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통과비자(창비세계문학 36) 작가 안나 제거스 출판 창비 안태현 님의 별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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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이 한번도 나타나지 않은 '나'는 독일 출생이지만 친위대를 폭행한 후 수용소로 끌려갔다가 친구 가족이 있는 파리로 탈출한 도망자 신세다. 어느날 지인의 부탁을 받아 비델씨에게 편지를 전달하러 갔으나 그는 이미 죽어있었다. '나'는 작가인 비델씨의 유작과 유품을 회수한 후 그 남자 신원인 것처럼 행세를 한다. 그러다 비델의 아내를 만난다.

    이 책은 1940년 초반의 파리에서의 체류를 배경으로 한 소설로 동독 작가 안나 제거스가 파리-마르세유-멕시코로의 탈출 경험을 기반으로 집필했다.
    1939년 9월 1일 나치당국이 전쟁을 선포한 후 제3제국의 범죄성은 직접적으로 드러났다. 파리는 이미 점령당했으며 게슈타포(비밀경찰)가 사방에 있어 신원확인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도시에 머무르기 위해 신분증과 난민증과 체류비자가, 떠나기 위해서는 통과비자와 출국비자가, 혹은 긴급비자 탈출비자 등,,, 여러 종류의 모든 서류가 필요했다. (작중에서 서류 종류만 12가지가 넘었고 '아리아인 출생증'마저 필요했다) 또한 마지막 서류를 발급하기 전에 첫번째 서류가 만기되어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해야했고 횡령이 비일비재했다.
    가만히 있으면 신원 확인 불가로 수용소로 끌려갔고, 떠나려고 하면 탑승권과 온갖 비자와 만기되기 전 모든 것이 끝나야 할 '행운'이 필요했다. 요컨대 제국 시대의 법 아래에서 범죄 행위를 저지르지 않았음에도 누구나 '범죄자'가 될 수 있었다. (이는 스탈린 치하 제국의 '범죄자'와는 다르다. 소련의 범죄자는 사상이 불순하다는 이유로 사람들을 '범죄자'로 간주하였다.)

    유대인 뿐 아니라 독일 출신이라도 "신원확인"이 안된다면 범죄자로 간주되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 위태로운 시대에 나와의 관계를 증명해줄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에게 전쟁은 끝날 기미도 안보였고, 앞으로도 이 상황이 영원히 유지될 거라 생각했을 것이다. 나의 정체성을 밝혀줄 사람은 아무도, 어디에도 없었다. 그 시대는 분명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곳이 아닌, 아무 것도 시작할 수 없는 곳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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