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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감 공모전 우수작
제목: 인간다움과 작별하지 않는 법
학과: 심리학과 , 이름: 이*경, 선정연도: 2022
내용:
책 《작별하지 않는다》의 주인공은 ‘경하’인 듯하다. 그렇게 생각하며 책의 초반부를 지나 중반부에 다다르면 ‘인선’이 주인공인가 싶다. 하지만 후반부에 다다를수록 ‘정심’이 주인공이라는 생각이 든다. 2021, 한강 『작별하지 않는다』 코멘터리 북, 문학동네, 29쪽
그러나 책을 끝까지 읽어보면 알 수 있다. 이 책은 ‘사랑과 절멸 그리고 인간다움을 이야기하는 이들’이 주인공이 되는 책이다.
그렇다면 이 책에서 줄곧 이야기하는 ‘사랑과 절멸, 인간다움’이란 무엇일까. 이 세 단어는 어떤 연결고리를 지닌 채 이야기를 끌어가는가. 사랑에 대한 정의는 분명하지 않지만 추구하는 방향은 명확하다. 사랑은 자신과 다른 이들을 존중하고 인정한다. 그 차이로서 나타나는 갈등을 해결하려고 하지 부추기진 않는다. 반면 절멸의 정의는 명료하다. ‘아주 없어짐’. 그러나 실상은 이 명료한 뜻과는 달리 명료함에 그치지 않는다.

그 겨울 삼만 명의 사람들이 이 섬에서 살해되고, 이듬해 여름 육지에서 이십만 명이 살해된 건 우연의 연속이 아니야. 이 섬에 사는 삼십만 명을 다 죽여서라도 공산화를 막으라는 미군정의 명령이 있었고, (...) 낙인찍힌 유족들도, 입을 떼는 순간 적의 편으로 낙인찍힐 다른 모든 사람들도 침묵했으니까. (p.317)

이 둘은 차이점만 존재하는가? 완전히 양극단에 위치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이 둘은 모두 ‘믿음’에서 나오는 과정이자 결과이다. 둘 다 그 믿음의 정도가 강하다는 면에서 같으나, 그 믿음의 방향은 다르다. 절멸은 스스로에 대한 믿음에서, 사랑은 타인에 대한 믿음에서 나온다. 전자는 다른 이를 해치는 데 사용된다. 그 이유는 자신을 믿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 믿기 때문이다. 성찰 없는 신념의 고집은 자신이 바라보는 세상의 전부가 된다. 그렇기에 자신의 이념에 어긋나는 이들을 가만둘 수 없는 것이다. 반면 자타를 신뢰하는 것은 서로에 대한 존중을 내포한다. 존중이란 차이를 인정하고 수용하되 비판하는 일이다. 이처럼 누군가를 사랑하기는 어렵지만 절멸은 비교적 쉽다. (이 ‘쉽다’는 말은 누군가의 목숨의 무게를 뜻하지 않음을 짚고 넘어간다.) 그렇기에 사랑의 또 다른 이름은 용기이고 절멸의 또 다른 이름은 비겁함이다.
역사 속의 독재자뿐만 아니라, 그의 하수인들은 비판 한 점 없는 공고한 이념 아래 공권력을 휘두르며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집단화하고 죽음에 대한 공포를 앞세워 사람들을 죽인다. 그 방식은 다양하다. 물리적인 폭력, 노동 착취, 때로는 분위기. 동조하지 않으면 죽음뿐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며 수많은 보통의 사람을 죽여온 역사를 우리는 배웠다. 이처럼 인간으로서 마땅히 갖춰야 할 인격을 제 손으로 버리고, 타인의 목숨을 쥐락펴락하는 자들의 오만함과 믿음은 비겁함에 비례한다. 어쩌면 아집이고 모순이며 그 누구도 위하지 않는 자신의 이념을 차마 ‘깨우치지 못한’, 그래서 자신(과 이념)을 위협하는 자들과 논의하는 대신 그들을 영원히 지워버림으로써 자신의 입지를 공고히 한다. 단지 자신이 옳다고 믿기 때문에 행한다. 따라서 저 비겁함은 ‘내가 틀릴 수도 있다’라는 회의주의와의 작별이자 변화의 여지를 남겨두지 않는 고립과의 악수이다. 자신이 옳다는 그 믿음이 그릇된 것인지조차 모른 채로 그렇게 존재들의 절멸을 시도한다. 예컨대 공권력에 도전한 반역자 취급을 하는 식이거나 한국 사회에서 낙인을 찍는 ‘빨갱이’ 취급을 하는 식이다.

P읍에 있는 국민학교에 한 달간 수용돼 있다가, 지금 해수욕장이 된 백사장에서 12월에 모두 총살됐어. / 모두? / 군경 직계가족을 제외한 모두. / 젖먹이 아기도? / 절멸이 목적이었으니까. / 무엇을 절멸해? / 빨갱이들을. (p.220)

절멸에서 생존한 사람들은 그 이후에 사회적으로 절멸된다. 절멸은 아무 소리가 없는 ‘침묵’으로 행해지기도 한다.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죽음에서 살아 돌아온 사람들 또한 그러하다. 생존을 위해 직업을 가질 수도, 사람들과 관계를 형성할 수도 없다. 그들이 겪었던 사건에 대해 언급조차 할 수 없다. 정심의 남편이 고문으로 인해 수전증을 가졌어도 일은 할 수 있었지만, 군사독재정권 하의 전과자인 그와 아무도 허물없이 지내려하지 않았던 것처럼. 아이러니한 일이다. 정작 인간답지 않은 일을 인간에게 저지른 자들은 ‘인간답게’ 살아가는데도 말이다.
그러나 그 뜻이 지닌 완전무결함과는 다르게, 절멸은 소멸의 ‘시도’ 그 자체로 더 이상 완전하지 않게 된다. 침묵은 필연적으로 그 껍질을 깨고 나오고 만다. 제주 4·3 사건이 1987년 6월 민주화 항쟁의 열기 속에서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처럼. 그들은 왜 국가가 주도하는 억압에도 불구하고 목소리를 낸 것인가. 소리 없는 아우성 속의 고통을 외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용기를 내야 자신이 살고 ‘함께’ 살아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인선은 경하와 함께 눈 속에서 마주보며 ‘사랑은 무서운 고통’이라고 말한다. ‘살갗을 타고 스며드는 골수에 사무치고 심장이 오그라드는 사랑’. 절멸을 찾아가는 과정은 ‘심장 깊은 곳에서 무엇인가 이미 떨어져 나갔고 움푹 파인 그 자리를 적시고 나온 피는 더 이상 붉지도 뿜어 나오지도 않는’ 것이라고 말한다. 전자가 마냥 긍정적이지만은 않기에 사랑과 절멸이 주는 고통의 간극을 크다고 단정 지을 수 없을 것이다. 다만 ‘무엇이 사람을 살아가게 하는가’를 묻는다면 아마도 많은 이들이 전자를 택할 것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탄압이 전제된 절멸 하에서 사랑을 행하기란 쉽지 않다. 사람들이 압도적인 소멸의 공포에도 사랑을 행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인간다움’ 때문이다. 정심은 빨갱이의 가족이라는 낙인에 몸을 움츠리기는커녕, 직접 절멸의 장소를 찾고 파헤친다. 가족의 시체 위에서 녹지 않는 눈을 봤던 13살의 아이가 노인이 되어서까지. 오라버니가 살아있는지 찾는 과정에서 훗날의 남편을 찾아간다. 절멸의 문턱을 넘어온 또 다른 생존자를 만난 것이다. 정심의 남편은 15년간의 형무소 생활을 겪고 제주로 돌아와 백사장에서 떠내려갔을지 모르는 동생을 목격했을 여성의 집을 찾아간다. 그 여성은 딱 한 번 그에게 털어놓았던 그날의 일을 몇 년간의 망설임 끝에 훗날 인터뷰에서 말한다. 이 모든 이들의 기록을 파헤쳐간 정심을 따라 인선은 세천리에 대한 자료를 찾기 시작한다. 저마다 이유는 다르겠지만 그 기원은 사랑이자 인간다움이다. 눈과 귀와 입을 닫고 살아가는 것은 사랑이 결여된 인간답지 못한 삶이나 마찬가지이니까.

경 하난 그 사름이 입을 떼신디, 그날 모래밭에서 아이들을 봤느냐곡. (...) 몰른다곡 내보내야 하는 것을 알멍도 이상하게 대답을 하고 싶었져. 꼭 내가 그 사름을 기다렸던 것추룩. 누게가 이걸 물어봐주기만 기다리멍 십오 년을 살았던 것추룩. (p.230)

이 책에서 경하와 인선, 정심, 정심의 남편은 계속해서 환상인지 현실인지 모를 순간들 속에서 살아간다. 어느 것이 현실이고 환상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그 경계가 흐릿해지는 시점을 지나 기어코 살아낸다. 환상과 현실은 공존할 수 있는가.
작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두 세계를 살아가는 건 사실 우리가 현실에서 늘 경험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기억하고 상상할 때, 특히 사랑할 때 그렇지요. 깊이 사랑할 때 우리는 우리의 삶과, 사랑하는 사람의 삶을 동시에 살게 됩니다.’(한강 『작별하지 않는다』 코멘터리 북, 21쪽) 이에 따르면 ‘작별하지 않는다’는 것은 환상과 현실 그 어느 것과도 작별하지 않는 것, 즉 환상과 현실의 공존이 삶이라고 볼 수 있다. 인선은 경하가 자신의 꿈속에서 보았던 언덕 위의 우듬지들을 세우는 프로젝트의 이름을 묻는다. 이에 경하는 ‘작별하지 않는다’라고 답한다. 어느 것이라고 주어를 분명히 하지 않은 채 작별하지 않겠다고 말한다. 그것은 아마도 자신이 사랑하는 무언가를 두고 하는 단언일 테다. 경하는 아마를 사랑하는 것까지는 아니라고 말하지만, 인선이 섬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인생의 모든 기점을 함께했음에도 인선을 잃을 것만 같다고 말하지만, 그는 자신의 삶 속의 삶들을 사랑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지 않고서야 작별을 논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작별은 무엇인가를 사랑할 때 할 수 있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무엇을 믿고 버려야 하는지도 분간하기 어려운 현실 속에서, 끝까지 사랑하는 누군가를 위해 작별하지 않는 것은 사랑이 아니고서야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기에 환상과 현실과 작별하지 않는 것은 큰 결심을 필요로 하는 일이다. 인선이 자신의 어머니와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것, 정심이 가족과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것, 경하가 꿈 속의 삶과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것, 이 책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의 삶처럼.

앞에서 사랑과 절멸을 살펴보았으니, 이제는 다음 질문을 던질 차례이다. 인간다움이란 무엇이며, 우리는 왜 인간다움과 작별하지 않아야 하는가? 사랑과 절멸, 환상과 현실 사이에서 평생토록 고뇌할 인간이 인간다움을 포기하면 안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인간다움은 자신과 타인을 사랑하는 것이다. 자신을 믿고 타인도 믿으며 함께 동등한 권리를 누리며 살아가는 삶이다. 자신만이 옳다고 여기는 자세는 부끄러워하는 것이다. 하나라도 없다면 자책이고 불신이며 자만이 되겠지만, 이 모든 것이 합쳐지면 용기가 된다. 앞에서 말했듯 사랑의 또 다른 이름은 용기이다. 자신이 겪지 않았다고 하여 지나치지 않고 함께 목소리를 내는 것. 그것이 사랑이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은 변화하지 않는데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면 개개인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자들에게 목소리를 높일 수 있다. 더하여 타인의 목숨을 쉽게 앗아간 이들을 제대로 처벌하라는 목소리를 높일 수도 있다. 이처럼 사랑은 두려움에 맞서서 포기하지 않는 것이며, 끝까지 마주하고 기억하는 것이기도 하다. 혼자 실행하기 어려운 일은 사랑에서 행할 수 있다. 다른 이를 믿고 연대하며 존중하는 사랑에서 나온 목소리의 합은 더 크게 더 멀리 뻗어나가 더 큰 힘을 지닌다.
이토록 어려운 ‘인간다움’을 포기해서는 안 되는 이유는 그것의 정의보다 명확하다. 인간은 혼자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자신과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다 하여도 특정한 누군가가 다른 이를 억압해서는 안 된다. 불법행위나 비도덕의 범위가 아닌 이상 타인의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절멸은 그 모든 것을 뛰어넘어 자신만이 옳다고 여기는 그릇된 판단의 결과이므로 인간답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씨를 말려야 한다며 절멸을 행하는 자도, 죽여야 하는 대상과 마찬가지로 인간이다. 이에 어떻게 옳음의 여지가 있을 수 있을까.

절멸은 그 어떠한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자신을 비롯한 타인의 인간다움을 앗아가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국가가 가해자인 폭력의 역사는 지워서는 안 되며 지울 수도 없다. 또한 이와 같은 폭력이 21세기인 지금에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언할 수 없다. 다만 우리가 미처 배우지 않은, 혹은 외면하는 절멸만이 있을 뿐이다. 그릇된 믿음과 정치적인 목적 아래, 1980년의 광주 5∙18 민주화 운동과 1975년부터 1987년까지의 형제복지원 사건과 같은 절멸의 역사는 반복되어 왔다. 이는 오랜 시간에 걸쳐 천천히 이루어진다. 아무리 강인한 사람이라도 무력함을 겪고 포기하고 싶을 만큼의 오랜 시간 동안 말이다. 현대에는 지금 당장의 죽음과 예고된 죽음이 혼합된 절멸의 사례가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져 나온다. 사전예방이 가능했던 일용직 노동자들의 죽음에 대해 탄식만 내놓는 ‘그들’처럼. 기본적인 인권인 이동권을 보장받지 못하는 장애인들을 보고도 장애인들의 시위로 인해 열차가 지연된다는 메시지만 반복하는 ‘그들’처럼. 출생율 하락과 노키즈존 찬성을 함께 외치는 ‘그들’처럼. 자신이 여성혐오자이기 때문에 피해자를 죽였지만 낯부끄러운 핑계를 대며 여성을 매일같이 살해하는 ‘그들’처럼. 피해자보다 ‘그들’의 편에 서서 관용을 베푸는 ‘그들’처럼. 실질적이고도 구체적인 대책을 강구하기는 커녕 방조하고 목도하는 ‘그들’처럼.
아마도 인류가 존재하는 한 절멸은 반복될 것이다. 하지만 그 반복을 줄일 수는 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답은 간단하다. 인간다움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아무리 인간다움을 포기한 자들의 삶이 지속된다 하여도, 그들의 삶이 더 물질적으로 사회적으로 풍요로워 보여도, 그들의 삶은 이미 죽음으로 가득하다. 죽음의 삶을 연명하는 이들로 인해 인간답게 살기 위해 성찰하고 노력하는 우리의 삶을 멈출 수는 없다.

무섭지 않았어. 아니, 숨이 쉬어지지 않을 만큼 행복했어. (...) 심장이 쪼개질 것같이 격렬하고 기이한 기쁨 속에서 생각했어. 너와 하기로 한 일을 이제 시작할 수 있겠다고. (p.318)

여전히 사랑을 행하며 살아가기 어려운 세상이지만 그럼에도 사랑을 행하는 사람이 이긴다. 그렇게 생각하고 다짐하며 살아가는 인생이란 무엇일지 끊임없이 고뇌하고 실천하는 사람이 사람으로서 존재한다. 사랑이 개개인과 사회를 나은 방향으로 이끌어 감을 알고 있지만, 사랑을 행하는 자들을 낮추려 애쓰는 자들이 많다. ‘요즘 세상이 살기 힘들다’는 말로 저 사실을 합리화할 수 없다. 그럼에도 사랑을 행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그 사람들로 인해 절멸의 역사를 기억하고 반복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절멸의 역사를 기억하고 사랑을 행하는 사람이 되도록 애써야 한다. 고통스럽겠지만 그것이 인간다움과 작별하지 않는 법이므로.
독후감 공모전 우수작
제목: 작별과의 작별을 위하여
학과: 윤리교육과 , 이름: 문*은, 선정연도: 2022
내용:
어느 날 문득 이별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눈에 대해서도.
다소 거칠어진 가을바람을 가르며 걷다가, 생각했다. 지나가는 이 바람은 누구의 살갗을 건드려 나에게 왔는지, 그 사람의 행복을 빼앗아 왔는지 아니면 슬픔을 모아 기어이 눈비를 내리게 할지.
자연현상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벚꽃이 피었을 때 들떠서 두근거린다든가 여름밤 매미와 귀뚜라미의 공명 소리에 옛 추억을 떠올리고, 가을 새벽 쌀쌀한 공기에 괜한 울적함을 느끼거나 겨울에 내리는 눈을 보며 또다시 올 한 해를 생각하는 모든 시간들이, 어느 순간 싫어졌다. 감정을 느끼기 두려운 것은 삶에 의한 고통이거나 삶에 대한 사랑일 텐데, 어느 갈피도 잡을 수 없었다. 그러다 책을 읽으며 생각했다. 결국 사랑은 지극한 고통이고, 고통은 영원에 대한 사랑이라고. 그래서, 결국 나는 내 삶을 사랑하고 있다고, 영원처럼 빛나는 삶을 꿈꾸고 있다고.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를 도서관에서 빌려 처음 읽고 너무 깊고 진한 여운이 남아 다른 어떤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사실 그 처음을 읽는데도 몇 번을 멈춰 섰는지 모른다. 한 자리에 눌러앉아 몇 시간을 내리읽다 고개를 들어 창문을 보니, 어느새 바깥이 어둠에 잠겨 있었다. 그때, 눈을 보았다. 경하의 꿈에서 내리던 그 성근 눈이, 내 눈에 비쳤다. 10월에 눈이 올 리가 없지 하루 종일 고민하다, 결국 일과를 끝내고 집 가는 길에 서점에 들러 이 책을 구입했다. 그리고 읽고, 멈추고, 또다시 읽었다. 이 책을 읽는 나를 담은 벽에 비친 그림자가 그날의 이야기를 하는 인선의 그림자와 겹쳐질 때까지, 그리고 책을 읽는 나의 마음이 인선에게 닿을 때까지 읽고 또 읽었다.
책은 경하의 꿈 장면으로부터 시작된다. 눈 내리는 벌판 위 수천 그루의 검은 통나무들과 봉분들과 함께 경하가 서 있다. 그 벌판에 곧 밀물이 밀려와 아래쪽 무덤들이 물에 잠기기 시작한다. 위쪽에 묻힌 뼈만이라도 옮겨야겠다고 생각하지만 어떻게 손 쓸 새 없이 무릎까지 차오른 물을 가르며 달리다 꿈에서 깬다. 경하는 그것이 두 달 전 출간한 책의 내용인 도시의 학살에 대한 꿈이리라고 생각하고, 한때 사진과 다큐멘터리 영화 작업을 하다 어머니를 돌보기 위해 제주로 내려가 목공 일을 하는 친구 인선과 함께 그 꿈을 영상으로 담는 작업을 계획한다. 백 그루가 넘는 검은 나무를 심고 나무에 눈이 쌓인 모습을 두 눈으로 직접 마주해 그 악몽에서 벗어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그 뒤로 몇 해 동안 각자의 힘든 시기를 겪고 겨우 삶을 회복하는 사이 계획은 진전되지 못하고, 그 작업뿐 아니라 둘의 관계 또한 점차 희미해진다.
그러던 어느 겨울, 인선이 목공 작업 중 손가락이 절단되어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는 연락을 받고 급하게 도착한 병원에서 경하가 인선에게 받은 부탁은 제주 집에 혼자 남겨진 새를 돌봐달라는 것. 망설임 끝에 제주행 비행기에 오르지만, 제주는 때마침 거세게 몰아치는 폭설과 강풍에 휩싸여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발작적으로 찾아오는 고질적인 두통과 신경통에 시달리며 인선의 집까지 눈길에 오르고 산을 헤매던 중, 눈더미 속으로 미끄러져 눈과 어둠 속에서 고립된다.
그 이후의 이야기가 실제인지 경하의 무의식 속 환각을 그린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신형철 문학평론가가 이 책을 두고 ‘생사의 경계 혹은 그 너머에 도달하고서야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이만한 고통만이 진실에 이를 자격을 준다는 듯이, 고통에 도달하는 길은 고통뿐이라는 듯이.’라고 표현한 것처럼. 길고 고요한 투쟁의 서사를 읽기 위해서는 현실에 얽힌 복잡한 정념이나 양상으로부터 벗어나야 함을, 초연하고 숙연한 마음으로 바라보아야 함을 함의하고 있는 듯했다. 결국 인선의 집에 도착한 경하는 전혀 손가락을 다치지 않은 인선과 만나고, 고요한 촛불의 능선 아래에서 70여 년 전 제주 4·3사건을 겪은 인선 가족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리고 경하의 꿈에 대한 작업을 이루려던 곳, 인선 아버지의 옛 집터를 바라보는 눈더미 너머에 함께 누워있다가, 점차 쌓이는 눈 속에서 꺼져가는 불꽃과 함께 인선의 형상은 사라진다. 경하의 성냥이 다시 타오르는 것을 보지 못한 채로, 그 고동치는 꽃봉오리를 보지 못한 채로.
제주에서 태어나 부산으로 대학교에 오기 전까지 4·3사건에 대해 어른들이 이야기하는 것을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었다. 학교에서 한국사 시간에 근현대사 흐름의 일부로 잠깐 거치거나, 올해가 4·3사건의 몇 주년이니 어느 행사를 하거나 추념식을 한다는 상투적인 메시지를 들은 것이 다였다. 5·10 남한 단독 총선거 결의에 반대하여 좌익 세력과 일부 제주 주민들이 무장봉기하였고, 이를 미군정과 극우 청년들, 경찰들이 진압한 사건. 제주도, 그 사건의 중심지에서 나고 자랐음에도 고작 이 정도의 겉핥기식 정의 만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매년 4월 3일이 되면 왜인지 모르는 찜찜하고 불편한 마음이 드는 것은 사실이었다. 학교 안에서나 사회 속에서, 어딘가 가라앉고 우울한 분위기와 어정쩡하게 조심하는 언행들 속에서 4·3사건은 우리들 마음속에 다소 거북하고 찝찝한 형상과 느낌을 자아냈다. 제주도민으로서 괜히 그 뜻만은 잊으면 안 될 거 같아 한 번씩 찾아보고는 금세 잊어버리기의 의미 없는 반복. 작가 한강은 이렇듯 지나간 역사에 대한 우리의 무감각하고 냉담한 인식을, 무서울 정도로 강렬하고 솟구치는 감정을 통해 처절히 감각하고 느끼게 한다. 그 감각의 중심에 인선의 부모가 있다. 1948년 제주도에 사는 삼십만 명을 다 죽여서라도 공산화를 막으라는 미군정의 명령과, 이를 실현할 의지와 원한이 장전된 서북청년단과 군경들의 초토화 작전 속에서 그 삶을 견뎌야 했던 인선의 어머니와 아버지가 있다.
열아홉 살에 온 가족을 잃고 슬퍼할 겨를도 없이 십오 년을 형무소에서 보내야 했던 인선의 아버지. 바다 앞 해수욕장에서 총살된 젖먹이 여동생을 찾아다녔다던, 인선의 기억 속에서 고문 후유증으로 손을 떨고 협심증으로 널찍한 돌을 따뜻하게 데워 심장 위에 올리곤 했던 그가 있다. 그리고 그와 동시대에 살았던 인선의 어머니가 있다. 1948년 겨울 국민학교 앞 보리밭에서 사람들이 군경에 의해 대량 학살당했을 때, 죽은 사람들의 얼굴 위에 덮인 피어린 살얼음을 하나씩 걷어내며 엄마 아빠를 찾아다녔던 열세 살의 정심이 그 자리에 있었다. 피로 범벅된 어린 여동생을 업고 친척네 집까지 걸어가, 그렇게 하면 살아날까 자신의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내고 여동생의 입속으로 흘려보낸, 너무나도 어렸던 그녀가 있다. 인선은 어머니가 죽도록 싫었다고 했다. 구부정한 등과 끔찍하게 여린 목소리를 가진 그녀를, 악몽을 안 꾸게 해준다는 미신을 믿고 항상 요 아래 날카로운 실톱을 깔고 잤던 그녀를, 그렇지만 자주 악몽을 꿔서 숨을 죽여 몸서리를 치고, 들고양이처럼 이상한 소리를 내며 흐느껴 울던 그녀를 보고 있노라면 명치에서부터 훅, 하고 뜨거운 게 쉬지 않고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고 인선은 말했다. 내가 4·3 사건을 보며 느끼는 감정과 비슷한 걸까. 아니, 훨씬 그 이상일 거라고 생각했다. 역사를, 그중에서도 참혹하고 서슬 퍼런 과거를 마주하는 것은 굉장히 불편하고 버거운 일이다. 정심은 그 시대를 직접 몸으로 겪은 역사의 산증인이자 역사 그 자체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현재를 버텨내지만 과거를 잊지 못하고, 과거 속에서 현재를 살아간다. 그런 그녀를 옆에 둔 인선에게 그 과거의 아픔이, 고통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고통은 작별하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도, 공간과 반세기를 넘겨도 아픈 기억은 여전히 그들의, 우리의 마음속에 그 흔적을 남긴다.
인선이 정심에 대한 미움을 내려놓기 시작한 것은 형무소에 끌려가 행적을 알 수 없는 오빠를 찾기 위한 정심의 길고 고요한 싸움을 발견하게 된 이후다. 대구형무소에 이감되었다가 진주로 이송되었다는 명부를 구했지만, 찾아간 그곳에 오빠의 흔적은 없었다. 좌익으로 분류되어 검속된 보도연맹 가입자들을 형무소에 더 수용할 공간이 없게 되자, 기존에 있던 수감자들을 당시 폐광된 경산 코발트 광산에서 집단 총살했다. 그곳에서 죽은 사람들만 약 삼천오백 명. 정심은 알고 있었을 것이다. 오빠도 그 광산에서 총살되었음을, 아무 기록과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음을. 그러나 단 일의 희망, 먼지 한 톨 만큼의 가능성만 보일지라도, 정심은 포기하지 않았다. 직접 경북에 가서 신문을 구매해 관련된 모든 기사를 모아 스크랩하고, 대구 합동 위령제에 참가하고, 경북 지구 피학살자 유족회에 가입했다. 2000년대에 들어 광산 탐사가 시작되고, 수천 개의 뼈들이 발견되고, 유해들이 입구까지 차올라 흩어진 모습을 보기까지 정심은 멈추지 않았다. 대구 실종 재소자 제주 유족회를 따라 정기적으로 광산을 방문했다. 그때 정심의 나이가 일흔둘에서 일흔넷. 작별하지 않았다. 아픔을, 기억을 정심은 결코 놓지 않았다. 누구보다 강하게, 그리고 굳세게 정심은 살아 있었다.
결국 정심은 실패했다. 단 한 조각의 뼈도 찾지 못했다. 그리고 그녀가 끝내 무너지는 모습을 인선은 지켜봐야 했다. 밤마다 아이처럼 기어서 문턱을 넘어와 식탁 밑에 숨는 모습을, 짜고 끈끈한 그 손가락을 인선의 입에 물리고 얼굴을 쓰다듬으며 아이처럼 우는 모습을, 인선이 잠드려는 순간 흔들어 깨우며 도와달라고, 구해달라고 애원하다 겨우 잠드는 모습을. 그러다, 마치 밀물 때가 지나치게 긴 이상한 바다처럼, 다시는 바다가 빠져나가지 않는 것처럼, 정심은 깊은 수면 속으로 잠겼다. 끝끝내 사라졌다.
그러나,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마음, 이곳에 잊지 않은 사람을 간절히 생각하는 마음마저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 마음이 그렇게 정심에게서 인선에게로, 인선에게서 우리에게로 왔다. 기억해야 한다. 아픈 상처를 건드려 더 쓴 진물이 나오더라도, 그것이 날카로운 칼이 되어 아픈 곳을 다시 겨누더라도 떠올리고 새겨야 한다. 한강이 소재로 택한 ‘눈’은 과거와 현재를 잇는 매개물이다. 내린 눈은 소멸하지 않는다. 과거 땅에서 녹아 지하수로 흘러 들어가거나 공기 중으로 증발한 눈은 현재 다시 수증기가 되고 구름으로 상승하면서 바람으로, 비로, 눈으로 끝없는 순환을 이루며 우리에게 온다. 정심이 보았던, 그 차가운 얼굴 위에서 녹지 않았던 눈은 경하가 인선의 가족사를 마주했던 제주도에서 세디센 눈보라가 되어 흩날렸다. 마치 그 차갑고 날카로운 속성의 냉기를 경하에게 전하려는 듯이, 그리고 눈과 그 순환이 끊임없이 작용하는 것처럼 자신도 살아 있다고, 포기하지 않았다고 경하에게, 우리에게 말하려는 듯이.

작별하지 않았나. 우리는 그동안 얼마나 많은 것들과 소중한 의미들을 성가시다는 이유로, 떠올리면 아프다는 이유로 작별해왔을까. 그러나 고통은 곧 사랑의 다른 표현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사랑해서, 감정을 쏟아서, 그 감정을 다시 새기는 게 너무나도 아려와서, 보고 싶고 그리워서, 우리는 아프다. 그런데도, 결국 그 사랑에 손을 뻗어 기어이 고통을 견디는 것이 우리가 눈보라를 헤쳐가는 길이라고, 서로의 얼굴에 쌓인 눈을 닦아줄 수 있는 방법이라고 책은 말하는지도 모른다.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역사를 기억해내는 것, 아파하면서도 사랑하는 것, 작별하지 않음을 위하는 것, 작별에 대해 작별하는 것, 그것이 그들을 영원히 살아 있게 하고 우리를 영원히 살게 한다. 내가 삶에서 느낀 고통과 허무함은 삶에 대한 사랑이었다. 마지막 경하의 성냥 속 불꽃이 다시 타오를 때, 세상에서 가장 작은 새처럼 눈이 퍼덕일 때, 삶에 대한 사랑과 경외심을, 그 끈적임을 느꼈다.
지금도 눈이 내리고 있다. 그 눈이 바람으로 왔는지, 비로 왔는지, 햇빛 속 입자로 왔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것이 그들의 삶을, 그들에 대한 기억을 품고 왔다면 가만히 서서 그들을 느끼겠다. 그 아픔을 견디겠다. 어느 늦은 밤, 어딘가에서 부딪히고 온 것처럼 한쪽이 흐트러진 달을 보다가 생각했다. 그들이 왔구나. 그리고 그 순간 봄의 벚꽃이, 여름밤의 재잘대는 울음소리가, 가을 새벽의 쌀쌀한 공기가, 겨울의 소복한 눈이 다시 내게로 스며들어와 생생히 살아 있음을 느꼈다.
그들의 세계와 나는, 과거와 현재는, 결코
작별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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