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도서관 독후감 공모전

2019.11.18

선정도서 12종 240권
참가대상 부산대학교 학부생, 대학원생 및 부산 지역 주민
참여방법 도서관 독후감 선정도서(1인 1책, 선착순)를 수령 후 자유롭게 독서하고 해당 도서의 독후감 제출
참여기간 2019년 9월 9일 ~ 10월 20일
시상내역 총 8편(부산대 총장상 및 도서관장상, 총상금 160만원)
  • 본 사업은 부산대학교 국립대학육성사업(REN)의 예산을 지원받아 운영되었습니다.
우수 독후감 선정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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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 이름 학과 선정도서/독후감제목 보기
최우수 김*정 국어교육학과 도서: 타인의 고통
독후감: 타인의 고통-연민과 불편함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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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사람들이 바다 건너 일어나는 전쟁과 그 모습을 어떻게 접할 수 있었을까? 다양한 방법들이 있었겠지만, 이 책에서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사진’을 통해 형상화된 ‘이미지’의 전달이다. 카메라가 발명된 이후 사람들이 폭발적으로 열광한 이유는 사실적인 이미지가 그대로 전달되었기 때문이다. 사진은 객관적인 ‘증거물’이라고 착각하기 쉽지만, 작가의 ‘의도’가 들어갈 수밖에 없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초기 사진술이 ‘사실주의’와 결합했다는 것이 모순적이라 약간의 실소가 유발되기도 한다. 아니나 다를까, 사진작가들은 ‘포토저널리즘’이라는 새로운 바람을 사회에 불러일으켰고, 작가들의 셔터 한 번에 전쟁의 의미가 달라지기도 했다. 어느 쪽을 찍느냐에 따라 ‘젊은이들의 무의미한 희생’과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군인들의 용맹한 모습’이라는 상반된 메시지가 전달 될 수 있다.
‘수많은 난민의 죽음은 통계가 되고, 한 사람의 죽음을 전하는 사진은 전 세계가 주목할 비극적인 사건이 된다.’라며 인터넷에 떠도는 말이 있다.
– 이 장에서도 알 수 있듯이 ‘사진’의 역할은 중요하다. 다시 말해, 작가의 ‘의도’가 가진 힘은 굉장히 크다. 만약 사진작가가 이 사람의 죽음을 동정하게끔 사진을 찍지 않았다면 사람들이 사진을 보고 소년에 대해 연민하였을까? 책에 잠깐 언급되었듯이, 전쟁이나 죽음도 미학적인 요소에만 집중한다면 아름답게 연출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당사자(물론 죽은 자는 말이 없다)나 유가족의 동의도 없이 고인의 마지막 모습을 어떠한 엄숙함, 숭고함도 없이 비참성만을 부각하여 찍은 것은 비판받을 부분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저자도 이 부분에 대해서 굉장히 강조하는 것이 있다. ‘함부로 연민하지 말라.’[연민은 변하기 쉬운 감정이다.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이런 감정은 곧 시들해지는 법이다.(153p)] 전쟁의 참상을 담은 ‘이미지’를 보고 ‘연민’하지 말라는 저자의 주장은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면이 있다. 흔히 TV에 노출되는 유니셰프 광고에서도 그 어떤 서사도 없이 단순히 보는 이의 연민을 불러일으킴으로써, 후원을 부추기지 않는가? 그리고 일부 사람들은 정기소액결제만으로 그것이 마치 후원하지 않는 사람에 비해 ‘도덕적으로 성숙한 사람’이라는 자격증을 받은 것 마냥 싸구려 우월감과 자기만족에 취한다. 이는 순수한 목적에서는 벗어난다만, 저자의 관점에 따르면 실천한다는 점에서 생각만 하는 것 보다는 올바른 행동이다. 하지만, 실천으로 옮길 수 없거나 옮기는 게 낫지 않은 경우는 어떻게 해야 좋을까?
[현대성의 시민들, 스펙터클이 되어버린 폭력의 소비자들, 전쟁터에 직접 가보는 위험을 무릅쓰지 않고도 그 참상을 세세히 말하는 데 정통한 사람들은 진실해질 수 있는 가능성을 비웃도록 단련되어 있는 사람들이다.(164p)] 정보가 범람하게 된 현대 사회에서는 이 구절이 정말 공감이 갔는데, 현 시대에서도 이러한 부유층(재력, 권력, 정보 등의 부유층)들의 기만은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난다. 그 중에서도 예를 들자면, 매체에서 비춰지는 소위 ‘흙수저’ 계층은 틀에 박힌 이미지이거나 부유층들이 상상하는 막연한 이미지로 그려지는 것이 대부분이다. 영화 ‘기생충’에서도 주인공 가족들은 4인 가족이 전원이 의욕 없고 한심한 백수인데다가 부잣집에 기생하여 사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그려진다. 이 얼마나‘가난은 게으른 사람들이나 겪는 것이다’라는 기득권적 사고에 편향된 이미지인가. 특권층은 단편적인 이미지들에서 취한 정보만으로 그들이 진정한 고통에 공감하는 메시아라도 된 듯 선민의식을 가지고 약자를 대한다. 이 경우, 실천으로 옮기는 것이 과연 연민만 하는 것보다 낫다고 할 수 있을까? 그릇된 인식을 바탕으로 한 실천보단, 저자가 말했듯이 [특권을 누리는 우리와 고통을 받는 그들이 똑같은 지도상에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의 특권이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 보는 것 (154)] 이 우선적인 과제라고 생각한다. ‘가난마저, 고통마저 도둑질당하는 이 세상에서 진정한 약자들은 도대체 어디서 도움을 요청해야 하는가?’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구절(164p)이었다.
그리고 사진작가의 의도대로든, 불쌍한 이에 대한 연민을 종용하는 사회적 교육의 문제든 간에 나도 모르게 그들, 약자들의 죽음을 연민의 대상으로만 소비하며 살아왔다. 이는 앞에서 말한 부유층의 기만과 다를 바 없다. 과연 내가 전쟁난민의 입장이거나 지금도 전쟁이 일어나는 지역에서 태어난 사람이었다면 소년의 죽음에 대해 연민과 공포 중 무엇을 느꼈겠는가? – 답은 당연히 후자다. 한국에 만연한 안전 불감증과 더불어 ‘우리'(여기서 말하는 우리는 나를 포함해서 안전한 사회체계 속에 살아가는 기득권층이다)가 타인의 고통과 죽음에 무감각한 것은 마음 한편으로는 우리가 안전한 위치에 놓인 기득권층임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사진배경이 되는 장소가 될 수 있는 한 멀리 떨어져 있고 이국적일수록, 우리는 죽은 자들이나 죽어 가는 자들의 정면 모습을 훨씬 더 완전하게 볼 수 있다. (109p)] 이런 생각에 미치자, 그때서야 저자가 연민하지 말라고 했던 이유에 대해 어느 정도 공감할 수 있었다. ‘연민’은 특권층 자신들이 고통의 원인에 연루되지 않았다는 무고함을 내세운 치졸한 감정이었기 때문이다. 나 또한 특권층에 속하는 사람으로서, 앞으로는 기만적인 입장에서 벗어나서 고통 받는 이들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는 방안을 고안해보기로 다짐했다. 그리고 개인적인 차원의 노력뿐만 아니라 국가적인 차원에서도 전쟁이나 기아와 같은 인재(人災)의 피해를 최소화하거나 예방하는 방안을 국제적 공조를 통해 마련하는 것이 시급하다 생각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저자의 생각에 공감하는 부분도 있었지만 나와 생각에서 차이를 보이는 부분도 존재했다. 저자는 일반 가정집에서도 TV로 전쟁을 목격할 수 있게 되면서 그것이 일종의 유흥거리로 전락했다고 주장한다. 반복되는 자극적 이미지가 타인의 고통에 무감해지는데 일조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사람들이 무감한 이유가 앞 문단서 밝힌 ‘특권층으로서 안전함’을 자각하고 있기 때문이지, 자극적인 것에 무뎌졌기 때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치의 악행을 고발하고 있는 영화 <피아니스트>를 예시로 들어보겠다. <피아니스트>는 개연성이 있고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이지만, 그럴듯한 ‘이미지’의 재현일 뿐 ‘현실’은 아니다. 만약 <피아니스트>가 아니라, 수많은 시체들이 공사장에서나 볼법한 중장비들로 대충 치워지거나 바퀴에 깔려 으스러지는 ‘실제장면’을 보러 갈 때도 사람들이 기대에 차서 팝콘과 콜라를 사들고 갈지를 생각한다면 답은 나온다. 사람들이 죽어가는 장면이 나오는 것은 둘 다 똑같다. 아니, 오히려 그럴듯하게 보이기 위해 극적으로 연출된 영화의 경우가 더 자극적이고 불쾌함을 유발할 것이다. 하지만 결국 이마저도 ‘허구’임을 관객들은 알고 있기에 영화가 끝난 뒤에 적당한 ‘여운’만을 가슴에 안고 퇴장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실제 다큐멘터리보다 영화를 찾는 것은 저자의 말처럼 스펙타클이 일종의 현실이 되어버렸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스펙타클’과 ‘현실’을 너무나 잘 구분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은연중에 ‘불편함’을 회피하려는 욕구가 있다. 사진도 연출되고 조작되는 경우가 많지만, 최소한 영화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허구인 경우는 찾기 힘들다. 그 자극성을 떠나서 ‘실제’ 사람이 죽은 사진, 그 순간의 포착을 보는 것을 사람들이 불편해했기 때문에 사진으로 전쟁의 모습을 전하는 게 현대에 와서 주목받지 못하는 이유라고 생각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제일 뇌리에 박힌 구절은 이 부분이다.
[이미 미국계 흑인들이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이 도시에 아직까지도 흑인 노예사 박물관이 존재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 아마도 흑인 노예를 둘러싼 기억은 사회의 안정에 지나치게 위험하기 때문에 그 기억을 자극하거나 새롭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고 판단됐을 것이다.(133)]
미국인인 저자는 미국의 이중성을 비판하려 든 예시였겠지만, 나는 우리나라에도 비슷한 사례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에 있어서 ‘위안부’문제는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을 비판할 때 빼놓고 이야기 할 수 없는 잔혹한 사건이다. 일본이 어린 소녀들을 상대로 저지른 일들은 지탄받아야 마땅하지만, 우리나라가 가해자의 입장이 된 사건에 대해서도 국민들의 반응이 뜨겁고 관심이 쏠렸을까? 박정희 대통령 당시, 베트남전에 참전한 한국군들이 베트남 여성들을 강간하고 그로인해 태어난 혼혈들을 ‘라이따이한’이라 칭하는 명칭이 생길 정도로 많은 피해자를 낳은, 가해자로서의 역사가 우리에게도 있다. 타국에 대한 혐오감으로 온 국민이 ‘반일정서’를 공유하고 있는 상황에서 정작 우리가 가해자가 되었던 사건에 대해서는 존재 자체를 모르거나 알면서도 애써 모른 체 하려는 것이 모순적이지 않는가. [사람들은 자신의 고통을 다른 어떤 사람의 고통에 견주는 것을 참지 못하는 법이다.(166)] 만약 내가 위안부 문제로 일본을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베트남 피해 여성에 대한 이야기를 제시한다면, 그들은 나에 대해 감히 위안부 문제의 심각성을 격하시키는 것이냐며 비난을 퍼부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사람들은 큰 착각을 하고 있다. 우리가 남들로부터 대우받길 원한다면, 우리가 먼저 남들을 대우하는 태도를 지닐 필요가 있다. 우리의 고통을 인정받기를 원한다면, 타인의 고통을 인정하고 그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과를 할 필요가 있다. 최소한 타인의 고통에 대해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남은 도덕성을 잃고 이기적인 기만자로 변해버리기 전에 타인의 고통을 직면할 필요가 있다. 이 책은 자신도 모르게 괴물이 되어가는 현대인들이 한번쯤은 읽어보아야 할 것 같다.
-당신은 오늘하루도 타인의 고통을 가십으로 소비하지는 않았습니까?-
우수 윤*혜 독어독문학과 도서: 타인의 고통
독후감: 바보는 되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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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the valley of the sorrow, spread your wings. (슬픔의 협곡에서, 너의 날개를 펼쳐라.) 어느 출처도 모르는 문구 하나가 내 마음을 달래준 지는 꽤 시간이 지났다. 항상 내게 주어지고 감당해내야만 하는 삶의 무게감이 가끔은 힘에 부쳐 왜 나만 고통스러운, 행복하지 못한 삶을 살아야만 하는가 하는 건방진 생각에 사로잡혀 있을 때, 어느 책을 읽다 작가가 소개해 준 수전 손택의 한마디는 구글 검색을 통해서도 출처가 미스터리하지만, 지금의 삶의 하나의 지향점으로서 자리 잡고 있었다. 그래서 책상의 한쪽에 “수전 손택 – 타인의 고통, 우울한 열정 읽어보기”라고 메모해 놓고서는 해야 할 일들에 치여 그 메모가 살짝 바랠 때까지 방치해 놓았던 내가 감히 그녀를 안다고 할 수는 없으나, 그 슬픔의 골짜기에서도 나에게 날개를 펴라고 전하는 그녀의 이름 네 글자만 보더라도, 나는 그녀의 가장 유명한 책인 이 책을 읽고 싶다는 욕심에 평소의 아침보다 조금 더 서둘러 도서관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누구보다 전쟁에 가장 가까이 있는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전쟁은 그리 두렵고 나를 압도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짧은 외국 생활을 하면서 한국에 생소한 외국인들이 내게 가장 궁금해했던 것은 우리나라의 전쟁 상황 이야기였다. 종전 협정을 맺은 날 심지어 외국인 친구들이 내게 “너 역사의 한 장면을 목격했어. 소감이 어때?” 라고 말할 때도 나는 그저 “그래?” 하고 말았다. 나는 이야기해 줄 것이 없었다. 그리고 늘 북한 관련 뉴스를 보고 있자면 전쟁이 나면 어떡하느냐며 노심초사하는 할머니의 울음 섞인 우려도 나는 별로 개의치 않았다.

독일에 있을 때, 미국인 친구들과 다하우 수용소에 간 적이 있었다. 수많은 사람이 죽어 간 그 장소가 주는 음기와 스산함에 압도당했다. 영어로 열정적으로 아주 빠르게 설명을 하는 가이드의 설명을 듣는 친구들을 뒤로 한 채, 나는 그들이 고문하고, 사람을 죽여갔던 건물들의 사진만 찍어갔다. 사실 그 수용소 자체가 지옥 같았지만, 나는 더 지옥같이 보이는 곳들의 사진을 찍었다. 그래야, 내가 나중에 떠올리고, 남들에게 나 ‘그 수용소’ 갔다 왔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 테니까. 그래서 책을 읽는 동안 내게 드는 한 가지의 감정을 묻는다면, 나는 당연히 부끄러움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몇 달 전, 추천받은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라는 책을 얼마 읽지 못하고 대출하고 반납하기를 여러 번 하였다. 그들의 절박함과 고통스러움은 언어라는 수단을 통해서 나에게 큰 자극이 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늘 사진과 영화는 그나마 나에게 자극이 되었다. 가족이 보고 싶지만. 소리 내어 울지 못해 참호에 갇혀 죽음을 기다리는 눈물을 참는 배우들의 연기에 그제야 내 눈가가 촉촉해졌다. 그것이 만들어진 감동이라는 사실을 앎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내가 “사실적”이라고 생각하고 전쟁에 대해 피부 가까이 느꼈다고 생각했던 고통들의 사진이 누군가의 지시와 의도 속에 만들어진 도상이라는 사실은 충격적이었다. 아마 수전은 이런 나뿐만 아니라 자신의 글을 읽는 모든 이들이 그러리라는 것을 예상이라도 한 듯 뼈 아픈 불편한 말들을 한다.

이 책을 읽던 와중에 사실“그래서 나보고 어쩌라고”라는 알량한 상념이 살짝 들었다는 것을 고백한다. 사진은 늘 증거가 된다. 생활 어디에서나, 어디 증거 가져와, 라고 한다면 보통은 사진이나 동영상을 보여준다. 인간의 인지능력의 한계이자, 또한 이 사회가 나아가고 있는 방향 자체가 온갖 시각적인 도상들에 의해서 증거되고, 증거를 요구한다. 이미 지나간 일들이며, 나에게 닥치지 않을 일들을 대중들에게 알리려면 더욱더 강력한 자극이 필요하다. 그러면, 누군가에게는 예술로서, 누군가에게는 포르노로서 소비되는 이 전쟁사진이 없었다면, 과연 사람들은 이 전쟁들을 기억하고 살아줄까? 그리고 증거가 어딨느냐고 하지 않을까?

“가슴이 미어질 듯한 사진들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던져줄 수 있는 능력을 좀체 잃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런 사진들은 뭔가를 이해하는 데에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서사는 우리가 뭔가를 이해하도록 만들어 줄 수 있다. 그러나 사진은 뭔가 다른 일을 수행한다. 사진은 우리를 쫓아다니며 괴롭히는 것이다.” (137p) 나는 단 한 번도 그들을 이해해 본 적이 없을 것이다. 그저 그 잔혹함에 얄팍한 동정 정도가 내 감정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들의 서사에 크게 관심 둔 적이 없었다. 그저 내 말초 신경을 건드리는 자극에만 반응했을 뿐이었다.

매혹적인 육체가 외부의 공격을 받는 광경을 보여주는 이미지들이 모두 포르노 그라 피라는 사실은 꽤 전부터 여성학에 관심을 가지면서 알게 된 사실이었다. 사람들은 왜 그리도 잔인하고 잔혹한 것을 좋아할까 이해가 안 돼가도, 가끔 들려오는 연예인이나 아는 사람의 불행한 가십에 귀를 열게 되는 내 모습이 바로 그 예라는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엄마가 자주 보는 슬픈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이 싫었다. 내가 과잉공감을 하는 유약한 타입의 사람이라서 그런 것인지, 타인의 가난과 삶의 무게에 대한 방송은 나에게 피부로 느껴졌다. 그 처절함을 나는 불편해했다. 엄마는 저렇게 처절하게 살지 않는 나의 삶에 대한 감사함을 늘 느끼라고 하셨다. 그러나 나는 그 사람들과 나를 비교하며 감사하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내가 좋은 사람이어서 그런 것 보다는, 이미 나의 기준과 내 눈은 이미 나보다 경제적으로든, 신체적으로든, 사회적 지위로든 위에 있는 사람들을 올려다보는데 지쳐 그들을 바라보고 공감할 에너지가 부족해서였을 것이다. 그들의 고통이

몇 주 전 화성 살인사건의 용의자가 사실은 교도소 안에 있었다는 기사가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했다. 나는 경찰의 무능함에 통탄했고, 이 불안함 속에서 살아야 하는 세상이 싫었다. 하지만 나를 더 화나게 한 것은 그 사건을 영화화한 “살인의 추억”에 대한 영화에 대한 재관 심이었다. 그리고 편성을 바꿔버리고서는 시청률 잡아보겠다고 얄팍한 수를 쓰는 방송사와 그 잔혹함을 예술로 승화시켜 대중이 사랑하는 영화로 만들어버린 예술계의 콜라보가 너무나도 싫고 토악질이 나왔다. 누군가에게는 당장의 존재 문제로 귀속될 수 있는 일들이 누군가에게는 유흥거리라는 사실이 너무나도 싫었다. 그래서 범죄 영화를 거의 보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범죄 영화를 보면 쫓기고 아파야만 했을 피해자와 반사회적 성격장애가 아니던 이상 “그럴 수 밖에 없었다”던 범죄자 중의 일원에 대해서 이해하게 된다. 사람들은 가해자를 영웅화시킨다. 나는 그것이 싫었다. 가해자에게 공감하는 꼴이라니, 너무나도 웃기지 않는가. 결국 두 번의 상처를 받는 것은 피해자인데 말이다. 그래서 이러한 사실을 아는 나조차 그런 사람이 되게 만드는 예술이 싫었다. 가해자에게 피해자만큼이 서사를 주게 되면, 그것 또한 말이 되고, 이해 가능한 일이 되어버린다. 사람들이 사랑해 마지 않는 영화 “마블 시리즈”의 빌런들의 인기만 봐도 그렇다. 대중문화는 우리를 우리의 정신 속에 가장 부드럽게 들어와 가장 강력하게 작용해버린다.

나는 전시의 시대에 산다. 내 대부분의 동년배는 국적을 불문하고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를 이용한다. 거의 99%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가 오늘 먹은 것, 내가 한 것, 내가 산 것, 그리고 내가 가진 것에 대한 전시들이 끊이지 않는다. 아마 그것은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고 갉아먹게 하는 것이라는 것에는 대부분이 공감할 것이다. 이 시대 최고의 유망 직업이 유튜버라고 하는 농담이 그저 농담으로 들리지 않고, 그들이 버는 고수익에 혹해 나도 한번 해볼까 하는 생각을 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전시하면 돈이 되는 신기한 자본주의의 세상에 살아가고 있다. 사람들을 자극하는 슬픈 사연을 가진 이야기가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게 하고, 사람들은 지갑을 연다. 그러나 사람들은 더 슬프고 더 참혹한 사연을 원한다. 나는 이다음의 세대가 어느 방향으로 갈지 궁금하다. 이미 돈이 되는 사회 운동만이 전개되고, 돈이 되는 권리에만 사람들은 집중하는 시대이자, 돈으로 본인의 선행과 따뜻한 마음을 보여 줄 수 있는 세상이니까. 사회는 앞으로 발전한다지만, 나는 사실 갑갑한 현실에 직면할 때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이 사회가 만들어 놓은 대로 따라가야만 하는 나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의문한다. 얕은 철학 지식을 써먹어 보자면, 나는 실존주의를 갈망하는 구조주의자일 뿐이었다. 스스로 본인이 되길 원하면서, 사실 그 구조 속에 허우적대며,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이 구조가 그들과 똑같은 날 만들었다고 외치는 비겁자라는 생각이 들 때마다 몰려오는 자괴감은 가끔은 한 치 앞도 모르는 풋내기인 나를 너무나도 우습게 만든다.

단지 ‘괜찮아, 다른 사람도 다 힘들고 다른 사람들도 다 똑같이 살아.’라고 말하는 누군가의 식상하지만 배려 깊은 위로보다는 수전이 타인에 고통에 대해서 내게 보낸 칼날 같은 훈계들이 더욱 위로가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수잔 손택은 내게 “타인과 공유하는 이 세상에 인간의 사악함이 빚어낸 고통이 얼마나 많은지를 인정하고, 그런 자각을 넓혀나가는 것도 아직까지는 그 자체로 훌륭한 일”이라고 이야기해준다. 그리고 “끊임없이 환멸을 느끼는” 내가 얼마나 미성숙한 존재인지도 느끼게 해주었다. 나는 환멸을 느끼는 데서 끝나는, 나 자신을 한정시켜 버리고 이 사회를 닫히게 하는 그저 미약하고도 사악한 존재 하나구나라는 생각에 다시 빠질 때쯤, 그러나 그녀가 나에게 “다 같이 슬퍼하자, 그러나 다 같이 바보가 되지는 말자. 역사를 조금이라도 알고 있다면 그동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그다음에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라고 마지막으로 전한다.

이 책을 덮고, 이 책에 대한 감상문의 마침표를 찍고 나면, 나는 또다시 내 일상의 지루한 굴레에 얽매여서 타인의 고통에 대해 고찰을 하지 못하고 무의식적으로 일상의 포르노그래피를 즐길 것이다. 아니, 또 나는 무뎌지겠지. 이기적인 내가 가진 연민은 보통의 사람만큼이나 변하기 쉬울 것이며, 오히려 이리저리 줏대 없이 흔들리다가 내 입맛에 맞게 작동하던 공감 능력에 휩쓸려 연민의 늪에 빠져버리겠지. 오히려 내가 더 힘들고, 고통스럽다며 우악스럽게 못 들은 척해 버릴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렇게 살고 싶지 않다. 나는 배웠다. 역사를 배웠고, 인문학을 배웠고 인간의 본질을 탐구하고 또 언어로써 우리를 각성시키는 지성인의 글을 읽었다. 타인의 고통은 곧 나와 어떠한 작은 관계든 연결 돼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 싶다. 아니, 잊지 않을 것이다. 더 이상 바보처럼 울기만 하는 사람은 되고 싶지 않다. 그들이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가슴 깊이 이해하는 그런 따뜻한 어른이 되고 싶다. 손택이라는 통찰력 있는 어른이 내게 건넨 훈계와 위로는 아마 또 다른 내 삶의 지향점이 될 것이다. 나도 언젠가는 그녀와 같이 의연하고 성숙한 지성인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다 같이 슬퍼하자, 그러나 다 같이 바보가 되지는 말자”에 꾹꾹 눌러 담아 내 책상 위 벽에 잘 보이는 한 켠에 적어 두었다.

우수 이*주 국제교육개발협력전공 도서: 세계는 왜 싸우는가
독후감: 초콜릿 vs AK-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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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0월 17일 로이터 통신은 터키가 마이크 펜스 미국 부통령과의 회담 뒤 시리아 북부지역에서의 군사작전을 5일간 중지한다고 기자회견에서 밝히며 아울러 양국 간 폭 30Km에 이르는 안전지대를 설치하기로 미국과 터키가 합의했다고 전했다. 이전 같으면 그저 그런 먼 나라의 전쟁뉴스로 치부되었을법한 국제 뉴스가 이제는 정말 내 곁에서 일어나는 일처럼 느껴졌다. 왜일까? 바로 이 책 “세계는 왜 싸우는가”를 읽을 수 있는 값진 기회를 만난 다음이었기 때문이다. 추천사에서 손석희 JTBC 대표이사님이 언급한 바와 같이 전쟁은 크게 두 가지 문제로 인해 발생한다. 다름 아닌 먹고사는 문제와 믿음의 문제, 다시 말해 경제 혹은 종교로 인한 갈등과 탐욕에 기인하는 경우가 절대 다수를 차지한다. 이는 다른 관점에서 가장 가시적인 문제와 가장 내면 깊숙이 자리한 보이지 않는 문제로도 양분될 수 있겠다.
세계 도처에서 오늘도 일어나고 있을 전쟁 가운데 책은 13개 국가의 사례를 대물림, 독립, 더 가지고 싶은 자, 그리고 가난이라는 네 가지 키워드로 서너 곳씩 분류하여 각 국의 지리적 위치와 주요 연혁을 시각적 자료와 함께 저자의 축적된 지식과 함께 현장의 생생한 처절함과 안타까움을 인도주의적 관점에서 차분히 설명해 주었다. 책의 목적 자체가 원천적으로 작가 본인의 아들에게 지구촌 시민의 한 사람으로써 알고 있어야 할 전쟁의 원인과 평화의 필요성, 그리고 인류애를 가르치고자 쓰였기 때문일까? 책은 각 장마다 전쟁의 원인과 실상을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주며 각 국 사람들의 아픔을 공감하고 그들의 자유와 행복을 기원하는 저자의 인류에 대한 진정성 있는 사랑과 연민을 독자 역시 공감할 수 있도록 이야기하는 구조로 되어 있다.
국제연합을 비롯한 다양한 국제기구와 국가 간 기구, 비정부 기구 등의 많은 국제개발과 협력을 목적으로 조직되는 다양한 기구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태생적 한계와 미국을 선두로 한 강대국들의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한 자국 안보와 경제적 생존을 위한 연대와 경쟁, 밀실 야합의 영향으로 국제기구들의 힘은 종종 건전한 상식에 반하는 결정을 내리게 만든다. 또한 그로 인한 약소국 정부와 그 국민들로 하여금 처절한 전쟁을 치르게 만들고 아무 상관없는 국민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경우가 비일비재해온 것이 사실이다. 책은 그 이름마저 아름다운 중동의 파리라 불리는 베이루트가 수도인 레바논으로부터 출발한다. 너무나 평화롭고 아름다운 이 곳에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싸움으로 인해 헤즈볼라가 지속적으로 공격을 받으면서 무고한 레바논 시민의 희생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다. 팔레스타인 어느 작은 난민촌에서 의료 활동을 하고 있는 의사 ‘마하르’의 말처럼 국적을 불문하고 사람이기에 누구든 치료하고 싶다는 그 아름다운 생각이야말로 그 어떤 국제기구의 사명보다도 훨씬 범인류애적 사고가 담긴 모토로 삼아야할 만큼 가치 있는 목표가 아닐까 싶다. 다음으로 카불이 수도인 아프가니스탄이 등장한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전 세계인을 충격에 빠뜨렸던 9.11 사건의 주인공인 알카에다의 우두머리 빈 라덴으로 유명한 탈레반이 장기간 미국과의 전쟁을 치르는 과정에서 미국에 대한 적개심으로 가득할 아프가니스탄의 청년들과, 그와 반대로 자국에 많은 희생을 가져온 미군 병사들 양쪽 모두의 명복을 빌며 2011년 미군 철수를 단행한 오바마 대통령의 결정이 부디 향후 아프가니스탄의 국가 재건의 시발점이 되었기를 기원해본다. 이어서, 간다라미술의 중심지 중 한 곳이었던 스와트가 있는 파키스탄에서는 전쟁으로 인해 세계 최대의 불상이 탈레반의 폭탄테러로 인해 파괴되고 미군 폭격에 가족을 잃은 적개심 가득한 전쟁고아들이 또 다시 탈레반으로 성장하는 악순환이 일어나고 있음에 탄식을 금할 수 없었다. 저자의 바램대로 나 역시 파키스탄 북쪽의 히말라야 낭가파르바트의 아름다운 살구꽃과 아몬드꽃을 우리 다음 세대가 평화롭게 등반하며 감상할 수 있기를 염원한다.
다음 장에서는 독립을 위한 전쟁들이 다루어졌다. 1520년 포르투갈을 시작으로 인도네시아에게까지 무려 6개국으로부터의 식민지 역사가 이어진 동티모르는 일본의 식민지 역사가 있어 더욱 그 아픔에 공감이 더해졌다. 1999년 9월 마침내 독립일을 맞이하고 191번째 국제연합 회원국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국민들의 독립에 대한 염원과 국제사회의 관심과 지원이 만들어낸 결과임에 분명하다. 이어서 옛 소련의 식민지였던 체첸 사태로부터 어린이를 포함한 민간인의 많은 사망에 대한 국제사회의 방관 문제와 인도와 파키스탄 사이의 끝없는 영토분쟁을 앓고 있는 동양의 알프스 카슈미르의 독립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언젠가 여러 나라의 대립이 종결되면 평화로운 초원과 순박함을 간직한 카슈미르 사람들의 훌륭한 솜씨로 직접 만들어낸 고품질 캐시미어 제품이 세계만방으로 수출될 수 있으리라 믿는다. 독립을 위한 전쟁편의 마지막은 독립국가가 없는 최대의 민족인 쿠르드족에 대한 이야기로 채워졌다. 무엇보다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에 의해 1987년부터 3년간 너무나도 잔인하게 자행되었던 인종 청소인‘안팔 작전’은 정말 경악할만한 국제사회의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특히나 용서받을 수 없는 화학무기를 사용하여 여성과 아이들마저 살상한 이 사건에 대해 미국을 비롯한 서방국가가 이 끔찍한 만행을 방관했다는 점은 인도주의적 관점에서 절대 용서받지 못할, 아니 용서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적어도 UN 차원에서의 어떠한 조치와 지원은 있었어야 했는데 말이다.
이어지는 3부에서는 석유자원이 부른 이라크 전쟁과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나라 없는 설움과 나라 잃은 설움, 그리고 다이아몬드에 대한 탐욕에 기인한 시에라리온의 내전에 대한 이야기가 소개되었다. 그 가운데 소년병에 대한 이야기를 읽으며 최근에 보았던 영화 ‘장사리’에서의 학도병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비록 상황과 지리적 위치는 다르겠지만 나라의 독립을 위해 동원되었던 우리나라 학도병들과 시에라리온의 소년병은 너무나도 닮아 있었다. 어른들의 전투에 아이들이 동원되는 이 비참한 현실이 제발 앞으로는 없어지기를 간절히 소망해본다. 다행히 소년병 징집을 금지하는 ‘파리서약’이 있지만 여전히 요원한 내란과 가난은 전쟁을 치르는 국가의 아이들이 소년병으로 동원되는 것을 온전히 막지는 못하는 이 현실은 개탄스럽기 그지없다. 아직 가치판단의 기준이 명확하지 않은 아이들을 전쟁에 내몰아 총알받이가 되게 만드는 것은 언제 어디서나 절대로 금지되어야 할 악중악이 아닐 수 없다. 특히나 다이아몬드 채굴권 다툼의 과정에서 반군과 정부군이 서로 전쟁포로에게 총을 못 쏘고 농사를 못 짓게 하기 위해 사지를 잘라 수많은 사람들이 손발이 없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읽으며 인간의 탐욕은 과연 어디까지인지 반문하게 만들었다.
마지막 4부로 넘어가기 전 ‘줌인(Zoom In)’ 코너를 통해 알게 된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두 가지 무기는 또 한 번 인간 본연의 잔인성에 대해 반추하는 시간을 갖게 했다. 하나는 산 채로 살이 타들어가는 것을 보면서도 어쩔 수 없이 자기 몸이 불타는 것을 보고 있을 수밖에 없는 백린탄이고 다른 하나는 모자(母子) 폭탄이라고도 불리는 집속탄이라는 무기이다. 화학성분 인(P4)으로 만들어져 신체에 달라붙어 온 몸이 타들어 갈 때까지 시꺼멓게 타들어가는 백린탄에 희생된 많은 민간인들, 특히 여성과 아이들, 노약자들의 고통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특히나 세계의 평화유지군을 자청하는 미군이 이라크 팔루자에서 이 끔찍한 백린탄을 사용하고서도 오리발을 내밀다가 방송 후에야 시인한 전례는 선진국 역시 자국의 만행에 대해서는 궁색한 변명과 거짓말을 한다는 사실을 재확인 시켜주었다. 더불어 엄마폭탄 폭발 후 사방으로 퍼진 아기 폭탄의 연쇄 폭발 후 땅속에 묻힌 채로 있다가 아이들이 장난감으로 착각하여 만지고 놀다가 터져 불구가 되거나 사망하는 집속탄 역시 이스라엘이 레바논에 400만 발이나 발사했다는 사실로부터 자국의 승리를 위해 어떤 비인간적 행위도 서슴지 않는 국제 분쟁의 잔인함에 치를 떨게 했다. 더욱 충격적인 사실은 2008년 아일랜드 더블린 국제회의에서 집속탄 사용의 전면 금지가 합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참가하지 않은 국가들 가운데 우리나라가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한국 기업이 여전히 이 반인도주의적인 집속탄 생산국이라는 사실에 그야말로 경악했다. 이제는 OECD 회원국일 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경제성장 모델이 되고 있는 우리나라의 국격을 고려할 때 이는 더할 나위 없이 치욕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하물며 동족상잔의 비극을 경험하고 학도병의 아픔을 겪은 우리나라는 당장 집속탄의 생산을 멈추고 더블린 합의에 동참해야 할 것이다. 책의 마지막은 가난이 부른 전쟁을 다루었다. 우리에게도 아덴만 작전으로 악명이 높아진 굶주림이 만든 해적의 나라 소말리아, 마약과 납치가 만연한 세계 최대의 마약 생산국 콜롬비아, 그리고 북한의 아웅산 폭파 사건으로 우리에게 너무나 아픈 기억으로 남아 있는 미얀마가 다루어졌다. 이러한 분쟁을 자세히 살펴보면 모두 유럽국가의 식민지로 오랫동안 지배를 받다가 독립하는 과정에서 부패한 군사정권이 통치를 하거나 식민지 시절에 침범국가로부터의 지배에 길들여진 세력이 독립 세력을 탄압하면서 갈등이 촉발되고 분쟁이 격화되면서 내전이 장기화 되는 경우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과정에서 최근 사용하는 용어인 ‘게릴라’가 점차 테러리스트와 같은 나쁜 뉘앙스로 곡해되어 왔다는 것인데, 거슬러 올라가보면 아르헨티나 출신의 쿠바 혁명가인 체 게바라가 바로 이러한 게릴라전의 대표적 인물이다. 결국 한 쪽의 시각에서는 테러리스트로 규정짓는 이 게릴라가 바로 일제강점기 우리나라의 독립 운동가였으며 다른 나라의 독립군 역시 침략국 입장에서는 ‘게릴라’라고 부른다는 사실이 놀랍다. 이러한 입장의 변화는 아웅산 수치 여사의 경우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미얀마 독립 건국의 아버지인 아웅 산 장군의 외동딸 수 치 여사가 20년간의 감금에서 풀려나와 2015년 정권교체를 이루어내었지만 모두의 예상을 깨고 2017년 로힝야 난민문제를 방관했던 사실은 민주화 투사라 하더라도 진정한 정의와 인권에 대한 의식은 별개의 문제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다. 결국 요즘 확산되고 있는 ‘세계시민교육’과 같은 글로벌 마인드와 정의, 인권, 젠더와 같은 국제 사회에서 필요한 소양들을 전 세계 모든 사람이 함께 공유해야 할 가치임이 입증된다.
책의 마지막 장을 통해 저자는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총인 AK-47을 언급했다. 전국의 PC방을 뜨겁게 달구는 여러 게임들을 통해 등장하는 이 총의 제작자인 미하일 칼라슈니코프의 이름과 총 제작연도인 1947년으로부터 유래한 이 AK-47은 사용이 쉽고, 잔고장이 적으며 강한 파괴력을 지녔으며 저렴한 제작비와 손쉬운 관리 덕분에 전 세계에서 가장 애용하는 성공적 무기가 되었다. 단순하고 견고한 이 총은 심지어 50달러도 하지 않는 저렴한 구입비용으로 인해 아프리카 부족들과 소년병들이 애용하고 있으며, 분쟁지역은 물론 게임에서까지도 등장하고 있다. 한편, 앞서 언급한 콜롬비아에서 재배되는 마약원료인 코카인은 코카나무를 재배하는 농민으로부터 만들어진다. 그러나 외국 시민단체들이 코카인 근절을 위해 코코아의 원료인 카카오나무를 심게 하고 그 열매를 비싸게 구입하여 초콜릿을 만들어 외국에 수출하는 ‘공정무역’의 방식으로 점차 코카나무를 줄이고 카카오나무를 늘려가는 방법으로 콜롬비아로부터 생산되는 마약을 줄여나가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고 한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게임에 도입되어 총에 대한 거부감을 줄이고 살상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AK-47로 인해 발생하는 역효과와 공정무역으로 자국 농민의 이익을 돕고 국가를 마약으로부터 구제하는 초콜릿 효과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이는 마치 바람과 태양의 시합과도 같다고 할 수 있겠다. 총을 만들어 파는 행위는 당장의 경제적 이익을 가져다줄지는 모르지만 그로인한 지속적인 전쟁과 살상, 소년병과 테러의 문제는 부정적 나비효과를 극대화 시키는 반면 초콜릿 효과는 자국경제의 튼튼한 토양을 제공하고 전쟁을 줄이고 평화를 가져다주는 긍정적 나비효과를 불러올 것이다. 이러한 노력과 지원이야말로 국제사회에서 전쟁을 감소시키고 개도국 경제의 발전을 도모하는데 기여하는 좋은 방안이라고 본다.
더불어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또 하나의 중요한 사실은 우리가 ‘뉴스의 시대’에 살고 있다는 점이다. 국가 간 주도권 전쟁 (Hegemonic War)이 끊임없이 이어져온 가운데, 정신적 절대 권력의 지배세력은 늘 종교였음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이러한 종교의 자리는 알랭 드 보통이 그의 저서‘뉴스의 시대’를 통해 주장한 바와 같이 뉴스가 차지하고 있다. 아침예배 대신 아침 뉴스를, 하루를 마감하는 밤에는 8시 또는 9시 뉴스가 우리의 하루를 정리해 주고 여러 가지 소식과 이미지를 정리하여 우리의 의식세계에 이미 중요함의 순위마저 매겨진 사안들을 정리하여 전달해 준다. 대부분의 세계인 모두가 이러한 우선순위 뉴스에 편승하여 피지배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는 가운데, 그 우선순위에서 언제나 전쟁 또는 테러가 1, 2등의 자리를 너무나도 오랜 기간 변함없이 차지해 왔음을 깨닫고 있는 사람은 과연 얼마나 될까? 우리가 간과하고 있는 사실 가운데 하나는 국제 뉴스의 왜곡가능성에 대한 회의적 비판이다. 종군사진작가들과 종군기자들로부터 전해지는 사진들과 글들로부터 대다수의 우리들은 1차 가공된 사진과 기사로 해당 내용을 전달받게 된다. 오늘날 세계 곳곳의 대기업들이 광고료 지급이라는 지위를 바탕으로 언론사들을 조종할 수 있고, 정치권력이 이러한 보이지 않는 지배구조의 상위에 있는 대기업과 강대국에 유리한 각종 제도와 정책을 제공함으로써 양자 간 돈독한 이해관계를 통해 정치권력의 치부가 언론조작 및 왜곡이 가능한 구조임은 익히 알려졌지만 어쩔 수 없다는 식의 패배론적 대중심리는 이 구조에 대한 무언의 동조를 함으로써 반 능동적으로 기득권 세력이 원하는 대로 잘 가공된 뉴스를 접하게 되는 비정상적 구조를 갖고 있다는 사실은 그다지 놀랍지 않다. 그러나 전쟁과 테러는 이와는 별개의 문제다. 어떤 경우에도 무고한 사람들의 죽음은 정당화될 수 없다.
나날이 발전하고 있는 개인화된 기기들은 언제 어디서나 뉴스와 사진, 동영상이라는 형태로 TV, 라디오, 인터넷과 SNS 등 다양한 방법으로 전 세계의 모든 소식을 우리들에게 전해온다. 중요한 점은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엄청난 속도와 양으로 우리를 덮쳐오는 이 뉴스의 시대에 다른 나라 사람들의 고통에 무뎌지지 않고 동정과 연민, 공감을 넘어 그 고통의 원인들을 꿰뚫어 보고 줄이고 없앨 수 있는 방안에 대해 주체적으로 반응해야 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AK-47이 아닌 초콜릿이 우리의 장기적 선택지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마이클 잭슨의 명곡 ‘Heal the world’의 가사처럼 우리의 다음세대에게는 평화와 사랑이 가득한, 깨끗하고 아름다운 세상을 물려주기 위해서라도 ‘싸우지 않는 지구’를 위해 전 세계 모두의 화합과 공존을 희망하는 마음 간절하다.
장려 김*정 중어중문학과 도서: 독서의 역사
독후감: 독서광에게 건네는 선물 <독서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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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의 역사>는 사 백 페이지가 넘는 두꺼운 책이지만 기존 역사책들의 연대기 순 사건 병렬식 방법을 탈피하고, 독서를 이루는 요소 각각이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의 순서대로 역사를 설명한다. 그래서 독자로 하여금 독서 과정 중 책을 다시 펴게 되는 순간마다에서 느끼게 되는 낯선 감정과 같은 불편함을 덜게 해준다. 또한 역사책이라는 타이틀에 맞게 책 내용은 생소한 인물들의 등장과 복잡다단한 사건들이 시간을 종횡무진 거슬러 오르며 장구하게 서술된다. 그러나 표면상 그저 하나의 역사 이야기 이지만, 쌀을 씹으면 씹을수록 단내가 나는 것과 같이 이 책도 곰곰이 생각하고 다시 볼수록 작가 알베르토가 전하고자하는 깊은 지혜를 통찰 할 수 있다.

첫 번째 챕터에서 저자는 앞으로 나올 이야기가 연대기 순으로 엮여진 것이 아님을 확실히 했다. 나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쉽게 이해하지 못했지만, 본격적으로 이야기가 시작되고 알 수 있었다. 독서와 사색을 즐기는 나는 종종 그런 순간을 경험한다. 과거와의 조우, 깊은 사색으로부터 얻어진 통찰을, 어느 날 어느 철학자의 저서 속에서 보게 되었을 때, 나의 생각이 이미 누군가가 한 것의 반복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의 상실감, 역설적으로 나의 생각이 저명한 철학자의 수준에까지 닿았다는 느낌, 그 기쁨. 복잡한 감정과 함께 끊임없이 저자와 대화하고 씨름하며, 더욱 발전된 새로운 개념을 알게 되는 것, 나아가 그것마저 철학자의 유령을 답습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는 것, 이런 나 자신의 이야기가, <독서의 역사>의 ‘역사에서 그대로 재현되고 있다는 사실에, 필자는 깊이 감동받았다. 작은 것에서 큰 것까지, 모든 것의 역사는 일정 부분 상통하는 것이 있다는 가르침을 얻게 되었다.

본 저서는 독서의 기법이나, 자세에 영향을 끼친 중요했던 역사적 순간들을 하나하나 서술하고 있었다. 챕터의 끝자락에 가서 자신이 이런 역사적 사건들을 통해 어떤 생각을 하게 되는지에 대해 한 두 페이지 정도 저술하지만, 그것을 제외하자면 너무나 담백했다. 역사에 대해 조금 알 수 있다 뿐이지 딱히 유용한 부분을 발견하지 못했던 나는 책에 큰 흥미를 느낄 수 없었다. 그러나 작가의 생각을 반영한 부분을 발판삼아, 다시 보니 그제서야 이 저서를 즐길 수 있었다. 나는 작가의 생각을 보며 나의 경험에 저서 속 역사 이야기를 대입해보았다. 이러한 방법을 통해서 나는 작가와는 차별된 방식으로 사색할 수 있었다. 이를 통해 나의 공책에 많은 생각을 담을 수 있었다. 앞서 말했듯이 본 저는 맨 쌀밥 같은 책이다. 그냥 꿀떡꿀떡 삼켜 넘겨서는 공허하게 시간만 낭비하게 되고 배만 더부룩하다. 마음 같아서는 나의 노트 속에 담긴 감상을 모두 나누고 싶지만, 그 내용이 너무 방대하여 특별히 즐거웠던 경험 몇 가지만 공유하고자 한다.

독서는 언제나 권력자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다. 독서행위는 인간에게 정신적 자유를 쥐게 해주었고, 힘을 갖게 해주었다. 그렇기에 독서의 이득을 충분히 누린 권력자는 독서의 무서운 파괴력을 정확히 파악하는 셈이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역사적으로 검열과, 낙인이라는 효과적인 도구를 사용해, 독서가들을 반동분자 또는 얼간이로 만들어버리고, 독서행위를 지탄했다. 그러나 지혜와 자유를 사랑하는 인간들, 글의 맛을 보게 되어버린 인간들은, 그러한 탄압 속에서도 독서에 대한 갈망을 멈추지 못했다. 물론 지독한 수준의 체벌은 그러한 독서편력을 조금은 수그러들게 만들었지만, 당시 금지된 독서를 어떻게 든 해내는 독서가들의 몸부림은, 나로 하여금 어쩌면 독서가의 운명은 하늘이 정해준 필연이 아닌가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들이 책에 집착하게 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독서가 선사하는 거부할 수 없는 지혜와 자유 때문인 것 같다. 지금까지도 독서광들은 때때로 멸시당한다. 독서광들을 모욕하는 이유도 가지 각색인데, 현실에 벗어난 도피자, 실생활과는 거리가 먼 뜬구름 잡는 소리만 하는 인간 등의 이미지가 주를 이룬다. 나는 이렇게 무시당하는 독서의 행위를 좋아하고 말았다. 이런 나 자신의 모습이 경멸스러웠던 적도 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남들의 지탄에 나는 스스로 그럴듯한 이유를 만들어 냈다. ‘어쩌면 나는 그냥 독서를 하는 나의 모습을 좋아하는 것이 아닐까? 나는 그냥 사회가 두려워 책 속으로 가상의 세계 속으로 도망친 것은 아닐까? 어쩌면 나는 지적 우월감에 취해 있는 위선자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이런 생각들은 내가 독서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인지한 순간부터 지금까지도 여전히 나를 괴롭혀 온다. 이것은 어쩌면 독서가의 숙명일지도 모른다고 알베르토 망구엘 또한 말했다. 나와 같은 고뇌에 고통받았을 역사 속 인물들이 어떠한 삶을 살아갔는지를 알아보는 것을 통해 나 또한 조금은 위안을 얻을 수 있었다.

또한 저자의 독서 일대기에서 나의 이목을 사로잡았던 구간은 저자가 서점에서 일할 당시 소설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부탁으로 그에게 책을 읽어주는 일을 맡게 되었던 이야기다. 그 인연은 저자가 더욱 넓은 독서의 세계를 접하고, 문학의 대가와 대화할 기회를 끝없이 가짐으로써, 다양한 영감을 얻을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한 명의 독서가로써 그러한 기회를 잡을 수 있다는 것은 커다란 행운이다. 필자는 행운을 붙잡게 된 저자에게 부러움을 느꼈다. 눈 먼 소설가와 단 둘이 독서모임을 하게 된 격이었다. 나는 그런 기회를 얻게 된 망구엘을 부러워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하지만 마지막 페이지를 끝으로 책을 덮었을 때 나는 생각했다. ‘만났다.’ 망구엘에게 호르헤스가 다가왔듯, 나에겐 망구엘이 다가왔다. 망구엘에게 새로운 삶을 주었던 호르헤스처럼, 망구엘은 나에게 새롭게 탄생할 방법을 들고 나를 찾아왔다. 그제서야 깨닫았다. 운명은 다가오는 것이 아니다. 만드는 것이다. 나에게 호르헤스는 없지만 <독서의 역사>가 있다. <독서의 역사>가 없었더라면 또 다른 무엇인가 있었을 것이다. 내가 원하는 것이 독서가로서 한단계 성장하는 것이라면, 나는 어떤 인연도 각성의 계기로써 잡게 될 수 있었을 것이다. 망구엘이 호르헤스를 만나게 된 것은 특별한 일이지만, 전례 없는 행운은 아니었다. 나 또한 이렇게 망구엘이 누렸던 행운을 톡톡히 누리고 있지 않은가?

독서 행위의 발전과정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낭독에서 묵독으로, 찰흙덩이에서, 8절지로, 그리고 텍스트의 내용까지, 많은 것들이 변해왔다는 것을 확인 할 수 있었다. 그 중 가장 이목을 끌었던 것은 내게 너무나 익숙한 독서의 방식인 묵독이, 과거에는 전혀 상상도 할 수 없는 방식이었다는 것이다. 그 시대 사람들은 어째서 그렇게 소리 내어 책을 읽을 생각밖엔 못했을까? 아마 경험하지 못한 것은 있을 수 없다는 연역법적인 생각이 그 당시에도 존재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기에 한 단계 발전하는 데는 너무나 힘든 단계를 건너야 하는 것이다. 아마도 그런 이유로, 인류는 큰 고통에 직면하고, 벗어나는 것을 반복하는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그러한 시련이 닥치기 전에, 과거를 통해 배운다면, 그래서 우리에게 더 나아질 구석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다면, 세상이 조금 더 평온해질 것이다. 나는 <독서의 역사> 눈으로만 읽는 독서 챕터에서 그것을 상기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나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지금의 나도 어떤 일이든 너무 당연하게 해오고 있었던 것 같다. 어쩌면 지금의 삶, 그리고 내가 하는 모든 일들이, 더 나은 수준으로 더 세련된 형태로 개선될 여지가 있을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니, 매 순간 권태롭게 살아가는 나의 삶이 조금 부끄러워졌다.

독서는 언제나 즐겁다. 그러나 외롭고 힘들다. 그리고 두렵기도 하다. 텍스트를 왜곡하여, 나의 생각에만 심취하게 되는 것, 읽어도 얼마 안가서 잊어버릴 책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것, 쏟아지는 수많은 문서에 비해 너무나 적은 책을 읽는 것 등에 대한 두려움은 내가 과연 잘하고 있는 것인가 의문이 들게 만든다. 작은 방안에 틀어박혀 책을 읽다 보면, 어느 순간 세상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세상과 소통 하고싶은 생각도 들지만, 매일같이 쏟아지는 텍스트들은, 날 무섭게 한다. 독서를 쉴 땐 내가 뒤처지는 듯 느껴지고, 그래서 더욱 멈출 수 없게 된다. 그렇게 독서에 빠진 채, 세상과 단절되고 만다. 그리고 끝에 가선, 읽었던 것 중에 기억에 남는 것은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러면서도 그만둘 수가 없다. 정말 속 편한 것 같지만, 독서가에게도 고충이 많다. 독서인구가 극히 적은 한국에서 마음이 맞는 친구를 만나기는 쉽지 않다. 그렇기에 외롭다. 이런 나의 고민들 고충들, 들어줄 사람도 이해해줄 사람도 없다. 그래서 독서의 역사는 친구 같았다. 나 말고도 비슷한 삶을 사는 독서가들의 삶이 어땠는지 알 수 있었고, 책에 미친 모습은 아름다웠다. 나도 그렇구나, 안심했다. 거기에 더해 내가 어디까지 왔는지도 알 수 있었다.

나에게 독서는 글을 읽는 것 그 이상을 의미한다. 책과의 교류, 만남. 책을 구성하는 크림 빛 페이지와 그 내음, 책의 여백에 간간히 기록된 나만의 기억, 생각 그리고 책장 속 아름답게 진열된 자태, 그 모든 것이 독서의 한부분이다. 인쇄 공장에서 대량 생산되는 책들 중 단 하나, 우연히 나와 조우하게 되어, 생명을 얻게 된 나만의 것, 나의 책이란 그런 의미다. 그리고 그렇게 그것들에 의미를 부여하게 될 때 나는 진정 독서를 하게 되고, 머리 위 떠다니는 문자의 구름 속에서 나는 나만의 침묵에 빠져, 나의 정체성, 나의 세계관을 건조한다. 책과 교류하는 나만의 특별한 방법인 줄 알았던 것이, 오래 전부터 행해진 독서가들의 전유물이라는 사실을 망구엘의 담담한 고백을 통해 알게 되었을 때에, 나는 묘한 쾌감이 느껴졌다. 역시 나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독서가로서의 성장단계는 대체로 비슷했다. 저자의 자전적 기록을 보며 나는 나의 역사를 떠올렸다. 글을 읽게 되고, 새로운 세계를 접하고, 모든 경험과 지식을 알게 된 것과 같은 착각에 빠지고, 또 다시 깨부서지고 뒤흔들렸던, 그러했던 나의 순간들. 여전히 생생하고, 감명 깊다. 그런 감탄을 자아내는 경험이 모든 독서가들의 공통된 경험이라고 생각하니, 정신이 아찔했다. 거기에 더해 이제 나는 뭘 더 알게 될지 어떤 경험을 할지 궁금해졌다. 그렇게 독서의 역사를 나를 투영해 보았고, <독서의 역사>에서 앞으로 내가 걷게 될 독서가로서의 길은 무엇인지, 나는 어디까지 온 것인지, 그 힌트를 얻을 수 있었다.

역사책이 으레 그렇듯, 책 속 수많은 사건 수많은 인물들 중 내가 정확히 기억하는 정보는 많이 없다. 그렇지만, 장구한 역사 속 수많았던 독서광들의 편집증에 가까운 독서편력에서 나는 독서가로써 지녀야할 진정한 자세를 조금은 엿볼 수 있었다. 본 책은 독서가가 책을 읽을 때에 어떤 자세로 읽어야 하는지,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왜 읽어야 하는지, 독서가의 몸가짐과 마음가짐은 어때야 하는지에 대해 자세히 담고 있다. 물론 작가 알베르토 망구엘은 독서의 역사는 끝나지 않는다며, 담지 못해 아쉬웠던 이야기들과, 아직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이야기들 또한 많다고 했다. 그것은 우리 독서가에게 아직도 알아 가야할 것이 많다는 것을 알려주는 하나의 암시라고 생각한다. 책에 적힌 것들만 익히더라도, 고수 독서가로서의 자질은 충분히 갖출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진정한 독서가가 된 후에 저자가 마지막으로 남긴 <독서의 역사>에 적혀지지 못한 뒷이야기를 채워 나가라는 임무를 수행하며 살아간다면, 그것이 바로 독서가의 삶, 그리고 기쁨이 아닐까?

장려 정*민 지역주민 도서: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
독후감: 타자의 세계를 경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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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 전쯤 처음 미셸 투르니에의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이하 『방드르디』) 처음 읽었다. 그땐, 방드르디 출현 이후에 몰입한 나머지 이전의 이야기를 대부분 잊어버려, 그 앞이 이야기 비중이 꽤 크다는 사실이 내겐 또 다른 충격이었다. 물론 이 소설의 핵심은 여전히 방드르디이며, 소설 후반부를 이끄는 동시에 로빈슨을 변화시키는 인물임은 분명하다. 이 점을 간과하고 로빈슨을 중심축에 두고 소설을 읽는다면, 오독 할 수 있는 확률이 아주 높다. 왜냐면 이 소설의 진짜 핵심은 방드르디도, 로빈슨도 아닌 ‘타자성’이기 때문이다. 소설 초반부터 투르니에는 줄기차게 타자성을 말한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타자성은 일반적인 어떤 관계에 초점을 맞추는 대신, 그렇게 맺어진 관계로 인해 상대가 어떻게 변화하는가를 말하고, 그렇게 변모된 관계가 이 세계에 어떤 위기를 초래했는지 에둘러서 말한다.
소설은 난파되기 직전의 ‘버지니아 호’에서 로빈슨의 타로점을 치는 선장으로부터 이야기로부터 시작된다. 이 부분은 예언에 가까운데 여기서 선장은 로빈슨에게 무질서한 세계를 손아귀에 쥐어보려 온갖 노력을 기울이겠지만 결국 실패하고 도리어 당신이 변할 거란 말을 건넨다. 물론 로빈슨은 농담으로 흘려들으나 후일 이는 정확히 실현된다. 실제 홀로 무인도에 떨어진 로빈슨은 금세 구조될 상황이 아님은 깨닫자마자 무인도를 제 방식대로 명명하고 다스리려 한다. 이는 19세기 초반 제국주의자들의 비서구권 국가를 식민지화하는 방식과 거의 흡사하다. 아니 방드르디를 만나기 이전까지, 혹은 폭발 사건 이전까지의 로빈슨은 제국주의자들의 오만방자한 행위의 축소판처럼 느껴진다.
투르니에가 구태여 방드르디를 만나기 이전까지 삶을 상세히 설명한 까닭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싶다. 로빈슨은 무인도 생활을 위해 제 나름의 여러 규칙을 정하는데, 그중 상징적 사물이 물시계다. “시간은 그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어두운 심연 속으로 미끄러져 나가는 것이 아니라 이제부터는 규칙화되고 지배되고 장차 섬 전체가 그렇게 되려 하듯이 오직 한 인간의 정신력에 의하여 길들여지게 된다는 자랑스러운 기분을 느꼈던 것이다.” 이때까지 로빈슨에게 시간 개념 없이 무질서하고 마음대로 생활하는 것은 원시적이고 야만적인 행위 그 자체였기에 어떻게든 길들이고 질서를 만들어 문명화해야만 하는 어떤 대상이었다. 19세기 초 산업사회를 기반으로 국가를 건설한 제국주의자들 눈에 비서구권, 더 쉽게 여전히 공동체적이고 농경문화의 기반으로 살아가는 국가들은 그들이 새로운 교육을 받게 하고 제도적 틀을 만들어 바꿔나가야 할 하나의 대상으로 비쳤을 거다. 제국이란 형식과 야욕에 오래도록 길들여진 그들 눈엔 비서구 문명이 가진 고유성은 단지 바꿔야 하는 낡은 관습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은 문명과 교육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비서구가 기본적으로 가진 문화와 사회를 경험해보려는 그 어떤 노력도 하지 않은 채, 그들이 생각하고 추구하는 가치에 꼭 들어맞도록 전혀 다른 방식의 삶을 기존에 있던 늘 그래왔던 삶으로 길들이려 뒤바꾸려 했다. 그 결과 제국주의자들은 그들이 생각했던 바와는 달리 문명 파괴자 혹은 난봉꾼이 되었고, 끊임없이 제국의 침략을 받고 그들에 의해 기존 가지고 있던 문화와 삶을 체계를 잃은 비서구는 텅 빈 껍데기, 서구열강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닌 야만인이 되어 버린 것이다. 서구와 비서구, 난봉꾼과 야만인, 이들은 무엇 때문에, 단지 세계와 사람에서 무엇으로 명명되고 적대관계로 변화하게 된 것일까? 대놓고 적대관계라 말하긴 애매모호한 부분은 있으나 세계가 이것 혹은 저것으로 나뉜 것은 사실이다. 물론 전부 제국주의의 야욕 탓으로 돌리려는 건 아니지만, 1,2차 세계대전 전후 제국주의 혹은 강대국의 힘을 내세워 세계 전역을 그들의 영향력 아래 두고자 했던 역사의 흔적은 지울 수 없다. 비록 그들의 야욕은 온전히 채워지지 않았지만 그 영향력은 여전히 하나의 질서처럼 군림하고 있다.
『방드르디』에서 로빈슨은 질서와 어떤 체계를 추구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그를 잘 드러내는 장이 무인도에‘스페란차’란 이름을 부여하고 천 일이 흐른 후 섬을 다스리려 여러 법령을 제정하는 부분이 담긴 4장이다. 이 부분은 우스꽝스러우면서도 간담이 서늘해진다. 투르니에는 로빈슨과 텐이라는 개 외에는 아무도 없는 섬에 별 쓸모도 없는 법을 제정하는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그는 타인이 부재한다는 그 파괴적인 영향에 대하여 건축하고 조직하고 입법하는 것이 최고의 방책임을 다시 한 번 느꼈다.” 이는 달리 말해 섬이 아닌 조난구조조차 보낼 수 없는 섬에서 그 자신을 지키기 위한 방어책이었던 거다. 이에 동의라도 하듯, 이 장의 ‘항해일지’에서 그는 “나는 누구일까? 이 질문은 절대로 부질없는 것이 아니다. 심지어 그것은 풀리지 않는 질문도 아니다. 왜냐하면 만약 그것이 그가 아니라면 스페란차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며 어떤 질서와 체계를 갖춘 섬을 자신과 동일시 한 것이다. 이후 방드르디를 만나 그와 함께 살게 되었을 때도 로빈슨은 그를 자신과 다른 낯선 타자로 인식하지 못하고, 그들 제 소유물로 여겨 길들이려 한다. 즉 이때까지, 보다 정확히 방드르디의 실수에 의한 폭발로 인해 재건된 섬의 체계들이 한순간에 무너지기 이전까지, 로빈슨에게 낯선 타자는 지대한 영향을 끼칠만한 대상이 아니었다. 단지 그가 가꾸어 어떤 형태를 만들어가야 할 소유물에 지나지 않았다. 19세기 초 제국주의자들 눈에 비친 비서구권 국가들도 낯설고 다른 세계가 아닌 정복하고 개화해 주어야 할 그 무엇에 불과한 것은 아니었을까? 만약 제국주의자들이 비서구권 국가들은 길들이고 가르쳐야 할 미개인이 아닌 낯선 타자로 보았다면, 이 세계는 지금과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을까? 투르니에 역시 이 부분이 정말 궁금해서 다니엘 디포의 소설을 재해석하고자 했던 건 아닐까? 실제 1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 작가 상당수가 제국주의의 민낯을 마주하고 절망하거나 좌절했다. 이전까지 유럽이 가진 우월함이 당연하고 이성을 의심치 않던 그들에게 조국(유럽)이 보여준 건 제국주의 혹은 강대국의 힘자랑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니엘 디포와 투르니에 소설의 가장 큰 차이는 ‘방드르디’의 존재감이다. 디포의 소설에서 방드르디의 존재감은 거의 드러나지 않지만, 투르니에 소설 속 방드르니는 핵심인물로 그려진다.
달리 말해, 제국주의 중심에 섰던 프랑스 작가인 투르니에는 중심인물인 로빈슨이 아닌 주변부 인물, 이전엔 소설 속에 등장했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는 방드르디에 초점을 맞췄단 얘기다. 이는 단지 고전의 재해석이 아니다. 기존 소설에서 방드르디는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았을뿐더러, 타자, 길들지 않는 무엇으로 단지 이름만이 부여되었을 뿐이지만, 투르니에 작품 속 방드르디는 그렇지 않다. 등장 초반부터 그는 길들지 않는 무엇이 아닌 타자다. 여기서 타자란 나 외의 모두로서 내게 어떤 영향력을 끼치는 것들이다. 여기엔 사람만이 포함되지 않고 자연적인 요소도 포함되기에 그 범주가 광범위하다. 쉽게 나를 제외한 세상 모두가 타자인 셈이다. 번복이지만, 제국주의자와 소설 중반까지 이어지는 로빈슨의 행위는 타자성을 억누르고 제압함으로써 구심점이 되고자 한다. 이는 명백한 착각이자 오류다. 타자 없는 구심점이나 중심은 없고, 그가 언제까지나 구심이며 중심점일 수도 없다. 정말 잘못된 상상력이다. 살아 숨 쉬는 것들은 끊임없이 움직이고, 변한다. 인간이라 해서 예외는 아니다. 인간이라는 하나의 종으로 분류되었을 뿐 여러 관계 속에서 변하고 움직이는 생명을 가진 존재임이 먼저다. 그리고 이 존재는 관계를 통해 변하고 성장한다.
『방드르디』 속 로빈슨과 방드르디는 서로 만나고 어떤 관계 속에 놓이므로 인해서 전혀 다른 삶을 선택하게 된다. 섣부른 결론을 노출하면 문명인으로서 무인도조차 자신의 방식으로 길들이려 했던 로빈슨은 원시성을 지닌 섬에 남는 삶을 택하지만, 아무리 길들이려 해도 길들지 않던 방드르디는 구조선이 무인도에 닿자, 그간 제가 꾸려오던 원시적인 삶의 방식을 버리고 문명의 삶을 자발적으로 택한다. 처음 소설을 읽었을 때 가장 충격적으로 다가왔던 부분도 여기, 낯선 타자로 상징되던 방드르디가 문명을 갈망하는 인물로 뒤바뀐 것이 내겐 엄청난 사건이었다. 그리고 이 어마어마한 사건을 이해하는데 꽤 오랜 필요했다. 내 삶에 지속적으로 개입하려는 낯선 타자로 인해 기존에 내가 알던 나는 전혀 다른 나로 변하는 것이 자연 순리였다. 『방드르디』 폭발사건 이후 관전 포인트도 여기다. 폭발사건 이전에 로빈슨과 방드르디는 주종관계로서 방드르디가 일방적으로 로빈슨의 생활을 관찰하고 지시에 따랐다면, 사건 이후 로빈슨과 방드르디는 동등한 관계가 되어 지속적으로 서로의 삶에 개입함으로써 상대방의 삶의 방식을 배우고 궁금해한다. 즉, 서로에게 낯선 타자가 되어 상호 영향을 주고받는다.
서로에게 사물이 아닌 낯선 타자가 되는 일은 상대의 세계를 경험한다는 의미다. 폭발사건 이후 이들 사이 가장 큰 변화는 로빈슨 역시 방드르디의 영향을 받는 타자로 변화된 지점이다. “방드르디에게서 용기를 얻어 이제는 알몸으로 햇볕에 나섰다. 처음에는 잔뜩 겁을 먹고 쭈그린 채 흉하기만 했던 그의 모습이 차츰차츰 피어났다. 피부는 구릿빛으로 변했다. 새로운 자부심이 가슴과 근육을 팽창시켰다. 그의 몸에서 어떤 열이 뿜어져 나왔고, 그의 영혼은 거기에서 전에는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어떤 자신감을 얻어내는 것 같았다.” 이전까지 방드르디를 가르치고 길들여 자신이 경험한 세계로 끌어당기고자 했던 로빈슨은 이제 방드르디의 세계를 경험하는 것이다. 또한, 단순히 일시적인 경험으로 끝맺지 않고 그 삶을 통해서 로빈슨 자신은 지니고 있지 않을 것이라 믿었던 어떤 내면성을 발견한다. 이가 바로 투르니에가 소설을 통해 세계에 던지는 메시지가 아닐까? 로빈슨이 방드르디를 제 소유물에서 낯선 타자로 새로이 바라본 일은 서구 열강이 비서구에 대해서, 그렇게 해야 함이 당연하지만 절대 그렇게 바라보지 못하는 시선이다.
물론 소설에서는 섬의 질서를 단번에 무너뜨린 폭발사건이라는 엄청난 계기가 있었다. 그러나 무너진 질서, 더구나 원래부터 있던 것도 아닌 스스로 만들어 제정하고 확립한 질서는 다시 만들어 제정하고 확립하면 되는 것들이었으나 로빈슨은 그러지 않았다. 대신 그 섬, 텅 빈 섬에서의 생존 방식을 방드르디를 통해 다시 배웠다. 제국주의는 결국, 실패로 끝났다. 그들은 타자성을 배우는 대신 힘으로 제압하고 그들의 방식으로 길들이여 했기에 실패는 예견된 결과였고 강자와 약자들의 대립은 예나 지금이나 지속적으로 이어지고 있다. 마치 그것이 당연한 것처럼. 정말 당연할까? 세계를 작동시키고 더 풍성히 만드는 건 거대한 힘이 아니다. 다만 그렇게 보일 뿐이다. 지금 강대국이라 불리는 국가들의 풍부한 자원과 막강한 권력은 온전히 그들의 것이 아니다. 제국이란 힘으로 눌러 빼앗은 것들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막강한 힘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늘 거대한 힘을 원한다. 그러나 진짜 힘은 누군가를 착취하거나 길들여서 생기지 않는다. 그렇게 얻은 힘은 언젠가 사라진다. 그 언제 사라질지 모를 힘을 위해 끝없이 힘을 길러야 하고 또 다른 이들은 착취당하거나 길들어야 한다.
이는 본래 모든 인간이 갖는 본성, 원시적 힘을 억눌러 버리는 일이기도 하다. 폭발 이전 도저히 길들지 않는 방드르디를 보며 로빈슨은 처음으로 질서를 고민한다. “질서란 항상 얻기 어려운 것으로서, 섬의 자연적인 야만성으로부터 힘들게 쟁취한 것이다. 그런데 아라우칸 족이 그에게 저지른 것들은 그 질서를 심각하게 뒤흔들어놓고 있었다.” 이때만 해도 그는 그가 이룩해둔 질서나 체계가 무너질 수도 있단 상상은 하지 않았다. 그 자신이 힘들여 이룩한 질서와 체계이기에 언제까지나 견고할 줄 알았던 거다. 이는 낯선 타자가 침범하지 않을 땐 가능하지만 세계. 그러니까 살아가는 일은 끊임없는 타자와의 상호관계성이다. 로빈슨이 무인도를 제 방식대로 길들이여 했지만, 그 역시 섬의 입장으로 생각하면 로빈슨이라는 타자의 침범으로 인해 제 고요함이 깨진 것이고, 로빈슨 역시 방드르디와 폭발사건으로 인해 제가 이룩한 질서를 잃은 것이다. 결국, 낯선 타자의 개입이 나를 변화하게 만든 것이다.
그렇다면, 제국주의자들은 어떻게 변하지 않고 더 막강한 힘을 얻게 되었을까? 그리고 서구권 국가가 아닌 국가는 왜 비서구 국가일까? 그는 방드르디를 만나기 이전, 폭발사건이 발생하기 이전 로빈슨이 그랬듯, 모조리 길들이여 했고 존재가 아닌 소유물 취급했기 때문이다. 내가 아닌 타자가 가진 삶의 방식을 존중하거나 배우기는커녕 억누르고 짓누름으로써 제국주의라는 견고한 질서를 만든 탓이다. 지금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자본주의 체제나 전 세계 공용어로 통하는 영어는 본래부터 그래왔거나 진화의 역사가 아니라 제국주의자들의 질서다. 그들의 삶의 방식을 다른 민족들에게 가르치려 그들은 어떤 민족의 언어를 짓밟아 영어를 습득하게 하고, 영어권 문화를 익히게 하여 종국엔 그들처럼 사고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본 문화의 저질성과 야만성을 반복적으로 상기시키는 한편, 제국의 우월성과 위대함을 주입 시키는 것이다. 가능한 방법이 아니라고 더러 코웃음 칠 수 있다.
그러나 제국주의자들이 막강한 힘을 유지할 수 있었던 방식은 예상외로 단순했다. 이따금 생각한다. 소설 속에서도 폭발사건이 아니었다면, 붕괴 이전으로 되돌리기 힘든 섬이 아니었다면, 문명인인 로빈슨은 원주민 방드르디를 아주 낯선 타자로 받아들였을까? 그러지 못했을 거라 생각한다. 이미 언급한 대로 기존 질서 속에 들어온 타자는 그 질서 속으로 끌어당겨야 할 이방인일 뿐이다. 그러나 모든 질서가 무너진 장소에서 타자는 낯선 존재자가 될 수 있고, 내게 어떤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따라서 제국주의자들, 문명인이라 자부하는 그들에게 힘이란 오직 질서와 체계가 전부인 셈이며, 그것이 무너지는 순간 그들의 세계는 무너지는 것이다. 지금의 세계 위기도 이와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 자본주의 체제는 이미 한계성에 달했고, 제국주의의 민낯은 만천하에 드러난 지 오래되었다. 그래도 여전히 서구열강은 그들의 건재함을 증명이라도 하듯 약소국을 향한 야욕을 가감 없이 드러내며 그들을 비서구 혹은 야만인이라 칭한다.
그러나 진짜 힘은 야만이라 불리는 그들의 낯선 타자성이다. 지배나 짓눌러 바꿔야 할 대상이 아닌 그들이 가진 본래 모습에서 나오는 어떤 에너지가 낯선 타자다. 그리고 그건 지금 우리에게, 이미 썩어 문드러질 대로 문드러진 자본주의 체계 끝에 매달린 모두에게 필요하다. 이것이 새로운 희망으로 거듭날 수 있을진 아무도 모르지만. 지금 이 상황을 바꾸려면 낯선 타자가 필요하다. 낯선 타자만이 기존 질서에 균열을 일으킨다. 물론 이 타자가 방드르디처럼 훗날 문명을 갈구할 수도 있고, 자본주의 체계가 끝까지 외면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건 나중 문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균열을 일으킬 낯선 타자다. 이들의 적극적인 개입만이 휘청이는 세계의 역사를 새로이 쓰게 할 것이다. 투르니에 소설을 읽기 전에 로빈슨과 방드르디의 삶의 행로가 어떻게 뒤바뀔 걸 예상치 못했던 것처럼.
장려 남*린 지역주민 도서: 역사의 쓸모
독후감: 민이에게 들려주는 역사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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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아, 이번 가을에 엄마는 <역사의 쓸모>라는 책을 읽었단다. ‘역사’라는 익숙한 주제가 아니었다면 제목 때문에 엄마의 책장에서는 벌써 쫓겨났을 책이야. 네가 엄마 책장에 좀 더 관심을 가졌다면 알았겠지만, 엄마에게 있는 역사책은 주로 테마 한국문화사나 왕실문화총서, 새로 읽는 우리 고전 같이 문화사나 원전에 가까운 책들이거든. 엄마는 ‘고전’이나 ‘역사’는 그 자체로 의미 있다고 생각하니까. 굳이 ‘역사’에서 ‘쓸모’를 찾아야 할 필요가 어디 있을까, 라는 게 엄마의 평소 생각이라서. 그런데 이 책을 읽고 나니 “역사를 배운다. 역사에서 배운다.”라는 낡은 말이,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오래된 말이 새삼 묵직하게 다가오더라고.
사실 저자 때문에 책을 선택한 것도 있어. 저자인 최태성은 원래 역사 교사였다가 온라인 강의와 대중 강연 중심으로 나서서 유튜브에 무료 강의 채널을 열었더라고. 엄마도 나중에 그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좀 멀리 갔고- 5년 전쯤 최태성의 한국사 시험 해설 단강을 들은 적 있었는데 깔끔하다는 느낌을 받았었거든. 12권의 목록을 보면서 ‘이 사람이 얘기하는 역사의 쓸모란 과연 어떤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으니 호기심 유발에 성공한 셈이지.
책은 크게 네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어. 1장 ‘쓸데없어 보이는 것의 쓸모’는 최태성이 바라보는 역사, 다시 말해 최태성의 역사관이라고 할까? 역사책을 보다보면 ‘사관이 말한다’라는 부분이 있는데, 딱 그 느낌이었어. “끊임없이 생명력을 불어 넣고, 이 시대에 맞는 의미를 찾아내서 사람들에게 알려주는 것” 27쪽 16~18줄
을 목표로 삼았다고 얘기하면서 <삼국사기(三國史記)> 대신 <삼국유사(三國遺事)>, 남은 이야기를 보물 지도처럼 보여주고 싶다는 것에서 다음 장으로 넘어갈 수밖에 없었지. 막힘없는 내용과 존댓말로 구성된 형식이 잘 어우러져서 현장감 있는 강의를 듣는 듯한 기분에 저절로 손이 빨라지더구나.
아, 넘어가기 전 1장에서 또 하나 짚어두고 싶은 건 오로지 ‘나’와 ‘현재’만을 생각하는 역사의식 없는 사람들에 대한 얘기였어. 책에서는 사사오입 개헌에 찬성했던 사람들을 예로 들고 있었지만 엄마는 서정주 시인이 생각났단다. 어떻게 그렇게 정갈한 모국어로 시를 쓰는 사람이 일제 말기 가미가제를 찬양하는 시를 쓰고, 5공 때 전두환을 찬양하는 시를 쓸 수 있었는지, ‘자화상’이나 ‘무등을 보며’, ‘푸르른 날에’ 같은 시를 가르치면서도 늘 의문이었거든. 하지만 저자의 말대로 ‘나’와 ‘현재’만을 보는 사람, 이라는 점에 초점을 맞추니 전북 고창이 고향인 시인이 신라 이야기를 시로 쓴 것까지도 이해가 되었어. “역사를 찬찬히 살펴보면요, 그 갈망의 힘으로 새로운 세상이 열립니다. 한 시대의 꿈이 이루어져서 다음 시대가 와요. 이걸 알게 되면 굉장히 설렙니다. 그렇다면 우리 시대의 꿈은 뭘까? 우리가 꿈꾸는 세상은 언제 오게 될까? 이런 생각이 들어요.” 32쪽 13~16줄
라는 상상력을 절대 이해할 수 없이 오직 눈앞의 현재만을 살아갔던 시인의 시가 오늘날 울림이 줄어든 것 역시 납득할 수 있었고.
2장 ‘역사가 내게 가르쳐준 것들’은 ‘혁신, 성찰, 창조, 협상, 공감, 합리, 소통’이라는 7개의 키워드로 동서고금의 역사를 살피고 있었어. 무엇보다 삼국 중 가장 약소국이었던 신라의 삼국통일을 황룡사 9층 목탑으로 풀어내는 것이 이채로웠지. 고층 빌딩이 없는 과거, 경주 전역 어디서나 볼 수 있었던 황룡사 9층 목탑이라는 뚜렷한 비전을 세우고 비주류를 등용했던 선덕여왕의 혁신 말이야.
이후로도 생각의 가지를 넓게 뻗을 수 있는 내용들이 많았어. 과거의 영광이나 스스로의 성공에 도취되어 결국 멸망의 길을 걸었던 잉카 제국과 연개소문은 자기 성찰이 부족했던 하나의 예시가 되었지. 자유의 확대를 향한 창조라는 키워드로 구텐베르크의 인쇄술과 아이폰과 한글 창제가 묶이기도 했고. 고려뿐 아니라 우리 역사 속에서 손꼽히는 협상의 달인 서희와 원종도 재미있었단다. 강동 6주를 얻어낸 서희의 외교야 다른 책에서도 쉽게 볼 수 있지만, 몽고에 항복하면서도 직할 통치를 벗어날 수 있었던 원종에 대해서는 다시 보게 되는 계기가 되었어. 장수왕과 박지원과 가성비를 통해 살펴보는 합리와 평창 동계 올림픽 때 문익점을 들면서 문 대통령과 소통을 시도한 북한 고위급 인사들의 이야기도 과거와 현재를 잘 이어주고 있었고.
특히 태극기 부대를 들고 와서 “특정 대통령이 아니라 사실은 자기의 삶이 통째로 부정당하고 있다는 생각에 분노하는” 143쪽 12~13줄
사람들에 대한 분석은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더구나. 역으로 기성세대도 요즘 젊은 애들의 삶에 관심을 갖지 않고 자신들의 경험만 내세운다는 점을 짚어준 것도 좋았지. “역사를 공부한다는 것은 사람들이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왜 그럴 수밖에 없는지 상상해보고 그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보는 일입니다. 결과만 놓고 잘잘못을 따지는 일이 아니라 그 속내와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을 헤아리는 것이지요.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공감하고 이해하는 연습을 하게 됩니다.” 139쪽 12~17줄
라는 말은 그래서 울림이 컸고. 네 글자로 바꾸면 그대로 역지사지(易地思之)잖니.
3장 ‘한 번의 인생,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는 다섯 사람의 삶을 통해 바람직한 인생에 대해 말하고 있었어. 유배당하고 유랑하면서도 자신이 바라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대안을 제시하고 움직였던 인물 정도전, ‘이걸 이룰 수만 있다면 내 인생을 바쳐도 좋다!’라고 한 길을 걸었던 대동법의 아버지 김육, 신분을 운명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바다를 바라보며 꿈을 키우며 자신의 가능성을 믿고 한 걸음 더 내딛었던 장보고, ‘한 번의 젊음을 어찌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신분과 재산을 다 던지고 독립 하나만을 바라본 예순여섯 해의 일생으로 답했던 이회영의 삶을 정말 옛날 얘기 들려주듯 풀어놓았어.
그리고 엄마가 너에게 들려주기 위해 아껴둔 박상진. 법학을 공부하다가 경술국치로 일제강점기가 시작되자 판사직을 포기하고 독립운동가로서 살아갔던 사람이야. 일제강점기에 판사가 된다면 일본 입장에서는 죄인이지만 조선 사람에게는 영웅인 ‘불령선인’들에게 징역과 사형을 선고할 수 없다는 이유로 말이야. 저자는 박상진을 두고 판사를 꿈꾼 사람이지만 꿈이 판사는 아니었다고 표현해. “그의 꿈은 명사가 아니었습니다. 법에 대해 아는 게 없어서 늘 당하고만 사는 평범한 이에게 도움을 주고, 정의가 살아 있음을 증명하는 사람이 되려고 판사가 된 것입니다. 이게 그의 꿈이었어요. 명사가 아닌 동사의 꿈이었지요.” 207쪽 19줄~208쪽 2줄
꿈이 뭐냐고 물었을 때 직업명이 나오는 것이 끝이 아니라 그 직업을 가지고 무엇을 하고 싶은지,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물어보는 게 필요하다는 거지.
문득 엄마를 돌아보게 되었어. 학생들에게 얘기할 때 후자와 비슷한 얘기를 한 적은 많아. 직업은 선생님이지만 ‘정원과 서재가 있는 삶을 꿈꾸는 사람’이라고. 하지만 이 직업을 가지고 무엇을 하고 싶은지에 대해서는 생각해본 적이 없더라고. 종례일보를 내주고, 학급 단합 활동 기회를 만들고, 도서관 활용 수업을 하고, 나름 다양한 활동을 시도해 봤지만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것에 가까웠지 큰 그림이 없는 거야. 앞으로 학교에서 20년을 넘게 있어야 할 텐데 말이야. 앞으로 복직할 때까지 엄마의 화두는 ‘책의 즐거움을 알고 표현할 수 있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교사’로 자리매김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되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가 될 거야. “저는 사람들이 명사가 아닌 동사의 꿈을 꾸면 좋겠습니다. 이왕이면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줄 수 있으면 좋겠지요. 그 꿈에서 삶의 의미를 찾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데 기여하는 자신만의 자리를 발견하길 바랍니다.” 214쪽 16~20줄
책을 읽으면서 삶에 이렇게 직접 말을 걸어오는 느낌은 하도 오랜만이라 짜릿하기까지 했어. 그래서 꿈이랑 관련지어 책 속의 한 구절 더. “독립투쟁단체들의 이동 경로를 외우려고 하지 말고 한번 머릿속에 그려봅시다. …(중략)… 우리는 그 화살표를 그냥 화살표로만 봐서는 안 됩니다. 그 안에 담겨 있는 그들의 발자국을 봐야 합니다. 그 속에 숨겨져 있는 건 그들의 꿈입니다. 그 시대 사람들의 꿈이에요.” 221쪽 11~20줄 발췌
민이 너도 동사의 꿈을 함께 꾸지 않으련? 명사 속에 갇혀 있지 말고, 내 삶의 목표를 구체적으로 그릴 수 있는 동사로서의 꿈 말이야.
4장 ‘인생의 답을 찾으려는 사람들에게’는 다시금 1장의 변주였어. 전반적으로 무난했지만 미투운동에서 어우동으로, 축첩제에 대한 얘기로, 나혜석으로 펼쳐지는 이야기를 따라가다가 뒤이어 예송논쟁을 말하며 첨예한 대립과 갈등이 적절한 온도-역사의 방향에 맞는가를 따져야 한다는 배치가 조금 걸리긴 했어. 앞에서 말한 내용을 바로 뒤에서 반박하는 듯해서 말이야. 그래도 책의 전반적인 구성이 수미상관을 이루며 안정감 있게 남더라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고, 오랜만에 소설 이외의 책을 잡아 재밌게 읽은 것 또한 맞아.
책을 다 읽고 나니 네가 얼른 자라서 엄마랑 같은 책을 읽고, 혹은 같은 주제를 다루고 있는 책을 읽고 함께 이야기 나눌 날이 기다려진다. 그때는 이렇게 ‘역사에 쓸모를 논할 필요가 어딨지? 어, 책을 읽어보니 그럴 법도 하네.’라고 엄마 혼자 말하기보다 네 생각을 듣고 같은 부분은 같게, 다른 부분은 다르게 말하면서 우리 둘의 역사-우리의 삶이 늘 동사로 움직여가기를 바랄게!
장려 허*영 치의학과 도서: 일본회의의 정체
독후감: 이웃으로 살아가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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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날씨가 쌀쌀해졌다. 원래라면 사람들이 히트텍을 사러 유니클로에 갔을 텐데, 올해는 다르다. 가지 않는다. 사람들은 여전히 불매 중이다. 나의 불매는 지난 여름방학부터 시작되었다. 친구들과 일본 여행을 계획하여 모든 준비가 끝난 상태였을 때, 뉴스에 일본의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일본이 위안부, 강제 징용 등의 면에서 한국 정부와 마찰이 생기자, 이것을 이유로 한국 경제에 제재를 가했다는 내용이었다. 사람들은 불매 운동을 시작했고, 일본행 비행기의 예약 취소는 빈번하게 일어났다. 나는 처음에 버텨보려고 했다. 나의 여행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아있었고, 그전에는 이 문제가 해결되리라고 기대를 품었다. 그러나 이 생각은 나에게 더 높은 수수료를 요구했을 뿐이었다. 결국 비행기를 취소한 나는, 매우 화가 났다. 이런 일을 벌인 아베가 너무 싫었고 그런 지도자를 뽑은, 정치에 관심조차 없는 일본 사람들에게도 화가 났다. 한국 사람들의 발길이 뚝 끊긴 일본의 모습을 보여주는 뉴스를 보며 코웃음을 치기도 했다. ‘꼴좋다.’라는 생각이었다.
나의 그런 생각은 불매로 이어졌다. 무엇인가를 살 때 ‘Made in Japan’은 아닌지 확인하는 습관이 생겼고 며칠간은 일식도 먹지 않았다. 이번을 계기로 생각보다 많은 일본 제품, 일본 브랜드가 생활 속에 녹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대체품으로 국산 제품을 찾게 되었으며, 일본 제품 사용과 일본 관광을 꺼리게 되었다. 나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그랬다. 원래는‘우리나라 사람들은 일본을 싫어하는 척하는데, 사실은 좋아한다.’라는 말이 있었다. 말로는 싫다고 하지만 우리나라 사람들만큼 일본에 자주 놀러 가는 사람들이 또 없었다. 부산대학교 앞에만 해도 수많은 일식집이 있다. 그만큼 일본의 문화를 가까이해 온 것이다. 그랬던 사람들이 변했다. 물론 일본의 경우 무역 의존도가 그리 높지 않기 때문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렇게 한다고 해서 큰 타격을 입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이것이 그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생긴 작은 변화일 뿐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위와 같은 인식이 생겼다는 사실만으로 의미가 있다. 나는 이것이 앞으로도 계속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나 일본 문화를 좋아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이지만, 나는 ‘아베를 좋아하는’ 우리나라 사람은 보지 못했다. 다들 차라리 싫어하는 편이었다. 그렇다면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반감을 사는 아베는 어떤 사람인가? 아베는 조선 총독을 지낸 아베 노유부키의 친손자로, 일본의 우파를 대표하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아베 총리는 2013년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단행하였고, 지금까지도 그곳에 공물을 보내고 있다. 주변국들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전범들을 미화하고, 과거의 일본을 찬양하는 태도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총리 아래에서 일본은 점점 우경화되고 있으며, 국민들은 이런 것에 관심조차 없다는 것이 원래 내가 알고 있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더 큰 집단이 아베 정권을 쥐고 있다는 이야기를 한다. 그것이 바로 ‘일본회의’이다.
일본회의는 우파 인사들의 모임이라고 보면 되는데, 이는 ‘국민회의’와 ‘일본을 지키는 모임’이 합쳐진 집단이고, ‘생장의 집’이라는 종교단체가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외신들은 이를 ‘극우 로비 단체’, ‘아베 내각을 좌지우지하는 집단’ 등으로 평가하는 데에 반해 일본 내에서는 이에 대해 쉬쉬하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일본회의에는 다수의 국회의원들이 속해 있으며, 이들은 점점 몸집을 늘려가고 있다. 이들은 지금까지 많은 일들을 해왔다. 선택적 부부별성 제도 반대 운동, 국기 국가법 제정 운동, 외국인 지방참정권 반대 운동, 야스쿠니 신사 20만 참배 운동, 교육 기본법 개정 운동 등이다. 이들을 살펴보면 전쟁 전의 일본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회귀적 성격과 변화를 지양하는 보수적 성격을 띠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본회의의 목표는 헌법의 개정이며, 헌법을 옹호해야 할 아베 총리조차 이에 앞장서고 있다. 위와 아래가 서로 밀접한 관계가 되어 협력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에서 좌파의 목소리는 매우 작아져 왔다. 그 배경에는 주변국의 큰 경제성장으로 인한 상실감과 경기 침체로 인한 불안감이 있었는데, 이것이 일본을 특별한 나라로 보는 미디어가 성행하게 하였다. 그리고 이것은 아베와 일본회의의 주장과 닮아있었다. 일본 전체가 그러한 병에 걸린 것이다. 아베는 여전히 50%대의 지지율을 기록하고 있으며, 역사 다시 쓰기와 헌법 개정을 빠른 속도로 추진하고 있다. ‘아베적인’ 것들이 난무하는 상황을 국민들이 그냥 지켜보고 있다는 점에서 이미 일본이 일본회의에 잠식되었다고 진단할 수 있다. 이렇게 한쪽 집단이 비대해지고, 국민들은 이에 무관심한 상태가 지속된다면, 일본에서 진정한 민주주의를 찾는 일은 어려워지지 않을까? 천황의 제국으로 돌아가는 것은 아닐까?
나는 일본 사람들이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지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우선은 한 집단 안에 있는 사람이 그 집단에 대해 객관적인 평가를 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집단의 구성원은 필연적으로 그 집단의 가치관, 상황 등에 영향을 받기 때문에 한 발짝 떨어져서 그 집단을 바라보기란 쉽지가 않다. 이러한 역할을 해주어야 하는 것이 언론인데, 일본에서는 언론 또한 우익에 물든 채로 침묵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 사람들은 지금 일본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을 수 있으며, 문제를 인지하더라도 객관적인 판단에 어려움을 겪고 있을 수 있다.
다음으로, 교육이 문제라는 생각을 했다. 교육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한 사람이 가치관을 형성하는 데에 큰 영향을 미치며, 한 번 정립된 가치관은 바꾸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일본 사람들의 경우 일본이 과거에 저지른 잘못에 대해서는 거의 배우지 않는다. 일제 강점기, 위안부 등의 단어를 들어보지 못한 채 졸업하는 학생들이 대다수이다. 반면에 원자력 폭탄과 같은 것을 다루면서 일본이 피해자라는 식으로 학생들을 가르친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 사람들은 아무런 죄책감을 가지지 않는다. 또한 미디어를 통해 일본은 우월한 나라, 아름다운 나라라는 생각에 지속적으로 노출되게 되는데, 이것은 자문화 중심적 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 A급 전범의 자손인 아베가 20, 30, 40대에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는 것에서도 이를 엿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사람들이 정치나 사회에 무관심하다. 일본의 투표율은 낮은 것으로 유명한데, 50%를 넘기지 못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권자의 약 20%만이 자민당을 지지한다고 하는데, 그들만으로도 정권이 결정되는 것이다. 투표율이 낮은 상황에서 정치 인사들이 장기적으로 권력을 유지하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이다. 아베는 이미 3연임에 성공했고, 4연임을 들먹이고 있다고 한다. 이것을 독재가 아니면 어떤 단어로 표현할 수 있을까? 누군가는 일본 사람들은 죄가 없고 나쁜 것은 일본 정부라고 말한다. 그러나 일본 사람들은 무관심이라는 죄를 지으며 살아가고 있다. 정치인들이 알아서 해줄 것이라는 생각으로는 그들이 원하는 미래를 맞을 수 없다. 그냥 정치인들의 입맛대로 끌려가는 것밖에는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일본은 변화할 수 있을까? 나는 잘 모르겠다. 책에 기술된 것과 같이 일본회의는 뿌리에서부터 머리에서까지 집요한 활동을 벌이고 있고, 이들을 저지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또한 사람들의 가치관 변화를 위해서는 교육과 미디어의 변화가 필요한데, 정치인들과 권력가들의 힘 없이는 이 또한 어렵다. 그러나‘일본 회의의 정체’와 같은 책이 나오는 것을 보면 일본 내에도 깨어있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것은 분명하다. 만약 이들이 대다수의 유권자들을 공감을 살 수 있다면 헌법의 개정을 막고 아베를 저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일본 사람들이 각성하여 국민적이 운동을 펼친다면 ‘민주주의’ 국가에서 무엇인들 못하겠는가? 가장 중요한 것은 ‘국민들’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다. 이들이 변하면 일본도 변한다.
‘일본회의의 정체’를 읽으면서 든 생각은, 우리나라의 민주주의가 생각보다 잘 발달 되어있다는 것이었다. ‘수많은 민주 항쟁을 통해 일궈낸 민주주의’, ‘피 흘려 만들어낸 민주주의’라는 것은 역사책과 영화에서 많이 배웠지만, 시끄러운 정치계를 보면서 잘하고 있는 게 맞는지 여러 번 의심했었다. 그러나 일본의 경우를 보면서 여러 개의 정당이 서로를 견제하고, 약 57~77%의 투표율을 보여주는 우리나라의 민주주의가 더욱 발전한 형태라고 느껴졌다. 또한 국민들이 나서서 독재 정권을 몰아내고, 지금과 같은 제도를 만들어 낸 것이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다. 이런 일이 일본에도 일어나서 회귀적 사고를 멈출 수 있다면, 한일 관계 정상화와 일본의 과거 청산 또한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꼭 그렇게 되기를 소망한다. 이웃으로서.
장려 김*우 경영학과 도서: 진화한 마음
독후감: 순수한 진화심리학 앞에서 알몸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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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가 왜 가장인 줄 아나?”, “남자(여자)끼리 왜 싸우는지 아나?”
아버지의 퀴퀴묵은 푸념은 언제나 원시인 때의 이야기로 돌아간다. 마냥 어릴 때는 세상일이 인류의 아주 먼 과거인 유인원 시절의 생활과 맞아떨어진다는 것이 신기했다. 하지만, 점차 시간이 갈수록 아버지의 이런 고리타분한 얘기들을 듣고 있자니 남녀차별주위, 남성우월주위를 옹호하고 이를 주입하고자 하는 것 같아 이런 얘기에 큰 거부감을 느꼈다. 그렇게 인류의 진화 및 발달과정을 설명하는 다윈의 ‘진화론’을 포함한 방대한 이론들은 현재 인간의 형태와 사회 현상을 설명하기에 많이 동떨어져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후 전중환의 ‘진화한 마음’이라는 책이 접하면서 생각에 큰 변화가 생기게 된다.
이제껏 읽은 책이 많지 않지만, 읽는 중에 내면에서 활발한 논쟁을 펼친 책은 처음이었다. 진화심리학의 기원, 정의 등을 설명하는 1장을 읽으면서 저자(전중환)는 인간의 행동과 내면(마음)을 조상들로부터 진화된 심리기제의 묶음이라 표현하고 이러한 이론적 틀을 가지고 인류와 사회의 양상을 설명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설명은 머릿속에 의구심이 먼저 자리 잡게 했다. 그 이유가 있다. 책을 펼치자마자, ‘이 책은 진화심리학 초심자를 위한 입문서가 아니다.’라는 문장을 보았고, 이 학문에 대한 기초적인 선수지식을 가지고 페이지를 더 넘겨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인터넷에 ‘진화심리학’이라는 검색어를 입력했는데, 이와 관련해서 나오는 건 학문의 정의, 이론적 배경, 연구 결과 등이 아니라 ‘여혐’, ‘페미니즘’과 같은 키워드와 ‘진화심리학 찬반 논쟁’과 같은 글이었다. 이를 보고, 내가 지금 접해야 하는 책이 정말이지 고독하고 외로운 학문을 다루고 있다고 생각하는 동시에 선입견 아닌 선입견을 품게 했다. 그래서 책 1장 속 저자가 진화심리학이 받는 수많은 오해들을 풀고 해명하기에 급급해 보인 듯하다. 이렇게 1장을 읽고, ‘너무 허무맹랑한 학문이 아닐까?’, ‘저자가 주장하는 연구 과정과 결과 도출 방법은 알겠는데 과연 이를 통해 인간의 얼마만큼을 설명할 수 있을까?’ 등 많은 고민과 걱정에 빠졌다.
제목처럼 ‘진화심리학’이라는 학문으로부터 모조리 다 까발려진 기분이 들었던 건 2장부터 시작되는 진화심리학의 연구 결과들을 마주하면서부터이다. 생존, 짝짓기, 혈연, 집단 사회생활, 학습과 문화 등 인간의 전반적인 행동과 생각을 단순히 ‘어떻게’가 아니라 ‘왜’에 초점을 맞추어 궁극적 원인을 연구 사례를 통해 설명하는 것을 볼 때마다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고개를 끄덕이기 일쑤였다. 보통 인간에 대한 새로운 연구 결과들을 마주할 때면, 놀랍거나 대단하다는 감정에 그치지만 진화심리학자들이 던지는 사례들에서는 흥미를 넘어선 당혹스러움과 찔림(양심의 가책)과 같은 감정이 들었다. 이는 진화심리학이 우리가 평소에 의식하지 못하는 외부 자극에 대해 특정한 방식으로 일어나는 심적 과정에 초점을 두고 있기 때문인 듯하다. 이성과 사랑에 빠지고, 바퀴벌레를 혐오하고, 아기를 귀여워하고, 가족에게 헌신하고, 음식을 고를 때 깊은 고민에 빠지는 것은 로봇과 같이 우리가 저절로 하는 행동과 생각이 아니다. 이러한 행위의 기저에는 매우 복잡, 정교한 심리 기제가 존재한다. 진화심리학은 이러한 심리 기제를 ‘진화적 시각’을 통해 만나게 해준다. 마음이 특정 기능을 적절히 수행할 수 있도록 진화과정 속‘자연 선택’에 의해 어떻게‘설계’되었는지에 대한 통찰을 제공한다. 진화심리학이 주는 새롭고 흥미로운 관점 덕분에 해당 학문에 대한 색안경을 벗고 이 학문의 매력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또, 진화심리학은 개인과 사회에 시사점과 방향성을 제시하기도 한다. 인간이 ‘선행, 배려’를 하는 이유는 본인에 대한 타인의 평가를 크게 의식해서 그런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연구 결과를 비영리, 공공 단체의 캠페인과 기부활동에 활용한다면 그 효과는 기대할만하다. (현재, 이러한 심리기제의 활용사례도 사회 속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필자는 ‘대체 불가능한 사람이 되어 우정의 지속성을 추구하자’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왜냐하면, 진화심리학에서 ‘우정’이라는 주제를 다룰 때, 사회적 보험가설과 동맹 가설이 나오는데, 이는 타인(친구)이 본인을 대체 불가능하다고 여기고 본인 스스로 그렇다고 인식되기 위해 친구와의 정서적 유대감을 형성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래서 적극적인 자기개발을 해서 집단 내에서 타인과 차별화된 강점을 통해 친구의 ‘친구랭킹’에서 우위를 차지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진화심리학은 인간의 근원을 통해 현재를 파악하는 학문이지만 개인에게 교훈을, 사회에는 미래 지향점을 제시하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점이 생긴다. 과연 왜 사람들은 ‘진화심리학’이라는 학문에 분노하는 것일까? 왜 순수한 학문이 아닌 대중들을 선동하는 수단으로만 바라보는 것인가? 이에 대한 개인적 견해를 풀어본다.
모든 학문은 완벽할 수 없고 그렇지 않다. 어떤 학문이든 전제, 가정이라는 울타리 속에서 이론이 정립되고 연구가 진행되며 이는 곧 ‘한계’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러한 결함이 발견되고 이에 대한 비판과 반론이 존재할 때 해당 학문은 발전할 수 있다. 하지만, 학문이 지향하는 방향과 이론의 핵심을 제대로 이해를 하지 못한 채 불필요한 오해와 억측 및 분란이 벌어지고 심하게는 여론몰이의 수단으로 활용하는 것은 절대 바람직하지 않다. 그런데도 ‘진화심리학’이라는 순수한 학문은 대중들의 과녁판이 되어가고 있다. 도대체 이 학문의 어떤 점이 그들을 불편하게 한 것일까?
먼저, 진화심리학이 허무맹랑한 주장만 하고 억지스러운 이야기를 꾸며내기에 급급한 사이비 과학이라는 의견이 존재한다. 필자도 이 책을 접하기 전까지만 해도 진화심리학이 공중에 붕 떠 있고 퍼즐을 억지로 끼워 맞추는 듯한 학문이라는 인식이 있었다. 하지만, 이는 해당 학문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기에 그랬다. 우선, 진화심리학은 인간의 수많은 심리 현상을 ‘진화적 자연 선택에 의한 심리기제’라는 일관된 원리로 통합적 이론의 틀을 제공하고 설명한다. 즉, 바다 위의 부표같이 이리저리 떠다니는 학문이 아니라 하나의 축을 가지고 인간의 행동과 그 이면을 분석하는 것이다. 또, 진화심리학은 기존의 심리학에 ‘진화적 시각’을 더함으로써 보다 과학적인 학문으로 발돋움했다. 과학자들은 여기에 분노할 수 있겠다. 하지만, 명확하고 일관된 가설을 통해 대표성을 띠는 표본에 인간의 심리기제 분석을 목적으로 하는 실험과 연구를 하는 진화심리학을 보고 “비과학적이다.”, “사이비 과학이다.”하는 것은 억지 논리라고 생각한다.
또, 진화심리학이 인간을 유전자의 종속체로만 보는 ‘유전자 결정론’에 100% 의존하고 이를 절대적 진리라고 신봉한다는 의견도 존재한다. 하지만, 이는 이 책을 접하면 분명한 오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물론, 진화심리학은 유전자 결정론에 입각한 학문이지만, 이에 무조건적으로 의존하여 연구하고 이론화하지 않는다. 인류 진화 과정 속 먼 조상이라 판단되는 오랑우탄, 원숭이들과의 차이점 분석을 통해 인간 특유의 모성애와 육아법을 설명하기도 하는 등 틀에 갇힌 사고를 대중들에게 심으려 하지 않는다. 물론, 진화심리학은 ‘유전자’라는 존재를 다른 분자생물학자들의 관점과는 다른 비교적 추상적인 개념으로 바라보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이러한 시각이 존재하기에 기존에 다루지 못했고 이해하지 못했던 현상들을 양파껍질 같이 하나하나 벗겨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진화심리학을 성차별주의, 폭력 등과 같은 사회적 문제를 과학이라는 가면으로 정당화시키려 한다는 입장이 잘못되었다는 것도 살펴보자. 진화심리학은 먼 조상으로부터 번식에 도움이 되었던 수많은 심리기제를 통해 인간의 행동과 심리를 꿰뚫는다. ‘선호하는 이성을 차지하기 위해 남성이 여성보다 더욱 경쟁 강도가 높은 이유’, ‘육아를 남성보다 여성이 더욱 전담하는 이유’, ‘인간이 살아가는 사회 속에 폭력이 발생하는 이유’ 등 진화심리학은 인간이 특정 행동을 하는 데 있어서 어떤 근원적 이유가 있는지를 알아내기 위해 유전자 진화적 관점을 통해 이를 분석한다. 이 결과에 대해 옳고 그름에 대해 논하거나 해당 사회 문제를 정당화하려는 움직임은 전혀 보이지 않는데도 대중들은 자신만의 필터로 진화심리학을 바라보고 이를 문제시하는 것이다.
이렇게 진화심리학에 대한 대표적인 세 가지 논점을 소개하고 이에 대한 개인적 견해를 풀어봤지만, 아직 이 학문은 넘어야 할 산이 매우 많다. 아직 전 세계적으로 전공자는 적지만 사회적 관심은 너무 크기 때문 아닐까? 모든 생물체를 통틀어서(어쩌면 우주까지도) 자신의 존재 이유와 그 가치에 관해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는 생물은 인간뿐이다. 그래서 ‘인간은 누구인가, 왜 존재하는가?’에 대한 의문은 수 세기 동안 종교, 예술 그리고 학문을 옭아맸던 과제였다. 그러나 약 160년 전, 다윈의 진화론과 유전자 결정론이 수수께끼의 일부분을 풀었다. 인간의 행동과 내면이 진화의 결과물이라는 사실이 본격적으로 인간탐구에 활용된 것은 고작 반세기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 성과와 힘찬 발돋움은 무시할 수 없다. 필자는 진화심리학이 지속해서 성장하고 발전해서 인간이 살아가는 사회에 커다란 시사점을 던져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왜냐하면, 미래의 방향성을 제시하기엔 그 근원을 파고드는 학문만큼 적합한 것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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