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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원인 감동공유 추천글
제목: 현대사회의 무감각함
학과: 토목공학과, 이름: 김*현, 선정연도: 2019
추천내용: 이 책은 타인의 고통을 접하고 이에 대처하는 현대사회의 현실을 보여주며 고통의 가장 본질적 개념인 전쟁에 관해 이야기한다. 책에서는 주로 사진이라는 매체를 이용해 전쟁의 본성에 대해 들여다 본다. 더 나아가 이미지(사진)가 사용되는 방식, ‘이미지’의 의미와 해석에 대해서도 깊게 다룬다.
인터넷과 sns가 발달하면서 우리는 지구 반대편에 위치한 나라들에서 일어나는 소식들이 지금 여기에서 실시간으로 생중계되며 전세계적으로 소통이 가능해졌다. 이러한 여러 매체들로부터 쏟아지는 정보들 중에는 좋은 소식도 있지만 반면 잔혹하고 부정적인 정보들도 또한 존재한다. 수많은 자극적이고 방대한 정보들은 현재에도 무분별하게 확산된다. 요즘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을 떠올려보라면 유명 연예인의 자살 소식이 먼저 생각이 난다. 이런 소식이 있기 전에 우리는 또 한명의 연예인을 보내야 했기에 얼마 차이가 나지 않는 시간내에 발생한 이 일이 정말 참담하기만 하다. 이처럼 우리는 매우 자극적이고 어쩌면 잔혹한 이러한 정보들에 매번 노출되며 무기력함에 빠지게 된다고 생각한다. 타인의 고통을 일종의 스펙타클로 소비해버리기 쉬운 현대사회에서 어쩌면 우리는 지독한 외로움을 느끼고 있는 것이 아닐까. 온전한 내 자신으로 존재하기도 버거워지는 듯한 느낌 또한 자주 느껴진다. 이 책의 저자 수전 손택은 실제 무력(무기)으로 발생하는 가시적인 전쟁에 대해 이야기하며 이를 연민만하는 우리의 자세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한다. 연민은 우리의 무능력함을 증명해주는 것이며 ‘그저 우리가 저지른 일이 아니니까’ 하는 생각으로 그것을 바라만 보는 자세를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을 극복하고 우리의 무감각함을 떨쳐내야한다고 이야기한다. 저자의 이러한 주장이 너무나 공감이 간다. 저자는 무력으로 발생하는 가시적인 전쟁에 관해 이야기했지만 현대사회에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키보드 워리어들이 sns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우리가 매번 접속하고 일상속에서 접하는 인터넷 속 세상은 전쟁터와 다름 없는 것이다.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지금 겪고 있는 무감각함과 무력감을 극복하는 것이 우리의 숙제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수많은 것들에서 파생된 그저 별 것 아닌 진부함이나 스펙타클로 소비하는 태도나 방식을 버려야 할 것이다. 현대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효원인들이 ‘타인의 고통’이라는 책을 읽고 자신은 타인의 고통을 어떻게 대하고 여기고 있는지, 더 나아가 이러한 이슈들 속에서 나 자신은 어떠한 행동을 하고 있는지 등 스스로의 마음과 생각을 환기시킬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길 바란다.
독후감 공모전 우수작
제목: 바보는 되지 않겠다.
학과: 독어독문학과, 이름: 윤*혜, 선정연도: 2019
내용: In the valley of the sorrow, spread your wings. (슬픔의 협곡에서, 너의 날개를 펼쳐라.) 어느 출처도 모르는 문구 하나가 내 마음을 달래준 지는 꽤 시간이 지났다. 항상 내게 주어지고 감당해내야만 하는 삶의 무게감이 가끔은 힘에 부쳐 왜 나만 고통스러운, 행복하지 못한 삶을 살아야만 하는가 하는 건방진 생각에 사로잡혀 있을 때, 어느 책을 읽다 작가가 소개해 준 수전 손택의 한마디는 구글 검색을 통해서도 출처가 미스터리하지만, 지금의 삶의 하나의 지향점으로서 자리 잡고 있었다. 그래서 책상의 한쪽에 “수전 손택 – 타인의 고통, 우울한 열정 읽어보기”라고 메모해 놓고서는 해야 할 일들에 치여 그 메모가 살짝 바랠 때까지 방치해 놓았던 내가 감히 그녀를 안다고 할 수는 없으나, 그 슬픔의 골짜기에서도 나에게 날개를 펴라고 전하는 그녀의 이름 네 글자만 보더라도, 나는 그녀의 가장 유명한 책인 이 책을 읽고 싶다는 욕심에 평소의 아침보다 조금 더 서둘러 도서관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누구보다 전쟁에 가장 가까이 있는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전쟁은 그리 두렵고 나를 압도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짧은 외국 생활을 하면서 한국에 생소한 외국인들이 내게 가장 궁금해했던 것은 우리나라의 전쟁 상황 이야기였다. 종전 협정을 맺은 날 심지어 외국인 친구들이 내게 “너 역사의 한 장면을 목격했어. 소감이 어때?” 라고 말할 때도 나는 그저 “그래?” 하고 말았다. 나는 이야기해 줄 것이 없었다. 그리고 늘 북한 관련 뉴스를 보고 있자면 전쟁이 나면 어떡하느냐며 노심초사하는 할머니의 울음 섞인 우려도 나는 별로 개의치 않았다.

독일에 있을 때, 미국인 친구들과 다하우 수용소에 간 적이 있었다. 수많은 사람이 죽어 간 그 장소가 주는 음기와 스산함에 압도당했다. 영어로 열정적으로 아주 빠르게 설명을 하는 가이드의 설명을 듣는 친구들을 뒤로 한 채, 나는 그들이 고문하고, 사람을 죽여갔던 건물들의 사진만 찍어갔다. 사실 그 수용소 자체가 지옥 같았지만, 나는 더 지옥같이 보이는 곳들의 사진을 찍었다. 그래야, 내가 나중에 떠올리고, 남들에게 나 ‘그 수용소’ 갔다 왔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 테니까. 그래서 책을 읽는 동안 내게 드는 한 가지의 감정을 묻는다면, 나는 당연히 부끄러움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몇 달 전, 추천받은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라는 책을 얼마 읽지 못하고 대출하고 반납하기를 여러 번 하였다. 그들의 절박함과 고통스러움은 언어라는 수단을 통해서 나에게 큰 자극이 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늘 사진과 영화는 그나마 나에게 자극이 되었다. 가족이 보고 싶지만. 소리 내어 울지 못해 참호에 갇혀 죽음을 기다리는 눈물을 참는 배우들의 연기에 그제야 내 눈가가 촉촉해졌다. 그것이 만들어진 감동이라는 사실을 앎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내가 “사실적”이라고 생각하고 전쟁에 대해 피부 가까이 느꼈다고 생각했던 고통들의 사진이 누군가의 지시와 의도 속에 만들어진 도상이라는 사실은 충격적이었다. 아마 수전은 이런 나뿐만 아니라 자신의 글을 읽는 모든 이들이 그러리라는 것을 예상이라도 한 듯 뼈 아픈 불편한 말들을 한다.

이 책을 읽던 와중에 사실“그래서 나보고 어쩌라고”라는 알량한 상념이 살짝 들었다는 것을 고백한다. 사진은 늘 증거가 된다. 생활 어디에서나, 어디 증거 가져와, 라고 한다면 보통은 사진이나 동영상을 보여준다. 인간의 인지능력의 한계이자, 또한 이 사회가 나아가고 있는 방향 자체가 온갖 시각적인 도상들에 의해서 증거되고, 증거를 요구한다. 이미 지나간 일들이며, 나에게 닥치지 않을 일들을 대중들에게 알리려면 더욱더 강력한 자극이 필요하다. 그러면, 누군가에게는 예술로서, 누군가에게는 포르노로서 소비되는 이 전쟁사진이 없었다면, 과연 사람들은 이 전쟁들을 기억하고 살아줄까? 그리고 증거가 어딨느냐고 하지 않을까?

“가슴이 미어질 듯한 사진들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던져줄 수 있는 능력을 좀체 잃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런 사진들은 뭔가를 이해하는 데에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서사는 우리가 뭔가를 이해하도록 만들어 줄 수 있다. 그러나 사진은 뭔가 다른 일을 수행한다. 사진은 우리를 쫓아다니며 괴롭히는 것이다.” (137p) 나는 단 한 번도 그들을 이해해 본 적이 없을 것이다. 그저 그 잔혹함에 얄팍한 동정 정도가 내 감정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들의 서사에 크게 관심 둔 적이 없었다. 그저 내 말초 신경을 건드리는 자극에만 반응했을 뿐이었다.

매혹적인 육체가 외부의 공격을 받는 광경을 보여주는 이미지들이 모두 포르노 그라 피라는 사실은 꽤 전부터 여성학에 관심을 가지면서 알게 된 사실이었다. 사람들은 왜 그리도 잔인하고 잔혹한 것을 좋아할까 이해가 안 돼가도, 가끔 들려오는 연예인이나 아는 사람의 불행한 가십에 귀를 열게 되는 내 모습이 바로 그 예라는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엄마가 자주 보는 슬픈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이 싫었다. 내가 과잉공감을 하는 유약한 타입의 사람이라서 그런 것인지, 타인의 가난과 삶의 무게에 대한 방송은 나에게 피부로 느껴졌다. 그 처절함을 나는 불편해했다. 엄마는 저렇게 처절하게 살지 않는 나의 삶에 대한 감사함을 늘 느끼라고 하셨다. 그러나 나는 그 사람들과 나를 비교하며 감사하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내가 좋은 사람이어서 그런 것 보다는, 이미 나의 기준과 내 눈은 이미 나보다 경제적으로든, 신체적으로든, 사회적 지위로든 위에 있는 사람들을 올려다보는데 지쳐 그들을 바라보고 공감할 에너지가 부족해서였을 것이다. 그들의 고통이

몇 주 전 화성 살인사건의 용의자가 사실은 교도소 안에 있었다는 기사가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했다. 나는 경찰의 무능함에 통탄했고, 이 불안함 속에서 살아야 하는 세상이 싫었다. 하지만 나를 더 화나게 한 것은 그 사건을 영화화한 “살인의 추억”에 대한 영화에 대한 재관 심이었다. 그리고 편성을 바꿔버리고서는 시청률 잡아보겠다고 얄팍한 수를 쓰는 방송사와 그 잔혹함을 예술로 승화시켜 대중이 사랑하는 영화로 만들어버린 예술계의 콜라보가 너무나도 싫고 토악질이 나왔다. 누군가에게는 당장의 존재 문제로 귀속될 수 있는 일들이 누군가에게는 유흥거리라는 사실이 너무나도 싫었다. 그래서 범죄 영화를 거의 보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범죄 영화를 보면 쫓기고 아파야만 했을 피해자와 반사회적 성격장애가 아니던 이상 “그럴 수 밖에 없었다”던 범죄자 중의 일원에 대해서 이해하게 된다. 사람들은 가해자를 영웅화시킨다. 나는 그것이 싫었다. 가해자에게 공감하는 꼴이라니, 너무나도 웃기지 않는가. 결국 두 번의 상처를 받는 것은 피해자인데 말이다. 그래서 이러한 사실을 아는 나조차 그런 사람이 되게 만드는 예술이 싫었다. 가해자에게 피해자만큼이 서사를 주게 되면, 그것 또한 말이 되고, 이해 가능한 일이 되어버린다. 사람들이 사랑해 마지 않는 영화 “마블 시리즈”의 빌런들의 인기만 봐도 그렇다. 대중문화는 우리를 우리의 정신 속에 가장 부드럽게 들어와 가장 강력하게 작용해버린다.

나는 전시의 시대에 산다. 내 대부분의 동년배는 국적을 불문하고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를 이용한다. 거의 99%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가 오늘 먹은 것, 내가 한 것, 내가 산 것, 그리고 내가 가진 것에 대한 전시들이 끊이지 않는다. 아마 그것은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고 갉아먹게 하는 것이라는 것에는 대부분이 공감할 것이다. 이 시대 최고의 유망 직업이 유튜버라고 하는 농담이 그저 농담으로 들리지 않고, 그들이 버는 고수익에 혹해 나도 한번 해볼까 하는 생각을 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전시하면 돈이 되는 신기한 자본주의의 세상에 살아가고 있다. 사람들을 자극하는 슬픈 사연을 가진 이야기가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게 하고, 사람들은 지갑을 연다. 그러나 사람들은 더 슬프고 더 참혹한 사연을 원한다. 나는 이다음의 세대가 어느 방향으로 갈지 궁금하다. 이미 돈이 되는 사회 운동만이 전개되고, 돈이 되는 권리에만 사람들은 집중하는 시대이자, 돈으로 본인의 선행과 따뜻한 마음을 보여 줄 수 있는 세상이니까. 사회는 앞으로 발전한다지만, 나는 사실 갑갑한 현실에 직면할 때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이 사회가 만들어 놓은 대로 따라가야만 하는 나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의문한다. 얕은 철학 지식을 써먹어 보자면, 나는 실존주의를 갈망하는 구조주의자일 뿐이었다. 스스로 본인이 되길 원하면서, 사실 그 구조 속에 허우적대며,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이 구조가 그들과 똑같은 날 만들었다고 외치는 비겁자라는 생각이 들 때마다 몰려오는 자괴감은 가끔은 한 치 앞도 모르는 풋내기인 나를 너무나도 우습게 만든다.

단지 ‘괜찮아, 다른 사람도 다 힘들고 다른 사람들도 다 똑같이 살아.’라고 말하는 누군가의 식상하지만 배려 깊은 위로보다는 수전이 타인에 고통에 대해서 내게 보낸 칼날 같은 훈계들이 더욱 위로가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수잔 손택은 내게 “타인과 공유하는 이 세상에 인간의 사악함이 빚어낸 고통이 얼마나 많은지를 인정하고, 그런 자각을 넓혀나가는 것도 아직까지는 그 자체로 훌륭한 일”이라고 이야기해준다. 그리고 “끊임없이 환멸을 느끼는” 내가 얼마나 미성숙한 존재인지도 느끼게 해주었다. 나는 환멸을 느끼는 데서 끝나는, 나 자신을 한정시켜 버리고 이 사회를 닫히게 하는 그저 미약하고도 사악한 존재 하나구나라는 생각에 다시 빠질 때쯤, 그러나 그녀가 나에게 “다 같이 슬퍼하자, 그러나 다 같이 바보가 되지는 말자. 역사를 조금이라도 알고 있다면 그동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그다음에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라고 마지막으로 전한다.

이 책을 덮고, 이 책에 대한 감상문의 마침표를 찍고 나면, 나는 또다시 내 일상의 지루한 굴레에 얽매여서 타인의 고통에 대해 고찰을 하지 못하고 무의식적으로 일상의 포르노그래피를 즐길 것이다. 아니, 또 나는 무뎌지겠지. 이기적인 내가 가진 연민은 보통의 사람만큼이나 변하기 쉬울 것이며, 오히려 이리저리 줏대 없이 흔들리다가 내 입맛에 맞게 작동하던 공감 능력에 휩쓸려 연민의 늪에 빠져버리겠지. 오히려 내가 더 힘들고, 고통스럽다며 우악스럽게 못 들은 척해 버릴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렇게 살고 싶지 않다. 나는 배웠다. 역사를 배웠고, 인문학을 배웠고 인간의 본질을 탐구하고 또 언어로써 우리를 각성시키는 지성인의 글을 읽었다. 타인의 고통은 곧 나와 어떠한 작은 관계든 연결 돼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 싶다. 아니, 잊지 않을 것이다. 더 이상 바보처럼 울기만 하는 사람은 되고 싶지 않다. 그들이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가슴 깊이 이해하는 그런 따뜻한 어른이 되고 싶다. 손택이라는 통찰력 있는 어른이 내게 건넨 훈계와 위로는 아마 또 다른 내 삶의 지향점이 될 것이다. 나도 언젠가는 그녀와 같이 의연하고 성숙한 지성인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다 같이 슬퍼하자, 그러나 다 같이 바보가 되지는 말자”에 꾹꾹 눌러 담아 내 책상 위 벽에 잘 보이는 한 켠에 적어 두었다.
독후감 공모전 우수작
제목: 타인의 고통-연민과 불편함에 대해
학과: 국어교육과, 이름: 김*정, 선정연도: 2019
내용: 과거의 사람들이 바다 건너 일어나는 전쟁과 그 모습을 어떻게 접할 수 있었을까? 다양한 방법들이 있었겠지만, 이 책에서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사진’을 통해 형상화된 ‘이미지’의 전달이다. 카메라가 발명된 이후 사람들이 폭발적으로 열광한 이유는 사실적인 이미지가 그대로 전달되었기 때문이다. 사진은 객관적인 ‘증거물’이라고 착각하기 쉽지만, 작가의 ‘의도’가 들어갈 수밖에 없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초기 사진술이 ‘사실주의’와 결합했다는 것이 모순적이라 약간의 실소가 유발되기도 한다. 아니나 다를까, 사진작가들은 ‘포토저널리즘’이라는 새로운 바람을 사회에 불러일으켰고, 작가들의 셔터 한 번에 전쟁의 의미가 달라지기도 했다. 어느 쪽을 찍느냐에 따라 ‘젊은이들의 무의미한 희생’과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군인들의 용맹한 모습’이라는 상반된 메시지가 전달 될 수 있다.
‘수많은 난민의 죽음은 통계가 되고, 한 사람의 죽음을 전하는 사진은 전 세계가 주목할 비극적인 사건이 된다.’라며 인터넷에 떠도는 말이 있다.
- 이 장에서도 알 수 있듯이 '사진'의 역할은 중요하다. 다시 말해, 작가의 '의도'가 가진 힘은 굉장히 크다. 만약 사진작가가 이 사람의 죽음을 동정하게끔 사진을 찍지 않았다면 사람들이 사진을 보고 소년에 대해 연민하였을까? 책에 잠깐 언급되었듯이, 전쟁이나 죽음도 미학적인 요소에만 집중한다면 아름답게 연출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당사자(물론 죽은 자는 말이 없다)나 유가족의 동의도 없이 고인의 마지막 모습을 어떠한 엄숙함, 숭고함도 없이 비참성만을 부각하여 찍은 것은 비판받을 부분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저자도 이 부분에 대해서 굉장히 강조하는 것이 있다. ‘함부로 연민하지 말라.’

[연민은 변하기 쉬운 감정이다.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이런 감정은 곧 시들해지는 법이다.(153p)] 전쟁의 참상을 담은 ‘이미지’를 보고 ‘연민’하지 말라는 저자의 주장은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면이 있다. 흔히 TV에 노출되는 유니셰프 광고에서도 그 어떤 서사도 없이 단순히 보는 이의 연민을 불러일으킴으로써, 후원을 부추기지 않는가? 그리고 일부 사람들은 정기소액결제만으로 그것이 마치 후원하지 않는 사람에 비해 ‘도덕적으로 성숙한 사람’이라는 자격증을 받은 것 마냥 싸구려 우월감과 자기만족에 취한다. 이는 순수한 목적에서는 벗어난다만, 저자의 관점에 따르면 실천한다는 점에서 생각만 하는 것 보다는 올바른 행동이다. 하지만, 실천으로 옮길 수 없거나 옮기는 게 낫지 않은 경우는 어떻게 해야 좋을까?
[현대성의 시민들, 스펙터클이 되어버린 폭력의 소비자들, 전쟁터에 직접 가보는 위험을 무릅쓰지 않고도 그 참상을 세세히 말하는 데 정통한 사람들은 진실해질 수 있는 가능성을 비웃도록 단련되어 있는 사람들이다.(164p)] 정보가 범람하게 된 현대 사회에서는 이 구절이 정말 공감이 갔는데, 현 시대에서도 이러한 부유층(재력, 권력, 정보 등의 부유층)들의 기만은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난다. 그 중에서도 예를 들자면, 매체에서 비춰지는 소위 ‘흙수저’ 계층은 틀에 박힌 이미지이거나 부유층들이 상상하는 막연한 이미지로 그려지는 것이 대부분이다. 영화 ‘기생충’에서도 주인공 가족들은 4인 가족이 전원이 의욕 없고 한심한 백수인데다가 부잣집에 기생하여 사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그려진다. 이 얼마나‘가난은 게으른 사람들이나 겪는 것이다’라는 기득권적 사고에 편향된 이미지인가. 특권층은 단편적인 이미지들에서 취한 정보만으로 그들이 진정한 고통에 공감하는 메시아라도 된 듯 선민의식을 가지고 약자를 대한다. 이 경우, 실천으로 옮기는 것이 과연 연민만 하는 것보다 낫다고 할 수 있을까? 그릇된 인식을 바탕으로 한 실천보단, 저자가 말했듯이 [특권을 누리는 우리와 고통을 받는 그들이 똑같은 지도상에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의 특권이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 보는 것 (154)] 이 우선적인 과제라고 생각한다. ‘가난마저, 고통마저 도둑질당하는 이 세상에서 진정한 약자들은 도대체 어디서 도움을 요청해야 하는가?’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구절(164p)이었다.
그리고 사진작가의 의도대로든, 불쌍한 이에 대한 연민을 종용하는 사회적 교육의 문제든 간에 나도 모르게 그들, 약자들의 죽음을 연민의 대상으로만 소비하며 살아왔다. 이는 앞에서 말한 부유층의 기만과 다를 바 없다. 과연 내가 전쟁난민의 입장이거나 지금도 전쟁이 일어나는 지역에서 태어난 사람이었다면 소년의 죽음에 대해 연민과 공포 중 무엇을 느꼈겠는가? - 답은 당연히 후자다. 한국에 만연한 안전 불감증과 더불어 '우리'(여기서 말하는 우리는 나를 포함해서 안전한 사회체계 속에 살아가는 기득권층이다)가 타인의 고통과 죽음에 무감각한 것은 마음 한편으로는 우리가 안전한 위치에 놓인 기득권층임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사진배경이 되는 장소가 될 수 있는 한 멀리 떨어져 있고 이국적일수록, 우리는 죽은 자들이나 죽어 가는 자들의 정면 모습을 훨씬 더 완전하게 볼 수 있다. (109p)] 이런 생각에 미치자, 그때서야 저자가 연민하지 말라고 했던 이유에 대해 어느 정도 공감할 수 있었다. ‘연민’은 특권층 자신들이 고통의 원인에 연루되지 않았다는 무고함을 내세운 치졸한 감정이었기 때문이다. 나 또한 특권층에 속하는 사람으로서, 앞으로는 기만적인 입장에서 벗어나서 고통 받는 이들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는 방안을 고안해보기로 다짐했다. 그리고 개인적인 차원의 노력뿐만 아니라 국가적인 차원에서도 전쟁이나 기아와 같은 인재(人災)의 피해를 최소화하거나 예방하는 방안을 국제적 공조를 통해 마련하는 것이 시급하다 생각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저자의 생각에 공감하는 부분도 있었지만 나와 생각에서 차이를 보이는 부분도 존재했다. 저자는 일반 가정집에서도 TV로 전쟁을 목격할 수 있게 되면서 그것이 일종의 유흥거리로 전락했다고 주장한다. 반복되는 자극적 이미지가 타인의 고통에 무감해지는데 일조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사람들이 무감한 이유가 앞 문단서 밝힌 ‘특권층으로서 안전함’을 자각하고 있기 때문이지, 자극적인 것에 무뎌졌기 때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치의 악행을 고발하고 있는 영화 <피아니스트>를 예시로 들어보겠다. <피아니스트>는 개연성이 있고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이지만, 그럴듯한 ‘이미지’의 재현일 뿐 ‘현실’은 아니다. 만약 <피아니스트>가 아니라, 수많은 시체들이 공사장에서나 볼법한 중장비들로 대충 치워지거나 바퀴에 깔려 으스러지는 ‘실제장면’을 보러 갈 때도 사람들이 기대에 차서 팝콘과 콜라를 사들고 갈지를 생각한다면 답은 나온다. 사람들이 죽어가는 장면이 나오는 것은 둘 다 똑같다. 아니, 오히려 그럴듯하게 보이기 위해 극적으로 연출된 영화의 경우가 더 자극적이고 불쾌함을 유발할 것이다. 하지만 결국 이마저도 ‘허구’임을 관객들은 알고 있기에 영화가 끝난 뒤에 적당한 ‘여운’만을 가슴에 안고 퇴장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실제 다큐멘터리보다 영화를 찾는 것은 저자의 말처럼 스펙타클이 일종의 현실이 되어버렸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스펙타클’과 ‘현실’을 너무나 잘 구분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은연중에 ‘불편함’을 회피하려는 욕구가 있다. 사진도 연출되고 조작되는 경우가 많지만, 최소한 영화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허구인 경우는 찾기 힘들다. 그 자극성을 떠나서 ‘실제’ 사람이 죽은 사진, 그 순간의 포착을 보는 것을 사람들이 불편해했기 때문에 사진으로 전쟁의 모습을 전하는 게 현대에 와서 주목받지 못하는 이유라고 생각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제일 뇌리에 박힌 구절은 이 부분이다.
[이미 미국계 흑인들이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이 도시에 아직까지도 흑인 노예사 박물관이 존재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 아마도 흑인 노예를 둘러싼 기억은 사회의 안정에 지나치게 위험하기 때문에 그 기억을 자극하거나 새롭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고 판단됐을 것이다.(133)]
미국인인 저자는 미국의 이중성을 비판하려 든 예시였겠지만, 나는 우리나라에도 비슷한 사례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에 있어서 ‘위안부’문제는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을 비판할 때 빼놓고 이야기 할 수 없는 잔혹한 사건이다. 일본이 어린 소녀들을 상대로 저지른 일들은 지탄받아야 마땅하지만, 우리나라가 가해자의 입장이 된 사건에 대해서도 국민들의 반응이 뜨겁고 관심이 쏠렸을까? 박정희 대통령 당시, 베트남전에 참전한 한국군들이 베트남 여성들을 강간하고 그로인해 태어난 혼혈들을 ‘라이따이한’이라 칭하는 명칭이 생길 정도로 많은 피해자를 낳은, 가해자로서의 역사가 우리에게도 있다. 타국에 대한 혐오감으로 온 국민이 ‘반일정서’를 공유하고 있는 상황에서 정작 우리가 가해자가 되었던 사건에 대해서는 존재 자체를 모르거나 알면서도 애써 모른 체 하려는 것이 모순적이지 않는가. [사람들은 자신의 고통을 다른 어떤 사람의 고통에 견주는 것을 참지 못하는 법이다.(166)] 만약 내가 위안부 문제로 일본을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베트남 피해 여성에 대한 이야기를 제시한다면, 그들은 나에 대해 감히 위안부 문제의 심각성을 격하시키는 것이냐며 비난을 퍼부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사람들은 큰 착각을 하고 있다. 우리가 남들로부터 대우받길 원한다면, 우리가 먼저 남들을 대우하는 태도를 지닐 필요가 있다. 우리의 고통을 인정받기를 원한다면, 타인의 고통을 인정하고 그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과를 할 필요가 있다. 최소한 타인의 고통에 대해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남은 도덕성을 잃고 이기적인 기만자로 변해버리기 전에 타인의 고통을 직면할 필요가 있다. 이 책은 자신도 모르게 괴물이 되어가는 현대인들이 한번쯤은 읽어보아야 할 것 같다.
-당신은 오늘하루도 타인의 고통을 가십으로 소비하지는 않았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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