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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습 ] 부산, 건축과 도시
조선시대 우암동은 한적한 포구마을이었다. 시기를 알 수 없으나 당시 표류한 일본인들의 송환에 앞서 임시로 수용되던 '표민수수소가 설치되어 조선과 일본 연안에서 어로 생활을 하던 표류민이 임시 체류하는 공간으로 사용되었다. 19세기 중반 이후 일본의 메이지 정부가 육식 장려정책을 추진하게 되면서 육우에 관한 수요가 급증하였다. 하지만 전통적인 일본 소는 체구가 작아 경작에는 활용할 수 있었으나, 사용으로는 부적합하였다. 이에 식용 목적의 유럽 소보다 경제적이고, 사역 및 식용으로 활용 가능한 조선 소에 대한 선호도가 높았다. 이러한 배경 아래 조선소의 대일수출은 1876년 개항과 동시에 부산항을 통해 이루어졌으며, 1879년부터 일본에서는 우역을 예방하기 위하여 조선소를 검역하였다.
[ 학습 ] "열림"과 "피란"의 도시 부산
부산부는 1910년 일제 강점 때 만들어진 이름이다. 그 이전, 부산시에 해당하는 행정 명칭은 동래부이다. 동래가 부산 지역을 대표하는 명칭이 된 것은 신라 경덕왕(742~764년) 때이다. 이때 거칠산군에서 동래군으로 바뀐 이후부터 1910년까지 부산 지역은 부산이 아니라 동래였다. 조선시대 부산은 동래부 아래에 있는 부산(『호구총수』, 1759년), 부산면(『동래부읍지』, 1871년)이었다. 고려시대 부산은 면이 아니고 부곡(富山部曲)(『신증동국여지승람』, 1530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