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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삶을 사랑하세요?
학과: 행정학과, 이름: 김*명, 선정연도: 2022
마음에 드는 글귀 또는 문장:언제나 마음을 끌어당기는 것은 살아있는 것이다. (p. 5)
추천하고 싶은 대상:지금을 살아가는 모든 이들
추천이유:지금을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 읽었을 때 좋을 것 같다. 삶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또한 살아가는 중에 필요한 지혜를 일깨워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미 우리가 알고 있던 지혜들 중 잠시 잊고 있던 것들 말이다.
“삶을 사랑하세요?” 누군가 이런 질문을 건넨다면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당연한 걸 왜 묻냐고 할까. 단호하게 아니라고 할까. 모두의 대답을 알 수는 없지만 질문에 대한 생각을 거듭할수록 쉽게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는 ‘우리는 정말 삶을 사랑하는 걸까? 삶을 사랑한다는 건 어떤 것일까?’하는 질문이 속에서 고개를 든다. 삶이라는 단어는 너무 거대하고 소중한 무언가를 담고 있는 것 같아 말하기가 조심스럽고, 그런 삶에 대해 인간이 할 수 있는 위대한 행위가 사랑이라면 마땅히 그것을 해야 할 것 같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우리는 이에 대한 물음이 필요해 보인다.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는 위와 같은 물음에 대한 생각을 이어가 사유의 길로 접어드는 시간을 함께하기에 좋은 책이다. 저자 에리히 프롬의 글 여러 편을 엮어 만든 이 책은 엮은이의 언급과 같이 ‘살아있는 것’과 ‘죽은 것’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독자로 하여금 삶과 그것을 살아가는 인간에 대한 이해를 더 해갈 수 있도록 돕고 나아가 살아있는 인간, 즉 생동감을 지닌 존재로서의 인간이 가지는 의미에 대한 심도 있는 견해를 피력한다. 이러한 내용을 통해 우리는 책을 읽는 동안 삶과 삶을 사랑하는 것에 대한 배움을 경험하게 된다. 때론 막연하게 느껴졌던 삶의 향기를 맡으며 말이다.
또한 이 책은 삶을 사랑하는 것에 대한 이해와 함께 그 사랑을 소멸시킬 위험을 가진 시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그 시대는 역사적인 기준에서 지금으로부터 수십 년의 거리를 두고 과거에 있지만, 당시의 문제는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가 겪고 있는 문제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그 점을 인지하며 독서를 할 때면 경계하게 될 것이다. 살아있는 존재로서의 우리를 위협하는 것들에 대해, 우리의 삶과 삶에 대한 사랑을 위협하는 것들에 대한 경계 말이다. 이와 같이 우리를 지키는 건강한 경계를 의식하는 것이 삶의 향기와 더불어 이 책이 가져오는 중요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살아간다. 하지만 누군가는 살아있고 누군가는 죽어있다. 누군가는 살아있는 것과 가까이 지내고 누군가는 죽어있는 것과 가까이 지낸다. 살아있는 존재로서 인간은 자유를 누린다. 죽어있다면, 그렇지 못하다. 살아있는 것과 죽어있는 것, 삶과 죽음 사이에서 우리는 무엇에 관심을 가져야 할까? 무엇을 경계해야 할까? 책을 읽는 동안에 이것에 대한 생각이 이어질 것이다. 그러한 생각을 하는 시간을 가지는 것이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시간을 가지고 나면 이 글의 처음에 나왔던 질문에 대해 우리는 조금 더 자신다운 대답을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사유의 길을 계속해 걸어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별점:★★★★★
독후감 공모전 우수작
제목: 너무 오랫동안 베스트셀러이고 싶었다, 그러지 않아도 됐음에도.
학과: 교육학과 , 이름: 조*서, 선정연도: 2022
내용:
프롬을 처음 만난 건, 작년 가을이었다. 자유로움에 대해 한창 고민을 할 시기였는데, 때마침 독서모임에서 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읽게 되었던 것이었다. 그때 처음 마주한 프롬의 목소리는 마치 할아버지의 목소리처럼 느껴졌다. 노곤하게 들려오는 낮은 목소리, 그렇지만 결코 가늘지 않은. 이후 프롬의 책을 찾아다니며 읽었다. 일 년 사이 읽은 프롬의 책만 벌써 다섯 권째라니, 이 정도면 명예 손녀딸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프롬의 책을 읽을 때면 나의 삶을 스캐너로 스캔하는 기분이 든다. 평소 감추고 싶었던 나의 모습들까지 고스란히 드러나는 스캐너 안에서 나는 늘 부끄러워하지만, 평소엔 잘 들여다보지 않는 나의 부족한 부분을 볼 기회를 놓칠 수 없다는 듯, 붉어진 얼굴로 그 시간을 유유히 즐기기도 한다. 이 책도 역시 그랬다. 프롬의 다른 책들과 다름없이 나의 시간들을 돌아보게 해주었다. 다른 책들과 조금 다른 점이 있었다면, 실존적인 측면의 이야기가 조금 더 많았다는 것이었다. 다른 책에서는 평소 프롬이 정답을 하나로 두고 이야기하는 것을 멀리하는 만큼, 급하지 않은 속도로, 어쩌면 손에 잡히지 않을 것 같은 이야기들을 전하는 편이었는데,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에서는 - 다른 사람의 손으로 엮인 책이라 그런지는 몰라도- 조금 더 가까이에서, 내 삶과 더 가까운 이야기를 해주는 듯 느껴졌다. 다른 책과 이 책 중 무엇이 더 좋다 말하긴 어렵지만, 지금 이 순간 내게 더 와닿은 책은 이 책이었던 것 같다.​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에서는 ‘삶’에 초점을 두어 이야기를 하고 있다. 다른 동물의 삶이 아니라 ‘인간의 삶’에 대해 이야기 한다는 점에서 현대 사회의 사람들이 어떤 ‘존재’로서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그리고 그 삶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는지에 특히 주목하여 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이야기가 나오지만 가장 가슴에 사무친 부분을 고르라면, 행복을 성취해내기 위해 스스로를 상품으로 전락시켜 끊임없이 소비하려 하는 현대 사회의 인간들에게 프롬이 호통하는 부분을 고르고 싶다.


나는 꽤 오랜 시간 ‘괜찮은 사람’이고 싶었다. 괜찮은 사람이 아니라면 최소한 ‘점차 괜찮아지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늘 이리저리 바쁘게 뛰어다녔다. 고작 한 달 반이 지난 이번 학기에만 하더라도 학업에 더불어 두 개의 독서 모임과 두 개의 인문학 모임, 단대 기자단 활동과 영어 과외 아르바이트를 병행했고, 이러한 규칙적인 일정 외에도 혼자 불쑥 여행을 떠나거나 뮤지컬이나 연극을 보는 등 점점 더 나은 사람, 점차 반짝이는 사람이 되고자 끊임없이 노력했다. 자연스럽게도 사람을 만날 때마다 ‘너처럼 열심히 사는 사람을 처음 본다.’라는 말을 쉽게 들었고, 날 오래 봐왔던 사람들로부터는 마치 지금 이 시기가 ‘나의 전성기’ 같이 느껴진다는 말도 들었다. 내가 생각해도 정말 그래보였다. 내 삶의 전성기가 있다면 정말 딱 지금인 것만 같이 느껴졌다. 찬란하게 빛나는, 빠르게 성장하는 전성기. 내가 나의 삶을 써내려가는 작가라고 생각한다면, 내 삶이라는 제목의 책이 베스트셀러가 된 시기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난 이런 내 삶을 온힘을 다해 사랑하고 있다고 자신했다.

그렇게 정말 ‘괜찮은 사람’이 된 것만 같다는 생각에, 그 기쁨에 잔뜩 빠져 내 삶을 사랑하던 -사실은 사랑한다 ‘생각했을 뿐’이었던- 어느 날, 해야 할 일들이 겹겹이 쌓여 날 짓누르고 있음을 발견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시험 기간을 앞두고 있었고, 벌여놓은 일들 -날 더 괜찮은 사람으로 만들어 준다고 믿었던- 이 처리되길 기다리고 있었다. 지극히 평범한 인간으로서 육체적·정신적 에너지는 한정적인데, 이 많은 일을 다 해내려 하다 보니 마주한 일들에 하나둘씩 구멍이 생기기 시작했다. 독서모임에서 읽기로 한 책을 다 읽지 못했고, 발표 준비를 하느라 밤을 새우는 날이 반복되면서 수면 패턴이 망가졌으며, 사나흘에 한 번꼴로 비릿한 피 냄새와 함께 코피가 찾아와 주르륵 흐르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자기혐오와 검열이 시작되었다. 왜 나는 다 해내지 못하는가, 하고. 왜 나는 일을 저질러놓고 제대로 책임지지 못하느냐고. 왜 나는 이렇게 부족하냐고. 도저히 날 사랑할 수 없었다. 이렇게 부족한 날 어떻게 사랑할 수 있나 싶었다. 그런데 이러한 자기혐오와 검열보다 날 더 괴롭게 한 것은, 이러한 나를 향한 ‘온전하지 못한 사랑’이 생각해보면 일정 주기로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마치 도돌이표 같았다.

꾸준히 써온 일기장을 열어보니 지난 학기에도, 작년 이맘때에도, 열심히, ‘괜찮은 사람’이 되기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노력했던 나는 늘 어느 순간 갑자기 무너져 내려왔다는 걸 알게 되었다. 늘 나의 한계를 마주하고 힘들어했다. 그렇다 보니 이번에도 ‘역시’ 무너져 내린 난, 1년 뒤에도, 3년 뒤에도 내가 오선 위 도돌이표처럼 반복되는 삶을 그리고 있으면 어떡하나 하는 불안에 잠겨 더욱 일어나기 힘들었다. 찬란한 기쁨과 성취의 멜로디 뒤에 처참히 무너지는 실패의 멜로디가 계속 찾아올 거라 생각하니, 내가 여태껏 이뤄냈던 것들, 내가 삶을 사랑한다 믿었던 시간들은 머릿속에서 싹 사라지고 앞으로 내가 또 마주하게 될 어두운 시기만 미리 걱정되어 온몸이 뜨거워졌다가 차가워지기를 반복했다. 이러다 보면 어느 순간 내가 내 삶을 평생 사랑할 수 없을 것 같다 느끼는 순간이 올 것 같아서 무서웠다.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의 프롬은 이런 내게 다가와, 내가 하고 있다고 믿는 ‘삶에 대한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고 낮고 큰 목소리로 말했다. 스스로를 조금 더 잘 팔리는 ‘괜찮은’ 상품으로, 조금 더 큰 성과를 내는 ‘성능이 좋은’ 기계로 만들면서 이걸 사랑이라 착각하고 있는 것뿐이라고 말이다. 프롬의 책을 읽으면서 내가 상품화했던 나의 모습들이 하나둘씩 머릿속을 스쳐갔다. 여태 내가 사랑의 방식이라 믿고 행했던 많은 행동과 생각들이 사실은 사랑이 아니었을 수 있겠다는, 오히려 억압과 소외였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드니, 나 스스로에게 미안해졌다. 스스로를 사랑할 수 없는, 도돌이표를 걷는 삶이 될 거라 섣불리 판단했던 내가 오만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또 책 8장 <소비하는 인간의 공허함>에서는 인간과 소비 사이의 메커니즘과 그 사이에서 발생하는 공허의 감정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 중에는 ‘소비를 통해 우리는 수동적 인간이 될 뿐만 아니라 종속적인 인간이 된다. 불안해지는 인간은 소비한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나는 이 문장에서 프롬이 이야기 하는 ‘소비’가 꼭 물질적인 것에만 국한되어있는 내용은 아니라고 느꼈다. 즉 내가 나를 괜찮은 사람으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에 ‘선택’한다고 생각했던 많은 ‘경험’들도 사실은 불안으로부터 비롯된 ‘소비’로서 선택했던 것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소비는 사실 능동적 선택이 아니라 불안의 감정에 종속된 수동적인 선택이라는 점에서. 나를 또 다시 불안의 늪으로 넣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도 이어졌다. 다시 말해, 불안을 탈피하기 위해 괜찮은 사람이고자 노력하며 경험들을 소비했던 게 날 또 다른 불안에 빠트렸음을 알아채게 되었다.

​ 책을 읽은 뒤 스스로에 대한 죄책감과 후회에 빠져 허우적대는 내게, 프롬의 엄격하지만 또 다정한 목소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 잘못만은 아니다’는 메시지도 전달한다. 책의 7장 <기본 소득으로 자유를 얻으려면>에서는 오랜 시간동안 ‘일하지 않는 자여, 먹지도 마라!’의 원칙이 인간을 지배해왔음을 이야기하고 있고, 책의 8장에서는 자본주의의 도래로 ‘출세하지 못할 것이라는 불안, (중략) 남들이 이룬 것을 나도 이루지 못하면 배우자와 친구들이 ‘패배자’ 취급을 할지 모른다는 불안이 만연한 것’으로부터 인간이 불안과 소외감을 느끼게 되었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러한 내용들은 어쩌면 현대 사회의 인간이 스스로를 도구화하는 흐름은 지극히 자연스러우며, 그 흐름 자체에 그저 흘러왔음에 있어서 스스로를 탓하기만 할 필요는 없다고 말하는 것처럼 내게 들렸다. 물론 이제는 내가 삶에 대한 사랑의 방식이라 믿었던 끝없는 스스로에 대한 상품화가 잘못되었음을 인식했기에, 조금은 다른 삶을 살 필요는 있겠지만 말이다.

나의 현실을 인식한 뒤 궁극적으로 스스로의 삶을 제대로 사랑하는 방법이 무엇인지 애타게 찾던 중, 프롬의 책의 서두에서 다음의 문장을 다시금 읽고 마음에 새기게 된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행복이 아니라 살아 있는 것이다.’ (책 1장 중) 삶을 사는 것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여태까지 나를 상품화 하면서까지 열심히 쫓았던 ‘행복’이 아니라 ‘살아있음’ 그 자체임을 피력하는 프롬의 말을 듣는 순간, 속에서 끓어오르던 불안이 고요해짐을 느꼈다. 내가 내 삶을 불행에 휩싸인 도돌이표라 느꼈던 것은, 삶을 제대로 사랑해 본 적이 없어서였다. 늘 행복만을 쫓는 것이 삶의 진정한 의미가 아님을 마주하는 순간 내가 믿어왔던 세상이 와장창 깨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그 깨짐이 슬프지만은 않았다. 오히려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갈 길이 열린 듯 느껴져 홀가분하고 설레기도 했다.


행복하지 않은 삶의 순간에 처참히 무너진 뒤, 일어날 힘이 없던 순간에 읽은 이 책 덕분에, 베스트셀러이고 싶었던, 베스트셀러가 되기 위해 노력하던 내 삶이 썩 ‘사랑스러운 삶’은 아니었음을 마주하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삶을 향한 사랑이라 불렀던 감정은 ‘사랑이고 싶었던’ 감정에 불과했으며, 사회가 부여한 상품적 가치로서의 인간에 부합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었음도 깨닫게 되었다. 앞으로도 어느 순간 내가 브레이크가 고장난 자동차처럼 행복이라는 공허한 도착지를 향해 무작정 달린다고 느껴질 때면 내가 달리는 길이 과연 삶을 사랑하는 길인지를, 그리고 내가 능동적으로 선택한 길이 맞는지를 잠시 멈춰 생각해보게 될 것 같다.

책에 나오는 ‘책을 읽고서도 내가 똑같은 사람이라면 그 책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거나 내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것이다.’라는 문장을 빌려 이야기를 마무리 하자면, 책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는 참 쓸모 있는 책이었다. 이 책을 읽은 뒤 죽어있는 상품이나 기계로서가 아니라, 살아있는 반짝이는 인간으로서, 삶이 행복하지 않더라도 그 삶 자체를 온전히 사랑하는 사람에 한 걸음 가까워졌으니!


(*이탤릭체로 표현한 부분은 책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에서 인용한 부분이며, 명확한 쪽수 정보가 제공되지 않는 전자책을 구매하여 읽어본 탓에 인용한 문장에 대해 정확한 쪽수를 기재하지 못했음)
독후감 공모전 우수작
제목: 뜨겁고 말랑하게
학과: 행정학과 , 이름: 김*호, 선정연도: 2022
내용:
현대사회는 한마디로 증오의 시대라 볼 수 있다. 전쟁, 환경오염, 기후변화, 인종갈등, 성별갈등, 세대갈등, 빈부격차, 자살 등 너무나 많은 사회문제가 우리의 현재와 미래를 위협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전쟁으로 가족을 잃는다.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인종차별, 성차별로 앓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디선가는 이상기후로 삶의 터전이 파괴되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사회로부터 외면받고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 이 모든 문제의 근원에는 증오가 뿌리박혀 있다. 우리는 왜 인류의 무궁한 기술적 발전에 앞서면서도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까? 이에 대해 에리히 프롬은 우리가 삶을 사랑하는 법을 잊고 삶에 무관심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거대한 사회문제 앞에서 개인은 한없이 작아지고 무력해진다. 거대한 사회문제를 떠나서도 사회 구조는 우리를 무력한 인간으로 만든다. 에리히 프롬은 개인이“자기 운명을 좌우할 힘이 전혀 없다”라고 말한다. 우리는 어쩌면 사회라는 거대한 기계의 차가운 부품으로 전락해버렸는지도 모른다. 고장이 나면 똑같은 부품으로 교체될 수 있는 그런 부품으로 말이다. 인간은 남들보다 더 좋은 부품이 되는 것이 중요해졌다. 경제적이고 효율적인 부품이 되길 강요받는다. 존재로서의 인간이 수단으로서의 인간으로 몰락해버린 순간이다. 이제 우리는 논리에 앞서 존재하지 않고, 존재에 앞서 논리가 있게 되었다. 인간이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몰락한 순간, 우리는 인간을 있는 그대로 바로 볼 수 없게 되었다. <인간은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다>에서 프롬은 현대의 중대한 첫 번째 과제로서 인간을 지성과 감성으로 가르는 이분법의 극복을 제시했다. 인간을 지성과 감성으로 가르는 이분법은 인간을 수단으로 보는 사고방식으로 이어진다. 더 좋은 부품이 되기 위해서는 지성을 가져야 한다. 그렇지 못한 인간은 부품이 될 수 없다. 성공적인 부품이 된 인간은 더욱더 차가워지고 단단해져야 한다. 더 경제적이고 효율적이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뜨겁고 말랑한 것을 버리고 차갑고 단단해져야 한다.
역설적이게 성공적인 부품이 된 자들은 무력하다. 그들은 무력을 알아차리지 못하기도 한다. 무력감은 상대에게 영향을 미칠 수 없다는 생각으로부터 유발된 감정이다. 그 대상은 인간이 될 수도, 사물이 될 수도, 자신이 될 수도 있다. 무력감이 심해질수록 반작용으로 대상을 통제하고자 하는 욕망이 강해진다. 따라서 현대의 인간은 무력감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인간 내면에 깊이 침투해 뿌리박은 무력감에서 분노가 탄생한다. 분노는 다시 불안을, 불안은 다시 무력감을 낳는다. 무력해질수록 불안해지고, 불안해질수록 무력해진다. 부품이 된 인간은 언젠가는 교체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없다는 불안감에 빠져있게 된다. 거대한 사회문제는 개인의 무력감을 더 키웠다. 수단이 된 개인은, 차갑게 굳어버린 개인은 더는 사랑할 수 없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사실 우리는 사랑하기보다는 증오하기를 더 좋아하기도 한다. 심지어는 그 대상이 우리 스스로일지라도 말이다. 인터넷에는 누군가를 비방할 목적으로 쓰인 글이 넘쳐난다. 연예인들, 스포츠인들은 매일 악성 댓글에 시달리기도 한다. 심지어 악성 댓글로 인하여 자살을 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사람들은 각종 커뮤니티에서 서로를 비방하고 비난한다. 지금도 우리는 증오의 대상을 찾아다니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간에. 당장 우리는 그 대상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면서 그것의 재판관이 되어 그들을 심판한다. 대상이 무엇인지, 누구인지는 단지 이름으로서 정의된다. 이름이 아니더라도 직업, 가족관계, 국적, 민족 등 대상 그 자체가 아닌 특징적 관계로서 정의되는 것이다. 에리히 프롬은 우리가 “구체적인 사람에게서 추상성을 본다”라고 한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을 ‘창의적’으로 봐야 한다 주장한다.
그가 말하는 ‘창의성’은 투영과 왜곡 없이 객관적으로 보고 대답한다는 뜻이다. 그는 책에서 장미를 보는 것을 예시로 든다. 장미를 보았을 때 우리는 생각한다. ‘이것은 장미네’ 혹은 ‘나는 장미를 보고 있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또는 ‘장미가 빨갛다’라든지 ‘장미가 예쁘네’하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때 우리는 장미를 창의적으로 바라본 것일까? 어쩌면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사실 우리가 생각한 것은 단지 장미 그 존재 자체의 구체성을 언어로 바꾸어 추상적으로 만든 것이다. 우리는 의식적으로 장미를 이해하고 그것을 언어화하였다. 그 장미는 ‘장미’로서, ‘빨간 꽃’으로서, ‘예쁜 꽃’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냥 구체적으로 지금, 그곳에 존재한다. 우리는 그것을 보면서도 보지 않는다. 우리는 그것을 생각할 뿐이다. 에리히 프롬은 우리가 대상을 완전하게 인식할 경우 추상이 없다고 한다. 즉 대상의 구체성과 유일성만 남는다는 것이다.
그 대상이 사람일 때도 다르지 않다. 우리는 길에서 낯선 사람을 마주친다. 아무 생각도 않고 지나갈 수도 있겠지만 그들이 입은 옷, 머리카락, 걸음걸이 등에 대하여 생각할 수도 있다. 만약 머리를 박박 깎고 염주를 든 사람을 마주치면 자연스레 그 사람은 스님이라 생각할 것이다. 우리는 그에게서 구체성이 아닌 추상을 본다. 새로운 사람을 알게 될 때를 가정해보자. 우리는 가장 먼저 이름을 묻는다. 다음으론 직업이나, 취미를 묻고 때론 가족관계를 물을 수도 있다. 그리고 다음에 만났을 때 그가 누구인지는 그의 이름이나 직업, 취미 등으로 기억된다. 이것은 지극히 당연하고 일반적인 일이다. 하지만 우리가 그를 언어를 넘어서 본 적이 있을까? 다시 말해 창의적으로 사람을 바라본 적이 있을까? 사람뿐만이 아니다. 그저 우리가 바라보는 것을 창의적으로 본 적이 있을까? 어쩌면 그것은 정말 어려운 일일 것이다. 습관적으로 대상의 이름을, 대상의 용도를, 대상의 특징을 언어로 정의할 것이다. 우리가 대상의 추상을 언어로 표현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우리는 대상을 창의적으로 보아야 한다.
비탈길에서 공이 굴러간다. 그것을 한 번 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두 번, 세 번 보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다. 그렇다면 열 번 보는 것은? 그것은 아마 조금 어려울 수도 있다. 백 번은 어떤가. 아마 비탈길에서 굴러가는 공을 백 번이나 보는 사람을 보고 우리는 인내심이 강하거나 미쳤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창의적으로 본다면 이것은 인내심이 강하거나 미친 것이 아니다. 비탈길을 공이 구를 때마다 그것은 구체적인 사건이고 유일한 사건이다. 비탈길에서는 공을 놓으면 굴러간다는 물리 법칙 뒤에 그것은 그저 구를 뿐이다. 자세히 바라보면 결코 완벽히 같은 사건이 아니다. 나무, 장미, 비둘기, 사람 모두 같다. 그들은 그저 존재할 뿐이다. 어떠한 추상에 의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사랑하기 위해 창의적이어야 한다. 에리히 프롬은 사랑이 대상과 하나 되는 것, 융합하는 것이라 한다. 프롬은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에서 사랑하기 위해“망상을 버리고 타인과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다는 것은 창의적으로 본다는 말과 같다. 창의적으로 볼 수 없는 사람은 사랑할 수 없다. 장미를 그 자체로 보아야 한다. 그래야만 장미를 사랑할 수 있다. 창의성은 보고 대답하는 것이다. 창의적이라면 대상을 보고 그것에 대답한다. 창의적으로 본다는 것은 그것에 꼭 맞게 응답하기 위한 조건이다. 그리고 대상에 꼭 맞게 응답하였을 때 보는 자와 보는 대상은 하나 된다. 지성으로, 합리적으로, 추상으로 대상을 보지 않고 감성으로, 온몸으로, 유일로서 대상을 볼 때 우리는 그것과 하나 되고 사랑한다.
사랑에는 대상이 필요하다. 대상이 없다면 그것을 창의적으로 볼 수도 응답할 수도 없고, 하나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사랑의 대상은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될 수도 있고, 무형의 무언가일 수도 있다. 지금 당장 내가 사랑하는 것을 떠올려보자. 그것은 가족일 수도, 연인일 수도, 비싼 신발일 수도, 아끼는 옷일 수도 있다. 바다를 떠올릴 수도 있을 테고, 푸른 하늘이나 낙조를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시를, 음악을, 철학자의 정신을 사랑할 수도 있다. 사랑의 대상은 정말 다양하고 무한하다. 하지만 ‘삶’을 떠올린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누구라도 삶을 문득 떠올리긴 쉽지 않다. 사실 사랑한다는 대상을 떠올렸을 때 그 대상이 삶이 되기는 쉽지가 않다. 진정으로 그것을 사랑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사실 ‘삶’이란 단어를 들으면 당장 나의 인생이 떠오르거나 ‘내가 살고 있다’라는 사실이 떠오른다. 아니면 죽음의 반대 정도가 떠오르기도 한다. 조금 더 생각해보면 다른 사람의 인생이, ‘다른 사람이 살고 있다’라는 사실 정도만 떠오른다. 에리히 프롬은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에서 삶을 “어쩔 수 없이 성장과 변화의 과정”이라고 정의한다. 나는 여기에 더 추가하고 싶다. 삶이란 뜨거운 것이고 말랑한 것이라고. 살아있는 것은 결코 차가운 것이거나 딱딱한 것이 아니다. 성장과 변화의 결과물도 아니다. 살아있는 것은, 삶은 뜨겁고 말랑하며 성장과 변화의 과정이다. 종종 이 사실을 잊는다. 특히 우리는 삶에서 결과를 보지 과정을 보지 못할 때가 많다. 완성된 삶은 없다. 그래서 우리는 삶을 사랑한다.
하지만 우리는 삶을 창의적으로 바라보지 못하기도 한다. 이것은 우리가 삶을 사랑하지 못하게 한다. 어쩌면 우리는 차갑고 단단한 것을 사랑하는 것 같다. 죽은 것을, 차를, 시계를, 무미건조한 관계를, 날카로운 금속을, 냉각된 두뇌를, 증오를 말이다. 계속해서 관계의 바다로 스스로를 던지고, 그 망망대해에서 갈 길을 헤매고 있다. 우리는 잔인하고 공허한 바다에서 ‘삶’을 볼 수도, 사랑할 수도 없게 된 것은 아닐까? 그러다가, 너무나 긴 시간 바다에 있다가 몸이 굳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죽은 것을 사랑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할 것이다. 삶을, 무엇보다도 삶을 사랑해야 한다.
어쩌면 우리는 삶을 사랑함으로써 간단히 해결할 수 있는 문제들에 고통받고 있는지도 모른다. 차갑고 딱딱하기 때문에 생긴 문제를 차갑고 딱딱한 것으로 풀어가려고 하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삶을 사랑하는 법을 완전히 잊었을지도 모른다. 에리히 프롬은 이런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무기력한 우리에게 한 가지 해답을 던지고 있다. 삶을 사랑하라고.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는 우리에게 진정으로 삶을 사랑하고 있는지 묻는다. 그리고 우리가 삶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면 그것을 깨닫게 하고 반성하게 한다. 사실은 그가 말한 ‘창의성’이나 ‘사랑’의 개념은 생소하고 현실과는 멀고 너무나 이상적이기도 하다. 모든 사람이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가? 라는 의문과 우려 이전에 개인적으로도 그가 말하는 ‘창의성’에 기반한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가능한지부터 묻게 되기도 한다. 그가 말하는 삶을 사랑한다는 것은 완전히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기계가 되는 것만큼 어려운 일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삶을 사랑할 수 있게 된다면 나는 분명 우리가 사는 세상이 더 좋은 세상으로 바뀔 것이라 믿는다. 지금까지 우리는 장미를 바라보는 법을, 뜨겁고 말랑한 것에 응답하는 법을, 삶을 사랑하는 법을 잊고 살아왔다. 때문에, 우리는 무기력하고 차갑고 딱딱한 기계가 되었다. 타인을 이름으로, 수단으로, 결과물로 바라보았다. 인간을 지성과 감성으로 나누어 놓고 싸우기 바빴다. 서로 증오하기 바빴다. 그 결과는 참혹한 현실로 되어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 죽은 것을 사랑하고, 삶을 증오하게 되었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비방하게 되었다. 장미를 창의적으로 바라보지 않고 꺾어서 응답했다. 이제는 반성해야 할 때이다. 타인을 이름으로, 수단으로, 추상으로, 결과물로 바라보고 무력하게 응답하지 않아야 한다. 이제는 증오를 멈추고 삶을 사랑해야 할 때이다. 이제는 창의적으로 장미를 보아야 할 때이다. 우리는 살아있기 때문이고, 삶이기 때문이고, 사랑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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