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정도서 | 8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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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가대상 | 부산대학교 학부생, 대학원생 및 부산 지역 주민 |
참여방법 | 도서관이 선정한 올해의 책 8권 중 1권을 자유롭게 읽고 해당 도서의 독후감 제출 |
참여기간 | 2024년 9월 9일 ~ 11월 3일 |
시상내역 | 총 11편(부산대 총장상 및 도서관장상, 총상금 210만원) |
※ 본 사업은 부산대학교 국립대학육성사업의 예산을 지원받아 운영되었습니다. |
수상 | 이름 | 학과 | 선정도서/독후감제목 | 보기 |
최우수 | 김*하 | 무역학부 | 도서: 겨울의 언어 독후감: 나의 언어는 누가 듣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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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아무도 내 말을 들어주지 않는다
한 번도 이런 생각을 해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길을 걸으면 꼭 사람들의 귀는 닫혀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으면서 꼭 사람들이 나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제 우리는 서로에게 질문과 안부가 사라진 세상에서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책 <겨울의 언어>을 읽고 요즘을 돌아보았다. 내가 걷는 길과 지나가는 곳들과 그때 스쳐 지나가던 사람들까지. 지하철에 앉아 가만히 있으면 꼭 이상한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모두가 핸드폰을 보고 바삐 손과 눈을 움직인다. 혼자여도 혼자가 아니라는 표시를 맘껏 즐기고 있다. 그러면 가만히 있던 나도 그들을 따라 가방에 있던 핸드폰을 꺼내 어떤 화면이든 어떤 메시지든 좋으니 다시 읽는다. 말을 걸지 않을 것이니 안심하라는 무언의 신호를 터뜨린다. 나란히 앉아있는 사람들의 단절은 그렇게 견고해지고 그런 식으로 철저해진다. 되돌아본 요즘 속 풍경에는 언어의 행방이 묘연했다. 어디를 가도 인터넷과 연결 가능한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연결은 인터넷 속도와는 반대로 점점 느려지고 버벅거리는 현상이 나날이 심화되고 있다. 왜? 생각해보았다. 우리는 공통의 언어로 서로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다. 단절은 그와 다른 것이다. 마음을 열지 않으면 말을 이해해도 그 너머에 있는 상대방의 의도와 감정을 헤아릴 수 없게 된다. 낯선 이에게 마음을 좀처럼 열어주지 않는 현대인들의 도도함을 녹이고 싶단 생각이 든 것은 그 때문이었다. 우리는 무엇을 통해 타인과 연결될 수 있을까. 책은 고민을 던져준다. 나는 그것을 잽싸게 물어 일과를 끝낸 하루의 끝에서 홀로 조명을 켜고 글을 적으며 고민을 나름대로 풀어나간다. 생각이 나지 않을 땐 다시 책을 펴고 작가에게 조언을 구한다. 김겨울은 말한다. “꼭 예술로 뭔가를 얻어야 하냐고 물을 수도 있다. 그런 경험 하나 없이도 잘 살 수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먹고사는 이상의 삶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는가. 누구든지 태어나서 해볼 수 있는 경험보다 해보지 못하는 경험이 까마득하게 많기에 우리는 함께 있을 때만 보완할 수 있다. ⋯그래서 함께 시간을 견디는 사람들, 혹은 예술만이 서로의 연장이 된다.”그는 우리에게 예술을 조명 삼아 스스로 나은 길을 찾고 자신의 인연을 만들어나가기를 권하고 있다. 인간의 행위는 무엇이냐보다 어떻게 행해지느냐에 따라 예술로 불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짧은 대화로도 누군가를 웃게 한다면 그것은 대화 대신 유머라 통할 수 있고 짧은 고백으로도 누군가의 마음을 움직인다면 그것은 고백 대신 노래라 불릴 수 있고, 짧은 문장이라도 누군가에게 기억된다면 그것은 문장 대신 문학이라 불릴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앞으로 우리는 우리만의 언어로 낯선 이들에게 말을 걸어야 한다. 그러면 상대는 기다렸다는 듯이 들어줄 것이다. 핸드폰을 접고 주변을 둘러보아야 한다. 스마트폰 속에 행복은 잡히지도 느껴지지도 않는다. 내 것이 아니라면 나에겐 그저 허상이지 않을까? 누군가 이 글을 읽는다면 주변에 있는 사람에게 당신의 언어로 한 마디 전하길 바란다. 그 한 마디는 예술로 남을 것이며 그와 당신의 고리는 묶이기 시작할 것이다. 행복한 삶은 하루로 쪼개어지고 행복한 하루는 한 시간으로 쪼개어진다. 한 시간은 분으로 쪼개어지고 분은 한 마디, 하나의 생각으로 쪼개어진다. 틈새로 벌어진 시간을 기곗소리가 아닌 살아있는 하나의 언어로 채워 모두가 행복한 삶을 만들 수 있기를 바란다. 2부 언어의 정의 책은 또다시 묻는다. 당신에게 언어란 무엇인가. 작가 김겨울의 언어는 그의 유년 시절, 고유한 생각, 기억, 그가 좋아하는 것들; 철학, 음악, 춤, 책, 사회과학, 겨울 등으로 생겨났고 그가 지나온 길들이 그의 언어를 다듬고 있다. 책을 읽다 보면 독자는 그를 철학적이고 은유적이라 여기며, 책을 읽으면 꼭 겨울바람이 생각나고 은은한 클래식 음악이 귀에 맴도는 착각에 빠지는 것처럼 언어는 한 사람의 시간을 대변하곤 한다. 삶이 뚜렷할수록 언어는 더욱 또렷하게 들려온다. 다시 돌아와 나에게 언어란 무엇일까. 사전적 의미는 이러하다.‘사람들이 자기 생각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타내고 전달하기 위해 사용하는 체계, 문자나 음성 따위의 수단.’자기 생각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되는 모든 매개는 언어라 불릴 수 있다는 것이다. 언어는 과연 소통의 수단일까, 표현의 수단일까, 의미가 있을 것일까, 별 의미가 없는 것일까. 시원 명쾌한 정의가 내려지지 않는다. 아직 언어란 나에게 모호한 것이다. 어렵고 까다롭고 다루기 힘든 것이다. 이제 나의 과제는 언어에 대한 정의를 내리는 것이다. 어깨가 무거워질 뿐이다. 그리곤 마음을 바꿔 책 <겨울의 언어>를 통해 본질에 가까운 질문을 만들어 낸 것만으로도 며칠 동안 밖에서나 집에서나 책을 끈질기게 놓지 않은 보람이 이런 것이라 생각하며 자축을 벌인다. 우리의 삶에 따라붙는 질문들이야말로 진정한 소리이지 않을까? 이를 듣고 받아 써낸다면 눈에 보이는 글자 하나하나는 그만의 언어가 될 것이다. 너무나 미세하고 항상 멀리 떨어져 있어서, 소리를 들으려 귀 기울이는 자들은 가끔 침묵이 필요할 것이다. 3부 새겨울나기 결국, 돌고돌아 언어를 찾기 위해 혼자만의 시간을 택하는 것은 내 곁에 아무도 없다는 외로움이 들어도 또 다른 창조의 과정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쩌면 나는 그 과정을 지나고 있을지도 모른다. 글을 적는 지금, 시계는 낙엽 소리가 명쾌히 들리는 가을을 지나는 중이다. 그 말인즉슨 누구도 밟아보지 않은 눈과 함께 새겨울이 오고 있다는 것이다. 그때 분명 여름보다는 조금 더 외로울 것이다. 아무래도 추운 건 더운 바람보다 개인의 외로움을 돋보이게 만들기도 하니까, 물론 순전히 기분 탓일지도 모른다. 바람에 몸속까지 시린 느낌이 들 때면 추위가 만든 기분을 무시할 수 없게 된다. 친구는 하나둘 떠났고 가족으로부터 독립했고 생활비를 위해 계속 일을 해야 한다. 겨울에 춥다고 가만히 웅크릴 수 없는 몸이 된 것이다. 말할 벗은 줄어들고 진심을 나눌 기회는 희미해진 것만 같다. 만약 외롭다면 버텨야 하고 그래도 외롭다면 즐겨야 한다. 이젠 새겨울이 오면 추위에 굴복하지 않을 것이다. 아직 읽지 않은 책들을 읽을 것이고, 만나고 싶었던 사람들을 만날 것이고, 가고 싶었던 곳을 마구 다닐 것이다. 남들의눈치를 보는 아주 오래된 고질적인 성격을 그대로 내버려 둘 것이고 기분에 따라 다르게 기억되는 날들을 존중할 것이다. 새겨울이 지나 찾아올 봄과 여름을 대비해 추운 겨울날의 나를 기록할 것이다. 낮은 온도를 품은 글을 덮어두었다가 다시 돌아올 더운 계절에 열어볼 것이다. 낮은 온도와 높은 온도가 번갈아 회전하다 보면 나를 감싸는 주변의 온기는 적당해질 테니까. 그리하기로 마음먹는다. 책 한 권으로 겨울맞이 준비 완료! 마음속으로 내심 뿌듯해하며 며칠간 눌러앉았던 의자에서 엉덩이를 떼려고 한다. 가을에서 겨울로 건너가는 길목에서 만난 책<겨울의 언어>은 이번 겨울을 새로이 맞이하기 전 계절을 반기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글은 살아있지 않은 혹은 죽어있지 않은 친구라고 부르면 되겠다. 그리고 기대하진 않지만, 이번 겨울은 내 말을 들어준 누군가가 나타날지도 모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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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 | 김*현 | 무역학부 | 도서: 고통 구경하는 사회 독후감: 우리가 함께 만들어가는 연대의 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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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사회에서 고통을 어떻게 바라보고 다루는지는 중요한 논점이다. 목격은 눈으로 직접 보는 일이고, 구경은 흥미와 관심을 가지고 보는 일이다. 둘 다 보는 일이지만 목격이 가치중립적이라면, 구경할 때 눈은 흥밋거리와 관심거리를 찾는다. ‘목격’과 ‘구경’의 차이를 통해 사람들은 단순히 무언가를 보는 데서 그치지 않고, 고통을 소비하고 흥미로 취급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 차이는 단순히 타인의 고통을 보는 방식에 따라 우리가 그 고통에 관해 어떤 책임을 지게 되는지, 그리고 그 책임을 어떻게 행동으로 이어가야 하는지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 이제는 누구나 스마트폰과 소셜미디어를 통해 손쉽게 고통의 순간을 촬영하고 공유할 수 있게 되었으며, 이를 통해 우리는 고통의 중개인으로서의 위치에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접근은 단순한 정보 전달을 넘어 윤리적 고민을 요구한다. 타인의 고통을 쉽게 ‘구경’으로 만들어버리는 행위는 그 고통의 본질을 희석할 수 있으며, 이때 필요한 것은 시선이 머무는 방식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과 책임이다. 우리가 고통을 소비하는 것에 지나치게 매몰된다면 단순히 보고만 있는 구경꾼으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 고통을 목격하고 나서 그 뒤에 이어지는 행동, 즉 사회적 책임과 공동체적 연대가 더욱 중요하다. 우리가 단지 흥미로 다른 이의 고통에 시선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그 고통을 통해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움직임이 필요하다. 또한, 편향된 시각에서 선택적으로 정보를 수용하게 되면, 그 끝은 폭력과 무관심일 수밖에 없다. 우리가 고통의 책임을 특정 개인이나 흉악범에게만 떠넘기고 사회 구조적 문제를 간과할 때, 오히려 진정한 문제 해결을 위한 시야가 좁아지게 된다. 저자는 우리가 고통을 바라볼 때 일시적 자극에 그치지 않고, 구조적 변화를 위해 문제를 바라보는 방향을 전환할 필요가 있음을 말한다. 고통을 단순히 소비하는 데 머물지 않고, 우리의 시선을 더 넓고 깊게 확장해야 하는 당위성을 강조하며, ‘목격’이라는 윤리적 책임이 담긴 행위를 통해 사회적 변화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일상 속에서 무심코 마주하는 타인의 고통을 나는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는지 되돌아보았다. 타인의 고통을 구경으로 소비하기보다, 그 순간이 진정으로 나와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을 갖출 필요성을 느꼈다. 고통을 단순히 지나치지 않고 내 시선을 조금 더 책임감 있게 사용하는 연습이 필요하겠다. 이러한 과정은 나 개인의 변화에 그치지 않고, 내가 속한 사회와 공동체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이다. 타인의 고통에 대해 좀 더 깊이 공감하고, 그 고통을 함께 나누려는 노력을 기울일 때, 보다 따뜻한 사회가 될 것이다.
타인의 고통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종종 착각으로 이어진다. 날씨는 누구에게나 가혹해 보이지만, 실제로 그 피해는 균등하게 퍼지지 않는다. 경제적 자원이 부족한 사람들은 극심한 기후 변화에 더욱 취약해지는 반면, 자산이 있는 사람들은 고급 주거지와 적절한 온도 조절 시설을 통해 그 고통을 경감할 수 있다. 이러한 현실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주목이 절실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산업재해와 같은 고통이 빈번하게 발생하면서, 이 고통은 일종의 문화로 자리 잡고 있다.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사고는 점차 일상화되어 가고, 우리는 그 고통에 대해 무감각해지며, 시급히 해결해야 할 사회적 문제로서 경각심을 잃고 만다. 매일 발생하는 고통 속에서 자주 보이는 고통에만 주목하게 되며, 그 과정에서 잊히고 소외되는 고통도 존재한다. 특정 사건이나 역사적 고통이 미디어에서 다뤄질 때, 우리는 그 과정에서 무엇이 생략되고 있는지를 고민해야 한다. 시간이 흐른다고 해서 해결되지 않은 사건들이 잊혀지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고통이 있는 곳에는 그에 대한 기억과 반성이 필요하며, 단순히 고통을 알리는 것을 넘어 그 고통의 깊이를 이해하고, 누군가의 삶에 미치는 영향을 성찰하는 것이 필요하다. 뉴스는 고통을 단순한 자료로 소비해서는 안 된다. 취재는 누군가의 삶을 침범하는 것이므로, 그 고통을 드러내는 행위는 신중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사회적 약자들은 그들의 목소리가 대중에 잘 전달되지 않는 경우가 많으며, 이들이 때로 뉴스의 단순한 ‘예시’로 활용된다. 이 과정에서 그들의 고유한 이야기가 소외될 위험이 있으며, 언론은 그들의 이야기를 올바르게 전달하고 사회적 약자의 권리를 존중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결국, 타인의 고통을 공유하고 이해하는 과정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그 아픔을 경청하며, 서로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야 한다. 이를 통해 고통의 본질을 이해하고, 그에 대한 적절한 대응책을 마련해 나가야 한다. 고통이 사회의 문제로 여겨질 때, 우리는 그 해결책을 함께 모색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서로의 경험을 공유하며 더욱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고통에 대한 인식은 단순히 지식의 축적에 그쳐서는 안 된다. 우리가 마주한 고통은 남의 일이 아니라, 우리의 문제이자 사회의 문제다. 서로의 이야기에 귀 기울임으로써, 더 나은 해결책을 모색하고 서로를 이해하는 기반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과정으로 결국 사회가 변화할 것이다.
타인의 아픔에 대한 인식과 이해는 우리 사회의 중요한 과제다. 특히 ‘닮음’은 공감의 한계를 나타내는 요소이다. 우리는 종종 자신과 유사한 사람들의 고통에 쉽게 공감하는 경향이 있지만, 이는 동시에 타인에 대한 공감의 범위를 제한한다. 친구가 겪는 어려움에 대해서는 깊이 공감하지만, 사회적으로 소외된 사람들, 예를 들어 노숙자나 이주민의 고통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게 될 때가 많다. 이런 편향된 공감은 사회적 약자들에게 추가적인 상처를 줄 수 있다. 또한, 고통은 개인적인 것이면서 사회적인 현상이기도 하다. 언론에서 보도되는 사건들은 종종 사회적 관심을 끌기 위한 것이지만, 이 과정에서 소외되는 목소리들이 존재한다. 언론은 때때로 피해자의 고통을 제3자의 시각에서 다루며, 이로 인해 피해자의 진정한 이야기가 왜곡될 수 있다. 성폭력 사건의 피해자가 직접 자신의 이야기를 전달하기보다, 언론에서 단순히 사건을 보도하는 방식으로 처리된다면, 피해자의 감정과 경험은 소외되고, 사건의 본질은 흐려지게 된다. 젠더 갈등과 관련된 논의도 이러한 맥락에서 중요하게 다뤄진다. 특정 집단 간의 대립이 단순한 갈등으로 묘사되는 경향은 문제의 본질을 흐릴 수 있다. 여성과 남성 간의 권리와 기회에 대한 불평등이 있을 때, 언론이 단순히 ‘여성 대 남성’의 대립으로 보도하면 문제의 핵심을 간과하게 된다. 이때 진정한 해결책을 찾기 위해서는 갈등의 맥락을 이해하고, 이들을 위한 대화의 장을 마련해야 한다.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는 데 있어 나의 평소 태도를 생각해보며, 나와 다르게 살아가는 이들의 고통에도 귀 기울여야겠다고 다짐했다. 또한 고통을 다루는 것에 대한 언론의 역할을 되짚어보는 기회이기도 했다. 인터넷에서 부정적인 댓글을 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대로 보도하는 것은 고통이 진정으로 의미하는 바를 왜곡할 수 있다. 언론이 고통을 다룰 때는 더욱 신중해야 하며, 공정하고 정확한 보도가 이루어져야 한다. 또한, 우리가 얼마나 타인의 고통에 무관심한지 와닿았다. 고통이 나와 연결되지 않는다고 느끼는 순간, 그들의 아픔을 외면하게 된다. 타인의 고통에 대한 이해와 인식의 중요성을 느끼며, 개인의 고통이 사회적 문제와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고, 우리가 공감해야 할 대상이 단순히 ‘닮은’ 이들이 아니라는 점을 이해하였다. 결국, 사회적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고통의 목소리를 경청하고, 이를 바탕으로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 과정에서 서로의 고통을 나누고, 함께 아파하며, 변화를 이끌어낼 필요가 있다.
고통과 상실의 경험은 개인에게 깊은 슬픔을 남기지만, 이러한 감정을 넘어서는 사회의 역할도 요구된다. 한 사람의 고통이 다른 이들에게 알려지는 과정을 통해 사회는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이라는 최소한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언어와 자원은 항상 동등하게 주어지지 않으며, 고통을 효과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은 사회적 계층에 따라 달라진다. 이러한 차이는 종종 고통의 우위를 점하기 위한 경쟁으로 이어지기도 하고, 이는 곧 고통의 정치화로 나타날 수 있다. 뉴스 매체는 고통을 조명하지만, 그 해결책을 항상 제공하지는 않는다. 빠르게 지나가는 뉴스 속에서 잊혀지는 고통은 결국 일상의 연민을 소홀히 하게 만든다. 우리는 종종 소식의 속도에 휘둘리며, 이전의 사건을 잊고 새로운 뉴스에 집중하게 된다. 하지만 변화는 개인들의 자발적인 반응에서 시작될 수 있으며, 각자의 시선이 개인적이고 주관적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의 눈앞에 고통이 있다는 것을 느끼지 못할 수도 있지만, 그 고통이 결코 무의미한 것이 아님을 상기해야 한다. 사회가 애도하는 방식은 그 자체로 고통의 언어를 만들어낸다. 공동체의 슬픔은 무엇을 잃었는지를 드러내며, 애도의 과정에서 사회적 결핍을 인식하게 된다. 이러한 애도의 과정은 사회가 진정으로 무엇을 원하는지를 보여주며, 공적 애도를 통해 우리는 공동체의 가치와 희망을 다시 한 번 되새길 수 있다. 그러므로 슬픔과 애도의 표현은 개인의 고통을 넘어서 사회적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이는 사회의 구조와 체질을 바꾸려는 시도의 일환이며, 이를 통해 우리가 무엇을 잃었는지, 그리고 무엇을 고쳐야 하는지를 명확히 인식할 수 있게 된다. 또한, 공적 애도는 종종 사회적 합의 과정을 촉진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어떤 죽음이 애도받아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는 그 사회가 어떤 가치를 중시하는지를 드러내며, 이를 통해 우리는 더 나은 사회를 위한 방향성을 찾아갈 수 있다. 따라서 애도는 단순히 개인적인 슬픔의 표현이 아니라, 공동체의 건강과 미래를 고민하는 중요한 과정이다.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가치와 우리가 아끼는 것을 잃었을 때 느끼는 감정이 단지 개인적이기만 해서는 안 된다. 사회의 공동체적 슬픔을 인정하고, 고통의 언어를 함께 나누는 과정이 필요하다 결국 우리의 애도가 다른 이들의 애도와 연결되고, 이로써 변화의 씨앗이 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러므로 고통을 경청하고, 그 고통을 이해하며, 함께 애도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이자 책임이다.
이 책을 읽으며 고통에 대한 이해와 책임을 깊이 있게 성찰할 수 있었다. 개인으로서 내가 고통에 대해 가져야 할 태도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고통은 단순한 정보의 소비가 아니라, 나와 연결된 경험이다. 타인의 고통을 무관심으로 흘려보내기보다는, 그들이 겪는 아픔에 대한 진정한 공감이 필요하다. 고통을 소외된 목소리로 만들지 않고, 함께 이해하고 연대하는 것이 우리의 책임이다. 이 과정에서 나 자신의 고통뿐만 아니라 타인의 고통을 경청하고 반응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되었다. 고통을 단순히 외면하고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고통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공동체적 연대감을 형성해야 한다. 우리의 삶 속에서 고통이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를 돌아볼 필요가 있으며, 이를 통해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한 구성원으로서 나의 역할을 재정립할 필요성을 느꼈다. 서로의 고통에 대한 공감과 이해를 통해 더 나은 사회를 가꾸는데 보탬이 되어야 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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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 | 김*양 | 교육학부(교육대학원) | 도서: 삶은 예술로 빛난다 독후감: 잠시, 멈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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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을 마주하고 내 얼굴을 바라본다. 그 모든 것이 적나라하게 배어 나온다. 며칠 전의 숙취와 이번 주의 피곤과 때론 타인에 대한 증오가 온통 구겨져서 나를 바라본다. “어쩌라고?”
사실 마주보는 일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그래서 이렇게 살 수만 없을 때 지금처럼 그저 앞으로 내달릴 수 없을 때 흘깃이라도 고개 들어 나를 보려는 소심한 노력을 갖고 미술관으로 가야 한다. 힘없이 어깨를 늘어뜨리고 퇴근해서 이불 속에서 충전인지 방전인지 모르고 뒤척일 때, 그런 나를 위로하려 며칠 끓이고 끓여 나를 일으키는 그 곰국의 농도를 미술관에서 만날 수 있다. 매일 쌀을 씻는 행위를 즐겁게 했던 이우환의 어머니가 그에게 일상이 주는 축복을 일깨우듯이, 그의 선과 점은 우리의 어깨를 내리치는 죽비처럼 일상의 담담함을 감사하라고 얘기한다. 일상은 본디 무미건조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른 눈이 반짝임을 놓치고 밋밋하게 바라보는 것이라고 차분히 알려준다. 사실 주변의 사람들이 많아도 그런 얘기를 해 줄 마음의 여유를 가진 사람이 많지 않다. 그들도 흐릿한 눈으로 술을 마시고, 한숨을 쉬며 하루하루 살아가는 일에 급급할 뿐이다. 그러나 그림은 ‘그럼에도 불구하고’당신의 반짝이는 순간을 기억하게 할 것이다. 설령 그것이 미술관에 걸려있지 않고, 책 속에 축소되어 박제되어 있을지라도. 그것은 그린 사람의 온 생애가 때론 응축되어 있어서 곱씹어 보아도 닳지 않는 생명력이 담겨 있다. 보아야 할 것들, 보지 않아도 될 것들로 뒤범벅된 시선의 홍수 속에 미술관을 간다는 것은 내가 주체가 되어 보고 싶은 작품 앞에서 마음껏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자유를 준다. 마음에 소용돌이가 멎지 않아서 무엇을 해도 잔잔해지지 않을 때면, 같이 소용돌이치거나 소용돌이 치고 난 뒤의 잔잔함을 담은 그림을 보면서 화가의 마음을 떠올린다. 당신도 붓을 들고 마음이 지옥이었겠군요, 지옥 뒤에 천국같은 시간 속으로 옮겨갔군요 라고 생각하며 만난적도 없는 누군가와 시공간을 넘어서 깊은 공감을 나눈다. 우리가 가진 감정이란 것이 사실 나의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모두의 것이기도 한 비슷한 모습을 가진다. 그래서 그림을 본다는 일은 내가 보고싶고 집중하고 싶은 감정이나 고뇌를 확장시키기도 하고 축소시키기도 한다. 그 선택은 온전히 나의 것이다. 내가 주인이고 중심이라는 걸 잊고 살다가 주도권이 내게 오는 즐거운 경험을 예술은 하게 한다. 뒤샹의 ‘파리의 공기 50cc’가 주는 생각의 전환은 삶을 숨쉬고 느끼는 일에 대해 말한다. 뒤샹의 나태함은 무엇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해야한다는 당위성에서 벗어나기 때문에 가볍고 경쾌하다. 그 가벼움이 주는 해방감이 우리가 미술관에서 웃음이 나는 지점이다. 헛웃음처럼 무릎을 탁 치게 되는 탁월함. 일상은 우리에게 지키고 해야하는 선과 규칙을 너무 많이 만들어 놓았다. 편리하고 제어 가능하다는 장점은 있으나 그 규율은 우리를 넥타이나 블라우스 단추처럼 조여서 때론 사무실에서 잘 기능하는 유기체로 느껴지게 한다. 인간은 계곡에서 바위를 만나 굽이치며 휙휙 방향을 트는 자유롭게 생동감 있는 생명이다. 그러나 우리는 현대인으로서의 삶은 너무도 옭아 매인 채로 살아가서 이것이 때로는 인간으로서의 기본값이라 생각을 한다. 그러나 뒤샹의 작품과 같은 자유로움을 만나면 우리는 각성하게 된다. 틀밖에서도, 선밖에서도 자유로운 인간으로서의 나를. 한 발짝 떨어져서 보아야 보이는 것들을 너무 많이 놓치고 지나치며 살고 있다. 김창열이 물방울을 발견한 그 순간처럼, 작고 하찮다여겼던 사물과 순간에 우리가 바라봐야할 진실이 맺혀있을 수 있다. 매일 먹는 밥, 그 사소한 밥 한 그릇에도 늙은 어머니가 쌀을 씻고, 한참을 쉬어 무릎에 손을 짚고 쌀물을 맞추고, 때맞춰 뜸을 들여 밥을 뒤척여 가장 좋은 부분을 밥 그릇에 옮겨 담고, 식지 않게 이불을 덮어 놓는 정성이 있다. 그 밥 한 그릇을 우습게 보지 마라. 그 한 그릇을 꼭꼭 씹어 먹으며, 우리는 삶을 다짐하고 하루를 나아갈 힘을 얻는다. 그래서 최정화의 ‘소쿠리 탑’은 그저 물질로서의 소쿠리로 인지되고 소비되어 지면 안되는 것이다. 오래전 같이 근무했던 동료가 낡은 넥타이를 매고 와서는 어깨를 날개처럼 펼치며 내게 말했던 적이 있다. 오래전 할아버지가 아버지에게, 아버지가 자신에게 물려준 넥타이라고 자랑스럽게 얘기했다. 그 넥타이에 세대를 이어온 사랑과 자부심이 묻어 있듯이, 소쿠리는 삶의 최전선에서 분투한 누군가의 기억이 있으며, 때로는 모두에게 어떠한 형태로의 기억이든 맞닿은 사물일 수도 있다. 삶은 감자가 담겼던 기억일수도 있고, 달큰한 호박전이 담겨있을 수도 있는 그런 온도를 가진 물체. 그래서 예술은 시작점은 작품이지만, 그 끝은 우리의 마음 속일 수도 있다. 내 마음의 어떤 기억 또는 어떤 상처들. 크리스토와 장클로드의 ‘사물을 포장’하는 예술을 보면서, 나는 요즘 우리가 말하는 쓸모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모든 것이 쓸모있음과 없음으로 나누어 지는 요즘에 그들의 예술이란 낭비와 쓸모없는 일로 여겨지기 쉽다. 그들의 예술은 또한 일반적인 회화나 조각처럼 보존되지도 않는다. 정해진 기간동안 존재했다가 철거된다. 이 얼마나 소비적이고 하릴없는 일로 여겨지기 쉬운가. 얼핏 뱅크시가 파쇄했던 퍼포먼스를 떠올리게 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뱅크시의 파쇄는 무의미한가. 조금 더 확장해서 생각해 보면, 태어나서 소멸하는 우리의 일생은 무의미한가. 그들의 포장 예술은 공간의 확장과 더불어 관람을 원하지 않는 많은 이들에게도 풍경의 일부라는 측면에서 노출된다. 그 속에서 어떠한 형태로든 사람들은 생각을 한다. 섬, 다리, 계곡, 해안을 포장하고 사람들은 그 속에서 자신의 어떤 생각들과 접점을 갖는다. 그 생각에 대해서 예술가는 제한하거나 제안하지 않는다. 누군가는 환경에 대해서 생각하고, 누군가는 인간이 가진 가식과 허물에 대해서 사고할지도 모른다. 아니면 예술이 가진 의미 그대로 아름답다는 감상을 가지며 퐁네프다리를 오가는 출퇴근 직장인에게 일상의 행복이 될지도 모른다. 예술의 의도는 설령 예술가가 내포하고 있다 하여도 그 끝이 닿는 감상자에게는 각자의 텍스트로 변환되어 읽힌다. 그런데 그 변환은 반드시 보는 사람의 의도대로 이루어 진다는 것이다. 주체적인 인간임을 잊고 살다가 예술이 선사한 주도권을 쥐는 순간 나는 아주 근사하게 마음의 문을 열고 그 예술의 빛을 어떤 곳에 드리울지 결정하는 것이다. 나에게 예술은 숨쉬기 힘들 때는 숨쉴 수 있게 틈을 열어주었고, 답을 찾지 못할 때는 답은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 주었다. 그리고 내가 존재하는 것이 무겁고 벅찰 때면, 더한 고통 속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붓으로 아름다움을 직조하는 과정을 통해, 존재란 힘들고 아득한 순간도 있지만 나아가다 보면 그래도 살아갈 만한 세상이라고 고통만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느끼게 해주었다. 힘들고 아프지 않을 때는 미술관에서 그림 앞에 왜 의자가 있나 생각하였다. 그림은 한순간 스쳐가는 장면인데, 무엇 때문에 앉아서까지 봐야 할 필요가 있나 생각했다. 그런데 내 몸과 마음이 너덜너덜해져서 미술관에 들어갔을 때, 잠시 쉬어야 겠다는 생각으로 의자에 앉아서 그림을 마주한 순간 알게 되었다. 그림을 그린 사람의 마음과 열정이 시간을 두고 지긋이 바라볼 때 내 안으로 스며온다는 것을. 내 삶이 예술로 빛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예술이 내 방문을 두드리며 애써 나를 밝히려 오지 않을 것임도 안다. 그러나 렘브란트가 자화상을 그리며 자신의 빛나는 젊음과 야망을 그리면서 나이들어 희미해져 가는 자신의 존재를 인정해 가듯이 그렇게 나를 인정해 가는 것이 삶이라는 것을 안다. 소로야가 물을 오래도록 바라보았기에 물 속의 인체를 그토록 햇살의 결을 따라 자연스럽게 그렸듯이, 나 또한 오래도록 애정을 갖고 바라보아야 제대로 볼 수 있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그 애정을 갖고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 나와 내가 살고 있는 사소해 보이는 일상이라는 것도 안다. 세잔의 아몬드 나무도, 고흐의 아몬드 나무도 공들여 그려넣은 자신만의 아몬드 나무라는 것도 안다. 바라보는 사람들은 각작의 이유로 좋아하는 아몬드 나무가 있겠지만, 나는 어쩌면 내가 바라보는 시선으로 나만의 아몬드 나무를 그려야 한다는 것도 안다. 철학자들은 삶의 관점을 각자의 방식으로 정의내린다. 하나의 옮음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의 관점만으로 우리가 살아갈 수 없음도 안다. 그런데 살다보면 하나의 옳음만 존재하고, 하나의 관점만 있는 것 같아서 그 틀 속에서 자꾸만 작고 보잘 것 없어지는 나를 발견한다. 시선이 점점 좁아져서, 누구보다 아끼고 사랑해야 하는 나를 미워하고 나무라게 된다. 그래서 작고 쪼그라진 나는 의미를 잃고 회색으로 희미해져 간다. 그런 회색의 순간에 어쩌면 내게 필요한 것은 나를 위로해 줄 그림 한 장이다. 나는 그림들이 위로해 준 많은 방황의 순간이 있었다. 위로받으러 간건 아니었다. 그저 어딘가로 향해 가야만 했고, 그 끝에 미술관이 있었다. 미술관에서 난 꽤 괜찮은 사람같이 느껴졌다. 그 이유는 내가 그림을 읽기 위해, 내 안의 나를 일으켰고, 그 순간 의미를 읽으며 덩달아 나도 의미를 가진 사람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잠시 멈추고 그림과 닿아 있으면 된다. 무엇이 아니어도, 무엇을 하지 않아도 된다. 그림을 그렸던 사람의 열기가 당신의 삶의 닿을 것이다. 그 순간 그렇게 빛을 받으면 된다. 삶이 빛나지 않더라도, 그 순간 당신은 빛을 받는다. 그래, 당신은 빛날 수도 있는 사람이라는 걸 잊지 말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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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 | 강*예 | 지역주민 | 도서: 겨울의 언어 독후감: 우리가 서로 다른 계절을 살더라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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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더운 습기로 가득한 싱가포르를 거쳐 창문이 뽀얗게 흐려지는 건조한 열기의 사막 도시 두바이에서 여러 해를 살았던 나는 추위를 유난히 싫어했다. 겨울이 없던 곳이니 조금만 추운 곳에 가도 벌벌 떨기 일쑤였고, 실제로 작은 온도 변화에도 얕은 감기를 자주 앓았다. 마음도 약해지게 만드는 추운 겨울을 누가, 왜 좋아하는 걸까.
‘제자리에 곧게 서서 거센 바람을 맞는 일을 생각하며 그럼에도 이것이 삶이라면 노래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노래는 이따금 뚝뚝 끊기고 위태롭다. 그러나 겨울 속에서 기꺼이 노래하는 다른 사람들…’ 책을 관통하는 하나의 메시지가 없다고 저자는 일러두었다. 그러나 독립된 하나하나의 글은 겨울의 언어로 ‘겨울의 삶’ 하나를 읊조린다. 책을 덮을 즈음엔 천천히 내린 눈처럼 작가의 마음이 내 마음 위에 소복하게 쌓여있다. 겨울은 혹독하다면서도 겨울을 사랑하는, 그래서 이름까지 겨울로 바꾼 작가의 마음을 헤아려 본다. ‘겨울과 함께 산다는 건 그런 것이다. 내가 나를 절망시키면서도 동시에 내가 나를 안아줄 수 있다고 믿는 것.’ 작가는 스스로 이름을 지으며 새겨울을 맞이하였을 것이다. 어떤 어려움도 피하지 않고 한순간도 놓치지 않으려는 생을 향한 의지. 나의 겨울은 어떤 모습이었는지 떠올린다. 외항사 승무원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에 돌아온 이십 대의 끝자락. 호기롭게 귀국했지만 왜 좋은 직장을 그만두었냐는 말들이 걱정이 아닌 따가운 바늘처럼 나를 찔렀다. 무턱대고 사표를 던진 것이 아니라고, 다시 멋지게 설 수 있음을 증명하고 싶었다. 쉽지 않았다. ‘겨울은 네가 무엇이든 가질 수 있었던 시기는 예전에 끝나버렸다고 넉살 좋게 웃는 것’만 같았다. 나이 서른에 파리로 유학을 떠났다. 2월의 파리는 뼈가 시리게 추웠다. 파리를 낭만의 도시로 부른 이는 분명 잠시 머물다 간 여행자일 거라고 오들오들 떨며 나는 불평을 터뜨렸다. 처음부터 무언가를 시작하는 것은 스무 살 때보다 곱절로 힘겨웠고, 나는 얼음 바닥에 넘어지고 또 넘어졌다. ‘바람이 면에서 선으로 부는 겨울, 길고, 얇고, 뾰족해 콧속에서 와르르 산산조각이 나는 겨울바람’이 불던 그 매서운 겨울을 난 이후, 겁내던 추위를 정면으로 버틴 이후 비로소 나는 감기에 덜 걸린다. 나도 한때 저자처럼 결혼하지 않고 아이도 낳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일등석에서 일하던 선배들은 나이 마흔에도 우아하게 자유를 즐기며 일하는 것처럼 보였다. 나도 커리어 우먼으로,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내 한 몸 내가 책임지며 사리라. 곳곳에 유해 물질로 가득한 이 세상에 내 아이를 던져놓는 것도 결코 잘하는 일이 아닐 것이라고, 여러모로 불리한 것만 같은 여성으로 사는 삶을 더 불리하게 살고 싶지도 않았다. 7년이 흘렀다. 어떤 이유에서건 결혼과 출산을 하지 않는 청년의 뜻을 여전히 응원하는 오늘의 나는 그러나, 결혼도 했고 돌이 안 된 아기도 있다. 인생을 함께 하고 싶은 반려를 만났고 그 사람과 아이를 키운다면 할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이 들었다. 오늘 나는 정장을 차려입고 출근하는 커리어 우먼이 아니라, 임신 당시 입던 헐렁한 원피스를 입은 채 아기 이유식을 만드는 데 여념이 없다. 불리함을 물리칠 수는 없어도 이를 안고 나아가자는 전에 없던 의지가 생긴듯하다. 문을 나서면 뉴욕, 시드니, 런던이었고 문을 닫으면 사각거리는 하얀 호텔 침대가 기다리던 비행 시절이 문득문득 어제인 듯하다. 그 삶은 나름대로 어렵게 얻은 것이었고 또 매력적이었지만, 어째서인지 점차 넓은 세상이 아닌 작은 기내에 갇혀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나의 일터 풍경은 구름과 해와 달, 별인데 그 아름다움을 잡을 수 없는 것처럼 헛헛했다. 다른 곳으로 옮기고 도전해야 새로운 세계로 갈 것만 같았다. 하지만 세계는 내 안에서 커져야 했다. 오늘 나의 세계는 책의 다른 장이 아닌, 다른 책을 펼친 것처럼 다른 깊이와 넓이로 나아가고 있다. 꼬깃꼬깃 비행기를 접어놓은 크기의 작은 집. 이 공간 속 아기와 내가 단둘이 있으면 나는 아기의 세계가 된다. 그리고 아기가 내게 보여주는 세계는 실로 무한에 이른다. 아기의 두 눈이 수없이 봐온 어떤 하늘보다 반짝이고 아름답다. 아이와 함께 나는 성장의 기회를 다시 한번 얻었다. 이 경이로운 세계를 모르는 이가 없으면 좋겠다 싶었지만, 겨울 작가처럼 다른 세계를 나 같은 독자에게 보여줄 사람이 있어야 한다고 이내, 생각했다. 세상은 전보다 팍팍할지언정 내 아이가 살아갈 곳이라는 사실에, 세상만사에 관심을 기울이고 모든 존재에게 애정이 솟는다. ‘팡 튀어 오르는 물줄기같이 살아본 때는 언제인가? 와하하 터지는 웃음에 마음 놓고 옷을 적실 수 있었던 기억’을 가지는 삶, ‘삶은 바로 여기에 있고 그다음 몇 초간에도 있으며 바로 내일에도 있다’라고 작가는 분명히 말한다. 나는 아기를 만나고 나서 매 순간을 살고, 생애 처음인 듯한 해맑은 웃음을 터뜨린다. 커져 버린 공감대로 인해 무관심했던 일에 가슴이 미어지고 화가 나는 때도 많다. 아동학대 뉴스에 공분하는 것은 물론, ‘엄마가 섬 그늘에 굴 따러 가면 아기가 혼자 남아….’자장가를 불러주다가 혼자 남은 아기를 상상하곤 슬퍼지기도 하는 것이다. 겨울 작가가 꼭지에 마침표를 찍은‘삶의 생동. 삶의 기운’이란 바로 이런 것들이 아닐까. 우리는 각자가 다르게 ‘삶을 좀 알기 위해’ 삶을 계속 살아간다. 그러니까 나는 이십 대 때 외국으로 나가고 싶다는 로망이 가득했다. 최대한 많은 곳을 단시간에 갈 수 있는 일이 바로 비행이라는 결론에 이르러, 외국어 공부를 했고 많은 면접을 봤다. 저비용 항공사에서 시작해 대형 항공사로 이직하며 한 달에 예닐곱 도시를 날아다녔다. 시공간을 다르게 사는 것이 나의 생활이 되면서, 대부분 시간을 혼자 보냈다. 반쯤은 두둥실 떠다니는 듯 정착 없는 삶이었기에, 나만의 일상을 지탱할 어떤 것이 절실히 필요해졌다. 고단한 몸을 이끌고 호텔 방에 들어서면서 라디오를 켜기 시작했다. 밤 열 시까지 듣고 끄겠다던 라디오를 새벽 두 시까지 듣고 자던 학창 시절의 습관이었다. 익숙한 목소리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면 처음 가보는 냉랭한 호텔도 익숙한 공기로 채워졌고, ‘그 시간 동안 어딘가에 사는 누군가들이 나와 비슷하게 하루하루를 넘기고 있다는 사실’에 나도 안도하며 잠들었다. 당시는 그저 한국어로 나오는 방송이 좋았다고 생각했다. 저자는 예리하게 내가 항상 불안정했던 이유를 짚어냈다. ‘우리가 잃고 있는 것은 동시성의 감각이다… 같은 시간에 같은 이야기를 나누는 일. 같은 세상을 공유하는 일.’ 팟캐스트나 유튜브 영상은 여전히 하나의 벽이 느껴지지만, 라디오는 누군가 같은 방송을 듣고 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안다. 늦은 밤에도 문자를 보내고 싶어지는 이유, 지구 저편에서 같은 노래에 감동하고 있다는 모종의 연대감이 있기 때문이다. 요즈음 아기와 나는 오전 열 시부터 클래식 라디오 방송을 듣는다. 파리에서 힘든 밤마다 위안을 얻은 음악들은 슈만과 쇼팽, 라흐마니노프의 선율이었다. 방송 중 소개되는 많은 문자 중 나와 비슷한 상황 속 엄마들의 사연을 들으면 잔잔한 위로를 받는다. 나는 얼굴을 모르는 이에게 마음의 응원을 보내게 된다. 열 시 방송이 시작하기 전, 커피 한 잔을 내리는 것이 중요한 일과 중 하나다. ‘나는 늘 내일의 커피를 생각한다. 일을 하는 동안, 밥을 먹는 동안, 책을 읽는 동안 나는 오늘치의 커피와 내일 마실 커피를 생각하고 있다.’ 많은 독자가 ‘커피라는 가짜 버튼’ 글에 공감 버튼을 눌렀으리라 확신한다. 일명 커피 공화국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아기에게 쉼을 허락받아야 하는 육아인으로서 나는 하루에 몇 번이고 커피를 떠올린다. 비행할 당시에는 도시마다 맛있는 커피 파는 집을 섭렵할 정도로 커피 애호가였다. 임신 기간과 모유 수유 중 커피를 끊다시피 했지만 한 잔 두 잔, 다시 커피가 일상에 들어오니 전보다 더 중독적이다. ‘마음의 연료’, 바로 그거다. 나는 작가처럼 커피를 내려 자리에 앉아 마음을 다잡고 일을 시작하지는 않지만, 육아는 체력전 아니던가. 어떤 커피를 마실지 고르고 내려 먹는 순간은 짐짓 신중하다. 커피를 마신다고 힘이 불끈 나는 것도 아니고 잠이 금세 달아나지도 않는다. 하지만 곱게 간 원두가 뜨거운 물과 산소를 만나 뿜어내는 시큼하고 구수한 커피 향이 피어오르는 몇 분, 오늘의 커피를 마실 수 있다는 행복감에 젖어든다. 나의 커피는 ‘오늘 아기와 더 잘 놀아봐야지, 오늘은 아기가 잘 때 책 한 페이지를 더 읽어야지’ 등 어제 아쉬웠던 점들을 만회해 보려는 의지가 담겼다고 의미 부여를 한다. ‘…매일 그날의 커피 덕분에 삶을 꽤 견딜 수 있었기 때문에, 이제는 삶이 원래 견딜 만한 것이라고 착각할 수도 있다. 삶에는 리셋 버튼이 없고, 그것이 우리를 불행하게 만들지만, 커피는 매일의 가짜 리셋 버튼이 되어준다.’ 오전 여섯 시. 우유를 먹이고 기저귀를 갈고, 손가락을 가지고 놀다가 책을 읽어준다. 칭얼거리기 시작하면 잠자리에 눕히기를 여러 번 반복하면 하루가 간다. 아기와의 하루는 늘어난 테이프처럼 길지만 정신 차려 보면 테이프 재생이 끝나있는 것처럼 쏜살같다. ‘매일의 리셋 버튼’이 그래서 필요하다. 자칫 반복적인 체력 소모로 아기에게 미운 얼굴을 보이지 않기 위한 오늘의 리셋. 아기 중심적이지만 나의 삶 또한 여기 있음을 환기하는 리셋이다. 나는 우연히 팟캐스트에서 작가를 처음 알게 되고 유튜브를 통해 그녀가 전하는 책들을 만났다. 작가가 자신의 인생을 토대로 눌러쓴 ’겨울의 언어‘는 그동안 내가 작가로부터 받았던 인상과 다르게 읽혔다. 매주 보고 들었던 목소리이건만 책에서 나오는 작가의 목소리는 한층 더 깊었다. 책이 영화화되었을 때 실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얼굴과 목소리를 알고 난 다음 책을 읽으니 오히려 반대의 효과가 나타났다. 영상을 만드는 창작자이면서 책이 왜 필요한지를 작가가 몸소 보여주고 있는, 과연 ‘젊은’‘여성’‘작가’였다. 젊기에 톡톡 튀는 영상을 만들어 내고, 여성이기에 여성이 보는 사회를 그릴 수 있으며 작가이기에 일반인이 놓치는 것들을 포착한다. 작가는 이 속성을 피할 수 없는 함정이라 하였다. 작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독자는 같은 글도 다르게 읽었으리라, 편견 없는 독서를 어렵게 하는 ‘젊은 여성의 에세이’라는 점을 경계한다고 했다. 그러나, 동시대를 사는 ‘젊은 여성 독자’인 나는 그러기에 이 책을 집어 들었다. 같은 라디오 방송을 들으며 자란 내 또래의 이 다른 여성은 일상을, 그리고 세상을 어떻게 보고 표현할까. 작가를 알기에, 아니 안다고 생각하기에 친숙한 작가의 생각이 담긴 글에서 발견하는 새로운 면모가 흥미롭다. 작가가 부딪히는 한계조차 읽어낼 수 있다고 작가와 독자는 서로를 믿어야 한다. 힘겨운 겨울의 시간을 지났다고 해서 방황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지금도 때때로 길을 잃고 아마 평생 그러할 것이다. 언제라도 막다른 길이 나올 수 있음을 알고 추위도 버틸 수 있다고, 혼자가 아니라면 겨울을 따뜻하게 안을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우리에겐 라디오가 있고 커피가 있고, 서로가 있다. 모두가 각자의 계절을 살더라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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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려 | 김*영 | 의학과 | 도서: 세상 멋져 보이는 것들의 사회학 독후감: 더 이상 멋지지만은 않은, 눈덩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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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겨울날, 하얀 눈덩이가 비탈길에서 미끄러진다. 눈덩이는 비탈길을 구르며 덩치를 불린다. 사과 한 알만하던 눈덩이는 축구공만해지고, 축구공만한 눈덩이는 사람의 키를 훌쩍 넘겨 비탈길을 오르던 남자에게 쿵, 부딪친다. 쓰러진 남자의 주변으로 행인들이 모여서 웅성거린다. 그러거나 말거나 눈덩이는 남자를 지나쳐 굴러내려간다. 커다란 굉음을 내며, 코끼리보다 거대해진 그림자를 드리우며.
눈덩이 효과(snowball effect)는 작은 규모의 사건이 연쇄적으로 커지는 과정을 비유한 표현이다. 경제 및 투자 용어로 사용하기도 하고, 일상 속에서 작은 사건을 간과해서 큰 문제가 닥쳤을 때 사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표현은 무엇보다도 근현대의 사회 문제들을 표현하기에 적합하다는 생각이 든다. 오찬호 작가의 <세상 멋져 보이는 것들의 사회학>은 소외계층은 물론이고 전 인류를 깔아뭉갤지도 모르는 눈덩이들의 위험성에 대한 여러 가지 질문을 던진다. 어떻게 보면 불편할 수도 있는 질문들이다, 아니, 불편할 수밖에 없다.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한, 더 이상 그것들을 제외한 삶을 상상할 수 없는 기술과 생활 방식의 문제점을 비판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일상적인 사물의 이면에 대해 설명한다. 수세식 변기, 플라스틱, 냉장고, 에어컨, 스마트폰 등. 이것들이 없는 삶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당장 나만 해도 냉장고에서 막 꺼내 시원한 물을 한 모금 마시며 플라스틱으로 만든 노트북 자판기를 두드리며 글을 쓰고 있다. 고차원적인 기술의 집약체가 손 뻗으면 닿을 곳에 있는 것이 당연한 밀레니엄 세대로서 단 하루라도 스마트폰 없이 살 자신이 없다. 편리함을 넘어선 의존, 의존을 넘어선 중독이다. 저자는 ‘있으니까 편하다’라는 말은 ‘없으면 불편하다’로 이어지며, 기술이 주는 편리성을 한 번 경험한 뒤로는 개인과 사회 모두 이전으로 돌아갈 수 있는 관성을 잃는다고 설명한다. 한 마디로 ‘있는 것이 당연한’ 분위기가 되는 것이다.
책의 부제인 ‘그럼에도 불구하고 던져야 할 질문’들을 차례로 읽고 나면 이미 알고 있는 문제들은 물론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당연함에 대해 다시 한 번 고찰해보게 된다. 그리하여 최종적으로 세 가지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내가 당연하게 여긴 것들이 사실은 당연하지 않다는 것, 내가 혁신적이라고 여겼던 기술의 파괴성에 대해 지속적인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 마지막으로 개인이 모여 집단이 되었을 때 사회의 무게추가 기울어지며 비로소 변화가 시작된다는 것이다.
첫째로, 당연한 것이 실은 당연하지 않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숨 쉬듯 플라스틱 제품을 사용하는 것, 소비하지 않을 음식과 옷을 과도하게 쌓아 두는 것, 완벽한 몸매를 강조하는 것. 찬찬히 생각해 보면 오지선다형 문제에서 곧바로 답으로 고를 수 있는 ‘틀린 당연함’들이다. 그러나 눈 코 뜰 새 없이 바쁜 현대 사회에서는 이 당연함을 수용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큰 피로가 따라붙는다. 수면 부족 상태로 왕복 2시간을 출근하는 직장인에게 플라스틱 용기에 담긴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지 말라고 할 수 있을까? 아이돌, 다이어트, 바디 프로필이 알고리즘을 지배한 SNS 속 청소년에게 네 몸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래서 우리는 당연함의 폭력성을 모른 척하고 그냥 산다. 그렇게 쌓인 당연함들이 지구를, 사회를, 사람들의 정신을 천천히 오염시키고 있다.
저자는 부정적인 당연함뿐 아니라 긍정적인 당연함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어두운 골목길이나 위험한 작업장에 CCTV가 설치되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아이를 원하지 않는 남녀가 관계를 할 때 피임을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불과 100년, 아니 50년 전으로만 돌아가도 당연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지금 당연하지 않아 보이는 불합리함도 언젠가는 당연하게 여겨질 수 있겠다. 과거의 누가 알았을까, CCTV에 녹화된 영상으로 채 한 시간도 되지 않아 유괴범을 잡을 수 있으리라고? 또 누가 알았을까, 마가릿 생어의 피임 클리닉이 불법이던 시절, 약국에서 피임약을 손쉽게 구매할 수 있게 되리라고? 작금의 사회에 깊게 뿌리내린 차별과 모순 역시 가까운 미래에 말도 안 되는 예시로 사회학 책에 기록되기를 바라며 책을 읽었다. 어쩌면 너무 당연해 보여서 인지조차 못하고 있는 차별과 모순들을 통틀어서 말이다.
그러나 책은 여기서 논의를 마무리하지 않고 한 발짝 더 나아간다. CCTV는 당연해졌다. 피임약도 당연해졌다. 그러나 이 변화는 무조건적인 선인가? CCTV가 보편화되며 범죄율이 감소하고, 관리 및 감독이 용이해지며 인건비를 절약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CCTV로 알바생을 매 분, 매 초 감독하는 점장은 어떠한가? 유치원과 수술실에 설치된 CCTV로 사고의 맥락을 전부 추측할 수 있을까? 피임약이 구하기 쉽기 때문에 원치 않은 임신을 한 사람에게 ‘피임약 안 먹었어?’라는 질문부터 던지는 사회 분위기는 옳은가? 당연함과 당연하지 않음 사이를 오가는 ‘변화’는 대체로 긍정적인 변화, 부정적인 변화로 분류가 가능하지만 이것을 혁신, 퇴보와 같은 용어로 단정지어 버리면 깊은 논의가 불가능하다. 모든 변화에는 동전의 양면이 존재하고, 모든 당연함에는 당연하지 않음이 공존한다.
기술은 개인의 삶과 사회에 긍정적인 영향만을 줄까? 당연히 대답은 ‘아니요’다. 길거리에 지나가는 사람을 아무나 붙잡고 질문해도 아니라고 말할 것이다. 뉴스가 보편화된 시대에 많은 시민들은 핵폐기물의 위험성, 플라스틱의 해로움, 에어컨의 온실가스로 인한 지구 온난화에 대해 알고 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이 기술에서 벗어나지 못할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갈릴 것이다. 기술이 주는 편리함에 길들여지기 때문에 기술의 사용 여부는 비가역적이라든지, 기술의 단점은 또 다른 진보된 기술로 극복이 가능하다든지, 그 기술을 사용하지 않음으로서 야기되는 손실이 더 크기 때문이라든지, 그 손실을 감내해야 하는 것은 오히려 소외계층이기 때문이라든지. 좁은 방 안에서 홀로 더위를 버텨야 하는 독거노인들이 가득한데, 지구 온난화를 막기 위해 여름에 다 같이 에어컨을 틀지 말자고 외치는 것은 기만적이다. 개인적 차원의 노력만을 강조하는 것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할뿐더러 또 다른 이름의 폭력일 수 있다. 그래서인지 저자는 플라스틱 사용을 줄이라거나 에어컨 사용을 자제하라는 등 개인 차원의 실천적인 해결책을 제시하기보다는 혁신의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위험성에 대해 두루 경고하는 것에 집중한다.
책장을 덮고 ‘그래서 대체 어떻게 하라는 거냐’는 답답함 섞인 질문이 머릿속을 맴돌기도 했다. 기술이 초래하는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과학자들, 거대 기업에 맞서 싸우는 환경운동가들, 더 나은 방향으로 정책을 변화시켜 나가는 시민 집단의 지성은 한순간에 눈에 띄는 변화를 만들어 내기에는 턱없이 느려 보인다. <세상 멋져 보이는 것들의 사회학>은 정답이 무엇인지 알려 주지 않는다. 대신, 무엇이 오답인지는 확실하게 알려 준다. 이미 나쁜 습관이 들어 버렸다며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누워서 다가올 눈덩이를 기다리는 것만큼은 정답이 아닌 오답이다. 나쁜 습관을 들이는 데에는 삼 일이면 충분하지만 그 습관을 고치는 데에는 몇 달, 몇 년이 걸린다고 하지 않던가. 인류는 근 100년간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진보함과 동시에 퇴보했다. 앞으로의 100년은 조금 더 느리게 가도 되지 않을까. ‘속도보다는 방향’에 집중해야 한다는 저자의 마무리가 인상깊었다. 더 좋은 스마트폰, 더 많은 소비, 더 빠른 배달 서비스로부터 잠시 눈을 돌리고, 우리의 나쁜 습관을 천천히 되돌아보며 반성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사회적 합의(social consensus)는 사회 구성원 다수가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바를 뜻한다. 우리들의 구성원은 넓고도 다양하다. 편리함이라는 명목하에 위험에 무방비하게 노출되는 플랫폼 노동자부터, 지금 두 발을 딛고 서 있는 오염된 지구까지. 사회적 합의에 이르려면 우선 ‘우리’에 대해, 사회와 환경을 이루고 있는 구성원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가지각색의 눈덩이가 무차별 폭격을 가하고 있는 지금 눈덩이를 막기 위해서는 개인을 초월한 집단의 힘이 필요하다. 어차피 봄이 오면 눈이 녹을 텐데 무엇이 걱정이냐며 팔짱을 끼고 있는 한 개인은 다가가서 설득이라도 해볼 수 있다. 그러나 눈덩이가 벌어들이는 천문학적인 금액에 눈이 멀어 그 밑에 깔리는 사람, 그것이 파괴하는 환경에 대해서는 쉬쉬하는 거대 기업과 권력은 개인의 힘으로 막을 도리가 없다. 그들 자체가 하나의 눈덩이인 셈이다. 책에 따르면 고준위핵폐기물이 방사능을 방출하지 않기까지 보관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10만 년이 걸린다. 인간의 수명은 고작 100년이지만, 100년간 편리한 삶을 누리는 대가로 10만년이라는 시간을 책임져야 할 의무가 생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던져진 질문’에 대한 명확한 해답은 구할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질문을 던지지 않는 것’이 오답이라는 것을 상기시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책을 읽을 가치가 있었다. 무지는 죄가 아닐지언정 자신의 무지한 상태를 인지하지 않는 것, 혹은 무지에서 벗어나려는 의지조차 폄하하는 것은 죄가 맞다고 감히 적어 본다. 나 역시 크고 작은 사회 문제들을 외면하며 살아온 것이 부끄럽다. 이번 주에는 새 물건을 배송받는 대신 동네에서 중고 물품을 거래하는 것으로 저울에 아주 작은 무게추를 달아 보아야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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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려 | 박*혜 | 간호학과(간호대학 대학원) | 도서: 고통 구경하는 사회 독후감: 외로운 섬들의 연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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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종종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가장 적절한 거리에 대해 고민하곤 한다. 상대와 나 사이의 거리가 서로의 뺨에 있는 솜털까지 느껴질 정도로 너무 가깝게 느껴져 숨이 막힐 때, 또는 한 공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절대 닿지 않을 듯 한없이 멀게만 느껴져 막막함이 찾아올 때. 상대와 나의 거리가 양극단에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 고민이 시작된다. 이 고민은 여러모로 미숙했던 학창 시절부터 시작되어 졸업 후 사회에 나와 두 번의 이직을 겪고, 이제는 정말 ‘어른’이란 이름을 달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서른을 훌쩍 넘긴 지금까지도 명쾌한 결론을 내리지 못한 채 계속되고 있다. 그러는 사이 내 마음 한편에 자기 자리를 잡고 눌러 앉아버린 이 고민은 평소엔 쥐 죽은 듯 조용히 그 자리를 지키며 기회만 보다가, 내가 인간관계에 있어 부정적인 감정을 조금이라도 느낄라치면 바로 자리를 박차고 뛰어나와 마음 곳곳을 쑤시고 다닌다.
이 친구가 내 마음을 콕콕 쑤시며 밤잠까지 설치게 하는 일은 주로 나의 가족, 연인, 친구 또는 직장 동료와의 관계에 대한 문제이고 아주 가끔은 잠깐 스친 타인, 길을 걷다 발견한 고양이와 강아지 때문일 때도 있다. 이 지긋지긋한 동반자가 내 마음 속에서 활동한 가장 최근의 일은 그리 친하지 않았던 직장 선배와 관련된 일이었다.
그는 나와 같은 직장에서 근무하지만 일하는 부서와 층이 달라서 오며 가며 얼굴을 마주칠 때 인사만 겨우 하는 직장 선배였다. 별로 친하지 않은 내가 그에 대해 아는 것은 그가 항상 조금은 무심하고 느긋한 태도로 일에 임하는 사람이었고 꾸미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것 정도였다. 그런 그가 언젠가부터 직장 동료들에게 돈을 빌리고 다닌다는 얘기를 들었다. 처음엔 소액이었다가 갈수록 액수가 커저 나중엔 선뜻 빌려주기엔 꽤 부담될 만한 돈을 재차 요구하며 함께 일하는 팀원들을 불편하게 만들었단 소문은 사실 여부를 알 수 없는 무수한 추측과 상상이 더해진 채로 그가 직장을 그만두고 나서도 오랫동안 많은 사람의 입에 오르내렸다. 그의 퇴사 이후, 직장 사람들 몇 명이 직장 근처 카페에서 그를 마주친 적이 있었다. 그에게 다가가 안부를 물었을 때 그는 몹시 힘들다며 울음을 터뜨렸다고 한다. 그 모습에 당황한 사람들은 다급히 그를 달랜 뒤 자리를 빠져나왔고 그 일 역시도 속보처럼 빠르게 전해져 한동안 사무실의 주된 이야깃거리가 됐었다. 직장 사람들이 그를 만났을 때의 일은 그의 남루한 행색, 음울한 표정에 대한 묘사와 함께 전달되었고, 그와 더불어 그가 직장을 다니던 시절 동료들과 함께 가볍게 나눴을 대화의 단편들을 짜맞춰 완성된 그의 가족 관계와 가정형편에 대한 소상한 내용도 더해졌다. 나는 그가 직장을 그만두고 나서야 그를 더 잘 알게 됐다. 그가 직장 내 대화의 소재로 쓰이지 않게 된 것은 이후 그가 스스로 세상을 떠난 뒤 몇 년이 지나고 나서였다.
나는 이 일을 떠올릴 때마다 그와 나 사이의 거리는 얼마였는지 혼자 가늠해 본다. 나는 그의 고통을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먼 거리에 있었다 해야 할까, 아니면 그의 가정형편부터 그가 세상을 떠난 방법까지 다 전해 들을 수 있을 만큼 근처에 있었다 해야 할까. 그의 생전 둘이 나눴던 가벼운 눈인사와 몇 분 안 되는 짧은 담소를 되짚어보면 우린 그리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다. 하지만 당시 전해지던 그의 고난을 거의 실시간으로 전달받던 사람으로서, 나는 그의 지척에 존재하던 무정한 구경꾼이 아니었을까 하는 죄책감을 떨칠 수가 없었다. 나를 포함해 그를 아는 직장 사람 모두가 그에 대한 안타까움을 갖고 있었겠지만, 그의 재정난을 알았을 때나 그의 우울을 목도했을 때도 우리는 그의 고통을 중개하고 전달받았을 뿐 그를 위한 어떠한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그의 비극을 그저 직장 내 가벼운 가십거리로 소비한 것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일은 내게 적잖은 충격을 주었다. 기쁨은 나누면 배가 되고, 슬픔은 나누면 반으로 줄어든다는 옛말과 달리, 나의 기쁨은 타인의 질투를 유발하고 나의 슬픔은 나를 공격할 약점이자 타인의 가십거리로 전락하는 게 현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 이후로 나는 나의 슬픔을 타인에게 보이지 않도록 노력하는 동시에 타인의 아픔 역시도 내가 도와줄 수 없다면 부러 묻거나 그 주변을 기웃대지 않기로 했다. 상대와 나 사이의 거리가 너무 가까워 부담을 주고 부담이 될 바에는 차라리 멀리 떨어지는 것이 낫다는 생각이었다. 서로 부대끼며 사는 사회라지만 힘들 땐 모두가 먼 발치에서 나의 고통을 지켜보고 수근거릴 뿐 결국 나를 도울 사람은 나 혼자라고 생각하니 발을 딛고 선 땅이 조금 더 차갑고 딱딱하게 느껴졌다.
나는 최근‘고통 구경하는 사회’를 읽으며 내가 느낀 죄책감과 불편감을 조금 더 깊게 이해할 수 있었다. 기자이자 이 책의 저자인 김인정은 타인의 고통이 특종의 기회가 되는 기자로 활동하며 느낀 직업적 고뇌와 윤리적 딜레마에 대해 이야기한다. 기자는 피해자의 억울함을 그를 대신해 널리 알려주는 대리인이 될 수도 있지만 그와 동시에 피해자의 헤아릴 수 없는 슬픔이 불특정다수의 자극적인 대화 소재로 쓰이도록 만드는 고통의 중개인이 되기도 한다. 저자는 대리인과 중개인, 그 사이의 적절한 거리와 태도를 고민한다.
그러나 그는 고통의 전달자이자 구경꾼을 양산하는 중개인이 될 위험을 무릅쓰고도 사람은 ‘타인에 대한 말하기’를 멈추어선 안 된다고 말하고 있다. 타인에 대한 말하기가 멈춘다면 우리는 서로를 돕고 도움받을 기회를 영영 놓쳐버릴지도 모른다. 때로는 과하고 또 때로는 부족할지라도, 사람들은 타인의 고통을 보고 들으며 그 아픔에 공감하고, 연대를 형성한다. 형성된 연대는 행동을 유발하여 비슷한 아픔이 재발하는 것을 막고 긍정적 변화를 만들어낸다. 이를 위해 우리는 계속해서 말하고 지켜봐야 한다. 다만 타인의 고통에 어느 정도의 거리로 다가갈 것이고, 목격한 고통을 어떤 자세로 대할 것이며 그를 위해 무엇을 행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끊임없이 고민해야 할 것이다.
영국의 시인인 존 던은 그의 작품‘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에서 ‘어떠한 인간도 그 자체로 온전한 하나의 섬일 수 없으며, 모든 인간은 대륙의 한 조각이며 전체의 일부’라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이 문장을 차용하고 각색해 극 전체를 꿰뚫는 주제로 쓴 영화‘어바웃 어 보이’의 대사를 더 좋아한다. ‘모든 사람은 섬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일부의 섬들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다.’라는 극 중의 대사처럼 나는 개개인은 망망대해를 떠다니는 하나의 외로운 섬이란 생각이 든다.
사람은 너무 가까이 붙어있으면 이리저리 부딪히며 서로를 부수고, 너무 멀리 떨어져 있으면 서로의 존재를 망각하는 각각의 섬이다. 그러나 그 섬과 섬 사이를 잇는 다리들이 분명히 존재한다. 그 다리는 타인에 대한 관심과 애정, 그리고 연민의 실로 얼기설기 얽혀있을 것이다. 언제 끊어질지도 모르고, 무엇을 옮길 수 있을지도 모르는 연약하고 위태로운 다리일지라도 그것은 분명 존재한다. 나는 각 섬 사이에 다리를 놓고 그 다리에 살을 덧대어 견고히 만들어 주는 것이 바로 저자가 말하는 ‘타인에 대한 말하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자의 말처럼 우리는 타인의 고통에 대해 말하고 또 들을 필요가 있다. 다만 누군가의 슬픔에 대해 궁금해하고 알아내는 것은 그를 도울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이지 나의 개인적인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서나 흥미로운 대화거리를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것을 명심하기로 했다. ‘고통 구경하는 사회’를 읽은 뒤 나는 그 선배의 일을 다시금 떠올렸다. 그리고 그 일로 인해 새겼던 나의 일명‘안 주고 안 받기’의 규칙을 약간 수정했다. 타인의 고통에 허락하지 않은 관심을 보이진 않되, 그가 누군가 그 고통을 목도하고 들어주길 원할 땐 주저 없이 다가가기로 말이다. 무수히 많은 외로운 섬들이 너무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적당한 거리를 지키며, 서로와 서로를 잇는 견고하고 아름다운 다리를 만들 때까지 나는 이 규칙을 고수해 보고자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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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려 | 허*모 | 광메카트로닉스공학과 | 도서: 슈퍼 스페이스 실록 독후감: 우물 안 개구리도 하늘은 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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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은 오늘날 첨단 과학기술의 선두주자로 자리매김하며, 특히 반도체, 정보통신, 인공지능(AI) 등 다양한 분야에서 세계적인 기술력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고성능 스마트폰을 손에 쥐고 초고속 인터넷을 통해 지구 반대편의 사람들과 실시간으로 소통할 수 있으며, 이는 우리 생활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또한, 한국의 반도체 산업은 전 세계 전자 기기와 데이터 센터 운영의 필수적인 요소로, 글로벌 경제와 산업 공급망에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듯 수준 높은 기술력은 단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한국이 오늘날처럼 높은 과학기술 수준을 갖추기까지는 수십 년 동안의 끊임없는 노력이 뒷받침되었습니다.
불과 한 세기 전만 해도 조선은 과학기술이 크게 뒤처진 나라였습니다. 그러나 짧은 시간 동안 눈부신 발전을 통해 기술 자립을 이루었고, 우리는 세계 무대에서 영향력을 가지는 선진국 반열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과거 조선은 과학기술 발전에서 후발주자였던 것일까요? 그 이유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여러 요인이 있습니다. 우선, 조선은 끊임없는 외세의 침략과 내적 불안정으로 인해 지속적인 발전을 이루기 어려웠습니다. 이런 상황은 조선이 외부로부터 문호를 닫고 스스로 고립되게 만들었고, 그 결과 새로운 문물과 사상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외국에서 발전한 기술과 지식을 충분히 수용하지 못한 조선은 마치 우물 안에 갇힌 개구리처럼 좁은 환경 속에 머물러야 했습니다. 그러나 ‘우물 안 개구리’라는 표현이 꼭 부정적인 의미만을 가지는 것은 아닙니다. 조선인들은 우물 속에서도 외부 세계에 대한 호기심을 품었고, 밤하늘에 빛나는 별들을 바라보며 다양한 상상과 꿈을 키웠을 것입니다. 비록 제한된 환경 속에서도 선조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세상을 이해하고 탐구하며, 나름의 의미와 영감을 찾으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이 책은 한국인의 과학적 전통과 상상력이 당시 서양과 크게 다르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과학자 장영실이 개발한 해시계와 물시계, 그리고 하늘의 별을 관측하고 기록한 천상분야열차지도를 통해 우리 선조들이 이루어낸 독자적인 과학적 성취를 엿볼 수 있습니다. 장영실은 혁신적인 도구와 기구를 만들어 실생활에 적용했고, 이를 통해 당시 세계의 과학 발전 흐름에 맞춰가려 했습니다. 또한 삼국 시대에는 외국과의 활발한 교류로 별자리 관찰이 이루어졌으며, 조선 후기에는 김석문이 지구의 자전과 공전을 언급하기도 했습니다. 이는 유럽에서도 아직 정립되지 않았던 개념이었고, 당시 조선이 독자적인 천문학적 성과를 어느 정도 이루었다는 점을 시사합니다.
과거에도 우리 선조들은 세상을 이해하고 해석하기 위해 다양한 상상을 했으며, 이를 실천으로 옮기려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물론 오늘날 우리가 배우는 현대 과학의 뿌리는 조선의 과학과 다소 차이가 있습니다. 서양의 부유한 국가들은 더 많은 자원을 과학 발전에 투자할 수 있었고, 과학자들은 정치적 간섭 없이 연구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받았습니다. 이러한 배경 덕분에 유럽에서는 천문학, 물리학, 화학 등이 빠르게 발전할 수 있었고, 오늘날의 과학적 토대를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문명의 발달 속도 역시 유럽이 아시아보다 빨랐기에 아시아 문화권에서는 과학과 기술 발전이 상대적으로 늦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저자는 조금 다른 시각을 제시합니다. 한국 사회 역시 과학과 기술의 중요성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고, 다양한 발명과 발견을 통해 생활의 편의를 도모하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석빙고와 같은 전통 냉장고, 물시계와 해시계, 다양한 주조 기술들은 오늘날과도 기본 원리 면에서 유사한 방식으로 설계되었습니다. 이러한 발명품들은 발전 속도에서 차이가 있을 뿐, 우리 선조들 또한 생존과 삶의 질 향상을 위해 독자적인 지혜를 발휘하며 다양한 기술을 발전시키려 했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고대 천문학과 관련해서도 우리나라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고려 태조 왕건의 운명이 토성의 산신령에 의해 미리 정해졌다는 전설이나, 조선 태조 이성계가 금성을 향해 기도드리는 제단을 세워 매년 의식을 치렀다는 이야기는 조선 사회가 천문학적 요소를 삶에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현대 사회에서는 이러한 과학적 전통을 잘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현대 천문학은 갈릴레오 갈릴레이나 요하네스 케플러와 같은 서양 학자들이 그 기반을 닦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들 학자들은 논문과 학회를 통해 지식을 널리 전파했습니다. 우리는 이들의 논리가 현대 천문학의 정설로 자리 잡았다고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만약 조선의 천문학이 단순히 구전이 아닌 기록과 연구로 지속되었다면, 우리나라 역시 독자적인 천문학 체계를 완성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는 현대 문명이 아직 닿지 못한 원주민들이 고유한 방식으로 기우제를 지내며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모습과도 비슷합니다.
빠르게 발전하는 과학기술은 우리의 생활을 더 편리하고 풍요롭게 만들어 줍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용하는 많은 기술들은 외국의 영향을 받아 형성되었기에, 한국 고유의 전통적 가치나 문화를 직접적으로 반영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는 저자에게도, 또 이 글을 읽는 독자에게도 아쉬움을 남기는 부분입니다. 우리가 오늘날 누리는 다양한 첨단 기술들이 서양의 사고방식과 발명에 의해 큰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외국인에게 한국 음식을 소개할 때 어떤 음식을 추천하시겠습니까? 불고기, 잡채, 비빔밥 등 다양한 음식들이 떠오르겠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김치”를 소개하고 싶습니다. 김치는 한국인의 지혜와 과학적 감각이 응축된 음식입니다. 오랜 발효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그 깊은 맛을 내기 때문에, 김치에는 우리 선조들의 생활 지혜와 기술력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또한 한국인 DNA 속 매운맛에 대한 사랑도 김치 속에 녹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외국에서 김치와 같은 맛을 구현하기 어려워, 우리가 해외에 나가서도 자연스럽게 김치를 찾게 되는 것이 아닐까요? 마치 우물 안 개구리가 익숙한 환경과 음식을 잊지 못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전통을 지키고 고유의 문화를 이어가는 것은 결코 부정적인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의 전통을 소중히 간직하는 것은 우리 민족의 뿌리를 지키고 후손들에게 자긍심을 전하는 매우 뜻깊은 일입니다.
이 책을 읽고 나서 국가의 고유한 기술력 보유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깊이 있게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흔히 대학 진학이나 취업을 준비하는 시기에 ‘우물 안 개구리’라는 비유를 들어 얼마나 제한된 시각을 가지고 있는지를 경고하곤 합니다. 이러한 비유는 단순히 개인의 진로 문제에 국한되지 않고, 국가 차원에서도 유사한 맥락을 지닙니다. 독자적인 기술력을 보유하지 못한 국가는 글로벌 경쟁에서 매우 불리한 위치에 놓이게 됩니다. 이는 현대 사회에서 특히 반도체 산업을 통해 분명히 드러납니다.
반도체는 현대 전자제품의 핵심 부품으로, 이를 설계하고 제조하는 능력은 국가의 경제적 경쟁력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우리나라는 현재 반도체를 설계하는 능력이 부족하여 결국 미국의 여러 기업에 하청을 주며 파운드리 산업을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하청 구조는 국가의 독자적 기술력 부족을 더욱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더불어, 세계 최대 소비국 중 하나인 중국에게 막대한 양의 반도체 제품을 판매해야 하며, 이는 결국 중국의 반도체 기술력이 향상되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습니다. 미국은 이를 견제하려 하고, 이러한 상황 속에서 강대국 사이의 힘의 균형이 무너지는 문제도 발생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고래 싸움에서 새우등이 터지는 형국은 우리의 기술력이 미비하기 때문에 생기는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한국이 독자적인 기술력을 확보하고 있었다면, 이러한 상황에서도 주도권을 가질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현재의 상태로 인해 우리는 다양한 외부 압박에 시달리며 좌우로 치이고 있는 형편입니다.
이 책에서 다룬 것처럼 우리의 기술이 어떻게 발전해왔는지를 돌아보며,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고 우리나라의 독자적인 기술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기술은 단순한 산업 발전의 도구가 아니라, 국가의 미래와 경쟁력을 좌우하는 핵심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기술력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깨닫고, 이를 바탕으로 더 나은 미래를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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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려 | 김*현 | 사회학과 | 도서: 말리의 일곱개의 달 독후감: 스리랑카의 황야에서, 망각에 맞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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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하다. 이전의 인상이나 경험을 의식 속에 간직하거나 도로 생각해 내다, 라는 뜻이다. 기억해야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왜 잊어서는 안 되는가. 왜 힘은 망각을 바라는가. <<말리의 일곱 개의 달>>을 읽으면 그 답을 찾을 수 있게 된다.
말리는 사진을 통해 스리랑카의 어떤 이들, 또는 전 세계 어떤 이들의 눈을 대변한다. 억울한 죽음을 증언하는 그의 사진은 취재가 필요한 모든 편에 서서 역사를 기록했다. 입을 다문 시체를 담은 그의 사진은 즉, 누군가에게는 기억이 되었지만 누군가에게는 두려움이 되었을 것이다.
스리랑카는 다수민족 싱할라족과 소수민족인 타밀족 간의 분열으로 분리주의를 맞게 되었다. 18세기 영국 식민지 시대가 도래했을 당시, 영국과 친밀했던 타밀족이 사회 진출을 하게 되자, 싱할라족은 불만을 가지게 된다. 영국의 지배가 끝난 이후에는 다수민족인 싱할라족이 스리랑카를 통치하게 되면서 싱할라어만 자국어로 인정하게 되는 ‘싱할라 온리’법이 통과되기도 하였다. 이렇게 두 민족 간의 갈등이 깊어지면서 스리랑카의 위기가 도사리고 있을 때, 정부가 비밀 조직을 구성하여 반체제 인물들에게 살인, 납치, 고문 등과 같은 비인간적인 행위를 저지르게 되면서 이는 두 민족 갈등의 기폭제가 되어 타밀 반군과 스리랑카 정부는 극단적 대치를 맞이하게 되었다. 말리의 사진은 이러한 스리랑카의 1983년 폭동을 시작으로 타밀 반군과 정부군의 대립을 모두 네거티브 필름 속에 담아낸다. 자신의 존재 이유가 증언이라고 말하면서, 그 모든 일출과 학살이 자신이 필름 속에 담았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말리는 사진작가로 일하다가 자신도 모르게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눈을 떴을 때는 콜롬보의‘중간계’로 안착해 있다. 중간계에서는 일곱 개의 달이 뜨고 지는 동안 자신의 생을 되돌아 볼 수 있다. 그리고 일곱 개의 달이 다 지기 전에 망각의 빛으로 들어가면 환생의 기회가 주어진다. 그러기 위해서는 첫째, 자신의 유골에 묵상해야 한다. 둘째, 귀 검사를 받아야 한다. 이는 빛으로 나아갈 준비가 되었는지 확인하는 과정이다. 셋째, 탄생의 물에 몸을 담근다. 이는 달이 일곱 번 지기 전 모두 끝마쳐야 하며, 중간계가 존재하는 이유이다. 빛으로 가게 되면 모든 것을 잊게 되는 망각의 과정을 걷는다.
아무 잘못 없이 학살당한 중간계에 떠다니는 망자들은 일곱 개의 달이 뜰 동안만 생전의 삶을 떠올릴 수 있다. 그리고 잊어야만 한다. 책 속에서 세나는 말한다. “그들은 여러분이 잊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잊어버리면, 아무것도 변하지 않으니까요.”라고. 어쩌면 잔인한 세상은 중간계를 무척이나 원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상위 포식자들에게 적대할 힘조차 없는 약자들의 희생과 망자들의 무력함을, 7개의 달로 자신들의 만행을 말끔히 지울 수 있는 세상을 원할 것이다.
다수민족 싱할라족과 소수민족 타밀족 간 분열으로 분리주의를 맞게 된 스리랑카의 역사는 내게 짙은 향수의 잔향처럼 남아 한국의 아픈 역사를 떠올리게 했다. 작가는 대한민국과 스리랑카는 비슷한 비극의 역사를 겪었다고 말하며, 잔혹한 전쟁과 타락한 독재, 구조적 부패를 지나왔지만 중요한 차이가 있음을 강조했다. 대한민국은 멋지게 나라를 일으켜 세웠지만, 스리랑카는 여전히 나라의 부흥을 기다리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서도 중간계를 찾아볼 수 있을까? 침체된 국가에서 비약적인 성장을 일구어낸 대한민국, 그리고 끈질긴 독재로 이어져 오고 있는 북한 그 사이를 들여다볼 수도 있지만, 우리는 5.18 민주화 운동으로 작가가 제시한 중간계를 다시 한번 느껴 볼 수 있다. 우리는 5.18 민주화 운동으로 많고 많은 사람들을 잃었다. 스리랑카의 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목숨을 잃은 것처럼, 우리 또한 아픈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 망령들은 중간계에서 힘껏 소리치지만, 그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여기서도 중간계를 빌려 망각을 원하는 그들이 존재할 것이고, 그럼에도 우리는 그들에 대항해 기억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말리의 사진이 잊어서는 안 되는 것들의 기록이었던 것처럼, 우리에게는 ‘푸른 눈의 증인들’의 사진에 의해 5.18 민주화 운동이 목격되었고 세계로 진실이 알려질 수 있었다. 망각을 원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만행을 들키지 않고, 약자들이 기존의 이데올로기를 타파할 수 없게 만들기 위해서 망각과 은폐를 원한다. 우리는 단지 그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끝까지 기억해야만 한다. 책 속에서도 망각에 저항하는 인물이 등장한다. 자신을 빛의 반대파라고 소개하는 세나이다. 이는 망각의 반대파를 말하며, 잊어서는 안 된다는 걸, 잊힌 자들을 도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작가는 억울하게 죽어나간 사람들이 거치는 중간계라는 공간을 통해 스리랑카의 책임 더 나아가 세계의 잔혹함에 대한 책임을 묻는다. 중간계를 통한 망각을 원하는 자들에게 대항하는 우리의 기억은 망각의 길로 들어서지 말자고 투항하는 것 같다. 우리에게는 언제나 잊어서는 안 되는 것들이 있다. 전 세계에, 각 국가에, 사회에, 개인에게는 모두 그것들이 있다. 전쟁과 갈등을 차치하더라도 망각을 강요하는 자들과 망각하지 않기 위해서 투쟁하는 자들의 간극은 좀처럼 좁혀지지 않겠지만, 이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잊지 말아야 할 가치 중 하나로 자리잡고 있다.
더불어 우리는 진정한 악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스리랑카의 내전은 싱할라족과 타밀 반군에 의해 일어난 민족주의 갈등이다. 해당 내전은 2009년 타밀 반군 지도자인 프라바카란이 사망할 때까지 25년간 이어졌다. 수십 년간 이어져 온 박해와 저항의 굴레 속에서 저항을 선의 축에 가깝게 보기 쉽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저항이라는 미명하에 자행된 테러, 폭동, 살인은 좀처럼 선이라고 보기 힘들다. 그렇기에 둘 중의 누구에게도 선과 악이라는 가치를 부여하기 힘들다. 책에서도 “정말 두려운 것은 악이 아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는 힘을 지닌 존재, 이것이야말로 치가 떨리는 존재다.”라고 밝힌 것처럼, 악이라는 것은 쉽사리 규정하기 힘들다. 자신의 이익과, 집단의 이익을 위해서 투쟁하는 이들은 서로에게는 악이 되지만, 동족에게는 선이 된다. 그렇다면 현재 전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쟁도 악이라고 볼 수는 없는 것일까?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에 북한 파병으로 인해 세계가 초조함에 휩싸여 있는 지금, 해당 전쟁으로 인한 사상자와 피해는 어마무시한 수준에 다다랐다. 생명과 평화 그리고 문명을 파괴하는 상황에서는 보다 더 많은 가치가 말살된다. 작가는 말리를 통해 독자를 스리랑카의 아픈 역사 한 가운데에 던져놓음으로써 그 아픔에 대한 공감을 이끌어낸다. 하지만 역사의 아픔을 담은 소설이라고 해서 마냥 어렵고 무겁지만은 않다. 역사적 사실에 자신을 살해한 범인을 찾는 추리적 판타지를 가미함으로써 어쩐지 스리랑카 내전을 다루는 책임을 잊고 그 세계에 빠져들게 만든다. 이처럼 <<말리의 일곱 개의 달>>은 사진으로 정의를 찾고자 한, 금기의 사랑을 한, 스리랑카 역사 속에 존재했던 한 사람인 말리가 우리에게 역사의 잔혹함에 대한 책임을 묻는 판타지 소설이다. 또한 역사 위에 판타지가 존재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목숨과 인내 그리고 시간이 존재했을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만드는 책이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메시지는 ‘망각’이다. 흔히들 인간은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고들 한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여전히 잊어서는 안 되는 것들이 있고, 온 세계가 암흑으로 덮일 때까지 계속해서 생겨날 것이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그것을 지우려고 하는 자들에 맞서 싸워야만 한다. 잊지 말아야 한다. 억울한 희생과 잔혹함 사이에서 잃어버릴 수 없는 가치를 찾아 품에 안아야 한다. 역사의 잔혹함 속에 존재했던 사람들의 이야기, 그들이 망령이 되어 산 사람들 곁을 떠도는 이야기, 그렇기에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되는 역사의 중요성을 저 멀리 있는 스리랑카에서 전해 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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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려 | 박*홍 | 조선해양공학과 | 도서: 세상 모든 것의 기원 독후감: 시간을 넘어 피어나는 유물의 이야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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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모든 것의 기원’은 저에게 유물이 지닌 힘과 고고학자의 해석 방식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열어주었습니다. 이 책은 단순한 고대 유물의 기록이 아니라, 과거 인류의 삶과 현대를 연결하며,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본질적인 삶의 패턴을 탐구합니다. ‘잔치’, ‘놀이’, ‘명품’, ‘영원’이라는 네 가지 주제를 중심으로 인간 본성의 다양한 측면을 설명하고, 이를 통해 사람들이 비슷한 욕구와 감정을 추구해 왔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러한 면모는 오늘날 우리가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지에 대한 통찰을 제공하면서, 책을 읽는 내내 저자는 유물 해석 방식과 그 속에 깃든 인간의 역사를 더욱 깊이 느끼게 해주었습니다.
‘잔치’에서 다룬 음식 문화는 인류의 본질적인 연결을 설명하는 방식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음식은 단순히 배고픔을 해결하는 것을 넘어, 사람들이 함께 모여 유대를 강화하고 특정한 순간과 장소를 기념하는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고 합니다. 고대 유적에서 발견된 다양한 음식과 술의 흔적들은, 단순한 영양 섭취의 도구가 아니라 사회적이고 종교적인 의식으로 사용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예를 들어, 막걸리와 같은 발효주는 한국의 전통 술로서 단순히 마시는 음료가 아닌 사람들 사이의 유대를 강화하는 매개체로 사용되었다는 저자의 해석이 인상 깊었습니다. 이는 현대 사회에서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으며, 우리는 특별한 날에 가족이나 친구와 함께 술을 나누며 순간을 기념하고 유대감을 형성합니다. 음식에 대한 이러한 깊은 의미를 깨닫고 나니, 현대 사회에서의 음식 소비 방식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편리함과 속도를 중시하며 하루하루 음식을 빠르게 소비하지만, 고대 사람들에게 음식이란 오랜 시간과 노력을 들여 준비하는 소중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재료 하나하나에 정성을 다하며, 음식을 통해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형성하고 유지했습니다. 그래서 가끔은 음식이 주는 의미를 소중히 여기고, 그것이 단순히 먹고 마시는 행위가 아닌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는 점을 기억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고대 유적 속에서 이어져 온 음식 문화의 가치를 보며, 가족이나 친구와 함께한 식사 시간이 떠올랐습니다. 이런 소중한 시간이 단순한 소비가 아닌 깊은 의미가 있다는 점을 다시 한번 배웠습니다. ‘놀이’에 관한 이야기도 새로운 통찰을 제공했습니다.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유적에서 발견된 주사위나 작은 인형, 놀이판 등은 과거 사람들이 단순히 생존에만 몰두하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여가를 즐기고, 놀이를 통해 창의적인 표현을 하며 기쁨을 누렸습니다. 책에서 설명하는 고대 놀이 도구들이 단순한 장난감이 아닌, 그 시대 사람들의 정서적 욕구와 공동체 내에서의 소통 방식을 가장 잘 드러내는 상징이라는 점이 흥미로웠습니다. 인간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삶의 의미와 가능성을 탐구해 온 존재인 것이며, 또한 놀이를 통해서만 표현할 수 있는 자유와 기쁨은 어린아이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성인들에게도 중요한 본능이라는 사실도 새삼 깨달았습니다. 놀이가 인간에게 주는 의미는 단순히 시간을 보내는 것을 넘어, 내면의 감정과 생각을 표현하고 타인과 연결되는 방법인 것 같습니다. 현대에서도 우리들은 스포츠, 게임, 예술 활동 등을 통해 기쁨과 성취감을 느끼며 삶의 활력을 찾곤 합니다. 이에 놀이가 주는 자유와 창의성은 단순히 시간을 보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본질적 특성인 것이며, 우리가 어떻게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표현하고 타인과 연결되기를 원하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이러한 본능이 시대를 초월해 인간의 중요한 특징으로 남아 있음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명품’이라는 주제에서는 사람들이 외모를 통해 자신을 표현하고자 하는 욕망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 특히 공감이 되었습니다. 저도 누군가에게 좋은 인상을 남기고 싶은 순간에 더 정성을 들여 준비하곤 했기에, 이것이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능임을 느꼈습니다. 예를 들면, 신라 시대의 금관이나 고대 이집트의 화려한 장신구는 단순히 아름다운 물건이 아니라, 개인의 자부심과 사회적 지위를 나타내는 상징이었습니다. 이들은 단순한 도구를 넘어, 소유자의 권력과 정체성을 드러내며 자신을 타인과 차별화하려는 수단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책은 이러한 장신구들이 과거부터 현재까지 인간의 본질적인 욕구와 연결된 상징이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현대 사회에서도 우리는 명품이나 패션을 통해 자신을 표현하고, 성취감을 드러내며,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고자 합니다. 저 역시 평소 외형을 가꾸는 것이 단순한 치장이 아니라 정체성을 드러내는 수단으로써 여기고 있는데, 이는 인간의 본능적인 표현 욕구로 단순한 소비를 넘어 타인과 소통하고 사회적 존재로 자리 잡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영원’에 대한 이야기가 가장 깊은 인상이 남았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죽음을 맞이하게 되지만, 과거의 사람들은 죽음을 단순한 끝이 아닌 새로운 여정의 시작으로 받아들였습니다. 특히 한반도 고분에서 발견된 유물들을 통해 죽음 이후에도 가족들과 함께하고자 하는 마음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믿음을 통해 삶의 의미를 더 크게 느꼈던 것 같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인간은 죽음을 두려워하면서도 그것을 초월해 서로 영원히 연결되고자 하는 강한 소망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 파트를 통해 죽음이 단순한 생의 종착점이 아닌,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관계가 이어지는 또 다른 시작일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죽음을 맞이하며 소중히 여겼던 물건을 무덤에 함께 묻고, 남은 사람들이 그를 기억하게 하려는 마음은 인간의 깊은 연대와 사랑의 표현이었습니다. 이러한 죽음에 대한 이해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중요한 통찰을 제공하는 듯합니다.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관계는 우리의 삶을 더욱 의미 있게 만들며, 죽음 이후에도 우리를 이어주는 중요한 끈이 되곤 합니다. 인간이 가진 본능적 관계 욕구와 죽음을 초월하는 연대의 힘을 새삼 인식하게 되었으며, 다시금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순간을 소중히 여길 수 있도록 노력하게 되었습니다. 고고학은 과거를 탐구하는 학문이지만 그 가치는 현대와 미래에까지 깊이 이어지는 것 같습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유물을 해석하여 과거의 이야기가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설명합니다. 과거 사람들의 삶의 흔적을 통해 우리는 잃어버린 가치를 되새기고, 현대 문제에 대한 통찰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동서양의 교류와 문화적 영향을 보여주는 다양한 유물들은 인류가 오랜 시간 동안 서로 소통하고 협력하며 발전해왔음을 알려줍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협력보다는 견제와 갈등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는 듯합니다. 과거의 교류와 협력의 의미를 되새기며, 오늘날에도 서로를 이해하고 협력하는 자세를 되찾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같은 맥락으로, 과거를 되돌아보는 것은 단순히 과거의 이야기를 찾는 데 그치지 않고 현대와 미래의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데 필요한 작업입니다. 고고학은 인간이 오랜 시간 동안 이루어온 성취와 실패, 그리고 그로부터 얻은 교훈들을 통해 현재와 미래를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 수 있도록 돕습니다. 현대 사회의 빠른 변화와 기술의 발전 속에서 우리는 종종 과거의 지혜를 간과하고 앞만 보고 나아가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 책을 통해 과거의 유물들이 지금 우리 삶 속에서 어떤 교훈을 줄 수 있는지를 되새기게 되었고, 이러한 통찰을 통해 우리가 잃어버린 가치를 다시 발견하며 미래를 위한 방향성을 잡아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환경 문제나 사회 갈등을 해결할 때도 이런 지혜가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덧붙여, 개인의 정체성과 문화적 유산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도 깨달았습니다. 글로벌화된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종종 자신의 문화와 전통을 잊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고고학을 통해 우리 민족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고 자부심을 가질 수 있다면, 이는 개인의 정체성 확립과 사회의 다양성 존중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 책은 이러한 점에서 우리에게 문화적 자긍심과 정체성에 대한 중요성을 일깨워줍니다. 앞으로 저 역시 우리 문화와 전통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개인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더욱 힘써야겠다고 느꼈습니다. 또한, 글로벌 사회 속에서 서로의 문화를 존중하며 조화롭게 살아가는 자세를 가져야겠다고 다짐하게 됩니다. 결론적으로, ‘세상 모든 것의 기원’은 우리에게 유물을 통해 인류의 본질과 살아가는 방식에 대한 깊은 이해를 제공하며, 동시에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도록 합니다. 이 책을 통해 고고학이 단순히 과거를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그 기록을 바탕으로 현재와 미래의 가치를 새롭게 재해석할 수 있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느꼈으며, 앞으로 과거의 지혜를 바탕으로 현대를 바라보고 미래를 설계하는 데 적극적으로 활용하고자 합니다. 이는 개인의 성장뿐만 아니라 인류 전체의 발전에도 기여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빠르게 변화하는 기술과 정보의 홍수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과거의 지혜와 경험을 무시하고 앞으로만 나아가는 것은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과거의 실패와 성공에서 배운 교훈을 토대로 우리는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으며, 이는 개인의 삶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의 발전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따라서 고고학과 역사에 관한 관심을 지속적으로 가져야 하며, 이를 통해 우리 자신과 사회를 더욱 깊이 이해하고 발전시킬 수 있을 것이라 봅니다. 이 책을 통해 얻은 통찰과 깨달음을 바탕으로, 앞으로의 삶에서 과거의 지혜를 존중하고 현재를 충실히 살아가며 미래를 설계하는 데 힘쓰고자 합니다. 이는 저 자신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과 사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길이라고 믿습니다. 고고학이 주는 감동과 교훈을 많은 사람들이 함께 느끼고 공유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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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려 | 이*경 | 지역주민 | 도서: 행복은 뇌 안에 독후감: 공감하며 살고 있습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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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까지 나의 마음을 뒤엉킨 실타래처럼 복잡하게 만드는 단어가 있었다. “공감”이다.
최근 우연히 읽은 책, [행복은 뇌 안에]가 나를 공감 가운데 데려가 놓았다. 읽는 내내 양쪽 어깨 가득 나의 무거운 짐, 공감에 대한 고민이 함께였다. 다행히도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을 쯤엔 한 동안 나를 괴롭혔던 공감과 비로소 화해할 수 있었다. 혹 지금 이 순간, 공감이 어렵다면 잠시 내 이야길 들어보시라.
보통 공감에 대해 검색하면 [대상을 알고 이해하거나, 대상이 느끼는 상황 또는 기분을 비슷하게 경험하는 심적 현상]이라고 정의한다. 이 정의를 따라 표면적으로 공감을 받아들이면 특별히 불편한 것이 없을 수도 있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으며 함께 울고 웃는 일은 우리의 삶 전반에 녹아 있다. 이처럼 자명해 보이는 공감은 때때로 나를 불편하게 했다. 스스로가 공감력이 낮은 사람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상담이나 면담 장면 같은 직업적 상황은 논외로 두고, 평범한 일상 속 공감 말이다. 상대와의 물리적·심리적 거리감 문제는 아니다. 때로는 밀접한 사람과의 대화중에서도 한계들이 고개를 들었다. 상대가 꺼내는 그 마음을 온전히 따라가지 못해 한 발자국도 내딛지 못하고 홀로 발을 동동 구를 때가 있다. 같은 공간 속 나 홀로 외딴섬이다. 다른 사람들은 고개를 주억거리기도, 한숨을 쉬기도, 함께 눈물짓기도 하며 동행하는 중인데 나만 고장 난 로봇처럼 버벅거리고 있다. 보통 그런 순간들은 첫째, 내가 잘 알지 못하는 미지의 영역이거나 둘째, 나와는 전혀 다른 감정이 피어나는 순간들이었다. 내가 미처 겪어보지 못한 미지의 세계 앞에서는 감히 그 어떤 명함도 내밀 수 없었다. 도저히 ‘그 마음 내가 잘 알지’라고 할 수가 없다. 어설프게 위로의 말을 전하기엔 내 깊이가 너무 얕고, 그냥 이성적인 판단 하에 현실적 대안만을 제시하기엔 내가 너무 선을 넘는 것 같다. 후자도 힘들긴 마찬가지다. 나 혼자 아예 다른 경험과 감정 노선을 걷는 셈이다. 이야기를 들으며 ‘이게 진짜 그럴 일인가? 그렇게 느낀다고? 진짜?’ 막막하고 황당하다. 그럴 때마다 공감이 자연스럽지 않은 일처럼 느껴졌다. 남들은 이야기 시작과 동시에 매끄럽게 감정의 물살을 함께 타는 것 같은데, 왜 나만 이렇게 부자연스럽고 힘든가 싶다. 단순히 요즘 사람들이 좋아하는 MBTI의 힘을 빌려 나는 F가 아니라 T라서 그렇다고 포장하기에는 영 시원하지 않다. F와 T가 단순히 그런 의미는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이쯤 되니 좀 더 근본적인 물음으로 회귀한다. 공감이란 대체 무엇인가. 고민스럽다.
일반적으로 누구나 공감 능력을 타고 난다. 그럴 준비가 되어있다. 우리 머릿속 깊숙이 자리 잡은 거울 뉴런 덕분이다. 특정 행동을 수행하거나 다른 사람이 그렇게 행동하는 것을 관찰할 때 흥분하는 전두엽의 뉴런을 말한다. 원숭이가 직접 바나나를 쥘 때나, 상대가 바나나를 손에 쥐는 것을 관찰할 때 똑같은 뉴런이 흥분한다는 뜻이다. 본격적으로 만 3세 이후가 되면 마음 이론을 획득한다. 다른 사람의 심적 상태를 추론하는 것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테이블 위에 놓인 반창고 상자를 열었더니 반창고 대신 연필이 튀어나온다. 아이들은 예상치 못한 이벤트에 즐거워한다. 이제 실험자가 묻는다. ‘상자 안을 본 적 없는 친구에게 이 상자를 보여주면, 무엇이 들어있다고 생각할까?’ 만 3세 이전의 아동은 본인이 본 것 그대로 답한다. ‘연필이요!’ 만 3세 이후의 아동은 웃음이 먼저 터진다. ‘반창고요!’ 다음 친구들을 속일 생각에 벌써부터 신이 나 있다. 타인의 관점을 이해한 것이다. 본격적인 공감의 시작이다.
우리가 아니, 적어도 내가 공감을 대할 때 장벽을 느끼는 지점은 그 이후에 일어나는 것으로 보인다. 공감이 무엇인지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탓에 ‘나는 당신의 상황을 알고, 마음을 고스란히 느끼고, 때문에 지금 당신을 온전히 이해한다.’라는 수동적 공감의 덫에 걸리고 만다. 어쩌면 이미 잘 발달된 공감 능력을 갖고 잘 기능하고 있는지도 모르는데, 덫에 걸리는 순간 내가 공감 능력이 부족한 것만 같은 괴로운 고민이 시작되는 것이다. 공감은 수동적 감정 노동이 아니다. 누군가 고통 받는 순간에 연민을 느끼는 것도 공감이지만, 다른 사람이 나와 다를 수 있음을 알고 인정하는 능력 역시 또 다른 공감이다. ‘우리는 의견이 다르지만 친구가 될 수 있어’라는 열린 태도를 간과한 나는 그만 공감의 덫에 걸렸던 것이다. 그뿐일까. 자신의 말을 멈추고 상대의 말을 경청하는 것, 서로가 처한 상황을 고려해 협력하는 것, 상대에게 필요한 도움을 기꺼이 제공하는 것도 공감의 행동적 측면일 수 있다.
다시 되묻는다. 공감이란 무엇일까. 머리로는 알면서도 오랜 시간 걸려있던 덫에서 풀려나기란 여전히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지금, 내게 공감은 조금 더 선명한 거울이 되었다. 나에게 있어 공감은 ‘상대를 비추는 거울이 되어주는 것’이다. 네가 지금 이런 상태구나, 있는 그대로를 선명하게 비추어주는 것 말이다. 거울 뒷면의 나는 당신과 100퍼센트 똑같지 않을 수도 있다. 대부분의 상황에서 나는 사실 당신이 느끼는 모든 것을 오롯이 다 느끼지도 못할뿐더러, 당신이 겪고 있는 그 순간들을 태어나 단 한 번도 겪어보지 못했다. 그럼에도 당신은 그럴 수 있겠다, 수용해 주고 인정해 주는 거울을 들고 상대 앞에 선다. 나와 너를 함께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나와 너의 다름을 받아들인다. 결국 진짜 공감의 출발은 나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친다. 상대를 향해 들고 있는 마음의 거울을 돌려 그 앞에 내가 선다. 나를 있는 그대로 비추고 알아차린다. 나에 대한 솔직한 이해가, 수용이 가능한 사람만이 다른 사람에 대한 무조건적인 인정과 수용도 가능하다.
이까지 정리하고 나면 마지막 챕터에 이르러 공감과 기후위기가 왜 함께인지도 충분히 납득 가능하다. 올 여름의 기록적인 무더위를 경험한 이상 뻔뻔하게 모른 척 덮어두기 힘들어 진, 우리의 피부로 직접 느껴지는 기후위기. 이러한 시대에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자질 첫 번째는 어쩌면 공감일 지도 모른다. 개개인의 노력이 무용하다는 뜻이 아니다. 이제는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그러한 변화를 실현해낼 정체체계를 구성하기 위해서는 서로 연대하고 집단을 꾸려야 한다. 이 변화의 대목에서 공감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기후위기에 취약한 지구 반대편 사람들, 실제로 기후위기의 피해를 입기 시작한 우리와 다음 세대, 기후위기에 관련된 수많은 사람 사이에서 제대로 된 공감이 이루어져야만 힘 있는 변화가 가능해진다. 우리 모두 스스로를 자주 비추고, 마주하고, 들여다보며 이 거울을 반짝반짝 닦아내는 시간이 필요하다. 나의 그대들과 연결되는 공감에 한 걸음 더 다가가는 일이겠다. 보다 선명하고 깨끗한 나만의 공감 거울을 가꾸기로 한다. 다음번 당신을 비출 때는 어제보다 오늘, 오늘보다 내일 더 따뜻한 거울로 당신의 이야기를 기다릴 것을, 귀 기울일 것을 다짐한다. 제목의 이유가 좀 더 선연하게 다가온다. 왜 공감이 아닌 행복이라고 붙였는지, 어째서 ‘내 안’ 이기도 ‘뇌 안’이기도 한지, 왜 알록달록 여러 빛깔의 조화로 표지를 디자인했는지 하는 것들 말이다. 많은 이들에게 이 책이 가 닿기를 바란다. 임팩트가 강한 강연 영상(2021년 티앤씨 재단의 우공이산 콘퍼런스 내용을 엮은 책이므로)을 몰아보는 것도 좋겠으나 진득하게 마음에 뿌리를 내릴 수 있는 글의 힘을 믿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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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려 | 김*범 | 지역주민 | 도서: 행복은 뇌 안에 독후감: 공감에 지친 이들을 위한 독후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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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싸웠습니다.
계속되는 연휴와 징검다리 휴일에 기쁘게 취해가던 중 찾아온 사소한 다툼이었어요.
다툼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우리의 관계에 대해 이야길 해야겠네요. 국가에서 공인한 7년이라는 신혼 기간 중 어느덧 절반을 넘는 시간을 함께 해온 우리는 정말 사이가 좋았습니다. 결혼 전 7년의 연애 기간이 무색할 정도로 지독하게 붙어 다녔고 꾸준히 생각과 감정을 나눴어요. 부부는, 아니 특별히 우리는 일심이며 동체라고 믿었습니다. 이유는 몰랐고 지금도 잘은 모르겠지만 우리 사이에 대한 왠지 모를 자신도 있었죠. 그랬던 우리인 만큼 사소한 다툼이 꽤나 크게 다가왔습니다.
다툼이 있고 나서야 우리의 시차가 보이기 시작했어요. 문제가 생기면 저는 즉각적인 소통을 원했지만 아내에겐 감정을 가라앉히고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어요. 그리고 그 시간은 제 오해를 멋대로 키우기엔 충분히 길었죠. 집을 나와서 한참을 혼자 걸었습니다. 일심이라 믿던 우리의 관계에 몰랐던 감정이 끼어드니 심란했습니다. 머릿속을 맴도는 이 감정을 어떤 단어로 정의해야 할지 도저히 모르겠더라고요. 머리가 복잡한 만큼 실망은 커져만 갔습니다.
오해가 풀리기까진 며칠이 걸렸어요. 감정이 켜켜이 쌓이다 보니 어느 정도의 대화로는 해소가 되지 않더군요. 저는 상처받은 마음에 과장을 덧붙여 표출하기 바빴고 무조건적인 사과와 공감을 바랐어요. 마지막에 마지막을 향한 감정의 평행선을 달리던 중, “내가 뭘 그렇게까지 잘못했다고..”라고 울먹이는 아내의 한 마디에 머리가 하얘졌습니다. 내가 지금껏 뭘 하고 있었던 거지..
그동안 저는 모든 문제는 대화와 공감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어요. 복잡한 감정을 단어로 정의하고, 대화로써 공유하면 간단하리라고 말이죠. 그리고 이 책을 통해, 그 전제부터 잘못됐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저자는 말하더군요. 감정 단어라는 건 단지 감정에 관해 타인과 소통하기 위해 만들어낸 인간의 도구에 불과하다. 정의할 수 없더라도 중요한 건 감정의 소통이므로 이 도구에 감정을 억지로 끼워 맞출 필요는 없다. 복잡한 감정을 단어로 정의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일인데 그 감정을 간단히 공유하려 하다니.. 심지어 짧은 시간 안에! 제가 알던 공감은 제대로 된 공감이 아니었던 거죠. 저는 타인과 공감하면 상대방도 나와 똑같은 감정을 경험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공감은 생각보다 훨씬 더 자기중심적이라는 사실을 놓치고 있었네요.
제가 하고 있던 공감은 사실은 제 인정 욕구에 불과했던 건가 싶기도 합니다. 내가 공감을 잘 하고 있다고 아내가 인정해 주기를 바라왔던 거죠. 그리고 그 욕구를 잘못 쓰고 있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어요. 인정 욕구는 꼭 특정 타인이 충족시켜줘야만 하는 건 아니라고 하더군요. 이런 잘못된 생각으로 인해 내 욕구는 타인의 행동에 종속되고, 결국 내 인정 욕구와 감정을 낭비하는 일이 될 수 있기 때문이에요. 이 모든 건 사소한 다툼 속에서 아내에게 인정을 받지 못한다고 느낀 제 감정이 낭비되어 일어난 일이었던 거죠. 생각이 여기까지 다다르자 마음이 한결 후련해짐을 느꼈습니다.
그날 이후, ‘행복은 뇌 안에’라는 책을 통해 자기 공감부터 천천히 배우고 있습니다. 복잡하고 다양한 내 감정을 하나의 단어로 정의하는 것에 집착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느끼려 노력 중입니다. 감정은 원래 복잡한 것임을 인지하고, 되레 단순하고 명확할 때를 의심하고 있어요. 여러 감정 중 무언가를 선택해야 한다는 압박감에서 벗어나니 내 상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가 더욱 쉬워졌습니다. 자기 공감을 노력하고부터 느낀 놀라운 점은 내게 진짜 중요한 것, 내게 정말 필요한 욕구를 스스로 알아주는 것만으로도 그 욕구가 충족된 것과 같은 에너지가 채워진다는 거예요. 또한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다양한 대안을 발견하기 위해 삶을 바라보는 시야까지 넓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나를 나로서 볼 수 있게 되니, 평소에 내가 느끼던 느낌의 원인이 모두 내 욕구 안에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어요. 여러 감정이 나에게 신호를 보낼 때 내게 무엇이 중요해서 이런 마음이 드는지 내 안을 살펴보는 것, 그것이 자기 공감을 단련하는 방법이라는 사실을 몸소 배우고 있습니다.
책을 읽으며 아차 싶었던 다른 한 가지는 바로 공감과 관점 이동이 서로 매우 다른 심리 기제라는 점입니다. 공감은 자신의 익숙한 신체 내부 상태가 그대로 투사되는 과정이고, 관점 이동은 내가 아닌 타인과 외부 환경에 더 집중하는 과정이라고 하더군요. 이 개념을 처음 접했을 땐 이러한 분류는 불필요해 보이는데.. 꼭 필요한가?라는 의문이 들었지만 자세한 예시 덕분에 쉽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관점 이동의 목적은 생존하는 것 혹은 원하는 바를 얻어내는 것으로, 잠시 자기 관점을 버리고 상대의 관점을 취하여 전혀 다른 사람을 이해할 때 사용하는 심리 기제입니다. 하여 우리가 알고 있는 공감은 안정적이고 쉬우나 오류 가능성이 높은 대신, 관점 이동은 노력이 많이 필요하고 자기중심성에서 벗어 날 수 있어 정확성이 높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자기중심성을 내려놓고 다른 사람을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관점 이동은 좀 더 이성적인 방향성을 가진 공감이라고 볼 수 있겠네요.
대부분의 정보 교류가 온라인에서 이루어지는 요즘, 어느 순간 우리의 삶이 AI 기반 알고리즘에 점령당한 듯하여 무서울 때가 있습니다. 비슷한 성향의 정보와 사람들만 접하다 보니 나와 전혀 다른 존재에게는 공감하지 못할뿐더러 공격성까지 드러내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것 같습니다. 저부터도 타인의 다른 생각에 공감하지 못하고 나와 다른 사람이라는 태깅 후 외면해버리는 경우가 많은데요. 그래서 더욱 공감이라는 단어 자체에 피로감을 느끼는 요즘인 것 같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관점 이동이지 않을까요? 나를 내려놓고 타인의 관점에서 바라보자! 나와 내 알고리즘 친구들을 내려놓고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과 함께 하며 생각의 폭을 넓히다 보면, 지능이라 일컬어지는 공감 능력이 조금은 향상되지 않을까요?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나를 감싸고 있는 껍질을 스스로 깨는 희생이 필요할 테고요. 이것이 인생에 있어 다양성과 안주하지 않으려는 도전 정신이 항상 필요한 이유인가 봅니다.
다시 우리 부부의 이야기로 돌아와보면, 물론 좋습니다. 이 책 덕분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외면하는 불쾌하고 부정적인 감정을 함께 직시할 수 있었고 섬세하게 파고들어 완전히 해소시켰습니다. 이처럼 항상 화려한 경험이 중요하지만은 않은 것 같아요. 일상적인 경험 속에서도 새로운 감정과 경험을 얼마나 깊이 파고들어 체화했는지가 훨씬 더 중요합니다. 이러한 작은 배움들이 쌓여가다 보면 서로를 이해하고 헤아릴 수 있게 되겠죠.
특히나 부부 사이엔 이런 배움이 너무 중요한 것 같아요. 요즘 TV 매체에 결혼은 원래 힘든거다, 안 힘들면 결혼이 아니라는 등의 희화화가 많이 보이는데, 불편한 감이 없지 않네요. 이 사회가 부부라는 관계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것 같아서요. 물론 서로 다른 두 사람이 만나 가장 가까운 사이가 되는 과정이 쉽지만은 않겠죠. 하지만 더불어 사는 사회의 가장 기초단위인 부부 관계의 부족함을 그저 웃고 넘겨버릴 만한 일은 아니라고 봅니다. 공감의 부족 혹은 오해에서 비롯된 문제들을 정확히 인식하고 개선해 나가는 모습이 더 많이 보이길 바랍니다. 행복은 뇌 안에 처럼요.
당연한 공감은 없는 것 같아요. 가장 기본적이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쉽게 인지하지 못하는 우리의 문제에는 많은 배움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자체적으로 내린 저희 부부 솔루션은 앞서 배운 교훈과 동일합니다. 공감을 바라지만 말고 먼저 알을 깨고 나가기!
배우면 배울수록 공감은 결코 글로 배울 수 있는 지식이 아닌 것 같네요. 사랑이 그러하듯이 말이죠. 저희 부부는 공감이란 직접 경험하며 체득하는 삶의 태도이자 사람을 대하는 자세라고 배워가는 중이고요. 공감에 지친 당신에겐 타인의 관점에서 생각해 줄 수 있는 여유가, 조금은 더,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네요. 사랑합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