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장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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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0 | 4 | ▼a이것은 월고(月皐) 조성가(趙性家, 1824∼1904, 字 直敎, 號 月皐, 本貫 咸安)가 동문(同門)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 1846∼1916, 字 會一, 號 松沙, 本貫 幸州)의 서찰에 답한 서찰이다. 먼저 심부름꾼이 가지고 온 서찰이 높은 재를 넘어오니 학(鶴)이 날아와서 신선(神仙)의 말을 전해 준 것과 다름이 없었기에 송광사(松廣寺)에서 이별한 회포는 햇볕 앞에서 눈이 녹듯 사라져버렸다고 한 다음, 이어서 황산(凰山)의 선사(先師, 奇正鎭, 1798∼1879, 字 大中, 號 蘆沙, 本貫 幸州, 諡號 文簡) 묘소(墓所)에 신도비(神道碑)를 세우는 일에 대해 언급하였다.▲ | |
541 | ▼a월고문고▼b조몽(경상남도 양산시, 부산대의학과 교수)▼c기증▼d2020.6.26.▲ | ||
546 | ▼a한국한자임▲ | ||
650 | 4 | ▼a고문서▲ | |
653 | ▼a간찰▼a월고문고▼a月皐6-27▲ | ||
700 | 1 | ▼a조성가, ▼d1824-1904▼e발신▲ | |
700 | 1 | ▼a기우만, ▼d1846-1916▼e수신▲ |
[簡札]
자료유형
국내고서
서명/책임사항
[簡札] / 趙性家 發信 ; 奇宇萬 受信
판사항
筆寫本
발행사항
[刊寫地未詳] : [刊寫者未詳] , 高宗 29(1892)
형태사항
1張 ; 29.0 x 41.4 cm
일반주기
行草書임
發信日: 1892년(고종 29) 11월 초4일
탈초 및 해제 : 정석태(부산대학교 점필재연구소)
發信日: 1892년(고종 29) 11월 초4일
탈초 및 해제 : 정석태(부산대학교 점필재연구소)
요약주기
이것은 월고(月皐) 조성가(趙性家, 1824∼1904, 字 直敎, 號 月皐, 本貫 咸安)가 동문(同門)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 1846∼1916, 字 會一, 號 松沙, 本貫 幸州)의 서찰에 답한 서찰이다. 먼저 심부름꾼이 가지고 온 서찰이 높은 재를 넘어오니 학(鶴)이 날아와서 신선(神仙)의 말을 전해 준 것과 다름이 없었기에 송광사(松廣寺)에서 이별한 회포는 햇볕 앞에서 눈이 녹듯 사라져버렸다고 한 다음, 이어서 황산(凰山)의 선사(先師, 奇正鎭, 1798∼1879, 字 大中, 號 蘆沙, 本貫 幸州, 諡號 文簡) 묘소(墓所)에 신도비(神道碑)를 세우는 일에 대해 언급하였다.
언어주기
한국한자임
주제(일반주제명)
청구기호
5-1
원문 등 관련정보
관련 파일
해제
이것은 월고(月皐) 조성가(趙性家, 1824∼1904, 字 直敎, 號 月皐, 本貫 咸安)가 동문(同門)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 1846∼1916, 字 會一, 號 松沙, 本貫 幸州)의 서찰에 답한 서찰이다. 먼저 심부름꾼이 가지고 온 서찰이 높은 재를 넘어오니 학(鶴)이 날아와서 신선(神仙)의 말을 전해 준 것과 다름이 없었기에 송광사(松廣寺)에서 이별한 회포는 햇볕 앞에서 눈이 녹듯 사라져버렸다고 한 다음, 이어서 황산(凰山)의 선사(先師, 奇正鎭, 1798∼1879, 字 大中, 號 蘆沙, 本貫 幸州, 諡號 文簡) 묘소(墓所)에 신도비(神道碑)를 세우는 일에 대해 언급하였다. 선사의 묘소에 신도비를 세우는 문제를 이제야 논의하게 된 것은 늦어도 한참 늦고 또 오래 지체된 것이라고 하고는, 문하(門下)의 제자들 외에도 사대부(士大夫)들로서 호응한 사람들이 오히려 많았던 것은 아름다움 덕(德)을 좋아하는 본성(本性)을 가진 인간은 모두 한마음인 것을 알 수 있겠다고 한 다음, 이어서 이것은 입으로만이 아니라 진정 마음 깊이 좋아해서 이러한 논의가 있게 된 것이니 논의를 낸 당일이 바로 일을 성사시킬 당일일 것이므로 노쇠한 자신으로서는 소원하던 일이 이루어진 것이라서 참으로 몹시 다행스럽다고 하였다. 그리고 자화(子和, 李承鶴, 1857∼1928, 字 子和, 號 靑皋, 本貫 全州)의 혼인(婚姻) 문제, 인가(人家)에서 균(菌)이 생겨 대동미(大同米)가 축난 문제 등을 언급하고는 자신의 근황에 대해 언급하였다. 자신은 계절이 바뀔 때마다 노쇠(老衰)함이 더하는 것은 이치가 그러한 것이므로 어찌할 수 없지만 집안에 하나도 좋은 일이 없어서 답답하다고 한 다음, 이어서 1891년(고종28) 목활자(木活字)로 초간(初刊)한 선사의 저술 답문유편(答問類編)에 대해 지금 한창 교정(校正)에 마음을 쓰고 있지만, 거친 안목에다 건망증 때문에 장차 근본(根本)은 버리고 말단(末端)만을 취하여 매독환주(買櫝還珠)하는 것을 면치 못하고 말까 두렵다고 하였다. 또 자신의 막내아우 계호(季豪)가 당한 일은 유감스러운 것인데 계호가 반드시 말할 것이라고 하고는, 정암(靜菴, 趙光祖, 1482∼1519, 字 孝直, 號 靜菴, 本貫 漢陽, 諡號 文正), 고봉(高峯, 奇大升, 1527∼1572, 字 明彦, 號 高峯, 本貫 幸州, 諡號 文憲), 사암(思菴, 朴淳, 1523∼1589, 字 和叔, 號 思菴, 本貫 忠州, 諡號 文忠) 세 분 선생의 문집 정암집(靜菴集), 고봉집(高峯集), 사암집(思菴集)을 함께 구할 길이 있는지 물었다. 책값은 보낼만한 인편(人便)이 있을 것 같으니 어디서 구한 것이든 상관없으니 구해서 보내달라고 하였다. 끝으로 남명집(南冥集)[남명(南冥) 조식(曺植, 1501∼1572)의 문집]을 중간(重刊)하면서 서인(西人)이든 남인(南人)이든 가리지 말고 교정(校正)의 소임을 맡기자고 하여 자신은 일단 간소(刊所) 회중(會中)에게 상대방과 신호(莘湖, 金祿休, 1827∼1899, 字 穉敬, 號 莘湖, 本貫 蔚山) 두 사람을 추천했는데, 그대 집의 심부름꾼이 돌아와서 하는 말이 거듭 내가 부탁하는 말을 어기기는 어렵지만 다시 이름이 오르는 것은 꺼려진다고 하여 자신의 속마음이 상대방에게 통하지 못한 것이 몹시 섭섭하다고 하였다. 오직 바라기는 학문을 힘씀에 신명(神明)의 가호(加護)가 있기를 기원한다는 말로 끝을 맺었다. 이 서찰은 임진년(1892, 고종29) 11월 초4일에 발송하였다. 조성가의 월고집(月皐集) 권11에 「답기회일(答奇會一)」이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이것은 원본(原本)이고, 문집(文集)에 실린 것은 수록하는 과정에 내용 중 일부가 수정(修訂) 또는 산삭(刪削)되었다.
번역서
본문(本文), 심부름꾼이 가지고 온 서찰이 높은 재를 넘어오니 학(鶴)이 날아와서 신선(神仙)의 말을 전해준 것과 다름이 없었기에 송광사(松廣寺)에서 이별한 회포는 햇볕 앞에서 눈이 녹듯 사라져버렸습니다. 황산(凰山) 황산(凰山): 전라남도 장성군 동화면 남산리 황산마을을 말한다. 이곳에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의 묘소(墓所)가 있었다.
에 선사(先師, 奇正鎭)의 신도비(神道碑)를 세우는 일은 이제야 논의가 일어나니 늦어도 한참 늦고 또 오래되어서야 가능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문하(門下)의 제자들 외에도 사대부(士大夫)들로서 호응한 사람들이 오히려 많았으니 아름다움 덕(德)을 좋아하는 선한 본성(本性)을 가진 인간으로서 모두 한마음인 것을 볼 수 있었는데, 하물며 직접 가르침을 받은 문하의 제자들이야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마음으로 좋아하는 것이 입으로 말하는 것만 아니라 마음으로 진정 좋아하고 있으니 논의를 낸 당일이 바로 일을 성사시키는 날일 것이므로 노쇠한 저의 바람은 이루어진 것이니 참으로 몹시 크게 다행스럽습니다. 자화(子和 李承鶴, 1857∼1928, 字 子和, 號 靑皋, 本貫 全州) 자화(子和): 이승학(李承鶴, 1857∼1928)의 자이다. 호는 청고(靑皋),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전라남도 담양군에서 석전(石田) 이최선(李最善, 1825∼1883)의 아들로 태어났다. 부친과 함께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1798∼1879)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885년(고종22)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시해되자 분을 참지 못하고 격문을 전국에 보내어 의병을 일으키고, 의진(義陣)을 광주로 옮겨 서울로 진격하려 하였으나 조정에서 회유하자 그 뜻을 접었다. 저서로는 청고집(靑皋集)이 있다.
의 혼인(婚姻)은 학문(學問)의 연원(淵源)과 가부(葭莩) 가부(葭莩): 혼인을 통해 인척(姻戚)이 된 관계를 말한다. 가부는 원래 갈대 속의 얇은 막으로 친척의 관계가 먼 것을 뜻하는 말이었다가 후대에 혼인으로 인척이 된 관계를 뜻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한서(漢書) 권53 「중산정왕전(中山靖王傳)」에 “가부(葭莩)는 친(親)이 있는 것도 아니다.”라고 하였는데, 그 주(註)에 “가(葭)는 갈대이고, 부(莩)는 갈대 대롱 속에 있는 지극히 엷은 흰 막이다.”라고 하였다.
의 세의(世誼)에서 본다면 고도(古道)를 지금에 행한 것이라고 할 수 있으니, 참으로 대단히 잘 된 일입니다. 균(菌)이 생기는 것은 인가(人家)에서 혹 이와 같은 때가 있으니 대동미(大同米)가 축난 것을 어찌하겠습니까. 저 성가(性家)의 노쇠한 모습이 가을보다 겨울이 더한 것이야 이치가 그러한 것이니 어찌 가련해 여길 것이겠습니다. 집안에 하나도 좋은 일이 없는 것이 답답할 뿐입니다. 선사(先師)의 저술 답문유편(答問類編) 답문유편(答問類編):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1798∼1879)이 제자들과 학문적인 문제로 문답한 내용을 엮은 책이다. 15권 6책이다. 1891년(고종28) 목활자(木活字)로 초간(初刊)하였고, 1902년(광무6) 목판본(木板本)으로 중간(重刊)하였다.
에 대해 지금 한창 마음을 쓰고 있지만, 거친 안목에다 건망증 때문에 장차 근본(根本)은 버리고 말단(末端)만을 취하여 매독환주(買櫝還珠) 매독환주(買櫝還珠): 근본(根本)을 모르고 말단(末端)만 좇는 것을 말한다. 춘추시대 초(楚)나라 사람이 옥으로 꾸미고 향기를 쐰 목란(木蘭) 상자에 보옥(寶玉)을 담아서 정(鄭)나라에 가서 팔자 어떤 정나라 사람이 상자만 사고 보옥을 돌려주었다는 고사에서 유래하였다. 《韓非子 外儲》
하는 것을 면치 못하고 말까 두렵습니다. 제 막내아우 계호(季豪) 계호(季豪): 조성가(趙性家)의 막내아우 조성주(趙性宙, 1841∼1918)의 자이다. 호는 월산(月山)이다.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1798∼1879)의 문인이다.
가 당한 일은 유감스러운 것인데, 계호가 반드시 말을 할 것입니다. 정암(靜菴, 趙光祖), 고봉(高峯, 奇大升), 사암(思菴, 朴淳, 1523∼1589) 세 분 선생의 문집 정암집(靜菴集), 고봉집(高峯集), 사암집(思菴集)을 함께 구할 길이 있는지요? 그리고 책값은 보낼만한 인편(人便)이 있을 것 같으니, 계주(薊州) 계주(薊州)의 버들이든 당주(唐州)의 버들이든: 미상.
의 버들이든 당주(唐州)의 버들이든 상관없으니 인편에 따라 잊지 말고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남명집(南冥集)을 지금 중간(重刊)하면서 교정(校正)의 소임을 맡을 사람은 서인(西人)이든 남인(南人)이든 가리지 말자고 하여 저는 일단 간소(刊所)의 회중(會中)에게 그대와 신호(莘湖, 金祿休) 두 분을 부표(付標)해서 보냈는데,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지요? 그대 집의 심부름꾼이 돌아와서 하는 말이 거듭 내가 부탁하는 말을 어기기 어렵지만 다시 이름이 오르는 것은 꺼려진다고 하니, 섭섭한 마음에 마침 신음을 하면서 어리석고 속된 생각을 통하지 못한 것을 한스러워하고 있습니다. 오직 바라기는 학문(學問)을 힘씀에 신명(神明)의 가호(加護)가 있기를 기원합니다. / 착서(着署), 임진년(1892, 고종29) 11월 초4일[동지 그 이튿날].
에 선사(先師, 奇正鎭)의 신도비(神道碑)를 세우는 일은 이제야 논의가 일어나니 늦어도 한참 늦고 또 오래되어서야 가능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문하(門下)의 제자들 외에도 사대부(士大夫)들로서 호응한 사람들이 오히려 많았으니 아름다움 덕(德)을 좋아하는 선한 본성(本性)을 가진 인간으로서 모두 한마음인 것을 볼 수 있었는데, 하물며 직접 가르침을 받은 문하의 제자들이야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마음으로 좋아하는 것이 입으로 말하는 것만 아니라 마음으로 진정 좋아하고 있으니 논의를 낸 당일이 바로 일을 성사시키는 날일 것이므로 노쇠한 저의 바람은 이루어진 것이니 참으로 몹시 크게 다행스럽습니다. 자화(子和 李承鶴, 1857∼1928, 字 子和, 號 靑皋, 本貫 全州) 자화(子和): 이승학(李承鶴, 1857∼1928)의 자이다. 호는 청고(靑皋),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전라남도 담양군에서 석전(石田) 이최선(李最善, 1825∼1883)의 아들로 태어났다. 부친과 함께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1798∼1879)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885년(고종22)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시해되자 분을 참지 못하고 격문을 전국에 보내어 의병을 일으키고, 의진(義陣)을 광주로 옮겨 서울로 진격하려 하였으나 조정에서 회유하자 그 뜻을 접었다. 저서로는 청고집(靑皋集)이 있다.
의 혼인(婚姻)은 학문(學問)의 연원(淵源)과 가부(葭莩) 가부(葭莩): 혼인을 통해 인척(姻戚)이 된 관계를 말한다. 가부는 원래 갈대 속의 얇은 막으로 친척의 관계가 먼 것을 뜻하는 말이었다가 후대에 혼인으로 인척이 된 관계를 뜻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한서(漢書) 권53 「중산정왕전(中山靖王傳)」에 “가부(葭莩)는 친(親)이 있는 것도 아니다.”라고 하였는데, 그 주(註)에 “가(葭)는 갈대이고, 부(莩)는 갈대 대롱 속에 있는 지극히 엷은 흰 막이다.”라고 하였다.
의 세의(世誼)에서 본다면 고도(古道)를 지금에 행한 것이라고 할 수 있으니, 참으로 대단히 잘 된 일입니다. 균(菌)이 생기는 것은 인가(人家)에서 혹 이와 같은 때가 있으니 대동미(大同米)가 축난 것을 어찌하겠습니까. 저 성가(性家)의 노쇠한 모습이 가을보다 겨울이 더한 것이야 이치가 그러한 것이니 어찌 가련해 여길 것이겠습니다. 집안에 하나도 좋은 일이 없는 것이 답답할 뿐입니다. 선사(先師)의 저술 답문유편(答問類編) 답문유편(答問類編):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1798∼1879)이 제자들과 학문적인 문제로 문답한 내용을 엮은 책이다. 15권 6책이다. 1891년(고종28) 목활자(木活字)로 초간(初刊)하였고, 1902년(광무6) 목판본(木板本)으로 중간(重刊)하였다.
에 대해 지금 한창 마음을 쓰고 있지만, 거친 안목에다 건망증 때문에 장차 근본(根本)은 버리고 말단(末端)만을 취하여 매독환주(買櫝還珠) 매독환주(買櫝還珠): 근본(根本)을 모르고 말단(末端)만 좇는 것을 말한다. 춘추시대 초(楚)나라 사람이 옥으로 꾸미고 향기를 쐰 목란(木蘭) 상자에 보옥(寶玉)을 담아서 정(鄭)나라에 가서 팔자 어떤 정나라 사람이 상자만 사고 보옥을 돌려주었다는 고사에서 유래하였다. 《韓非子 外儲》
하는 것을 면치 못하고 말까 두렵습니다. 제 막내아우 계호(季豪) 계호(季豪): 조성가(趙性家)의 막내아우 조성주(趙性宙, 1841∼1918)의 자이다. 호는 월산(月山)이다.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1798∼1879)의 문인이다.
가 당한 일은 유감스러운 것인데, 계호가 반드시 말을 할 것입니다. 정암(靜菴, 趙光祖), 고봉(高峯, 奇大升), 사암(思菴, 朴淳, 1523∼1589) 세 분 선생의 문집 정암집(靜菴集), 고봉집(高峯集), 사암집(思菴集)을 함께 구할 길이 있는지요? 그리고 책값은 보낼만한 인편(人便)이 있을 것 같으니, 계주(薊州) 계주(薊州)의 버들이든 당주(唐州)의 버들이든: 미상.
의 버들이든 당주(唐州)의 버들이든 상관없으니 인편에 따라 잊지 말고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남명집(南冥集)을 지금 중간(重刊)하면서 교정(校正)의 소임을 맡을 사람은 서인(西人)이든 남인(南人)이든 가리지 말자고 하여 저는 일단 간소(刊所)의 회중(會中)에게 그대와 신호(莘湖, 金祿休) 두 분을 부표(付標)해서 보냈는데,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지요? 그대 집의 심부름꾼이 돌아와서 하는 말이 거듭 내가 부탁하는 말을 어기기 어렵지만 다시 이름이 오르는 것은 꺼려진다고 하니, 섭섭한 마음에 마침 신음을 하면서 어리석고 속된 생각을 통하지 못한 것을 한스러워하고 있습니다. 오직 바라기는 학문(學問)을 힘씀에 신명(神明)의 가호(加護)가 있기를 기원합니다. / 착서(着署), 임진년(1892, 고종29) 11월 초4일[동지 그 이튿날].
원서
伻書踰嶺 何異鶴傳仙語 松廣別懷 歸於雪晛 凰山螭龜 待今日而發論 可謂遲之遲而又久 及門外章甫尙多應之者 可見彝好攸同 况躬親摳趨者乎 心好不啻口出 論發之日 卽事成之日 衰朽者之志願遂矣 大幸大幸 子和結姻 淵源葭莩 可謂古道行於今 大善大善 菌化人家或有如此之時 穀縮大同奈何 性家頹塌之容 冬不如秋 理也奚恤 家間無一善狀耳 答問類編方留念 而麤眼兼健忘 將不免買櫝而止耳 季豪所遭遺憾 豪必言之矣 靜庵思庵高峯三先生集 幷有求得之路否 冊價似若送傳之便矣 薊柳唐柳 隨便勿忘 南冥集方營重刊 而校正之任 不擇西南 不佞姑請于會中以座右及莘湖付標 而於盛意何 門伻人回語 重違盛囑憚再入 缺然適殿屎 未能通忞哇思 惟希懋學加護
壬辰南至翼
壬辰南至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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