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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제
이것은 월고(月皐) 조성가(趙性家, 1824∼1904, 字 直敎, 號 月皐, 本貫 咸安)가 동문(同門)의 벗인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 1846∼1916, 字 會一, 號 松沙, 本貫 幸州)에게 보낸 서찰이다. 을미사변(乙未事變) 이후 내려진 단발령(斷髮令)에 반발하여 전국적으로 일어난 의병운동(義兵運動)에 송사 기우만이 전라도에서 창의(倡義)한 문제를 말하고 있다. 기우만은 1895년(고종32)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시해되고 이어 단발령이 내려지자 머리를 깎는 치욕은 나라가 망하는 것보다 더한 일이라고 하면서 머리를 깎고 사느니 차라리 머리를 안 깎고 죽는 편이 낫다는 통분의 상소(上疏)를 하였다. 1896년(고종33) 2월 제천의진(堤川義陣)의 창의대장 유인석(柳麟錫, 1842∼1915)의 격문(檄文)이 호남지방에까지 영향이 미치면서 의병봉기의 기운이 짙어져 갔다. 3월 광주향교(光州鄕校)에서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을 모아 규칙을 정하고 전략을 의논하는 등 준비에 철저를 기하였다. 그동안 이러한 소식을 접한 사람들이 속속 모여들어 의병의 형세가 커지자 관리들은 자기들 신변에 위험을 느껴 모두 도피하였다. 이때 장성(長城)의 족숙 성재(省齋) 기삼연(奇參衍, 1851∼1908)이 장정과 군사 300명을 이끌고 와서 합세하게 되자 그 기세는 더욱 높아졌다. 이로써 사실상 호남창의(湖南倡義)의 총수가 되었다. 각 고을에 통문을 보내어 모든 의진(義陣)을 일제히 광주(光州)로 모이도록 하고 광주의 광산관(光山館)을 본영(本營)으로 삼았다. 그러나 고종(高宗)으로부터 의병(義兵)을 해산시키라는 명으로 파견된 선유사(宣諭使) 신기선(申箕善)의 설득으로 해산하고 말았다. 5월에 장성에서 다시 의병을 일으켰으나 10월 16일 왜군에게 붙잡혀 옥고를 치르고 1897년(고종34) 4월에 석방되었다. 1908년 2월 순천(順天) 조계산(曹溪山)의 암자에서 동지 문인들과 다시 거사를 꾀하던 중에 고종이 강제 퇴위 당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북쪽을 향하여 통곡한 후 해산하고 은둔하였다. 이 서찰에서 조성가는 먼저 봄여름 사이의 세 통의 서찰은 모두 되돌아왔으니 한 서찰은 길이 막혀서 되돌아왔으며, 다른 한 서찰은 그대의 집에까지 갔지만 만나지 못해서 되돌아왔으며, 또 다른 한 서찰은 인편(人便)으로 가는 사람이 길을 바꾸어 되돌아오니 매번 상대방에게 보낼 전족(專足, 專伻)을 한 차례 만날 것을 바라왔지만 끝내 보낼 만한 사람을 만나지 못한 채 온갖 어려움 속에 분주한 가운데 상대방을 향한 도도(滔滔)한 일념(一念)을 어찌 일찍이 잠시라도 놓은 적이 없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조금 뒤 고서백(高瑞伯, 高光洵, 1848∼1907)이 월횡(月橫)을 지난 적이 있었지만 그때 나는 이미 산골짜기로 들어갔기 때문에 자기 막내아우 계호(季豪)가 들은 바 나주(羅州)의 모임이 파한 전말(顚末)을 전해주니 얼마나 놀랍고 답답했는지 모른다고 하고, 이달 10일경에 광주(光州)에 우거(寓居)하는 이생(李生)이 와서 말해주기를 “저번에 담대헌(澹對軒)에서 서로 만나고 돌아와서 봄여름 사이 겪었던 일을 대략 들었는데 두렵고 어려운 형편은 지금도 또한 남은 근심이 다 없어지지 않았습니다.”라고 하니 형세가 참으로 그러하겠지만 그래도 오히려 백에 하나 위로되었고 또 장전(長田)에 머물고 있는 자기 일가 사람이 월횡(月橫)에 와서 미중(美中)의 서찰을 전해주었는데 대략 “세 차례의 상소(上疏) 중에 둘 상달(上達)이 되고 하나는 상달이 되지 못한 사유와 근자에 그 춘부장 어른과 함께 보성(寶城) 행차를 하였다.”라는 내용이라서 참으로 이른바 “몸이 빠져나와 노닐게 되었다.”라는 것이라 기쁨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하고는, 자기 일가 사람은 함안(咸安)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자기를 찾아오겠다고 했기 때문에 바야흐로 지금 간절하게 기다리고 있던 차에 이대요(李大耀)가 또 찾아와서 전해준 것은 미중(美中)의 서찰 내용보다 다소 상세하였으니 그가 모두 다 알고 있지 못한 사람임을 알 수 있었다고 한 다음, 이어서 돌아보건대 하늘은 하늘이 되지 못하고 땅은 땅이 되지 못하는 뒤집힌 세상에 국가(國家)의 치욕을 씻어내고 가학(家學)을 염려하고 사림(士林)의 원기를 부지하는 것은 상대방이 책임을 지지 않는다면 아무도 책임질 사람이 있지 않으니 상대방이 그 책임을 져서 대의(大義)를 밝히고 충분(忠憤)을 편다면 족하겠고 일의 성패(成敗)와 형세의 이불리(利不利)는 논할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또 난리 중에 온 가족이 잠시 떨어졌다가 다시 모였지만 그간 집안일은 빠뜨리고 놓친 것이 반드시 열에 아홉일 것이니 상대방의 아우 성초(聖初, 奇宇蒙)가 고생을 겪고 있음을 충분히 상상할 수 있겠다고 하고, 호남(湖南)의 추수는 고루 잘 익었고 그대 전답도 크게 실농(失農)하는 지경에 이르지 않은 것도 또한 한 가지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한 다음, 겁난(劫難)을 겪은 것이 다소 오래되었으니 대소(大小)의 여러 가족들은 생각건대 크게 안정을 찾았는지 물었다. 이어서 진주(晉州)의 일은 호남(湖南)보다 열배 이상 더 들떠 있다고 하고는 봄에 보낸 서찰에서 비록 상세함을 다해 얘기했지만 한 통도 받아 보지 못했지만 생각건대 미리 대비했을 것이라고 한 다음, 자기 아들을 의소(義所, 湖南倡義會盟所)에 보내는 문제에 대해 언급하였다. 자기 아들이 상대방을 보좌하는 것은 백에 하나도 취할 것이 없는데다 나이 많은 부모의 슬하에 있어서 밖으로 나갈 수도 없는 형편이고, 뿐만 아니라 의리상 장차 아주 가까운 인척(姻戚)에게 가는 것은 거의 가정을 보존하지 못하는 것이라서 의소(義所, 湖南倡義會盟所)에 혈성(血誠)으로 간청하여 가족을 데리고 월횡(月橫)에서 50리 떨어진 방장산(方丈山, 智異山) 궁벽한 산골짜기로 들어갔다고 하였다. 그런 다음 자기 아들도 또한 늙었고 자신은 더 늙었다고 하고는, 이생(李生)이 세전(歲前)에 상대방에게 자주 왕래하는 인편(人便)이 있다고 하여 이렇게 소회를 말하니 매번 소식을 전하기를 바란다고 한 다음, 천만(千萬) 자중자애(自重自愛)하시기를 바란다는 말로 서찰을 끝맺고 있다. 이 서찰 말미(末尾)에는 “효술(孝述)은 상(喪)을 당해 돌아왔기 때문에 듣고서 지극히 슬펐습니다. 해마다 난리(亂離)로 떨어져 있어 끝내 집의 아이들로 하여금 달려가 조문(弔問)하지 못하니 유명(幽明) 간에 서로 저버린 것과 정례(情禮, 인정과 예의)를 갖추지 못한 것을 어찌 글로 다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다음에 혹 그 간곡한 마음을 다할 수 있을는지요?”라는 내용의 추신(追伸)이 달려 있다. 이 서찰은 병신년(丙申年, 1896, 건양1) 8월 28일에 발송하였다. 조성가의 󰡔월고집(月皐集)󰡕 권11에 「여기회일(與奇會一)」이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이것은 원본(原本)이고, 문집(文集)에 실린 것은 수록하는 과정에 내용 중 일부가 수정(修訂) 또는 산삭(刪削)되었다.
번역서
서두(書頭), 송사(松沙) / 본문(本文), 봄여름 사이의 세 통의 서찰은 모두 되돌아왔으니 한 서찰은 길이 막혀서 되돌아왔으며, 다른 한 서찰은 그대의 집에까지 갔지만 만나지 못해서 되돌아왔으며, 또 다른 한 서찰은 인편(人便)으로 가는 사람이 길을 바꾸어 되돌아왔습니다. 매번 전족(專足, 專伻) 전족(專足): 서찰이나 물건을 전할 목적으로 특별히 보내는 심부름꾼을 말한다. 전팽(專伻), 전인(專人), 전인(耑人), 전팽(耑伻)이라고도 한다.
을 한 차례 만날 것을 바라왔지만 끝내 보낼 만한 사람을 만나지 못한 채 온갖 어려움 속에 분주한 가운데 그대를 향한 도도(滔滔)한 일념(一念)을 어찌 일찍이 잠시라도 놓은 적이 있었겠습니까. 조금 뒤 고서백(高瑞伯, 高光洵, 1848∼1907) 고서백(高瑞伯): 고광순(高光洵, 1848∼1907)을 말한다. 한말 의병장으로서 자는 서백(瑞伯), 호는 녹천(鹿川), 본관은 장흥(長興)이다. 1895년(고종32) 명성황후(明成皇后) 시해사건에 이어서 단발령(斷髮令)이 내려지자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 1846∼1916)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좌도 의병대장에 추대되었다. 이후로도 계속 항일의병활동을 지속하다가, 1907년 성재(省齋) 기삼연(奇參衍, 1851∼1908)의 호남창의회맹소(湖南倡義會盟所)에 소속되어 지리산 연곡사(鷰谷寺)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이 월횡(月橫) 월횡(月橫): 경상남도 하동군 옥종면 월횡리를 말한다.
을 지난 적이 있었지만 그때 나는 이미 산골짜기로 들어갔기 때문에 제 막내아우 계호(季豪) 제 막내아우 계호(季豪): 조성가(趙性家)의 막내아우 조성주(趙性宙, 1841∼1918)를 말한다. 자는 계호(季豪), 호는 월산(月山)이다.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1798∼1879)의 문인이다.
가 들은 바 나주(羅州)의 모임이 파한 전말(顚末)을 전해주니 얼마나 놀랍고 답답했는지 모릅니다. 이달 10일경에 광주(光州)에 우거(寓居)하는 이생(李生) 이생(李生): 미상 ⑥ 담대헌(澹對軒): 전라남도 장성군 진원면 진원리에 있다. 월고(月皐) 조성가(趙性家, 1824∼1904)의 스승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1798∼1879)가 만년에 학문을 강론하고 후진을 양성하던 정사(精舍)이다.
이 와서 말해주기를 “저번에 담대헌(澹對軒)에서 서로 만나고 돌아와서 봄여름 사이 겪었던 일을 대략 들었는데 두렵고 어려운 형편은 지금도 또한 남은 근심이 다 없어지지 않았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형세가 참으로 그러하겠지만 그래도 오히려 백에 하나 위로되었습니다. 이어서 또 장전(長田) 장전(長田): 전라남도 담양군 창평면 장화리 장전마을을 말한다.
에 머물고 있는 제 일가 사람이 월횡(月橫)에 와서 미중(美中) 미중(美中): 이광수(李光秀)의 자이다.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 1846∼1916)의 벗이다. 나머지는 미상.
의 서찰을 전해주었는데 대략 “세 차례의 상소(上疏) 중에 둘 상달(上達)이 되고 하나는 상달이 되지 못한 사유와 근자에 그 춘부장 어른과 함께 보성(寶城) 행차를 하였다.”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오호라! 이것은 이른바 “몸이 빠져나와 노닐게 되었다.”라는 것이라 기쁨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제 일가 사람은 함안(咸安)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저를 찾아오겠다고 하였기 때문에 바야흐로 지금 간절하게 기다리고 있던 차에 이대요(李大耀) 이대요(李大耀): 미상.
가 또 찾아와서 전해준 것은 미중(美中)의 서찰 내용보다 다소 상세하였으니 어찌 그가 모두 다 알고 있지 못한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돌아보건대 하늘은 하늘이 되지 못하고 땅은 땅이 되지 못하는 뒤집힌 세상에 국가(國家)의 치욕을 씻어내고 가학(家學)을 염려하고 사림(士林)의 원기를 부지하는 것은 그대가 그 책임을 지지 않는다면 누구로 하여금 그 짐을 지게 할 수 있겠습니까. 대의(大義)를 밝히고 충분(忠憤)을 편다면 족하겠습니다. 일의 성패(成敗)와 형세의 이불리(利不利)는 옛 현인(賢人)은 논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이미 안정되었으니 이보다 더한 다행이 없습니다. 온 가족이 잠시 떨어졌다가 다시 모였지만 그간 집안일은 빠뜨리고 놓친 것이 반드시 열에 아홉일 것이니 성초(聖初) 성초(聖初): :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 1846∼1916)의 아우 기우몽(奇宇蒙, 1852∼1907)의 자이다. 호는 백수(白水)이다.
가 고생을 겪고 있음을 충분히 상상할 수 있겠습니다. 호남(湖南)의 추수는 고루 잘 익었고 그대 전답도 크게 실농(失農)하는 지경에 이르지 않은 것도 또한 한 가지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겁난(劫難)을 겪은 것이 다소 오래되었으니 대소(大小)의 여러 가족들은 생각건대 크게 안정을 찾았겠지요? 진주(晉州)의 일은 호남(湖南)의 경우보다 열배 이상 더 들떠 있습니다. 봄에 보낸 서찰에서 비록 상세함을 다해 말씀드렸지만 하나도 받아서 보지 못한 것은 생각건대 미리 대비하셨을 것입니다. 제 아들이 그대를 보좌하는 것은 비단 백에 하나도 취할 것이 없는데다 나이 많은 부모의 슬하에 있으면서 밖으로 나갈 수도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의리상 장차 아주 가까운 인척(姻戚)에게 가는 것은 거의 가정을 보존하지 못하는 것이라서 스스로 집안을 반으로 잘라내었습니다. 그리고 의소(義所, 湖南倡義會盟所)에 혈성(血誠)으로 간청하여 가족을 데리고 산골짜기로 들어갔으니 월횡(月橫)에서 50리 떨어진 방장산(方丈山, 智異山)의 궁벽한 곳입니다. 제 아들도 또한 늙었으니 그 아비는 모름지기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생(李生)이 세전(歲前)에 이르기를 “자주 왕래하는 인편(人便)이 있습니다.”라고 하니 매번 소식을 전하여 이렇게 소회(所懷)를 말씀드립니다. 천만(千萬) 자중자애(自重自愛)하시기를 바랍니다. 다 말씀드리지 않고 이만 그칩니다. 서찰을 보내는 법식(法式)을 갖추지 못했습니다. / 착서(着署), 병신년(丙申年, 1896, 건양1) 8월 28일. 노계생(老契生) 노계생(老契生): 늙은 벗이라는 말이다.
조성가(趙性家) 배(拜). / 추신(追伸), 효술(孝述) 효술(孝述): 미상.
은 상(喪)을 당해 돌아왔기 때문에 듣고서 지극히 슬펐습니다. 해마다 난리(亂離)로 떨어져 있어 끝내 집의 아이들로 하여금 달려가 조문(弔問)하지 못하니 유명(幽明) 간에 서로 저버린 것과 정례(情禮, 인정과 예의)를 갖추지 못한 것을 어찌 글로 다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다음에 혹 그 간곡한 마음을 다할 수 있을는지요?
원서
松沙
春夏間三書皆繳還 一道梗 一造門未遻 一便人改路矣 每擬一遭專足 而竟未得可遣之人 棲屑百艱之中 滔滔一念 何嘗食息弛也 稍後高瑞伯嘗一過月橫 而吾已入峽 故季豪以所聞羅州罷會顚末傳之 何等驚鬱 今旬間光寓李生來言曰 前相面於澹軒而還 略聞春夏所經歷 危懔艱窘之狀 今亦餘憂未殄云 勢固然矣 而猶慰百一 繼又見長田留鄙族入月橫 傳美中書 槩言三疏二達一未達之由及近日與其家嚴偕作寶城行 吁 是所謂脫身遊者乎 喜不可量 族人托以咸安回路訪我 故方苦竢 而李大耀且來矣 所傳稍詳於美書 而豈無渠之所未盡知者乎 顧乾不爲乾坤不爲坤之世 刷國恥念家學扶士氣 公不爲己任 而使誰肩夯哉 明大義攄忠憤足矣 成敗利鈍 昔賢所不論也 今已妥帖 幸莫大焉 闔眷暫離更聚 然其間家務之滲齾 十必八九 而聖初之喫苦 大可想矣 湖秋均登 而貴庄不至大段失農云 亦一幸也 經劫差久 大少諸節 想平平耶 晉之事 不翅浮於湖十倍 春書雖致詳 而一未摭覽者 想綯繩矣 家兒之輪翮 不但百無一取 篤老親下 不得出頭 而義將適出切姻 幾不保家 而産業自至 刳其半矣 血懇義所 絜家入峽 距月五十里 方丈極窮箐也 吾児亦老 其父不須言 李生歲前云 有屢度往來便 番番寄音 以開此懷 千萬千萬 止此 不宣
丙申八月卄八
老契生 趙性家 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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