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티사르의 자동차(양장본 HardCover) 작가 페드로 리에라 출판 미메시스 님의 별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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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의 유명 시트콤 프렌즈에 이런 장면이 나온다. 주인공 챈들러는 부담스러운 여자친구 재니스와 헤어지려 하지만 인연을 끊어내는 것이 맘대로 되지 않는다. 그래서 선택한 방법이 회사 일 때문에 먼 외국에 오래도록 출장을 가야 한다는 핑계를 대는 것이었다. 이때 선택한 국가가 바로 예맨이다. 재니스는 이 변명에 속아넘어가고, 꼭 편지하겠다는 약속과 함께 주소를 되짚는데, "15, Yemen road, Yemen"이라는 가짜 주소를 철덕같이 믿는다. 나는 이 장면을 보면서 웃기기도 했지만, 내가 만약 예맨 사람이라면 굉장히 기분이 나쁠 것 같기도 했다. 예맨에 대한 무지에서 시작된 개그지만 예맨이 그만큼 낙후되었다는 암시를 풍기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작품은 예맨에 일 때문에 가본 경험이 있는 스페인 만화가의 작품으로 예맨 여성 인권의 현주소를 낱낱이 드러낸다. 앞서 말했듯 작가의 창작이 아닌 '어느 예맨 여성'의 실화를 바탕으로 했으며 '그래픽 노블'의 특성에 따라 그림보다 문장을 따라가며 읽는 맛이 상당했던 작품이다. 예전에 읽을 때는 잘 느끼지 못했던 부분인데 문장력이 상당히 뛰어났는데 아무리 그래픽 노블이라지만 엄연히 만화에 속하는 작품에 문장력에 감탄해보긴 처음이었다. 다시 곱씹어볼 만한 문장은 이번에 읽을 땐 없었지만 워낙에 작품의 분위기가 분위기인 지라 그냥 작품 자체가 뛰어난 문장처럼 읽혔다.

    처음 이 작품의 모델이 된 '어느 예맨 여성'은 예맨의 문제는 종교가 아닌 그 이전부터 이어져 온 '관습과 전통'이라는 종교가 문제임을 서두에서 밝히고 있다. 쉽게 말해 이슬람교는 거들 뿐이란 것이다. 여담이지만 쿠란의 구절을 쓴 무함마드 입장에선 좀 억울할 수도 있겠다. 쿠란을 쓸 당시와 지금 시대를 동일시할 순 없으니 어느 정도는 고리타분하고 폐쇄적인 마음가짐과 환경에서 그 구절들을 적은 것이겠지만, 후대의 이슬람교와 관련된 문제들은 그 쿠란을 교묘하게 자기들 입맛대로 오독한 것에서 비롯되니 이슬람교 전체를 싸잡아 욕하기도 뭔가 애매하단 생각도 든다.


    왜 이런 말을 하냐면 이 작품의 주인공 인티사르부터가 샤를리 엡도의 풍자 만화를 바보같다며 비판하는 등 딱히 이슬람교도인 것에 대해 부끄러워하는 눈치가 없어보이기 때문이다. 인티사르는 예맨이란 나라의 막장스러움, 자신의 아버지는 틈이 날 때마다 씹지만 이슬람교를 근본적으로 혐오하는 장면은 없었다. 아주 나쁘게 말하면 세뇌당해서 그렇다고 할 수 있겠지만, 실상 이슬람교를 실제로 겪어보지 않은 입장인 나 같은 독자는 실제 그 종교를 믿으며 본인 나라에서 특정 성별로 살아감에 있어 어떤 기막힌 고충이 있는지를 객관적으로 살펴보는 게 그나마 이 책을 읽는 동안 감정을 격해지지 않게 억누를 수 있는 방법이지 않을까 싶다.

    아니나 다를까 동양권과는 비교가 불허한 여권의 후진성이 작품 전반에 걸쳐 여과 없이 묘사됐다. 사실 동양이라고 어디 가서 여권 신장이 잘 이뤄졌다고 할 순 없지만 상대적으로 예맨 같은 나라랑 비교했을 때 뭐든 위엔 더 위가 있구나 하는 탄식이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전신을 가리는 니캅을 시작으로 흡연하는 여성을 바로 창녀 취급하거나 아버지의 말 한 마디에 진학과 취업과 결혼이 당사자의 의지완 상관없이 결정되고 번복따윈 용납하지 않는 것, 여성 혼자선 담배 한 갑 구매할 수 없는 것 등 사소한 것부터 시작해 이래저래 도가 지나쳐 일일이 언급하며 화를 내는 게 입 아프고 열불나는 사례가 줄지어 소개된다.

    그래도 이 작품을 결말까지 읽을 수 있는 원동력은 바로 주인공 인티사르일 것이다. 사회 분위기상 여성 혼자서 운전을 하는 게 용납이 안 되는 상황에서 퇴근할 때 도로에서 자신의 자동차로 스릴 넘치는 드라이브를 펼치는 도입부는 제법 흥미로웠다. 고작 여성이 운전하다는 이유로 얼굴 붉히며 달려드는 남성 운전자도 정상은 아니지만 그런 상황을 대처하는 인티사르의 대범함도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좋은 의미에서 정상으로 보이진 않았다. 그도 그럴 만한 것이 상당한 자산가의 자제이고 또 그 꼰대 아버지를 상대로 학업이나 취업처럼 중대한 문제에선 절대 타협하지 않던 인티사르였기에 느닷없는 광란의 레이스따윈 대수로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인티사르의 상황이 그나마 나은 건 그녀의 성격 덕분이 크지만 이런 성격조차 바로 자신이 인생에서 가장 싫어하는 아버지의 재력에서 어느 정도 비롯됐다고 생각해볼 수 있다. 인티사르로선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겠지만 다른 나라도 아니고 작중 묘사에 따르면 예맨처럼 여성을 대상으로 한 제약이 많고 나라 자체가 빈부 격차가 극심한 나라에선 가장의 재력이 곧 그 집안 인물들의 정체성을 살펴봄에 있어 간과할 수 없는 요소임엔 분명하다. 즉 인티사르의 비극은 그나마 다른 예맨 여성에 비해 가방끈도 길고 어느 정도 주체적으로 삶을 살아가는 것은 아버지 덕분이란 걸 본인이 결코 모르지 않는다는 것에 있는데... 이는 굳이 예맨이 아니라 독립하지 못하고 부모 그늘에 사는 자식이라면 다 공감할 여지가 많은 부분이라 여겨졌다. 내가 이 책을 5년 전에 읽을 때와 다르게 인티사르의 이야기가 부분적으론 내 삶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결정적으로 느낀 부분이기도 하다. 인상적인 변화긴 한데 참 씁쓸하구만.

    따지고 보니 이 작품을 끝까지 읽을 수 있는 원동력인 인티사르의 성격이 어느 정도는 아버지의 덕도 있다는 결론이 나와 책이 전에 없이 씁쓸한 뒷맛을 안겼다. 하지만 반대로 결말을 다다르니 씁쓸함이 아닌 감동이 밀려왔다. 낡아빠지긴 했어도 애지중지 타고 다닌 인티사르의 자동차가 아버지에 의해 이복 남동생의 운전 연습용으로 넘겨졌을 때 인티사르는 자신이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남자인 친남동생과 함께 자동차를 몰래 태워버린다. 제아무리 낡아빠졌어도 남이 망치느니 자기가 끝을 내는 게 맞다며 눈물을 머금고 태워버린 것이다. 물건의 제값이 어떻든지 간에 자신의 소유를 애틋하게 여기는 마음과 그 물건을 빼앗기느니 과감히 자신의 손으로 끝을 내는 행동이 참으로 주체적인 모습이지 않은가 싶었다.

    비록 인티사르의 자동차든 주체적인 성격이든 아버지의 제력에서 비롯된것일지언정 어쨌든 인티사르의 것이기도 하며 이는 변함없는 사실이다. 때문에 계속 이런 마음가짐과 행동력이 뒷받침된다면 아버지나 다른 남성의 방해로 인생이 뜻대로 풀리지 않더라도 그녀에게 어떻게든 활로가 열리지 않을까 하는 낙관적인 생각도 들었다. 물론 이 작품은 실화를 바탕으로 했으니 너무 낙관적인 생각은 당사자 입장에선 역겨움을 유발할 수도 있다. 허나, 이 작품의 제목에 다른 무엇도 아닌 인티사르의 '자동차'가 들어간다는 것에서 인티사르가 마지막에 자동차를 대한 태도에서 인생의 활로를 개척할 만한 약간의 실마리를 엿볼 수 있었기에 저 낙관적인 생각을 포기하고 싶진 않다.

    때론 자신의 소중한 것을 스스로의 손으로 없애면서 얻게 되는 자존감도 있는 법이다. 우리가 그 자존감을 얻고 지켜나간다면, 어쩌면 답이 없어 보이는 삶이 실마리를 얻은 듯 유려하게 흘러갈는지 모른다. 실제로 이 작품이 마지막까지 씁쓸하게 읽히지 않았다는 점에서 난 내 낙관적인 해석에 더욱 애착이 간다. 반면교사를 삼긴 좀 그렇지만, 예맨처럼 힘겨운 나라에서 저런 결말의 이야기를 접하니 다가올 새해가 전보다 밝게 느껴졌다. 이 기운이 부디 오래 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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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성으로서 이토록 당당한 주인공도 결국 다른 거대한 남성의 권위 하에 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는 것이 너무도 씁슬하네요. 결국은 인티사르의 안전은 그의 아버지가 다른 남성들을 압도할 수 있기 때문에 나오는 것이겠죠. 결국 본인을 억압하는 존재에 빌어 자유를 누린다는게 참 숨막히는 기분일 것 같습니다. 이슬람 뿐 아니라 여러 여성인권낙후사회의 모습을 보면 극단으로 치달은 사회는 왜 항상 여성을 몰아만가는지, 여성이 아닌 자들에게 여성은 어떻게 느껴지는지가 궁금합니다. 좋은 책 잘 읽고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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