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떻게 죽을 것인가 작가 Gawande, Atul 출판 부키 hayul 님의 별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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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별적인 의사들은 개별적인 분야의 질병은 잘 해결한다. 하지만, 복합적인 병을 가진 할머니가 찾아왔을 때에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오히려 악화시키는 경우가 많다. 이 때문에 노화 전문의들이 노인들을 치료했을 때, 장애를 일으킨 사람도 적었고, 우울증에 걸린 사람도 적었다. 물론 사망률은 비슷했지만 말이다. 이 말은 좀 더 나은 죽음을 맞이했다는 말일 것이다. 우리 모두가 바라는 죽음 말이다. 덜 두렵고 덜 고통스러운 죽음. 죽음이 아름다울 수는 없지만 우리 모두는 삶의 마지막까지 인간적이기를 바란다.
    하지만 아툴 가완디는 현대 의학은 환자를 살리는 데에 급급하고 있다고 말한다. 어느 의사든 환자에게 죽으라고 말할 수는 없으니 최대한 환자를 살릴려고 노력하지만 결국 환자가 마지막에 다가가는 순간만큼은 의학이 의학이 아니라 생명연장술 같이 느껴지는 장면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정말 이것이 의학이 추구하던 바였을까? 가완디는 인도 사람이고, 인도의 시골에서 할아버지의 죽음이 어떠했는지 잘 기억한다. 할아버지는 늙어가면서 공동체 사이에서 경험이 많은 사람으로서 가지는 일종의 권위를 가지고 있었고 모든 구성원들은 할아버지를 존경했다. 그리고 구성원들이 둘러싼 가운데 할아버지는 임종을 맞이했다. 가완디가 미국으로 의사생활을 와서 접한 노화와 죽음은 다른 것이었다. 가완디는 그녀 아내의 할머니를 통해 이를 설명한다. 아마 인도와 미국 간 문화의 차이가 큰 영향을 미쳤을 거라고 느껴진다. 그녀의 할머니는 가족들에게 ‘얹혀사는’ 것을 싫어했고 정말 많이 아프기 전까지는 혼자서 살며 많은 일들을 혼자 해결하셨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혼자 설 수 없어지는게 사실이고 우리는 차츰 허물어지게 된다.

    그렇게 우리는 의존하게 된다. 우리의 배우자와 자식들에게. 이 말은 주도권을 잃는다는 말과 같은 의미이다. 요양원에 가면 처음 보는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게 될것이고 내가 모르던 사람들이 밥을 먹여주고 씻겨줄 것이다. 아마 그때부터 나의 사생활이란 없는 것이 될 것이다. 나의 신체적 정신적 능력이 없어지는 것도 모자라 생판 모르는 사람에게 의존해야 한다면 비참할 것 같다. 그리고 모두가 겪어보진 않았지만 간접적으로 알듯이, 요양원의 직원들은 보통 노인을 한 사람이 아니라 단순한 환자로서 대하는 경우가 많다. 난 이점에서 내가 배웠던 의료인문학의 내용이 떠올랐다. 의사가 환자를 단순히 환자로 대한다는 문제이다. 환자는 다양한 사회에서의 문제들을 질병과 함께 안고 오지만 보통의 의사들에게 환자는 그저 질병이 있는 개체일 뿐이다. 두 문제 다 수요가 공급을 압도하기 때문이라는 큰 문제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공급을 늘리기 위한 사회적 지원도 부족한 것이 현실이다.
    아마 이런 문제들은 청년층과 중년층은 이런 문제를 잘 느끼지 못한다는 데에서 올 것이다. 우리에게는 삶이 영원할 것 같으니까. 당장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것도 아니고, 근처의 죽음을 경험하기도 어린 나이기 때문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그저 막연하고 작을 뿐이다. 하지만 노인들은 다르다. 그들은 노화로 인한 직접적 문제로 언제든 죽음 근처에 갈 수 있는 병을 가질 수 있다. 젊은 사람들은 흔히 비전이 있다는 말을 많이 한다. 젊음은 현재보다 미래에 대한 고민을 할 수 있도록 하고, 그래서 현재를 포기할 수 있도록 하기도 한다. 하지만 노인들이 삶을 보는 시점은 다르다. 그들에게는 당장 코앞의 미래도 불확실하기 때문에 현재, 여기서 내가 무엇을 하고 느끼는지가 중요하다. 가완디는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가지고 이를 다시 한 번 말한다. ‘톨스토이는 생명의 덧없음과 씨름해야 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관점 사이에 얼마나 깊은 틈이 있는지를 본 것이다.’ 그리고 톨스토이는 이런 깊은 틈을 좁힐 수 있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저 옆에 있어주고 손을 잡아주는 것이다.

    노화로 인해 우리가 쇠약해지고 의존적이 되었을 때, 아이러니하게 들릴지는 모르겠으나, 우리가 바라는 것은 일상의 소소한 일(머리를 어떻게 하고 무엇을 먹을지 같은)에 대해 직접 선택을 하고, 자신의 우선순위에 따라 세상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즉 삶에서 자율성을 갖기를 원하는 것이다. 가완디는 자율성이 불가능하지 않다고 말한다. 한 사례에서, 요양원의 의사는 요양원의 3대 문제(무료함, 외로움, 무력함)를 해결하기 위해 생명이 필요하다는 결단을 내린다. 그리고 요양원에 꽃들과 동물들을 들여오는 데에 성공한다. 이 뒤로 노인들은 생명력을 되찾기 시작한다. 예전의 삶과 자율성을 조금씩 찾아온 것이다.
    아마도 의료인문학이 중요한 이유는 의학계에서의 인문학적 관점이 부재한다는 것 때문일 것이다. 의료전문가들과 학계는 마음과 영혼의 안녕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신체적인 건강을 복구하는 데에만 집중한다. 하지만 우리는 삶이 기울어가는 단계에 우리가 삶을 영위할 방법을 결정할 권한을 그들에게 맡겨 버렸다. 결국 책의 다양한 사례들이 보여주듯이 나이든 사람들은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이할 뿐이다.

    앞까지가 노화에 대한 이해와, 기존 의학계의 관점을 비판하고자 하는 내용이었다면, 이 다음부터는 우리 모두가 노화와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를 다루고 있다. ‘내려놓기’, ‘용기’이다.
    우리는 혹시 우리가 다시 살아날 수 있다면, 어떠한 방법을 써서라도 그 확률을 믿어보고자 한다. 미미한 확률일지라도. 그리고 의사들 또한 비슷한 충동을 느낀다. 그런 기적같은 일이 일어나기를 우리 모두가 바라지만, 노화나 질병 때문에 삶을 고통스럽게 유지해야 하는 사람이라면 이런 의학적인 충동을 자제해야 한다고 작가는 말한다. 당연히 우리 모두는 죽는다. 그리고 이 죽음을 더 고통스럽고 길게 맞이할 것인가, 아니면 평온한 환경에서 인간적인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가 우리에게 남겨진 문제이다. 하지만 나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당장은 후자를 택하겠지만, 막상 내가 환자가 되어 시한부 인생을 살게 된다면, 난 며칠이라도 내 삶을 더 늘리고 싶지 않아할까. 이해할 수 있는 심정이지만 나 또한 이런 선택을 할까봐 두려워진다. 작가도 비슷하게 말한다. ‘환자는 자신이 치명적인 질병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만, 죽어가고 있다는 것까지는 인정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호스피스 케어는 죽음의 방법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제공하려고 했고 모든 사람들이 그것에 동의하지는 않는다. 환자와 주변인들의 희망 때문이기도 하고, 의학계의 관성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을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한다.
    ‘내려놓기’를 위해서 우리는 힘들고 어려운 대화를 나눠야만 한다. 젊은 사람들은 나이 많은 사람들과, 자녀들은 부모들과 이런 얘기를 지속적으로 해야 한다. 무거운 주제이지만, 서로 이해하는 폭도 넓어질 것이고, 부모가 나이가 들었을 때 그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더 잘 알고 실행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의사와 환자와의 기존의 관계들도 재고되어야 한다. 기존의 관계들은 가부장적 관계, 정보를 주는 관계 두가지가 있다. 하지만 환자는 이 관계에서 만족감과 동의를 갖기 힘들 것이다. 그래서 새로운 관계가 등장한다:해석적 관계이다. 이 관계에서 환자와 의사는 충분히 의사결정을 공유할 수 있고, 그래서 환자는 자신이 걱정하는 것이 무엇인지, 자신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분명하고 명확하게 알 수 있다. 이런 내용은 우리가 의료인문학 수업부터 꾸준히 다뤄왔던 관계이지만, (작가도 자신의 학생시절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이상적인 관계인 동시에 전적으로 이론적인 관계처럼 학생들이 느꼈다. 사실 나도 이런 관계가 가장 좋을 것이라는 생각은 갖고 있었지만 이것을 의사로서 어떻게 실행시킬지 항상 모호했었다. 하지만 이 책에서 다양한 사례들과 의사의 태도를 보고 기준점을 가질 수 있게 된 것 같다. 떠오른 좋은 비유가 있다-영화 ‘케빈에 대하여’이다. 에바는 케빈을 낳지만 아기를 돌볼 준비가 되지 않았었고, 케빈에 대해 부정적으로 인식한다. 그렇게 태어난 케빈은 남들과는 약간 다르고 에바는 자신의 아이를 가혹한 무관심으로 대한다. 케빈은 엄마의 관심과 애정을 위해 머리를 써서 에바를 괴롭힌다. 케빈을 애정으로 대했던 아빠와 케빈은 좋은 관계를 유지하지만, 에바와는 늘 크고 작은 다툼이 생기고, 작은 악마는 사이코패스로 성장하게 된다. 나에게 인상깊었던 대사는 이것이다-단지 살짝 안아주면 되는데. 에바가 안으면 울기만 하던 아기가 에바의 남편이 안으면 울지 않고, 그 때 남편이 말한 대사이다. 우리가 좀더 사랑으로 서로를 대할 수 있으면 되는데.
    다시 책으로 돌아와서, 작가는 마지막 장에서 ‘용기’에 대해 말한다. 작가는 용기를 ‘무얼 두려워하고 무얼 희망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지식을 직면할 수 있는 힘’이라고 정의내린다. 그리고 나이들어 병드는 과정에서는 두 가지 용기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하나는 삶은 유한함을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가 찾아낸 진실을 토대로 행동을 취할 수 있는 용기이다. 용기를 가지는 데에 발목을 잡는 것은 삶이 얼마나 남았을지의 불확실성이 아니라, 자신의 두려움과 희망 중에 무엇을 택하느냐에 있다. 그리고 이러한 용기를 존중하는 사람들은 ‘존엄사’라는 개념을 더 지지한다. 누군가가 의미없는 생명 연장을 거부할 때 이를 존중해 주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환자들이 안락사에 의존하게 될까봐이다. 작가는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는 좋은 죽음이 아니라 마지막까지 좋은 삶을 사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나도 가장 가까운 사람을 죽음으로 잃어본 사람으로서 책의 많은 부분이 공감이 되었다. 아마 내가 철학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도 그 일을 계기로 해서였던 듯하다. 우리가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플라톤은 죽음이 축복이라고 말했지만 우리 모두 자신의 존재가 세상에서 완전히 없어지는 것이 두렵다. 그 두려움으로 고통스러운 생명을 가망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연장시킬 것인가, 아니면 현재를 소중히 다루며 가장 인간다운 삶을 살다 죽을 것인가. 이 책은 의사에게도 환자에게도, 끝을 맺을 우리 모두에게도 필요한 책이 아니었나 싶다. 이번 책을 계기로 의료인문학의 내용을 잘 이해하게 되었고, 나 스스로도 기준을 명확히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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