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 국내 출간 30주년 기념 특별판 작가 밀란 쿤데라 (지은이), 이재룡 (옮긴이) 출판 민음사 hayul 님의 별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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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서평
    제목부터 다가가기 힘들어 보이는 이 책은 언젠가 철학과 수업을 듣다가 교수님께서 추천하셨던 책이다. 책을 처음 읽을 때는 앞부분의 내용 전개가 지루하다고 느껴졌으나 중반부로 넘어갈수록 흥미진진해 지니, 앞부분을 읽다가 책을 덮고 싶다면 꼭 참아보길 바란다. 아마 끝까지 읽고나면 다시 제일 처음부터 읽고 싶어질 테니까.
    저자는 네 남녀의 만남과 헤어짐, 각 인물의 인생을 통해 여러 철학적인 논제들과 당대의 사회상(러시아의 체코점령)을 소설의 형식으로 풀어낸다. 크게 다루어지는 논제로는 니체의 영원회귀, 영혼과 육체의 이원성에 관한 질문, 무거움과 가벼움, 키치, 그리고 실존주의가 있고 개별적으로 다루어지고 있는 듯하지만 각 논제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저자는 이 주제들을 바라보는 다양한 관점을 각 인물을 통해 보여주고, 하나의 관점만이 옳고 그르다고 말할 수 있는지 질문하며 상식적인 가치체계에 의문을 던진다. 이 책을 보다 보면, 인물들의 상식적이지 않아 보이는 행동에 대해서도 세밀하게 해설했기 때문에 표면적으로 어떤 사람의 행동만 보고 판단을 하는 것이 조심스러워진다.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그들 나름의 경험에서 비롯된 무의식의 결과로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이라는 추측을 할 수 있게 되고, 그래서 사람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지는 경험을 할 수 있다.
    위의 여러 논제들 중 인상 깊었던 논제들을 꼽으라면 무거움과 가벼움이 되겠다. 우리는 흔히 무거움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며 그래서 가벼움보다 더 ‘좋다’고 여긴다. 하지만 저자는 이런 가치판단을 비틀고, 무거움과 가벼움을 다양한 논제에서의 대립으로 심화시키며 ‘상식적인 가치’를 부정한다. 우선 이 책 자체도, 철학과 시대상을 담은 방대한 내용을 소설이라는 형식으로 풀어내어 가볍게 읽히도록 쓰였기 때문에 모순적인 특성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우연과 필연에 대해서는, 여섯 우연이 겹쳐 생겨난 사랑은 물론 단 하나의 우연이라도 일어나지 않았다면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나, 여섯 번의 우연에 얽힌 사건인만큼 더 중요하고 많은 의미가 담겨있지 않냐고 반문한다. 필연과는 달리 우연에는 주술적 힘이 있으며, 그것이 바로 아름다운 것이고 유의미한 것이 아니냐는 구절에서, 나의 가치체계가 붕괴되는 느낌을 받았다. 저자는 거의 모든 대립되는 속성의 삶의 양상을 이러한 자세로 논하고 있고, 한쪽이 더 가치있거나 좋다는 생각을 버리고 그냥 그 자체로 봐 달라고, 그 자체의 의미와 장단점을 더 집중해서 보라고 책 전반에 걸쳐 말한다.
    아마 저자의 이와 같은 자세는 키치kitsch라는 논제와 연결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원래 미학 용어였던 키치는 ‘존재에 대한 확고부동한 동의’로 이 책에서 새롭게 정의된다. 풀어 설명하자면, ‘사람이라는 존재/어떠어떠한 존재라면 당연히 “A”해야 한다’라는 문장에서 A에 해당하는 속성이 키치라는 말이다. A에는 가령 종교라던가, 우리가 당연하다 생각하는 가치들, 사회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가치들 같이 수많은 것들이 들어갈 수 있다. 키치는 기본적으로 개인의 감수성에 기반을 두고 있고(개인에게 아름다운 이미지로서 감동을 불러 일으킬 수 있어야 이미지 속의 무언가가 키치가 될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유대감은 키치 위에 존재한다(우리 모두가 키치라는 이미지를 아름답다 느끼고 키치에 동의하기 때문에, 유대감을 가질 수 있다). 그러니까 엄밀히 키치는 한 공동체나 사회가 공유하는 감정과 가치인 것이다. 하지만 앞 논제에서 보았듯 우리의 가치체계는 존립근거가 미약하고, 그래서 키치는 ‘편견, 오해, 이미지’가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리고 사회의 기득권은 구성원 간의 유대감을 얻기 위해 키치를 교묘하게 이용한다. 책에서 다뤄지는 시대상도 이와 밀접한 관련이 있고, 나치의 홀로코스트에서도 극명하게 볼 수 있으며, 현대사회에서도 공공연하게 이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때문에 수많은 키치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은 무엇이 키치인지를 분명히 구별하는 지녀야 하고 나아가 키치에 반항할 수 있어야 한다. 다양한 삶의 주제에 대해 가치판단을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는 자세는 바로 키치를 식별하고 저항하기 위해 필요한 자세인 것이다.
    무거움과 가벼움에 대한 논제는 키치라는 논제로 이어지고 이는 다시 실존주의의 개념에 대한 논의로 넘어간다. 저자가 이 책을 통해 실존주의의 개념을 잘 설명했다는 평을 받고있는 만큼, 실존주의에 대한 간략한 설명 또한 곁들여야 할 것 같다. 실존주의의 핵심 주장은 인간에 있어서 ‘실존은 본질에 선행(先行)한다’, 즉 인간은 주체성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실존’은 이념적인 ‘본질’ 밖의 현실적인 존재이고, 이 현실적 존재 중에서도 “지금, 여기에, 이렇게 있는” 현실의 ‘자기자신’이 가장 중요하게 여겨진다. 쉽게 말하자면 우리는 ‘인간으로서의 특징, 속성’인 본질을 갖기 이전에 이미 인간으로서 존재(=실존)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실존을 기반으로 지금, 여기를 직시하고 주체적으로 행하고 선택해가며 우리의 본질을 결정하는 주체가 바로 ‘자기자신’이다. 현실적 존재는 자신의 유한성을 인식하고 무력함을 직시하지만, 이 현실의 일상적 자기를 넘어서 ‘초극, 초월’하려 노력하고, 이것이 바로 인간의 존재방식이라고 실존주의는 설명한다.
    우리는 살면서 수없이 인간의 본질에 대한 논의를 접한다. 하지만 인간의 본질 역시 사회에 의해 키치로 얼룩져 있으며, 모두에게 통용되는 인간으로서의 본질 또한 있다고 단언하기 힘들다. 역사 속에서 키치에 의해 당대의 ‘본질’에 배척되는 사람들의 죽음을 수없이 목도해오지 않았나. 또 이 소설 속에서도 저자는 너무나도 다른 네 사람을 보여주며 무엇이 인간의 본질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 묻는다. 다만 네 인물은, 자신의 한계와 키치를 인식하고 이 한계 속에서 지금, 여기 있는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고뇌할 뿐이다. 저자는 소설 처음부터 니체의 영원회귀를 부정하며 ‘지금, 여기’의 연속인 인생은 반복되지 않는 단 한 번 뿐인 것이고, 그래서 덧없고 가벼운 것이지만, 이러한 유한성 속에서도 이를 극복하려는 노력이 본질을 꽃피우는 것이라 말한다. 요컨대, 그러므로 지금, 여기의 존재는 ‘존재의 가벼움’이라는 한계를 ‘참을 수 없’다.
    인간과 사회의 내면을 섬세하게 들여다보는 이 친절하게 쓰인 소설은, 두께보다 더 많은 내용을 담고 있다. ‘프라하의 봄’을 배경으로 한 소설이지만 여전히 사회가 돌아가는 방식은 변하지 않았고, 우리가 이 혼란스러운 시대를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많은 조언을 던지는 책이다. 아마 한번만 읽어서는 이야기의 깊이를 마주하기 힘들 것이다. 몇 달이 지날 때마다 다른 상황 속에서 이 책을 접할 때, 훨씬 책이 매끄럽게 읽힐 것이고 책을 읽고난 후의 생각과 여운이 커질 것이며 나아가 현재를 살아가는 자세에도 큰 변화가 있을 것이다. 이상 20세기의 걸작이라 불리는 작품에 대한 짧은 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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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간의 삶에 대한 사색인 철학과 인간의 삶에 대한 내용인 소설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인 것 같네요
      • 단순한 소설의 형식이 아니라, 소설의 극한을 보여준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 좋은 서평 감사합니다. 기회가 되면 꼭 읽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