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도서관 독후감 공모전

2015.09.16

선정도서 25종 300권
참가대상 부산대학교 학부생(휴학생 포함)
참여방법 도서관 독후감 선정도서(1인 1책, 선착순)를 수령 후 자유롭게 독서하고 해당 도서의 독후감 제출
참여기간 2015년 11월 26일 ~ 2016년 1월 17일
시상내역 총 8편(부산대 총장상, 총상금 120만원)
※ 본 사업은 ACE+의 예산을 지원받아 운영되었습니다.
2015년도 공모전 선정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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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 독후감 선정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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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 이름 학과 선정도서/독후감제목 보기
최우수 박*희 사회학과 도서: 철학카페에서 문학 읽기
독후감: 그대는 실존하기 위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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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어떤 독자를 만나느냐에 따라 달리 해석된다. 더 나아가 그 어떤 독자가 또한 어떤 상황에서 책을 읽느냐에 따라 가지는 의미가 달라진다. 모든 독자가 전부 각자의 고유성을 지니고 있음은 자명한데, 처한 상황은 또 얼마나 상이하고 시시각각 변할 것이며 그에 따른 해석은 얼마나 다양할 것인가. 책과 독자의 만남은 우연이 겹쳐 일어난 운명적이고 감각적인 순간이다. 그렇게 책은 독자에게로 다가가서야 시공간을 공유하고 오감을 자극하면서 경험을 체험하게 하는 힘, 그 특별함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독자는 책장을 넘기는 순간부터 그 힘을 무의식적으로 느끼면서 다양한, 하지만 온전한 자신만의 이해력을 바탕으로 해석해나갈 것이다. 학창시절 때부터, 나는 철학에 깊이 빠져있었다. 소설에서부터 학교에서 공부하는 과정까지 철학적 요소와 관련된 것에 심취해 있었다. 알면 알수록 알 수 없는 그 깊이가, 단순히 지식의 확장이 아닌 사고가 확장되는 그 과정이 머리 아프면서도 즐거운 순간이었다. 특히 인간을 근본으로 한다는 점이 다소냉소적으로 사회를 바라보았던 어린 날의 시선과 맞물려 떨어져서 ‘모든 것의 최우선은 인간이다.’라는 명제에 한동안 헤어 나올 수 없었다. 그렇다. 인간이라는 가치는 그 어떠한 것을 가지고도 비교할 수 없는 것이었다. 비록 악인일지라도 용서 받을 가치는 충분했다. 그때는 그랬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그 생각은 딱 고등학교 졸업까지였다. 철학을 즐겁게 공부할 수 있었던 순간도, 순수한 마음으로 이상적인 생각을 꿈꿀 수 있었던 시기는. 계획표에 의해 움직이던 고등학교까지의 삶이 끝나고 대학교에서 들어서자 처음에는 몰랐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공허한 곳에 내던져진 시간이 늘어나고 흔히 말하는 권태, 빡빡한 일정을 벗어난 후유증이 내 사고 곳곳에 생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참을 수 없는 지루함은 마치 역병처럼 온 몸에 퍼져 세포 하나하나에 각인된 것만 같았다. 각인된 세포만이 증식하는 게 아닐까 걱정하던 어느 날, 평소와 같이 철학자들의 글을 보던 나는 내면에서 무언가 달라졌음을 느꼈다. 그 순간부터 나는 철학이 싫어졌다. 좋아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싫어졌던 것이다. 살면서 싫어하는 것이 손가락을 꼽을 정도로 적은 내가, 그렇게 생각했다는 것이 중요했다. 보기 싫증이 났다. 왜 머리 아프게 말을 돌려가며 설명하는가? 그들은 옳지만 그렇다고 항상 옳은 것만은 아니지 않는가? 왜 답이 없는 싸움을 하는가? 도대체 무엇이 쓸모가 있단 말인가? 부정적인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어느새 그토록 좋아했었던 철학적 사고를 부정하기 시작했다. 과도기였다. 헤겔의 표현을 빌리자면 합의 경지를 이르기 위한 정과 반의 갈등의 작용이었다. 비로소 반작용이 강력하게 나타나고 있었다. 그 이후에도 계속 나 자신을 돌아볼 겨를도 없고 삶의 여유를 가질 자세도 갖추지 못했다. 그저 그런대로, 되는대로 살았다. 비록 따분해하고 읽기 싫어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극복하고자 읽었던 다소 철학적인 책들 몇 권을 완독했지만, 그것은 큰 의미가 없었다. 그 책의 감동은 그 순간으로 끝이었다. 아무리해도 여운은 오래남지 않았다. 나는 아직 변화를 위해 행동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지루한 나날의 연속이었고, 나 그리고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생각만 표류하며 허무하게 떠도는 시간이 길어졌다. 문득, 어느새 패배자의 길을 처량하게 걷고 있음을 깨달았다. 불면증, 무기력증 벗어던져야 한다. 허무와 패배주의의 나락에서 뛰쳐나와야 한다. 변해야한다. 왜라는 의문에 답을 알았다. 하지만 어떻게? 알고는 있으나 행하지 않는데, 움직이지도 않는데 어떻게 변화를 꿈꿀 수 있는가. 환경부터 변화를 주자고 생각했다. 나를 둘러싼 주변에 변화를 주고 생각에 확신을 주고 다시금 행동을 해야만 하는 상황을 스스로에게 부여하니 삶과 사고가 그에 따라 달라지고 있음이 느껴졌다. 사고방식에 숨 쉴 여유를 주니 가슴에 더 와 닿기 시작했고, 머리 회전은 더욱 매끈하게 돌아가는 것 같았다. 그때서야 과거의 작용과 반작용들을 돌이켜볼 틈도 생겼다. 치열하게 살았지만 여유를 놓치지 않는 마음가짐이 최근에서야 자리잡은 덕분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나는 철학을 열렬히 좋아하기도 했다가 반대로 증오하기도 하면서 살아왔다. 애증의 관계였다. 살면서 철학의 깊이는 부족하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어느 정도‘가 문제였다. 그것은 사람들의 생각을 가늠할 척도를 내가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 오만함에 불과했다. 헤아릴 수 없는 존재를 내가 감히 어떻게 판단할 수 있겠는가. 자만심을 비우니 눈에 글이 새롭게 읽히기 시작했다. 철학을 대하는 마음가짐의 성숙, 스스로 변화된 모습을 인지하고 읽은 책, ‘철학카페에서 문학읽기’는 그 시작점이었다. 책을 공(空)의 태도로 대하니 내용들은 나를 채우고 있음이 확실히 느껴졌다. 나열 되어있는 글들이 이미지화되어 머릿속에 정리되어 그려지고 그 그림들은 곧 뇌세포 하나씩을 잡아당겨 지금 나에게 필요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다. 하나의 소재로 철학적 해석을 풀어갈 때마다 내가 처한 상황에 맞게 ‘이렇게 생각해보면 어떨까?’관점을 넓혀주고 소개해주고, 또 은연중에 문제해결에 대한 방안을 권유하고 있었다. 나와 주변을 이해하기 위한, 결코 손해 보지 않으면서 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사고방식의 대안을 거부감이 들지 않게 부드럽게 속삭이고 있었다.
부담이 없었다. 작가의 설명 그대로 그는 딱딱한 강의실에서의 대면이 아닌, 독자와 카페에서의 만담을 추구 한 것이 분명하다. 아니면 이렇게 고리타분할 수도 있는, 철학적 내용을 반발 없이, 편안하게 설명할 길이 없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서두에 나와 있는 작가의 의도대로 나는 카페에서 첫 장을 넘겼다. 그 날은 유독 카페라떼(caffe Latte)가 구미에 당기는 날이었다. 도서관에서 읽을까 고민하다가 오늘은 커피 한잔과 함께 읽고 싶은 기분이 들어서 카페로 향했다. 12월답지 않게 유독 날씨가 포근했던 날이었다. 인연에게 이끌리듯 그렇게 나는 책을 관통하는 주제인 자기 존재의 실현 가능성, 그것에 대한 해석을 접하게 되었다.
커피(Coffee)를 마실 때의 온 몸에 감각이 활성화 되는 것 마냥 구원이라는 단어는 책을 펼치자마자 나의 신경을 자극시켰다. 구원은 종교적 요소가 아닌 모든 인간에게 필요한 하나의 실현성이었다. 자신의 존재를 규명하고 확인받으며 인정하고 미래로 나아가는 원동력, 작가의 해석은 그 과정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그것이 신학적이니 세속적인의 문제는 고작 관점의 차이일 뿐이다. 인간에게 구원은 보다 고귀한 가치로 여겨져야 한다. 관점의 차이로 인한 논쟁의 자세로 대립할 것이 아니라 그 아름다움의 구현 방안을 모색하는 협심의 자세로 추구해야 한다. 그런데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은 구원을 ‘기다리는’경향이 강했다. 때론 천상의 빛이 내려오기를 기다리는 성지의 순례자들처럼, 때론 면죄부를 팔던 어떤 이든, 그저 무언가가(그것이 신이든, 인간에 의해 탄생한 무엇이든) 그들에게 다가가 ‘너는 구원받았느니라.’라고 속삭이면 그것을 계기로 구원은 이루어진 것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이루어졌다고 자신을 합리화 시킨 것이었다. 하지만 철학은 발전을 거듭해 계몽주의를 만나고 더 이상 인간은 누군가에 의해 실현될 구원은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것은 자기 위안에 만족하는 빈껍데기에 불과하고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이성을 갈고 닦아 남이 아닌 스스로가 판단해 구원을 선택하는 것이다. 선택의 과정에서 이성은 종착지의 광명이 아니라 구원의 여정을 밝혀주는 등불이었다. 그런데 이성은 동시에 위험한 불씨이기도 했는데 이는 욕망의 범주가 급속도로 확장했기 때문이었다. 석유를 머금은 듯 화르르 타오르기 시작한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무한대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성과 욕망은 엎치락뒤치락하며 인간이 스스로를 대면하기 위한 기나긴 여로에 끝없는 갈림길을 제시하고 선택을 강요한다. 나그네여, 그대는 실현할 것인가, 체념할 것인가? 괴테는 자신이 고통스러워하던 어느 순간 언제부턴가 자신의 옆에서 메피스트가 존재한다는 것을 감지했을 것이다. 그리고 악마는 괴테 귀에 앞선 말을 평생 동안 읊조렸을 것이 분명하다. 괴테의 번뇌가 평생에 걸쳐 작품에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괴테는 항시 옆에 있던 악마를 자신의 저서 ‘파우스트’에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역으로 메피스트에게 혹은 독자에게 살며시 속삭인다. “이 책을 읽는 그대여, 내가 생각하는 바는 이렇다네. 그 갈림길의 끝은 없다고 생각하네. 하지만 그대가 선택한 길은 그 무엇이든 간에 구원으로 가는 길이라네. 그저 한 발짝씩 다가간다는 것이 중요하지. 그러니 내면의 소리를 듣고 그대가 원하는 바를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그렇다. 괴테는 실현하든, 체념하든 온전히 그대의 판단으로 최선을 다하면 된다고 하였다. 맞는 말이다. 그대의 선택으로, 자신을 알고 삶의 의미를 스스로에게 부여하고자 하는 욕망은 실현되어야 한다. 그제야 구원을 위한 작은 준비를 마친 셈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욕망은 타인에게 무언가의 피해를 주지 않았을 때에만 허용된다. 우리는 타인을 고려하지 않고서는 혼자 존재할 수 없다. 존재의 양립 없이는 세상 어떤 것도 혼자선 무의미하다. 왜냐면 관계가 없다면 의미는 생성될 수 없기 때문이다. 때문에 욕망이 관계에 악영향을 행사할 것이 예상된다면 걸어왔던 구원의 길을 벗어나 잠시 쉬어야 한다. 결과가 어떻게 되든 부정적인 의미를 창출해낼 것이기 자명할 것이기에 더욱 더 그렇다. 그렇다면 이제는 긍정의 관계 속에서 구원의 새로운 길을 발견하고 자신의 실존을 발견함이 바람직하다. 부버가 말하길 태초부터 관계가 있었다. 사람이 아닌 관계가 있었다고 한다. 오직 나는 누군가에게 다가가 너로서 존재해야 유의미함이 생긴다. 세상에 나로서만 존재할 수는 없다. 만남이 있고서야 너와 내가 존재함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자신을 알아봐주는 상대가 있어야 비로소 자신의 존재 가능성을 설명할 수 있다.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다. 김춘수 시인은 그 의미를 이렇게 표현한 것이 아닐까 여겨진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저 ‘그’에 불과한 그가 이름을 불러준다는 만남의 행위를 통해 의미 있는 존재 ‘꽃’이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너’로서 상대를 만나는 것이 아니라 그저 ‘그’로서 조우하는 경향이 강하다. 우리는 누군가를 만나도 만나지 않은 것처럼 외롭고 공허함을 겪고 있다. 이는 진정한 만남이 아니고 동시에 아름다운 관계가 아니다. 의미는 사라지고 허무함만이 남아 있는 비인간적인 만남이다. 바람 불지 않는 공터에 쓸쓸히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그네처럼 그저 덩그러니 서있을 뿐이다. 바람이나 혹은 사람이 밀어줘야 그네가 움직이듯 우리는 그러한 비본질적인 관계를 배척하고 대신에 서로를 길들이는 과정을 겪어야 한다. 어린왕자에서 사막 여우는 왕자에게 말했다. 그 길들이는 시간이 바로 중요한 것이라고. 그리고 아마 이렇게 덧붙여서 말했을 것 같다. 시간이야 말로 존재에게 의미를 불어넣는 숨이라고. 그러니 너는 만남의 시간을 소중히 여기는 법을 배우라고. 옳다. 그런데 한 문장만 뒤에 더 넣으면 좋겠다. “너 스스로와의 만남도 역시.”
인간이 살아온 시간과 살아갈 시간, 살아왔었던 공간과 지금 처해있는 상황, 구원의 길은 이러한 시공간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것에 따라 각자가 추구하는 구원의 모습이 달라지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흘러온 시공간, 다시 말해 과거의 기억은 현재의 나를 규명하는데 도움을 주고 앞으로의 길을 펼쳐줄 하나의 틀이 되므로 매우 중요하다. 회상함은 나를 과거를 돌아보는 것이고 현재를 살아있음을 느끼는 것이며 나의 미래를 내다보는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우리는 구원의 끝은 모르지만 결코 멀지 않은 곳에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타인의 만남을 통해서 뿐만 아니라 자신의 회상을 통해 자신을 만나고 누구인지를 인지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작업을 통해 현재에서 감각을 새롭게 체득하고 자신의존재를 깨달을 수 있다. 나는 이렇게 존재하는구나. 하면서 말이다. 무언가 기억이 나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기억을 떠올리려 애쓴다. 회상함이 실패하면 자신을 구성하고 있던 과거 일부분이 없어진 것은 아닐까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불안하기 때문일 것이다. 존재 자체의 근간이 흔들리는 것만큼 공포감이 큰 것은 없다. 하지만 실존주의자들은 그대가 불안하고 염려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다고 했다. 그러니 그 걱정조차 즐기면서 마음껏 회상하자. 생각과 회상은 인간에게만 주어진 축복이 아니던가. 그렇게 자신만의 구원으로 한걸음 내딛으면 되는 것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데카르트의 말에서 한 단어만 바꿔도 무방할 것 같지 않은가? “나는 회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회상은 넓게 보면 자신에게 과거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닌 현재와 미래를 모두 아우르는 실존적 방안이기 때문에 카이로스(Kairos)적 시간이다. 모든 것은 현재다. 그리고 모든 것은 긴밀히 연결되어 있기에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시공간 그리고 내면에서의 치밀한 상호작용이 발생한다. 그 과정에서 인간은 필연적으로 외적인 상황에 대해 내적인 성숙의 아픔을 겪고 발전하기 마련이다. 무척이나 힘들고 고통스럽다. 나를 내려놓고 포기하고 싶다. 누가 대신 겪어줄 수도 없고 피할 수도 없다. 하지만 알고 보면 어떻게든 극복할 수 있다. 포기해서는 안 된다. 인간의 의지는 그 어떤 것이라고 꺾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저항하고 반항해야 한다. 그러고 나면 치열한 번뇌와 갈등을 딛고 일어나 구원으로 향하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임을 확신한다. 성숙의 정도(正道)를 막는 목소리에게 우리는 반항해야 한다. 그것이 내면이든 사회의 부조리함이든 맞서 싸워서 극복해야할 존재 따위일 뿐이다. 구원의 길을 막는 장애물이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사회는, 가정은 우리에게 우리다움을 생각하게 만들지 않았다. 반항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그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가 가고자 하는 구원의 갈림길 앞에서 그들은 웃으면서 말한다. “그것이 비록 부조리할 지라도, 다 그렇게 사는 건데 뭐. 너도 그저 그렇게 흘러가듯이 살아.”이것이 진리라는 마냥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이 말해 설득되어야만 할 것 같다. 그들의 말에 나도 모르게 무릎 꿇고 고개를 끄덕인다. 하지만 저 길의 끝에서 희미하게 새어나오는 미세한 빛줄기가 다시금 정신을 차리게 만든다. 그리고 미약하게 울려 퍼지는 메아리가 마음속에 남는다. 그들에게는 인간성이 없음을 잊지 마시오. 그들은 잠시 당황하지만 이내 평정을 되찾는다. “그대가 믿는 꿈을 그대로 실현시켜주겠다. 그 누구보다도 행복한 미래가 펼쳐지는 것이 그려지지 않는가? 우리들만 믿고 따라 오라. 그대를 아무런 걱정 없는 유토피아에 살게 해주겠다!” 사회가 달콤한 말로 속삭인다. 하지만 거기에 구원의 길을 걷는 자는 냉소를 머금고 외친다. “거기에는 행복을 선택할 자유도 없다. 우리는 스스로 선택할 수 있고 마땅히 그래야 한다. 그곳은 유토피아가 아니다. 그곳은 단지 또 다른 디스토피아이자 빅브라더에 의해 조장된 독재사회나 다름없다. 나는 자신에 대한 자유가 없는, 그런 곳을 거부한다.” 그러자 가정이 다가와서 한쪽 어깨를 감싸며 따뜻하게 말한다. “아무렴. 사회보다는 가족이지. 애초에 가족은 존재 그대로를 사랑하고 인정하는 곳이잖아. 인간성은 가족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지. 우리와 함께 가자고. 같이 행복해지자.”그러자 어깨의 있는 손을 떼어놓고 고통스럽게 고개를 저으며 그는 외친다. “가족은 이미 진정한 의미의 가족이 아니다. 너희는 자본이 풀어놓은 악령에 이미 물들어 변신해버렸다. 존재 자체보다는 존재가 어떠함에 따라 판단하는 너희 역시 인간됨이 부족하다. 이미 가정은 흉악함에 물들어버린 인간이 득실대고 무조건적인 사랑이 사라졌다.”그러자 그의 앞을 가로막던 사회와 가정은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다시금 길이 나타난다. 그런데 이번에는 무척이나 길다. 주변은 칠흑처럼 어둡고 걸어도 어딘지도 모르겠으며 끝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같은 길만 쳇바퀴 돌 듯 반복해서 걷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그래도 인내를 갖고 계속 걷는데 갑자기 공간의 감각이 느껴지지 않는다. 텅 빈 우주에 홀로 존재하는 것 마냥 여기가 어딘지조차 알 수 없다. 극심한 불안과 두려움이 엄습한다. 믿고 있던 것들이 모두 무너져 내린다. 일상이라는 투수가 던진 권태라는 투구(投球)를 받아 치고 낯섦이라는 홈베이스(Home base)에 도달한 것이다. 그는 그 곳을 밟자 아찔하고 극심한 현기증을 느낀다. 일상에서의 변화는 불현 듯 찾아온다. 일상이 주는 안정감은 권태에 빠지게 하는 원인이다. 안정적이지만 참을 수 없는 지루함은 견디기 힘들다. 결국 우리는 무언가를 함으로써 이 상황을 벗어나야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중요한 것은 한다는 행위에 담겨져 있는 성질이다. 일상에 순응하며 시간을 그대로 흘려보낸다면 삶의 낭비일 것이고 일상에서 변화를 찾아내어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낸다면 성숙한 구원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결국 일상 역시 자기 존재의 실현에서 거쳐야할 소재인데 문제는 그 변화가 너무나 불안정해서 우리는 쉽사리 험난한 그 곳에 발을 들여 놓으려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하지만 권태로운 일상보다는 불안정한 일상이 낫다. 전자가 인간에 의한 비본래적인 삶이라면 후자는 인간 그 자체에 의한 본래적인 삶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싫어하겠지만 인간이기 때문에 불안과 흔들림을 안고 살아가야 한다. 항상 걱정하며 실존에 대해 의문을 가져야하는 것이 인간이 가져야할 자세이다. 그러한 삶의 태도는 구원과 성숙에 빠질 수 없다. 염려하고 두려워하고 극복해야 한다.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 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 말이 아닌가 싶다.결국 인간의 삶은 실존적으로 성숙과 구원을 위한 반응의 연속이다. 성장하면서 느끼는 모든 것, 타인과의 관계에서 존재 하는 의미와 감정들, 사회적으로 만나는 나와 ‘그것들‘에 대해 인지하고 일련의 태도를 가지는 것들이 모두 개인적으로 실존하는 의문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한 과정인 것이다. 때문에 매 순간, 그리고 그 순간을 형성하는 나와 관계들, 시공간, 이것들을 구성해온 과거와 지금 현재, 그리고 앞으로의 미래 모습까지. 살아가기 위한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존재한다. 이 총체적 관계에서 어느 하나 빠질 것이 없다. 반항하고 선택하며 자유를 찾고 의미를 찾는 과정은 모두 다르고 소중하다. 그대가 실존하기 위해 존재한다는데, 무슨 말이 더 필요하리요. 살아간다는 것은 인간성의 승리가 아닐까.
구원은 무심코 나에게 다가왔다. 낯선 거리를 걷다가 스쳐지나가는 그 수많은 사람들에서 아는 이를 마주칠 확률보다 더 아득하게 나를 불러 세웠다. 권태로운 나날에 빠져있을 때, 내가 왜 질투를 하고 있는지 의아해하고 나를 둘러싼 외부적인 것들에 대해 하나의 해답을 찾지 못하고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 ‘철학카페에서 문학읽기’는 마치 내가 이러리라고 예상했다는 듯이 나를 찾아왔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어디 한번 이해하고 받아들이지 않겠냐고 오래된 친구처럼 편안하게 말했다. 해석하고 나의 것으로 바꿔서 수용하자 삶의 태도가 변한 것이 느껴졌다. 나를 둘러싼 삶의 의미가 다시 생생해지고 삶에서 생기가 솟아났다. 내 처지에 맞아서 그런지 몰라도 책의 내용 하나하나가 가슴 속에 너무 와 닿았다. 이 책이 주는 위로와 감동은 철학에 대한 아집을 벗어나게 한 계기 그 이상이었다.
나는 일종의 구원을 기다렸고 만났으며 그로 인해 삶의 희열을 맛보았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구원은 끝이 없다는 것을 잘 알기에 끊임없이 실존하고자 노력하면서 최선을 다해 삶을 영위하는데 만전에 만전을 다할 것을 스스로에게 약속한다. 오늘은 하늘이 흐리고 빗줄기가 내려왔다. 내일은 더욱 춥고 바람이 많이 불어올 것이다. 오한을 스며드는 추위도 머지않았다. 하지만 이 또한 기분이 들뜨고 즐겁다. 지금이 아니면 언제 또 누려보겠는가. 삶의 재미와 의미는 멀지 않고 나에게 달려 있으니 이 얼마나 소중한가. 나는 현재를 만끽한다. 나는 삶을 대하는 태도를 스스로 선택했고 지금, 나는 행복하다.
우수 박*순 경영학과 도서: 갈매기의 꿈
독후감: 갈매기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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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특별한 갈매기>
“나는 천재야” 내 어릴 적 기억 속 7살 때부터 중학교 입학 전까지 매일 스스로에게 때로는 가족들에게 했던 말이다. 천재이고 싶었는지 진정 천재였는지는 증명할 길이 없었다. 내가 다녔던 초등학교는 중간고사와 기말고사라고는 전혀 없는 시골 학교였기 때문이다. 영어 시간인데도 등산을 하기도 하고 수학시간인데도 축구를 하고는 했다. 우리가 조르지 않았다. 선생님들이 우리에게 권했을 뿐, 우리는 충실히 따랐다.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엄마의 반 강제로 영어 학원에 다니게 되었다. 아직도 기억하는 그 이유, 같은 학교 5학년 누구누구가 다니는데 좋다더라. 다행히도 나는 그 학원이 좋았다. 영어를 배우는 것도,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는 것도 나에게는 색다른 경험이었다. 천재성을 드러내주는 일화는 여기서 시작된다. 어느 날 담임선생님께서 나보고 영어 대회에 나가라고 하셨다. 충청북도 교육청에서 개최하는 도내 모든 초등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대회였다. 아마 공문이 내려왔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겠지. 내 초등학교는 전교생 100명 정도였고, 모든 학년이 1반밖에 없는, 그런 학교였다. 초등학교 1학년부터 6학년 때까지 전학을 제외하고는 항상 같은 반. 그리고 그 중 유일하게 영어 학원을 다니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결국 내가 나가게 되었다. 아주 단순한 대회였다. 영어로 된 짧은 노래를 불렀던 것으로 기억한다. 시내의 한 초등학교 교실에서 열렸고, 나는 그저 큰 초등학교를, 반이 1개가 아닌 5개가 넘는 학교를 본 것이 신기했을 뿐이었다. 대회 결과가 나왔다. 지역인재 할당제가 그 때부터 있었는지 은상을 타게 되었다. 상당히 떨떠름한 기억이 난다. 왜 내가 탔는지에 대한 의문, 동정심인가 생각이 들었다. 물론 가장 크게 차지한 것은 기쁨이었다. 엄청 웃으면서 교장선생님의 호명에 따라 조회대에 뛰어 올라갔었다. 끝은 여기가 아니다. 4학년에도 은상, 5학년에는 금상, 6학년에는 동상을 받으면서 나의 영어 실력을 인정받았고 그 공로로 ‘예능상’이라는 것도 학교에서 받아봤다. 학우들을 즐겁게 해주어서 받은 것이 아닌, 학교를 빛낸 학생에게 준 내가 초등학교를 다니던 6년 중에 최초이자 마지막이었다. ‘예능계, 체능계’할 때의 그 ‘예능’인 것 같다. 나는 이런 4년간의 특별한 사건을 겪고 나니, ‘특별한 사람’으로 착각하게 되었다. 불행하게도 그 착각이 깨지는 것은 한참 후다. 그리고 그 충격은 오랫동안 영향을 끼치게 된다. 조나단은 여느 갈매기와 다르다. 갈매기임에도 독수리를 모방하고 표방한다. 신체구조상 한계는 분명이 있겠지만 조나단은 포기하지 않는다. 무리와 다르게 행동을 하는 것에 두려움이 없었고, 부모님의 걱정에도 자신은 꿋꿋했다. 조나단은 특별한 갈매기였다. 그를 더욱 특별하게 만든 것은 자기만의 뚜렷한 가치관과 이것을 지탱하고 더 발전시켜주는 피나는 노력이었다. 매일 점심시간마다 농구를 한 중학교 3년을 지나 고등학생이 되었다. 중학생 때는 어떤 특별한 존재였을까 생각하면 떠오르는 것은 단 2가지뿐이다. 학교 도서관 앞에 가끔 붙이던 ‘다독 순위’에 내 이름이 항상 3위 안에 들어갔던 것과 15cm의 키가 큰 것이다. 별 것 없었던 이 순간과는 대조적으로 나의 ‘특별함’을 강화하게 된 순간은 고등학교 3년이었다. 이 시기에 ‘특별함’이 ‘자만’으로 바뀌게 되고 부동산 버블, 주식시장 버블이 끝날 때 나락으로 붕괴되듯이 나의 ‘특별함’도 같은 길을 가게 된다. 1학년 3월 전국시험, 나의 성적은 3~4등급이었지만, 뻔뻔하게도 목표는 연세대학교 경영학과였다. 내 학교 책상에 연세대, 고려대, 서울대의 마크를 붙여놓고 입학 전형을 빼곡히 적어놓았다. 내 방은 더 심했다. 정문 사진까지 붙여놓았기 때문에 참 요란했다. 아직 기억나는 건 내 책상을 본 학우들이 뒷담화를 했다는 것이다. 이해한다. 지방 국립대를 간신히 가는 성적인 내가 상위 1%도 가기 힘든 곳을 목표로 하고 대놓고 책상에 붙여놓았으니까. 조나단을 조나단이게 만들었던 것은 다른 갈매기들보다 빠르게 그리고 높이 날고 싶다는 열망이 아니었다. 그 생각, 열망을 직접 행동한 것이 조나단을 ‘특별한’ 갈매기로 만들었다. 그리고 계속 실패해도 다시 도전하는 정신이 ‘조나단’을 만들었다. 밥을 먹는 것보다 나는 것이 더 좋았던 조나단, 자신의 멸치를 노인 갈매기에게 양보도 할 줄 아는 조나단은 꿈을 이루기 전부터 멋진 갈매기였다. 나의 성적은 오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3월 이후 있었던 6월, 9월, 11월 전국 시험의 성적은 3월과 상당히 유사했다. 국어 점수가 조금 올랐다면 영어 점수가 떨어져 있고, 영어 점수가 올랐다면 수학 점수가 떨어져 있었다. 공부를 소홀히 하진 않았다. 하루 평균 최소 7시간 이상 했다. 쉬는 시간, 점심시간, 저녁시간 다른 친구들은 축구와 농구를 할 때 나는 공부를 했다. 엄마에게 오해를 받은 적도 있었다. 하늘은 높고 말은 살찌고 내 성적은 오르지 않던 날, 1주일에 과목별 한 권씩 문제집을 정복하던 날이 있었다. 역시 문제집을 새로 사야해서 돈을 달라고 했는데 엄마가 말했다. ‘돈 어디다 쓰냐. 매주 돈을 받아 가는데, 매번 문제집을 산다고 하다니’ 나에게 조금 실망스러운 때였다. 쉬는 시간 아껴가면서 공부를 했던 나를 돈이나 횡령하는 사람으로 의심을 하다니. 이해를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른 문제집보다 얇기는 했지만 1주일에 1권을 푸는 놈은 내 주변에 드물었고, 그렇게 공부하는데 성적이 제자리인 것은 엄마가 오해를 하기에 충분했었다. 하지만 나의 반박에 엄마는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나를 못 믿겠다면, 나에게 3주의 시간을 달라. 그 시간동안 내가 푼 문제집을 버리지 않고 모아서 보여주겠다.’ 그러자 엄마는 여느 때처럼 ‘힘 내’라고 말씀하시며 돈을 건네주셨다. 결단코 1원도 다른데 쓰지 않았다. 혹 다른 곳에 쓰고 싶다면, pc방이나 노래방, 그 돈을 엄마에게 달라고 했었다.<특별함을 넘어서 오만한 갈매기>
성적이 오른 것은 1년 반이 지난 2학년 가을이었다. 나에게 1이란 내 생일에서나 보던 것이었다. 나의
생일은 11월 11일. 그런데 가을 전국 시험에서 나의 성적표에 반 1등이라는 칭호가 덤으로 딸려왔다. 내가 그 때까지 받아본 1+1 중에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엄청난 일이었다. 그 날 저녁, 엄마가 퇴근할 때까지 기다리는 시간은 참 길었다. 정확히 퇴근 시간에 맞춰 엄마에게 자랑을 했고, 저녁 메뉴는 삼겹살이었다. 그 때부터였던 것 같다. 학우들이 나를 바라보는 눈이 달라진 때, 내게도 모르는 문제를 쪼르르 들고와 물어보던 때가 이 순간부터 시작되었다. 더 이상 내 책상에 붙어있던 대학교 마크들을 보고 비웃는 사람들은 없었다. 공부 비법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는 친구들도 있었고, 어떤 학원을 다녔고, 어떤 인강을 들었는지를 물어보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학원도, 인강도 전혀 하지 않았다. 이 점이 나를 더 특별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이 순간까지도 나는 정상이었다. 특별함과 오만을 나누는 경계선 안에 있었다. 오만함의 영토를 정복해가기 시작한 것은 몇 개월 후 고등학교 3학년 때였다.
조나단은 잠시 포기했었다. 특별한 갈매기가 아닌 그냥 갈매기가 되기로 했다. 연습을 하다 많이 다치기도 했고 약해지기도 했다. 그리고 더 이상 다른 갈매기들의 조롱을 받고 싶지 않아서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것은 조나단과는 맞지 않는 옷이었고 자신의 호흡을 방해할 정도로 꽉 조이는 작은 옷이었다. 이럴 때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조치는 역시 그 옷을 벗는 것, 그리고 자신에게 맞는 옷을 입는 것이다. 예비 고3, 어깨가 무거워지는 칭호를 단 순간 담임선생님이 나를 호출했다. ‘공부 정점들의 집합소’인 기숙사를 들어오라고 하셨다. 전 학년에서 25등 안에 들어야하고 문과에서 10등 이내에 들어야만 입사할 수 있는 그 곳, 나의 고등학교 안에서는 서-연-고 SKY로 여겨지던 곳이었다. 시간은 흘러 정말 중요하다는 3월 전국 시험 그리고 바로 한 달 뒤의 4월 시험에서 나는 또 다른 칭호를 얻게 되었다. ‘전교 1등’의 타이틀. 공부를 잘하는 학생이라면 혹은 잘하고 싶은 학생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꿈꾸는 그 자리에 2년 만에 올라섰다. 분명 이것은 나에게 좋은 소식이다. 노력의 결실이 드디어 맺어지기 시작했으며, 목표와 매우 가까워졌음을 알려주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조나단과는 다른 생각을 하기 시작했고 어둠의 신호가 초록색으로 바뀌었다. 나의 고 3 1년을 바꾼 생각, ‘난 왜 다른 사람들처럼 쉬는 시간에 쉬지 못하는 거지? 쟤네들은 쉴 때 쉬고도 나만큼 공부를 잘 하잖아?’ 단순한 생각이고 누구나 할 수 있는 생각이기도 하지만 무서운 점은 자신의 색깔을 잃어버린다는 것에 있다. 아이러니하게 정점을 찍은 순간 저 으로 가기 시작했다. 이 날 이후 나는 남들처럼 공부를 했다. 다른 갈매기처럼 행동을 하면서 독수리처럼 날기를 바랐다. 조나단이 그랬듯, 갈매기가 갈매기 이상이 되기 위해서는 상상 이상의 노력이 필요하다. 실패를 겪어도 다시 일어서는 의지가 필요하다. 나는 계획을 바꾸었고, 행동을 변화시켰다. 남들이 하는 대로 했다. 몸은 조금 편했다. 쉬는 시간에도 쉴 수 있고, 식사 후에도 소화시킬 여유가 생겼으니까. 하지만 마음은 불편했다. 이대로 괜찮을까. 하지만 서 있으면 앉고 싶고, 앉아 있으면 눕고 싶은 것이 본성이라는 말처럼 점점 누워있고 싶었다. 그리고 그렇게 했다. 투자의 대가 워렌 버핏이 말했다. ‘명성을 쌓는 데는 20년이 걸리지만 잃어버리는 데는 5분이면 충분하다.’ 나의 성적이 하락하는 데는 3개월로 충분했다. 이 때 다시 내 맞춤복을 입었다면 나는 다시 독수리 같은 갈매기가 될 수도 있었겠지만, 평범한 갈매기를 선택했다. 어쩌면 당연한 결과이고 예견된 바일 수도 있다. 수능 성적이 기대 이하로 나왔다. 점수는 고 2때 수준으로 회귀했고, 꿈꾸던 대학교들은 꿈속에 영원히 박제되었다. 나는 수능 성적표를 받고 2차 위기를 겪었다. 박제된 나의 꿈에 다시 도전-재수-할 용기가 나질 않았고 운명으로 받아들였다.<극과 극은 통한다. 오만에서 자괴감으로>
누구나 그랬듯 신입생의 봄은 아름다웠고 따뜻했다. 나의 고향과는 다른 날씨, 빠르게 찾아오는 벚꽃 그리고 사랑까지. 교양 수업에서 만난 여학생을 결국에는 나의 여자로 만들었고 헤어지기 전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만났다. 학점 관리도 잘 되어 4 초반을 얻어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은 첫 학기였다. 문제는 가을에 시작되었다. 수능을 본 지 1년 된 11월의 추웠던 날, 내가 재수를 했다면 어땠을까, 아니 최소한 망하지만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는 상상을 했다. 수험생 시절 힘들 때마다 상상했던 대학교와 대학생활을 꿈꾸지 않았던 곳에서 생각하니 나의 마음은 계속 아프기만 했다. 나쁜 것들은 무리지어서 온다는 말처럼, 여러 의문점들이 내 마음의 문을 두드렸다. 그 중 한 가지, 오래 전 읽었던 책 중에 나왔던 말이 있었다. ‘막상 대학교를 간 학생들이 목표를 잃고 뒤늦은 사춘기를 겪는다.’ 고등학교 2학년 쯤 읽은 걸로 기억한다. 나는 비웃었다. 난 벌써 인생의 목표가 있는데 무슨 뒤늦은 사춘기를 겪는다고? 여러 번 실패해 본 사람은 다시 실패해도 일어날 수 있지만 진짜 위험한 것은 한 번도 실패해보지 않은 사람이다. 또 다른 책에서 나왔던 말이다. 역시 믿지 않았다. 적어도 나는 다를 것이라고, 잘 이겨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수험 생활 3년 중에서 2년을 성적이 오르기까지 기다렸는데, 내가 무엇을 이겨내지 못할까 생각했다. 하지만 이 1년 동안 나는 내 시선으로 살아가지 못했다. 공부만으로도 벅찼던 나는 다른 취미를 가지지 못했다. 단지 컴퓨터 게임을 즐겼던 정도. 대학에는 참 다양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다. 노래를 잘 부르는 사람, 악기 하나쯤은 능숙하게 다루는 사람, 외국어 하나는 한국어만큼 잘하는 사람까지. 도대체 언제 저 사람들은 저런 능력을 가지게 되었을까. 하나로도 벅찼던 나에게 그들은 최고의 비교대상이었다. 비교가 늘어갈수록 자괴감은 깊어갔고 동시에 나보다 못한 사람들에 대한 멸시도 늘어갔다. 내가 스스로에게 주었던 마이너스를 플러스로 채우는 방법으로 다른 사람을 무시하는 것을 선택했다. 제일 쉬운 길이다. 그리고 가장 빠져나오기 힘든 길이기도 하다. 다시 한 번 노력으로 자신의 능력을 키우는 것이 힘들지만 오래 지속되고 최상의 길이다. 하지만 눕는 것을 좋아했던 나에게 앉아 있으라는 말은 고문이었다. 누워서도 할 수 있는 것을 찾았고 충실히 실행했다. 2010년 11월의 어느 날. 난 수능의 상처를 극복하지 못했고, 목표를 잃어버린 채 살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선택할 수 있는 것은‘군대’였다. 그렇게 나는 내 계획보다 1년 빨리 군대를 가게 되었다. 2011년 화창했던 3월이었다.<착각과 회피의 조나단>
조나단은 결국 돌아온다. 자신만의 가치관으로 살아간다. 무리에서 이탈하는 위험을 감수하고서도 그 자신으로 산다. 많이 힘든 시간을 겪었지만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갔다. 점차 자신을 따르는 갈매기들이 늘어갔다. 그리고 이상향의 세계에서 행복을 느끼면서 생을 마감한다. 돌아왔다. 군대에서 640일의 시간을 보내고 나의 무대에 입장했다. 복학생이 늘 그렇든 ‘뭐든지 할 수 있다’는 용기를 가지고 무대에 다시 섰다. 어느 유명한 음악가가 그랬다. 가르치기 가장 어려운 사람은 하나도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 어설프게 알고 있는 사람이라고. 나는 책을 미친 듯이 읽기 시작했고, 사교활동을 무척이나 많이 했다. 동시에 그 동안 새롭게 꿈 꿔왔던 주식 투자를 시작했다. 카카오톡에 친구 수도 많이 늘어가고, 학교를 걷다보면 다시금 아는 사람이 조금씩 늘어갔다. 학점도 물론 좋았다. 2010년 신입생의 따뜻했던 봄날과 유사하게 흘러갔고 그것은 가을에도 이어졌다. 2013년의 가을, 대학생활의 정점을 찍었다. 멘토링을 통해 생활비도 여유롭게 쓸 수 있었고 학과 1등을 했다. 무엇하나 부족한 점, 아쉬운 점이 없던 가을이었다. 나는 낭비를 좋아하지 않는다. 가까운 편의점에서 음료수가 1,000원, 10분 거리의 슈퍼에서 800원이라면 난 슈퍼로 간다. 그랬던 내가 런치세트로 먹으면 4300원인 맥도날드 빅맥세트를 밤에 배달시켜서 7300원으로 먹었다. 그 정도의 사치를 부릴 정도로 정점의 생활을 하고 있었다. 정점이라는 단어는 좋은 것 같으면서 나쁘다. 이전보다 상승한 상태이니 성장의 의미가 있다. 하지만 앞으로 있을 하락의 시작점이기도 하다. 전제는 하나, 더 이상 성장을 멈췄을 때. 꾸준히 성장을 한다면 지금의 정점은 미래의 저점이 된다. 나는 성장을 멈췄다. 나는 잘하고 있는 줄만 알았다. 내 삶을 내 가치관으로 살고 17살의 열정이 돌아온 줄 알았다. 모든 것은 착각이었고 회피였을 뿐, 핑계에 지나지 않았을 뿐이었다. 추락의 시작은 그간 읽었던 책의 목록을 확인하는 데서 시작했다. 대략 100권 정도가 있었지만 제목을 하나하나 살피면서 어떤 내용이었는지를 다시 기억해보고 있었다. 그러나 기억이 나는 것은 30%가 되지 않았다. 한 번만 읽은 책도 있지만 다섯 번 이상 읽은 책도 있었다. 30%라는 수치는 나에게 수치를 느끼게 해주었다. ‘고작 내가 이것밖에 되지 않는가.’ 그렇다. 기억이 나지 않으면 한 번 더 읽으면 된다. 이런 생각을 했다는 것에서 나의 마음은 아직 자괴감을 느끼던 수준에서 성장하지 않았음을 나타낸다. 또한 봄부터 활동해오던 11개의 소모임에서 알게 된 그 많은 사람들과 지금까지도 연락하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30명이 넘는 사람들 중 단 한 명도 없었다. 책의 충격에서 벗어나기 위해 친구에게 연락을 하고 싶었다. 나의 고민을 털어놓고 위로를 받고 싶었다. 그러나 친구 목록을 보는 순간 나의 ‘친구’들은 신입생의 봄날과 다르지 않았다. 문제는 성격에 대한 고찰까지 번져갔다. 내가 성격이 좋지 않은가? 이기적인가? 연락을 잘 받지 않나? 혹시 말실수를 했나? 아무리 생각을 해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이 답을 얻게 된 날은 2년 후 2015년 겨울이다. 문제에 대한 답을 찾지는 못했지만, 나를 슬럼프로 빠지게 하는 데는 충분했고, 성공했다. 모든 사교모임에서 나왔고 독서를 중단했으며 게임에 빠졌고 그렇게 어둠의 방학이 시작되었다. 사실 이런 징조는 지금 생각해보면 예전부터 있어왔다. 방학 때마다 학기 중 연락하던 친구들의 수는 급감했었다. 나 스스로의 생활패턴도 늦잠-게임-식사거르기-게임의 반복이었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방학이면 고향에 돌아가는 학생들이 많으니까, 내가 지금 친구 없이 외롭게 지내는 것은 일시적이고 견딜 수 있다고 여겼다. 또한 학과 특성상 조별 과제를 많이 하게 되는데 그 후 연락하는 사람도 한 명도 없었다. 이때부터 스스로에 대한 피드백을 하고 자기계발의 선순환 고리를 만들었어야 했다. 나는 그러지 못했다. 3년의 시간이 지난 후 뒤늦은 깨달음을 얻었다. 그럼 나는 이 순간부터 양질의 씨앗을 심고 푸른 새 떡잎을 틔웠을까. 아니다. 나는 도망을 선택했다. 그 동안 쌓여왔던 나 자신에 대한 문제와 주변의 문제들을 무시했다. 극복이 아닌 포기를 선택했고, 포기가 아닌 올바른 선택이라고 합리화를 했다. 더 이상 악화시키지 않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해결되는 것은 없었다. 당연히. 나는 그 후 2년 간 차악의 선택으로 살았고 이 선택들이 나를 유지시키기는커녕 더 깊은 곳으로 데려갔다. 학점은 하락하기 시작했고, 다른 사람들이 취업 준비, 대학원 준비, 혹은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한 노력들을 할 때 나는 ‘특별한 갈매기’였다. 그들과 반대로 가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갈매기.<조나단, 나를 부탁해>
갈매기의 꿈을 다 읽어갈 때 쯤, 내 의식의 흐름도 끝나가고 있었다. 신기하게도 조나단의 삶의 행적과
내가 걸어온 길이 어느 정도 유사하게 흘러갔다는 사실이 조금 더 이 책에 감정이입을 하게 만들었다. 조나단이 마지막에 살았던 세상은 그가 꿈꾸던 세상이었다. ‘특별한’갈매기들이 사는 곳, 자기만의 시선으로 세상을 즐기는 갈매기들의 낙원, 현실에 존재하기 매우 힘든 유토피아. 그렇기 때문에 특별한 갈매기들이 평범한 갈매기들의 낙원에서 살아내기 위해서는 엄청난 의지와 노력이 필요하다. 나를 구해준 또 하나의 책이 있다. ‘스물아홉 생일, 1년 후 죽기로 결심했다’란 제목의 수필. 꿈을 잃고 도망치면서 삶을 살아온 주인공 아마리가 자신이 동경하는 라스베이거스에서 1주일을 보내보고 싶다는 결심을 하게 되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한 처절한 1년의 기록인 이 책. 나와 비슷한 처지의 주인공에게서 위로를 받았고, 눈물을 흘렸고, 꿈도 받았다. ‘나도 한 번 도전해보자’는 의지도 받았다. 조나단과 아마리 그리고 나. 도망을 친 지 2년 째, 대학교 졸업을 한 달 앞둔 지금, 다시 17살로, 따뜻한 봄이었던 20살로 돌아가고 싶어졌다. 도망자의 신분이 아닌 도전자의 신분으로, 그 나이가 아닌 그때 가졌던 내 의지와 열정, 실행력을 가지고 싶어졌다. 보통의 소설 혹은 수필이라면 앞으로의 전개는 주인공이 목표를 이루고 성공적인 삶을 사는 내용이 나오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나는 다르다 그리고 같다. 지금 성공적인 삶을 이루지는 못했다는 점이 다르고, 앞으로 이룰 것이라는 점이 같다. 그렇다. 신분 변화가 이뤄진 것이 오래되지 않았다. 불과 한 달이 채 되지 않는다. 아직도 과도기인 듯하다. ‘조나단이 되는 것이 가능할까, 갈매기의 삶도 나쁘지 않은데’, ‘나는 조나단이 되고 싶어. 내 꿈을 이루고 내 가치관대로 살고 싶어.’이 두 가지의 고민이 아직도 내 머리 속에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더 강해지고 있는 쪽은 조나단이다. 점차 많은 갈매기가 조나단에게 왔고, 그들이 다시 평범한 갈매기들을 그 갈매기들만의 삶을 사는 데에 도움을 주기 위해 떠났다. 어려운 길이고 힘든 길이지만 더 즐거운 길이며 행복한 길임을 깨달아 가고 있기 때문이겠지. 나는 아직 잘 모른다. 내가 선택한 길이 즐거운 여행이 될지, 고난의 행군이 될지는 겪어봐야 알겠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히 아는 것은 도망자의 삶이 힘들다는 점이다. 처음에는 몸과 마음이 편하다. 추구해야 할 목표가 없으니 무난하게 시간이 날 이끄는 대로 살면 된다. 하지만 점차 마음이 불편해진다. 포기를 했지만 내 좌심방 좌심실 한편에 숨겨놓았던 꿈이 나를 아프게 자극한다. 어느 순간이 지나면 몸도 편하지가 않다. 죄책감이 들기 때문에 잠을 자도, 휴식을 취해도 온전히 쉬지 못한다. 결국 몸과 마음을 모두 아프게 한다. 꿈을 포기하는 일은.<날 길들여줘, 조나단>
150페이지에 불과한 책이 15년에 달하는 나의 기억을 되살렸다. 순간순간의 느낌까지도 생생하게, 마치 앨범을 보고 캠코더 영상을 다시 보는 듯 했다. 삶의 저점과 정점을 경험해 보았고 사이사이 상승곡선과 하강곡선을 살아봤다. 그리고 지금, 수평선. 수평의 움직임이 위로 갈지 밑으로 갈지는 오직 나에게 달려있다. 며칠 전 읽었던 어린왕자에 너무도 유명한 구절이 있었다. ‘네가 나를 길들인다면 나는 수천만 마리의 여우 중에서 너에게 특별한 하나의 여우가 될 거야.’ ‘그 장미가 하는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판단해야 했어.’
도전자로써의 내 모습은 1달 후, 1년 후, 5년 후의 내가 판단할 것이다. 그 때까지 나를 부탁해, 조나단. 나를 길들여줘.
우수 나*선 정치외교학과 도서: 중세는 살아있다
독후감: 중세인을 위한 변명 (The apology for the medieval peop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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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도그마에서 벗어나기 – 기록과 편집으로서의 역사
중세는 억울하다. 대개 인류 지성사는 이 시대를‘무지의 베일’1)에 가린 아둔한 자들의 침체된 역사라
폄하 해버리곤 한다. 움베르토 에코를 위시한 오늘 날의 일부 석학들이 중세에 가해진 부당한 오명을
벗기기 위해 분투하고 있지만 역부족이다. 여전히 일반인들의 무의식 속 중세는 단지 마녀사냥이 자행되며, 인간의 존엄을 짓누르고, 고문과 굶주림으로 점철된 암흑기로 각인되어 있을 뿐이다.
물론 이 시대에 차마 입에 담기가 무서울 정도의 괴상망측한 일이 종종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렇기에 중세를 절대 악(惡)으로 보는 기존의 시각에 근거가 아예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동안의 천편일률적인 중세에 관한 도그마(dogma)에, 엄밀한 사료를 토대로 날카로운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 역시 필요하다. 이것이야말로 표현의 자유가 보장된, 혜택 받은 시대를 사는 우리의 책무다. 스승 소크라테스의 양심을 알리기 위해 『소크라테스의 변명』을 쓴 플라톤의 마음처럼, 이 책의 저자 장 베르동은 위와 같은 문제의식에서 중세를 위해 본 책을 서술했다. 역사는 기록과 편집의 집합이며, 집합은 다시 이미지(image)를 낳는다. 이를테면 신문이 날마다 부정적인 사건사고 위주로 기록하고 편집하는 것이, 작금의 사회에 관한 현대인들의 비관적인 인상(印象)에 기여하듯 말이다. 평화롭고 유쾌한 일은 보통 기록되지 않는다. 충격적이고 쓰라린 사건만이 기록된다. 중세의 역사도 마찬가지다. 중세말의 혼돈과 타락이 중세 전체는 아닐 것이다. 중세는 약 1000년에 가까운 길고 긴 세월이었다. 우리는 늘 이것을 간과한다.2. 근대인들의 시샘
새 시대가 앞 시대를 넘어서려는 것은 당연하다. 분명 근대는 중세의 반동이지만, 동시에 중세의 자식이기도 했다. 중세의 공백이 근대의 출현을 불러온 것이 아니라, 중세의 조용한 유산을 근대가 요란하게 상속 받은 것이다. 중세는 조용하고 길게, 천년동안 천천히 우리 삶의 기반을 주었다. ‘역사는 발전한다’ 는 명제가 참이라면, 중세의 발전 없이 근대의 출현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중세는 정체된 시기라는 누명을 써왔다. 역사발전의 공백기로 치부되어 왔다. 프로이트적으로 아버지를 부정하는 사춘기 소년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Oedipus complex)가 아니었을까? 근대인의 시샘이었으리라. 오늘날의 관점에서 이전 시대를 돌이켜 보면, 우선 못난 것부터 먼저 눈에 띄기 마련이다. 그다음엔 맥락을 무시하는 오류를 종종 범할 것이고, 과잉 일반화하기 일쑤일 것이다. 근대인들이 그랬다. 근대인의 눈에 비친 중세는 언제나 비합리적이고 추하고 불결했다. 근대인들은 새로운 세상을 창조한다는 자부심으로 중세를 모멸하고 무시했다. 그러나,‘나치’의 등장은 이성적이라 자부하던 근대인의 환상을 무너뜨렸다. 어느 시대 어느 세상에서나 명암은 있기 마련이라는 단순한 진리를 망각한 것이다.3. 포스트 모더니즘 시대의 중세 재해석
우리는 포스트 모더니즘의 시대의 사람이다. 포스트 모더니즘은‘해체’와‘복원’의 변증법이다. 어느 한 시기 전체를 한 단어로 축약해버리는 편견을 해체하고, 생략된 고유한 맥락을 복원한다. 전체를 해체시켜 개체를 분리하고, 다시 개체 하나 하나의 개성을 복원한다. 이 관점에서 우리는 살아보지 못한 중세를 복기해야 한다. 작은 화소들을 공들여 모아 만든 선명한 TV 화면처럼 말이다. 중세를 포스트 모더니즘적으로 읽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중세가 평화롭고 풍족한 유토피아였음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더 심한 지옥이었음을 밝히는 것도 아니다. 바로 중세는 암흑이며 근대는 빛의 세기라는 극단적인 이분법에서 탈피하는 것이다. 그 다음은 중세라는 긴 시기를 긴 호흡으로 천천히 되살펴 보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기존의 논의가 다루지 못한 작은 부분들을 여러 각도에서 복원하는 것이다. 논리는 선명하고 명확하게 세상을 비추고 또 구분해낸다. 그러나 빛이 강렬할수록 그림자 역시 짙어 지는 법이다. 짙은 어둠은 크고 뚜렷한 것들 외에 모조리 삼켜버린다. 중세가 꼭 그렇다. 천년 중세의 평화롭고 안락한 일상은 거대하고 강렬한 정치 종교적 사건들에 의해 가려져 왔다. 그래서 중세 재조명의 목표는 작고 희미했지만 가장 중요했던 중세인들의 삶을 복원하는 것이다. 중세 전체의 정치경제적 거대담론이 아닌, 중세인 한 사람 한 사람의 희로애락과 평온한 일상을 다루는 것이다. 그림자를 걷어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포스트 모더니즘적 중세 읽기가 아닐까?4. 중세는 살아있다
중세는 좌우보혁 할 것 없이 어떤 진영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시대였다.3) 마르크스는 자신의 독창적인 역사 발전의 단계에 한 과정으로 이 긴 시기를 우겨 넣었다. 괴팍한 성격과 풍성한 수염을 가진 한 사상가에게 중세의 자리란 단지, 폐쇄적인 장원에서 벌어지는 영주와 농노의 계급투쟁의 시대였다. 이 소용돌이에서 사회의 생산력은 극히 미약했다. 생산관계는 신분제에 예속되어 늘 굶주렸다. 지배계급은 포악했다. 마르크스의 변증법에서 이 고난의 시기는 벗어나는 데에만 무려 1000년이 걸릴 정도로 정체된 시기였던 것이다. 자유주의자의 눈에도 중세란 정치권력을 통해 부를 독점하는 악한 체제였다. 신분특권을 이용하여 불로소득을 정당화하고 세습했다. 이 체제는 여러모로 인간의 자유와 존엄을 억압했다. 국왕과 영주는 자의적으로 사람을 가두고 죽였다. 교회는 마녀사냥과 이단재판으로 사람을 불태워 죽였다.
뿐만 아니라 세금이란 명목으로 시도 때도 없이 개인의 재산을 공권력을 이용해 강탈했다. 장원과 신분제는 자유임노동을 공간적으로 구속했고, 특권계급은 자유계약과 공정한 경쟁의 결과를 뒤집었다. 시장에서의 경쟁과 노력이 아니라 핏줄과 DNA를 통해 부를 분배했다. 자유주의자들은 중세를 저주하고 냉소했다. 하지만 중세의 실상은 이들의 비관적 비판과는 달랐다. 중세는 사람 사는 곳이었고 역으로 1000년 동안 안정된 삶은 영위하던 시기였다. 저자 장 베르동은 중세에 관한 사료들을 끌어 모아 그대로 이 책에서 풀어낸다. 기록과 편집이 부정적이고 선정적인 것들 위주로 된다는 맥락을 재차 고려해보면, 장 베르동이 추려낸 사료이상으로 중세가 사람 살만한 곳이었음을 반증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시기와 마찬가지로 중세에도 웃음꽃이 피어났으며, 사랑을 했고, 여행을 다니며 목가적인 삶을 살 수 있었다. 중세에는 가난한 적도 있었지만 풍족하게 누린 날이 훨씬 더 많았다. 공동체의 온정이 살아 있었다. 노동시간도 오히려 근대보다 덜했으며, 축제도 많이 열렸다. 휴식과 오락거리도 풍성했다. 종교는 사람에게
권세를 부린 적도 있었지만, 대개는 삶에 녹아 도덕적 교화와 정신적 지주가 되는데 더 방점을 두고 있었다. 물론 근대인들의 주장도 부분적으로 사실이었다. 거리는 불결했으며 위생 상태는 최악이었다. 전염병이 창궐했고 흑사병으로 유럽인구의 상당수가 사망했다. 그러나 의학은 끊임없이 발전해 나갔고, 환자를 위한 간호와 완쾌를 바라는 마음은 똑같았다. 중세에서는 정치-경제/사회-문화 모두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발전하고 있었다. 단지 중세말기의 타락상을 중세 1000년을 일반화하는 논리 오류만 접어둔다면, 객관적으로 중세의 빛과 그림자를 모두 고찰하고 그중에서 계승할 부분을 찾아내는 현명함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현대인들은 생존경쟁에 허덕이며 저녁이 있는 삶을 갈망한다. 사회의 모든 책임은 옅어지고 있다. 시와 노랫말은 사장되는 추세다. 중세인들은 삶에서 여유와 유머를 추구했다. 장인정신이라 불릴 만큼 책임에 높은 가치를 두었다. 낭만과 음유시인들의 발라드가 울려 퍼졌다. 이렇듯 현대의 결핍을 중세의 여유로 치유할 수 있다. 이것들이 21세기 오늘날 , 다시 중세를 되살펴보아야 하는 이유다.5. 종교와 사회, 종교와 정치 – 중세에서 현대로
중세하면 종교를 빠뜨릴 수 없다. 기독교적 세계관은 서구 정신의 뿌리이며, 중세의 이데올로기로 기능했다. 중세의 생활에서 교회를 빼놓고는 거의 언급할 수 있는 게 없다. 따라서 이번 단락에서는 중세의 핵인 종교를 사회와 정치적 차원에서 좀 더 다뤄 보려한다. 나아가 오늘 날 종교의 정치사회적 역할까지 논의를 진전시켜 보려한다. 중세를 다시 읽는 것도 결국은 오늘날의 교훈을 위해서이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필자는 조심스레 막스 베버(Max Weber 1864-1920)와 마이클 샌델(1953~)이라는 각각 20세기와 21세기의 지성을 본 글에 모셨다.① 종교의 굴레와 탈(脫종)교 사이에서 – 막스 베버
중세 말 교회권력과 군주권력의 균형추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한 때 서릿발에 황제를 무릎 꿇렸던 교황은 아비뇽에 갇혔으며, 각 파벌의 수장은 서로가 자신을 정통 교황임을 참칭했다. 교회는 부패했고, 종교개혁이 일어났으며 연이어 종교전쟁으로 번졌다. 이 다툼 속에서, 결국 세속권력이 종교권력에 승리했다. 이제 종교는 세속의 발전을 가로막는 구시대적 패배자로 간주 되었다. 그러나 베버는 종교의 패배라는 현실을 겸허히 인식함과 동시에 오히려 자본주의 발아에 종교적 영향과 기원이 존재했음을 고찰했다.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으로 유명한 막스베버는 자신의 종교사회학에서 핵심을‘탈 주술화’와‘합리화’로 잡았다.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삶과 운명이 주술적 믿음에 의해 좌우되었다. 특히 의학에 있어서 점성술과 같은 미신이 위독한 환자의 치료를 좌우했다. 산모들은 종종 미신에 의해 목숨을 잃어야 했다. 그래서 베버는 역사의 진보를 이성에 따른 합리화 과정이라고 보았다. 이 관점에서 중세는 이성의 계몽이 덜 된 미성숙한 사회였다. 종교의 굴레에서 세상이 탈출해야했 다. 그러나 종교의 영향에서 벗어나려 했던 근대 자본주의 역시 종교와 무관하지 않았다. 과거의 종교리가 세상을 억압했다면, 종교개혁으로 출현한 새로운 종교윤리는 세상을 발전시키고 자본주의의 맹아의 한 부분이 되었기 때문이다. 종교는 뫼비우스의 띠와 같았다. 결국 베버는 탈 주술화를 목표로 하지만 종교의 사회적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다는 불가피성을 목격하고 인정 할 수밖에 없었다. 난관에 부딪혔다. 베버의 논지는 종교가 세상 모든 분야를 침식하여 주술화 한 것을 비판했으나, 종교의 고유영역 자체를 아예 없애버리지는 못한다는 한계에 봉착했다. 종교와 탈종교의 딜레마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렇다면 종교를 특정방향으로 잘 관리하는 방법 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는 마이클 샌델의 논의가 막스 베버에 뒤이어 꼭 필요하다.② 정치는 종교의 순기능을 권장해야한다 – 마이클 샌델
중세인의 삶에 종교는 깊숙이 개입했다. 꽤 성공한 영역도 있었지만 결국은 실패했다. 자유주의적 사상이 세계에 보편적으로 보급된 오늘 날의 시민들은 종교의 정치성에 굉장히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던진다. 이러한 막연한 심리적 불안감에는 과거 중세시절 종교의 폭력으로 자행되었던 수많은 폭력과 이단재판, 마녀사냥, 종교의 만행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유주의를 어느 정도 받아들인 국가에서는 너나 할 것 없이 종교 영역에서 중립을 요구한다. 그러나 종교는 그 영향력의 정도와 깊이는 차이가 있겠지만, 중세건 오늘 날이건 사람들의 삶에 여전히 개입한다. 우리의 선택에서 종교적 가치관은 늘 일정한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문제는 종교에 대한 중립으로 인해 생긴 공백지대에서 발생했다. 자유주의는 인간의 이성과 신앙이 조화되어 공백지에 예수의 복음, 부처의 가르침이 들어서길 바랐다. 하지만 현실은 이 틈을 타고 종교 근본주의자들이 가득 차 버리고 말았다. 종교에 대한 정치의 외면은 본의 아니게 복음이 아니라 혐오를 낳은 것이다. 만약 종교를 외면하는 정치와 중립이 아니라, 종교의 좋은 점을 이끌어내는 정치가 있었다면 IS와 9.11테러 같은 일이 자행 될 수 있었을까? 마이클 샌델은 이 부분을 지적한다. 종교가 잘못된 점도 많았지만, 종종 세상의 인간적 가치와 정 (Justice)와 선(善)을 불어넣기도 했다. 센댈은 인종차별을 극복한 것은 종교에 관한 정치의 중립이 아니라, 마틴 루터 킹(1929-1968) 목사를 비롯한 종교적 차원의 양심에서 비롯되었다 말한다. 종교인들이 명백한 사회부정의 앞에서 중립과 눈치를 보면서 속세와 단절 하는 게 과연 옳은 일일까?
중세의 종교는 사회를 교화하고 정화하는 역할을 맡았다. 정신적 지주였다. 시대를 거슬러 다시 종교권력이 정치권력을 예속시키자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에 종교가 정치를 껴안을 수는 없다. 거꾸로 정치가 종교를 포용해야 한다. 방관은 더 큰 악을 불러온다. 중세가 종교로 정치를 정화하려했다면, 오늘 날은 정치가 종교의 순기능을 권장해야한다. 종교의 윤리와 미덕을 삶과 결부시켜 실현하려 했던 중세의 가르침과 실패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부분이다. 6. 소회(所懷) : 중세인과 그들의 후예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며 우리의 안락한 삶에는 위생과 의학을 발전시키기 위한 중세 의사들의 합리화 노력과 고난이 담겨있다. 그동안 무수한 미신과 주술로 고통 받고 실험되어 일찍 덧없이 죽어간 많은 민초들의 희생이 담겨있다. 합리적 세상을 위해 주술의 영역을 줄여간 정치가와 철학가들의 덕을 우리가 보고 있다. 어느 사회에나 더 나은 세상 더 좋은 시대를 만들려 노력하는 사람들이 존재했고, 이들의 천년노력과 시행착오를 거쳐 오늘날의 우리는 혜택 받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이제는 바로 이 중세인 들과 우리네 일상 곳곳에 녹아있는 그들의 노고에 조롱과 비웃음이 아닌,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박수를 칠 때가 아닐까?
감사하고픈 대상이 더 있다. 요즘들어 인생은 우연한 만남의 연속이자 그 집합이라는 생각을 계속하고 있다. 도서관에서 개최한 본 대회가 아니었다면, 필자는 평생‘중세’에 관해 진지하게 읽고 쓰고 고민할 기회가 없었을 것이다. 중세를 막연하게 암흑기라며 비웃는 외눈박이 중에 하나로 남아있었을 것이다. 이 책과의 만남은 우연이자 큰 행운이었으며, 관심 없던 분야에 흥미를 일깨워준 계기가 되었다. 이 행사를 기획하고 집행해주신 모든 이들에게 감사드린다. 마지막으로 이 책을 번역하신 역자께 큰 감사의 말을 올리고 싶다. 책 구석구석에 정말 친절하고 풍부한 각주를 달아 주셨다. 문장은 주술관계 한번 놓치는 일 없이 깔끔했고, 물 흐르듯 쉽게 읽혔다. 번역 약소국 대한민국의 학문 토대는 열악하다. 그러나 앞으로는 이 책의 역자와 같은 전문 번역인의 노고로 필자와 같은 학부생이 더 편한 환경에서 공부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에도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뿐만 아니라 훌륭한 번역서는 필자에게 큰 자극이 되었다. 본인 역시 더 부지런히 갈고닦아 훌륭한 지성인이 되어, 양질의 번역서를 내보겠다는 작지만 원대한 꿈을 꾸어 본다. 이상으로 방대한 천년 중세에 관한 폭넓은 본 독후감 여행을 마친다.
장려 하*비 경영학과 도서: 여덟 단어
독후감: 여덟 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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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취춘생의 이름으로”

2016년 한국의 경제 성장률은 3%도 되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이런 암울한 현실 속에서 가계 빚 최대치, 실업률, 취업난이라는 글자는 이제 막 사회로 진출하려고 하는 나에게 또 다른 장벽이었다. 작년 하반기 취업을 준비하면서 취직이 잘되지 않자 서울로 대학을 갔어야 하나, 공대로 갔어야 하나 등 온갖 생각이 들었다. 돌이킬 수 없는 과거였기에 나뿐만 아니라 주위가 함께 고민했다. 취업에 성공한 친구를 축하하면서도 쓸쓸함이 느껴지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했다. 그리고 나는 왜 이런가에 대한 고민도 많이 되었다. 이 책은 고민이 많은 시기에 삶을 대하는 자세와 삶의 위기를 이겨 낼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생각해보게 하였다. 그리고 나에게 다시금 용기를 주었다. 할 수 있다고. 저자는 흔히 말하는 ‘광고를 만드는 사람’으로 이 책을 통해 삶에 필요한 8가지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그는 우리의 삶에 있어서 자존 / 본질 / 고전 / 견 / 현재 / 권위 / 소통 / 인생의 8가지 단어가 가장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자신이 그동안 가져왔던 생각과 책들을 정리하면서 중요한 8가지를 소개하고 있다. 그러면서 책을 읽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좀 더 올바른 시각으로 삶을 대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나는 다행히 이 책을 만나서 지독히도 흔들리며 자책하다가,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 다양한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었다.

1) 자존 “ 남이 아닌 나에게 중심을 찾자”
취업을 준비하다 보면 합격과 불합격이 나뉘는 순간에 가장 나에 대한 큰 좌절을 경험 할 수 있을 것이다. 저들은 합격이 되었는데 나는 왜 안 되었을까 라고. 저자는 책에서 자존을 제1의 단어로 제시하고 있다. 그는 우리의 관점의 중심이 자신이 아닌 바깥에 있다고 제시한다. 첫 번째 이유는 남과 다르면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밀려들기 때문에 바깥의 눈치를 보는 것이 습관이 되어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자존감을 가지고 스스로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고 한다. 그리고 말한다. ‘각자’의 인생을 찾아야 한다고. 두 번째 이유는 우리의 교육은 늘 우리에게 없는 것에 대해 지적 받고 그것을 가져야 한다고 가르쳤기 때문이다. 칭찬은 자존감을 키워주는 데, 갖지 못한 것에 대한 질타는 눈치를 자라게 한다. 즉, 중심점을 바깥에 놓고 눈치를 보기 시작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중심점을 자신 안에 찍고 그것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피력한다. 이 말은 내가 무수히 많이 복사 붙여넣기를 하던 자기 소개서에도 해당되는 말이었다. 내가 이 회사의 관점에서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내 꿈을 위해 이 회사에게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먼저 말했어야 했다. 또한 그동안 남의 합격에만 부러워하고 그들이 가진 것을 못 가져 안달하진 않았는지 뒤돌아보게 되었다. 동시에 화자는 자신의 길을 무시하지 않는 것이 바로 인생이라고 인생에 교과서는 없다고 제시한다. 그는 열심히 살 보면 인생에 어떤 점들이 뿌려질 것이고, 의미 없어 보이던 그 점들이 어느 순간 연결되어 별이 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정해진 빛을 따를 필요는 없다고, 우리에겐 오직 각자의 점과 각자의 별이 있을 뿐이다고 말한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말 중에 하나인 스티브 잡스도 이렇게 말했다. “Creativity is just connecting things”그와 저자는 동시에 나에게 이렇게 위로했다. 열심히 살다보면 상관없어 보이는 순간의 선택들이 결국 나의 지금을 보여줄 것이라고. 이렇게 나는 또 위로를 얻었다. 지금은 길이 보이지 않더라도 하루하루 열심히 살다보면 이 선택도 결국 하나의 길이 될 것이라고. 남에게 중심을 맞추는 마음으로는 평생 남의 콩이 더 커 보일 것인데. 나는 그동안 타인이 가진 장점에 내 장점을 맞추려 아등바등하지 않았냐는 생각이 든다. 화자의 말처럼 어떤 인생이든 어떤 형태가 될지 모르지만 반드시 기회가 찾아올 것이다. 그러니 내가 가진 것에 집중하여 준비해야 한다. 나만 가질 수 있는 무기 하나쯤을 가지는 것, “Be yourself”내가 할 수 있는 장점에 집중해야 할 것이다.

2) 본질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
저자는 본질을 두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첫 번째는 한마디로 말하는 것이다. 돌려 말하는 것을 미덕으로 배운 우리 사회에서는 핵심을 바로 말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다. 그러나 대학에서 발표를 배우고 흔히 말하는 자소서를 쓰면서 하고자 하는 말을 정확히 쓰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배웠다. 하지만 여전히 하고 싶은 말을 1마디로 정의하기가 쉽지는 않다. 하지만 저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습을 통해 한마디로 하고 자하는 바를 말하는 습관을 키워야 한다고 한다. 두 번째는 Everything changes but nothing changes. (모든 것은 변하지만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이다. 그동안 세이클럽, 싸이월드, 페이스북 그리고 인스타그램을 통해 우리가 무언가를 전달하는 사이트는 바뀌어 왔지만 알리고 싶어 하는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저자는 빠르게 변하는 세상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본질은 존재한다는 것을 말했다. 얼마 전에 읽었던 이규보의 시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규보의 ‘전의유감시최군종번’을 보면 “無事不參差(무사불참차) 하는 일마다 어긋나기만 하네 / 是我所自取(시아소자취) 이는 모두 다 내가 지은 죄 / 嗟哉又怨誰(차재우원수) 아! 그 누구를 원망하리오”라는 부분이 있다. 이 시가 지어진지 700년 넘는 시간은 지나왔지만, 합격을 하지 못해 자책을 하는 부분은 취준생인 나에게도 공감되는 부분이었다. 이 시가 공감되는 것은 몇 백년이 넘는 시간 전의 화자와 같은 생각인 본질을 공유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저자의 말대로 살면서 본질을 잘 파악하고 이를 잘 전달하는 것에 대한 꾸준한 연습이 필요할 것이다.

3) 고전 “시대를 초월하는 무언가’
삼성의 창립자가 죽기 전 아들에게 추천한 책은 논어라고 한다. 21C에 와서도 논어의 힘은 꾸준히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시간이 지나도 논어를 읽는 이유는 본질의 두 번째 이유와도 맞물린다. 시대를 초월하는 가르침이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고전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고전은 시간과 싸워 이겨낸 것으로, 3백년 5백년을 살아남았고 앞으로 더 살아남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풍화되기보다는 시간의 엄호를 받는 듯이 갈수록 더 단단해 지고 있다고 한다. 즉 저자는 베스트셀러처럼 당대의 것도 중요하지만, 몇 세대를 걸쳐 살아남은 것들도 중요하다고 한다. 한 때의 베스트셀러가 몇 달도 되지 않아 베스트셀러 리스트에서 사라지는 것을 보면 그 동안 살아남은 책들의 새삼 대단함을 느낄 수 있다. 저자의 말 뿐만 아니라 저자의 지인 김현규씨도 이렇게 얘기했다. “…위대한 문학이나 미술, 음악 등 예술작품들은 본질에 가깝다고 볼 수 있습니다. 나한테만 좋은 것이 아닌, 우리나라에서만 좋은 것이 아닌, 전 세계 다수의 인간이라는 종이 느끼는 근본적인 무엇을 건드린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말처럼 사람을 막론하고 느낄 수 있는 무언가가 고전에는 있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는 구구절절한 짝사랑의 심정을 알 수 있다. 짝사랑하는 사람이라면 한번쯤은 느껴볼 수 있었던 감정을 베르테르를 보며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시대를 초월하는 무엇인가가 사람들의 마음을 울린다. 익숙하지만, 나와 동일한 감정을 누군가도 느끼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고전이 아닐까. 저자는 고전에 대한 중요성을 피력한 후, 고전을 궁금해 하라고한다. 삶을 풍요롭게 해준다고. 그는 가방은 고가품이지 명품이 아니라고 하며, 고전에 대해 고가품과 명품을 헷갈리지 말고 클래식, 고전과 같은 진정한 명품의 세계로 들어올 필요가 있다고 마무리하고 있다.

4) 견 “행복은 바로 곁에 있다. 단지 못보고 지나칠 뿐”
스티브잡스, 에디슨 등 생각지도 못한 것을 발명한 사람들을 보면 놀랍다. 그들이 만들어 낸 것을 보면 세상에 없는 것을 창조한 것은 아닐까란 생각이 든다. 하지만 실제로 그들이 만든 것은 세상에 없는 것을 만들어냈기 보다는 사람들이 못 본 것에서 찾아낸 것이라고 한다. 작가는 생각의 탄생이라는 책을 소개하면서 ‘발견은 모든 사람들이 보는 것을 보고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 것을 생각하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모두가 보는 것을 보는 것 ‘시청’의 힘으로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것을 찾아내는 ‘견문’의 힘을 키워야 한다고 한다. 이를 위해서 그는 현재에 대해서 시간을 가지고 봐야 한다고 한다. 시간을 들여서 바라보면 모든 것이 말을 걸고 있다고 한다. 얼마 전 한 프로그램에서는 패트리샤무어라는 산업디자이너를 소개했다. 그녀는 없던 것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노인이 되어봄으로써 노인에게 필요한 물건을 발명했다. 즉 그녀는 일반 사람들이 지나쳐버린 것들을 자세히 살펴보고는 그들을 위한 물건을 만든 것이다. 조은의 ‘언젠가는’이라는 시에서 보면 “수많은 시간을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며 / 꽃들이 햇살을 어떻게 받는지 / 꽃들이 어둠을 어떻게 익히는지 / 외면한 채 한 곳을 바라보며 / 고작 버스나 기다렸다는 기억에 목이 멜 것이다.” 라는 부분이 있다. 행복은 바로 내 곁에 있는데, 그동안 나는 뭐가 그리 바쁘다고, 주위를 보지 못한 채 살아왔는지 반성할 수 있었다.

5) 현재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것에 집중하자
흔히들 대한민국은 미래 공화국이라고 한다. 현재 힘들지만은 미래에 부자가 되어서 잘 살 것이라는 생각으로 현재를 미래에게 양보한다고 한다. 하지만, 저자는 행복이 현재에 있다고 한다. 그는 어떤 선택을 하든 간에 선택을 하고 나면 답은 그 자리에 있다고 한다. 매순간 원하는 선택만을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내가 내린 최선의 선택에서 현재에 집중하여 후회 않고 최고의 선택을 내 것으로 하는 것이 중요하다. 내 선택을 했다면 뒤돌아보지 말라. ‘현재’ 그리고 매순간에 집중하라는 것이 저자가 말하는‘현재’의 중요성인 것이다. 저자가 소개하는 한형조의‘붓다의 치명적 농담’에서 “그렇지 않아, 그들은 밥 먹을 때 밥은 안 먹고 이런저런 잡 생각을 하고 있고, 잠 잘 때 잠은 안자고 이런 걱정에 시달리고 있지.”라는 부분이 있다. 그의 말처럼 그동안 해결되지 않는 걱정만하며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시간들이 떠올랐다. 무한도전에서 언젠가 유재석도 말했다. 초보들이 자주 하는 실수는 행동을 하지 않고 걱정만 하는 것이라고. 걱정만 하다보면 주어진 일을 못해내는 경우가 더 많으니, 걱정하지 말고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라고 한다. 그의 말처럼 “현재”내가 하고 있는 일에 집중해야 할 것이다. 두 번째로 저자는 말한다. 완벽한 선택이란 없다고. 정확히 옳은 선택은 없다고 한다. 단지, 선택을 하고 옳게 만드는 과정이 있을 뿐이라고. 모든 선택에는 정답과 오답이 공존한다. 그러니 어떤 것이 옳은 것인지 고민하기보다는 그 때 무엇이 최선인지 생각하고 그 선택을 통해 그 선택을 옳게 만드는 실천이 중요하다고 제시한다. 그가 소개한 다음 세 글은 현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준다. 지상의 양식 “나는 지금 내가 차지하고 있는 이 공간적 지점에, 시간 속의 이 정확한 순간에 자리잡고 있다. 나는 이 지점이 결정적이지 않은 것을 허락할 수 없다.” 사르트르, 카뮈의 ‘이방인’에 대한 비평문“인생은 잘 짜인 이야기보다는 그 하나하나가 관능적인 기쁨인, 내일 없는 작은 조각들의 광채다.” 김화영의 글 “살아있다는 그 단순한 놀라움과 존재한다는 그 황홀감에 취하여” 위의 글처럼 나는 지금이라도 주위에 것들을 그냥 흘러 보내지 말고 존중해서 잘 보내야 할 것이다. 삶은 순간의 합이니까. 나의 삶이여, Verweile doch, du bist so schon! (머물러라, 너는 정말 아름답구나.)

6) 권위 “쫄지마!”
잘 나가는 사람이나 어른들을 보면 위축 되는 경우가 많았다.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나는 먼저 나를 낮추고 이로써 마음이 불편할 때가 많았다. 하지만, 그들도 누군가의 친구이자 아빠이다. 저자의 말처럼 우리는 모두 완벽하게 불완전한 사람들이다. 어떠한 사람을 보더라도 옳은 부분은 좋아하되 그렇지 않은 부분은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동의되지 않는 권위에 굴복하지 말고 불합리한 돈의 힘에 복종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엄마가 하는 말처럼, 약자에게 약하고 강자에게 강한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인터넷에 한때 유명했던 강약약강(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하다는 말)이 아닌 불합리한 것에 굴복하지 않고, 아랫사람과 윗사람 모두에게 사랑받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7) 소통 “상대를 향한 배려”
부모님께서는 매년 나에게 인터넷으로 연말정산을 도와 달라고 하신다. 매년 설명해주고 인터넷으로 설명서를 뽑아서 함께 가이드를 줘도 매번 나에게 부탁하신다. 나는 약간은 짜증이 묻어난 말투로 연말정산을 해결한다. 부모님은 그때마다 천천히 가이드를 같이 보면서 가르쳐 달라고 한다. 이번에 제대로 배워야 내가 없어도 스스로 할 수 있다고. 하지만 그런 부모님의 의미도 모르고 나는 “어차피 또 내년에 나에게 부탁하잖아! 그냥 내가 빨리할게!”라고 한다. 그러면 실망한 부모님의 표정을 볼 수가 있었다. 저자의 말을 읽으면서 나는 지독히도 부모님께 배려가 없었다. 저자는 우리가 소통이 안 되는 이유로 첫 번째,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한다. 나는 부모님과 내가 컴퓨터에 대한 지식이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부모님이 새로운 컴퓨터 사이트에 대한 두려움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 못했다. 두 번째, 읽는 사람에 대한 배려가 없었다. 부모님은 back, caps lock등의 용어를 몰랐다. 나는 적어도 사진을 찍어서 설명을 해줬어야 되었다. 그의 말처럼 나는 ‘생각이 없었다’. ‘생각이 없다’의 다른 말은 ‘배려가 없음’이고 ‘배려가 없음’의 다른 말은 ‘교양이 없음’이고 ‘교양이 없음’의 다른 말은 ‘능력이 없음’이었다. 나는 부모님께 배려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전하지 못했다. 짜증이 뭍은 말투로 부모님께 툭툭대며 말했다. 소통은 가족에게나 친구에게나 사람들 모두에게 중요한 것이다. 하지만, 나는 부모님께 그랬지 못했고 소통이 되지 못한 것이다. 저자의 글을 읽으면서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모른다.

8) 인생 “전인미답”
고미숙의 ‘나의 운명 사용설명서’에서 “지구는 탄생 이래 단 한 번도 동일한 날씨를 반복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를 인용하며 저자는 어차피 가야할 길 앞에서 망설이거나 두려워하기보다 설렘과 기대를 품고 걸어야 한다고 한다. 실험과 같이 몇 번 단추를 누르면 어떻게 반응을 하고 결과가 딱 떨어지게 나오는 기계가 아니니까. 우리들의 불완전함을 받아들이고 실수에 휘둘리지 않는 것. 전인미답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한다. 가본 적이 없기 때문에 누구나 실수할 수 있다며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것에 너무 안달복달하지 않는 것이 정답이라고 한다. 실패를 기본 조건으로 놓고 살면 작은 일에 흔들리지 않는다고 방법을 제시한다. 모든 인생이 최선만을 선택할 수는 없다며. 차선의 선택을 했다고 해도 그 중에서 최선을 건져내는 삶이 더 행복할 수 있다고 한다. 꽃보다 청춘에서 배우 윤여정도 이런 말을 했다. “나도 내 나이가 처음이라고”, 응답하라 1998에서 성동일도 비슷한 말을 했다. “아빠도 아빠가 처음이잖아.”라고. 저자는 내가 항상 내가 하고자 하는 대로만 할 수 없는 게 인생이고 누구나 처음이라고 한다. 그러니깐 작가의 말대로 오늘 하루 지금을 성실하게 최선을 다해 살다보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9) 마무리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의 글을 읽으면서 충분히 공감 받고 위로를 받았다. 그동안 읽은 몇몇 책들은 이렇게 살아야 정답이다라고 가르쳤었다. 하지만 여덟 단어를 읽으면서는 누군가의 삶을 따라하여 살기보다는 내 인생을 어떻게 현명하게 살 수있을까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었다. 특히나 저자가 그동안 읽었던 책들을 인용구를 보면서 인생과 관련된 다양한 책도 소개받을 수 있었다. 혹자는 힘든 마음의 위로보다는 이렇게 만든 사회 구조를 비판해야 한다고 할 수도 있다. 이 책에서는 사회 구조를 흔드는 방법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어도 흔들리는 청춘들이 이 책을 보면 아픈 것이 당연하다고 느끼기보다는, 아픈 것을 어떻게 스스로 위로 할지를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여덟 단어를 다 읽고 시간이 지난 현재도 물론 나는 여전히 흔들린다. 하지만 책을 통해 나는 전보다는 차분히 그리고 흔들리는 것에 대해 심하게 걱정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최고의 화가인 빈센트 반고흐도 동생 태오에게 쓴 편지에 이렇게 얘기했다. “오늘 하루는 그림이 잘 그려지는 것 같아도, 밤이 되면 또 그림 그리기가 쉽지 않다”고 멋진 연예인이든 가난한 이든 누구나 잘 할 것 같다가도 흔들릴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선택에 있어서 후회하지 않고 성실할 것을 책을 통해 배웠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인생에 정답이 없으니 내 선택을 정답으로 만들기로 결심했다. 예전에 취업 준비를 하면서는 흔들릴 때마다 맥주 한 캔을 사거나 누군가에게 하소연을 했었다. 그러나 책을 다 읽은 지금은 힘들고 흔들릴 때는 여덟 단어와 고전을 통해 위로를 받을 것이다. 또한 책에서 말한 것대로 인생에 정답은 없으니, 내가 지금 눈뜨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 최선을 다할 것이다. 그래서 과거보다는 더 나다운 내가 될 것이다. 그리고 못 가진 것에 아쉬워말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살아있음에 감사함을 까먹지 않는 사람이 되고자 한다.

장려 이*쁨 경영학부 도서: 벌거벗은 유전자
독후감: 벌거벗은 유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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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년 전 인간 게놈 프로젝트라 하여 사람의 유전자 지도를 밝혀낸다고 언론에서 떠들썩하게 다뤘었다. 2003년에 이 인간 게놈 프로젝트의 완료 선언이 있었고 언론 등에서 크게 떠들어댔던 만큼 그게 뭔가 대단한 일이겠거니 여기긴 했지만, 그것이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는 일반인으로서 솔직히 잘 모르겠다. 대중의 입장도 나와 그렇게 차이 나지는 않을 거로 생각한다. 오늘날 과학의 최신 흐름은 일반인이 따라가기에 엄두가 나지 않을 만큼 진보해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나는 독후감을 쓰기 위해 따로 조사해 보기 전까지 유전자와 게놈(유전체)이 다른 것이라는 것도 몰랐다. 비슷해 보이긴 하지만 둘은 분명 다른 개념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하나의 단위체로서 종합적인 유전정보를 지니고 있는 ‘유전자의 집합’을 게놈이라고 한다. 책 벌거벗은 유전자는 제목과는 다르게 유전자보다는 유전체에 더 초점을 맞춘 책이며 내 기대와도 다르게 유전자나 유전체가 어떤 것인지에 관해서 다룬 책이 아니라, 관련된 사회과학적 내용을 다룬 책이다. 어떻게 보면 과학책이라기보다는 과학의 탈을 쓴 철학책이라 할 수도 있겠다. 인간 게놈에 얽힌 다양한 윤리 문제가 책 안에 제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인간 게놈 프로젝트는 사람들이 암 등 불치병의 치료와 수명의 연장을 꿈꾸게 했다. 인간 게놈을 제대로 이해하고 이용하기 위해서는 단순한 게놈 서열 분석만으로는 부족하다. 게놈을 지닌 사람의 머리카락 색, 눈 색, 생김새나 건강기록 등의 형질정보와 그 축적이 필요하다. 하지만 형질자료 수집은 시간과 비용이 많이 소요되며 무엇보다 피험자의 신원이 노출될 위험이 크다. 그렇기에 기꺼이 사생활과 익명성을 포기하는 피험자를 모아 게놈 서열 분석을 한 것이 조지 처치의 개인 게놈 프로젝트(PGP) 이다. PGP는 초기 참여자가 모두 유전학이나 그에 상당한 분야의 석학 보유자여야 한다는 조건을 걸었는데 그래야만 피험자가 개인 게놈 공개 동의의 위험성을 잘 이해하고 동의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처음 이 책을 읽을 때 ‘게놈을 공개하는 게 뭐가 대수지? 나라면 바로 경험자로 참여할 텐데.’라고 단순하게 생각했던 입장에서 이것은 적절하고 필요한 조건이라고 생각한다). 책 벌거벗은 유전자의 저자는 PGP의 4번째 피험자인 미샤 앵그리스트로 저자 역시 유전학을 공부하고 한때 유전 상담사라는 직업을 가지기도 했던 사람이다. 유전 상담사라니, 생소한 직업명이지만 검색을 통해 알아본 결과, 분명 우리나라에도 있는 직업이다. 저자 본인은 자신이 유전 상담사라는 직업에 맞지 않은 사람이었다고 말하지만, 전직 유전 상담사이자 조카가 희귀한 유전 질병에 걸린 사람(즉 환자의 가족), 또 PGP의 참여자 등 다양한 입장에서 유전 상담사를 바라보는 내용이 나오기에 미래의 의료 계통 직업으로서 우리나라에 소개되는 유전 상담사라는 직업에 관심이 있다면 이 책을 읽어보는 것이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책에서 저자는 PGP와 관련하여 PGP를 진행하는 조지 처치를 포함한 자기 외의 다른 9명의 PGP 피험자들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PGP에 참여한 동기가 무엇인지, 자신이 유전학자로서 학회에 참여하거나 유전형 검사 회사에 방문하면서 접한 것들과 만난 사람들과 그들의 생각, 유전체에 관련된 여러 이슈와 그에 대한 의견들, 상업 유전체 검사 회사의 역사 등을 1인칭 관점으로 수필을 쓰듯 풀어낸다. 솔직히 말해보면 이 책은 개인적으로 참 재미없는 책이었다. 책에 사진이나 그림은 하나도 없이 글만 있으면서도 전문용어가 쉴 새 없이 나오니 관련 분야 전공은커녕 과학도서도 많이 읽어보지 못한 문외한으로서는 어렵기 그지없다. 한 번 읽어만 보는 데에도 시간이 정말 많이 걸렸다. 잘 이해도 되지 않는 텍스트를 막무가내로 줄줄 읽다가 도대체 다른 사람들은 이 책을 어떻게 생각할까 궁금해져서 인터넷에 책을 검색해보기도 했다. 역시 사람 생각과 의견이 다양할 수 있는 만큼이나 또 그렇게 차이가 나지는 않는 건지, 책을 읽으면서 나랑 비슷하게 답답함과 지루함을 느꼈던 사람들이 많았다. 특히 이 책을 읽고 너무 딴 나라 이야기 같아 소외감을 느꼈다는 감상이 있었는데 거기에 깊이 공감했다. 물론 한국이 아닌 미국 저자의 이야기이니 딴 나라 가 맞긴 하다). 그렇듯 이 책은 전공자나 관심이 있어 관련 분야 책을 많이 읽어본 사람이 아니면 추천해주고 싶은 책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다루는 소재는 흥미로웠고, 유전학을 전공하고 개인 유전체학에 관심이 있는 저자가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서술하는 이 내용을 나도 제대로 된 이해를 바탕으로 편히 읽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체력이 약하고 잔병치레가 많았는데 그래서 사람의 몸과 건강에 대해 관심이 많았고 여전히 그렇다. 좋은 음식을 먹고 적당하게 잠자고 운동을 하는 것 같이 건강에 좋은 생활 습관을 유지하면 그 사람은 건강할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사람의 건강 상태엔 과거나 현재의 생활 습관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 사람의 건강뿐만이 아니다. 노력 여하와 주변 환경에 따라 물론 수많은 가능성이 있겠지만 살면서 한 사람의 많은 것들이 그냥 ‘타고난 것’이라는 것을 느낀다. 저자 또한 이 책에서 “부모는 결혼, 수입, 직업, 섹스, 요리, 빨래, 빌려 볼 영화, 개 목욕시킬 당번 등 온갖 일을 결정할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의 게놈은 결정할 수 없다.”라고 말했듯 유전자는 태어날 때 결정되어 있으며 바꿀 수 없다. 그리고 그런 유전자에 의해 외모부터 질병에 걸릴 확률까지 한 인간의 수많은 것이 결정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인류가 인간의 유전자와 유전체를 해석하고자 하는 것은 필연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오랜 옛날부터 우리 선조들이 자신과 가족의 운명을 궁금해하며 점술가를 찾아갔듯이, 유전자 분석을 통해 우리의 현재와 미래를 알 수 있다면 우리는 유전자 분석을 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식자우환(識字憂患)이라는 말이 있듯이 아는 것이 무조건적으로 좋은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알츠하이머를 유발하는 어떠한 유전자 쌍이 있다. 자신이 이 유전자를 보유하고 있다면 85세가 되기 전에 알츠하이머가 발병할 확률이 50%이며 이 병을 딱히 예방할 수단도, 발병 시 확실한 치료 수단도 없다. 자신에게 이 유전자가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은 언제 발병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으로 자신의 인생을 채워 스스로를 더 불행하게 만드는 일일지도 모른다. 이런 상황임에도 당사자에게 이러한 유전자가 있음을 곧이곧대로 고지하는 게 최선이라고 할 수 있는가? 저자 또한 자신이 유전자 결정론을 믿지 않는다고 해놓고 자신의 유전자 검사 보고서를 받기 전에 걱정으로 벌벌 떨었다고 스스로 시인했다. 다행히도 저자의 검사결과에는 저자가 걱정하던 알츠하이머나 다른 희소병 걸릴 확률 수치가 걱정할 만큼 높게 나오지는 않았다. 하지만 높게 나왔다면? 저자는 자신의 게놈 정보를 공개하기로 서약한 사람인데 만약에 저자가 난치희소병에 걸릴 확률이 높다고 나왔다면 그건 저자의 가족에게 어떠한 영향을 끼칠까? 결혼 전 서로의 건강진단서를 교환하는 게 예의라는 말이 있는 세상이다. 결혼 상대방의 유전자 검사표를 교환하는 게 상례가 되는 시대가 얼마 남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마치 영화 가타카가 실현된 것과 같다. 가타카는 실로 유전자 하면 빠질 수 없는 영화다. 이 책에서도 저자가 언급했을 뿐 아니라 유전자 관련 기사, 서평 등에 빠지지 않고 인용되는 영화이다. 98년도에 개봉한 영화지만 여전히 명작으로서 자주 언급되는 이 영화를 나는 고등학교 재학 시절 과학의 날에 학교에서 봤었다. 유전자가 개인의 신분이자 유전자로 그 모든 가능성이 평가되는 세상. 주인공 빈센트는 부모의 자연잉태로 태어났는데 태어나자마자 유전자 검사를 통해 심장질환의 병력과, 30세의 짧은 수명을 선고받는다. 해당 직업에 적절하다 평가되는 유전자 보유자가 아니면 그 직업을 시도할 수조차 없는 세상에서 빈센트는 자신의 유전자로는 꿈꿀 수 없는 우주비행사를 꿈꾸고, 결국엔 많은 시련을 넘어 그 꿈을 이룬다. 운명을 뛰어넘는 의지와 노력을 말하는 감동적인 영화 가타카에서 내 기억에 가장 남았던 장면은 의외로 극 초반부의 장면이었다. 서로 사랑에 빠져 있는 채 곧 태어날 아이를 기대감에 가득 차 기다리는 빈센트의 부모가 빈센트의 유전자 분석 결과라는 선고를 받고서 보이는 바로 그 표정. 그리고 빈센트 다음 아이는 시험관을 택해 유전적으로 완벽한 아이로 낳는 장면. 거기서 나는 주인공 빈센트에게 감정이입을 하며 그 부모에게 배신감마저 느꼈는데, 그럼에도 내가 그 부모의 입 이었다면 분명 유전자 조작을 해서 가능한 한 신체적으로 건강하고 키 크고 잘 생긴 아이를 선택해서 낳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아이가 더 건강하고 더 잘생기기를 원하는 것이 과연 나쁜 일이라 할 수 있을까? 유전체 관련 기술의 발달이 우생학과 비슷한 부작용을 불러올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이해 가는 순간이다. 책의 감수자 또한 감수자의 말에서 과학 기술의 발전이 유전 정보에 의한 차별 정책의 가능성을 열 수도 있다고 지적한다(책에는 유전체와 우생학을 둘러싼 쟁점과 마찬가지로 흥미로운 다른 쟁점이나 사례가 제시되어 있다. 유전자 특허를 둘러싼 분쟁이라든지-유전자에 특허를 낼 수 있을까? 자기 유전자 정보를 알 자기 권리는 자연권일까?- PGP 피험자이기도 한 정기적으로 정자 기증을 하던 한 기증자의 사연이라든지).
조지 처치를 필두로 한 많은 과학자의 노력으로 개인 유전체 검사 비용은 그 가격대가 낮아지고 있다. 미국에서는 한국 돈 100만 원이면 개인 유전체 분석이 가능한 수준이라고 한다. 그야말로 개인이 자신의 유전체 정보를 주머니 속에 지니고 다닐 수 있는 시대가 도래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어떨까? 검색을 해보니 암 유전체 분석 등에 몇백만 원대 수준으로 꽤 고가이긴 했지만, 우리나라에서도 개인 유전체 분석 의뢰가 그렇게까지 어려운 일은 아닌 듯했다. 그뿐만 아니라 최근 울산과학기술원(UNIST)이 주도, 울산대, 울산대병원, 울산시가 게놈 빅 데이터 프로젝트라 하여 우리나라 사람 1만 명의 게놈 데이터를 분석해 한국 게놈 빅데이터를 만들겠다고 공언하는 등 우리나라에서도 게놈의 이용을 위한 게놈 자료화 등의 관련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다. 기술의 발전은 막을 수 없는 흐름이다. 가타카에서처럼 유전자가 신분증을 대신하고, 태어나자마자 유전자 분석을 통해 그 사람의 인생을 예고하는 시대는 생각보다 우리 지척에 와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 해야 하는 일은 무엇일까. 기술의 윤리성에 대해 논쟁하기보다는 기술이 어떻게 악용될 수 있는지, 그러한 일을 막을 방법에는 무엇이 있는지를 고심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할 수 있으려면 무엇보다 그 기술에 대한 이해가 우선일 것이다. 처음에 이 책을 읽었을 때 나는 단순히 저자와 책에 나오는 다른 과학자들의 지식과 그들이 자신들의 지식에 갖고 있는 친숙함이 부러워서 유전자와 유전체에 대해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독후감을 쓰면서는 앞으로 오게 될, 개인 유전자 분석이 보편화 된 세상을 대비해서라도 유전자와 유전체에 대해 꼭 공부해 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공부를 하다가 다시 이 책을 보게 되면 그때는 더 재밌고 친숙하게 이 책을 읽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장려 이*민 신문방송학과 도서: 철학카페에서 문학 읽기
독후감: <철학카페에서 문학읽기> – 권태로움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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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살 겨울 속 나는 방황하고 있다. 묵묵히 바보처럼 공부만 하며 살아온 십대를 벗어나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 즐거웠다. 자유로움이 마냥 좋은 건지 알았다. 하지만 자유엔 책임이 뒤따른다는 것을 곧 나는 뼈저리게 느낀다. 내가 직접 부딪혀야 했다. 아직 학생이니깐 서툴고 어설프다 라는 말이 이젠 통하지도 어울리지도 않는다. 19살의 나와 지금의 나는 그리 달라진 것도 없는데 학생과 어른으로 딱 구분되어 나누어진 어설픈 사회다. 그래서 시간은 잔인하다. 평범하게 살기위해서는 치열하게 살아야한다. 근데 나는 중간에 멈춰 서서 나를 지나쳐가는 시간과 친구들을 막연하게 바라만 보고 있다. 그들은 뭘 향해 달리는가. 그리고 뭘 위해 노력하는가. 그들은 그 답을 알고 있는가. 부러움과 시기심이 얽힌 마음의 덩어리들이 목을 졸려온다. 또한 허기가 진다. 자꾸만 채우고 싶다. 배가 부름에도 허전하다. 휴학을 고민하며 우울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나의 진정 솔직한 심정들이다. 난 내 이런 감정상태를 확연하게 무엇이다! 라고 짐작할 수 없었다. 그래서 더 불안했다. 어떤 감정인지 모르니 두려웠고 어떻게 해결해야하는지 몰랐다. 그래서 불안했다. 나는 어릴 적부터 불안하면 책을 읽는다. 그래서 책을 집어 들었다. ‘철학카페에서 문학읽기’내게 어려웠지만 그래도 나의 감정상태를 진단할 수 있었던 좋은 기회였다.‘권태’에 초점을 맞추어 서술하려한다. 책의 구성은 총 13편의 소설과 희곡들을 작가가 문학 작품에 대한 기초지식부터 인문학까지 풍부한 지식들로 설명을 해놓은 책이다. 이 책을 읽으며 작가의 방대한 지식에 놀랐으며 한 작품으로 하나의 컨셉을 잡아 술술 풀어내는 이야기보따리에 자연스레 녹아들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이 14권의 책 중 내가 읽은 책은 5권밖에 읽지 않았다는 것이다. 줄거리를 모르고 또 그 작품에 대해 스스로 깊이 생각해보지 않은 상태에서 읽으니 수학문제로 치자면 문제를 읽고 답지 해설을 바로 펴 읽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혼자 그 문제를 풀어보려 노력하지 않고 답지부터 보니 그렇구나!는 해도 이해하기 어렵고 나의 지식으로 전환되어 오지 않았다. 하지만 작가의 풍부한 지식으로 여러 영화나 책, 시들은 인용하여 이해하기 쉽게 예를 들어 좋았다. 각 작품마다 작가는 하나의 컨셉을 잡는다. <파우스트>는 자기 체념과 자기실현,<데미안>은 성장, <어린 왕자>는 만남의 의미, <오셀로>는 질투 등 이렇게 작품을 관통하는 메시지를 선정하여 문학과 철학으로 이 주제를 문학작품과 더불어 설명한다. 내가 공감이 갔던 부분들은 아무래도 어리다면 어린 22살의 사회생활경험을 바탕으로 사람과 사람간의 관계에서 벌어지는 것이나 ‘나’, ‘내면’에 관한 성장 또는 자아에 대한 것들이었다. 아무래도 사회적인 것, 분노, 반항이라는 것에 관심을 두기에는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과 나는 무엇을 좋아하는지, 나는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겠는 이 혼란을 엿보는 것이 더 시급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철학카페가 있어서 좋아하는 커피와 좋아하는 책으로 편한 사람들과 함께 철학과 문학을 공유하며 책의 의미를 다지는 곳이 있다면 좋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지식의 깊이 차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모르면 들으며 배우고 책을 읽으며 느끼고 깨달았던 나의 사소한 고민을 나누는 그런 카페. 그렇다면 나는 이 카페에서 <고도를 기다리며>의 ‘권태’에 대해 이야기를 꺼낼 것이다. 나의 겨울방학, 22살의 겨울방학 참으로 권태롭고 허기지다고. 먼저 이 나의 방학에 대해 그리고 나의 심정에 대해 무어라 한 단어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이제는 취업을 생각해야하는 나이가 되었다. 과거의 나는 뭐하고 살았나 하는 원망스러움과 나는 이제 무얼 할 것인가 하는 막막함이 무서웠다. 답답했다. 매일은 아니지만 가끔 나의 기분을 일기장에 남기는데 방학 때 쓴 것을 보면 대부분이 이러하다.

한 가지에 미쳐보라 말한다. 나는 이미 쉼, 에 미쳐있는데도 불구하고
시계는 사실 2개의 숫자로만 움직인다. 8282
나는 무엇이 될까 나의 선택이지만 나는 궁금하다 고로 생각한다 허나 막막하다

부끄럽지만 이런 생각들을 자주하는 요즘이다. 정말 한심스럽게도 폰만 하루 종일 본 적도 있다. 점심때 까지 잠을 자본적이 있다. 우울하고 의욕이 없다. 이 직업 저 직업 저울질을 하는 나도, 준비하는 자가 기회를 잡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준비하지 않는 나도 한심스럽기 짝이 없어 생각으로부터 도피중인 것이다. 그래서 도피한 것이 권태이다. 시간마저 녹이는 권태로움으로 도피했다 나는. 그리고 그 권태에서 벗어나기 위해‘시간 죽이기’를 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철학카페에서 문학읽기>를 통해 알게 되었다. ‘고도를 기다리며’는 대학교 1학년 과제로 읽어본 적이 있다. 정말 힘겹게 읽었던 기억이 난다. 줄거리를 간단하게 소개해 본다면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는 언제 올지 모르는 고도를 한없이 기다리며 시간을 보낸다. 이들은 기다리는 시간동안 이들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시간 죽이기’를 한다. 예를 들어 그저 시간을 보내며 지난 일을 회상하기도 하고, 고도에 대해 이야기를 하기도, 잠을 자기도 다투기도 스스로 목을 맬까 공상도 한다. 중간에 럭키와 포조라는 다른 인물이 등장하지만 아무런 사건도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다 한 소년이 나타나 고도가 오늘 저녁에는 못 오고 내일은 틀림없이 올 것이라고 전하며 2막이 시작된다. 2막도 1막처럼 거의 같은 내용이 반복되며 끝난다. 여전히 고도를 기다리면서 말이다. 이 단조로운 내용 구성이 지루할 법도 한데 이 연극은 공연만 400회를 넘고 수십여 개 국어로 번역, 공연된 20세기 대표적 희곡으로 자리 잡게 된다. 그 이유를 저자는 관객이 느끼는 지루함은 인간이 느끼는 근본적인 기분인 권태 그 자체를 보여주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저자는 이 작품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견딜 수 없이 무거운 삶의 무의미성
무한한 공간, 영원한 침묵
전락할 것인가, 실존할 것인가?

먼저 이 작품은 부조리 연극이라고도 불리는데 보통 부조리라하면 비합리적임이란 뜻으로 다른 작품들은 이를 철학적으로 문학적으로 설명하며 이해시키려 하는데‘고도를 기다리며’는 그저 부조리 그 자체를 보여주는 것을 택했다. ‘고도를 기다리며’를 지은 작가 베케트는 ‘변화 없는 시공간’과 ‘성격 없는 인물’이라는 장치로 효과적으로 이를 전달했다. 극은 시간의 흐름이나 공간의 변화에 따라 사건을 전개한다. 하지만 이 작품은 반복되는 시간과 고정된 공간으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인물들이 대화를 하지만 의미를 가지지 않기에 사건을 전개하는 힘이 없다. 말라비틀어진 한 그루의 나무라는 배경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저 거기서 둘은 고도만
기다리고 있다. 1막이 끝나고 2막이 시작할 무렵 같은 공간에서 처음 둘이 나누었던 이야기를 또 비슷하게 이야기한다. 외관상 달라진 것이 있다면 나무에 잎이 좀 더 돋아있는 정도. 이 자체가 부조리인 것이다. 시간은 다시 반복되고 공간은 변하지 않는다. 흘러가지 않는다. 분명 계속해서 내용이, 시간이 흘러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일단 근본은 바뀌지 않았다.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두 번째로 극에서 인물은 의미와 목적을 가지고 말을 하지만 여기선 앞에 언급한 것처럼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특히 이들은 고도를 기다리고 있지만 왜 기다리는지 무엇을 하려고 기다리는지 모른다. 그렇기에 이들은 아무 의미 없는 대사와 행동을 반사적으로 행하고 있는 셈이다. 이렇듯 ‘변화 없는 시공간’과 ‘성격 없는 인물’을 던져놓은 것이다. 저자는 이를 텅 빈 무대에 대본도 없이 배우를 올려놓은 것과 같다고 말한다. 어쨌든 극을 이끌어야 한다. 즉, 그 배우는 시간과 연극에 붙잡혀 있다. 하지만 의미도, 목적도 없는 행위의 반복들이 이루어지는 공허 속에 자리하게 된다. 또 이를 저자는 이를 하이데거를 비롯한 실존주의자들이 말한 “인간은 피투성(내던져져 있음)이다.”라고 묘사한 인간의 상황과 같음을 말한다. 사실 생각해보면 우리는 언제 올지도 모르고 또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죽음에 붙잡혀 있으면서도 공허 속에 놓아져 있다는 것이다. 더 쉬운 예로 기차역에서 제일 빠른 기차가 4시간 후라면 우리는 기차 시간에 붙잡혀 있으면서도 동시에 그 시간동안 공허 속에 놓아져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 말인 즉 작품 속 에서처럼 고도를 기다리는 일, 기차 시간을 기다리는 일, 죽음을 기다리는 일 모두 그것 자체가 시간 죽이기이지만 우선 급한 건 그 시간동안 지루함을 달래려 시간을 보내기 위해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 마치 텅 빈 무대에 올라간 배우처럼 말이다. 그렇게 의미 없는 반복적이고 수동적인 행위와 말로 시간 죽이기를 시작한다. 나도 그러하다 우선 불확실한 미래를 기다리고 있다. 무엇을 하는지, 언제 오는지, 어디에서 오는지 모르는 고도를 기다리는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처럼 말이다. 무엇을 하는지, 그 일은 즐거운지, 나랑 적합한지, 언제 오는지 모르는 막연한 기다림. 이렇게 언제 올지 모르는 나의 미래이지만 나는 신경을 쓰고 그 미래에 대해 예상을 해보며 붙잡혀 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것을 기다리는 그 기간 동안 나는 공허 속에 던져져있다. 공허란 아무것도 없는 것, 그 기다림의 시간동안 시간을 채워야 하는 것. 방법이 정해져 있지 않는 것. 무엇을 할지 모르겠는 것. 지금의 나의 상태이다. 불확실한 존재의 기다림은 그 기다림의 기간 동안 의미 없는 행동들의 반복일 뿐이다. 그래서 권태롭고 시간이 흐르는데 반복되는, 공간은 변하지 않는 시공간 속에서 녹아들어가고 있다. 고도를 기다리며 1막의 시작과 2막이 시작의 대사가 같다고 하는데 그 대사의 허무함의 깊이는 다르다고 작가는 말한다. 권태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절망스럽다. 그리고 이런 권태는 시간 죽이기로도 벗어날 수 없으며 그렇기에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의 시간 죽이기는 실패로 돌아간다. 왜냐하면 이들은 끝끝내 고도를 만나지 못하고 기다리며 작품이 끝나기 때문이다. 이런 깊은 권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실존’하는 것이라 철학자 하이데거는 말했다. 실존이란 다른 사람을 따라 말하고 행동하는 ‘세상사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자신의 ‘존재가능성’을 기획하고 그것에 따라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진정한 자기로 살아간다는 말이다. 결국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좋아하는가. 나는 무얼 하고 싶은가. 무얼 잘하는가. 나에 대한 깊은 탐구를 통한 ‘나’라는 사람이 누구인지 파악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막연한 기다림 속에서 길은 보이지 않지만 차근차근 만들어나갈 것이다. 먼 미래를 기획하고 도달하기 위해 예측해보고 돌다리 하나라도 두드려보며 한걸음씩 나아갈 것이다. 그것이 내가 막연하게 지나쳐보내는 친구들의 길이 아닌가싶다. 그들과 나의 다른 점은 그들은 실존하고 나는 권태 속에서 전락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젠 내가 왜 무기력했는지, 그토록 아무 것도 안하며 의미 없는 시간들을 보냈는지, 그리고 점점 더 우울해지고 절망스러웠는지 알 수 있게 되었다. 혼자 ‘고도를 기다리며’를 읽었다면 그저 지루했겠지만 ‘김용규’작가의 문학적, 철학적 해설로 깨닫게 되었다. 권태는 인간 근본적인 기분이다.

벗어나려 애쓰는 것은 인간의 본질이다. 누구나 권태로움에 시간마저 녹아버린 경험이 있다. 실존하자. 내가 누구인지 찾자. 그렇게 출발선에 서자
그다음 한발 짝은 힘겹겠지만 출발선에 서는 것만큼은 아니다.

용기를 얻었다면 얻었다 할 수 있다. 작년에 교수님과 상담을 할 때 무엇이 되고 싶냐고 물으셨다. 나는 모르겠다 했다. 교수님은 아직 늦지 않았다고 이번 겨울방학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 찾으라고 하셨다. 그 말은 잊고 출발선에 서지도 않았으면서 어디로 가야하는지도 모르면서 뛰려고 했던 나의 불안과 정작 뭘 해야 할지 모르겠는 나의 초초함이 만든 권태로움에 빠져있었다. 그리고 이 책을 읽고 생각난 교수님의 마지막 한마디 ‘공칠과삼’ 이번 방학 때는 잘한 일에는 7번 칭찬을 못한 일에는 3번 반성을 하라고 하셨다. 멋진 말이다. 우선 떨어진 나의 자존감을 회복하며 용기를 가지고 앞을 응시하겠다. 사실 ‘철학카페에서 문학읽기’에서 ‘고도를 기다리며’말고도 훌륭한 고전작품들과 나의 고민들을 해결해주고 더 깊이 있는 생각을 할 수 있게 해준 김용규씨의 해설들이 있었다. 특히 ‘데미안’, ‘어린왕자’, ‘오셀로’, ‘1984’등이 있었다. ‘데미안’은 몇 일전에 정독한 책으로 자아와 성장에 관한 깊은 철학적, 종교적 사유로 쓴 독일의 대문호 헤르만 헤세의 작품이다. 역시나 자신에 깊은 내면으로 파고들어가는 자아성장 소설이다. 이것 역시 혼란스러웠던 머릿속에 위로를 해주던 작품이었다. ‘어린 왕자’는 관계, 만남에 대한 서술로 다시 읽으니 더 아름다운 소설인 거 같다. 대학생이 되니 자꾸자꾸 새로운 관계, 낯선 사람들을 만나고 직접적으로 거절해야 하는 상황들이 많아졌다. 학창시절엔 그저 같은 반 친구들과 잘 지내기만 하면 됐었는데 이젠 한 반이라는 소속감이 없는 사람들과도 긍정적인 관계를 맺어야 한다. 그래서 스트레스였다. 나와 맞지 않고 어색하지만 그래도 좋은 관계, 호감을 주는 사람으로 남고 싶어 내성적인 성격을 꾹꾹 숨겨가며 활발하게 굴었다. 그렇지만 애써 잘 보일 필요가 없다. 예의바른 사람으로 남되 애쓰지 말 것, 집착하지 말 것. 그렇게 기다리고 천천히 다가가면 서로 의미 있는 존재가 된다. 그 말이 참 예뻤다. 그리고 좁고 깊은 인간관계를 추구하는 나로써 몇 안 되는 나의 친구들에게 너무 감사했다. 내가 누군가에게 의미 있는 특별한 존재로 기억되는 것. 나를 기다리고 나와의 만남을 행복해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참으로 고마움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오셀로’는 사랑은 질투와 함수관계인가를 서술한 흥미로운 글이었다. 사랑한다면 질투하는 것이 당연한 것일까 진정한 사랑은 질투하는 것이 아니다. 라는 두 가지의 명제로 철학적으로 풀어나갔다. 전자는 애로스적, 후자는 아가페적 사랑이라는 유형에 속하며 그리스로마 신화에 나오는 신 ‘애로스’의 탄생비화부터 시작해 진화심리학에서의 질투와 ‘에리히 프롬’의 질투에 대한 개념을 담아내었다. 애로스는 아프로디테와 풍요의 신, 결핍의 신에서 태어나 끝없는 풍요에 대한 갈망을 담고 있다고 한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계속 다가가고자 하지만 결코 그 사람은 될 수 없다는 것에서 질투가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또한 진화심리학에서는 질투는 방어도구라고 한다. 정자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난자와 수정을 하기위한 것과 하나는 꼬리가 돌돌 말려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것이 있는데 전자의 경우 생식을 위한 것 후자의 경우는 혹여나 남아있는 다른 사람의 정자를 잡아 안고 죽는다. 이렇듯 다른 이에게 뺏기지 않겠다는 방어기제로 질투가 쓰인다는 것이다. 하지만 ‘에리히 프롬’은 어느 형태로는 질투는 사랑이 아니며 사랑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나의 경우엔 사랑은 모양이 없다고 생각한다. 각자의 사랑이 있을 뿐. 애로스적 사랑, 아가페적 사랑이라는 유형에 속할 수 없다고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신 애로스가 풍요와 결핍사이의 존재로 태어나 끝없이 갈망한다는 것은 참으로 좋은 표현이라
생각했다. 남녀사이의 사랑에 대해서만 다루었지만 ‘사랑’의 대상은 다양하다. 인간애, 가족애, 우정 등 ‘사랑’이라는 요소는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수요건이라 생각한다. 사랑이 없어 외롭고 고독하고 세상에서 멀어지며 그 허기를, 공허를 끊임없이 채우려한다. 그래서 여러 정신병이 나오는 것이 아닌가했다. 폭식증이나 싸이코패스 같은 것 말이다. 내가 느꼈던 공허 중 어느 정도는 사랑의 갈망을 채우려하다 느낀 감정이 아닐까 싶었다. 앞서 ‘허기진다’고 표현했는데, 사랑의 공허는 허기짐과 끊임없이 채우려드는 것이 비슷하다. 방학이 되며 불확실한 미래에 붙잡혀 권태를 벗어나려 시간 죽이기를 하고 있을 때 친구들과 가족에게 점점 말을 안 하게 되었다. 첫째 의미 없이 수동적, 반복적으로 행동하고 있는 내가 한심스러웠고 친구들은 척척해내고 있다고 생각하니 더 내가 못나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게 오히려 나를 더 공허하게 만들었음을 나는 알게 되었다. 내가 먼저 멀리했으면서도 사랑을, 관심을 갈망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토록 ‘철학카페에서 문학읽기’는 다른 이들에게 어떤 존재로 느껴졌는지 모르겠지만 나에게 있어서 나를 더 돌아보게 하고 북돋아준 존재였다. ‘당신은 전락할 것인가 실존할 것인가?’어쩌면 수많은 20대 30대 40대 모든 인생에서 할 수 있는 질문이겠다.

당신은 전락할 것인가, 실존할 것인가?

출발선을 찾아 서는 일이 의미 없지 않음을 이것이 가장 힘듦을 깨닫고 용기를 얻은 작품으로 앞으로 나에게 다른 문제가 발생했을 때에도 도움이 되어줄 든든한 지침서가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이 작품을 평하고 싶다

장려 배*희 신문방송학과 도서: 낙타샹즈
독후감: 낙타샹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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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은 삶의 비료 같은 것이다. 어떤 경험을 하느냐에 따라 사람들은 각기 다른 모습으로 변한다. 사막에서 목단이 자랄 수 없다. 샹즈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낙타샹즈>는 1930년대 중국 북경의 인력거꾼 샹즈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쓰여진 소설이다. 사실 우리나라에서는 인력거꾼 하면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을 떠올리곤 한다. 나 또한 그러했다. 인력거꾼의 이야기를 다룬다는 점에서 하층민의 비참한 삶을 다양한 방면에서의 역설로 표현해낼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책을 펼쳐 읽는 순간 나는 나의 생각이 틀렸음을 알게 되었다. 이 소설은 샹즈라는 인물에 대해 아주 사실적으로 표현한다. 이에 역설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샹즈의 인생이라는 사실이 서술되어 있을 뿐이었다. 소설의 내용은 이러하다. 샹즈는 젊은 인력거꾼이다. 시골에서 올라와 부모님도, 친구도 없이 오롯이 혼자서 북경에서 살면서 자신의 인력거를 갖겠다는 일념 하나로 3년 동안 아파도 참고 먹는 것, 입는 것도 줄여가며 겨우겨우 돈을 모아 자신의 인력거를 마련하게 된다. 하지만 전쟁으로 인해 자신의 인력거를 빼앗기고 군대에 끌려가게 된다. 다행히 그는 혼란을 틈타 낙타 3마리와 함께 탈영하여 다시 북경으로 돌아오게 된다. 하지만 그의 탈영 과정은 만만치 않았다. 하루를 꼬박 걷는 동안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못해 살아있는 시체의 모습으로 북경으로 돌아와서는 낙타를 시세보다 훨씬 싸게 팔고 받은 돈으로 여인숙에 머물렀다. 그는 이미 많이 지쳐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며칠을 아파서 누워있었다. 몸이 어느 정도 낫자 샹즈가 이전에 인력거를 끌 때부터 알았던 류쓰예를 찾아가 자신의 돈을 맡기고 류쓰예가 운영하는 인력거 대여점에서 인력거를 다시 끌게 된다. 그의 목표는 단 하나, 자신의 인력거를 사는 것이었다. 그는 인력거를 사기 위하여 파렴치한 짓도 마다하지 않았다. 남의 손님을 빼앗거나 손님을 바꿔치기 하는 등 돈을 모으기 위해 악착같이 일했다. 하지만 그의 내면에는 이런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다. ‘열심히 일을 한들 무슨 소용이겠는가?’ 이미 빼앗긴 인력거로 인해 그는 독하게 마음먹는다는 것 자체가 힘들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래도 그는 그의 인력거를 사기 위하여 부잣집의 인력거를 끌기도 했지만 주인의 야박한 인심에 3일 만에 그만두고는 다시 류쓰예의 인력거를 끈다. 류쓰예에게는 외모나 심성이 그리 곱지 않은 딸, 후니우가 있었다. 그녀는 내심 샹즈를 좋아하고 있었다. 그래서 후니우는 아버지가 집을 비운 사이 샹즈를 유혹하여 하룻밤을 보낸다. 이에 마음이 무거워진 샹즈는 차오선생의 집에서 인력거를 끌기로 하여 그곳에서 기거하며 그 집의 일을 하였다. 그곳에서 그는 새로운 인생을 살리라 마음을 먹고 인력거를 위해 열심히 돈을 모으고 있었다. 그런데 불쑥 찾아온 여인이 있었으니 그녀는 바로 후니우였다. 그녀는 샹즈에게 샹즈의 아이를 가졌다며 책임을 지라는 말을 하기 위하여 찾아온 것이었다. 그는 앞이 깜깜해졌다. 그러는 와중에 설상가상으로 차오선생이 공산주의를 설파한다는 이유로 차오선생을 쫓아오던 형사와 마주치는데 그 형사는 자신이 예전에 끌려갔던 군대의 상사였고, 그는 샹즈에게 너만은 살려줄테니 그 대가로 돈을 달라고 하여 샹즈는 자신이 모아둔 돈을 빼앗기게 된다. 그 사이 차오선생이 다른 곳으로 도망가는 바람에 그는 또 모든 것을 잃게 되었다. 그래서 샹즈는 다시 류쓰예의 집에 들어가게 된다. 하지만 조금 다른 모습이었다. 그의 눈에는 영혼이 없었고, 그저 시키는대로 일할 뿐 이었다. 그러다 류쓰예의 생일이 되었고, 그때 후니우는 샹즈의 아이를 가진 것을 아버지께 이야기 하였다. 그 결과 부녀간에 싸움이 일어나게 된다. 류쓰예는 샹즈가 내심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그가 인력거꾼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부녀간의 싸움으로 후니우와 샹즈는 류쓰예의 집에서 쫓겨나게 되었고, 둘은 결혼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결혼과 동시에 후니우의 임신이 결혼을 위한 거짓말이었음을 알게 되고, 크게 상심한다. 그간 마음속에 있었던 책임에 대한 무게감이 아무런 의미가 없어진 것이다. 그는 다시 삶에 대한 의욕을 잃고 살아갔다. 인력거를 끌힘이나 의욕은 예전만하지 못한데 부양가족은 늘어났다는 점이 샹즈를 크게 압박하였다. 그러다 이웃으로 샤오푸즈라는 여자가 오게 되는데 이 여자는 이미 장군의 첩으로 들어갔다가 돌아온 사람이었다. 어린 두 동생과 알코올중독 아버지를 위해 무슨 일이라도 해야 했지만,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고 그녀는 결국 몸을 팔게 된다. 이 일을 후니우가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다. 그러던 중 후니우와 샹즈 사이에 아이가 생기게 되는데, 후니우가 임신해있는 동안 운동량은 부족한데 너무 많이 먹어서 아이가 우량아가 되었고, 그로 인해 출산에 어려움을 겪다가 그만 아이를 낳는 중에 산모와 아기 모두 죽고 만다. 샹즈는 다시 또 모든 것을 잃었다. 그에게 남아있는 것은 후니우의 돈으로 마련하였던 인력거 두 대 뿐이었다. 그는 후니우의 장례를 위하여 인력거를 팔았다. 그러곤 여느 인력거꾼과 다름없이 그저 하루를 살기 위해 인력거를 끌었다. 그에게 더이상의 꿈과 희망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우연히 전에 도망갔던 차오선생을 다시 만나 재기를 꿈꾸게 되었고, 후니우가 죽은 뒤 자신에게 관심을 보였던 샤오푸즈가 기억이 나 그녀를 데리고 차오선생의 집에 들어가려고 하였지만, 샤오푸즈는 이미 사창가에서 자살을 한 지 오래된 후였다. 그는 정말 일말의 희망마저 잃어버린 채로 그저 하루를 위해 인력거를 끌고 세상의 법규나 경찰의 제지는 모두 삐딱하게 대응하며 골칫덩어리가 되고 만다. 그는 스스로 키가 크고 힘이 좋기 때문에 함부로 제지할 수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샹즈는 하루 벌어서 하루 쓰는 생활도 모자라 돈을 빌려서 갚지 않기 시작하고, 여러 사람에게 사기를 치고, 결국은 롼밍이라는 사회주의 운동가를 경찰에 일러바쳐 돈을 번다.(이 당시 중국은 사회주의가 아니었고, 강한 사회주의 설파는 불법이었다.) 그에게 더이상 불로소득이나 더러운 돈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처음 이 책을 다 읽고는 먼저 라오서라는 작가에게 감탄하였다. 사실 우리는 현대 중국의 소설을 접할 기회가 많지 않다. 우리는 대부분 미국이나 프랑스 등 서구 중심의 현대소설을 주로 읽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개인적으로 현대소설에 크게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편이었다. 대부분의 현대소설이 수식이나 꾸밈보다는 사실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주인공의 내면이나 사회적인 상황을 덤덤하게 표현하는데, 이런 점에서 소설의 내용이 머리로는 이해가 되지만 주인공들은 왜 그랬을까에 대해서는 단편적으로만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라오서는 샹즈의 이야기를 아주 사실적으로 이야기하지만 아주 문학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샹즈의 삶이 얼마나 힘들었을지, 그가 그 삶을 이겨내고자 어떠한 노력을 얼마나 하였는지를 문학적 수식방법을 통하여 표현하고 있다. ‘초가을 늦은 밤, 별빛 반짝이는 나뭇잎 사이로 산들바람이 불어오자 샹즈는 고개를 들어 아득히 먼 은하수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처럼 시원한 날에 그의 가슴 또한 그처럼 넓기만 한데 그는 마치 공기가 부족한 것처럼 가슴이 답답했다’ 이 문장에서 보듯이 먼저 초가을의 계절과 샹즈가 바라보는 하늘을 묘사하여 그의 내적인 감정을 더욱 깊이있게 표현하고 있다. 사람의 감정을 단편적인 한 문장으로 드러내는 것 보다 비유를 통하여 풍부하게 감정을 표현하여 소설 속 샹즈의 삶을 더욱 부각시키는 효과를 가져온 것 같다. 그 다음 내가 생각한 것은 ‘이 책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이 책은 열심히 노력하면 보상받는다는 법칙을 산산히 부숴버린다. 샹즈는 열심히 노력했지만 결국 사회에, 사람에, 상황에 발목 잡히고 만다. 특히 샹즈는 사람에게 많은 배신을 당하게 된다. 그가 아무리 인력거라는 목표를 가지고 이를 위해 살아도 그의 상황은 도무지 나아지는 것이 없었다. 그를 좌절시키는 요소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이를 통해 작가는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 나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다 라오서가 한 말을 우연히 발견하게 되었다. ‘개인을 위해 노력하는 이는 어떻게 하면 개인을 파멸시킬 수 있는지를 안다.’ 이 말을 통해 라오서는 이 책으로 한 개인의 극단적인 개인주의의 말로를 말하고자 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책은 3인칭 전지적 작가시점에서 쓰였다. 작가가 인물 모두의 감정을 알고 있고 표현할 수 있다. 하지만 전지적 작가 시점임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철저히 샹즈의 입장에서만 이야기하고 있다. 상황 설명이 필요한 부분에서 전지적 작가 시점임이 드러날 뿐, 샹즈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이야기를 진행할 때에는 어찌보면 관찰자 입장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샹즈 외의 인물의 감정에 대해 제대로 표현하지 않는다. 대부분 샹즈의 감정만을 표현할 뿐이었다. 이를 통해 라오서는 샹즈의 삶이 왜 이렇게 되었는지를 말하고자 하였던 듯하다. 이 말은 샹즈가 다른 이들의 감정을 이해하려하지 않았음을, 샹즈는 자신의 생각을 위해서 살아가는 인물임을 서술방식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샹즈는 자신외의 누군가에 대해서 감정을 소비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 외의 어느 누구에게도 큰 관심을 가지지 않았고 게다가 그가 누군가에게 호의를 베푼다는 행위는 아주 드문 일이었다. 그가 차오선생을 다시 만났을 때, 후니우의 임신소식을 들었을 때에도 그에게 중요한 것은 나, 인력거를 살 돈. 그것만을 생각했다. 누군가에게 크게 마음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힘들어도 의지할 사람이 없었고, 지푸라기라도 내밀어 준 차오선생의 호의는 스스로가 생각한 조건에 맞지 않아 시원하게 걷어 차버리고 거리의 골칫덩어리로 전락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내가 처음 샹즈의 몰락을 이해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그 이유를 우리 세대의 대부분이 샹즈와 같은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다. 나도 샹즈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열심히 노력하면 반드시 그 보상은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 책의 결말이 이해가 가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샹즈가 참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몇 번이고 쓰러져도 다시 일어나고, 다시 희망을 가진다는 점에서 정말 의지가 강한 사람이구나, 본받고 싶다 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책에서 샹즈의 결말은 볼품없다. 그는 모든 것을 잃고 사람을 팔아넘겨 받은 돈으로 그저 하루를 살아간다. 책을 다 읽은 순간 정말 혼란스러웠다. 이 책은 샹즈처럼 열심히 인생을 살아도 결국은 목적과 꿈이 없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을 샹즈의 개인주의적인 생각이 불러낸 처참한 결과라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는 라오서가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였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라오서의 생각에 공감하지 못하고 있었다. 왜 그런가 생각해보니 샹즈는 바로 나의 모습이었고, 우리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 세대는 단군 이래 최고의 스펙을 가지고 있지만 높아져만 가는 기준에 의해 취업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러한 우리 세대를 지칭하는 말에는 사토리 세대, 달관 세대 등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가슴 아픈 말은 바로 N포세대 인 것 같다. 따로 목표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저 살아가기 위해서 수많은 것을 포기한다. 나 하나 취업하고 살아가는 것도 힘들기 때문에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 데 이어 내 집 마련과 인간관계, 게다가 샹즈는 그래도 마지막까지 지키려 했지만 우리는 이미 포기하고 있는 꿈과 희망까지. 우리가 나 하나를 위해서 포기한 것은 어마어마하다. 샹즈가 모든 것을 잃고 그저 하루를 살기 위해 ‘나’라는 존재외의 모든 것을 포기했던 것처럼 우리 또한 그저 나 하나 살아가기 위하여 많은 것을 포기하고 있다. 우리의 삶이 샹즈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래서인지 샹즈가 그래도 잘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샹즈는 결국 자신만은 절대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였지만, 혹여나 그렇게 되면 어떡하나 걱정했던 그저 그런 인력거꾼이 되고 만다. 우리 세대 또한 꿈을 위해 대외활동, 학점, 토익, 자격증 등을 준비하며 열심히 발버둥 친다. 하지만 그 꿈을 이루는 것은 극히 소수에 불과하고 처음 목표를 위해 시작할 때 자신만은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삶, 그 삶을 살며 큰 희망이나 꿈 없이 하루를 살아가는 달관세대가 되어버리고 만다. 1930년대, 2010년대 숫자만 바뀌었을 뿐, 우리는 2010년대의 샹즈인 것이다. 샹즈의 삶이 극단적인 개인주의로 인하여 몰락하였다는 라오서의 말에 따라 지금과 같은 우리의 삶 또한 극단적인 개인주의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우리 세대도 그렇고 샹즈가 그렇게 파멸하게 된 것이 샹즈가 자신만을 위해 살아서라는 말로 결론짓고 싶지 않다. 물론 샹즈는 스스로를 위해 살았다. 스스로의 꿈과 목표를 위해서만 살았다. 그는 지나치게 그 자신만을 생각했다. 하지만 이것이 샹즈를 파멸로 이끈 모든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나는 개인은 거스를 수 없는 사회구조적인 문제가 반드시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사회구조적인 덫이나 벽을 넘어 자신의 꿈을 이룬 사람이야 말로 위인이 되는 것이고, 그 벽을 넘지 못하는 우리와 같은 평범한 사람들은 그 벽 앞에서 꿈과 희망, 의지, 목표 등을 내려두고 그저 살아가는 데에 집중하게 된다. 샹즈는 류쓰예처럼 인력거를 소유하여 다른 인력거꾼들에게 인력거를 빌려주고 그 돈으로 살아가기를 꿈꿨었다. 하지만 샹즈가 류쓰예와 다른 점은 류쓰예는 이미 꽤 많은 자금을 가진 사람이었고, 샹즈는 혈혈단신 거의 고아처럼 자라 가진 것이라곤 나이와 체력뿐인 젊은이였다는 것이다. 사막에서 모란이 자랄 수는 없는 것처럼, 그는 이미 남들보다 척박한 사막에서 시작하였고, 잠시 인력거를 구입함으로써 비옥한 토지를 만든 듯 했지만, 그 마저도 사회의 요구에 따라 허무하게 빼앗기고 만다. 그는 인력거를 되찾아올 힘이 없었다. 그가 군대에서 도망쳐 다시 재기하기 위해 악을 쓰고 돈을 벌어도 그에게 돌아오는 것은 자신보다 높은 사회적 신분을 가진 사람들의 횡포뿐이었다. 돈을 모아야겠다고 마음먹을수록 그 돈을 가져가는 것은 모두 샹즈보다 사회적 신분이 높은 사람들이었다. 샹즈에게 불어오는 사회구조라는 바람은 샹즈의 토지를 다시 척박한 사막으로 만들었다. 그 사막 속에서 끝까지 꽃을 피워내고자 했지만, 그래도 샹즈는 사회적 약자였고, 그를 보호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결국 스스로 아무것도 가지지 않음으로써 더 이상 뺏기는 것도 없는 상태가 되길 자처했다. 이는 사회라는 커다란 구조만 볼 때는 볼 수 없는 사회적 약자의 삶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샹즈의 삶은 철저히 외면당한 사회적 약자의 삶이다. 누구도 그에게 단비를 내려주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샹즈를 이런 사회구조 안에서 자신만의 꿈을 이루려고 스스로를 위해서 살았지만, 고질적인 사회구조적 문제를 결국엔 넘지 못하고 보호받지 못하는 약자의 삶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게 된 것으로 결론짓고 싶다. 인력거꾼이라는 직업과 신분으로는 넘을 수 없었던 벽 뒤에서 자신 스스로를 위해서만 살아갔던 샹즈, 그의 삶은 개인주의의 말로이자 사회구조적인 문제의 결과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샹즈와 같은 삶을 살고 있는 우리가 이렇게 많은 것을 포기하고 달관하게 되는 것은 개인의 문제 뿐 아니라 개인으로서는 해결하기 힘든 사회구조적인 벽에 의해 나타난 결과라고 본다. 책을 읽는 내내 샹즈의 삶을 응원했다. 목표는 다르지만 그 목표를 위한 과정이 너무나 비슷했기 때문이다. 샹즈가 꼭 성공하길 바랐다. 하지만 나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샹즈의 삶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하루를 살아가는 하층민으로 마무리 되었다. 책을 읽고는 ‘앞으로는 나 스스로만을 위해서 살지 말아야겠다.’라는 생각보다는, ‘샹즈와 같은 삶 또한 잘못되지 않았다’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오히려 샹즈의 삶이 현실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래도 생각해보면 내가 샹즈의 삶을 응원했듯 소설 속의 샹즈가 우리의 삶을 본다면 우리를 응원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들었다. 뿐 만 아니라 차오선생이 제공해 준 소중한 기회마저 함께 살기로 마음먹었던 샤오푸즈가 죽었다는 이유만으로 거절하는 샹즈를 보며, 답답해하는 나 자신은 과연 그런 일이 없었을까 하는 생각을 가지게 하였다. 나도 나에게 좋은
기회가 주어져도 그것을 좋은 기회라고 여기지 않은 적이 있지 않았을까 하며 나 자신을 냉철히 되돌아 볼 수 있었다. 나뿐만이 아닌 우리 세대와 참 많이 비슷한 샹즈라는 인물을 통해 나 자신은 저렇게 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고찰을 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샹즈의 삶이 개인의 생각과 행동에 의해서만 결론이 난 것은 아니라는 것, 그의 삶이 결코 헛되지 않았다는 것, 우리와 샹즈에게는 스스로의 힘만으로는 넘기 힘든 벽이 존재한다는 것, 그 벽을 넘지 못하는 것이 결코 잘못된 것은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이 책을 주위 친구들에게 추천해주었다. 친구들이 이 책이 재밌냐고 물어보면 이렇게 대답한다. “이 책
주인공이 우리랑 많이 닮았어. 그래서 슬퍼.”
우연히 얻은 기회로 굉장히 소중한 책을 얻어, 나를 돌아보는 좋은 경험이 되었다.
장려 김*우 경제학부 도서: 프리덤 라이터스 다이어리
독후감: 당신은 생각보다 힘이 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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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한국 교육 예찬론’은 이미 유명한 이야기다. 지난 2009년 취임한 이래로, 그는 수차례 한국의 우수한 교육 체계와 높은 교육열을 추켜 세워왔는데 그 중 특히 강조한 것이 교사의 역할이다. 그는 한국의 교사를 ‘국가 건설자’로 표현할 정도로 그 역할에 각별한 의미를 부여했다. 유능하고 헌신적인 한국의 교사들이 학생들에게 양질의 교육 서비스를 제공하고 그 학생들이 고급 인적 자본으로 성장해 사회 각 분야, 산업에서 국가 발전을 이끌어 왔다는 것이다. 인적자본을 공급한다는 관점에서 볼 때 한국 교육은 모범사례가 될만하며 그 최전방에 우수한 교사가 있다는 것이 오바마 대통령의 일관된 견해로 보인다. 그에 따르면 한국의 교사들은 ‘의사에 버금가는 소득과 사회적 지위’를 지닌 직업으로 사회적으로 높은 존경과 선망을 받고 있다. 그러한 이유로 인재들이 앞다퉈 교사를 지망해 왔으며, 높은 수준의 인적 자원이 양질의 교육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라는 것이다. 반면 미국의 사정은 조금 다르다. 미국 초기 교사는 개척 시기 농한기에 자제의 교육을 위임받은 고용인에 불과했다. 하지만 19세기 후반부터 사범학교의 정비 ·확충, 나아가 대학으로의 승격과 같은 제도적 변천을 거치면서 사회적 평가도 상대적으로 높아졌다. 따라서 과거 미국 사회에서 교사는 크게 존경받거나 높은 대우를 받는 직업이 아니었지만 최근 들어 명문 아이비리그 대학 출신 졸업생들이 유입되고 있고 만족도와 사회적 평판이 높아지고 있다. (두산백과, <교사의 사회적 지위> 참조) 오바마 대통령이 한국 교육의 성공으로 우수한 교사를 지목한 것은 미국 내 교사의 처우 개선과 지원 강조로 이어진다. 오늘날 미국 사회에서 교사의 사회적 평판이 높아지는 추세지만 여전히 낮은 교사의 지위를 향상해 더욱 우수한 인재를 공교육으로 유입시켜 언론에 ‘평준화 실험의 실패’ 등으로 비판받고 있는 공교육 강화 정책에 힘을 실어주고자 하는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대다수 한국 언론은 오바마 대통령의 표현 하나하나에 큰 의미를 부여하며 ‘오바마 한국 교육 극찬’‘오바마도 인정한 한국 교사의 우수함’ 등의 제목을 달아 앞다퉈 기사를 내 왔다. 하지만 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한국인들은 얼마나 될까. 여러 가지 교육 통계나 연구 결과를 인용하지 않더라도 한국 교육의 현실을 마냥 긍정적으로 보는 시선은 많지 않다. 높은 학업 성취도와 비교하면 턱없이 낮은 학업 의욕. 정확히 그에 비례하는 스트레스와 그로 인한 자살률. 대학 진학률과 그로 인한 입시 경쟁과 사교육비 문제. 무너지는 교권과, 고통받는 학생들. 선생님과 학생, 그리고 학부모까지 교육의 직접적인 당사자 누구도 행복하지 않은 한국 교육은 명암이 공존하되, 때로는 어둠이 빛을 잠식하는 게 아닌지 걱정이 될 정도다. 너무나 중요하기에 쉽지 않은 문제다. 때로 어려운 문제일수록 답은 가까운 곳에 있다. 『프리덤 라이터스 다이어리』 속 그루웰 선생님과 ‘자유의 작가들’은 미국 내 공교육의 성공사례를 보여준다. 미국 대통령의 예찬과 역설적이게도 한국의 교육 정책이 미국의 교육 정책을 닮아간다는 점을 참고하면, 한국 교육 현장에 시사하는 바도 크다. 사실 『프리덤 라이터스 다이어리』 속 여러 일기들이 쓰인 배경이 되는 그루웰 선생님과 윌슨고등학교 203호 학생들의 이야기는 지극히 ‘미국적’인 성장담, 성공담으로 볼 수도 있다. 다양한 인종의 문제아들로 이뤄진 학급인 윌슨고등학교 203호. 이곳 학생들은 폭력과 마약, 음주, 흡연, 총격, 살인, 낙태, 강간이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환경에서 방황하며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이곳에 갓 임용된 국어 교사 에린 그루웰이 부임한다. 학생들은 ‘당연히’ 그를 경계하고 어떠한 기대도 하지 않는다.
그 역시 다른 선생님과 마찬가지로 적당히 시간만 보내다 가겠지. 그 역시 다른 선생님처럼 자신들을 경계하며 비딱하게 보겠지. 하지만 그루웰 선생님은 달랐다. 그녀는 203호 학생들을 똑같은 ‘사람’으로, 그만큼 존엄하고 행복해야 하는, 성장해야 하는 사람으로 보았다. 그리고 그 사실을 그들도 자각하도록 헌신적으로 노력한다. 그들의 마음을 여는 열쇠가 바로 ‘프리덤 라이터스’ 스스로 자유의 작가가 되어 자신들의 상처와 고통을 직시하고, 나아가 타인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글쓰기다. 자유를 위한 글쓰기, 글쓰기를 통한 자유. 그루웰 선생님은 그들이의 자유를 얻기 위한 여정에 든든한 조력자가 된다. 그들을 둘러싼 시선은 편견으로 가득하다. 흑인들은 모두 술과 마약에 찌들었으며, 히스패닉은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시한폭탄이다. 원래 그들은 그렇기에 어떠한 방법도 소용이 없다. 그저 일이 너무 커지지 않도록 적절히 통제하는 것만이 최선이다. 그러므로 한정된 예산과, 교육적 지원을 좋은 대학에 진학할 만한 ‘우수한’ 학생들에게만 맞추는 교육 현실은, 어딘지 낯선 풍경은 아니다. 어쩌면 그들을 괴물로 만든 것은, 아니 괴물로 머물게 한 것은 어른들의 비뚤어진 시선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흑인이니까 어차피; ’그래봤자 히스패닉이니까‘ 하는 만들어진 믿은은 그들 스스로의 삶을 제약한다. 그들은 소수계 문제아들로 이뤄진 학급이라는 편견을 극복하기 위해, 정상적인 삶을 살아갈 수 없을 것이라는 편견을 이겨내기 위해 함께 문학을 읽고, 글을 쓴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상처를 직시하고 그것에서 벗어나는 용기를 얻는다. 그리고 세상을 감동을 준다. 졸업은커녕 생을 걱정해야 했던 그들 중 상당수는 무사히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한다. 여기까지라면 전형적인 미국식 드라마의 플롯이다. 물론, 그런 평범한 이야기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 미국 교육 현장에서 일어난 성공 사례라는 것이다. 자유의 작가들이 남긴 기록은 예외적이고 일회적인 이벤트가 아닌, ‘프리덤 라이터스 교육법’이라는 지속 가능한 교육법으로 자리를 잡았다. 나아가 자유의 작가들은 그들이 경험한 치유의 글쓰기와 따뜻한 환대를 후배들에게 돌려주기 위해 자유의 작가 재단을 설립한다. 희망은 이렇게 이어져 나간다. 그루웰 선생님의 수업은 무엇이 달랐을까. 우선 그곳엔 밑줄이 없고 풀어야 할 문제가 없다. 핵심어와 주제를 찾아 밑줄을 그을 필요가 없다. 작가 자신도 모른다는 작가의 의도나, 전혀 의도하지 않았다는 화자의 의도 등을 찍어내기 위해 애쓸 필요도 없다. 수업은 단순하다. 함께 문학을 읽고 사유하고, 글을 쓴다. 그리고 그것을 나눈다. 때로는 책을 바탕으로 연극을 하거나 영화를 만들기도 한다. 어쨌거나 그들이 함께 읽는 문학은 자신들이 딛고 사는 현실과 동떨어진 아름다운 이야기들만이 아니다. 그들처럼 고통스럽고 괴로운, 어쩌면 더욱 잔인한 상황에 부닥친 사람들의 이야기들이다. 그들은 문학 속 이야기에, 주인공에 공감하고 위로받고 용기를 얻는다. 안네 프랑크, 즐라타 필리포비치 등이 그들의 친구가 된다.
타인의 이야기지만 그곳에서 자신을 발견한다. 그것을 글로 쓰고 나누면서 한없이 무겁고 벗어날 수 없을 것만 같던 삶의 무게를 객관적으로 느끼게 된다. 무엇으로든 표현할 수 있다면, 표현되는 순간, 고통은 더는 고통이 아니다. 글쓰기는 고통을 표현하고 감당할 수 있게 만드는 효과적인 방법이다. 그리고 그들은 흑인 차별에 항의하는 목소리를 내며 미국을 여행한 ‘자유의 여행자’에서 모티브를 얻어 차별과 편견, 폭력에 맞서는 ‘자유의 작가들’이 된다. 자신을 스스로 치유한 것을 넘어 세상에 희망의 증거가 된 것이다. 그들은 깨닫는다. 총격과 집단 구타가 난무하는 공포 속에서 자신을 진정 지키는 것은 총이 아니라 용기와 희망이며, 고통은 술이나 마약으로 잠시 잊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직시함으로써 맞서야 한다는 것을. 진정한 자유는 거리를 방황하는 것에 있지 않고 자신을, 타인을 발견하고 ‘좋은 삶’을 향해 주어진 시간을 충실히 활용하는 것에 있다는 것을. 사실 그루웰 선생님과 함께 했던 ‘자유의 작가들’모두가 좋은 대학에 가거나, 행복을 찾았다는 마냥 그런 밝은 이야기는 아니다. 이 책에는 미처 실리지 못한 이야기도 분명 많을 것이다. 누군가는 여전히 방황하고 있으며 고통스러운 현실에 괴로워하고 있을 테니까. 하지만 그들에게도 ‘자유의 작가’로서 경험한 시간들이 헛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자유의 작가로 활동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법, 살아내는 법을 배웠기 때문이다. “만약 지옥을 통과하고 있다면 계속 가라”(윈스턴 처칠) 어쩌면 사람이 불행한 이유는 지옥 같은 환경 그 자체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지옥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사실에 절망해 그 자리에 주저앉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어차피 난 안될거야. 진정한 교사는 그들이 스스로 그 자리에서 일어나 묵묵히 가던 길을 나아가는 힘을 길러주는 것이다. 그렇게 그들도 결국 긴 터널을 지나 새로운 세상에 발을 내디딜 것이다. 암울하고 고통스러운 고백들로 가득한 전반부를 지나 후반부로 갈수록 일기의 내용은 희망과 용기로 점점 채워져 간다. 이제 그들은 절망스러운 현실에서 벗어나는 힘을 얻고 밝은 미래를 꿈꾸기 시작한다. 학생들은 너무나 중요하고 당연하지만 잊고 살아온 사실들을 발견한다. “우리는 기꺼이 사회적 꼬리표나 숫자 혹은 통계치 일부가 되었고, 그것이 당연한 현실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앞으로 누군가 나의 인종을 묻는다면 즐라타처럼 “전 그냥 사람입니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188p) 그리;고 자연스럽게 새내기 교사인 그루웰 선생님도 성장해간다. 진정한 교육은 가르치는 이도 함께 성장시킨다. 당장 필자의 지나온 시절 교실 속 풍경을 떠올려 본다. 늘 성실히 수업에 임하지만 무언가 힘이 없어 보이던 선생님들. 사교육에 길든 학생들은 학교 수업보다 학원에, 인터넷 강의에 의존한다. 그럴 수밖에. 고등학교 교육은 이미 좋은 대학에 입학하기 위한 과정에 불과했다. 글쓰기는커녕, 교과서나 참고서 이외에 소설이나 교양 서적을 읽으면 눈총을 받아야 했다. 그런 학생들을 알면서도 애써 외면해야 했을 선생님들, 독서를 장려하기는커녕 당장 수능에 도움이 되지 않으니 혼내야 했던 선생님들. 필자가 본 것은 그분들의 의기소침함이었을지도 모르고, 그 의기소침함은 교육 현실과 그곳에 속한 자신에 대한 자괴감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물론 한국의 이런 교실 풍경은 선생님 개개인의 잘못만은 아닐 것이다. 그보다 더 크고 근본적인 교육의 문제, 더 나아가 그것을 둘러싼 사회 구조의 문제다. 교육이 이미 한정된 자원을 획득하기 위한 선발의 기능만을 수행하는 남아버린 상황에서 학교에서 친구와 진정한 우정을 쌓거나 선생님과 진지한 지적 교류를 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풍부한 독서와 다양한 경험을 통해 나를 인식하고, 자유롭게 사유하고, 자신을 표현하고, 진로를 탐색하는 시간을 기대하는 것은 더욱 무리다. 그런 상황에서도 선생님들은 최선을 다했고 필자에게 많은 힘과 용기를 주셨다. 그분들에게 받은 배움이 오늘날 나를 이루고 있을 테니까. 다시 지난날의 선생님들을 만난다면 고마움과 함께 위로를 전해드리고 싶어졌다. 지난날 내가 받았던 위로와 격려처럼. 그리고 함께 고민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것은 결코 그들을 못 믿어서가 아니라 모두가 함께 고민해야 하는 문제기 때문이다. 교육은 그들만이 짊어져야 하는 고민이 아니라 함께 나누는 고민이어야 한다. 지금도 어딘가에서 혼자 외롭게 고민을 짊어지고 있는 선생님이 있다면 그루웰 선생님과 자유의 작가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 당신은 생각보다 위대하며, 한 인간의 삶을 바꿀 수 있다고.
이 글을 쓰던 중 경기도의 어느 고등학교에서 기간제 교사가 학생들에게 빗자루로 폭행을 당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자신이 가르치는 제자에게 폭행을 당하며 아픔과 그보다 큰 비참함을 느꼈을 선생님을 떠올리면 분노와 슬픔이 교차한다.
그럼에도 섣부르게 가해 학생에 대한 강력한 체벌 허용(부활)만이 유일한 해법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교실에서 벌어지는 교사에 대한 폭력을 단순히 개인의 일탈로 치부해 매로 다스리기엔 이미 너무나 많은 일탈이 벌어지고 있으며, 그 강도도 이미 어떤 매보다 더하다.
게다가 체벌 강화를 근본적인 대책으로 제시하는 것은 교육 문제에 대한 해결책임을 교육 현장의 교사에게만 전가하는 것이다. 분명 교육의 주체는 교사와 학생이다. 하지만 교육 문제는 다양한 요건에 영향을 받으며, 다양한 주체, 나아가 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친다. 교실은 교육 문제의 최전선이며 실제로 교육이 일어나는 공간이다. 교실의 문제는 교육의 근본적인 실패에서 비롯된다. 그런데도 교육의 복합적이고 총체적인 특성을 외면한 채 무턱대고 ‘사랑의 매’만 다시 꺼내드는 것은 알레르기성 비염 환자에게 하릴없이 코만 풀도록 하는 겪이 아닐까. 결국, 이것은 교육을 둘러싼 당사자들이 함께 고민해야 할 문제다. 우리는 왜 지난날 ‘사랑의 매’를 부러트렸는가. 교권 추락이 아니라 교육의 추락이 문제다. 교육을 회복해야 한다.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교육은 만능열쇠가 아니다. 어떤 점에서 교육이, 교사가 학생에게 미칠 수 있는 영향은 생각보다 아주 제한적인지도 모른다. 말을 물가로 끌고 갈 수는 있어도 물을 마시게 할 수는 없듯이. 그럼에도 우리는 교육에 무엇을 기대해야 하는가. 교육만능주의는 경계해야 하지만 교육만이, 교사만이 할 수 있는 영역이 여전히 존재한다. 우리의 과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그루웰 선생님과 자유의 작가들은 그러한 질문에 대한 좋은 답을 하나 보여줬다. 문제의 답은 하나가 아니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글쓰기는 힘이 세다. 그리고 당신은 생각보다 더 힘이 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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