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장자료

원문 등 관련정보

독후감 공모전 우수작
제목: 82년생 김지영
학과: 철학과, 이름: 박*호, 선정연도: 2017
내용: 어떤 주의주장이 넓게 퍼지게 되면, 그 주의주장 내에 구별이 가능한 스펙트럼이 생긴다. 페미니즘도 마찬가지다. 처음 입학했을 때와 달리 요즈음에는 학교에 오가면서 페미니즘과 관련된 현수막이 걸려 있는 것을 항상 보게 된다. 현수막을 걸어놓은 사람들은 어떤 페미니스트인가를 질문하게 된다.
내 관심은 이 작품의 내재적인 요소에 대한 분석보다도 작품의 의도와 그것에 의해 파생되는 정치적 효과에 미쳤다. 가까운 과거에 대한 이해하기 쉬운 연대기적 서술, 주석에 달아놓은 통계 자료, 얇은 책의 두께, 작가의 노골적인 인터뷰를 보면, 『82년생 김지영』이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쓰였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의도를 숨기려는 제스쳐는 보이지 않는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정치는 대의제 민주주의 하에 운위되는 협소한 정당정치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소수자를 응원한다고 말하지만,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페미니즘에 관한 이야기를 하거나 페미니스트를 대면할 때에는 계면쩍어했던 기억이다. 내가 책을 읽으며 생각한 것은 그런 것이다. 이 에세이는 『82년생 김지영』에 대한 감상이자, 내가 미뤄왔던, 페미니스트를 대하는 ‘태도 결정’을 위한 생각들이라고 말해도 좋다. 당연히 나 역시 시대착오적인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닌가, 어쩌면 괜히 ‘적의’라고 불릴 만한 태도를 취하고 있는 건 아닌가, 유의하면서 글을 읽고 썼다.
일본의 비평가 가라타니 고진은 근대문학이 끝났다고 선언한 적이 있다. 가라타니는 문학의 닫힌계 내에서만 사고하지 않았다. 그는 자본과 네이션 체제에 대한 사유에서 문학의 종언 테제를 도출했다. 근대문학에서‘풍경’, ‘내면’, ‘깊이’는 ‘근대국가’가 되기 위한 도정에서 출현한다. 근대문학의 상상력은 거기에서 나타난다. 그러나 이제 문학의 정치적인 상상력과 전위는 끝났으며, 오락으로 남았다는 것이다. 지금은 문학이 과거에 가졌던 정치적, 윤리적 지위는 ‘잔영’만이 남아있을 뿐이고, 그리고 그렇다면 과분한 대우를 받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겠다. 그는 근대 문학의 정치성은 소설로 대표된다고 보았고, 그 때문에 종언 테제는 소설로 한정하고 있다. 표적이 된 것은 일본의 문학일 뿐만이 아니라 한국의 문학이기도 했다. 지금 문학계의 자세한 사정이야 모르지만, 문학 관련 종사자들이 이를 반갑게 여기지는 않을 법하다. 가라타니 고진을 체계적으로 번역하고 있는 조영일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최근에 발표된 한 논문을 보면, 가라타니 고진은 최근 20년간 한국문학 연구자들이 가장 많이 인용한 외국학자였다. 그런데 그와 같은 인기는 최근 들어 많이 주춤한데, 그것은 아마 『근대문학의 종언』이 국내에 소개된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문학이 끝났으니, 자신은 다른 것을 하겠다는 선언은 그동안 그에게 호의적이었던 많은 문학연구자나 비평가들에게 깊은 배신감을 안겨주었다. 그래서 최근 약 5년여 간 한국의 문단이나 학계에서는 이런 그의 주장을 비판(부정)하는 것을 글의 서두로 삼는 게 유행 아닌 유행이 되기도 했다.”, 가라타니 고진, 「옮긴이 후기」,『세계사의 구조』, 조영일 역, 도서출판 b, 2012, p475

이런 오래된 이야기를 꺼낸 것은, 『82년생 김지영』이 어떤 위치에 있는가를 사고하기 위해서다. 『82년생 김지영』이 정치적인 의도를 갖고 쓰였다면, 이런 종류의 작품은 문학의 정치적 책무를 다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러니까, 가라타니의 종언 테제를 비껴갈 수 있을까?
칸트는 판단력을 규정적 판단력과 반성적 판단력으로 나누었다. 이미 구성된 규칙을 적용하는 것이 규정적 판단력이라면, 반성적 판단력은 새로운 규칙을 구성해서 사태를 이해하는 판단력이다. 예술이 다른 영역에 미치는 효과로서가 아니라 예술 자체로 창조력을 갖는다면, 반성적 판단력과 관계하는 지점이라야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82년생 김지영』은 남성 중심적 이데올로기와 그 때문에 피해자가 되는 여성의 구도를 반복하고 있다는 점에서 작가는 규정적인 판단을 했다고 보아야 한다. 이는 이미 확립된 네이션 체제 바깥에 대한 상상이 없는 것이다. 문학이 문학 자체의 창조력을 갖는 동시에 정치적 책무를 다한다는 것은 반성적 판단력이 작동하는 지점, 즉 새로운 정치적 상상력을 만들어내는 데에 있다. 창조력 있는 여성주의 소설이라면, 기존의 남성 중심적 이데올로기 뿐만 아니라 기존의 여성주의적 시각도 넘어서는 주체를 주조했어야 했다. 실패로 끝날 시도일지라도.
아쉬운 대목을 말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김지영이 부푼 꿈을 안고 대학에 입학한 무렵, 그 시절에 대한 묘사로 IMF 이후 상승한 등록금에 대한 이야기와 취업난에 대한 대학생의 부담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런 것에 대해서는 인물들의 비판의식이나 적의는 보이지 않는다. 곧바로 어려운 시절에 괜찮게 지냈던 김지영 집안의 경제 수준에 관한 이야기 이어진다. 여기서는 어김없이 아버지와 어머니의 대결 구도가 등장해서, 부당한 아버지의 공치사에 대한 비판이 묘사된다. 조남주, 『82년생 김지영』, 민음사, 2016, p84-89
김지영과 친구들이 취업준비를 하는 대목에서는 비정상적인 학벌과 스펙에 대한 묘사는 있으나 역시 문제의식은 없고, 남자와 여자의 단순한 대결 구도로 끝맺는다. 조남주, 『82년생 김지영』, 민음사, 2016, p95-97

이러한 단순한 구도에서도 대한민국의 성차별은 분명히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누구나 알고 있는 것을 다시 폭로하는 데 자족하면 안 된다. 문학의 종언 테제를 부정하는, 문학의 존엄을 이어가는 작품이라면 다른 상상이 있었어야 했다. 일국 내의 자신의 교환관계에서의 부당한 처지만을 인지하는 주체는 그의 윤리적 타당성을 금방 잃어버린다. 작품 내의 여성들은 시종일관 체제 내에서의 인정투쟁, 곧 자본의 인정을 받고 싶어 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를테면, 작품 속의 인물이 대한민국에서만의 문제가 아니라 인류 일반에 있어 나타나는 성차별적 부조리, 나아가서 그것을 만드는 요소이자, 여타 문제의 주요한 요소인 자본에 대한 문제의식을 서술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김지영을 비롯한 인물들은 노동시간 단축에 대해 고민을 해볼 수도 있었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진다면, 남자와 여자로 구분되는 통념적인 대립을 무화시키고 약자 일반에 보편적인 윤리의식을 담지하는 강력한 정치적 주체가 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런 문제의식에 관해, 성별 분업에 대한 내 생각을 예로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선진국을 보면 성별에 따른 분업이 지양되고 자유로운 선택에 따라 직업을 선택하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한 국가의 차원으로 보면 성별 분업이 극복된 듯이 보일지라도 거시적으로 보면 그렇지 않다. 선진국에서 성별 분업이 줄어든 듯 보인다고 해도, 그것은 출산을 하지 않는 대가로 얻은 일이다. 개발도상국의 노동자는 일자리를 찾아서 선진국으로 떠난다. 선진국은 개발도상국에서 부족한 인구를 유입시켜서 인구의 부족분을 조율한다. 또한 선진국을 보면 노동시간이 줄어서 육아와 노동의 병행이 쉽게 된 환경이 만들어진 듯이 보이나, 선진국의 개선된 노동 환경은, 세계화된 자본이 한 국가 내에서 자급자족하는 시스템을 붕괴시키고 한 국가 내의 산업 구조가 외국에 의존하도록 만듦으로써, 개발도상국 혹은 개발도상국의 국민이 선진국의 국민이 피하는 업종을 도맡게 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총체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선진국은 성별 분업을 착취로써 지양하고 있다. 실천의 심급은 여기까지 미쳐야 한다.
문학 자체의 창조력을 포기하고 정치적 의도만을 달성할 셈이라면, 문학이 가진 상투를 벗어내는 것이 정직하다. 대신에 데모를 할 수도, ‘내러티브 탐사 보도’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가라타니는 인도인 작가 아룬다티 로이의 예를 들고 있다. “인도인 작가 아룬다티 로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녀는 1997년 영국의 부커상을 받았는데, 그 작품이 베스트셀러가 되어 매우 유명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처녀작으로 상을 받은 후, 소설은 쓰지 않고 인도에서 댐건설 반대운동, 반전운동 등으로 분주합니다. 발표하는 저작도 그런 종류의 에세이뿐입니다. 구미에서 인기를 얻은 인도 작가는 아메리카나 영국으로 이주하여 화려한 문단생활을 보내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왜 소설을 쓰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로이는 자신은 소설가이기 때문에 소설을 쓰지 않는다. 쓸 것이 있을 때만 쓰며, 이런 위기의 시대에 무사태평하게 소설 따위를 쓰고 있을 수는 없다는 식으로 답하고 있습니다.
로이의 언동은 문학이 책임지고 있던 사회적 역할이 끝났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문학으로 사회를 움직일 수 있는 것처럼 보이던 시대가 끝났다고 한다면, 이제 진정한 의미에서 소설을 쓴다는 것도 소설가라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그렇다면 소설가는 그저 직업적 직함에 지나지 않는 것이 됩니다. 로이는 문학을 버리고 사회활동을 택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문학’을 정통으로 계승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가라타니 고진, 『근대 문학의 종언』, 조영일 역, 도서출판 b, 2006, p63-64
문학의 ‘잔영’이 만들어내는 시차를 이용해서 자신의 의도였던 ‘내러티브 탐사 보도’를 했던 것이라면 영리한 전략이다. 작가는 가라타니의 종언 테제를 비껴나가지 못했거나, 종언 테제를 받아들이고 문학을 수단으로 이용했다. 그러나 작가가 가졌던 정치적 의도는, 적어도 지금의 네이션 체제의 근본적인 변화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긍정할 수가 없다. 『82년생 김지영』은 자족하고 위로받을 여성들, 우리 사회의 교양을 내면화할 남성들에게 필요한 소설에 다름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새로운 정치적 상상력을 불어넣는 글쓰기는 어떻게 가능한가? 발터 벤야민은 쓰고 있다.

“사적 유물론자는 역사의 서사적 요소를 포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역사는 그에게 어떤 구성의 대상이 되는데, 그 구성의 장소를 이루는 것은 공허한 시간이 아니라 특정한 시대, 특정한 삶 그리고 특정한 작품이다. 그는 그 시대를 사물화된 ‘역사적 연속성’을 폭파하여 거기에서 끄집어낸다. 그래서 이런 식으로 그는 한 시대에서 한 특정한 삶을, 필생의 업적에서 한 특정한 작품을 캐낸다. 이러한 구성에서 얻어지는 수확은, 한 작품 속에 필생의 업적이, 필생의 업적 속에 한 시대가, 그리고 한 시대 속에 전체 역사의 진행 과정이 보존되고 지양되어 있다는 점이다. […] 역사학의 대상은 어떤 단순한 사실들의 뭉치가 아니라 오히려 과거라는 씨줄이 현재라는 직조 속에 엮어 넣어진 상태를 나타내는 일군의 소수의 실들이다. (우리가 이처럼 엮어 넣어진 상태를 단순한 인과율적 결합과 동일시한다면 그것은 잘못일 것이다. 그런 상태는 오히려 일종의 변증법적 직조이다. 그 실들은 수백 년 동안 잊혀질 수도 있지만, 현재의 역사 진행은 그러한 실들을 비약적으로 또 눈에 띄지 않게 다시 붙잡을 수 있다.) 순전한 사실성에서 벗어난 역사적 대상은 어떠한 ‘기리는 평가’(Würdigung)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러한 역사적 대상은 현재성(Aktualität)과의 애매모한한 유사점들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현재성이 해결하지 않으면 안되는 엄밀한 변증법적 과제 속에서 구성되기 때문이다.” 발터 벤야민, 「수집가이자 역사가 에두아르트 푹스」,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폭력비판을 위하여/초현실의 외󰡕, 최성만 역, 도서출판 길, 2008, p261, p280


모든 사태를 기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글쓰기는, 가치판단에 따라 사태의 경중을 고려하여 사태를 기입하거나 빼는 ‘체계’를 갖추어야 한다. 체계는 체계성을 갖는다. 체계성을 가능하도록 하는 것은, 칸트 식으로 말하자면, 우리의 이성개념, 곧 이념이다. 칸트가 직접 말하진 않았지만, 이념을 추동하는 것은 비의식(무의식이라고 말해도 좋다.)이다. 그는 이론이성과 이념의 한계를 규정했지만, 실천이성의 요청에 따라 다시 폐기했던 이념을 불러온다. 이념의 실재성은 도덕법칙의 표상으로 구제되는데, 그 표상이 어떻게 가능한가를 따져 물으려면 우리는 의식에 현전하지 않는 어떤 것을 추적하는 과정, 이를테면 정신분석과 같은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벤야민은 인용문에서 역사를 서술하는 비의식적 주체가 탄생하는 과정에 대한 분석까지 나아간다. 역사는 구성의 대상이라고 말하는데, 상대주의적 관점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사물화된 역사적 연속성을 폭파하여야 끄집어낼 수 있는 어떤 특정한 ‘장소’는, 전체 역사의 진행 과정을 재배열할 가능성으로서의 ‘내적인 분열’이다. 내적인 분열을 해소하는 것은 그 장소를 역사에 기입하는 것인데, 그러려면 전체 역사의 과정은 재배열되어야 한다. ‘장소’는 역사가의 현재성에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될 무엇으로 위치하는, 어떤 비의식적 동기다. 벤야민의 그것은 물론, 벤야민식의 사적 유물론의 체계성의 분열일 것이며, 그것을 해결하고자, 벤야민의 비의식적 주체가 탄생한다. 이런 점에서, 역사는 해결해야 할 현재로부터 구성된다. 타자(‘특정한 작품’)에게서 분열되어버린 동일성을 탈구축하는 운동. 그것이 벤야민이 말하는 사적 유물론자가 포기하지 말아야 할 서사적 요소다. 벤야민이 말하는 글쓰기를 육화하고 있는 작가의 예로, 이청준이 적당하다. 조남주의 글쓰기와 좋은 대조를 이룬다. 인용한다. “소설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마다 매번 곤혹감을 느끼는 것은 우선 ‘소설이 무엇이냐’라는 물음에 대한 시원한 대답을 마련할 수 없다는 점이다. 그야 소설이란게 원래 그런 것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 바꾸어 말해 소설은 우리 삶의 반영이자 꿈의 표현이 아닐 수 없으므로, 그 삶을 몇 마디 간단 명료한 수사로 정의내릴 수 없듯이 소설의 이해 또한 각자의 모색과 발견의 과정을 드러내 보일 수 있을 뿐 영구불변의 본질적 정의는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는 이야기다. 의미론상으로 우리 삶에 대한 최종적 이행 도달할 때 그 확정의 삶은 더 이상 지속될 가치가 없는 것처럼, 소설 또한 우리의 미확정의 삶과 함께 영구한 모색과 논의의 열린 도정에 있어야 할 정신 상태의 한 표현 기제라는 점에서 더욱 그러할 터이다. [...] 하지만 소설 일이란 원래 그 같은 삶의 질곡과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견디고 이겨 넘으려는 희망(전망)과 도전의 여정 아닌가. 더욱이 소설을 자기 삶의 길로 선택한 사람은 그의 삶이 아무렇게나 끝날 수 없음처럼 그것이 아무리 어렵더라도 계속 그 길을 가야 한다. 그것이 비록 별 성취를 거둘 수 없을 때라도 자신의 삶 때문에 계속 소설을 써야 한다. 그리고 나는 지금까지 대개 그렇게 해온 셈이다.”, 이청준, 「나는 왜, 어떻게 소설을 써왔나」, 신화의 시대, 물레, 2008

이런 관점에서 평가해 볼 때, 높이 평가할 만한 여성주의 소설이라면 새로운 여성상을 기입하는, 그래서 우리의 통념 전체를 재배열하게 할 수 있는 소설이라야 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어찌 글쓰기뿐이겠는가. 우리 일상에서의 판단에도 이질적인 새로움, 즉 타자에의 개방성은 기존의 어떤 이념보다도 윤리의 기본 조건일 것이다. 윤리는 정치의 빈틈에 자리한다. 에마뉘엘 레비나스에 따르면, 정치는 어떤 경제성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그러나 윤리는 다르다. 레비나스에게 경중을 따질 수 있는 ‘도덕성’은 윤리에 속하지 않는다. 순수하게 윤리적인 사태는 경제성을 벗어난다. 계산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계산이 불가능한 타자의 얼굴에 응답하는 것이다.
레비나스는 정치가 반드시 순수한 윤리적 사태, 즉 타자에의 책임에 감시를 받아야 한다고 말하지만, 정치를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었다. 정치가 없는 순수주의는 악의를 가진 이들의 먹잇감에 다름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정치에 참여할 수밖에 없으며 그것이 가진 경제성의 폭력 속에서 무한한 업보를 쌓게 된다.
자크 데리다는 레비나스의 윤리학을 수용하지만, 순수주의에 매몰되지 않는다. 그는 자기 동일성이 이질적 타자와 마주한 지점에서 겪게 되는 아포리아에서의 ‘결단’을 요구한다. 그것은 기존의 합리적 질서, 즉 규정적인 판단을 존중하면서도 타자와의 마주침에서 필요한 반성적인 판단을 해야 하는, 두 판단이 교차하는 좁은 문을 지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실존적인 삶의 상식과도 부합하지 않는가.
그 동안 여성들이 받아온 차별을 만회하기 위해 페미니즘에 무조건적인 지지하는 것, 혹은 소수자를 위한‘정체성 정치’가 아니라 체제의 모순을 가능하게 하는 물적 토대를 바꾸려는 움직임. 이것들은 모두 업보를 각오한 결단이어야 하는 셈이다. 우리는 언젠가 윤리와 정치가 불화하지 않을 수 있는 ‘도래할 민주주의’를 꿈꾸며 결단의 순간들을 지나야 한다. 타자를 만났을 때의‘태도 결정’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언제나 나의 태도를 부스러뜨릴 각오를 한다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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