얇은 시집. 책을 샀을 당시의 계절이 여름이었다. 왠지 계절에 흠뻑 젖어보고 싶어 순전히 제목만 보고 집어든 책인데 의외로 마음에 들어 아직까지 베개 옆에 눕혀놓고 읽는다. 시집은 한 권당 마음에 드는 시가 하나만 있어도 성공했다고 생각하는 편인데, 이 시집은 대부분의 시가 마음에 들어서 특히 뿌듯했다.
시인이 공들여 선택한 단어의 조합들을 무척이나 사랑한다. 시인마다 다르게 사용되는 어휘들을 짚어가며 서로 다른 느낌을 느껴보는 것 역시 시의 매력 중 하나이다. 그 중에서도 페이지를 펼쳐놓고 오래도록 음미하는 것이 시의 가장 매력적인 부분이라고 생각하는데, 안희연의 시집은 대부분의 페이지마다 길게 멈추어 있었어야해서 완독에 시간이 걸렸다. 시 한 편 한 편마다 중장편 소설같은 서사가 짙게 배어 있다. 그가 들려주는 알 수 없는 이야기속에 풍덩 빠져있자면 잠 잘 시간도 잊은 채 상상의 나래를 끝도 없이 펼치게 된다.
연약하고 처연하다. 마디마디가 슬픔에 절여있는데 어쩐지 바스라질듯한 얄팍함은 아니다. 그렇다고 모든 역경을 이겨내며 정면으로 삶에 투쟁하는 사람은 아닌 것 같다. 그저 그렇게, 쏟아지는 슬픔을 맞으며 묵묵히 걸어가는 듯한 시.
책의 표지도 무척이나 아름답다. 추적 추적 비내리는 밤에 한 페이지씩 넘겨보면 좋을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