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장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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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의 파수꾼
자료유형
국내단행본
서명/책임사항
호밀밭의 파수꾼 /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 저 ; 공경희 옮김
원서명
(The) Catcher in the rye
개인저자
발행사항
서울 : 민음사 , 2001
형태사항
279 p. ; 23 cm
총서사항
세계문학전집 ; 47
일반주기
원저자명: Jerome David Salinger
ISBN
8937460475 (2001)
9788937460470 (2013)
8937460009 (세트)
9788937460005 (세트)
9788937460470 (2013)
8937460009 (세트)
9788937460005 (세트)
청구기호
823.914 S165c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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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등 관련정보
효원인 감동공유 추천글
제목: 호밀밭의 파수꾼
학과: 영어영문학과, 이름: 신*진, 선정연도: 2013
추천내용: 방황하는 청춘은 홀든 콜필드와 닮았다.『호밀밭의 파수꾼』 세상을 살다 보면 자신과 성향이 다른 사람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특히, 자신이 다른 사람과 교감을 잘 나누고 있지 못하다면 그런 생각을 가지기 쉽다. 이런 사람들의 경우, 실제로는 자신과 성향이 많이 다른 사람들과 교감을 나누고 싶은 열망은 강하나 실제로는 그렇게 되기 힘들 수 있다. 이 상황에서 결정적으로, 나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서로 잘 교감하고 살아간다면 이 사람은 단 두 가지 중 하나의 판단을 한다. "내가 잘못되었다.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모두 잘못된 것이다." 이 책을 개인적으로 평가하자면, 후자의 판단을 하고 살아온 소년 홀든 콜 필드가 정신적 방황을 겪으며 어느 정도 사회에 나아갈 길을 찾아가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의 주인공인 홀든 콜필드는 그리 매력적인 인물은 아니다. 새치가 많으며 짧은 헤어스타일을 가지고 있고, 몸도 그리 남성다운 매력을 풍기지 않는다. 집안은 아버지가 꽤 괜찮은 수입을 올리는 변호사이므로 풍족하게 사는 편이지만, 그의 정신은 전혀 풍족하지 못하다. 다른 사람들과 교감을 풍부하게 나누지 못하고, 항상 다른 사람들을 경멸하기 때문이다. 사실 그가 이렇게 된 데에는 몇 가지 사연이 있다. 우선 자신이 가장 아끼는 동생 앨리의 죽음이다. 앨리는 홀든의 말에 따르면 다른 사람들을 배려할 줄 아는 착한 마음씨를 지닌 아이다. 그러나 어린 나이에 죽고 만다. 그리고 세상은 앨리가 없어도 잘 돌아가고 있다. 사람들은 앨리를 점차 잊어간다. 그리고 그는 이 상황이 너무나도 싫다.
다음으로는 다른 사람들과의 성향 차이를 들 수 있다. 그는 적어도 약자들에 대해 우호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약한 친구를 괴롭히며 재미를 느끼는 덩치 큰 동급생이라든가, 영어 발표를 할 때 소심한 친구를 방해하는반 친구들을 경멸하게 되고, 이렇듯 다른 성향들은 그가 다른 급우들과 가까워지는 것을 더욱 더 어렵게 만든다.
소설의 시작 부분에서는 홀든에게서 어느 정도의 공감대를 느낄 만한 부분이 많다고 독자들은 이야기한다. 왜 학교에 나가야 하는가, 자신이 싫어하는 행동을 강요하는 사회의 요구를 왜 들어주어야 하는가와 같은 문제들을 홀든이 제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갈수록 사람들을 그냥 싫어하고, 행동의 이유들이 불분명해지는 홀든의 모습에서 그 공감대는 점차 느껴지지 않는쪽으로 바뀌게 된다. 그는 동생 피비의 말대로 '이유 없이 사람들을 싫다고만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독자들도 느낄 수가 있기 때문이다. 퇴학을 당하고 나서 집이 아닌 다른 곳으로 가 살려고 했던 홀든은 호텔방과 클럽, 그리고 자신이 전에 알던 몇 안되는사람들 주변을 전전하다가, 피비를 통해서 집으로 돌아오기로 결심하고, 이후 정신병원에서의 치료 과정을 버텨내고 사회로 나아갈 준비를 한다는 것이 이 소설의 결말임을 볼 때, 이 소설은 심리적, 정서적으로 불안정한 한 소년이 사회화되는 과정을 다룬 것이라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 소설을 보며 홀든 콜필드의 모습에서 예전 내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말이 잘 통하지 않는다거나, 알 수 없는 이야기를 늘어 놓는 바람에 타인과 멀어진 경우가 좀 있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나만의 잘못은 아니었다. 그런 모습을 받아 주지 못한 상대들의 잘못도 있는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그 사람들의 특징들을 존중해 주지 않으면, 나 역시 그 사람들과 같은 사람이 될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생각한다. (물론 당시에는 그냥 다른 사람들이 날 좋아해 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그 사람들 모두에게 맞춰 준 결과지만) 덕분에 난 홀든처럼 정신병원에 갈 필요 없이 나름의 사회화 과정과 친구 관계를 얻을 수 있었다고 본다.
사실 이 소설은 순수를 유지하려는 사람의 의지를 '파수꾼'이라는 용어로 설명한 만큼, 다른 의미도 지니고 있는 것 같다. 어린아이들이 순수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도록, 어른들처럼 때 묻지 않도록 하기를 원하는 홀든은 그런 의미에서 자신을 '호밀밭의 파수꾼'에 비유한다. 이는 지나가던 아이가 로버트 번즈의 시 중 '호밀밭에 들어오는 누군가를 만난다면'이라는 대목을 '호밀밭에 들어오는 사람을 잡는다면'이라고 부르는 것을 듣고 홀든이 문득 생각하게 된 자신의 소망이다. 이 호밀밭의 파수꾼은 어린아이들이 절벽 쪽으로 떨어지게 될 경우(순수성을 잃는다는 의미) 이들을 떨어지지 않게 붙잡아 주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고, 홀든은 그것을 자신의 유일한 소망이라고 이야기한다. 물론 현실은 이와 다르기 때문에, 순수성을 어느 정도 잃어버려야 어른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홀든은 사회를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이것 외에도 이 소설은 여러 가지 흥미로운 요소들을 지니고 있으니, 다른 효원인들도 이 책을 읽으며 다른 요소들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 자신하며 글을 마친다.
학과: 영어영문학과, 이름: 신*진, 선정연도: 2013
추천내용: 방황하는 청춘은 홀든 콜필드와 닮았다.『호밀밭의 파수꾼』 세상을 살다 보면 자신과 성향이 다른 사람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특히, 자신이 다른 사람과 교감을 잘 나누고 있지 못하다면 그런 생각을 가지기 쉽다. 이런 사람들의 경우, 실제로는 자신과 성향이 많이 다른 사람들과 교감을 나누고 싶은 열망은 강하나 실제로는 그렇게 되기 힘들 수 있다. 이 상황에서 결정적으로, 나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서로 잘 교감하고 살아간다면 이 사람은 단 두 가지 중 하나의 판단을 한다. "내가 잘못되었다.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모두 잘못된 것이다." 이 책을 개인적으로 평가하자면, 후자의 판단을 하고 살아온 소년 홀든 콜 필드가 정신적 방황을 겪으며 어느 정도 사회에 나아갈 길을 찾아가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의 주인공인 홀든 콜필드는 그리 매력적인 인물은 아니다. 새치가 많으며 짧은 헤어스타일을 가지고 있고, 몸도 그리 남성다운 매력을 풍기지 않는다. 집안은 아버지가 꽤 괜찮은 수입을 올리는 변호사이므로 풍족하게 사는 편이지만, 그의 정신은 전혀 풍족하지 못하다. 다른 사람들과 교감을 풍부하게 나누지 못하고, 항상 다른 사람들을 경멸하기 때문이다. 사실 그가 이렇게 된 데에는 몇 가지 사연이 있다. 우선 자신이 가장 아끼는 동생 앨리의 죽음이다. 앨리는 홀든의 말에 따르면 다른 사람들을 배려할 줄 아는 착한 마음씨를 지닌 아이다. 그러나 어린 나이에 죽고 만다. 그리고 세상은 앨리가 없어도 잘 돌아가고 있다. 사람들은 앨리를 점차 잊어간다. 그리고 그는 이 상황이 너무나도 싫다.
다음으로는 다른 사람들과의 성향 차이를 들 수 있다. 그는 적어도 약자들에 대해 우호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약한 친구를 괴롭히며 재미를 느끼는 덩치 큰 동급생이라든가, 영어 발표를 할 때 소심한 친구를 방해하는반 친구들을 경멸하게 되고, 이렇듯 다른 성향들은 그가 다른 급우들과 가까워지는 것을 더욱 더 어렵게 만든다.
소설의 시작 부분에서는 홀든에게서 어느 정도의 공감대를 느낄 만한 부분이 많다고 독자들은 이야기한다. 왜 학교에 나가야 하는가, 자신이 싫어하는 행동을 강요하는 사회의 요구를 왜 들어주어야 하는가와 같은 문제들을 홀든이 제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갈수록 사람들을 그냥 싫어하고, 행동의 이유들이 불분명해지는 홀든의 모습에서 그 공감대는 점차 느껴지지 않는쪽으로 바뀌게 된다. 그는 동생 피비의 말대로 '이유 없이 사람들을 싫다고만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독자들도 느낄 수가 있기 때문이다. 퇴학을 당하고 나서 집이 아닌 다른 곳으로 가 살려고 했던 홀든은 호텔방과 클럽, 그리고 자신이 전에 알던 몇 안되는사람들 주변을 전전하다가, 피비를 통해서 집으로 돌아오기로 결심하고, 이후 정신병원에서의 치료 과정을 버텨내고 사회로 나아갈 준비를 한다는 것이 이 소설의 결말임을 볼 때, 이 소설은 심리적, 정서적으로 불안정한 한 소년이 사회화되는 과정을 다룬 것이라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 소설을 보며 홀든 콜필드의 모습에서 예전 내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말이 잘 통하지 않는다거나, 알 수 없는 이야기를 늘어 놓는 바람에 타인과 멀어진 경우가 좀 있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나만의 잘못은 아니었다. 그런 모습을 받아 주지 못한 상대들의 잘못도 있는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그 사람들의 특징들을 존중해 주지 않으면, 나 역시 그 사람들과 같은 사람이 될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생각한다. (물론 당시에는 그냥 다른 사람들이 날 좋아해 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그 사람들 모두에게 맞춰 준 결과지만) 덕분에 난 홀든처럼 정신병원에 갈 필요 없이 나름의 사회화 과정과 친구 관계를 얻을 수 있었다고 본다.
사실 이 소설은 순수를 유지하려는 사람의 의지를 '파수꾼'이라는 용어로 설명한 만큼, 다른 의미도 지니고 있는 것 같다. 어린아이들이 순수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도록, 어른들처럼 때 묻지 않도록 하기를 원하는 홀든은 그런 의미에서 자신을 '호밀밭의 파수꾼'에 비유한다. 이는 지나가던 아이가 로버트 번즈의 시 중 '호밀밭에 들어오는 누군가를 만난다면'이라는 대목을 '호밀밭에 들어오는 사람을 잡는다면'이라고 부르는 것을 듣고 홀든이 문득 생각하게 된 자신의 소망이다. 이 호밀밭의 파수꾼은 어린아이들이 절벽 쪽으로 떨어지게 될 경우(순수성을 잃는다는 의미) 이들을 떨어지지 않게 붙잡아 주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고, 홀든은 그것을 자신의 유일한 소망이라고 이야기한다. 물론 현실은 이와 다르기 때문에, 순수성을 어느 정도 잃어버려야 어른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홀든은 사회를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이것 외에도 이 소설은 여러 가지 흥미로운 요소들을 지니고 있으니, 다른 효원인들도 이 책을 읽으며 다른 요소들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 자신하며 글을 마친다.
독후감 공모전 우수작
제목: 호밀밭의 파수꾼 또 하나의 이름이 되다
학과: 치의예학과, 이름: 문*경, 선정연도: 2013
내용: 한때 내가 가진 고전에 대한 이미지는 늙음 이고 꼰대 였었다. 기력을 다해가는 노쇠함이 아니라 견고하게 굳혀져 가는 꼰대의 완성이었다. 고전에서는 언제나 가볍지 않은 문체들로 주인공들이 심각하게 세상을 살고 있었다. 텔레비전 속 가 수가 좋고 떡볶이와 수다를 좋아하는 소녀가 펼친 책장 속 세상은 너무나 진지하고 세상 온갖 고민이 모여 있어 어린 시절의 나는 지루한 훈육이라 치부한 적도 있었다.
청소년기, 누구나 그러하듯 나는 고전이라는 타이틀을 가진 작품들을 부모님 선생님 혹은 출판사를 통해 추천받았고 처음 읽어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는 러시아 귀족도 아니었고 프랑스 뒷골목의 빵을 훔치는 사나이도 아니었으니 그들의 인생과 정신적 여정을 함께 하기란 여간 지루한 것이 아니었다. 아마도 나에게 '그것을 읽어냈다' 는 성취감과 지적 허영심이 없었다면 나는 그 작품들에게 이내 손을 뗐을 것이다.
그 사춘기적 허세는 시간이 흐를수록 갈피를 못 잡고 여러 가지로 파생되기 마련이다. 불량스러움을 추구하고 세상의 권위를 모조리 부정하고 싶은 반항심이 내 독서세계에도 발을 뻗친 것이다 착실히 읽어가던 고전이라는 모범적인 책에도 반기를 들고 싶었다. 그때, 우습게도 나의 반항심은 아주 진지했고 아이러니하게 책 안에서 동지를 발견하였다 그것이 '호밀밭의 파수꾼' 이었다.
가끔 사람들은 위대한 소설의 엄청난 두께가 단 몇 줄로 전락했을 때 느껴지는 초라함에 냉소를 퍼붓기도 한다만 호밀밭의 파수꾼은 그럴 필요가 없는 작품이다. '주인공 홀든이 고등학교에서 쫓겨난 뒤 3일의 생활 아니 3일간의 중얼거림' 그것이 이 소설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소설은 경외감을 불러일으키는 다른 명작소설과는 달리 존 레논의 암살자인 마크 채프먼이 소지하고 있었던 좋지 않은 유명세를 가진 독특한 이력의 책이다. 사춘기 감성의 냉소적인 소년이 거친 언어로 쏟아내는 독백은 고전이라는 타이틀에 기대를 한 이들을 갸우뚱하게 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반겼었다. 위대한 사상이 녹아있지도 않고 휴머니즘과 회개 등 그런 고결한 주제 의식 없이 가끔 이유 없이 불만스럽던 내가 몰래 일기장에 적어두는 그런 혼잣말이 몇백 페이지에 걸쳐 쏟아져 나오던 그 유려함에 동질감을 느꼈던 것인지도 모른다.
사실 우리는 주인공 홀든 콜필드보다는 평이하게 살고 있다 그 평이함이 나를 안정시켰는지도 모른다 불만과 비난을 쏟아내기엔 부모님 품속의 나는 자격이 없어 보인다 뭔지 모를 불만이 증폭되기 전 또 한편으로 나는 부모님과 선생님에게 감사함을 느끼며 나를 둘러싸고 있는 체제에 순응하고 살아간다. 나는 홀든 콜필드와 같이 감히 퇴학을 당할 수는 없고 뻔뻔스레 나에게 주어진 조건에 대한 감사함을 아니 느낄 수도 없다. 즉 홀든은 학교에서 같이 수업을 듣고 농담 따먹기를 하는 평범한 우리는 아니었던 것이다. 음침하고 두서가 없는 불만을 주절거리는 이를 10대 소녀가 반길 친구일 리 없다. 그는 홀든 콜필드는 나도 인지하지 못한 내 안의 어두운 부분이었다. 그것이지 않을까 내 삶의 평안함에 이내 꼬리를 내리던 소년기 특유의 가시돋침이 실제 만개할 수 있었다면 홀든처럼 나도 길거리로 방황을 위해 뛰쳐나가지 않았을까 그것이 아니라면 나는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어내려가며 그렇게 반겼을 리 없다 나는 홀든 콜필드의 생각보다는 페이지를 꽉꽉 채워놓은 무질서한 비난들에 공감했던 것으로 하니까.
그렇게 나는 이전까지 내가 동경해오던 헤르만 헤세의 세계에서 벗어났다. 구도의 자세로 겸허히 서투르나 그 길을 걸어 성장하고자 하는 바른 주인공이 소설 속 내 또래의 전부였었다. 아픔과 성숙이 수레바퀴처럼 돌아가는 헤세의 소설은 차분했다 처음 나의 삶을 직면하게 된 나에게 좋은 길잡이가 되어주던 데미안 나르치스 그들의 말에 나는 감화되어 있었다 삶의 고뇌가 막 시작되던 시점에 나는 참으로 진지했으나 그 진지함은 시간이 지나자 고루함이 되었다.
[정말 환장할 노릇이다. 전혀 반갑지도 않은 사람에게 늘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같은 인사말을 해야 한다는 건 말이다. 그렇지만 이 세상에서 계속 살아가려면 그런 말들을 해야만 한다.] 나는 이런 구절에 환장했을 것이다. 헤세에 물들어 있던 내가 홀든의 이런 대사를 보며 불량스런 별세계라 신을 내지 않았을까. 그리고 또 어찌 샐린저는 전쟁터의 죽을 고비를 몇 차례를 넘기고서도 유년기의 치기를 그대로 소설 속에 옮겨다 놓았는지 몇 년 뒤 나는 이 구절을 다시 읽으며 빙그레 웃었던 기억이 난다.
그 시절의 서툰 반항들을 귀여워지는 나이에 샐린저가 적어낸 홀든은 지금 또 다른 사춘기 동지들을 만났을 테다.
한편으로는 또 우습지 않은가 [그런 곳은 없는 것이다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겠지만 그곳에 일단 가보면 우리가 보지 못하는 틈을 타서 어떤 자식이 바로 코밑에다 'fuck you'이라고 써놓고는 사라져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내가 죽어 무덤에 묻히고 비석 같은 것에 홀든 콜필드 라는 이름을 새겨 넣으면 출생연도나 사망연도가 쓰인 아래로 누군가가 'fuck you'라고 몰래 써놓을지도 모르는일이다. 사실 난 그럴 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 이런 구절들이 '고전 명작' 이라는 점잖은 이름표를 달고 세상에 나와 있다는 사실이 한때 금서가 되었다는 이 책의 광포함은 홀든의 꿈 호밀밭의 파수꾼이라는 아주 서정적인 이름 아래 숨어있다. 위태로운 소년의 정신세계가 욕설도 마다치 않고 혼전 성관계, 술, 매춘 등과 함께 쏟아져나온다.
돌이켜보면 헤세의 진중함과 샐린저의 괄괄함은 성장기간 동안 한 사람 안에서도 번갈아가며 나타난다. 우리는 그 둘 모두를 갖고 있고 또 그 둘 모두에 공명하며 자라 나는 것이 옳은 표현일 것이다. 싱클레어에게는 데미안이 있었다면 홀든 콜필드는 앤톨리니 선생님을 찾는다. 여기서도 샐린저의 냉소적인 전개는 계속된다. "자주 미성숙한 인간의 특징이 어떤 이유를 위해 고귀하게 죽기를 바라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반면 성숙한 인간의 특징은 동일한 상황에서 묵묵히 살아가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좋은 말씀을 들려주시는 앤톨리니 선생님 그러나 홀든은 잠든 사이 이마를 어루만지는 앤톨리니 선생님을 동성애자로 의심하고는 곧 그곳에서 도망쳐 나온다 홀든은 피비를 만나기까지 안착하지 못하고 방황한다.
그렇다 하여 나는 여동생 피비의 존재에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싶지 않다. 홀든은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고자 하는 소망을 이야기하고 순수한 피비의 모습에 홀든은 조금씩 변화의 모습을 보여주는 듯하다. 그러나 삼백여 페이지를 걸쳐 홀든이 우리에게 남긴 것이 과연 그 소박한 소망이며 여동생에게 감화되는 오빠의 모습일까.
우리가 기억하는 것은 "그곳에서는 귀머거리에 벙어리 행세를 하며 살 참이었다. 그러면 누구하고도 쓸데없고 바보 같은 대화를 하지 않아도 될 테니 말이다." 를 외치는 홀든의 모습이다 일본 애니메이션 공각기동대에도 인용되는 이 문구는 비뚤어지고 상처받은 소년의 여물지 못한 정신세계가 고스란히 녹아있다 이 작품이 남긴 것은 홀든 콜필드의 나중 행보가 아니다 여동생 피비의 존재는 무엇인지 그가 마지막 정신분석 학자와 마주하는 것은 어떤 결말을 의미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홀든 콜필드는 악도 선도 아닌, 그저 방황하는 청소년이요. 그런 그가 방황을 72시간 동안 독백으로 쏟아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사실 우리가 본 것은 한 편의 이야기가 아닌 방황의 초상화한 점이다.
고전이란 이름을 달게 되면 그 위치에 오르기까지의 추앙만이 명예롭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름 없이 사라져간 작품들보다 억울하게 난도질당하기도 하고 심심풀이 땅콩이 되어 하찮게 취급되기도 한다. 그 작품보다 훨씬 어린 녀석들이 머리가 굵어지면 먹물냄새를 풍기며 한마디씩 하게 되는 것을 수백 년간 지켜보아야 하는 것이 바로 고전 명작의 인생이라 볼 수 있다. 그렇게 고전으로 살아가는 것은 고달프다 그런 구도의 길을 시시껄렁함과 불량함을 잔뜩 안고 있는 홀든 콜필드가 가고 있다는 것은 재미난 아이러니다.
나는 이제 고전이란 명예의 전당이 갖는 가치 있음을 신랄히 깎아내리는 십 대 시 절을 지났다. 고전이란 예의 난해함으로 뭇사람들의 정신적 허영을 채우는 도구가 아님을 견지할만한 나이가 되고 보니 고전이란 것은 이름을 붙여 하나씩 밤하늘의 별자리를 만들어가는 것이란 생각이 든다. 얼큰하게 취해 바닷가에서 춤을 추는 누군가는 조르바로 젊은 시절 이룰 수 없는 사랑에 괴로워하는 이는 베르테르로 우리는 별자리를 만들 듯 이름을 붙여왔다. 그리고 샐린저를 통해 우리는 스무 살이 되기 직전 위 태로운 사춘기의 소년이 방황하는 모습을 홀든 콜필드라고 이름 붙이게 된 것이다. 우리 부모님이 연애하던 시절에도 북쪽 다섯 별을 가리키며 카시오페이아라 불렀듯 어릴 적 내가 공명한 호밀밭 파수꾼은 계속 그 자리에 그 이름으로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의 아이가 자라 질풍노도의 시기를 맞을 그 어느 때에, 나처럼 홀든 콜필드를 마주하게 될 것이다 고전이란 생명력이란 그런 것으로 나의 아이는 알퐁스 도데의 목동도 되고 한껏 비뚤어져서 샐린저의 홀든 콜필드도 될 것이다. 프로방스의 언덕과 뉴욕 뒷골목을 가지 않아도 그들과 만나며 그들과 함께 자라날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고전이라고 이름으로 그 주인공들을 우리 곁에 두는 까닭일 테니까.
학과: 치의예학과, 이름: 문*경, 선정연도: 2013
내용: 한때 내가 가진 고전에 대한 이미지는 늙음 이고 꼰대 였었다. 기력을 다해가는 노쇠함이 아니라 견고하게 굳혀져 가는 꼰대의 완성이었다. 고전에서는 언제나 가볍지 않은 문체들로 주인공들이 심각하게 세상을 살고 있었다. 텔레비전 속 가 수가 좋고 떡볶이와 수다를 좋아하는 소녀가 펼친 책장 속 세상은 너무나 진지하고 세상 온갖 고민이 모여 있어 어린 시절의 나는 지루한 훈육이라 치부한 적도 있었다.
청소년기, 누구나 그러하듯 나는 고전이라는 타이틀을 가진 작품들을 부모님 선생님 혹은 출판사를 통해 추천받았고 처음 읽어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는 러시아 귀족도 아니었고 프랑스 뒷골목의 빵을 훔치는 사나이도 아니었으니 그들의 인생과 정신적 여정을 함께 하기란 여간 지루한 것이 아니었다. 아마도 나에게 '그것을 읽어냈다' 는 성취감과 지적 허영심이 없었다면 나는 그 작품들에게 이내 손을 뗐을 것이다.
그 사춘기적 허세는 시간이 흐를수록 갈피를 못 잡고 여러 가지로 파생되기 마련이다. 불량스러움을 추구하고 세상의 권위를 모조리 부정하고 싶은 반항심이 내 독서세계에도 발을 뻗친 것이다 착실히 읽어가던 고전이라는 모범적인 책에도 반기를 들고 싶었다. 그때, 우습게도 나의 반항심은 아주 진지했고 아이러니하게 책 안에서 동지를 발견하였다 그것이 '호밀밭의 파수꾼' 이었다.
가끔 사람들은 위대한 소설의 엄청난 두께가 단 몇 줄로 전락했을 때 느껴지는 초라함에 냉소를 퍼붓기도 한다만 호밀밭의 파수꾼은 그럴 필요가 없는 작품이다. '주인공 홀든이 고등학교에서 쫓겨난 뒤 3일의 생활 아니 3일간의 중얼거림' 그것이 이 소설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소설은 경외감을 불러일으키는 다른 명작소설과는 달리 존 레논의 암살자인 마크 채프먼이 소지하고 있었던 좋지 않은 유명세를 가진 독특한 이력의 책이다. 사춘기 감성의 냉소적인 소년이 거친 언어로 쏟아내는 독백은 고전이라는 타이틀에 기대를 한 이들을 갸우뚱하게 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반겼었다. 위대한 사상이 녹아있지도 않고 휴머니즘과 회개 등 그런 고결한 주제 의식 없이 가끔 이유 없이 불만스럽던 내가 몰래 일기장에 적어두는 그런 혼잣말이 몇백 페이지에 걸쳐 쏟아져 나오던 그 유려함에 동질감을 느꼈던 것인지도 모른다.
사실 우리는 주인공 홀든 콜필드보다는 평이하게 살고 있다 그 평이함이 나를 안정시켰는지도 모른다 불만과 비난을 쏟아내기엔 부모님 품속의 나는 자격이 없어 보인다 뭔지 모를 불만이 증폭되기 전 또 한편으로 나는 부모님과 선생님에게 감사함을 느끼며 나를 둘러싸고 있는 체제에 순응하고 살아간다. 나는 홀든 콜필드와 같이 감히 퇴학을 당할 수는 없고 뻔뻔스레 나에게 주어진 조건에 대한 감사함을 아니 느낄 수도 없다. 즉 홀든은 학교에서 같이 수업을 듣고 농담 따먹기를 하는 평범한 우리는 아니었던 것이다. 음침하고 두서가 없는 불만을 주절거리는 이를 10대 소녀가 반길 친구일 리 없다. 그는 홀든 콜필드는 나도 인지하지 못한 내 안의 어두운 부분이었다. 그것이지 않을까 내 삶의 평안함에 이내 꼬리를 내리던 소년기 특유의 가시돋침이 실제 만개할 수 있었다면 홀든처럼 나도 길거리로 방황을 위해 뛰쳐나가지 않았을까 그것이 아니라면 나는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어내려가며 그렇게 반겼을 리 없다 나는 홀든 콜필드의 생각보다는 페이지를 꽉꽉 채워놓은 무질서한 비난들에 공감했던 것으로 하니까.
그렇게 나는 이전까지 내가 동경해오던 헤르만 헤세의 세계에서 벗어났다. 구도의 자세로 겸허히 서투르나 그 길을 걸어 성장하고자 하는 바른 주인공이 소설 속 내 또래의 전부였었다. 아픔과 성숙이 수레바퀴처럼 돌아가는 헤세의 소설은 차분했다 처음 나의 삶을 직면하게 된 나에게 좋은 길잡이가 되어주던 데미안 나르치스 그들의 말에 나는 감화되어 있었다 삶의 고뇌가 막 시작되던 시점에 나는 참으로 진지했으나 그 진지함은 시간이 지나자 고루함이 되었다.
[정말 환장할 노릇이다. 전혀 반갑지도 않은 사람에게 늘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같은 인사말을 해야 한다는 건 말이다. 그렇지만 이 세상에서 계속 살아가려면 그런 말들을 해야만 한다.] 나는 이런 구절에 환장했을 것이다. 헤세에 물들어 있던 내가 홀든의 이런 대사를 보며 불량스런 별세계라 신을 내지 않았을까. 그리고 또 어찌 샐린저는 전쟁터의 죽을 고비를 몇 차례를 넘기고서도 유년기의 치기를 그대로 소설 속에 옮겨다 놓았는지 몇 년 뒤 나는 이 구절을 다시 읽으며 빙그레 웃었던 기억이 난다.
그 시절의 서툰 반항들을 귀여워지는 나이에 샐린저가 적어낸 홀든은 지금 또 다른 사춘기 동지들을 만났을 테다.
한편으로는 또 우습지 않은가 [그런 곳은 없는 것이다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겠지만 그곳에 일단 가보면 우리가 보지 못하는 틈을 타서 어떤 자식이 바로 코밑에다 'fuck you'이라고 써놓고는 사라져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내가 죽어 무덤에 묻히고 비석 같은 것에 홀든 콜필드 라는 이름을 새겨 넣으면 출생연도나 사망연도가 쓰인 아래로 누군가가 'fuck you'라고 몰래 써놓을지도 모르는일이다. 사실 난 그럴 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 이런 구절들이 '고전 명작' 이라는 점잖은 이름표를 달고 세상에 나와 있다는 사실이 한때 금서가 되었다는 이 책의 광포함은 홀든의 꿈 호밀밭의 파수꾼이라는 아주 서정적인 이름 아래 숨어있다. 위태로운 소년의 정신세계가 욕설도 마다치 않고 혼전 성관계, 술, 매춘 등과 함께 쏟아져나온다.
돌이켜보면 헤세의 진중함과 샐린저의 괄괄함은 성장기간 동안 한 사람 안에서도 번갈아가며 나타난다. 우리는 그 둘 모두를 갖고 있고 또 그 둘 모두에 공명하며 자라 나는 것이 옳은 표현일 것이다. 싱클레어에게는 데미안이 있었다면 홀든 콜필드는 앤톨리니 선생님을 찾는다. 여기서도 샐린저의 냉소적인 전개는 계속된다. "자주 미성숙한 인간의 특징이 어떤 이유를 위해 고귀하게 죽기를 바라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반면 성숙한 인간의 특징은 동일한 상황에서 묵묵히 살아가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좋은 말씀을 들려주시는 앤톨리니 선생님 그러나 홀든은 잠든 사이 이마를 어루만지는 앤톨리니 선생님을 동성애자로 의심하고는 곧 그곳에서 도망쳐 나온다 홀든은 피비를 만나기까지 안착하지 못하고 방황한다.
그렇다 하여 나는 여동생 피비의 존재에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싶지 않다. 홀든은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고자 하는 소망을 이야기하고 순수한 피비의 모습에 홀든은 조금씩 변화의 모습을 보여주는 듯하다. 그러나 삼백여 페이지를 걸쳐 홀든이 우리에게 남긴 것이 과연 그 소박한 소망이며 여동생에게 감화되는 오빠의 모습일까.
우리가 기억하는 것은 "그곳에서는 귀머거리에 벙어리 행세를 하며 살 참이었다. 그러면 누구하고도 쓸데없고 바보 같은 대화를 하지 않아도 될 테니 말이다." 를 외치는 홀든의 모습이다 일본 애니메이션 공각기동대에도 인용되는 이 문구는 비뚤어지고 상처받은 소년의 여물지 못한 정신세계가 고스란히 녹아있다 이 작품이 남긴 것은 홀든 콜필드의 나중 행보가 아니다 여동생 피비의 존재는 무엇인지 그가 마지막 정신분석 학자와 마주하는 것은 어떤 결말을 의미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홀든 콜필드는 악도 선도 아닌, 그저 방황하는 청소년이요. 그런 그가 방황을 72시간 동안 독백으로 쏟아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사실 우리가 본 것은 한 편의 이야기가 아닌 방황의 초상화한 점이다.
고전이란 이름을 달게 되면 그 위치에 오르기까지의 추앙만이 명예롭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름 없이 사라져간 작품들보다 억울하게 난도질당하기도 하고 심심풀이 땅콩이 되어 하찮게 취급되기도 한다. 그 작품보다 훨씬 어린 녀석들이 머리가 굵어지면 먹물냄새를 풍기며 한마디씩 하게 되는 것을 수백 년간 지켜보아야 하는 것이 바로 고전 명작의 인생이라 볼 수 있다. 그렇게 고전으로 살아가는 것은 고달프다 그런 구도의 길을 시시껄렁함과 불량함을 잔뜩 안고 있는 홀든 콜필드가 가고 있다는 것은 재미난 아이러니다.
나는 이제 고전이란 명예의 전당이 갖는 가치 있음을 신랄히 깎아내리는 십 대 시 절을 지났다. 고전이란 예의 난해함으로 뭇사람들의 정신적 허영을 채우는 도구가 아님을 견지할만한 나이가 되고 보니 고전이란 것은 이름을 붙여 하나씩 밤하늘의 별자리를 만들어가는 것이란 생각이 든다. 얼큰하게 취해 바닷가에서 춤을 추는 누군가는 조르바로 젊은 시절 이룰 수 없는 사랑에 괴로워하는 이는 베르테르로 우리는 별자리를 만들 듯 이름을 붙여왔다. 그리고 샐린저를 통해 우리는 스무 살이 되기 직전 위 태로운 사춘기의 소년이 방황하는 모습을 홀든 콜필드라고 이름 붙이게 된 것이다. 우리 부모님이 연애하던 시절에도 북쪽 다섯 별을 가리키며 카시오페이아라 불렀듯 어릴 적 내가 공명한 호밀밭 파수꾼은 계속 그 자리에 그 이름으로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의 아이가 자라 질풍노도의 시기를 맞을 그 어느 때에, 나처럼 홀든 콜필드를 마주하게 될 것이다 고전이란 생명력이란 그런 것으로 나의 아이는 알퐁스 도데의 목동도 되고 한껏 비뚤어져서 샐린저의 홀든 콜필드도 될 것이다. 프로방스의 언덕과 뉴욕 뒷골목을 가지 않아도 그들과 만나며 그들과 함께 자라날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고전이라고 이름으로 그 주인공들을 우리 곁에 두는 까닭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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