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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감 공모전 우수작
제목: 성학집요
학과: 바이오정보전자공학과, 이름: 제*우, 선정연도: 2013
내용: “이 시대의 학문이란 무엇일까? 또한 이 시대에 필요한 사람은 누구일까?” 율곡의 성학집요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며 생각했다. 400여 번이 넘는 계절의 뒤바뀜을 건너 현시대의 ‘학문’을 배우는 ‘사람’들 중 한명으로써 율곡이 선조에게 올린 글을 읽는 순간순간, 그의 글귀 하나하나들은 나도 의식치 못하는 새 딱 딱히 굳어만 가던 내 생각과 마음가짐을 매서운 죽비로 내려치는 것과 같았다. 너무 가슴 아팠으며 또한 감사했다. 그리고 너무나 안타까워 가슴이 먹먹했다. 제왕학의 입문서라 할 수 있는 성학집요에서는 율곡이 선조를 성인의 길로 이끌기 위해 그리고 그를 통한 유가적 이상정치의 실현과 조선의 안녕을 얼마나 염원하는지 생생히 나타나 있었다. 독일의 철학자 니체는 “글로 쓰인 모든 것들 중에서 나는 오직 피로 쓰인 것만을 사랑한다.”라고 했던가? 율곡이 선조에게 보내는 이 책 역시 그 무엇에 비견할 바 없이 그의 혼이 오롯이 들어있는 저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논어, 맹자, 대학을 포함하는 사서 그리고 육경 등, 성학집요에는 “성인이 갖 추어야 할 배움의 모든 것”이 압축되어 들어있다 할 수 있다. 동양철학, 사상의 절대고전이라 할 수 있는 위와 같은 저서들을 한권한권 독파하기에는 현대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옛 조선의 많은 선비들에게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율곡은 선조가 참된 성군이 되길 바라는 절실한 마음에서 성학집요를 엮어 올렸다. 구체적으로 통설(統說) 수기(修己)[자기수양] 정가(正家)[집안을 바로잡음] 위정(爲政)[정치를 행함] 성현도통(聖賢道統)[성현의 계통과 진리의 전승] 이렇게 5절로 구분해 편집되어 있는 성학집요는 각 절에도 여러 종류의 장들로 구분하여 성리학에서 얘기하는 여러 철학적 이론들과 사상들을 친절히 설명하고 있다. 그 무엇보다 수기를 강조한 율곡은 성인이 되기 위해 자기수양이 얼마나 요구되는지 보여주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율곡이 하나하나 덧붙인 주석은 자신의 관점을 바탕으로 제시된 입장을 다시금 해석함으로써 딱딱할 수 있는 내용을 한결 부드럽게 만드는 효과를 가진다.
군자란 무엇인가? 성인은 또한 무엇인가? 율곡은 성학집요에 성인이 갖추어야할 자질과 덕목을 하나하나 제시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는 무엇 때문에 선조를 성군의 길로 향하게 하려 그토록 노력한 것일까? 조선 중기 선조가 왕위에 올랐을 때는 왕위에 대한 철저한 준비과정도 그리고 그를 지지할 확고한 세력도 뒷받침 되지 않은 불안정한 상태였다. 그렇기에 왕권을 강화하려는 선조와 유가적 이념을 바탕으로 왕권을 견제하려는 관료집단과의 긴장관계로 군신간의 원활한 소통이 어려운 시대였다 할 수 있다. 어느 누구도 온전히 상대방의 생각과 마음을 귀 기울여 듣지 못함에 따라 발생하는 빈번한 갈등에 서로 간 실망만 쌓였다. 이는 다음과 같은 율곡의 말에서 간접적으로 들어나는 바이다. “예로부터 임금과 신하가 서로 마음을 알지 못하면서도 공적을 이루었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그랬기에 율곡은 유교적 이념에 충실해 군주를 성군으로 이끌기를 바라는 마음 에서 성학집요를 엮었다. 조선 역시 군주를 중심으로 구성된 국가로써, 신하의 역할은 때로 제한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결국엔 군왕의 역할이 다시금 강조되는데, 율곡은 옛 요순임금과 같이 선조가 성인의 길을 따름으로써 국가와 백성을 위하게 이끄려 애썼다. 철인에 의하여 다스려지는 플라톤식 이상국가와 대등하게 유교적 사회에서 역시, 왕의 도덕적 자질이 나라의 안녕과 백성의 복리에 직결된 사회 시스템이기에 그 무엇보다 왕의 수양이 중요했다. 그렇기에 율곡은 유교적 이념을 기반으로 하여 몸가짐을 단속하는 법에서부터 덕을 높이는 법, 정치의 근본과 절차, 그리고 인사관리 등 다방면으로 국왕이 다양한 자질을 지니길 바라고 또한 요구하였다.
그렇다면 율곡이 생각한 성인, 혹은 현 시대의 말로 바꾸어 볼 때에 ‘인재’란 누구이며 어떤 자질을 지닌 사람을 말하는 걸까? 결과적으로 국가의 정치, 경제, 민생, 국방을 안정시킨다면 군주를 성군이라 일컫을 수 있는 것일까? 결과지상주의에 빠진 현 사회에서는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성리학은 자기수양을 중요시했다. 성리학은 언제나 경건한 마음가짐으로 사람과 세상 그리고 자신을 경계하고 두려워하라 요구한다. 또한 자신을 굽히는 것을 부끄러워도 말고 남을 이기려는 사사로운 마음 역시 내려 놓으라 말한다. 게으름 또한 그 무엇보다 나쁜 기질이라 말하며 온 마음을 다해 아름다운 자질을 완성하라는 성리학. 이런 인간상을 율곡은성인이자 시대의 ‘인재’라 생각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과정보다는 결과, 하나의
행동보다는 화려한 언변에 쉽게 현혹되는 우리네 사회에서는 이러한 유교적 개념이 고루하고 따분함에 넘어 답답하게 느껴질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살펴볼 필요가 있다 생각한다. 아니, 고민해 볼 필요가 반드시 있다 생각한다. 과연 우리가 배우고 있는 것은 ‘학문’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인지, 그리고 배우는 학생의 입장에서 ‘학생’에게 요구되는 자질은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가 과연 제대로 잘 배워나가 시대가 요구하는 ‘인재’가 되고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여겼다. 율곡이 말하는 배움의 자세와 지금의 학생들의 자세는 너무나 큰 간격이 있는 것 같았다. 무엇 한쪽을 일방적으로 맞다 틀리다하기 전에 이 차이가 무엇에서 기인하는지부터 알아볼 필요가 있다 생각했다.
많은 학생들은 오래전부터 자신도 모르게 가슴 한 켠에 불안을 담고 생활하고 있다. 좁디좁은 취업난, 이를 위해 요구되는 학점, 대외활동, 그리고 각종 영어점수들. 우리는 불안하기에 혹은 너무 두렵기에 현실을 외면하기도 하고 눈앞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급급해 문제의 본질에서는 눈을 돌려버린다. 그래서 누군가는 이런 시대 상황에 순응하여 사회가 요구하는 규격화된 ‘인재’가 되기 위해 하루 하루 노력하고, 또 누군가는 학교를 취업양성소라 비난하며 불평을 늘어놓는다. 그럼에도 그들은 뚜벅뚜벅 자신의 길을 걸어간다. 그들은 미래에 대한 비전보다는 가슴팍에 불안과 더 가까우며, 자신의 신념과 철학보다는 미디어의 견해에 쉽게 휩쓸린다. 사회는 학생들에게 인문학적 소양이 필요하다 역설하지만 정작 사회는 그들에게 그럴 기회와 여유를 제공하는지 의문이었다.
그렇다면 한 국가를 이끄는 군주가 아닌, 현 시대를 살고 있는 학생의 한명으로써 율곡의 성학집요를 어떻게 읽어야 할까 그리고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하는 많은 고민을 해보았다. 비단 이 글은 선조 즉 군주만을 위한 글이 아니라 400여년이 지난 지금 이 시대에도 누구에게나 적용되어 활용할 수 있는 훌륭한 삶의 지침을 제공해 줄 수 있다 생각했다. 누군가는 이를 고리타분한 철학적 담론이라 말할 수 있겠지만, 목표와 성과, 효율성에 초점화 되어 폭넓은 주의를 잃어버린 현 대인들에게 율곡의 성학집요는 단지 삶의 의미와 진리 탐구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는데 넘어 자아탐색과 자기실현 그리고 그로인한 궁극적인 행복감까지 우리에게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또한 서양의 관점과는 다소 차이가 있는 동양문화의 핵심인 “노력”의 가치를 중요시 한 것 역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 덕목은 누구보다 배우는 학생들에게 요구되는 자질 중 하나라 생각한다. 이 뜻은 다음과 같은 글귀에서 더욱 생생히 나타난다. “...행하지 않을지언정 행한다면 독실하지 않고서는 그만두지 않는다. 남이 한 번 만에 할 수 있다면 나는 백 번이라도 해서 할 수 있게 하고 남이 열 번 만에 할 수 있다면 나는 천 번이라도 해서 할 수 있게 한다.”
그 누구보다 자기수양에 철저했던 율곡의 자세와 태도 그리고 생각 역시 이 책에서 엿볼 수 있었다. 그가 학문에 임하는 자세는 정말 감탄 밖에 나오지 않았다. 율곡은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경전이 생겨난 이래 선비라면 누구나 글을 읽었을 터이지만 참 유학자가 일어나기는 드물었고, 임금이라면 누구나 글을 읽었을터이지만 좋은 정치가 흥하기는 드물었는데, 그 까닭은 무엇입니까? 글을 읽은 것 이 귀로 듣고 입으로 말하는 자료가 되었을 뿐 쓸모 있는 도구가 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 사실상 율곡의 이 말은 화려하지도, 우리가 알기 힘든 심오한 철학적 개념이 들어 있는 것도 아닌 단순하고도 너무나도 단순한 말이다. 하지만 진리는 당연한 것이라 하였던가? 배우는 자의 입장에서 무엇을 배우는 것이 자신의 지식과 앎의 수준을 뽐내기 위해, 그리고 최악의 경우에는 타인을 멸시하고 자신의 출세의 도구로만 쓰이는 것을 율곡은 경멸했다. 그리고 지식과 앎이 나와 세상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진정한 ‘도구’가 되지 못하는 것에 대해 안타까 워함을 느낄 수 있었다.
또한 수시로 흐트러지는 자신의 생각과 마음 그리고 몸가짐을 바로잡기 위해 항시 얼마나 치열한 노력을 기울였는지 나타나 있었다. 또한 사람과의 관계적 측면과 인사의 중요성 역시 유교적 이념에 기반하여 상세히 설명하고 있었다. “소인을 멀리하고 군자를 가까이 즐겨하라.”는 말 역시 현실 정치에서도 그리고 우리네 인간관계에서도 여전히 적용 가능한 말일 것이다.
누군가는 이야기한다. “공자(유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 과연 그 무엇이 사람들로 하여금 그처럼 생각하도록 한 것일까. 대한민국의 산업화 과정 및 그에 파생된 핵가족화 문제 등 다양한 사회 현상들을 겪는 동안 유교적 문화의 부작용이 그토록 심각했나는 생각이 들었다. 이 글을 쓰는 나 역시 이전엔 비슷한 입장을 지녔었다. “지나치게 번잡한 예절이란 형식에 치우쳐 중요한 본질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닌지, 그리고 효율성이 강조되는 사회에서 수천 년 전의 이런 철학이론이 그 어떤 가치를 지닐 수 있는지.”에 대해서 의문이 들었고 그것들이 가질 수 있는 가치에 대해서 역시 상당히 회의적이었다. 하지만 율곡의 글을 읽고 난 후 그동안 나의 생각들이 너무나 편협했다는 것을 느꼈다. 무언가를 제대로 비판하기 위해서는 그 대상을 먼저 충분히 공부해 볼 필요가 있었는데, 사실 그런 과정 없이 무작정 비난에 가까운 정도의 비판을 쏟아낸 과거의 모습들에 부끄러웠다. 사람들은 흔히 그 이유, 즉 본질을 쉽게 놓친다는 느낌을 받았다. 공자가 말하는 ‘예(禮)’와 ‘인(仁)’이란 유학의 핵심개념이 과거와 현시대에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로 잘못 적용되는 현상만을 바라보고 사람들은 무작정 비판한다. 하지만 그 이론과 개념이 잘못 적용된 현상 때문에 그 사상 혹은 정신적 토대까지 매도하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이라는 것을 느꼈다. 그 당시 공자가 왜 그러한 개념을 필요로 했는지, 그것이 제대로 적용되는 상황과 조건은 어떠했는지, 또한 그 개념의 한계는 어디까지인지에 대해 숙고하지 않고 피상적인 결론은 내는 것이 얼마나 아둔하고 위험한 생각인지 느꼈다.
이상을 쫓아가지 못하는 현실 속에서, 무엇이 예(禮), 인(仁), 충(忠)인지도 모르는 채, 무작정 옛 철학적 이론을 따르는 우리들의 모습을 돌아봤을 때도 너무 슬펐다. 옛 조선의 선비들이 추구하고 꿈꾼 성리학적 이념에 기반을 둔 이상적 사회에 대한 갈망이 소멸된 현재 사회를 바라볼 때에 또 다시금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또한 성리학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이러한 대중의 오해와 멸시를 바라보았을 때, 성리학의 진정한 의미를 호도하게 만드는 여러 조건과 환경들이 너무 불 합리하다 여겨졌다.
물론 성리학을 비판하는 그들의 의견 역시 무조건 반박해야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옛것을 익히고 그것을 미루어서 새것을 안다는 온고지신(溫故知新)의 뜻과 같이, 과거로부터 튼튼한 뿌리를 지닌 다음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생각하였다. 또한 과거에 아무리 훌륭한 사상 혹은 개념이라도 그것을 그대로 현실에 적용하는 것은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즉 옛 성인의 글이라 해서 무작정 감탄하며 받아들여 자신과 현실에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의 상황과 조건들에 대한 충분한 숙고를 거친 후, 어떻게 지금에 맞추어 적용 할 수 있을지 생각해 보는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생각이 들었다.
다시 말해, 성학집요와 같은 옛 경전을 볼 때 역시 주의할 부분이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예를 들어 “군자가 학문을 하는 까닭은 기질을 변화시키기 위해서일 뿐이다.”라는 글귀를 읽을 때에, 무작정 옛 이론을 현실에 적용시켜 “우리가 공 부하는 유일한 이유는 자기극복을 위함 때문이다.”라고 섣불리 판단하는 것을 조 심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 이유는 여기서 말하는 군자란 일반적인 사람이라 치환될 수 없으며, 학문이란 것도 지금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것이라 단순히 바꾸어 설명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과거에 ‘군자’가 학문을 하는 까닭
과 지금의 학생들이 학문을 하는 이유는 얼마간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즉, 모든 것은 그 당시의 시대상황과 각종 제약조건하에서 같은 내용이라도 충분히 다르게 해석되고 적용될 수 있을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율곡은 말하고 있었다. “네가 배우는 것은 어떠한 ‘학문’이냐”고, 그리고 또한 의문을 던졌다. “네가 생각하는‘배움’이란 무엇이냐”라고. 사실 우리 모두는 요순과 같은 역사적인 성군이 될 수도 없을 뿐더러, 모두가 그처럼 되어야할 필요 역시 없다. 하지만 새로운 인재의 필요성이 더욱 간절히 대두되는 시대에 있어, 우리는 성학집요를 통해서 율곡이 생각하는 성인 즉, 옛 조선의 인재상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생각이 든다. 또한 이러한 다양하고도 깊은 위대한 생각과의 만남은 우리네의 지식과 앎에 대한 갈증을 해소시켜 줄 뿐더러, 더 깊은 원초적인 질문을 이끈다. “율곡이 꿈꾸던 동양적 유토피아는 과연 어떠한 사회였을까? 또한 그를 실현시키기 위해 지금의 우리가 할 수 있는, 그리고 해야 하는 일은 무엇일까?” 율곡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며, 생각을 이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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