五月 哭李晩求[有挽、祭]
書戒寔容
[書略曰 吾平日作書入京 今遣子入京耶 汝之入京之意 吾實未知也 求官乎 求友乎 求財乎 求財則鄙矣 求友則迂矣 無乃妄欲求官者乎 今朝廷用人 異於昔時 汝旣無技能 又無乎力所求 豈能如心耶 設使得之 不足以榮於閭里 不足以報效涓埃 何不以一進士爲甘於己分 而妄欲爲萬不當之事也 若爲親求官 則尤是大不可 兄主恬退已久 專然無意於世矣 是以年來京中舊知 累以書邀 而每以疾病而辭之 汝豈不知乎 若或爲吾求官 則是陷吾於坑坎也 子而陷親 定非人理 汝旣粗辨菽麥 豈不識吾之素志 若或以我謂外雖無求 而內懷進就之意 則汝可曰知父者哉 吾雖無似 豈忍有表裡於對汝說話之際乎 旣入京 則只有一事 近日京中書肆多 新帙云 可竭力求來耶云云]
跋崔子玉、白居易、張思叔座右銘
[跋略曰 嘗誦三君子座右銘 節節嘆其有味 旣書壁以自警 有時出遊 惜不能常目 乃手書油紙以隨之 思至則輒展而讀之 雖在道路 便如周旋於三君子座云云]
謹書朱先生敬齋箴、求放心齋銘後
[謹書右二篇 油其紙以備裝具 雖道路雨雪顚沛之中 猶或視以爲警]

◎ 光武七年癸卯(1903, 49歲)
春 辭講長
[時趙侯鍾緖以興學右文爲務 薦任本郡講長 而以功制辭之]
四月 刊性齋先生續、附集于風雷亭[侍講公藏修之所]
[許進士邇齎性齋續集及年譜、挽祭等篇來 謀入刊譜 府君伯仲與許錦州擔之 續、挽祭 門生各家擔之 許舫山薰、金約泉鎭祜、趙一山昺奎、許錦洲埰迭相往來 講定刊務]
製性齋先生請改謚註疏
歷年提綱成

◎ 光武八年甲辰(1904, 50歲)
三月 遣孫柄鉉 祭李晩求靈筵
與晉康士林書 論語類刊事
[翌年設刊所于大源菴 ○ 按府君答刊所書 某生晩雖未及竭蹶 敦工於眉饒徽建之間 其所以挫産助刊之意 則固不讓於崇沐也 是以齎志十年 廣求聲氣 今乃集事如此 而尙不能奔趨席末 猶不以昧慢而誅之 輒辱書悉以梗槩 蓋恕其貞疾難動 而諒其宿志有在也 二百五十物 非拙手所能辦了 然揆念初心 有難中改 且剞人適在鄙里 故已約以土地相酬耳云 頭註: 當在上年]
秋 重刊古鏡重磨方
[有跋文 ○ 先是家藏寧邊本一冊 而學者之來 輒以是書先授 故紙獘字沒不能讀 是歲傾槖登梓 以應學者]
巡察使金璉植到本府存問
[巡察使聞府君重望 先致存問 而欲聞于朝 因政府換局遞歸未果]
駕洛事實略成
常體便覽成
[序略曰 古之時 人人好禮 故猶恐禮書之不廣 今書愈廣而讀愈少 臨事就攷 眩於衆說 莫知所從 此便覽之所以成 而不遑講究變節 恐失其常體也]
十月 子察容生

◎ 光武九年乙巳(1905, 51歲)
東國歷年指掌成
[序略曰 檀君朝鮮一千二百十一年 箕子朝鮮九百二十九年 箕準馬韓一百三十七年 新羅朴氏十王 昔氏八王 金氏三十七王 共九百九十二年(自金氏景明王元年戊寅至十八年乙未 屬于高麗紀 實九百七十四年 ○ 高句麗二十八王七百五年 百濟三十一王六百八十一年竝焉 金氏文武王癸亥百濟亡 戊辰高句麗亡) 高麗三十二王二廢主共四百七十四年 太祖高皇帝開國後五百三年 通共四千二百二十七年 馬韓以上 文獻渺茫 不能立例逐錄 姑別記于卷首 始新羅元年甲子 凡朝廷得失治忽 可憲章可鑑戒者 撮其大而書之 至聖帝三十一年甲午而止 蓋乙未事有臣子所不忍書者]
哭安都事益遠[有挽詩、祭文]
書軍用鐵道建築班乞完先墓
[鐵路標枺 犯噤谷公墓所 府君書以乞之 僅得保完]
秋 省墓于夏山
冬 政府爲疆隣所逼 五條約成
[答鄭鏞書 書略曰 吾輩雖身在草莽 所講究則君臣大義 忍見社稷至此 而不能開口陳興復之策 平日區區文字皆虛語 何心更與同志啇確 然猶未能謝遣書伴者 私竊以爲本朝所以立國者儒術 而今邪書悖技列樹門戶 將難復見冠章甫而衣縫掖者 只欲小須更不廢舊術 以報我先王培育之恩也 ○ 先是大臣累奏筵席 帝今以府君姓銜書付殿壁 朝廷知將登用 國事已非 知者惜之]
八月 子審容生
冬 覲侍講公于萬浪亭
[亭在三浪江上 侍講公別業 ○ 侍講公自聞五條約成 慮又有變出 住江舍以便赴急之路 ○ 先是大臣李載冕累奏筵席 帝令以府君姓銜書付殿壁 朝廷知爲早晩登用 國事已非 知者惜之]

◎ 光武十年丙午(1906, 52歲)
朱子性理說節要成
[序略曰 自宋以來 論性理者多門 其說散出於諸書 學者無以尋其端緖 至皇明永樂間 性理大全成 先儒論議格言之輔翼五經四書 有補於治道者 悉以類而編之 總二百二十九卷 窮巷之士 雖欲讀之 力詘不能求 某悶焉 乃取大全中朱子說而節略之 蓋百之一二也]
聞侍講公被拘于憲兵隊 卽往赴不離
[時伊藤自日本入京 疑惧侍講公住近車場 拘之數日 過境釋之 〇 府君與許參奉垈書 書略曰 域內寂無人 俾藤賊肆然復入帝城 此時何時 痛泣痛泣 家伯所遭 一則頃時奔赴之故 一則不耐憤愾 不諱辭氣 但愧未曾設一計 圖殺藤賊 而渠所疑則如彼也 且媿挫於一嚇 更不得奔赴於今日也]
跋古鏡重磨方
答許鉐書[書略曰 趨庭服勤 應門酬接 自是己分當爲 豈特以廣交朋友、高談理氣 謂之眞學問哉 所可憂者 簪笏在身 已與韋布相殊 凡所以自期者 慮或隨以異焉 然此俗士事也 賢者寧有是哉云云 當移書于言行錄]
跋晉陽河氏世稿
三月七日講會 遠友小至 作詩嘆之
[詩曰 歲暮徒增半嶺聲 漆囱悄待曉天明 江南三月氷猶合 山外千林鴂自鳴 誰送雋才趍異道 更慚無術語諸生 莫謂長洲風浪湧 扁舟惟得渡頭平]
九月 講會 作詩示諸生
[詩曰 世路人情朝暮翻 感君依約到山藩 全國若皆從俗學 後生誰與證前言 紫巖病叟愁無寐 黃菊良辰酒滿罇 願將今日無窮意 莫向他歧別立門]
答柳震玉祭崔贊政益鉉可否
[書略曰 崔贊政隕身警國 櫬返故疆 途路觀者 有口皆哭 有目皆涕 蓋出於彛衷 非求媚於死者也 我所以爲生者有媿 則贊政所以捨生者 豈不卓卓矣乎 旣立大節 固不可追咎其旣往 然惜其不能以敦倫斥和之說 陳勉我聖上 國太公直谷之行 不幸出於贊政封疏之後 而斥和之碑 隨而埋沒也 今日贊政之拘 固已胚胎於贊政之疏 則王庭痛哭 無益於事 黌舍會講 無益於義 痛哭之席 旋請師諡 會講之日 索取公貨 俱卽著載新聞 固已露出心跡 然終能得其死所 知將藉以有辭 當此人物蕭索之日 豈可求備於一人 凡商兒酒媼 左奠右賻 猶恐或後者 只能自盡其彛衷而已 彼安得深識乎義理精微哉 不圖左右之所以爲問者 不於義理而於色目也 我朝自分黨以來 立節之賢何限 而互相奠弔 挽誄相傳 蓋義理天下之所公共故也 噫 此言一出 人必曰彼夫夫也 外借義理 內懷黨論 以錦陽所以重遭禍故者 實由崔疏 故其論如此 且爲左右言之 崔所以斥錦陽者 非崔之忠 乃勢家所嗾 而崔近年來往嶺鄕 獲見葛翁文集 覺得前疏失實 對人輒分疏 然猶未能更奏天陛 使葛翁飮恨泉下 苟爲葛翁遊從家子姓者 與崔相好 則是不但負葛翁也 乃所以忘其祖也 吾嶺之爲南論者 孰非葛翁遊從家子孫也 崔之忠雖高 不可匿然而拝其靈也 只當贊嘆其能死爲盡吾惡而知其美之義而已]

◎ 光武十一年丁未(1907, 53歲)
六月 皇帝禪位于太子 改元隆熙[十六日脯時 日光赤黑]
病枕 使諸生呼韻卽書
[詩曰 逢人輒問帝京事 不須深罪頑酋突 豈圖孽從臣僕出 頃刻之間大厦蹶 禪受世遠名猶存 賊子藉手頗揚扢 就使書生不談兵 只有寸心與寸笏]
書與金稺受、趙應章 請刊士儀一依舊本
[書略曰 伏讀校刪諸條 未敢以僉公見解之精而黽勉奉唯也 略隨淺見 錄在別紙 非敢以自立己見而抗于高明也 實有所深憂者存焉 故意在不刪 而傳之不刪之地 以此推之 僉公之意 以梳洗爲主 故自爾傳之當刪之地也 四書六經 聖人之言 猶使千古起疑 況後來禮家之書 豈能盡美而絶群訟乎 稷所以深憂者 何請略陳之 噫 士儀之曾經禍機 爲先師弟子者 孰不聞知 孰不痛心 稷嘗侍不倦堂 人有來言 一邊人圖毁士儀 逐條抉摘 質于宋祭酒 賴祭酒公正之見 陰機自消 然未嘗不凜然而懼 及見或人之抵李韋士書 或人則已覻得於彼邊設計之始 而吾輩則晩聞於事靖之後 惟俟天相斯文而已 今吾輩重刻是書 謹當一遵舊文 俾無所乘釁至好 頭註: 當在丁未下]
士儀重刊所 作詩示諸公
[刊所諸公 欲用校本 論議未定 府君力疾以赴 辨釋不刪之由 群議遂寢 詩曰 梅峽凉颷八月秋 章縫濟濟校書樓 小心秪恐差毫髮 奧義同思徹尾頭 手艸輸來規已定(先師有增刪手本 故一遵無違) 雋儒分寫筆如流 多賀耆賢能濟事 百方皆向衆情述]
哭許舫山[有祭文]
挽安巡察鍾悳

◎ 新皇帝隆熙二年戊申(1908, 54歲)
深衣編成
作孺人黃氏壙記
三月 哭兄嫂淑夫人安氏
[有祭文 文略曰 昔吾之日再三䦱門 而憫淑人之過爲禮敬 今朝朝而拜 時時而哭 而淑人不省焉 又曰 淑人入門之日 稷之齡十二 雖略知禮敬之意 而相視之如兄弟姊妹 自失怙恃以來 吾事兄如父 故亦視嫂如母 朝而候 晝而候 出而告 反而告 有善則告 有憂則告 兒作非則告 賓至則告 婢僕失業則告 田疇荒頓則告 今不可得而告矣 請以一語而爲無窮之告曰 嫂乎嫂乎 平生以造家爲念 願上告于天 使世世多男 父慈子孝 夫和婦順 文學簪組 蔚爲時望 嫂氏之靈 豈不悅豫乎]
十二月 祗從日錄成
[時皇帝南巡至釜山 侍講公聞之驚惶 奔問行在所 府君從之 迎大駕于釜山 侍講公仍扈駕馬山 府君還家 〇 答辛聖民(泳秀)書 書略曰 月中聞車駕南巡 陪兄奔問 七日而返 蓋事出不意 輿情疑懼 不敢以草莽之賤而偃處私室也 頭註: 此條當書祗從日錄下]
巡狩攷成
校許舫山集[有跋文]

◎ 新皇帝隆熙三年己酉(1909, 55歲)
氏族攷成
[按跋曰 氏族攷者 攷東國諸家著者而列書也 何以知其著著 莫著於朝家之褒獎 故有美諡則書之 其次輿人之所尊慕也 故享祠院則書之 於文學言語 可見其自修 故有著述之富則書之 雖非三者 其蹟表表則書之 有或取其世類而分註而書之 旣皆勸人爲善 則亦宜懲人爲惡 故不善之類 亦或書之 註末以彰其邪行 有貫邑而無著者 則隨所知而書之 其人可書而其貫無攷 則書曰某邑以俟知者 名載史牒而姓與貫無徵者 有氏有貫 而無可以塡名者 只有氏 而無其貫者 幷列錄于下 略羅麗而詳本朝者 不惟其近而易知 亦欲見盛代賢豪之輩出也 卷首之特書聖朝公子者 於聖神本支之盛 而有以見邦運之隆也 於相臣而必書廟號者 要以見列朝爰立之得其人也 乃依備考所錄序次而書氏族 各以其所攷而編之云云]
曆攷成
答洪承武(繼文)書
[書略曰 吾與子皆今人 苟不用十分工夫 俱將終於今人 請以古人之言而交勉可乎 曾子曰 士不可以不弘毅 任重而道遠 仁以爲己任 不亦重乎 死而後已 不亦遠乎 弘 寬廣也 毅 强忍也 寬則容受之多 廣則承載之闊 强則執守之堅 忍則負荷之久 吾與子幸而生禮義之國 終身所以服事者 禮義而靡他 不其重且遠歟 若不耐一時之辛苦困跲 而易其所守 將何以歸見古人 亦何以詔示來者乎云云 頭註: 當移書言行錄]
東岳先生子孫圖成
製七世祖判書海隱府君焚黃祝文
[按與金西山書曰 七世祖海隱公 以尊周義理蒙贈長銓 而神主已祧埋矣 焚黃儀節 當行於墓 而夫人合祔 士林參祭 恐涉未安 宗議擬以木牌行祀於宗家 行祀後木牌 卽日埋安於墓所耶 旋祭旋埋 得無輕遽於禮意耶]
作慕禎壇契帖序
[壇卽判書公杖屨之所 而竪碑之日 多士會祭之 仍修契事(鄕、道參錄者千餘人)]
十一月 壽侍講公六十一歲生朝[有詩]
十二月 謁玉山體仁廟
[有詩曰 平生願讀求仁錄 今日始登求仁堂 入廟如聞體仁術 仰瞻神座辨心香 閣有遺經澤不沫 行間標識頗精詳 闇修敏求然後得 偕立兩進皆其方 亦樂門開集章縫 無邊樓迥通康莊 天以斯文付遼左 考亭復見鷄林鄕 道德蓄氣爲龍湫 脉脉激起派流長 始焉一勺終萬里 上溯洙泗波洋洋 小子尋源迷不得 幾載中道空徊徨 挺身殫膂躋五臺 便無一塵留腎腸 却恨陰雲久不收 未肯許我長徜徉 復恨此身生最晩 未及奉覩宸綃煌 拙手强寫邱壑勝 擬將歸揭蘆山房 前年已畫搴芝來 從玆匹美爲寶藏 畫外復有眞所慕 兩夫子書俱盈箱 五箴十圖德之基 終身誓作吾羹墻]

◎ 新皇帝隆熙四年庚戌(1910, 56歲)
歷代國界攷成
校愚拙叟安公文集[有墓誌]
送權一和泰榮歸漣上[有序 序略曰 噫 吾輩之始相遇也 相期固不淺 又猥被師獎 而顧衰病無成 所望惟朋友而已 今於相送之際 安得無一語乎 大禹七十三受精一之訓 武王八十七受敬義之書 衛公九十五作懿戒 而退陶、寒岡兩夫子 以是而寓磨古鏡之義 其方在重磨一編 余嘗擬作老年自力之助 而重刻是書 謹爲一和賚呈 請歸而讀之 鹿峰之下 有以益知文正公八十八歲所樂何事 而亦不負文憲公九十年誨人不倦之至意矣云云]
春 校慵齋、訥齋兩先生逸稿[有跋]
小學節要成
跋達西齋蔡公逸稿
七月 社屋
[府君自是廢藥餌 謝遣諸生]
國朝聞人生卒錄成
[始太祖高皇帝壬申 至隆熙四年而止 凡五百十九年 分書生平 書左者生也 書右者卒也 兩生大賢 連年出生名儒 於是而見國祚隆盛之會 或群賢厄於一歲 忠臣殉於連年 於是而見國祚隆盛之日 而災禍尙闖發也 壬申四月 圃隱先生卒 而聖朝受命 庚戌七月 我皇帝臨昌德宮 而八月李響山晩燾卒 噫 國之將興 賢人災 國之將亡 賢人亦災 於是而覽者知編錄之意也]
答韓東愈書
[書略曰 吾輩命薄 不能保舊國日月 生不足爲生 學不足爲學 旣不得死所 則猶當奉守我先王敎育之術而已]
十一月 侍講公被囚酋獄
[時侍講公却金被拘 絶食罵賊 府君侍立獄外 累日不倦]

◎ 辛亥(1911, 57歲)
跋曺四友堂集
十一月 侍講公渡鴨綠江
十二月 挈家從侍講公 住安東縣興隆街
[有紀行詩 〇 府君自失怙來 事侍講公如事嚴父 朝夕必省 雨雪不廢 有患候不離側 出入送迎于里門之外 有命無違 有誚和顔益恭 執役服勤 至老不懈 自昌山累徙 而一無相離 渡江亦由是也 〇 答族姪元容書 略曰 吾之行 專欲不離病兄而已 非敢自擬於古人避地之義也 但媿急於思兄而忽於親壟也 所以不欲深入 而時時爲省楸之計 然貧病日甚 那能如意 預爲之嗟悒也云云]
答姜信喆信赫書
[書略曰 顧吾晜弟 只是二人 而白首之年 那忍相分於二千里之外耶 所以方理行 而十七八日間 似撘輪經一晝夜 可抵安東縣云 兄弟相聚則雖幸 惟遠離丘墓爲至慟也云云]

◎ 壬子(1912, 58歲)
作金海鄕案及邑誌節略合刊序
撰燕巖書院遺墟碑
書奉天淸朝宮殿新調査寶庫類誌後
[識曰 壬子正月 淸宣統帝讓位于民國 時余住鴨江西岸興隆街 日報中見右記 心欲往觀其形制而未果 遂攷其字義而書之 俾人知古昔帝王 俱拳拳於祭先宴賓之儀云爾]
與張舜華錫英、李大衡斗勳遊元寶山
[詩曰 誰送耆賢賦遠遊 東溟風急激洪流 準擬遣懷觀大地 强相扶病出寒邱 燈深長白山前屋 路繞吉林城下洲 爲報沙河老市卒 渾無一事作閒愁]
與李參書敏應遊接梨樹
[詩曰 吾王赤子遍遼河 男婦扶携風雪陂 獨有杞泉公子裔 車中不禁淚滂沱]
送李景若圭煥、朴應賢鳳烈、族孫在圭遊奉天
[有序 略曰 瀋有古器 殷之舟、周之鼎、漢之彛、唐之尊是也 汗之興 遷而聚之 未知今日將遷于誰家 從質館過白門 爲我告諸陪臣之靈曰 中國有孫、黃、黎三大人者出 而尊攘之義復明 諸陪臣之身 雖殉于崇禎 諸陪臣之精神氣魄 自能活動於二百六十八年之間 而鍾毓得三個英雄 此所謂慰有辭者也 但愛新氏之陵廟宮殿 將今蒭牧縱橫 適與吾宗國相似 至此而能不涕乎 況服事之久而受賴之多 不忍以舊警而蔽新義也 余於正月送子寔容遊于瀋 繼而送安和鎭 二月送張舜華、李大衡入瀋 三月送李泳魯入瀋 今又送三君子入瀋 吾雖未造瀋境 瀋固在吾目中 惟有所不能攷得者 今因三君子之行而攷得之可乎 自瀋距崇禎皇帝陵墓 道里幾何 其傍有林木叢鬱 的是關西義士崔孝一餓死處 請爲我酹之 酹有辭 復有祈 然吾畏約不敢言 三君子之心 亦吾之心 能不畏約而言之乎]
以序贈興隆卜者劉心一
[心一山 東省靑州府諸城縣人 二尙書三閣老之家孫也 失志賣卜]
和溫次琴樂書
[次琴 諸城人 福建總鎭顯厲玄孫 詩曰 窮道相逢歌曲成 華東萬里兩書生 淚從五國城中灑 樽就君平肆裡傾 河出古途淸或見 琴要完譜錯仍更 祿仕殖財君莫謝 孔門商賜尙賢聲]
題孫銘軒新德扇三絶
[銘軒 諸城縣人 孔府執事官四品 發書寄扇要寫 詩曰 硯膩必稱尼石品 蓍靈偏愛孔林叢 於人盍敬銘軒叟 簪笏來從聖府中 柳烟紅雨話中詳 如坐太和元氣坊 廟檜新條長幾尺 斯文於此卜興喪 風雨凄凄大地昏 低徊中道獨傷魂 賴君欲遂平生志 歸宿春秋臺下村]
作序贈錢君培墊
[序略曰 錢君 登州府之榮成縣人也 與余同寓沙河隔衖爲戶 昕夕輒相對 不言而情自通 累以書詢之 我有疾病 而君代爲憂 我乏薪水 而君代爲謀 我未定居 而君曰吾縣好 我子失學 而君曰吾表親張立均先生善導迪人 其言皆出於衷膈 蓋悲余之喪國流離而然也 噫 君與我離家二千里而會于玆 不可謂無分也 玆土千萬人 無不汨汨商務 而君與我俱無所事 志之同也 吾樸陋 衆皆擯棄 而君獨收之 異事也 ○ 淸庠生張世淑子良贈府君序 略曰 致八盧君 以朝鮮舊臣 遭時之亂 避地安東 與吾表親培墊錢君對戶 昕夕筆談 作序相贈 壬子十月間 余旅遊遼東 讀其文 知其守孔孟學 懷夷齊志 潔身不仕 蓋宋謝枋得之亞流歟 而其文之從容閒雅似歐陽 精深雄健類子厚 古今人物風土人情 無所不考 則博物君子也 然而言者心之章也 文者德之華也 張良歸漢 古國之思未忘 伏生避秦 先王之典遂傳 篇中雖未明言 而思君懷國之心、憂時感事之意 流於楮墨間 有非浮華之士所能及者 嗟呼 有臣如是而不能用 使之流離他邦 傷懷故國 良可慨也 復以詩留贈曰 箕子辭周去杳然 殷盤商頌入朝鮮 文明久已開先哲 博雅從今見後賢 耿耿丹心懷故國 行行血淚洒華箋 昨宵奉讀錢君序 歐柳文章並一篇]
五月 孫男在爀生
七月 還蘆谷
[時寔容在菊里疾㞃 侍講公命往診之 府君難之 侍講公責以子病而父不診 亦非倫理 府君率眷東還 未幾日 承侍講公病電 卽入安東縣 八月 侍講公患候復康 故還菊里]
十一月 寔容卒于安東縣
[寔容病益沈重 告府君曰 死於此客也 强疾請覲 故府君帶往 十二日則侍講公生朝也 設杯盤請故國知舊 而慰侍講公去國流離之懷 累日不出痛口+楚聲 以安親心 至十四日而卒 經二日 藳葬于元寶山]
十二月 還國 改葬孺人黃氏于菊洞巽坐原
復入安東縣 覲侍講公

◎ 癸丑(1913, 59歲)
正月 奉祠版還蘆谷
[兩世孀婦不可獨留舊國 又不可幷携於流離之地 故侍講公命府君還之]
二月 返寔容柩葬蘆谷
[時府君患節沈重 家容等奔走湯劑 故安表兄鍾達奉柩而還]
校止止堂集[有跋]
五月 跋大訥手卷
[按跋尾曰 相稷病臥四朔 與鬼爲隣 若一朝溘然 家兄歷事 無以告後人也云云]
七月 覲侍講公于接梨樹
[先是侍講公自興隆街 移住接梨樹]

◎ 甲寅(1914, 60歲)
四月 覲侍講公于接梨樹
[詩曰 沙河車裡昔相迎 那意今余臥密城 遼寓未聞管有弟 嬴埋難與札同情等句]
和安校理孝濟
[詩曰 高人避地斷將迎 氣似秋霜意似城 東韓界已非吾土 西塞人皆識爾情 欲報君恩祗有死 回思海棘反爲榮 四載栖栖來去者 却慙身與義俱輕]
十月 紫巖書堂成
[有記文、雜詠 ○ 九思齋、古鏡重磨室、雲葉樓、傴僂軒、傳心閣、蒙齋、容衆所、細谷精舍、博約門、瞻夏壇、望遼壇、琅玕園、兄弟巖、銅山、黔金窟、柞林、懶巖、風詠巖、梧園、霽月塢、七絶亭、上ㆍ中ㆍ下盥巖、萬柳門、洗心澗、斷塵橋、櫛縰岸、赤壁 皆堂之屬而在雜詠中 ○ 落成日 行鄕飮禮 講大學 會者百餘人 按府君詩曰 巖堂新築柳門東 路入丹崖巷首通 餘日秖宜調病骨 殘經那望振頹風 階因疊級循無懈 園有群栽養則同 古鏡重磨非別法 請看曾傳十章中 記略曰 朋友爲我而成斯堂 吾盍爲朋友而求所相資哉 乃以白鹿洞規、藍田鄕約鐫于壁 冀有以共與勉勵 然方身爲俘徒 跼天而蹐地 兄在殊土 雨飱而風宿 有不暇以起居之適於病軀 泉林之愜於幽抱 講討之得有其所爲 私分之幸 而惟巖石之不受磨泐而能守其紫者 良足以起余也 入此室者 苟指巖爲誓 與之偕守其所守 則方能知相稷命名之微意云云 ○ 張晦堂錫英記 略曰 余少時與致八交 其後見人家邱墓之文與夫樓臺序記之作 多出其手 而知人之以作者推 又見後輩新進有從南方來者 往往言從學於其門 而容止有度 不類恒狀 又知其敎人有術也 及余渡浿江 北走吉林 相見於遼薊之野 登元寶山 望古國山川 共洒新亭之淚 又嘆其自靖有道矣 後數年 余聞其還自遼陽 以解人之有疑其未宜還者曰 今日域中君子小人 皆化爲禽獸 其可無先覺之人 把住得一脉斯文 以覺其願覺者乎 今其引進後生 坐鎭一方 譬如建安之末 天下震盪 而區區巴蜀 炎精尙存 又如朱光鎖盡 九野寒閉 藐然陽德 不絶於窮泉之下 而尙可有昭回之日 此其職分之所當爲也 又曰 命來學者曰 無食者食於我 無衣者衣於我 有來者無拒 於是聞風而鼓篋者至 其舍之不能容 二三子相與謀建立此堂 生師無寒暑之窘 而遂可以飮射而絃誦矣 倣朱夫子竹林故事 告成而行禮 峨冠大袖 執經而蹌趨 蓋亦衰世之盛事也云云 〇 李進士建昇記 略曰 與余定交甚懽 其淸標古貌 翛然如癯鶴 望之知其爲有道者 顧多病口不絶呻吟聲 然見好書輒蹶起疾書 年今六十 事侍講君 執役服勤 如童子時 余爲之感嘆不已 又曰 嗚虖 若孫明復者 値宋盛時 朝野皆推泰山先生 今致八槁枯終老於蘆山之下 於致八固無損 生之不辰 重爲賢者悲之 然於其不辰 方見爲學之善 夫隨時而俯仰 非善學者也 又曰 其必有大奮發於心 而不以自外至者爲欣戚 又曰 擧世混濁 淸士乃見 余獨以爲眞學問庶出乎今之世 又曰 修吾身也 齊吾家也 父詔其子 兄勗其弟 禮樂文物 自足乎環堵之內 此不遇者之用 又曰 用於身 用於家 用於天下國家 其用一也 坐是堂而敎人者 用及乎人者也 升是堂而求學者 將以用乎己者 其視貪榮利而爲者何如哉 於是乎堂之用亦大矣云云 ○ 答金勿窩相項書 書略曰 所謂巖堂起居 雖適心 所不能自安者有二焉 一則局乎天蹐乎地 伸脚非其時也 一則梨屋之湫隘如彼也 雖然堂旣成矣 不容無數句 言志本韻錄呈 幸下一語 以證我不自安之實而懲之如何 頭註: 當書紫巖書堂下]
校進菴鄭公文集[有碣文]
撰七灘書院遺墟竪碑告由祝文

◎ 乙卯(1915, 61歲)
四月 覲侍講公于接梨樹
作大東風雅序
跋孫格齋先生文集三刊
跋金西岡先生逸稿重刊
冬 祭性齋先生影幀于金陵
[時江右士林將妥性齋先生影幀于麗澤堂 自京奉來 路出金陵 宿于荷溪安氏先齋]
撰文昌侯崔先生靑龍臺碑
[熊山縣苽洞海上有小臺 俗傳文昌侯崔先生遊釣之所 然縣無文獻可徵 且潮退已久 臺之下耕犁 相尋蘆荻掩翳 風絲月竿 靡所覿其彷彿 近有人偶得磨崖一石 剜苔剔蘚而檢之 石面直書者 靑龍臺三大字也 左方小字曰致遠書 始信俗所傳者不妄也]
十一月 家容等請讌周甲不許

◎ 丙辰(1916, 62歲)
作浮海亭記[先祖侍中公墓閣]
[堂在固城堂項山下 先祖侍中公墓閣也 侍中公世住松京 麗亡挈家浮海 至鐵城而止焉 實由慕於魯連、師襄 故名之曰浮海]
答李小菴邁久 論穌齋先生學問階級
[書略曰 穌爺淵源之出於玉山 人孰不知 而曾見溪門諸子錄 特書愚伏先生答道南山長書于卷中 其書曰 穌齋於退溪先生 雖未執弟子之禮 後學之尊仰 不可無階級 朱子之待西山常以老友 而實記、群書 皆書於弟子之列 恐當以此例書之 據此則穌齋及朴龍巖 亦入錄似無疑 未知此書載在愚伏集中耶 穌齋二十七 聞文元公入洛 爲贄而禮焉 獲聞忘助之異名 階級之的如此]
擬陸秀夫舟中進講大學有作
[詩略曰 悲風長夜山南屋 老人讀史噫而吁 人間何世無大學 身賤未躡崖山途]
書勸懲諸條 贈夏山同約會
[答李定厚書 略曰 約事新成 勸懲立規 此足以扶頹俗 幸相與加勉 圖爲持久如何 南軒之言曰 不揀擇害事 擇之更生議論 須於揀擇不揀擇之間 隨機調劑 或可爲持久之方耶 吉元要定約條 乃以曾所試者謄付 然此則全行一坊 彼則廣於同志 諸條中往往有合商處 僉諒而取捨之]
七月 覲侍講公于安民山
[時侍講公移居于此 距接梨樹十里]
秋 眞幀成

◎ 丁巳(1917, 63歲)
四月 覲侍講公于安民山
哭安守坡孝濟[有挽詩、祭文]
作欽欽堂重修記
[崔貞武公震立不祧廟之東寮]
書孫明復、吳隱之、冀缺、梁鴻、鮑宣五人妻古事贈崔氏女
哭許氏妹
哭從弟相卨
編一蠹鄭先生事實略
編守愚堂崔先生事實
就正補遺契約束成
[契本爲許先生設者 而始於甲子丙寅之間 續於庚子 今幷錄庚子之員 而不宜因稱續案 故名之曰就正補遺契 定約束 營建影閣]
謹賡桃花宸帖
[帖是我昭敬王御製 而爲寧海南氏世藏 南君浩良言之 故賡宸韻以寓風泉之感]
春 與李省軒炳憙、許錦洲 倡京鄕士林 刊星湖李先生文集于退老
[答李炳鯤書 略曰 向對時軒令公言之曰 如使公早爲合同 則此役不過廿冊而止 今日旣圖刻全集 此是公不合同之效也 功反高焉 然若因是而玆鄕分裂 則後百年必曰 玆鄕之分裂 自時公始也 相笑而罷 蓋時軒之意以全集未來爲憂 冊旣入京 自當早晏至此鄕 而全集準刻也 以今爲計 惟當各自保存 一爲全書 一爲節要 以惠後進而已 彼所以欲毁此而專彼者 京鄕之言 若出一口 然此固不量而信口也 爲全爲節 尤有光於斯文也 蔽一言相持之時 愼口最好 朝發私話 而暮已遍於鄕間 是以刊所密密之機時 公無不聞知也 密密非別事乃刊務 而傳之者略加傅會 則聽之者認爲毁己也 況君子自守之法 自謹言語始者乎云 ○ 答孫景若書曰 ○ 答許舫山書 書略曰 星湖集 李元八侍郞已勘定卄五冊 而屢書于族兄允暉氏 使之完議于嶺鄕 見其書 蓋寄意于稷輩 然俗尙日益變 貨路日以塞 前年役費 已至半上落下 當日親炙者尙然 況有誰溯淵源而竭心膂乎 然若復等待後人 此書將終於巾衍 吾道之不幸何如哉 伏乞收議宣、福間 發通一省 又自畿湖先爲略略鳩貨 則某輩可藉以爲說也云云 頭註: 當載丁巳刊星湖集下註]
與金聖天基性、李景簡章稙、李應晦遊博山
秋 以下廬黃先生文集營刊 書告京鄕士林
[書略曰 星、順、性之書皆已刊 而先生之文 獨不出於巾衍之外 譬猶鑿沼濬源 一科尙堙上項 諸書浩穰如許 雖不敢經紀 惟放言十冊 出乎先生之心而文之 先生之言 字字而淑人心也 句句而扶世敎也 此而不行 吾黨何顔 以先師及門之列而不能圖 則非所以體先師平日尊師之至意也 以冠儒服儒之列 而不思所以報先生扶道之功 則顧何以詔之後耶云云]
冬 刊下廬集于昌原赤峴永慕齋[有跋文 ○ 齋在昌原赤峴 黃先生始祖侍中墓閣也 先生姓裔洙建擔夯刊事 請設所于此]
跋東賢學則
[跋曰 某庚辰歲 受學則于先師許文憲公 退與同志共之 下廬先生惠後學扶世敎之澤 始衣被南方 然猶患其未及廣焉 今年冬 刻先生文集 役將訖 黃君洙建不忍以此書更留篋衍 出貨幷刻 不但以書之出于族先 蓋欲今一時人士獲知東賢踐履之實而有所感發云]
大嶺勝覽成
[金參書光濟借去 而爲時所諱 見奪於總府 無他副本 痛恨]

◎ 戊午(1918, 64歲)
聖廡位牌考成
撰寧無成齋河先生逸稿序
哭安承旨禧遠[有祭文]
四月 覲侍講公于安民山
答金在華書
[略曰 示喩爲山之難 古人所憂 而今之人不知所以爲憂 纔覆半簣 謂已廣大 悠悠泛泛 終不免邱垤之歸 苟令人人以賢之憂爲憂 雖到九仞 而常如微塵 卷石之始 慥慥不已 不期廣而自廣 不期大而自大 草木之生 寶藏之興 執契可俟也云云 頭註: 當移書言行錄]
挽崔子順時敎
編光州世稿續[有碣表及遺事 ○ 風軒時金+進、詠歸亭爾柙、農窩尙普、小醒基弼四世合稿 是歲刊于風雷亭 本孫根容來幹其事]
十二月 太上皇昇遐于德壽宮
[設位而哭 哀痛不已 ○ 上侍講公書曰 自見竹符以後 遠方之書 無日不咨 而正論異辭 實相半也 服制八域旣成 人皆知大喪之不可不服 而彼一種之說 往往闖作於讀書者唇吻何也 蓋於書誤解 或曰何服之有 或目之以舊君 始覺書不可徒讀也 嗚呼 德壽宮大行 不但曰率普均痛 五百十九年絲穀於東土者 雖泉下人有靈 則皆痛隕也 金滄江澤榮集中預論服制 而大不滿人意 故心竊憂之 近日頗多中其毒者可嘆云云]

◎ 己未(1919, 65歲)
三月 撰長山齋上樑文[下廬先生文集藏板所]
夏 被訊于台龍派出所
[以名出巴書 累被酋調]
秋 使家容覲侍講公于安民山
[是時府君氣力漸損 不能撘輪遠役故也]
九月 移居秣方
[距蘆谷數里]
泗南書庄成
[有記文、雜詠 ○ 庄在泗淵之南 向陽牖、觀善寮、歇馬巖、折旋衖、方齋、耕巖、編書巖、剞劂室、望北壇、望夏臺、望鳳邱 皆庄之有 ○ 崔鍾應記 略曰 ……]
撰三足堂金先生行狀
校李子粹語
[與李起菴中業 講定疑條於泗南]
跋敬齋河文孝公文集
書宗室德恩監祭壇碑後
定禮林壇規
[凝州士林 就禮林書院舊墟 設壇奉享佔畢齋、迂拙齋、松溪三先生 頭註: 當在乙未告由祝上]
作佔畢齋、迂拙齋、松溪三先生設壇告由祝文
使察容往祭郭俛宇鍾錫
祭海州淸聖廟文

◎ 庚申(1920, 66歲)
作濯纓金先生文集四刊跋
撰定菴先生郭公行狀
謹書宣祖大王回揭彭遊擊[信古]御帖後
太乙敎辨
[辨曰 老子語道德、列子平淡、莊子齊物、墨翟學仁、楊朱學義、申子引繩墨、荀子能定皆可謂近理 然已見斥於程朱 蓋權詐疎放 無父無君 慘覈性惡 自相悖戾於聖人中正之道故也 況下於此者乎 今所謂太乙敎者 自以爲儒佛仙合而一之 是薰蕕氷炭之同一器也 稍有識者 豈肯信之 彼道家者流 爲老氏而不至者 妄意於六合之外 求其所謂道者 蕩搖人主之侈心 然其說終不行佛者 取列子骨骸反根之語 爲四大各離之論 已不保其軀殼 餘尙何爲哉 設使學仙蛻垢濁 學佛而登天堂 儒者之所不取也 烏可以合而一之哉]
撰眉叟先生影堂奉安及常享祝文
東國儒賢編年成[有序]
鈔節朱先生與魏應仲書揭方齋[泗南書庄東室]
使定容、乙鉉覲侍講公于鳳凰城
[時侍講公移居鳳凰城]
作除夕夢罷詩十首
[詩曰 六十六年除夕弟 二千百里八旬兄 殘夢渾忘身病劇 飛輪直向鳳凰城]

◎ 辛酉(1921, 67歲)
鳳凰城志成
[序曰 鳳凰城在秦 爲朝鮮地 然距箕都隔遠 後屬中州 不過爲一荒服也 是以文獻無足徵 惟鮮人朝京必由此 故習知之 擬之以山海關外名勝區也 家兄痛國絶 携家渡馬訾河 住沙河二年 接梨樹四年 安民山三年 復賃屋于此 而余病久未及趨見 恐一朝溘然 魂雖欲往 無以識其路 乃採取城之沿革、官員、山川、城堡、關站而錄之 爲鳳凰城志 朝夕看閱而指點之曰吾兄之所耕釣在此 所遊賞在此]
作彛箴
作强說
作金海鄕校重修記
作釣耕菴先生蔣公墓祭常享祝文
作長山齋釋菜常享祝文
禮林壇享儀成
哭鄭省齋在夔[有挽]
哭鄭校理在敎[有挽]
使乙鉉覲侍講公于鳳凰城
廣疑問齋成[齋在泗南書庄之右 有樑頌 ○ 成耆悳記曰 ……]
贈知申先生盧公實記成[有跋]
作經菴銘贈南浩良
挽李起菴中業
李晩修時佐來訪
挽柳校理道緯
挽趙西川貞奎
撰武屹書堂重修上樑文
跋豐川盧氏世稿

◎ 壬戌(1922, 68歲)
作玉淵五賢祠尊慕契序
三月 鳳巖同泛錄成
十二月 哭出系子婦宜人安氏[有祭文]

◎ 癸亥(1923, 69歲)
重刊眉叟先生年譜于泗南[頭註: 當在癸亥]
刊洙泗言仁錄、五服沿革圖[頭註: 當在癸亥]
[金參奉容禧主其事 故刊訖 輸板于紫溪書院]
校寒岡先生續、附集[頭註: 當在癸亥]
作至聖祠奉安祝文
撰東山書堂上樑文
盛京省誌成

◎ 甲子(1924, 70歲)
元朝題方齋壁
[聖人七十從心欲 愚夫戒得惧多欲 聖人七十不踰矩 愚夫事事靡循矩 平生學聖吾所欲 如何迄今多情欲 願祛六十九年欲 必以聖人爲吾矩 心生規兮規生矩 度方有常謂之矩 靜而安物地之矩 令不失形器之矩 義以方外聖之矩 方兮作我餘年矩]
題廣疑問齋壁
[詩曰 一事無成到七旬 秪携黃卷自怡神 風雲日月中元甲 才智聰明上學人 閉口不言山外事 開門剰賞洞中春 千紅萬紫皆吾有 多賴天翁育物仁]
作息城君東溪李公影堂記
編警齋郭先生實紀[有序]
春 往尙州愚川 校溪堂柳先生文集
與金古巖世洛、李晩修時佐、柳二江萬植遊道南
二月 遭安氏姉喪
冬 往溪堂集刊所

◎ 乙丑(1925, 71歲)
撰弘文館修撰守坡安公墓誌銘
謹書夏山勸懲案後
[識曰 萬曆八年 寒岡先生出守昌寧縣 設八書齋 課境中子弟 明年辛巳 置詳定有司十七人 各籍其坊里善惡 未朞歲往往有改愆而自新者 大君子政化之速 有如是夫 武屹舊藏 有夏山勸懲案 卽其書也 在先生雖不過一時過存之蹟 以夏山人士考之 實百代不刊之文獻 而將愈久愈勸愈懲也 謹謄寫而藏之 以備夏山古事云爾]
周禮私議成
[跋曰 按小宰章 天官、地官、春官、夏官、秋官、冬官 各曰其屬六十 而今所編 天官六十四員 地官八十一員 春官七十員 夏官七十八員 秋官六十六員 而鄭玄云司空篇亡 漢興 購千金不得 蓋漢於秦火之餘 得之斷簡而未覓 冬官之錯入五官也 司空篇豈本亡也 然昔所未慗 今誰辨別 但旣略有所見 試爲之充定六官 名之曰私議]
己卯錄成
政經成
勸學錄成
作楊州市琉璃甁歌警諸生
撰晩醒朴公行狀
夏 校全禮類輯于開寧之甘文[類輯凡四十卷 溪堂柳先生所編也 二江屢書要之 故扶病往之 居一旬 以氣力之難久旅 携類輯而還]
七月 約會趙一山於金陵
[以許應扶救事 發文數郡 會于金陵之望川 至珠山 與許錦洲聯行 猝遇暴雨 留數日而還 有苟令此事無終始 誰謂吾曹若箇存之句]
八月 柳二江來質溪堂集疑條
九月 李老正中聃、韓□□升源來訪
秋 浴東萊溫泉
[府君嘗患腫 侍講公要同浴 遠近士友來從者甚衆 風浴之暇 敬閱寒岡先生浴行錄 咸曰 今日吾輩 槩是錄中諸賢之裔 又是諸賢之源流也 盍修一契 圖爲羹墻之資乎 雲谷、冠山、檜原、泗陽、八樂、社倉 均是先生過存之地 彼皆有亭臺塾院之設 而獨於此而乏數棟屋子 俾後生小子 無所高景 此吾輩之所共汲汲也 仍修契事 府君名之曰景賢 作序文 頭註: 此條當在十月之上]
十月 孫男在爀加冠 作字辭以戒之
十一月 浴東萊溫泉
[腫患至是尤㞃 復啓浴行 家容、定容及李炳祺陪從 浴三日輒愈 留十餘日而還]
冬 還居蘆谷
[答崔鍾應書曰 朝華暮東 昨秣今蘆 屑屑不止者 非不知其爲嗤罵之資 然始焉而從耋兄 中焉而爲未亡婦 終焉而聽子也 蓋亦天所使也 爲之何哉]

◎ 丙寅(1926, 72歲)
春 居泗南
哭柳西坡必永[有挽詩]
哭柳二江[有祭文]
重修紫巖書堂[有上樑文]
與山海亭諸公論定南冥、松溪兩先生釋菜儀
[答許㙏書曰 山海亭 吾黨之所瞻依 而年來殊極寥落 遠邇嗟嘆 幸賴僉公尊衛之至意 輯治棟宇 又敦契事 至發釋菜之論 斯文氣數 庶幾從玆振發 何等仰賀 松溪申先生 冥爺之道交也 生而有申君爲最之許 歿而有聯卓共祀之禮 登遺亭而仰遺風者 未嘗不幷及松翁 今旣爲冥翁將事 則恐亦追依院享之儀 仰體冥爺觀善之志也 論者曰 亭是冥爺之亭 爲冥爺設禮而已 此則不然 敬義二字 自是冥爺用工之要法 而堂成之日 舍菜之節 縱緣他議 未得如禮 然苟如禮 則不敢不並祭於守愚先生也 禮林釋菜 實爲畢爺而設 而亦並祭松爺矣 今海亭之祀 豈可別立一規 不祭松爺乎 以冥爺精靈言之 昔所同享 而今忽單設 必於陟降之際 不免有踽足+京之懷也 相稷非識禮者 不敢有所質言 然旣承謬詢 故妄陳己意而已云云]
三月 新皇帝昇遐于昌德宮
[府君痛國祚永絶 累日閉門謝客]
歷代著述先聖先儒姓諱總錄成
五月 浴溫泉
[時金古巖與凝川士友同來 故有唱酬]
七月 撰性齋先生金陵影幀閣上樑文
挽張晦堂
作孤雲集序
家世十遷圖屛成[有詩]
紫巖書堂十曲圖屛成[有詩]
十二月 夢陪先師有作
[曰 九十進如彼 如斯無所進 退而己百千 敬無適無莫 無所適莫乎而……]

◎ 丁卯(1927, 72歲)
撰東阿李公行狀
撰巡察使石荷安公行狀 校文集
挽李小菴邁久
撰古琴孫公行狀 校文集
禎熙錄成
[崇禎、隆熙殉國諸賢事行]

◎ 戊辰(1928, 74歲)
作元朝自警文
[文曰 老夫今年七十四歲 追思之七十三年 所猷爲者皆非也 少而不勤讀非也 壯而求名利非也 廢擧而猶用意於文詞非也 受師訓而未克服膺非也 無所資益於朋友而以敎授爲己任非也 無足輕重於闡發而妄作人文字非也 不謹於辭受非也 不察於慶弔非也 耽書籍而不恤財力之匱乏非也 煩使令而妨損子孫之課業非也 何如能見餘年之不爲非 頭註: 此間當書元朝自警文]
作漁村先生楊公光山壇所告由祝文
撰德峯書堂上樑文
撰蠹窩崔公墓誌
辨我我錄中寒岡先生癸丑疏見誣
[時府君以檜淵首席 發文告我我錄刊所 略曰 我寒岡先生癸丑兩劄 蓋委曲而盡敬也 同春宋文正公嘗與美村尹文敬公論癸丑兩疏曰 此老此疏 豈不爲大疵乎 美村曰 當時欲諫廢主 時義不得不然 同春之意 廢主也 不宜曰休明之世 不宜曰聖上臨御 不宜曰治敎方隆 不宜曰聖明 不宜曰天縱仁愛 不宜曰聖心聖躬 故曰大疵也 美村之意 以今看則廢主 以其時看則時王也 安得不曰聖上聖心諸語乎 故曰時義也 尤菴宋文正公年譜壬辰條中特載此語者 以美村之論不合於禮訟 故目以時義 而擠之爲利害上人也 非所以論癸丑疏之有疵無疵也 癸丑疏苟爲大疵 則同春何以特請寒岡之贈 尤菴何以歷拜寒岡之廟 何以揭臨風剩嗅百梅香之詩乎 洪梅山直弼答吳熙常書 則務欲爲寒岡覓疵而有曰此非癸丑疏 乃丁巳擬疏也 以一國所共覩 諸書所現載之癸丑頒敎文中四十三字 謂寒岡之拶逼聖母 又以舜母、唐曌等語 去頭折尾 誣毁無忌 是誠何心哉 此若爲疵 則同春何憚而不言 必曰癸丑疏乎 蓋頒敎文中句語 同春知之 故不疑於寒岡也 洪則未及知 故疑爲寒岡語耶 尤菴譜則曰癸丑疏 洪則曰此非癸丑疏 乃丁巳擬疏也 編譜者不得知 而洪獨知之乎 洪之意必以癸丑疏無疵 乃竭膂求疵於丁巳之疏 而茫不識頒敎中語 自喜得誣賢奇貨也云云]
春 往金陵就正堂 奉安性齋先生影幀[作奉安及常享祝文]
夏 校世譜于追遠齋
[臨歸 諸宗族來餞 府君有詩曰 細閱光山卅世文 文章道德域中聞 二千四百冠童聚 南北東西道里分 只望印工能就緖 休嗔病叟欲歸耘 命酒賦詩情話密 屯山艸木若相欣]
撰小菴李公行狀 校文集
作霽江書堂三先生釋菜告由祝文
哭族兄石南相旭[有祭文]
國朝出治錄成
[泗川朴彩奎刊布 ○ 序略曰 蓋一國之治 出於相臣 成於冢宰 而其所以承流宣化者觀察也 相臣賢 則不賢者不得爲冢宰 冢宰賢 則不賢者不得爲觀察也 於三者而國之治亂係焉 聖王所以愼於作相也 遂首書列聖廟號 其下作十欄 第一欄錄相 第二欄錄冢宰 其次錄八路觀察 自甲至癸 逐年而書之 無有闕漏 而未及攷者 空其欄以俟 但私自成書 無足爲世道輕重 然使覽者於賢者而有所慕 不賢者而有所戒 則亦不無小補於治理]
作寒岡先生四禮問答彙類跋

◎ 己巳(1929, 75歲)
作持軒箴贈權東煥
作黃江亭重修記
國朝進文蒐錄成
送李翊元遊江西[有序]
作澗松趙先生續集跋
八月 省侍講公于金谷
[侍講公自還國以來 不肯安於子孫之養 或寄留僧舍 或賃屋海島 乃就金陵之金谷楸下 築天山齋擬終年 春秋今八十一也]
遊夫仁洞 有同話錄[百弗菴崔先生杖屨之所 ○ 時府君以道淵、檜淵、鳳岡、東川四所首任 仍向本堂 察容及孫兌錫陪從]
謁畢齋金先生廟
[詩曰 晩始尋源到道淵 登亭如拜禮林筵 山南處處光輝遍 梧月楊風四百年]
訪文淵齋 有唱酬詩帖[高靈桃津朴氏先齋]
謁寒岡鄭先生廟 行月朝約會儀
[時府君爲約長 而士友會者五十餘人]
訪鳳岡書堂 行相揖禮 講大學、中庸 仍至高山亭 謁忠肅公廟
與灆溪書院諸公 質文獻公實記新刊增刪諸條
[與檜淵士林書告濫溪書院諸公曰 四子之書 待朱子而章句焉 故百代而尊信之 苟有人妄試手分 曰闕文者則補之 曰衍文者則刪之 其可曰尊四子乎 亦可曰信朱子乎 我文獻公鄭先生 東方五賢之一也 文穆公鄭先生 五賢後一人也 文獻之蹟 文穆編之 吾黨之士 孰不尊信乎 實記之成 在萬曆丁巳 迄今三百餘年 公私文字之後出者 續錄可也 豈可毁成書而混之 別立遺集之目耶 噫 乙亥之役 旅軒張先生作跋語 而歎其足以推測先生之學 而起後人之追想 要相與篤信 則有以見實記之爲完本也 及至癸卯 令人發部次未整之歎 無乃遊伽倻錄一條、祭墓文一篇及神道之碑爲後來揷入 而未及識別故耶 以今所刊者言之 苟不有旅軒張文康公、陶菴李文正公跋語 都無實記影響也 文穆公所以眷眷於文獻公事實者 將於何處而尋其彷彿乎 夫如是則李文正公所云經鄭先生手 故不敢遷動者 在今日作空言耶 乃攷其不敢遷動之二件 則史禍首末 已無名目 且置休說 只以略存底事實篇及碑狀文字而言之 所遷動者 凡一百五十餘處 於文敬先生則必祛舊稱而貶之 於文獻先生則必遷改而尊之 兩先生之道同尊同 朝野之所習熟於口耳也 貶之改之 於兩先生無所加損 然實記編成之日 則行狀因本文而登之 本文乃得於鄭氏之門者也 貶改一事 貴院僉君子所不能逃其責也]
辨朴晩醒墓碣中畿學、嶺學之說
[鄭觀秀朴晩醒墓碣中畿學、嶺學之說 請發通討之 府君難同室之鬨 以書答之曰 畿、嶺之說 不過文人唇吻間一時機軸之發 不足深卞 然東方之學 自圃隱而肇其基 歷冶、江、畢、暄、蠹而靜菴出 晦齋、冲齋並世而承之 退陶集其成 而南冥道同而德齋 退陶之門 四先生並興焉 繼而立門戶者 旅軒、愚伏、眉叟、葛菴、星湖、大山、順菴、立齋、下廬、定齋、性齋諸先生 或私淑於畿 或親炙于嶺 同一規矩 同一心法 何從而分別之哉 諸先生之終身行之者 均是格致治平之術 而授徒則講孝悌忠信之道 升朝則盡堯舜君民之策 安往而不具體用哉 若以爲隨錄出於磻溪 心書出於茶山 執此而謂畿學之有意於進就 則淺之其爲說也 旅軒之易學圖說、愚伏之養正編、眉叟之心學圖、葛菴之洪範衍義、星湖之疾書、大山之制養錄、順菴之語類節要、立齋之論語衍義、下廬之學則、定齋之讀書瑣語、性齋之宗堯錄 俱所以羽翼經傳 則實有體而有用也 但柳、丁兩公之書 全言其用 故不似諸先生兼體用之書也 且竊惟之退陶著心經後說、寒岡著心經發揮、眉叟著心學圖 三先生之所以傳心也 況李子粹語一書 始於星湖 成於順菴 以是授下廬曰欲學朱子 先學退陶 孔孟之言 如王朝之法令 程朱之言 如嚴師之勅厲 退溪之言 如慈父之訓戒 下廬亦以是說而授性齋 其非所以專尙退溪之學者耶]
撰領議政晉山府院君姜文景公遺墟碑

◎ 庚午(1930, 76歲)
正月 作滄浪亭重修記[蘆溪安先生講道之所]
爲文哭盧參判泳敬
挽金古巖世洛
挽鄭涵齋恩錫
刊世譜于追遠齋
作追遠齋記
刊世譜要編[有序]
屯山同話錄成
[有序 序略曰 某戊辰歲 留屯山三月 今年又留三月 無日非花樹之會 無日無朋遊之娛 而特於是日 而成是錄 何也 勿窩金仁叔 嘗同遊定跟齋金一叟、明八晜季、金浩見、楊和五仲玉 鄕井世交也 衿佩齊臨 歡動山門 族中長老 以齒而坐 其次肩隨 少者趨席隅 設酌勸酬 甚相樂也 將別 某悵然曰吾輩少壯時 近而鄕塾 遠而國學 以至儒賢之院、名勝之榭 不期而遇 雖今年分手 明年能盍簪 柰玆白首枯落 各守蓬蓽 略憑書尺、詩筒而通聲氣而已 是日之會 天實借便 而又不能更僕宿 宿散而後思之 便一夢境 寧不黯黯 苟載名一帖 思到而披閱之 殆似此席促膝 其不爲均慰孤寂之資乎 僉曰 唯 使族姪根容列書姓名、表德、貫邑、居住 凡三十六人 名之曰屯山同話錄 所共話者何事 寰宇興替 非吾話也 民族聚散 非吾話也 所話惟身心之不放失、子孫之守本分 其餘稻熟魚肥、風淸月白 最是一場緊說話也 錄中多吾族 酬賓之禮然也 兒子家容、稚孫在燁 亦隨錄焉 蓋不以應門之卑而遺之也 遂各賦一詩而繫其下 勿窩、東籬幷有序 仲玉有跋 元容有賦 根容有識 余亦不容無一言也 錄成於七月十三日 而凡三十八人 各有詩一篇 或有序跋賦識 宗族朋友踵而至見錄中詩 樂而和之 並續錄焉 人員至數百餘]
續同話錄成
[序略曰 某又未歸 宗族朋友之踵而至者見錄中詩 樂而和之 經術文學之士往往焉 遂錄其詩 注用前例 目之曰續同話錄]
七月二十六日 省鳳谷、竹田、大谷墓[親壟]
[仍有詩曰 新秋扶病强奔趨 大谷、梨房三柏楸 塋間伏泣那堪退 不覺前林落照收]
十月晦日 還馬山寓第 臨行 根容有詩 餞道錯錯 未及開視 至夏山停車三數時 沈囈中坼閱之 走艸和寄
[詩曰 千家萬牒僅成書 十襲封纏載我車 因爾祈年祈爾學 愼無悠泛老夫如 〇 是年二月 家容以調病移居于此 留數日後 卽欲返駕于蘆山 因天寒而止 ○ 趙瑞午昶奎書曰 家兒爲治其宿祟 且爲荒愁所驅 挈家于馬港 某之所處 正是難便 欲隨養則城市棲屑 非心欲仍居 蘆第則□得過失於兒子□以方躊著耳]
作雪窓先生河公行狀
十二月 校李默山遺稿
[搜出亂紙 手自謄艸 燈下寫至十餘張]

◎ 辛未(1931, 77歲)
元朝 壽侍講公八十三歲
[詩曰 菊水胚來又出身 天翁已許壽斯人 講求守一處和術 豈但南陽百卅春 / 今年乃作畝丘翁 淸曉冠衣傲雪風 口經復見濟南叟 懿戒將偕衛武公 / 壽限齊看瓊海揚 齒空庶飮穰城乳 聽視如常步履强 一時人瑞爭相覩]
作花堂裵公實記序
正月二十二日甲子 始有患節
[是日夕 抄趙紫巖性源行狀未畢以廢 痛就床第 丙寅 稍有减勢 使不肖等書送在燁星單及裵花堂實記序 丁卯 患候更添 命不肖書告于 以下缺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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