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핑퐁 작가 박민규 출판 창비 허종헌 님의 별점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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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이 소설을 ‘이상하고 잔인한 판타지’로 정의하고 싶다. 비교적 내용이 간단할 거라는 나의 예상을 뒤엎은 채 하나하나에 상징성이 들어가 있는, 상당히 어려운 책이었다. ‘쥐와 새, 파충류의 뇌’, ‘괴생물체’, ‘초능력’ 등 현실과 괴리가 느껴지는 것들이, 폭력의 중심에 있는 중학생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소설책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들이, 나온다. 우선 제목부터 따 당하는 중학생 소년과 어울리지 않은 ‘핑퐁’이다. ‘핑퐁’은 한글로 ‘탁구’인데 이 소설은 제목에 걸맞게 탁구로 시작해서 탁구로 끝난다, 하지만 끝까지 왜 하필 ‘탁구’였는지 속 시원하게 알려주지 않는 얄궂은 책이다. 줄거리는 비교적 간단하다 볼 수 있다. 왕따를 당하며 일진패거리들의 갖은 폭력들을 당하는 못이 또 다른 왕따를 당하는 모아이라는 인물과 탁구로써 가까워지며 ‘자신의 의견’의 존재를 눈치채가는 과정을 담고 있다.
    소설은 못의 시선을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이상을 시사한다. 학교 내의 불평등한 관계를 통해 사회의 불평등함까지 확장해서 바라보게끔 한다.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시민사회에 대한 절대적 신뢰, 기성세대, 위인만을 기억하는 세상, 끝없이 반복되는 잘못들을 비판한다. 버스에서 에어컨을 트는 것 또한 민주주의이고, 다수로 인해 쉽게 말 꺼내지 못하는 추위로 떨며 피해를 입는 못같은 사람들은 소수자이다. 항상 잘나서 자신 밖의 세상의 존재조차 모르는, 똑똑하지만 무지한 상류층을 상징하는 학생회장은 ‘이번 학기도 잘 이끌었고 큰 사고 없었다’며 모아이와 못의 존재를 삭제한다. 말로써 모든 것이 해결되는 이상적인 세계에 머물며 현실의 소수자는 이상 저편에 치우쳐 두는, 이러한 인물을 등장은 잔인한 상류층을 비판으로 해석된다. 소설 속에는 학생회장 말고도 수많은 잔혹한 인물들이 나오는데 이러한 잔인한 인물들을 소설 속에서 마주치며 든 생각이 있다. ‘인류가 쌓아온 명성과 업적이, 누군가가 그 인류가 되고 말고, 내가 되고 말고가 대체 무슨 상관이냐는 거다’
    ‘핑퐁’은 알고 보면 지구에서 인간이란 존재를 ‘못’이라는 중학생 인물로써 심판하는 책이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못과 모아이에게 ‘인류의 지속과 삭제’라는 선택권을 주게 되는데, 이 선택권을 준 인물은 다름 아닌 판타지적 인물, 세끄라탱이다. 소설을 읽으며 마주한 마지막 부분은 전혀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으나 다시 생각해보면, 유치하기도 하고 ‘갑자기??’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판타지 인물, 세끄라탱에 대해 얘기해보자. 세끄라탱은 처음에 한국에 정착해 탁구 물품을 파는 외국인으로 나온다. 그러나 그는 이상하다. 가끔씩 알 수 없는 소리나 해제끼고, 알고 보니 학교의 ‘조류와 파충류의 뇌를 가진 아이’들이 세끄라탱의 아이라던가, 또 알고 보니 상류층의 편안한 삶만 아는 줄 알았던 학생회장도 세끄라탱의 아이라던가 아무튼 이상한 인물이다. 이 소설에 판타지라는 요소를 첨가해주는 독보적인 인물이고, 모든 것을 아는 특별한 인물이면서, 마지막에는 촉수가 여럿 달린 괴생물체가 본래의 정체이며 마치 지구, 혹은 세계의 관찰자, 관리자 같은 인물로서 나온다. 소설의 마지막에 그는 인류의 대표인 스키너 박스에서 길러진 쥐와 새, 그리고 인류가 깜박해버린 인물인 모아이와 못을 탁구계라는 특이한 공간으로 이끌고 와 인류를 그대로 지구에 둘지 언인스톨(삭제)할지를 전리품으로 걸며 탁구 시합을 시킨다. 인류 대표인 새와 쥐는 스키너 박스에서 탁구공을 정확히 치고 정확한 장소로 보내야 먹이를 먹을 수 있도록 길러져왔다. 그래서 그들은 한 치의 오차 없이 실수 없이 정확히 탁구를 치며 승리로 향하고 있었다. 그러나 시합은 못과 모아이의 승리였다. 왜냐면, 그들이 죽었으니까. 쥐와 새는 시합 중 과로로 사망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새와 쥐는 인류의 대표로서 자격이 충분히 주어진다고 느껴진다. 그들에게 현대 인간상이 그대로 표현된 것이다. 어쨌건 얼떨결에 이긴 못과 모아이는 인류를 언인스톨하기로 결정한다. 그렇게 그들은 인류를 언인스톨하고 각자의 삶으로 돌아갔다. 나는 이 소설이 굉장히 불편했다. 불편한 이유는 별거 없다. 제대로 된 사람이 없어서. 책에 나오는 인물들은 모두 맛이 가있었다(책의 표현을 빌리자면). 일진인 ‘치수’는 ‘그냥’ 못을 괴롭혔다. 못의 하루 기분은 그에게 전적으로 의지하고, 그의 조그마한 선택으로 못은 세상의 멸망까지도 바라는데, 그는 단지 ‘그냥’ 많은 학생들 중 하필이면 못을 선택해 그토록 끈질기게 괴롭힌 것이다. 이런 현실적인 ‘일진’ 말고도, 못생기고 능력이 없어서 모태솔로로 살다가 자위기구가 사랑에 빠진 남자라던가, 9V의 건전지를 씹으며 온 몸에 전류를 흘려보내는 뚱뚱한 남자, 모든 걸 알고 있는 인간이 아닌 존재 등 현실과 상당한 거리가 있어 보이는 인물들까지, 소설은 불편했다. 이 중에 가장 맛이 간 인물로 ‘9V의 뚱뚱한 남자’를 들고 싶다. ‘9V’에 대한 얘기를 마주할 때, 나는 소름이 돋았다. 어쩌면 내가 이 소설 속에 존재하는 상징을 제대로 파악해 낸 유일한 인물이기에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는, ‘혤리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모임’의 일원으로서 못이 모임에 처음 가는 날 만난 사람이다. 모임에서 자위 기구와 ‘섹스’를 하는 사람, 기도하며 벽에 머리를 찧는 사람 등이 있었지만, 9V짜리 건전지를 입에 물고 전기를 자신의 몸에 흘려보내며 ‘에애에애’거리는 뚱뚱한 남자만큼이나 특이하진 못했다. 그는 모임에 모이는 다른 사람과는 달리 ‘세상이 잘못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는 인류의 문명 발달을 근거로 들어 못에게 세상이 잘못되지 않았음을 강력히 피력했다. 산업과 기업이 있기에 인구의 절반은 지금껏 살 수 있고, 그들에게는 공평한 기회가 주어진다며 염치없다고 타박하는 남자. ‘전쟁을 하면 어때, 분쟁이니 억압이니, 인간의 이기니, 집단의 폭력이니, 좀 있으면 어떠냐 이거야.’ 따위의 말을 지껄이면서도 ‘뚱뚱해서’ 혤리 혜성이 왔으면 좋겠다는 웃기는 남자이다. 그는 내가 판단하는 전형적인 멍청한 인물상이다. 현대교육에 맞춰서 교과서에서 찬양하는 부분만 쏙 빼서 찰떡같이 알아듣고는 그 반대편의 어두운 것들은 무시하거나 ‘그래서 뭐?’라고 말하는 뻔뻔한 인간. 여하튼 이러한 개인적 감정을 빼놓고 ‘9V 남자’라는 인물을 살펴보자면, 그는 현대 인간의 문명을 찬양하는 인간으로, 작가는 이러한 부분을 9V 건전지라는 현대문물로써 강조하며 표현했다. 또한 그러면서도 현대의 선진국의 사람들만 주로 걸린다는 비만,에 대해 작가는 또한 그 남자를 통해 표현했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저 남자는 틀렸어’ 저 남자는 세상이 없어지길 바라는 자신의 이유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저 남자는, 살찐 것 자체에 불만이 있는 게 아니다. 그는 귀걸이가 파묻힐 정도로 뚱뚱한 자신의 몸을 남들이 폄하하는 것이 ‘정확히는’ 싫었던 거다. 결국은 ‘비만’이라는 인간 집단들을 소수자로 몰아내어 버리는, 외모지상주의와 관련된 사회의 어두운 단면에 본인이 속해있으면서도 남자는 그것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 그러면서 그에게는 세상이 잘못된 것 하나 없이 굴러가고 있고, 세상이 망했으면 하는 것이다. ‘우리가 진정한 발전을 도모한다면, 현재의 좋은 점에만 매달려있으면 안 된다. 소수자 또한 현실이다’라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부분이었다. 어찌됐건 그는 9V의 건전지들을 입으로 씹다가 감전되어 못이 보는 앞에서 사망한다. 작가는 여기서 9V 건전지를 한명 한명의 인간에 비유한다. 다수인척 병렬로 모여, 모아이와 못 같은 인간들을 감전사시킬 수 있는 하나의 9V짜리 건전지로 비유한다.
    소설 ‘핑퐁’은 내용도 특이하지만, 쓰여진 방식도 굉장히 특이하다. 우선 바로 눈에 띄는 것이 글자의 크기이다. 소설 속에서 강조하는 대사나 짧은 내용은 글자 크기가 이렇게 표현된다. 주로 못의 혼잣말이 이렇게 표현되는데, 마치 못이란 인물이 내게 귓속말로 속삭이는 듯해서 강조하는 기능이 그 역할을 제대로 수행해낸다. 또한 글자 크기가 작아서 그런지, 글자 크기가 작게 표현되는 내용이 슬프고 안타까워서 그런지, 연민의 감정이 들기도 한다. 이건 눈에 바로 띄는 기능적인 방식이고, 눈에 잘 띄지 않는 내용적인 방식도 있다. 흘러가는 듯이 나온 단어들이 자주 뒷부분에 언급이 된다는 거다. 예를 들면, ‘낙지’라는 단어에 상징적 의미를 두어, 그저 순간적으로 흘러갈 줄 알았던 게 뒤에서도 자주 나온다는 거다. 또한 이 소설은 소설 속의 소설들을 꽤 가지고 있다. 그것은 대부분 모아이와의 대화에서 연결되며, 상징들의 집합 같은 느낌을 자아낸다. 앞서 언급한 ‘낙지’라는 것도, 소설 속의 소설(‘방사능 낙지’)에 나온다. ‘그저 낙지는 존재할 뿐인데, 보고 비명을 지른다’ 같은 마치 못, 자신에게 빗대는 방식으로 책에서는 등장한다. 이러한 소설 속의 소설은 지루할 지도 모를 내용을 좀 더 풍성하게 만들어 주기도 한다.
    이 소설의 내용만 다루기에는 그 내용에서 상징하는 바가 너무 크고, 상징하는 것만 다루기에는 이 소설이 대체 뭔지 이해가 안 간다. 그래서 둘 다 다루려고 위에서 열심히 노력해봤지만, 책 속의 상징들이 너무나도 많아 겉핥기식으로만 진행되고 필력과 판단력도 부족해 내용도 이리저리 순서 없이 적은 것 같다. 그러나 이 소설이 의미하는 바는 확실히 알겠다. 지금 사회가 완벽하기는커녕 잘못됐다는 것이다. 민주주의를 근거삼아 소수에게 자연스러운 폭력을 행사하는 사회, 현실의 소수자는 잊고 살아가는 속편한 인간들. 분명 사회는 어딘가 이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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