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장자료

원문 등 관련정보

독후감 공모전 우수작
제목: 한 움큼의 하늘은 파랗지 않다
학과: 지역주민 , 이름: 이*근, 선정연도: 2022
내용:
마을은 산과 가까워 어둠은 이르게 내려앉아 몸을 웅크렸다. 그 날은 어머니가 마구간 앞 조그만 상 위에 찬물을 담은 흰 사발을 두었다. 상 위 촛불이 흔들거려, 주변이 빛과 어둠으로 일렁이며 춤을 추었다. 흰 사발을 마주한 채 어머니는 합장을 하며,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어미 소가 새끼를 출산하는 날이었다. 새벽, 어미 소가 허연 입김을 더 가쁘게 뱉어낼 때 궁둥이 쪽에 검은 발 두 쪽이 나오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당황한 낯빛으로 옆집에 사는 당숙을 급히 불러왔다. 어른들이 소에 달라붙어 비죽 나왔던 발을 다시 집어넣고 배를 만지기를 여러 차례 했을 때 새끼 소의 대가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제야 어른들은 허연 입김을 길게 뱉어냈다. 어미 소는 온몸이 젖은 새끼를 연신 혀로 핥았다. 갓 태어난 새끼는 부러지지 않는 것이 신기할 정도의 가는 다리로 몸을 지탱하다 넘어지길 반복했다. 어머니는 흰 사발의 물을 향해 연신 고맙다며 손을 비비고 머릴 조아렸다. 그날 아침 어머니는 평소보다 더 푹 삶은 소죽 위에 넘칠 만큼 사료를 듬뿍 뿌렸다. 어미 소의 검은 눈은 촉촉하게 젖어, 우물처럼 깊어 보였다.
몇 개월 후 마구간 앞에 트럭 한 대가 정차했다. 때묻은 시퍼런 지폐 뭉치를 아버지께 건넨 트럭 주인은 새끼 소의 고삐를 끌어당겼다. 조금 두꺼워진 다리가 된 송아지는 네 다리를 뒤로 뉘어 무게 중심을 뒤로 기울여 버텼다. 그러나 힘의 차이로 차로 질질 끌려갔다. 어미 소는 내가 들어본 가장 처연한 소리로, 가장 오래 울었다. 사흘 정도 울다가 소는 울음을 그쳤다. 재작년에 겪었던 일이고 내년이면 다시 겪을 일일 것이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먼 산을 바라보는 소의 눈빛이 공허해 그 눈이 눈물의 우물 같았다. 아버지께 건네진 그 지폐 뭉치의 일부는 내 학비와 생활비가 되었을 것이다. 꼴깍 삼킨 침이 쌉싸름했다. 어미 소는 코뚜레를 풀고 너른 풀밭으로 가, 어린 소와 한가로이 풀을 뜯는 삶을 바라지 않았을까. <천개의 파랑> 속 ‘투데이’를 보며, 이 때의 소의 눈망울을 떠올렸다.

<천 개의 파랑>에 등장하는 ‘투데이’는 어린 경주마이다. 검고 윤기 나는 갈기가 아름답고 뛰는 것을 무엇보다 행복해하는 말로, 매우 빨리 달릴 수 있어서 주인에게 거액의 돈을 벌게 해 준다. 그러나 빨리 달리는 그 뛰어난 능력 때문에 짧은 기간에 혹사당한 투데이는 연골이 닳아 걷는 것에도 통증을 느끼는 몸이 된다. 이대로는 투데이가 견딜 수 없음을 안 콜리는 경기 도중 스스로 투데이 위에서 땅으로 떨어짐으로써, 투데이의 죽음을 향한 질주를 멈춰 세운다.
콜리는 말의 질주에 방해되지 않게끔 작은 키 및 가벼운 무게로 만들어진 휴머노이드 로봇 기수이다. 콜리는 실수에 의해 기수용 소프트웨어 칩이 아닌 학습이 가능한 소프트웨어 칩이 장착된, 일종의 돌연변이 기수라 다른 휴머노이드 기수들과는 다른 말과 행동을 한다. 콜리는 투데이를 위해 스스로 낙마하여, 투데이의 연골이 완전히 부서지는 것을 늦추었지만, 그 선택으로 자신의 하체는 부서진다. 그런 콜리를 연재가 수리한다. 휴머노이드 로봇 전문가인 연재는 몇 마디 대화에서 콜리의 특이함을 느끼고는 학급 친구 지수의 도움을 받아 콜리의 하체를 성공적으로 수리한다.
연재의 언니인 은혜는 아픈 투데이를 보러 하루도 빠지지 않고 경마장에 들른다. 가장 빠른 다리를 지녔으나 지금은 어디에도 갈 수 없이 좁은 벽 속에 갇힌 투데이를, 은혜는 어떤 눈으로 바라보았을까? 7살 때부터 소아마비로 인해 두 다리를 쓸 수 없는 삶을 살았고, 휠체어로 어디든 갈 수 있게 되었으나, 세계는 휠체어에 맞게 조각되지 않았기에 어디로도 편히 갈 수 없었던 은혜였다. 은혜는 투데이를 또 다른 자기 자신이라 생각지 않았을까? 더 이상 경마 경주를 할 수 없는 몸이 된 투데이는 안락사될 상황에 처한다. 그것은 결코 투데이가 바라는 ‘안락’한 죽음일 수 없기에 은혜는 투데이를 구할 방안을 모색한다. 은혜는 연재, 콜리와 함께 투데이의 경마 출전권을 얻어낸 후 느리게 트랙을 돌 계획을 세운다. 경마 관리자는 굳이 한물간 경주마의 출전권을 얻으려는 은혜 무리를 이해하지 못한다. 뛰지 못하는 말이 겪게 될 운명은 그에게는 관심 밖이었던 것이다. 기자인 은혜의 사촌 오빠 서진의 도움으로 결국 출전권의 관리자 승인을 얻는 데 성공한다. 서진 외에도 수의사 복희, 매표소 직원 다영, 마방 관리자 민주, 연재가 아르바이트했던 편의점의 점장 등 많은 이들의 도움으로 은혜의 계획은 순조롭게 진행된다.

이처럼 이 소설 속에는 많은 이들이 등장하여 서로 도움을 주고받으며 함께 성장해 간다. 이들 각각은 다른 이들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 걸까? 존재는 각자의 시간을 어떻게 건너는 것인가? 연재와 은혜의 엄마 보경은 로봇을 꺼려하고 두려워하였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콜리와 대화가 잘 통하는 벗이 된다.

“그렇다면 인간은 함께 있지만 모두 같은 시간을 사는 건 아니네요. 같은 시대를 살고 있을 뿐 모두가 섞일 수 없는 각자의 시간을 보내고 있네요. 맞나요? 당신의 시간은 어떻게 흘러가고 있나요?”
“내 시간은 멈춰 있어.”
“왜요?”
“흐르게 하는 법을 잊었어.”
보경은 남편인 ‘소방관’이 죽었던 그 시간에 갇힌 듯 응어리진 상처를 간직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아주 천천히 움직여야겠네요.…… 행복만이 그리움을 이길 수 있다고 했잖아요. 아주 느리게 하루의 행복을 쌓아가다 보면 현재의 시간이, 언젠가 멈춘 시간을 아주 천천히 흐르게 할 거예요.”
진심을 내보인 대화를 하면서 보경에게 두려움과 공포를 주었던 콜리는 보경에게로 건너온다. 보경의 시간은 다시 흐르게 된다.

연재는 소아마비인 언니가 부모님의 우선 순위가 되면서, 언니를 제 운명의 짐처럼 여기며, 타인과 가까워지는 것을 꺼린다. 그러다가 언니인 은혜, 엄마인 보경의 삶과 마음을 이해하면서, 또 지수의 마음을 공감하면서, 존재의 경계에 쌓아두었던 담을 서서히 허물기 시작한다. 지수는 연재를 로봇 대회에 상을 받게 해줄 팀으로서만 생각한 것이 아니었다. 그와 친해지기 위해 적극적으로 다가가, 진심으로 연재를 이해하려 애썼기에 둘 사이의 높았던 경계의 벽을 넘어 서로 진정한 친구가 된다. 보경은 처음엔 콜리를 두려워하였으나 콜리를 존중하는 태도로 대하며 진심을 교류하였기에 콜리로부터 위안을 얻는다. 아픈 몸이지만 경마에 출전했을 때 투데이는 달리면서 행복을 느낀다. 콜리는 투데이의 행복을 감지한다. 콜리는 말이 아니고, 생명체도 아니기에 투데이의 행복을 느낄 수 없어야 한다. 하지만 투데이가 행복을 느낄 때의 떨림의 진동을 콜리는 감지하여 그것을 ‘행복’이라 인지한다. 콜리의 관심과 이해는 생명과 비생명의 경계마저 뛰어넘는다. 콜리는 투데이가 닳은 연골에서 오는 고통에 주저앉기보다 더 뛰고 싶어함을 짐작하고, 무거운 몸의 자신이 투데이가 달리는데 방해되지 않도록 두 번째로 낙마를 선택한다. 투데이를 살리기 위해 애쓰는 과정에서, 은혜는 두렵기만 하던 세계에 맞설 수 있는 강건한 힘을 얻는다. 이처럼 인간과 인간, 그리고 인간이 아닌 존재와의 관계에서도 진정한 관계는 서로를 어루만지며, 서로 의지하고 지탱하게 만든다.

한 존재가 다른 존재를 이익 등을 위한 수단으로만 인지할 때는 존재 사이의 경계를 건널 수 없다. 수단으로 대하지 않고 존재 그 자체를 목적으로 받아들이며, 그에게 다가가 이해하고 공감하려 할 때, 존재의 경계를 가로질러 진정한 관계를 맺을 수 있다. 경마 관리자에게 투데이는 돈을 벌어다 주는 도구일 뿐이다. 그에게는 투데이 및 다른 경주마들의 본연의 색은 보이지 않는다. 그에게 경주마는 그저 돈을 잘 버는 것과 잘 못 보는 것의 구분으로서만 의미를 지닐 뿐이다. 그의 사고 방식은 더 많은 돈을 벌게 해 줄지는 몰라도 그 자신을 고립되고 외로운 영혼으로 만들 것이다.
나의 부모님께도 소는 일정 부분 수단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경마 관리자의 그것과는 결이 다르다. 송아지를 팔아 아버지께 건네진 때묻은 지폐는 공납금 용지를 앞에 두고 한참을 침묵하던 시간을 줄여줄, 수중에 단돈 만 원이 없어서 자식 소풍 전날 오촌 아저씨 집에서 꾼 돈을 갚을, 막차의 구겨진 차표 같은 것이었다. 출산하는 소를 앞에 두고 흰 사발에 정화수를 담았던 어머니는 군대 간 자식이 무탈하길 빌 때도 흰 사발에 정화수였다. 그 순간만큼은 자식이라고 음식을 더 차리지 않았고, 소라고 홀대하지 않았다. 쇠파리와 모기가 들끓는 여름엔 짚과 쑥으로 피운 연기로 그것들을 쫓아주었고, 소가 앓을 땐 소죽을 끓여주곤 했다. 물론 소가 바랐을 삶에 미칠 수 없었겠으나 오랜 세월을 함께한 소를 한 번씩 그윽하게 바라보는 어머니의 눈은 언제부턴가 소를 닮아 있었다. 수단의 성격이 있으나, 소의 존재를 무시하지 않았고 소에 대한 존중을 간직하고 있었다. 이 같은 부모님과 소의 특별한 관계는 개별자인 존재들끼리 어떻게, 어떠한 관계를 맺을 것인가에 대해 생각하게 해주었다.
각각의 존재는 경계를 가짐으로써 개별자로 존립한다. 즉 존재에게 경계가 있는 것은 필연적이다. 그러나 어느 존재도 오로지 홀로 자족적일 수는 없다. 존재는 다른 존재와 함께 함으로써 의미를 가진다. 콜리는 여러 타자와의 경계를 넘으며, 두 번이나 투데이를 위해 자신의 희생을 택한다. 그럼으로써 그 어느 로봇과도 다른 단독자로 선 로봇이 된다. 콜리는 낙마하는 3초 동안 맑은 하늘을 본다. 파랑으로 빛나는 하늘을. 존재는 경계가 없는 덩어리가 아니라 개별자이므로 많은 존재는 하나의 파랑이 아니라 천 개의 파란 점같이 개별의 모습을 띨 것이다. 그 천 개의 파랑은 따로따로 고립된 것이 아니다. 같게 또 다르게 함께 어울린다. 하늘을 검지와 엄지로 잡아 땅에서 펼치면 파랑을 찾을 수 없다. 물 분자 하나에서 분수를 볼 수 없듯이 파란 하늘은 개별로서는 이룰 수 없는 것이다. 파란 하늘은 무수한 작은 하늘 조각의 맞잡은 손에 의해 파랑을 이뤄내는 것이다. 희미한 하늘의 조각 같은 콜리, 은혜, 보경, 연재, 지수, 민주, 복희, 서진, 다영, 점장이라는 희미한 존재들이, 연대함으로써 투데이가 새 생명을 얻고, 혹사당하는 경주마들의 실태가 조명되는 결과를 만들어낸다. 개별의 존재가 타자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타자의 섬으로 건너가 어울림으로써 맑고 파란 하늘을 이룬 것이다. 고립(孤立)이 개인을 실존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타자의 손을 잡고 연립(聯立)함으로써 스스로가 존립(存立)될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존재는 그러한 것이다.
독후감 공모전 우수작
제목: 자유로운 공존을 향한 푸른 질주
학과: 경제통상대학 경제학부 , 이름: 이*민, 선정연도: 2022
내용:
물음표.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내 마음속에 떠오른 것은 온점이 아닌 물음표였다. 이는 단지 예상하지 못한 결말 때문만은 아니었다. 평소에 접해 왔던 소설들은 대부분 그 여운을 담아 간직하는 것으로 마무리해 왔다면, <천 개의 파랑>은 마치 탁구를 치듯 그 내용에서 비롯한 여러 가지 가치에 대해 사유(思惟)할 기회를 나에게 되돌려 주었다.
사실 평소 과학 서적을 비교적 자주 접하지는 못했던 터라 다른 책들과는 조금 다른 궁금증을 가지고 독서를 시작하게 되었다. 먼저 비전공자에게는 자칫 생소할 수 있는 분야를 어떻게 풀어나갈지 궁금하였는데, 배경지식이 필요한 내용이 등장하게 되면 이해에 어려움을 느낄 독자들이 분명 존재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과학 기술만을 부각하기보다는 그 기술을 소재로 작가의 철학을 공유하고자 하는 기대심이 있었다. 또 쉽게 의미를 유추하기 힘든 제목도 호기심을 자극했다. 통상적으로 제목이 그 본질을 꿰뚫는 창이라고들 하는데, 이번 경우에는 제목이나 표지만으로는 좀처럼 내용을 종잡을 수 없었기에 더욱 흥미롭게 본작을 파고들 수 있었다.
작중에서 주인공이자 인간의 외형을 지닌 로봇인 휴머노이드 콜리는 경주마 투데이와 보경네 가족을 조우하게 되는데, 로봇이 인간 기수를 대신한다는 대목에서 로봇이 복싱 경기에 출전하는 영화 '리얼 스틸'을 떠올릴 수 있었다. 비록 종목은 다를지라도 로봇을 우리 세상의 스포츠에 안착시키고자 하는 시도가 비슷하게 느껴졌다. 또 콜리가 대화를 통해 새로운 단어를 알아 가며 다른 사람과 교감할 때 응용하는 장면에서는 마치 어린아이가 처음 언어를 접하고 학습하며 성장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더욱이 중간중간마다 서술 시점이 바뀌어 등장인물 각각의 내면을 세밀히 엿볼 수 있었기에 이러한 감동은 배로 느낄 수 있었다. 가끔은 마치 내가 실제로 콜리와 대화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나아가 작품을 읽어 가며 점점 확고해진 생각은 이 책을 '단순히 과학 소설로 정의하기 어렵다'였다. 좁게는 아픈 동물과 매몰찬 경영인들을 바라보는 수의사 복희의 심리 묘사에서부터 넓게는 콜리가 사람들과 대화하며 형용하는 사회의 어두운 일면까지. 전반적으로 등장인물들의 정서를 강조하고자 하는 작가의 의지를 실감할 수 있었다.
특히, 필자는 작품 속 등장인물들의 서사나 배경이 되는 사회의 모습이 공통적으로 '외로움'을 표상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외로움의 개념을 단순히 홀로 있을 때 느끼는 감정에 국한하지 않고, 하나의 사회 구성원으로서 느끼는 존재 가치에 대한 고찰이자 사회적 양상으로 넓혀서 이해하고자 했다. 사실 꾸준히 발전하는 기술, 증가하는 인구 밀집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문화 콘텐츠들 사이에서 어떻게 외로움을 느낄 수 있냐고 반문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발전의 산물을 모두가 향유하지는 못한다는 점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보경네 가족이 바로 이를 방증하는 사례라고 볼 수 있다. <천 개의 파랑>은 대화 능력을 갖춘 인공지능 로봇이 말을 타며, 단순하거나 위험한 직종들 또한 로봇이 대체할 정도로 발전한 사회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보경은 결국 남편을 화마 속에서 잃었고, 은혜는 현시대 휠체어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불편함에 기대어 살아왔으며 연재는 재능이 있음에도 부족한 여건으로 인해 꿈을 포기하고 무기력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시대는 빠르게 변화하여 가는데 이들은 소외되어 외로이 발버둥치는 것이다. 과연 이들이 제대로 된 소속감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고 볼 수 있을까? 투데이의 경우는 어떤가? 주요 등장인물들(투데이도 명백히 자아를 가진 존재이다) 중 유일하게 말을 하지 못하지만, 자유롭게 달릴 때면 그 누구보다 진정한 삶의 의미를 온몸으로, 단적으로 표출한다. 로봇인 콜리가 몸소 느낄 정도의 활기찬 기쁨의 떨림. 하지만 채찍이 등장하고, 기록의 멍에를 짊어지며 투데이는 고요해진다. 함께 '호흡'을 나누고 교감하는 상대가 사라지며 외롭게 달리는 것은 더 이상 투데이에게는 기쁨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비단 소설 속 가상 세계의 문제만이 아니다. 현대 사회에서도 우리는 충분히 유사한 요소들을 비추어 볼 수 있는데, 일례로 저자는 은혜를 통해 현대의 장애인들이 가지는 남모를 고충을 지적한다. 장애가 있는 경우 이를 멸시하거나 어떻게든 숨기려 들었던 과거와는 달리, 최근에는 장애를 다룬 드라마나 영화가 큰 인기를 구가할 정도로 시대적인 흐름은 바뀌어 가고 있다. 하지만 아직 우리의 의식은 그에 미치지 못하는 것 같다. 당사자의 의사를 묻지도 않고 휠체어를 무작정 밀어 주거나 물건을 옮기고, 이를 자랑스러워하는 경우들이 종종 보이고 있다. 장애가 없는 사람에게는 함부로 하지 못할 행동들이, 장애인들에게는 소위 '배려'나 '도움'이라는 명목으로 자행되는 것이다. 이를 보며 '폭력적 배려'라는 말을 떠올릴 수 있었는데, 전혀 어울리지 않는 두 단어이지만 작금의 세태를 꼬집는 비판으로는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여기에 심지어는 도심의 미관을 해친다는 이유만으로 시각장애인들의 눈이 되는 점자블록을 제거하거나, 이익 창출을 위해 장애를 희화화하는 영상물을 제작하는 등 대놓고 장애인들을 소외시키는 경우도 존재한다. “몇천만 원을 웃도는 기계 다리 부착 수술보다 더 필요했던 건 인도에 오를 수 있는 완만한 경사로와 대중교통을 누구의 도움 없이도 탈 수 있는 안전함이었다"라는 은혜의 말로 우리는 장애인들에게 진정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그들의 일상을 안전하게 보조하고 똑같은 소속의 구성원으로 대우하는 것. 하지만 대중은 앞에서는 장애인들을 배려하는 척 위선적인 모습을 보이고 뒤에서는 전혀 그들을 이해하려 들지 않는 이중적인 자태를 보인다. 그들은 장애를 개인의 비뚤어진 보람을 충족시키는 수단으로 사용하였으며, 그리고 그 결과로, 장애인들은 그들이 느끼는 불편함마저 도둑맞게 되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야 할까? 필자는 이에 대한 결론을 책의 결말 부분에서 정립할 수 있었다. 결말도 나에게는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는데, 분명 결말을 초반부터 접한 상태로 읽기 시작했음에도 부지불식간에 '투데이는 마지막 경주에서 천천히 달렸고 모두가 행복해지는' 부류의 해피엔딩을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평소 내가 통상적인 소설들의 흔한 결말에 경도되어 있었기도 했고, 은연중에 작품에서 자주 등장하는 "우리는 모두 천천히 달리는 연습을 할 필요가 있다"라는 말을 의식했기 때문인 듯하다.
하지만 여기서 정말로 '천천히 달린다'라는 말이 단지 속도만을 의미하는 것일까. 단순히 앞만 보고 서둘러 달리지 말고, 천천히 달리면서 삶의 의미를 반추하여 되찾아 보라는 말은 아닐까? 투데이는 마지막 경주에서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혼자, 그리고 빠른 속도로 질주했지만 우리는 이를 두고 문자 그대로 해석하지 않는다. 콜리의 희생을 통해서 '진정한 의미의 살아간다는 것'을 간파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힘입어 투데이는 홀로 달렸으나 외롭지 않게, 빠르게 달렸으나 아프지 않고 자유롭게 본인의 황혼을 장식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각자 삶의 가치에 대해 끝없이 고민하며 살아가야 한다. 단순히 개인의 영달을 위한 고민이 아니라 타인과 공생할 수 있는 사회, 소외되는 이들이 양지로 나올 수 있는 공동선의 사회를 구성하기 위한 고민을 지속해야 한다. 물론 자본주의를 근간으로 한 우리 사회와 기술이 발전해 나가는 과정은 주로 다수를 주연으로 할 것임은 자명해 보인다. 하지만 소수를 경시하는 시류에만 편승한다면 언젠가 우리가 타고 가고 있는 사회는 반드시 무너질 것이고, 우리는 결국 아무런 대비 없이 낙마하게 될 것이다.
처음 <천 개의 파랑>을 펼쳤을 때의 기억이 다시 떠오른다. 처음 보경네 가족의 이야기를 마주했을 땐 마치 깨진 도자기를 보는 것 같았다. 모두 도자기의 한 부분인 것은 분명했지만, 세 명 모두 파편화되어 자기 자신의 고충에만 얽매여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콜리를 만나고 대화를 통해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 주며 외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나 역시 콜리의 이야기, 다시 말해서 저자의 역설(力說)을 통해 우리 사회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과 우리가 견지해야 할 자세에 대한 가치관을 확립할 수 있었다. 사전적으로도 ‘외로움’의 반대말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조금도 외롭지 않을 수는 없다. 하지만 소외되는 이들을 되돌아보고 스스로의 진정한 삶의 의미를 추구한다면 우리는 시나브로 더 자유롭고 눈부신, 파랑파랑한 하늘 아래에서 함께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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