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채식주의자 작가 한강 출판 창비 hayul 님의 별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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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을 여름이 막 지난, 선선한 날에 읽었다. 산타 마리아 노벨라의 친칸타 향이, 탬버린즈 고체향수 324의 차가운 풀향과 잘 어울리던 날이었고, 냉정의 열정‧열정의 냉정 같은 향과 날 속의 책이었다.

    한강 이라는 작가를 많이 들어보았으나 이 작품으로 처음 접하였다. 이 책으로 맨부커 인터내셔널 상을 타며 유명해진 것으로 알고 있다. 전에 맨부커 수상작을 감명깊게 읽었던 경험이 있어 이번 책도 기대하며 읽었는데, 두 작품의 느낌은 다소 다르지만 이 책 또한 흥미로웠고 울림이 깊었다.

    소설은 특이하게 작가가 다른 시기에 쓴 세 단편 소설을 다듬어 이어지는 하나의 이야기로 만들었다고 한다. 각 단편은 다른 인물의 입장에서 쓰였고, 전체적인 이야기는 시간순으로 전개되기 때문에 읽는 데에 혼란스러움은 없었다. 구성방식부터 신선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내용은 신선하다 못해 파격적이었다. 사실 소설만 읽어서는 소설에 대한 이해가 힘들었으나 해설을 읽으며 짜임이 훌륭하고 표현력도 상당하구나 싶었던, 마치 잘 짜인 그림을 보는 듯했다.
    이 책은 보통의 여자 영혜가 채식주의자로, 그리고 결국 음식을 거부하는 사람이 되어 정신병원에 갇히는 일련의 사건을 주변 인물의 서술로 풀어내고 있다. 육식이 아닌 채식을 선택하고, 결국에는 음식을 거부하는 영혜의 선택은 온전히 그녀 자신의 선택이다. 연이어 따라오는, 화장을 하지 않고 브라를 하지 않겠다는 선택 역시 그녀 자신의 선택이다. 영혜의 입장에서 서술되는 짤막한 구절을 보다 보면, 사실 이 선택에 엄청난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다. 해설에서와 같이 그녀는 자신이 하고 싶지 않은 부가적인 것들을 지워나가며 ‘팽창의 시대에 축소를 택했을 뿐’이다. 이 선택은 그 누구에게도 해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녀의 남편, 그녀의 아버지와 어머니, 주변의 인물들은 영혜의 행동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채식주의자’로-‘그녀의 행위를 이해하기 쉬운 속성으로 환원한 호칭으로’- 명하며 끊임없이 본인들의 이해범위 내로 돌아올 것을 요구하고 강제한다. ‘이해할 수 없는 타인의 모습을 그대로 놔두지 못하는, 타인의 습성과 문화를 이해하려 노력도 하지 않는’ 대다수의 사람들의 모습을 극명하게 잘 보여주고 있다. 이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신의 특성이 정상으로 받아들여지는 일종의 ‘특혜’를, 자신의 상황과 위치를 전혀 인지하지 못한다. 이 무지가 소수에게 얼마나 폭력적인지는 영혜가 얼마나 극단적인 상황으로 자신을 몰아가는지를 통해 잘 드러나고 있다.
    집단의 몰이해는, 영혜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지속적으로 행해진다. 가족이라는 굴레 내에서 끊임없이 행해지는 정신적인 폭력으로부터 영혜는 벗어나고 싶어하지만, 언니인 인혜는 이에 응답하지 않는다. 몰이해가 지속되지만 않았어도, 단 한 명만이라도 영혜를 이해했더라면 혹은 그럴 수도 있다는 마음가짐으로 그녀를 대했더라면 영혜가 ‘살아있는 화석’처럼 야위었을 일도 없었을 것이다. 일생동안 폭력을 견뎌내던 영혜는 결국 모든 배척된 것들의 집합으로, ‘미친’ 속성의 합으로, 고독한 실체로 존재하며 혼자서 경계 저편으로 넘어간다. 인혜는 진창의 삶을 남겨두고 혼자 떠난 영혜의 무책임함을 용서할 수 없다고 말하지만, 영혜를 돌보며 스스로 감추었거나 잊었던 트라우마와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끊임없이 영혜와 자신의 과거를 다시 가정하며 가능성의 역사를 새로 쓴다. 결국 인혜는, 어쩌면 영혜가 겪는 모든 일들이 자신의 미래였어야 했을 수도 있다고, ‘그녀의 삶이 자신의 것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고, 우리의 운명은 뒤바뀐 것이라고 말한다. ‘무덤처럼 지쳐있는’ 자신도 이미 오래전부터 죽어있었으며 영혜와 자신은 ‘서로의 상처를 나눠진 운명의 공동체’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낀다.

    언젠가 나는 ‘collecting our death, 산다는 건 그런게 아닐까’라고 적은 적이 있다. 우리에게 선택받지 못한 가치들이나 순간들이 달고 왔을 미래와 가능성들은 우리의 손에 죽었다. 그런 죽음들을 모아서 쌓아오다 보면 죽음의 무게는 삶을 짓누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린 매순간 죽어간다. 삶의 과정은 죽음에 다가가는 과정이고, 죽음을 모으는 일인 것이다. 수많은 죽음 속에 살아남는 나의 실체라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죽음으로 점철되어 있고, 나에 대한 타인의 몰이해의 집합이기도 하다. 개인의 근원적인 고독감은 여기서 연유한다.
    하지만 우리는 서로에게서 자신의 상처를 보기도 한다. 또 ‘타인이 대신 앓은 나의 상처’를 뒤늦게 볼 때도 있다. 우리는 몰이해로 인한 고독에 아파하면서도 서로의 상처를 나눈 한 배를 탄 존재들이다. 작가의 말을 빌리자면, ‘세계의 고통을 자신의 몸으로 앓는 자의 현실’, 가해자는 보이지 않고 피해자들만 무수한 사회 속 개인인 것이다. 그래서 우린 이 현실에 화가 나면서도 냉소를 띠고, 체념한 가운데에도 서로를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존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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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기 다른 인물이 이야기를 서술하는 방식이 내용을 전달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을 것 같네요. 대단하다는 말을 듣는 것들은 정말 대단한가 봅니다.
      하지만 어쩌면 이해라는 것이 불가능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개인은 결국 스스로가 만들어낸 하나의 관점 밖에 채택할 수 없는 것이고, 자신도 타인을 똑바로 볼 수 없으니, 타인이 나를 이해해주길 바라는 것은 이룰 수 없는 욕심이 아닐까요. 주인공은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합니다.
      냉소적이며 체념하지만 그래도 생을 살아가는, 존재 자체가 모순인 우리는 앓아가며 죽어가겠지요. 그 속에서 누군가는 죽어감에 눈을 두고, 누군가는 문득의 희망에 힘을 쏟습니다. 가능성이나 위계는 말하지 않겠지만은 생이 주어진 이 상황에, 긍정 또한 해볼만 한 것을 아닐런지요. 물론 저는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어느 날에는, 행복하고 싶습니다.

      • 아마도 이해라는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영역의 일이어서, 쓰신 말씀처럼 완전한 이해를 받을수는 없을 겁니다. 거기서 기인하는 고독과 슬픔이 가장 깊은 감정이 아닐까 생각하기도 해요. 이 소설이 하나의 주인공을 내세우지 않는 것도 바로 각자의 처지를 제대로 조명하기 위해서이겠죠. 하지만 영혜의 비극이 몰이해에 근거하는 만큼, 자신의 처지와 아픔에 빠져 타인을 경계로 몰아세우는 일 역시 있어서는 안된다고 작가는 말하는것 같습니다. 비록 온전한 이해는 아니어도, 타인의 존재방식을 ‘그럴 수 있구나’ 하고 인정할 수 있는 마음가짐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이런 체념 속에서도, 우리는 또 우리와 어떤 부분에서 닮은 사람들을 만나 친구가 되고 연인이 되겠죠. 한 사람에게 나의 모든 부분을 이해받으려 하는 것보다, 어떤 사람에게는 이런 면을, 또 다른사람에게는 다른 면을 이해받는 것이 보다 현실적이고, 또 한 개인이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또 굳이 사람에게서가 아니더라도, 글, 음악, 그림을 접하며 이해받는다는 느낌을 받는 것도 소중한것 같습니다. 모쪼록 모순 속에서 웃고 울더라도 적당한 온도의 괜찮은 삶을 살아내게 되시길 바라요.

    • 타인을 완전히 이해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지만, 적어도 너의 삶을 너의 뜻대로 살라는 최소한의 존중의식이 영혜의 주변 인물에게 있었다면 어땠을까 싶네요. 주변에 해가 되지 않는 선택이고, 한 사람의 성인으로 자신의 행동을 선택했지만 정신적인 폭력이라고 느낄 정도의 몰이해를 받았던 영혜의 상황이 안타깝게 느껴집니다. 한 번쯤 꼭 읽어보고 싶은 소설이에요. 좋은 서평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