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런던 미술관 산책 작가 전원경 출판 시공아트 님의 별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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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읽기 전엔 런던 유명 미술관들의 대표작을 소개해주는 평범한 미술 서적인 줄 알았다. 물론 런던 미술관에 대한 선망을 품고 있기에 펼친 책인 만큼 제아무리 평범하더라도 나름대로 만족하며 읽었을 것이다. 하지만 저자의 서문을 읽고서 정말이지 본문의 내용을 기대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저자는 런던의 유명 미술관들만이 아닌 인지도가 떨어지지만 역사적으로, 또는 미술을 전공한 저자 스스로 생각하기에 중요한 미술관도 몇 곳 다뤘음을 서문에서 밝혔다. 일단 그 점이 흥미로웠고, 더욱 흥미로운 것은 단지 그 미술관의 대표작이 아닌 런던이나 영국 전체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그림 위주로 소개했다는 점이다. 즉 유명하더라도 예컨대 고흐나 얀 반 에이크, 벨라스케스의 그림처럼 내셔널 갤러리를 대표하는 그림이더라도 영국 역사와 무관한 내용의 작품이라면 뒤에 '이외에 꼭 보아야 할 그림'으로 간략히 정리해놓은 것이 제법 신박하게 다가왔다.

    그런데 이런 의문도 들 것이다. 영국의 미술관이나 박물관에서 '메이드 인 영국'은 건물과 경비원밖에 없다는 농담이 있을 정도인데 오로지 영국 작가의 작품만으로 책 한 권을 채우는 게 가능한가? 오죽하면 '해가 지지 않는 나라'일 적에 여러 나라에서 하도 많이 훔친 나머지 양심에 찔려 입장료를 안 받는다고 수군거릴 정도니 정말 말 다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농담은 농담으로 치부하고 싶지만 영국의 화가라고 하면 기껏해야 터너밖에 떠오르지 않아 저자의 서문이 흥미로우면서 반신반의하기도 했다. 물론 내가 노르웨이에 여행갔을 때 그 나라에 뭉크를 제외하고도 정말 멋진 화가가 많다는 걸 알았으니 영국에도 꼭 터너가 아니더라도 그에 못지않게 훌륭한 화가들이 많을 것이다. 그래, 꼭 세계적으로 유명해야 멋지고 훌륭한 화가인 것은 아니니까...


    이 책을 읽고 언젠가 런던을 방문한다면 이 그림들은 꼭 봐야지 하고 구체적인 리스트가 머릿속에 작성됐다. 대표적으로 내셔널 갤러리에선 폴 들라로슈의 <제인 그레이의 처형>, 터너의 <전함 테메레르>, <비, 증기, 속도>, 모네의 <웨스트민스터 하구에서 본 템스 강>, 르누아르의 <우산>을, 코톨드 갤러리에선 마네의 <폴리베르제르의 술집>, 루소의 <톨게이트>가, 테이트 브리튼에선 윌리엄 홀맨 헌트의 <깨어나는 양심>을, 조지프 라이트의 <대장간>, 터너의 <노엄 성의 일출> 등이 보고 싶었다. 개중엔 런던이나 영국과 크게 상관없는 작품도 있고 그저 좋아하는 화가의 대표작이거나 아니면 저자가 소개한 작품의 내용이 흥미로워서 보고 싶은 경우가 많다. 그래서 국립 초상화 미술관이나 테이트 모던에서 작가가 소개한 작품 중엔 눈에 들어오는 작품이 없었다.

    오해해선 안 될 것이 국립 초상화 미술관의 경우엔 소개되는 그림들이 전부 영국의 위인이다 보니 역사를 공부하는 느낌이 들어 가장 이질적이면서 어떤 의미에선 가장 흥미로웠지만, 바로 역사를 공부하는 듯한 그 이질감 때문에 순수하게 그림으로서 끌리는 느낌은 거의 들지 않았다. 반대로 테이트 모던은 폐공장을 현대미술관으로 바꾼 것으로 유명하며 개인적으로 방문해보고 싶은 곳이지만 현대 미술의 특성상 난해하고 기괴한 그림이 많고 - 특히 베이컨의 작품이 그렇다. - 작가가 소개한 작품들 중 영국 문화나 역사를 대변하는 작품이 없어서 읽는 동안 그 이상의 흥미가 생기진 않았다. 오히려 이 미술관에 얽힌 비하인드 스토리가 더 인상적이었다. 예전에 런던의 도시 계획에 관한 책을 읽을 때도 느낀 것이지만 간혹 예산을 감축한 탓에 임기응변으로 오래된 건물을 활용한 공간이 크게 각광받는 케이스가 참 많은 것 같다. 정말 인간 만사 새옹지마랄까.


    생각보다 소개된 작품의 수도 많았지만 저자가 너무 어렵게 글을 쓰지 않아서 좋았고 영국 역사를 잘 모르더라도 맥락 파악에 문제 없었던 것이나, 또 너무 자전적인 이야기에 빠진 나머지 글이 감상적으로 흐르거나 삼천포로 빠지지 않은 것도 이 책에 대해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저자는 자신이 소개한 그림이 미술사적으로, 테크닉적으로 얼마나 뛰어난 작품인지 설명하기보다 저자 자신의 눈으로 정성스럽게 관찰한 결과를 들려주는 느낌에 더 가까웠다. 그 어투 덕분에 진입 장벽이 낮아져 자칫 지루하고 나와 다른 세상의 이야기 같은 그림들의 이야기가 꽤 재밌게 스며들었다.

    아까 저자가 서두에서 밝힌 집필 방침이며 그 예시로 든 두 그림의 비하인드 스토리가 참으로 흥미롭기 그지없었다고 말했었다. 확실히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은 틀린 말이 아니다. 위에서 런던에 가서 보고 싶은 그림들 중엔 저자가 소개해주지 않았으면 그냥 지나쳤을 그림도 많다. 가령 산업혁명을 최초로 화폭에 담은 화가인 조지프 라이트의 이야기나 모네가 런던에 잠시 살았었다는 사실, <제인 그레이의 처형> 속 비극적인 역사는 나처럼 역사나 미술 전공이 아닌 사람이 따로 알기에는 시간이 필요할 만큼 낯선 이야기인 터라 저자가 쏟아내는 이야기에 잠시나마 지적 욕구 및 갈증이 적잖이 해소됐다.

    그런데 한편으론 이런 생각도 든다. 아는 만큼 보이긴 하지만 모르더라도 알기 위해 노력한다면 시간이 조금 걸릴 뿐 어쩌면 더 많은 것을 알게 될 것이라고. 결국 이 책을 쓴 저자도 처음부터 완벽히 모든 이야길 알고서 집필에 임한 것이 아닌 집필하는 도중에도 미술관에 몇 번씩 들러 이야길 풍성하게 만든 것에 가까움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저자가 미술관에 몇 번씩 들르는 동안 겪었던 에피소드나 개인적인 감상, 그림의 배경을 공부한 뒤에 달라진 인상 등을 들려주니 작품들을 직관하지 않았음에도 간접적으로나마 감상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요즘처럼 인쇄물이 풍족해진 세상에선 책에 수록된 그림을 보는 것만으로 간접 체험을 하는 느낌은 받기 쉽지 않은데 저자는 그 어려운 걸 해냈다. 정말 미술관을 사랑하는 작가라 그럴까, 그림을 살펴보는 자세나 열정 등 참 본받아 마땅한 작가가 아닐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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