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장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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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분과 전체
자료유형
국내단행본
서명/책임사항
부분과 전체 /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지음 ; 김용준 옮김
기타서명
원자물리학을 둘러싸고 나눈 대화
원서명
(Der) teil und das ganze, gesprache im umkreis der atomphysik (2 Aufl.)
개인저자
판사항
개정신판
발행사항
파주 : 지식산업사 , 2005
형태사항
384 p. ; 22 cm
일반주기
원저자명: Werner Heisenberg
키워드
ISBN
8942389058
청구기호
539.7 H473t2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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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등 관련정보
독후감 공모전 우수작
제목: 부분과 전체
학과: 무역학과, 이름: 최*우, 선정연도: 2011
내용:사람들은 구분 짓는 습성이 있다. 지식을 자연의 것과 사회의 것으로 나누었고 물질은 생물과 무생물로 인간을 영혼과 육체로 가치를 선과 악으로, 사람은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구분 지어 왔다. 모든 것이 우리가 그어놓은 선으로 갈라지는 건 필연일까 아니면 인간의 오만일까 부분과 전체는 그런 생각에 대한 이야기 이 다. 대상을 나눈다는 건 인간이 추구하는 단순함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생각 의 한계는 다발적인 인식을 가져다주지 못하고 설사 다양한 범주로 나누었다 할 지라도 집중적인 사색이 이루어 질 수 없다. 인간은 단순한 질서를 추구하기에 오른쪽과 왼쪽으로 구분 짓는다. 주관과 객관이라는 이름의 기준으로 단순한 질서 하나를 만든다. 불완전한 인간에게 혼란이 없는 두 가지 갈래의 구분은 우리의 사 고에는 편안함을 가져다주고 선택을 용이하게 해준다. 단지 대상을 막연히 인지하여 두서없이 생각이 분화될 때보다 많은 이점이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 체계가 진리인가 거짓인가를 떠나 구분이라는 것은 인간에게 꽤나 실용적인 방법이다.
부분과 전체의 저자 하이젠베르크는 양자물리학자로 불확정성의 원리를 주창해 노벨상을 받은 과학자이다. 그는 아이슈타인과 동시대에 살며 상대성이론을 경험했고 당시 절대적 이였던 뉴턴의 역학이 세상을 모두 설명해 주지 못한다는 것을 직접 증명했던 인물이다. 하지만 하이젠베르크는 뉴턴이 틀렸다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뉴턴의 역학은 이미 그 자체로 자기 완결성을 띄는 진리라고 평가한다. 모순일 수밖에 없다. 절대적인 시간과 절대적인 적용을 전제로 한 뉴턴 의 역학과, 시간과 공간의 뒤틀림을 설명하는 아이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동시에 수용한다는 건 왼쪽과 오른쪽이 하나라고 주장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하지만 빛 이 파동이자 입자라는 모순이 보편적인 가치인 것처럼 그의 이론은 진실로 여겨 진다. 그는 책의 말미에 자신의 역할은 새로운 토론의 장을 마련하는 것이라고 말 한다. 현대 원자물리학은 대상을 이루는 가장 작은 단위를 이해하는 특성을 지니 기에 그는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수학적 공식 하나에 두지 않고 철학적 사색과 고찰을 계속한다. 그는 아집에 사로잡히지 않고 순수하게 토론하며 진리를 구축하고자 했던 과학자였던 것이다.
넓은 범위의 사람들이 '전체'를 찾는데 동참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그의 말에 꽤 오랜 시간 의식의 저편으로 미뤄두었던 생각 하나가 고개를 들었다. 정의란 무엇일까. 언뜻 전혀 상관없는 생각의 흐름으로 비칠 수도 있지만 10여년의 시간을 법학도란 꿈을 바라보며 살아온 내게는 큰 울림이 있는 순간 이였다. 내게 있어 정의는 하이젠베르크가 몰두했던 자연의 이치라기보다는 올바른 판단이다. 인간은 선과 악을 나누어 두었지만 너무나 많은 가치와 해석이 제시된 지금, 더 이상 절 대적인 선을 단정 지을 수 없다. 모든 사람의 인권과 자유를 보장하자며 시작된 자본주의는 빈부의 차를 매워주지 못한다. 또 그 차이를 줄이기 위해 누군가 행한 기부는 해석에 따라 위선이란 비난을 받기도 하고 자연을 두고 발생하는 개발과 보전의 대립은 누가 올바른가에 대해 말해주지 못한다. 범죄에 대한 처벌과 용서 역시 그 누구도 단정 지을 수 없는 단지 다수의 합의로 결정되는 임시적인 진리 의 조각에 불과하다. 나 역시 질서를 벗어나는 혼란을 꺼리기에 나름의 판단을 내려 보려 하지만 쉽지 않다. 무엇이 어떻게 구성 되었는가 정말로 대상이 실존하는 가를 모르기 때문이다. 사회는 인간의 결합체이다. 하지만 실존하지 않는다, 단지 우리가 그렇게 이름 붙인 것에 불과하다. 인식도 마찬가지이다. 사물이 실제로 존 재하기에 우리가 인지하는 것인지 아니면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범위만큼만 인지하여 이름 붙인 것뿐인 일부에 불과한 것인지 알 수 없다. 공리공론으로 보일 수 있는 이 생각은 진실의 범위를 설정해 주기에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전자를 택한다면 새로운 원리에 대해 폐쇄적일 것이고 후자를 택한다면 인간의 사유 자 체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을 담보하게 되어 한계를 가진다. 여기서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에 착안한 사고를 도입해 보게 된다. 두 가지 모두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다. 사회라는 개념의 허상을 인정하고 실존적인 성격을 덧붙이는 것 이다. 사물이 실제로 존재하지만 우리가 인지할 수 있는 범위에 한계가 있음을 깨 닫고 잠정적인 정의를 내리는 것이다. 당연히 그래야 하고 이미 그렇게 진행되고 있을 거라 생각되는 이 단순한 생각은 의외로 어려운 일이다. 평생을 바쳐 연구를 거듭한 저명한 학자에게 “당신의 이론은 아직 모든 걸 설명해 줄 수 없습니다." 라고 말하는 건 가혹한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식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진실에 다가설 수도 올바른 판단을 할 수도 없다. 개인적으로는 바로 이 부분
에 가장 큰 의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한계가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학문이 생긴 이래로 셀 수 없이 많은 분야가 결합하고 나누어져 부분을 이루었다. 과학자를 떠올리면 생물학자, 천문학자, 물리학자, 화학자 등이 떠올라 쉽게 부분들이 존재함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의 전체는 무엇일까 가장 상위 개념인 과학이라는 이름일까? 물론 그럴 수도 있지만 전체는 동기라고 생각한다. 즉 미생물의 관찰, 위성의 발견, 속도의 계산, 전자의 특성이 전체가 아니라 그것 을 알고자 했던 첫 번째 동기인 호기심이야 말로 과학의 전체라는 것이다. 물론 이 동기는 개인에 따라 달라 질 수 있다. 누군가는 인류를 위해 세균을 연구할 것 이고 또 다른 누군가는 환경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체 에너지를 찾고 있을 것이다. 세분화된 구분과 과정에 침잠하여 자신의 일에 대한 동기를 잊는 다면 그것은 부분으로 전체를 규정하려는 모순일 뿐이다. 한계의 인정은 개인의 동기가 다르다.
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한 사람은 하나의 우주라는 말을 믿는 내게 이러한 인정은 중요하다. 과학에 있어 결과에 해당하는 원리와 규칙, 발명과 발견은 아직 부분이다. 전체는 그 일을 시작했을 때의 동기가 충족되었을 때 이루어진다. 하지만 여기서도 문제가 하나 발생한다. 모든 동기를 올바르다고 할 수 있을까? 분명 잘못된 동기가 존재한다. 살상을 위해 개발되는 핵폭탄이 그러하다. 생명을 빼앗는 행위를 위해 전제되는 동기는 절대로 전체가 될 수 없다. 그렇기에 전체를 결정함에는 정의라는 올바른 판단이 필요한 것이다. 이 정의를 세우는 것이 가장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며 전체이자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하이젠베르크는 나치 집권 하에 시행되던 핵폭탄 개발을 직접적으로 저지했다. 그는 어떤 이유로도 과학이 인간을 시해하는 목적으로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뚜렷한 신념을 가졌고 자신의 안위도 고려하지 않고 실천했던 것이다. 인류를 위한 전체가 무엇인지 분명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올바른 목적을 잊지 않고 산다는 것은 전체를 이루는 가장 빠른 길이다. 하지만 지금의 우리는 가장 중요한 목적을 잊고 있다. 인간의 역사에는 좌익과 우익이 항상 존재한다. 개혁과 보수라는 이름하에 사람을 두 가지로 양분하는 것이다. 이 역시 세분화 되어 중도라는 개념과 상식이라는 용어가 덧붙여지긴 하지만 크게 두 줄기로 이루어진다. 또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대립은 가장 참혹했던 전쟁을 불러왔고 절대적인 선을 위해 존재한다는 종교는 유일신'이라는 가치로 서로를 배척하고 있다. 질서를 위한 구 분이라고 보기엔 너무나 잘못된 부분이 많다. 이 모든 것의 동기인 전체는 인간의 행복일 것이다. 하지만 나누어진 개념들은 전혀 상반된 결과를 가져왔다. 전체가 아닌 부분조차 형성하지 못한 것이다. 대상을 인식하기 위해 논의되어야 할 과학이 대상을 하나하나 제거해 나가고 있는 것과 다르지 않다. 우리는 너무나 쉽게 무엇인가를 나눈다. 생각의 편의를 위해, 선택의 용이를 위해. 하지만 대상은 나
수 없다고 본다. 다만 잠정적으로 나누어 놓는 것일 뿐이다. 왼쪽과 오른쪽의 대립은 변증법으로 귀결되는 것이 합당하다고 본다. 아마 모든 사람들은 헤겔이라는 철학자를 알기 전, 아주 어렸을 때부터 어렴풋이 정반합이라는 원리를 인식했을 것이다. 나 역시 잘 알지 못하는 헤겔의 사유 방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 에는 일면과 양면이 존재하고 그것이 계속해서 결합되는 방법으로 이치가 성립된다는 것이다. 이를 인정한다면 우리가 계속해서 해오고 있는 구분 짓는 행위의 한계를 보완할 수 있을 것이다. 언제나 변증법의 원리에 기초하여 변할 수 있는 과학의 법칙과 같은 결과를 부분으로, 대상으로의 접근을 태동시킨 동기를 전체로 생각한다면 인간이 그토록 추구하는 절대적 진리인 진실이 존재하게 된다.
올바르다는 말을 인간에게만 적용시키지 않는다면 정말 많은 수정이 이루어질 것이다. 선과 악이라는 개념 자체가 사리지고 자연의 이치만이 남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사람이기에 우리에게 적용될 수 있는 올바름을 만들어야 한다. 또 정말로 절대적인 올바름이 존재할 것인지 그렇지 않을 것인지에 대한 것도 확정 지을 수 없다. 우리가 모든 것을 경험해 볼 수 없고 아직 인식하지 못했을 뿐이지 분명 존재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불확정적이다” 는 생각은 인간의 지성에 대한 회의적인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그렇지 못해 발생할 수 있는 문제들을 해결해 준다. 부분에 동화되는 것은 전체와 상충되는 가장 잘못된 일이다. 올바른 판단을 위한 정의를 무엇이라 단정할 수는 없지만 인간을 행복과 선을 위해 필요 한 일을 하기 위해 끊임없이 토론하고 고쳐나가는 것만이 전체가 될 수 있음은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추상적이고 막연해 질서를 추구하는 인간을 혼란에 빠뜨리 는 경우가 일어날 수 있다. 해도 전체가 무엇인지에 대한 생각과 고찰은 끊이지 말아야 한다. 자연의 이치, 종교적 신념을 넘어서는 무엇인가를 찾기 위해서가 아 니라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여 최선의 판단을 할 수 있기 위해 또 진리 그 자체 를 밝히려 하는 숭고한 동기를 위해서도 부분과 전체는 항상 같은 생각의 줄기에 존재하여야 한다. 그렇기에 어쩌면 인간이 나누어야 하는 유일한 인식의 체계는 부분과 전체일 지도 모른다.
학과: 무역학과, 이름: 최*우, 선정연도: 2011
내용:사람들은 구분 짓는 습성이 있다. 지식을 자연의 것과 사회의 것으로 나누었고 물질은 생물과 무생물로 인간을 영혼과 육체로 가치를 선과 악으로, 사람은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구분 지어 왔다. 모든 것이 우리가 그어놓은 선으로 갈라지는 건 필연일까 아니면 인간의 오만일까 부분과 전체는 그런 생각에 대한 이야기 이 다. 대상을 나눈다는 건 인간이 추구하는 단순함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생각 의 한계는 다발적인 인식을 가져다주지 못하고 설사 다양한 범주로 나누었다 할 지라도 집중적인 사색이 이루어 질 수 없다. 인간은 단순한 질서를 추구하기에 오른쪽과 왼쪽으로 구분 짓는다. 주관과 객관이라는 이름의 기준으로 단순한 질서 하나를 만든다. 불완전한 인간에게 혼란이 없는 두 가지 갈래의 구분은 우리의 사 고에는 편안함을 가져다주고 선택을 용이하게 해준다. 단지 대상을 막연히 인지하여 두서없이 생각이 분화될 때보다 많은 이점이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 체계가 진리인가 거짓인가를 떠나 구분이라는 것은 인간에게 꽤나 실용적인 방법이다.
부분과 전체의 저자 하이젠베르크는 양자물리학자로 불확정성의 원리를 주창해 노벨상을 받은 과학자이다. 그는 아이슈타인과 동시대에 살며 상대성이론을 경험했고 당시 절대적 이였던 뉴턴의 역학이 세상을 모두 설명해 주지 못한다는 것을 직접 증명했던 인물이다. 하지만 하이젠베르크는 뉴턴이 틀렸다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뉴턴의 역학은 이미 그 자체로 자기 완결성을 띄는 진리라고 평가한다. 모순일 수밖에 없다. 절대적인 시간과 절대적인 적용을 전제로 한 뉴턴 의 역학과, 시간과 공간의 뒤틀림을 설명하는 아이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동시에 수용한다는 건 왼쪽과 오른쪽이 하나라고 주장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하지만 빛 이 파동이자 입자라는 모순이 보편적인 가치인 것처럼 그의 이론은 진실로 여겨 진다. 그는 책의 말미에 자신의 역할은 새로운 토론의 장을 마련하는 것이라고 말 한다. 현대 원자물리학은 대상을 이루는 가장 작은 단위를 이해하는 특성을 지니 기에 그는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수학적 공식 하나에 두지 않고 철학적 사색과 고찰을 계속한다. 그는 아집에 사로잡히지 않고 순수하게 토론하며 진리를 구축하고자 했던 과학자였던 것이다.
넓은 범위의 사람들이 '전체'를 찾는데 동참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그의 말에 꽤 오랜 시간 의식의 저편으로 미뤄두었던 생각 하나가 고개를 들었다. 정의란 무엇일까. 언뜻 전혀 상관없는 생각의 흐름으로 비칠 수도 있지만 10여년의 시간을 법학도란 꿈을 바라보며 살아온 내게는 큰 울림이 있는 순간 이였다. 내게 있어 정의는 하이젠베르크가 몰두했던 자연의 이치라기보다는 올바른 판단이다. 인간은 선과 악을 나누어 두었지만 너무나 많은 가치와 해석이 제시된 지금, 더 이상 절 대적인 선을 단정 지을 수 없다. 모든 사람의 인권과 자유를 보장하자며 시작된 자본주의는 빈부의 차를 매워주지 못한다. 또 그 차이를 줄이기 위해 누군가 행한 기부는 해석에 따라 위선이란 비난을 받기도 하고 자연을 두고 발생하는 개발과 보전의 대립은 누가 올바른가에 대해 말해주지 못한다. 범죄에 대한 처벌과 용서 역시 그 누구도 단정 지을 수 없는 단지 다수의 합의로 결정되는 임시적인 진리 의 조각에 불과하다. 나 역시 질서를 벗어나는 혼란을 꺼리기에 나름의 판단을 내려 보려 하지만 쉽지 않다. 무엇이 어떻게 구성 되었는가 정말로 대상이 실존하는 가를 모르기 때문이다. 사회는 인간의 결합체이다. 하지만 실존하지 않는다, 단지 우리가 그렇게 이름 붙인 것에 불과하다. 인식도 마찬가지이다. 사물이 실제로 존 재하기에 우리가 인지하는 것인지 아니면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범위만큼만 인지하여 이름 붙인 것뿐인 일부에 불과한 것인지 알 수 없다. 공리공론으로 보일 수 있는 이 생각은 진실의 범위를 설정해 주기에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전자를 택한다면 새로운 원리에 대해 폐쇄적일 것이고 후자를 택한다면 인간의 사유 자 체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을 담보하게 되어 한계를 가진다. 여기서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에 착안한 사고를 도입해 보게 된다. 두 가지 모두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다. 사회라는 개념의 허상을 인정하고 실존적인 성격을 덧붙이는 것 이다. 사물이 실제로 존재하지만 우리가 인지할 수 있는 범위에 한계가 있음을 깨 닫고 잠정적인 정의를 내리는 것이다. 당연히 그래야 하고 이미 그렇게 진행되고 있을 거라 생각되는 이 단순한 생각은 의외로 어려운 일이다. 평생을 바쳐 연구를 거듭한 저명한 학자에게 “당신의 이론은 아직 모든 걸 설명해 줄 수 없습니다." 라고 말하는 건 가혹한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식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진실에 다가설 수도 올바른 판단을 할 수도 없다. 개인적으로는 바로 이 부분
에 가장 큰 의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한계가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학문이 생긴 이래로 셀 수 없이 많은 분야가 결합하고 나누어져 부분을 이루었다. 과학자를 떠올리면 생물학자, 천문학자, 물리학자, 화학자 등이 떠올라 쉽게 부분들이 존재함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의 전체는 무엇일까 가장 상위 개념인 과학이라는 이름일까? 물론 그럴 수도 있지만 전체는 동기라고 생각한다. 즉 미생물의 관찰, 위성의 발견, 속도의 계산, 전자의 특성이 전체가 아니라 그것 을 알고자 했던 첫 번째 동기인 호기심이야 말로 과학의 전체라는 것이다. 물론 이 동기는 개인에 따라 달라 질 수 있다. 누군가는 인류를 위해 세균을 연구할 것 이고 또 다른 누군가는 환경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체 에너지를 찾고 있을 것이다. 세분화된 구분과 과정에 침잠하여 자신의 일에 대한 동기를 잊는 다면 그것은 부분으로 전체를 규정하려는 모순일 뿐이다. 한계의 인정은 개인의 동기가 다르다.
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한 사람은 하나의 우주라는 말을 믿는 내게 이러한 인정은 중요하다. 과학에 있어 결과에 해당하는 원리와 규칙, 발명과 발견은 아직 부분이다. 전체는 그 일을 시작했을 때의 동기가 충족되었을 때 이루어진다. 하지만 여기서도 문제가 하나 발생한다. 모든 동기를 올바르다고 할 수 있을까? 분명 잘못된 동기가 존재한다. 살상을 위해 개발되는 핵폭탄이 그러하다. 생명을 빼앗는 행위를 위해 전제되는 동기는 절대로 전체가 될 수 없다. 그렇기에 전체를 결정함에는 정의라는 올바른 판단이 필요한 것이다. 이 정의를 세우는 것이 가장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며 전체이자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하이젠베르크는 나치 집권 하에 시행되던 핵폭탄 개발을 직접적으로 저지했다. 그는 어떤 이유로도 과학이 인간을 시해하는 목적으로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뚜렷한 신념을 가졌고 자신의 안위도 고려하지 않고 실천했던 것이다. 인류를 위한 전체가 무엇인지 분명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올바른 목적을 잊지 않고 산다는 것은 전체를 이루는 가장 빠른 길이다. 하지만 지금의 우리는 가장 중요한 목적을 잊고 있다. 인간의 역사에는 좌익과 우익이 항상 존재한다. 개혁과 보수라는 이름하에 사람을 두 가지로 양분하는 것이다. 이 역시 세분화 되어 중도라는 개념과 상식이라는 용어가 덧붙여지긴 하지만 크게 두 줄기로 이루어진다. 또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대립은 가장 참혹했던 전쟁을 불러왔고 절대적인 선을 위해 존재한다는 종교는 유일신'이라는 가치로 서로를 배척하고 있다. 질서를 위한 구 분이라고 보기엔 너무나 잘못된 부분이 많다. 이 모든 것의 동기인 전체는 인간의 행복일 것이다. 하지만 나누어진 개념들은 전혀 상반된 결과를 가져왔다. 전체가 아닌 부분조차 형성하지 못한 것이다. 대상을 인식하기 위해 논의되어야 할 과학이 대상을 하나하나 제거해 나가고 있는 것과 다르지 않다. 우리는 너무나 쉽게 무엇인가를 나눈다. 생각의 편의를 위해, 선택의 용이를 위해. 하지만 대상은 나
수 없다고 본다. 다만 잠정적으로 나누어 놓는 것일 뿐이다. 왼쪽과 오른쪽의 대립은 변증법으로 귀결되는 것이 합당하다고 본다. 아마 모든 사람들은 헤겔이라는 철학자를 알기 전, 아주 어렸을 때부터 어렴풋이 정반합이라는 원리를 인식했을 것이다. 나 역시 잘 알지 못하는 헤겔의 사유 방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 에는 일면과 양면이 존재하고 그것이 계속해서 결합되는 방법으로 이치가 성립된다는 것이다. 이를 인정한다면 우리가 계속해서 해오고 있는 구분 짓는 행위의 한계를 보완할 수 있을 것이다. 언제나 변증법의 원리에 기초하여 변할 수 있는 과학의 법칙과 같은 결과를 부분으로, 대상으로의 접근을 태동시킨 동기를 전체로 생각한다면 인간이 그토록 추구하는 절대적 진리인 진실이 존재하게 된다.
올바르다는 말을 인간에게만 적용시키지 않는다면 정말 많은 수정이 이루어질 것이다. 선과 악이라는 개념 자체가 사리지고 자연의 이치만이 남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사람이기에 우리에게 적용될 수 있는 올바름을 만들어야 한다. 또 정말로 절대적인 올바름이 존재할 것인지 그렇지 않을 것인지에 대한 것도 확정 지을 수 없다. 우리가 모든 것을 경험해 볼 수 없고 아직 인식하지 못했을 뿐이지 분명 존재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불확정적이다” 는 생각은 인간의 지성에 대한 회의적인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그렇지 못해 발생할 수 있는 문제들을 해결해 준다. 부분에 동화되는 것은 전체와 상충되는 가장 잘못된 일이다. 올바른 판단을 위한 정의를 무엇이라 단정할 수는 없지만 인간을 행복과 선을 위해 필요 한 일을 하기 위해 끊임없이 토론하고 고쳐나가는 것만이 전체가 될 수 있음은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추상적이고 막연해 질서를 추구하는 인간을 혼란에 빠뜨리 는 경우가 일어날 수 있다. 해도 전체가 무엇인지에 대한 생각과 고찰은 끊이지 말아야 한다. 자연의 이치, 종교적 신념을 넘어서는 무엇인가를 찾기 위해서가 아 니라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여 최선의 판단을 할 수 있기 위해 또 진리 그 자체 를 밝히려 하는 숭고한 동기를 위해서도 부분과 전체는 항상 같은 생각의 줄기에 존재하여야 한다. 그렇기에 어쩌면 인간이 나누어야 하는 유일한 인식의 체계는 부분과 전체일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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