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장자료
LDR | 00000nwmaa2200000 k | ||
001 | 0100582295▲ | ||
005 | 20221206145831▲ | ||
007 | oe ▲ | ||
008 | 221123s1856 ko kor ▲ | ||
040 | ▼a221016▲ | ||
041 | ▼akor▲ | ||
085 | 5 | ▼a5-1▼2四分改修法▲ | |
090 | ▼a5-1▲ | ||
245 | 0 | 0 | ▼a[簡札] /▼d趙性家 發信 ; ▼e蔡東陽 受信▲ |
250 | ▼a筆寫本▲ | ||
260 | ▼a[刊寫地未詳] :▼b[刊寫者未詳], ▼c哲宗 7(1856)▲ | ||
300 | ▼a1張 ;▼c21.2 x 79.1 cm ▲ | ||
500 | ▼a行書임▲ | ||
500 | ▼a發信日: 1856년(철종 7)▲ | ||
500 | ▼a탈초 및 해제 : 정석태(부산대학교 점필재연구소)▲ | ||
520 | 4 | ▼a이것은 월고(月皐) 조성가(趙性家, 1824∼1904, 字 直敎, 號 月皐, 本貫 咸安)가 채동양(蔡東陽, 1808∼?, 字 獻可, 本貫 平康)의 서찰을 받고 그에 답한 서찰이다. 조성가의 경술(經術)과 문장(文章), 다시 말하면 도학(道學)과 문장(文章)에 대한 입장이 잘 표명되어 있다.▲ | |
541 | ▼a월고문고▼b조몽(경상남도 양산시, 부산대의학과 교수)▼c기증▼d2020.6.26.▲ | ||
546 | ▼a한국한자임▲ | ||
650 | 4 | ▼a고문서▲ | |
653 | ▼a간찰▼a월고문고▼a月皐6-33▲ | ||
700 | 1 | ▼a조성가, ▼d1824-1904▼e발신▲ | |
700 | 1 | ▼a채동양, ▼d1808~?▼e수신▲ |
[簡札]
자료유형
국내고서
서명/책임사항
[簡札] / 趙性家 發信 ; 蔡東陽 受信
판사항
筆寫本
발행사항
[刊寫地未詳] : [刊寫者未詳] , 哲宗 7(1856)
형태사항
1張 ; 21.2 x 79.1 cm
일반주기
行書임
發信日: 1856년(철종 7)
탈초 및 해제 : 정석태(부산대학교 점필재연구소)
發信日: 1856년(철종 7)
탈초 및 해제 : 정석태(부산대학교 점필재연구소)
요약주기
이것은 월고(月皐) 조성가(趙性家, 1824∼1904, 字 直敎, 號 月皐, 本貫 咸安)가 채동양(蔡東陽, 1808∼?, 字 獻可, 本貫 平康)의 서찰을 받고 그에 답한 서찰이다. 조성가의 경술(經術)과 문장(文章), 다시 말하면 도학(道學)과 문장(文章)에 대한 입장이 잘 표명되어 있다.
언어주기
한국한자임
주제(일반주제명)
청구기호
5-1
원문 등 관련정보
관련 파일
해제
이것은 월고(月皐) 조성가(趙性家, 1824∼1904, 字 直敎, 號 月皐, 本貫 咸安)가 채동양(蔡東陽, 1808∼?, 字 獻可, 本貫 平康)의 서찰을 받고 그에 답한 서찰이다. 조성가의 경술(經術)과 문장(文章), 다시 말하면 도학(道學)과 문장(文章)에 대한 입장이 잘 표명되어 있다. 상대방이 당시의 선비들의 병폐가 경술(經術)과 문장(文章)을 둘로 나누어놓고는, 문장을 하는 선비들은 국가를 경영하고 세상을 경륜하는 경국제세(經國濟世)의 학문(學問), 이 서찰의 말로는 “왕조의 체제를 도모하고 나라의 논의를 결정하고 백성을 기르고 국가의 대업을 세우는 일[謨王體斷國論牧黎元建大業之工]”에 대해서는 스스로 선을 그어놓고 강구하지 않는 것에 있다는 지적에는 깊이 공감하면서도, 상대방이 이와 같은 당시 선비들의 병폐를 극복하기 위해 문장을 통해 국가를 경영하고 세상을 경륜하는 학문, 이 서찰의 말로는 “왕조의 체제를 도모하고 나라의 논의를 결정하고 백성을 기르고 국가의 대업을 세우는 일”을 추구해야 한다는 입장에는 반대의 뜻을 분명하게 표시하였다. 상대방이 자신에게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 중 당(唐)나라 유종원(柳宗元, 773∼819)과 송(宋)나라 소식(蘇軾, 1037∼1101) 문장을 잘 체득했다고 칭송한 다음 문장으로 대성(大成)하기를 권유한 것에 대해, 자신은 유종원과 소식의 문장을 대략 보기는 했지만 그 문장을 잘 체득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한 다음, 자신은 문장의 요체를 터득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이제는 문장공부가 위주인 과거시험공부를 그만두고 대문을 닫아걸고 들어앉아 염락관민(濂洛關閩)의 도학(道學)을 중심으로 학문을 익히면서 앞으로 10여 년을 기약하고 대학(大學) 한 책을 읽어서 그곳에서 밝힌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의 본지(本旨), 상대방이 말하는 국가를 경영하고 세상을 경륜하는 경국제세의 본지에 대해서 깊이 연구해 보겠다고 하였다. 과거시험을 통한 출사의 길을 버리고 본격적으로 도학(道學)을 통한 성현(聖賢)의 경전공부를 해 나가겠다는 자신의 뜻을 밝히고 있다. 먼저 지난봄에 한양(漢陽)에 갔다가 이낙첨(李洛詹)을 통해 상대방이 갑인년(甲寅年, 1854, 철종5) 9월에 보내준 천백 여자가 이르는 장문(長文)의 서찰을 받아보고, 지금의 선비들이 경술(經術)과 문장(文章)을 둘로 나누어놓고서 왕조의 체제를 도모하고 나라의 논의를 결정하고 백성을 기르고 국가의 대업을 세우는, 다시 말하면 국가를 경영하고 세상을 경륜하는 경국제세의 학문에 대해서 스스로 선을 그어놓고 강구하지 않는다고 상대방이 지적한 것은 시대에 병통에 적중한 것이라고 칭송하고는, 문장을 익혀 경국제세(經國濟世)의 학문(學問)을 실현하려는 뜻을 가지고 그에 맞는 재주와 역량을 갖추고 있더라도 상대방의 경우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실제 세상에 쓰이지 못한 채 초야(草野)에 묻혀 지내는 경우가 많다고 한 다음, 이어서 자신은 상대방이 칭송한 것처럼 유종원과 소식 문장을 잘 체득한 것도 아니고 또 문장이란 일반적인 기예(技藝)보다 그 요체를 터득하는 것이 몇 배 더 어려운 것이라서 그렇게 할 수 있는 재주와 역량이 자신에게는 없는데다 오래도록 문장공부 위주의 과거시험공부를 하면서 선비가 궁극적으로 추구해야 할 국가를 경영하고 세상을 경륜하는 경국제세의 학문과는 동떨어진 공부를 해왔으니, 이제부터라도 세상 사람들과의 교제를 끊고 대문을 닫아걸고 들어앉아 염락관민(濂洛關閩)의 도학(道學)을 중심으로 학문을 익히면서 앞으로 10여 년을 기약하고 대학 한 책을 읽어서 그곳에서 밝힌 치국평천하의 본지, 상대방이 말하는 “왕조의 체제를 도모하고 나라의 논의를 결정하고 백성을 기르고 국가의 대업을 세우는 일”, 다시 말하면 국가를 경영하고 세상을 경륜하는 경국제세의 본지에 대해서 깊이 연구해 보는 것이 자신의 지극한 소원이라고 하였다. 과거시험을 통한 출사의 길을 버리고 본격적으로 도학을 통한 성현의 경전공부를 해 나가겠다는 자신의 뜻을 밝히고 있다. 그렇게 하여 진실로 노둔한 자신을 채찍질하고 갈고 닦아서 강구하기를 오래도록 한다면, 협소한 재주를 조금 넓힐 수 있을 것이고 제한된 역량을 조금 확장할 수 있을 것이니, 그러면 상대방이 권면한 뜻에 거의 부응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천 리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인편(人便)을 구할 수 없어서 3년을 지낸 뒤에야 비로소 답장을 보내게 되었다는 말로 끝맺고 있다. 이 서찰은 끝에 발신연월일(發信年月日)이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서두(書頭)에 “이낙첨(李洛詹)이 전해준 족하(足下)가 갑인년(甲寅年, 1854, 철종5) 9월에 보내주신 서찰을 받아보았습니다.[得李洛詹所傳足下甲寅九月辱賜書]”라고 한 말과 서미(書尾)에 “천 리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인편(人便)을 구할 수 없어서 3년을 지낸 뒤에야 비로소 답장을 드리게 되었습니다.[千里無便 越三年始得報答]”라고 한 말에 의거할 때 병진년(丙辰年, 1856, 철종7)에 보낸 것이 분명하다. 이 서찰은 조성가의 월고집(月皐集) 권10에 「답채진사 을묘(答蔡進士 乙卯)」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이것은 원본(原本)이고, 문집(文集)에 실린 것은 수록하는 과정에 내용 중 일부가 수정(修訂) 또는 산삭(刪削)되었다. 특히 월고집에 수록된 서찰에는 원본 서두의 ‘갑인구월(甲寅九月)’이 ‘거년구월(去年九月)’로 수정되고, 서미(書尾)의 “천 리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인편(人便)을 구할 수 없어서 3년을 지낸 뒤에야 비로소 답장을 드리게 되었습니다.[千里無便 越三年始得報答]”라고 한 부분은 산삭(刪削)된 채 발신연대(發信年代)가 을묘년(乙卯年, 1855, 철종6)로 고쳐져 기록되어 있다. 오류로 보인다.
번역서
서두(書頭), 채상사(蔡上舍, 蔡進士) 채상사(蔡上舍, 蔡進士): 진사(進士) 채동양(蔡東陽)을 말한다. 상사(上舍)는 상사생(上舍生)으로서 성균관(成均館)에 입학하여 학업을 익히는 생원(生員)과 진사(進士)을 뜻한다. 채동양은 1840년(헌종6) 식년진사시에 합격하였으므로 여기서는 진사를 가리킨다.
에게 답한 서찰. / 본문(本文), 지난봄에 한양(漢陽)에 갔다가 이낙첨(李洛詹) 이낙첨(李洛詹): 미상
이 전해준 족하(足下)가 갑인년(甲寅年, 1895, 철종5) 9월에 보내주신 서찰을 받아보았습니다. 너무도 기뻐서 읽어보니 전후 천백 여자가 되는 장문(長文)의 서찰이었는데, 고금(古今)을 오르내리면서 제가(諸家)를 논의하셨습니다. 그중 경술(經術) 경술(經術): 성현(聖賢)의 경전을 연구하는 학문을 말한다. 도학(道學)으로서의 성리학(性理學)를 가리킨다.
과 문장(文章)을 논의한 것에서는 의론(議論)은 모난데 없이 원만하여 마치 천 길 되는 비탈에 둥근 바퀴를 굴리는 것과 같았고, 문세(文勢)는 광대하고 힘차서 마치 만 리를 흐르는 황하(黃河)에 근원을 두고 흘러나오는 것과 같았으니, 지금의 선비들에게 깊이 개탄해 하는 것이었습니다. 경술과 문장이 두 길로 갈라져서, 왕조의 체제를 도모하고 나라의 논의를 결정하고 백성을 기르고 국가의 대업을 세우는 일에 대해서는 스스로 선을 그어놓고 강구하지 않는 이것이 과연 선비들의 일반적인 병통이었으니, 족하의 말씀은 시대의 병통에 적중한 것입니다. 그러나 강구하는 것은 세상에 베풀려는 것입니다. 재주와 역량이 족히 쓰일 만한 뒤에야 베풀 수 있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헛되이 강구하는 것일 뿐입니다. 스스로 선을 그어놓고 강구하지 못하는 사람은 또한 이미 스스로의 재주와 역량을 헤아린 것입니다. 족하처럼 재주가 뛰어나고 역량의 커서 경술을 깊이 체득하고 문장으로 꾸민 사람이 나아가 조정에 등용된다면, 왕조의 체제를 도모하고 나라의 논의를 결정하고 백성을 기르고 국가의 대업을 세우는 일에 대해 가슴속에 온축한 펼쳐서 그 강구한 것을 저버리지 않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오히려 초야(草野)에 묻혀 광채를 거두어 감춘 채 밥 한 그릇에 나물 한 접시로 양웅(揚雄) 양웅(揚雄): 기원전53∼기원후18. 자는 자운(子雲), 중국 사천성(泗川省) 성도(成都) 출신이다. 전한(前漢)의 문인이자 학자이다. 문장과 학문이 뛰어났지만 성제(成帝) 때 황문급사중(黃門給事中)이라라는 낭관(郎官)이 된 뒤에 애제(哀帝)와 평제(平帝) 거치는 오랜 기간 동안 승진을 하지 못한 채 한 자리에 머물 정도로 벼슬살이에서 몹시 침체하였다. 이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조롱을 해명한 「해조(解嘲)」라는 글을 짓기도 하였다. 저서로는 법언(法言), 태현경(太玄經) 등이 있다.
의 가난을 좇지 못하고 한유(韓愈) 한유(韓愈): 768∼824. 자는 퇴지(退之), 호는 창려(昌黎)이다. 중국 하남성(河南省) 하양(河陽) 출신이다. 당(唐)나라 문인이자 정치가이다. 육조(六朝) 시대 이후의 변려문(騈儷文)을 반대하고 고문운동(古文運動)을 주도하여 당송고문(唐宋古文)의 수장(首長)으로서 명성을 얻게 되었다.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이다. 과거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처 이부시랑(吏部侍郎)에 이르렀다. 그는 한때 벼슬살이에서 불운하였는데, 그때 「송궁문(送窮文)」이라는 글을 지어서 자신이 곤궁함을 떨쳐버리지 못하는 이유를 해명하기도 하였다. 저서로는 한창려집(韓昌黎集)이 있다. 사후 예부상서(禮部尙書)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문공(文公)이다.
의 곤궁함을 떨치지 못하면서 쓸쓸하게 성대(盛代)의 한 진사(進士, 司馬) 진사(進士, 司馬): 원문의 ‘사마(司馬)’는 생원(生員)과 진사(進士)를 말한다. 여기서는 진사를 가리킨다.
가 되어 있으니, 그 베풀어야 할 때를 얻지 못한 것이기에 이 때문에 또한 제가 깊이 개탄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 문제에 대해 족히 의논할 자격은 없습니다. 그러나 족하가 천 리 먼 곳에서 그 재주와 역량을 헤아리지 않고 이것을 가지고 저를 면려하신다면, 귀머거리에게 종려(鍾吕) 종려(鍾吕): 음악의 기준이 되는 음률(音律)을 말한다. 종려(鍾吕)는 음률의 명칭인 삼종(三鍾)과 삼려(三呂)를 말한다. 삼종은 임종(林鍾)ㆍ응종(應鍾)ㆍ협종(夾鍾)으로서 양(陽)의 음률에 속하고, 삼려는 남려(南呂)ㆍ대려(大呂)ㆍ중려(中呂)로서 음(陰)의 음률에 속한다.
의 음률(音律)을 알아들으라고 강요하고 장님에게 문채(文彩)의 아름다움을 구별하라고 강요하는 것에 거의 가깝지 않겠습니까. 제가 만약 그 실정(實情)을 그대로 드러내놓지 않고 감당할 수 있다고 한다면, 이것은 족하를 속이는 것입니다. 제가 족하를 어찌 감히 속이겠습니까. 저는 재주가 본래 보잘것없는데다 외지고 누추한 곳에서 성장하여, 이미 훌륭한 스승에게 좋은 가르침을 받지도 못하였고, 또 뛰어난 벗들에게 유익한 도움을 받지도 못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경술(經術)의 높은 경지를 엿보지 못한 채 과거시험을 대비하는 공령문(功令文) 공령문(功令文): 과거시험을 위한 문장으로서 과시(科詩), 과부(科賦), 대책(對策) 등 여러 문체의 글을 말한다. 과문(科文), 과체(科體)라고도 한다.
을 익히는 구렁텅이에 곧바로 빠져들어, 문장을 수사(修辭)하는 것에 힘을 쓰고 대우(對偶)의 형식을 맞추는 변려문(騈儷文) 변려문(騈儷文): 육조(六朝)와 당(唐)나라 때 성행하던 한문(漢文) 문장의 문체(文體)이다. ‘변(騈)’은 “두 마리 말이 함께 마차를 끈다.”라는 뜻이고, ‘려(儷)’는 ‘짝, 쌍, 부부’라는 뜻이다. 4자(字)나 6자(字)로 된 구(句)를 두 마리의 말이 함께 마차를 끌듯이 짝을 지워 들면서 글을 지어가기 때문에 사륙변려문(四六騈儷文)이라고도 한다. 운(韻)을 붙인다는 면에서 단순히 일반 산문(散文)과는 구별되는 반운문(半韻文)이다. 과거시험을 위한 공령문(功令文)의 한 축을 이루었고, 고문(古文)의 발달 이후에도 상량문(上樑文)과 표전(表箋) 등 한문 문장의 문체 중의 하나로 여전히 존속하였다.
을 익히는 것에 쓰면서 과거시험장에서 사람들과 각축을 벌였으니, 이른바 “왕조의 체제를 도모하고 나라의 논의를 결정하고 백성을 기르고 국가의 대업을 세우는 일”에 대해서는 과연 스스로의 재주와 역량을 헤아려 강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유종원(柳宗元) 유종원(柳宗元): 773∼819. 자는 자후(子厚)이다. 중국 산서성(山西省) 하동(河東) 출신이다. 유하동(柳河東)ㆍ유유주(柳柳州)라고도 불린다. 당(唐)나라 문인이자 정치가이다. 한유(韓愈)와 함께 고문운동(古文運動)을 제창하였다.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이다. 교서랑(校書郞), 남전위(藍田尉)를 거쳐 감찰어사(監察御使)가 되었다. 그 후 왕숙문(王叔文)의 사건에 연좌되어 영주사마(永州司馬)로 좌천되고 이어 유주자사(柳州刺史)로 옮겼다. 저서로는 유하동집(柳河東集)이 있다.
과 소식(蘇軾) 소식(蘇軾): 1037∼1101. 자는 자첨(子瞻), 호는 동파거사(東坡居士)이다. 중국 사천성(泗川省) 미산(眉山) 출신이다. 북송(北宋) 문인이자 정치가이다.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이다. 부친 소순(蘇洵, 1009∼1066), 아우 소철(蘇轍, 1039∼1112)도 모두 당송팔대가로서 이 세 사람을 삼소(三蘇)로 일컬어졌다. 관직은 서주(徐州)와 항주(杭州) 등의 지주(知州), 단명전학사(端明殿學士)ㆍ한림시독학사(翰林侍讀學士), 병부(兵部)와 예부(禮部)의 상서(尙書) 등을 지냈다. 저서로는 동파전집(東坡全集)이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의 문장에 대해서는 혹 대략 읽어본 적이 있었지만, 그 심오한 내용에 대해서는 조금도 엿보지 못하였거늘, 족하는 제 글이 유종원과 소식의 문장을 근골(筋骨) 근골(筋骨): 근육(筋肉)과 골격(骨格)으로서 문장의 내용과 형식을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로 하였다고 하시니, 족하의 말씀은 지나칩니다. 대개 살갗만을 깎아내는 사람은 또한 드물 것입니다. 고인(古人) 고인(古人)이……하였습니다: 고인(古人)은 모곤(茅坤, 1512∼1601)으로서 그의 이 말은 당송팔대가문초(唐宋八大家文鈔) 「총서(總叙)」에 나온다. 모곤의 자는 순보(順甫), 호는 녹문(鹿門)이다. 중국 절강성(浙江省) 귀안(歸安) 출신다. 과거에 급제하여 청양(靑陽)과 단도(丹徒) 두 현(縣)의 지사에서 시작하여 이부계훈사(吏部稽勳司), 광평통판(廣平通判), 광서근비첨사(廣西近備僉事) 등을 역임하였다. 요족(瑤族)의 반란을 진압하였고, 호종헌(胡宗憲)의 휘하에서 왜구의 평정을 도왔다. 의고문파(擬古文派)가 성행할 때 당송고문(唐宋古文)을 높이 평가하여 당송팔대가문초(唐宋八大家文鈔)를 편집해서 널리 유포하였다. 저서로는 옥지산방고(玉芝山房稿) 등이 있다. 모곤의 이 말 중의 영륜(營綸)은 황제(黃帝) 때의 악관(樂官)으로서 악률(樂律)을 창제했다고 알려진 전설상의 음률(音律)의 명인(名人)이며, 편작(扁鵲)은 춘추시대(春秋時代) 정(鄭)나라 사람으로서 의술(醫術)의 명인이며, 조보(造父)는 주(周)나라 목왕(穆王) 때 사람으로서 수레를 잘 몰았던 마술(馬術)의 명인이며, 양유기(養由基)는 춘추시대 초(楚)나라 사람으로서 궁술(弓術)의 명인이며, 비조(裨竈)는 춘추시대 정(鄭)나라 대부(大夫)로서 점술(占術)의 명인이며, 혁추(奕秋)는 전국시대(戰國時代) 바둑의 명인이며, 웅의료(熊宜僚)는 춘추시대 초(楚)나라 용사(勇士)로서 탄환 던지기의 명인이다.
이 말하기를 “영륜(營綸)이 음률(音律)에 정통하고, 편작(扁鵲)이 의술(醫術)에 정통하고, 조보(造父)가 마술(馬術)에 정통하고, 양유기(養由基)가 궁술(弓術)에 정통하고, 비조(裨竈)가 점술(占術)에 정통하고, 혁추(奕秋)가 바둑에 정통하고, 웅의료(熊宜僚)가 탄환(彈丸) 던지기에 정통한 것은 이들이 모두 천부적으로 타고난 지혜를 가지고서 마음과 힘을 오로지 그 한 가지 일에만 집중해서 학습한 공부를 더하고서야 그 요체(要諦)를 터득한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물며 문장의 요체를 얻기가 만약 이러한 여러 가지 기예(技藝)의 요체를 얻는 것보다 네다섯 배나 더 어려운 것이라면, 유종원과 소식의 문장은 그중에서도 더욱 그 요체를 얻기 어려운 것을 쇠퇴한 말세(末世)에 재주는 절대로 고인(古人)에게 미칠 수 없는데다 아울러 마음과 힘을 오로지 그 한 가지 일에만 집중해서 학습하는 공부도 없는 제가 어떻게 갑자기 그 근골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이미 그 요체를 터득할 수 없었기 때문에 수레를 돌려 왔던 길을 되돌아가서 염락관민(濂洛關閩) 염락관민(濂洛關閩): 송(宋)나라 성리학(性理學)을 말한다. 정주학(程朱學), 도학(道學)이라고도 한다. 염락관민(濂洛關閩)의 염(濂)은 염계(濂溪)로서 성리학의 비조(鼻祖) 염계(濂溪) 주돈이(周敦頤, 1017∼1073)가 거주하던 곳이며, 낙(洛)은 낙양(洛陽)으로서 명도(明道) 정호(程顥, 1032∼1085)와 이천(伊川) 정이(程頤, 1033∼1107)가 거주하던 곳이며, 관(關)은 관중(關中)으로서 횡거(橫渠) 장재(張載, 1020∼1077)가 거주하던 곳이며, 민(閩)은 민중(閩中)으로서 회암(晦菴) 주희(朱熹, 1130∼1200)가 거주하던 곳으로서 그들의 학문 성리학을 지칭한다.
의 남겨진 학문(學問)을 익히면서 신기(新奇)함을 추구하던 문장공부를 버리고 마음을 차분하게 해주는 경전공부[냉담(冷淡)]로 나아간 것이고, 혼잡스러운 역사서(歷史書)를 버리고 평이(平易)한 도학서(道學書)에 힘쓰게 된 것입니다 신기(新奇)함을……것입니다: 자신은 외적 사건의 전개가 혼란스러운 역사서(歷史書)의 학습이나 신기(新奇)함을 끝없이 추구하는 문장공부를 버리고 냉담(冷淡)하고 평이(平易)한 성현의 경전공부와 도학서(道學書)의 학습에 힘쓰겠다는 말이다. 냉담(冷淡)은 경서(經書), 곧 성현(聖賢)의 경전(經傳)에 대한 공부를 말한다. 냉담은 냉정함 또는 차분함의 뜻으로서 성현의 경전은 사람들의 마음을 차운하게 가라앉혀 내면을 향하게 할 수 있기 때문에 냉담이라고 한 것이다. 외적 사건의 전개가 혼란스럽고 복잡하여 부질없이 관심을 밖으로 돌려 마음을 들뜨게 만드는 역사서의 요열(鬧熱)과 상대해서 한 말이다. 주자(朱子)는 말하기를 “역사서는 혼잡스럽고 경서는 냉담하니, 후생들은 마음과 뜻이 아직 안정되지 않아 외면으로 향하지 않는 이가 적다.[史書鬧熱, 經書冷淡, 後生心志未定, 少有不偏向外去者.]”라고 하였다. 《朱子大全 卷33 答呂伯恭》 더구나 문장을 잘 쓰기 위해 신기(新奇)함을 추구하는 것은 문장이라는 한 가지 기예(技藝)에 탐닉한 나머지 학문에 대한 큰 뜻을 읽어버린다는 완물상지(玩物喪志)의 가르침을 잊은 것이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완물상지는 외물을 즐기다가 본래의 뜻을 잃게 된 것을 가리킨다. 북송(北宋) 사양좌(謝良佐, 1050∼1103)가 사서(史書)를 잘 외우고 박학다식함으로 자부하자, 그 스승 명도(明道) 정호(程顥, 1032∼1085)가 그것은 ‘완물상지(玩物喪志)’라고 나무랐던 것에서 유래하였다. 《近思錄 卷2 爲學》
. 한 권의 대학(大學) 외에 책상에 다른 서책을 두지 않은 채, 계획하기를 지금부터 시작하여 10여 년을 기한으로 세상 사람들과의 교제도 끊고 대문을 닫아걸고 들어앉아 공부를 하여 고인들이 학문을 닦던 방법을 만에 하나라도 엿볼 수 있기를 바라는 이것이 진실로 저의 지극한 소원입니다. 그러나 대학의 극공(極功)은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에 있으니, 왕조의 체제를 도모하고 나라의 논의를 결정하고 백성을 기르고 국가의 대업을 세우는 일은 진실로 이 책 밖에 있지 않을 것입니다. 진실로 노둔한 저를 채찍질하고 갈고 닦아서 강구하기를 오래도록 한다면, 이미 협소한 재주를 이를 통해 조금 넓힐 수 있을 것이며 이미 제한된 역량을 이를 통해 조금 확장할 수 있을 것이니, 그렇게 한다면 거의 족하가 권면하신 것에 부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족하께서는 온축한 것을 베풀 수 있는 때를 먼저 얻어서 저로 하여금 길이 개탄하지 않을 수 있게 해 주시면 저로서는 참으로 다행이겠습니다. 서로 부탁하는 것이 이미 두터워서 외람되게 여기까지 말씀드리게 되었습니다. 천 리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인편(人便)을 구할 수 없어서 3년을 지낸 뒤에야 비로소 답장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나무라지 말아주시기를 간절하게 바랍니다. 이만 줄입니다.
에게 답한 서찰. / 본문(本文), 지난봄에 한양(漢陽)에 갔다가 이낙첨(李洛詹) 이낙첨(李洛詹): 미상
이 전해준 족하(足下)가 갑인년(甲寅年, 1895, 철종5) 9월에 보내주신 서찰을 받아보았습니다. 너무도 기뻐서 읽어보니 전후 천백 여자가 되는 장문(長文)의 서찰이었는데, 고금(古今)을 오르내리면서 제가(諸家)를 논의하셨습니다. 그중 경술(經術) 경술(經術): 성현(聖賢)의 경전을 연구하는 학문을 말한다. 도학(道學)으로서의 성리학(性理學)를 가리킨다.
과 문장(文章)을 논의한 것에서는 의론(議論)은 모난데 없이 원만하여 마치 천 길 되는 비탈에 둥근 바퀴를 굴리는 것과 같았고, 문세(文勢)는 광대하고 힘차서 마치 만 리를 흐르는 황하(黃河)에 근원을 두고 흘러나오는 것과 같았으니, 지금의 선비들에게 깊이 개탄해 하는 것이었습니다. 경술과 문장이 두 길로 갈라져서, 왕조의 체제를 도모하고 나라의 논의를 결정하고 백성을 기르고 국가의 대업을 세우는 일에 대해서는 스스로 선을 그어놓고 강구하지 않는 이것이 과연 선비들의 일반적인 병통이었으니, 족하의 말씀은 시대의 병통에 적중한 것입니다. 그러나 강구하는 것은 세상에 베풀려는 것입니다. 재주와 역량이 족히 쓰일 만한 뒤에야 베풀 수 있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헛되이 강구하는 것일 뿐입니다. 스스로 선을 그어놓고 강구하지 못하는 사람은 또한 이미 스스로의 재주와 역량을 헤아린 것입니다. 족하처럼 재주가 뛰어나고 역량의 커서 경술을 깊이 체득하고 문장으로 꾸민 사람이 나아가 조정에 등용된다면, 왕조의 체제를 도모하고 나라의 논의를 결정하고 백성을 기르고 국가의 대업을 세우는 일에 대해 가슴속에 온축한 펼쳐서 그 강구한 것을 저버리지 않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오히려 초야(草野)에 묻혀 광채를 거두어 감춘 채 밥 한 그릇에 나물 한 접시로 양웅(揚雄) 양웅(揚雄): 기원전53∼기원후18. 자는 자운(子雲), 중국 사천성(泗川省) 성도(成都) 출신이다. 전한(前漢)의 문인이자 학자이다. 문장과 학문이 뛰어났지만 성제(成帝) 때 황문급사중(黃門給事中)이라라는 낭관(郎官)이 된 뒤에 애제(哀帝)와 평제(平帝) 거치는 오랜 기간 동안 승진을 하지 못한 채 한 자리에 머물 정도로 벼슬살이에서 몹시 침체하였다. 이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조롱을 해명한 「해조(解嘲)」라는 글을 짓기도 하였다. 저서로는 법언(法言), 태현경(太玄經) 등이 있다.
의 가난을 좇지 못하고 한유(韓愈) 한유(韓愈): 768∼824. 자는 퇴지(退之), 호는 창려(昌黎)이다. 중국 하남성(河南省) 하양(河陽) 출신이다. 당(唐)나라 문인이자 정치가이다. 육조(六朝) 시대 이후의 변려문(騈儷文)을 반대하고 고문운동(古文運動)을 주도하여 당송고문(唐宋古文)의 수장(首長)으로서 명성을 얻게 되었다.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이다. 과거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처 이부시랑(吏部侍郎)에 이르렀다. 그는 한때 벼슬살이에서 불운하였는데, 그때 「송궁문(送窮文)」이라는 글을 지어서 자신이 곤궁함을 떨쳐버리지 못하는 이유를 해명하기도 하였다. 저서로는 한창려집(韓昌黎集)이 있다. 사후 예부상서(禮部尙書)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문공(文公)이다.
의 곤궁함을 떨치지 못하면서 쓸쓸하게 성대(盛代)의 한 진사(進士, 司馬) 진사(進士, 司馬): 원문의 ‘사마(司馬)’는 생원(生員)과 진사(進士)를 말한다. 여기서는 진사를 가리킨다.
가 되어 있으니, 그 베풀어야 할 때를 얻지 못한 것이기에 이 때문에 또한 제가 깊이 개탄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 문제에 대해 족히 의논할 자격은 없습니다. 그러나 족하가 천 리 먼 곳에서 그 재주와 역량을 헤아리지 않고 이것을 가지고 저를 면려하신다면, 귀머거리에게 종려(鍾吕) 종려(鍾吕): 음악의 기준이 되는 음률(音律)을 말한다. 종려(鍾吕)는 음률의 명칭인 삼종(三鍾)과 삼려(三呂)를 말한다. 삼종은 임종(林鍾)ㆍ응종(應鍾)ㆍ협종(夾鍾)으로서 양(陽)의 음률에 속하고, 삼려는 남려(南呂)ㆍ대려(大呂)ㆍ중려(中呂)로서 음(陰)의 음률에 속한다.
의 음률(音律)을 알아들으라고 강요하고 장님에게 문채(文彩)의 아름다움을 구별하라고 강요하는 것에 거의 가깝지 않겠습니까. 제가 만약 그 실정(實情)을 그대로 드러내놓지 않고 감당할 수 있다고 한다면, 이것은 족하를 속이는 것입니다. 제가 족하를 어찌 감히 속이겠습니까. 저는 재주가 본래 보잘것없는데다 외지고 누추한 곳에서 성장하여, 이미 훌륭한 스승에게 좋은 가르침을 받지도 못하였고, 또 뛰어난 벗들에게 유익한 도움을 받지도 못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경술(經術)의 높은 경지를 엿보지 못한 채 과거시험을 대비하는 공령문(功令文) 공령문(功令文): 과거시험을 위한 문장으로서 과시(科詩), 과부(科賦), 대책(對策) 등 여러 문체의 글을 말한다. 과문(科文), 과체(科體)라고도 한다.
을 익히는 구렁텅이에 곧바로 빠져들어, 문장을 수사(修辭)하는 것에 힘을 쓰고 대우(對偶)의 형식을 맞추는 변려문(騈儷文) 변려문(騈儷文): 육조(六朝)와 당(唐)나라 때 성행하던 한문(漢文) 문장의 문체(文體)이다. ‘변(騈)’은 “두 마리 말이 함께 마차를 끈다.”라는 뜻이고, ‘려(儷)’는 ‘짝, 쌍, 부부’라는 뜻이다. 4자(字)나 6자(字)로 된 구(句)를 두 마리의 말이 함께 마차를 끌듯이 짝을 지워 들면서 글을 지어가기 때문에 사륙변려문(四六騈儷文)이라고도 한다. 운(韻)을 붙인다는 면에서 단순히 일반 산문(散文)과는 구별되는 반운문(半韻文)이다. 과거시험을 위한 공령문(功令文)의 한 축을 이루었고, 고문(古文)의 발달 이후에도 상량문(上樑文)과 표전(表箋) 등 한문 문장의 문체 중의 하나로 여전히 존속하였다.
을 익히는 것에 쓰면서 과거시험장에서 사람들과 각축을 벌였으니, 이른바 “왕조의 체제를 도모하고 나라의 논의를 결정하고 백성을 기르고 국가의 대업을 세우는 일”에 대해서는 과연 스스로의 재주와 역량을 헤아려 강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유종원(柳宗元) 유종원(柳宗元): 773∼819. 자는 자후(子厚)이다. 중국 산서성(山西省) 하동(河東) 출신이다. 유하동(柳河東)ㆍ유유주(柳柳州)라고도 불린다. 당(唐)나라 문인이자 정치가이다. 한유(韓愈)와 함께 고문운동(古文運動)을 제창하였다.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이다. 교서랑(校書郞), 남전위(藍田尉)를 거쳐 감찰어사(監察御使)가 되었다. 그 후 왕숙문(王叔文)의 사건에 연좌되어 영주사마(永州司馬)로 좌천되고 이어 유주자사(柳州刺史)로 옮겼다. 저서로는 유하동집(柳河東集)이 있다.
과 소식(蘇軾) 소식(蘇軾): 1037∼1101. 자는 자첨(子瞻), 호는 동파거사(東坡居士)이다. 중국 사천성(泗川省) 미산(眉山) 출신이다. 북송(北宋) 문인이자 정치가이다.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이다. 부친 소순(蘇洵, 1009∼1066), 아우 소철(蘇轍, 1039∼1112)도 모두 당송팔대가로서 이 세 사람을 삼소(三蘇)로 일컬어졌다. 관직은 서주(徐州)와 항주(杭州) 등의 지주(知州), 단명전학사(端明殿學士)ㆍ한림시독학사(翰林侍讀學士), 병부(兵部)와 예부(禮部)의 상서(尙書) 등을 지냈다. 저서로는 동파전집(東坡全集)이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의 문장에 대해서는 혹 대략 읽어본 적이 있었지만, 그 심오한 내용에 대해서는 조금도 엿보지 못하였거늘, 족하는 제 글이 유종원과 소식의 문장을 근골(筋骨) 근골(筋骨): 근육(筋肉)과 골격(骨格)으로서 문장의 내용과 형식을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로 하였다고 하시니, 족하의 말씀은 지나칩니다. 대개 살갗만을 깎아내는 사람은 또한 드물 것입니다. 고인(古人) 고인(古人)이……하였습니다: 고인(古人)은 모곤(茅坤, 1512∼1601)으로서 그의 이 말은 당송팔대가문초(唐宋八大家文鈔) 「총서(總叙)」에 나온다. 모곤의 자는 순보(順甫), 호는 녹문(鹿門)이다. 중국 절강성(浙江省) 귀안(歸安) 출신다. 과거에 급제하여 청양(靑陽)과 단도(丹徒) 두 현(縣)의 지사에서 시작하여 이부계훈사(吏部稽勳司), 광평통판(廣平通判), 광서근비첨사(廣西近備僉事) 등을 역임하였다. 요족(瑤族)의 반란을 진압하였고, 호종헌(胡宗憲)의 휘하에서 왜구의 평정을 도왔다. 의고문파(擬古文派)가 성행할 때 당송고문(唐宋古文)을 높이 평가하여 당송팔대가문초(唐宋八大家文鈔)를 편집해서 널리 유포하였다. 저서로는 옥지산방고(玉芝山房稿) 등이 있다. 모곤의 이 말 중의 영륜(營綸)은 황제(黃帝) 때의 악관(樂官)으로서 악률(樂律)을 창제했다고 알려진 전설상의 음률(音律)의 명인(名人)이며, 편작(扁鵲)은 춘추시대(春秋時代) 정(鄭)나라 사람으로서 의술(醫術)의 명인이며, 조보(造父)는 주(周)나라 목왕(穆王) 때 사람으로서 수레를 잘 몰았던 마술(馬術)의 명인이며, 양유기(養由基)는 춘추시대 초(楚)나라 사람으로서 궁술(弓術)의 명인이며, 비조(裨竈)는 춘추시대 정(鄭)나라 대부(大夫)로서 점술(占術)의 명인이며, 혁추(奕秋)는 전국시대(戰國時代) 바둑의 명인이며, 웅의료(熊宜僚)는 춘추시대 초(楚)나라 용사(勇士)로서 탄환 던지기의 명인이다.
이 말하기를 “영륜(營綸)이 음률(音律)에 정통하고, 편작(扁鵲)이 의술(醫術)에 정통하고, 조보(造父)가 마술(馬術)에 정통하고, 양유기(養由基)가 궁술(弓術)에 정통하고, 비조(裨竈)가 점술(占術)에 정통하고, 혁추(奕秋)가 바둑에 정통하고, 웅의료(熊宜僚)가 탄환(彈丸) 던지기에 정통한 것은 이들이 모두 천부적으로 타고난 지혜를 가지고서 마음과 힘을 오로지 그 한 가지 일에만 집중해서 학습한 공부를 더하고서야 그 요체(要諦)를 터득한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물며 문장의 요체를 얻기가 만약 이러한 여러 가지 기예(技藝)의 요체를 얻는 것보다 네다섯 배나 더 어려운 것이라면, 유종원과 소식의 문장은 그중에서도 더욱 그 요체를 얻기 어려운 것을 쇠퇴한 말세(末世)에 재주는 절대로 고인(古人)에게 미칠 수 없는데다 아울러 마음과 힘을 오로지 그 한 가지 일에만 집중해서 학습하는 공부도 없는 제가 어떻게 갑자기 그 근골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이미 그 요체를 터득할 수 없었기 때문에 수레를 돌려 왔던 길을 되돌아가서 염락관민(濂洛關閩) 염락관민(濂洛關閩): 송(宋)나라 성리학(性理學)을 말한다. 정주학(程朱學), 도학(道學)이라고도 한다. 염락관민(濂洛關閩)의 염(濂)은 염계(濂溪)로서 성리학의 비조(鼻祖) 염계(濂溪) 주돈이(周敦頤, 1017∼1073)가 거주하던 곳이며, 낙(洛)은 낙양(洛陽)으로서 명도(明道) 정호(程顥, 1032∼1085)와 이천(伊川) 정이(程頤, 1033∼1107)가 거주하던 곳이며, 관(關)은 관중(關中)으로서 횡거(橫渠) 장재(張載, 1020∼1077)가 거주하던 곳이며, 민(閩)은 민중(閩中)으로서 회암(晦菴) 주희(朱熹, 1130∼1200)가 거주하던 곳으로서 그들의 학문 성리학을 지칭한다.
의 남겨진 학문(學問)을 익히면서 신기(新奇)함을 추구하던 문장공부를 버리고 마음을 차분하게 해주는 경전공부[냉담(冷淡)]로 나아간 것이고, 혼잡스러운 역사서(歷史書)를 버리고 평이(平易)한 도학서(道學書)에 힘쓰게 된 것입니다 신기(新奇)함을……것입니다: 자신은 외적 사건의 전개가 혼란스러운 역사서(歷史書)의 학습이나 신기(新奇)함을 끝없이 추구하는 문장공부를 버리고 냉담(冷淡)하고 평이(平易)한 성현의 경전공부와 도학서(道學書)의 학습에 힘쓰겠다는 말이다. 냉담(冷淡)은 경서(經書), 곧 성현(聖賢)의 경전(經傳)에 대한 공부를 말한다. 냉담은 냉정함 또는 차분함의 뜻으로서 성현의 경전은 사람들의 마음을 차운하게 가라앉혀 내면을 향하게 할 수 있기 때문에 냉담이라고 한 것이다. 외적 사건의 전개가 혼란스럽고 복잡하여 부질없이 관심을 밖으로 돌려 마음을 들뜨게 만드는 역사서의 요열(鬧熱)과 상대해서 한 말이다. 주자(朱子)는 말하기를 “역사서는 혼잡스럽고 경서는 냉담하니, 후생들은 마음과 뜻이 아직 안정되지 않아 외면으로 향하지 않는 이가 적다.[史書鬧熱, 經書冷淡, 後生心志未定, 少有不偏向外去者.]”라고 하였다. 《朱子大全 卷33 答呂伯恭》 더구나 문장을 잘 쓰기 위해 신기(新奇)함을 추구하는 것은 문장이라는 한 가지 기예(技藝)에 탐닉한 나머지 학문에 대한 큰 뜻을 읽어버린다는 완물상지(玩物喪志)의 가르침을 잊은 것이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완물상지는 외물을 즐기다가 본래의 뜻을 잃게 된 것을 가리킨다. 북송(北宋) 사양좌(謝良佐, 1050∼1103)가 사서(史書)를 잘 외우고 박학다식함으로 자부하자, 그 스승 명도(明道) 정호(程顥, 1032∼1085)가 그것은 ‘완물상지(玩物喪志)’라고 나무랐던 것에서 유래하였다. 《近思錄 卷2 爲學》
. 한 권의 대학(大學) 외에 책상에 다른 서책을 두지 않은 채, 계획하기를 지금부터 시작하여 10여 년을 기한으로 세상 사람들과의 교제도 끊고 대문을 닫아걸고 들어앉아 공부를 하여 고인들이 학문을 닦던 방법을 만에 하나라도 엿볼 수 있기를 바라는 이것이 진실로 저의 지극한 소원입니다. 그러나 대학의 극공(極功)은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에 있으니, 왕조의 체제를 도모하고 나라의 논의를 결정하고 백성을 기르고 국가의 대업을 세우는 일은 진실로 이 책 밖에 있지 않을 것입니다. 진실로 노둔한 저를 채찍질하고 갈고 닦아서 강구하기를 오래도록 한다면, 이미 협소한 재주를 이를 통해 조금 넓힐 수 있을 것이며 이미 제한된 역량을 이를 통해 조금 확장할 수 있을 것이니, 그렇게 한다면 거의 족하가 권면하신 것에 부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족하께서는 온축한 것을 베풀 수 있는 때를 먼저 얻어서 저로 하여금 길이 개탄하지 않을 수 있게 해 주시면 저로서는 참으로 다행이겠습니다. 서로 부탁하는 것이 이미 두터워서 외람되게 여기까지 말씀드리게 되었습니다. 천 리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인편(人便)을 구할 수 없어서 3년을 지낸 뒤에야 비로소 답장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나무라지 말아주시기를 간절하게 바랍니다. 이만 줄입니다.
원서
答蔡上舍書
去春戾洛 得李洛詹所傳足下甲寅九月辱賜書 驚喜拜讀 首尾千百餘言 下上今古 評騭諸家 其論經術文章處 議論圓滑 如轉圜於千仞之坂 文勢澎漾 如注源於萬里之河 深有慨乎今之士子 以經術文章歧作兩塗 而至於謨王體斷國論牧黎元建大業之工 則自畫而不講者 此果士子之公患 而足下之言的中時病矣 然講之欲其施之也 夫材器力量 足以有用 然後可以施之 不然徒講而已 彼自畫而不講者 亦已自量矣 如足下材器碩博力量宏厚 而體之以經術 飾之以文章 進而用於朝著 則謨王體斷國論牧黎元建大業之工 可展其所蘊而不負其所講矣 猶且伏於林下 戢景葆采 飯一盂蔬一盤 揚之貧未逐 韓之窮未送 而蕭然作盛世之一司馬 則未得其施之之時者也 此亦吾所以深慨者也 僕無足與議於此 而足下迺於千里之遠 不料其材器力量而以此勉之 則殆不近於強聾者以審鍾呂之音 責瞽者以辨文采之美哉 僕若不布露其情實 而若有以當之者 是欺足下也 足下豈敢欺乎 僕材本薄惡 生長僻陋 旣無擩染於賢師 又乏規益於強輔 未闖乎經術之閫域 徑入於功令之窠窟 篆刻藻華 取靑媲白 角於場屋之間 而所謂謨王體斷國論牧黎元建大業之工 則果自量而不講矣 至於柳蘇之文 或有汎覽之日 而其奧處不能窺一斑 足下迺謂筋髓乎柳蘇 則足下之言過矣 蓋刮皮膚者亦希耳 古人有言曰 伶倫之於音 扁鵲之於醫 造父之於御 由基之於射 裨竈之於占 秋之於奕 遼(僚)之於丸 彼皆以天縱之智 加之以專一之學 而迺得其解 矧乎文章之難 若可倍蓰於此數技 而柳與蘇尤得其解者 季葉澆漓 才不及古人萬萬 而兼乏專一之學者 遽得其筋髓哉 旣不可得 乃回轅復路 拾濂閩之緖餘 嘗洛建之糟粕 黜新奇就冷淡 貶鬧熱務平易 一部大學之外 案無他書 計自今伊始 限十許年 息交絶遊 杜門斂膝 庶幾窺得萬一於古人爲學之方 是固至願 而大學極功 在乎治平 則謨王體斷國論牧黎元建大業之工 固不外乎是書 苟能策蹇磨鈍 講貫日久 則旣狹之材器 以是少寬 旣局之力量 以是稍廣 庶可副足下之所勉 而足下先得其施之之日 不使僕永有所慨也 幸甚幸甚 相屬旣厚 猥屑至此 千里無便 越三年始得報答 不罪不罪 不宣
去春戾洛 得李洛詹所傳足下甲寅九月辱賜書 驚喜拜讀 首尾千百餘言 下上今古 評騭諸家 其論經術文章處 議論圓滑 如轉圜於千仞之坂 文勢澎漾 如注源於萬里之河 深有慨乎今之士子 以經術文章歧作兩塗 而至於謨王體斷國論牧黎元建大業之工 則自畫而不講者 此果士子之公患 而足下之言的中時病矣 然講之欲其施之也 夫材器力量 足以有用 然後可以施之 不然徒講而已 彼自畫而不講者 亦已自量矣 如足下材器碩博力量宏厚 而體之以經術 飾之以文章 進而用於朝著 則謨王體斷國論牧黎元建大業之工 可展其所蘊而不負其所講矣 猶且伏於林下 戢景葆采 飯一盂蔬一盤 揚之貧未逐 韓之窮未送 而蕭然作盛世之一司馬 則未得其施之之時者也 此亦吾所以深慨者也 僕無足與議於此 而足下迺於千里之遠 不料其材器力量而以此勉之 則殆不近於強聾者以審鍾呂之音 責瞽者以辨文采之美哉 僕若不布露其情實 而若有以當之者 是欺足下也 足下豈敢欺乎 僕材本薄惡 生長僻陋 旣無擩染於賢師 又乏規益於強輔 未闖乎經術之閫域 徑入於功令之窠窟 篆刻藻華 取靑媲白 角於場屋之間 而所謂謨王體斷國論牧黎元建大業之工 則果自量而不講矣 至於柳蘇之文 或有汎覽之日 而其奧處不能窺一斑 足下迺謂筋髓乎柳蘇 則足下之言過矣 蓋刮皮膚者亦希耳 古人有言曰 伶倫之於音 扁鵲之於醫 造父之於御 由基之於射 裨竈之於占 秋之於奕 遼(僚)之於丸 彼皆以天縱之智 加之以專一之學 而迺得其解 矧乎文章之難 若可倍蓰於此數技 而柳與蘇尤得其解者 季葉澆漓 才不及古人萬萬 而兼乏專一之學者 遽得其筋髓哉 旣不可得 乃回轅復路 拾濂閩之緖餘 嘗洛建之糟粕 黜新奇就冷淡 貶鬧熱務平易 一部大學之外 案無他書 計自今伊始 限十許年 息交絶遊 杜門斂膝 庶幾窺得萬一於古人爲學之方 是固至願 而大學極功 在乎治平 則謨王體斷國論牧黎元建大業之工 固不外乎是書 苟能策蹇磨鈍 講貫日久 則旣狹之材器 以是少寬 旣局之力量 以是稍廣 庶可副足下之所勉 而足下先得其施之之日 不使僕永有所慨也 幸甚幸甚 相屬旣厚 猥屑至此 千里無便 越三年始得報答 不罪不罪 不宣
소장정보
예도서예약
서서가에없는책 신고
보보존서고신청
캠캠퍼스대출
우우선정리신청
배자료배달신청
문문자발송
출청구기호출력
학소장학술지 원문서비스
등록번호 | 청구기호 | 소장처 | 도서상태 | 반납예정일 | 서비스 |
---|
북토크
자유롭게 책을 읽고
느낀점을 적어주세요
글쓰기
느낀점을 적어주세요
청구기호 브라우징
관련 인기대출 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