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도서관 독후감 공모전

2011.12.31

선정도서 231종(한겨레신문 ’20세기의 명저 100선’, 교보문고 ‘권장도서 100선’, 한국일보 ‘우리시대의 명저 50선’
참가대상 부산대학교 학부생(재학생)
참여방법 독후감 공모 대상도서를 읽고 방문제출 or 이메일제출
참여기간 2011년 10월 31일 ~ 2011년 12월 9일
시상내역 총 21편(총상금 300만원)
2011년도 공모전 선정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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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 독후감 선정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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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상 강*영 문헌정보학과 도서: 모차르트
독후감: 모차르트, 그리고 엘리아스에게 보내는 연서(戀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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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 1756-1791). 그를 생 각하면 가장 먼저 그의 모습이 떠오른다. 동그란 얼굴에 하얀 가발과 장난기 어린 눈, 빨간 코트를 입고 피아노 앞에 앉아서 연주를 하거나 펜을 들고 종이 위에 머릿속에 떠오른 악상을 써내려가는 모습. 그리고 이런 그에게는 항상 따라오는 말들이 있다. ‘신의 은총(모차르트의 중간 이름인 아마데우스의 뜻이다)’이나 ‘음악의 신동’, 그리고 ‘천재 작곡가 둥둥, 35년이라는 짧은 인생이었지만 모차르트는 어린 시절부터 죽음의 순간까지 음악과 함께였고 그 음악들은 하나같이 완벽했다. 이처럼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작품성과 양적인 면 모두에서 뛰어난 작품들을 남긴 만큼 사람들은 모차르트를 타고난 천재라고 부르며, 지금도 우리는 그의 음 악을 듣고 연주하고 찬양한다. 하지만 ‘모차르트 한 천재에 대한 사회학적 고찰」의 저자인 노베르트 엘리아스는 이와 같은 생각, 즉 모차르트는 타고난 천재라는 생각은 옳지 않다고 말한다.
타고난 천재 모차르트?
노베르트 엘리아스는 독일 태생으로 20세기 사회학을 이끈 사회학자이다. 대학 시절에는 의학, 심리학, 철학을 공부하기도 했으며 여기에 덧붙여 훗날 정치, 심리학, 경제학, 경제사 강의를 하기도 했다. 엘리아스는 신칸트학과 철학을 공부하던 중 신칸트주의에서 사회적 측면을 다루지 않는데 실망하여 결국 사회학을 공부하기로 돌아섰으며 이를 통해 결과적으로는 사회학자가 되었던 것이다. 때문에 그는 크게는 사회학자이지만 그 속에는 철학, 심리학, 경제학 등 여러 관점들이 녹아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책 속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는 부분인데 예를들어 심리학적 관점에서는 프로이트의 이론에서 리비도’와 ‘승화’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 만큼 모차르트 한 천재에 대한 사회학적 고찰」은 단순한 위인전기의 형식을 뛰어넘어서 (책 앞날개에서 말하고 있듯이) “천재성으로 가득 찬 인간 모차르트의 심오한 영혼과, 음악적 창조력을 침해한 사회적 조건과 제약들 . 사이의 긴장관계를 빼어난 직관으로 꿰뚫고 있다”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책의 부제인 「한 천재에 대한 사회학적 고찰」에서도 볼 수 있듯 이 책의 전체 내용을 관통하고 있는 것은 모차르트라는 한 천재에 대한 편견과 고정관념을 벗어나는 것, 즉 모차르트는 타고난 천재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서 그를 한 개인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어느 천재의 사회학’이라는 다소 역설적으로 보이는 제목을 먹 하였다. 나의 목표는 그 천재를 해체하거나 환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인간적 상황 을 이해할 수 있게 하고 모차르트의 운명과 같은 길을 걸어가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 야 하는가 등의 질문을 어느 정도 해명하려는 것이다. 그의 비극을 이 책에서 내가 시도하였던 방식으로 서술함으로써 개혁자들에 대해 좀더 신중해야만 한다는 일반인 들의 의식을 총더 강화할 수 있을 것이다.” (p.26)
그리고 이런 그의 생각이 가장 잘 드러나는 문장은 바로 책의 가장 뒷표지에 있 는 문장, “모차르트는 타고난 천재가 아니다. 모차르트는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천재이다.”라고 생각한다. 처음에 이 문구를 보았을 때는 약간 반감이 들었다. 모차르트에 대해 타고난 천재가 아니라고 한 말은 넘어간다 치더라도 사회적으로 ‘만 들어진’ 천재라고 말하는 부분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모차르트를 주관 없이 외부의 힘에 이끌려 다니는 수동적인 사람으로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나에게는 우상과도 같았던 존재를 말이다. 하지만 저자의 각주와 책 전체 내용을 읽어가면서 나의 생각이 짧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모차르트와의 만남
사실 나 또한 모차르트에 대하여 ‘음악의 신동’이자 ‘타고난 천재’라는 생각을 가 지고 있던 사람들 중의 한 명이었다. 어린 시절에 피아노를 배우면서 모차르트에 대해 알게 되었는데, 지루하고 어려운 작품들에 비해 모차르트의 작품들은 비교적 쉬우면서 발랄하고 재미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에게 호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모차르트의 초상화들을 통해서는 귀여운 아이의 모습이나 젊은 시절 앳된 그의 모습을 볼 수 있었고, 어린 아이 시절 모차르트가 지은 짧은 미뉴엣이나 「마술피리」 등을 통해서는 그 아름답고 완벽한 음악에 ‘역시 그는 천재구나’라는 생각을 했었다. 이렇게 내 머릿속에서는 점차 모차르트라는, 일반인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천재에 대한 환상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생각 (환상)에 약간 금이 간 때가 있었다. 바로 모차르트와 살리에리 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아마데우스」를 보면서였다. 나에게는 소중한, 우상과도 같은 모차르트에 대한 영화임에도 불구하고(또는 그랬기 때문에) 나는 영화 속에서 모차르트의 그 방정맞은 웃음소리와 상황에 맞지 않는 행동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약간의 충격을 받았던 것 같기도 하다. 이는 내가 그때까지 가지고 있었던 신동 모차르트에 대한 미화된 환상을 깨뜨리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동시에 ‘역시 천재는 괴짜(이상한 사람)인가’라는 생각도 어렴풋하게 했었던 것 같다. ‘개인’의 모습에서의 모차르트
몇 년 후, 나는 「아마데우스」의 결말이 허구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방정맞은 웃음 소리의 진실은 알아내지 못했지만 말이다). 뮤지컬 모차르트!」를 보게 될 날을 앞두고 다시 모차르트에 대해 전보다 더 큰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면서였다. 뮤지컬에 대한 정보뿐만 아니라 모차르트에 대한 정보까지 끌어 모으면서 나는 모차르트의 ‘천재 작곡가로서의 모습을 넘어선 ‘한 사람으로서의 모습이 궁금해지기 시작했고, 이런 궁금중은 뮤지컬을 본 후에는 더욱 커져 있었다(뮤지컬 또한 모차르트라는 한 개인의 모습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아버지와 누나, 콜로레도 대주교, 아내, 친구들,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고뇌). 이런 상황에서 「모차르트: 한 천재에 대한 사회학적 고찰」 은 나에게 있어 ‘인간 모차르트’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던 것이다.
노베르트 엘리아스는 모차르트라는 한 천재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모차르트 의 삶을 여러 시각에서 바라보고 글로 써내려가고 있었다. 모차르트라는 한 개인 의 내면적 모습과 갈등, 모차르트와 아버지의 관계, 모차르트와 대주교의 관계, 시민계급과 귀족계급간의 갈등(사회적 상황), 그리고 수공업자 예술과 예술가 예술 (자유 예술가) 등등 여러 키워드들에 대해 저자는 이야기하고 있었다.
항상 사랑을 바라고 노래했던 모차르트
엘리아스는 책의 처음 부분을 그는 스스로를 포기했고 추락하였다’ 라는 제목과 함께 35세의 모차르트의 좌절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하고 있다. 그는 모차르트가 자기 자신이 가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었던 두 원천으로 빈 청중들로부터 의 사랑과 한 여인의 사랑(아내의 사랑)을 들고 있었다. 이런 모차르트에게 있어 서 음악은 사랑을 갈구할 수 있는 수단이 되기도 했으며, 때로는 음악 그 자체가 모차르트에게 목적이 되어 사랑이 음악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한 때 모차 르트는 그 둘 모두를 향유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모차르트와 그의 주변은 서로 어긋나기 시작했고 결국 모차르트는 두 원천을 모두 잃어버리며 희망을 다 잃고 상실감 속에서 스스로를 포기하고 죽어갔다. 이처럼 저자는 모차르트가 사랑을 갈구하는 모습과 좌절하는 모습을 가장 첫 부분에 독자들에게 보여주면서 지금까지와 같은 천재의 모습이 아닌, 한 인간으로서의 모차르트를 느낄 수 있도록 준비운동을 시키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천재라고 불리는 모차르트 에게 동감을 넘어 연민을 느끼기 까지 했으니까.
모차르트와 아버지
모차르트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은 바로 레오폴트 모차르트, 모차르트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다. 어느 누구에게나 그렇듯이 아이에게 있어 부모는 전 생애에 걸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차르트에게는 그 영향이 더욱 컸다. 모차르트에게 있어 레오폴트는 아버지인 동시에 음악 선생이자 매니저이기도 했다. 어린 시절의 모차르트는 아버지의 사랑을 얻기 위해 엄격했던 아버지의 가르침과 이성적인 판단을 잘 따랐다. 아버지의 가르침 밑에서 모차르트는 음악적 잠재력을 더욱 크게 키울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 들을 계속 자신의 통제 속에 두려던 아버지의 생각과는 달리 모차르트는 점차 성 장해 나가면서 아버지의 품을 떠나려고 한다. 이 갈등이 거의 최초로, 그리고 아 주 첨예하게 나타났던 것이 바로 1781년 콜로레도 대주교(잘츠부르크 후작 주교) 와의 갈등과 함께 면직을 당한(또는 얻어낸) 일이었으며 이러한 해방은 (아버지의 허락을 받지 못한) 모차르트의 결혼으로 완성되었다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여느 부모자식과 마찬가지로 모차르트도 아버지에게서 애증을 느꼈을 것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시민계급과 귀족계급
모차르트가 프랑스의 마리 앙투아네트(1755-1793) 와 동시대인(人)인 만큼 모차르 트는 사회적 과도기(프랑스 시민 혁명 이전과 이후)를 살아갔다. 시민계급에 해당 되었던 모차르트는 궁정 귀족들의 멸시에 괴로워했고 그것에 분노했다. 하지만 그 와 동시에 어릴 적부터 자신의 능력이 뛰어나단 것을 인지했던 그는 귀족들의 인정을 받고 싶어 했고, 자신은 그들과 동급의 대우를 받아야 마땅하다는 당시에는 발칙하다고도 할 수 있는 생각을 하기도 했던 것 같다. 즉 모차르트는 귀족들에 대해 적대감을 보이면서도 동시에 그를 원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은 모차르트의 개인적인 이유도 있을 수 있겠지만 사회적인 이유도 컸다고 할 수 있다. 18세기 후반 당시 독일의 문학과 철학 영역에서는 점차 궁정을 벗어나 대중에게 다가갈 수 있는 길이 열리고 있었지만 음악 분야에서 는 그러한 모습이 더디게 나타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모차르트의 비극은 결국, 그의 음악적 환상과 음악적 양심이 아직 그 사회의 전동 적 취향에 묶여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으로나 창조적 작업에 있어서 순전히 혼 자 힘으로 사회 권력 구조의 벽을 부수려 했다는 데, 그것도 전래의 권력 관계가 온 전했던 사회적 발달 단계에서 그러한 것을 행했다는 데 있다.” (p.26)
모차르트와 콜로레도 대주교
모차르트의 삶에 있어서 외부적으로 가장 큰 갈등상황을 보여준 것은 콜로레도 대주교와의 관계라고 할 수 있다. 이 둘의 관계는 ‘시민계급과 귀족계급 사이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며 그에 따라 수공업자 예술과 예술가 예술’의 모습을 보여 주기도 한다. 모차르트는 귀족에게 종속되어 있는 신분으로 그들의 의뢰를 받고 그들이 원하는 틀 속에서만 작곡을 해야 하는 것(이를 수공업자 예술이라고 저자 는 일컫는다) 이 싫었다. 모차르트는 어린 시절 가족과 음악여행을 다니며 맛보았 던 자유를 기억하고는 다시금 자신이 원하는 대로 마음껏 작곡하며 생활비를 벌 수 있는 자유 예술가를 꿈꾸었던 것이다. 이처럼 자유를 원했던 모차르트는 자신을 답답하게 구속하는 잘츠부르크의 주교가 싫었다. 둘 사이의 갈등은 점차 심화 되었으며 1781년에는 그 정점에 다다랐다.
“1781년 모차르트와 후작 주교의 사이는 틀어지고, 모차르트는 자신을 계속 하인 취 급하는 골로레도 대주교(잘츠부르크 후작 주교)의 태도에 격분해 사임을 요구하며 그 와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이 다은 대주교의 시종인 아르코 백작이 모차르트의 엉덩이를 걷어찬 것으로 끝났는데, 이것은 절대적 지배자의 신하라는 예속된 자리에 억지로 끼워 맞추려는 사회적 순응 요구에 대한 그의 개인적 반란의 정점이었으며, 부단히 창작의 자유를 추구한 모차르트에 얽힌 유명한 일화로 전해지고 있다.” (p.36~37)
모차르트의 편지
엘리아스는 모차르트에 대하여 이러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고 뒷받침하기 위해 여러 참고자료들을 보여주고 있었는데 그 중 가장 관심이 가고 눈길이 가던 자료 는 모차르트가 살아있을 적에 여러 사람들과 주고받았던 편지들이었다. 편지들을 통해서 내용의 정확성을 높이거나 흥미를 끌 수 있었고, 있는 그대로의 모차르트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모차르트에게 더욱 친근함을 느낄 수 있는 효과도 있었다. 이러한 모차르트의 편지들을 담은 책으로는 「모차르트, 천 번의 입맞춤」을 들 수 있는데, 뮤지컬 모차르트!」의 노랫말들이 모차르트의 편지에서 따온 경우 가 많아서 찾아 읽었던 적이 있다. 엘리아스의 책과 함께 읽는다면 모차르트에 대해 더 많이 이해할 수 있는 아주 좋은 자료가 될 것이다. 아쉬운 점은 두 책 모두 가 이제는 더 이상 서점에서는 구할 수 없다는 점이다. 때문에 직접 소장할 수는 없게 되었지만 도서관에서 어렵지 않게 책들을 구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조각글들의 모음
모차르트: 한 천재에 대한 사회학적 고찰을 읽으면서 신기했던 점은 책의 형태이지만 책을 읽고 있다는 느낌이 좀처럼 들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뭔가 체계적이거나 정형화되어 있지 않은 느낌이 들었다. 완전 자유로운 느낌의 소설도 아니고, 완전 정형화되어 있는 교과서도 아닌, 그 중간. 아니 그런 유형들을 벗어나서 작가의 생각을 써내려간 조각글들의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글의 형태에서도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정제된 형태가 아닌, 말하자면 처음 글을 쓰고는 수정하지 않은 글 같다는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때문에 처음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는 낯선 느낌 때문에 책에 빠져들기가 쉽지 않았다. 그렇지만 글과 내용을 곱씹어 읽어가 면서 점차 글의 모습에 익숙해졌고 어느샌가 책 속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결국 책의 마지막, 편집 후기를 읽으면서는 내가 신기하다고 느꼈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1990년 8월 1일 사망한 엘리아스가 죽는 날까지 쓰고 있었던 책이 바로 이 책, 모차르트: 한 천재에 대한 사회학적 고찰, 이었고 편집자는 정말 엘리아스가 책을 쓰기 위해 써놓은 조각글들을 모아서 수정, 편집한 후 출판했던 것이다. 때문 에 조각글들은 순서가 맞지 않을 수도 있고, 내용이 엘리아스가 원하는 대로 수정 이 안 된 초고일 수도 있으며, 원래 계획에 따르면 들어가야 할 내용들이 없는 경우도 있었던 것이다. 나는 여기서 내가 책을 읽으며 받은 느낌과 사실이 일치한다는 점에서 짜릿하기 도 했으며, 어쩌면 세상에 나오지 못했을 책을 내준 편집자에게 감사의 마음을 느끼기도 했다. 그가 아니었다면 이 책을 만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모차르트에 대해서도 심도 깊은 이해를 하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또한 나는 저자인 엘리아스에게 감사의 인사와 함께 그가 모차르트와 겹쳐 보이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는 점도 전하고 싶다.
최고의 음악가이지만 자신을 가로막는 사회구조와 싸워야 했던 모차르트, 현대 사회학의 거장이지만 유대계 독일인이라는 이유로 나치정권 하에서 망명생활을 해야 했던 엘리아스, 그리고 결정적으로 두 명 모두 죽음의 순 간 까지 자신의 작품을 쓰고 있었다는 점으로 인한 것이었으리라. 타고난 천재가 아닌, 천재로 성장하는….
전체 책의 내용을 읽어오면서 원래 의도했던 ‘인간 모차르트’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그 당시 사회의 모습, 그리고 모차르트 주변의 사람들에 대한 지식과 이해도 더욱 높아진 것 같다. 또한 저자인 엘리아스로부터 모차르트에 대한 애정, 내가 모차르트에게 느끼는 감정과 같은 비슷한) 감정을 느낄 수 있었던 것 같아서 더욱 기쁘다. 저자가 전체 글을 통해서 전하고 싶었던 점(“어떤 예술가도, 즉 모차르트조차도 힘 안들이고 창작할 수는 없다.”)과 “모차르트는 타고난 천재가 아닌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천재” 라는 말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인간은 사회와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며 성장하는 존재이고, 이것은 천재에게도 당 | 연한 일인 것이다. 모차르트는 당시 삶을 살아가며 천재로 성장하고 있었고 죽음 후에도 사회와 상호작용하며 천재로 인정받은 것이라고 생각해 본다.
“어떤 예술을 추후에 체형하면서 인간과 예술가를 완전히 분리하는 것은 아마 정당 치 못할 것이다. 모차르트의 예술을 사랑하면서 그것을 창조한 인간을 조금이라도 사랑하지 않기는 어려운 것이다.” (p.18)
입상 황*애 영어영문학과 도서:전태일 평전
독후감:그가 아름다운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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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나는 소설보다는 평전과 자서전류를 더 좋아하고 많이 읽는 편이다. 이유는 단순한데 인생에 있을 만한 일을 꾸며 쓴 허구적 이야기 보다 실제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평전이나 자서전들이 항상 나에게 더 현실성 있게 다가오고, 때로는 나를 슬프게 만들거나 희망을 주는 등 언제나 생각할 거리를 주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23세의 여대생이다. 짧지만 내 20대를 돌아보면 특별히 기억할 만한 것 없이, 즉 큰 어려움도 큰 슬픔도 없이 무난하고 평범하게 지나온 길이었다. 22세 때 내가 무엇을 했는지 생각하건데 딱히 기념할 만하거나 떠오르는 것이 없다. 여기 지금으로부터 약 40여 년 전 22세의 나이로 수많은 노동자들을 대신해 몸을 불살라 죽음으로써 세상을 뒤흔든 한 청년이 있다. 사실 전태일’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자세히 알지 못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노동 운동’에 대해서 그것이 담고 있는 참뜻을 나는 잘 알지 못했고, 다만 나에게 전태일’은 노동운동을 하다가 자신의 몸을 불살라 죽은 노동자 정도로만 인식 되었던 것이 다였다. 더 솔직하자면, 때때로 생각하길,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자 분신자살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택한 조금은 미련하고 급진적인 노동운동가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번에 전태일 평전을 매우 슬프게 읽으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전태일 열사가 왜 그러한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었는지, 왜 그가 실로 아름다운 청년이라 불리는지 알게 해준 좋은 기회였다. 부족한 글쓰기 실력이 내가 느낀 깊은 감동을 다 적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다. 평소에 감정이 풍부하지 못한 나지만 지독히도 비 참한 과거 우리네 현실과 평생 배가 고파야 했던 꿈 많던 한 청년의 죽음이 몇 번이나 나를 울컥하게 했는지 모른다. 특히 그의 어린 시절 이야기는 아무리 가져도 만족을 모르는 요즘 시대의 사람들의 세태와 대비되면서 나에게 묵직한 무언가로 다가왔다. 돌아보자면 정말 단 한번도 ‘배움’이라는 것에 대해서 열망해 본 적이 없던 나였다. 문득 그런 내 자신이 좀 한심하게 느껴져서 다시 생각하고 또
생각해봐도 배움’을 열망해본 적이 없다. 다만 초, 중, 고등학교 그리고 대학교까지 진학하면서 그냥 남들이 가는 길을 똑같이 따라갈 거라고, 또 ‘따라가야 한다고 생각했고, 특별히 배움’에 대해서 큰 의의를 두지 않았던 나였던 것이다. 사실 상 요즘 많은 20대들이 배움에 대한 열망이나 도전정신 없이 흐리멍텅한 눈으로 남들이 다 가는 길을 따라가는 것처럼, 나 역시 깊은 생각이나 고민 없이 대학을 선택하고 학과를 정하고 그저 스펙을 쌓기 위해 공부하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였었다. 하지만 나에겐 이렇게 사소하고 평범한 길이 어린 전태일에게는 너무나도 어렵고, 그래서 더 행복한 길이었던 것이다. 교육이라곤 국민 학교를 다닌 것이 다였던 그는 야간 학교인 청옥고등공민학교에 입학하게 되었을 때 정말 “뛸 듯이 기뻤다”고 표현한다. 불우한 가정환경 때문에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국민 학교도 중도에 포기해야했던 그에게는 학교생활이란 그저 꿈같은 이야기였고, 고통 뿐이었던 그의 짧은 인생을 통틀어 가장 행복했던 시기라고 그는 말하기도 하였다. 그는 청옥에서의 추억을 그리며 “내가 살아 있는 인간임을 어렴풋이나마 느끼 게 해주었다”, “50분 수업 시간이 너무 짧게 느껴졌고, 정말 하루하루가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소박함이다. 작은 것인데, 정말로 작은 것인데…그 는 감사하고 또 감사했다. 이 사소하고 작은 것에 행복을 느끼며 감사했던 전태일 이 아버지의 반대로 학교를 또다시 그만두어야 했을 때 가출 한 것은 충분히 이 해가 되는 상황이었다. 그의 배움에 대한 열망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 그가 어린 시절 겪은 가난함, 굶주림, 그리고 배움에 대한 갈망과 그에 따른 절 망을 이야기 하자면 끝이 없다. 이것은 당시 비단 그만 겪던 어려움은 아닐 것이 다. 그 세대가 겪었던 처절한 가난과 고통은 현실이라고 믿기도 싫은 지독한 것이 었다. 혹자들이 너무나 쉽게 내뱉는 것처럼, 근대화의 과정에서는 언제나 어디서 나 거쳐야 하는 그런 희생의 종류라고 치부하기에는 너무나도, 정말 너무나도 지 독했다. 그는 자기 자신도 어려움에 처해있으면서 어린 여공들 등 자신보다 조금 이라도 더 어려운 사람들을 보면 하루 종일 마음이 불편하고 힘든 따뜻한 성품을 가진 사람이었다. 이러한 그가 굶고 있는 14살도 안된 여공들에게 빵을 사주고 버스비가 없어 매일 2시간을 걸어 통근을 한 것은 놀랄 일도 아니다. 그는 평화 시장에 취직한 후 그 참혹하고도 처절한 노동의 세계에서 큰 충격을 느낀다. 훗날 그는 이 세상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다 같은 인간인데 어찌하여 빈한자는 부 한자의 노예가 되어야 합니까? 왜 가장 청순하고 때 묻지 않은 어린 소녀들이 때 문고 부한자의 거름이 되어야 합니까? 이것이 사회의 현실입니까? 빈부의 법칙입니까? 가슴 절절한 말이다.
당시 노동 상황을 살펴보면 참후하다. 단지 ‘돈’이 없기 때문에 학교도 다니지 못하고 기본적인 교육조차 받지 못하면서 공장의 쾌쾌한 다락방에서 몸 한번 못편 채 먼지를 마시며 일했던 당시 어린 여공들은 하루 14시간을 꼬박 일하고도 커피 한잔 값인 50원을 받았다. 정말 기막힌 저임금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여공들은 영양실조, 위장병, 폐결핵, 눈병, 신경통, 생리 불순 등 수많은 병에 시달렸지만 이러한 직업병에 걸린 것이 드러나면 그들에게 돌아오는 것은 적반하장 격으로 퇴사 뿐이고, 그들이 지금까지 벌어온 돈보다 훨 많은 돈이 드는 병원비를 들여 병을 치료하거나, 그 돈마저 없다면 그저 죽을 날을 기다리는 것 뿐 이었다. 참으로 불쌍하고 억울한 인생이 아닐 수가 없다. 이것이 어떻게 존중 받아야 할 한인간의 인생이라고 볼 수 있는가.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선언에서 모든 인간 이란 다만 ‘부유한 사람 또는 ‘권력자’ 만을 말하는 것인가. 전태일은 이러한 세태 에 스스로 죄책감마저 느꼈으며 문득 억울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면서 그는 이것이 분명히 바뀌어야 할 환경이라고 확신한다. 사실 이것은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또 생각해야만 하는 문제였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사람이 일을 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또 인간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것이다. 다만 그 당시 지독한 가 난에 살던 사람들은 이러한 이의를 제기할 생각조차 못했을 뿐일 것이다. 하루하루 벌어먹기 바쁜 그러한 생활, 이러한 생활 속에서 감히 노동운동이라는 것을 생 각이라도 할 수 있겠는가. 그러한 생각조차도 그들에겐 사치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근본적인 물음으로 돌아와 보자. 이들은 왜 이렇게 살아야만 했는가? 왜 이렇게 지독하게 가난하고 처절하게 살 수밖에 없었는가? 그들이 못났기 때문 에? 그들이 그렇게 태어났기 때문에? 전태일은 부잣집 딸이었으면 한창 뛰어놀고 마음껏 배우고 살 어린 여공들이 대체 왜 태어나서 잠 한번 푹 못 자보지 못하고 단 한 번도 배부르게 먹어보지 못하고 몸이 부서지도록 일만하다가 병을 얻어 절망 속에서 죽어가야 하는가에 대해 깊이 생각한다. 썩은 세상은 그들의 죽음과 고통을 무시하고 외면했지만 전태일은 이러한 현실에 대해 끝없이 의문을 가진다. 왜? 왜? 왜? 대체 왜? 사실상 그에겐 답을 얻을 수 없는 물음이었다. 대체 무엇이 그들을 이렇게 살 수밖에 없게 하는 것인가? 왜 소위 밑바닥 인생들은 항상 밑바닥 생활만 하다가 처절하게 죽 어 가는가? 정답은 그것은 그들이 못나고 부족해서가 아니라, 소수의 억압자들에 의해 대다수의 사람들이 짓밟히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태어날 때부터 억눌리는 고통에 찬 현실을 바라보았고 이것이 어쩔 수 없는 운명처럼 강요된 것으로 착각하고 살게 되지만, 사실 이것은 그들과 똑같은 존재인 인간’이 만든 것이다. 그들은 태어 날 때부터 이것에 강요되고 살아온 인생이기에 현실의 질서 앞에서 무조건 조아 라고 순응해야 생존할 수 있다고 무의식중에 학습되어지고 한없이 비굴해질 뿐인 것이다. 합리적인 정답이다. 이것이 비단 저 당시에만 해당되는 문제라 말할 수 있는가? 결국 그들이 태어날 때부터 ‘밑바닥 인생’ 이었다는 것은 소수충이 만들어낸 환 상일 뿐이라는 것을 깨달은 전태일은 투쟁의 길로 나선다. 그는 아버지를 통해 노동법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새로운 전망을 느낀다. 그는 뜻이 맞는 동료들을 모 아 회합을 하나 만드는데 그 이름은 ‘바보회’였다. 전태일이 제안한 이 이름은 지 금까지 부당한 학대를 받으면서도 바보처럼 살아온 과거에 대한 반성과, 노동운동에 뛰어드는 것은 바보같은 짓이라 말하지만 바보답게 되든 안 되든 부딪혀보자는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즉 세상에 순응하고 머리를 조아리고 사는 삶 대신 세 상의 고난의 길을 자초하고 있으니 그들은 바보라는 것이다. 조직이 생긴 후 전태일은 좀 더 열렬하게 노동운동에 달라붙었고, 근로기준법을 중심으로 실태를 조사하여 노동청에 시정을 요청하자는 열정에 불타올랐다. 하지만 그는 곧 이것은 소용이 없는 것임을 깨닫는다. 노동청이 기업주와 결탁하여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그의 가슴은 답답해졌다. 그는 큰 충격과 함께 끝없는 고민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대체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이 고통을 타개할 수 있는가? 대체 누구와 싸워야 이 현실을 바꿀 수 있는 것인가? 아무리 묻고 되물어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이러한 권력유착적 시대상황에서는 아무리 발버둥 쳐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깨닫 고는 그는 좌절하고 좌절한다. 그가 친구에게 보낸 편지 “현실의 조롱과 냉소가 너무나도 잔혹하고 괴로웠다” 에서 그의 실의와 낙담을 절절히 느낄 수 있다. 고민 끝에 그는 또 다른 묘안을 하나 하게 되는데, 그것은 노동자들을 착취하지 않더라 도 충분히 성공할 수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기업주들의 인식을 바꾸어 보자는 또 다른 희망을 가지고 모범기업체를 설립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마저도 결국 초기 자본의 문제로 쉽게 될 수 없었다. 결국 또다시 ‘돈’ 의 문제로 돌아왔다. 돈이 사람을 만들고 돈이 사람을 죽이던 그 시대에 결국 돈’이 또 다시 전태일의 희망을 짓 밟았다. 또 다시 깊은 좌절에 부딪힌 그는 삼각산의 수도원에 숨어 들어가게 되는데 그 곳에서 그는 일기를 쓴다. 그 유명한 구절은 다음과 같다. “이 결단을 두고 얼마나 오랜 시간을 망설이고 괴로워했던가? 지금 이 시각 완전에 가까운 결단을 내렸다. 나는 돌아가야 한다. 꼭 돌아가야 한다. 불쌍한 내 형제의 곁으로, 내 마 음의 고향으로, 내 이상의 전부인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의 곁으로. 생을 두고 맹세 한 내가, 그 많은 시간과 공상 속에서, 내가 돌보지 않으면 아니 될 나약한 생명체들.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마. 조금만 참고 견디어라. 너희들의 곁을 떠나 지 않기 위하여 나약한 나를 다 바치마. 너희들은 내 마음의 고향이로다……오늘 은 토요일. 8월 둘째 토요일. 내 마음에 결단을 내린 이날. 무고한 생명체들이 시 들고 있는 이때에 한 방울의 이슬이 되기 위하여 발버둥 치오니, 하느님, 긍휼의 자비를 베풀어주시옵소서….” | 사실상 그가 현실을 바꾸기 위해 시도했던 첫 번째 방법 즉, 진정 호소의 방법 은 노동청과 기업주의 유착을 목격하고 난 후 실패로 돌아갔다. 고민 끝에 본인이 모범기업체를 설립하여 노동을 착취하지 않고서도 돈을 벌고 성공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자 하였던 두 번째 방법 또한 초기 설립자금으로 필요한 거액 3000 만원 을 구할 수 없었기에 실패로 돌아갔다. ‘당연히 부호들은 아무도 그를 도와주지 않았고(아니, 관심조차 갖지 않았고), 그는 심지어 본인의 눈을 기증하고서라도 돈을 얻어내어 그의 뜻을 이루어 보려 하였지만 실패로 돌아간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할 수 있는 다음 방법은 무엇인가. 그가 싸워야 할 대상은 노동자들을 착취 하는 당장 눈앞에 보이는 기업주만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것을 묵인하는 노동청만 도 아니었다. 그가 싸워야 할 대상은 썩은 사회 그 자체였다. 이 썩은 사회를 바 꿀 수 있는 방법이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들을 숨 막히게 억누르는 이 사회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보이지 않는 썩은 사회가 그들에게 씌워놓은 굴레는 그들을 숨 한번 편히 쉬지 못하게 평생을 억누르고 있었다. 이 굴레를 벗어던지고 가난하고 가진 것 없는 자도 결국 부유한 자들과 똑같은 인간임을 주장할 수 있는 방법이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어떻게 하면 부호나 권력자들과 똑같은 인간’이라는 것을 세상에 소리칠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이 썩어빠진 세 상에 목소리를 내어 자신들의 존재를 알릴 수 있는가. 권력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소외당한 채 죽어가고 마치 처음부터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 잊혀지는 노 동자들을 위해 전태일이 할 수 있는 마지막 방법은 대체 무엇인가. 그의 최후의 투쟁방법은 결국, 그것은 결국 죽음이었던 것이다.
그의 죽음은 사실상 이미 예정되어있었던 것이다. 억지로 잠이 안 오는 주사를 맞고 야간작업을 하며 돌처럼 굳은 여공들을 볼 때, 고된 일에 피를 토한 그 어리 | 디 어린 여공을 데리고 병원 문 앞에서 자신의 텅 빈 주머니를 한탄 할 때, 이런 모든 고통을 지켜볼 때 그는 이미 이 어린 여공을 위해, 이 불쌍한 이들을 위해, 그리고 우리 모두를 위해 이 썩어빠진 세상을 바꾸려 마음먹었을 것이다. | 가열한 탄압과 무거운 침묵의 시대에서의 전태일의 외로운 투쟁은 사실상 아무 리 해도 이길 수 없는 게임이었다. 싸우면 싸울수록 더 단단하고 무거운 벽에 부 딪히게 되고, 아무리 외치고 싸워도 세상은 그들에게만 귀를 닫고 눈을 감은 듯 아무런 관심조차 없다. 심지어 동료 노동자들까지 현실의 두려움이라는 벽에 부딪히고 당장 먹고 사는데 급급하여 적극적인 투쟁에 나서지 않는다. 두터운 벽의 일각을 뚫었던 평화시장 관련 신문보도로 인해 잠시나마 관심을 가지는 듯 했던 사회여론은 곧 다시 잠잠해져버린다. 노동청과 기업주 그리고 정부는 자신들의 잇속을 챙기기 위해 여러 차례 노동자들을 속이며 시간 끌다가 사회의 관심이 사라지자 다시 배짱을 내민다. 이러한 세태 속에서 그가 느꼈던 좌절감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이 세상은 정말이지..정말이지 꿈쩍도 하지 않는 다. 아무리 바꾸려 해도 이 세상은 그대로다. 아무리 소리쳐도 슬픈 메아리가 되어 조롱하듯 그에게 돌아올 뿐이다. 이러한 차갑고도 딱딱한 현실의 벽을 몸소 깨달으며 전태일과 노동자들은 체념의 늪으로 빠져들 뿐이었다. 그는 결심한다. 다시 한 번 믿어보자는 친구들의 말과는 달리 그는 더 이상 기업주와 노동청, 정부가 내미는 약속을 믿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그는 피 끓는 노력과 투쟁 속에서 겪는 자신들의 고통과 진정성에는 아랑곳 하지 않고 다만 자신 들을 속이고 회유하며 우롱하는 그들에게 맞서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다 내거는 단호한 투쟁이 아니고서는 아무것도 이루어 질수 없음을 절실히 느낀 것이다. 전태일과 동료 노동자들은 근로 기준법을 화형에 처하기로 한다. 전태일이 무엇보다. 소중하게 간직했던, 그의 희망의 원천이었던 그 책. 바로 그 책을 태워버리기로 한 것이다. 이것은 도대체 누구를 위한 법이며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 법인가? 이러한 썩은 세상 속에서 이미 근로기준법은 허울 좋은 것에 불과했다. 그는 근로기준법 화형식 날 자신의 몸도 함께 불사를 것을 다짐하고, 가족들과 마지막 이별을 한다. 실로 가슴 찢어지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가족과 마주하는 식사 에서 전태일의 마음 속 에는 소리 낼 수도 없는 가슴 찢어지는 통곡이 메아리 쳤을 것이고, 가족들에 대한 죄책감으로 몹시 괴로웠을 것이다. 그가 가는 길은 그렇게 사랑하는 가족들을 뒤로하고 제 자신을 뒤로하고 철저히 버린 채 나아가는 길이었다. 그렇게 가족과의 절절한 마지막 이별을 끝낸 후 그는 외롭고 지독히도 슬픈 투쟁의 길에 나선다. “누구 한 사람 죽는 것처럼 쇼를 한판 벌여서 저놈들 정신을 번쩍 들게 하자”는 전날의 전태일의 부탁으로 친구 김개남이 성냥불을 전 태일에게 붙였을 때, 그의 온 몸에 불길이 차오른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는 불길 에 휩싸인 채 “근로 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말라!”,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며 비명에 가 깝게 외쳐댄다.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그랬다. 그들은 기계가 아니었다. 잠도 잘 수 없고 움직일 수도 없는 곳에서 배를 골아가며 14시간동안 쉬지 않고 일만 하는 그들도 그래도 인간이었다. 기계가 아니었다. 이 당연한 사실을 깨닫게 하는 데 세상은 정녕 한 청년의 희생이 필요했던 것일까. 그의 전신은 숯처럼 타고, 온 살결은 화상으로 터지고, 눈은 뒤집혔다. 그의 모습은 식별할 수 없을 정도로 참혹했다. 참혹하고도 참혹했다. 참혹한 몰골로 그가 끝까지 마지막 남은 생명의 힘을 다해 내 뱉은 말은 바로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였다.
그의 분신자살 소식은 입과 입을 타기 시작했고, 그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망치 에 머리를 얻어맞은 듯 충격에 휩싸인다. 그들은 거리로 뛰쳐나와 미친 듯이 울부 짖으며 데모를 시작한다. 그의 죽음은 노동자들에게 엄청난 충격임인 동시에 그들 을 각성시키고 일깨우는 계기가 된 것이다. 그들은 더 이상 이렇게 살수도, 이렇 게 살기도 원하지도 않았다. 그들을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누가 전태일을 죽 였는가?”, “우리도 사람이다. 14시간 노동이 웬 말이냐”며 울부짖었고, 분노에 미 쳐버린 일부 젊은 노동자들은 손가락 깨물어 혈서를 쓰는 등 잔혹한 상황이 이어 졌다. 병원에 실려 간 전태일은 소식을 듣고 온 어머니와 마주한다. 이소선 여사가 식별할 수 없이 망가져버린 아들의 모습을 처음 마주했을 때의 그 마음을 누가 이 해 할 수 있을까. 그러한 어머니를 두고 전태일은 말한다. “어머니 마음을 굳게 가지세요. 나를 이해할 수 있지요? 저를 원망하십니까?” 이소선 여사는 아들을 위 해 의연하게 대답한다. 나는 너를 이해한다. 어찌 원망하겠니? 원망하지 않는다…” “역시 우리어머니는 나를 이해해 “그래, 아무 걱정 마라. 내 목숨이 붙어 있는 한 기어코 내가 너의 뜻을 이룰게.”어머니 정말 할 수 있습니까?” “그래, 기필코 하고 말겠다.” 살이 타는 고통 속에 죽어가면서도 그는 자신의 죽음이 헛되이 되지 않도록 어머니께 자신의 뜻을 이어달라는 약속을 받은 후에 마지막 숨 가쁘게 한마디 내 뱉고는 숨을 거둔다. 그의 마지막 말은 이것 이었다. “엄마 나 배가 고프다.”
엄마, 나 배가 고프다…. 태어난 순간부터 단 하루도 배불리 먹어보지 못한, 인간 적인 대우를 받아 보지 못한 꿈 많던 노동자 전태일은 마지막 순간까지 배가 고 팠다. 오직 노동자들을 위해 한 목숨을 바친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당시 그의 나이는 한 번 마음껏 피어보지도 못한 22세, 청춘의 나이였다.
그의 충격적인 죽음 이후 전 사회적으로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비인간적인 삶과 부당한 착취에 대한 사항이 환기가 되었고, 이런 비인간적인 세태는 바뀌어야한다. 는 목소리가 수면으로 터져 나온다. 이것이 그가 이룬 성과였다. 아무도 바라보지 도, 귀 기울이지도, 관심을 가지지도 않았던 이 평화시장에, 또 인간이하로 살던 이 노동자들에게 세상이 주목하게 한 것, 이것이 청년 전태일이 이룬 성과였다. 분명 그의 목숨을 바친 이러한 헌신적인 노동인권운동이 없었더라면 이 땅의 수 많은 노동자들의 인권은 수십 년이 지난 뒤에나 존중받았을 것이다. 이처럼 그는 대한민국의 노동운동과 민주주의 발달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 22살 청년의 목숨 을 바친 노동운동은 이 썩은 세상을 단번에 뒤집지는 못했지만, 세상을 각성케 하고 움직일 수 있는 신호탄이 된 것이다. 그는 한 번의 뜨거운 날개 짓으로 세상에 소리쳤고, 그렇게 나비가 되어 날아갔다. 그가 죽은지도 벌써 40여년이 흘렀다. 오늘날 전태일은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가? 이제 전태일 분신사건은 그저 과거 권위주의 시대에 일어난 옛날 일일 뿐이고 흘러가는 과거로써만 치부되는가? 민주주의가 발달하고 인권이 존중되는 21세기 사회에서 새삼스레 전태일을 이야기 하는 것은 고리타분한 구닥다리가 되는 길인가? 이 사회에는 여전히 정치, 경제, 언론이 유착한 권력관계가 버젓이 존재하고 있고, 그들이 만드는 시나리오 속에서 약자들은 여전히 고통 받고 있다. 이러한 세 상이 지속되는 한 전태일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메시지를 던질 것이다. 한진중공업 정리해고로 인한 희망버스나, 김 진숙 지도위원의 309일 동안의 생활을 건 투쟁, 구조조정으로 인한 쌍용자동차 직원의 자살, 그리고 삼성 반도체 직원들의 희귀병으로 인한 죽음들. 더 이상 제2의 전태일은 없다고 확신할 수 있는가? 아직도 우리 사회에는 이러한 비극적인 사건들이 만연하고 있다. 이들의 비극 속에서 전태일의 얼굴을 떠올리는 것은 지나친 비약일까? 전태일이 쏘아올린 신호탄은 분명 이 땅의 노동운동과 민주주의 발전에 많은 것을 가져다 주었다. 하지만 그의 희생도 이 모순적인 사회를 단번에 뒤엎지는 못했고, 지금도 여전히 이 사회는 모순과 부조리투성이다. 이러한 사회 속에서 전태일이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그는 비록 극단적인 방법으로 권력의 사회라는 유리창에 돌을 던졌지만, 그가 우리에게 남기는 메시지는 비단 ‘죽음’으로서의 투쟁은 아닐 것이다. 조금만 어려운 사람을 보아도 마음이 아파 하루 종일 기분이 좋지 않았다는 그는 자신의 희생으로 하여금 더 이상 다음 희생자가 나오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을 청년이었음을 확신한다. 또한, 작금의 사회는 확실히 과거 전태일이 투쟁했던 시대만큼 침묵의 시대요. 어둠의 시대는 아니다. 혹자들은 비록 이름 뿐 인 것이라 말할지 라도, 우리는 분명히 부당한 사회에 이의를 제기 할 수 있고 시정을 요구할 수 있다. 이러한 사회에서 전태일이 우리에게 남기는 메시지는 바로 부당함을 보면 부당하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 사회의 부조리에 침 묵하고 무관심하기 보다는 우리가 누려야 할 권리를 힘껏 외쳐 사회가 우리를 바라보게 할 수 있게 하는 노력인 것이다. 권력의 사회 속에서 겪는 약자들의 고통을 외면하고 침묵하는 한 제2의 제3의 전태일은 계속 나타날 것이다. 결국 그들 이 우리이고 우리가 그들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2011년 9월 3일 노동자들의 어머니인 이소선 여사가 타계하였다. 장작 41년, 아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살아온 그 41년을 뒤로 한 채 이소선 여사는 끝내 영원히 잠들었다. 그녀는 전태일의 죽음을 맞이한 후 그의 정신을 이어가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1980년대 중반까지 시장에서 옷 장사를 해 번 푼돈으로 노동자들과 수배자들을 먹이고 입히고 재웠다. 그녀는 또한 여공들에게 노동교실 열 어주기도 하였고, 그 당시 서슬 퍼런 감시 속에서의 꿋꿋한 투쟁운동의 전개로 여 자의 몸으로 수차례의 감옥살이도 견뎌야 했다. 1980년대 후반 이후에는 그녀는 급진화한 노동운동을 벗어나 인권, 통일운동 쪽 일을 하기 시작하여 잠드는 그날 까지 멈추지 않고 아들의 뜻을 이어나갔다. 노동자들을 위해 제 한 몸을 불살라 세상을 뒤흔든 전태일. 그리고 수많은 고초 속에서 아들의 뜻을 이어나간 이소선 여사. 이들은 이제 이 세상에 없지만 그들이 주고 간 많은 것들은 이 사회에 남아 밑거름이 되어 우리가 사는 이 사회를 보다 풍요롭게 해주고 있다. 그들은 결코 쉽게 잊혀지는 과거가 아니다. 그들은 그자체로 우리나라 노동의 역사다. 역사는 죽지 않듯 그들도 죽지 않는다. 그들의 이야기는 지나간 구닥다리 따위가 아니다. 그들은 현재에도 이 땅에 숨 쉬며 우리에게 끊임없이 더 나은 사회를 위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이다.
입상 최*우 무역학과 도서:부분과 전체
독후감:부분과 전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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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구분 짓는 습성이 있다. 지식을 자연의 것과 사회의 것으로 나누었고 물질은 생물과 무생물로 인간을 영혼과 육체로 가치를 선과 악으로, 사람은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구분 지어 왔다. 모든 것이 우리가 그어놓은 선으로 갈라지는 건 필연일까 아니면 인간의 오만일까 부분과 전체는 그런 생각에 대한 이야기 이 다. 대상을 나눈다는 건 인간이 추구하는 단순함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생각 의 한계는 다발적인 인식을 가져다주지 못하고 설사 다양한 범주로 나누었다 할 지라도 집중적인 사색이 이루어 질 수 없다. 인간은 단순한 질서를 추구하기에 오른쪽과 왼쪽으로 구분 짓는다. 주관과 객관이라는 이름의 기준으로 단순한 질서 하나를 만든다. 불완전한 인간에게 혼란이 없는 두 가지 갈래의 구분은 우리의 사 고에는 편안함을 가져다주고 선택을 용이하게 해준다. 단지 대상을 막연히 인지하여 두서없이 생각이 분화될 때보다 많은 이점이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 체계가 진리인가 거짓인가를 떠나 구분이라는 것은 인간에게 꽤나 실용적인 방법이다.
부분과 전체의 저자 하이젠베르크는 양자물리학자로 불확정성의 원리를 주창해 노벨상을 받은 과학자이다. 그는 아이슈타인과 동시대에 살며 상대성이론을 경험했고 당시 절대적 이였던 뉴턴의 역학이 세상을 모두 설명해 주지 못한다는 것을 직접 증명했던 인물이다. 하지만 하이젠베르크는 뉴턴이 틀렸다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뉴턴의 역학은 이미 그 자체로 자기 완결성을 띄는 진리라고 평가한다. 모순일 수밖에 없다. 절대적인 시간과 절대적인 적용을 전제로 한 뉴턴 의 역학과, 시간과 공간의 뒤틀림을 설명하는 아이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동시에 수용한다는 건 왼쪽과 오른쪽이 하나라고 주장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하지만 빛 이 파동이자 입자라는 모순이 보편적인 가치인 것처럼 그의 이론은 진실로 여겨 진다. 그는 책의 말미에 자신의 역할은 새로운 토론의 장을 마련하는 것이라고 말 한다. 현대 원자물리학은 대상을 이루는 가장 작은 단위를 이해하는 특성을 지니 기에 그는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수학적 공식 하나에 두지 않고 철학적 사색과 고찰을 계속한다. 그는 아집에 사로잡히지 않고 순수하게 토론하며 진리를 구축하고자 했던 과학자였던 것이다.
넓은 범위의 사람들이 ‘전체’를 찾는데 동참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그의 말에 꽤 오랜 시간 의식의 저편으로 미뤄두었던 생각 하나가 고개를 들었다. 정의란 무엇일까. 언뜻 전혀 상관없는 생각의 흐름으로 비칠 수도 있지만 10여년의 시간을 법학도란 꿈을 바라보며 살아온 내게는 큰 울림이 있는 순간 이였다. 내게 있어 정의는 하이젠베르크가 몰두했던 자연의 이치라기보다는 올바른 판단이다. 인간은 선과 악을 나누어 두었지만 너무나 많은 가치와 해석이 제시된 지금, 더 이상 절 대적인 선을 단정 지을 수 없다. 모든 사람의 인권과 자유를 보장하자며 시작된 자본주의는 빈부의 차를 매워주지 못한다. 또 그 차이를 줄이기 위해 누군가 행한 기부는 해석에 따라 위선이란 비난을 받기도 하고 자연을 두고 발생하는 개발과 보전의 대립은 누가 올바른가에 대해 말해주지 못한다. 범죄에 대한 처벌과 용서 역시 그 누구도 단정 지을 수 없는 단지 다수의 합의로 결정되는 임시적인 진리 의 조각에 불과하다. 나 역시 질서를 벗어나는 혼란을 꺼리기에 나름의 판단을 내려 보려 하지만 쉽지 않다. 무엇이 어떻게 구성 되었는가 정말로 대상이 실존하는 가를 모르기 때문이다. 사회는 인간의 결합체이다. 하지만 실존하지 않는다, 단지 우리가 그렇게 이름 붙인 것에 불과하다. 인식도 마찬가지이다. 사물이 실제로 존 재하기에 우리가 인지하는 것인지 아니면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범위만큼만 인지하여 이름 붙인 것뿐인 일부에 불과한 것인지 알 수 없다. 공리공론으로 보일 수 있는 이 생각은 진실의 범위를 설정해 주기에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전자를 택한다면 새로운 원리에 대해 폐쇄적일 것이고 후자를 택한다면 인간의 사유 자 체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을 담보하게 되어 한계를 가진다. 여기서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에 착안한 사고를 도입해 보게 된다. 두 가지 모두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다. 사회라는 개념의 허상을 인정하고 실존적인 성격을 덧붙이는 것 이다. 사물이 실제로 존재하지만 우리가 인지할 수 있는 범위에 한계가 있음을 깨 닫고 잠정적인 정의를 내리는 것이다. 당연히 그래야 하고 이미 그렇게 진행되고 있을 거라 생각되는 이 단순한 생각은 의외로 어려운 일이다. 평생을 바쳐 연구를 거듭한 저명한 학자에게 “당신의 이론은 아직 모든 걸 설명해 줄 수 없습니다.” 라고 말하는 건 가혹한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식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진실에 다가설 수도 올바른 판단을 할 수도 없다. 개인적으로는 바로 이 부분
에 가장 큰 의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한계가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학문이 생긴 이래로 셀 수 없이 많은 분야가 결합하고 나누어져 부분을 이루었다. 과학자를 떠올리면 생물학자, 천문학자, 물리학자, 화학자 등이 떠올라 쉽게 부분들이 존재함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의 전체는 무엇일까 가장 상위 개념인 과학이라는 이름일까? 물론 그럴 수도 있지만 전체는 동기라고 생각한다. 즉 미생물의 관찰, 위성의 발견, 속도의 계산, 전자의 특성이 전체가 아니라 그것 을 알고자 했던 첫 번째 동기인 호기심이야 말로 과학의 전체라는 것이다. 물론 이 동기는 개인에 따라 달라 질 수 있다. 누군가는 인류를 위해 세균을 연구할 것 이고 또 다른 누군가는 환경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체 에너지를 찾고 있을 것이다. 세분화된 구분과 과정에 침잠하여 자신의 일에 대한 동기를 잊는 다면 그것은 부분으로 전체를 규정하려는 모순일 뿐이다. 한계의 인정은 개인의 동기가 다르다.
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한 사람은 하나의 우주라는 말을 믿는 내게 이러한 인정은 중요하다. 과학에 있어 결과에 해당하는 원리와 규칙, 발명과 발견은 아직 부분이다. 전체는 그 일을 시작했을 때의 동기가 충족되었을 때 이루어진다. 하지만 여기서도 문제가 하나 발생한다. 모든 동기를 올바르다고 할 수 있을까? 분명 잘못된 동기가 존재한다. 살상을 위해 개발되는 핵폭탄이 그러하다. 생명을 빼앗는 행위를 위해 전제되는 동기는 절대로 전체가 될 수 없다. 그렇기에 전체를 결정함에는 정의라는 올바른 판단이 필요한 것이다. 이 정의를 세우는 것이 가장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며 전체이자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하이젠베르크는 나치 집권 하에 시행되던 핵폭탄 개발을 직접적으로 저지했다. 그는 어떤 이유로도 과학이 인간을 시해하는 목적으로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뚜렷한 신념을 가졌고 자신의 안위도 고려하지 않고 실천했던 것이다. 인류를 위한 전체가 무엇인지 분명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올바른 목적을 잊지 않고 산다는 것은 전체를 이루는 가장 빠른 길이다. 하지만 지금의 우리는 가장 중요한 목적을 잊고 있다. 인간의 역사에는 좌익과 우익이 항상 존재한다. 개혁과 보수라는 이름하에 사람을 두 가지로 양분하는 것이다. 이 역시 세분화 되어 중도라는 개념과 상식이라는 용어가 덧붙여지긴 하지만 크게 두 줄기로 이루어진다. 또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대립은 가장 참혹했던 전쟁을 불러왔고 절대적인 선을 위해 존재한다는 종교는 유일신’이라는 가치로 서로를 배척하고 있다. 질서를 위한 구 분이라고 보기엔 너무나 잘못된 부분이 많다. 이 모든 것의 동기인 전체는 인간의 행복일 것이다. 하지만 나누어진 개념들은 전혀 상반된 결과를 가져왔다. 전체가 아닌 부분조차 형성하지 못한 것이다. 대상을 인식하기 위해 논의되어야 할 과학이 대상을 하나하나 제거해 나가고 있는 것과 다르지 않다. 우리는 너무나 쉽게 무엇인가를 나눈다. 생각의 편의를 위해, 선택의 용이를 위해. 하지만 대상은 나
수 없다고 본다. 다만 잠정적으로 나누어 놓는 것일 뿐이다. 왼쪽과 오른쪽의 대립은 변증법으로 귀결되는 것이 합당하다고 본다. 아마 모든 사람들은 헤겔이라는 철학자를 알기 전, 아주 어렸을 때부터 어렴풋이 정반합이라는 원리를 인식했을 것이다. 나 역시 잘 알지 못하는 헤겔의 사유 방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 에는 일면과 양면이 존재하고 그것이 계속해서 결합되는 방법으로 이치가 성립된다는 것이다. 이를 인정한다면 우리가 계속해서 해오고 있는 구분 짓는 행위의 한계를 보완할 수 있을 것이다. 언제나 변증법의 원리에 기초하여 변할 수 있는 과학의 법칙과 같은 결과를 부분으로, 대상으로의 접근을 태동시킨 동기를 전체로 생각한다면 인간이 그토록 추구하는 절대적 진리인 진실이 존재하게 된다.
올바르다는 말을 인간에게만 적용시키지 않는다면 정말 많은 수정이 이루어질 것이다. 선과 악이라는 개념 자체가 사리지고 자연의 이치만이 남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사람이기에 우리에게 적용될 수 있는 올바름을 만들어야 한다. 또 정말로 절대적인 올바름이 존재할 것인지 그렇지 않을 것인지에 대한 것도 확정 지을 수 없다. 우리가 모든 것을 경험해 볼 수 없고 아직 인식하지 못했을 뿐이지 분명 존재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불확정적이다” 는 생각은 인간의 지성에 대한 회의적인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그렇지 못해 발생할 수 있는 문제들을 해결해 준다. 부분에 동화되는 것은 전체와 상충되는 가장 잘못된 일이다. 올바른 판단을 위한 정의를 무엇이라 단정할 수는 없지만 인간을 행복과 선을 위해 필요 한 일을 하기 위해 끊임없이 토론하고 고쳐나가는 것만이 전체가 될 수 있음은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추상적이고 막연해 질서를 추구하는 인간을 혼란에 빠뜨리 는 경우가 일어날 수 있다. 해도 전체가 무엇인지에 대한 생각과 고찰은 끊이지 말아야 한다. 자연의 이치, 종교적 신념을 넘어서는 무엇인가를 찾기 위해서가 아 니라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여 최선의 판단을 할 수 있기 위해 또 진리 그 자체 를 밝히려 하는 숭고한 동기를 위해서도 부분과 전체는 항상 같은 생각의 줄기에 존재하여야 한다. 그렇기에 어쩌면 인간이 나누어야 하는 유일한 인식의 체계는 부분과 전체일 지도 모른다.
입상 김*선 무역학과 도서:죽음의 수용소에서
독후감:죽음의 수용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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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론
왜 사는지 아는 사람은 “어떠한 상황도 견딜 수 있다.
나는 가끔 생각한다. 나는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내고 있는 것이라고. ‘인생’ 이라는 단어에 대해서 고민을 시작해보는 8살 무렵부터 어렴풋이 나는 나의 길이 거의 정해져 있음을 알았다. 생각해보면 인생의 중요한 결정을 할 때마다 내 가 갖고 있던 선택지는 2~3개 정도였다. 나는 수많은 기회를 가지고 있었지만 동 시에 선택할 수 있는 기회는 많지 않았다. 나는 끊임없이 사람들의 입을 통해, 대 중 매체와 교육을 통해 선택지의 우선순위를 강요받았다. 삐에르 뷔리뎅은 이렇게 말했다. ‘취향은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 되어지는 것이다.’라고.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그리고 취업, 결혼, 아이. 퇴직 그리고 얼마 후의 죽음. 너무도 당연한 이 길을 아무 의심 없이 대학교에서 취업으로 가는 길을 걷고 있던 나는 우연한 기회에 이 책을 만났다. 이 책의 저자, 빅터 프랭클이 나에게 물었다. “당신은 왜 사나요?2. 본론 2.1 당신은 얼마 입니까 ?
“인간의 가치가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유용성에서 나온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히틀러의 계획에 따라 자행된 안락, 즉 나이가 들어서, 불치의 병에 걸려서, 사회적으로 쓸모없게 된 사람들을 죽였던 ‘자비로운 행위에 대해 변명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 사회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유용한 사람이 되길 강요한다. 외모적으로 더 뛰어나게, 더 똑똑하게, 더 강하게, 좀 더 많은 기술을 갖도록, 이런 자본주의 즉 물 질적인 것이 신이 되서 숭배 받는 사회를 일찍이 마르크스는 “보편적 매춘의 시 대”라고 규정한 바 있다. 모든 사람들이 하나의 인간으로 존중받는 것이 아니라 그가 가지고 있는 사회적으로 적합한 재능으로서 그 사람의 가치를 평가받는다. 그래서 자본주의 하에서 사람들을 조금 더 높은 평가를 얻기 위해, 조금 더 높은 가격으로 자신을 팔기 위해서 노력한다. 학벌, 학점, 영어 성적, 자격중을 따기 위 한 노력은 우리 자신을 좀 더 높은 가격에 팔기 위한 노력에 지나지 않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들은 조금 더 비싼 값에 자신을 팔기 위해 존재하는 것인가?’ 물론 모든 사람들이 이 질문에 No라고 자신 있게 말하지만 정작 ‘당신은 왜 사나요? 혹은 왜 존재합니까?” 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선 뜻 대답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고통에 허우적대고 있던 자신의 환자에게 프랭클은 질문을 바꿔 묻는다. “당신은 왜 자살하지 않나요?”
2.2 너무도, 너무도 상대적인 고통
“일정한 양의 기체를 빈 방에 들여보내면 그 방이 아무리 큰 방이라도 기체가 아주 고르게 방 전체를 완전히 채울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고통도 그 고통이 크든 작든 상관없이 인간의 영혼과 의식을 완전하게 채운다. 따라서 고통의 ‘크기’는 완전히 상대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나는 몇 년 전에 친구 한 명을 잃었던 일을 아직도 후회한다. 친구는 나에게 죽고 싶다고 말했다. 사회적으로 훨씬 많은 혜택을 받고 자랐던 친구 – 중산층의 가정 에서 유명 대학의 의대에 들어갔고 이미 미래가 ‘보장’ 된 – 가 자신의 삶을 살고 싶지 않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 이유인 즉 자신의 부모님이 이혼을 할 것 같다는 것이었다. 그 말에 나는 화가 났다. 나는 훨씬 시골에서 살다가 어렵게 대학을 들 어왔고, 미래를 불확실한데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했던 어머니는 내가 어린 시절 갑자기 돌아가셨기 때문이었다. 청소년 시절 내내 나의 소원은 어머니를 다시 한 번만 볼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친구가 내게 말했던 그 때에는 고통이라는 것이 상대적인 것임을 몰랐다. 나는 그 때 마치 교통사고 당해 누워 있는 사람에게 손가락이 다쳤다고 위로해 달라고 말 하는 것처럼 들렸다. 나는 진심으로 화를 냈고 친구는 죽지는 않았지만 내 삶의 길목 어딘가에서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이 책을 통해 뒤늦게 나는 깨달았다. 고 통은 절대적인 아픔과 크기에 상관없이 영혼을 가득 채워 그 사람을 지배하려고 한다는 사실을.
2.3 고통 속에서도 의미를 찾다
| “사람은 자기가 해야 할 사명이 있는 때까지는 절대 죽지 않는다.”
초등학교 고학년 우연히 읽었던 명언 모음집에서 발견한 말이다. 리빙스턴의 이 말은 내가 어머니의 죽음을 맞고 나서 내 머리를 가득 채웠던 말이다. 좋은 의미에서가 아니라 나쁜 의미에서. 이 말이 나에게는 이렇게 들렸다. “어머니는 세상 에서 더 이상 할 게 없어서 일찍 돌아가신 것이다.” 라고.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았다. 1000번을 다시 그 때로 돌아가 사고를 막을 수 있었다면 나는 단 한 번의 망설임도 없이 1000번 모두 그 때로 돌아가 상 황을 바꾸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임을 알았다. 고민. 고민. 고민, 계속된 고민 끝에 나는 이러한 질문에서 조금 벗어날 수 있었다. 내가 어머니의 죽음을 되돌릴 수는 없지만 어머니의 삶과 죽음을 의미 있게 만들 수는 있었다.
이형기의 낙화라는 시의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 날, 나의 사랑, 나의 결별, 샘터에 물 고인 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 이라는 구절처럼 남들보다 일찍 맞게 된 슬픔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나는 일찍 성숙해졌다. 커가면서 점점 어머니가 세상에 살았다는 것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내 삶을 통해서 증명해 보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2.4 의미 있는 삶. 그리고 행복. 참 쉽죠?
“삶의 세 가지 방식을 통해 우리는 의미 있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
1) 무엇인가를 창조하거나 어떤 일을 함으로써
2) 어떤 일을 경험하거나 어떤 사람을 만남으로써 3) 피할 수 없는 시련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기로 결정함으로써
빅터 프랭클은 자신이 만든 ‘로고테라피’라는 이론을 통해 의미 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인생에 대해 위의 세 가지 방식을 취할 것을 권한다.
2.4.1 무엇인가를 창조하거나 어떤 일을 함으로써
“인간 존재의 자기 초월 : 인간은 항상 자기 자신이 아닌 어떤 것을 지향하거나 그 쪽으로 주위를 돌린다. 자기 자신을 잊을수록 그는 더 인간다워지며, 자기 자신을 더 잘 실현시킬 수
|있게 된다.”
재미있게도 프랭클은 자아실현을 갈구하면 할수록 더욱 더 그 목표에 이르지 못 하게 된다고 말한다. 그의 말은 자아실현은 자아초월의 부수적인 결과로만 얻어진 다는 말이다. 책의 첫 부분에서도 밝혔듯이 프랭클은 젊은이들에게 성공을 목표로 삼지 말라고 말한다. 그것을 표적으로 할수록 그것으로부터 멀어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것이 원하는 대로 확실하게 행동 한다면 성공은 ‘찾아오게 되어 있다고 말한다.
앞서 나는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를 ‘보편적 매춘의 시대’로 매도해버렸지 만, 적어도 그 속에도 우리가 물질적인 가치를 이 사회에서 행복의 본질이라고 착 각하지 않는다면 얼마든지 행복하게 일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쉽게 말하면 돈을 위해서 내가 가지고 있는 노동력을 파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신념과 내 적 가치- 재미, 보람, 사명의 실현과 같은 – 를 실현하기 위해 일을 한다면 충분히 그 일을 통해서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2.4.2 어떤 일을 경험하거나 어떤 사람을 만남으로써
“인간에 대한 사랑처럼 이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생존에 대한 책임과 그것을 계속 지켜야 한다는 책임이 아주 중요한 의미로 부각된다.
우리 사회는 ‘사랑’ 이라는 말로 넘쳐난다. 하지만 우리가 믿고 있는 ‘사랑’이 진짜 사랑일까? 얼마 전에 읽었던 카프카의 “변신” 이라는 작품은 다시 한 번 나에게 이에 대한 의문을 던져 주었다. 집안의 가장이었던 그레고리라는 세일즈맨은 어느 날 아침 갑자기 벌레로 변한다. 그 동안 그의 수입을 통해 생활을 영위하던 가족 들은 – 심지어 그 착했던 여동생까지도 – 벌레로 변한 그레고리를 더 이상 자신의 가족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가 외적인 모습 이 벌레로 변했던 것처럼 그 역시 집에 있는 벌레에 지나지 않게 된다.
우리는 가끔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과 그 사람에게 기대하는 것을 사랑하는 것을 헷갈리고는 한다. 만약 자신의 연인이 있다면 질문해보자. 이 사람이 장애인이 된 다거나, 직장을 잃는다거나, 잘생긴 얼굴이 흉측하게 변해도 나는 그 사람을 그 전처럼 사랑할 수 있을까? 나는 솔직히 이 말에 자신이 없다. 그레고리의 가족들 이 그랬듯, 이 사람이 내가 허용할 수 있는 범위 이상으로 망가져버린다면 그 전 처럼 그 사람을 사랑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이런 의미에서 빅터 프랭클은 내가 어떤 유용함을 갖는 자신의 자리를 대체할 수 없는, 오로지 나 자신이어야만 되는 그런 존재가 어떤 사람에게 되는 것, 혹은 그 런 존재를 갖는 것을 통해서 우리의 삶은 의미 있을 수 있다고 말한다. 일반적으 로 부모와 자식의 관계가 이런 관계를 가장 잘 설명해준다. 그래서 많은 부모님들 은 자식에게 이렇게 말한다. “내가 너 때문에 산다.”고.
2.4.3 피할 수 없는 시련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기로 결정함으로써
“사람이 자기 운명과 그에 따르는 시련을 받아들이는 과정은 그에게 자기 삶에 보다 깊은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그 삶이 용감하고, 품위 있고, 헌신적인 것이 될 수 있다. 혹은 자기 보존을 위한 치열한 싸움에서 존엄성을 잃고 동물과 같은 존재가 될 수도 있다.”
죽음의 수용소에서의 뒷부분에서는 이런 일화가 소개된다. 불치병에 걸린 젊은이가 찾아와 자신이 본 영화 이야기를 했다.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이 아주 용감하고 품위 있게 죽음을 기다리는 과정을 생생하게 그린 영화였는데, 그 영화를 보면 서 그렇게 의연하게 죽음을 맞는 것이 인간으로서 참으로 위대한 성취였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제 운명이 자기에게 그와 똑같은 기회를 주었다.”
누구도 나쁜 상황이 자신에게 오지 않기를 바란다. 빅터 프랭클도 자신이 유대인 이라는 이유만으로 아우슈비츠에 끌려가길 원치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인생을 살다보면 너무도 자주 우리는 원치 않은 상황에 빠진다. 프랭클은 말한다. 인간에게 모든 것을 빼앗아 갈 수는 있어도 단 한 가지. 마지막 남은 인간의 자유,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는 것만은 빼앗아 갈 수 없다는 것이다.
프랭클은 아우슈비츠에서 3년간 복역하면서 수많은 죽음의 목격했고 동시에 자기 자신도 매일 매일 죽음에 대한 공포에 짓눌려 있었다고 한다. 한 가지 자신이 흥미롭게 생각한 것은 같은 상황에서도 어떤 사람들은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며 성자 같이 살았던 반면에 어떤 사람들은 짐승보다도 못한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이 다. 그는 성자와 짐승을 나누는 것은 삶에 대한 자신의 태도와 행동이라고 말한다.
2.5 죽음은 삶의 가장 아름다운 선물
“이 땅에서 영원히 사는 것은 없는 것과 같다. 스트럴드 블록은 영원히 살 수 있었지만 추함과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채
살고 있다. 이것은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죽은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나단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 를 보면 흥미로운 사람들이 나온다. 스트럴드 블록이라는 이 사람들은 영원히 죽지 않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이들이 가장 부러워하는 사람들은 때가 되면 죽는 일반적인 사람들이다.
인생에서 한번뿐이라는 의미는 많은 사람들에게 특별하게 다가온다. 우리가 인생에서 한 두 번 갈까 말까 한 외국 어느 나라에 가게 된다면 더욱 그 의미가 특별해진다. 사람들은 그것이 인생에서 마지막이 될 수 있는 것을 알기에 그 시간들을 소중히 여긴다. 그 순간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현실에 집중하게 된다.
하지만 매일 비슷한 일상을 살아가는 것처럼 가끔 우리는 우리가 죽음과는 아주 멀찍이 떨어져 있다는 착각을 하곤 한다. 그래서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고 흘려보내게 된다.
3. 결론
누군가 사람은 언제 죽는 것이냐고 나에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 나는 깊게 생각해 본 후 이렇게 말했다. “더 이상 내가 살았다는 흔적이 세상에 남지 않게 되었을 때”라고, 아무도 나를 기억해주는 사람이 없고, 내가 살고 갔다는 흔적을 아무도 알지 못할 때 사람은 그때 진정으로 죽는 것이 아닐까 싶다.
동시에 살아 있어도 살아 있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자신의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지 못하고 삶이 주는 많은 질문을 듣고도 흘려버린다. “죽음의 수용소에서”라 는 책을 읽고 느낀 내용을 담은 이 글을 한 재미있는 담화를 소개하는 것으로 마 치고 싶다.
한 남자가 내 친구 제이미 코언에게 물었다. “사람의 가장 우스운 점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코언이 대답했다.
“모순이죠. 어렸을 때는 어른이 되고 싶어 안달하다가도,
막상 어른이 되면 잃어버린 유년을 그리워해요. 돈을 버느라 건강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가도, 훗날 건강을 되찾는데 전 재산을 투자합니다. 미래에 골몰하느라 현재를 소홀히 하다가, 결국 현재도 미래도
놓쳐버리고요. 영원히 죽지 않을 듯 살다가 살아보지도 못한 것처럼 죽어가죠.”
입상 윤*한 법학과 도서:죽음의 수용소에서
독후감:죽음의 수용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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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상반기를 보내다 독서에 대한 생각이 든 것은 “문득”이라는 단어가 적절하다고 생각될 만큼 갑작스러웠다. 개인적인 고민, 장래에 대한 걱정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던 중 누군가를 만나 이야기하는 것이 부담스러웠던 나는 학교 홈페이지를 뒤적이던 중 독서치료프로그램이 개설되었다는 공지사항을 접하자마자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신청을 하게 되었다. 독서와 치료라는 단어의 조합이 생소한 것도 있지만 치료라는 측면에 희망을 품었기 때문이었다. 3달이 흐른 지금 결론을 말하자면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가족, 인생, 사랑 등 여러 가지의 내용을 다룬 책 들은 자기 계발서적에 편중한 나에게 접하기 어려울 책들이었지만 책을 읽고 나 면 무언가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고 사색을 하게 해주었기에 프로그램에 참가하기를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멘토, 멘티라는 단어가 화두가 된 지 오래지만 나 는 그리 적극적인 사람은 아니기에 이처럼 책들이 나의 멘토가 되어주었다. 멘토가 사람이 아닌 활자라는 점에서 소통을 할 수는 없지만 책의 내용으로 작가와 만나고 스스로 생각할 시간을 가져 보니 책만큼 부담없는 멘토도 없었다.
좋은 이별이라는 김형경 작가의 책을 읽고 각자의 생각을 이야기하는 기간이었다. 사랑과 이별에 대한 이야기들을 잘 풀어낸 책이었기에 이번에도 나를 뒤돌아 보며 책을 읽다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책이 거론되었다. 나치아래 수용소에서 고생한 저자의 이야기는 나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이번에 독후감 목록을 보면서 이 책이 나오자 바로 선정하여 독후감을 쓰기에 이르렀다. 쉰들러 리스트 등 나치가 유태인을 학살하고 핍박했던 이야기는 누구나 알 것이 다. 이 책의 제목 자체도 강렬했지만 죽음과 맞닿아 있던 저자가 수용소에서 어떠한 생각을 하며 시간을 보내었는지가 무척이나 궁금했다. 그가 수용소에서 살아남았다는 사실도 대단하지만 불확실한 미래앞에서 어떤 정신을 가지고 버티어 내었는지가 나에겐 실로 중요했다. 20대를 88만원세대라고 할만큼 힘든 요즘 세상에 점점 지쳐 쓰러져 가는 나에게 그의 생각이 좋은 자극이 되기를 바랬다. 수용소에서는 사람다운 생활이 불가능하다. 음식도 적게 주고 노동을 시키고 자 는 것이 하루 일과인 만큼 사람이 피폐해지는 것은 순식간이다. 책을 읽어가면서 도 수용소의 삶이 절망적이고 어두울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물론 억압과 감시 속에서 끝이 보이지 않는 힘든 생활을 계속해 나갔지만 그 안에서도 다양한 인간과 생활이 존재했다. 감시자에게 아부를 떠는 사람, 다른 사람이 죽든 말든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배식보다 음악을 택해 밤에 작은 음악회를 열어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는 사람, 자신이 곧 죽을 것을 알면서도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배식을 나누어 주는 사람, 다친 사람을 돌보아 주는 사람 등이 있었다. 끝이 있다는 것을 알면 그나마 이겨내는데 좋은 동기가 되겠지만 수용소에 서는 그 끝을 알 수 없기에 일상화된 싸움 혹은 생기없는 분위기를 상상했던 나 는 무언가 한 대 맞은 듯한 느낌이었다.
나름 저자는 운이 좋게도 의사라는 직업으로 일반사람들과는 다른 혜택을 누릴 수가 있었지만 그 역시도 부종으로 고생하고 적은 배식과 노동에 혹사당하는 수용소안의 사람이었기에 연민의 감정이 들었다. 그러나 수용소에서 다른 곳으로 이전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자신은 동료들과 남겠다는 또한 탈출을 계획한 시점에서 죽음이 코 앞에 다가온 고향사람을 차마 두고 가지 못해 탈출을 하지 않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절대적으로 힘든 상황 에서도 자신의 길을 선택하는 그의 모습이 대단해 보였다. 내용 중에 이런 일화가 있다. 죽음을 앞둔 여인이 죽음을 두려워 하기는 커녕 자신의 운명이 자신에게 이러한 엄청난 타격을 가한 것에 대해 감사하고 있다고, 정 신적인 성취 같은 것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며 창 밖의 나 무가 자신의 외로움을 달래준다며 죽음을 덤덤히 받아들였다. 그러한 모습에서 저자는 극한의 상황속에서 내면적 자아에 대한 최종적인 책임은 심리적, 육체적 요 인에 있는 것이 아니라 본인의 자유의사에 따른 결정에 있다고 말했다. 수용소에서의 다른 소소한 이야기들도 있었지만 이 이야기가 잊혀지지 않는 건 비단 나뿐만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죽음을 앞에 두고 세상을 비난한다거나 스스로를 비하할 수도 있었지만 그 여인은 순전히 자유의사로 그 상황을 감사해하고 있었다. 나는 이러한 상황을 나에게도 투영해 보았다. 최근의 나는 불확실한 미래로 세상 탓도 해 보고,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것을 원망도 해 보았으며 스스로를 자학하기도 했다. 그 여인처럼 죽음에 직면한 것은 아니나 힘든 현실앞에서 어찌할 줄을 몰랐다. 그러나 이야기를 읽으며 느낀 것은 상황이야 어찌됐던 결국은 내 의사가 모든 걸 결정한다는 것이었다. 힘든 상황에서도 아직 집과 식사를 할 수 있는 생활을 누리고 있다고 감사하는 것도 내 의지이고 세상을 탓하며 부정적으로 사 는 것도 나의 의지인 것이다. 단지 나는 안 좋은 쪽으로 안 좋은 면만 보았고 그러한 색안경을 끼었다. 쉽지는 않았지만 좋은 쪽으로도 생각해 보니 상황이 그리 암울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한순간에 모든 것을 감사하는 삶을 살았다는 것은 아니지만 좋은 면을 보려고 하니 그렇게 보아지고 또한 비판적으로 살던 그 전보다는 조금은 살기가 숨통이 트이게 된 것이다. 오늘까지만 살지 덤으로 내일 까지 살지 한치 앞도 모르는 이가 보여준 의연한 모습과 교훈은 현재에 허덕이고 있는 나에게 작은 파장을 던져 주었다. 당연한 말일 수도 있겠지만 이 책을 찾아 서 읽지 않았더라면 이런 단순한 진리도 깨닫지 못한 채 방황만 거듭할 수도 있 었다고 생각하니 내 멘토(?)가 새삼 고마웠다. 과거 지하철만 타면 습관적으로 엠피쓰리를 켜서 음악을 들었었다. 그러다 보니 자투리시간에 무언가를 생각하기 보단 노래를 흥얼거리거나 그냥 시간을 흘러보냈었다.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었던 그들은 틈이 나면 어떠한 생각을 했을까하는 두근거림이 내 머릿속에서 흘러나왔다.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수용소내에서는 다양 한 모습이 존재한다. 먹고 자는 것만 생각한 이도 있었고 저자와 그의 친구처럼 탈출을 계획한 이도 있었으며 이타적인 사람도 있었고 자유의사를 지닌 여인도 있었다. 그 중에서도 저자는 부인을 떠올렸다. 자신보다도 사랑하는 부인에 대한 생각을 품었던 저자, 생사보다도 그 찰나의 순간에 사랑을 선택한 그의 모습은 많 은 걸 시사하게 해 주었다. 최근 들은 말 중에서 기억나는 말은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보람이라는 우석훈 교수의 말이었다. (이 보람이라는 말은 뒤에 나올 가치관이라는 말과도 일맥상통할 것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제 사회로 나가려 는, 여러 가지 선택을 앞둔 나에게 있어 선택은 고통이었다. 뚜렷한 가치관이나 기준이 없었기에 고통이라기 보다는 주구장창 망설이고 있었다는 표현이 아마 적 절할 것이다. 돈, 사회적 시선, 명예, 내가 좋아하는 것 , 나만의 가치 등등 여러 가지 기준들 앞에서 선뜻 발을 내딛지 못했었다. 죽음을 앞둔 그들에게서도 나를 움직일 보람을 찾지 못한 불안한 내 모습을 기대했던 것 같다. 그냥 감시자에게 맞지 않는 것, 오늘 배식에 대한 생각, 내일 하루도 무사히 살아남게 해달라는 기도, 주위 사람들에 대한 둔해짐 같은 것들을 말이다. 그러나 내가 한참 모자라고 어리숙한 탓일까? 수용소에서의 그들은 모두가 그러하지 않았다. 오히려 저자처럼 자신만의 무언가를 품고 살았던 이들이 살아남을 수가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다가 방송에서 보았던 강의가 불현듯 떠올랐다.
고도원 씨가 했던 말인데 꿈너머 꿈을 가져란 말이었다. 사람들은 누군가에게 꿈을 물어보면 요즘은 대부분 직업을 말한다. 공무원, 대기업취업, 변호사, 의사 등등 말이다. 그런데 고도원 씨가 이런 말을 했다. 그 꿈을 이루고 나면 어떠할까라고, 공무원이 꿈이라고 하자. 어렵게 노력하여 공무원이 되고 난 사람들이 인터넷에 쓰는 후기를 보면 영어 만점 받고 쓰레기통을 치운다고 불평을 한다. 그걸로 끝이다. 안정 된 생활을 할 수 있기에 공무원이 되는 아무개씨는 그럭저럭 산다. 고도원 씨는 그러한 것을 염려했다. 공무원이 꿈이라면 그 너머의 것을 꿈꾸라는 것이다. 가령 시민에게 봉사하는 공무원이라는 꿈을 가진 사람이라면 공무원이 되어 쓰레기통 을 비우는 데서 불만을 표시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에게 봉사하는 것이 첨가 되었 기에 쓰레기통을 비우더라도 어떻게 하면 시민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활력을 가지게 된다는 말이었다. 단순한 꿈을 가지기 보단 꿈너머의 꿈을 가지라던 고도원 씨의 말이 책을 읽으면서 고구마처럼 엮여져 나왔다. -수용소에 서 살아 남은 이들은 생존에의 단순한 꿈이 아닌 그 너머의 것들을 꿈꾸었기에 살아 남았지 않았을까?- 나의 꿈너머 꿈은 무엇일까라는 고민을 안게 되었지만 고민했던 부분들에 대한 약간의 해답을 스스로 얻을 수 있었던 것 같아 기뻤다. 내가 위에서 한 말들에 대해 혹자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거 누구나 가 다 아는 이야기고 나도 그런 겉멋이 든 말은 지어낼 수도 있다고 말이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콜럼버스의 달걀을 떠올려 보면 쉬워진다. 누구나 생각 할 수 있는 것이지만 그것을 하는 데에는 누구나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바꿔 말하자면 세상 천지에 깔려 있는 말이기는 하지만 내 것으로 만들지 않으면 흔해빠진 명언에 지나지 않는 다는 것이다. 예비역들은 다 알 수 있는 말이 하나 있다. 군대는 빨리 갔다와야 한다라는 말, 남자라면 누구나 다 알고 있을 법한 이것 의 의미는 예비역이 아니면 이해하지 못한다.
군대에 가서 빨리 나와야 예비군 훈련을 빨리 끝낼 수 있다는 의미와 더불어 군대에 일찍 가야 그곳에서 사회경험을 할 수 있고 사회에 대한 준비를 미리 할 수 있으며 자신에 대해 뒤돌아 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참의미가 담겨 있는 말이다. 과연 이런 의미를 군대를 가보지 않은 친구들이 느낄 수가 있을까? 나는 누군가 옆에서 뭘 해라고 하면 잘 하지 않는다. 청개구리는 아니지만 그것이 잘 와 닿지 않아서이다. 그러다가 나 스스로 무언가를 깨닫고 나면 하지 말라고 해도 그 일을 하고 만다. 이는 나의 멘 토와도 연결이 되는데 책을 그냥 읽고 덮는 데에 그치면 책을 읽고 난 전후가 달 라질 것이 없다. 그러나 책을 읽고 난 후 책 속의 내용에 대해 몇 가지라도 생각 해 보고 스스로에 대해 생각해보면 한 가지라도 얻을 수가 있다. 이것이 적극적인 책읽기인데 이렇게 읽어야지 자신에게 도움이 된다. 참고로 이런 적극적인 책읽기 는 독서프로그램을 통해 자연스레 읽힐 수가 있었다. 이야기가 너무 다른 곳으로 세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상황속에서 그들은 어떠한 생각과 생활을 했는지가 나의 관심사였다.
나의 단순무식한 생각과는 달리 다양한 인간들이 존재했으며 다양한 생각들이 있 었다. 자아가 무너진 이들이 많았지만 그 중에서도 인간의 고귀함을 몸소 보여준 이들도 있었고 생에 대한 교훈적인 태도를 보여준 이도 있었다. 그중에서도 자유 의사에 대해 좀 더 생각해 보게 되었다. 윤리시간에 단순히 암기했던 자유의사가 아닌 그 참의미에 대해서 말이다. 상황앞에서 나는 자유의사에 따라 상반된 선택을 할 수가 있다. 흔해 빠진 말로 물이 반이나 남았다고 볼 수도 있고 물이 반밖에 안 남았다고 볼 수도 있다. 이렇듯 여러 가지 선택을 목전에 둔 나에게 자유의사에 따라 일을 처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만 그 안에 나의 가치관이 없으면 내 삶은 힘든 생활의 연속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나의 가치관
을 키워주는 데에는 책만한 멘토도 드물다고 본다. 간접적인 경험을 통해 뭔가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이 멘토는 나에게 별다른 조언도 하지 않고 부담을 주지 않는다. 수감자들이 생의 끝자락에서 허덕였지만 그들은 자유의사로 각자 자신들의 삶을 챙겨 나갔고 그러한 모습들을 미사여구를 제거한 꾸밈없는 상황묘사로 저술한 저 자는 보는 이로 하여금 생생한 감동을 안겨주었다. 이 독후감은 적극적인 책읽기가 도움이 된다는 선배의 넋두리와 아울러 책읽기의 길을 찾고 싶으면 도서관에서 진행하는 프로그램에 참가해 보라는 권유를 계
기로 쓰게 되었다. (물론 도서관의 사주를 받은 것은 아니다.) 나의 이 좁은 식견이 어떠한 도움이 될 지는 모르지만 단 한명이라도 올해가 가기 전 책 한 권을 읽고 인생의 진로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더 바랄 바가 없을 것 같다. 애초에 책을 출판하기전 실명을 비공개로 하려다가 독자들에게 솔직하고 진정성있는 의미를 부여해 주기 위해 실명으로 출판하기로 마음을 바꾼 저자 빅터 프랭클의 바램이 이러하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을 하며 여기서 마무리를 하려 한다.
입상 한*민 한문학과 도서:역사란 무엇인가
독후감:불안한 현실과 미래에 대한 나와 카의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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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역은 끝이 보이지 않는다는 한탄의 축적 끝에 찾아왔다. 예비역이 되어 돌아온 대학은 새롭게 솟아오른 건물 몇 채 외에 외견상 입대전과 다를 바 없었다. 하지 만 대학을 복학하면서 처하게 된 입장은 입대 전과 달랐다. 예전에 함께 다녔던 면식있는 동기들과 선배들 태반이 진로와 취업을 찾아 잠적했다. 이 문제에 나 또 한 예외가 아니라서 주변사람들의 인식과 기대를 의식하며 취업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앞으로 무엇인가 하며 먹고 살아야 하는데 내가 배우는 것 이 도움이 될까? 인문학에 대한 사회인식에 대해서는 전망이 좋지만, 취업에 있어 서는 지금 전공하고 있는 한문학을 포함한 인문학 자체가 전망이 밝지 않다고 한 다. 취업이란 현실의 문제로 인해 한문이란 과거의 문화를 탐구하는 전공을 배우 는 것이 현실에 무슨 도움이 되는지 종종 의심을 품거나 다른 진로를 찾아야 할 지 고민했다. 반값 등록금,대학 법인화,FTA 등도 취업난과 마찬가지로 사회의 심 각한 문제라고 미디어들이 쏟아내지만, 앞길이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나아가야 하는 처지에 그런 문제에 관심과 열정이 끌리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에드워드 헬렛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를 선택하게 된 것은 군 복무시절에 진중문고를 읽은 것이 계기였다. 군 생활 특유의 느릿하고 반복되는 일 상을 견디고자 진중문고의 책들을 읽었는데 그 중에 유시민의 [청춘의 독서]라는 책도 있었다. 저자는 그 책에서 고전들을 소개하고 고전이 자신의 삶에 어떤 영향 을 미쳤으며 고전에서 무엇을 배웠는지 서술하였다. 여기서 저자가 마지막으로 권 하는 책이 E.H.카의 [역사란 무엇인가였다. 카와 그의 책은 중학생 때부터 알고 있었다. 중학교 국사책의 도입부에 역사에 대한 인식 소개로서 랑케와 카를 다룬 부분이 있었고 그래서 국사시간에 카의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 는 문구를 배워서 그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군대에서 교과서 지식으로만 알고 있 었던 카와 [역사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알게 되었다. 카의 책을 통해 역사의 진보를 믿고 독재타도에 투신했다는 [청춘의 독서]저자의 이야기는 감동적이었다. 이때 [역사란 무엇인가가 유시민의 삶과 역사관과 사회 인식을 바꿔놓았 다는 것에 주목했다. 그리고 나 또한 이 위대한 역사가의 고전을 통해 예측하기 어려운 삶에 대한 좋은 가르침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러한 기대와 희망으로 이 책을 제대한 뒤에 읽게 되었다. 이제 이 책을 읽고 느낀 감정을 풀어 내고자 한다. [역사란 무엇인가를 읽으며 처음 든 느낌은 [청춘의 독서]저자가 ‘평균적인 한국 인이 수월하게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니다.’라고 한 것처럼 난해하다는 것이었다. 카는 수많은 사례들을 인용하며 내용을 전개하는데 그 예들은 죄다 서양의 지식과 교양들이었다. 그리고 그 사례들은 역사만 포함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사상과 과학 등 다양한 분야의 정보들을 다루고 있었다. 하지만 [청춘의 독서에 언급된 것처럼 멈추지 않고 계속 읽어나가니 카가 이 책을 통해 독자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핵심내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카가 제시하는 수많은 사례들은 궁극적으로 카의 주장을 뒷받침하거나 수식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양한 분야의 정보를 소재로 삼은 것이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에게 카의 역사에 대한 입장에 쉽고 다양하게 접근할 수 있게끔 한다. 그 다양함은 이 책을 본 뒤에 다시 보게끔 하는데 그것은 다양한 분야의 관점으로 카의 주장을 생각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이 책의 난해함이 카와 독자의 대화를 방해하거나 고전이란 타이틀을 무색하게 느껴지지 못하게 했다. 지적 호기심을 기반으로 하여 인내와 용기로서 난해함을 돌파하니 카의 주장을 나타났다. 역사란 무엇인가는 6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중에서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는 유명한 말은 1장 마지막에 있었다. 그 말은 1장의 핵심을 요약 한 말이었으며 2~6장의 핵심도 각각 문장의 마지막에 위치해 있었다. 각 장들은 그 장의 핵심을 수립하여 증명하는 과정이고 1~6장은 카의 주장을 뒷받침 한다. 그 과정을 보다가 3장에서 카가 제시한 왜? 라는 문제를 제기하는 인식이 눈에 들어왔다. 이 인식이 이 [역사가 무엇인가에 대한 나의 감상을 끌어냈다. 카는 역사가와 다른 모든 과학자들이 공통적으로 왜? 라고 묻는 동물이라고 보았다. 이 공통적인 인식을 바탕으로 그는 역사의 연구를 원인의 연구라고 정의했다. 그리고 해답을 얻을 가망이 조금이라도 남아있는 한 쉴새없이 해야하는 것이 ‘왜?’ 라고 했다. 여기서 이 ‘왜?’라는 문제의식이 바로 학문의 시작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의 제목처럼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의문이 생긴 뒤에 카는 그 의문에 대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수많은 과거 사실을 언급했다. 그리고 해답을 얻기 위해 수많은 의문을 제기하고 그것을 해결하면서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자신의 견해를 완성하였다. 그리고 카의 이 책이 지금 고전의 반열에 든 것을 보 면 그가 말한 ‘위대한 역사가나 사상가는 [왜?] 라고 묻는 사람이다.’에 동의하지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문제를 제기하고 그것을 해결하는 과정은 역사라는 일 부 학문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과학자들도 현상에 대한 의문을 바탕으로 속 한 분야의 학문을 발달시킨다. 이것은 또한 경제,사상,법 등 모든 학문 분야의 연 구를 이끌어내는 원인이다. 카는 이런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연구가 진행되고 궁극 적으로 자기의 환경에 대한 인간의 이해력과 지배력을 늘려나간다고 보았다. 즉 문제의식으로 인해 연구하여 얻어낸 성과들을 바탕으로 사회가 발전한다는 것이 다. 나는 카가 역사의 발전 진보를 믿은 것이 인간의 문제인식이 이러한 발전을 이끌어낸다고 믿은 것에서 출발한 것이라고 본다. 그리고 카가 제시한 왜라는 문 제인식은 나와 내가 배우는 학문과 내가 속한 세상의 관계에서도 적용된다고 생각했다. 이 책을 읽게 된 궁극적인 이유는 혼란한 현실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고 싶어서였다. 즉 나와 현실에 대한 문제 인식이 있었고 그 문제를 탐구하고자 책을 읽은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을 읽는 것은 카의 역사에 대한 사상을 알아가는 과정이자 내가 품은 문제의 답을 찾아가는 과정 이었다. 나의 첫 번째 문제는 내가 배우는 인문학이 앞으로 사는데 과연 도움이 되느냐 는 것이었다. 여기서 인문학을 역사로 바꾸고 이에 대한 카의 의견을 도출하면 ‘인문학이 나의 미래를 보장하지 않는다.’라는 결론이 나온다. 카는 역사가 과학과 는 달리 특수한 장래를 예견할 수 없다고 보았다. 대신 일반화를 하여 미래의 행 동을 위한 타당하고 유효한 일반적인 지침을 제시한다고 하였다. 카에게 있어서 그 일반화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 또는 상호작용이고 그것은 미래와 연 결되는 것이었다. 그는 역사와 사실의 부단한 상호작용을 통해 과거로 현재를 이 해하고 현재로 과거를 이해하게 되며 이 과정에서 개인은 과거 사회를 이해하고 현대 사회에 대한 인간의 지배력을 강화한다고 했다. 그 과정에서 역사가는 ‘왜?” 라는 문제의식과 ‘어디로?’ 라는 목표의식을 세우고 그것들은 궁극적으로 진보하는 미래를 지향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내가 품은 첫 번째 문제는 수정되 어야 할 것이다. 내가 배우는 인문학이 앞으로 사는데 도움이 될 것인가가 아니라 내가 인문학을 배워서 앞으로 사는데 어떻게 적용시키느냐가 문제가 될 것이다. 이 문제는 개인이 짊어져야 하는 것이고 그 문제의 실마리는 카가 제시한 ‘왜?” 라는 문제의식과 ‘어디로?’ 라는 목표의식 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의식들은 인문학 뿐만 아니라 다른 학문을 하는 사람들에게도 생각해볼 개념들이다. 왜 이 학문을 배워야 하는지, 무엇을 위해 배워야 하는지 생각해야 한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개인이 자신의 학문을 통해 현실과 미래의 환경을 지배하는데 나침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의식은 학문과 개인의 관계에서 세상과 개인의 관계에 대한 인식으로도 확대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왜 내가 이런 삶을 택하는지, 나에게 삶의 선택을 유도하는 현재 사회의 요소는 무엇이며, 그렇게 하는 그 영향력이 옳은 것인지 우리는 의문을 가지고 탐구해야 한다. 그리고 세상에 속한 다른 사람들과 인식을 나눠서 궁극적으로 인간을 지향하고 자신의 목적과 부합되는 미래의 진보를 이끌어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카는 이것을 역사라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와 상호작용을 통해 가능하다고 보았다. 여기에 카가 역사나 다른 학문들의 목적이인간의 시대에 대한 지배력 강화로서 동일하다고 언급했다. 그렇다면 우리가 배우는 학문이 현실을 바로잡아 미래를 이끌어나갈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그 리고 그 학문을 세상에 제시하고 이끌어 나갈 수 있는 것은 그러한 학문을 가르칠 의무가 있는 대학과 그것을 배우는 우리라고 판단했다. 그렇다면 고교, 대학 진학에서 반값 등록금,대학 법인화 FTA,취업난이란 사회 문제들이 학점이나 월급 문제 같은 개인적인 문제에 영향 주지 않더라도 궁극적으로 우리가 속한 사회 전체의 미래에 부정적인 것이라면 우리는 이 문제들에 문제의식을 가지고 해결하려는 목적으로 접근해야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우리가 배우는 학문 들은 문제의식을 기반으로 우리가 인간답게 살기 위해 필요한 인간과의 관계와 사회와의 관계를 탐구하여 제시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두 번째 문제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는 것이다. [청춘의 독서의 저자가 이 책을 통해 민주주의 운동이라는 인생의 목표를 잡은 것에 내가 감동을 느낀 것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목표를 세우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나는 군 복무 다한 성인임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아직도 갈피를 잡지 못했다. 인문학은 전망이 보장되지 않는다고 인식과 미래를 염려하게 하는 다양한 사건과 진로 선택의 문제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망설여졌다. 나는 불확실하고 불안한 미래가 두려웠다. 위에 제시한 첫 번째 문제는 궁극적으로이 문제의 산물인 것이다. 카가 책에서 소개한 수많은 사례들 속에도 미래의 진보 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들이 있었다. 퇴보를 두려워하는 의식과 그 인식에 의해 현 재에 안주하려는 의식이 그것이다. 여기서 퇴보를 인생의 쓴 경험으로 본다면 이러한 의식들이 학술에서만 등장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내가 좋아하고 하고 싶은 진로가 있는데 그 직업의 장래가 밝지 않다. 불확실한 미래를 선택하여 위험을 감수하느니 차라리 현재의 대세를 따라 현상유지라도 하자.’는 견해로 인해 벌어지는 현상들을 고등학교와 대학교 진학 문제에서 겪었고 이제 진로 선택할 시기에도 겪고 있는 것이다. [청춘의 독서의 저자도 이 책에서 민주주의로의 역사 의 진보를 보았지만 인생이 험난해질까 두려워 독재타도운동을 해야 하는지 망설였다. 이러한 이상과 현실의 관계 문제에서 이 책의 저자 카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나 회의를 보이지 않았다. 카도 역사가 항상 진보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지 않 았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궁극적으로 역사는 진보하고 있다는 인식을 확고하게 믿 었다. 그는 진보의 과정에서 희생과 손실, 피할 수 없는 위험이 있을 수 있다고 인정했으나 그러한 아픔들도 퇴보했던 역사의 일부와 함께 미래를 향한 진보로 믿었던 것이다. 이것을 현실에 대입한다면 불확실한 미래를 선택하여 겪는 위험과 고통 또한 자신이 원하는 미래로 가는 과정에서 겪는 진보의 과정이자 산통이라고 해석될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왜?’ 라는 문제의식과 ‘어디로’ 라는 목적의식이 확고하다면 카의 미래에 대한 희망은 [청춘의 독서] 저자가 말한 것처럼 힘든 현실에서도 위로와 격려가 될 것이다. 카의 이 믿음은 허영만 화백이 그린 다음 웹툰 [말에서 내리지 않는 무사]의 주인공 테무진(칭기즈칸)이 고난을 겪는 상황 에서 한 대사를 연상하게 했다. “패배는 한계가 아니라 미래로 가는 과정이다.”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와 역사만화의 대사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이 비록 장래가 불투명한 것이라도 도전해볼만 하다는 용기를 심어주었다. 결국 이 책을 읽게 된 원인이었던 나의 미래에 대한 의문들에 대해 카는 내가 어떻게 해야하는지 답을 내주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이 책을 읽고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은 타인이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찾아 결정해야 하는 것임을 깨달 았다. 이 책은 내가 가진 문제의 답을 역사에 대한 카의 정의를 통해 어떻게 찾아 야 하는지 제시해주었다. 이제 이 답을 해결하는 것은 내가 세상과 학문을 어떠한 문제의식과 목표의식을 바탕으로 인식하고 관계를 맺느냐에 달려있다. 현재 배우고 있는 인문학과 나에게 영향을 미치는 사회 현상과 세상에 대하여 문제의식과 목표의식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찾아볼 생각이다. 설사 그 일이 장래의 먹고 사는 것을 불편하게 할지라도 그 일이 궁극적으로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게 할 수 있다면, 진보된 미래를 지배할 수 있다면 지금의 도전은 할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이 카의 역사가 무엇인가를 처음으로 읽으면서 느낀 감상이었다. 다 읽은 후의 느낌은 마치 등산한 느낌 이었다. 이 텍스트 내용 전체는 산이요, 카의 주장 이 정상이라면 나는 등산객 이었다. 이 첫 산행에서 등산객은 정상 완주를 목표로 했다. 목표는 완료했지만 목표를 달성해가면서 보지 못한 산 속의 또다른 모습들과 그것들이 줄 감상이 궁금했다. 하지만 그 모습들을 완상하기에 아직 산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다고 느껴졌다. 다음번에 이 산을 올라가게 된다면 정상 완주보다 산의 풍경과 그 속의 수많은 인물들과 그들의 사상과 철학, 역사를 감상하며 올라 가고자 한다. 그리고 저자 카와 앞으로 이 책을 통해 대화를 더 하려고 한다. 그는 역사에 대 한 자신의 정의인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를 [역사란 무엇인가에 담았다. 나는 이 텍스트를 통해 학문과 세상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불확실한 미래로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에 대해서 카와 대화를 하였다. 이 대화에서 나는 저자가 제시하고자 했던 것들과 그것들의 의미들을 다 알게 되었는지 자신하지 못한다. 여기서 한문학을 배우면서 고전이란 언제 읽어도 어느 관점에서 읽어도 의미를 부 여하는 것이라고 들은 것을 상기하고 다음을 기약한다. 그래서 내가 학문과 세상을 좀 더 배우고 경험하다가 미래에 대한 긍정적인 전망이 어두워져서 의심이 나 면 다시 이 책을 읽어 카와 대화를 다시 할 생각이다. 카와 그가 소개하는 역사로부터 아직 알아내지 못한 새로운 의미와 교훈을 기대하고 미래에 대한 진보라는 이상을 실천하려는 의지를 가다듬기 위해서.
입상 임*희 윤리교육과 도서:심판
독후감:결론이 나지 않는 심판의 끝은 어디인가 <「심판』 – 카프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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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흔히 명작, 고전이라고 알려진 책들을 많이 안다. 수업 시간에 예시라든가, 저명한 분의 글 한자락이라든가, 지나가면서 흘려서 라든가, 종종 고전의 제목과 내용을 얼핏 듣게 된다. 그래서 마치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책을 이미 읽은 것처럼 느끼곤 한다. 나에게는 카프카의 『변신』이 그런 책이었다. 그레고리 잠자가 자고 일어난 뒤 벌레가 되는 것은 내 머릿속에 생생하게 그려졌다. 그래서 당연히 『변신』을 읽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수업 시간에 카프카에 대해 배우면서 『변신』의 줄거리를 다시 한 번 듣게 되었고, 그때서야 내가 『변신』을 읽었다고 ‘착각’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것을 계기로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카프카의 이야기가 궁금해졌다. 그 중 카프카의 3대 장편 작품 중 하나인 「심판을 읽어 보기로 했다. 심판」 은 「소송」으로도 번역되어서 나오는 책인데, 원래 원제에 가깝게 하려면 「소송」이 더 가깝다고 한다. 카프카의 다른 책들과 마찬가지로 제목만 봐도 어느 정도 내용을 추측해 볼 수 있다. 말 그대로 요제프 K.가 겪게 되는 심판에 관한 내용이 다. 그레고리 잠자가 자고 일어난 뒤 갑자기 벌레가 된 것과 마찬가지로 요제프 K.도 자고 일어났을 뿐인데 체포된다. 어떤 남자들이 찾아와서 체포 소식을 알리 고 그 이후로 늘 비슷하던 일상생활은 뒤죽박죽이 되어버린다. 요제프 K는 이 사 실이 너무나 당황스럽기 때문에 혹시 은행의 동료들이 자신의 생일을 독특하게 기념하는 것은 아닌가?” 하고 연극 같이 여기기도 한다. 그러나 사건은 생각보다 심각했고, 무슨 죄인지 어떻게 진행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일단 소송에 휘말린 것은 확실해 보였다. 소송 중에 있으나 원래 일상생활은 가능한 상태에 있는 요제프 K.는 일상생활을 유지하면서 소송을 해결하려고 애쓴다. 그러나 잘나가는 은행 부장으로써의 자리가 걱정될 만큼 일에는 집중이 되지 않고 점점 소송에만 신경이 쓰이게 된다. 그도 그럴 것이 만나는 모든 사람이 요제프 K.가 소송에 휘말린 피고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첫 심리에 갔을 때부터 사람들은 아무 말 하지 않아도 요제프 K.가 피고인인 것을 알고, 연락을 자주 하지 않던 사촌도 숙부도 알고, 심지어 은행 고객도 안다. 오히려 이번 사건을 계기로 이 세상 모든 사람이 법정과 관련 있는 사람이라고까지 느끼게 된다. 이런 주변 상황 속에서 요제프 K는 자신의 소송을 무사히 끝내고자 한다. 분명 이렇게 이야기의 흐름이 존재하는 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다 읽고 난 뒤 찝찝함이 영 없어지지 않았다. 마치 중간 부분을 읽지 않고 대충 넘기며 읽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이 책을 충분히 열심히 읽었으며, 단 한 군데도 뛰어 넘은 적이 없다. 하지만 여전히 ‘내가 책을 잘못 읽은 것인가.’ 하는 의문이 가시지 않았다.
이러한 카프카의 부조리한 소설을 이해하는 데 카프카의 생애를 아는 것이 도움이 되었다. 여러 책들을 통해 알게 된 카프카는 유태인으로써 프라하의 유태인들이 모여 사는 게토지역에 살았다. 하지만 카프카의 아버지는 당시 프라하의 주 류층인 독일계에 속하고 싶어서 형식적인 수준의 유태인의 모습만 따랐다. 그 당시는 많은 유태인들이 시오니즘 운동을 한창 벌인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카프카는 오히려 독일어를 배우며 시오니즘과는 거리를 두며 자랐다. 프라하의 게토에 살며 형식적으로 유태인으로써 살아가지만 마음은 유태인이 아니고, 체코인보다는 체코가 싫어하는 독일 주류층에 편입되려는 가족의 분위기에서 카프카가 정체성을 가지기는 어려웠다. 그는 자신이 속한 곳이 어디인지 알지 못한 채 한 발짝 떨어져 서 세상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으며, 세상 또한 카프카를 어딘가 떨어져 있는, 유리벽 너머에 있는 존재로 여겼다. 또한 태생적으로 기질이 여리고 몸이 약한 카프카에 비해 덩치나 성격적인 면 에서 훨씬 크고 거대한 아버지에게 늘 억압받으며 자랐다. 어머니도 적절한 소통 의 역할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카프카는 스스로를 언제나 억압받는 존재로 여기 며 동시에 의사소통의 단절을 느끼며 살아갔다. 이러한 개인적인 배경에서 나오는 특유의 자기 비하와 의사소통의 단절이 모든 작품에서 때로는 직접적으로 때로는 간접적으로 등장한다. | 정체성의 혼란에 더해 자기비하를 지닌 카프카는 인생의 선택의 기로에서 늘 방황하는 모습을 보였다. 세상에 편입되고 싶지만 동시에 자신의 문학적인 능력이 나 순수함을 손상하고 싶지 않아하는 모순이 카프카를 늘 따라다니는 것이다. 이것은 카프카의 세 번에 걸친 약혼과 파혼에서도 드러난다. 결혼을 통한 마음의 안 정을 찾으려 애쓰나 자기 비하와 의사소통의 부재가 카프카를 세상에서 끌어내리고 단절시키며 불안한 상태를 유지하게 만들었다. 그 외에도 카프카의 생애와 관련해서는 굉장히 많은 정보를 접할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한 작가 개인에 대한 논문이나 글로는 카프카에 관한 것이 가장 많은 양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그 분야도 문학으로 한정되지 않는다. 종교, 실존주의, 마르크스주의, 정신분석학을 비롯해 문학 자체의 부조리, 미학까지 다 양한 분야에서 카프카라는 인물에 대해 많은 연구를 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많은 연구가 존재하는 이유는 카프카가 우리의 삶에서 숨겨진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어 놓고 있기 때문이다. 카프카라는 한 개인의 삶 속에서도 도망가 거나 회피하지 않는 실존주의적 삶은 고스란히 드러났으며, 천직으로 여긴 글 쓰는 행위를 통해 카프카의 생각은 여과 없이 책에 표현되었다. 그래서 카프카의 책 을 통해서 카프카 개인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삶에 대해서 끊임없이 수많은 방향 으로 논할 수 있는 것이다. 마치 카프카의 문학을 통해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을 프리즘처럼 비춰주는 것 같다. 예를 들어 카프카는 살아가는 내내 모순적이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카프카는 세상에 편입되고 싶어 했다. 하지만 세상과 어느새 생겨버린 거리감은 좁혀 지지 않으며 카프카 또한 자신의 순수성을 위해서 거리감 좁히기를 원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동시에 세상에 편입되고 싶어 한다. 마찬가지로 소송에 휘말린 요제프 K는 자신이 무죄임을 입중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 그러나 뷔르스트너 양과의 대화를 포함해 종종 자신이 유죄인 것처럼 행동한다. 법정 화가가 제안한 소송 해결방법인 ‘실제적 무죄 판결’, ‘외견상의 무죄 판결’, ‘판결 지연’도 마찬가지이다. 실제적 무죄 판결’이야말로 진짜 답인 것 같지만 전설처럼 내려오는 이 야기일 뿐이다. 그리고 ‘외견상의 무죄 판결’이나 판결 지연 모두 죄인이라는 것을 전제로 이야기가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다. 그러므로 요제프 K.가 소송을 해결하는 방법은 유죄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요제프 K는 유죄가 아니며, 그러나 요제프 K는 피고인이어야 해결이 가능하다. 그러나 …. 어느 것 하나 선택하거나 정하지 못한 채 꼬리에 꼬리를 무는 모순만이 존재한다. 요제프 K는 이탈리아인 고객을 가이드해주기 위해 성당에서 만나기로 하지만 고객은 나타나지 않는다. 성당을 돌아다니던 요제프 K는 신부가 부르는 것을 듣 는다. 그는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신부가 자신의 이름으로 부르는 것을 무시하지 못하고 뒤를 돌아보고야 만다. 신부에게서 ‘문지기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는 ‘문 안으로 들어가고 싶어 하는데, 문지기에 의해 들어가지 못한다. 끊임없이 기 다리며 설득하고 뇌물도 주지만 문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 ‘그’의 기력이 쇠한 후에 문지기는 문을 닫으면서 이 문이 그를 위해 존재하는 문’이라고 말한다. ‘그’와 문지기는 항상 옆에 있지만 소통이 되지 않는다. 끝없이 ‘그’의 욕구가 절될 뿐이다. 카프카는 요제프 K. 를 통해 자신의 부조리한 모순에 대한 생각을 드 러내며 ‘문지기 이야기’를 통해서 부조리한 세상이 소통의 부재와 억압된 존재에 서 비롯된다는 것을 암시한다.
사람의 인생도 마찬가지이다. 영원한 존재를 꿈꾸지만 현실성이 없다는 것을 알기에 기억에 영원히 존재하는 것으로 대체한다. 하지만 삶은 한정된 시간 속에 해결해야 하는 문제와도 같아서 큰 꿈을 이루기가 쉽지 않다. 깨끗한 존재이자 잊혀 지지 않는 존재로 영원히 기억되고 싶지만 결국 어느 한 쪽으로 타협하고 마는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소통의 부재를 억지로 꺾어 버리고자 법 앞에서 잠깐 떠나 있거나, 자신의 정체성의 실현 가능성을 접어버리고 소소하게 사는 것을 택한다. 그러나 카프카는 ‘글 쓰는 사람’의 정체성을 포기하려 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동 시에 끊임없이 세상과 소통하고자 노력한다. 모순된 두 가지를 동시에 하려고 애 쓰는 것 자체가 얼마나 힘든 것인지 알지만 카프카는 둘 중에 어느 하나도 놓을 수 없는 입장이 되어버렸다. 삶을 타협하는 보통 사람들과 달리, 그는 스스로 부조리한 삶의 한 가운데로 빠져버린 것이다. 요제프 K도 무죄임을 입증하려고 애 쓰지만, 자신의 서른한 번째 생일날 마치 무슨 일이 있을 것인지 알고 있었던 사람인 것 마냥 준비된 자세를 취한다. 그러면서도 마지막까지 자신이 사용하지 않 은 수단이 있는 것은 아닌지, 구원자는 없는지, 두리번거린다. 카프카는 일반적인 모순을 넘어서 죽음에 대한 문제에서도 모순을 드러낸다. 책 곳곳에서 요제프 K. 가 자살을 비롯한 죽음을 생각한다. 심지어 마지막 장에서는 칼을 쥐고 자살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한다. 아마 요제프 K. 가 가지고 있는 죄의 삯이 죽음인 것 같다. 그런데 요제프 K,는 스스로 죽지도 못한 다. 왜냐하면 죄인이면서 동시에 무죄이기 때문이다. 죄인이라면 죽어야하지만 무 죄라면 죽을 수 없다. 요제프 K는 과연 무죄인가, 유죄인가? 상위 법정 기관과는 소통조차 되지 않는 상황에서 그에게 죄의 여부는 영원히 알 수 없다. 마치 우리 가 삶은 힘들지만 죽지는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힘든 삶을 왜 쉽게 끝내지 못하는 것일까? 삶의 진정한 의미, 가치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것을 꾸준히 알아내려고 애쓰지만 알지 못한다. 요제프 K의 죄의 여부와 마찬가지인 상태이 다. 결국 요제프 K.의 심판만이 부조리한 것이 아니다. 죽어야한다고 생각하지만 죽지 못하는 것은 요제프 K.만의 문제가 아니다. 삶의 진정한 의미, 가치를 알지 도 못하면서 삶을 살아가는 우리가 부조리한 것이다. 인식하지 못하는 척, 모르는 척 여겨왔던 진실을 카프카가 아무런 덮개 없이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는 부분이다.
그래서 카프카의 책을 읽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웃기지만 웃어도 되는 것인지 모르겠으며, 유쾌하다기보다는 불쾌해지고 ‘이게 뭐지?’라는 생각을 들게 한다. 카프카 특유의 유머가 소설 곳곳에 존재하지만, 다 읽고 난 뒤의 당혹감은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카프카에 대한 다른 책을 읽을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내가 받은 혼란스러운 느낌이 카프카가 보여주고 싶은 것이 무엇인 지 알고 싶게 만든 것이다. 어렵지만 딱딱한 음식을 씹을 수 있도록 노력하고 싶었다. 그 결과 카프카는 나에게 어렵고 혼란스럽지만 동시에 매혹적인 가치를 던져주었다. 바로 카프카는 꾸며내지 않는다는 것이다. 요제프 K, 의 결말도 “개 같이!” 끝나며, 치욕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런데, 이 때문에 카프카의 책이 진정으로 가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내가 외면했던 삶의 진실이 갑작스럽고도 혼란스럽고 부조리하게 묘사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끝나지 않는, 아니 죽음의 순간 직전까지 끝날 수 없는 소송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은 누구나 요제프 K. 이다. 카프카는 논리적이고 이성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당연하고 최고인 것 같아 보이는, 성공이나 목표를 위해 어떤 방법과 수단, 경쟁을 가리지 않는 요즘의 사람들에게 삶의 본질이란 무엇인지 알아보라는 심판을 내리고 있다. 언제나 해피엔딩 이길 바라며 노력하는 것이 ‘살아가는 것의 가치’를 이해하는 방법이 아니라 결국 삶이라는 것은 하이데거가 말한 것처럼 ‘존재 그자체로 문제가 되는 존재’라는 것 을 책 내내 강조한다. 쾌쾌하고 답답하며 숨을 쉬지 못할 것 같은 법정의 공간처
럼 부조리한 현실을 그대로 직시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기분 나쁜 어지러움이겠지 | 만 눈감고 피하고 도망치지 말고 서성이고 흔들리며 어지러움을 한 가득 느껴보라고 던져주고 있다. 그러니까 카프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비록 끊임없는 노력 | 에도 소통은 거부되고 좌절되겠지만 죽기 직전까지 살아가는 이유를 알아내기 위해 계속 시도할 수밖에 없는 것이 살아가는 이유이자 가치가 아닐까. 요제프 K, 는 소송을 통해 극대화된 짧은 1년간 그 과정을 거쳤고, 카프카는 일평생을 통해 거쳤듯이 말이다.
단순히 책 한 권을 읽은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삶을 바라보는 새로운 프레임을 제시해 주는 것이 고전이 가지고 있는 매력이자 힘이다. 수많은 고전들은 지금 읽어도 이 시대에 맞게끔 개개인에 맞게끔 적용된다. 요제프 K의 이야기에 | 서 내 모습이 보이고 내 문제의 해결이 어렴풋이나마 보이는 것이다. 특히 실제로 읽어보는 것과 지나가며 중간의 내용을 잠시 듣는 것에 분명한 차이가 난다. 카프카의 『변신』에서도 부조리한 모습은 그대로 드러나는데, 실제로 읽어보기 않는다. 면 카프카의 정신세계, 부조리를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변신』을 읽 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심판도 읽게 되었고 카프카와 관련된 다른 책들도 읽는 것으로 확장되었다. 살아 숨 쉬어 열매를 맺은 고전의 전형적인 결과를 겪은 것 같다. 이번엔 카프카의 공을 받았으니 쥐고 흔들어볼 차례이다.
입상 강*주 문헌정보학과 도서:오래된 미래
독후감:오래된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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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정말 이래도 되는 걸까?
계절상의 이유로 고립되는 시기가 있다는 라다크는, 말하자면 나의 로망이었다. 현대를 살고 있는 사람은 누구나, 누구나라고 일반화시켜도 될 일인지 모르겠으나 겨울잠, 소음과 현란한 장치로부터의 고립, 평화로운 대자연에서의 삶을 많이 들 꿈꾸지 않던가. 극심한 추위로 꼼짝도 하고 싶지 않을 때면 며칠만 세상이 정지해주길 바라기도 한다. 그런 심리를, 나는 멀미가 날 만큼 난잡하고 폭력과 횡포로 물든 이기의 사회 탓, 저마다 자기 목소리로 불평불만공해를 일으키는 개인들의 사회 탓으로 돌려 본다. 거기에 나 자신도 있다. 결국 온갖 때 묻은 나로부 터의 도망을 겨울잠, 고립, 대자연과 같은 데에 기대어 하고 싶은 것이다. 그 모든 것의 대명사가 나에겐 라다크였다. 이기적 사회, 공해의 사회. 그것이 내 생활의 물리적 편의의 댓가라면 이런 편의쯤은 당장이라도 포기하고 싶은 대상 1호다. 그 런 마음은 요즘 들어 더 하다.
요즘 나라 곳곳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모두 우리가 아직도 개발에 목말라 있는 모양을 전하고 있다. 방금 들은 광고 비슷한 뉴스에서 제주도 민요 ‘너영 나영’이 흘러나왔다. 제주섬에서도 청정구역으로 보호되고 있는 강정 마을의 해군기지 설치 논란 속에 그 마을 주민들이 뿔뿔이 흩어졌다는 인터뷰가 민요 위에 얹어졌다. 형제끼리, 사촌끼리, 이웃끼리 찬반으로 나뉘어 물리적 정신적 폭력이 오고가는 가운데 얼굴을 마주치기만 해도 가슴 속에 응어리가 진다는 마을 어르신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나도 울며 생각했다. 내가 나고 자란 제주도는 이미 오래 전부터 분해되기 시작했고 워낙 고립되어 살아온 영향인지 편의와 편리에 누구보다 쉽게 현혹된 사람들은 운치 있던 돌담 골목을 무너뜨리고 ‘찻길’을 만들어내어 마을을 점점 더 볼썽사납게 한다. 그러는 가운데 이웃과의 관계가 소원해지기도 했지만 개의치 않고 아스팔트는 늘어만 간다. 골프장을 비롯해서, 들리는 말로는 ‘동 남아 가느니만 못한 경험을 주는 수준의 각종 관광 시설은 외부인에게는 제주도 의 잇속 챙기기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때마다 다치는 자존심이나, 당연히 그 자리에 있어야 할 것들이 사라져서 느끼는 배신감을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얼마쯤 물으로 나와 지내면서 한번씩 오가는 마을의 변화에 토를 다는 것도 조 금은 염치가 없기도 하다. 그런 배신감이나 상한 자존심은 개인적인 욕심으로 두고라도, 그곳에서 나고 자라 마을을 단장하고 지켜온 주민들은 해군기지 논란이 있기 전까지 공동체가 위협을 당하는 일 없이 단란하고 화목한 전통 속에 최소한 행복했다고 할 수 있다. 그것보다 우선하는 가치가 무엇인지 따져볼 것도 없이 제 주도의 그간 개발 행보를 보면 경제논리에 더럽혀질 만큼 더럽혀져 있는 ‘환상의 섬’이 보인다. 어느 의식 있는 사람은 더 이상 큰 프로젝트는 의미 없으니 정체성 을 찾는 것이 이익이라고 조언한 바 있고, 진보(현대화)의 방향이 꼭 하나여야 하 는 것은 아니라는 헬레나의 입장이 그것이건만.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는 애초 언어학자로 라다크로 들어가 16년간 정착했다. 라 다크의 말을 비교적 원활하게 사용할 수 있어서 언어를 통해 그들의 사고방식과 문화, 전통을 이해할 수 있었고 거기에 흡수되어 살아오면서 공동체와 타고난 자연 환경에 의지하는 전통사회를 가장 가까이서 목격한 외국인이다. 그리고 전통사회의 변질과정을 지켜보며 천편일률적이고 반생태계적인 서구 지향적 개발 대신 라다크 사람들이 스스로의 의지로 직접 개입하여 생태를 거스르지 않는 지속가능 한(sustainable) 개발을 하도록 도왔다. 그래서 이제는 생태환경운동가로 익숙한 이름이다.
‘지속가능한(sustainable) 개발’이라는 키워드는 관광학을 배울 때 담당 교수님의 화두였다. 지역의 전통과 인문문화와 자연문화를 변질되지 않게 자원화하여 그냥 보고 즐기는 관광이 아니라 그것을 배우고 경험을 공유하는 상생 여행, 지속가능한 관광의 하나로 문화관광, 생태관광을 연구하셨다. 그것이 피차에게 이상(理想)적인 그림이지만 라다크의 경우에는 당사자들의 가치관이나 삶과 전혀 상관없이 살아 왔고, 특별히 알려는 노력도 하지 않았을 제3의 관계자가 나타나 관광개발을 추진 하게 되었다. 라다크의 차별된 환경은 고려하지 않고 정형적이고 획일적인 ‘개발 물’을 세우게 된 것이다. 개방, 개발되기 시작한 라다크와 라다크 사람들은 상대적 으로 낙후되고 가난한 존재가 되었다. 전통적인 자급 경제체제에서는 돈의 역할이 크지 않았지만 곧 이들은 ‘한 푼 줍쇼’를 외치게 되었다. 1970년대 헬레나가 처음 본 라다크는 아무도 가난하지 않은 공동체였다. 그러나 불과 10년도 지나지 않았을 때 그들은 스스로 가난하다고 도움을 청했다. 과거 돈의 쓰임은 극히 일부였는데 국제적인 화폐경제 체제에 장악당한 이들은 언젠가부터 기본적인 욕구를 충족하는데도 돈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생계를 위해 화폐를 사용해야 하는 라다크 사람들은 국제금융을 좌지우지하는 사람들의 영향권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땅을 경작하며 살던 시절 그 모든 생활의 주인이었던 사람들이 이제는 그런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새로운 경제체제가 그런 의존성을 가져오리라는 사실을 알지 못 했다. 돈이라는 것은 그저 편리하고 도움을 주는 것으로만 보였다.
우리 정말 이래도 되는 걸까? 이미 살아 온 것보다 두 배의 날들을 더 살게 되겠지만 돈 때문에 저질러진 일들을 돈으로만 처리할 수 있거나 돈도 해결하지 못 하는 꼴을 봐야 하는 게 아마 내가 인간으로서 겪는 가장 참담한 경험이 될 것이라고 감히 확신한다.
라다크의 현대화는 우리나라가 그래 왔던 것처럼 젊은이들이 돈을 벌기 위해 고향을 떠나도록 했다. 공동체가 분해되고 핵가족이 늘어나는 수순도 밟았다. 편 리하고 편한 것을 알아보고 그것에 대한 맹목성을 가지게 했다. 자신들을 키운 고유문화를 부끄러워하게 만들었다. 싸움이나 화 따위를 우습고 시시한 것으로 여기 던 사람들에게 욕심과 이기를 갖게 했다. 다양한 음식, 다양한 옷, 다양한 볼거리, 들을 거리가 그들의 삶에 개입되어 스스로 가난해졌을 라다크의 미소가 슬프다. 아니, 슬픈 건 차라리 낫다. 현대화, 도시 개발에 관한 정보도 없고 서구사회 발 전의 이면에 대해서 누구도 말해주지 않는 상태에서 외부에 의한 서구지향적 개 발선상에 있던 라다크 사람들의 순진함은 농약을 여섯 종류나 썼기 때문에 좋은 야채’라는 인식에서 충격적으로 드러난다. 서구에서는 이미 사용이 금지되었거나 제한되어 있는 화학물에 완전히 노출된 채 일하는 것은 또 어떤가.
나는 개발에 굶주린 듯한 우리 사회도 아직 그 단계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것 같다. 소위 선진국이라는 나라의 면면들을 추종하는 듯한 행태가 말해 주고 있다. 라다크와 우리의 차이가 있다면, 당시 라다크 사람들은 순진했고 정보가 없었기 때문에 교육과 정보 유통의 중요성이 부각되기나 했지만 오늘 우리는 경험도 있고 정보를 획득하고도 무지하다는 것.
현대화(진보)가 꼭 한 방향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인식을 가질 정도, 개발이 곧 파괴가 되는 야만적인 행태를 거부할 수 있을 정도는 우리가 지적, 물리적으로 많이 성장한 사회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우리가 그러한가.
우리는 지금도 하늘을 향해 가고 있지만 선진국 사람들은 다시 내려오고 있다. 그들은 그 위는 텅 비어 있다고 말한다)
이것은 라다크 사회가 우리에게 전하는 힌트다. 우리가 동경해 마지않던 서구식의 획일적 현대화는 결국 물리적 편리에서 정신적 편안함을 추구하는 쪽으로 방 향을 틀었다. 자동차보다 자전거를 혹은 자기 두 다리를 사용하려고 하고, 삭막하고도 휘황한 시멘트 건물보다 편안한 땅(흙)을 딛고 살려고 하며, 좋은 땅에서 농약 먹지 않고 자란 식품을 선호한다. 조금 불편해도 건강한 삶을 꿈꾸고 부와 명 예가 충족시켜주지 못한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다. 라다크의 전통을 비롯해 저마다. 의 잃어버린 생태적 양식을 다시 좋으며 미래를 그리고 있다. 오래된 미래다.
개발 이전의 라다크의 삶에 대해 나는 묘한 결핍을 느꼈다. 그들 전통의 에너지, 깊은 생명력을 내가 억만장자인들 살 수 있을까. 절대적 만족과 행복을 자랑하던 그들 사회는, 늘 상대적 빈곤을 경험하며 사는 내가 사실은 가난하기 짝이 없는 문명인임을 인정하게 한다. 우리 정말 이래도 되는 걸까. 이대로도 괜찮을까? 참담한 꼴을 당하기 전에 라다크의 전통, 변화, 미래를 우리 사회에 새겨 넣으며 우리는 조금 아플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입상 한*근 항공우주공학과 도서:오래된 미래
독후감:오래된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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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에서 발견한 올바른 미래
1. 오래된 미래에 들어가며.
‘오래된 미래’라는 제목만 봐서는 이 모순적인 제목을 이해할 수 없었다. 2년 전 매일경제지에 이 책이 이 주의 권장도서로 게재되었던 적이 있다. 당시에는 ‘오래된 미래’라는 책 제목에서 어떠한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책을 읽은 후 이 책의 제목이 정말 잘 지어졌다고 생각한다. ‘라다크가 가진 전통으로부터 전 세계가의 문화는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 방향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크게 세 파트로 라다크의 전통, 변화 그리고 미래로 구성된다. 첫 번째 장에서 ‘라다크의 전통’을 이해하고, 두 번째 장에서는 서양의 자본이 이들에 게 무차별적으로 들어와 이들의 사회를 파괴하는 모습을 매우 현실적으로 다룬다. 마지막 세 번째 장은 저자의 시선으로 이들이 나아가야 할 방향과 세계화에 대한 고찰 그리고 이들이 라다크 내에서 성과를 내었던 일련의 일들을 소개한다.
책을 읽으면서 가장 많이 느낀 것은 우리가 흔히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는 세계화가 제3세계 국가들에게는 매우 위협적인 요소가 된다는 것이다. 나 역시 서양 문물은 언제나 우수하다는 편협한 사고를 하고 있었다는 것과 제 3세계 국가들은 늘 불행하다는 것, 그리고 이러한 서양식 발전이 제 3세계 국가들에게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과 같이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었던 점에서 이 책이 나에게 매우 큰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또한 이 책은 다양한 모순을 다룬다. 지역토산물이 먼 거리에서 가져오는 농산물보다 비싸지는 이유와 제3세계 국가들은 서양의 선진 문화를 동경하는데 반 해, 서구 선진국은 무분별한 발전 이전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모습을 보인다. 무지에서 오는 이러한 차이를 이 책은 매우 사실적으로 다루고 있다. 나는 전체를 보고 있다고 생각한 것들도 이 책을 통해서 아주 단편적인 면들만 보고 있었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II. 전통의 중요성
지금의 우리나라만 해도 전통의 중요성을 어느 정도는 알고 있는 것 같다. 우리나라의 고유 전통을 지키기 위한 노력이 각지에서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하 지만 우리나라가 지금보다 어려울 때인 즉, 경제발전이 급속도로 이루어지기 이전 그 당시만 해도 우리는 서구 선진국들을 따라가기에 바빴었다. 서구 선진국 문화 와 교육제도, 정책의 전반적 요소 등 우리나라는 서구 선진국이 가진 것들을 동경 했고, 그것들을 무분별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우리나라도 과거에는 라다크와 비슷하게 농업 사회가 주를 이루었었다. 그러나 지속적인 개방정책으로 해외의 문 물이 쏟아져 들어오고 이것들은 우리나라에 적지 않은 변화를 가져왔고 그 중에 서 도시화가 가장 큰 변화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농업국가여서 서로 돕는 공동체 문화가 잘 발달해 있었다. 농업 뿐 아니라 각종 전통적인 관습만 보더라도 우리나라는 공동체 문화가 매우 발달한 국가였다는 사실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라다크 또한 이러한 공동체 문화가 잘 발달한 국가이다. 하지만 서양문물이 들어오면서 이것들은 파괴되고 변질되었으며 급속한 도시화가 진행되었고 그러한 변화로 인해 여러 가지 사회적 문제가 발생했다. 저자가 처음 본 리틀 티베트로 불리는 라다크는 행복한 나라였다. 물론 이들 이 사는 곳은 매우 척박하고, 해산물과 같은 다양한 먹을거리도 없었고, 특히 외 부 문화와는 거의 단절된 곳이긴 해도 말이다. 하지만 이들은 매일 웃으며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우리가 생각하는 편의 시설 같은 그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없어도 이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힘들어 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것들을 즐기며, 높은 수준의 만족감을 유지하면서 살고 있었다. 이들은 자연의 일부로 삶을 살고 있는 때 묻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마치 옛날 우리 선비처럼 여유 있는 삶을 살고 있었다는 것이다. 어디를 가든, 무엇을 하든 노래와 불경이 끊이질 않았다. 그리고 일을 할 때에도 즐기면서 할 수 있는 양만큼만 하기 때문에 지금 우리들처럼 일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 경우가 없었다. 일하는 것이 즐겁다는 것은 이들 의 전통을 보면 이해가 간다. 스스로 할 수 있는만큼씩 함께 일한 후 먹는 술 한 잔의 행복은 사람 사는 곳이라면 똑 같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라다크 사람들은 척박한 기후조건 속에서도 그들 스스로 잘 해쳐 나가며 오랜 전통을 유지해 왔다. 이들은 자연에서 모든 것을 얻고 반대로 되돌려주는 공생하는 삶을 살고 있었다. 버리는 것도 없었고 자연의 모든 요소는 꼭 필요한 곳에 쓰였다. 이러한 것들은 라다크 문화를 이해하지 못하는 현대식 학교 교육에서는 가르칠 수 없는 부분이다. 그들은 현대식 학교 교육을 받지 않아도 긴밀한 유대관계를 통해서 생존에 필 요한 요소들을 습득해 나간다. 즉, 오랜 경험으로 축적된 전통으로부터 스스로의 생존법을 터득해 나가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언제나 웃음이 끊이질 않았고 정서적으로는 매우 안정적이었다. 이러한 라다크의 모든 것들은 공동체라는 것으로부터 시작되는 것 같다. 공동체라는 것은 사람이 살아가기 위해 필수적인 것이었고, 사람들의 오랜 경험에서 비롯된 것으로 공동체 문화가 얼마나 중요한지 인식시켜주는 부분이다.
III. 개발이 가지고 온 불행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이들은 우리가 겉으로 보기에는 힘든 삶을 살고 있는 것 같지만 정작 그들은 스스로의 삶에 만족하고 있었다. 하지만 자본의 영향이 이들에게도 미치게 되었고, 이것은 우리가 예상한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영향을 미쳤다는데 문제가 발생한다. 아마 이러한 것은 서양의 발전된 문화는 무조건 옳다 는 것의 잘못된 생각에서부터 시작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또한 이러한 자본주의 사회의 영향력은 매우 강해서 순수한 라다크 사람들을 자본주의 사회로 빠르게 편입시켜버렸다. 과연 우리가 처음 생각했던 바와 같이 개발이 이루어지고 서 양 문물이 들어오게 됨에 따라 이들이 행복해 졌을까? 이 책의 결론은 결코 아니 라는 것이다. 서양식 학교 교육은 이들의 생존환경과는 완전히 다른 것들을 가르 쳤다. 즉, 배움이 현실에 직결되지 않는 학교 교육이 들어왔고, 각종 매체와 외국인들의 잦은 방문은 젊은 사람들에게 정체성과 같은 정신적 요소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저자는 이러한 현상을 매우 부정적인 것으로 보았다. 우리의 삶을 살아가는 궁극적 목표는 행복인데, 라다크 사람들은 이러한 것들이 유입되면서 오히려 불행해졌기 때문이다.
여유가 넘쳤던 그들의 삶은 자본이란 것이 들어오면서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객관적으로 따져보면 그들이 ‘쪼’를 이용하여 밭을 가는 것 보다 트렉터와 같은 기계를 이용하면 더 빨리 갈 수 있다. 요리를 하는 것도 전기를 이용하면 훨씬 쉽고 간단하게 할 수 있다. 안락한 의자에 앉아서 TV로 전 세계가 돌아가는 것을 볼 수 있고, 부탁할 일이 있는 경우에도 전화를 사용하면 되기 때문에 한나절씩 먼 길을 걸어갈 필요도 없게 되었다. 분명 자본의 유입으로 발전의 혜택인 이것들 은 이들에게 더 많은 여유를 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혜택을 받은 사람들이 더 여유가 없다고 하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여유는 곧 낭비라는 것이 라다크에도 적용된 것이다. 자본가는 더 많은 이윤을 창출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 노동시간이라고 하는 것은 필요노동시간과 잉여노동시간으로 구분되어 있는데 자본가는 노동자의 필요노동시간을 줄이고 잉여노동시간을 늘려서 더 많은 이익을 창출하려 한다. 이것은 자본주의 사회가 유지되는 필수요소이기 때문에 라다크에서도 똑같이 적용된 것이다. 더 많은 일을 시켜 더 많은 이윤을 창출하기 위한 노력에서 이들의 행복했던 삶은 파괴되어 갔다. 과거에 그들은 이러한 자본이 없어도 행복했었는데 말이다. 또한 이들 전통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현대식 학교 교육은 젊은 세대와 그들 고유의 전통을 단절시켜버렸다.
현대식 학교 교육이 어느 나라에서나 똑같이 적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극명하게 드러난 부분이다. 획일화된 학교 교육을 받는 사람들은 그들 지역의 전통 문화에 맞추어서 살기란 사실상 매우 어렵다. 학교 교육은 라다크 사람들을 다른 것들을 할 수 없는 도시 노동자로 전락시켜버리는 역효과를 가져왔다. 우리가 제3국가의 걸 모습만 보고 불행하다고 생각한 것과 같이 이들은 서구 선진국의 화려한 문화의 | 단면만 보고 있는 셈이다. 이것 역시 무지와 편견에서 나타나는 결과라 생각한다.
도시 노동자로 전락한 사람들은 곧 불행해졌다. 자본주의 사회는 구성원 모두를 만족시켜줄 수 없다는 특징이 있다. 이 책에서도 그렇듯이 극소수만이 자본주의의 혜택을 보았고, 나머지 구성원들은 원래의 삶의 수준보다 더 떨어지거나 불행해졌다고 했다. 이전보다 더 불행해졌는데 과연 이것이 발전이라고 할 수 있는가라는 의문이 든다. 너그럽고 온순한 사람들은 점점 불안정한 상태가 되었고 가속화되는 지역 개발로 인해 정체성의 혼란을 겪어야 했다. 가장 문제는 라다크 사람들은 이러한 개발로 인해 자신들의 문화를 부끄럽게 생각하게 된 것이다. 문화란 어느 것이 우수하다고 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라다크 사람들은 단지 서양의 화려한 문화에 눌려서 그들의 문화를 부끄럽게 생각하게 됐다. 공동체 생활을 기피하게 되었고 농업보다는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도시로 갔다. 또한 정부의 관광객 유치 차원에서의 개방정책은 라다크 사람들의 정체성을 뿌리째 흔들어 놓았다. 자급자족을 하던 그들에게 빈곤층이란 없었다. ‘우리는 함께 살잖아 요.”라는 말처럼 말이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로 변모하면서 빈곤계층이 발생했으며, 인구과잉 현상도 겪게 되었다. 이러한 상대적 빈곤과 절대적 빈곤이 곁들어져서 라다크 사람들의 마음을 황폐하게 만들어버렸다.
우리가 돕는 대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도우려 한다면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올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라다크에도 개발은 필요 하다. 하지만 무분별하고 무차별적인 개발은 결코 아니어야 한다. 그들의 전통문화를 파괴하는 개발은 제대로 된 개발이 아니며 그것은 발전이라고 할 수 없다.
IV. 라다크로부터 배우다.
라다크를 통해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되었다. 먼저 내가 보는 것이 전체가 아닌 단면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시각의 차이는 해와 달처럼 매우 클 수 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나 내가 옳다는 것이 ‘진짜 좋은 것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라다크의 경우에는 개발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들 전통을 훼손하지 않은 것이 개발의 핵심이 되어야 한다. 여기서 ‘라다크 프로젝트’와 같은 것이 라다크에 도움이 되는 개발이라고 본다. 자본에 기초하지 않고 살았던 그들 은 자본이 매우 부족하다. 그러한 사회에 자본주의가 들어오면 이들은 더 빈곤해 질 수 밖에 없고, 그것을 벗어나기 위해 그들 스스로의 여유를 버릴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해서 빈곤을 벗어나기란 매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익히 알고 있듯이 서구 선진국들도 빈곤에 시달리며 불행하게 사는 극빈층들이 매우 많다. 아무리 거대한 자본이 들어와서 개발을 한다 한들 돈이 없다면 이것들을 이용할 수 없고 상대적 빈곤감과 더불어 절대적 빈곤도 커지기 마련이다. 책 앞부분에 ‘세계화 위 에 지역화’라는 말이 있다. 세계화의 본질은 좋은 것이다. 우리가 하려고 하는 FTA역시 본질은 좋은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세계화위에 각 지역에 맞는 지역화도 함께 진행해야 한다. 세계는 다양하기 때문에 그 다양성을 고려해야 할 필요가 있다. 라다크에서 발생한 일련의 사회적 문제는 다양성을 고려하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라다크 사람들 중 일부는 올바른 교육을 통해서 그들 자신 문화의 우수성을 알게 되었고, 지금은 활발하게 라다크 전통을 보존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라다크로부터 우리도 배울 점이 무엇인지 짚어보면 다음과 같다. 우리나라도 무분별한 문화개방으로 피해를 입은 국가이다. 한글 및 국어 파괴는 이미 수년 전부터 문제가 되어 오고 있고, 심각한 핵가족화로 노인들은 일자리를 잃었으며 갈 곳도 없어졌다. 우리나라 전통차보다 해외에서 수입한 커피를 더 많이 마 시고, 미국 슬럼가의 유행이 우리나라 젊은 층의 주류 문화로 떠오르는 것을 보면 이러한 것이 과연 발전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인가 라는 의문이 든다. 과연 개발이 이러한 전통문화보다 더 우선이 되어야 할지 그것도 의문이다. ‘오래된 미래’에 비추어 보게 되면 이것은 잘못된 것이며, 객관적으로 봐도 절대 발전이라고 볼 수 없다. 앞서 말했듯이 ‘세계화 위에 지역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획일화된 문화로 갈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기후도 다르고, 지형도 다르고, 인종 도 다른데 어떻게 획일화된 문화를 가질 수 있는 것인가?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더 많은 문화적 충격 및 전통적 문제 같은 심각한 정체성 문제가 발생할 것이라고 본다. 서구 선진국들은 여러 가지 그들의 사회 문제를 접하면서 다시 과거로 돌아가려고 노력한다. 유전자 변형 농산물 보다는 유기농 농산물을 선호하고, 핵가족보다는 어른들과 함께 하는 가족 체계가 더 좋다는 것이 확산되어가고 있는 추세다. 또한 아이들을 다루는데 있어서 더 많은 접촉이 중요하다는 사실도 배워가고 있다. 하지만 제3세계 국가들은 그것을 잘 모른다. 여전히 자신들의 문화나 전통이 서구에 비해 열세하다고 본다. 서구 선진국에서 인체에 해로워서 쓰지도 않는 화학비료나 살충제를 마구 쓰면서 좋다고 여긴다. 공동체 보다는 개인주의가 더 좋다고 생각하고, 서구 선진국의 문화가 우수하여 자신들도 그러한 문화를 부지런히 따라가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그 모든 행동에서 돌아오는 것은 행복과 만족감이 아니라 완전 그 반대라는 것이다. 라다크를 예를 들어 ‘오래된 미래’라는 것은 그 들은 이미 서구 선진국이 동경 할 만 한 멋진 미래를 이미 가지고 있는 셈이다. 오랜 전통에 의한 미래는 다양성이 보존되고, 오히려 더 지속가능한 개발이 가능 하며, 더 행복한 삶을 유지하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것들을 이 책 ‘오래된 미래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입상 박*복 문헌정보학과 도서:군주론
독후감:시대를 잘못만난 정치이론가, 니콜로 마키아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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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부터 한번 읽어보고 싶었던 책, 군주론
선정도서 중에 책을 고를 때 많은 고민이 됐었다. 솔직히 처음에는 이전에 이 미 읽었던 책을 골라서 글을 좀 편하게 써보고자 하는 마음에 그런 책들 중에서 하나를 고르던 중이었는데, 그러던 와중에 문득 내 눈에 들어온 하나의 책이 있었는데, 그 책의 이름은 마키아벨리가 쓴 [군주론이었다. 사실, 이전부터 마키아벨리라는 사람과 [군주론]이라는 책에 대해서는 이미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고등학교 때 선택과목으로 세계사를 배울 때도 들은 적이 있었고, 사람들과 정치에 관한 얘기를 할 때 심심찮게 등장하던 용어가 ‘마키아벨 리즘’이었고 심지어 중·고등학교 시절에 굉장히 즐겨 했던 창세기 전)이라는 롤 플레잉 게임에서도 그의 이름과 그의 사상을 봤을 정도였다. 니콜로 마키아벨리(1469~1527)는 르네상스 시대의 역사학자이며 정치 이론가로 서 1513년에 [군주론을 써 내었다. 사실 이 [군주론]의 저술 목적은 그 당시 마키아벨리가 살았던 피렌체 공화국의 통치자였던 로렌초 데 메디치의 환심을 사기 위함이었다. 오늘날 몇몇 사람이 [군주론]은 군주에게 아첨하여 한자리 얻어 보고자 하는 책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을 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군주론에서 마키아벨리는 군주(왕)는 종교와 도덕을 떠나서 강한 힘으로 정치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군주론]은 근대 정치사상의 기원이라고 생각되어 왔으며, 유럽의 수많은 왕들에게 새로운 정치학 교과서로 읽혀졌다.
책하고는 관련이 없는 얘기지만, 내가 [군주론을 읽어보기로 마음먹은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나는 이전에 동아리에서 회장직을 6개월 정도 맡아서 했었고, 그 이후에 학과 학생회장직을 약 1년간 맡았었다. 그 당시에 난 한번 열심히 잘해보고자 하는 욕심에 리더십에 대한 책을 참 많이도 읽었었다. 솔직히 오늘날의 민 주주의 사회에서의 리더와 옛날의 군주국을 다스리는 군주와 비교하는 것도 웃기 는 얘기지만, 어쨌든 그 시절에 대한 추억이 나의 눈길을 [군주론]에 가게 만들었 던 하나의 이유가 되었다. 사자의 힘과 여우의 교활함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총 26장으로 나누어져 있다. 1장부터 11장까지는 시민형 군주국, 교회형 군주국, 세습 군주국 등 군주국의 종류와 그 특징들을 다루었고, 12장부터 14장 까지는 군대의 종류와 용병술에 대해서, 15장부터 25장까지는 각기 다른 개별적인 상황에서 군주가 처신해야 하는 방법 등을 다루었고 마지 | 막 26장에는 이탈리아가 강한 국가가 되기를 희망하는 그의 염원이 담겨있었다.
내가 생각하는 [군주론]의 하이라이트는 바로 18장의 내용이다. 마키아벨리는 18장에서 군주는 사자의 힘과 여우의 교활함을 가져야 한다고 가르쳤다. 사자는 함정에 빠지기 쉽고 여우는 늑대를 물리칠 수 없기 때문에 함정을 알아차리기 위 | 해서는 여우가 되어야 하고 늑대를 혼내주려면 사자가 되어야 하듯이 군주는 가끔 필요하다면 교활함에 의존해야 하고 악행도 저지를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전체적인 [군주론]에서 다루는 이상적인 군주의 모습은 이탈리아를 통일 시킬 수 있는 강력한 군주였다. 마키아벨리는 이탈리아에 로마의 유명한 정치가였던 카이사르와 같은 영웅이 나타나기를 바랐지만 실제로 그의 [군주론이 제시하는 군주에 가까운 왕은 서양사에 정통한 그는 절대 알리가 없는 동양의 역사에서 찾을 수 있다. 예를 들어, 만리장성의 축성으로 유명한 중국 고대의 진시황은 강한 법률과 군대를 바탕으로 전란을 다스리고 중국에 첫 통일 국가를 구축하였다. 마키아벨리는 자신이 공부한 역사에 근거하여 [군주론을 저술하였다. 그는 이 전의 군주들이 행한 행동을 잘된 것과 잘못된 점을 지적하면서 위대한 인물들의 행위에 대한 지식만큼 소중하고 가치가 있는 것은 없으며 인간은 거의 항상 선인들의 행적을 따르며, 모방을 통해서 행동한다고 주장하였다. 나는 이 부분에 상당히 공감을 하는 데, 평소에도 ‘역사’는 인류의 재산이고 앞으로의 미래를 밝혀 주는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군주론에 대한 나의 반박
[군주론]을 읽으면서 상당 부분 공감을 하였지만, 사실 그에 못지않게 공감이 안가는 부분도 있었는데, 그가 주장하는 것에 모순되는 역사적 사례가(특히 동양 의 역사에) 상당히 많았다. 아마 [군주론]의 바탕이 되었던 그의 역사 이론이 서 양의 역사에 국한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제 10장을 보면 시민들이 군주를 방어하기 위해서 자기들의 집이 불타고 재산
이 약탈되었고, 그 결과 군주가 자기들에게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한데 뭉쳐 더욱더 군주와 혼연일체가 된다고 서술되어 있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그 반대의 경우가 예상된다. 상식적으로 봐도 자기들의 집이 불타고 재산이 약탈 되면 자기들을 제대로 지켜주지 못한 국가나 군주에 대한 분노감 때문이라도 충성심은 반감되기 마련이다. 조선의 역사를 살펴보아도 1592년 임진왜란 당시 궁궐이나 주요 국가 건물들이 적군인 왜군보다 오히려 무능한 왕과 정부에 분노한 평민들에 의해 불타 없어진 경우가 더 많았던 사례를 보더라도 마키아벨리의 저 주장은 공감하기가 어려운 부분이다. 제 17장에서는 현명한 잔인함이 진정한 자비이고, 사랑을 느끼게 하는 것보다는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것이 더 안전하다고 서술되어 있다. 또한 잔인함을 지니면 서 자신을 두려운 존재로 만들되, 비록 사랑을 받지는 못하더라도, 미움을 피해야 한다고 했다. 물론 마키아벨리는 한니발과 스키피오라는 두 유명한 장군의 적절한 사례를 들어 설명했지만 동양의 중국의 역사에서 초나라의 항우와 한나라의 유방의 패권 다툼의 사례를 보면 얘기가 또 달라진다. 유방군은 항우군에 비해 병사의 수도 적고, 대부분의 전투도 항우가 승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마음이 잔인했던 항우보다 덕이 많았던 유방에게 기울어졌기 때문에 결국 유방의 승리로 끝나고 말았다. 또 하나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은 마키아벨리가 언급했던 카르타고의 한니발과 로마의 스키피오이다. 그는 한니발을 잘된 예로, 스키피오를 잘못된 예로 설명을 하였지만 실제 역사 속에서 한니발과 스키피오가 대결한 2차 포에니 전쟁의 자 마 레기아의 대전투에서의 승자는 한니발이 아닌 스키피오였고, 전쟁은 카르타고 의 항복으로 마무리되었다.
마지막으로 제 21장을 보면, 위대한 업적에 의해서 명성을 얻은 스페인의 페르난도 왕은 항상 거창한 일들을 계획하고 성취했는데, 이로 인해서 그의 신민들은 항상 사태의 귀추를 주목하면서 긴장과 경이감에 사로잡혀 있었고, 그의 이러한 행동은 쉴 새 없이 계속되었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그에게 반란을 시도할 만한 시간적 여유조차 가질 수 없었다고 시술되어 있다. 마기아벨리는 페르난도 윙이 진 쟁에 전념하게 하여 그의 신하들이 어떠한 반란도 모의할 수 없게 만들었다고 되어 있지만 그에 대한 나의 생각은 좀 다르다. 거듭된 전쟁은 나라를 피폐하게 하 고, 신하들의 불만을 가져다 줄 수 있다고 본다. 실제로 중국 고대의 수나라가 멸망한 가장 큰 이유는 수나라 황제 양제의 거듭된 고구려 원정으로 인해 나라 재정이 바닥에 이르고, 백성들의 삶이 피폐해지면서 여기저기서 반란이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앞서 언급한 나의 학생회장 시절의 경험을 떠올려 볼 때 [군주론]에 대한 내 나름의 결론을 내린다면, 모름지기 군주란 그 시대의 상황에 맞게 처신하고 국가를 다스려야 한다는 점이다. 동아리에서는 그 동아리의 특성에 맞게 처신하고, 학과 에서는 그 학과의 특성에 맞게 처신했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의 기준에 따라 항상 일관적인 자세를 유지했기 때문에 어려움을 많이 겪었던 기억이 난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에 담겨진 군주의 모습이 모든 인류 역사를 통틀어 군주의 이상적인 모습이라고 하기는 어렵겠지만 적어도 그가 살았던 중세 이탈리아, 크고, 작은 도시 국가로 나뉘어져 번번이 프랑스, 스페인 등의 강대국의 침략을 허용했던 그 시절의 이탈리아에는 어쩌면 앞서 언급한 진시황처럼 마키아벨리가 제시하 였던 강한 힘으로 정치를 하는 군주가 가장 이상적인 군주의 모습이었을지도 모른다.
시대를 잘못만난 마키아벨리, 만약 그가 다른 시대에 태어났다면?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을 저술하여 로렌초 데 메디치에게 바침으로써 공직생활에 복귀하고자 하였으나, 불행하게도 정작 로렌초 데 메디치는 그 책을 들춰보지 도 않았다. 메디치 가문의 인정을 받아 공직에 복귀하려던 마키아벨리의 뜻은 끝내 좌절되었다. 그리고 그는 결국 그가 원하는 이탈리아의 모습을 보지 못한 채 1527년에 실의에 빠져 죽고 말았다.
그의 사후에도 그는 오랫동안 역사 속에서 그의 위대한 이름을 주목받지 못하였다. 그의 무덤은 어디인지도 잊혀져버렸고, 그의 생전에도 빛을 보지 못했던 [군주론], [로마사논고] 등의 그의 저서들은 심지어 그가 죽은 뒤에도 교황청에 금서목록에 등재될 정도였다. 그의 업적이 재조명되고 그에 대한 새로운 평가가 나타나기 시작한 때는 18세기 이후부터로, 장 자크 루소와 새뮤얼 애덤스는 마키 아벨리의 사상을 참고하여 자신의 정치사상을 엮어냈고, 이는 각각 프랑스대혁명 과 미국 독립혁명에 영향을 주었다. 자신보다 피렌체 공화국을 더 사랑했던 마키아벨리가 그토록 바라던 이탈리아 의 강력한 통일국가의 탄생은 그가 죽고 343년이나 흐른 뒤인 1870년 이루어졌다. 이탈리아의 통일을 이야기하는 데 반드시 등장하는 4명의 영웅들이 있다. 통일 운동의 정신적 지도자이며 사상가였던 주세페 마치니, 게릴라를 이끄는 장군으로 평생을 혁명과 통일에 바친 주세페 가리발디, 역사상 최초의 통일 이탈리아 왕국 의 첫 군주였던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마지막으로 탁월한 외교가였던 카미요 벤소 카보우르가 그들이다. 만일 니콜로 마키아벨리가 이탈리아가 도시국가로 분 열되어 외세의 각축장이 되었던 르네상스 시대의 피렌체 공화국이 아닌 이탈리아 통일 운동, 즉 리소르지멘토4) 운동 시대에 이탈리아 통일의 중심이었던 사르데냐 왕국에 태어났다면 그의 생애는 어떠하였을까? 아마 훗날 역사에서 이탈리아의 통일을 얘기할 때 4명의 영웅이 아닌 5명의 영웅을 얘기했을지도 모른다. 위의 4 명의 인물에다가 ‘에마누엘레 2세를 보필한 뛰어난 정치가, 니콜로 마키아벨리’ 라고 추가되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이왕 만일이라며 가정을 한 김에 난 한 가지 질문을 더 해보고 싶다. 요즘 한 창 ‘뿌리 깊은 나무’라는 드라마가 한창 인기리에 방영중이다. 드라마 초기에 태종 이방원과 그의 아들 세종 이도의 갈등을 재미있게 재현했는데, 태종 이방원은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에서 제시하는 군주에 가까운 군주였고 세종 이도는 그와 정반대의 군주이다. 지금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은 ‘만일’ 한 나라를 다스리는 왕, 즉 군주가 된다면 어떤 군주가 되고 싶은가? 굳이 태종과 세종이 아니더라도 여러분의 이상적인 군주가 따로 존재한다면 과연 무엇이라고 대답을 하겠는가?
입상 민*선 문헌정보학과 도서:멋진 신세계
독후감: 멋진 신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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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신세계. 이 책은 맹목적인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초래될 암울한 미래를 그려 낸 올더스 헉슬리의 디스토피아 소설이다. 디스토피아 소설이란 현대 사회의 부정 적인 측면이 극단적으로 묘사되어 인류의 미래상을 암울하고 비극적으로 그려낸 것으로 정의할 수 있다. 올더스 헉슬리는 어둡고 비참한 미래 세계에 대한 내용에 ‘멋진 신세계’라는 조금은 모순적인 제목을 붙여 부정적인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더 극대화시키고 있다. 나는 책을 읽으면서 수업시간에 들었던 “인문학의 위기”가 떠올랐다. 이 책은 과학기술로 인한 인간성의 상실을 그려낸 소설로 너무나 유명한 작품이지만, 최근 몇 년간 인문학의 위기가 세계적으로 회자되고 있는 상황에서 더욱 주목할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자가 이 소설에서 보여주고 있는 세계는 현대 사회의 과학 지상주의로 인한 인문학의 위기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인문학의 위기란 맹목적인 과학지상주의와 실용주의적 경향으로 인해 인문학적인 가치가 쇠퇴 하고 있는 것을 말한다. 사실 인문학은 인류의 역사와 항상 함께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최근 우리 사회에서는 실용성만을 추구하고 과학만능주의에 빠져 인간의 삶, 문화와 직결되는 인문학적 가치를 경시하고 있다. 이는 멋진 신 세계 속의 문명사회에서 맹목적인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인간적인 가치들이 소멸되어 버린 상황과 다를 바가 없는 것 같다. 올더스 헉슬리는 이 현실비판적인 소설을 통해 오늘날 현대 사회에 경고의 메시지를 던진다.
올더스 헉슬리가 구상한 미래의 세계는 과학기술의 놀라운 발전 아래, 모든 사람들의 행복하고 안정된 삶이 보장된 그야말로 ‘멋진 신세계다. 이 세계는 헨리 포드가 T형 자동차 모델을 개발한 해를 기원으로 하여 포드 기원 632년을 배경으 로 하고 있다. 우리 날짜로 봤을 때 2540년 쯤 되는 셈이다. 이 시대에서 인간은 어머니의 자궁이 아닌, 중앙 인공 부화국의 병 속에서 마치 부화기속의 알이 깨어 나듯 인공적으로 생산된다. 병 속의 태아 상태에서부터 계급은 알파, 베타, 감마, 델타, 엡실론의 다섯 가지 계층으로 나누어지며 각 계급 간의 육체적, 정신적 차이는 과학적인 행동 조절에 의해서 인공적으로 조작된다.
이렇게 태어날 때부터 계급이 정해지고 정신적으로 조작된 사람들은 찬란한 과학기술의 혜택을 누리면서 안정되고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다. 이 문명화된 사회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행복하다. 사회 체제에 반항심을 일으키거나 사회의 불안 정을 조성할 수 있는 불안, 공포, 슬픔 등의 감정들은 ‘소마’라는 약물을 복용함으로써 철저히 통제 된다. 여기에서 ‘소마’ 라는 장치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소마’는 환각증상을 일으키는 약물로서 불안과 고통, 공포 등의 인간이 느끼는 부정적인 감정들을 없애주며 완벽한 쾌락을 맛볼 수 있게 해준다. 물론 이 약물은 인간의 불행과 고통을 제거해준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존재로 여겨질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쾌락과 행복에 의존하여 사회체제에 복종하고 조종당하게 하는 일종의 체 제 안정을 위한 도구라고 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인간이 느낄 수 있는 모든 불편함은 ‘소마’를 통해 해결하면 되므로 사람들은 고뇌와 번민을 모르고 오로지 쾌락만을 추구하는 기계적 생물체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세계의 사람들은 병에서 태어나 ‘어머니’나 ‘가족’의 존재를 모른다. 이 사회에서는 ‘어머니’라는 단어는 듣는 것만으로도 거북할 정도로 저급한 단어로 취급된다. 물론 어머니의 사랑 같은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다. 또한 나이가 들어도 추하게 늙지 않으며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없다. 사실 표면적으로만 보았을 때 소설 속 사회는 정말이지 ‘멋진’ 신세계처럼 보인 다. 하층 계급은 주어진 노동을 성실히 이행하고 그것을 당연시 여기며 조금의 불 만도 가질 수 없도록 행동조절을 받고 상류 계급은 그에 걸맞게 매우 자유롭고 이성적이며 쾌락적인 삶을 살아간다. 이렇게 철저히 통제되고 조작된 계급사회에 서 인간들은 주어진 환경에 만족하고 적응하여, 행복하고 안정적인 삶을 보장받는다. 인간적인 감정을 느낄 수 없고 가족의 존재와 사랑을 부정하지만 그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그런 것들은 있으나마나한 것이므로 크게 문제될 일은 아니다. 이렇게만 보면 분명히 ‘멋진 신세계’라는 것이 확실해 보인다. 하지만 그렇게 살아가 는 삶이 정말 멋진 삶인지는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이렇게 평화롭고 발전된 사회에서 궁극적으로 추구하고자 하는 가치는 무엇일 까. 매우 진보된 과학기술을 통해 이룩하게 된 이 문명사회의 본질적인 목표는 행 복과 안정이다. 하지만 나는 과학기술로써 조작되고 통제된 행복과 안정을 바탕으 로 한 이 사회가 과연 진정으로 행복한 사회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들었다. 인류는 과학기술로 인해 행복하고 안정된 삶과 눈부시게 발전된 문명사회를 얻었지만 너무나 중요한 인간적 가치를 잃게 된다. 고도로 문명화된 이 사회에서 윤리적 가치, 사랑과 슬픔 같은 인간적인 감정들은 사회에서 용인될 수 없는 반사회적이고 비효율적인 가치일 뿐인 것이다. 인간은 병에서 태어나 철 저하게 통제된 수면교육을 통해서 인간성과 개성이 말살되고 인간적 감정을 느낄 | 수 없도록 기계화되어 버린다. 이렇게 생산된 인간들은 획일화된 생각을 가지고
행동하며 인간적인 감정은 느낄 수도 없고 그럴 필요마저 인식하지 못하는 채로 살아간다. 이런 인간은 기계와 다를 바가 없지 않을까. ‘소마’를 통한 일시적이고 조작된 쾌락, 사랑이라는 감정이 없는 성관계, 어머니라는 존재의 부정… 이런 비인간적인 요소들 속에서 얻게 되는 안정된 삶이 과연 행복한가. 인간을 더 이상 인간이라고 볼 수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이것을 행복한 삶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나는 책을 읽는 내내 이런 비인간적이고 끔찍한 사회가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소설 속 내용을 좀 더 살펴보면, 야만인 보호구역에서 문명사회로 오게 된 존이 라는 야만인 청년이 겪게 되는 일들은 이러한 미래가 얼마나 암울한 것인지 여과 없이 보여준다. 존이 살고 있던 야만인 보호구역의 앨페이스는 문명의 손길이 닿 지 않았던 원시적인 사회이다. 말하자면 신세계가 아닌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지 금의 사회와 같다고 볼 수 있다. 이 원시 사회는 종교적인 신의 존재를 긍정하고 인간적인 가치를 중요시하며, 영혼의 존재와 인간의 격정적인 감정들을 인정하는 사회이다. 여기서 태어나고 자라난 존은 예술적이고 인간적인 감성을 지니고 있지 만 존이 가지고 있는 이러한 원시적인 가치는 멋진 신세계에서 추구하는 효율적인 가치와는 극명하게 대비된다. 그러한 가치의 충돌은 제 18장의 존과 문명세계의 통치자인 무스타파 몬드의 직접적인 논쟁에서 잘 드러나고 있었다.
“하지만 저는 불편한 것을 좋아합니다.” “우리는 좋아하지 않습니다. 일을 편하게 하는 것을 더 좋아하지요.” “저는 신을 원합니다. 편안한 것은 원하지 않습니다. 저는 시와 현실적 인 위험과 자유를 원하고, 선과 죄악을 원합니다.” “알 수 없군요. 왜 불행해지는 권리만 원하는지.”
이 부분을 읽으면서 존이 신과 현실의 위험과 자유 그리고 선과 죄악을 원하는 것에서 그가 인간적인 가치들을 얼마나 중시하는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무스타과 본드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며 불행해지는 권리로 치부해 버린다. 문명사회에서 그러한 가치들은 용인될 수 없는 사회의 장애물일 뿐인 것이다. 또한 종교적인
문제에 대해서 무스타파 몬드는 종교적인 감정은 남아돌아가는 불필요한 것에 지 나지 않는다고 여긴다. 그리고 ‘소마’를 통해 청춘의 욕망이 결코 사라지지 않고 그로 인해 사회 질서가 안정되어 있으므로 신의 존재는 필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결국 현실적이고 인간적인 감정, 선과 죄악, 신의 존재와 같은 가치들은 발달한 과학과 물질문명사회에서는 결코 인정될 수 없는 쓸모없는 것일 뿐이다. 존은 이러한 문화적인 가치의 충돌을 견디지 못하고 죽음을 택하게 된다. 존의 죽음 또한 나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극단적인 도피인 죽음 을 택하는 존을 내세우면서 저자는 마치 사회 환경에 예속되어 개성이 소멸되고 인간성이 말살된 개인은 삶의 본질적인 이유가 사라지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결국 과학기술의 발전과 진보주의로의 맹목적인 추종은 우리 스스로 파멸하는 길인 것이다.
올더스 헉슬리가 이 소설을 쓴 지 80여 년이 지난 지금, 그가 구상한 멋진 신세 계는 현재 우리가 누리는 것들이거나 머지않아 곧 우리 눈앞에 펼쳐질 세계가 될 것들이다. 사실 내가 책을 읽는 내내 불편한 감정이 들었던 것도 소설의 배경이 매우 현실적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책을 읽으면서 왠지 미래의 우리 사 회의 모습이 소설 속 세계와 닮아 있을 것만 같은 생각에 두려움과 공포심마저 느꼈다. 지금과 같이 과학만능주의, 물질만능주의가 팽배한 상황에서 우리의 미래 는 충분히 멋진 신세계’의 그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사실 저자가 이렇게 암울하고 부정적인 미래를 이야기 한 것은 인류의 미래가 절망적인 어둠뿐이라는 것을 말하고자 한 것 이상으로, 현대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깨 닫게 하는 경고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과학기술과 물질문명의 발전은 인류에게 많은 이로움을 주었다는 것은 반박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편리하고 안정적인 삶, 경제적인 부를 얻은 대신 우리가 잃어가고 있는 소중한 가치가 분명히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라고 생각 한다. 과학기술의 발전과 더불어서 인간적인 가치들은 조금씩 경시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더불어 인간적 가치들을 중시하다보면 과학기술의 발전에 장애가 생기 는 것도 당연하다. 이 과제는 우리를 딜레마에 빠지게 한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 한 사실은 고도의 과학기술발전과 함께 인간성의 회복과 인문학적 가치의 회복은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또한 그런 인간성과 가치의 회복은 개인의 자유와 사고를 존중하고 생명을 경시하지 않으며, 무조건적인 쾌락주의를 지양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또한 책에서 살펴보면 인간적인 가치의 중요한 잣대로 종교적 인 존재와 셰익스피어의 책들로 대변되는 예술적 감성, 그리고 사랑과 고뇌 등의 감정을 말하고 있다. 이러한 가치들을 회복해야만 인간성이 상실되어가는 현대 사 회에 조화로운 질서를 잡아줄 수 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더불어 저자가 이 소설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단지 과학기술의 맹목적인 발전으로 인해 인간적 가치가 말살되는 것에 대한 경고에 그치지 않는 것 같다. 이보다 조금 더 나아가, 그 진보된 과학기술이 개개인의 인간성을 소멸시킴으로써, 바로 거대한 지배 체제의 안정을 위한 하나의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것도 저자가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니었을까. 이러한 문제도 생각해 볼 문제인 것 같다.
나는 소설 속의 문명인 레니나가 ‘진보는 아름다운 것이다’라고 외쳤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이 구절을 읽으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물론 진보는 우리 인간을 편리하고 행복하게 해줄 수 있다는 점에서 아름답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무조건적인 진보는 결코 아름답지 않은 것 같다. 인간적이고 가치 있는 삶의 요소 들을 무시한 맹목적인 발전으로의 길은 결국 인류가 스스로 파멸하는 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나 또한 과학기술의 편리함에 안일해져 이러 한 심각한 문제들을 지나치게 경시하고 있었다. 맹목적인 발전을 당연시 여겼고, 인간적인 가치가 경시되고 있는 문제들도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 책을 읽으면서 정말 많은 것을 느꼈다. 인류의 미래가 ‘디스토피아’가 아닌 진정한 멋진 신세계, ‘유토피아’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는 끊임없이 고민하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오랜 만에 많은 것을 느끼게 해준 인상 깊었던 책이었다.
입상 박*린 문헌정보학과 도서: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
독후감: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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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문화가 보편적인 것이 되어버린 시대에 사람들은 ‘아프리카’라는 단어 자체에서부터 신선함을 느끼는 것 같다. 새로운 관심거리가 된 아프리카 문화는 각종 산업들의 모티브가 되기도 하고, 그것에 만족하지 못한 사람들은 영화나 다큐멘터리, 여행을 통해서 자신이 직접 진짜 아프리카를 느껴보고자 한다. 개인적으로 아프리카에 특별한 관심이 있던 것은 아니다. 어쩌면 유행처럼 보이기도 하는 흐름에 휩쓸려서 몇 해 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카메룬의 사랑’이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다. 외국인이 들여다보는 아프리카가 아닌, 카메룬 감독과 배우들이 아프리카를 배경으로 그들의 언어로 찍은 영화였다. 그들이 직접 보여주는 생생한 아프리카를 즐기면서 ‘진짜’ 만이 가질 수 있는 매력을 느꼈다. 다문화를 주제로 한 수업에서 우연히 접한 이 소설은 그 즐거움을 다시 한 번 느끼게 해줬 다. 치누아 아체베의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Things Fall Apart)’는 아프리카 문학의 고전으로서, 그들의 문화를 이미 보여주고 있었다. 이 소설은 주인공인 오콩코를 중심으로, 19세기 말 아프리카, 우무오피아 마을 의 전통적인 생활방식과 서구세력이 침입하면서 몰락해가는 원주민 사회를 있는 그대로 묘사한다. 서구적 관점이 아니라 당사자들의 관점에서 아프리카의 전환기 를 보여주는데, 영어로 쓰였고 보편적인 소설 구조를 띠는 덕분에 지역적 한계를 뛰어넘는 영향력을 가진다. 또한, 이 소설의 배경과 등장인물은 치누아 아체베의 후속 소설들로 이어지기 때문에 단순히 그 시대만을 묘사한 작품이 아니라, 역 사적 흐름을 보여주는 시리즈물의 시작이라는 의미도 있다.
소설은 3부로 이루어져 있는데,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1부에서는 마을에서 부와 명예를 가진 오콩코를 중심으로 우무오피아 마을 사람들의 생활상과 가치관 을 보여준다. 오콩코는 공격적이며 권위적인 사람으로 묘사되는데, 그는 영원히 굳건하리라고 믿었던 전통문화의 상징이다. 하지만 2부에서 그는 우연한 실수로 칠 년 동안 다른 마을로 추방되었다가 돌아오게 된다. 오콩코와 그의 가족들은 친서구문화가 보편적인 것이 되어버린 시대에 사람들은 ‘아프리카’라는 단어 자체에서부터 신선함을 느끼는 것 같다. 새로운 관심거리가 된 아프리카 문화는 각종 산업들의 모티브가 되기도 하고, 그것에 만족하지 못한 사람들은 영화나 다큐멘터리, 여행을 통해서 자신이 직접 진짜 아프리카를 느껴보고자 한다. 개인적으로 아프리카에 특별한 관심이 있던 것은 아니다. 어쩌면 유행처럼 보이기도 하는 흐름에 휩쓸려서 몇 해 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카메룬의 사랑’ 이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다. 외국인이 들여다보는 아프리카가 아닌, 카메룬 감독과 배우들이 아프리카를 배경으로 그들의 언어로 찍은 영화였다. 그들이 직접 보여주는 생생한 아프리카를 즐기면서 ‘진짜’ 만이 가질 수 있는 매력을 느꼈다. 다문화를 주제로 한 수업에서 우연히 접한 이 소설은 그 즐거움을 다시 한 번 느끼게 해줬다. 치누아 아체베의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Things Fall Apart)’는 아프리카 문학의 고전으로서, 그들의 문화를 이미 보여주고 있었다. 이 소설은 주인공인 오콩코를 중심으로, 19세기 말 아프리카, 우무오피아 마을 의 전통적인 생활방식과 서구세력이 침입하면서 몰락해가는 원주민 사회를 있는 그대로 묘사한다. 서구적 관점이 아니라 당사자들의 관점에서 아프리카의 전환기를 보여주는데, 영어로 쓰였고 보편적인 소설 구조를 띠는 덕분에 지역적 한계를 뛰어넘는 영향력을 가진다. 또한, 이 소설의 배경과 등장인물은 치누아 아체베의 후속 소설들로 이어지기 때문에 단순히 그 시대만을 묘사한 작품이 아니라, 역사적 흐름을 보여주는 시리즈물의 시작이라는 의미도 있다. 소설은 3부로 이루어져 있는데,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1부에서는 마을에서 부와 명예를 가진 오콩코를 중심으로 우무오피아 마을 사람들의 생활상과 가치관을 보여준다. 오콩코는 공격적이며 권위적인 사람으로 묘사되는데, 그는 영원히 굳건하리라고 믿었던 전통문화의 상징이다. 하지만 2부에서 그는 우연한 실수로 칠 년 동안 다른 마을로 추방되었다가 돌아오게 된다. 오콩코와 그의 가족들은 친척들과 절친한 친구의 도움을 받아 평화롭게 지내다 돌아가는데, 그가 돌아갈 무 렵에 ‘아마베’라는 마을에 백인이 나타나고 그 마을이 폐허가 되는 사건이 일어난 다. 원주민들은 이 사건을 계기로 서구 문화 유입의 부정적인 면을 인식하기 시작 한다. 한편으로는, 실제로 일어난 이 사건을 소설에 넣어서 시간적 배경을 분명히 하고 작품의 사실성을 높인다. 3부는 우무오피아에 돌아온 오콩코가 전통이 사라 졌음에 좌절하고 그 세력에 맞서 싸울 결심을 하지만, 백인들에게 농락당한 뒤 결국에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극으로 마무리된다. 전통을 상징했던 오콩코가 결국 무너져 내리고(fall apart) 만 것이다. | 나이지리아의 이보족 마을에서 태어난 저자, 치누아 아체베는 기독교 미션스쿨 에서 교육을 받고, 나이지리아와 영국의 방송국에서 근무했으며, 외교관, 연구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현재는 미국에서 교수 생활을 하고 있는데, 다양한 경험을 가진 작가라고 할 수 있다. 그는 1958년 런던에서 처음으로 이 작품을 발표하면서 문학을 통해서 아프리카를 알리기 시작했는데, 1958년은 그 전 해에 ‘가나’가 아프리카 최초로 독립한 것을 시작으로 아프리카 대륙의 다른 국가들도 독립을 앞둔 시기였다. 그렇기 때문에 단순히 아프리카 전통 문화를 세계에 알리기 위한 것만 이 아니라, 새로운 국가 건설을 앞두고 가치관에 혼란을 느끼는 아프리카 젊은이들에게 문화적 뿌리를 상기시켜 주기 위한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굳이 독자를 두 부류로 나누지 않더라도, 책을 읽으면서 저자의 의도가 아프리카 문화와 그것이 다른 문화와 충돌하기 시작하는 과정을 전달하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저자는 친 절한 선생님처럼 차분한 흐름 속에서 사람들의 일상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설명하 고, 백인들이 서서히 힘을 얻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기대했던 것과 달리 원주민들의 모습이 푸근하게 다가오는 것에 놀라면서, 아프 리카에 대한 나의 인식을 되돌아봤다. 아프리카에 대해서 쌓아온 특정 이미지가 아프리카 영화 한 편으로는 바뀌지 않을 만큼 뿌리 깊었나보다. 고전을 직접 읽어 보지도 않고 마치 그 내용을 다 안다고 착각하듯이, 아프리카에 대해서 충분히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미디어를 통해서 아프리카를 접하면서, 무의식적으로 원주민과 동물들의 강렬한 원시성만을 아프리카의 특징이자 장점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또는, 식민지 때의 영향이 남아서 유럽의 분위기를 풍기는 이국적인 곳이 내게는 아프리카였다. 그들의 문화를 겉으로 이해하는 것과 별개로 원주민들에게는 경멸할 만한 야만성이 있다는 무의식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의 이보족들은 고유의 문화를 가지고 자존심을 지키며 살아가는, 평범한 조상들의 모습이었다. 사람들이 주술사의 말을 중심으로 단결해서 이웃 마을과 전쟁을 하는 모습, 조상의 탈을 쓴 사람들이 법적 판결을 하는 장면, 혼인하 기까지의 과정과 축제 모습, 위계 질서를 바탕으로 하지만 의견을 말할 수 있고 다수결에 따르는 모습 등 관혼상제와 일상적인 모습을 등장인물간의 대화와 설명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마을 구성원들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하고 받아들이는 질서 가 있고, 민주주의의 모습을 띤 부분도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특히, 그들의 언어습관과 교육방식에서 소설 ‘내 영혼이 따뜻한 날들’에서 느꼈던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지혜로운 모습들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작품에는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민담과 설화를 전하는 장면이 많은데, 우리나라 전래동화를 듣는 느낌이다. 교훈이 들어있는 그들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문화의 보편성을 발견 하고, 그 속에서 그들만의 고유한 부분을 발견하는 즐거움이 있다. 그뿐만이 아니라 그들은 원하는 바를 직접적으로 말하기보다 다양한 속담과 유머를 사용해서 설득하는 것을 즐긴다. 해학적인 모습에서는 그들의 삶이 얼마나 풍요로웠는지 느낄 수 있고, 상대방을 배려하고 서로의 관계를 소중히 여기는 그들의 모습은 친근하게 다가왔다. 육체적 노동은 줄어들었지만 여유를 잃고 살아가는 현대인으로서 부러운 모습이었다.
이렇게 소설에서 묘사된 이보족의 전통이 아프리카 문화 전체를 대표할 수는 없지만, 아프리카는 정의하기 애매할 정도로 광범위한 문화다. 이 소설은 인위적 인 국경이나 국가를 통해서 접근하기보다, 하나의 문화 단위인 부족을 중심으로 한, 심층적인 접근이라는 의미가 있다. 946 저자의 의도가 그 시대의 아프리카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라면, 균형적인 시선은 중요한 요소다. 문학에서 객관성을 논하기는 어렵겠지만 문화인류학 보고서의 성격을 띤 작품이기 때문이다. 우선, 문학의 틀 속에서는 서술방식을 통해서 독자들이 나름대로 객관적으로 그들의 삶의 엿볼 수 있다는 점을 살펴볼 수 있다.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는데, 상황이나 등장인물의 행동을 전혀 평 가하지 않고, 등장인물의 목소리가 되어서 속마음을 표현해주거나 특정 행동의 의 도를 설명한다. 그래서 등장인물 하나하나의 캐릭터가 뚜렷하고, 그것이 그들의 사고방식이나 생활양식에 대한 이해로 자연스럽게 이어지기 때문에 특정한 관점 에서 조작된 모습을 바라본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좀 더 큰 틀에서, 이 작품은 균형 잡힌 시각을 제공하는, 탈식민주의 문학이라는 시각이 일반적이다. 탈식민주의는 유럽이나 서구의 제국주의 세력이 자기들의 사상을 보편화하고, 그 것을 기준으로 다른 나라를 이해하려는 경향을 비판한다. 서구 열강들은 지배, 억압, 착취를 위해서 비서구 세계들을 의도적으로 왜곡하고 그러한 인식을 전 세계에 퍼뜨려왔다는 것이다. 에드워드 사이드는 그의 저서 “오 리엔탈리즘” (1978)에서 서구 열강이 백인 우월주의나 유럽 중심의 이데올로기를 유 포하고 동양을 열등한 타자로 만들어 냈다고 지적했다. 아프리카와 유럽의 관계에 는 노예 무역과 인종차별주의 문제까지 있다. 아프리카는 서구 사회에게 또 다른 동양인 것이다. 왜곡되어 있던 아프리카 문화를 상세히 소개한다는 점에서부터 식민주의적 시선에 대항하고자 하는 의도가 강함을 알 수 있다.
소설 속에서, 우무오피아에 들어온 백인들은 자기들의 기준을 너무나도 당연하게 원주민들에게도 적용한다. 원주민에게 제공받은 땅에 학교와 교회를 짓고, 원 주민을 법원 전령으로 부리며, 원주민들을 막무가내로 협박하며 자기들이 만든 법을 적용하는 것이다. 제국주의 세력의 폭력은 에구구들을 모욕하고 살해하는 것에 서 드러난다. 에구구는 부족에서 나이가 많고 지혜로운 여섯 명의 남자로, 정체를 밝히지 않은 채 조상들의 탈을 쓰고 마을의 중요한 결정을 이끌거나 옳고 그름을 판결하는 사람들이었다. 오콩코도 그 중 한 명이었는데, 그들은 마을 사람들에게 거의 신성시되는 절대적인 존재였다. 하지만 판결에 불만이 있을 경우 의견을 말 하고 서로 납득할 수 있도록 의사소통 도 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인 치안판사는 에구구를 살해하고, 그들의 문화를 모욕하고, 수갑을 채워서 협박하는 일을 저질러서 원주민들을 좌절하게 한다. 갓 유입된 백인들의 법이 원주민들의 전통있는 사법제도를 파괴하고, 백인들의 기독교가 원주민 사회에서 절대적인 역 할을 하던 전통 신앙을 파괴한다. 저자는 원주민들을 그저 계몽의 대상으로만 본 식민주의의 폭력성을 묘사하고 비판한다.
이처럼 탈식민주의 문학의 특징은 이 소설 이전에 아프리카를 다룬 문학 작품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다고 한다. 조셉 콘래드의 ‘암혹의 핵심’과 같이 아프리카를 진지한 배경으로 사용한 작품에서도 아프리카는 백인이 야만적으로 변해버리 는 장소로 비춰지는 등 부정적으로 묘사됐다. 그래서 이 작품은 피해자의 관점 에서 그들의 문화를 중점적으로 보여주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균형 잡힌 시선을 유지하고 있다. 이 작품처럼 등장인물들을 통해서 사회의 복합적인 면, 심지어는 부 |정적인 면까지 보여줄 수 있다는 단서만 있다면, 당사자의 관점이 가장 사실적이고 정확할 수 있다. 균형 잡힌 시선을 보여준다는 것은 장점만을 나열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서구 문명을 받아들이는 것이 대안이 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이 생긴 부정적인 면들도 자세히 묘사한다. 오수라고 불리는 불가촉천민 계층이 있었고, 쌍둥이는 불길하므로 강에 버려야했으며, 다른 마을에서 잡혀온 이케메푸나는 오콩코에게 아들 대접을 받았으나 인질이라는 이유만으로 잔인하게 죽어야만 했다. 전통문화를 대 표하는 오콩코는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아야 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지만 속으 로는 자신의 폭력성에 놀라기도 한다. 오콩코의 친구 오키에바리도 이케메푸나를 죽인 일에 관여한 오콩코를 탓하는 등 부조리함을 그들도 직접 느끼고 있음을 보 여준다. 또한 오콩코 자신도 가장 좋아하는 딸에 진마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능력을 발휘할 수 없음을 안타까워한다. 결국 일련의 사건들을 보고 자신의 문화와 정체성에 회의감을 느낀, 오콩코의 아들 은워예는 아버지를 떠나서 완전히 기독교 에 헌신하게 된다. 소외당하던 계층과 여성들도 마찬가지였다. 즉, 사회 변화의 원 인은 어느 한 쪽만이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 작품을 읽고, 저자의 의도를 이해하면서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한국의 근대사였다. 일제강점기에 접어들면서, 그 흐름 속에서 우리 문화를 지키기 위한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주인공의 몰락이 민족의 몰락과 연결되고, 고유의 문화를 묘사한다는 점에서 박경리의 ‘토지’와 같은 작품도 떠올리게 한다. 그래서 오콩코의 좌절감이 더 공감되고, 그의 죽음이 더 안타까웠다. 이처럼 제국주의에 반대한 역사를 가진 나라들 사이에서 이 작품은 보편성을 가질 수 밖에 없다.
마지막으로, 치누아 아체베는 아프리카 문화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뿐만 아니라 그 시대의 역사적 흐름은 피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오히려 변화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는 것이 좋다는 이상을 제시하는 것 같다. 원주민들이 백인들에게 처음 가졌던 태도에서 알 수 있듯이, 그들은 백인들을 두려워하지도 않았고, 서로 의 방식을 존중한다면 내쫓거나 해칠 생각도 없었다. 후속 소설에서도 이야기는 주인공의 비극으로 끝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경은 어쩔 수 없이 변하고 있으며, 등장인물들은 그 속에서 나름대로의 희망을 가져야 한다. 미래를 위한 희망을 제시하는 작가라는 의견은 이 작품에선 크게 와 닿지 않지만, 전통문화의 장점을 뿌리로 삼을 수 있다면 그것이 희망일 것이다.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진다’는 탈식민주의 문학의 고전이라는 거창한 타이틀이 있지만,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는, 흥미진진한 소설이다. 아프리카의 “과거가 단 지 하나의 긴 야만의 밤이 아니었다” (Achebe, Newsatesman, 1965년 1월 29일자) 는 걸 알려주고 싶었다는 저자의 말처럼 아프리카 문화에 대한 진짜 기록이기도 하다. 또한, 아프리카 뿐만이 아니라 문화를, 그리고 문화들의 충돌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제시하는 책이다.
입상 김*현 수학과 도서: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독후감: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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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있음을 안다. 회의는 뿌리 깊고 무지는 심각하지만 그럼에도 끝내 놓을 수 없는 내가 있다. 사람들은 ‘나는 누구 인가?’라는 질문을 수없이 하지만 대 부분은 ‘나는 없다.’ 또는 ‘나는 있으되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답을 얻기 위해 질 문을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나는 있다.’ 라는 전제를 가지고 던지는 물음인 것이다. ‘나’는 ‘너’ 보다, 그 누구보다 소중하다. 나의 생각은 이미 저명한 사상가의 생각을 초월해 있으며 세계가 나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이렇게 우리는 무거움 속에 산다. 아니 단지 살고 싶어 하는지 모른다.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겁기를 원한다. 파악되지 않는 현상 속에 진리가 있다고 믿으며 상대적인 가치 속에서도 불변의 도덕법칙을 추구한다. 이것은 분명 모호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우리는 소피스트적인 단순함, 간단명료함을 궤변으로 치부하고 그 표면적인 가벼움을 싫어한다. 만일 누군가 도덕이 한낱 강압 적 교육의 결과, 정치가들의 체제 유지 전략이라고 또는 모든 인간의 행동 원리가 이익의 추구라고 말하거나 더 나아가 신이란 인간의 허상이며 나약한 인간의 창조물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그의 주장을 불편해한다. 스스로가 퇴폐와 파멸의 욕구
를 느끼고 데카당을 외치면서도 우리는 그의 가벼움, 진지하지 못함을 탐탁지 않게 여긴다. 하지만 어느 순간, 우리는 모든 것이 일회적이며 덧없이 흘러가버리기 때문에 어떤 것도 쉽게 판단 할 수 없음을 깨닫는다. 한번이기에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여겨지고 만다. 이 세상에서 가장 무거웠던 것이 깃털보다 더 가벼운 것이 된다. 비극은 순간의 희극으로 전락한다. 조금이라도 자신의 존재에 대해 진지한 물음을 던져본 이 라면 그는 곧 이러한 부조리, 비 일치에 직면하게 된다. 우리는 B와 D 사이에 갇혀 매순간 ‘이것이냐 저것이냐’를 선택해야 하지만 그것조차 가볍다는 생각에 이르면 도저히 견딜 수 없다. 유한한 존재의 숙명적 비극이 여기에 있다. 그것은 고뇌이며 도저히 좁힐 수 없는 간극이다. 우리는 가장 무겁고자 하지만 필연적으로 가벼울 수밖에 없는, 그 가벼움으로의 이행이 우리를 절망에 빠뜨린다. 이번에는 반대로 모든 것을 초월하여 무(無)가 되어보고자 하지만 그럴 수도 없는 자신에 혐오를 느낀다. 불안과 권태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것은 존재가 당면한 가장 치명적이며 피곤한 문제이다. 여기에 더 이상 진전되지 않는 답답함이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역으로 모든 것 은 이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차이가 고뇌를 부르고 고뇌가 창조를 낳았으며 창조 가 아름다움을 가져왔다. 실제로, 우리들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 인간이 가지는, 현재까지 이어지는 모든 것의 근원이 여기에 있다. 그것은 언어와 실재, 육체와 정신, 가벼움과 무거움, 유한과 무한, 현상과 물자체라는 이름으로 다양한 해석을 낳았다. 그것은, 어두운 밤을 거쳐 새로운 아침을 맞을 때마다 황금알을 낳는 거 위였으며 우리는 가장 절망적 어둠속에서만 이 희미한 빛을 잡을 수 있었다. 그리 하여 이 문제는 존재의 역사를 관통하여 자연스럽게 우리의 삶의 중심에 놓인다. 작가는 등장인물들을 통해 가벼움과 무거움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의 삶일 그들의 삶을 지켜본다. 가벼움인가? 무거움인가? 비록 그것이 결국엔 무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여기서 어떤 결정을 내리고자 한다.
토마스의 세계
토마스는 의사였다. 그는 호기심과 메스로 무장하고 인간이 관여할 수 없을 것처럼 보이던 현상 이면의 것에 과감히 손을 집어넣는다. 그는 여기서 가벼운 신성 모독을 느끼며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이 쾌락이 그를 뛰어난 의사로 만들었다. 이렇듯 그는 근본적으로 분해하는 자’이다. 이것은 그의 또 다른 삶 속에서도 여실히 드러나는데 여성편력이 바로 그것이다. 그는 파악되지 않는 타 존재의 가장 은밀한 부분을 탐닉한다. 순간 그는 그들의 무거움을 가벼움으로 전락시킨다. 그 는 그들의 이름과 직업, 구체적 일상에는 관심이 없다. 다만 그는 그 무거움을 타 파하고자 한다. 그래서 그는 그들이 자신의 삶에 관여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는 가장 내밀한 부분을 훔쳐보는 가장 표상적인 관계, 그 효율성을 에로틱한 우 정이라고 부르며 선을 긋는다. 그는 그들의 오해와 침범을 견딜 수 없다. 어떤 이 는 이를 두고 많은 이를 사랑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할 수도 있겠으나 실상은 가벼움,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그래서 그는 그들과 함께 편안히 잠을 이룰 수 없으며 그들을 사랑할 수도 없다. 정확히 말해 사랑할 수 없었다.
이런 그 앞에 몇 개의 우연을 거쳐 테레사가 나타났다. 무거움을 갈망했지만 외 부에서 강요하는 가벼움에 파묻힌 그녀는 연약했고, 불안했으며 그래서 매혹적이었다. 자신도 설명할 수없는 순간 그는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고 그는 그녀가 요구하는 특별함, 그 무거움과 사비나로 대표되는 가벼움 사이에서, 사랑과는 다른 육체적 관계라는 명목으로 불안한 생활을 지속해 나간다. 이것이 그에게 있어 첫 번째 고민이었다. 동시에 그는 그 자신이 천직으로 여기던 의사라는 직업을 포기해 야 할 수도 있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이 두 기로에서 그는 각각 무거움(테레사) 과 가벼움(의사 포기)을 선택한다. 늘 가벼움의 달콤함을 쫓던 그였지만 그의 동 정, 연민, 테레사에 대한 그의 사랑을 버릴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그는 분해자로서의 그의 본능에 충실하지만 끝내 테레사의 품에 안기게 된다.
‘테레사와 사비나’ 라는 두 극점에 관하여
이 둘은 토마스를 중심에 두고 서로 정반대에 있지만 닮은 점이 있다. 이 두 사람에게 개인을 매몰하는 전체주의적 가벼움, 그 통일은 폭력이라는 것이다. 테레사에게 있어 그녀의 어머니가 그랬고, 그녀가 일하던 바의 술 취한 손님들이 그랬다. 아니 어쩌면 그녀가 속한 공간과 시간 모두가 그녀에겐 폭력이었을지 모른다. 그녀는 벗어나고 싶었다. 그녀가 알던 모든 것으로부터. 그녀 자신의 가벼움으로부터. 그녀는 토마스를 만났고 그에게로 갔다. 하지만 이 또한 그녀에겐 시련이었다. 그녀는 단 하나의 특별한 존재, 토마스에게 무거움이 되고 싶었다. 그녀에게 사랑이란 유일함이자 ‘타’의 배제를 의미했다. 그러므로 그녀에게 토마스의 여성편력은 의심을 낳았고, 그것은 일종의 희망 고문이었다. 이루어 질듯 말듯, 잡힐 듯 말듯 희망을 갖게 하면서 그 자신은 점점 쓰러져가는, 가장 잔인한 고문이었다. 그럴수록 그녀는 더욱 토마스에게 집착했고 그녀를 버릴 수 없는 토마스는 그녀와 점점 더 얽매여 갔다. 사비나 또한 테레사와 마찬가지로 평생 동안 전체주의적 폭력에 저항했다. 그녀는 키치를 경멸했다. 그녀는 토마스와 같이 가벼운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테레사처럼 하나의 사랑에 정착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그녀는 번번이 배신하고 후회하며 공허해져갔다. 그녀가 이렇듯 불안해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녀가 사랑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녀가 앞의 두 사람과 다른 점은 그녀의 행동원리가 ‘모든 키치를 거부하라.’ 라는 자기 명령이라는 것이다. 그러한 명령 때문에 그녀는 프란츠를 포함한 그 어디에도 정착 할 수 없었다.
사비나는 보는 존재, 배신의 존재, 즉흥의 존재인 반면 프란츠는 듣는 존재, 정 조의 존재, 의도의 존재이다. 그녀는 그런 프란츠에 기대고 싶었지만 서로에 대한 몰이해, 그의 진실된 사랑 관을 견딜 수 없었고 결국 그를 떠났다. 그녀는 이내 후회했지만 그에게로 돌아 갈 수 없었다. 동정할 수 없는 자 사랑 할 수도 없는 것이다. 이것으로부터 그녀는 토마스, 테레사와는 다른 길을 걷게 된다. 던져진 존재로서 키치에서 완전히 벗어 날 수 없음에도 그녀는 모든 키치를 혐오하는 자기모순 에 빠져 끝이 없는 배신의 길을 걷는 것이다. 정착의 안락함을 추구하면서도 타 존재의 불편함, 그 다름, 키치에 대한 환멸이 그녀를 멈출 수 없는 배반의 기차 위로 그녀를 밀어 넣은 것이다. 그녀는 오히려 그곳에서 깃털보다, 그 무엇보다. 가벼워지기를 결심하였다. 하지만 그럴수록 나는 그녀에게서 무거움으로의 강한 열망을 느낀다. 미련해서 또한 자신은 그처럼 미련할 수 없어서 곰을 싫어하는 여우를 본다. 유한한 존재의 비극이 바로 여기에 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경이로움 나는 이제 말년의 테레사에게 주목하고자 한다. 그녀는 어느 순간에 이르러 늘 자신 옆에 있었던 토마스를 다시 보게 된다. 그의 쇠락이 자신 때문인 것만 같아 마음 아파한다. 그녀가 그를 너무 못살게 군것은 아닌지 그 동안의 자신의 이기심을 반성한다. 동시에 그녀는 카레닌과의 목적 없는 사랑을 통해 진정한 사랑에 대 해 생각한다. 그에게 가까이 가고자 할수록 더욱 더 철저하게 고립되었던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게 된다. 토마스에게만 의미 있는 존재가 되고 싶었던 그녀는 이 순간 그것을 초월하였다. 그녀의 사랑은 더 이상 지상의 것이 아닌 천상에 속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인류 밖의 인간이 되었다. 이것은 꼭 니체의 그것이며 유약한 존재 모두에게 보내는 따뜻한 시선이다. 여기서 그녀는 더 이상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은 제 3의 상태로 간다. 늘 그렇듯이 위태로운 일상의 충격은 아무런 예고도 없이 찾아왔다. 가벼움으로 기억되는 대학 1년이 지나고 휴학을 하고 있을 때였다. 가을도 지나고 복학을 준 비하던, 지금 이맘때로 기억한다. 갑자기 모든 것이 엉망이 되었다. 보이던 모든 것이 의심스러웠고 낯설었다. 아무런 암시도 없이 어느 순간 가벼움과 무거움이, 정확히는 죽음과 삶의 문제가 나를 뒤덮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나는 무기력했고 무능력했다. 나는 물론 갑작스러운 혼란에 당황하기도 했지만 그것보다 내가 그에 대한 답을 도저히 낼 수 없다는 것이 나를 더욱 답답하게 했다. 시시때때로 얼굴을 달리하는 불안과 권태 사이에서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럴수록
내 자신으로 더욱 침잠해보기도 했지만 허사였다. 여전히 암흑이었고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친구들과 가족들은 그냥 웃어 넘겼고 나도 그들처럼 이 사태를 무시하려 했으나 좁혀지지 않는 양 극단 사이에 끼여 있는 나 자신의 어색함을 감출 수 없었다. 나는 아무런 성과 없이 학교로 돌아 왔고 이제는 그전처럼 사람들을 대할 수 없었다. 중심 없이, 의미 없이 그들에게 휘둘릴 것만 같았다. 그렇다고 이 불편함을 안고 그들 앞에서 괜찮은 척 연기를 할 수도 없었다. 나는 그들에게 이해받지 못한 채 철저히 혼자였다. 문제는 그들이 아니었다. 오로지 내가 문제였다. 나는 어떤 결론이라도 얻고 싶어서 스스로를 고립시켰던 것이다. 그동안에도 난해한 질문들은 계속 이어졌고 그럴수록 나는 더욱 암울해졌다.
그런데 어느 날 나는 놀라운 경험을 했다. 그날도 역시 무의미와 무능력을 전신에 이고 길을 걸어가는데 무언가가 내 앞을 지나갔다. 땅만 보고 걷던 나는 놀라 주위를 살펴보니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노을이 지는 가을 하늘을 배경으로 나무 한 그루가, 거기에서 떨어지는 낙엽이, 놀란 듯 그들을 바라보는 내가 있었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졌고 뭔지 모를 뜨거움을 느꼈다. 지금에 이르러 언어가 끊긴 그 때를 다시 하나의 기호 안에 정확히 담을 수는 없겠으나 그것은 가벼움도 무거움도 아닌 경이로움이었던 것 같다. 나는 그 나무 한 그루에, 낙엽 하나에 위로받았던 것일까? 그것은 어떤 고귀한 것을 본 느낌이었고 무엇인가 정화되는 듯 했다. 그날은 분명 지금도 모호함으로 가득하지만 그것은 기분 좋은 무지였고 감히 언어로, 이성으로 범접할 수 없는 존재의 충만함 이었다. 나는 지금도 그때의 내밀한 흥분, 그 떨림을 잊을 수 없다.
이런 일은 어떻게 일어났을까? 왜 그때이어야만 했을까? 왜 그것은 아무런 개 연성도 걸치지 않은 채 갑자기 내 앞에 나타난 것일까? 나는 그때 내가 과거와 미래 사이에 빛나는 현재를 본 것이라고 믿고 있다. 낮과 밤의 경계에서 고뇌하던 존재가 문득 스치는 현재를, 존재 그 자체를, 그 찬란함을 본 것이라고 믿고 싶다. 그것은 존재가 한계를 느낀 가장 절망적인 순간에 희미하게, 그리고 점점 더 강렬해지는 존재의 비밀 그 틈을 잡은 것은 것이었다. 그런 뒤 주위를 둘러 봤을 때 오직 나만이 가득했던 세상에 나 아닌 다른 존재가 있었고 나는 그들의 가치, 그들의 무한한 가능성, 그 무거움을 볼 수 있었다. 동시에 그들에게 보내는 따뜻한 시선을 가질 수 있었다. 모든 존재가 가지는 간절한 부름을 들을 수 있었다. 이것이 체계 밖의 인간, 테레사의 그것, 니체의 그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처음엔 아무생각 없이 존재를 긍정했고 어느 순간 그들이 낯설었고 곧이어 그 들을 부정했으며 신기하게도 다시 내 안에서 그들을 수용할 수 있게 되었다. 토마스에게 “그래야만 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 “그래야만 한다.” 이듯이 나에게 존재는 존재였다. 여기까지 말해놓고 보니 내가 무슨 큰 깨달음을 얻은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도 않다. 여전히 불안과 권태가 주기를 달리하며 나를 찾아오고 낯선 존재는 나에게 여전히 불편하고 어색하다. 하지만 이제 나에게 불안은 일상이 되었고 권태는 친근해졌다. 그리고 나는 다른 존재를 받아들일 용기가 생겼다. 나는 나를 구할 수 있었고 동시에 모든 이를 살릴 수 있었다. 자 이제 당신의 결단만이 남았다. 당신은 현재 어디쯤에 있는가? 가벼움인가? 무거움인가? 경이로움인가? 당신은 이 제 당신의 인생을 어디로 인도하여 어떤 악보를 완성해 낼 것인가?
입상 고*윤 행정학과 도서:존재와 무
독후감:존재와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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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 동서양 고전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
2011년 10월 17일, 그동안의 내 생활을 되돌아보고 반성하여 학업에 온 힘을 쏟아야 한다는 다짐을 했다. 그러다 우연히 이지성 작가님의 ‘여자라면 힐러리처럼’ 을 읽었다. 평범한 여대생이었던 힐러리가 지금의 위치까지 오게된 성공이야기에 대한 내용이었다. 한참 읽던 중, 힐러리가 동·서양 인문 고전을 즐겨 읽었으며, 다른 학생들과 고전에 대한 토론을 했다는 내용이 눈에 띄었다. 고전이라고 하 면, 어렵고 실생활과 동떨어진 학자들이나 읽는 책이라는 고정관념이 있었기 때 문이다. 이지성 작가님은 동·서양 고전을 읽으면 당대의 지성들이었던 고전 작가들의 사고방식을 닮아 간다고 설명하였다. 심지어 인문학과는 연관이 없을 것같은 뉴턴, 아인슈타인 등등 과학자들도 인문고전을 즐겨 읽었다. 최근에 고인이 된 스티브 잡스 또한 고전을 즐겨 읽었다. 소크라테스와 반나절을 보낼 수 있다면 애플사를 통째로 넘겨 줄 수 있다고 할 만큼 인문고전에 관심이 깊었다. 세계를 움직이던 지성들이 그토록 열심히 즐겨 읽었던 인문고전에 점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2011년 1학기에 ‘동·서양 고전산책’ 수업을 들었지만 다루던 고 전들을 잘 이해하지 못하였으며, 관심도 없었다. 다른 학우들도 마찬가지였다. 고전이 어려워 이해를 못하게 되자 자연히 관심도 없어지고 고전을 읽는 것은 어렵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박혔다. 그 당시에는 고전을 읽을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여자라면 힐러리처럼’을 계기로 인문고전 읽기에 도전하게 되었다. 마침 시험공부를 하러 제 1 도서관에 들렀는데 ‘책읽는 대학-독후감 공모’ 포스터를 보았다. 이 공모전에 참여하면, 정해진 기간 내에 독후감을 작성해야 하기 때문에 책을 읽다가 ‘다음에 보지 뭐’하는 나태한 마음도 추스릴 수 있고, 독서 후에 독후감을 쓰면서 나의 이해도를 점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떤 책을 읽을지 고민하다 J.P.Sartre 의 ‘존재와 무를 읽기 시작했다. 처음 책을 도서관에서 찾았을 때 누런 표지에 1100 쪽이 넘는 이 책을 어떻게 읽어나갈지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어렵다고 피하기만 한다면 나에게 발전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몸에 좋은 약이 입에 쓰다.’는 속담처럼, 어렵고 나의 능력에 버거운 일을 해결할 때마다 성장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제목인 존재와 무는 상반되는 의미인데 어떤 내용일지 궁금했다. 내용이 난해하여 포기 하려고 했지만 틈나는 대로 책을 읽고 사색하고, 관련자료를 찾아보면서 점점 ‘존재와 무’를 이해하게 되었다. 책의 내용을 서서히 알게 되면서 성취감과 독서 의 기쁨을 알게 되었다. • 새로운 시각 – 즉자존재와 대자존재
Sartre의 ‘존재와 무’에서는 존재를 2가지로 구분한다. 첫 번째는 즉자존재이다. ‘존재는 그 존재 속에 고립되어 있고, 그것이 아닌 것과 어떤 관계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이다.(존재와 무, p.41), 즉자는 그 자체로 충실하다. 내포하는 것과 내 포되는 것의 그 이상의 완전한 충실, 그 이상의 완전한 동등성은 상상할 수도 없다. 존재 속에는 털끝만한 공허도 없다. 무(無)가 비집고 들어갈 수 있는 바늘구 멍만한 균열도 없다.(존재와 무, p.156)’는 구절에서 즉자존재의 특징을 알 수 있다. 즉자존재는 의식이 없는 사물을 가리킨다. 돌맹이, 책 등이 즉자존재이다.
반대로 대자존재는 ‘그러므로 자기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이 존재의 일원성이 동 일성의 무화로서 그 자신의 무를 내포하고 있어야 한다. …(중략)… 대자는 그것이 자기 자신과 일치할 수 없는 한 존재하도록 스스로 자기를 규정하는 존재이 다.(존재와 무, p.162)’, ‘인간이 즉자존재와 마주하여 스스로 태도를 취하는 것은 – 우리의 철학적 물음은 이런 태도의 한 형태인데 – 인간이 이런 즉자존재로 있지 않기 때문이다.(존재와 무, p.106)’에서 알 수 있듯이 의식을 가지고 스스로를 규정하고 다른 사물을 정립하는 존재이다. 즉, 대자 존재는 인간이다. 존재를 이렇게 의식을 기준으로 이원화하는 것이 신선하게 느껴졌다. 제목이 왜 ‘존재와 무인지 궁금했었는데, 즉자 · 대자 존재에 대해서 알고 나서 어느정도 알 수 있었다. 인간은 의식을 가지고 스스로를 규정하며, 이전의 규정들을 무(無)로 만들고 다시 규정하기에 제목을 ‘존재와 무’로 지은 것이다. 책을 읽기 전까지는 사물과 사람의 차이라면, 단순히 사람은 살아 움직이고 사물은 물질이라고만 생 각했었다. 책을 읽고 이렇게 새로운 시각으로 사람과 사물을 양분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편, 침팬지와 같은 지능이 높은 동물을 대자 존재로 볼 수 있을지 의문이 생겼다. 일본 교토대 영장류 연구소의 마쓰자와 박사는 침팬지에게 학교는 없지만 학습은 있다고 말한다. 새끼 침팬지들은 어른들의 행동을 보며 견과류를 먹는 방법 등을 배운다. 이는 일본의 초밥 요리사들이 어깨너머로 요리를 배우는 것과 유사 하다.
교토 영장류 연구소의 침팬지 아이(Ai)와 아들 아유무(Ayumu)는 인간보다 뛰어난 지적 능력(순간 기억 능력)으로 진화에 대한 잘못된 관점을 뒤집는다. 아유 무는 2007년 11월 SBS에서 행한 실험에서 인간보다 뛰어난 순간 기억력을 입증 했다.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교 Jared Diamond 교수는 ‘제 3 의 침팬지 – 인간’에서 다 음과 같은 주장을 했다. 인간의 유전 형질은 침팬지와 98.4%가 같고 1.6%만이 다르다. 인류의 유전자가 침팬지와 비슷한데도 불구하고 세계의 패자(覇者)가 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요인은 언어를 사용 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의 설 명이다.
침팬지가 이렇게 우수한 지능을 지녔으며, 인류와의 차이가 언어의 사용이라면 침팬지에게도 의식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국의 심리학자 고던 갤럽 (Gordon Gallup)은 동물이 거울 앞에서 자신을 인지하기 위해서는 우리 인간과 같은 형태의 자의식을 반드시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우스웨스트 루이지애나 주립대학교(University of Southwestern Louisiana)의 다니엘 포비넬리 (Daniel Povinelli) 교수는 1995년 침팬지 메간(Megan)을 여러 달 동안 훈련했다. 포비넬리가 고던 갤럽이 고안한 방법으로 자의식 실험을 메간에게 했다. 어느 날 아침 메간은 마비가 되어 있었다. 메간이 의식이 없을 동안 메간의 이마에 밝은 붉은 잉크 한 점이 발랐는데, 오후에 메간의 의식이 돌아와서 숙소에 걸린 거울을 보고 이마에 있는 점을 긁었다. 이것을 근거로 메간이 자신을 알아보는 자의 식이 있다고 주장했다. 원숭이는 그러한 연관관계를 생각해 내지 못한다. 이러한 연구 결과들을 보고 침팬지에게도 의식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수준은 자신을 인지하고, 아사히 신문(2007. 09. 12)에서 기사화 되었듯이 프로포즈를 위해 과일을 선물하는 정도이다. 그렇다면 ‘자신과 사물이 다른 존재임을 인식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침팬지가 자신을 비정립적인 존재, 사물을 정립적인 존재로 본다면 대자존재일 가능성이 높다. 한편, 침팬지가 대자 존재라는 것을 증명할 방법이 아직은 없다. 때문에 침팬지의 의식수준에 대한 명 확한 경험적 결과가 없다.
인류는 진화과정에서 어느 순간 즉자에서 대자가 되었다. 자신과 세상을 다른 것으로 인식하는 의식, 자아가 생겨나면서 대자가 되었다. 그렇다면 침팬지는 어떤가? 인간의 진화과정 중 자아가 생기기 전 단계와 비슷한 수준이라면 즉자이다. 그런데 말을 할 순 없지만 대자라면, 우리는 같은 대자존재를 실험하고 동물 원에 강금하여 구경한 것이다. 당하는 입장에서는 차라리 즉자가 되고 싶을 것이다. 인류도 ‘고민이 없어서 좋겠다.’며 의식이 없는 상태를 부러워 할 때도 있다. 즉, 아무런 생각 없이 생리적인 활동만을 하는 즉자 상태를 원하는 경우가 있다. 견딜 수 없을 만큼 힘든 상황에 닥쳤을 때 등이다.
• 대자존재의 특징 – 자기기만 (황우석 박사 사건)
앞에서 설명한 대자존재의 특징은 자기기만이다. 기만이라고 하면, 남을 속이는 행위인데 어떻게 스스로를 기만할 수 있는지 궁금했다. 자신을 아무리 속이려고 해도 속일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Sartre의 설명에 의하면, 자기기만은 인간의 고유한 특징인 의식 때문에 생겨난 ‘나는 비록 스스로 부끄럽게 여길 뿐이라 해도, 내 속에서 여러 경향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이런 경향은 실은, 나의 협조를 얻어야 비로소 실현되는 것이고, 그것은 자연의 힘이 아니라 내가 끊임없이 그런 가치에 대해 결정을 내 림으로써 그것을 효과적인 것으로 만들고 있는데도, 사람들은 일부러 사실을 보 지 않으려 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나의 성격, 나의 본성에 관해서 하나의 판단을 내릴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바로 그 순간에 내가 알고 있는 그 밖의 일들을 나로부터 은폐하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나의 현재는 정의상(定義上) 나의 과거 에서 빠져나와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과거를 그렇게 판단하는 것이다. 그 증거로 나는 예전에 내가 있었던 그대로의 것으로 있다고 성실한 마음으로 말하는
그 당사자가 마음속에 원한을 품고 있는 타인에게 화를 내면서 나는 이미 과거에 내가 있었던 그대로의 것일 수는 없다(옛날은 옛날, 지금은 지금)고 주장함으로써 상대편의 원망을 진정시키고자 할 경우가 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 과거에 는 유죄였으나 이제는 새로운 자유 속에서 이미 유죄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법정이 그 사람을 유죄로 판결한다면, 우리는 그것에 대해 놀라고 진심으로 가슴 아파한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그 사람이 자신을 유죄자로 있는 것으로 인지할 것을 요구한다.(존재와 무, p.138) Sartre는 어떤 의식을 했지만 그 의식에서 고개를 돌려 기존의 의식을 무의식으로 가라 앉히는 것을 자기기만이라고 했다. 위의 본문은 내가 상대방에서 원한을 가지고 있지만 겉으로는 원한이 없다고 하는 것, 법원의 판결이 부당하여 죄인의 처지를 불쌍히 여기지만 그 사람이 자신을 죄인이라 여기기를 바라는 것을 예로 서 들었다. 나는 자기기만이 일상생활에서 많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가장 자주 느끼는 자기기만은 길을 가다 쓰레기를 버릴지 가지고 갈지 고민하는 것이다. 내 의식은 쓰레기를 버리고 편하게 길을 가자고 하지만, 사회화된 의식이 쓰레기는 쓰레기통에 버리는 것이 옳은 일이라고 한다. 고민하게 되지만 처음의 의식은 무 의식이 되고 쓰레기는 쓰레기통에 버리게 된다. Sartre는 이런 자기기만을 긍정적으로 보았다.
한편, 자기기만을 통하여 황우석 박사에 대한 사람들의 의식에 대해 알 수 있었다. 2011년 11월 3일, 황우석 박사의 교수직 파면은 부당하다는 처분이 내려졌다. 물론 황우석 박사는
연구를 제대로 감독하지 못한 죄가 있다. 하지만 석좌교수에 서 파면된 것은 부당하다는 것이다. 지금 대부분의 사람들은 황우석 박사의 복귀 에 부정적인 입장이다. 이것은 자기기만이다. 사람들은 논문 조작이 미즈메디 연구원에 의해 이뤄지고 이것을 황우석 박사가 간파하기 어려웠다는 것을 알고 있 다. 하지만 법원에서 판결을 내린 이후, 논문 조작의 죄는 없다고 안타까워 하면 서 황우석 박사가 스스로를 유죄자로서 ‘있는 것’으로 인지할 것을 요구한다. 즉, 연구를 조작한 행위는 없다고 판결 났지만 스스로를 죄인으로 여기고 연구를 하 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다. 자기기만에 대한 Sartre의 생각을 실제사례에 적용시키는 과정에서 그 개념에 대 해 더 잘 이해하게 되었다. 이 개념을 하나하나 실생활에 적용하면 다른 이들이 왜 그런 행동들을 하는지 이해할 수 있다.
• 매순간 스스로를 만들어 나가는 대자(사람)
따라서 또한 인간 존재는 비록 전체 분해적인 형태에서 일지라도 자기의 규정들 의 구체적인 전체로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인간존재는, 자신이 현재 그것으로 있는 구체적인 부정에서, 자신의 다른 모든 부정을 통해, 벗어나는 한에서만 전체일 수 있다. …(중략)… 나는 즉자존재를 통해 내가 그것으로 있지 않아야 하는 어떤 종류의 구체적인 실재를 자신에게 알려준다.(존재와 무, p.324)’ 사람은 즉자 존재와 다르다. 즉자존재는 과거, 현재, 미래에도 그 존재가 변하지 않는다. Sartre에 의하면 사람은 완전하지 않은 존재이다. 사물처럼 어떤 용도가 정해져서 소멸할 때까지 그 존재 이유를 유지하지 않는다. 만약, 직업을 기준으로 ‘나’를 규정한다면 지금은 학생, 시간이 지난 뒤에는 공무원, 더 시간이 흐른 뒤에는 자영업을 할지도 모른다. 이처럼 대자존재인 사람은 한 가지 정해진 역할이 없다. 과거, 현재에 의해 ‘나’의 존재가 규정되어 변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즉자존재이 다. 한 가지 역할이 규정되어 평생 그것만을 수행하는 의식 없는 사물에 불과한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사람들은 스스로를 매순간 무(無)로 만들고 다시 규정하기 때문에 즉자존재와는 다른 대자존재이다. ‘즉 과거와 현재 사이에는 하나의 절대적인 이질성이 있다. 그리고 내가 과거로 돌아 갈 수 없는 것은 과거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과거로 있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나 자신이 즉자적으로 존재하고, 그 결과, 동일화라는 형태로 과거 속에 나를 잃어버리는 것이다.(존재와 무, p.224~225) 이 구절에서 알 수 있듯이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를 동일하게 여긴다면, ‘나’는 대자가 아니라 즉자이다.
나도 마찬가지지만 많은 사람들이 과거에 얽매여서 자신들의 열려있는 미래를 닫아버린다. 과거에 실수하거나, 수치심 느낀 일들을 곱씹으며, 스스로를 자학하거나 ‘나는 안되’라며 규정해 버린다. 하지만 이런 행동들은 자기 자신을 즉자존재로 만드는 행위이다. 사람은 이전의 자신을 무(無)로 만들고 스스로를 다시 규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이 경험한 과거의 일들은 이미 즉자존재이고 바뀔 수 없는데 그런 과거를 현재의 자신과 동일시하면 안된다. ‘내가 나를 만든다면 나는 나를 유한하게 한다. 이 사실에서 나의 인생은 유일 한 것이다. 따라서 설령 내가 죽지 않는다 할지라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은 나에게 금지되어 있다. …(중략)…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죽지 않는 자도 죽는 자도 다수로 태어나 하나로 돌아간다. 비록 시간이 무한정, 즉 무제한이라 하더라도, 그럼에도 또한 그 인생은 자기를 유일한 것이 되게 하기 때문에, 자기의
존재 자체에 있어서 유한할 것이다.(존재와 무, p.884)’ Sartre가 이 문구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인생은 유한하다. 또한 되돌릴 수 없기에 설령 무한의 삶이 주어진다고 해도 유일하고 특별한 삶이다. 그런데 과거에 얽매여서 유한하고 유일하며, 특별한 자신의 인생을 망치게 되는 것은 너무 안타까운 일이다. Sartre의 ‘존재와 무’를 읽으면서 대자존재와 즉자존재의 이런 차이점이 감동적이었다. 그동안의 ‘나’는 자신을 비하하며 살았다. 군대에서 인정받지 못했고, 성격이 내 성적이고 유머가 많지 않아 인기도 많이 없었다. 주변사람들이 ‘니가 어떻게 그걸 해?’라고 말하면 과거의 ‘나’ 자신을 되돌아보며 ‘그래 저 사람들 말이 맞지, 내가 어떻게 해? 옛날에도 못했는데.’라고 생각하고 과거의 ‘나’에 맞춰서 살았다. 그렇게 하면 주변사람들이 드러내고 비웃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난날의 ‘나’는 즉자존재로서 살아왔다. Sartre의 ‘존재와 무’를 읽고 과거를 무(無)로 만들고 새로이 나를 규정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기뻤다. 비록 과거에 실수도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도 못 받았지만, 과거를 잊고 다시 힘을 내서 살아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가끔 옛 기억이 떠올라 우울해지려고 하면 Sartre의 말을 마음 속으로 되새기곤 한다. ‘과거와 현재가 동일한 것은 즉자이지, 난 대자니까 내 삶을 내가 만들어 갈 거야!’ 그러면 한결 마음이 편해진다. 이성적으로 내가 나의 삶을 규정해 나갈 수 있는 존재임을 알았기에 과거와는 달라졌다. Sartre는 1907년, 2세 때 자신의 아버지를 잃었다. 그는 아버지 없는 어린 시절 을 오히려 축복이었다고 말하였다. 그에게 ‘아버지’는 이미 결정나버린 과거에 얽 매여 살아간 인물로 상징된다. Sartre가 즉자존재였던 아버지가 없었던 것을 축복 이라고 표현한 것을 보고 즉자존재로 사는 것은 너무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나 스스로를 만들어가면서 내가 누구인지 정의해나가는 삶을 살아야겠다. 분명히 살아가면서 비웃음도 당하고 모욕도 당할 것이다. 하지만 이전처럼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하게 더 발전된 모습으로 그런 시선들을 이겨낼 것이다. 앞으로 내가 하려는 국가고시나, 다른 목표에 도전하는 것을 보면 다른 사람들은 ‘니가 과거에 못했는데 어떻게 해? 우수한 인재들도 하기 힘든데’ 라고 말할 것이다. 그 때마다 나의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꿈을 이룰 수 있는 방법을 찾아 내 길을 가는 것에 최선을 다할 것이다. 1906
• 끝맺으며,
Sartre의 ‘존재와 무’를 읽고 오랜 시간동안 괴로워하고, 고민했던 나의 과거를 이겨내는데 도움이 되었다. 한 번의 독서로 오랜 시간 고민해왔던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불안하고 우울해질 때 Sartre의 글을 떠올리면 마음의 안정을 찾는데 도움이 되었다. ‘존재와 무’를 읽고 사람의 의식을 이렇게 심도있게 연구한 것이 신기했다. 과학처럼 물질을 이용한 연구만이 모든 연구가 아니라 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만약 이 책을 읽지 않았다면 고만고만한 자기계발서에 적힌 구절들을 보며 잠깐의 위로를 얻는데 그쳤을 것이다. 그리고 과학에서 하는 것만이 연구인 줄 알았을 것이다. 이처럼 고전을 읽는 것은 나에게 뜻밖의 선물로 다가왔다. 비록 ‘존재와 무한 편을 읽었을 뿐이지만 왜 고전을 읽어야 하는지 알게 되었다. 두껍고 어렵게만 느껴지던 고전이었지만 그 가치를 알게 되자 인류의 지성들이 남긴 역작으로 보이게 되었다. ‘존재와 무’를 읽은 것은 나의 생활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런데 책을 읽으며 의문점이 생겼다. Sartre는 과거를 무(無)로 만들고 현재를 사는 것을 강조했지만,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가 완전히 분리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이 스 스로를 만들어가는 것은 맞지만, 현재의 ‘나’는 과거의 삶으로 만들어졌다. 유아 기에 형성된 가치관이 성인이 된 지금에도 영향을 준다. 또한, 그렇게 형성된 가치관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그런데 과거를 ‘무(無)’로 만들고 새로운 삶을 살아 가는 것이 가능한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동일시 여기지 않는다 해도 ‘나’의 가치관, 습관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과거의 행동을 다시 행할 가능성이 높다.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가치 관, 습관을 무(無)로 만들어야 한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그것이 가능한가? 어느 정도는 변화하겠지만, 앞에서 말하였든 가치관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그런데 시 간을 두고 생각해보니 역설적이게도 사람은 변하였다. 비록 짧은 시간동안은 그 대로인 것 같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면 달라져 있었다. 10년 전, 초등학생 시절 활발하고 인기 많던 친구가 있었는데 점점 어눌하게 변하고 이전에 높았던 성적 도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부정적으로 변했지만 그 원인은 자신에게도 있으며 주변 사람에게도 있다. 자기가 놀기를 좋아하게 됐으며, 주변에도 그런 친구들만이 있으니 변한 것이다. 이런 변화가 한순간에 오지 않았다. 10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뒤에 그 차이가 컸지만, 성장하면서 크게 느끼지 못하였다. 사람의 가치관이나 습관, 신념 등은 한순간에 바뀌지 않는다. 다만 조금씩 자신 은 물론 주변 사람들도 감지하지 못 할 만큼 변하는 것 같다. 특별한 일을 겪은 사람들은 한순간에 변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컴퓨터를 포맷하듯, 자신을 무(無)로 만들고 다시 시작하지 않는다. 조금씩 조금씩 스스로를 규정 하며 변화한다. ‘나’의 경우에도 ‘존재와 무’를 읽고 가치관의 변화는 있었지만 아직도 일정부분 예전의 가치관은 남아있다. 이성적으로는 과거를 즉자로 보고 도 전적으로 살겠다고 하지만, 현실에는 소극적인 면이 있다. 하지만 10년 뒤, 나는 도전적이고, 긍정적으로 살고 있을지 모른다. 그런 내 모습을 상상할 때면 나도 모르게 힘이 생긴다. 독서를 한 뒤, Sartre가 사상적으로 영향을 받았다는 R.Dercartes와 M.Heidegger에 대해서도 알고 싶어졌다. 비록 ‘존재와 무’에 대해서 완전히 이해한 것은 아니 지만 부분적인 이해만으로도 나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그래서 Sartre가 영향을 받을 정도의 지성들은 어떤 사고방식을 가지고 자신의 학문을 완성하였는지 알고 싶어졌다. 의미있게 생각하지 않았던 솔로몬의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라는 명언도 지금 생각해보면 ‘존재와 무의 중심내용에 일맥상통하는 것을 느꼈다. 부귀영화를 누렸든, 천대를 당했든 간에 무엇을 당하더라도 그 순간이 지나 과거가 되면 현재의 ‘나’에게 영향을 줄 수 없다는 점에 공통점이 있다. 이런 것을 생각 하며 인류 역사상 뛰어났던 지성들은 비슷한 사고방식을 가졌다는 것을 느꼈다. Sartre와 공자는 자신의 학문을 앞선 시대를 살았던 여러 지성들의 영향을 받아 완성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공자의 경우 논어는 선현들의 말씀을 모은 것이라고 하였으며 Sartre는 Dercartes와 Heidegger 같은 학자들의 영향을 받았다. 당대의 지성들도 선현들의 학문을 연구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기에 후대에 막대한 지식을 줄 수 있었다. 그러므로 ‘존재와 무한 편으로 고전읽기를 끝내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인문고전들을 많이 읽어야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입상 정*윤 수학과 도서:길 위에서
독후감:길 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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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장, 되는 일이 왜 한 가지도 없는 거지? ”
어느 화창한 날, 105번째로 굴러다니던 돌조각을 투덜거리며 걷어찼을 때, 나는 스무 살 이었다. 어영부영 겨우내 뽑혔던 학과의 전공 공부는 하기 싫었고, 당최 교수님들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이해도 되지 않았다. 억지로 얼굴에 덕지덕지 바른 화장품에서 어색한 냄새가 났다. 청춘이라는 단어가 싫었다. 그것은 마치 참담하게 실패한 인형극처럼 시시할 뿐이었다. 적어도 나에겐 그렇게 느껴졌다. 대 학생이 된다는 의미에 대해서 단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 없었던 나는, 그 저 립스틱을 멋지게 바르고, 즐겁게 공부를 하면서 나날을 보내는 대학생들을 어 깨 너머로 힐끔거리며 막연한 기대감을 품었다. 모두가 참 좋은 시절이라고, 너도 곧 누리게 되리라고 해맑게 이야기해주었다. 그러나 정작 대학에 와서 바라본 풍경은 오염된 생태계에서 막 구조된 펠리컨처럼 답답하고 초췌해 보였다. 모든 것이 한참 진부했다. 모두가 평범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모두가 고달픔을 모면하기 위해 스펙을 위한 스펙을 향해 발로 뛰고 있었다. ‘그냥 한 길로 걸어가면 되는 거야, 모두가 다 그렇게 하니까 라면서 좁은 골 목으로 몰아넣어지고 어느 순간 숨통이 막힐 때면 모든 것은 이미 책임질 수 없 을 정도로 복잡해졌다. 그러니까, 그저 기계처럼 곱게 펼쳐진 수순을 밟고 지나가 야 하는 과정이 그토록 찬양받던 청춘의 진짜 정체였다. 속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니까, 스무 살이 되면 일이 일사천리로 풀릴 것 이라 굳게 믿고 살아온 지난 19 년이 몽당 굴뚝 연기처럼 날아가는 것을 나는 똑똑히 목격했다. 나는 그저, 비칠 비칠 살아온 나라는 인간의 윤곽선을 제대로 긋고 싶을 뿐이었다. 그러나 나의 커다란 곰발을 감당하지 못하는 구두를 신고 절뚝거리며 다음 강의실을 찾아 헤매 는 것 외엔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어느 순간 멍하니 넋을 놓을 때면 나는 종종 공황상태에 빠졌다. 어째서 이토록 인생은 진부한 걸까? 나는 어떻게 살아야 진부하지 않을 수 있는 걸까? 나는 어떤 사람이어야 진부함을 피할 수 있는 걸 까? 하지만 그런 질문자체가 이미 죽도록 진부했다. 초조함이 번개처럼 내 어둡고 고요한 밤하늘에 쩍쩍 갈라졌다. 그 와중에 나는 묵묵히 책을 읽었다. 하지만 책을 읽으면 내 자신과 모든 현실을 잊을 수 있다는 유쾌하지 못한 이유로 읽었을 뿐 이었고, 그렇게 섭취한 내용이 과연 의식의 식도를 제대로 타고 홀러내렸을지 확신하기 어려웠다. 그러던 어느 날, 여느 순간과 마찬가지로 건조한 목요일의 오후 즈음이었나? 나 는 만나고 말았다. 언젠가 어떤 책에서 읽었던 문장의 주인이었던, 작가 잭 케루 악의 작품 <길 위에서>를 말이다. 그 결정적인 문장은 바로 이런 내용이었다. ” 사람은 그 인생에서 한번쯤은 황야로 들어가 건강하면서도 어느 정도는 지루하기까지 한 고독과 절망을 경험해야 한다. 자신이 오직 자기 자신의 육체에 의존 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뒤에 스스로의 진실한, 숨겨져 있는 힘을 깨달아야 한 다.” 깊은 마음 속 외딴 곳이 푹 찔린 것 같았다. 그 요란한 끌림의 이유를 설명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나는 오래도록 그 이름을 기억했고, 오후의 도서관에서 우연히 그 이름을 보았을 때, 막연한 기대감에 이끌린 채로 , <길 위에서>를 한 손에 들고 뚜벅뚜벅 걸어가고 있었다. 한낮 껍데기 같은 내 육체 뒤에도 진실한, 숨겨져 있는 힘이 존재 하나요? 라는 얄팍한 질문으로부터의 대답에 대한 기대감에 사로 잡힌 채로 말이다. 그리고 지난 몇 주 동안 나는 그와 함께 정말로 ‘길 위에서 삶을 보냈다. 책을 덮은 마지막 순간에는 끔찍한 감기에 걸리고 말았다. 책 속에서 거침없이 미친 짓 거리를 하던 딘 모리아티와 주인공 샐 파라다이스도 한 번 안 걸린 감기에 나는 그대로 자리에 드러눕고 말았다. 가래로 들끓는 목울대를 부여잡고 나는 분한 기 분마저 들었다. 그러면서도 이상하게 기분이 묘하게 후련한 것은 얌전한 겉표지 아래의, ‘참을 수 없는 광기의 무거움에 납작해진 내 머리 탓일지도 모르겠다.
이 책은 기본적으로 젊은 작가 ‘샐 파라다이스’가 떠난, 길고 긴 탐험의 길 위 에서 만난 사람들과 여행에 대한 이야기이다. 커다란 미국 대륙의 동부와 서부를 몇번씩이나 횡단하며 겪었던 일들, 그리고 마지막에는 멕시코까지 내려가는 모험 심을 자랑한다. 60년대의 비트제너레이션의 모습을 보여주는 일화들, 광기어린 부랑자와 예술가 친구들이 모여 겪는 해프닝들 역시 뜨거운 여행 내내 태양처럼 작 열한다. 그리고 주인공보다 더 주인공의 역할을 자처하는 ‘딘 모리아티’를 주축으 로 길이 펼쳐진다. 그 길 위에는 여자와, 벤제드린, 재즈와 술이 넘쳐흐른다. 지금 까지 뜨뜻미지근한 안방의 가장자리에서만 살아온 나로선, 한동안 쉼 없이 등장하는 마약과 재즈 뮤지션의 이름들, 히치하이크의 돌풍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딘 모리아티는 한 때 뉴멕시코의 소년원에서 썼던 편지로 인하여 주인공 샐과 인연을 맺게 된 인물이다. 그는 인생에서 오직 섹스와 여자, ‘미국식 기쁨’을 거칠게 분출하는 범죄행위만을 품고 달려온 제동이 걸리지 않는 오토바이를 연상시켰다. ‘그저 세상사에 열심이었고 빵과 사랑만을 갈망하는 그의 원초적인 모습에서 주 변의 사람들의 반응은 딱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정신분열증에 걸린 어릿광대, 혹 은 거룩한 시인. 그의 자취를 밟아나갈 때마다 이토록 모호한 인물을 책 밖에서 나, 책 속에서나 처음 만나 본 터라,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나까지 쩔쩔매게 되었 다. 과연 샐 파라다이스가 악의 없이 그의 모든 걸 이해하고 선망하는 지 몇 번이 나 의심했다. 그러나 그들의 우정은 다소 광기어린 방향으로 굳건해지기만 했다. 책장이 넘어 갈 때마다, 길 위에서의 시간도 흘러간다. 그 동안 마주치게 되는 인물들이 연이어 등장하며, 그들은 각각 다양한 개성과 광기로 똘똘 뭉쳐 있다. 특히 나 내가 좋아했던 몇몇 인물들은 정말로 ‘제대로 미친’ 사람들이었다. 미친 초현실주의자, 그리고 어두운 정신을 지닌 우울하고 시적인 사기꾼으로 불 리는 카를로 막스는 매번 ‘어딘가의 우울’ 이라는 시를 구상하며 그들에게 소리치 고는 원숭이 춤을 추곤 한다. 샐이 덴버에 도착해서 만났던 채드 킹은 니체적 인 류학자로, ‘자기가 가지고 있는 머리 가죽의 개수를 자랑한 다음 언제나 쑥스러워 하는 인디언들의 모습에 깊이 매료 된 채 일평생을 보내는 사람이다. 그리고 늘 “늙은 대가에게 새로운 곡을 가르칠 순 없는거야” 라고 시니컬하게 말하는 유쾌한 도둑놈 레미 봉쾨르와 함께 샐은 샌프란시스코에서 잠시 동안의 막사 경비원 일을 하기도 한다. 그 외에 뉴올리언스의, 느린 말투로 모든 것에 비평하는 올드 불 리와, 매번 헤밍웨이 스타일의 단편을 집필하는 성마른 소설가 롤랑 메이저, 사랑을 사랑한다는 멕시코 여자 테리, 실존했던 가수였으며 ‘오루니’를 입에 달고 연주했던 재즈 뮤지션인 슬림 갤러드 등등, 마치 직접 소개 받은 것 같은 기분이 드는 생생한 인물들이 길 위에서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다시 나타나기를 반복한다. 하지만 그 많은 인물 중, 특히나 내 마음을 사로잡은 사람들이 있었다. 언젠가 샐 이 뉴욕에서 만났던 롤로 그렙이라는 미치광이는, 등이 쭉 찢어진 파자마를 입고 는 베르디의 오페라를 틀어 놓고 그 음악에 맞춰 팬터마임을 하는 일 외에는 그 어떤 것에도 관심이 없다. 그는 발작적인 도취상태에서 목을 좌우로 돌려 대다가, 몸을 뒤틀고, 울부짖고는 마지막에 절망하며 꽈당 하고 뒤로 쓰러지기를 반복했다. 딘은 롤로 그렙을 우러러보며, ‘우리의 목표’라고 극찬한다. 딘이 롤로 그렙을 극찬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내 머리까지 좀 이상해지는 것 같았다. 옛 17세기 악보 원본을 옆구리에 끼고 악을 쓰면서 뉴욕의 부둣가를 비틀 비틀 걸어가는 위대한 학자라고 일컬어지는 롤로 그렙이 이 책의 진짜배기 ‘미친놈’ 딘 모리아티에게 영감을 준 것은 놀랍지 않았다. 하지만 롤로 그렙을 마음속 에 생생하며 그리면서 나 역시도 그처럼 되고 싶다. 라는 생각을 나도 모르게 했을 때는 정말 깜짝 놀라고 말았다. 뒤이어 조지 시어링이라는, 실존했던 영국인 재즈 피아니스트에 대한 묘사가 나왔다. 그의 광기어린 정열과 화음으로 범벅이 된 연주를 들으며 땀을 뻘뻘 흘리던 딘이 연주가 끝난 후, 텅 빈 피아노 의자를 가리키며 “신의 빈자리” 라고 말할 때, 나는 그만 너무나도 감동받고만 나머지, 나 역시도 당장 자리를 박차고는 미쳐버리고 싶었다. 말하자면, 광기는 은총이었던 것이다. 이런 저런 격한 감정의 급류 속에서 나는 어느 덧 진짜 길 위에서 서있었다. 어디선가 격렬한 비밥 재즈가 들려왔고, 멕시코 국경의 광활한 풍경이 보이기도 했다. 도로를 걷고 있으면 덜덜 거리는 트럭의 운전석에 딘 모리아티가 고개를 슥 내밀고 “우와!” 라고 연신 외칠 것만 같았다. 하지만 책의 마지막에 도달했을 때, 딘의 모습은 너무나 초라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딘이 어떻게 되었는지도 잘 이 해할 수 없었다. 지금껏 곁에 있었던가 싶은 그림자처럼 흐릿하게 뉴욕의 골목 귀 퉁이로 사라지는 딘의 모습이 이제까지 길과 책과 나를 달궈놓은 딘 모리아티가 맞나 싶었다. 그래서 몇 번이나 마지막 부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실패한 도박판 에서 선뜻 떠나지 못하는 주정뱅이처럼, 나는 계속해서 맴돌고, 맴돌고, 또 맴돌고 있었다. 이 책 너무 어렵잖아, 시간이 지나자 나는 도리어 화가 나기 시작했다. 책을 덮은 후 한참동안 심한 감기를 앓았다. 결국에는 얻고 싶은 대답은커녕, 세 상에 대한 나의 관념만 더욱 복잡해지고 모호해진 것 같아서 마음도 상했다. 무아지경의 상태에 빠져서 주말동안에는 아무런 일도 하지 못했다. 밤에는 잠도 잘 오 지 않았다. 의식의 초원에서 늘어나기만 하는 수백만 마리의 양들을 방목하며 나 는 생각에 잠겼다. 그토록 고독한 길 위에서 결국 홀로 걸어가야 할 나는 누구인 걸까? 정말로 나는 누구인걸까? 입술을 깨물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답을 찾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책을 다시 읽었고, 가슴으로 그었던 밑줄을 다시 한 번 지그시 되새겨보았다. ‘노을이 붉게 물들 무렵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그 순간은 내 평생 단 한 번밖에 없었던 아주 독특하고도 묘한 순간이었다. 나 자신이 누군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집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었고, 여독에 지쳐 뭔가에 홀린 듯한 상태였는데, 한 번도 본 적 없는 싸구려 호텔 방안에서, 밖에서 들려오는 증기기관의 씩씩거리는 소리, 호텔의 오래된 나무 바닥이 삐걱거리는 소리, 위층의 발소리, 그리고 온갖 종류의 슬픈 소리들을 들으며 금이 간 높은 천장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이상하게도 한 십오 초 동안 내가 누군지 정말로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겁이 나진 않았다. 나는 그저 다른 누군가, 어떤 낯선 사람이 되었고, 나의 삶 전체는 뭔가에 홀 린 유령의 삶이 되었다. 황혼 빛이 감도는 부랑자의 고백 속에서 나는 뭐라고 형용할 수 없는 가슴 깊은 위안을 느꼈다. 그저 먼 곳에서 아련하게 들려오는 기 차 소리와, 낯선 모든 것이 주는 감미로움이 눈꺼풀 사이로 스며들었고, 그제 서 야 나는 잠이 들었다. 사실 길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길이 아니라고 굳게 믿었던 대 평원과 늪지, 야생의 세계 모든 곳에도 결국엔 길이 존재한다. 책 속의 샐과 딘, 그들의 괴짜 동료들은 직접 히치하이크를 하거나, 차를 몰고 털털 거리며 길 아닌 길을 향해 거침없이 나아갔다. 딘 모리아티는 언젠가 잃어버렸던 자신의 아버지, 늙은 딘 모리아티 노인을 찾아다닌다. 그리고 서스쿼해나 강 근처에서 만났던 유 령이었던 늙은 부랑자는 ‘캐나다’가 아닌, ‘캐나디’를 찾아 서쪽을 동쪽이라 믿으며 헤매다 결국은 산맥의 어둠속으로 홀연히 모습을 감춘다. 그 모든 부랑자의 모 습은 결국 나의 모습이었다. 태초부터 뭔가를 잃어버렸다고 굳게 믿고 정처 없이 헤매고, 지독한 고독 속에서 잘 못된 방향으로 끊임없이 흘러가는 장면들은 결국 나의 초상 이였고, 내가 아닌 모든 사람들의 초상 이였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길 위에서 고독하게 움직이고, 멈추고, 고민하고 다시 움직인다. 걸어가고, 또 걸어간 다. 결국 자신 안에 숨겨져 있는 진실한 힘이란, 자신만을 위한 길을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길은 존재하지 않으니까. 결국 자신이 선뜻 발걸음 옮기는 그 곳이 나의 길인 것이다.
처음으로 세상을 둘러보았다. 오랜 시간동안, 나는 망원경 혹은 현미경으로만 세상을 살펴보기를 고집했다. 하지만 고개를 들고 육안으로 바라본 세상은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눈이 부셔서 감아야 했다. 한사람, 한사람이 그려나가는 길들이 너무나 찬란했으니까..
입상 김*수 경제학과 도서: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독후감: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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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讀後“評”이 아니라 讀後“感”이었다. 이 소설에 대한 평가는 문학평론가가 할 몫이고 나는 나의 생각, 느낌 그리고 내 이야기를 해야겠다. 이 소설은 제목만 생각해도 벌써부터 나를 설레게 한다. 나는 글을 쓸 때면 제목을 어떻게 정할지 많은 고민을 한다. 그 글의 내용과 주제를 표현하면서 너무 적나라하지도 않게 또 너무 우회적이지도 않게 말이다. 이 소설의 제목이 그러했다. 이 밀란 쿤데라 작가도 이 소설의 제목을 정하고 꽤 만족스러워 한 듯 싶다. 실제로 이 작가는 후기 작품 소설에서 화자로 등장하여 이 제목을 한 번 더 쓰고 싶어했지만 그러지 못하여 아쉬움을 토로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 제목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이는 세 부분으로 구성되낟. 존재하다. 존재가 가볍다. 그리고 그 존재의 가벼움을 참을 수 없다.
먼저 존재함이란 무엇일까. 나는 이 존재란 단어를 지극히 좋아하는 한편 지극히 싫어하기도 한다. 이 단어는 너무도 오묘하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들이 말하는 어떤 사물이 있고 없고의 그 존재가 아니라 어떤 본질적인 것의 존재함, 사람들 모두가 일상 속에서 그것을 망각 속에 부쳐 잊을 채 살고 있지만 실제로 분명히 존재하는 그 본질적인 것의 존재 말이다. 지금 글을 쓰고 있는 나는 왜 존재하는지. 도대체 왜 이 세계가 무가 아니라 어떤 것이 존재하고 인간들이 존재하는지. 과연 철학자 셀링이 저주받은 질문이라 칭할 만하다. 답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존재 철학의 거장인 하이데거가 말했다. “인간의 존재와 본질은 질문의 형태를 취하기 때문에 질문 그 자체가 이미 하나의 해답이다.” 질문이 곧 해답이라니. 나에겐 이 명제가 불만족스러웠으며 하나의 진리인 해답을 찾고 싶었다. 어쨌거나 이 책 또한 그 해답을 찾는 데 도움이 될까 하는 생각에서 읽은 책 중 하나이니 말이다.
바로 이러한 인간 존재의 양태 때문에 나는 인간이 존재하는 조건이 가볍다고 생각한다. 이 가볍다는 말은 애초에 우리에게 정해진 본질이 없다는 말이다. 우리의 삶은 오직 삶 그 자체로만 본다면 한없이 무의미해 보인다. 우리 인간은 연극 배우에 불과하다. 그것도 아주 불행한 연극배우이다. 일순간, 아무런 준비도 없이. 한 번도 리허설을 해 본 적도 없이 무대에 있다. 아무런 대본도 없이 무대에 내던져져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한번이 곧 끝이다. 자신을 보고 있는 관객들 앞에서 어떤 대사를 읊어야 할지 모르는 채 아찔함과 아득함을 느낀다. 진실로 이는 참을 수 없다. 자신의 존재가 그토록 무의미하다는 건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각자 자신만의 의미를 만들고 그 삶에 대응하여 살아간다. 이 깃털처럼 가벼운 우리 존재 조건을 붙잡아줄 무게 중심을 스스로 찾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내 삶은 오랫동안 무거움 그 자체였다.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앞에서 밝힌 사유처럼 인간 존재 조건이 가볍다는 인식조차 없었으며 또 그러했기 때문에 이후에 내 삶에 무거움을 부여한 것도 아니었다. 내 삶은 처음부터 무거움의 의미를 부여받았다. 나의 부모님은 아주 독실한 천주교인이신데 부모님은 나를 낳으시기 전부터 아들이 생기면 꼭 미카엘이란 세례명을 붙이기를 원하셨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유아세례를 받고 미카엘이란 세례명을 부여받았다. 놀라운 건 내가 태어나고 삼년 쯤 뒤에 부모님이 미카엘의 영명 축일을 아라보았는데 그 날짜가 정확히 나의 생일과 겹치는 것이었다. 의도치 않게 미카엘의 축일과 나의 생일이 정확히 9월 29일로 겹치는 것이었다. 사실 단순히 확률적으로 보았을 때 365분의 1이라는 충분히 있을 법한 우연으로 비추어졌을지도 있었겠지만 부모님은 그것에 아주 큰 의미를 부여하셨다. 그리고 나는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도 집에서 내 본명이 아닌 세례명으로 불린다. 부모님은 나를 미카엘이 아닌 본명으로 부르신 적이 한 번도 없다.
나 자신 또한 이러한 환경 속에서 커 오며 자의식을 형성하였기에 나 스스로도 무언가 선택받고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종교적 가치관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기에 나를 포함하여 모든 일들에 대하여 무의미한 것은 없었다. 예컨대 모든 것 이미 하늘의 뜻이 있었고 힘든 일이든 좋은 일이든 모두 중요성을 내포하고 있어서 아무 이유 없이 일어나는 일은 없었다. 그 중 지금 생각해보면 아주 우습지만 어릴 적 내겐 습관이 하나 있었는데 길을 가면서 신호등이 내가 건너는 시간에 곧바로 초록불로 바귀면 하늘이 나를 도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때 그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었다. 중학교 시절까지도 진실로 나는 그렇게 생각을 했다. 하지만 점차 크면서 이러한 종교적 세계관에서 많이 벗어나긴 했지만 그것은 커다란 하나의 외적인 기준을 다른 것으로 대체한 것에 불과한 것이었고, 그러했기 때문에 나는 나에 대한 우월감과 어떤 사명감 그리고 그러해야만 한다는 당위성을 벗어나지 못했다. 어디에서나 존재의 이유를 찾고자 했으므로.
지금 내 방에는 밀레이 대표작인 <만종>이 커다란 액자에 담겨 있다. 보통 이 작품을 해석하기를 삶에 대한 경건한 자세와 진지함 등을 말한다. 황혼녘 한 남자와 여자가 감사의 기도를 올리는 모습은 더없이 평화스러워 보이고 엄숙해 보인다. 하지만 초현실주의자 화가인 살바도르 달리는 이 엄숙함을 깡그리 해체한다. 달리의 해석에 따르면 여인의 자세는 기도하는 모습이 아니라 막 교미를 마친 암사마귀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그녀는 가면을 쓰고 남자에게 덤벼들기 직전의 모습이다. 남자는 남편이 아닌 그녀의 아들인데, 성적인 기대감과 공포심을 동시에 갖고 있다. 즉 아들은 저항하기 힘든 어머니의 매력에 빠져있지만, 동시에 암사마귀가 교미 후 수컷을 머리부터 씹어먹을 것을 알고 있기에 공포심에 떨고 있다는 것이다. 달리는 근친상간, 곤충의 생태까지 동원하여 밀레의 <만종>을 완벽하게 해체하고 있다.
애초 밀레의 <만종>은 오랫동안 내 방에 걸려 있었고 그것은 곧 나의 삶의 방식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이 작품이 상징하는 엄숙함과 무거움을 살바도르 달리는 또 다른 의미로 해석하며 조롱한 것이었다. 처음 달리의 해석을 보았을 때는 충격적이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사람이 인생에서 어느 한 권의 책을 통해서 혹은 어느 하나의 사건을 통해서 그의 가치관이 한 번에 바뀌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사람은 시간을 통해 서서히 여러 경험을 통하여 그것을 종합저긍로 해석하며 가치관을 형성하는 것이다. 내게는 밀레의 작품 <만종>의 본래적 의미를 뒤집은 달리의 해석도 그 경험 중 하나였으며 그리고 내가 직접 부닥치며 겪은 여러 사건들과 일련의 책들을 통해서 또 다른 가치관을 형성하게 되었다. 그것은 <만종>에서의 삼종기도를 올리는 그 분위기와 엄숙함, 본질적으로 의미 부여된 삶으로부터의 도피였다.
어린 아이들은 모든 걸 설명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이는 세상을 통제하려는 아이의 욕망에서 비롯되는 것이고, 그들은 모든 걸 통제하기 위해 모든 걸 설명하고 싶어 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오랫동안 어린 아이인 채로 있었다. 하지만 세상에는 나의 통제를 넘어서는 것들이 있었고 더구나 의미를 부재하는 것 또한 분명히 존재했다. 나아가 나는 점차 오랜 시간 동안 나를 지탱해 왔던 무거움의 의미에 싫증을 느꼈고 배신하고 싶은 욕구를 느꼈다. 더 이상 나는 그렇게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 보통의 존재란 걸 깨달았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자존감의 사라짐이었기에 슬프기도 했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자유를 의미했기에 기쁘기도 했다. 나는 이제 한없이 가벼움을 갈망하고 추구했다.
어떤 것에도 정해진 가치나 기준은 없었으며 모든 건 허용되었다. 리허설 그 자체가 곧 삶이고 그 삶은 단 한번만 재현되기에 그 삶에 대해 결코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는 없는 것이다. 살면서 응당 마땅히 이루어야 할 것도 없었고 의무도 없었기에 나는 언제든지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심지어 극단적으로 이 삶을 영영 떠나는 것도 두렵지 않았다. 그것은 내 자유였으니 말이다.
이제 소설 이야기를 조금 말 하여도 될 것 같다. 하지만 이는 곧 내 이야기의 연장선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이 소설 속의 등장인물들이 각각 나의 모습들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타인은 곧 나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며 우리는 타인을 바라볼 때 자신 안에 내재한 또 다른 자아상을 발견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와 마찬가지로 나는 소설 속 등장인물들도 그런 식으로 인식한다. 앞서 말했듯이 인간의 삶 자체로써만 본다면, 즉 인간의 존재의 양태인 그 조건만 본다면 우리의 존재는 가벼운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각자 나름대로의 의미를 부여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그 의미는 가벼울 수도 있고 무거울 수도 있다.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크게 두 부류로 나누어 볼 때 토마스와 사비나는 가벼움을 그리고 테레자와 프란츠는 무거움을 각각 대변한다.
나는 내 생각의 흐름에 맞추어 이 각각의 인물들을 재배치해 보았다. 먼저 프란츠라는 캐릭터는 무거움의 극상이다. 그는 젊은 대학 교수인데 안락한 환경 속에서 자랐으며 일생을 책 속에 파묻혀 지냈기에 현실 세계를 제대로 직시하지 못한다. 지식인층인 그는 그 당시 체코의 혁명 시위를 항상 동경하며 지낸다. 자신의 평온한 삶과 대조되는 역동적인 삶을 막연하게 그리워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주체적 의식에서 형성된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만들어진 이미지를 가리키는 것이다. 지식인층인 그는 그 당시 체코의 혁명 시위를 항상 동경하며 지낸다. 자신의 평온한 삶과 대조되는 역동적인 삶을 막연하게 그리워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주체적 의식에서 형성된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만들어진 이미지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미지와 만들어진 상징 속에서 자신의 모든 의미를 찾는 것이다. 그는 허영심과 가식을 채워져 있다. 더불어 사랑을 할 때조차 그는 한 여인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속에 내재된 여성상을 사랑한다. 요컨대 프란츠는 이미지적인 무거움을 가진다. 이미지 속에서 실재는 가려져 있으며 그는 참된 삶을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반면 사비나는 가벼움의 극상이다. 그녀는 프란츠와는 정반대되는 인물인데 그녀 는 만들어진 이미지를 극도로 혐오한다. 사회의 속박과 그리고 자신을 규정짓는 모든 의미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비사실주의 화가라는 그녀의 직업에서 보이듯이 그녀는 겉으로 드러난 이면을 끝없이 경계한다. 작가 밀란 쿤데라는 그 겉의 이미 지를 ‘키치’라고 표현한다. 이 용어는 소설 전체의 주제와 관련지어 아주 중요하다. 이 키치는 독일어인데 영어로는 shallow, 얕은 것 즉 피상적인 것이다. 의역하자면, 어떤 것을 해석하고 편집한 것이다. 사비나는 바로 이 키치의 세계에 반항한다. 반대로 프란츠는 이 키치의 세계, 만들어진 이미지 속에서 사는 것이다. 소설에서 이 두 사람은 잠시 연인 사이로 나온다. 하지만 두 사람은 근본적으로 가치관이 정 반대이기 때문에 곧이어 결별한다. 프란츠는 사비나의 모습 안에서 어떤 역동적이고 진보적인 여성상을 발견하고 그것을 오해하며 결혼을 요청하지 만 하지만 다시 사비나는 그 사랑의 무게가 싫었고 아내 역할을 맡아서 그에 맞 추어 삶을 사는 것은 참을 수 없었기에 프란츠가 청혼하는 순간 망설임 없이 프란츠를 버리고 떠난다. 키치와 무거움 속에 사는 프란츠와 비키치와 가벼움 속에 사는 사비나 모두 삶이 진실되어 보이거나 그렇게 행복해 보이지는 않는다. 우리는 과연 사비나처럼 비키치의 삶을 살 수 있을까. 우리가 생각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의식을 가진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우리는 어떤 사물이나 사건에 대하여 하나의 해석을 만들지 않을 수 없다. 이미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그 이전 만들어진 언어의 이미지 안에서 생각을 하고 그런 식으로 말을 하며 행동을 하는 것이다. 우리는 항상 군중 속에서 살고 있고 완전한 사회의 관습 안에서 탈 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 중 그 누구도 초인이 아니며 키치로부터 완전하게 벗어날 수 없다. 우리가 아무리 키치를 경멸해도 키치는 인간 조건의 한 부분인 것이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나는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고 한없이 가벼워질 수 없다면 다시 그 이전의 무거운 삶으로 돌아가야 하는가. 사비나가 추구하고자 하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프란츠의 삶을 택해야 하는가. 밀란 쿤데라는 무거움과 가벼움에 대한 판단을 유보하고 또 다른 두 인물인 테레자와 토마스를 통해서 새 로운 모습을 제시한다. 앞서 말했듯이 테레자 역시 프란츠와 마찬가지로 무거움을 대변하는 인물이다. 하지만 어둠이 깊이의 표시는 아니라는 말도 있듯이 무거움도 깊이의 표시는 아 니다. 그렇기에 이 두 인물은 같은 무거움이 아니다. 프란츠는 외부적으로 만들어 진 의미에서 무거움을 부여하므로 얕은 무거움이며 테레자는 자신의 내면에 비축 한 생명력에서 그 무거움을 찾으므로 깊은 무거움이다. 그런 의미에서 테레자는 더없이 순수해 보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유치해 보이기도 한다. 예컨대 테레자는 시골에서 출장을 온 외과 의사인 토마스를 첫 눈에 반하고 그와 관련지어 나타나 는 모든 우연들에 의미를 부여하여 필연으로 만들고 운명으로 만든다.
반면 토마스는 사비나처럼 가벼움의 인물이지만 사비나와 다른 점은 토마스는 동정심이라는 감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토마스는 자신을 운명적 사랑으로 인식하고 시골에서 무턱대고 그를 찾아 올라온 테레자에게 점차 연민을 느낀다.처음 토마스는 테레자와는 달리 그 우연적 사건들을 이해하지 못했고 테레자 역시 다른 여자들처럼 그저 육체적 성관계를 가지는 파트너에 불과했지만 점차 사랑에 빠지고 동정심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 소설에서 토마스는 가장 존재론적 지위 변화가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이는 테레자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테레자의 그 깊은 무거움은 토마스를 두 가지 범주에서 변화를 겪게 만든다. 토마스는 의무 영역에서 외과 의사라는 의무감을 버리고 점차 하층 노동자로 추락하는 반면 감성 영역에서는 무정함의 가벼움에서 동정심과 연민의 무거움으로 옮겨 간다.
작가는 하나의 정답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이 각각의 네 명의 인물의 삶에 대한 태도를 보여주면서 가벼움과 무거움에 대한 판단을 독자에게 맡기고 있다. 그러나 눈여겨보면 그 속에 이미 답이 드러나고 있는 듯하다. 본질적으로 인간 존재 조건 의 가벼움과 그리고 또 하나의 조건인 키치의 세계 속에서 살 수 밖에 없는 그 무거움 사이에서 우리는 삶의 태도를 결정한다. 인간은 의미와 더불어 살고 있다. 그렇기에 우리의 모든 태도는 어느 정도 무거움을 부여받은 셈이다. 하지만 우리는 침울하지 않으면서도 무거울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물에 적 절한 무게를 부여하기만 하면 된다. 그럴 수 있는 사람이 무게 있는 사람이다. 그 는 적절한 관심으로 세상을 채운다. 무거운 영혼이 아니라 생각하는 영혼이 됨으로써 충분한 거리를 갖고 판단하고, 그럼으로써 세상에 영혼을 부여한다. 이와 같은 태도는 삶의 무거움이 아니라 삶 속의 무거움이다. 그렇기에 가벼움이 들어갈 여지를 남겨 두는 셈이다.
나의 어린 시절의 삶 그리고 프란츠와 같은 삶은 무거움 그 자체이다. 인생은 무거움과 가벼움이 모두 필요한 것이다. 무거움은 사물의 깊이와 정신의 진지함을 가리킨다. 가벼움은 사물의 높이와 정신의 자유를 가리킨다. 구체적 현실과 관계 없는 생각이 텅 비어 있다면 생각 없는 구체성 또한 눈던 것이다. 높이 올라 거리를 두고 내려다보지 않으면 분별 있는 현실 속에 있지 못하고 닫힌 현실 속에 있게 된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무거움은 세상에 빛을 솟아나게 하는 섬광 같은 무거움이고 또한 아름다운 무거움은 중력의 중심을 닮았다. 그것은 균형점이다. 균형점은 전혀 슬프지 않은 근본적인 몸짓에서 온다. 그것은 사물에 적절한 무게를 부여하는 몸짓이다. 요컨대, 우리의 존재는 결코 무거움 그 자체도 아니며 한없는 가벼움 그 자체도 아니다. 그 양 극단 사이에 위치한 우리는 그 안에서 하나의 주제를 선택할 수 있고 그에 맞추어 의미를 만들며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정답은 없기에 그 주제를 스 스로 선택하는 것이지만 그것이 자신의 참된 내재적 고유성과 감성의 영역에 가 까울수록 좋을 것 같다. 그럴수록 더 아름다워 보인다. 음악에서는 하나의 주제가 되는 선율을 바탕으로, 선율·리듬·화성 따위를 여러 가지로 변형하여 나가는 기악곡 형태를 변주곡이라 칭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존재는 변주곡과 닮았다. 우리는 하나의 주제의 맞추어 수많은 음들을 해석하고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며 여러 양상의 선율을 쏟아내는 것이다.
“인간의 삶은 마치 악보처럼 구성된다. 미적 감각에 의해 인도된 인간은 우연한 사건을 인생의 악보에 각인될 하나의 테마로 변형한다. 그리고 작곡가가 소나타의 테마를 다루듯 그것을 반복하고, 변화시키고 발전시킬 것이다. … 인간은 가장 깊은 절망의 순간에서조차 무심결에 아름다움의 법칙에 따라 자신의 삶을 작곡한다.”
입상 황*영 항공우주공학과 도서:자유론
독후감: 자유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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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경제사상사 강의를 듣던 중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을 처음 알게 되었다. 당시 강의를 하셨던 교수님은 그의 책 『자유론』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에 대해 간략하게 알려 주셨다. 그즈음 나는 ‘개인의 자유는 어디까지 허용이 되어야 하는 것일까?’라는 질문에 나름대로의 해답을 찾고 있던 중이었고 마침 우연히 알게 된 그의 이러한 질문과 해답은 나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 가 그의 생각에 모두 동의한 것은 아니었다. 내가 그의 책에 관심을 가진 이유는 현재 나의 고민에 대해 이미 선대의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고 고민하여 나름의 결론을 내었었다는 것 그 자체에 있었다. 경제사상사 강의 중 교수님은 학생들에게 존 스튜어트 밀의 자서전의 내용도 간략하게 이야기해 주셨다. 밀의 사상적 배경에 대한 이해에 많은 도움이 되었기 에 기억나는 대로 조금 옮겨 볼까 한다. 존 스튜어트 밀은 벤담주의자이자 리카도 경제학의 신봉자였던 제임스 밀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아버지의 극성으로 엄청 난 조기 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3세 때 그리스어를 배우고 8세 때 라틴어를 배웠으며 이후에도 수학, 물리학, 심리학, 논리학, 경제학 등 20세 이전에 이미 당대의 거의 모든 지식을 습득했다고 한다. 그의 자서전의 표현에 따르면 당시의 그는 마 치 생각하는 기계와 같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 제임스 밀은 예술이나 시 등은 가르치지 않았으며 정서적인 면에서도 아들을 칭찬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꾸짖는 일이 잦았다고 한다. 이러한 유년기를 보낸 존 스튜어트 밀은 20대가 되어 정신적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그는 엄청난 지적 성취에도 불구하고 동인도회사에서 공무원으로서 그리 대단치 않은 삶을 살아가게 된다. 그의 이러한 정신적 위기는 우여곡절 끝에 자신의 배우자를 맞이하면서 끝나게 된다. 그는 그의 아내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이후 예술과 시 등에 심취하였다. 그의 이러한 감성적인 성향은 그의 아버지를 이 어 벤담주의 학설의 과격한 면을 완화하는데 도움이 되기도 하였을 것이다. 「자 유론』의 서문에서도 그는 자신의 아내에게 감사를 표시하고 있다. 밀이 『자유론』을 쓰게 된 연유는 이러하다. 밀은 인간은 행복을 추구하는 존재라고 규정하게 되었고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행복한 삶인가에 대해 고민했다. 그는 자유야 말로 인간의 행복을 실현시키는 가장 적절한 수단이라고 생각했다. 인간은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할 때 가장 행복하다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자유는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제한될 필요가 있다고 말하여 자유를 제한 의 정당성을 부여하였다.
주로 정부 또는 국가 권력은 사회 전체의 이득을 위하여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기도 한다. 어떤 이들은 그러한 억압을 완전히 부정하고 아나키즘을 주장하기도 한다. 자신을 아나키스트라고 주장하는 어떤 이와 대화를 나눈 적이 있는데 그는 마치 정부라는 권력 집단이 사라지면 현재의 많은 문제들이 일거에 해소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인간은 선사시대부터 이미 고문적인 삶을 살 아왔고 국가라는 제도가 없더라도 대부분의 일반 사람들은 아무 문제없이 잘 살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었다. 나 역시 일정 부분 그들의 생각에 동의하지만 나는 그들이 주장하는 대로 무정부상태가 이루어지더라도 결코 개인의 자유가 완전히 이루어 질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원래 자유란 불완전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세상의 자원은 유한하며 개인의 욕망들 중에는 양립 불가능한 것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어떤 땅을 경작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고 하자. 하지만 만약 이미 그 땅 이 다른 사람에 의해 소유되어 있는 경우, 그는 그 땅을 경작할 자유를 얻지 못할 것이다. 또 어떤 아름다운 한 사람을 배우자로 삼고 싶어는 사람이 아주 많다고 할지라도 결국 그 사람과 배우자가 될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 뿐이다. 이렇게 자유는 아주 작은 부분이라도 침해된다면 그것으로 총체성은 훼손되고 그것은 더 이상 완전한 자유라고 부를 수 없게 된다.
자유가 원래 불완전한 것이라 모든 이가 완전한 자유를 얻을 수 없다면 결국 사회는 개인의 욕망을 어느 정도씩 제한해야할 필요가 있다. 그러지 않으면 구성 원들의 욕망은 갈등을 불러일으키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 방법은 법이나 제도 가 될 수도 있으며 사회 구성원간의 암묵적인 동의나 규칙을 통하여 이루어 질 수도 있다. 이처럼 자유를 억제하는 것이 필요하다면 이제 얼마나 어디까지 억제 할 것이냐 하는 문제가 남게 된다. 즉, 정도의 문제가 남는다.
예를 들어 우리의 정신을 교란시키는 물질들 (커피 등에 들어 있는 카페인부터 담배에 들어있는 니코틴, 술에 들어있는 알코올뿐만 아니라 여러 종류의 마약까지)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일부 예외가 있지만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담배와 술은 합법적이지만 대마초, 코카인, LSD 등 마약은 불법적인 것으로 분류되고 있다. 일 부 국가 예서는 술도 불법적인 것으로 간주하기도 하며 또는 했으며 이와 반대로 또 어떤 국가에서는 대마초와 같은 상대적으로 가벼운 마약을 합법적으로 허용하 고 있다. 국내에서도 정제 마약 이외에 대마초 같은 천연 마약을 합법화 하자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과연 어느 정도 제한하는 것이 옳은가? 제레미 벤담과 제임스 밀, 그리고 자유 론의 저자 존 스튜어트 밀을 포함한 공리주의자들은 이러한 문제에 대해 사회 전 체의 효용을 최대화 하는 방향으로 맞추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최근에 많이 읽힌 『정의란 무엇인가」의 저자 마이클 샌델 등 여러 철학자들이 지적했듯 이 단순히 사회 전체의 효용을 극대화시키는 방향이라는 것은 감정적인 면을 배 제했다는 면에서 비난 받기 쉬우며 실질적으로 그 효용이라는 것을 정량화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온전한 해결책이 될 수 없다.
고전이라는 이름으로 읽히는 책이 모두 그러하듯 그것이 모두 진리는 아니다. 자유론 역시 마찬가지다. 밀의 저작은 아직도 억압 받고 있는 우리들에게 많은 공 감을 불러일으키지만 어떤 부분은 시대가 바뀌면서 또는 다른 성향으로 인해서 옳지 못하다고 생각된다. 예를 들어 밀은 가능하면 자유를 허용하되 미성년자나 정신 발달이 미숙한 사람 또는 심신미약 상태 감정적으로 흥분한 상태에 있는 사람들의 자유는 어느 정도 제한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물론 현재 우리가 취하는 제도가 미성년자들에 대한 규제를 하고 대다수의 공감을 얻고 있지만 이러한 논 리는 식민지 시대에 그들의 통치를 정당화 하는 논리로 사용되기도 했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한다.
밀은 위험한 다리를 건너는 것을 막는 행동은 과연 자유를 제한하는 것인가? 라고 스스로 물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위험한 것으로 확인된 다리를 건너는 것을 다른 누군가가 막는다면 그것은 개인의 자유를 억압한 것인가? 라고 말이다. 아마 그 사람이 말리지 않았다면 그 사람은 다리를 건너다가 죽고 말았을 것이다. 밀은 이것은 실질적으로 자유를 침해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자유란 그 사 람이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므로 그 사람은 다리를 건너고 싶어 했지 물에 빠지려고 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어떤 자유의 침해는 그 사람에 게 이득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것은 자유를 제한 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위에서 말한 경우와 달리 확실한 위해가 아니라 단지 그 가능성만이 존재하는 경우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밀은 그러한 경우 역시 약간의 제한을 가해 위해를 가할 가능성을 상당히 줄 일 수 있다고 말한다. 나는 위에서 마약의 예를 들었는데 이 경우가 그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향정신성 약물로 분류된 약물 중 상당 부분은 의료용으로 사용되는 것들이다. 농약 또한 마찬가지로 사람이 먹을 식물을 키우는데 사용될 수도 있고 사람을 죽이는 데 사용 될 수도 있다. 현재 우리 사회는 밀이 주장한 것과 상당히 유사한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바로 위해를 가할 위험이 있는 약물을 사용하려면 의사 또는 인정된 판매자의 승인이 있어야 하도록 관리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이를 사용한 범죄를 매우 어렵게
만들고 동시에 합법적인 목적에 사용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자유도 그다지 침범하지 않게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처럼 적절한 제약은 개인에게도 사회 전체에게도 매우 바람직하다고 생각된다. 위에서 예를 든 것처럼 위험한 다리를 건너는 어떤 사람을 제약하는 것은 분명 적절해 보인다. 그리고 그것이 위해를 가할 가능성이 있을 때의 대처 역시 충분한 공감을 일으킨다. 하지만 만약 그 다리를 건너려는 사람이 그러한 위험을 충분히 알고 있는 상황에서도 그것은 적절한가 하는 것은 여전히 문제로 남는다. 마약을 복용함으로써 그러한 환각 상태 및 중독을 일으킬 것을 충분히 인지하고 마약을 하는 것, 농약을 먹으면 죽을 것을 알면서도 농약을 마시는 것 같은 일들 말이다. 마약이 주는 어떤 정신 교란 상태를 경험할 자유, 삶을 지속하거나 그만하는 것을 선택할 자유를 정부가 제한하는 것은 옳은 일인가? 그러한 상태는 무조건 나쁜 것인가? 그동안 이러한 것을 막아왔던 이유는 분명했다. 그것은 나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정말로 나쁘기만 한 것인가? 마약은 나쁜 것, 자살은 나쁜 것으로 여기는 이유는 무엇일까?
마약에 취한 상태 또는 중독된 상태에서는 정상적인 사회생활이 힘들게 된다. (마약에 취한 상태에서 타인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다는 것을 문제 삼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러한 논리는 옳지 못하다. 왜냐하면 알코올 역시 그러한 위험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 다. 마약을 집에서 혼자서 한다면 그것은 타인에게 특별한 위해를 가하는 행위가 아니다.) 즉, 노동을 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사회의 입장에서 이는 노동력의 상 실을 의미한다. 자살 또한 마찬가지다 예전부터 여러 종교에서 자살은 금기시되어 왔었다. 에밀 뒤르캠이란 사회학자는 자살에 대해 연구하고 분류하면서 특정 자살을 이기적 자살이라고 분류했다. 그 이유는 자신의 번뇌를 이기지 못하고 현 실 사회를 다른 사회 구성원들에게 떠넘기기 때문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이러한 것들에서 볼 수 있듯이 사회는 그 집단의 이익에 위해를 가하는 어떤 것을 나쁜 것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보드리야르가 그랬던가? 인류는 생산적이지 않은 모든 것들을 금기시해 왔다고 말이다. 그렇다면 자유도 그렇게 집단의 이익을 위해서만 제어되어야 하는 것일까? 무엇을 결정할 때 개체와 집단 둘 중 어느 것에 우선순위를 두느냐 하는 것은 절대적인 답이 없다고 생각한다. 개체와 집단의 이익은 상충되는 부분이 많으며 갈등의 소지는 언제나 내제되어 있다. 그러한 갈등이 최소화되는 지점을 찾는 것이 중요할 것이라 생각한다.
밀은 행동의 자유는 어떤 방식으로든 이유에서든 제한할 수 있지만 사상의 자유에 대해서는 거의 전적으로 확보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그 이유로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다양성이 사라지게 되기 때문이라는 이유를 들었다. 다양성이 말살된 사회는 활력을 잃게 되고 종국에는 자멸하게 될 것이라는 말이었다. 이 부분은 작금의 대한민국을 사는 우리들이 한 번 생각해볼 부분이 아닌가 생각된다. 나 는 이 대목을 읽으면서 칼 포퍼의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을 떠올렸다. 포퍼 역시 닫힌 사회가 아니라 언제나 비판을 수용할 수 있는 열린사회를 주장했었기 때문이다. 포퍼가 생각했던 열린 사회 역시 밀의 그것과 일맥 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는 생각이 든다. 밀은 의견의 자유, 즉 사상의 자유, 생각의 자유에 대해서 말한다. 우리는 무엇이 좋다 무엇이 나쁘다 는 식으로 의견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과연 지금 우리는 그러한 자유를 누리고 있는가? 국가 보안법과 같은 사상의 문제, 언론에 대한 정부의 통제, ‘나는 꼼수다’ 라는 정치 풍자 토크쇼에 대한 정부의 제제, 여전한 인터넷 검열 등 아직도 우리나라에서 표현의 자유가 상당히 침해 받고 있는 실정이다. 미국의 보수적 인권단체 프리덤 하우스가 올해 5월 초에 발표한 2011년 세계 언론자유도 조사 결과 한국은 196개국 중 70위를 기록했다고 한다. 한국이 속한 그룹 역시 바뀌어 자유 국가에서 부분 자유 국가로 바뀌었다. 2006년 31위로 아시아 최고 순위를 기록한 이후 급격한 추락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순위는 박정희 정권 시절의 순위와 비슷한 수준이며 중남미의 자메이카(23위), 아프리카의 가나 (54위)보다도 한 참 낮은 순위라고 하니 현재 한국을 사는 한 사람으로써 부끄러워하지 않을 수 없다.
표현의 자유가 확대되어야 할 이유는 분명하다. 고인 물은 썩기 마련이다. 견제 받지 않는 권력은 썩을 수밖에 없다. 어떻게든 권력은 견제를 받아야 하며 긴장 상태를 유지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에 맞게 건전한 비판과 토론이 수반되어야 하겠지만 단순히 자신과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감정적으로 동의할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 관습적인 이유만으로 제한하는 일은 사라져야 한다고 생각된다. 이것은 사 회 전체적으로도 이득이 없다. 그저 기득권과 권력 집단에게만 이득을 줄 뿐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허위사실 유포죄로 한 전직 국회의원이 대법원 최종 유죄 판결을 받고 수감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 죄는 위헌 소지가 있을뿐더러 현대 의 다른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는 허위 사실유포라는 것만으로는 중형을 내리지 않는다. 이러한 판결은 개인들이 자기 검열하도록 만들 소지가 있어 결국 자기 목 소리를 충분히 내지 못하게 되어 표현의 자유가 침해 받게 될 소지가 있기 때문이 다. 이는 아마 권력층과 기득권층이 바라는 것일 것이다.
책을 읽은 후에도 내가 서두에 언급한 ‘과연 개인의 자유는 어디까지 허용이 되어야 하는 것일까?’ 라는 질문의 구체적인 답은 지금까지도 여전히 찾지 못했다. 다만 그 질문은 내가 살아가는데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는데 중요한 질문이라는 것을 다시 깨닫게 되었다. 아마도 그 답은 모든 다양성이 말살된 기계적인 전제정 치는 아닐 것이고 또한 모든 법과 제도, 규칙들이 사라진 방임의 세계도 아닐 것 이다. 그렇다고 그 둘의 정중앙도 아닐 것이다. 유교에서 말하는 중용처럼 그것은 양쪽의 중간도 아니며 때로 변하기도 하며 어쩌면 답이 없을지도 모르는 종류의 것인 것 같다. “자유”라는 문제는 앞으로도 대해서는 모두가 끊임없이 생각하고 또 생각해봐야 할 문제라 생각된다.
입상 백*원 철학과 도서:존재와 무
독후감:존재와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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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를 호주머니에 넣고 다닐 수 있게 되었을 만큼 기술 문명이 고도화된 오늘날 타인과 관계를 맺는 일도 상당히 복잡하고 다양해졌다. 사람들은 트위터로 실시간으로 자신의 상황을 알리기도 하고, 인터넷 채팅을 통해 비대면적인 의사소통을 하며, 심지어 얼굴을 알지 못하는 낯선 타인과도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곤 한다. 타인과 의사소통을 하는 방식이 앞 시대와 비교하여 굉장히 다채로워지고 그 양에 있어서도 폭발적으로 증가하였지만, 결국은 타인과 나 사이의 ‘관계’에 관한 문제이다.사르트르에 의하면 인간존재는 사물과 마찬가지로 우연한 존재이다. 다만 사물 과 구별되는 것이 있다면 ‘의식’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의식이 없는 사물을 ‘ 즉자존재’라 하고, 의식이 있는 인간 존재를 ‘대자존재’라 한다. 의식은 그 자체로 존재할 수 없다. 의식은 항상 ‘무엇에 대한 형태로 존재한다. 따라서 인간은 항상 무엇인가를 지향하는 존재이다. 그런데 나와 마찬가지로 의식을 가진 대자존재가 등장하는데, 그것이 바로 타인, 즉 ‘대타존재’의 출현이다. 우연한 타인의 존재는 내 실존을 붕괴시키고, 내 세계의 필연적인 몰락을 가져다준다. 타인은 시선으로 나를 끝없이 판단하고 부정하며 변화시키는 존재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나 또한 타인을 바라볼 수 있기에 타인을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 대자존재와 대타존재는 서로가 서로의 주체-타인, 객체-타인의 관계를 번갈아가면서 스스로를 확립해나가 는 존재인 것이다.
인간은 의식하고 자유로이 선택하고 행동할 수 있기에 즉자 존재가 될 수 없는 데도 타자의 시선은 나를 사물처럼 고정시킬 위험이 있다. 타자의 시선은 나를 규정하고 판단하므로 나의 존재는 결국 타자에게 달려 있는 것이며, 타자의 시선은 내게 지옥이 되는 것이다. 사르트르에 의하면 나에게 있어 타자는 나와 대립하고 끊임없이 투쟁하여야 할 대상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나와 타자와의 관계의 한 종류인 남녀 간의 사랑은 어떠한가? 사르트르 식이라면 사랑도 불가능한 것이 되어버리는가? 두 사람은 결국 화해할 수 없는 존재인가? 이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문제가 바로 이러한 것이다. | 오늘날 현대사회에서는 더 이상 여성을 남성의 종속물로 보지 않는다. 여성은 독립적인 존재이다. 두 남녀에게는 각자의 세계가 있고 대등한 관계에 위치한다. 따라서 두 남녀 사이의 관계는 대자존재와 대타존재의 관계에 놓인다. 이 글에서 는 사르트르의 존재론적 관점에서 관계 중에서도 ‘남녀 간의 사랑’을 고찰해보고 자 하며, 구체적으로 영화 (19882) 에 나타난 주인공 에드워드 와 에스페라의 사랑을 통해 분석해보고자 한다.
사르트르의 존재론과 사랑
타자는 나를 제멋대로 규정짓는 존재인 동시에 나의 존재를 확립해주는 존재이기도 하다. 사르트르의 표현을 빌자면 타자는 나라는 하는 하나의 존재를 ‘거기에 존재하게 하는 자이다. 그런데 타자는 내 존재 근거를 부여해주기는 하지만, 내 존재의 책임자는 아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타인의 자유에 달려 있다. 따라서 스스로는 존재 근거를 확립할 수 없는 대자존재인 나는 타자를 요구하게 된다. 이에 대해 사르트르는 “나 자신을 되찾고자 하는 나의 시도는 근본적으로 타인을 다시 끌어들이려고 하는 시도이다.”라고 말했다. 이를 사랑에서 이야기해보자. 서로 사 랑하는 두 남녀는 누구보다도 서로의 가치를 인정해준다. 나를 알아봐주는 상대에 대해서 사랑은 더욱 깊어질 수밖에 없다.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고 원하면서 스스 로의 존재에 대해 확신을 가진다. 따라서 두 사람은 이 사랑이 지속되길 원하고, 상대를 늘 자신의 곁에 두고 싶어 한다.
이러한 마음은 타자를 소유하고 싶어지게 한다. 그런데 이 대타존재에 대한 소유는 즉자존재에 대한 소유와는 다르다. 타자의 완전한 굴복은 나에 대한 타자의 사랑을 죽이게 된다. 즉 타자가 노예처럼 나에게 종속되면 나는 나의 존재 근거를 또다시 잃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사랑받는 자는 사랑하는 자의 자유를 요구한다. 내가 타인을 내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것은 ‘시선을 향하는 자-타인’으로서의 한 에서이다. 일반적으로 사랑의 관계에서 타자를 소유하고 싶은 욕망이 커질 경우 두 남녀는 흔히 서로가 서로를 변화시키려 한다. 이러한 욕구는 자신의 존재 근거를 보다.
확립하기 위하여 상대가 나 자신만을 위해 살았으면 하는 이기심, 즉 타자의 자유를 내 것으로 차지하고자 하는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다. “날 사랑한다면 그 성격 좀 제발 고쳐요.”, “날 사랑한다면서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와 같은 발언들은 모두 이러한 이기심에서 발현된 것이다. 상대를 제압하여 자신에게 굴복시키고자 하는 이러한 경향성을 가지고 사르트르는 ‘사디즘’을 이야기한다. 반면, 타자의 자유를 보존하고자 하는 마음이 커지면 사랑의 관계에서 자신을 희생하여 상대의 이기적 마음을 모두 받아주려 하기도 한다. ‘사랑하니까 다 이해해줘야지’하는 타 자를 향한 무한한 마음은 오히려 나의 주체성을 침해할 수 있다. 사르트르는 고통을 주는 타인을 그대로 받아들임에 있어 ‘마조히즘’을 이야기한다. 결국 두 가지 사랑의 방식은 한쪽을 잃기 때문에 불균형적인 형태의 사랑이다.
그리하여 나는 타자의 자유를 보존시키는 동시에 타자를 소유하는 방식으로 타인의 ‘시선을 향하는 자유’를 나의 면전에서 유지하기 위해, 나의 ‘시선을 받고 있 는 존재’에 전면적으로 나를 동화시키고자 한다. 즉 대자존재는 자신의 즉자존재에 근거를 부여하는 것으로서의 타자의 자유에 자기를 동화시키려고 하는 것이 다. 그런데 이는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 그 이유에 대해 사르트르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한다.
…그러므로 타자와의 합일은 사실상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고, 권리 상’으로도 또한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똑같은 초월 속에 대자와 타자가 동화된다면, 그 결과 필연적으로 타자가 지닌 타이성(異性)의 성격은 소멸되어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가 타자를 나에게 동화시키려고 시도하기 위한 조건은 내가 어디까지나 나에 대해 내가 타인인 것을 부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사르트르는 타자와의 합일에 대한 시도를 허무맹랑한 것으로 보지 않는 다. 오히려 그것 자체를 사랑으로 본다….이 이룰 수 없는 이상은, 그것이 타자의 현전에 있어서의 나 자신의 시도를 따라다니는 한에서, 하나의 시도로서의 사랑, 즉 나 자신의 가능성을 향한 여러 시 도의 어떤 유기적 총체로서의 사랑에 동화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 이룰 수 없는 이상은 사랑의 이상이고, 사랑의 동기이며, 사랑의 목적이고, 사랑의 가치 그 자체이다. 타자에 대한 원초적인 관계로서의 사랑은 내가 이 가치를 이루려고 지향할 때의 모든 시도의 총체이다…..)
에서의 사랑
영화 의 두 주인공 에드워드와 에스페라는 반대의 성향을 지닌다. 작곡가인 에드워드는 연애와 직업 및 모든 면에 있어 자유로운 성향을 띠며, 스키장에서 첫눈에 반한 에스페라에게 무작정 쫓아가서 만나자고 할 정도로 적극적이기도 하다. 반면 에스페라는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대학 교수 자격시험을 치르고 있는 학생으로, 호감이 가는 남성과 데이트할 때조차도 시간 계획을 세우고 만약의 상황을 대비해 속옷까지 신경 쓰는 매사에 꼼꼼한 여성이다.
서로에게 단시간에 사로잡히지만 두 사람은 자꾸만 어긋난다. 에스페라는 자신에게만 집중하지 않는 에드워드에게, 에드워드는 늘 자기 얘기만 하는 에스페라에게 서운함을 느낀다. 두 사람 모두 상대가 자신을 좀 더 이해해주기를 바란다. 이는 타자를 나에게로 끌어들이려는 형태의 사랑이다. 이러한 사랑은 두 사람을 모두 지치게 하지만 둘은 서로를 원하기에 그 해결책을 찾으려고 한다. 그러던 중, 에스페라는 대학 교수 시험의 최종 관문인 구두시험에서 물리에르의 비극과 희극적 요소로 본 사랑과 자기애에 관한 연구’를 발표하게 된다. 그 때 마침, 에드워드와 의 다툼으로 에스페라의 감정은 극에 달해 있었다. 에스페라는 자신의 상기된 감정을 자신의 발표에 끌어들인다. … 물리에르 사랑의 모순은, 해가 되는 것을 사랑한다는 게 자주 잘못 사용됩니다.
그것은 사랑의 어려움을 극적이고 영원하게 합니다. 그런 사랑은 갈등이며, 중요한 선택을 하게 됩니다. 단순한 사랑과 자기애에 관한 선택입니다. 4막 3장에 살리만은 알세스에게 말합니다. 당신은 나를 잘못 사랑하고 있소. 그는 자기 개념의 사랑을 제시하려는 겁니다. 그는 살리만에게 하늘이 살리만을 가난한 자로 창조했으면 좋겠다고 했어요. 신분도 지위도 없는 자가 되면 나는 기뻐할 것이오. 그 때는 믿음이 내 사랑을 당신에게 받아들이게 하니까. 대상을 부정하는 특이한 사랑입니다. 살리만은 그를 통해서만 존재한다는 이기적인 욕망이죠. 살리만은 자유, 돈, 친구, 자기만의 개성이 있는 거죠. 그 당시엔 특이한 상황이죠. 물리에르는 오늘날의 문제를 앞서 제시한 것입니다. 여성의 독립이죠. 그의 주인공들은 각자의 세계가 있어요. 동등하게 대면하고 자기 세계를 양보하지 않죠….
에스페라는 물리에르 극의 등장인물인 살리만과 알세스를 통하여 사디즘적인 사랑을 이야기한다. 알세스가 살리만을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소유하기 위하여 그녀의 외부적인 어떤 사항들을 변화시키려고 하는 것은 ‘대상을 부정하는’ 사랑인 것이다. 이는 타자의 자유를 꺾는 형태의 사랑이다. 이러한 사랑으로는 타자에게 서 나의 존재근거도 찾을 수 없다. 에스페라 자신과 에드워드와의 사랑도 여기에 해당된다. 에스페라는 이에 대한 극복책을 살리만의 입을 빌어 이야기 한다.
…마지막까지 그녀를 변화시키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것이고 누구도 그럴 권 리는 없어요. 모두가 헛된 것입니다. 살리만은 알세스에게 그것을 깨닫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녀가 말하기를, “나를 사랑한다면 이대로의 나를 받아주세요. 나도 당 신을 그대로 받아주겠어요.” ….
사랑하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달라는 요청은 자신의 자유를, 그리고 존재를 침해하지 않고 보존해달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상대의 자유 또한 존중 해주겠다고 약속한다. 이렇게 서로의 자유를 존중해주면 두 사람은 동등한 위치에 서 상호주체성이 성립된다. 에스페라는 이러한 자기애와 타인에 대한 사랑을 화합 하는 방법으로 ‘사랑’을 이야기 한다.
…알세스는 소유욕이 강하고 자기중심적입니다. 살리만은 책임감이 없고 성실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서로 단점을 받아주고 웃어넘길 수 있다면 사랑은 자존심과 자기애를 극복할 수 있어요. 진정한 사랑은 그런 희생만으로 오진 않습니다. 고통을 주는 자가 자기를 사랑하는 자임을 깨달았을 때 진정한 사랑은 이루어지는 것 입니다. 그리고 한 쌍임을 깨닫는 것 입니다…..
상대를 단점을 변화시키려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드릴 때, 사랑은 자존심 과 자기애를 극복할 수 있다고 에스페라는 말한다. 상대가 나를 변화시키려는 것 도 결국 나를 사랑하기 때문임을 깨닫는다면 진정한 사랑을 이룰 수 있다고 말한 다. 그러면서도 에스페라는 무조건적인 희생에서 오는 마조히즘적인 사랑을 경계한다.
사르트르가 말한 것처럼 타자의 자유를 보존시키는 동시에 타자를 소유하는 타자와의 합일은 불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그 자체가 원래 모순이기 때문이다. 그러 나 타자와 하나가 되기 위한 시도로서 타자의 세계를 부정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고 하면서 타자의 단점이 나를 사랑하기 때문임을 깨닫는다면, 타자를 계속해서 곁에 두고 사랑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사랑의 시도는 일방적인 것이 아닌 상호적인 것이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불완전한 사랑을 계속해나가면서 상대가 나를 존중해 주려함에 사랑을 느끼고 때때로 드러나는 상대의 단점이 결국은 나를 사랑하기 때문임을 알고 포용해 준다면, 두 사람은 고난 속에서도 사랑 을 유지시켜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작용 속에서 사랑은 더욱 굳건해 질 것 이기 때문이다.
나오면서 인간은 그 자체가 원래 불완전한 존재이기에 완전한 것을 추구하고 사랑에 있어서도 모든 것을 충족시키고자 한다. 대자존재가 대타존재를 만나 그와 하나가 되고자 시도하는 것은 불완전을 극복하려는 행위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타자 와 하나 되려고 할 때, 서로 다른 두 가지 욕망이 충돌하기 때문에 사랑은 불가능 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불가능한 이상 자체가 사랑의 동기이고 목적이고 가 치 그 자체이기 때문에, 사랑에의 시도 자체를 사랑으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사르트르는 타자를 지옥이라 했지만 오히려 그의 타자론은 두 대자존재간의 상 호주체성을 확립해주었다고 생각된다. 사랑에 있어서 상호주체성은 무엇보다 중요 한 개념이고, 상호주체성 없이는 사랑이 완전히 불가능하다. 사르트르는 절대로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타자를 제시하여 대자 존재인 인간을 무한한 외로움에 빠 트렸지만, 동시에 두 대자존재간의 사랑의 가능성도 열어준 것으로 보인다. 애초 에 완전한 사랑이 가능한 것이라면 수많은 남녀 간의 갈등과 불화는 다 무엇이란 말인가. 하지만 사르트르는 사랑하는 두 남녀사이에 다툼이 생겨나는 이유를 설명 해주었다. 그 답은 정말로 간단하게 ‘사랑하니까’ 이다. 문제 발생의 원인을 사르트르가 제공했기 때문에 그 해결방안도 사르트르에게서 찾을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입상 정*연 영어영문학과 도서:고도를 기다리며
독후감:우리도 고도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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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코 내일은 없다. 우리는 내일을 잡으려고 수많은 이야기를 반복한다. 내일 무엇을 하지? 내일부터 열심히 살아야지. 많은 다짐을 하고 너와 나에 관해 어떻게 무엇을 할지 결정을 하지. 11시 59분에서 00시 00분으로 넘어가는 순간. 우리가 그토록 기다렸던 내일은 사라진다. 우린 내일부터 새롭게 시작하려 했잖아. 그럼 다시 또 다른 내일을 위해 오늘에서 내일만 기다려야지.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다 지친 우리가 기지개를 펴며 먼 곳을 바라본다. 아침마다 쉼 없이 발걸음을 놀리며 학교로 걸어오는 길, 누군가가 쉬고 있을 집 곳곳의 불빛들. 시원한 밤공기를 마시며 바라보는 야경은 화려하고 장엄하며 때론 쓸쓸하기까지 하다. 학교는 왜 이렇게 경치 감상하기가 좋은 거야! 우린 투덜거린다. 세 상에는 우리가 볼 수 없고 실재하는지조차 의문스러운 신비로운 동물이 다섯 가 지가 있단다. 용, 빅풋, 유니콘, 네스 호의 괴물, 그리고 남자친구. 남자친구는 어 디쯤 걸어오고 있을까? 우리가 너무 멀리 있어서, 혹은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학 교 경사가 너무 높아서 저기 보이는 라푸타 건물쯤에서 쉬고 있는 것은 아닐까? 다리가 많이 아픈가봐. 신발이 다 닳아 버렸나??
사뮈엘 베케트(이하 베케트)의 부조리극 <고도를 기다리며> 에서 고도는 오지 않는다. <고도를 기다리며>는 고도는 과연 실존하는 인물인가에 대해서도 독자 들은 의아하게 된다. 분명 나 뿐 아니라 이 작품을 읽은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 일거다. 작품은 산만 하다. 인과(因果)관계가 뚜렷한 리얼리즘에 기반 한 소설 혹은 영화를 보는 것에 길들여진 일반 대다수의 독자들은 이 작품에 집중하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작품의 줄거리 역시 이렇다 할 것이 없다. 블라드미르와 에스트라공은 나무 밑에 앉아 실 제로 존재하기는 한 건지 의문스러운 ‘고도(Godot)’라는 인물을 기다리고 있다. 럭키를 데리고 다니는 포조가 등장해 둘과 만난다. 작품 속 등장인물들의 대화는 결코 이어지는 것이 없다. 두 주인공 중 한명은 신발에 투정을 부리고, 한명은 모 자를 벗었다 썼다를 반복한다. 각자의 이야기를 하기 바쁘다. 당근을 달라고 하니 순무를 준다. 순무를 줬다고 화를 내기도 한다. 시종일관 맥락이 있는 대화는 결코 없다.
친구는 늘 자신의 이야기에 집중하길 원했다. 난 가끔 그의 모습에 성화가 났다. 그의 표정에서 드러나는 반감의 표시를 볼 때면 어딘가 씁쓸했다. 그래서 우린 최대한 사정거리를 정해놓고 대화를 이끌어갔다. 우리가 부딪히지 않는 최소한 의 거리를 측정하며 대화의 꼬리가 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그렇게 집에 오는 버스 안에서 문득 생각이 들었다. 사람은 가끔 제 스스로를 돌아보지 못할 때가 많다. 불평을 실컷 하고 뒤돌아서면 느낄 때가 있다. ‘아, 나도 그랬었지. 우리는 서로를 휘감고 있는 모순, 즉 나까지 휘감고 있는 모순은 잘 깨닫지 못하면서 남의 자그마한 모순에 대해서도 민감하게 짜증을 털어놓거나 불만을 터뜨리곤 했다. “당근을 다오.. 이건 순무 아냐?”(29) 그래서 결국 기대를 하지 않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아예 나에 관한 이야기는 닫아버리기보다 조금의 틈을 유지하며 대화를 하는 것이 훨씬 나와 너를 위해 더 편한 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에스트라공은 스스로를 “꽁꽁 묶여있는 (30) 것 같다고 표현했다. 그러면서 다 시 누구에게 묶여있는가를 고민한다. 쓴 웃음이 나왔다. ‘에스트라공, 너는 고도를 기다리고 있잖아!”
우리는 무엇에 묶여있는 것일까. 에스트라공이 고도에게 묶여있음을 이야기하면 서 우리를 묶고 있는 것들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어디선가 우리가 이른 시간에 일 어나 생활을 해온 것 역시 기득권자들의 지배 논리가 개입된 행위라고 본 적이 있었다. 우리의 사고는 철저히 지식에 입각해서 이뤄진다. 지식 역시 우리가 작위적으로 포착한 것은 아닐까? 공자가 생각한 정치의 지식과 노자가 꿈꾼 정치의 지식은 달랐다. 성공의 기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한다. 돈을 많이 벌고, 멋진 차를 타고 다니고 안정적인 핵가족의 형태를 이루는 것. 텔레비전 드라마에서는 간혹 사랑이 모든 것을 해결해주는 해답의 논리인 듯 보여준다. 혹은 개인의 아픔 과 상처가 가족 안에서 사랑, 배우자와의 사랑을 통해 다 보듬어지는 것들로 표현 되고 있다. 우리와 우리를 묶고 있는 이념들, 혹은 정의된 것들. 에스트라공이 고도에게 묶여있듯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우리를 묶고 있는 당연시 되는 것들에 대해 가끔 갑갑하다고 느꼈다.
‘아름답다’는 기준은 굉장히 다르다. 문화에 대해 19세기 보수 평론가들은 정전으로 국한된 고급문화가 문화의 전부라고 생각했다. 미술관은 마치 교회나 성당과 같은 성스러운 곳처럼 관객들을 얼어있게, 조용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20세기 중, 후반 산업화의 붐을 따라 통조림통이, 마를린 먼로의 얼굴이 예술이 되고 문화가 되었다. 우리라고 부르는 대중들이 문화의 일선으로 뛰어들게 되었다. 나의 눈에 는 내 남자친구의 얼굴이 가장 아름답고 장동건이나 원빈보다 훨씬 멋있다. 그리스 조각상에서 튀어나온 듯한 8등신이 아름다운가? 부모님의 거친 손, 주름 진 얼굴이 더 아름답진 않은가? 1 | 가끔 우리는 충동적으로 여행을 떠나기도 하고 이유 없이 누군가에게 화를 내 기도 한다. 그 모든 과정 속에 인과관계는 늘 뚜렷하지 않다. 원인이 있어서 결과 가 있었다기보다 더 큰 틀에서 우리의 삶 속 과정의 일부분이 아닌가. 충동을 어떻게 인과관계로 설명을 할 수 있을까. 우리를 묶고 있는 것은 너무 많다. 예의범 절, 도덕, 질서, 아름다움, 성적 등등. 그러나 우린 우리를 묶고 있는 것에서 벗어 나려는 생각을 하지 않을뿐더러 묶여있다는 것을 당연시 받아들이고 있다.
<고도를 기다리며>는 이렇다 할 줄거리도 없고 기가 차는 대사들로 극이 진행 되지만 중간 중간 우리에게 생각을 하게끔 하는 대사들이 등장한다. 블라드미르는 “기분”(99)을 마음대로 조종할 수 없다는 것에 서운함을 드러낸다. 또한 구두가 벗겨지지 않는다고 불만을 터뜨리는 에스트라공에게 인간이란 “구두”(13) 탓, 즉 외부의 탓으로 돌리는 문제가 있다고 말한다.
삶이란 그런 것 아닐까. 온통 알 수 없는 문제들로 가득 차있다. 내 눈에 보이는 별은 7.8년 전에 별이라고 하던데. 가끔 과제는 교수님들 모두 약속이라도 하
신 듯 비슷한 시기에 우르르 쏟아진다. 해야 할 일은 해도 해도 끝이 없다. 오지 않는 내일과 오늘 사이의 언저리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해야 할 일에 마주하고 있다. 날 우울하게 만드는 비는 오는 여름에도 지난여름에도 내년 여름에도 며칠이고 내릴 것이다. 그래도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도통 어떻게 걸어가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올바로 사는 것인지 나 스스로 깨우칠 순 없지만 가끔 이렇게 사는 것이 그렇게 나쁘지는 않다고, 그래도 감사해야할 일이 있다고 깨닫곤 한다.
<고도를 기다리며>는 ‘우리’를 너무나도 잘 그려내고 있다. 고도를 기다린다고? 블라드미르와 에스트라공의 대화는 시종일관 자신이 이야기를 하기 바빴다. 우린 온갖 소음 속에서 살고 있다. 가만히 생각해보자. 나와 내가 타자가 누가 되던 간에 오늘 한 이야기들을 찬찬히 생각해보면 알맹이는 있었던가. 친구와의 대화는 오늘도 맥없이 신세타령만 하다가 너와 나의 비위만 맞추다가 끝이 났다. “고도를 기다려야지”(81) 그래서 고도는 도대체 언제오냐고? 1막에서 나무 한그루. 2막에서도 나무 한그루, 잎 몇 장. 무언가 변하기는 한 건가. 내일이 오기는 했다. 그런데 내일이 와도 고도는 오지 않았다. 바람이 부는 소리에 고도가 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흔들거리는 청춘. 그러나 우리는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다. 쉴 새 없이 공부를 하고 친구들과 떠들고 과제를 써내고 술을 마시고 한해가 또 흘러갔다. 내년에는 취직을 할 수 있을까? 신발이 벗어지질 않아. 도대체 내년은 오긴 하는 걸까. 내 년이 오는 것이 무섭기는 하다. 언제부턴가 우린 반전영화에 열광하기 시작했다. <유주얼 서스펙트>(브라이언 싱어, 1996)에서 카이저 소제는 다름 아닌 절름발이라는 사실이 밝혀졌을 때 우 린 짜릿함을 느꼈다. 주인공이 범죄를 행해가는 과정을 뚜렷하게 따라가기보다. 해답이 정해진 상황에서 그 과정을 따라가기보다 궁금해 하며 결말을 기다렸다. 고도가 오기는 할까. 책의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 주구장창 고도를 기다리기만 하는 그들과 마주앉아 나도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지는 않은지. 이 독후감을 마무 리 지을 수 있을까? 이번 성적은 잘 나올 수 있을까? 올해가 가기 전에 라푸타 앞에서 쉬고 있을지도 모르는 미래의 남자친구는 도착할까? 답은 없다. 결국 고도는 오지 않았다. 나도 오지 않지만 오는 내 미래를 기다리고 있다.
블라드미르와 소년의 대화. 블라드미르 고도 씨가 보낸 거지? 소년 네. 블라드미르 오늘 밤에는 못 오겠다는 얘기겠지?? 소년 .. 블라드미르 하지만 내일은 온다는 거고? 소년 네. 블라드미르 내일은 틀림 없겠지? 소년 네.
입상 박*진 주거환경학과 도서:이방인
독후감:우린 이방인이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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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방인을 만났다. 그와 나는 세 번 만났다. 그와 처음 만난 것은 고등학교 때였다. 이방인은 커녕 카뮈에 대해 알지도 못했던 그때의 나는 책장에 꽂혀있는 낡은 세계명작세트 중 가장 끌리는 제목의 책 한권을 골랐고 그 책이 이방인이었다. 하 지만 이방인에 대한 나의 첫인상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따뜻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슬프지도 않았다. 셰익스피어의 희비극이나 호밀밭의 파수꾼과 같은 성장소 설에 익숙했던 내게 이방인은 제목 그대로 이방인이었다. 소설 속 뫼르소의 행동 은 도무지 내게 이해되지 않았고 그의 사고 또한 내가 납득하기 어려웠다. 결국 나는 그에게서 아무것도 보지 못한 체 그를 떠나보내야 했다. 이방인과의 두 번째 는 만남은 대학교 1학년 때였다. 한창 허영심으로 가득 차 있었던 나는 나름 고상 한 척, 문화인인 척 하기 위해 여러 종류의 책을 손에 들었다 놓았다 했고 그중에 이방인이 끼여 있었다. 두 번째 그를 만날 때의 나는 불행인지 다행인지 이방인과 카뮈에 대하여 약간의 배경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방인이 실존주의 문학의 대표 적 작품으로 부조리한 현실과 이에 대한 반항을 그리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덕분에 뫼르소의 행동은 더 이상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행동들이 아니었다. 나는 그러한 뫼르소의 행동들이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반항이라는 것을 너무나도 정확히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게 책을 읽는 동안, 아니 책을 읽기 전부터 나는 뫼르소의 편에 서서 그의 시선으로 소설을 읽었다. 잘못된 것은 뫼르소가 아니었다. 사람을 죽이긴 했지만 그것은 우연한 사고에 불과했고, 그보다 더 나쁜 것은 그들만의 시선으로 뫼르소를 사형으로 몰아가는 부조리한 사회였다. 나는 그 의 어깨를 두드리며 그를 위로한 뒤 그와 헤어졌다. 그리고 세 번째, 이번 독후감 공모를 준비하기 위해 다시 그를 만났다. 그는 여전히 고집스럽게 신부의 기도를 거부하고 사형 집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옛말에 ‘아는 만큼 보인다. 라는 말이 있다. 많은 선생님들이 인용하는 말 중 하 나며 많은 사람들이 이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나 또한 이 말을 부정하지 않는다. 실제로 우리는 아는 만큼 본다. 잘 알지 못한 상태에서는 세계적인 추상파 화가의 작품도 네 살짜리 꼬마 아이의 낙서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으며 오랜 시간을 견뎌온 역사적인 건축물 역시 그저 낡은 건물에 불과할 뿐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커다란 함정이 하나 숨어있다. 우리는 아는 만큼 보이지만, 또한 아는 대로 본다는 것이다. 내가 얼핏 보기에는 이방인과 전혀 관련 없을 것 같은 이 말을 꺼낸 데에는 이유가 있다. 나는 위에서 이야기 한 대로 독후감공모에 제출할 독후감을 적기 위해 이방인을 손에 들었다. 내가 이방인을 읽으면서 머릿속을 한 생각은 어떤 식으로 글을 풀어나갈 것이냐 하는 것이었다. 이미 책의 줄거리는 다 알고 있었다. 그리고 독후감은 요즘 초등학생들도 줄거리를 나열한 뒤 자기 생각을 조금 넣는 식의 구성으로 글을 쓰지 않는다. 그렇다면 자신의 생각과 책의 내용과 의미를 잘 버무려 글에 녹여 내느냐가 관건이다. 이방인은 실존주의 문학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주제는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통찰이다. 따라서 실존주의 철학과 부조리한 사 회에 대하여 반항을 보여주는 뫼르소의 행동에 대한 나의 생각을 적는 것이 유리하다. 책을 읽음과 동시에 머릿속에서는 그런 계산이 펼쳐지고 있었다. 나이를 먹 으면서 아니, 12년의 초중고 교육과정과 몇 년의 대학 과정을 겪으면서 정답을 찾 는 데 익숙해진 나는 이번에도 최선의 모범답안을 찾고 있었다. 이번 11월에 열린 대학가요제의 참가팀 대부분이 현재 20대의 키워드인 청춘을 가지고 지겨울 만큼 반복해서 노래했듯이 실존주의 문학가인 카뮈의 이방인에 대한 독후감에는 그의
실존주의에 대한 생각과 뫼르소의 행동을 부조리에 대한 반항과 연결시켜 글을 쓰는 것이 가장 정답에 가깝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나는 이러한 생각들을 머릿속에서 굴림과 동시에 책의 이부분 저부분을 살피며 독후감에 쓰일만한 대목을 찾는데 열중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다른 생각이 들었다. 보통 우리는 책을 읽을 때 그 책에 대해 알지 못하고 읽는 경우가 많다. 대충 흥미를 끌기 위해 표지에 쓰여진 몇 줄의 줄거리나 책 소개를 위해 짧게 쓴 기사, 믿어야 될지 말아야 될지 모르는 다른 이의 추천 정도만 듣고 책을 펼치는 경우가 많지, 그 책을 쓴 작가의 사상과 책이 담고 있는 심오한 주제를 파악한 후 책을 읽는 경우는 드물다. 조그마한 호기심으로 집어든 책에서 우리는 작가가 그려놓은 세상 속으로 들어가 웃기도, 울기도 하며 화도내고 즐거워도 한다. 이러한 우리의 행동과 감정들이 작가의 의도와 맞아 떨어지든 아니든 간에 일단 타인의 생각이 배제된 자신 만의 관점으로 책을 만나고 이야기한다. 그 뒤 작가가 그 책을 쓴 의도와 작품들 속의 장치들을 알아가는 것은 독자들 각자의 자유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이러한 자유를 빼앗기고 있다. ‘이 책은 이러한 관점으로 쓰여 졌으니 이렇게 읽어야 한다.’는 형태의 누군가가 정해놓은 틀 안으로 들어가서 책을 읽고 있는 것이다. 이건 비단 책뿐만이 아니다. 영화, 음악과 같은 문화부터 음식과 쇼핑 과 같은 소비, 정치적 신념과 종교, 심지어는 남녀 데이트 시 비용 부담과 같은 사소한 행동들 하나까지도 우리는 보이지 않는 사회의 메커니즘에 따라 움직이고 있다. 자신의 눈으로 보고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정해놓은 일반적이고 상식적인 기준에 의해 모든 것이 좌우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처음 본 뫼르소의 행동은 이해되지 않는 행동들 뿐 이었다. 어머니가 돌아 가셨음에도 불구하고 뫼르소는 그다지 슬퍼하지 않으며 어머니의 시신 앞에서 담 배를 피운다. 심지어 그는 어머니의 장례를 치르는 것조차 귀찮아하는 듯이 보였다. 그리고 그는 장례식이 끝난 지 며칠 되지 않아 여자와 함께 밤을 보낸다. 또, 태양이 강렬했단 이유만으로 총으로 사람을 쏘아 죽였으며 이미 죽은 시체를 향 해 네 번의 방아쇠를 더 당긴다. 그의 행동 하나하나는 나뿐만이 아니라 일반적인 상식, 세상의 보편적인 방식에서 한참 벗어난 행동들이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 도 나는 두 번째 이방인에서 본 뫼르소의 행동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뫼르소의 행동은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반항의 한 형태로 실존주의 철학에 입각하여 해석하여야 하며 우리는 이를 통해 부조리에 대한 통찰을 하도록 만들어 준다.’는 단편적인 앎을 통해 나는 뫼르소의 행동이 가지는 진짜 의미를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렇게 나는 무지의 한꺼풀을 벗고 새로운 눈으로 이방인을 보게 된 것이 다. 하지만 과연 나는 이방인을 제대로 본 것일까? 아이러니 하게도 우리는 아는 것을 통하여 새로운 것을 보게 되었지만 우리는 결국 아는 것, 우리의 지식이 되어버린 ”이라는 틀에 갇혀버리고 말았다. 아는 만큼만 보고, 아는 대로 판단하는 것이다. 카뮈와 이방인의 대해 알게 된 후 우리는 더 이상 뫼르소를 비정상적인 사람이라 부를 수 없게 되어버렸다. 우리는 더 이상 뫼르소의 행동을 이해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버렸다. 뫼르소의 행동에 의의를 제기하거나 비난하는 사람은 |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되어 버린다. 이방인을 읽는 사람의 관점은 카뮈와 이방 인에 대한 지식을 가지게 된 순간부터 실존주의 철학과 부조리의 틀을 벗어날 수 없게 된 것이다. 물론 카뮈의 대표적인 작품들이 부조리의 사색을 통해 쓰여 졌으며 이방인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 아니다. 이러한 상식, 지식이라는 불리는 사회의 메커니즘을 통해 우리의 삶은 사회가 요구하는 커다란 틀 안에 갇혀버리는 것이다. 이방인 속 뫼르소는 사회가 요구하는 상식과 관습을 계속하여 거부한다.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울지 않으며, 여자 친구에게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으며, 신을 믿는다고 하지 않는다. 그러자 사회는 이러한 뫼르소의 행동을 하나씩하나씩 엮어 인과 관계를 만들어 나가고 | 결국 뫼르소에게 사형을 선고한다. 합리적인 인과관계를 거부한 그는 사회에서 배 척당하는 이방인이 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사회의 틀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할 수 있을까. 그렇다고 할수 없다. 어머니의 장례식에 우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지 는 몰라도 당연한 일이 아니다. 눈물은 자연스러운 감정에 의하여 발생하는 행동 이며 이것이 자주 일어나다 보니 보편적인 통념이 되어버린 것이지 사실 당연한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상황에 따라서, 예를 들어 평생 자신을 학대한 어머니이거 나 어릴 때 자신을 버렸던 어머니라면 자식은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 울지 않을 수 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일반적인 상식에 따라 눈물 한방울 흘리지 않는 뫼르소를 비난하며 불효자라는 낙인을 찍는다. 다른 것 역시 마찬가지다. 이방인에서 나온 것처럼 우리는 회사에서 열정적이고 야심 있는 회사원의 모습을 보여야 하며 애인에게는 비록 그것이 빈말일지라도 사랑한다는 말을 속삭여야 한다. 오직 단편적인 모습만으로 사회적 상식이라는 기준에 의해 평가가 내려진다. 이런 것들 모두가 사회 속에 깊이 뿌리박힌 우리는 관리하고 통제하는 메커니즘들이다. 사회의 요구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문학을 이해하는 관점이라는 틀 속에서 이방인 속 뫼르소를 안아 줄 수 밖에 없다. 그에 대한 우리의 생각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는 실존주의 문학의 대표적 작가인 카뮈가 만들어낸 부조리한 현실에 반항하는 영웅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는 과연 실제로 우리 주변에 뫼르소와 같은 이방 인을 우리는 과연 따뜻하게 안아 줄 수 있냐는 것이다. 아마 우리는 불행히도 소설 속 배심원들처럼 그에게 사형선고를 내릴 확률이 높다. 우리는 이미 스스로가 모르는 사이에 무지막지한 사회적 메커니즘에 꽁꽁 묶여 길들여졌기 때문이다. 언제부터 만들어졌는지 모르는 이 무시무시한 관념들은 벗어나기는커녕 자각하기조 차 쉽지 않다. 그리고 이를 자각한다고 하더라도 이 사회적인 틀에서 벗어나기란 쉽지 않다. 우리는 매순간 이성적인 사회의 눈에 의해 감시당하고 있다. 이방인에 는 뫼르소를 응시하는 눈에 관한 묘사가 많이 등장한다. 뫼르소의 어머니가 머물 던 양로원 원장의 눈, 어머니의 시신 앞에서 졸고 있던 뫼르소를 응시하던 어머니 의 친구의 눈, 모든 행동이 정확하고 계산적이던 키가 작은 여자의 눈. 이들의 눈 은 사회의 질서와 어긋나는 행동을 하는 뫼르소를 주시한다. 즉, 그들의 눈은 이 성적인 사회의 감시자로써 뫼르소를 감시하는 것이다. 신속하고 정확하며 철저하게 정해진 행동을 하며 타인에게도 자신과 같이 상식적인 행동을 요구하는 그들 . 은 뫼르소가 사형을 선고받는 그 순간까지 그를 주시한다. 불행히도 현실 속에도 이러한 눈은 존재한다. 지금 이순간도 우리들이 정해진 사회의 규범을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감시자의 역할을 하고 있다. 현실에서는 우리 모두의 눈에 감시자의 역할이 담겨있다. 거리를 걸어다는 낯선 사람도, 10년을 넘게 사귄 친구도, 동기 도, 교수님도, 심지어는 이 글을 쓰고 있는 나 또한 때에 따라 철저하게 감시자의 역할을 수행한다. 누군가가 일반적인 상식을 벗어나는 행동을 했을 때, 모두의 눈 이 그를 향해 쏠리듯 우리는 서로를 감시함과 동시에 서로에게 감시당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감시를 벗어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방인은 대표적인 반항의 문학이라고도 불린다. 그리고 뫼르소는 그 반항의 대 표적인 상징이다. 과거 청춘은 반항과 저항의 상징이었다. 사회는 그들에게 히피, 오랜지족, X세대, N세대와 같은 이름을 가져다 붙이며 그들을 정의하였다. 그들은 철저하게 기성세대를 부정하며 사회와 정치, 예술 전반적으로 다양한 형태의 반항을 보여주며 그들의 문화를 만들어 갔다. 하지만 요즘 사회는 지금의 20대 청춘들 에게 반항정신을 잃은 순종적인 세대라고 말한다. ‘아프다.”, ‘연약하다.” 라는 말들을 붙여주며 우리를 위로하려 한다. 취업전쟁과 스펙관리, 등록금마련 등 갖가지 문제를 외치며 우리를 다독인다. 혹은 ‘피나는 노력의 필요를 역설하며 우릴 다 그친다. 2010년대에 살아가는 20대 청춘들은 어느새 아픈 것이 당연한 그런 세대 가 되어버렸다. 신입생들은 들어오자 말자 스펙을 위해 학점을 관리하고 토익을 준비하며 방학에는 다음 학기를 위한 등록금마련을 위해 아르바이트를 한다. 그리고 그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20대의 청춘들은 이렇게 또 하나의 큰 틀에 갇혀버렸다. 아프고 위로해주고 싶은 청춘이라는 부조리한 틀 말이다. 우리는 여유롭고 태평해서는 안 되며, 즐거워서도 안 된다. 큰 꿈을 가져야 하며 치열하게 노력을 해야 하고 도전적이고 창의적이어야 한다고 강요당한다. 넘쳐나는 자기계발서들은 서로 다른 듯 같은 이야기를 반복해서 말하며, 아픔과 불안이라는 집단 최면 빠진 청춘들은 이런 책들을 마치 성경이나 되는 듯 한두권씩은 꼭 가지고 다닌다. 하지 만 결국 그 속에서 우리들이 얻을 수 있는 것은 하룻밤 자고 일어나면 모조리 사라지고 마는 이미 성공한 그들의 무용담뿐이다. 지금의 우리들은 이렇게 사회가 마음대로 이름 붙인 아프고 위로 받아야 하는 청춘이 되어 살아가고 있다. 반항마저 반항적인 것으로, 창의마저 창의적인 것으로 규정지어 그들의 커다란 틀 속에 넣어버리는 사회. 과연 뫼르소라면 어떻게 했을까. 그는 어떤 형태로 현재의 시스템 속에서 반항이라는 몸부림을 보여주었을까. 그리고 이시대의 뫼르소를 지켜보 는 나는 어떤 마음으로 그를 지켜볼까. 과연 우린 이 거대한 사회의 틀을 벗어나 이방인이 될 수 있을까. 솔직히 말하면 나는 자신이 없다. 자신이 달리는 곳이 쳇 바퀴인 것을 알고 있음에도 계속 달릴 수밖에 없는 다람쥐처럼 나는 아직 이 두텁고 단단한 청춘의 틀을 벗어날 자신이 없다. 나는 아직 이 사회를 향해서 ‘아니오.’라고 외칠 용기가 없다. 이건 무척 슬픈 일이다.
입상 조*영 철학과 도서:이방인
독후감:이방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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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의 한 낮 땡볕 더위가 따갑다. 커다란 피켓을 드는 팔의 감각은 사라진지 오래다. 괜히 높은 구두를 신었나. 아까부터 발바닥이 쑤셔온다. 이 더운 날씨에 괜히 나왔나 보다. 더위로 붉게 달아 오른 얼굴이 자꾸 신경 쓰인다. 시원한 건물 | 안에 들어가 쉬고만 싶다. 하지만 그럴 수 없지. 나는 1인 시위 중이다. 오고가는 사람들 시선 속에 나는 없다. 그들에게 나는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존재인가 보다. 누가 나를 보고 고개라도 한 번 끄덕여 주면 좋겠다. 아니다. 지금으로썬 나한테 욕을 퍼부어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다. 무관심한 사람들에게 소리치고 싶다. 나를 봐달라고, 내가 들고 있는 피켓을 봐달라고. 하지만 수많은 인파들은 나를 스쳐 지나간다. 흘끔 보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람도 있다. 나 혼자만 이렇게 비분강개하는 건가 씁쓸해진다. 누군가 나를 봐주기만을 기다리는 시간 동안 나는 여러 가지 감정을 느꼈다. 그 중 가장 강하게 와닿았던 감정은 외로움이었다. 나는 문득 그들도 나와 비슷한 감정을 느낄 거라 생각했다. 아무도 자신을 바라봐주지 않는 데서 오는 외로움 말이다. 그 2009년 1월 20일 용산에서 ‘사람’이 죽었다. 그리고 시간이 한참 지난 후에 뉴스에서 그들의 통곡 소리를 들었다. 불법 시위자들에게 유죄 판결을 내린다는 뉴스였다. 나도 모르게 다리에 힘이 쭉 빠졌다. 나는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 없단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피켓을 들고 거리로 나왔다. 카뮈의 ‘이방인』은 바로 이 시기에 나를 찾아왔다. 책의 내용은 간단하게 요약할 수 있다. 주인공 뫼르소의 엄마가 죽었다. 그리고 그는 장례식에서 울지 않았다. 작렬하는 태양에 눈이 멀어 살인을 저지른다. 탕!탕!탕!탕! 불행의 문을 네 번 두드린다. 그래서 프랑스 인의 이름으로 공공 광장에서 목이 잘리게 될 거란 선고를 받게 된다. 사람들은 뫼르소에게 특정한 반응을 원한다. 뫼르소가 모친의 장례식에서 울기를 바라고 살인에 대해선 죄책감을 느끼기를 바란다. 하지만 뫼르소는 ‘이방인’ 이다. 즉 사회적 통념 즉 보편적인 윤리에서 뫼르소는 멀리 떨어져 있다. 카뮈는 뫼르소가 이방인인 이유를 그가 게임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 설명한다. 여기서 게임은 무엇일까?
사회는 일종의 시스템이다. 이것은 약속으로 이루어져 있다. 카뮈에 따르면 인간은 자신의 힘으로는 세계의 진실을 사유할 수도 없고 감당해 낼 수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세계의 진실에 대해 일정한 방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하기로 약속을 한다. 그러나 이 거대한 약속 체계, 즉 도덕 체계는 우리가 죽음을 앞두고 있다는 존재 즉 부조리의 진실을 가려 버린다. 인간은 세계 속에 던져진 존재이다. 부조리란 바로 인간은 태어나서 언젠간 죽는다는 사실로부터 출발한다. 언뜻 보기에 뫼르소가 이방인인 까닭은 그가 모든 것에 무관심하기 때문인 것처 럼 느껴진다. 하지만 뫼르소의 삶의 태도는 무관심보단 무차별함에 더 가깝다. 뫼 르소는 이것과 저것에 차이를 느끼지 못하는 인물이다. 모두가 죽어야한다는 단 하나의 진실, 곧 삶의 부조리 앞에서는 모든 것이 같은 가치를 갖는다.
사르트르의 말마따나, “도대체 <악령>을 쓰는 카페오레를 마시는 모든 것은 같은 값”을 갖는 것이다. 이 세상에 던져진 인간은 아무것도 정당화 할 수 없고 책임질 수 없다. 따라서 뫼르소에게 모든 것은 허락되어 있다. 우리가 가진 일반적인 규칙에 따라 뫼르소를 바라보자. 그는 모친의 장례식에서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은 냉혈한. 장례식 다음날 정부와 해수욕을 즐기고 영화를 본 후 섹스를 즐긴 부도덕자. 포주와 친구로 지내고 살인까지 저지른 파렴치한, 아랍인의 죽음을 확인한 뒤에도 연이어 네발을 더 쏜 악랄한 범죄자다. 이것은 법 정에서 검사가 뫼르소를 정의한 것과 유사하다. 사회적 시스템은 개인에게 일정한 잣대를 들이댄다. 사법 시스템이 뫼르소의 사형을 결정하기 위해 정교히 돌아가는 동안에도 뫼르소는 철저히 이방인인 것처럼, 사회적 시스템의 잣대에 의해 개인이 규정되고 판단되는 과정 속에 개인이 끼어들 여지는 없다. 인간은 보편적인 것을 갈망하지만 결코 보편에 닿을 수 없다.
그래서 일종의 게임 규칙을 만든다. 인간이 만든 게임 규칙은 개인을 규정하고 제한한다. 그리고 이 기준에 맞지 않는 오류들을 과감히 제거한다. 모든 것의 차이를 제거하고 동일 성을 요구하는 인간의 노력은 폭력이다. 뫼르소는 자신의 인격을 멋대로 규정하는 사람들에게 분노를 느낀다. 뫼르소의 삶의 태도는 차이를 거세하여 개인을 사회 질서 속에 포섭하려는 사회를 위해 한 개인을 단두대에 끌고 가는 게임 질서에 대한 반항이다. 혼히, 우리가 사는 시대를 포스트모던의 시대라고 칭한다. 포스트모던 시대에 어 울리는 것은 아마도 ‘차이에 대한 예민한 감수성’일 것이다. 타자들에 대한 폭력을 우리 사회에선 너무나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나와 너는 다르고 따라서 너는 나를 너의 잣대로 판단 할 수 없다는 외침은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렬하게 다가온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혼란스럽다. 어디까지 차이를 인정해야 하는 걸까? 뫼르소처럼 모든 것에 무차별한 태도는 옳은 것일까? 사르트르의 말처럼 <악령>을 쓰든 카페오레를 먹는 모두 동일한 가치를 갖는 것일까? 그렇다면 선과 악도 단순히 메커니즘의 하나인 것일까? 1인 시위는 앞으로 내가 취하고 싶은 삶에 대한 태도의 반증이다. 어떻게 살 것 인가? 이 물음에 대한 나의 답변은 올바르게 살겠다는 다짐이었다. 내가 옳다고 믿는 가치들을 지키겠다는 다짐이 나를 거리고 내몰았다. 하지만 부조리 앞에서 모든 가치가 열려져 있는 것이라면, 내가 믿는 가치는 오늘 저녁에 치킨을 먹을지 피자를 먹을지 고민하는 것과 하등 차이가 없다. 카뮈에 따르면 인간은 모두 사형 선고를 받고 살아가고 있다. 오늘 죽든 내일 죽든 인간에게 모든 것은 열려져 있다. 나의 행동을 정당화해줄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은 세계 앞에 던져진 존재이다. 선과 악, 윤리는 인간이 만든 게임 규칙에 불과하다. 보편적인 윤리가 존 재하지 않는 다면 용산에 사람이 있든 말든 그것은 상관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선 과 악, 옳고 그름이 단순한 사회적 시스템이라면 나의 신념에서 정당성을 찾을 수 없다. 카뮈의 절망은 세계는 존재하지만 그 존재 이유가 없는 것으로부터 비롯되었다. 나는 왜 존재 하는가? 신이 존재하지 않다면 나의 존재를 누가 근거 지어줄 수 있을까? 인간은 이 질문들에 답할 수 없음을 깨달을 때 당혹감을 겪는다. 때문에 카뮈의 절망은 곧 나의 절망이기도 하다. 모두가 죽어야 한다는 사실만이 단 하나 의 진실이다. 카뮈에 따르면 윤리, 선과 악과 같은 가치들은 사회적 시스템 속에 서만 의미를 갖는다. 하지만 아무리 정교한 사회적 시스템이라도 인간은 모두 죽 는다는 사실을 가릴 수 없다. 삶의 부조리 앞에서 모든 것이 같은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뜻은 결국 모든 가치를 부정하는 것이다. 개인이 가진 신념은 삶의 진실을 가리기 위해 인간들이 임의로 세워놓은 메커니즘 속에서만 의미를 갖는다. 결국 카뮈의 말대로라면 나의 1인 시위는 본질적으로 아무런 의미를 가질 수 없다. 아니 애초에 올바르게 살고자 했던 나의 다짐 자체가 공허하다. 부조리한 세계에 ‘올바름’의 기준이 존재할리 만무하다. 이것과 저것의 차이가 사라진 세상에선 그 무엇도 가치를 가질 수 없다. 회의주의란 땅에서 윤리가 설 자리는 뿌리부터 흔들 린다. 회의주의는 윤리를 구원할 수 없다. 하지만 나는 카뮈의 「이방인」에 쉽사리 동의할 수 없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사형선고를 언도받았다. 나 또한 가끔씩 내가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몸 서리치 곤 한다. 하지만 삶이 부조리하단 진실 하나로 모든 가치를 무의미하게 만들 순 없다. 선과 악, 윤리와 도덕, 법과 질서는 모두 유한한 인간이 만들어낸 유한한 가 치들이다. 하지만 이것들은 모두 보편적인 가치를 추구한다. 현실은 이상이 될 수 없지만 이상은 더 나은 현실을 위한 발판이 된다. 인간의 유한성이 결코 무한한 가치를 향한 열망을 꺾을 수 없다. 나는 문득 뫼르소를 향한 대중들의 분노는 한 개인을 향한 분노가 아니라, 사라 져가는 인간성에 대한 분노란 생각이 들었다. 뫼르소의 모습은 현대인의 모습과 무척 닮아있다. 뫼르소는 타인의 고통에 쉽게 침묵하는 우리의 자화상이다. 신도 부조리한 삶의 진실도 인간적 가치들을 구원할 수 없다. 카뮈는 항상, 부조리의 발견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하나의 출발점이라고 말했다. 부조리를 발견한 지점에서 우리의 사유를 멈출 때 우린 회의주의에 빠질 수밖에 없다. 중요한 점은 부조리를 발견한 이후 내딛는 발걸음이다. 부조리한 삶의 진실 위에서 인간적 가 치들을 어떻게 세울 것인가? 그것이 우리가 고민을 시작해야 할 지점인 것이다.
카뮈의 『이방인」을 읽고 난 후에 나의 머릿속은 더욱 복잡해졌다. 나의 작은 노력들이 궁극적으론 무의미하단 생각에 맥이 빠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뮈는 나를 혼란에 빠뜨렸을 뿐 나를 설득하지는 못했다. 「이방인」을 읽고 나는 인간 적 가치들의 토대가 반드시 존재해야 하는지 생각했다. 우리는 흔히 무언가가 바로서기 위해선 흔들리지 않은 토대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간적 가치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나는 선과 악, 윤리를 보장하는 근거가 변치 않아야 한다는 통념에 의문이 들었다. 카뮈의 말처럼 인간은 세상에 내던져진 불완전한 존재이다. 그러므로 인간적 가치들은 변치 않는 토대 위에 서있을 수 없다. 오히려 이것은 실패와 희생 위에 위태롭게 서있다. 보편적인 가치를 찾기 위한 인간의 노력은 모 두 실패로 돌아갈 것 이지만 진정한 인간성은 이 실패 속에서 찾을 수 있다. 인간은 신이 아니기에 완벽한 ‘선’에 도달할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린 멈춰 서야 하는 걸까? ‘선’에 도달하기 위한 노력을 멈출 때 우리가 대면하는 것은 비인간성 이다. 부조리의 인간, 카뮈의 분석은 정확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카뮈의 분석을 출발점으로 삼아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보편적인 가치를 찾기 위한 노력은 모두 실 패할 것이다. 문제는 불변하는 가치를 찾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 하면 부조리 속 에 매몰 되지 않고 인간답게 실패할 것인가. 이것이 우리가 화두로 짊어지고 갈 질문이다. 인간은 과감히 실패함으로써 앞으로 나아갈 수 있고, 그럼으로써 더 잘 실패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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