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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습 ] 인물로 보는 서양의 역사
8세기 말~9세기 초, 카롤루스제국 황제 카롤루스 마그누스(샤를마뉴, 748~814)는 기병의 무력을 키워 이민족을 격퇴하고 서유럽을 제패했다. 기병을 통제하는 방식은 황실 재산을 하사하거나 전리품을 나눠주는 게르만의 전통을 따랐다. 역대 제왕들은 공적이 큰 신하에게 가문의 땅(domaine royal)을 봉토(封土)로 하사하고, 귀족을 견제하기 위해 심복(心腹)을 지방에 파견하는 등의 대책을 마련했다. 카롤루스 마그누스는 군주와 신하의 관계를 새로운 차원에서 바라봤다. 그는 과거의 역사 속에서 세 가지 전통, 제도를 찾아 혼합했다.

[ 학습 ] 밀양지역 문화와 인물
아리랑 가운데 밀양아리랑은 팔색조다. 시대와 목적에 따라 다양하게 불리고 있기 때문이다. 광복·독립군에게는 희망가로 불렸고, 정부에는 의전가, 민주화 운동이 한창일 땐 통일가 등으로 모습을 조금씩 달리해왔다. 60여 종의 아리랑 가운데 밀양아리랑은 정선아리랑, 본조아리랑, 진도아리랑과 함께 4대 아리랑으로 꼽힌다. 게다가 밀양에서만 불리던 아리랑은 일제강점기를 겪으면서 한민족의 대표 아리랑으로 자리매김했다.

[ 학습 ] 동서문화교류와 실크로드
칭기즈칸의 손자 쿠빌라이칸은 ‘유라시아 자유무역지대’를 구상해고 만들어냈다. 쿠빌라이는 이 구상을 통해 정치ㆍ군사ㆍ경제ㆍ유통ㆍ생산ㆍ교통 등 다방면에 걸쳐 자유무역과 중상주의 정책을 펼쳤다. 또 다인종, 다언어, 다문화를 가진 사람들을 고용해 세계제국을 운영했다. 쿠빌라이칸은 몽골이라는 이름으로 세계를 하나로 묶으려고 했다. 그 중심지는 13세기 쿠빌라이가 건설한 북경이었다. 중국의 수도 북경이 중국 동북쪽 귀퉁이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은 몽골고원부터 중국까지를 포함해서 보면 북경이 중심이기 때문이다. 쿠빌라이는 통혜하라는 운하를 통해 북경을 발해만과 연결하고, 신중한 남송 공략을 통해 해양을 강화했다. 이때 발전한 도시가 천진과 상해다. 쿠빌라이칸은 이를 통해 기존에 여러 유목제국이 기초를 닦고 확립해놓은 초원의 군사력과 중국의 경제력이라는 토대 위에 무슬림의 상업력을 결합한 대교역권이라는 시스템을 만들어냈다.

[ 학습 ] 일본의 역사와 문화
1616년에 에도 막부는 유럽인의 거주와 무역 기항지를 히라도와 나가사키로 제한하였다. 1624년에는 선교사 활동에 깊이 관여한 포르투갈과 스페인 선박의 내항을 금지시켰다. 이는 네델란드 상인들이 “천주교는 일본에 절대 유해하다. 천주교를 봉쇄하기 위하여 해외제국과의 왕래를 봉쇄하는 것이 효과적이라”며 구교 국가들을 견제한 것이 영향을 미쳤다. 1636년에 막부는 포르투갈인을 나가사키 내에 축조한 인공섬 데지마(出島)로 이주시켜 일본인과의 교제를 원천 봉쇄했다.

[ 학습 ] 고고학과 발굴
이집트의 히에로글리프(hieroglyph)는 한자처럼 상형문자다. 영어나 한글처럼 소리만을 적는 표음(表音)문자와 달리, 각각의 글자가 뜻을 지니는 표의(表意)문자다. 가장 오래된 유물은 기원전 3100년경 물건이다. 로마 지배시대까지 근 3천여 년, 주로 파라오의 업적, 신이나 사후 세계에 관한 묘사(描寫)를 신전 등에 조각하는 데 썼다.

[ 학습 ] 중국의 역사와 문화
중국 3대 미녀 중 한 사람인 양귀비의 본명은 무엇일까. 중국 역사상 3대 미인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양귀비는 중국 당나라 현종의 비로 본명은 양옥환이다. 양귀비는 '꽃을 부끄럽게 만드는 아름다움을 가졌다'는 뜻에서 '수화(羞花)라고도 불렸다. 희고 매끄러운 피부를 가졌으며 155cm의 작은 키에 65kg에 달하는 통통한 몸매를 지녔다고 전해지고 있다. 현종이 양귀비를 자신의 귀비로 삼은 일화가 유명하다.

[ 학습 ] 문화로 읽는 한국의 종교
수륙재는 물과 육지에서 떠도는 외로운 영혼과 아귀를 달래며 위로하기 위하여 불법(佛法)을 강설하고 음식을 베푸는 의식이다. 보통의 천도재는 망자 개인을 추천하기 위한 의식이지만 수륙재는 망자 한두 명뿐만 아니라 수륙을 떠도는 유정무정(有情無情)의 무주고혼(無主孤魂)을 천도하기 위한 의식으로 민심 수습 차원에서도 국가적으로 설행할 수 있는 불교 의식이었다. 이러한 수륙재의 특징은 조선 건국 후 고려시대에 국가적으로 설행되던 각종 불교 의식이 모두 금지된 속에서도 수륙재만큼은 국가의 후원을 받아 설행될 수 있었던 원인이었다.

[ 학습 ] 인물로 보는 한국지성의 역사
자신을 극진히 총애한 정조대왕의 죽음 직후 노론의 마수에 걸려들어 18년 유배 생활을 마치고 고향 마현(馬峴) 마을로 돌아온 정약용은 회갑을 맞은 1822년(순조 22년)에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을 지어서 정조대왕과의 인연, 천주교에 대한 입장, 자신을 시기하여 자신과 자신의 집안을 역적으로 몬 인물들, 유배 생활 동안 심혈을 기울여 저술하고 엮은 500여권의 책 그리고 평생의 뜻을 새긴 명(銘)을 담았다.

[ 학습 ] 일상으로 읽는 한국사
산업으로서 관광은 근대의 산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아름답거나 진귀한 것을 보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은 원초적인 것이므로, 근대 이전에도 현재의 관광과 같은 것이 많이 있었다. 관광을 위해서는 여행을 해야 하는데, 조선시대 여행은 걸어가거나 나귀를 이용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간혹 아주 신분이 높은 사람은 가마를 타고 여행하기도 했다. 그리고 하루 동안 주변의 경치를 감상하는 관광에서부터 며칠이나 몇 달이 걸리는 여행까지 다양한 형태의 관광이 있었다. 과거의 관광은 주로 자연 풍광을 구경하는 것이었지만, 인간이 만들어놓은 인공적 문물을 관람하는 것도 포함됐다. 중세부터 있었던 기독교인이나 이슬람교도들의 성지순례는 이런 종류의 여행이라고 할 수 있다. 동양에서도 일찍이 종교적 목적의 여행이 있었다. 인도나 서역에서 불교를 전파하러 중국으로 긴 여행을 한 스님들이 있었고, 또 인도로 구도의 여행을 떠난 중국 승려도 많았다. [왕오천축국전]을 남긴 신라의 스님 혜초도 8세기 무렵 인도로 여행한 승려 중 하나였다. 혜초 이전에도 신라의 승려 가운데 중국에 공부하러 갔다가 인도까지 간 사람이 여러 명 있다.

[ 학습 ] 세계문화유산의 이해
판테온은 로마인이 신봉하던 다신교(多神敎)의 신전으로 축조되었으며 주 건축 자재는 벽돌과 로마의 콘크리트이다. 로마 시내의 가장 오래된 길 가운데 하나인 비아 코르소(Via Corso : 옛 마차 경주로)의 서쪽에서 멀지 않은 지점에 위치한 이 신전은 기원전 27년에 시작되었다고 하나 처음의 건물은 현재와 달랐다고 한다. 그 후 118년부터 128년 사이에 헤이드리안(Hadrian) 황제 때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완성되어 2,000년 가까이 원래의 모습을 거의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609년부터는 기독교의 교회로 사용되고 있다. 세계의 건축 사학자들은 이 건물이 정확하게 어떤 이유로 그처럼 견고한지를 아직도 확실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 학습 ] 영화로 이해하는 인문학 키워드
르완다 사태의 저변에는 해묵은 종족 갈등이 있다. 르완다는 14세기 이 지역에 진출한 소수 투치족(14%)이 왕국을 세워 토착부족인 후투족(85%)을 지배했다. 그러다가 1916년부터 벨기에의 식민통치가 시작된 뒤 투치족에 대한 벨기에의 철저한 종족 차별 정책으로 두 종족간 갈등이 시작되었다.

[ 학습 ] 광주학생독립운동
원산총파업이 일어난 그 해, 남녘 땅 나주에서 또다른 사건이 터졌다. 1929년 10월 30일 오후 나주역에서 후쿠다 쇼조(福田修三)를 비롯한 광주중학교 학생이 광주여고보 여학생 박기옥과 이광춘, 이금자를 희롱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를 본 박기옥의 사촌 박준채가 일본인 학생에게 항의하는 과정에서 싸움이 벌어졌다. 당시 박준채는 광주고등보통학교(광주고보) 2학년 학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