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선정도서 | 8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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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가대상 | 부산대학교 학부생, 대학원생 및 부산 지역 주민 |
| 참여방법 | 도서관이 선정한 올해의 책 8권 중 1권을 자유롭게 읽고 해당 도서의 독서 에세이 제출 |
| 참여기간 | 2025년 9월 1일 ~ 11월 9일 |
| 시상내역 | 총 11편(부산대 총장상 및 도서관장상, 총상금 210만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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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사업은 부산대학교 국립대학육성사업의 예산을 지원받아 운영되었습니다. |
| 수상 | 이름 | 학과 | 선정도서/독서 에세이 제목 | 보기 |
| 최우수 | 박*서 | 간호학과 | 도서: 마음 지구력 독서 에세이: 마음을 입은 간호사, 지구력을 걸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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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진의 시대, 간호라는 감정의 최전선에 서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근육과 체력만 단련하지만, 매일의 도전과 스트레스 속에서 소리 없이 지쳐가는 마음의 근육에 대해서는 얼마나 생각해왔는가. 예비 간호사인 나에게 이 질문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앞으로 마주할 직업적 현실에 대한 근본적 성찰을 요구했다. 간호 현장은 생명과 감정이 교차하는 최전선이다. 환자와 보호자에게 무한한 공감을 베풀어야 하는 숙명은 때로 내 마음을 텅 비게 만들고, 결국 소진 증후군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런 나에게 윤홍균의 『마음 지구력』은 단순한 심리학 책이 아니라, 마음을 단단히 하고 지치지 않고 서는 법을 알려주는 길잡이였다. 마음의 상처를 위로하는 데 그치지 않고, 마치 근육을 단련하듯 마음을 훈련해야 한다는 메시지가 내 절박한 필요와 맞닿아 있었다. 책은 마음 지구력, 공감 능력, 적응력이라는 세 가지 핵심 방어 시스템을 통해 ‘유연하고 끈질긴 긍정성’을 길러 삶을 지속 가능하게 만드는 방법을 제시했다. 이 에세이에서는 『마음 지구력』에서 배운 회복과 성장의 기술을 바탕으로, 간호 현장에서 맞이할 감정적 난관을 어떻게 극복하고, 흔들려도 무너지지 않는 나만의 돌봄을 만들어갈지 이야기하고자 한다. 나를 지키는 힘이 곧 타인을 살리는 힘이 된다는 깨달음이 이 글의 출발점이다.
[지쳤다는 마음을 이해하는 일 ― 나의 소진을 인식하다] 『마음 지구력』을 펼쳤을 때 가장 먼저 떠올린 질문은 “나는 왜 이렇게 쉽게 지칠까”였다. 간호학과에 입학한 순간부터 나는 스스로에게 ‘성공해야 한다’는 주문을 걸어왔다. 생명을 다루는 직업의 특성상 실수가 용납되지 않는다는 압박감은 나를 늘 긴장 상태에 머물게 했다. 그런 긴장은 하루이틀의 피로가 아니라, 서서히 내 마음을 마모시키는 소진의 형태로 쌓여갔다. 책의 저자 윤홍균은 이를 번아웃이라 부르며, 열정이 고갈된 상태가 아니라 마음의 보상 중추와 브레이크인 편도핵이 균형을 잃은 결과라고 설명한다. 그의 분석은 내 삶과 놀라울 만큼 닮아 있었다. 성적 경쟁, 완벽한 실습, 취업 준비 속에서 나는 늘 더 이상 열정이 생기지 않는 무력감에 빠졌다. 최선을 다했다는 위로조차 공허하게 느껴졌고, 남은 것은 짜증과 자책, 그리고 끝없는 피로뿐이었다. 나는 왜 이렇게까지 지쳐야만 하는가. 그 답을 찾는 과정에서, 내가 믿어왔던 해피 엔딩적 인생관이 문제의 시작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늘 열심히 노력하면 반드시 성공한다는 단순한 믿음으로 스스로를 몰아붙였다. 간호사가 되기 위해 지금의 고됨을 버티면 언젠가 꽃길이 펼쳐질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실습 현장에서 마주한 위급한 상황과 인간관계의 갈등, 예상치 못한 실패들은 그 믿음을 무너뜨렸다. 기대했던 보상이 오지 않자, 내 마음은 금세 끝났다고 결론 내리고 모든 것을 내려놓으려 했다. 윤홍균은 이런 태도를 마음의 지구력을 갉아먹는 주범이라 지적하며, 과정으로서의 세계관을 제안한다. 스트레스도 겪고 심란한 일도 생기겠지만, 중간중간 꽃길도 걷겠지. 이 문장은 내 사고방식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인생을 완주해야 할 경주가 아니라, 여러 스테이지를 하나씩 통과하는 게임처럼 바라보기 시작한 것이다. 한 번의 실패가 끝이 아니라 다음 단계를 준비하는 과정이라는 인식이 생겼다. 그 이후로 나는 학업과 실습의 스트레스를 다르게 보게 되었다. 성적이나 결과가 전부가 아니라, 환자와 마주한 순간, 동료와 협력하는 과정, 그리고 실패를 통해 배우는 성장의 궤적 자체가 보상임을 깨달았다. 이제는 실패를 무능력의 증거가 아닌 기울어진 순간으로 인식하며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연습을 하고 있다. 저자는 또한 더 버텨야 한다는 잘못된 노력 대신, 잘 자고, 놀고, 체력을 회복하는 것이 진짜 끈기라고 강조한다. 나 역시 이 조언을 실천하려 노력한다. 쉼은 게으름이 아니라 지속하기 위한 준비이며, 더는 못하겠다는 마음의 신호는 단순한 포기가 아니라 새로운 방향을 찾아 나설 기회임을 깨닫게 되었다. 결국 『마음 지구력』의 첫 장을 통해 나는 나의 소진이 나약함이 아니라 지속 불가능한 태도에서 비롯된 결과임을 알게 되었다. 완벽해야 한다는 강박, 한 번에 성공해야 한다는 환상은 나를 지치게 만들었고, 이는 내 지구력을 갉아먹는 가장 큰 적이었다.
[공감의 회복 ― 타인을 위로하기 전에 나를 먼저 이해하기] 나는 마음 지구력의 고갈이 간호의 질 저하라는 윤리적 위협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인식했다. 그렇다면 소진의 늪에서 벗어나 지속 가능한 돌봄을 실현하는 핵심적인 방법은 무엇일까. 『마음 지구력』의 두 번째 장, 공감이 능력이다는 그 해답으로 자기 공감이라는 심리적 보호막을 제시한다. 공감은 간호의 본질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이 자신을 소진시키는 감정의 방해물로 변할 수 있음을 저자는 경고한다. 환자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을 보호해야 한다는 그의 말은, 간호사에게 가장 시급한 지구력 단련의 출발점이 된다. 간호사는 타인을 위로하는 일에는 능숙하지만, 정작 자신에게는 놀라울 만큼 냉정하다. 사소한 실수에도 나는 왜 이 정도도 못 하지라는 자기비판이 뒤따르고, 그 순간 마음의 면역 세포라 할 수 있는 방어력이 점점 약해진다. 환자의 고통에 공감하여 함께 울면서도 전문가답지 못하다는 자기검열이 감정을 눌러버린다. 나 역시 실습 중 환자의 갑작스러운 악화나 내 판단 미숙으로 괴로울 때마다 감정을 표현하기보다 숨기려 애써왔다. 그러나 책은 이러한 태도가 오히려 회복력을 갉아먹는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를 되묻거나, 자신의 불행을 합리화하려는 습관은 결국 마음의 방어선을 무너뜨린다는 것이다. 저자가 제시한 해답은 단순하지만 강력하다. 바로 자기 연민이다. 그는 타인에게 공감하듯, 자신을 가장 친한 친구처럼 따뜻하게 대하라고 말한다. 환자의 실수에는 너그럽지만 나의 실수에는 가혹했던 나의 태도는, 돌봄의 균형을 잃은 모습이었다. 『마음 지구력』은 이런 이중 잣대를 벗어나 나도 인간이기에 실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라고 권한다. 부정적인 감정을 억누르기보다 내가 요즘 많이 힘들구나 하고 스스로에게 말하는 용기가 회복의 첫걸음이라는 것이다. 감정을 인정하고 자신을 위로하는 일은 결코 나약함이 아니라, 마음의 근육을 단련하는 과정임을 나는 이 책을 통해 깨달았다. 이 깨달음은 내게 깊은 실천적 변화를 이끌었다. 실습 중 작은 실수를 했을 때, 예전에는 부끄러워 숨기기에 급급했지만, 이제는 그 순간조차 성장의 일부로 받아들이려 한다. 괜찮아, 나도 인간이야라는 한마디가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운다. 저자가 말하듯, 쉬는 시간에 잠시 숨을 고르고, 제대로 쉬고, 때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조차 마음 지구력을 회복하는 훈련의 일부가 된다. 나는 이제 공감이 타인을 향한 행위이기 전에, 나 자신을 향한 윤리적 책임임을 이해하게 되었다. 자신을 돌보지 못하는 간호사는 결국 공감 피로에 빠지고, 이는 환자의 미세한 신호조차 놓치게 하는 위험으로 이어진다. 진정한 전문성은 환자의 고통에만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고통을 견디는 자신의 마음을 돌보는 데서 시작된다. 내가 나의 마음을 존중하고 회복시킬 때, 비로소 환자에게 온전한 공감을 건넬 수 있다. 비워진 컵으로는 물을 따를 수 없듯, 나의 마음을 먼저 채우는 일은 결코 이기심이 아니라 지속 가능한 돌봄의 조건이다. 결국 『마음 지구력』은 나에게 공감의 본질을 새롭게 정의하게 했다. 그것은 타인의 아픔을 느끼는 능력이 아니라, 자신을 존중할 줄 아는 용기에서 비롯된다. 나를 이해하고 보듬는 일, 그로부터 비롯된 내면의 여유가 환자에게 닿을 때 비로소 지속 가능한 공감이 완성된다.
[적응력과 플랜 B ―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은 간호사로 성장하기] 『마음 지구력』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가장 강렬하게 남은 단어는 적응력이었다. 저자는 주저하는 당신을 위한 조금 특별한 끈기 이야기에서 완벽주의라는 내면의 감옥을 해체하고, 그 자리에 유연한 적응과 플랜 B라는 새로운 철학을 세운다. 나는 그 대목에서 한동안 책을 덮은 채 조용히 숨을 고르게 되었다. 완벽하려 애쓸수록 더 깊이 지쳐가던 나의 대학 생활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간호학과에 입학한 후, 나는 프로페셔널은 실수하지 않는다는 신념으로 자신을 몰아붙였다. 특히 처음으로 환자에게 정맥주사를 시도했던 날, 연거푸 실패한 뒤 찾아온 수치심은 지금도 생생하다. 손끝이 떨리고, 환자의 팔에 생긴 작은 멍이 내 자존심처럼 시퍼렇게 남았다. 그날 이후 나는 실패를 단순한 과정이 아니라 무능력의 증거로 받아들였다. 동기들의 시선을 피했고, 실습 후에도 그 기억은 트라우마처럼 남아 나를 괴롭혔다. 그러나 『마음 지구력』은 이러한 완벽주의가 오히려 출발조차 막는 방해물임을 지적한다. 나는 달라야 한다는 생각이야말로 가장 비생산적인 자기 암시였던 것이다. 저자는 완벽함이 아닌 적응력으로 살아가라고 말한다. 적응력이란 세상을 바꾸는 힘이 아니라, 변화 속에서 나 자신을 다시 조율하는 능력이다. 나에게 필요한 것은 완벽한 성공이 아니라, 실패를 발판 삼아 새로운 경로를 찾아 나서는 유연한 끈기였다. 그는 옳은 선택이란 없다. 선택을 옳게 만드는 과정이 있을 뿐이라고 말하며, 완벽한 준비 대신 일단 시작하는 용기를 제안한다. 이 문장을 읽으며 나는 간호 현장에서의 내 모습을 떠올렸다. 불확실한 환자 상태, 예측할 수 없는 응급상황 속에서 필요한 것은 100%의 정답이 아니라, 변화에 맞춰 나를 조정해 나가는 탄력성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인식은 오히려 나를 더 성장시키는 새로운 출발점이 되었다. 이 책이 제시한 플랜 B는 단순한 대안 계획이 아니다. 그것은 불확실성을 인정하고, 예상치 못한 상황 속에서도 나를 지탱하는 마음의 전략이다. 나는 이 철학을 간호사로서의 삶에 구체적으로 적용해보고자 한다. 첫째, 환자와 나 사이의 건강한 경계를 세울 것이다. 환자의 고통에 공감하되, 그 감정을 나의 책임으로 떠안지 않는 연습이 필요하다. 나는 환자의 감정을 저장하는 창고가 아니라, 그 감정을 해석하고 대응하는 전문적인 처리 장치가 되어야 한다. 이는 간호사로서 지속 가능한 공감을 유지하기 위한 자기 보호의 기술이다. 둘째, 하루의 감정을 기록하며 나의 마음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려 한다. 근무 후 짜증 났던 일, 무력감을 느꼈던 순간을 짧게 적어 내려가는 일은 사소해 보이지만, 그 행위가 감정의 면역 체계를 회복시키는 힘이 된다. 내가 오늘 참 힘들었구나 하고 스스로의 감정을 인정하는 것이 지구력을 단련하는 첫걸음임을 깨달았다. 셋째, 동료와의 연대를 마음의 버팀목으로 삼을 것이다. 스트레스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환경의 문제일 때가 많다. 동료의 어려움을 공감하고, 함께 해결의 길을 모색하는 연대는 소진을 막는 가장 강력한 회복력이다. 혼자가 아니라 함께 버텨내는 힘, 그 연대감이야말로 사회적 지구력의 근원이다. 『마음 지구력』은 간호를 더 이상 희생과 봉사의 언어로만 정의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기 존중과 자기 돌봄을 전제로 해야만 지속 가능한 전문직이 될 수 있음을 명확히 제시한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이 문장은 나에게 단순한 위로를 넘어선 윤리적 깨달음이었다. 마음 지구력을 단련하는 일은 결국 나를 살리고, 나를 통해 환자를 살리는 일이다. 돌봄의 지속 가능성은 완벽함이 아니라 회복 탄력성에서 온다는 이 명제야말로, 내가 앞으로 간호사로 살아가며 매일 되새길 가장 중요한 다짐이 되었다.
[흔들리되, 무너지지 않는 간호사로] 윤홍균의 『마음 지구력』은 나에게 나를 돌보는 것이 곧 타인을 돌보는 것이라는 역설적 진리를 가르쳐주었다. 책을 읽기 전까지 나는 회복탄력성을 단순히 고난을 이겨내는 힘이나 역경을 버텨내는 의지로만 이해했다. 그러나 저자는 마음 지구력이 유연하고 끈질긴 긍정성을 바탕으로 삶의 방향을 재조정하는 능력이며, 간호사에게 반드시 필요한 윤리적 자질임을 일깨워주었다. 가장 큰 깨달음은 무작정 성공만을 좇는 사고를 버리고, 좌절과 소진을 성장의 신호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간호 현장은 감정을 숨기고 견뎌야 하는 공간이다. 그러나 억압된 감정은 번아웃으로 이어져 환자의 안전과 돌봄의 질을 위협한다. 책은 자기 공감이 가장 강력한 회복의 원천임을 강조한다. 타인에게 관대하듯, 스스로의 실수와 무력감에도 “나도 인간이기에 실수할 수 있다”고 인정하는 순간, 비로소 에너지를 회복하고 다음 환자에게 진정한 공감을 건넬 수 있다. 자기 돌봄은 이기적이 아니라 전문직으로서의 필수 윤리임을 깨달았다. 이 책이 제시한 적응력과 플랜 B의 철학은 나만의 간호관을 세우는 길을 열었다. 완벽해야 한다는 비현실적 기준을 내려놓고, 불확실한 환경에서도 한 걸음을 내딛는 용기를 선택할 것이다. 실패도 성장의 데이터로 삼아, 유연하게 경로를 조정하며 나아갈 것이다. 과거 실습에서 느낀 좌절과 무력감은 이제 내 마음 지구력을 단련한 증거로 받아들인다. 나는 단지 환자의 신체적 회복만 돕는 기술적 간호사가 아니라, 감정까지 성찰하고 다스릴 줄 아는 마음 지구력을 갖춘 전문인으로 성장하고자 한다. 예측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적응력을 잡고, 건강한 경계와 동료와의 연대로 마음의 균형을 유지할 것이다. 결국 나를 지키는 힘이 타인을 살리는 힘이 된다. 이 믿음이 내가 걸어갈 간호사의 길을 단단히 지탱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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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수 | 윤*현 | 사회복지학과 | 도서: 양심 독서 에세이: 당신의 마음속 삼각형은 아직 아픈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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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부. 당신의 마음속 삼각형은 뾰족한가, 뭉툭한가
과거 인디언들은 사람의 마음속에 작은 삼각형이 있다는 사실을 믿었다고 한다. 그 삼각형은 우리가 옳지 않은 일을 할 때마다 회전하며 마음을 찌르지만, 같은 일을 반복하다 보면 모서리가 닳아 더는 아프지 않게 된다고 한다. 나는 이 이야기가 오늘날의 우리 사회를 상징하는 듯 느껴졌다. 부당함을 보아도 침묵하고 타인의 고통 앞에서도 무심히 스쳐 지나가는 일상 속에서 양심의 둔화를 본다. 무감각은 뉴스 속에서만 있는 게 아니라, 지하철 창문에 비친 내 얼굴 속에서도 종종 보였다. 책 <양심>을 읽으며 나는 그 잊힌 감각의 발자취를 찾아보았다. 요즘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면‘노약자석’이라는 표지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하지만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건 정작 그 자리가 필요하지 않은 사람들이다. 그 자리의 주인은 노인들임이 분명하지만 조금만 주위를 둘러보면 어린아이부터 어른까지 남녀노소 그 자리에 앉는다. 정작 자리의 주인이 오면 다들 슬그머니 시선을 피하고 심지어는 자는 척도 서슴지 않는다. 꼭 노인 배려석이 아니더라도 길을 가다 보면 종종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마주친다. 길을 헤매고 있는 아주머니, 무거운 짐을 들고 계단을 오르는 노인, 횡단보도를 건너지 못하는 어린아이와 그저 방관만 하는 사람들. 나 역시 그런 적이 있다. 유난히 손에 쥔 휴대전화 화면이 밝게 느껴지던 순간, 그 불편한 시선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그저 화면을 스크롤 하며 마음을 달랬다. 도와줘야 한다는 생각보다‘괜히 이상하게 보이면 어쩌지.’,‘나만 나서면 민망하지 않을까’하는 짧은 계산이 나를 행동하지 못하게 했다. 그 순간 내 마음의 삼각형이 분명히 나를 찔렀지만 아픔은 금세 사라졌다. 다들 그런거지 라는 말로 스스로를 달래면서 삼각형의 모서리를 한 번 더 닳게 만들었다. 책 <양심>에서 최재천 교수는 양심을 내 안의 깨끗한 무엇이자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것으로 정의하며 그 뿌리는 타인과 자연을 향한 연결의 감각에 있다고 말한다. 또한 양심은 혼자서 옳고 그름에 대한 개인의 기준이지만 이와 동시에 우리 모두를 한 방향으로 이끄는 공동체의 나침반이기도 하다. 결국 이는 자신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타인과 함께 살아가기 위한 생명의 본능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나는 이 구절을 읽으면서 깊은 울림을 느꼈다. 양심은 나에게 늘 정답을 고르는 일로 여겨졌지만, 사실 그것은 함께 살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마음의 온도였다. 뉴스 속 잔혹한 장면에 무감각해지는 사회와 누군가의 고통을 남의 일로 밀어내는 나 자신을 보며 나는 양심이란 단어가 왜 오래된 교과서 속 단어처럼 느껴졌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믿고 싶다. 누군가의 아픔 앞에서 아직도 마음이 찔린다면 그건 내 안의 삼각형이 완전히 닳아 없어지지 않았다는 뜻이라고.
2부. 양심,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 ‘측은지심’이라는 말이 있다. 맹자는 아기가 우물에 빠지려 하는 모습을 본다면 누구든 본능적으로 달려가 구하려 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 마음에는 계산이 없다. 이익도, 판단도, 이유도 없다. 그저 교육이나 이성적 판단을 하기 이전에, 타인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인지하는 가장 원초적인 인간의 연대감이다. 나는 이것이 최재천 교수가 말한 양심의 첫 울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의 사회는 그 울림을 점점 약하게 만든다. 어떤 일을 하던 최소한의 노력으로 최대의 이익을 내며, 가장 빠르게 처리하는 것이 팽배한 세상에서 마음의 반응은 불필요한 지연처럼 여겨진다. 양심이 사라진 자리에 남는 것은 계산된 판단과 냉정한 합리성뿐이다. 그 속에서 사람의 마음은 편리해졌지만, 한편으로는 점점 차가워지고 있다. 최재천 교수는 양심의 작동 원리는 세 단계의 명확한 순서를 가진다고 말한다. 바로 앎, 사랑, 용기이다. 그는 양심이 앎의 산물이라고 단언한다. 지혜 없는 양심은 맹목적일 수밖에 없으며, 사랑 없는 지혜는 공허하고, 용기 없는 사랑은 결국 침묵으로 사라진다. 앎은 세상을 이해하려는 지혜의 움직임이다. 무엇이 옳은지 판단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아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세상의 복잡한 이치와 타인의 고통을 보지 못하면 양심은 나아갈 방향을 잃는다. 그래서 그는 지혜가 없는 양심은 맹목적이라고 말한다. 아는 만큼 보이고 보는 만큼 사랑하게 되는 것처럼 앎은 결국 사랑으로 이어진다. 사랑은 양심의 두 번째 단계이다. 타인을 나와 분리된 전혀 다른 영역의 존재가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존재로 느끼는 순간, 비로소 인간의 양심은 숨을 쉰다. 그는 동물의 이타적 행동을 예로 들며 공생하는 인간‘호모 심비우스’에게 이타심은 선택이 아닌 생존 전략이라고 말한다. 결국 지혜를 통해 타인의 존재와 고통을 인지하고 그 인지를 바탕으로 그들을 나와 동일시하는 의식이 사랑이었다. 즉 사랑은 단순히 너를 좋아한다, 경애한다는 감정이 아니라 생명을 지속시키는 지혜의 한 형태임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이자 개인적으로 가장 중요한 단계인 용기, 나는 이 단어 앞에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저자는 책이 끝나는 내내‘차마, 어차피, 차라리’라는 세 단어로 현대인의 양심을 가로막는 벽을 묘사한다.‘차마’는 소극적인 망설임,‘어차피’는 냉소적인 체념,‘차라리’는 결단의 용기이다. 아마 대다수의 사람들은 차마와 어차피 사이에서 흔들릴 것이다. 나 또한 그랬다. 도와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괜히 도왔다가 오지랖 부린다는 말을 들을까 봐 망설였고, 나 하나 나선다고 해서 세상이 달라지지 않을 거라 말하며 나의 행위에 면죄부를 주었다. 그때마다 내 마음의 삼각형은 조용히 돌다 멈추었다. ‘용기 있는 한 사람의 행동은 수많은 사람을 움직이고 때로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계기가 된다’라는 말을 나는 개인적으로 좋아한다. 이 문장은 용기를 무모한 돌진이 아닌 세상을 움직이는 충격으로 보기 때문이다. 여기에 책 <양심>에서 얻은 깨달음을 접목시키면 용기는 황소처럼 그저 들이박고 보는 것이 아니라 앎과 사랑이라는 단단한 토대 위에서 피어나는 조용한 결단이다. 요즘 우리는 앎의 홍수 속에서 사랑을 잃은 시대를 살고 있다. 수많은 정보가 손끝에 쏟아지지만, 그 지식은 점점 타인을 향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지식으로 상대를 공격하거나 자신의 무관심을 정당화하기도 한다. 그래서 양심은 지혜와 사랑이 연결되지 못할 때 침묵하거나 왜곡된 형태로 드러난다. 특히 지식이 넘쳐나지만, 이것이 진정한 통찰과 타인에 대한 애정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오히려 타인을 공격하거나 나의 이익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전락하는 경우가 많다.
3부. 호기심의 광기: 양심의 시험대 인간의 호기심은 때로는 빛이 되지만 때로는 어둠의 문을 연다.‘나는 지식의 광기에 사로잡혀 인간성을 잃었다’라는 말은 양심의 근간인 앎이 사랑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호기심이나 효율에만 집중될 때, 그 끝이 얼마나 위험한지 보여주는 문구이다. 저자는 이러한 상황에 대해서도 심도 있게 다루고 있었다. 그는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였다는 속담을 인용하며 인간의 탐구심이 생명의 존엄성보다 앞설 때 발생하는 윤리적 문제에 대해 지적하고 있다. 특히 책은 황우석 박사의 사례를 통해 이를 정면으로 마주하게 한다. 나는 솔직히 이 사건을 처음 알았다. 황우석 박사는 인간 여성의 난자를 사용한 연구로 큰 물의를 빚었고 최재천 교수 또한 대학원 시절 매일같이 실험용 생쥐의 난자를 적출하고 죽여야 했던 경험을 고백한다. 두 사람의 과거를 읽은 나는‘도대체 인간의 지식욕은 어디까지가 허용되는가’라는 물음을 피해 갈 수 없었다. 우리는 모두 알고 싶어하고 진리를 얻고자 한다. 세상은 넓고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는 끝이 없다. 그러나 그 호기심이 생명의 존엄을 가려버렸을 때 지식은 윤리가 없는 칼날이 되고 만다. 황우석 박사의 행동은 분명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었다. 하지만 그를 피도 눈물도 없는 괴물이라 부르는 사회의 분노를 느끼며 나는 한 가지 의문을 떨칠 수 없었다. 정말 그는 혼자서만 잘못된 방향으로 미끄러진 것이었을까? 물론 황우석의 여성 난자 실험이 비윤리적인 것은 맞지만 과연 그에 대한 사람들의 수위 높은 욕설까지 정당화될 수 있을까. 인류는 지금도 수많은 가축을 희생시키며 의학 연구를 이어가고 있고, 인공 장기를 만들기 위해 돼지부터 원숭이까지 끊임없이 생명을 조작한다. 과학자들은 끝없이 지식을 탐구하고 성과를 얻고자 한다. 아무리 못하게 막아도 언젠가 또 시도하는 과학자가 나타날 것이며 실제로 현재 복제 동물 혹은 인간에 대해 생각하는 사람도 꽤 있다. 과연 그 당시 대한민국에서 황우석을 처벌한다고 해서 다른 나라의 또 다른 황우석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다. 우리가 욕하는 그 사람은 사실 우리가 만들어낸 과학 문명의 욕망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다만 나는 아직 이 문제를 완전히 이해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해졌다. 지혜라는 것이 사랑으로 연결되지 않을 때 앎은 언제든 광기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을.
4부. 다시 아픈 마음으로 살기 위해 책 <양심>을 덮은 후 나는 잠시 숨을 골랐다. 그리고 아주 조용히 스스로에게‘나는 아직 마음이 아플 줄 아는 사람인가.’라는 물음을 던지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다. 이 질문은 누가 시킨 것도 정답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내가 인간으로서 마지막까지 붙잡아야 할 감각이 무뎌지지는 않았는지 확인하는 가장 근원적인 물음이었다. 일상 속에서 스쳐 지나갔던 여러 순간들이 떠올랐다. 지친 친구가 힘겹게 마음을 털어놓던 날, 나는 그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지 못했다.‘나도 힘들어…’라는 말로 대화를 서둘러 마무리하며 그 친구의 외로움보다 내 피로를 먼저 선택했던 나와 타인의 고통을 귀찮음으로 가볍게 넘겼던 순간들이 천천히 떠올랐다. 그 순간 마음 어딘가가 분명히 찔렸지만 나는 그 찌름을 피곤함이라는 이유로 덮어버렸다. 이제야 알겠다. 그 작은 찌름이 바로 양심이 깨어나는 첫 신호였음을. 최재천 교수는 양심을 개인의 인격적 존재가치를 지탱하는 마지막 내면의 부르짖음, 그 빌어먹을 양심이라 표현했다. 하지만 나는 양심을 희망의 씨앗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그 씨앗은 너무 작아 잘 보이지는 않지만, 누군가의 아픔을 향해 잠시 멈추어 바라보는 마음, 불편함을 감수하며 건네는 짧은 말 한마디,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은 선택을 하는 그 조용한 실천 속에서 천천히 뿌리를 내린다. 나는 이제 더 이상‘다들 그런거지.’라는 말로 자신의 둔감화를 합리화하지 않기로 했다. 앎의 지혜를 통해 세상을 이해하고, 그 이해를 사랑이라는 공감으로 이어가며, 마지막 순간에‘차라리 내가 나선다.’는 용기를 선택하는 그런 사람으로 살고 싶다. 양심은 어느 날 갑자기 완성되는 덕목이 아니라 삶의 작은 결마다 반복해 길러야 하는 마음의 근육이라는 걸 이제는 알고 있다. 그래서 나는 나의 마음속 삼각형이 다시 뾰족해지기를 바란다. 그 뾰족함은 타인을 찌르기 위한 것이 아니라 무뎌지지 않도록 나 자신을 일깨우는 작은 통증이다. 그리고 그 통증이야말로 호모 심비우스 즉, 서로 기대어 살아가는 존재로서 우리가 반드시 지켜야 할 마지막 감각일 것이다. 세상은 앞으로도 빠르게 변화할 것이다. 그러나 그 속도에 휩쓸려 인간으로서의 마음을 잃어버리지는 않기를 바란다. <양심>은 조용히, 그러나 단호하게 나에게 묻는다.‘당신의 마음속 삼각형은 아직 아픈가?’나는 그 질문에 제대로 답하기 위해 오늘도 다시 아픈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려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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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수 | 고* | 경제학부 | 도서: 일할 사람이 사라진다 독서 에세이: ‘세상에 공짜는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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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공 수업에서 거시 경제 모델을 배우며 한국의 성장 잠재력을 분석하는 그래프를 들여다볼 때면, 숫자가 가리키는 냉혹한 현실에 종종 압도당하는 기분이었다. 교과서에서 배운 대로라면 노동(L)과 자본(K)이 GDP를 결정해야 하는데, 정작 그 근본 변수인 ‘노동력’ 자체가 붕괴하는 현실은 이 모든 모델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거대한 전제 오류가 아닐까 싶었다. 솔로우(Solow) 성장 모형에서 경제 성장의 한 축을 담당하는 인구 증가율이 마이너스가 되고, 그 절댓값이 커지는 세상을 교과서는 상정조차 하지 않았다는 점이 나를 혼란스럽게 했다. 쏟아지는 저출산 관련 뉴스들은 처음엔 무감각한 백색소음처럼 들렸지만, 전공 지식이 쌓일수록 그 소음은 대한민국이라는 시스템의 기반이 무너지는 굉음처럼 들리기 시작했다. ‘과연 우리가 배운 성장 모델이 다음 세대에도 유효할까?’, ‘우리의 미래 GDP는 정말 지속 가능할까?’ 하는 회의감은, 단순히 전공 공부가 어렵다는 푸념을 넘어, 내 미래에 대한 실존적인 불안감으로 다가왔다.
이철희 교수의 『일할 사람이 사라진다』는 바로 이 불안의 실체를 데이터라는 메스로 남김없이 해부하는 책이다. 이 책은 인구 문제를 먼 미래의 재앙이 아니라 지금 당장 발등에 떨어진 노동력 고갈이라는 현실 경제 문제로 정확히 끌어내린다. 책을 읽는 내내 내가 막연하게만 느꼈던 잿빛 미래의 전망이 얼마나 구체적이고 임박한 현실인지 통감했다.
책이 제시하는 수많은 통계와 분석 중, 나의 관점을 가장 근본적으로 뒤흔든 것은 21세기 한국의 인구 변화를 “14세기 흑사병 이후 유럽의 인구 감소와 비견될 만하다”라고 진단한 대목이었다. ‘흑사병’이라는 단어가 주는 충격은 실로 엄청났다. 우리는 인구 절벽이라는 말을 너무 자주 들은 나머지, 그것이 마치 완만한 내리막길인 것처럼 착각해왔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저자는 이것이 ‘절벽’이라는 비유조차 무색하게 만드는, 그야말로 문명사적 대격변에 가깝다는 것을 일깨워준다. 흑사병이 중세 유럽의 봉건제도를 무너뜨리고 사회 구조를 완전히 재편했듯, 지금의 인구 붕괴는 우리가 아는 한국형 자본주의와 고도성장 모델의 근간을 해체하고 있다. 흑사병은 단순히 인구를 줄인 것이 아니라, 노동력의 희소성을 극단적으로 높여 살아남은 농노들의 교섭력을 강화했고, 결국 장원 경제를 무너뜨렸다. 지금 우리의 인구 감소가 만약 흑사병에 비견될 만한 수준이라면, 이건 단순히 일손 부족 문제를 넘어, 자본과 노동의 힘의 균형, 산업 구조, 나아가 복지 시스템과 국가 재정의 근간까지 송두리째 뒤흔드는 거대한 패러다임의 전환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어쩌면 자본이 노동을 자동화로 대체하며 극단적인 불평등이 심화되거나, 혹은 반대로 필수 노동력의 가치가 폭등하여 사회적 권력관계가 재편될 수도 있다. 이 비유는 나에게 인구 문제가 단순한 경제 변수가 아닌, 사회 시스템 자체의 붕괴 혹은 재편을 의미할 수 있음을 경고했다.
이러한 진단은 단순히 겁을 주려는 수사가 아니다. 저자는 “인구 변화가 노동인구 규모에 미치는 영향을 정확하게 전망하기 위해서는 생산연령인구보다 경제활동인구의 변화를 살펴보는 편이 타당하다.”라는 매우 날카로운 분석 틀을 제시한다. 이 부분은 내가 전공 수업에서 느꼈던 답답함을 정확히 짚어주는 명쾌한 지적이었다. 흔히 언론에서는 15세에서 64세까지의‘생산연령인구’감소만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이건 말 그대로 경제 활동에 참여할 ‘가능성이 있는’ 인구의 총량일 뿐, 실제 노동 시장의 건강 상태를 보여주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저자의 말대로, 중요한 것은 일할 의사와 능력을 갖추고 실제 노동 시장에 뛰어든 ‘경제활동인구’다. 그리고 이 지표로 보면 한국의 상황은 훨씬 더 심각하다. 여성의 경제 활동 참여가 늘고 고령층이 은퇴를 미루면서 그나마 감소 속도를 방어해 왔지만 이제 그마저도 한계에 다다르고 있다. 이건 마치 댐의 수위가 낮아지는 와중에, 바닥에 고여있던 물까지 모두 퍼서 쓰고 있는 형국이나 마찬가지다. 경제활동인구의 감소는 곧바로 노동 투입량(L)의 감소로 이어지고, 이는 GDP 성장률을 직접적으로 갉아먹는다. 우리가 경험한 ‘한강의 기적’이 풍부하고 질 좋은 노동력이라는 인구 배당에 빚지고 있다면, 우리는 이제 그 모든 혜택을 청산하고 인구 오너스라는 무거운 청구서를 받아 든 셈이다.
이 거대한 노동력의 공백을 메울 방법으로 가장 손쉽게 거론되는 것이 바로 ‘이민 확대’ 정책이다. 정부와 많은 전문가는 이민을 불가피한 선택처럼 이야기한다. 하지만 솔직히 나는 이민자 수용 정책에 대해 늘 회의적이었다. 내가 이 문제에 회의적이었던 건, 무슨 막연한 외국인 혐오나 배타성 때문이 아니다. 그보다는 사회적 비용을 너무 안일하게 생각하는 게 아닌가 하는 근본적인 의문 때문이었다. 당장의 노동력 부족이라는 경제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장기적으로 우리 사회가 감당해야 할 사회 통합 비용이나 문화적 갈등은 그 편익을 훨씬 상회할 수 있다고 보았다. GDP 1% 포인트를 방어하기 위해 사회적 갈등 비용을 5% 늘리는 것은 과연 합리적인 선택일까? 그래서 이 책에서 “이민 확대는 인구 문제의 만병통치약이 아니다”라는 점을 명확히 짚어준 부분이 가장 크게 와닿았다. 저자는 코로나19 팬데믹 당시 신규 입국 외국인 노동자 수가 이전의 7분의 1 수준으로 급감하며 농촌과 산업 현장이 마비 직전까지 갔던 사례를 지적한다. 이는 외국인력 공급이 팬데믹과 같은 외부 충격에 얼마나 취약할 수 있는지, 그리고 우리가 얼마나 이 외부 노동력에 의존하게 되었는지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다.
저자는 이민 확대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앞으로도 한국에 오려는 외국인이 충분히 많을 것”이라는 안일하고도 막연한 전제를 깔고 있다고 비판한다. 그리고 이 가정이 현실과 어긋날 수 있는 세 가지 이유를 냉철하게 제시한다.
첫째, 외국인력 확보를 둘러싼 국가 간 경쟁이 심화되고 있다. 이는 노동 시장에서도 ‘수요와 공급’의 법칙이 작동한다는 당연한 사실을 상기시킨다. 우리만 인력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일본, 대만 등 우리와 인구 구조가 비슷한 경쟁국들 역시 적극적으로 외국인 유치 정책을 펴고 있다. 외국인력 시장은 이미 ‘공급자 우위 시장’으로 변하고 있다. 둘째, 인력 송출국 스스로의 경제 발전이다. 대표적인 예로 베트남의 경우, 10년 후 평균 임금이 한국의 절반 수준에 이를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지극히 당연한 글로벌 경제 발전의 수순이다. 우리가 ‘한강의 기적’을 이뤘듯, 그들도 자국에서 더 나은 기회를 찾게 될 것이다. 우리가 한강의 기적을 축하하면서 동시에 동남아 국가들이 영원히 우리의 저임금 노동력 공급처로 남아주기를 바라는 것은, 경제학적으로도 윤리적으로도 모순된 태도다. 셋째, 송출국 자체의 인구 변화 역시 이들의 ‘인력 수입국’전환 시기를 앞당길 것이다. 우리보다 속도가 느릴 뿐, 아시아의 많은 국가가 고령화를 겪고 있다. ‘무한한 노동력 공급’이라는 가정 자체가 20세기적 발상에 불과하다.
결국 무한한 외국인력 공급이라는 가정 위에 세워진 이민 정책은 타당하지 않다는 것이 저자의 핵심이다. 그렇다면 이 문제에 어떻게 접근해야 할까? 저자는 두 가지 현실적인 방향을 제시한다. 첫째, 막연히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한국을 외국인이 선호하는 국가로 만들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해야 한다. 둘째, 외국인력 도입을 인구 문제 해소의 만병통치약처럼 생각하는 태도 자체를 버려야 한다.
나는 특히 ‘선호하는 국가’라는 대목에서 고민에 빠졌다. 저자는 임금 이외의 매력적인 조건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매력적인 조건’이란 무엇일까? 단순히 높은 임금과 깨끗한 기숙사를 넘어, 차별 없는 시선, 안정적인 체류권, 자녀 교육 지원, 나아가 사회 구성원으로 받아들이는 포용적인 문화일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나는 가장 큰 회의감을 느낀다. 경제적 필요성에 의해 이민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당위는 알겠지만, 과연 우리 사회가 그로 인한 사회적 비용을 감내하고 ‘매력적인 다문화 사회’로 변모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경제 논리가 사회적 수용성을 앞질러 갈 때 발생하는 파열음은 독일의 가스트아르바이터나 일본의 기능실습생 제도에서 이미 목격된 바 있다. 이민은 근본적인 체질 개선책이 될 수 없으며, 어설픈 도입은 경제 문제와 사회 문제를 맞바꾸는 최악의 ‘정책 트레이드오프’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다.
경제학원론 첫 시간에 배우는 교훈 중 하나가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지금 우리가 겪는 인구 문제만큼 이 격언이 뼈아프게 적용되는 분야도 없겠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는 종종 모든 문제를 깨끗하게 없애면서 어떠한 부작용도 없는 마법 같은 해법을 갈망하지만, 저자가 지적하듯 그런 ‘만병통치약’은 존재하지 않는다. 외국인 정책을 포함한 모든 대응책은 명확한 편익과 그에 상응하는, 혹은 그를 능가하는 사회적 비용을 수반한다. 지금 당장 일손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가장 쉬운 길, 즉 저임금 외국인력 도입에만 의존하는 것은, 당장의 경제적 편익을 위해 미래 세대에게 더 큰 사회적 갈등 비용을 전가하는 행위일 수 있다. 미래의 지속가능한 사회를 만들어가기 위해서는, 당장의 고통과 비용을 감수하더라도, 더 근본적인 체질 개선의 길을 선택하는 것이 결국 더 현명한 길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저자는 출산율 반등이라는 희망 고문에서 벗어나, 이미 시작된 축소 사회에 적응해야 한다고 말한다. 책 전반에 깔린 메시지는 명확하다. 일할 사람이 사라지는 속도를 늦출 수는 없으니, 이제는 적은 노동력으로도 살아남을 수 있는 사회 시스템을 설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곧 노동 생산성의 혁신, 산업 구조의 재편, 그리고 자동화 기술의 과감한 도입을 의미한다.
이 책을 덮으며, 전공 수업에서 막연히 느꼈던 비관론은 한층 더 구체적이고 무거운 현실이 되어 내 어깨를 짓누르는 듯했다. 동시에,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에 대한 방향성도 어렴풋이 잡히는 듯했다. 우리가 앞으로 마주할 대한민국은 과거 우리가 알던 고도성장의 나라가 아닐 것이다. 어쩌면 자동화 기술이 노동을 해방시키는 유토피아가 아니라, 로봇을 소유한 자본가와 그렇지 못한 대다수 사이의 극단적 불평등이 나타나는 디스토피아가 될 수도 있다.
노동력이 귀해지는 시대, 사람의 가치를 어떻게 재정의하고, 기술로 그 공백을 어떻게 메우며, 갈등을 최소화하며 어떻게 함께 축소할 것인지를 고민해야 한다. 『일할 사람이 사라진다』는 인구 문제에 대한 환상을 걷어내고, 데이터라는 차가운 거울을 통해 우리의 민낯을 비추는 책이다. 이 거울에 비친 미래가 비록 잿빛일지라도, 그 현실을 정확히 직시하는 것에서부터 비로소 첫걸음을 뗄 수 있을 것이다. 흑사병이 중세의 끝과 근대의 시작을 알렸듯, 이 거대한 인구 변화의 파고 속에서 우리가 어떤 새로운 시대를 준비해야 할지 고민을 이어갈 수밖에 없다. 어쩌면 우리는 성장 그 자체를 경제학의 지상 과제로 삼았던 지난 세기의 패러다임, 그 자체를 근본적으로 재검토해야 할 시점에 정말로 온 것인지도 모르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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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수 | 오*영 | 의예과 | 도서: 꽃 떨어진 동산에서 호미와 괭이를 들자 독서 에세이: 박제가 되어버린 꽃을 아시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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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엔 아름다운 것들이 어찌나 많은지. 싱그러운 봄꽃이 만발한 동산, 그 동산에 소풍나와 인솔교사를 뒤따르는 학생들, 그네들이 도란도란 나누는 대화, 곧 온 산골과 거리를 울리는 목소리, 목소리들…
하지만 아름다운 것을 가만히 내버려둘 리 없는 현실이었던가. 목소리는 몰려오는 구둣발 소리에 묻히고, 동산은 자욱한 흙먼지에 가린다. 이날도, 꽃이, 떨어졌다. 실컷 동산에 있던 꽃들을 남김없이 밟고 때리고 결박해 끌고 간 구둣발은 남겨진 폐허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위아래로 까딱거린다. 그러다 좋은 생각이 났는지 쓰러진 꽃 하나를 주워든다. 세상을 향해 뻗친 잎과 줄기의 말단을 쳐내고, 생기로 가득찼던 사관篩管을 비우기 위해 특수 용액에 숨 막힐 정도로 담근다. 본래의 색이 남아있으면 성가시므로 탈색제도 몇 방울 떨어뜨린다. 그렇게 숨이 멎을 때쯤 표백된 꽃을 꺼내 빨갛게, 또 하얗게 염색한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특수용액에 담갔다 꺼내면, 프리저브드 플라워(preserved flower)가 완성된다. 만족스러운 표정의 구둣발은 성큼성큼 동산 한 가운데로 걸어가 프리저브드 플라워를 꽂는다. 지극히 아름다우나 물을 흠뻑 들이키는 기쁨도 따스한 햇살의 황홀함도 모르는 그것, 시들지도 않지만 살아있지도 않은 그것, 그것이 안 망할 리 없지. 망할 사관을 심은 것이니 가히 식민사관(植泯篩管)이라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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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가 한국 정부를 겁박하며 재정권과 외교권을 침탈한지 6년만인 1910년, 한국민은 졸지에 나라를 잃었다. 일본군들이 쳐들어와 활개쳤고, 쌀과 유기는 새로 나오는 족족 빼앗겼다. 게다가 일제가 우리에게서 빼앗으려고 했던 것은 이런 자원뿐만이 아니었다. 그들은 호시탐탐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노렸다. 창씨개명을 실시하고, 황국신민서사 암송을 강요하며, 신사에서 절하도록 위협했다. 하지만 이런 만행에 우리 민족이 가만히 있었겠는가. 꽃은 이미 떨어졌으나 사람들은 좌절하지 않고 끊임없이 호미와 괭이를 들었다. 이수희와 김경화는 바람에 이파리를 휘날리는 꽃들처럼 태극기를 펄럭였고, 홍종현은 태양을 쫓는 꽃봉오리처럼 고개를 들고 목이 터져라 만세를 불렀다. 송병천은 후세를 위해 홀씨를 흩뿌리는 꽃처럼 온 거리에 격문을 나붙였다. 그 규모는 크지 않았지만, 또 원래의 계획했던 바를 완전히 이루지는 못했지만, ‘평범한’ 사람들의 ‘당연한’ 조선독립운동은 끊임없이 꽃을 피우고 끊임없이 이어져갔다. 이러한 노력이 있었기에, 수천번의 호미질과 괭이질이 있었기에, 지금 우리가 독립된 나라에서 우리 민족의 역사와 뿌리를 잊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게 아니겠는가? 그런데 이 책이 담고 있는 내용은 이것뿐만이 아니다. 이 책은 독립운동을 하는 민중을 부정하고 탄압하려 했던 역겨운 일제의 간계 또한 보여주고 있다. 일제는 자기 나라를 위해 독립운동을 하는 그들이 그저 법을 어긴 범죄자가 되길 바랐다.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은 ‘제령 7호’, ‘치안유지법’, ‘보안법’을 어긴 범죄자일 뿐이고, 사회의 혼란을 야기한 반란분자일 뿐이라고 여겨지길 바랐다. 즉 일제는 조선이라는 민족의 꽃을 꺾고 내선일체라는 새로이 ‘만들어진’ 꽃을 세우고 싶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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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어지는’ 꽃에는 어떤 종류가 있는지 아는가? 두 가지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지는 조화이고, 다른 하나는 실제 꽃을 이용해 만들어지는 프리저브드 플라워, 즉 보존화(保存花)이다. 이 둘은 완전히 다른 인공적인 과정을 통해 만들어지는 꽃이라는 점에서 많은 차이점을 가지고 있지만, 가장 큰 차이점은 실감성에 있다. 조화는 누가 봐도 그 촉감에서나 색감에서나 질감에서나 가짜라는 것이 티가 나지만, 보존화는 그렇지 않다. 촉감과 질감이 부드럽고 매끄러우며 ‘꽃답게 아름다운’ 진한 색깔을 가지고 있기에, 실제 꽃을 많이 보지 못했고 그저 꽃은 아름다운 것이라는 막연한 인식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보존화가 생명이 있는 꽃이라고 속기 쉽다. 나도 언젠가 실제 생화에 가장 근접하면서도 시들지 않는 보존화의 이점에 끌려, 선물용으로 프리저브드 플라워를 만드는 수업을 들은 적이 있었다. 수업을 들으러 꽃집에 들어서자 신문지가 깔린 책상과 장갑, 정체를 알 수 없는 용액이 든 투명한 유리병들, 그리고 아직까지 생명력을 발산하고 있는 꽃 여러 송이가 어지러이 공간을 차지하고 있었다. 꽃집 주인과 인사를 한 후 장갑과 마스크를 쓰고 가장 먼저 한 것은 꽃을 자르는 일이었다. 불필요한 것들은 쳐내고 특히 줄기 끝부분은 적절히 다듬어야 나중에 용액과 염료가 잘 흡수된다는 꽃집 주인의 친절한 목소리는 이상하게 내 가슴을 후볐다. 꽃을 다 다듬고 난 다음에는 그것을 서로 다른 두 용액에 담가야 했는데, 그 냄새가 지독했다. 하나는 심한 알코올 냄새였고, 다른 하나는 머리 아픈 약품 냄새였다. 꽃집 주인은 꽃이 용액들에 푹 잠겨야 한다는 주의사항만을 간단하게 알려준 후, 내게 주어진 재료를 잽싸게 자신이 가져온 것과 바꿨다. 이 과정은 며칠이 걸리므로, 자신이 미리 담가놓은 꽃으로 이어서 수업을 진행하자는 것이었다. 그런 식으로 탈수와 탈색, 보존과 염색 과정을 순식간에 건너뛴 수업은 신기하게도 내가 그 과정들을 실제로 하나하나 밟았다고 착각하게 했다. 신기하게도. 이제 마지막으로 염색까지 마친 꽃을 건조하는 과정을 배웠다. 아무런 흠 없는 아름다운 보존화를 얻기 위해서는 끝까지 조심스럽게 꽃을 다루어야 했다. 마찬가지로 이 과정도 오래 걸리므로, 꽃집 주인은 내 것을 미리 만들어놓은 보존화와 바꾸었다. 그것은 매우 아름다웠고, 생기넘쳐 보였으며, 나를 뿌듯하게 했다. 비록 그 보존화가 만들어진 역사를 되짚어보면 그 속에 나는 단 1%도 없겠지만, 아무렴 어떤가. 나는 아름다운 보존화를 얻었고, 보존화를 만드는 방법까지 채득하게 되었다. 그거면 된 거 아닐까?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나는 자꾸 내가 만든, 아니 알고보면 꽃집 주인이 만든 보존화가 떠올랐다. 일제는 조선 민족의 꽃을 꺾어 다듬은 다음 우리 민족의 색을 빼고 왜색을 주입하려 했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식민사관(植民史觀)이라는 그럴듯한 꽃을 몇몇 사람들은 받아들었다. 마치 꽃집 주인의 보존화를 받아들고 기뻐한 나처럼. 이 사람들은 그것이 진짜 꽃인 양, 호미와 괭이를 들고 그 역겨운 죽은 꽃들을 치워버리려는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했다. 속아버린 것이다. 어쩌면 자신을 위해 일부러 속은 것일 수도 있다. 우리는 속지 말자. 눈앞에 하나하나 보여진 역사를 왜곡하는 손길들에 속지 말자. 그러기 위해서 끊임없이 우리 민족을, 우리네 역사를 공부하자. 생화를 많이 보지 못했던 자들이 프리저브드 플라워에 속아넘어가기 쉽듯, 우리 역사를 잘 모르는 자들이 그럴듯한 사관에 속아넘어가기 쉽다. 그 누구가 얼마나 화려한 꽃을 건네든 상관없이, 생명도 없는 것들은 과감히 쳐내고 우리 영토에 뿌리내린 생화를 지켜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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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아직도 그때 그 화花요일이 생생하다, 모두가 잠이 들 준비를 하던 밤, 부모님은 일찍이 주무시기에 볼륨을 3 정도로 낮춰두었던 텔레비전, 기분 좋게 하루를 마무리하러 오는 어둠을 맞이하려 깜박이던 눈, 한 손엔 오늘 만난 친구들과 나누던 카톡, 개운하게 양치까지 마치고 자러갈 준비를 했던 내게 울린 스마트폰 알림. 일제히 같은 목소리를 보도한 뉴스. 이해하기 어려운 말들에 깜박임을 멈춘 눈동자. 따스함이 식기도 전에 다시 황급히 켜진 텔레비전. 떨리는 숨으로 모두를 잠에서 깨운 나는. 나는 아직도 그때가 생생하다. 꽃이 떨어지던 그때가 생생하다. 그런데 역사는 반복된다고 했던가. 분명 꽃은 떨어졌는데, 꽃이 떨어지자 호미와 괭이를 들었던 사람들이 있는데, 그 모든 것이 꿈이라는 듯 당당히 프리저브드 플라워를 가져와 세우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그 쨍한 색깔의 프리저브드 플라워를 받아든 사람들이 있다. 그럴듯해 보이는 보존화에 날아든 벌들이 있다. 우리는 속지 말자, 눈앞에 하나하나 보여진 역사를 왜곡하는 손길들에 속지 말자, 그럴듯한 사관에 속아넘어가지 말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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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려 | 김*주 | 한의학과 | 도서: 궤도 독서 에세이: 우리는 여전히 지구의 존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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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류는 멈추지 않는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예부터 끊임없이 경계를 넘어섰다. 더 멀리, 더 높이, 더 빠르게. 바다의 끝을 두려워하던 시대, 바이킹들은 폭풍과 안개를 뚫고 미지의 대륙으로 향했다. 지도도 나침반도 없던 그 항해에서, 그들은 별빛만을 의지해 북대서양을 건넜다. 그들의 배는 단지 나무로 엮은 조각선이었지만, 그 위에는 ‘인류의 욕망’이 실려 있었다. 지상의 경계가 무너진 후, 사람들은 하늘을 바라봤다. 아폴로의 착륙선이 내려앉던 그날, 우리는 처음으로 ‘지구 밖에서 지구를 바라보는 존재’가 되었다. 이처럼 인간의 역사는 끊임없는 도전의 연속이었다. 바이킹의 노와 대항해의 돛, 비행기의 프로펠러와 로켓의 불꽃은 모두 더 멀리 가고 싶다는 같은 욕망의 언어를 말한다. 그리고 그 욕망의 끝에서, 오늘의 인류는 국제우주정거장이라는 인류 문명의 가장 먼 끝자락에 서 있다. 그곳에는 여섯 명의 인간이 머문다. 과학자이자 기술자, 동시에 누군가의 가족이자 친구이며, 지구의 대리인이기도 하다. 그들은 인류의 무한한 발전을 위해 지구를 떠났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역설적으로 그곳에서 가장‘지구로부터 멀리 떨어진 인간’이 되고 점점 인간답지 못한 생활을 영위하게 된다.
무중력 속의 삶은 상상보다 훨씬 더 냉혹하다. 땅이 없다는 것은 단지 발을 디딜 곳이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몸의 중심이 사라진다는 뜻이다. 무중력은 인간의 몸을 천천히 분해한다. 피는 머리로 몰리고, 다리는 가늘어지고, 뼈의 칼슘은 빠져나간다. 땀은 흘러내리지 않고 둥근 구슬로 떠다닌다. 우리는 그동안 중력을 짐으로 여겼지만, 사실 그것은 생명의 조건이었다. 중력은 우리를 땅에 묶는 사슬이 아니라, 우리의 존재를 형성하는 보이지 않는 손이었다. 우주에서는 그 손이 사라진다. 인간의 몸은 방향을 잃고, 감각은 둔해지고, 스스로의 위치를 확신할 수 없게 된다.몸의 근력을 유지하고 인공적인 무게의 감각을 잃지 않기 위해 정거장 속 사람들은 매일 몇 시간씩 고정 벨트를 두르고 운동해야 한다. 인간이 자신의 몸을 유지하기 위해 인공적인 중력을 만들어내야 하는 곳, 그것이 우주다. 육체는 여전히 지구의 법칙에 묶여 있고, 그 법칙을 떠난 순간부터 서서히 퇴화한다. 우주는 인간을 해방시키는 공간이 아니라, 인간이 지구에 속해 있음을 냉정하게 증명하는 공간이다. 그러나 육체보다 더 큰 고통은 감정의 결핍이다. 국제우주정거장의 승무원들은 하루에도 열여섯 번의 일출과 일몰을 맞는다. 창밖으로 보이는 지구에서는 구름이 밀려가고, 바다가 반짝이며, 도시의 불빛이 살아 움직인다. 대기의 푸른 띠가 얇은 선처럼 지구를 감싸고, 그 아래에는 수십억의 사람들이 살아 숨 쉰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은 잔혹할 만큼 멀다. 그들은 그 풍경 속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 그 빛은 따뜻하지만 닿을 수 없고, 그 바다는 넓지만 냄새가 없다. 창문을 통해 보이는 지구는 생명으로 가득 차 있지만, 그들의 생활공간은 금속과 플라스틱, 필터와 경보음으로 이루어진 인공의 세계다. 가족, 연인, 친구, 언어, 추억, 그 모든 것은 여전히 지구의 중력 속에 묶여 있다. 그들은 그 세계를 떠났고, 이제는 그 세계를 관측하는 존재가 되었다. 매일 정해진 시간, 통신 회선이 열릴 때면 잠시 목소리를 주고받지만, 그 짧은 대화는 늘 반 박자 늦는다. 지구에서 올라오는 전파가 공기를 지나지 못하고, 우주의 진공을 가로질러 올 때 생기는 몇 초의 지연은 사소해 보이지만, 그 틈 속에 서늘한 고립의 감각이 스며든다. 그 어긋남 속에서 그들은 자신이 여전히 인간이지만, 더 이상 ‘지구의 리듬’에 속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느낀다. 지상에서는 하루가 흘러가고, 계절이 바뀌고, 바람이 분다. 하지만 우주에는 계절도 바람도 없다. 그곳의 시간은 전파의 왕복 거리만큼 느리고, 감정은 빛의 속도에 미치지 못한다. 그래서 사랑은 언제나 한 박자 늦게 도착하고, 그리움은 늘 시간차를 두고 되돌아온다. 이 작은 지연이, 그들에게는 어떤 말보다 선명하게 “당신은 이제 지구에 있지 않다”라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본 소설에 등장하는 일본인 우주비행사 치에는 지상에서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게 되지만 당연하게도 그녀는 장례식에 갈 수 없다. 눈물이 흘러도 중력이 없으니 떨어지지 않는다. 이렇게 눈물이 흘러내리지 못하는 세계에서는 슬픔도 완성되지 않고, 고통은 무언의 형태로 곁을 떠다닐 뿐이다. 치에는 창밖으로 스치는 일본 열도를 바라보며, 바다의 윤곽으로 기억을 더듬어보지만 그 기억조차 둥둥 떠다닌다. 이처럼 우주는 인간에게 끝없는 가능성을 열어주지만, 동시에 인간이 인간으로서 느끼는 ‘감정의 무게’를 빼앗아간다. 인간에게 우주는 인간을 단련시키는 공간으로, 항상 완벽을 요구한다. 그곳에서는 개인의 감정보다 임무가 우선이다. 한 사람의 불안이나 통증, 두려움은 곧 시스템의 결함으로 간주된다. 목에 혹이 생긴 러시아 우주인은 끝내 보고를 미루며 두려움과 책임 사이를 오간다. 그가 아픈 것은 인간으로서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그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그는 ‘결함 있는 부품’이 되어 쓸모없는 존재가 된다. 우주는 냉정한 곳이기에 그곳에서 인간은 완벽한 시스템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 인간이 느끼는 감정은 업무를 방해하는 잡음이 되고, 어떠한 형태의 고통이든 데이터로 환원되어 부정적인 요소로 취급된다. 인간은 이러한 체계 속에서 인간답지 못한 삶을 영위해야 하고, 결국 자신이 살아 있는 존재가 아니라 ‘기능해야 하는 존재’임을 자각하게 된다. 자신의 감정, 행동, 말을 모두 검열하며 사소한 한숨과 망설임조차 두려워하게 된다면 감정의 온도는 서서히 낮아지고, 표정은 점점 굳어지게 될 것이다. 철저히 계산된, 분 단위로 짜여 있는 하루하루의 루틴 속에서 그들은 자신의 심장박동조차 낯설게 들린다. 그래서 그들은 무의식중에 지구를 떠올린다. 잠깐 실수해도 웃어넘길 수 있고, 계획에서 어긋나도 원망이나 자책보다는 새로운 일정의 반가움이 있는 온기있는 공간. 우주의 완벽한 질서 속에서 그들이 진정으로 그리워했던 곳은 불완전하지만 살아있는 세계인 지구다. 그들이 창문 밖을 볼 때마다 지구는 끝없이 아름답다. 대기의 경계선 위로 태양이 솟아오르고, 남극의 얼음이 푸르게 빛난다. 하지만 그 경이로움은 잔혹하다. 그들은 그 아름다움을 ‘볼’ 수는 있지만, ‘느낄’ 수는 없다. 반짝이는 빛은 따뜻하지 않고, 찬란한 바다는 냄새가 없으며, 장엄한 산맥에는 바람이 없다. 지구는 그들에게 가장 가까우면서도 결코 닿을 수 없는 세계가 된다. 한편 지상에서는 태풍이 몰려오고, 산불이 번진다. 위성처럼 지구를 도는 그들은 그 모든 재난을 관측하고 기록하지만, 재난 속에서 아우성치는 사람과 세상을 구할 수는 없다. 필리핀 해역 위를 지날 때, 한 비행사는 자신이 예전에 만난 어부를 떠올린다. 지금 그는 안전할까. 그러나 자신은 그저 위에서 연구를 위해 사진을 찍고 기록하는 ‘관찰자’로서 존재할 뿐이다. 관측과 무력감 사이에서, 인간의 윤리는 흔들린다. 과학의 진보가 인간의 온기를 대신할 수 없음을, 그들은 그제야 실감한다. 지구를 떠나온 그들은 결국 지구를 갈망한다. 땀을 흘리고, 바람을 맞고, 땅을 딛는 단순한 행위가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는다. 그들에게는 이제 그 모든 것이 사치다. 무중력 속에서는 냄새도, 온기도, 방향감각도 없다. 인간이 인간으로 존재하려면, 흙과 공기, 중력이 필요하다. 우리는 땅의 생물이다. 그 땅의 중력이 우리의 피를 순환시키고, 우리의 언어를 지탱한다. 인류는 발전을 향해 나아간다고 믿지만, 어쩌면 그것은 ‘도피’인지도 모른다. 지구의 혼란과 불안, 질병과 전쟁에서 벗어나려는 욕망이 우리를 하늘로 밀어 올렸는지도 모른다. 우주는 새로운 희망처럼 보이지만, 그 실상은 지구로부터의 탈출을 꿈꾸는 인간의 그림자일 뿐이다. 우리는 깨끗하고 완벽한 세계를 찾아 떠났지만, 그곳에서도 여전히 불안하고 외롭다. 어디로 가든, 인간은 지구의 흔적을 안고 간다. 우리가 숨 쉴 때마다 들이마시는 산소는 우리가 떠나 온 숲의 향기를 머금고 있고, 세포 속 물은 수천 번의 증발과 응결을 거쳐 다시 돌아온 구름의 기억이다. 즉, 인간은 지구를 떠나는 순간조차 지구로부터 빌린 원소와 기억을 안고 움직이고 지구를 떠나도 지구를 완전히 떠날 수는 없는 존재로 남게 된다. 인간은 우주를 향해 나아가면서도, 언제나 지구를 향해 회귀한다. 그 회귀는 단순히 귀환의 항로가 아니라, 존재의 방향이다. 우리는 별을 향해 손을 뻗지만, 그 손끝에 닿는 것은 결국 흙의 온기다. 지구는 우리가 떠날 수 있는 장소가 아니라, 우리 안에 각인된 생명의 문장이다. 〈궤도〉는 거대한 질문을 남긴다. 인간은 정말로 지구 없이 존재할 수 있을까? 과학적 기술의 측면에서는 가능하다고 말하지만, 인간의 원초적인 감정은 그렇지 않다고 대답한다. 인간이 끊임없이 염원하는 무한한 발전의 끝에는 항상 ‘외로움’이 빠짐없이 존재한다. 수 세기동안 인간은 별을 향해 손을 뻗고 있지만, 결국 그 손이 그리워하는 것은 흙의 온기다. 지구는 단순히 우리가 서 있는 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우리가 살아 있는 방식이자 이유이다. 결국 우리는 지구에 있어야 완성되는 존재인 것이다. 우주는 우리에게 무한을 보여주지만, 지구는 유한함의 따뜻함을 가르친다. 그 유한함 속에서만 사람들 사이에 애정과 사랑이 싹트고, 상실과 결핍이 의미를 갖는다. 지구에서 땀을 흘리고, 중력에 눌리고, 서로에게 기대어 사는 일. 그 단단한 현실이야말로 인간이 숨 쉴 수 있는 유일한 우주다. 그러므로 나는 묻는다. 무한한 발전을 향해 떠난 그들이, 과연 행복했을까? 빛으로 가득한 우주의 어둠 속에서, 그들이 진정으로 그리워한 것은 언제나 같은 것이었을 것이다. 발을 딛을 수 있는 단단한 땅, 누군가의 체온이 남아있는 공기, 그리고 우리가 돌아갈 집, 지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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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려 | 이*민 | 화학과 | 도서: 궤도 독서 에세이: 명확한 시선 없는 명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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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사도, 결론도 보이지 않는다. 『궤도』라는 제목처럼, 이는 하나의 이야기라기보다 그저 물체가 다른 물체 주위를 맴도는 궤적, 끝없이 이어지는 운동의 흐름 같다. 그 흐름 속에서 작가의 사유를 따라가며, 어느새 나 자신도 그 궤도에 올라타 있었다. 그녀의 생각을 따라 돌며, 나의 삶과 사유를 되짚고 다시 계산하는 과정에 빠져든다. 어지러울 만큼의 경험이다. 결론은 어디에도 없다. 하지만 지구를 향한 러브레터이자, 모든 인간 생명의 개별적이면서도 공동체적인 가치를 인정하는 감동적인 헌사에 감사할 수 있다.
작가는 우주인의 일상과 한 번도 바깥에서 바라보지 못했던, 우주에서 바라본 지구의 모습을 생생하고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우주정거장의 일상과 자연 세계의 장대한 묘사를 병치하며, 우주 속 우리의 위치를 묻는다. 국제우주정거장은 90분에 한 차례씩 24시간 동안 총 16차례 지구를 공전한다. 16번의 궤도를 돌기 때문에 16번의 일출과 16번의 일몰을 마주하게 된다. 지구 위에 떠 있는 거대한 H자 금속체 안에 여섯 사람이 있다. 네 명의 astronaut(미국인, 일본인, 영국인, 이탈리아인), 두 명의 우주비행사 cosmonaut(러시아인, 러시아인), 여자 둘에 남자 넷, 열일곱 개 모듈을 연결해 시속 1만 7,500마일로 이동하는 우주정거장 하나. 죽음과는 4인치 티타늄을 사이에 둔 공간, 국가도 국경도 전쟁도 없는 곳인 우주선 안에서도 러시아와 나머지 국가와의 대립을 지상에서 만들지만, 정작 이들은 서로 잘 지낸다. 부유하는 가족이라고 하지만, 가족보다 더한 동시에 덜한 사이다. 이 짧은 시기 동안 이들은 서로에게 전부나 다름없다. 존재하는 게 자신들뿐이기 때문이다. 서로가 서로의 친구이자 동료이고, 스승이고, 의사이고, 치과의사이자 미용사다. 우주유영을 하고, 우주로 발사되고 지구로 재진입할 때, 비상 상황에서도 서로가 서로의 구명밧줄이다. 각자가 서로에게 인류 대표가 되어 수십억 명 몫을 감당해야 한다. 가족, 동물, 날씨, 섹스, 물, 나무까지, 지상의 모든 것 없이 지낼 줄 알아야 한다. 사람들과 사물들이 그리워지고, 지구가 아득하다 느껴져 며칠을 우울함에 허우적대고, 심지어 북극에서 저무는 석양을 봐도 기분이 나아지지 않을 때는 선내의 사람들 얼굴을 보며 계속 살아가게 할 무언가를 발견해야만 한다. 처음에 이들은 밤 풍경에 매료되었다. 화려한 도시 불빛을 외피에 두른 지구는 인간이 만든 것들로 황홀하게 빛난다. 밤이 되면 고향을 가리킬 수 있다. 저기 시애틀, 오사카, 런던, 볼로냐, 상트페테르부르크, 모스크바가 있다. 밤에 드러나는 전기의 과잉은 숨을 멎게 한다. 그러나 그 무력 속에서 문득, 그들은 아름다움을 본다. 도시의 불빛으로 황홀히 밤은 빛나고, 그 불빛들은 인간이 만든 문명의 심장박동처럼 반짝인다. 이곳에 무언가가, 누군가가 있음을 심연 앞에서 선언하는 지구. 무심한 우주 속 지구의 무심한 회전, 모든 언어를 초월하는 구체의 완벽함. 다시 깨끗하고 찬란하며 형용할 수 없이 푸르름. 러시아인 안톤과 로만, 미국인 숀, 일본인 치에, 이탈리아인 피에트로, 영국인 넬로로 구성된 여섯 명의 우주비행사는 각자의 감각과 기억, 사유를 기록한다. 여섯 명의 우주인의 각자의 서사와 삶의 의미가 번갈아 서술된다. 자신들이 서로와 또 우주선과 아주 구분되어 있다고 느껴지지 않는다. 이곳에 오기 전 어떤 사람이었으며, 훈련 환경이나 배경이 얼마나 달랐고, 동기와 성격이 어떻든, 어느 나라 출신이며, 자신들의 국가가 충돌하고 있든 말든, 이곳에서 이들은 우주선의 정교한 힘으로 동등해진다. 서로 다른 시점과 감각이 교차하면서 바라보는 위치와 인간 존재의 좌표가 점차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 서사가 명상적이고 철학적인 질문을 던지게 해준다. 이 중 한 명이 주인공이라기보다 각자의 우주 생활이 그려진다. 여섯 명의 우주비행사로 응축된 인류를 전달하는 시선은 누구의 시선인지 경계를 모호하게 흐트러뜨려 만들어진 혼돈으로, 공허한 우주 속 함께 있다는 감각을 더하기도 한다. 쉼표 없는 지명의 연속 나열, 하얀 빛으로 물드는 새떼 등의 묘사. 이런 작가의 섬세한 언어 조율로 인하여 독자는 ISS에 있다가, 지상에 있다가, 존재하지 않는 등 시점이 고정되지 않아 자신의 존재마저 해체됨을 느끼게 된다. 그야말로 궤도를 도는 우주비행사와 동일한 관점을 공유하게 하는 독특함을 선사한다. 찬란한 묘사가 리듬처럼 반복되며, 인물들의 생각이 빛과 색 속에서 뒤섞인다.
작품 속에는 화가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이 여러 차례 언급된다. 『궤도』의 궤적이 점차 겹겹이 쌓이듯, 이 그림 역시 시선의 궤도를 따라 변주된다. 처음에는 등장인물들의 보는 행위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보는 자는 감시자이자 지배자이며, 시선은 권력의 방향을 결정한다. 그러나 궤도가 겹을 더할수록 이야기는 어느새 보지 않는 자가 중심이 되는 시선으로 옮겨간다. 아무것도 바라보지 않는 개가 그림의 진정한 주체로 드러나는 순간이다. 이는 수많은 눈과 카메라, 인간의 시점이 향하던 세계가 이제는 그 시선을 받는 존재, 곧 지구 자체로 이동했음을 상징한다. 『궤도』는 이처럼 관점의 전환을 통해 우리가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되돌아보게 한다. 숀의 아내는 엽서 뒷면에 질문을 남긴다. “이 그림의 주제가 뭐게? 누가 누구를 보고 있는 걸까?” 그림 속 화가는 왕과 왕비를, 왕과 왕비는 거울 속 자신을, 감상자는 화가와 공주를, 그리고 서로를 본다. 그러나 피에트로는 말한다. “그림의 대상은 개야.” 이때 숀은 처음으로 엽서 속 전경의 개를 본다. 개는 눈을 감고 있다. 시선과 응시가 모든 것을 결정짓는 그림 속에서, 유일하게 아무것도 보지 않는 존재. 그러나 그 무관심 속에서만 진정한 자유가 태어난다. 인간의 허영과 위계, 응시의 교환 속에서도 개는 당당히 존재한다.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은 결국 누가 세계를 바라보고, 누가 세계의 중심에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다. 이 장면은 우주비행사 숀의 시각과도 맞닿아 있다. 희미한 구름에 빛이 반사되어 탁해진 눈처럼 보이는 지구는 마치 인간을 응시하는 또 다른 존재처럼 느껴진다. 숀은 미세중력 속에서 엽서를 바라보며,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이 실제로 ‘본다’는 행위인지, 혹은 단지 반사된 감각일 뿐인지 혼란스러워한다. 그는 말한다. “지구를 바라보고 있으면 두 방향으로 동시에 당겨지는 기분이 든다.” 시선은 이제 외부로 향하지 않는다. 관찰자였던 인간이 오히려 관찰당하는 존재로 전환되는 순간, 감각의 질서는 무너지고, 존재의 의미는 새롭게 구성된다. 『궤도』는 이처럼 ‘시선’의 위치를 끊임없이 이동시키며, 감각에서 존재로, 지배에서 순환으로, 인간에서 지구로 시점을 전환시킨다. 그리고 그 시선의 궤도를 따라가다 보면, 결국 우리 자신 또한 누군가의 응시 속에서 하나의 작은 점으로 존재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우주비행사들이 바라보는 ‘지구를 향한 시선’이 중심에 놓이지만, 점차 그 시선은 인간 사회 전체를 조망하는 ‘신의 관점’으로 확장된다. 우주 속에서 본 지구는 하나의 완전한 구체이며, 그 안의 분열과 갈등, 정치적 소란은 단지 먼지처럼 미세한 흔적에 불과하다. 작품 속 인물들은 처음에는 뉴스와 정치, 사회 문제에 관심을 두지 않으려 한다. 그들에게 지구의 언어, 즉 정치와 이념의 말들은 더 이상 의미를 갖지 않는다. 그 소리들은 우주에서 들으면 낯설고 잡음처럼 들린다. 그러나 이 무관심은 단순한 회피가 아니라, 인간의 언어와 관념이 얼마나 한정된 시야 속에 갇혀 있는지를 드러내는 장치다. 하지만 ‘시선의 전환’은 바로 이 지점에서 일어난다. 그들은 지구를 바라보다가 문득 깨닫는다. 정치는 단순한 촌극이 아니며, 오히려 인간이 만든 거의 모든 질서와 행동을 결정짓는 거대한 힘이라는 것을. 처음에는 우스꽝스럽게만 보였던 정치의 언어가 어느새 지구 전체의 움직임을 지배하고 있음을 인식하게 된다. 우주에서 본다면 인간의 모든 행위가 무의미해 보이지만, 동시에 그 무의미함 속에서도 인간은 끊임없이 의미를 찾으려 한다. ‘왜 우리는 여전히 지구에 집착할까?’, ‘완전한 지구가 저기 있는데, 왜 파괴를 멈추지 못할까?’ 그들의 질문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인간 존재를 향한 근원적인 성찰로 이어진다. 인류의 우주에 대한 욕망은 탐구인가, 배은인가? 이 뜨거운 욕망이 우리를 영웅으로 만들지, 아니면 어리석은 존재로 남길지는 알 수 없다. 결국 그들의 시선은 또 한 번 뒤집힌다. 우주에서 본 지구에는 국경도, 깃발도, 분노도 없다. 정치와 전쟁, 이념과 분열의 언어들은 모두 사라지고, 오직 푸른 구체 하나만이 존재한다. 이 깨달음은 ‘시선의 이동’을 넘어, 인간의 관점 자체를 해체하고 재구성한다. 인간 중심의 좁은 시야에서 벗어나, 관찰자이자 피관찰자로서의 존재를 자각하게 만든다.
단순한 SF도, 우주에서 지구의 아름다움을 찬미하는 작품도 아니다. 오히려 언어의 이탈감을 통해 감각적 시점에서 존재론적 시점으로 독자의 관점을 서서히 이동시키는 독특한 작품이다. 서맨사 하비는 인체의 감각들 사이에 존재하는 위계를 명확히 드러낸다. 시각은 전면에, 청각은 가장 끝자락에 놓이며, 미각과 촉각은 거의 배제된다. 그래서 이 책을 읽을 때 시각에 집중하고 다른 감각을 잠시 눌러둔다면, 작가의 메시지가 더욱 직접적으로 다가온다. 『궤도』는 줄거리보다 감각과 사유로 이루어진 우주 서사시다. 명확한 서사나 긴장감은 없지만, 문장은 시처럼 몽글몽글하고 아름답다. 읽는 내내 마치 중력에서 풀려나 부유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기쁨과 불안, 황홀과 우울, 애정과 분노, 희망과 절망. 문장을 수집하는 사람에게는 특히 매력적이다. 작품은 국제우주정거장에서 마지막 임무를 수행하는 여섯 명의 우주비행사들의 하루를 그린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지만, 그 아무 일도 없음 안에서 오히려 경이감이 솟아난다. 지구는 거대하면서도 연약하고, 인간은 위대하면서도 우주적 관점에서는 무의미하다. 그래서 이 책은 지구에 대한 애가라기보다, 모닥불 앞이나 석양 아래, 혹은 아기의 눈을 들여다보며 인간이 하는 사색의 연장선으로 읽힌다. 우주비행사들은 지상에서 어떤 정치적 이념이나 욕망이 충돌하더라도 서로 우호적으로 지낸다. 그들은 서로의 오줌을 정화해 마시고, 서로의 숨을 순환시켜 호흡한다. 저자는 이를 통해 그들의 공간이 곧 지구의 축소판임을 암시한다. 우주에서의 무중력처럼, 지구가 쪼개져도 본질은 같다. 거대한 우주 속에서 지구 역시 손바닥만 한 존재일 뿐이다. 이 작품은 지구의 개념 또한 새롭게 정의한다. 지구는 본래 산소가 없는 행성이었고, 식물이 탄생하면서 서서히 산소로 오염되었다. 그 오염이 생명 탄생의 조건이 되었듯, 인간 또한 지구의 순환 속 한 요소에 불과하다. 저자는 인간이 지구를 파괴한다고 말하지만, 생태계의 기원을 거슬러 보면 인간 역시 지구의 정화 작용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지구적 관점에서 인간은 중심이 아니라 하나의 미세한 흐름이자 박테리아 같은 존재다. 소설의 마지막, 달로 향하는 궤도 진입 장면은 생명의 탄생을 연상시킨다. 양수 속 무중력에서의 탄생이 첫 번째 대기권 진입이라면, 그 장면은 다시 생명의 기원을 되짚는 상징적 장면이다. 아무 소리 없는 행성은 단일한 파동만을 내지만, 생명이 가득한 지구는 불협과 조화를 동시에 품은 오케스트라처럼 울린다. 『궤도』는 그 오케스트라의 소리를 듣게 하는 책이다. 우주선 창밖으로 보이는 지구의 압도적인 아름다움, 인류가 만든 국경과 갈등의 무의미함, 기후 변화와 생명의 연약함을 동시에 마주하게 한다. 도시의 불빛은 인류 문명의 위대함으로 반짝이지만, 동시에 그것은 지구의 몸살을 비추는 증거이기도 하다. 우리는 바람이 아니라, 그저 바람에 흩날리는 잎일 뿐임을 잊지 않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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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려 | 이*진 | 영어영문학과 | 도서: 친애하는 슐츠씨 독서 에세이: 당연하지 않은 세상에서 나도 또다른 슐츠씨가 되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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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연하지 않은 세상에서 나도 또다른 슐츠씨가 되고 싶다.
박상현의 『친애하는 슐츠씨』를 읽고 나는 오래된 전제를 다시 의심하게 되었다. 편견과 차별이란 말이 너무 거창해서, 우리는 일상에서 작동하는 편견을 보지 못할 때가 많다. 이 책은 일상의 작은 장면들을 통해 그 보이지 않는 선들이 어떻게 사람들의 삶을 재단하는지 차분하게 보여주었다. 나는 특히 책이 던지는 질문—‘너는 정말 자유로운가’—에 오래 머물렀다. 책은 여러 사례를 통해 편견의 구조를 살핀다. 백인 사회의 주류 기준을 따르기 위해 이름을 바꾸고 억양을 숨겨야 했던 언론인의 이야기, 여성복의 주머니가 사라진 역사, 디즈니의 거부 편지에 드러난 성의 고정관념, 그리고 법과 제도가 제때 약자를 보호하지 못했던 수많은 장면들. 그중에서도 프랭클린의 등장은 매우 상징적이었다. 해리엇 글릭먼의 끈질긴 요구가 찰스 슐츠에게 작은 변화를 불러왔고, 그 변화는 아이들의 무의식 속에 새로운 기준을 심었다. 나는 이 단순한 사실에서 실질적인 희망을 보았다. 개인적으로 이 책이 와닿은 이유는 내 경험과 맞물렸기 때문이다. 나는 대학원에 들어오기 전 항공사 지원을 준비했다. 공고에는 나이와 키 제한이 적혀 있지 않았지만, 면접 대기실에서와 면접장에서 체감한 건 다른 풍경이었다. 면접관의 질문은 능력에 관한 것이 아니라 ‘이미지’에 집중되었다. ‘좀 더 어려 보이면 좋겠다’는 말, ‘키가 조금 컸으면’이라는 농담은 그저 농담으로 들리지 않았다. 그 순간 나는 직업의 전문성보다 외형이 먼저 판단되는 장면을 보았다. 경쟁자는 사실 동료가 아니라, 회사가 설정한 미적 기준이었다. 그 사실을 마주한 뒤로 나는 진로를 바꿀 결심을 하게 되었고, 그 경험은 내 인식의 전환점이 되었다. 또 다른 경험은 더 직접적이었다. 자전거 사고로 다리를 다쳐 기브스를 하고 다닌 몇 달은 나를 완전히 달리 보게 했다. 엘리베이터 없는 건물 앞에서 멈칫할 때 느껴지는 타인의 표정, 버스에서 오래 오르내릴 때의 조급한 한숨, 식당에서 더 넓은 자리가 필요하다는 이유로 받는 짜증 섞인 눈빛들. 그 짧은 기간 경험만으로도, 나는 장애가 단지 육체적 불편을 의미하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사회의 시선이 어떻게 누군가를 ‘불편한 존재’로 규정하는지, 그리고 그 규정이 사람의 자존을 얼마나 쉽게 흔드는지를 체감했다. 완치된 이후에도 절뚝이는 걸음에 사람들이 마치 영구적 장애를 전제하는 태도를 보였을 때 느낀 모멸감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이런 개인적 경험은 책에 소개된 주디 휴먼의 사례와 연결되어 더 무겁게 다가왔다. 주디는 소아마비 이후 휠체어로 생활한다는 이유로 교사 자격을 거부당했다. ‘화재 시 학생을 대피시킬 수 없다’는 근거는 언뜻 합리적으로 보였지만, 그 이면에는 장애를 결함으로 보는 사회적 전제가 숨어 있었다. 결국 그는 장애인 권리를 위해 싸웠고 결국 제도 개선을 이끌어냈다. 마틴 루서 킹의 말처럼, 선의가 있으나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는 태도는 노골적 거부보다 더 큰 좌절을 낳는다고 이 책은 말한다. 나는 책을 읽으면서 여러 장면에서 멈춰 섰다. 디즈니의 거절 편지에 담긴 일화는 단순한 한 장의 기록이 아니라 문화의 틀을 드러내는 망치였고, 백설공주와 난쟁이들의 이미지가 여성에게 무의식적으로 투사하는 기준은 어른이 된 지금도 여전히 내 주위를 맴돈다. 창작의 자리에서 배제되는 여성, 묘사의 대상이 되어 소비되는 여성의 모습은 예술의 역사뿐만 아니라 일상의 광고와 상품 배치 속에서도 재생산된다. 이런 시각은 사람들이 ‘무심코’ 선택하는 많은 것들—어떤 직업을 권하는지, 어떤 외모를 덮어주는지, 어떤 발언을 묵인하는지—에 영향을 준다. 코드 스위치라는 말은 특히 강렬했다. 언어와 억양, 이름조차 바꿔야만 소통의 문을 열 수 있다면 우리는 무엇을 잃는가. 언어는 단지 소통의 도구가 아니라 정체성의 일부이다. 그런데 주류의 요구에 맞추어 그것을 포기하라고 강요하는 것은, 단지 채용 과정의 불공정함을 넘어서 존재 자체를 수정하라는 요구이다. 이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나는 학계에서도 타자의 담론을 어떻게 수용하는가를 다시 묻는다. 연구자로서 우리는 타인의 언어를 재현할 때 얼마만큼의 권한을 갖고 있는가. 나는 대학원 생활 속에서 겪은 작은 불편들이 책에서 말하는 더 큰 문제와 연결됨을 느꼈다. 세미나에서 내 의견이 자주 끊기거나, 회의에서 무심한 질문에만 응답하는 분위기, 그리고 동료의 농담 속에 은근히 깔린 선입견들. 그 순간들은 누적되어 누군가를 밀어내는 구조를 만든다. 그것이 바로 구조적 차별의 가장 미세한 단위다. 그 단위를 하나씩 모아내지 않으면 큰 제도는 바뀌지 않는다. 또한 이 책은 반(反)패러다임적 사유를 요구한다. 단지 피해를 호소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제도의 빈틈을 찾아 메꾸고, 불합리한 습관을 규범으로 굳지 못하게 하는 실천을 해야 한다. 예를 들어, 채용 공고의 문구를 바꾸는 일, 면접관 교육을 의무화하는 일, 장애인 접근성을 한 사업장의 조건으로 삼는 규정들. 이런 제도적 변화는 작은 불편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 문화에서 출발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몇 가지 구체적 실천을 결심했다. 수업에서 인용하는 사례를 점검해 성별·인종·계층의 편향이 없는지 살피고, 회의에서 누군가 목소리를 잃을 때 그 발언을 연결해 주는 역할을 자청하겠다. 또한 동료들과의 비공식 자리에서 편견을 ‘농담’으로 넘기지 않도록 지적하고, 필요하면 문제를 명확히 지적하는 연습을 하겠다. 작지만 반복되는 실천이 없으면 말은 공허해진다. 책은 또한 우리가 ‘나는 괜찮다’고 말할 때 진정으로 괜찮은지 묻는다. 단지 악의를 품은 소수만이 차별을 만들지 않는다. 대다수의 미온적 수용과 무심한 동의가 차별을 연장한다. 내가 아무렇지 않게 지나친 농담 하나가 누군가에게는 큰 상처였을지 모른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불편을 느끼면 곧바로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무엇이 문제였는지를 스스로 정리하려 노력한다. 프랭클린의 등장은 작지만 강력한 상징이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접하는 문화적 이미지 하나하나가 그들의 세계관을 만든다. 그런 점에서 창작자와 미디어는 도덕적 책임을 가진다. 나는 앞으로 텍스트를 생산할 때, 관객의 다양성을 고려하는 태도를 잊지 않으려고 한다. 이것은 단지 윤리적 선택이 아니라, 더 넓은 사회적 효과를 낳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나는 이 책이 준 교훈을 이렇게 정리하고 싶다. 편견은 거대한 운명이나 개인의 악의가 아니라, 습관과 구조의 문제다. 그렇기에 우리는 습관을 바꾸고 구조를 점검하는 일을 늦출 수 없다. 그리고 그 일은 영웅 한 사람의 몫이 아니라, 우리 각자의 몫이다. 오늘 내가 한 번 더 누군가를 배려하고, 오늘 내가 한 문장 더 불평을 말하고, 그것을 반복할 때 비로소 우리는 조금씩 다른 세상에 도달할 것이다. 나는 그 반복의 한 조각이 되고 싶다. 나는 또한 연대의 범위를 확장해야 한다고 느꼈다. 차별을 경험하는 이는 단지 한 집단이 아니라 다양한 교차성을 가진 사람들이다. 여성인 동시에 소수자이거나, 장애가 있고 동시에 경제적으로 취약한 이들이 받는 차별은 단순 합산이 아니다. 그들의 경험은 복합적이며, 이를 이해하지 못하면 제도적 해결책도 표층적일 뿐이다. 대학원 연구자로서 나는 교차성의 관점으로 문제를 읽고자 하는 노력을 더 기울일 것이다. 교육 기관의 역할도 중요하다. 학교는 편견을 재생산하는 대신 비판적 사고를 훈련시켜야 한다. 교과 과정에서 다양한 목소리를 포함시키고, 학생들이 직접 사회적 편견을 관찰하고 보고하는 과제를 설계하는 것은 매우 효과적이다. 또한 교직원 대상 인식 개선 워크숍을 정기적으로 시행해 일상의 언어와 태도가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성찰하게 해야 한다. 미디어 역시 막강한 영향력을 갖는다. 방송과 뉴스, 광고는 소비자에게 세계의 표상을 제공한다. 그 표상이 다양하지 않다면, 우리 세계의 상상력도 제한된다. 창작자와 기획자는 의도적으로 다양한 얼굴과 목소리를 담아야 한다. 그 일은 순간의 용기와 꾸준한 설득을 필요로 한다. 이제 나는 몇 가지 구체적 약속을 한다. 하나, 누군가의 발언이 묵살될 때마다 그 이야기를 다시 전하겠다. 둘, 회의나 토론에서 목소리가 작아진 사람을 위해 발언 기회를 만들겠다. 셋, 수업 자료에서 편향적 사례를 발견하면 교수님과 상의해 대체 자료를 제안하겠다. 작은 약속이지만, 그것이 쌓이면 보이지 않는 규범을 바꾸는 힘이 될 것이다. 미래 세대에게 물려줄 세계를 생각해볼 때가 있다. 로봇이 늘고 기술이 발달해도, 인간의 태도와 관점이 바뀌지 않으면 차별은 다른 옷을 입고 돌아온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기술을 믿기 전에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다. 나는 연구와 교육, 일상에서의 실천을 통해 조금씩 그 변화를 만들 것이며, 언젠가 누군가가 내 앞에서 안도의 숨을 쉬는 모습을 보고 싶다. 그때 비로소 ‘당연하지 않은 세상’이 조금은 ‘당연한’ 세상으로 변했음을 알게 될 것이다. 나는 이 글을 읽는 누구에게도 묻고 싶다. 당신은 지금 어떤 편지를 쓰고 있는가? 작은 불편을 지나치지 말고, 눈을 마주치고, 작은 행동으로 연대를 시작해달라. 우리의 조그만 용기들이 모여, 결국은 큰 틈을 만들 것이다. 나는 오늘도 작은 습관부터 바꿀 것을 약속한다. 말 한마디, 자리 한 번 양보하는 행동이 결국 세상을 바꿀 것이다. 이 약속은 사소하게 보이지만 나는 지키겠다. 그리하여 나또한 또 한명의 친애하는 슐츠씨가 되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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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려 | 이*준 | 교육학과 | 도서: 생물의 왕국 독서 에세이: 인간 중심의 좌표를 넘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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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물의 왕국’과 함께 걷는 공존의 윤리: 인간 중심의 좌표를 넘어
우리가 발 딛고 사는 이 행성에서 ‘왕국’이라는 단어가 상징하는 권위와 지배는 오랫동안 인간에게 국한되어 왔다. 역사적으로 인간은 자신들의 지성과 문명을 근거로 생명체 계층 구조의 최상위에 군림하며 자연을 통제하고 개발하는 정당성을 부여해왔다. 그러나 우리가 무심히 지나치는 숲의 흙 속, 바다의 깊은 심연, 심지어 우리 몸의 미세한 환경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지배를 비웃듯 광활하고 복잡하게 펼쳐진 생명의 실체가 바로 이 ‘생물의 왕국’이 독자에게 선사하는 경이로운 깨달음이다. 이 책은 단순히 생물학적 지식의 나열을 넘어, 지구 생태계의 복잡다단한 연결망과 그 속에서 비인간 생명체가 지닌 고유한 논리 및 내재적 가치를 심층적으로 조명한다. ‘생물의 왕국’은 독자에게 익숙했던 인간 중심적 세계관, 즉 르네상스 이래 서구 문명이 확립해 온 인간 우월주의의 좌표에 근본적인 균열을 일으킨다. 인간이라는 종이 지닌 독특성과 ‘이성’을 강조해온 오랜 사유의 전통 대신, 저자는 미생물부터 거대 포유류에 이르는 모든 생명체가 각자의 생존 전략과 진화적 성공을 통해 구축한 독립적인 ‘왕국’을 제시한다. 이는 인간의 시선과 단기적인 필요에 의해 정의되어 온 자연의 존재 방식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하게 만드는 지적인 충격이다. 자연을 이용 가능한 자원의 집합으로 보던 프레임에서 벗어나, 생명체를 각자의 삶의 방식을 가진 동등한 주체로 인식할 때 비로소 진정한 생태적 감수성이 발현된다. 본 에세이는 ‘생물의 왕국’이 제시하는 생물학적 통찰을 바탕으로, 어떻게 우리가 인간 중심주의라는 낡은 좌표를 해체하고 상호 의존적이며 윤리적인 공존의 세계관으로 나아갈 수 있는지 탐구하고자 한다. 특히, 비인간 생명의 지혜를 재인식하고, 인간의 행위가 지구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인류세(Anthropocene) 시대의 생태적 위기 속에서 우리의 책임과 역할을 재정립하는 데 초점을 맞출 것이다.
‘생물의 왕국’의 가장 강력한 메시지는 인간이 생명체 계층 구조의 정점에 있다는 오해, 즉 진화의 최종적 승리자라는 오만함을 불식시키는 데 있다. 책은 지구의 46억 년 진화 역사 전체를 통틀어 인간이 차지하는 시간과 공간이 지극히 미미하며, 생존 기간, 적응력, 생태계 기여도 면에서 미생물이나 곤충 같은 ‘하등 생물’이라 치부되던 종들이 훨씬 더 위대한 성공을 거두었음을 논증한다. 예를 들어, 바퀴벌레나 상어와 같이 수억 년 동안 환경 변화에도 불구하고 굳건히 살아남은 생명체들의 존재는, 최근 수백 년간 기술적 성취에 도취된 인간의 생존이 얼마나 불안정하고 예측 불가능한 것인지를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특히, 저자는 곰팡이나 균류가 구축하는 거대한 지하 네트워크, 즉 마이코리자(Mycorrhiza)와 같은 공생 관계를 통해 생태계의 복잡한 커뮤니케이션과 영양분 조달이 이루어지는 방식을 상세히 보여준다. 이 지하의 ‘정보 고속도로’는 수많은 생명체의 영양분을 조달하고 토양을 순환시키며, 이는 인간 문명이 이룩한 어떤 통신 기술이나 공학적 성취보다도 근원적인 지구 시스템 유지의 지혜와 안정성을 담고 있다. 이러한 분산화된 생명의 네트워크는 인간의 두뇌 중심적, 중앙 집중식 지능 개념으로는 포착할 수 없는 ‘비인간 지능’의 놀라운 예시를 제공한다. 저자는 또한 각 생물 종이 환경과 상호작용하며 발전시킨 독특한 생존 전략을 세밀하게 묘사함으로써, 모든 생명체가 그 자체로 완전하고 정교한 ‘생명의 논리’를 구현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침팬지의 도구 사용, 돌고래의 복잡한 사회적 소통, 새들의 정교한 구애 의식은 물론, 식물의 정교한 화학적 방어 메커니즘과 미생물의 퀀텀 감각 능력까지, 인간의 ‘이성’과는 다른 형태의 ‘지능’과 ‘지혜’가 생물의 왕국 전체에 편재해 있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비인간 생명의 복잡성을 인정하는 것은 단순히 자연에 대한 지식을 넓히는 것을 넘어, 인간의 지적 오만함, 즉 인간만이 이 세계를 이해하고 통제할 수 있다는 오도된 믿음을 내려놓는 윤리적 행위의 출발점이 된다. 이 과정에서 인간은 스스로를 왕국의 지배자가 아닌, 복잡하고 섬세한 생명의 그물망을 이루는 ‘수많은 종 중 하나’로 겸허하게 재정의하게 되며, 이는 지속 가능한 미래를 위한 가장 중요한 첫걸음이다. III. 본론 2: 비인간 생명의 지혜와 상호 의존성의 인식 책은 생물의 왕국이 개별적인 생명체들의 고립된 경쟁장이 아니라, 광범위한 상호 작용과 협력에 의해 유지되는 역동적인 공동체임을 강조한다. 특히 공생(Symbiosis), 기생(Parasitism), 분해(Decomposition)와 같은 생태적 관계에 대한 심도 있는 탐구는 생명의 진정한 힘이 개별 종의 우월성이 아닌 상호 의존성에서 비롯됨을 역설한다. 예를 들어, 식물이 광합성을 통해 태양 에너지를 포획하고, 이 에너지가 먹이사슬을 타고 흐르며, 최종적으로 미생물에 의해 유기물이 무기물로 분해되어 다시 토양으로 돌아가는 완벽한 순환의 과정은 생태계의 정수이자 완벽한 ‘지속 가능성’ 철학을 보여준다. 이러한 상호 의존성의 패턴은 비인간 생명체가 지닌 위대한 ‘지혜’의 증거로 해석될 수 있다. 식물은 뿌리를 통해 휘발성 유기 화합물(VOCs)이라는 화학적 신호를 주고받으며 해충의 공격에 대한 위협을 공유하고 공동 대응하며, 개미나 벌 군집은 고도로 분업화되고 유연한 사회 구조를 통해 효율성을 극대화한다. 심지어 인간에게 해롭다고 여겨지는 바이러스와 같은 미소 생물조차도 숙주와의 끊임없는 상호작용을 통해 유전자 정보를 교환하고 진화의 속도를 조절하며 생명의 다양성에 기여하는 복합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이들은 인간 사회가 끊임없이 추구하는 ‘최적화’와 ‘효율성’의 원리를 이미 수억 년 전부터 최소한의 에너지와 폐기물로 순환되는 생명의 방식으로 체화해 온 것이다. 이와 달리, 인간 문명이 구축한 선형적인 생산-소비-폐기 시스템은 자연의 순환적 지혜와 정면으로 배치된다. 인간은 자연으로부터 자원을 ‘추출’하고, 폐기물을 ‘버리는’ 방식으로 자연을 하나의 무한한 쓰레기통이자 원료 공급처로 간주해왔다. 독자들은 이러한 비인간 생명의 순환 논리를 이해함으로써, 인간 사회가 직면한 환경 오염, 자원 고갈, 경제적 불평등과 같은 난제들의 해법을 자연의 회복력 있는 지혜 속에서 찾을 수 있다는 희망을 발견하게 된다. 자연은 착취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삶의 방식을 배워야 할 위대한 스승이자 공존해야 할 동반자로 자리매김하며, 공존의 경제학적 모델을 제시한다.
‘생물의 왕국’이 그려내는 장엄하고 섬세한 생명의 태피스트리는, 동시에 인간의 무분별한 활동으로 인해 이 왕국이 얼마나 심각한 위협에 처해 있는지를 첨예하게 드러낸다. 현대는 인류세, 즉 인간의 활동이 지구 시스템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지질 시대로 명명되었으며, 화석 연료 사용으로 인한 급격한 기후 변화, 서식지 파괴로 인한 종의 대량 멸종, 플라스틱과 질소 순환의 교란 등은 왕국의 근간을 흔드는 명백한 징후이자 인간 행위의 직접적인 결과이다. 책이 제시하는 비인간 생명의 내재적 가치를 내면화하는 것은, 단순히 지적인 만족을 넘어 윤리적 책임의식을 동반한다. 인간이 스스로를 왕국의 구성원 중 하나로 인식할 때, 생태적 위기는 더 이상 ‘자연’이라는 외부의 문제가 아닌, ‘우리의 생존 기반’과 직결된 문제로 다가온다. 우리가 존중해야 할 대상은 멸종 위기에 처한 희귀종에 대한 ‘보존’ 노력뿐만이 아니라, 토양을 살리고 물을 정화하며 우리가 숨 쉴 산소를 생산하는 무수한 평범한 생명체들의 시스템 전체이다. 이들의 파괴는 결국 인류 문명의 지속 가능성을 담보할 수 없게 만든다. 따라서 ‘생물의 왕국’이 촉구하는 윤리적 실천은 거창한 환경 운동이나 정부의 정책 변화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우리의 일상적인 소비 패턴, 에너지 사용 방식, 도시 계획, 심지어 금융 투자의 결정에 이르기까지, 모든 선택이 생명의 그물망에 미치는 영향을 숙고하는 섬세하고 시스템적인 태도가 필요하다. 이는 소위 ‘깊은 생태학(Deep Ecology)’의 관점을 수용하여, 자연을 인간의 목적을 위한 도구적 수단이 아닌, 그 자체로 온전하고 내재적 가치를 지닌 존재로 대우하는 것이다. 왕국을 위한 윤리적 실천은 인간의 윤리적 의무인 동시에, 인간 스스로의 생존권과 삶의 질을 보장하는 가장 현명한 투자임을 깨달아야 한다. 생태계의 건강성을 회복하는 것은 미래 세대에게 물려줄 수 있는 가장 소중한 유산이며, 이는 인간 사회의 지속 가능성을 담보하는 유일한 길임을 책은 명확하게 제시하고 있다.
‘생물의 왕국’은 방대하고 정교한 생물학적 지식을 통해 우리에게 근본적인 세계관의 전환을 요구한다. 이 책을 읽는 경험은 인간 중심주의라는 좁은 시야에서 벗어나, 생명 전체의 광활하고 경이로운 파노라마를 목격하는 지적 순례의 여정이었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인간의 우월성을 해체하고, 미생물부터 거대 생명체까지 비인간 생명체가 수억 년 동안 발전시켜 온 순환과 공존의 지혜를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방법을 배웠다. 또한, 인간의 지배적 행위가 지구 시스템을 위협하는 인류세라는 위기의 시대에 우리가 져야 할 생태적 책임이 얼마나 막중한지를 자각했다. 결국 ‘생물의 왕국’은 단순한 과학 교양서가 아니라, 공존의 시대로 나아가기 위한 인류의 새로운 좌표를 제시하는 윤리 교과서이자 실천 지침서이다. 왕국의 일원으로서 인간은 더 이상 자연을 정복하거나 착취의 대상으로 바라보아서는 안 되며, 모든 생명체가 지닌 내재적 가치를 존중하고 그들의 생존권을 보장하는 것이 우리의 가장 중요하고 근원적인 윤리적 의무임을 깨달아야 한다. 이는 거대한 생명의 연결망 속에서 우리의 위치를 재정립하고, 자연의 시스템을 모방하여 우리 사회의 지속 가능성을 확보하는 일이다.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우리는 생물의 왕국이 영원히 지속될 수 있도록 섬세하고 책임감 있는 자세로 우리의 삶과 문명을 재구성해야 한다는 무거운 과제를 부여받는다. 이 책이 제시하는 생물학적 지식에 기반한 공존의 윤리를 실천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자신과 미래 세대가 번영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며, 진정한 생명의 왕국을 완성하는 길임을 확신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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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려 | 이*민 | 교육학과 | 도서: 친애하는 슐츠씨 독서 에세이: 일어버린 온기를 되찾기 위하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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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사랑보다 반목이, 배려보다 이기심이 팽배해져 가는 사회를 살아간다. 사회 곳곳에 차별이 만연하고 연대의 가치는 점점 희미해져 간다. 이러한 병폐를 목격하며,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거대한 문제에 번번이 주저앉는다. 온기를 잃어가는 사회에서, 차별에 대한 교육적인 접근을 어떻게 해야 할까? 교육이 회복해야 할 인간적인 시선은 무엇일까? 사회 교사를 꿈꾸는 교육학도로서 막연한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친애하는 슐츠 씨》를 읽게 되었다.
이 책은 역사적인 사건들을 친절하게 풀어준다. 그러나 친절한 말투와는 다르게 우리의 행동들을 다시금 성찰하게 만들며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차별이 무조건 악의에서 비롯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우리 모두가 어쩌면 차별을 해왔고 행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 책을 통해 인간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예비교원으로서 후에 어떤 교육자가 되어야 하는지 깊이 생각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익숙함이라는 죄 《친애하는 슐츠 씨》가 가장 마음을 아프게 찌르는 지점은 차별이 거창한 악의가 아니라, 우리가 무심히 반복하고 익숙해졌던 습관 속에 얼마나 잔인하게 숨어 있는가 하는 사실이다. 책은 인종주의자나 혐오자를 비난하는 대신, 선의를 가졌거나 아예 의식하지 못했던 무지에서 차별이 비롯된다고 말한다. 책이 펼쳐 보이는 ‘여자 옷과 주머니’의 역사는 가장 분명한 증거다. 여성복의 주머니가 작거나 없는 것이 단순히 유행의 문제가 아니라, 여성을 노동과 실용으로부터 격리하고 ‘바라봐야 할 대상’으로 한정하려는 오랜 사회적 시각이 반영된 결과라는 통찰은 큰 충격으로 다가온다. 주머니가 없다는 것은 여성의 주체적인 활동을 암묵적으로 부정당하는 잔인한 상징이다. 나는 이 무심한 관습이 수백 년간 이어져 왔다는 사실 앞에서, “원래 그렇다”는 말이 더욱 폭력적으로 느껴졌다. 현상을 방관하고 상황을 제대로 인지하지 않으려는 태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알게 되었다. 더 나아가 ‘완톤 폰트’의 사례는 시각적 상징마저 무심한 반복 속에서 편견이 굳혀지는 과정을 보여준다. 아시아 문화는 다 이렇다는 무지 속에서 유통된 폰트는, 문화와 역사를 깊이 이해하려 하지 않는 인류의 지적 게으름과 안일함이 어떻게 차별을 재생산하는지 보여주는 섬뜩한 사례다. 인류가 지금까지 쌓아온 문화유산을 학습하는 것은 물론 큰 의미가 있다. 그러나 그것이 절대불변의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우리 사회에서 소외된 구성원들을 배려하고 함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구성원들 스스로가 일상에서 ‘과연 이것이 맞는 것인가?’를 되물으며 성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의 교육은 어떠한가? 교과서 속의 지식을 진리라고 당연히 여긴다. 그렇기에 의문을 던지는 교육보다 기계처럼 습득하는 방식으로 행해진다. 무지에서 비롯된 인류의 차별들은 어쩌면 이러한 잘못된 교육에 기인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깊은 회의감을 품게 된다.
사회의 시선이 규정하는 문제 책이 보여주는 무심함은 곧 인간적인 상상력의 실패, 즉 타인의 입장이 되어보지 못하는 공감 능력의 부재와 직결된다. 특히 장애와 결핍 앞에서 이 무심함은 폭력적인 관습으로 변질된다. 나는 교사로서 연대와 배려의 온기를 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학교 현장에서 학생들이 처한 상황을 이해하고 돕고자 노력해야 한다고 믿는다. 우리 사회는 불평등을 개인의 노력으로 전가하며 차별을 심화하고 갈등을 촉발한다. 심지어 교사마저도 학교 현장에서 공부를 못하는 학생들에게 노력이 부족하다는 시선을 보낼 때가 많다. 예비 교원들이 교육사회학을 공부하며 불평등에 대해 깊이 배우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와 관련하여 장애인 운동가 주디 휴먼의 이야기는 나의 인식이 전환되는 기회가 되었다. “장애는 사회가 환경을 제공하는 데 실패할 때만 비극이 된다”는 그녀의 주장은, 장애 그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 구조와 문화가 장애를 문제로 만든다는 것을 강조한다. 올해 교생실습에서 고등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장애인의 이동권 시위를 통해 바라본 기본권 보장’이라는 주제로 수업을 진행했을 때, 수업 준비를 하며 장애인이 사회생활에 많이 참여하지 못하는 이유는 불편한 신체 때문이 아니라 이동하기 불편한 사회의 인프라 때문임을 알게 되었다. 특히, 선진국의 사례를 보면, 교통 인프라가 잘되어 있어 장애인의 사회 참여 비율이 확연히 높은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경험을 통해 장애인의 불편과 불이익은 사회가 규정하는 것임을 깨달았다. 그래서 교생실습을 할 때도, 이러한 인식의 전환을 학생들이 가질 수 있게끔 노력했다. 그러나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학생들도 있었다. 장애인의 이동권 보장을 위해 막대한 재정을 투입하는 것에 동의하지 못하는 학생들을 보면서, 사회가‘장애’를 개인이 감수해야 할 불편함 정도로 치부하는 것이 어떻게 재생산되는지, 그 파급효과가 얼마나 큰지 몸소 느꼈다. 동시에 그런 거대 담론을 생산하는 사회 속에서 성장하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어떻게 사회를 바르게 바라볼 수 있도록 교육할 수 있을까 하는 깊은 고민이 남았다.
작은 변화의 힘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무지와 악의의 역사 속에서도 변화가 어떻게 가능한지 보여주는 데 있다. 변화를 이끈 이들의 태도는‘성숙한 대화’를 선택하는 데 있었다. 찰스 슐츠와 해리엇 글릭먼의 편지에서 슐츠는 흑인 캐릭터(프랭클린)를 추가해달라는 요청에 대해 유보적인 태도를 취했지만, 결국 성숙한 대화를 통해 작은 변화가 일어났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구호나 급진적인 투쟁이 아니더라도, 쉼 없이 노력해서 고쳐나가려는 사소한 태도가 큰 변화로 이어진다는 메시지를 보게 된다. 주디 휴먼이 “장애는 사회가 환경을 제공하는 데 실패할 때만 비극이 된다”라고 선언하며 문제의 주체를 개인에서 사회로 전환했듯, 나는 학생들에게 권리가 선언이 아닌 작동의 문제임을 끊임없이 물을 것이다. 나아가 시몬 바일스와 오사카 나오미가 보여준 ‘정신 건강을 수호하는 용기’는 나에게 희생 강요의 관습을 거부할 용기를 준다. 교사는 학생들에게 인내와 성취만을 강요하는 대신, 멈추는 법과 회복하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 인간적인 존엄이 그 어떤 성취나 집단의 영예보다 우선한다는 중요한 가치를 교실의 가장 중요한 가치로 삼을 것이다. 책을 읽으며 장래에 교사가 되어,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가 하는 질문과 끊임없이 연결 짓고자 했다. 낙인과 편견의 희생양이 된 학생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 교사는 그들의 고통을 평가하는 심판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오히려 학생이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않고 드러낼 수 있는 안전한 공간을 마련해주는 인간적인 통로가 되어야 한다.
잃어버린 사회의 온기를 되찾기 위해서 결국 《친애하는 슐츠 씨》가 내게 선물한 것은 거창한 감동의 문장이 아니라 인류의 무심함에 대한 깊은 성찰과 일상의 태도이다. 교육을 포함한 사회의 문제는 내 삶이 망가지는 것에 대한 문제이며, 이 고리를 끊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본질적인 책무이다. 한 인간으로서 어떤 삶을 살 것인지, 교육자로서 어떤 교육을 행해야 하는지 끊임없이 성찰하면서 책을 읽어 내려갔다. 선의나 무지에서 비롯되는 차별이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할 것이다. 교실에서 누군가의 배경을 근거로 능력을 재단하지 않고,“원래 그렇다”는 말로 토론을 닫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책에 등장한 인물들을 통해 작은 변화의 위대함을 다시 믿어 보기로 했다. 이로써 내게 주어진 역할은 분명해졌다. “원래 그렇다” 앞에 마침표를 찍고 의문을 덧붙이는 것, 그리고 의문을 제기할 줄 아는 학생을 기르는 것. 눈에 잘 띄지 않는 작은 움직임이 미래의 책에 기록될 역사로 이어지기를, 그리고 우리 사회가 잃어버린 연대·배려·사랑의 온기를 되찾기를 소망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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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려 | 정*정 | 한의학과 | 도서: 일할 사람이 사라진다 독서 에세이: 사람 그리고 냉철한 현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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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할 사람이 사라진다』는 단순히 인구가 줄어든다는 통계적 사실을 넘어, 그 변화가 한국 사회의 ‘노동시장’이라는 핵심 동력원에 어떤 구체적이고 치명적인 충격을 가할지 엄밀하게 분석한 역작이다. 이 책은 막연한 ‘인구 절벽’의 공포를 걷어내고, 인력 수급의 불균형이 특정 산업과 직종을 중심으로 어떻게 파열음을 낼지 경제학적 관점에서 날카롭게 해부한다. 저자는 생산연령인구의 총량적 감소가 생각보다 완만할 수 있다는 희망적인 부분을 언급하면서도, 문제는 ‘누가’ 사라지는가에 있음을 강조한다. 인구 감소가 균형 있게 일어나지 않고, 저학력 기능인력, 단순 운송업, 건설, 요식업, 그리고 무엇보다 돌봄 및 의료 서비스 종사자와 같이 사회의 기초를 유지하는 데 필수적인 분야의 젊은 노동력이 급격히 사라지는 불균형이야말로 한국 경제의 지속 가능성과 사회 전체의 질서를 위협하는 본질적인 위기라는 것이다.
특히 젊은 노동력의 공백을 여성과 고령 인구의 노동시장 참여로 메울 수 있다는 낙관론에 대해, 저자는 이들의 노동 투입 증가가 일시적인 완충재가 될 수는 있으나, 임금 수준, 요구되는 직종, 그리고 생산성 측면에서 한계가 명확하며, 단순히 정년을 연장하거나 은퇴 시기를 늦추는 식의 임시방편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구조적인 문제임을 조목조목 지적한다. 고령 인구의 증가는 특정 시점 이후에는 생산성 증가를 상쇄하고 오히려 의료비 및 사회 지출 증가로 이어져 재정적 부담을 가중시키는 악순환을 초래할 수 있음을 경고한다. 저자는 고령화 시대에 노동 투입을 늘리는 것이 오히려 노동생산성이나 일자리의 질을 저해할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노인 세대 내부에서도 건강과 학력에 따라 노동 능력과 의지가 천차만별이기에 일괄적인 정년 연장보다는 개개인의 역량과 수요에 맞춘 유연한 고용 시스템이 절실함을 피력한다. 이미 다가온 미래로서 의료 공백과 영유아 및 노인 돌봄의 붕괴 가능성을 경고하며, 가까운 미래에 응급 환자를 치료할 의사나 신뢰할 수 있는 보육 교사를 찾기 어려워지는 상황이 단순한 불편을 넘어 사회 안전망의 근간을 흔들 것임을 역설한다. 이 위기를 돌파하기 위한 유일한 길은 기술 혁신을 통한 노동 생산성의 획기적인 개선을 최우선 과제로 삼고, 이와 병행하여 경직된 노동시장의 유연화, 그리고 나이, 성별, 국적에 관계없이 인력을 수용하는 다양하고 포용적인 인력 수급 시스템 구축에 있음을 강조한다. 이는 마치 급변하는 조류 속에서 배의 키를 어디로 돌려야 할지 알려주는 나침반과 같은 역할을 하며, 인구 위기가 단순히 ‘사람이 부족한’ 문제가 아닌, ‘구조와 시스템을 혁신해야 하는’ 기회이자 명령임을 천명한다. 대학원생으로, 그것도 불확실성이라는 짙은 안개 속을 헤쳐나가는 전문 인력으로서 이 책을 읽는 경험은 단순한 지적 자극을 넘어선다. 당장 눈앞의 연구 주제에 매몰되어 있을 때, 이 책은 내가 속한 노동 시장의 미래 지형도를 거대한 스케일로 펼쳐 보여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인구 감소가 곧 만성적인 인력 부족으로 이어질 것이라 생각하지만, 책에서 지적하듯 인력 부족은 범용적인 현상이 아니라 사회복지, 건설, 요식업 등 특정 부문에서 폭발적으로 발생할 문제다. 지식 집약적인 분야에서 전문 학위를 준비하는 나의 위치는 표면적으로는 당장 일할 사람이 사라지는 ‘위기 직종’의 범주에서는 다소 비껴나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 안도감은 매우 일시적이고 위태롭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의 연구와 지식 생산 활동 자체가 노동 시장의 ‘총량’이 줄어드는 상황에서 남아 있는 노동력 전체의 생산성을 획기적으로 개선해야 한다는 국가적 요구에 대한 직접적인 응답이기 때문이다. 대학원 생활은 끊임없이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고, 기존의 방식을 혁신하며, 최소의 인풋으로 최대의 아웃풋을 내는 ‘생산성’ 극대화 훈련 과정 그 자체이다. 예를 들어, 내가 속한 분야에서 논문 한 편을 발표하기 위해 이전보다 더 복잡한 데이터 처리 기술과 분석 기법을 동원해야 한다는 압박감은, 이 책이 말하는 ‘생산성 부채’를 젊은 세대가 짊어지고 있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게 한다. 우리는 인공지능, 빅데이터, 첨단 기술을 활용하여 1인당 생산량을 폭발적으로 늘려야 하는 숙명을 가지고 있으며, 이 책은 나의 학업적 고군분투가 단순히 개인의 경력 개발을 넘어, 인구 감소 시대에 한국 사회가 요구하는 질적 인적 자본을 생산하는 과정임을 재확인시켜 준다. 특히 저자가 강조하는 ‘노동 생산성의 비약적 발전’이라는 해법은, 지금 내가 밤을 새워 코드를 짜고 논문을 쓰는 이 행위가 곧 미래의 노동력 절벽을 막는 기초 공사와 같다는 숭고한 의미를 부여함과 동시에, 그 부담감이 얼마나 막중한지를 실감하게 한다. 학위 과정 중 주말 없이 연구실에 매달려야 하는 생활은 필연적으로 개인의 ‘돌봄’과 ‘생활 노동’ 영역을 외부 서비스에 의존하게 만든다. 간단한 식사마저 배달 앱에 의존하고, 연구실 청소나 환경 관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가 많다. 이런 사소한 경험들조차 노동력이 사라져가는 미래의 축소판처럼 느껴진다. 만약 우리가 졸업 후 전문직으로 진입한다 해도, 나의 소중한 연구 시간을 확보해주는 배달 라이더, 청소 노동자, 혹은 미래의 간병인이 고령화로 인해 사라진다면, 나의 고생 끝에 얻은 높은 생산성도 결국 유지될 수 없을 것이다. 더 나아가, 저학력/저숙련 인력의 감소와 고학력 인력의 증가는 필연적으로 노동 시장의 이중 구조 심화와 소득 불균형 확대로 이어질 것이라는 전망은 나의 미래에 대한 냉정한 윤리적 성찰을 요구한다. 내가 고생 끝에 진입할 고임금 전문직 시장은 안정적일지 몰라도, 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필수 서비스 노동자가 사라져 그들의 처우가 개선되지 않는다면, 이는 계층 간 격차를 더욱 벌려 사회적 불안정성을 극대화할 것이다. 책에서 언급했듯이, 고학력 부동산 중개인은 늘고 저학력 운전기사는 급감하는 현상은 이미 시작된 불균형의 징후이다. 이는 곧 필수 노동력의 임금이 폭등하거나, 서비스의 질이 급격히 저하되거나, 혹은 두 가지 모두 발생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고임금 전문가 그룹 역시 ‘모두가 풍요로운 사회’라는 이상을 달성할 수 없다. 내가 얻는 경제적 이익이 사회 전체의 안정성을 희생하는 대가일지도 모른다는 불편한 진실 앞에서, 나의 학문적 목표를 단지 개인의 성공에 국한하지 않고 사회적 기여로 확대해야 할 책임감을 느낀다. 동시에 책의 가장 아프고 절실한 지적은 돌봄 노동력의 위기에 대한 부분이다. 현재의 대학원생들은 미래의 고소득 전문직이 될 가능성이 높지만, 그들이 안정적으로 연구를 지속하고 가정을 꾸리며 다음 세대를 길러내기 위해서는 사회적 돌봄 시스템이 필수적이다. 주변의 여성 동료 대학원생들이 출산과 육아로 인해 연구 경력이 단절되는 과정을 목격할 때마다, 저자가 지적하는 ‘여성 노동력의 비자발적 이탈’ 문제가 얼마나 현실적이고 파괴적인지 깨닫는다. 젊은 인력이 줄어들어 아이를 믿고 맡길 어린이집 교사, 아픈 부모님을 돌볼 요양보호사, 심지어 응급 상황을 담당할 의사마저 사라진다면, 아무리 높은 지적 생산성을 갖춘다 한들 개인의 삶은 지속 가능할 수 없다. ‘뇌 수술을 위해 외국 병원에 가야 할지도 모른다’는 저자의 경고는, 사회의 기본 시스템이 붕괴할 때 전문 인력 개인의 성공이 얼마나 허망해질 수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는 당장 학업과 경력 단절 사이에서 고민하는 여성 동료 대학원생들의 현실적인 어려움과 맞닿아 있으며, 미래에 아이를 낳고 기를 계획을 가진 모든 이들에게 ‘개인의 성공과 사회의 지속 가능성’이 얼마나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뼈아프게 상기시킨다. 결국 이 책은 인구 문제를 단지 ‘출산율’이나 경제 성장률’의 문제가 아닌, ‘우리의 삶을 누가 유지하고 돌볼 것인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으로 끌어올린다. 노동 시장의 불균형은 곧 삶의 불균형이며, 미래의 노동자로 진입할 준비를 하는 우리 세대는 이 위기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이철희 교수가 제시한 해법들, 즉 고령자의 노동 유연화, 특히 외국 인력 수급 시스템의 근본적인 개혁과 포용적인 이민 정책, 그리고 무엇보다 노동 시장을 나이, 성별, 학력 등으로 차별하지 않는 다양하고 포용적인 사회 문화를 정착시키는 구조적 개혁이야말로, 우리가 직면한 위기를 기회로 바꾸고 대학원생으로서 꿈꾸는 안정적이고 풍요로운 미래를 보장하는 유일한 길이 될 것이다. 다만, 이러한 구조적 개혁은 단기적인 정치적 성과로 이어지기 어렵기 때문에, 정치적 지도자들이 장기적인 비전과 책임감을 가지고 정책 일관성을 유지해야만 가능한 일이다. 저자가 말하듯 인구 문제는 단거리 달리기가 아닌 마라톤이며, 지금의 정책 결정이 20년, 30년 후의 삶의 질을 결정한다는 절박한 인식이 모든 사회 구성원에게 필요하다. 이 책은 한국 사회에 던지는 냉철하고 필연적인 경고이자, 지금부터라도 마라톤의 긴 호흡으로 위기에 대응해야 한다는 엄중한 명령장이며, 고립된 연구실을 벗어나 사회 전체의 생존 전략을 고민하게 하는 중요한 좌표가 되어준다. 우리가 직면한 위기는 단순히 숫자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가치관, 노동 시스템, 그리고 미래 세대에 대한 책임감이라는 거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이 책을 덮으면서, 나는 더 이상 개인의 생존을 넘어 ’함께 생존하는 방법’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노력해야 함을 다짐하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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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려 | 안*찬 | 지역주민 | 도서: 먼저 온 미래 독서 에세이: 그럼에도 인간적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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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알파고 97수와 인공지능의 실수
2016년 3월, 서울 포시즌스 호텔에서 펼쳐진 구글 딥마인드 챌린지 매치. 수많은 이들이 ‘신의 한 수’라 칭한 이세돌의 백 78수는, 바로 그 4국에서 빛났다. 이 수가 던져준 충격은 방대한 인공지능 역사에 하나의 거대한 획이었다. 알파고는 이미 3승을 거두며 무너질 줄 모르는 존재였지만, 그 순간, 기계는 의식을 잃은 듯 흔들렸다. 딥마인드는 이 수가 AI의 예측 범위 바깥—“만에 하나(1만분의 1)”—라고 적었다. 그러나 이 놀라운 반전보다 더 드라마틱한 것은, 알파고의 응답이었다. 즉각적인 악수가 아닌, 머뭇거림, 벽에 난 틈처럼 삐걱거리는 오류들이 연거푸 쏟아졌다. 데미스 하사비스는 “알파고가 자신의 실수를 자각한 건 87수부터”라고 회고했다. 이후 나타난 수순들은 체계적 오류라기보다는 절망의 표정처럼 흘러나왔다. 마치, 자신이 틀렸음을 깨달은 존재가 서서히 무너지는 장면 같았다. 97수 이후의 바둑판에는 희망 아닌 체념이 스며들었고, 결국 인간은 미소를 되찾았다. 이 한 판은 단순히 AI의 실수를 보여준 것이 아니다. 인간과 기계, 각각의 창의성이 충돌하며 어떻게 미래가 재설정되는지를 드러냈다. 2국의 37수는 “기계 창의”의 징표였다면, 4국의 78수는 “인간 창의”의 극찬이었다. 당대 기술의 신; 딥블루가 체스 세계를 무너뜨렸던 1997년 만큼이나, 이 순간은 인공지능 시대에 커다란 울림을 남겼다. 이처럼 알파고도 실수하고, 인간도 방어할 수 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묻는다: 우리는 AI의 오류를 어디까지 용인할 수 있는가? “완벽한 기계”가 아니라, 스스로의 한계를 마주하는 기계 앞에서 필요한 것은 신뢰가 아닌 ‘공학적 겸손’이다. 바로 그 겸손이 인간을 구할 것이며, 78수는 그런 태도의 상징으로 기록된다.
[2] 『먼저 온 미래』가 보여준 창의성의 풍경 알파고 4국처럼, 예상 불가능한 수단이 인간의 본질적 능력을 시험한다는 점은 자명하다. 『먼저 온 미래』에서도 이러한 긴장은 ‘창의성은 수학적 정답인가, 인간적 오답인가’라는 근본적 질문으로 이어진다. 수학적으로 완벽한 수임에도 인간의 감성과 연결되지 못하면, 그것은 창의성이 아니다. AI가 제시한 “이상한 수”가 진정 가치 있는 수인지, 이는 인간 각자의 해석과 주체성이 걸린 문제다. 책은 이 질문을 바둑판 위에서 펼쳐지는 냉혹한 현실을 통해 파고든다. 알파고 등장 이후, 프로 기사들의 개성적인 기풍(棋風)은 점차 사라지고 AI가 제시하는 수를 암기하고 모방하는 경향이 짙어졌다. AI가 모든 것을 수치화하고 표준화함으로써, 인간 고유의 창의성과 다양성이 균질화될 수 있다는 서늘한 경고가 바둑계를 통해 ‘미리 온 미래’로 제시된 것이다. 더욱이 책은 “창의성은 인간의 전유물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일부 바둑 기사들은 AI의 수를 ‘창의적’이라고 평가하기까지 한다. 이는 인간만이 창의적이라는 오랜 믿음에 균열을 내는 충격적인 통찰이다. 만약 AI가 문학 작품까지 창의적으로 쓸 수 있다면, 인간 예술가와 작가의 전통적인 역할과 가치는 어떻게 될 것인가? 『먼저 온 미래』는 이러한 질문을 통해, 인간의 창의적 영역이 AI에 의해 어떻게 변화하고 위협받는지 탐구한다. 특히 책은 인간 문명과 창의성이 ‘모호함’에 기반해 발전해왔다는 점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바둑이나 소설 창작에서 명확히 설명할 수 없지만 공유되는 개념들; 탁월함, 기세, 가치 등이 끝없는 창조와 변주를 가능하게 했다. 그러나 AI의 등장은 이러한 모호함의 영역을 수치화하고 제거함으로써, 인간 창의성의 기반 자체를 흔들 수 있다는 분석을 내놓는다. AI는 모든 것을 명확한 데이터와 확률로 환원하려 들고, 그 과정에서 인간적 직관과 감성, 그리고 불확실성 속에서 피어나는 아름다움이 설 자리를 잃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단순히 바둑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책은 바둑계에서 벌어진 AI의 영향이 의사, 변호사, 예술가 등 다른 전문 분야에도 확산될 ‘미리 온 미래’로 제시한다. 특히 AI가 매일 수백 편의 소설을 생산할 수 있는 세상에서 인간 작가의 의미와 역할에 대한 심각한 고민을 담고 있다. AI가 새로운 일자리를 만들기도 하지만, 동시에 고전적 방식이 낳던 가치들을 사장시키기도 하는 ‘죽음의 집’이라는 표현은 그런 양면성을 상징한다. 결국 우리는 창작 활동에서 무엇을 가치로 삼을 것인지 재평가해야 한다. 바둑만의 문제가 아니라, 예술, 문학, 과학 등 모든 지적 활동의 문제이자, 인간 고유의 가치를 탐색해야 하는 절박한 과제인 것이다. 이처럼, 『먼저 온 미래』는 단순한 기술 비판서가 아니다. 인간 창의성의 본질: 불완전함, 경험, 판단을 다시 들여다보게 만드는 철학적 긴장감을 담고 있으며, 인간이 무엇으로 존재해야 하는지에 대한 심오한 질문을 던진다.
[3] 학계와 철학이 말하는 AI의 자리 나는 인공지능을 대체자가 아니라, 지적 노동의 동반자라고 아주 어릴 때부터 믿어왔다. AI가 인간의 영역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더욱 인간다울 수 있도록 보조하는 존재여야 한다. 육체 노동에서 기계가 반복 작업을 맡아 노동의 품위가 올랐듯, 지적 노동에서도 AI는 정보 검색, 정리, 요약 같은 수고를 떠맡아 주는 조력자가 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인간은 판단, 진단, 창의라는 고귀한 영토로 돌아갈 수 있다. AI는 인간의 어깨를 빌어 더 높이 올라가는 사다리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주의할 것은, 시작 단계에 있는 이들이 AI에 지나치게 의존한다면, 그들은 ‘전통적 경험’을 거치지 못한 채 전문가의 영역에 진입할 수 있다. 이는 이 책이 경고한 “경험의 멸종”으로 이어질 수 있다. 시행착오로 채워지던 인간적 성찰이, AI가 제공한 정답에 눌려 사라지는 현실은 되풀이되어서는 안 된다. 진정한 숙련은 단순히 정답을 아는 것을 넘어, 수많은 오답과 실패를 통해 얻어지는 ‘암묵지(tacit knowledge)’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며, 심지어 그것은 대부분 정답도 아니다. 따라서 인공지능의 도움을 받되, 인간 고유의 경험적 학습 과정을 유지하는 균형이 필요하다. AI는 우리의 지적 여정을 풍요롭게 하는 도구여야지, 그 여정 자체를 대체하는 지름길이 되어서는 안 된다. 『먼저 온 미래』가 그려낸 르포적 긴장과 공포는 현실의 그림자처럼 드리워져 있다. 바둑 기사들이 AI의 압도적 기력 앞에서 무력감을 느끼고, 자신들의 정체성이 흔들리는 순간은 기술이 인간의 영역을 침범할 때 발생하는 실존적 위기를 생생히 증언한다. 그러나 학계는 이러한 공포에 맞서, 인공지능을 대체가 아닌 책임 있는 보조의 관점으로 전환하려는 거대한 흐름을 만들어내고 있다. 이는 단순히 기술적 논의를 넘어선, 인간 존재와 기술의 관계를 재정의하려는 철학적 시도다. 학계의 핵심 논의는 인공지능을 ‘대체(Replacement)’의 도구로 볼 것인가, 아니면 ‘증강(Augmentation)’의 파트너로 볼 것인가에 집중된다. ‘대체’의 관점은 인공지능이 인간의 노동과 역할을 완전히 자동화하여 효율성과 비용 절감을 극대화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이는 일자리 감소와 인간 소외라는 우려를 낳으며, 『먼저 온 미래』에서 묘사된 ‘죽음의 집’과 같은 비관적 미래상과 맞닿아 있다. 반면, ‘지능 증강(Intelligence Augmentation, IA)’의 철학은 인공지능이 인간의 능력을 보완하고 확장하는 데 기여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AI는 인간의 인지 기능을 보조하고, 의사결정을 돕고, 문제 해결 능력을 향상시키는 ‘코파일럿(Co-pilot)’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한다. 반복적이고 데이터 집약적인 작업을 AI에 맡김으로써, 인간은 비판적 사고, 전략 수립, 창의적 활동 등 고차원적인 영역에 집중할 수 있게 된다. 궁극적인 의사결정권은 여전히 인간에게 남아있다는 점에서, IA는 인간 중심의 기술 활용을 지향한다. 이러한 증강의 철학은 스탠퍼드 철학 백과사전(SEP)의 「인공지능 및 로봇 공학 윤리(Ethics of Artificial Intelligence and Robotics)」 항목에서 더욱 명확해진다. 이 항목은 인공지능을 설계하고 사용할 때 ‘책임 있는 설계(responsibility in design)’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는 단순히 AI를 윤리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넘어, AI 시스템이 처음부터 인간의 가치, 자율성, 복지를 최우선으로 고려하여 설계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AI가 인간을 지배하거나 통제하는 존재가 아닌, 인간의 역량을 강화하고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도구로서 기능하도록 윤리적 지침을 마련하는 것이다. 이 관점은 AI가 공포의 대상이 아닌, 인간의 번영을 위한 협력자가 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나아가 「계산 철학(Computational Philosophy)」분야에서는 인공지능이 인간의 지적 활동을 어떻게 증폭시킬 수 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가능성을 제시한다. 계산 철학은 기계적 계산 기술을 철학적 연구에 적용하여 인간의 사유와 탐구를 확장하고 심화하는 방법론이다. 이는 복잡한 논증 구조를 모델링하거나, 방대한 데이터를 분석하여 새로운 철학적 통찰을 도출하는 등, 인간의 인지 능력만으로는 접근하기 어려웠던 영역을 탐색할 수 있게 한다. 인공지능은 단순히 정보를 처리하는 기계를 넘어, 인간 사고의 속도와 범위를 확장하고 새로운 발견을 가능하게 하는 ‘지적 증폭기’로서의 의미를 갖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학계와 철학은 인공지능이 가져올 미래에 대한 막연한 공포를 넘어, 기술을 인간 중심의 가치와 윤리적 책임 아래 두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인공지능을 대체자가 아닌 증강의 도구로, 그리고 인간의 지적·윤리적 성장을 돕는 파트너로 인식하는 이러한 학술적 흐름은 『먼저 온 미래』가 던진 질문에 대한 가장 강력하고 희망적인 답변이 될 수 있다. AI는 인간의 존재를 위협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본질적 가치를 재확인하고 새로운 지평을 열어줄 잠재력을 지닌 도구인 것이다.
[4] 도구로서의 인공지능, 그리고 인간의 자리 인공지능은 결국 도구다. 이 명제는 단순하지만, 인류가 기술을 마주해 온 역사를 관통하는 진실이다. 러다이트 운동 당시, 기계는 노동자의 생존을 위협하는 파괴자로 여겨졌다. 그들은 기계를 부수며 저항했지만, 역사의 흐름을 막지는 못했다. 그러나 수 세기가 지난 오늘, 육체 노동자는 사라지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기계를 다루는 새로운 전문가가 되었고, 노동의 가치는 다른 차원으로 승화했다. 기계는 인간을 대체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능력을 새로운 지평으로 확장시켰을 뿐이다. 스마트폰의 등장 역시 마찬가지다. 기성세대는 스마트폰에 몰입한 젊은 세대를 ‘스몸비(Smombie)’라 부르며 우려했지만, 이는 낡은 시선에 불과했다. 젊은 세대에게 스마트폰은 단순한 통신 기기가 아니라, 세상과 소통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강력한 도구였다. 물론, 도구에 대한 지나친 의존은 언제나 위험을 동반한다. 스마트폰 없이 길을 찾지 못하고, 인공지능 없이 글을 쓰지 못하는 세대는 분명 기초적인 문제 해결 능력이 퇴화할 수 있다. ChatGPT가 촉발한 인공지능 혁명 속에서, 그저 기계가 뱉어내는 결과물에만 의존하는 사람은 결국 ‘비숙련 정신 노동자’로 전락할 것이다. 기계보다 나은 가치를 생산하지 못하는 자는, 산업혁명 시대의 비숙련공과 같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운명이다. 이러한 현상은 이미 우리 눈앞에 펼쳐지고 있다. 2024년 여름부터 코딩 업계에 불어닥친 ‘바이브 코딩(Vibe Coding)’ 열풍이 그 증거다. Cursor, Windsurf 에디터와 같은 AI 코딩 툴에 의존해 양산된 개발자들은 곧 자신의 한계를 드러냈다. 그들은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는 대신, AI에게 ‘감(vibe)’으로 명령을 내릴 뿐이다. 그러나 탄탄한 기초를 다진 시니어 개발자들은 달랐다. 그들은 AI를 단순한 ‘코더(Coder)’로 활용하고, 자신은 전체 구조를 설계하는 ‘프로그래머(Programmer)’로 자리매김했다. AI를 통해 개발의 속도와 품질을 동시에 끌어올린 것이다. 이처럼 도구를 지배하는 자와 도구에 종속되는 자의 격차는 더욱 벌어질 것이다. 기계화 공정을 거부하는 기업이 없듯, 우리는 인공지능의 발전을 거부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인간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답은 명확하다. 인공지능을 압도하는 것이 아니라, 인공지능을 능숙하게 다루는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 인공지능의 한계를 명확히 이해하고, 그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방향을 제시하는 지휘자가 되어야 한다. 창의력의 본질을 다시 생각해야 할 때다. 창의란 무(無)에서 유(有)를 만드는 마법이 아니다. 기존의 지식을 융합하여 새로운 개념을 빚어내는 특성이다. 깊이 있는 지식 없이는 창의성도 없다. 그리고 창의성 없이는 기술의 진보도, 예술의 창작도 불가능하다. 인공지능이 흉내 낼 수 없는 것, 그것은 바로 깊은 성찰과 독창적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인간만의 창의적 가치다. 만약 우리에게서 이것이 사라진다면, 인간은 인공지능과 무엇으로 구분될 수 있겠는가. 더 나아가, 짐승과 무엇이 다르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결국 인공지능 시대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기술에 대한 막연한 공포나 맹목적인 순응이 아니다. 기계를 통해 역설적으로 더욱 인간다워지는 길을 찾는 치열한 성찰이다. 인공지능은 우리를 대체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의 한계를 비추는 거울이자, 우리의 잠재력을 증폭시키는 도구다. 그 거울 앞에서 어떤 얼굴을 할 것인지, 그 도구를 들고 무엇을 창조할 것인지, 이제 모든 것은 우리 인간의 손에 달려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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