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장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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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5 | 0 | 0 | ▼a[通文] :▼b[小訥文庫] /▼d曺錫和 曺永承 曺鍾應 曺熙榮 曺錫洪 曺鍾泰 曺昌淳 曺永基 曺熙承 曺錫度 曺錫瑜 曺瑛承 曺鍾韺 曺錫冑 曺錫坤 曺錫淳 曺禹承 曺秉祺 曺熙仁 曺熙碓 曺秉九 曺秉道 曺秉麟 曺秉夏 曺錫禧 曺景承 曺鍾正 曺鍾浩 曺鍾壕 曺秉周 曺在基 曺旼承 曺秉殷 曺錫君 曺錫藝 曺儀承 曺南承 曺鍾魯 曺鍾禹 曺正承 等;▼e性齋先生文集刊所 會中 [受信].▲ |
| 250 | ▼a筆寫本▲ | ||
| 260 | ▼a[發信地未詳] :▼b曺錫和 曺永承 曺鍾應 曺熙榮 曺錫洪 曺鍾泰 曺昌淳 曺永基 曺熙承 曺錫度 曺錫瑜 曺瑛承 曺鍾韺 曺錫冑 曺錫坤 曺錫淳 曺禹承 曺秉祺 曺熙仁 曺熙碓 曺秉九 曺秉道 曺秉麟 曺秉夏 曺錫禧 曺景承 曺鍾正 曺鍾浩 曺鍾壕 曺秉周 曺在基 曺旼承 曺秉殷 曺錫君 曺錫藝 曺儀承 曺南承 曺鍾魯 曺鍾禹 曺正承 等,▼c1904▲ | ||
| 300 | ▼a1張 ;▼c91.0 x 57.6cm.▲ | ||
| 500 | 0 | 0 | ▼a筆體: 楷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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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00 | 0 | 0 | ▼a탈초: 정석태(부산대학교 점필재연구소)▲ |
| 500 | 0 | 0 | ▼a해제: 이연순(부산대학교 점필재연구소)▲ |
| 500 | 0 | 0 | ▼a교열: 이현호(부산대학교 점필재연구소)▲ |
| 520 | 4 | ▼a이것은 性齋 許傳(1797∼1886)의 文集(性齋集) 元集을 板刻할 때 자기들 선조 四友堂 曺爾樞(1661∼1707)의 墓碣銘(「四友堂曺公墓碣銘」)이 뺀 것을 항의하고 속히 그 글을 넣어서 板刻해줄 것을 요구하는 내용의 글이다. 南平曺氏 宗中에서 性齋先生文集刊所에 보낸 것이다. 南平曺氏 宗中의 曺錫和 曺永承 曺鍾應 曺熙榮 曺錫洪 曺鍾泰 曺昌淳 曺永基 曺熙承 曺錫度 曺錫瑜 曺瑛承 曺鍾韺 曺錫冑 曺錫坤 曺錫淳 曺禹承 曺秉祺 曺熙仁 曺熙碓 曺秉九 曺秉道 曺秉麟 曺秉夏 曺錫禧 曺景承 曺鍾正 曺鍾浩 曺鍾壕 曺秉周 曺在基 曺旼承 曺秉殷 曺錫君 曺錫藝 曺儀承 曺南承 曺鍾魯 曺鍾禹 曺正承 等이 連名하였다. 山淸 德山의 曺氏들이 性齋 許傳 先生이 자기들 선조 四友堂(曺爾樞)의 墓碣銘(「四友堂曺公墓碣銘」)에다 “曺氏는 본래 南平에 世居하다가 新羅 때 始祖 曺繼龍이 夏山君에 封해지고 대대로 公卿이 이어지면서 夏山, 곧 昌寧을 貫鄕(本貫)으로 쓰게 된 것이고, 高麗 때 曺用奇가 南平君에 封해지면서 대대로 簪組(高官)가 이어지면서 南平을 貫鄕(本貫)으로 쓰게 된 것이므로 본래는 한 뿌리에서 나온 것이다.”라고 한 것을 문제 삼아 性齋 許傳 先生의 文集 元集에서 자기들 선조 四友堂(曺爾樞)의 墓碣銘(「四友堂曺公墓碣銘」)을 빼버린 것이라고 하고는, 그 이유는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선조 南冥 曺植(1501∼1572)의 夫人이 南平曺氏라서 지금 南平曺氏가 昌寧曺氏로 되어 있다면 同姓同本이 서로 婚姻한 것이 되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黃江 李希顔(1504∼1559) 先生이나 寒岡 鄭逑(1543∼1620) 先生 모두 南冥 曺植 先生 遺事에서 先生과 夫人과의 문제를 特書하고 있는 것을 볼 때, 昌寧曺氏로 南平曺氏와 婚姻한 것이 南冥 曺植 先生에게 누가 되지 않는다고 하고는, 이어서 聚遠堂(曺光益)의 「世德錄」(聚遠堂集 卷1) 기록을 끌어다가 자신들의 派祖(中始祖) 曺用奇가 高麗 때 南平君으로 封해지면서 南平으로 封貫된 것이 분명하다고 한 다음, 실제 湖南에 살고 있는 자신들 南平曺氏의 수가 적지 않은데다 長興 五龍 事蹟도 南平君(曺用奇)에서 시작된 것이므로 자신들이 南平으로 封貫된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이 명백하다고 하였다. 그렇지만 자신들을 포함한 玉川曺氏ㆍ鳴陽曺氏ㆍ綾城曺氏ㆍ仁山曺氏 등 南平에 뿌리를 둔 曺氏들 모두는 昌寧 하나로 貫鄕(本貫)을 통일해서 쓰라는 正祖의 筵敎 이후 昌寧을 貫鄕(本貫)으로해서 두 차례나 合譜를 刊行한 사실이 있는데, 그때는 合譜하는 것에 아무런 異意를 제기하지 않다가 수백 년이 지난 지금 돌연 昌寧曺氏와 南平曺氏는 엄연히 本이 다른데 性齋 許傳 先生이 四友堂(曺爾樞)의 墓碣銘(「四友堂曺公墓碣銘」)에다 昌寧曺氏와 南平曺氏는 본래 한 뿌리에서 나왔다고 한 것을 트집삼아 터무니 없는 말을 하고 있다고 하고는, 世系를 辨別하는 것은 本宗들 사이의 문제이고 文集의 刊行은 他人의 일인데도 山淸 德山의 曺氏들은 本宗들 사이의 입장이 다른 것을 가지고 他人들을 현혹시키려고 하고 있으니 답답하고 한심한 일이라고 하였다. 그런 다음 刊所의 僉賢들은 春秋筆法에 입각한 엄정한 태도를 견지할 것이니, 性齋 許傳 先生이 그렇게 쓰신 뜻을 존중해서 속히 자신들 선조 四友堂(曺爾樞)의 墓碣銘(「四友堂曺公墓碣銘」)을 性齋 許傳 先生 文集(性齋集) 元集에다 넣어서 板刻해주기를 강력하게 요구하였다. 만약 그렇게 할 수 없다면 반드시 儒林의 公論이 있을 것이니 일단은 刊役을 중단하고 후일을 기다리면 참 좋겠다고 하였다. 四友堂 曺爾樞의 墓碣銘(「四友堂曺公墓碣銘」)은 性齋 許傳의 文集(性齋集) 元集에는 들어가지 못하였고, 續集(性齋集續編 卷6)에 들어가게 되었다.▲ | |
| 520 | 4 | ▼a右文爲奉告事惟以文憲公性齋許先生 學並天人 道合體用 斯文有誘掖之功 後學殫壽梓之誠 鄙等先祖四友堂墓碣事 曾於元集刊役時 誣被德山曺氏之所沮戱 畢竟見漏於頒冊之日 則鄙等之含羞茹痛 無地可容 何幸尊慕之誠 愈久深深 闡發之道 無遺畢擧 意謂春秋復明 義理復生矣 又爲德山人之所防塞云 噫 彼之執說 以南冥先生聘禮一款也 盖先生初以異本而未詳 晩覺同祖而善處 故寒岡鄭先生曰 先生於內子 雖不好合 終身不絶恩義 黃江李先生曰 楗中於夫婦間 尤有人所難能者 君子過更 人皆仰之 若果爲先生累德 則二先生豈有特書於遺事乎 且聚遠堂世德錄曰 諱自奇弟用奇 以征討功 封南平君 南平之曺自此始 若果爲婚媾之嫌 而終有可揜之蹟 則後孫亦豈肯刊行一世乎 且以南平言之 則非徒鄙派而已 居于湖南者 其麗不少 而長興輿覽五龍事蹟 皆祖於南平君 則南平封貫 可謂明矣 而判中樞成公達生 撰鄙等先祖判書公墓誌 參判鄭公斗卿撰白墅公碑文 皆中祖於南平君 則亦鄙等世守之蹟也 還本昌寧 卽是正廟朝筵敎 而京中同宗宰輔氏通辭曰 乾文復闡 山岳重光 以之而癸丁兩度合譜 非獨南平之反本 玉川鳴陽綾城仁山 亦一體同歸 則彼晉曺之父兄 亦同修一譜 而終無一言 今於數百年後 猝發悖說 夫世系之辨 在於本宗 文集之刊 在於他人 彼旣無以立異於本宗 乃欲眩之於他人 吁亦䟽矣 刊所僉賢 亦當有春秋之論 則鄙等之殘劣 固不足觀 而獨不重性齋先生立言之日乎 幸望惟理是據 亟加鋟梓完好 而如其不爾 則必有儒林之論 姑停刊役 少俟後日 幸甚 甲辰二月十五日 發文曺錫和 曺永承 曺鍾應 曺熙榮 曺錫洪 曺鍾泰曺昌淳 曺永基 曺熙承 曺錫度 曺錫瑜 曺瑛承曺鍾韺 曺錫冑 曺錫坤 曺錫淳 曺禹承 曺秉祺曺熙仁 曺熙碓 曺秉九 曺秉道 曺秉麟 曺秉夏 曺錫禧 曺景承 曺鍾正 曺鍾浩 曺鍾壕 曺秉周 曺在基 曺旼承 曺秉殷 曺錫君 曺錫藝 曺儀承 曺南承 曺鍾魯 曺鍾禹 曺正承 等▲ | |
| 520 | 4 | ▼a1 ▲ | |
| 541 | ▼a노재찬, 광주노씨 ▼b부산대학교 명예교수 ▼c기증 ▼d1973▲ | ||
| 546 | ▼a漢文體▲ | ||
| 650 | 4 | ▼a고문서 ▼x통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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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99 | ▼a이철찬▼c이철찬▲ |
[通文] :[小訥文庫]
자료유형
국내고서
서명/책임사항
[通文] : [小訥文庫] / 曺錫和 曺永承 曺鍾應 曺熙榮 曺錫洪 曺鍾泰 曺昌淳 曺永基 曺熙承 曺錫度 曺錫瑜 曺瑛承 曺鍾韺 曺錫冑 曺錫坤 曺錫淳 曺禹承 曺秉祺 曺熙仁 曺熙碓 曺秉九 曺秉道 曺秉麟 曺秉夏 曺錫禧 曺景承 曺鍾正 曺鍾浩 曺鍾壕 曺秉周 曺在基 曺旼承 曺秉殷 曺錫君 曺錫藝 曺儀承 曺南承 曺鍾魯 曺鍾禹 曺正承 等 ; 性齋先生文集刊所 會中 [受信].
개인저자
노상직 , 소눌 , 1855-1931
판사항
筆寫本
발행사항
[發信地未詳] : 曺錫和 曺永承 曺鍾應 曺熙榮 曺錫洪 曺鍾泰 曺昌淳 曺永基 曺熙承 曺錫度 曺錫瑜 曺瑛承 曺鍾韺 曺錫冑 曺錫坤 曺錫淳 曺禹承 曺秉祺 曺熙仁 曺熙碓 曺秉九 曺秉道 曺秉麟 曺秉夏 曺錫禧 曺景承 曺鍾正 曺鍾浩 曺鍾壕 曺秉周 曺在基 曺旼承 曺秉殷 曺錫君 曺錫藝 曺儀承 曺南承 曺鍾魯 曺鍾禹 曺正承 等 , 1904
형태사항
1張 ; 91.0 x 57.6cm.
일반주기
筆體: 楷書
紙質: 韓紙
탈초: 정석태(부산대학교 점필재연구소)
해제: 이연순(부산대학교 점필재연구소)
교열: 이현호(부산대학교 점필재연구소)
紙質: 韓紙
탈초: 정석태(부산대학교 점필재연구소)
해제: 이연순(부산대학교 점필재연구소)
교열: 이현호(부산대학교 점필재연구소)
요약주기
이것은 性齋 許傳(1797∼1886)의 文集(性齋集) 元集을 板刻할 때 자기들 선조 四友堂 曺爾樞(1661∼1707)의 墓碣銘(「四友堂曺公墓碣銘」)이 뺀 것을 항의하고 속히 그 글을 넣어서 板刻해줄 것을 요구하는 내용의 글이다. 南平曺氏 宗中에서 性齋先生文集刊所에 보낸 것이다. 南平曺氏 宗中의 曺錫和 曺永承 曺鍾應 曺熙榮 曺錫洪 曺鍾泰 曺昌淳 曺永基 曺熙承 曺錫度 曺錫瑜 曺瑛承 曺鍾韺 曺錫冑 曺錫坤 曺錫淳 曺禹承 曺秉祺 曺熙仁 曺熙碓 曺秉九 曺秉道 曺秉麟 曺秉夏 曺錫禧 曺景承 曺鍾正 曺鍾浩 曺鍾壕 曺秉周 曺在基 曺旼承 曺秉殷 曺錫君 曺錫藝 曺儀承 曺南承 曺鍾魯 曺鍾禹 曺正承 等이 連名하였다. 山淸 德山의 曺氏들이 性齋 許傳 先生이 자기들 선조 四友堂(曺爾樞)의 墓碣銘(「四友堂曺公墓碣銘」)에다 “曺氏는 본래 南平에 世居하다가 新羅 때 始祖 曺繼龍이 夏山君에 封해지고 대대로 公卿이 이어지면서 夏山, 곧 昌寧을 貫鄕(本貫)으로 쓰게 된 것이고, 高麗 때 曺用奇가 南平君에 封해지면서 대대로 簪組(高官)가 이어지면서 南平을 貫鄕(本貫)으로 쓰게 된 것이므로 본래는 한 뿌리에서 나온 것이다.”라고 한 것을 문제 삼아 性齋 許傳 先生의 文集 元集에서 자기들 선조 四友堂(曺爾樞)의 墓碣銘(「四友堂曺公墓碣銘」)을 빼버린 것이라고 하고는, 그 이유는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선조 南冥 曺植(1501∼1572)의 夫人이 南平曺氏라서 지금 南平曺氏가 昌寧曺氏로 되어 있다면 同姓同本이 서로 婚姻한 것이 되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黃江 李希顔(1504∼1559) 先生이나 寒岡 鄭逑(1543∼1620) 先生 모두 南冥 曺植 先生 遺事에서 先生과 夫人과의 문제를 特書하고 있는 것을 볼 때, 昌寧曺氏로 南平曺氏와 婚姻한 것이 南冥 曺植 先生에게 누가 되지 않는다고 하고는, 이어서 聚遠堂(曺光益)의 「世德錄」(聚遠堂集 卷1) 기록을 끌어다가 자신들의 派祖(中始祖) 曺用奇가 高麗 때 南平君으로 封해지면서 南平으로 封貫된 것이 분명하다고 한 다음, 실제 湖南에 살고 있는 자신들 南平曺氏의 수가 적지 않은데다 長興 五龍 事蹟도 南平君(曺用奇)에서 시작된 것이므로 자신들이 南平으로 封貫된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이 명백하다고 하였다. 그렇지만 자신들을 포함한 玉川曺氏ㆍ鳴陽曺氏ㆍ綾城曺氏ㆍ仁山曺氏 등 南平에 뿌리를 둔 曺氏들 모두는 昌寧 하나로 貫鄕(本貫)을 통일해서 쓰라는 正祖의 筵敎 이후 昌寧을 貫鄕(本貫)으로해서 두 차례나 合譜를 刊行한 사실이 있는데, 그때는 合譜하는 것에 아무런 異意를 제기하지 않다가 수백 년이 지난 지금 돌연 昌寧曺氏와 南平曺氏는 엄연히 本이 다른데 性齋 許傳 先生이 四友堂(曺爾樞)의 墓碣銘(「四友堂曺公墓碣銘」)에다 昌寧曺氏와 南平曺氏는 본래 한 뿌리에서 나왔다고 한 것을 트집삼아 터무니 없는 말을 하고 있다고 하고는, 世系를 辨別하는 것은 本宗들 사이의 문제이고 文集의 刊行은 他人의 일인데도 山淸 德山의 曺氏들은 本宗들 사이의 입장이 다른 것을 가지고 他人들을 현혹시키려고 하고 있으니 답답하고 한심한 일이라고 하였다. 그런 다음 刊所의 僉賢들은 春秋筆法에 입각한 엄정한 태도를 견지할 것이니, 性齋 許傳 先生이 그렇게 쓰신 뜻을 존중해서 속히 자신들 선조 四友堂(曺爾樞)의 墓碣銘(「四友堂曺公墓碣銘」)을 性齋 許傳 先生 文集(性齋集) 元集에다 넣어서 板刻해주기를 강력하게 요구하였다. 만약 그렇게 할 수 없다면 반드시 儒林의 公論이 있을 것이니 일단은 刊役을 중단하고 후일을 기다리면 참 좋겠다고 하였다. 四友堂 曺爾樞의 墓碣銘(「四友堂曺公墓碣銘」)은 性齋 許傳의 文集(性齋集) 元集에는 들어가지 못하였고, 續集(性齋集續編 卷6)에 들어가게 되었다./右文爲奉告事惟以文憲公性齋許先生 學並天人 道合體用 斯文有誘掖之功 後學殫壽梓之誠 鄙等先祖四友堂墓碣事 曾於元集刊役時 誣被德山曺氏之所沮戱 畢竟見漏於頒冊之日 則鄙等之含羞茹痛 無地可容 何幸尊慕之誠 愈久深深 闡發之道 無遺畢擧 意謂春秋復明 義理復生矣 又爲德山人之所防塞云 噫 彼之執說 以南冥先生聘禮一款也 盖先生初以異本而未詳 晩覺同祖而善處 故寒岡鄭先生曰 先生於內子 雖不好合 終身不絶恩義 黃江李先生曰 楗中於夫婦間 尤有人所難能者 君子過更 人皆仰之 若果爲先生累德 則二先生豈有特書於遺事乎 且聚遠堂世德錄曰 諱自奇弟用奇 以征討功 封南平君 南平之曺自此始 若果爲婚媾之嫌 而終有可揜之蹟 則後孫亦豈肯刊行一世乎 且以南平言之 則非徒鄙派而已 居于湖南者 其麗不少 而長興輿覽五龍事蹟 皆祖於南平君 則南平封貫 可謂明矣 而判中樞成公達生 撰鄙等先祖判書公墓誌 參判鄭公斗卿撰白墅公碑文 皆中祖於南平君 則亦鄙等世守之蹟也 還本昌寧 卽是正廟朝筵敎 而京中同宗宰輔氏通辭曰 乾文復闡 山岳重光 以之而癸丁兩度合譜 非獨南平之反本 玉川鳴陽綾城仁山 亦一體同歸 則彼晉曺之父兄 亦同修一譜 而終無一言 今於數百年後 猝發悖說 夫世系之辨 在於本宗 文集之刊 在於他人 彼旣無以立異於本宗 乃欲眩之於他人 吁亦䟽矣 刊所僉賢 亦當有春秋之論 則鄙等之殘劣 固不足觀 而獨不重性齋先生立言之日乎 幸望惟理是據 亟加鋟梓完好 而如其不爾 則必有儒林之論 姑停刊役 少俟後日 幸甚 甲辰二月十五日 發文曺錫和 曺永承 曺鍾應 曺熙榮 曺錫洪 曺鍾泰曺昌淳 曺永基 曺熙承 曺錫度 曺錫瑜 曺瑛承曺鍾韺 曺錫冑 曺錫坤 曺錫淳 曺禹承 曺秉祺曺熙仁 曺熙碓 曺秉九 曺秉道 曺秉麟 曺秉夏 曺錫禧 曺景承 曺鍾正 曺鍾浩 曺鍾壕 曺秉周 曺在基 曺旼承 曺秉殷 曺錫君 曺錫藝 曺儀承 曺南承 曺鍾魯 曺鍾禹 曺正承 等/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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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30618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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