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장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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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1 | ▼a월고문고▼b조몽(경상남도 양산시, 부산대의학과 교수)▼c기증▼d2020.6.26.▲ | ||
546 | ▼a한국한자임▲ | ||
650 | 4 | ▼a고문서▲ | |
653 | ▼a간찰▼a월고문고▼a月皐6-63▲ | ||
700 | 1 | ▼a조성가, ▼d1824-1904▼e발신▲ | |
700 | 1 | ▼a기우만, ▼d1846-1916▼e수신▲ |
[簡札]
자료유형
국내고서
서명/책임사항
[簡札] / 趙性家 發信 ; 奇宇萬 受信
판사항
筆寫本
발행사항
[刊寫地未詳] : [刊寫者未詳] , 高宗 32(1895)
형태사항
1張 ; 23.4 x 117.5 cm
일반주기
行草書임
發信日: 1895년(고종 32) 1월 7일[인일(人日)]
탈초 및 해제 : 정석태(부산대학교 점필재연구소)
發信日: 1895년(고종 32) 1월 7일[인일(人日)]
탈초 및 해제 : 정석태(부산대학교 점필재연구소)
요약주기
이것은 월고(月皐) 조성가(趙性家, 1824∼1904, 字 直敎, 號 月皐, 本貫 咸安)가 동문(同門)의 벗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 1846∼1916, 字 會一, 號 松沙, 本貫 幸州)의 서찰을 받고 그에 답한 서찰이다. 1894년(고종31)의 동학농민봉기(東學農民蜂起)를 겪은 뒤의 근황을 듣고 그에 답하는 내용이다.
언어주기
한국한자임
주제(일반주제명)
청구기호
5-1
원문 등 관련정보
관련 파일
해제
이것은 월고(月皐) 조성가(趙性家, 1824∼1904, 字 直敎, 號 月皐, 本貫 咸安)가 동문(同門)의 벗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 1846∼1916, 字 會一, 號 松沙, 本貫 幸州)의 서찰을 받고 그에 답한 서찰이다. 1894년(고종31)의 동학농민봉기(東學農民蜂起)를 겪은 뒤의 근황을 듣고 그에 답하는 내용이다. 먼저 입부(立夫, 奇宰, 1854∼1921)가 섣달 말에 돌아가기 때문에 서찰 1통을 부치려고 했지만 끝내 길이 막혀서 발송하지 못했는데, 벗들에게 이끌려 30리 밖의 절[蘭若]에서 수세(守歲)를 하고는 새해 1월 6일에 집으로 돌아와서 지난 섣달 29일에 상대방이 보낸 서찰을 받고는 동학농민봉기(東學農民蜂起)가 환히 사라져서 주상(主上)의 위령(威靈)이 모든 곳에 미치게 되었음을 알게 되니 이것이 첫 번째 경하(慶賀)할 일이며, 또 입부(立夫)의 서찰을 대략 살펴봄에 난리를 피해 상대방에게 의지한 이들이 수백 가구(家口)에 이를 정도로 지극히 많아서 강동(江東)으로 고영(顧榮, ?∼312)과 하순(賀循, 260∼319)을 따라간 사람도 이보다 많다고 이르기에 부족하다고 하니 이것이 두 번째 경하할 일이며, 호남(湖南)과 영남(嶺南) 53개 고을 도약장(都約長)의 여망(輿望)을 받고 있다니 한결같이 어찌 이리도 장한 것인지, 선사(先師, 奇正鎭, 1798∼1879, 字 大中, 號 蘆沙, 本貫 幸州, 諡號 文簡)께서 훌륭한 손자를 두셨으니 이것이 세 번째 경하할 일이며, 대대로 청빈(淸貧)하였는데 흉년에도 그런대로 평안하다고 하니 이것이 네 번째 경하할 일이며, 온 가족이 면면이 모두 선(善)하니 이것이 다섯 번째 경하할 일이며, 신호(莘湖, 金祿休, 1827∼1899, 字 穉敬, 號 莘湖, 本貫 蔚山)는 매우 가까운 곳에 이르고 또 지주(砥柱)처럼 의지하여 잘못됨을 면하고 있으니 또한 경하할 일이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용강(龍岡, 奇弘衍, 1828∼1898)은 반드시 바로잡아 이끌어줄 필요는 없다고 한 것은 무슨 말인지, 말머리만 열어놓고 그 말을 끝맺지 않았으니 의혹됨이 몹시 심한데 서찰을 가지고 온 심부름꾼이 입부(立夫)에게 고하고는 곧바로 떠나가서 끝내 그에게 물어서 상세하게 알아볼 수 없다고 한 다음, 자신에 대해 말하고 있다. 자신의 근황은 섣달 말 입부(立夫) 편에 부친 서찰에 다 이야기하였는데 노쇠하고 추한 몰골은 난리(亂離)를 겪은 뒤로 하루하루 더욱 심해지고 있지만 집에 대단히 근심스러운 일이 없는 것이 일단 다행이라고 하고는, 호남(湖南)은 이미 안정되었고 영남(嶺南)도 또한 곧 슬픈 일 뒤에 기쁜 일이 있을 것이니 걱정할 문제는 아니지만, 북쪽의 소요(騷擾)가 걱정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서울의 소식은 끝내 정확한 말을 들을 수 없으니 칠실(漆室) 과부의 근심과 같은 자신의 부질없는 근심을 어느 겨를에 가련해 하겠느냐고 하였다. 입부(立夫)와 미중(美中)이 그곳에 갔다가 다시 이곳으로 온다고 하니 그 편에 계속 소식을 전해 주기를 깊이 바란다고 하였다. 다른 것은 입부(立夫)가 직접 말해 줄 것이므로 나머지는 하나하나 다 적지 못한다는 말로 서찰을 끝맺고 있다. 이 서찰은 을미년(乙未年, 1895, 고종32) 1월 7일[인일(人日)]에 발송하였다. 조성가의 월고집(月皐集) 권11에 「답기회일 을미(答奇會一 乙未)」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이것은 원본(原本)이고, 문집(文集)에 실린 것은 수록하는 과정에 내용 중 일부가 수정(修訂) 또는 산삭(刪削)되었다.
번역서
서두(書頭), 송사(松沙) / 본문(本文), 입부(立夫, 奇宰, 1854∼1921) 입부(立夫): 기재(奇宰, 1854∼1921)의 자이다.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 1846∼1916)의 족제(族弟)이다.
가 섣달 말에 돌아가기 때문에 서찰 1통을 부치려고 했지만 끝내 길이 막혀서 발송하지 못했습니다. 저 성가(性家)는 벗들에게 이끌려 30리 밖의 절[蘭若]에서 수세(守歲) 수세(守歲): 한해 중 마지막 날인 음력 섣달그믐날에 행하는 세시행사이다. 밤에 잠을 자면 눈썹이 센다고 하여 등불을 밝히고 밤을 새운다.
를 하고는 새해 1월 6일에 집으로 돌아와서 지난 섣달 29일에 그대가 보낸 서찰이 서안(書案)에 놓여 있어서 급히 펴서 빠르게 읽어보고는 놀라운 재앙[동학농민봉기(東學農民蜂起)]의 기운이 환하게 사라져서 주상(主上)의 위령(威靈)이 모든 곳에 미치게 되었음을 알게 되니 이것이 첫 번째 경하(慶賀)할 일입니다. 또 입부(立夫)의 서찰을 대략 살펴봄에 난리를 피해 그대에게 의지한 이들이 수백 가구(家口)에 이를 정도로 지극히 많아서 강동(江東)으로 고하(顧賀)를 따라간 강동(江東)으로 고하(顧賀)를 따른: 고하(顧賀)는 서진(西晉)과 동진(東晉) 때의 명사(名士) 고영(顧榮, ?∼312)과 하순(賀循, 260∼319)을 말하고, 강동(江東) 중국 장강(長江) 하류의 동부지방으로 지금의 강소성(江蘇省) 일대을 말한다. 동진(東晉) 원제(元帝)가 강동의 건업(建業)에 도읍을 정했을 때 강동 사람들이 처음에는 따르지 않았는데 왕도(王導, 276∼339)의 건의를 받아들여 고영을 군사(軍司)로, 하순을 오국내사(吳國內史)로 삼자 강동 사람들이 따랐다고 한다.《晉書 卷6 元帝紀, 卷68 顧榮列傳 및 賀循列傳》
사람도 이보다 많다고 이르기에 부족하다고 하니 이것이 두 번째 경하할 일입니다. 호남(湖南)과 영남(嶺南) 53개 고을 도약장(都約長) 도약장(都約長): 조선시대 고을 향약(鄕約)을 운영하는 최고책임자를 말한다. 도약정(都約正)이라고도 한다.
의 여망(輿望)을 받고 있다니 한결같이 어찌 이리도 장한 것인지, 선사(先師, 奇正鎭, 1798∼1879, 字 大中, 號 蘆沙, 本貫 幸州, 諡號 文簡)께서 훌륭한 손자를 두셨으니 이것이 세 번째 경하할 일입니다. 대대로 청빈(淸貧)하였는데 흉년에도 그런대로 평안하다고 하니 이것이 네 번째 경하할 일입니다. 온 가족이 면면이 모두 선(善)하니 이것이 다섯 번째 경하할 일입니다. 신호(莘湖, 金祿休, 1827∼1899, 字 穉敬, 號 莘湖, 本貫 蔚山)는 매우 가까운 곳에 이르고 또 지주(砥柱) 지주(砥柱): 중국 황하(黄河)의 거센 물살 가운데 우뚝이 서 있는 바위산이다. 혼탁한 세속에 휩쓸리지 않고 꿋꿋하게 자신의 절조(節操)를 지키는 군자(君子)에 비유된다.
처럼 의지하여 잘못됨을 면하고 있으니 또한 경하할 일입니다. 용강(龍岡, 奇弘衍, 1828∼1898) 용강(龍岡) : 기홍연(奇弘衍, 1828∼1898)의 호이다. 자는 경도(景道), 호는 용산(龍山)ㆍ용강(龍岡)ㆍ위류헌(渭柳軒), 본관은 행주(幸州)이다.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1798∼1879)의 문인(門人)이자 삼종질(三從姪)이다. 과거시험을 통한 출사(出仕)를 단념하고 학문 연구에 전념(專念)하였다. 저서로는 용산유고(龍山遺稿)가 있다.
은 반드시 바로잡아 이끌어줄 필요는 없다고 하였으니 이것은 무슨 말인지요? 말머리만 열어놓고 그 말을 끝맺지 않았으니 의혹됨이 너무 심합니다. 보내주신 서찰을 받음에 지난번 서찰을 가지고 온 심부름꾼이 입부(立夫)에게 고하고는 떠나가서 끝내 그에게 물어서 상세하게 알아볼 수 없었습니다. 저 성가(性家)가 세전(歲前)의 근황은 섣달 말에 입부(立夫) 편에 부친 서찰에 다 말씀드렸는데 노쇠하고 추한 몰골은 난리(亂離, 東學農民蜂起)를 겪은 뒤로 하루하루 더욱 심해지고 있습니다만 집에는 일단 대단히 근심스러운 일은 없습니다. 호남(湖南)은 이미 안정되었고 영남(嶺南)도 또한 선도후소(先咷後笑) 선도후소(先咷後笑): 먼저 울었다가 뒤에 웃는 일을 말한다. 슬픔 뒤에는 기쁨이 온다는 것이다.
하는 기쁨이 있겠지요? 그러나 북쪽의 소요(騷擾)는 이 얼마나 뜻밖의 큰 난리인지요. 서울의 소식은 끝내 정확한 말을 들을 수 없으니 칠실(漆室) 과부의 근심 칠실(漆室) 과부의 근심: 분수에 지나친 근심으로서 나랏일을 걱정하는 마음을 나타내는 겸사이다. 춘추시대 노(魯)나라 칠실(漆室)이란 읍(邑)에 과부가 자신이 시집가지 못하는 것은 걱정하지 않고 임금은 늙고 태자가 어린 것을 걱정하여 기둥에 기대어 울자, 이웃집 부인이 비웃으며 “이는 노나라 대부가 할 근심이니 그대가 무슨 상관인가?”라고 하였던 것에서 유래하였다. 《列女傳 卷3 漆室女》
을 어느 겨를에 가련해 하겠습니까. 입부(立夫)와 미중(美中) 미중(美中): 이광수(李光秀)의 자이다.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 1846∼1916)의 벗이다. 나머지는 미상.
은 갔다가 다시 온다고 합니다. 그 편에 계속 소식을 전해주기를 깊이 바라고 있습니다. 다른 것은 입부(立夫)가 직접 말해 줄 것입니다. 나머지는 하나하나 다 적지 못합니다. 잘 살펴주시기를 간절하게 바랍니다. / 착서(着署), 을미년(乙未年, 1895, 고종32) 1월 7일[인일(人日)]. 성가(性家) 배(拜).
가 섣달 말에 돌아가기 때문에 서찰 1통을 부치려고 했지만 끝내 길이 막혀서 발송하지 못했습니다. 저 성가(性家)는 벗들에게 이끌려 30리 밖의 절[蘭若]에서 수세(守歲) 수세(守歲): 한해 중 마지막 날인 음력 섣달그믐날에 행하는 세시행사이다. 밤에 잠을 자면 눈썹이 센다고 하여 등불을 밝히고 밤을 새운다.
를 하고는 새해 1월 6일에 집으로 돌아와서 지난 섣달 29일에 그대가 보낸 서찰이 서안(書案)에 놓여 있어서 급히 펴서 빠르게 읽어보고는 놀라운 재앙[동학농민봉기(東學農民蜂起)]의 기운이 환하게 사라져서 주상(主上)의 위령(威靈)이 모든 곳에 미치게 되었음을 알게 되니 이것이 첫 번째 경하(慶賀)할 일입니다. 또 입부(立夫)의 서찰을 대략 살펴봄에 난리를 피해 그대에게 의지한 이들이 수백 가구(家口)에 이를 정도로 지극히 많아서 강동(江東)으로 고하(顧賀)를 따라간 강동(江東)으로 고하(顧賀)를 따른: 고하(顧賀)는 서진(西晉)과 동진(東晉) 때의 명사(名士) 고영(顧榮, ?∼312)과 하순(賀循, 260∼319)을 말하고, 강동(江東) 중국 장강(長江) 하류의 동부지방으로 지금의 강소성(江蘇省) 일대을 말한다. 동진(東晉) 원제(元帝)가 강동의 건업(建業)에 도읍을 정했을 때 강동 사람들이 처음에는 따르지 않았는데 왕도(王導, 276∼339)의 건의를 받아들여 고영을 군사(軍司)로, 하순을 오국내사(吳國內史)로 삼자 강동 사람들이 따랐다고 한다.《晉書 卷6 元帝紀, 卷68 顧榮列傳 및 賀循列傳》
사람도 이보다 많다고 이르기에 부족하다고 하니 이것이 두 번째 경하할 일입니다. 호남(湖南)과 영남(嶺南) 53개 고을 도약장(都約長) 도약장(都約長): 조선시대 고을 향약(鄕約)을 운영하는 최고책임자를 말한다. 도약정(都約正)이라고도 한다.
의 여망(輿望)을 받고 있다니 한결같이 어찌 이리도 장한 것인지, 선사(先師, 奇正鎭, 1798∼1879, 字 大中, 號 蘆沙, 本貫 幸州, 諡號 文簡)께서 훌륭한 손자를 두셨으니 이것이 세 번째 경하할 일입니다. 대대로 청빈(淸貧)하였는데 흉년에도 그런대로 평안하다고 하니 이것이 네 번째 경하할 일입니다. 온 가족이 면면이 모두 선(善)하니 이것이 다섯 번째 경하할 일입니다. 신호(莘湖, 金祿休, 1827∼1899, 字 穉敬, 號 莘湖, 本貫 蔚山)는 매우 가까운 곳에 이르고 또 지주(砥柱) 지주(砥柱): 중국 황하(黄河)의 거센 물살 가운데 우뚝이 서 있는 바위산이다. 혼탁한 세속에 휩쓸리지 않고 꿋꿋하게 자신의 절조(節操)를 지키는 군자(君子)에 비유된다.
처럼 의지하여 잘못됨을 면하고 있으니 또한 경하할 일입니다. 용강(龍岡, 奇弘衍, 1828∼1898) 용강(龍岡) : 기홍연(奇弘衍, 1828∼1898)의 호이다. 자는 경도(景道), 호는 용산(龍山)ㆍ용강(龍岡)ㆍ위류헌(渭柳軒), 본관은 행주(幸州)이다.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1798∼1879)의 문인(門人)이자 삼종질(三從姪)이다. 과거시험을 통한 출사(出仕)를 단념하고 학문 연구에 전념(專念)하였다. 저서로는 용산유고(龍山遺稿)가 있다.
은 반드시 바로잡아 이끌어줄 필요는 없다고 하였으니 이것은 무슨 말인지요? 말머리만 열어놓고 그 말을 끝맺지 않았으니 의혹됨이 너무 심합니다. 보내주신 서찰을 받음에 지난번 서찰을 가지고 온 심부름꾼이 입부(立夫)에게 고하고는 떠나가서 끝내 그에게 물어서 상세하게 알아볼 수 없었습니다. 저 성가(性家)가 세전(歲前)의 근황은 섣달 말에 입부(立夫) 편에 부친 서찰에 다 말씀드렸는데 노쇠하고 추한 몰골은 난리(亂離, 東學農民蜂起)를 겪은 뒤로 하루하루 더욱 심해지고 있습니다만 집에는 일단 대단히 근심스러운 일은 없습니다. 호남(湖南)은 이미 안정되었고 영남(嶺南)도 또한 선도후소(先咷後笑) 선도후소(先咷後笑): 먼저 울었다가 뒤에 웃는 일을 말한다. 슬픔 뒤에는 기쁨이 온다는 것이다.
하는 기쁨이 있겠지요? 그러나 북쪽의 소요(騷擾)는 이 얼마나 뜻밖의 큰 난리인지요. 서울의 소식은 끝내 정확한 말을 들을 수 없으니 칠실(漆室) 과부의 근심 칠실(漆室) 과부의 근심: 분수에 지나친 근심으로서 나랏일을 걱정하는 마음을 나타내는 겸사이다. 춘추시대 노(魯)나라 칠실(漆室)이란 읍(邑)에 과부가 자신이 시집가지 못하는 것은 걱정하지 않고 임금은 늙고 태자가 어린 것을 걱정하여 기둥에 기대어 울자, 이웃집 부인이 비웃으며 “이는 노나라 대부가 할 근심이니 그대가 무슨 상관인가?”라고 하였던 것에서 유래하였다. 《列女傳 卷3 漆室女》
을 어느 겨를에 가련해 하겠습니까. 입부(立夫)와 미중(美中) 미중(美中): 이광수(李光秀)의 자이다.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 1846∼1916)의 벗이다. 나머지는 미상.
은 갔다가 다시 온다고 합니다. 그 편에 계속 소식을 전해주기를 깊이 바라고 있습니다. 다른 것은 입부(立夫)가 직접 말해 줄 것입니다. 나머지는 하나하나 다 적지 못합니다. 잘 살펴주시기를 간절하게 바랍니다. / 착서(着署), 을미년(乙未年, 1895, 고종32) 1월 7일[인일(人日)]. 성가(性家) 배(拜).
원서
松沙
立夫臘尾曰歸 故付一緘 竟以道枳未發 家也牽於知舊 守歲於三十里外蘭若 上六還棲 巍函之去臘卄九所發閣案 急坼疾讀 噩祲晛消 王靈曁迄 第一賀也 且偸窺立夫書 避亂而依歸者 至於數百家 夥頤極矣 江東顧賀不足多也 第二賀也 五十三官都約長輿望 一何壯哉 先師有孫矣 第三賀也 奕葉淸貧 險歲稍康之云 第四賀也 渾家面面戩糓 第五賀也 莘湖至於近親 亦倚砥柱而免緇瑕 亦偸賀也 龍岡不必提撕 是何說也 開端而不竟其說 訝惑滋甚 承緘前來价謁立夫去 未暇憑其口從當詳聞矣 家也之歲前經歷 悉於臘尾書 而癃朽醜殼 經亂后 朘削日甚一日 但家間姑無大段皺眉事 湖旣底平 嶺亦有先咷後笑之欣耶 然北騷是何等天來般大亂 京耗終未得的聞 漆嫠之緯 何暇恤也 立夫美中 去而更來云 伊便嗣音 深竚深竚 他在那友口 不乙不乙 統希勻灼
乙未人日
性家 拜
立夫臘尾曰歸 故付一緘 竟以道枳未發 家也牽於知舊 守歲於三十里外蘭若 上六還棲 巍函之去臘卄九所發閣案 急坼疾讀 噩祲晛消 王靈曁迄 第一賀也 且偸窺立夫書 避亂而依歸者 至於數百家 夥頤極矣 江東顧賀不足多也 第二賀也 五十三官都約長輿望 一何壯哉 先師有孫矣 第三賀也 奕葉淸貧 險歲稍康之云 第四賀也 渾家面面戩糓 第五賀也 莘湖至於近親 亦倚砥柱而免緇瑕 亦偸賀也 龍岡不必提撕 是何說也 開端而不竟其說 訝惑滋甚 承緘前來价謁立夫去 未暇憑其口從當詳聞矣 家也之歲前經歷 悉於臘尾書 而癃朽醜殼 經亂后 朘削日甚一日 但家間姑無大段皺眉事 湖旣底平 嶺亦有先咷後笑之欣耶 然北騷是何等天來般大亂 京耗終未得的聞 漆嫠之緯 何暇恤也 立夫美中 去而更來云 伊便嗣音 深竚深竚 他在那友口 不乙不乙 統希勻灼
乙未人日
性家 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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