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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감 공모전 우수작
제목: 존재와 무
학과: 철학과, 이름: 백*원, 선정연도: 2011
내용: 컴퓨터를 호주머니에 넣고 다닐 수 있게 되었을 만큼 기술 문명이 고도화된 오늘날 타인과 관계를 맺는 일도 상당히 복잡하고 다양해졌다. 사람들은 트위터로 실시간으로 자신의 상황을 알리기도 하고, 인터넷 채팅을 통해 비대면적인 의사소통을 하며, 심지어 얼굴을 알지 못하는 낯선 타인과도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곤 한다. 타인과 의사소통을 하는 방식이 앞 시대와 비교하여 굉장히 다채로워지고 그 양에 있어서도 폭발적으로 증가하였지만, 결국은 타인과 나 사이의 '관계'에 관한 문제이다.사르트르에 의하면 인간존재는 사물과 마찬가지로 우연한 존재이다. 다만 사물 과 구별되는 것이 있다면 '의식'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의식이 없는 사물을 ' 즉자존재'라 하고, 의식이 있는 인간 존재를 '대자존재'라 한다. 의식은 그 자체로 존재할 수 없다. 의식은 항상 '무엇에 대한 형태로 존재한다. 따라서 인간은 항상 무엇인가를 지향하는 존재이다. 그런데 나와 마찬가지로 의식을 가진 대자존재가 등장하는데, 그것이 바로 타인, 즉 '대타존재'의 출현이다. 우연한 타인의 존재는 내 실존을 붕괴시키고, 내 세계의 필연적인 몰락을 가져다준다. 타인은 시선으로 나를 끝없이 판단하고 부정하며 변화시키는 존재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나 또한 타인을 바라볼 수 있기에 타인을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 대자존재와 대타존재는 서로가 서로의 주체-타인, 객체-타인의 관계를 번갈아가면서 스스로를 확립해나가 는 존재인 것이다.
인간은 의식하고 자유로이 선택하고 행동할 수 있기에 즉자 존재가 될 수 없는 데도 타자의 시선은 나를 사물처럼 고정시킬 위험이 있다. 타자의 시선은 나를 규정하고 판단하므로 나의 존재는 결국 타자에게 달려 있는 것이며, 타자의 시선은 내게 지옥이 되는 것이다. 사르트르에 의하면 나에게 있어 타자는 나와 대립하고 끊임없이 투쟁하여야 할 대상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나와 타자와의 관계의 한 종류인 남녀 간의 사랑은 어떠한가? 사르트르 식이라면 사랑도 불가능한 것이 되어버리는가? 두 사람은 결국 화해할 수 없는 존재인가? 이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문제가 바로 이러한 것이다. | 오늘날 현대사회에서는 더 이상 여성을 남성의 종속물로 보지 않는다. 여성은 독립적인 존재이다. 두 남녀에게는 각자의 세계가 있고 대등한 관계에 위치한다. 따라서 두 남녀 사이의 관계는 대자존재와 대타존재의 관계에 놓인다. 이 글에서 는 사르트르의 존재론적 관점에서 관계 중에서도 '남녀 간의 사랑'을 고찰해보고 자 하며, 구체적으로 영화 (19882) 에 나타난 주인공 에드워드 와 에스페라의 사랑을 통해 분석해보고자 한다.
사르트르의 존재론과 사랑
타자는 나를 제멋대로 규정짓는 존재인 동시에 나의 존재를 확립해주는 존재이기도 하다. 사르트르의 표현을 빌자면 타자는 나라는 하는 하나의 존재를 '거기에 존재하게 하는 자이다. 그런데 타자는 내 존재 근거를 부여해주기는 하지만, 내 존재의 책임자는 아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타인의 자유에 달려 있다. 따라서 스스로는 존재 근거를 확립할 수 없는 대자존재인 나는 타자를 요구하게 된다. 이에 대해 사르트르는 “나 자신을 되찾고자 하는 나의 시도는 근본적으로 타인을 다시 끌어들이려고 하는 시도이다."라고 말했다. 이를 사랑에서 이야기해보자. 서로 사 랑하는 두 남녀는 누구보다도 서로의 가치를 인정해준다. 나를 알아봐주는 상대에 대해서 사랑은 더욱 깊어질 수밖에 없다.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고 원하면서 스스 로의 존재에 대해 확신을 가진다. 따라서 두 사람은 이 사랑이 지속되길 원하고, 상대를 늘 자신의 곁에 두고 싶어 한다.
이러한 마음은 타자를 소유하고 싶어지게 한다. 그런데 이 대타존재에 대한 소유는 즉자존재에 대한 소유와는 다르다. 타자의 완전한 굴복은 나에 대한 타자의 사랑을 죽이게 된다. 즉 타자가 노예처럼 나에게 종속되면 나는 나의 존재 근거를 또다시 잃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사랑받는 자는 사랑하는 자의 자유를 요구한다. 내가 타인을 내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것은 '시선을 향하는 자-타인'으로서의 한 에서이다. 일반적으로 사랑의 관계에서 타자를 소유하고 싶은 욕망이 커질 경우 두 남녀는 흔히 서로가 서로를 변화시키려 한다. 이러한 욕구는 자신의 존재 근거를 보다.
확립하기 위하여 상대가 나 자신만을 위해 살았으면 하는 이기심, 즉 타자의 자유를 내 것으로 차지하고자 하는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다. “날 사랑한다면 그 성격 좀 제발 고쳐요.”, “날 사랑한다면서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와 같은 발언들은 모두 이러한 이기심에서 발현된 것이다. 상대를 제압하여 자신에게 굴복시키고자 하는 이러한 경향성을 가지고 사르트르는 ‘사디즘'을 이야기한다. 반면, 타자의 자유를 보존하고자 하는 마음이 커지면 사랑의 관계에서 자신을 희생하여 상대의 이기적 마음을 모두 받아주려 하기도 한다. '사랑하니까 다 이해해줘야지'하는 타 자를 향한 무한한 마음은 오히려 나의 주체성을 침해할 수 있다. 사르트르는 고통을 주는 타인을 그대로 받아들임에 있어 '마조히즘'을 이야기한다. 결국 두 가지 사랑의 방식은 한쪽을 잃기 때문에 불균형적인 형태의 사랑이다.
그리하여 나는 타자의 자유를 보존시키는 동시에 타자를 소유하는 방식으로 타인의 ‘시선을 향하는 자유'를 나의 면전에서 유지하기 위해, 나의 '시선을 받고 있 는 존재'에 전면적으로 나를 동화시키고자 한다. 즉 대자존재는 자신의 즉자존재에 근거를 부여하는 것으로서의 타자의 자유에 자기를 동화시키려고 하는 것이 다. 그런데 이는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 그 이유에 대해 사르트르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한다.
...그러므로 타자와의 합일은 사실상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고, 권리 상'으로도 또한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똑같은 초월 속에 대자와 타자가 동화된다면, 그 결과 필연적으로 타자가 지닌 타이성(異性)의 성격은 소멸되어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가 타자를 나에게 동화시키려고 시도하기 위한 조건은 내가 어디까지나 나에 대해 내가 타인인 것을 부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사르트르는 타자와의 합일에 대한 시도를 허무맹랑한 것으로 보지 않는 다. 오히려 그것 자체를 사랑으로 본다....이 이룰 수 없는 이상은, 그것이 타자의 현전에 있어서의 나 자신의 시도를 따라다니는 한에서, 하나의 시도로서의 사랑, 즉 나 자신의 가능성을 향한 여러 시 도의 어떤 유기적 총체로서의 사랑에 동화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 이룰 수 없는 이상은 사랑의 이상이고, 사랑의 동기이며, 사랑의 목적이고, 사랑의 가치 그 자체이다. 타자에 대한 원초적인 관계로서의 사랑은 내가 이 가치를 이루려고 지향할 때의 모든 시도의 총체이다.....)
에서의 사랑
영화 의 두 주인공 에드워드와 에스페라는 반대의 성향을 지닌다. 작곡가인 에드워드는 연애와 직업 및 모든 면에 있어 자유로운 성향을 띠며, 스키장에서 첫눈에 반한 에스페라에게 무작정 쫓아가서 만나자고 할 정도로 적극적이기도 하다. 반면 에스페라는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대학 교수 자격시험을 치르고 있는 학생으로, 호감이 가는 남성과 데이트할 때조차도 시간 계획을 세우고 만약의 상황을 대비해 속옷까지 신경 쓰는 매사에 꼼꼼한 여성이다.
서로에게 단시간에 사로잡히지만 두 사람은 자꾸만 어긋난다. 에스페라는 자신에게만 집중하지 않는 에드워드에게, 에드워드는 늘 자기 얘기만 하는 에스페라에게 서운함을 느낀다. 두 사람 모두 상대가 자신을 좀 더 이해해주기를 바란다. 이는 타자를 나에게로 끌어들이려는 형태의 사랑이다. 이러한 사랑은 두 사람을 모두 지치게 하지만 둘은 서로를 원하기에 그 해결책을 찾으려고 한다. 그러던 중, 에스페라는 대학 교수 시험의 최종 관문인 구두시험에서 물리에르의 비극과 희극적 요소로 본 사랑과 자기애에 관한 연구'를 발표하게 된다. 그 때 마침, 에드워드와 의 다툼으로 에스페라의 감정은 극에 달해 있었다. 에스페라는 자신의 상기된 감정을 자신의 발표에 끌어들인다. ... 물리에르 사랑의 모순은, 해가 되는 것을 사랑한다는 게 자주 잘못 사용됩니다.
그것은 사랑의 어려움을 극적이고 영원하게 합니다. 그런 사랑은 갈등이며, 중요한 선택을 하게 됩니다. 단순한 사랑과 자기애에 관한 선택입니다. 4막 3장에 살리만은 알세스에게 말합니다. 당신은 나를 잘못 사랑하고 있소. 그는 자기 개념의 사랑을 제시하려는 겁니다. 그는 살리만에게 하늘이 살리만을 가난한 자로 창조했으면 좋겠다고 했어요. 신분도 지위도 없는 자가 되면 나는 기뻐할 것이오. 그 때는 믿음이 내 사랑을 당신에게 받아들이게 하니까. 대상을 부정하는 특이한 사랑입니다. 살리만은 그를 통해서만 존재한다는 이기적인 욕망이죠. 살리만은 자유, 돈, 친구, 자기만의 개성이 있는 거죠. 그 당시엔 특이한 상황이죠. 물리에르는 오늘날의 문제를 앞서 제시한 것입니다. 여성의 독립이죠. 그의 주인공들은 각자의 세계가 있어요. 동등하게 대면하고 자기 세계를 양보하지 않죠....
에스페라는 물리에르 극의 등장인물인 살리만과 알세스를 통하여 사디즘적인 사랑을 이야기한다. 알세스가 살리만을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소유하기 위하여 그녀의 외부적인 어떤 사항들을 변화시키려고 하는 것은 '대상을 부정하는' 사랑인 것이다. 이는 타자의 자유를 꺾는 형태의 사랑이다. 이러한 사랑으로는 타자에게 서 나의 존재근거도 찾을 수 없다. 에스페라 자신과 에드워드와의 사랑도 여기에 해당된다. 에스페라는 이에 대한 극복책을 살리만의 입을 빌어 이야기 한다.
...마지막까지 그녀를 변화시키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것이고 누구도 그럴 권 리는 없어요. 모두가 헛된 것입니다. 살리만은 알세스에게 그것을 깨닫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녀가 말하기를, “나를 사랑한다면 이대로의 나를 받아주세요. 나도 당 신을 그대로 받아주겠어요.” ....
사랑하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달라는 요청은 자신의 자유를, 그리고 존재를 침해하지 않고 보존해달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상대의 자유 또한 존중 해주겠다고 약속한다. 이렇게 서로의 자유를 존중해주면 두 사람은 동등한 위치에 서 상호주체성이 성립된다. 에스페라는 이러한 자기애와 타인에 대한 사랑을 화합 하는 방법으로 '사랑'을 이야기 한다.
...알세스는 소유욕이 강하고 자기중심적입니다. 살리만은 책임감이 없고 성실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서로 단점을 받아주고 웃어넘길 수 있다면 사랑은 자존심과 자기애를 극복할 수 있어요. 진정한 사랑은 그런 희생만으로 오진 않습니다. 고통을 주는 자가 자기를 사랑하는 자임을 깨달았을 때 진정한 사랑은 이루어지는 것 입니다. 그리고 한 쌍임을 깨닫는 것 입니다.....
상대를 단점을 변화시키려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드릴 때, 사랑은 자존심 과 자기애를 극복할 수 있다고 에스페라는 말한다. 상대가 나를 변화시키려는 것 도 결국 나를 사랑하기 때문임을 깨닫는다면 진정한 사랑을 이룰 수 있다고 말한 다. 그러면서도 에스페라는 무조건적인 희생에서 오는 마조히즘적인 사랑을 경계한다.
사르트르가 말한 것처럼 타자의 자유를 보존시키는 동시에 타자를 소유하는 타자와의 합일은 불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그 자체가 원래 모순이기 때문이다. 그러 나 타자와 하나가 되기 위한 시도로서 타자의 세계를 부정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고 하면서 타자의 단점이 나를 사랑하기 때문임을 깨닫는다면, 타자를 계속해서 곁에 두고 사랑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사랑의 시도는 일방적인 것이 아닌 상호적인 것이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불완전한 사랑을 계속해나가면서 상대가 나를 존중해 주려함에 사랑을 느끼고 때때로 드러나는 상대의 단점이 결국은 나를 사랑하기 때문임을 알고 포용해 준다면, 두 사람은 고난 속에서도 사랑 을 유지시켜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작용 속에서 사랑은 더욱 굳건해 질 것 이기 때문이다.
나오면서 인간은 그 자체가 원래 불완전한 존재이기에 완전한 것을 추구하고 사랑에 있어서도 모든 것을 충족시키고자 한다. 대자존재가 대타존재를 만나 그와 하나가 되고자 시도하는 것은 불완전을 극복하려는 행위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타자 와 하나 되려고 할 때, 서로 다른 두 가지 욕망이 충돌하기 때문에 사랑은 불가능 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불가능한 이상 자체가 사랑의 동기이고 목적이고 가 치 그 자체이기 때문에, 사랑에의 시도 자체를 사랑으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사르트르는 타자를 지옥이라 했지만 오히려 그의 타자론은 두 대자존재간의 상 호주체성을 확립해주었다고 생각된다. 사랑에 있어서 상호주체성은 무엇보다 중요 한 개념이고, 상호주체성 없이는 사랑이 완전히 불가능하다. 사르트르는 절대로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타자를 제시하여 대자 존재인 인간을 무한한 외로움에 빠 트렸지만, 동시에 두 대자존재간의 사랑의 가능성도 열어준 것으로 보인다. 애초 에 완전한 사랑이 가능한 것이라면 수많은 남녀 간의 갈등과 불화는 다 무엇이란 말인가. 하지만 사르트르는 사랑하는 두 남녀사이에 다툼이 생겨나는 이유를 설명 해주었다. 그 답은 정말로 간단하게 ‘사랑하니까' 이다. 문제 발생의 원인을 사르트르가 제공했기 때문에 그 해결방안도 사르트르에게서 찾을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독후감 공모전 우수작
제목: 존재와 무
학과: 행정학과, 이름: 고*윤, 선정연도: 2011
내용: 서론 - 동서양 고전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
2011년 10월 17일, 그동안의 내 생활을 되돌아보고 반성하여 학업에 온 힘을 쏟아야 한다는 다짐을 했다. 그러다 우연히 이지성 작가님의 '여자라면 힐러리처럼' 을 읽었다. 평범한 여대생이었던 힐러리가 지금의 위치까지 오게된 성공이야기에 대한 내용이었다. 한참 읽던 중, 힐러리가 동·서양 인문 고전을 즐겨 읽었으며, 다른 학생들과 고전에 대한 토론을 했다는 내용이 눈에 띄었다. 고전이라고 하 면, 어렵고 실생활과 동떨어진 학자들이나 읽는 책이라는 고정관념이 있었기 때 문이다. 이지성 작가님은 동·서양 고전을 읽으면 당대의 지성들이었던 고전 작가들의 사고방식을 닮아 간다고 설명하였다. 심지어 인문학과는 연관이 없을 것같은 뉴턴, 아인슈타인 등등 과학자들도 인문고전을 즐겨 읽었다. 최근에 고인이 된 스티브 잡스 또한 고전을 즐겨 읽었다. 소크라테스와 반나절을 보낼 수 있다면 애플사를 통째로 넘겨 줄 수 있다고 할 만큼 인문고전에 관심이 깊었다. 세계를 움직이던 지성들이 그토록 열심히 즐겨 읽었던 인문고전에 점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2011년 1학기에 '동·서양 고전산책' 수업을 들었지만 다루던 고 전들을 잘 이해하지 못하였으며, 관심도 없었다. 다른 학우들도 마찬가지였다. 고전이 어려워 이해를 못하게 되자 자연히 관심도 없어지고 고전을 읽는 것은 어렵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박혔다. 그 당시에는 고전을 읽을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여자라면 힐러리처럼'을 계기로 인문고전 읽기에 도전하게 되었다. 마침 시험공부를 하러 제 1 도서관에 들렀는데 '책읽는 대학-독후감 공모' 포스터를 보았다. 이 공모전에 참여하면, 정해진 기간 내에 독후감을 작성해야 하기 때문에 책을 읽다가 '다음에 보지 뭐'하는 나태한 마음도 추스릴 수 있고, 독서 후에 독후감을 쓰면서 나의 이해도를 점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떤 책을 읽을지 고민하다 J.P.Sartre 의 '존재와 무를 읽기 시작했다. 처음 책을 도서관에서 찾았을 때 누런 표지에 1100 쪽이 넘는 이 책을 어떻게 읽어나갈지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어렵다고 피하기만 한다면 나에게 발전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몸에 좋은 약이 입에 쓰다.'는 속담처럼, 어렵고 나의 능력에 버거운 일을 해결할 때마다 성장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제목인 존재와 무는 상반되는 의미인데 어떤 내용일지 궁금했다. 내용이 난해하여 포기 하려고 했지만 틈나는 대로 책을 읽고 사색하고, 관련자료를 찾아보면서 점점 '존재와 무'를 이해하게 되었다. 책의 내용을 서서히 알게 되면서 성취감과 독서 의 기쁨을 알게 되었다. • 새로운 시각 - 즉자존재와 대자존재
Sartre의 '존재와 무'에서는 존재를 2가지로 구분한다. 첫 번째는 즉자존재이다. ‘존재는 그 존재 속에 고립되어 있고, 그것이 아닌 것과 어떤 관계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이다.(존재와 무, p.41), 즉자는 그 자체로 충실하다. 내포하는 것과 내 포되는 것의 그 이상의 완전한 충실, 그 이상의 완전한 동등성은 상상할 수도 없다. 존재 속에는 털끝만한 공허도 없다. 무(無)가 비집고 들어갈 수 있는 바늘구 멍만한 균열도 없다.(존재와 무, p.156)'는 구절에서 즉자존재의 특징을 알 수 있다. 즉자존재는 의식이 없는 사물을 가리킨다. 돌맹이, 책 등이 즉자존재이다.
반대로 대자존재는 '그러므로 자기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이 존재의 일원성이 동 일성의 무화로서 그 자신의 무를 내포하고 있어야 한다. ...(중략)... 대자는 그것이 자기 자신과 일치할 수 없는 한 존재하도록 스스로 자기를 규정하는 존재이 다.(존재와 무, p.162)', '인간이 즉자존재와 마주하여 스스로 태도를 취하는 것은 - 우리의 철학적 물음은 이런 태도의 한 형태인데 - 인간이 이런 즉자존재로 있지 않기 때문이다.(존재와 무, p.106)'에서 알 수 있듯이 의식을 가지고 스스로를 규정하고 다른 사물을 정립하는 존재이다. 즉, 대자 존재는 인간이다. 존재를 이렇게 의식을 기준으로 이원화하는 것이 신선하게 느껴졌다. 제목이 왜 ‘존재와 무인지 궁금했었는데, 즉자 · 대자 존재에 대해서 알고 나서 어느정도 알 수 있었다. 인간은 의식을 가지고 스스로를 규정하며, 이전의 규정들을 무(無)로 만들고 다시 규정하기에 제목을 '존재와 무'로 지은 것이다. 책을 읽기 전까지는 사물과 사람의 차이라면, 단순히 사람은 살아 움직이고 사물은 물질이라고만 생 각했었다. 책을 읽고 이렇게 새로운 시각으로 사람과 사물을 양분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편, 침팬지와 같은 지능이 높은 동물을 대자 존재로 볼 수 있을지 의문이 생겼다. 일본 교토대 영장류 연구소의 마쓰자와 박사는 침팬지에게 학교는 없지만 학습은 있다고 말한다. 새끼 침팬지들은 어른들의 행동을 보며 견과류를 먹는 방법 등을 배운다. 이는 일본의 초밥 요리사들이 어깨너머로 요리를 배우는 것과 유사 하다.
교토 영장류 연구소의 침팬지 아이(Ai)와 아들 아유무(Ayumu)는 인간보다 뛰어난 지적 능력(순간 기억 능력)으로 진화에 대한 잘못된 관점을 뒤집는다. 아유 무는 2007년 11월 SBS에서 행한 실험에서 인간보다 뛰어난 순간 기억력을 입증 했다.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교 Jared Diamond 교수는 '제 3 의 침팬지 - 인간'에서 다 음과 같은 주장을 했다. 인간의 유전 형질은 침팬지와 98.4%가 같고 1.6%만이 다르다. 인류의 유전자가 침팬지와 비슷한데도 불구하고 세계의 패자(覇者)가 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요인은 언어를 사용 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의 설 명이다.
침팬지가 이렇게 우수한 지능을 지녔으며, 인류와의 차이가 언어의 사용이라면 침팬지에게도 의식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국의 심리학자 고던 갤럽 (Gordon Gallup)은 동물이 거울 앞에서 자신을 인지하기 위해서는 우리 인간과 같은 형태의 자의식을 반드시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우스웨스트 루이지애나 주립대학교(University of Southwestern Louisiana)의 다니엘 포비넬리 (Daniel Povinelli) 교수는 1995년 침팬지 메간(Megan)을 여러 달 동안 훈련했다. 포비넬리가 고던 갤럽이 고안한 방법으로 자의식 실험을 메간에게 했다. 어느 날 아침 메간은 마비가 되어 있었다. 메간이 의식이 없을 동안 메간의 이마에 밝은 붉은 잉크 한 점이 발랐는데, 오후에 메간의 의식이 돌아와서 숙소에 걸린 거울을 보고 이마에 있는 점을 긁었다. 이것을 근거로 메간이 자신을 알아보는 자의 식이 있다고 주장했다. 원숭이는 그러한 연관관계를 생각해 내지 못한다. 이러한 연구 결과들을 보고 침팬지에게도 의식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수준은 자신을 인지하고, 아사히 신문(2007. 09. 12)에서 기사화 되었듯이 프로포즈를 위해 과일을 선물하는 정도이다. 그렇다면 '자신과 사물이 다른 존재임을 인식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침팬지가 자신을 비정립적인 존재, 사물을 정립적인 존재로 본다면 대자존재일 가능성이 높다. 한편, 침팬지가 대자 존재라는 것을 증명할 방법이 아직은 없다. 때문에 침팬지의 의식수준에 대한 명 확한 경험적 결과가 없다.
인류는 진화과정에서 어느 순간 즉자에서 대자가 되었다. 자신과 세상을 다른 것으로 인식하는 의식, 자아가 생겨나면서 대자가 되었다. 그렇다면 침팬지는 어떤가? 인간의 진화과정 중 자아가 생기기 전 단계와 비슷한 수준이라면 즉자이다. 그런데 말을 할 순 없지만 대자라면, 우리는 같은 대자존재를 실험하고 동물 원에 강금하여 구경한 것이다. 당하는 입장에서는 차라리 즉자가 되고 싶을 것이다. 인류도 '고민이 없어서 좋겠다.'며 의식이 없는 상태를 부러워 할 때도 있다. 즉, 아무런 생각 없이 생리적인 활동만을 하는 즉자 상태를 원하는 경우가 있다. 견딜 수 없을 만큼 힘든 상황에 닥쳤을 때 등이다.
• 대자존재의 특징 - 자기기만 (황우석 박사 사건)
앞에서 설명한 대자존재의 특징은 자기기만이다. 기만이라고 하면, 남을 속이는 행위인데 어떻게 스스로를 기만할 수 있는지 궁금했다. 자신을 아무리 속이려고 해도 속일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Sartre의 설명에 의하면, 자기기만은 인간의 고유한 특징인 의식 때문에 생겨난 '나는 비록 스스로 부끄럽게 여길 뿐이라 해도, 내 속에서 여러 경향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이런 경향은 실은, 나의 협조를 얻어야 비로소 실현되는 것이고, 그것은 자연의 힘이 아니라 내가 끊임없이 그런 가치에 대해 결정을 내 림으로써 그것을 효과적인 것으로 만들고 있는데도, 사람들은 일부러 사실을 보 지 않으려 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나의 성격, 나의 본성에 관해서 하나의 판단을 내릴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바로 그 순간에 내가 알고 있는 그 밖의 일들을 나로부터 은폐하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나의 현재는 정의상(定義上) 나의 과거 에서 빠져나와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과거를 그렇게 판단하는 것이다. 그 증거로 나는 예전에 내가 있었던 그대로의 것으로 있다고 성실한 마음으로 말하는
그 당사자가 마음속에 원한을 품고 있는 타인에게 화를 내면서 나는 이미 과거에 내가 있었던 그대로의 것일 수는 없다(옛날은 옛날, 지금은 지금)고 주장함으로써 상대편의 원망을 진정시키고자 할 경우가 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 과거에 는 유죄였으나 이제는 새로운 자유 속에서 이미 유죄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법정이 그 사람을 유죄로 판결한다면, 우리는 그것에 대해 놀라고 진심으로 가슴 아파한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그 사람이 자신을 유죄자로 있는 것으로 인지할 것을 요구한다.(존재와 무, p.138) Sartre는 어떤 의식을 했지만 그 의식에서 고개를 돌려 기존의 의식을 무의식으로 가라 앉히는 것을 자기기만이라고 했다. 위의 본문은 내가 상대방에서 원한을 가지고 있지만 겉으로는 원한이 없다고 하는 것, 법원의 판결이 부당하여 죄인의 처지를 불쌍히 여기지만 그 사람이 자신을 죄인이라 여기기를 바라는 것을 예로 서 들었다. 나는 자기기만이 일상생활에서 많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가장 자주 느끼는 자기기만은 길을 가다 쓰레기를 버릴지 가지고 갈지 고민하는 것이다. 내 의식은 쓰레기를 버리고 편하게 길을 가자고 하지만, 사회화된 의식이 쓰레기는 쓰레기통에 버리는 것이 옳은 일이라고 한다. 고민하게 되지만 처음의 의식은 무 의식이 되고 쓰레기는 쓰레기통에 버리게 된다. Sartre는 이런 자기기만을 긍정적으로 보았다.
한편, 자기기만을 통하여 황우석 박사에 대한 사람들의 의식에 대해 알 수 있었다. 2011년 11월 3일, 황우석 박사의 교수직 파면은 부당하다는 처분이 내려졌다. 물론 황우석 박사는
연구를 제대로 감독하지 못한 죄가 있다. 하지만 석좌교수에 서 파면된 것은 부당하다는 것이다. 지금 대부분의 사람들은 황우석 박사의 복귀 에 부정적인 입장이다. 이것은 자기기만이다. 사람들은 논문 조작이 미즈메디 연구원에 의해 이뤄지고 이것을 황우석 박사가 간파하기 어려웠다는 것을 알고 있 다. 하지만 법원에서 판결을 내린 이후, 논문 조작의 죄는 없다고 안타까워 하면 서 황우석 박사가 스스로를 유죄자로서 ‘있는 것'으로 인지할 것을 요구한다. 즉, 연구를 조작한 행위는 없다고 판결 났지만 스스로를 죄인으로 여기고 연구를 하 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다. 자기기만에 대한 Sartre의 생각을 실제사례에 적용시키는 과정에서 그 개념에 대 해 더 잘 이해하게 되었다. 이 개념을 하나하나 실생활에 적용하면 다른 이들이 왜 그런 행동들을 하는지 이해할 수 있다.
• 매순간 스스로를 만들어 나가는 대자(사람)
따라서 또한 인간 존재는 비록 전체 분해적인 형태에서 일지라도 자기의 규정들 의 구체적인 전체로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인간존재는, 자신이 현재 그것으로 있는 구체적인 부정에서, 자신의 다른 모든 부정을 통해, 벗어나는 한에서만 전체일 수 있다. ...(중략)... 나는 즉자존재를 통해 내가 그것으로 있지 않아야 하는 어떤 종류의 구체적인 실재를 자신에게 알려준다.(존재와 무, p.324)' 사람은 즉자 존재와 다르다. 즉자존재는 과거, 현재, 미래에도 그 존재가 변하지 않는다. Sartre에 의하면 사람은 완전하지 않은 존재이다. 사물처럼 어떤 용도가 정해져서 소멸할 때까지 그 존재 이유를 유지하지 않는다. 만약, 직업을 기준으로 '나'를 규정한다면 지금은 학생, 시간이 지난 뒤에는 공무원, 더 시간이 흐른 뒤에는 자영업을 할지도 모른다. 이처럼 대자존재인 사람은 한 가지 정해진 역할이 없다. 과거, 현재에 의해 '나'의 존재가 규정되어 변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즉자존재이 다. 한 가지 역할이 규정되어 평생 그것만을 수행하는 의식 없는 사물에 불과한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사람들은 스스로를 매순간 무(無)로 만들고 다시 규정하기 때문에 즉자존재와는 다른 대자존재이다. ‘즉 과거와 현재 사이에는 하나의 절대적인 이질성이 있다. 그리고 내가 과거로 돌아 갈 수 없는 것은 과거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과거로 있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나 자신이 즉자적으로 존재하고, 그 결과, 동일화라는 형태로 과거 속에 나를 잃어버리는 것이다.(존재와 무, p.224~225) 이 구절에서 알 수 있듯이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를 동일하게 여긴다면, '나'는 대자가 아니라 즉자이다.
나도 마찬가지지만 많은 사람들이 과거에 얽매여서 자신들의 열려있는 미래를 닫아버린다. 과거에 실수하거나, 수치심 느낀 일들을 곱씹으며, 스스로를 자학하거나 '나는 안되'라며 규정해 버린다. 하지만 이런 행동들은 자기 자신을 즉자존재로 만드는 행위이다. 사람은 이전의 자신을 무(無)로 만들고 스스로를 다시 규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이 경험한 과거의 일들은 이미 즉자존재이고 바뀔 수 없는데 그런 과거를 현재의 자신과 동일시하면 안된다. '내가 나를 만든다면 나는 나를 유한하게 한다. 이 사실에서 나의 인생은 유일 한 것이다. 따라서 설령 내가 죽지 않는다 할지라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은 나에게 금지되어 있다. ...(중략)...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죽지 않는 자도 죽는 자도 다수로 태어나 하나로 돌아간다. 비록 시간이 무한정, 즉 무제한이라 하더라도, 그럼에도 또한 그 인생은 자기를 유일한 것이 되게 하기 때문에, 자기의
존재 자체에 있어서 유한할 것이다.(존재와 무, p.884)' Sartre가 이 문구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인생은 유한하다. 또한 되돌릴 수 없기에 설령 무한의 삶이 주어진다고 해도 유일하고 특별한 삶이다. 그런데 과거에 얽매여서 유한하고 유일하며, 특별한 자신의 인생을 망치게 되는 것은 너무 안타까운 일이다. Sartre의 '존재와 무'를 읽으면서 대자존재와 즉자존재의 이런 차이점이 감동적이었다. 그동안의 '나'는 자신을 비하하며 살았다. 군대에서 인정받지 못했고, 성격이 내 성적이고 유머가 많지 않아 인기도 많이 없었다. 주변사람들이 '니가 어떻게 그걸 해?'라고 말하면 과거의 '나' 자신을 되돌아보며 '그래 저 사람들 말이 맞지, 내가 어떻게 해? 옛날에도 못했는데.'라고 생각하고 과거의 '나'에 맞춰서 살았다. 그렇게 하면 주변사람들이 드러내고 비웃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난날의 '나'는 즉자존재로서 살아왔다. Sartre의 ‘존재와 무'를 읽고 과거를 무(無)로 만들고 새로이 나를 규정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기뻤다. 비록 과거에 실수도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도 못 받았지만, 과거를 잊고 다시 힘을 내서 살아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가끔 옛 기억이 떠올라 우울해지려고 하면 Sartre의 말을 마음 속으로 되새기곤 한다. '과거와 현재가 동일한 것은 즉자이지, 난 대자니까 내 삶을 내가 만들어 갈 거야!' 그러면 한결 마음이 편해진다. 이성적으로 내가 나의 삶을 규정해 나갈 수 있는 존재임을 알았기에 과거와는 달라졌다. Sartre는 1907년, 2세 때 자신의 아버지를 잃었다. 그는 아버지 없는 어린 시절 을 오히려 축복이었다고 말하였다. 그에게 '아버지'는 이미 결정나버린 과거에 얽 매여 살아간 인물로 상징된다. Sartre가 즉자존재였던 아버지가 없었던 것을 축복 이라고 표현한 것을 보고 즉자존재로 사는 것은 너무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나 스스로를 만들어가면서 내가 누구인지 정의해나가는 삶을 살아야겠다. 분명히 살아가면서 비웃음도 당하고 모욕도 당할 것이다. 하지만 이전처럼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하게 더 발전된 모습으로 그런 시선들을 이겨낼 것이다. 앞으로 내가 하려는 국가고시나, 다른 목표에 도전하는 것을 보면 다른 사람들은 '니가 과거에 못했는데 어떻게 해? 우수한 인재들도 하기 힘든데' 라고 말할 것이다. 그 때마다 나의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꿈을 이룰 수 있는 방법을 찾아 내 길을 가는 것에 최선을 다할 것이다. 1906
• 끝맺으며,
Sartre의 '존재와 무'를 읽고 오랜 시간동안 괴로워하고, 고민했던 나의 과거를 이겨내는데 도움이 되었다. 한 번의 독서로 오랜 시간 고민해왔던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불안하고 우울해질 때 Sartre의 글을 떠올리면 마음의 안정을 찾는데 도움이 되었다. '존재와 무'를 읽고 사람의 의식을 이렇게 심도있게 연구한 것이 신기했다. 과학처럼 물질을 이용한 연구만이 모든 연구가 아니라 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만약 이 책을 읽지 않았다면 고만고만한 자기계발서에 적힌 구절들을 보며 잠깐의 위로를 얻는데 그쳤을 것이다. 그리고 과학에서 하는 것만이 연구인 줄 알았을 것이다. 이처럼 고전을 읽는 것은 나에게 뜻밖의 선물로 다가왔다. 비록 '존재와 무한 편을 읽었을 뿐이지만 왜 고전을 읽어야 하는지 알게 되었다. 두껍고 어렵게만 느껴지던 고전이었지만 그 가치를 알게 되자 인류의 지성들이 남긴 역작으로 보이게 되었다. ‘존재와 무'를 읽은 것은 나의 생활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런데 책을 읽으며 의문점이 생겼다. Sartre는 과거를 무(無)로 만들고 현재를 사는 것을 강조했지만,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가 완전히 분리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이 스 스로를 만들어가는 것은 맞지만, 현재의 '나'는 과거의 삶으로 만들어졌다. 유아 기에 형성된 가치관이 성인이 된 지금에도 영향을 준다. 또한, 그렇게 형성된 가치관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그런데 과거를 '무(無)'로 만들고 새로운 삶을 살아 가는 것이 가능한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동일시 여기지 않는다 해도 '나'의 가치관, 습관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과거의 행동을 다시 행할 가능성이 높다.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가치 관, 습관을 무(無)로 만들어야 한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그것이 가능한가? 어느 정도는 변화하겠지만, 앞에서 말하였든 가치관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그런데 시 간을 두고 생각해보니 역설적이게도 사람은 변하였다. 비록 짧은 시간동안은 그 대로인 것 같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면 달라져 있었다. 10년 전, 초등학생 시절 활발하고 인기 많던 친구가 있었는데 점점 어눌하게 변하고 이전에 높았던 성적 도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부정적으로 변했지만 그 원인은 자신에게도 있으며 주변 사람에게도 있다. 자기가 놀기를 좋아하게 됐으며, 주변에도 그런 친구들만이 있으니 변한 것이다. 이런 변화가 한순간에 오지 않았다. 10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뒤에 그 차이가 컸지만, 성장하면서 크게 느끼지 못하였다. 사람의 가치관이나 습관, 신념 등은 한순간에 바뀌지 않는다. 다만 조금씩 자신 은 물론 주변 사람들도 감지하지 못 할 만큼 변하는 것 같다. 특별한 일을 겪은 사람들은 한순간에 변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컴퓨터를 포맷하듯, 자신을 무(無)로 만들고 다시 시작하지 않는다. 조금씩 조금씩 스스로를 규정 하며 변화한다. '나'의 경우에도 '존재와 무'를 읽고 가치관의 변화는 있었지만 아직도 일정부분 예전의 가치관은 남아있다. 이성적으로는 과거를 즉자로 보고 도 전적으로 살겠다고 하지만, 현실에는 소극적인 면이 있다. 하지만 10년 뒤, 나는 도전적이고, 긍정적으로 살고 있을지 모른다. 그런 내 모습을 상상할 때면 나도 모르게 힘이 생긴다. 독서를 한 뒤, Sartre가 사상적으로 영향을 받았다는 R.Dercartes와 M.Heidegger에 대해서도 알고 싶어졌다. 비록 '존재와 무'에 대해서 완전히 이해한 것은 아니 지만 부분적인 이해만으로도 나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그래서 Sartre가 영향을 받을 정도의 지성들은 어떤 사고방식을 가지고 자신의 학문을 완성하였는지 알고 싶어졌다. 의미있게 생각하지 않았던 솔로몬의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라는 명언도 지금 생각해보면 '존재와 무의 중심내용에 일맥상통하는 것을 느꼈다. 부귀영화를 누렸든, 천대를 당했든 간에 무엇을 당하더라도 그 순간이 지나 과거가 되면 현재의 '나'에게 영향을 줄 수 없다는 점에 공통점이 있다. 이런 것을 생각 하며 인류 역사상 뛰어났던 지성들은 비슷한 사고방식을 가졌다는 것을 느꼈다. Sartre와 공자는 자신의 학문을 앞선 시대를 살았던 여러 지성들의 영향을 받아 완성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공자의 경우 논어는 선현들의 말씀을 모은 것이라고 하였으며 Sartre는 Dercartes와 Heidegger 같은 학자들의 영향을 받았다. 당대의 지성들도 선현들의 학문을 연구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기에 후대에 막대한 지식을 줄 수 있었다. 그러므로 '존재와 무한 편으로 고전읽기를 끝내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인문고전들을 많이 읽어야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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