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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감 공모전 우수작
제목: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학과: 경제학과, 이름: 김*수, 선정연도: 2011
내용: 아. 讀後“評”이 아니라 讀後“感”이었다. 이 소설에 대한 평가는 문학평론가가 할 몫이고 나는 나의 생각, 느낌 그리고 내 이야기를 해야겠다. 이 소설은 제목만 생각해도 벌써부터 나를 설레게 한다. 나는 글을 쓸 때면 제목을 어떻게 정할지 많은 고민을 한다. 그 글의 내용과 주제를 표현하면서 너무 적나라하지도 않게 또 너무 우회적이지도 않게 말이다. 이 소설의 제목이 그러했다. 이 밀란 쿤데라 작가도 이 소설의 제목을 정하고 꽤 만족스러워 한 듯 싶다. 실제로 이 작가는 후기 작품 소설에서 화자로 등장하여 이 제목을 한 번 더 쓰고 싶어했지만 그러지 못하여 아쉬움을 토로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 제목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이는 세 부분으로 구성되낟. 존재하다. 존재가 가볍다. 그리고 그 존재의 가벼움을 참을 수 없다.
먼저 존재함이란 무엇일까. 나는 이 존재란 단어를 지극히 좋아하는 한편 지극히 싫어하기도 한다. 이 단어는 너무도 오묘하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들이 말하는 어떤 사물이 있고 없고의 그 존재가 아니라 어떤 본질적인 것의 존재함, 사람들 모두가 일상 속에서 그것을 망각 속에 부쳐 잊을 채 살고 있지만 실제로 분명히 존재하는 그 본질적인 것의 존재 말이다. 지금 글을 쓰고 있는 나는 왜 존재하는지. 도대체 왜 이 세계가 무가 아니라 어떤 것이 존재하고 인간들이 존재하는지. 과연 철학자 셀링이 저주받은 질문이라 칭할 만하다. 답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존재 철학의 거장인 하이데거가 말했다. "인간의 존재와 본질은 질문의 형태를 취하기 때문에 질문 그 자체가 이미 하나의 해답이다." 질문이 곧 해답이라니. 나에겐 이 명제가 불만족스러웠으며 하나의 진리인 해답을 찾고 싶었다. 어쨌거나 이 책 또한 그 해답을 찾는 데 도움이 될까 하는 생각에서 읽은 책 중 하나이니 말이다.
바로 이러한 인간 존재의 양태 때문에 나는 인간이 존재하는 조건이 가볍다고 생각한다. 이 가볍다는 말은 애초에 우리에게 정해진 본질이 없다는 말이다. 우리의 삶은 오직 삶 그 자체로만 본다면 한없이 무의미해 보인다. 우리 인간은 연극 배우에 불과하다. 그것도 아주 불행한 연극배우이다. 일순간, 아무런 준비도 없이. 한 번도 리허설을 해 본 적도 없이 무대에 있다. 아무런 대본도 없이 무대에 내던져져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한번이 곧 끝이다. 자신을 보고 있는 관객들 앞에서 어떤 대사를 읊어야 할지 모르는 채 아찔함과 아득함을 느낀다. 진실로 이는 참을 수 없다. 자신의 존재가 그토록 무의미하다는 건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각자 자신만의 의미를 만들고 그 삶에 대응하여 살아간다. 이 깃털처럼 가벼운 우리 존재 조건을 붙잡아줄 무게 중심을 스스로 찾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내 삶은 오랫동안 무거움 그 자체였다.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앞에서 밝힌 사유처럼 인간 존재 조건이 가볍다는 인식조차 없었으며 또 그러했기 때문에 이후에 내 삶에 무거움을 부여한 것도 아니었다. 내 삶은 처음부터 무거움의 의미를 부여받았다. 나의 부모님은 아주 독실한 천주교인이신데 부모님은 나를 낳으시기 전부터 아들이 생기면 꼭 미카엘이란 세례명을 붙이기를 원하셨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유아세례를 받고 미카엘이란 세례명을 부여받았다. 놀라운 건 내가 태어나고 삼년 쯤 뒤에 부모님이 미카엘의 영명 축일을 아라보았는데 그 날짜가 정확히 나의 생일과 겹치는 것이었다. 의도치 않게 미카엘의 축일과 나의 생일이 정확히 9월 29일로 겹치는 것이었다. 사실 단순히 확률적으로 보았을 때 365분의 1이라는 충분히 있을 법한 우연으로 비추어졌을지도 있었겠지만 부모님은 그것에 아주 큰 의미를 부여하셨다. 그리고 나는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도 집에서 내 본명이 아닌 세례명으로 불린다. 부모님은 나를 미카엘이 아닌 본명으로 부르신 적이 한 번도 없다.
나 자신 또한 이러한 환경 속에서 커 오며 자의식을 형성하였기에 나 스스로도 무언가 선택받고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종교적 가치관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기에 나를 포함하여 모든 일들에 대하여 무의미한 것은 없었다. 예컨대 모든 것 이미 하늘의 뜻이 있었고 힘든 일이든 좋은 일이든 모두 중요성을 내포하고 있어서 아무 이유 없이 일어나는 일은 없었다. 그 중 지금 생각해보면 아주 우습지만 어릴 적 내겐 습관이 하나 있었는데 길을 가면서 신호등이 내가 건너는 시간에 곧바로 초록불로 바귀면 하늘이 나를 도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때 그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었다. 중학교 시절까지도 진실로 나는 그렇게 생각을 했다. 하지만 점차 크면서 이러한 종교적 세계관에서 많이 벗어나긴 했지만 그것은 커다란 하나의 외적인 기준을 다른 것으로 대체한 것에 불과한 것이었고, 그러했기 때문에 나는 나에 대한 우월감과 어떤 사명감 그리고 그러해야만 한다는 당위성을 벗어나지 못했다. 어디에서나 존재의 이유를 찾고자 했으므로.
지금 내 방에는 밀레이 대표작인 <만종>이 커다란 액자에 담겨 있다. 보통 이 작품을 해석하기를 삶에 대한 경건한 자세와 진지함 등을 말한다. 황혼녘 한 남자와 여자가 감사의 기도를 올리는 모습은 더없이 평화스러워 보이고 엄숙해 보인다. 하지만 초현실주의자 화가인 살바도르 달리는 이 엄숙함을 깡그리 해체한다. 달리의 해석에 따르면 여인의 자세는 기도하는 모습이 아니라 막 교미를 마친 암사마귀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그녀는 가면을 쓰고 남자에게 덤벼들기 직전의 모습이다. 남자는 남편이 아닌 그녀의 아들인데, 성적인 기대감과 공포심을 동시에 갖고 있다. 즉 아들은 저항하기 힘든 어머니의 매력에 빠져있지만, 동시에 암사마귀가 교미 후 수컷을 머리부터 씹어먹을 것을 알고 있기에 공포심에 떨고 있다는 것이다. 달리는 근친상간, 곤충의 생태까지 동원하여 밀레의 <만종>을 완벽하게 해체하고 있다.
애초 밀레의 <만종>은 오랫동안 내 방에 걸려 있었고 그것은 곧 나의 삶의 방식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이 작품이 상징하는 엄숙함과 무거움을 살바도르 달리는 또 다른 의미로 해석하며 조롱한 것이었다. 처음 달리의 해석을 보았을 때는 충격적이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사람이 인생에서 어느 한 권의 책을 통해서 혹은 어느 하나의 사건을 통해서 그의 가치관이 한 번에 바뀌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사람은 시간을 통해 서서히 여러 경험을 통하여 그것을 종합저긍로 해석하며 가치관을 형성하는 것이다. 내게는 밀레의 작품 <만종>의 본래적 의미를 뒤집은 달리의 해석도 그 경험 중 하나였으며 그리고 내가 직접 부닥치며 겪은 여러 사건들과 일련의 책들을 통해서 또 다른 가치관을 형성하게 되었다. 그것은 <만종>에서의 삼종기도를 올리는 그 분위기와 엄숙함, 본질적으로 의미 부여된 삶으로부터의 도피였다.
어린 아이들은 모든 걸 설명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이는 세상을 통제하려는 아이의 욕망에서 비롯되는 것이고, 그들은 모든 걸 통제하기 위해 모든 걸 설명하고 싶어 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오랫동안 어린 아이인 채로 있었다. 하지만 세상에는 나의 통제를 넘어서는 것들이 있었고 더구나 의미를 부재하는 것 또한 분명히 존재했다. 나아가 나는 점차 오랜 시간 동안 나를 지탱해 왔던 무거움의 의미에 싫증을 느꼈고 배신하고 싶은 욕구를 느꼈다. 더 이상 나는 그렇게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 보통의 존재란 걸 깨달았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자존감의 사라짐이었기에 슬프기도 했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자유를 의미했기에 기쁘기도 했다. 나는 이제 한없이 가벼움을 갈망하고 추구했다.
어떤 것에도 정해진 가치나 기준은 없었으며 모든 건 허용되었다. 리허설 그 자체가 곧 삶이고 그 삶은 단 한번만 재현되기에 그 삶에 대해 결코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는 없는 것이다. 살면서 응당 마땅히 이루어야 할 것도 없었고 의무도 없었기에 나는 언제든지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심지어 극단적으로 이 삶을 영영 떠나는 것도 두렵지 않았다. 그것은 내 자유였으니 말이다.
이제 소설 이야기를 조금 말 하여도 될 것 같다. 하지만 이는 곧 내 이야기의 연장선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이 소설 속의 등장인물들이 각각 나의 모습들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타인은 곧 나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며 우리는 타인을 바라볼 때 자신 안에 내재한 또 다른 자아상을 발견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와 마찬가지로 나는 소설 속 등장인물들도 그런 식으로 인식한다. 앞서 말했듯이 인간의 삶 자체로써만 본다면, 즉 인간의 존재의 양태인 그 조건만 본다면 우리의 존재는 가벼운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각자 나름대로의 의미를 부여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그 의미는 가벼울 수도 있고 무거울 수도 있다.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크게 두 부류로 나누어 볼 때 토마스와 사비나는 가벼움을 그리고 테레자와 프란츠는 무거움을 각각 대변한다.
나는 내 생각의 흐름에 맞추어 이 각각의 인물들을 재배치해 보았다. 먼저 프란츠라는 캐릭터는 무거움의 극상이다. 그는 젊은 대학 교수인데 안락한 환경 속에서 자랐으며 일생을 책 속에 파묻혀 지냈기에 현실 세계를 제대로 직시하지 못한다. 지식인층인 그는 그 당시 체코의 혁명 시위를 항상 동경하며 지낸다. 자신의 평온한 삶과 대조되는 역동적인 삶을 막연하게 그리워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주체적 의식에서 형성된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만들어진 이미지를 가리키는 것이다. 지식인층인 그는 그 당시 체코의 혁명 시위를 항상 동경하며 지낸다. 자신의 평온한 삶과 대조되는 역동적인 삶을 막연하게 그리워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주체적 의식에서 형성된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만들어진 이미지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미지와 만들어진 상징 속에서 자신의 모든 의미를 찾는 것이다. 그는 허영심과 가식을 채워져 있다. 더불어 사랑을 할 때조차 그는 한 여인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속에 내재된 여성상을 사랑한다. 요컨대 프란츠는 이미지적인 무거움을 가진다. 이미지 속에서 실재는 가려져 있으며 그는 참된 삶을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반면 사비나는 가벼움의 극상이다. 그녀는 프란츠와는 정반대되는 인물인데 그녀 는 만들어진 이미지를 극도로 혐오한다. 사회의 속박과 그리고 자신을 규정짓는 모든 의미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비사실주의 화가라는 그녀의 직업에서 보이듯이 그녀는 겉으로 드러난 이면을 끝없이 경계한다. 작가 밀란 쿤데라는 그 겉의 이미 지를 ‘키치'라고 표현한다. 이 용어는 소설 전체의 주제와 관련지어 아주 중요하다. 이 키치는 독일어인데 영어로는 shallow, 얕은 것 즉 피상적인 것이다. 의역하자면, 어떤 것을 해석하고 편집한 것이다. 사비나는 바로 이 키치의 세계에 반항한다. 반대로 프란츠는 이 키치의 세계, 만들어진 이미지 속에서 사는 것이다. 소설에서 이 두 사람은 잠시 연인 사이로 나온다. 하지만 두 사람은 근본적으로 가치관이 정 반대이기 때문에 곧이어 결별한다. 프란츠는 사비나의 모습 안에서 어떤 역동적이고 진보적인 여성상을 발견하고 그것을 오해하며 결혼을 요청하지 만 하지만 다시 사비나는 그 사랑의 무게가 싫었고 아내 역할을 맡아서 그에 맞 추어 삶을 사는 것은 참을 수 없었기에 프란츠가 청혼하는 순간 망설임 없이 프란츠를 버리고 떠난다. 키치와 무거움 속에 사는 프란츠와 비키치와 가벼움 속에 사는 사비나 모두 삶이 진실되어 보이거나 그렇게 행복해 보이지는 않는다. 우리는 과연 사비나처럼 비키치의 삶을 살 수 있을까. 우리가 생각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의식을 가진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우리는 어떤 사물이나 사건에 대하여 하나의 해석을 만들지 않을 수 없다. 이미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그 이전 만들어진 언어의 이미지 안에서 생각을 하고 그런 식으로 말을 하며 행동을 하는 것이다. 우리는 항상 군중 속에서 살고 있고 완전한 사회의 관습 안에서 탈 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 중 그 누구도 초인이 아니며 키치로부터 완전하게 벗어날 수 없다. 우리가 아무리 키치를 경멸해도 키치는 인간 조건의 한 부분인 것이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나는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고 한없이 가벼워질 수 없다면 다시 그 이전의 무거운 삶으로 돌아가야 하는가. 사비나가 추구하고자 하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프란츠의 삶을 택해야 하는가. 밀란 쿤데라는 무거움과 가벼움에 대한 판단을 유보하고 또 다른 두 인물인 테레자와 토마스를 통해서 새 로운 모습을 제시한다. 앞서 말했듯이 테레자 역시 프란츠와 마찬가지로 무거움을 대변하는 인물이다. 하지만 어둠이 깊이의 표시는 아니라는 말도 있듯이 무거움도 깊이의 표시는 아 니다. 그렇기에 이 두 인물은 같은 무거움이 아니다. 프란츠는 외부적으로 만들어 진 의미에서 무거움을 부여하므로 얕은 무거움이며 테레자는 자신의 내면에 비축 한 생명력에서 그 무거움을 찾으므로 깊은 무거움이다. 그런 의미에서 테레자는 더없이 순수해 보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유치해 보이기도 한다. 예컨대 테레자는 시골에서 출장을 온 외과 의사인 토마스를 첫 눈에 반하고 그와 관련지어 나타나 는 모든 우연들에 의미를 부여하여 필연으로 만들고 운명으로 만든다.
반면 토마스는 사비나처럼 가벼움의 인물이지만 사비나와 다른 점은 토마스는 동정심이라는 감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토마스는 자신을 운명적 사랑으로 인식하고 시골에서 무턱대고 그를 찾아 올라온 테레자에게 점차 연민을 느낀다.처음 토마스는 테레자와는 달리 그 우연적 사건들을 이해하지 못했고 테레자 역시 다른 여자들처럼 그저 육체적 성관계를 가지는 파트너에 불과했지만 점차 사랑에 빠지고 동정심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 소설에서 토마스는 가장 존재론적 지위 변화가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이는 테레자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테레자의 그 깊은 무거움은 토마스를 두 가지 범주에서 변화를 겪게 만든다. 토마스는 의무 영역에서 외과 의사라는 의무감을 버리고 점차 하층 노동자로 추락하는 반면 감성 영역에서는 무정함의 가벼움에서 동정심과 연민의 무거움으로 옮겨 간다.
작가는 하나의 정답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이 각각의 네 명의 인물의 삶에 대한 태도를 보여주면서 가벼움과 무거움에 대한 판단을 독자에게 맡기고 있다. 그러나 눈여겨보면 그 속에 이미 답이 드러나고 있는 듯하다. 본질적으로 인간 존재 조건 의 가벼움과 그리고 또 하나의 조건인 키치의 세계 속에서 살 수 밖에 없는 그 무거움 사이에서 우리는 삶의 태도를 결정한다. 인간은 의미와 더불어 살고 있다. 그렇기에 우리의 모든 태도는 어느 정도 무거움을 부여받은 셈이다. 하지만 우리는 침울하지 않으면서도 무거울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물에 적 절한 무게를 부여하기만 하면 된다. 그럴 수 있는 사람이 무게 있는 사람이다. 그 는 적절한 관심으로 세상을 채운다. 무거운 영혼이 아니라 생각하는 영혼이 됨으로써 충분한 거리를 갖고 판단하고, 그럼으로써 세상에 영혼을 부여한다. 이와 같은 태도는 삶의 무거움이 아니라 삶 속의 무거움이다. 그렇기에 가벼움이 들어갈 여지를 남겨 두는 셈이다.
나의 어린 시절의 삶 그리고 프란츠와 같은 삶은 무거움 그 자체이다. 인생은 무거움과 가벼움이 모두 필요한 것이다. 무거움은 사물의 깊이와 정신의 진지함을 가리킨다. 가벼움은 사물의 높이와 정신의 자유를 가리킨다. 구체적 현실과 관계 없는 생각이 텅 비어 있다면 생각 없는 구체성 또한 눈던 것이다. 높이 올라 거리를 두고 내려다보지 않으면 분별 있는 현실 속에 있지 못하고 닫힌 현실 속에 있게 된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무거움은 세상에 빛을 솟아나게 하는 섬광 같은 무거움이고 또한 아름다운 무거움은 중력의 중심을 닮았다. 그것은 균형점이다. 균형점은 전혀 슬프지 않은 근본적인 몸짓에서 온다. 그것은 사물에 적절한 무게를 부여하는 몸짓이다. 요컨대, 우리의 존재는 결코 무거움 그 자체도 아니며 한없는 가벼움 그 자체도 아니다. 그 양 극단 사이에 위치한 우리는 그 안에서 하나의 주제를 선택할 수 있고 그에 맞추어 의미를 만들며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정답은 없기에 그 주제를 스 스로 선택하는 것이지만 그것이 자신의 참된 내재적 고유성과 감성의 영역에 가 까울수록 좋을 것 같다. 그럴수록 더 아름다워 보인다. 음악에서는 하나의 주제가 되는 선율을 바탕으로, 선율·리듬·화성 따위를 여러 가지로 변형하여 나가는 기악곡 형태를 변주곡이라 칭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존재는 변주곡과 닮았다. 우리는 하나의 주제의 맞추어 수많은 음들을 해석하고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며 여러 양상의 선율을 쏟아내는 것이다.
“인간의 삶은 마치 악보처럼 구성된다. 미적 감각에 의해 인도된 인간은 우연한 사건을 인생의 악보에 각인될 하나의 테마로 변형한다. 그리고 작곡가가 소나타의 테마를 다루듯 그것을 반복하고, 변화시키고 발전시킬 것이다. ... 인간은 가장 깊은 절망의 순간에서조차 무심결에 아름다움의 법칙에 따라 자신의 삶을 작곡한다.”




독후감 공모전 우수작
제목: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학과: 수학과, 이름: 김*현, 선정연도: 2011
내용: 나는 내가 있음을 안다. 회의는 뿌리 깊고 무지는 심각하지만 그럼에도 끝내 놓을 수 없는 내가 있다. 사람들은 '나는 누구 인가?'라는 질문을 수없이 하지만 대 부분은 '나는 없다.' 또는 '나는 있으되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답을 얻기 위해 질 문을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나는 있다.' 라는 전제를 가지고 던지는 물음인 것이다. '나'는 '너' 보다, 그 누구보다 소중하다. 나의 생각은 이미 저명한 사상가의 생각을 초월해 있으며 세계가 나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이렇게 우리는 무거움 속에 산다. 아니 단지 살고 싶어 하는지 모른다.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겁기를 원한다. 파악되지 않는 현상 속에 진리가 있다고 믿으며 상대적인 가치 속에서도 불변의 도덕법칙을 추구한다. 이것은 분명 모호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우리는 소피스트적인 단순함, 간단명료함을 궤변으로 치부하고 그 표면적인 가벼움을 싫어한다. 만일 누군가 도덕이 한낱 강압 적 교육의 결과, 정치가들의 체제 유지 전략이라고 또는 모든 인간의 행동 원리가 이익의 추구라고 말하거나 더 나아가 신이란 인간의 허상이며 나약한 인간의 창조물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그의 주장을 불편해한다. 스스로가 퇴폐와 파멸의 욕구
를 느끼고 데카당을 외치면서도 우리는 그의 가벼움, 진지하지 못함을 탐탁지 않게 여긴다. 하지만 어느 순간, 우리는 모든 것이 일회적이며 덧없이 흘러가버리기 때문에 어떤 것도 쉽게 판단 할 수 없음을 깨닫는다. 한번이기에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여겨지고 만다. 이 세상에서 가장 무거웠던 것이 깃털보다 더 가벼운 것이 된다. 비극은 순간의 희극으로 전락한다. 조금이라도 자신의 존재에 대해 진지한 물음을 던져본 이 라면 그는 곧 이러한 부조리, 비 일치에 직면하게 된다. 우리는 B와 D 사이에 갇혀 매순간 '이것이냐 저것이냐'를 선택해야 하지만 그것조차 가볍다는 생각에 이르면 도저히 견딜 수 없다. 유한한 존재의 숙명적 비극이 여기에 있다. 그것은 고뇌이며 도저히 좁힐 수 없는 간극이다. 우리는 가장 무겁고자 하지만 필연적으로 가벼울 수밖에 없는, 그 가벼움으로의 이행이 우리를 절망에 빠뜨린다. 이번에는 반대로 모든 것을 초월하여 무(無)가 되어보고자 하지만 그럴 수도 없는 자신에 혐오를 느낀다. 불안과 권태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것은 존재가 당면한 가장 치명적이며 피곤한 문제이다. 여기에 더 이상 진전되지 않는 답답함이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역으로 모든 것 은 이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차이가 고뇌를 부르고 고뇌가 창조를 낳았으며 창조 가 아름다움을 가져왔다. 실제로, 우리들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 인간이 가지는, 현재까지 이어지는 모든 것의 근원이 여기에 있다. 그것은 언어와 실재, 육체와 정신, 가벼움과 무거움, 유한과 무한, 현상과 물자체라는 이름으로 다양한 해석을 낳았다. 그것은, 어두운 밤을 거쳐 새로운 아침을 맞을 때마다 황금알을 낳는 거 위였으며 우리는 가장 절망적 어둠속에서만 이 희미한 빛을 잡을 수 있었다. 그리 하여 이 문제는 존재의 역사를 관통하여 자연스럽게 우리의 삶의 중심에 놓인다. 작가는 등장인물들을 통해 가벼움과 무거움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의 삶일 그들의 삶을 지켜본다. 가벼움인가? 무거움인가? 비록 그것이 결국엔 무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여기서 어떤 결정을 내리고자 한다.
토마스의 세계
토마스는 의사였다. 그는 호기심과 메스로 무장하고 인간이 관여할 수 없을 것처럼 보이던 현상 이면의 것에 과감히 손을 집어넣는다. 그는 여기서 가벼운 신성 모독을 느끼며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이 쾌락이 그를 뛰어난 의사로 만들었다. 이렇듯 그는 근본적으로 분해하는 자'이다. 이것은 그의 또 다른 삶 속에서도 여실히 드러나는데 여성편력이 바로 그것이다. 그는 파악되지 않는 타 존재의 가장 은밀한 부분을 탐닉한다. 순간 그는 그들의 무거움을 가벼움으로 전락시킨다. 그 는 그들의 이름과 직업, 구체적 일상에는 관심이 없다. 다만 그는 그 무거움을 타 파하고자 한다. 그래서 그는 그들이 자신의 삶에 관여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는 가장 내밀한 부분을 훔쳐보는 가장 표상적인 관계, 그 효율성을 에로틱한 우 정이라고 부르며 선을 긋는다. 그는 그들의 오해와 침범을 견딜 수 없다. 어떤 이 는 이를 두고 많은 이를 사랑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할 수도 있겠으나 실상은 가벼움,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그래서 그는 그들과 함께 편안히 잠을 이룰 수 없으며 그들을 사랑할 수도 없다. 정확히 말해 사랑할 수 없었다.
이런 그 앞에 몇 개의 우연을 거쳐 테레사가 나타났다. 무거움을 갈망했지만 외 부에서 강요하는 가벼움에 파묻힌 그녀는 연약했고, 불안했으며 그래서 매혹적이었다. 자신도 설명할 수없는 순간 그는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고 그는 그녀가 요구하는 특별함, 그 무거움과 사비나로 대표되는 가벼움 사이에서, 사랑과는 다른 육체적 관계라는 명목으로 불안한 생활을 지속해 나간다. 이것이 그에게 있어 첫 번째 고민이었다. 동시에 그는 그 자신이 천직으로 여기던 의사라는 직업을 포기해 야 할 수도 있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이 두 기로에서 그는 각각 무거움(테레사) 과 가벼움(의사 포기)을 선택한다. 늘 가벼움의 달콤함을 쫓던 그였지만 그의 동 정, 연민, 테레사에 대한 그의 사랑을 버릴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그는 분해자로서의 그의 본능에 충실하지만 끝내 테레사의 품에 안기게 된다.
‘테레사와 사비나' 라는 두 극점에 관하여
이 둘은 토마스를 중심에 두고 서로 정반대에 있지만 닮은 점이 있다. 이 두 사람에게 개인을 매몰하는 전체주의적 가벼움, 그 통일은 폭력이라는 것이다. 테레사에게 있어 그녀의 어머니가 그랬고, 그녀가 일하던 바의 술 취한 손님들이 그랬다. 아니 어쩌면 그녀가 속한 공간과 시간 모두가 그녀에겐 폭력이었을지 모른다. 그녀는 벗어나고 싶었다. 그녀가 알던 모든 것으로부터. 그녀 자신의 가벼움으로부터. 그녀는 토마스를 만났고 그에게로 갔다. 하지만 이 또한 그녀에겐 시련이었다. 그녀는 단 하나의 특별한 존재, 토마스에게 무거움이 되고 싶었다. 그녀에게 사랑이란 유일함이자 '타'의 배제를 의미했다. 그러므로 그녀에게 토마스의 여성편력은 의심을 낳았고, 그것은 일종의 희망 고문이었다. 이루어 질듯 말듯, 잡힐 듯 말듯 희망을 갖게 하면서 그 자신은 점점 쓰러져가는, 가장 잔인한 고문이었다. 그럴수록 그녀는 더욱 토마스에게 집착했고 그녀를 버릴 수 없는 토마스는 그녀와 점점 더 얽매여 갔다. 사비나 또한 테레사와 마찬가지로 평생 동안 전체주의적 폭력에 저항했다. 그녀는 키치를 경멸했다. 그녀는 토마스와 같이 가벼운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테레사처럼 하나의 사랑에 정착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그녀는 번번이 배신하고 후회하며 공허해져갔다. 그녀가 이렇듯 불안해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녀가 사랑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녀가 앞의 두 사람과 다른 점은 그녀의 행동원리가 '모든 키치를 거부하라.' 라는 자기 명령이라는 것이다. 그러한 명령 때문에 그녀는 프란츠를 포함한 그 어디에도 정착 할 수 없었다.
사비나는 보는 존재, 배신의 존재, 즉흥의 존재인 반면 프란츠는 듣는 존재, 정 조의 존재, 의도의 존재이다. 그녀는 그런 프란츠에 기대고 싶었지만 서로에 대한 몰이해, 그의 진실된 사랑 관을 견딜 수 없었고 결국 그를 떠났다. 그녀는 이내 후회했지만 그에게로 돌아 갈 수 없었다. 동정할 수 없는 자 사랑 할 수도 없는 것이다. 이것으로부터 그녀는 토마스, 테레사와는 다른 길을 걷게 된다. 던져진 존재로서 키치에서 완전히 벗어 날 수 없음에도 그녀는 모든 키치를 혐오하는 자기모순 에 빠져 끝이 없는 배신의 길을 걷는 것이다. 정착의 안락함을 추구하면서도 타 존재의 불편함, 그 다름, 키치에 대한 환멸이 그녀를 멈출 수 없는 배반의 기차 위로 그녀를 밀어 넣은 것이다. 그녀는 오히려 그곳에서 깃털보다, 그 무엇보다. 가벼워지기를 결심하였다. 하지만 그럴수록 나는 그녀에게서 무거움으로의 강한 열망을 느낀다. 미련해서 또한 자신은 그처럼 미련할 수 없어서 곰을 싫어하는 여우를 본다. 유한한 존재의 비극이 바로 여기에 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경이로움 나는 이제 말년의 테레사에게 주목하고자 한다. 그녀는 어느 순간에 이르러 늘 자신 옆에 있었던 토마스를 다시 보게 된다. 그의 쇠락이 자신 때문인 것만 같아 마음 아파한다. 그녀가 그를 너무 못살게 군것은 아닌지 그 동안의 자신의 이기심을 반성한다. 동시에 그녀는 카레닌과의 목적 없는 사랑을 통해 진정한 사랑에 대 해 생각한다. 그에게 가까이 가고자 할수록 더욱 더 철저하게 고립되었던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게 된다. 토마스에게만 의미 있는 존재가 되고 싶었던 그녀는 이 순간 그것을 초월하였다. 그녀의 사랑은 더 이상 지상의 것이 아닌 천상에 속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인류 밖의 인간이 되었다. 이것은 꼭 니체의 그것이며 유약한 존재 모두에게 보내는 따뜻한 시선이다. 여기서 그녀는 더 이상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은 제 3의 상태로 간다. 늘 그렇듯이 위태로운 일상의 충격은 아무런 예고도 없이 찾아왔다. 가벼움으로 기억되는 대학 1년이 지나고 휴학을 하고 있을 때였다. 가을도 지나고 복학을 준 비하던, 지금 이맘때로 기억한다. 갑자기 모든 것이 엉망이 되었다. 보이던 모든 것이 의심스러웠고 낯설었다. 아무런 암시도 없이 어느 순간 가벼움과 무거움이, 정확히는 죽음과 삶의 문제가 나를 뒤덮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나는 무기력했고 무능력했다. 나는 물론 갑작스러운 혼란에 당황하기도 했지만 그것보다 내가 그에 대한 답을 도저히 낼 수 없다는 것이 나를 더욱 답답하게 했다. 시시때때로 얼굴을 달리하는 불안과 권태 사이에서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럴수록
내 자신으로 더욱 침잠해보기도 했지만 허사였다. 여전히 암흑이었고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친구들과 가족들은 그냥 웃어 넘겼고 나도 그들처럼 이 사태를 무시하려 했으나 좁혀지지 않는 양 극단 사이에 끼여 있는 나 자신의 어색함을 감출 수 없었다. 나는 아무런 성과 없이 학교로 돌아 왔고 이제는 그전처럼 사람들을 대할 수 없었다. 중심 없이, 의미 없이 그들에게 휘둘릴 것만 같았다. 그렇다고 이 불편함을 안고 그들 앞에서 괜찮은 척 연기를 할 수도 없었다. 나는 그들에게 이해받지 못한 채 철저히 혼자였다. 문제는 그들이 아니었다. 오로지 내가 문제였다. 나는 어떤 결론이라도 얻고 싶어서 스스로를 고립시켰던 것이다. 그동안에도 난해한 질문들은 계속 이어졌고 그럴수록 나는 더욱 암울해졌다.
그런데 어느 날 나는 놀라운 경험을 했다. 그날도 역시 무의미와 무능력을 전신에 이고 길을 걸어가는데 무언가가 내 앞을 지나갔다. 땅만 보고 걷던 나는 놀라 주위를 살펴보니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노을이 지는 가을 하늘을 배경으로 나무 한 그루가, 거기에서 떨어지는 낙엽이, 놀란 듯 그들을 바라보는 내가 있었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졌고 뭔지 모를 뜨거움을 느꼈다. 지금에 이르러 언어가 끊긴 그 때를 다시 하나의 기호 안에 정확히 담을 수는 없겠으나 그것은 가벼움도 무거움도 아닌 경이로움이었던 것 같다. 나는 그 나무 한 그루에, 낙엽 하나에 위로받았던 것일까? 그것은 어떤 고귀한 것을 본 느낌이었고 무엇인가 정화되는 듯 했다. 그날은 분명 지금도 모호함으로 가득하지만 그것은 기분 좋은 무지였고 감히 언어로, 이성으로 범접할 수 없는 존재의 충만함 이었다. 나는 지금도 그때의 내밀한 흥분, 그 떨림을 잊을 수 없다.
이런 일은 어떻게 일어났을까? 왜 그때이어야만 했을까? 왜 그것은 아무런 개 연성도 걸치지 않은 채 갑자기 내 앞에 나타난 것일까? 나는 그때 내가 과거와 미래 사이에 빛나는 현재를 본 것이라고 믿고 있다. 낮과 밤의 경계에서 고뇌하던 존재가 문득 스치는 현재를, 존재 그 자체를, 그 찬란함을 본 것이라고 믿고 싶다. 그것은 존재가 한계를 느낀 가장 절망적인 순간에 희미하게, 그리고 점점 더 강렬해지는 존재의 비밀 그 틈을 잡은 것은 것이었다. 그런 뒤 주위를 둘러 봤을 때 오직 나만이 가득했던 세상에 나 아닌 다른 존재가 있었고 나는 그들의 가치, 그들의 무한한 가능성, 그 무거움을 볼 수 있었다. 동시에 그들에게 보내는 따뜻한 시선을 가질 수 있었다. 모든 존재가 가지는 간절한 부름을 들을 수 있었다. 이것이 체계 밖의 인간, 테레사의 그것, 니체의 그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처음엔 아무생각 없이 존재를 긍정했고 어느 순간 그들이 낯설었고 곧이어 그 들을 부정했으며 신기하게도 다시 내 안에서 그들을 수용할 수 있게 되었다. 토마스에게 “그래야만 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 “그래야만 한다.” 이듯이 나에게 존재는 존재였다. 여기까지 말해놓고 보니 내가 무슨 큰 깨달음을 얻은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도 않다. 여전히 불안과 권태가 주기를 달리하며 나를 찾아오고 낯선 존재는 나에게 여전히 불편하고 어색하다. 하지만 이제 나에게 불안은 일상이 되었고 권태는 친근해졌다. 그리고 나는 다른 존재를 받아들일 용기가 생겼다. 나는 나를 구할 수 있었고 동시에 모든 이를 살릴 수 있었다. 자 이제 당신의 결단만이 남았다. 당신은 현재 어디쯤에 있는가? 가벼움인가? 무거움인가? 경이로움인가? 당신은 이 제 당신의 인생을 어디로 인도하여 어떤 악보를 완성해 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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