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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원인 감동공유 추천글
제목: 하루쯤은 방드르디처럼 살아 보는 건 어떨까요?
학과: 물리학과, 이름: 조*현, 선정연도: 2019
추천내용: 미셸 투르니에의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은 대니얼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를 다른 시각으로 그려내었다. 원작은 로빈슨에게 초점을 맞추었고 투르니에의 작품에서는 방드르디가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다.
로빈슨 크루소라는 젊은 영국 청년은 항해 도중 난파를 당하고 어느 무인도에 갇히게 된다. 홀로 자급자족을 하며 무인도에 스페란차라는 이름도 붙이고 보금자리의 틀을 갖추고 작은 영국을 만들어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로빈슨은 자신의 섬에서 원주민 아라우칸족이 의식행사를 치르는 것을 보게 되고 그 속에서 탈출하는 한 남자를 구해준다. 그에게 금요일이란 뜻의 방드르디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주종관계를 형성하여 자신은 섬의 총독 역할을 자처한다. 그러나 그의 총독 행세는 얼마가지 못한다. 섬 곳곳에 묻어 두었던 화약이 방드르디의 실수로 한 순간에 폭발해 버리면서 그가 지금까지 이루었던 모든 것들이 다 날아가 버리게 된다. 로빈슨과 방드르디의 수직적인 관계 또한 그 폭발을 이후로 수평적인 관계로 변하게 된다. 둘의 수평적인 관계에 회의를 느끼던 로빈슨은 결국 순응을 하게 되고 친구처럼 지내게 된다.
그가 무인도에 갇힌 지 28년이라는 세월이 지나고 영국기를 단 화이트 버드호가 스페란차에 오게 된다. 화이트 버드호에서 내린 영국인들과 만난 로빈슨은 자신이 무인도에 28년 동안이나 갇혔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적지 않은 충격을 받는다. 영국인들의 배에서 저녁 초대를 받은 그는 식사를 마친 후 영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섬에 남아야겠다는 결심을 한다. 다음 날, 해가 뜨기도 전에 일어난 로빈슨은 방드르디가 없어졌다는 사실을 알아채고 섬 이곳저곳을 찾아 헤맨다. 바윗돌 더미들 사이에 한 구멍에서 방드르디 대신 화이트 버드호의 소년 수부를 발견하게 된다. 전날 밤, 방드르디는 홀로 카누를 타고 화이트 버드호로 떠났고 그 카누를 소년이 다시 타고 스페란차로 오게 된 것이었다. 로빈슨은 그 소년에게 목요일이란 뜻인 죄디라는 이름을 붙여 주고 소설은 끝이 난다.
책을 읽고 교훈을 얻어 우리의 삶에 적용하면 좋을 것 같아 이 책을 추천하고자 한다.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며 문득 방드르디의 살아가는 방식이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필요하지 않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방드르디는 미래에 대한 걱정은 전혀 없고 지금 행복하고 좋으면 된 것 이라는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 고대 로마의 시인인 호라티우스의 라틴어 시에는 “내일은 믿지 마라. 오늘을 즐겨라.” 라는 구절이 있다. 오늘날 Carpe diem(까르페디엠)으로 잘 알려진 구절이다. 요즘 사람들은 지금이라는 소중한 시간을 많이들 놓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이미 일어나 버린 일들 또는 일어나지도 않을 일들에 대한 후회와 걱정이 너무 많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내버려 두고 올 것은 오는 대로 두는 것이 현명한 것 같다. 과거에 얽매여 전진하지 못하고 미래에 대한 두려움으로 후퇴만 한다면 현재를 살아가는 의미는 없을 것 이다.
나도 가끔은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밤잠을 설친 적이 많았다. 그러나 되돌아보면 쓸데없는 걱정들 뿐 이었고 실제로 일어난 일들은 그리 많지 않다. 물론 미래에 대한 대비가 하나도 되어있지 않다면 내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불확실한 현대를 살아가기에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너무 앞만 보며 가지 말고 한번 씩 멈춰 서서 주위를 둘러보는 것도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그동안 무심코 지나치며 주의를 주지 못했던 것들에 관심을 준다면 이는 새로운 경험이 되어 미래를 위한 자양분이 될 수 있다. 가끔씩은 오늘만 산다는 생각으로 시간을 보내는 것도 의미 있는 경험일 것이다. 앞만 보며 바쁘게 달려가야 하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도 하루쯤은 방드르디가 되어 본다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독후감 공모전 우수작
제목: 타자의 세계를 경험하다
학과: 일반인, 이름: 정*민, 선정연도: 2019
내용: 7년 전쯤 처음 미셸 투르니에의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이하 『방드르디』) 처음 읽었다. 그땐, 방드르디 출현 이후에 몰입한 나머지 이전의 이야기를 대부분 잊어버려, 그 앞이 이야기 비중이 꽤 크다는 사실이 내겐 또 다른 충격이었다. 물론 이 소설의 핵심은 여전히 방드르디이며, 소설 후반부를 이끄는 동시에 로빈슨을 변화시키는 인물임은 분명하다. 이 점을 간과하고 로빈슨을 중심축에 두고 소설을 읽는다면, 오독 할 수 있는 확률이 아주 높다. 왜냐면 이 소설의 진짜 핵심은 방드르디도, 로빈슨도 아닌 ‘타자성’이기 때문이다. 소설 초반부터 투르니에는 줄기차게 타자성을 말한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타자성은 일반적인 어떤 관계에 초점을 맞추는 대신, 그렇게 맺어진 관계로 인해 상대가 어떻게 변화하는가를 말하고, 그렇게 변모된 관계가 이 세계에 어떤 위기를 초래했는지 에둘러서 말한다.
소설은 난파되기 직전의 ‘버지니아 호’에서 로빈슨의 타로점을 치는 선장으로부터 이야기로부터 시작된다. 이 부분은 예언에 가까운데 여기서 선장은 로빈슨에게 무질서한 세계를 손아귀에 쥐어보려 온갖 노력을 기울이겠지만 결국 실패하고 도리어 당신이 변할 거란 말을 건넨다. 물론 로빈슨은 농담으로 흘려들으나 후일 이는 정확히 실현된다. 실제 홀로 무인도에 떨어진 로빈슨은 금세 구조될 상황이 아님은 깨닫자마자 무인도를 제 방식대로 명명하고 다스리려 한다. 이는 19세기 초반 제국주의자들의 비서구권 국가를 식민지화하는 방식과 거의 흡사하다. 아니 방드르디를 만나기 이전까지, 혹은 폭발 사건 이전까지의 로빈슨은 제국주의자들의 오만방자한 행위의 축소판처럼 느껴진다.
투르니에가 구태여 방드르디를 만나기 이전까지 삶을 상세히 설명한 까닭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싶다. 로빈슨은 무인도 생활을 위해 제 나름의 여러 규칙을 정하는데, 그중 상징적 사물이 물시계다. “시간은 그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어두운 심연 속으로 미끄러져 나가는 것이 아니라 이제부터는 규칙화되고 지배되고 장차 섬 전체가 그렇게 되려 하듯이 오직 한 인간의 정신력에 의하여 길들여지게 된다는 자랑스러운 기분을 느꼈던 것이다.” 이때까지 로빈슨에게 시간 개념 없이 무질서하고 마음대로 생활하는 것은 원시적이고 야만적인 행위 그 자체였기에 어떻게든 길들이고 질서를 만들어 문명화해야만 하는 어떤 대상이었다. 19세기 초 산업사회를 기반으로 국가를 건설한 제국주의자들 눈에 비서구권, 더 쉽게 여전히 공동체적이고 농경문화의 기반으로 살아가는 국가들은 그들이 새로운 교육을 받게 하고 제도적 틀을 만들어 바꿔나가야 할 하나의 대상으로 비쳤을 거다. 제국이란 형식과 야욕에 오래도록 길들여진 그들 눈엔 비서구 문명이 가진 고유성은 단지 바꿔야 하는 낡은 관습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은 문명과 교육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비서구가 기본적으로 가진 문화와 사회를 경험해보려는 그 어떤 노력도 하지 않은 채, 그들이 생각하고 추구하는 가치에 꼭 들어맞도록 전혀 다른 방식의 삶을 기존에 있던 늘 그래왔던 삶으로 길들이려 뒤바꾸려 했다. 그 결과 제국주의자들은 그들이 생각했던 바와는 달리 문명 파괴자 혹은 난봉꾼이 되었고, 끊임없이 제국의 침략을 받고 그들에 의해 기존 가지고 있던 문화와 삶을 체계를 잃은 비서구는 텅 빈 껍데기, 서구열강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닌 야만인이 되어 버린 것이다. 서구와 비서구, 난봉꾼과 야만인, 이들은 무엇 때문에, 단지 세계와 사람에서 무엇으로 명명되고 적대관계로 변화하게 된 것일까? 대놓고 적대관계라 말하긴 애매모호한 부분은 있으나 세계가 이것 혹은 저것으로 나뉜 것은 사실이다. 물론 전부 제국주의의 야욕 탓으로 돌리려는 건 아니지만, 1,2차 세계대전 전후 제국주의 혹은 강대국의 힘을 내세워 세계 전역을 그들의 영향력 아래 두고자 했던 역사의 흔적은 지울 수 없다. 비록 그들의 야욕은 온전히 채워지지 않았지만 그 영향력은 여전히 하나의 질서처럼 군림하고 있다.
『방드르디』에서 로빈슨은 질서와 어떤 체계를 추구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그를 잘 드러내는 장이 무인도에‘스페란차’란 이름을 부여하고 천 일이 흐른 후 섬을 다스리려 여러 법령을 제정하는 부분이 담긴 4장이다. 이 부분은 우스꽝스러우면서도 간담이 서늘해진다. 투르니에는 로빈슨과 텐이라는 개 외에는 아무도 없는 섬에 별 쓸모도 없는 법을 제정하는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그는 타인이 부재한다는 그 파괴적인 영향에 대하여 건축하고 조직하고 입법하는 것이 최고의 방책임을 다시 한 번 느꼈다.” 이는 달리 말해 섬이 아닌 조난구조조차 보낼 수 없는 섬에서 그 자신을 지키기 위한 방어책이었던 거다. 이에 동의라도 하듯, 이 장의 ‘항해일지’에서 그는 “나는 누구일까? 이 질문은 절대로 부질없는 것이 아니다. 심지어 그것은 풀리지 않는 질문도 아니다. 왜냐하면 만약 그것이 그가 아니라면 스페란차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며 어떤 질서와 체계를 갖춘 섬을 자신과 동일시 한 것이다. 이후 방드르디를 만나 그와 함께 살게 되었을 때도 로빈슨은 그를 자신과 다른 낯선 타자로 인식하지 못하고, 그들 제 소유물로 여겨 길들이려 한다. 즉 이때까지, 보다 정확히 방드르디의 실수에 의한 폭발로 인해 재건된 섬의 체계들이 한순간에 무너지기 이전까지, 로빈슨에게 낯선 타자는 지대한 영향을 끼칠만한 대상이 아니었다. 단지 그가 가꾸어 어떤 형태를 만들어가야 할 소유물에 지나지 않았다. 19세기 초 제국주의자들 눈에 비친 비서구권 국가들도 낯설고 다른 세계가 아닌 정복하고 개화해 주어야 할 그 무엇에 불과한 것은 아니었을까? 만약 제국주의자들이 비서구권 국가들은 길들이고 가르쳐야 할 미개인이 아닌 낯선 타자로 보았다면, 이 세계는 지금과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을까? 투르니에 역시 이 부분이 정말 궁금해서 다니엘 디포의 소설을 재해석하고자 했던 건 아닐까? 실제 1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 작가 상당수가 제국주의의 민낯을 마주하고 절망하거나 좌절했다. 이전까지 유럽이 가진 우월함이 당연하고 이성을 의심치 않던 그들에게 조국(유럽)이 보여준 건 제국주의 혹은 강대국의 힘자랑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니엘 디포와 투르니에 소설의 가장 큰 차이는 ‘방드르디’의 존재감이다. 디포의 소설에서 방드르디의 존재감은 거의 드러나지 않지만, 투르니에 소설 속 방드르니는 핵심인물로 그려진다.
달리 말해, 제국주의 중심에 섰던 프랑스 작가인 투르니에는 중심인물인 로빈슨이 아닌 주변부 인물, 이전엔 소설 속에 등장했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는 방드르디에 초점을 맞췄단 얘기다. 이는 단지 고전의 재해석이 아니다. 기존 소설에서 방드르디는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았을뿐더러, 타자, 길들지 않는 무엇으로 단지 이름만이 부여되었을 뿐이지만, 투르니에 작품 속 방드르디는 그렇지 않다. 등장 초반부터 그는 길들지 않는 무엇이 아닌 타자다. 여기서 타자란 나 외의 모두로서 내게 어떤 영향력을 끼치는 것들이다. 여기엔 사람만이 포함되지 않고 자연적인 요소도 포함되기에 그 범주가 광범위하다. 쉽게 나를 제외한 세상 모두가 타자인 셈이다. 번복이지만, 제국주의자와 소설 중반까지 이어지는 로빈슨의 행위는 타자성을 억누르고 제압함으로써 구심점이 되고자 한다. 이는 명백한 착각이자 오류다. 타자 없는 구심점이나 중심은 없고, 그가 언제까지나 구심이며 중심점일 수도 없다. 정말 잘못된 상상력이다. 살아 숨 쉬는 것들은 끊임없이 움직이고, 변한다. 인간이라 해서 예외는 아니다. 인간이라는 하나의 종으로 분류되었을 뿐 여러 관계 속에서 변하고 움직이는 생명을 가진 존재임이 먼저다. 그리고 이 존재는 관계를 통해 변하고 성장한다.
『방드르디』 속 로빈슨과 방드르디는 서로 만나고 어떤 관계 속에 놓이므로 인해서 전혀 다른 삶을 선택하게 된다. 섣부른 결론을 노출하면 문명인으로서 무인도조차 자신의 방식으로 길들이려 했던 로빈슨은 원시성을 지닌 섬에 남는 삶을 택하지만, 아무리 길들이려 해도 길들지 않던 방드르디는 구조선이 무인도에 닿자, 그간 제가 꾸려오던 원시적인 삶의 방식을 버리고 문명의 삶을 자발적으로 택한다. 처음 소설을 읽었을 때 가장 충격적으로 다가왔던 부분도 여기, 낯선 타자로 상징되던 방드르디가 문명을 갈망하는 인물로 뒤바뀐 것이 내겐 엄청난 사건이었다. 그리고 이 어마어마한 사건을 이해하는데 꽤 오랜 필요했다. 내 삶에 지속적으로 개입하려는 낯선 타자로 인해 기존에 내가 알던 나는 전혀 다른 나로 변하는 것이 자연 순리였다. 『방드르디』 폭발사건 이후 관전 포인트도 여기다. 폭발사건 이전에 로빈슨과 방드르디는 주종관계로서 방드르디가 일방적으로 로빈슨의 생활을 관찰하고 지시에 따랐다면, 사건 이후 로빈슨과 방드르디는 동등한 관계가 되어 지속적으로 서로의 삶에 개입함으로써 상대방의 삶의 방식을 배우고 궁금해한다. 즉, 서로에게 낯선 타자가 되어 상호 영향을 주고받는다.
서로에게 사물이 아닌 낯선 타자가 되는 일은 상대의 세계를 경험한다는 의미다. 폭발사건 이후 이들 사이 가장 큰 변화는 로빈슨 역시 방드르디의 영향을 받는 타자로 변화된 지점이다. “방드르디에게서 용기를 얻어 이제는 알몸으로 햇볕에 나섰다. 처음에는 잔뜩 겁을 먹고 쭈그린 채 흉하기만 했던 그의 모습이 차츰차츰 피어났다. 피부는 구릿빛으로 변했다. 새로운 자부심이 가슴과 근육을 팽창시켰다. 그의 몸에서 어떤 열이 뿜어져 나왔고, 그의 영혼은 거기에서 전에는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어떤 자신감을 얻어내는 것 같았다.” 이전까지 방드르디를 가르치고 길들여 자신이 경험한 세계로 끌어당기고자 했던 로빈슨은 이제 방드르디의 세계를 경험하는 것이다. 또한, 단순히 일시적인 경험으로 끝맺지 않고 그 삶을 통해서 로빈슨 자신은 지니고 있지 않을 것이라 믿었던 어떤 내면성을 발견한다. 이가 바로 투르니에가 소설을 통해 세계에 던지는 메시지가 아닐까? 로빈슨이 방드르디를 제 소유물에서 낯선 타자로 새로이 바라본 일은 서구 열강이 비서구에 대해서, 그렇게 해야 함이 당연하지만 절대 그렇게 바라보지 못하는 시선이다.
물론 소설에서는 섬의 질서를 단번에 무너뜨린 폭발사건이라는 엄청난 계기가 있었다. 그러나 무너진 질서, 더구나 원래부터 있던 것도 아닌 스스로 만들어 제정하고 확립한 질서는 다시 만들어 제정하고 확립하면 되는 것들이었으나 로빈슨은 그러지 않았다. 대신 그 섬, 텅 빈 섬에서의 생존 방식을 방드르디를 통해 다시 배웠다. 제국주의는 결국, 실패로 끝났다. 그들은 타자성을 배우는 대신 힘으로 제압하고 그들의 방식으로 길들이여 했기에 실패는 예견된 결과였고 강자와 약자들의 대립은 예나 지금이나 지속적으로 이어지고 있다. 마치 그것이 당연한 것처럼. 정말 당연할까? 세계를 작동시키고 더 풍성히 만드는 건 거대한 힘이 아니다. 다만 그렇게 보일 뿐이다. 지금 강대국이라 불리는 국가들의 풍부한 자원과 막강한 권력은 온전히 그들의 것이 아니다. 제국이란 힘으로 눌러 빼앗은 것들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막강한 힘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늘 거대한 힘을 원한다. 그러나 진짜 힘은 누군가를 착취하거나 길들여서 생기지 않는다. 그렇게 얻은 힘은 언젠가 사라진다. 그 언제 사라질지 모를 힘을 위해 끝없이 힘을 길러야 하고 또 다른 이들은 착취당하거나 길들어야 한다.
이는 본래 모든 인간이 갖는 본성, 원시적 힘을 억눌러 버리는 일이기도 하다. 폭발 이전 도저히 길들지 않는 방드르디를 보며 로빈슨은 처음으로 질서를 고민한다. “질서란 항상 얻기 어려운 것으로서, 섬의 자연적인 야만성으로부터 힘들게 쟁취한 것이다. 그런데 아라우칸 족이 그에게 저지른 것들은 그 질서를 심각하게 뒤흔들어놓고 있었다.” 이때만 해도 그는 그가 이룩해둔 질서나 체계가 무너질 수도 있단 상상은 하지 않았다. 그 자신이 힘들여 이룩한 질서와 체계이기에 언제까지나 견고할 줄 알았던 거다. 이는 낯선 타자가 침범하지 않을 땐 가능하지만 세계. 그러니까 살아가는 일은 끊임없는 타자와의 상호관계성이다. 로빈슨이 무인도를 제 방식대로 길들이여 했지만, 그 역시 섬의 입장으로 생각하면 로빈슨이라는 타자의 침범으로 인해 제 고요함이 깨진 것이고, 로빈슨 역시 방드르디와 폭발사건으로 인해 제가 이룩한 질서를 잃은 것이다. 결국, 낯선 타자의 개입이 나를 변화하게 만든 것이다.
그렇다면, 제국주의자들은 어떻게 변하지 않고 더 막강한 힘을 얻게 되었을까? 그리고 서구권 국가가 아닌 국가는 왜 비서구 국가일까? 그는 방드르디를 만나기 이전, 폭발사건이 발생하기 이전 로빈슨이 그랬듯, 모조리 길들이여 했고 존재가 아닌 소유물 취급했기 때문이다. 내가 아닌 타자가 가진 삶의 방식을 존중하거나 배우기는커녕 억누르고 짓누름으로써 제국주의라는 견고한 질서를 만든 탓이다. 지금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자본주의 체제나 전 세계 공용어로 통하는 영어는 본래부터 그래왔거나 진화의 역사가 아니라 제국주의자들의 질서다. 그들의 삶의 방식을 다른 민족들에게 가르치려 그들은 어떤 민족의 언어를 짓밟아 영어를 습득하게 하고, 영어권 문화를 익히게 하여 종국엔 그들처럼 사고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본 문화의 저질성과 야만성을 반복적으로 상기시키는 한편, 제국의 우월성과 위대함을 주입 시키는 것이다. 가능한 방법이 아니라고 더러 코웃음 칠 수 있다.
그러나 제국주의자들이 막강한 힘을 유지할 수 있었던 방식은 예상외로 단순했다. 이따금 생각한다. 소설 속에서도 폭발사건이 아니었다면, 붕괴 이전으로 되돌리기 힘든 섬이 아니었다면, 문명인인 로빈슨은 원주민 방드르디를 아주 낯선 타자로 받아들였을까? 그러지 못했을 거라 생각한다. 이미 언급한 대로 기존 질서 속에 들어온 타자는 그 질서 속으로 끌어당겨야 할 이방인일 뿐이다. 그러나 모든 질서가 무너진 장소에서 타자는 낯선 존재자가 될 수 있고, 내게 어떤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따라서 제국주의자들, 문명인이라 자부하는 그들에게 힘이란 오직 질서와 체계가 전부인 셈이며, 그것이 무너지는 순간 그들의 세계는 무너지는 것이다. 지금의 세계 위기도 이와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 자본주의 체제는 이미 한계성에 달했고, 제국주의의 민낯은 만천하에 드러난 지 오래되었다. 그래도 여전히 서구열강은 그들의 건재함을 증명이라도 하듯 약소국을 향한 야욕을 가감 없이 드러내며 그들을 비서구 혹은 야만인이라 칭한다.
그러나 진짜 힘은 야만이라 불리는 그들의 낯선 타자성이다. 지배나 짓눌러 바꿔야 할 대상이 아닌 그들이 가진 본래 모습에서 나오는 어떤 에너지가 낯선 타자다. 그리고 그건 지금 우리에게, 이미 썩어 문드러질 대로 문드러진 자본주의 체계 끝에 매달린 모두에게 필요하다. 이것이 새로운 희망으로 거듭날 수 있을진 아무도 모르지만. 지금 이 상황을 바꾸려면 낯선 타자가 필요하다. 낯선 타자만이 기존 질서에 균열을 일으킨다. 물론 이 타자가 방드르디처럼 훗날 문명을 갈구할 수도 있고, 자본주의 체계가 끝까지 외면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건 나중 문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균열을 일으킬 낯선 타자다. 이들의 적극적인 개입만이 휘청이는 세계의 역사를 새로이 쓰게 할 것이다. 투르니에 소설을 읽기 전에 로빈슨과 방드르디의 삶의 행로가 어떻게 뒤바뀔 걸 예상치 못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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