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도서관 독후감 공모전

2022.11.10

선정도서 6종
참가대상 부산대학교 학부생, 대학원생 및 부산 지역 주민
참여방법 도서관이 선정한 올해의 책 6권 중 1권을 자유롭게 읽고 해당 도서의 독후감 제출
참여기간 2022년 8월 1일 ~ 10월 16일
시상내역 총 11편(부산대 총장상 및 도서관장상, 총상금 210만원)

※ 본 사업은 부산대학교 국립대학육성사업(REN)의 예산을 지원받아 운영되었습니다.

우수 독후감 선정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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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 이름 학과 선정도서/독후감제목 보기
최우수 이*경 심리학과 도서: 작별하지 않는다
독후감: 인간다움과 작별하지 않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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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작별하지 않는다》의 주인공은 ‘경하’인 듯하다. 그렇게 생각하며 책의 초반부를 지나 중반부에 다다르면 ‘인선’이 주인공인가 싶다. 하지만 후반부에 다다를수록 ‘정심’이 주인공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책을 끝까지 읽어보면 알 수 있다. 이 책은 ‘사랑과 절멸 그리고 인간다움을 이야기하는 이들’이 주인공이 되는 책이다.그렇다면 이 책에서 줄곧 이야기하는 ‘사랑과 절멸, 인간다움’이란 무엇일까. 이 세 단어는 어떤 연결고리를 지닌 채 이야기를 끌어가는가. 사랑에 대한 정의는 분명하지 않지만 추구하는 방향은 명확하다. 사랑은 자신과 다른 이들을 존중하고 인정한다. 그 차이로서 나타나는 갈등을 해결하려고 하지 부추기진 않는다. 반면 절멸의 정의는 명료하다. ‘아주 없어짐’. 그러나 실상은 이 명료한 뜻과는 달리 명료함에 그치지 않는다.

그 겨울 삼만 명의 사람들이 이 섬에서 살해되고, 이듬해 여름 육지에서 이십만 명이 살해된 건 우연의 연속이 아니야. 이 섬에 사는 삼십만 명을 다 죽여서라도 공산화를 막으라는 미군정의 명령이 있었고, (…) 낙인찍힌 유족들도, 입을 떼는 순간 적의 편으로 낙인찍힐 다른 모든 사람들도 침묵했으니까. (p.317)

이 둘은 차이점만 존재하는가? 완전히 양극단에 위치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이 둘은 모두 ‘믿음’에서 나오는 과정이자 결과이다. 둘 다 그 믿음의 정도가 강하다는 면에서 같으나, 그 믿음의 방향은 다르다. 절멸은 스스로에 대한 믿음에서, 사랑은 타인에 대한 믿음에서 나온다. 전자는 다른 이를 해치는 데 사용된다. 그 이유는 자신을 믿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 믿기 때문이다. 성찰 없는 신념의 고집은 자신이 바라보는 세상의 전부가 된다. 그렇기에 자신의 이념에 어긋나는 이들을 가만둘 수 없는 것이다. 반면 자타를 신뢰하는 것은 서로에 대한 존중을 내포한다. 존중이란 차이를 인정하고 수용하되 비판하는 일이다. 이처럼 누군가를 사랑하기는 어렵지만 절멸은 비교적 쉽다. (이 ‘쉽다’는 말은 누군가의 목숨의 무게를 뜻하지 않음을 짚고 넘어간다.) 그렇기에 사랑의 또 다른 이름은 용기이고 절멸의 또 다른 이름은 비겁함이다.

역사 속의 독재자뿐만 아니라, 그의 하수인들은 비판 한 점 없는 공고한 이념 아래 공권력을 휘두르며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집단화하고 죽음에 대한 공포를 앞세워 사람들을 죽인다. 그 방식은 다양하다. 물리적인 폭력, 노동 착취, 때로는 분위기. 동조하지 않으면 죽음뿐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며 수많은 보통의 사람을 죽여온 역사를 우리는 배웠다. 이처럼 인간으로서 마땅히 갖춰야 할 인격을 제 손으로 버리고, 타인의 목숨을 쥐락펴락하는 자들의 오만함과 믿음은 비겁함에 비례한다. 어쩌면 아집이고 모순이며 그 누구도 위하지 않는 자신의 이념을 차마 ‘깨우치지 못한’, 그래서 자신(과 이념)을 위협하는 자들과 논의하는 대신 그들을 영원히 지워버림으로써 자신의 입지를 공고히 한다. 단지 자신이 옳다고 믿기 때문에 행한다. 따라서 저 비겁함은 ‘내가 틀릴 수도 있다’라는 회의주의와의 작별이자 변화의 여지를 남겨두지 않는 고립과의 악수이다. 자신이 옳다는 그 믿음이 그릇된 것인지조차 모른 채로 그렇게 존재들의 절멸을 시도한다. 예컨대 공권력에 도전한 반역자 취급을 하는 식이거나 한국 사회에서 낙인을 찍는 ‘빨갱이’ 취급을 하는 식이다.

P읍에 있는 국민학교에 한 달간 수용돼 있다가, 지금 해수욕장이 된 백사장에서 12월에 모두 총살됐어. / 모두? / 군경 직계가족을 제외한 모두. / 젖먹이 아기도? / 절멸이 목적이었으니까. / 무엇을 절멸해? / 빨갱이들을. (p.220)

절멸에서 생존한 사람들은 그 이후에 사회적으로 절멸된다. 절멸은 아무 소리가 없는 ‘침묵’으로 행해지기도 한다.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죽음에서 살아 돌아온 사람들 또한 그러하다. 생존을 위해 직업을 가질 수도, 사람들과 관계를 형성할 수도 없다. 그들이 겪었던 사건에 대해 언급조차 할 수 없다. 정심의 남편이 고문으로 인해 수전증을 가졌어도 일은 할 수 있었지만, 군사독재정권 하의 전과자인 그와 아무도 허물없이 지내려하지 않았던 것처럼. 아이러니한 일이다. 정작 인간답지 않은 일을 인간에게 저지른 자들은 ‘인간답게’ 살아가는데도 말이다.

그러나 그 뜻이 지닌 완전무결함과는 다르게, 절멸은 소멸의 ‘시도’ 그 자체로 더 이상 완전하지 않게 된다. 침묵은 필연적으로 그 껍질을 깨고 나오고 만다. 제주 4·3 사건이 1987년 6월 민주화 항쟁의 열기 속에서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처럼. 그들은 왜 국가가 주도하는 억압에도 불구하고 목소리를 낸 것인가. 소리 없는 아우성 속의 고통을 외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용기를 내야 자신이 살고 ‘함께’ 살아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인선은 경하와 함께 눈 속에서 마주보며 ‘사랑은 무서운 고통’이라고 말한다. ‘살갗을 타고 스며드는 골수에 사무치고 심장이 오그라드는 사랑’. 절멸을 찾아가는 과정은 ‘심장 깊은 곳에서 무엇인가 이미 떨어져 나갔고 움푹 파인 그 자리를 적시고 나온 피는 더 이상 붉지도 뿜어 나오지도 않는’ 것이라고 말한다. 전자가 마냥 긍정적이지만은 않기에 사랑과 절멸이 주는 고통의 간극을 크다고 단정 지을 수 없을 것이다. 다만 ‘무엇이 사람을 살아가게 하는가’를 묻는다면 아마도 많은 이들이 전자를 택할 것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탄압이 전제된 절멸 하에서 사랑을 행하기란 쉽지 않다. 사람들이 압도적인 소멸의 공포에도 사랑을 행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인간다움’ 때문이다. 정심은 빨갱이의 가족이라는 낙인에 몸을 움츠리기는커녕, 직접 절멸의 장소를 찾고 파헤친다. 가족의 시체 위에서 녹지 않는 눈을 봤던 13살의 아이가 노인이 되어서까지. 오라버니가 살아있는지 찾는 과정에서 훗날의 남편을 찾아간다. 절멸의 문턱을 넘어온 또 다른 생존자를 만난 것이다. 정심의 남편은 15년간의 형무소 생활을 겪고 제주로 돌아와 백사장에서 떠내려갔을지 모르는 동생을 목격했을 여성의 집을 찾아간다. 그 여성은 딱 한 번 그에게 털어놓았던 그날의 일을 몇 년간의 망설임 끝에 훗날 인터뷰에서 말한다. 이 모든 이들의 기록을 파헤쳐간 정심을 따라 인선은 세천리에 대한 자료를 찾기 시작한다. 저마다 이유는 다르겠지만 그 기원은 사랑이자 인간다움이다. 눈과 귀와 입을 닫고 살아가는 것은 사랑이 결여된 인간답지 못한 삶이나 마찬가지이니까.

경 하난 그 사름이 입을 떼신디, 그날 모래밭에서 아이들을 봤느냐곡. (…) 몰른다곡 내보내야 하는 것을 알멍도 이상하게 대답을 하고 싶었져. 꼭 내가 그 사름을 기다렸던 것추룩. 누게가 이걸 물어봐주기만 기다리멍 십오 년을 살았던 것추룩. (p.230)

이 책에서 경하와 인선, 정심, 정심의 남편은 계속해서 환상인지 현실인지 모를 순간들 속에서 살아간다. 어느 것이 현실이고 환상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그 경계가 흐릿해지는 시점을 지나 기어코 살아낸다. 환상과 현실은 공존할 수 있는가.

작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두 세계를 살아가는 건 사실 우리가 현실에서 늘 경험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기억하고 상상할 때, 특히 사랑할 때 그렇지요. 깊이 사랑할 때 우리는 우리의 삶과, 사랑하는 사람의 삶을 동시에 살게 됩니다.’(한강 『작별하지 않는다』 코멘터리 북, 21쪽) 이에 따르면 ‘작별하지 않는다’는 것은 환상과 현실 그 어느 것과도 작별하지 않는 것, 즉 환상과 현실의 공존이 삶이라고 볼 수 있다. 인선은 경하가 자신의 꿈속에서 보았던 언덕 위의 우듬지들을 세우는 프로젝트의 이름을 묻는다. 이에 경하는 ‘작별하지 않는다’라고 답한다. 어느 것이라고 주어를 분명히 하지 않은 채 작별하지 않겠다고 말한다. 그것은 아마도 자신이 사랑하는 무언가를 두고 하는 단언일 테다. 경하는 아마를 사랑하는 것까지는 아니라고 말하지만, 인선이 섬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인생의 모든 기점을 함께했음에도 인선을 잃을 것만 같다고 말하지만, 그는 자신의 삶 속의 삶들을 사랑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지 않고서야 작별을 논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작별은 무엇인가를 사랑할 때 할 수 있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무엇을 믿고 버려야 하는지도 분간하기 어려운 현실 속에서, 끝까지 사랑하는 누군가를 위해 작별하지 않는 것은 사랑이 아니고서야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기에 환상과 현실과 작별하지 않는 것은 큰 결심을 필요로 하는 일이다. 인선이 자신의 어머니와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것, 정심이 가족과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것, 경하가 꿈 속의 삶과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것, 이 책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의 삶처럼.

앞에서 사랑과 절멸을 살펴보았으니, 이제는 다음 질문을 던질 차례이다. 인간다움이란 무엇이며, 우리는 왜 인간다움과 작별하지 않아야 하는가? 사랑과 절멸, 환상과 현실 사이에서 평생토록 고뇌할 인간이 인간다움을 포기하면 안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인간다움은 자신과 타인을 사랑하는 것이다. 자신을 믿고 타인도 믿으며 함께 동등한 권리를 누리며 살아가는 삶이다. 자신만이 옳다고 여기는 자세는 부끄러워하는 것이다. 하나라도 없다면 자책이고 불신이며 자만이 되겠지만, 이 모든 것이 합쳐지면 용기가 된다. 앞에서 말했듯 사랑의 또 다른 이름은 용기이다. 자신이 겪지 않았다고 하여 지나치지 않고 함께 목소리를 내는 것. 그것이 사랑이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은 변화하지 않는데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면 개개인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자들에게 목소리를 높일 수 있다. 더하여 타인의 목숨을 쉽게 앗아간 이들을 제대로 처벌하라는 목소리를 높일 수도 있다. 이처럼 사랑은 두려움에 맞서서 포기하지 않는 것이며, 끝까지 마주하고 기억하는 것이기도 하다. 혼자 실행하기 어려운 일은 사랑에서 행할 수 있다. 다른 이를 믿고 연대하며 존중하는 사랑에서 나온 목소리의 합은 더 크게 더 멀리 뻗어나가 더 큰 힘을 지닌다.

이토록 어려운 ‘인간다움’을 포기해서는 안 되는 이유는 그것의 정의보다 명확하다. 인간은 혼자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자신과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다 하여도 특정한 누군가가 다른 이를 억압해서는 안 된다. 불법행위나 비도덕의 범위가 아닌 이상 타인의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절멸은 그 모든 것을 뛰어넘어 자신만이 옳다고 여기는 그릇된 판단의 결과이므로 인간답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씨를 말려야 한다며 절멸을 행하는 자도, 죽여야 하는 대상과 마찬가지로 인간이다. 이에 어떻게 옳음의 여지가 있을 수 있을까.

절멸은 그 어떠한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자신을 비롯한 타인의 인간다움을 앗아가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국가가 가해자인 폭력의 역사는 지워서는 안 되며 지울 수도 없다. 또한 이와 같은 폭력이 21세기인 지금에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언할 수 없다. 다만 우리가 미처 배우지 않은, 혹은 외면하는 절멸만이 있을 뿐이다. 그릇된 믿음과 정치적인 목적 아래, 1980년의 광주 5∙18 민주화 운동과 1975년부터 1987년까지의 형제복지원 사건과 같은 절멸의 역사는 반복되어 왔다. 이는 오랜 시간에 걸쳐 천천히 이루어진다. 아무리 강인한 사람이라도 무력함을 겪고 포기하고 싶을 만큼의 오랜 시간 동안 말이다. 현대에는 지금 당장의 죽음과 예고된 죽음이 혼합된 절멸의 사례가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져 나온다. 사전예방이 가능했던 일용직 노동자들의 죽음에 대해 탄식만 내놓는 ‘그들’처럼. 기본적인 인권인 이동권을 보장받지 못하는 장애인들을 보고도 장애인들의 시위로 인해 열차가 지연된다는 메시지만 반복하는 ‘그들’처럼. 출생율 하락과 노키즈존 찬성을 함께 외치는 ‘그들’처럼. 자신이 여성혐오자이기 때문에 피해자를 죽였지만 낯부끄러운 핑계를 대며 여성을 매일같이 살해하는 ‘그들’처럼. 피해자보다 ‘그들’의 편에 서서 관용을 베푸는 ‘그들’처럼. 실질적이고도 구체적인 대책을 강구하기는 커녕 방조하고 목도하는 ‘그들’처럼.

아마도 인류가 존재하는 한 절멸은 반복될 것이다. 하지만 그 반복을 줄일 수는 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답은 간단하다. 인간다움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아무리 인간다움을 포기한 자들의 삶이 지속된다 하여도, 그들의 삶이 더 물질적으로 사회적으로 풍요로워 보여도, 그들의 삶은 이미 죽음으로 가득하다. 죽음의 삶을 연명하는 이들로 인해 인간답게 살기 위해 성찰하고 노력하는 우리의 삶을 멈출 수는 없다.

무섭지 않았어. 아니, 숨이 쉬어지지 않을 만큼 행복했어. (…) 심장이 쪼개질 것같이 격렬하고 기이한 기쁨 속에서 생각했어. 너와 하기로 한 일을 이제 시작할 수 있겠다고. (p.318)

여전히 사랑을 행하며 살아가기 어려운 세상이지만 그럼에도 사랑을 행하는 사람이 이긴다. 그렇게 생각하고 다짐하며 살아가는 인생이란 무엇일지 끊임없이 고뇌하고 실천하는 사람이 사람으로서 존재한다. 사랑이 개개인과 사회를 나은 방향으로 이끌어 감을 알고 있지만, 사랑을 행하는 자들을 낮추려 애쓰는 자들이 많다. ‘요즘 세상이 살기 힘들다’는 말로 저 사실을 합리화할 수 없다. 그럼에도 사랑을 행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그 사람들로 인해 절멸의 역사를 기억하고 반복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절멸의 역사를 기억하고 사랑을 행하는 사람이 되도록 애써야 한다. 고통스럽겠지만 그것이 인간다움과 작별하지 않는 법이므로.

우수 이*근 지역주민 도서: 천 개의 파랑
독후감: 한 움큼의 하늘은 파랗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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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은 산과 가까워 어둠은 이르게 내려앉아 몸을 웅크렸다. 그 날은 어머니가 마구간 앞 조그만 상 위에 찬물을 담은 흰 사발을 두었다. 상 위 촛불이 흔들거려, 주변이 빛과 어둠으로 일렁이며 춤을 추었다. 흰 사발을 마주한 채 어머니는 합장을 하며,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어미 소가 새끼를 출산하는 날이었다. 새벽, 어미 소가 허연 입김을 더 가쁘게 뱉어낼 때 궁둥이 쪽에 검은 발 두 쪽이 나오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당황한 낯빛으로 옆집에 사는 당숙을 급히 불러왔다. 어른들이 소에 달라붙어 비죽 나왔던 발을 다시 집어넣고 배를 만지기를 여러 차례 했을 때 새끼 소의 대가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제야 어른들은 허연 입김을 길게 뱉어냈다. 어미 소는 온몸이 젖은 새끼를 연신 혀로 핥았다. 갓 태어난 새끼는 부러지지 않는 것이 신기할 정도의 가는 다리로 몸을 지탱하다 넘어지길 반복했다. 어머니는 흰 사발의 물을 향해 연신 고맙다며 손을 비비고 머릴 조아렸다. 그날 아침 어머니는 평소보다 더 푹 삶은 소죽 위에 넘칠 만큼 사료를 듬뿍 뿌렸다. 어미 소의 검은 눈은 촉촉하게 젖어, 우물처럼 깊어 보였다.

몇 개월 후 마구간 앞에 트럭 한 대가 정차했다. 때묻은 시퍼런 지폐 뭉치를 아버지께 건넨 트럭 주인은 새끼 소의 고삐를 끌어당겼다. 조금 두꺼워진 다리가 된 송아지는 네 다리를 뒤로 뉘어 무게 중심을 뒤로 기울여 버텼다. 그러나 힘의 차이로 차로 질질 끌려갔다. 어미 소는 내가 들어본 가장 처연한 소리로, 가장 오래 울었다. 사흘 정도 울다가 소는 울음을 그쳤다. 재작년에 겪었던 일이고 내년이면 다시 겪을 일일 것이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먼 산을 바라보는 소의 눈빛이 공허해 그 눈이 눈물의 우물 같았다. 아버지께 건네진 그 지폐 뭉치의 일부는 내 학비와 생활비가 되었을 것이다. 꼴깍 삼킨 침이 쌉싸름했다. 어미 소는 코뚜레를 풀고 너른 풀밭으로 가, 어린 소와 한가로이 풀을 뜯는 삶을 바라지 않았을까. <천개의 파랑> 속 ‘투데이’를 보며, 이 때의 소의 눈망울을 떠올렸다.

<천 개의 파랑>에 등장하는 ‘투데이’는 어린 경주마이다. 검고 윤기 나는 갈기가 아름답고 뛰는 것을 무엇보다 행복해하는 말로, 매우 빨리 달릴 수 있어서 주인에게 거액의 돈을 벌게 해 준다. 그러나 빨리 달리는 그 뛰어난 능력 때문에 짧은 기간에 혹사당한 투데이는 연골이 닳아 걷는 것에도 통증을 느끼는 몸이 된다. 이대로는 투데이가 견딜 수 없음을 안 콜리는 경기 도중 스스로 투데이 위에서 땅으로 떨어짐으로써, 투데이의 죽음을 향한 질주를 멈춰 세운다.

콜리는 말의 질주에 방해되지 않게끔 작은 키 및 가벼운 무게로 만들어진 휴머노이드 로봇 기수이다. 콜리는 실수에 의해 기수용 소프트웨어 칩이 아닌 학습이 가능한 소프트웨어 칩이 장착된, 일종의 돌연변이 기수라 다른 휴머노이드 기수들과는 다른 말과 행동을 한다. 콜리는 투데이를 위해 스스로 낙마하여, 투데이의 연골이 완전히 부서지는 것을 늦추었지만, 그 선택으로 자신의 하체는 부서진다. 그런 콜리를 연재가 수리한다. 휴머노이드 로봇 전문가인 연재는 몇 마디 대화에서 콜리의 특이함을 느끼고는 학급 친구 지수의 도움을 받아 콜리의 하체를 성공적으로 수리한다.

연재의 언니인 은혜는 아픈 투데이를 보러 하루도 빠지지 않고 경마장에 들른다. 가장 빠른 다리를 지녔으나 지금은 어디에도 갈 수 없이 좁은 벽 속에 갇힌 투데이를, 은혜는 어떤 눈으로 바라보았을까? 7살 때부터 소아마비로 인해 두 다리를 쓸 수 없는 삶을 살았고, 휠체어로 어디든 갈 수 있게 되었으나, 세계는 휠체어에 맞게 조각되지 않았기에 어디로도 편히 갈 수 없었던 은혜였다. 은혜는 투데이를 또 다른 자기 자신이라 생각지 않았을까? 더 이상 경마 경주를 할 수 없는 몸이 된 투데이는 안락사될 상황에 처한다. 그것은 결코 투데이가 바라는 ‘안락’한 죽음일 수 없기에 은혜는 투데이를 구할 방안을 모색한다. 은혜는 연재, 콜리와 함께 투데이의 경마 출전권을 얻어낸 후 느리게 트랙을 돌 계획을 세운다. 경마 관리자는 굳이 한물간 경주마의 출전권을 얻으려는 은혜 무리를 이해하지 못한다. 뛰지 못하는 말이 겪게 될 운명은 그에게는 관심 밖이었던 것이다. 기자인 은혜의 사촌 오빠 서진의 도움으로 결국 출전권의 관리자 승인을 얻는 데 성공한다. 서진 외에도 수의사 복희, 매표소 직원 다영, 마방 관리자 민주, 연재가 아르바이트했던 편의점의 점장 등 많은 이들의 도움으로 은혜의 계획은 순조롭게 진행된다.

이처럼 이 소설 속에는 많은 이들이 등장하여 서로 도움을 주고받으며 함께 성장해 간다. 이들 각각은 다른 이들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 걸까? 존재는 각자의 시간을 어떻게 건너는 것인가? 연재와 은혜의 엄마 보경은 로봇을 꺼려하고 두려워하였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콜리와 대화가 잘 통하는 벗이 된다.

그렇다면 인간은 함께 있지만 모두 같은 시간을 사는 건 아니네요. 같은 시대를 살고 있을 뿐 모두가 섞일 수 없는 각자의 시간을 보내고 있네요. 맞나요? 당신의 시간은 어떻게 흘러가고 있나요?”

내 시간은 멈춰 있어.”

왜요?”

흐르게 하는 법을 잊었어.”

보경은 남편인 소방관이 죽었던 그 시간에 갇힌 듯 응어리진 상처를 간직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아주 천천히 움직여야겠네요.…… 행복만이 그리움을 이길 수 있다고 했잖아요. 아주 느리게 하루의 행복을 쌓아가다 보면 현재의 시간이, 언젠가 멈춘 시간을 아주 천천히 흐르게 할 거예요.”

진심을 내보인 대화를 하면서 보경에게 두려움과 공포를 주었던 콜리는 보경에게로 건너온다. 보경의 시간은 다시 흐르게 된다.

연재는 소아마비인 언니가 부모님의 우선 순위가 되면서, 언니를 제 운명의 짐처럼 여기며, 타인과 가까워지는 것을 꺼린다. 그러다가 언니인 은혜, 엄마인 보경의 삶과 마음을 이해하면서, 또 지수의 마음을 공감하면서, 존재의 경계에 쌓아두었던 담을 서서히 허물기 시작한다. 지수는 연재를 로봇 대회에 상을 받게 해줄 팀으로서만 생각한 것이 아니었다. 그와 친해지기 위해 적극적으로 다가가, 진심으로 연재를 이해하려 애썼기에 둘 사이의 높았던 경계의 벽을 넘어 서로 진정한 친구가 된다. 보경은 처음엔 콜리를 두려워하였으나 콜리를 존중하는 태도로 대하며 진심을 교류하였기에 콜리로부터 위안을 얻는다. 아픈 몸이지만 경마에 출전했을 때 투데이는 달리면서 행복을 느낀다. 콜리는 투데이의 행복을 감지한다. 콜리는 말이 아니고, 생명체도 아니기에 투데이의 행복을 느낄 수 없어야 한다. 하지만 투데이가 행복을 느낄 때의 떨림의 진동을 콜리는 감지하여 그것을 ‘행복’이라 인지한다. 콜리의 관심과 이해는 생명과 비생명의 경계마저 뛰어넘는다. 콜리는 투데이가 닳은 연골에서 오는 고통에 주저앉기보다 더 뛰고 싶어함을 짐작하고, 무거운 몸의 자신이 투데이가 달리는데 방해되지 않도록 두 번째로 낙마를 선택한다. 투데이를 살리기 위해 애쓰는 과정에서, 은혜는 두렵기만 하던 세계에 맞설 수 있는 강건한 힘을 얻는다. 이처럼 인간과 인간, 그리고 인간이 아닌 존재와의 관계에서도 진정한 관계는 서로를 어루만지며, 서로 의지하고 지탱하게 만든다.

한 존재가 다른 존재를 이익 등을 위한 수단으로만 인지할 때는 존재 사이의 경계를 건널 수 없다. 수단으로 대하지 않고 존재 그 자체를 목적으로 받아들이며, 그에게 다가가 이해하고 공감하려 할 때, 존재의 경계를 가로질러 진정한 관계를 맺을 수 있다. 경마 관리자에게 투데이는 돈을 벌어다 주는 도구일 뿐이다. 그에게는 투데이 및 다른 경주마들의 본연의 색은 보이지 않는다. 그에게 경주마는 그저 돈을 잘 버는 것과 잘 못 보는 것의 구분으로서만 의미를 지닐 뿐이다. 그의 사고 방식은 더 많은 돈을 벌게 해 줄지는 몰라도 그 자신을 고립되고 외로운 영혼으로 만들 것이다.

나의 부모님께도 소는 일정 부분 수단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경마 관리자의 그것과는 결이 다르다. 송아지를 팔아 아버지께 건네진 때묻은 지폐는 공납금 용지를 앞에 두고 한참을 침묵하던 시간을 줄여줄, 수중에 단돈 만 원이 없어서 자식 소풍 전날 오촌 아저씨 집에서 꾼 돈을 갚을, 막차의 구겨진 차표 같은 것이었다. 출산하는 소를 앞에 두고 흰 사발에 정화수를 담았던 어머니는 군대 간 자식이 무탈하길 빌 때도 흰 사발에 정화수였다. 그 순간만큼은 자식이라고 음식을 더 차리지 않았고, 소라고 홀대하지 않았다. 쇠파리와 모기가 들끓는 여름엔 짚과 쑥으로 피운 연기로 그것들을 쫓아주었고, 소가 앓을 땐 소죽을 끓여주곤 했다. 물론 소가 바랐을 삶에 미칠 수 없었겠으나 오랜 세월을 함께한 소를 한 번씩 그윽하게 바라보는 어머니의 눈은 언제부턴가 소를 닮아 있었다. 수단의 성격이 있으나, 소의 존재를 무시하지 않았고 소에 대한 존중을 간직하고 있었다. 이 같은 부모님과 소의 특별한 관계는 개별자인 존재들끼리 어떻게, 어떠한 관계를 맺을 것인가에 대해 생각하게 해주었다.

각각의 존재는 경계를 가짐으로써 개별자로 존립한다. 즉 존재에게 경계가 있는 것은 필연적이다. 그러나 어느 존재도 오로지 홀로 자족적일 수는 없다. 존재는 다른 존재와 함께 함으로써 의미를 가진다. 콜리는 여러 타자와의 경계를 넘으며, 두 번이나 투데이를 위해 자신의 희생을 택한다. 그럼으로써 그 어느 로봇과도 다른 단독자로 선 로봇이 된다. 콜리는 낙마하는 3초 동안 맑은 하늘을 본다. 파랑으로 빛나는 하늘을. 존재는 경계가 없는 덩어리가 아니라 개별자이므로 많은 존재는 하나의 파랑이 아니라 천 개의 파란 점같이 개별의 모습을 띨 것이다. 그 천 개의 파랑은 따로따로 고립된 것이 아니다. 같게 또 다르게 함께 어울린다. 하늘을 검지와 엄지로 잡아 땅에서 펼치면 파랑을 찾을 수 없다. 물 분자 하나에서 분수를 볼 수 없듯이 파란 하늘은 개별로서는 이룰 수 없는 것이다. 파란 하늘은 무수한 작은 하늘 조각의 맞잡은 손에 의해 파랑을 이뤄내는 것이다. 희미한 하늘의 조각 같은 콜리, 은혜, 보경, 연재, 지수, 민주, 복희, 서진, 다영, 점장이라는 희미한 존재들이, 연대함으로써 투데이가 새 생명을 얻고, 혹사당하는 경주마들의 실태가 조명되는 결과를 만들어낸다. 개별의 존재가 타자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타자의 섬으로 건너가 어울림으로써 맑고 파란 하늘을 이룬 것이다. 고립(孤立)이 개인을 실존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타자의 손을 잡고 연립(聯立)함으로써 스스로가 존립(存立)될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존재는 그러한 것이다.

우수 홍*전 한의학전문대학원 한의학과 도서: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독후감: 잃어버린 다정함을 진화론에게 돌려준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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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론’이나 ‘종의 기원’은 인류를 신을 배제한 채 설명하며, 현대 과학의 상징과도 같은 것이 되었고,「종의 기원」이 출판된 이래로 진화론은 인간을 이해하는 가장 일반적인 수단이 되었다. 현대 사회에서 진화론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 없으며, 서로의 행동을 진화라는 잣대를 통해 설명하고자 한다. 그만큼 진화론의 탄생은 그 사회의 패러다임을 바꿀 만한 혁명적인 일이었으며, 그로 인해 우리는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틀을 얻게 되었다.

그렇다면 진화론에 다정함이라는 수식어를 붙일 수 있을까? 적자생존, 진화, 자연선택이라는 논리로 관통되는 다윈의 철학은 얼핏 보면 다정함이나 따뜻함과는 거리가 있으며, 오히려 악용될 수 있는 여지가 다분하다. ‘진화’라는 단어는 생물이 열등에서 우월로 나아간다는 오해를 불러 일으키며, ‘적자생존’이나 ‘자연선택’ 역시 우월한 존재가 살아남고 선택받는다는 점에서 종의 위계를 암시하고 있다. 이러한 논리들은 결국 열등하고 ‘부적합한’ 사람들의 생식 능력을 빼앗아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우생학적 논리로 이어졌고, 그렇게 진화론은 수많은 열등한 사람들을 살해하는 살상무기가 되었다.

이처럼 다윈의 철학은 세상을 ‘적합한’ 사람들로 동질화하는 일에 쉬이 이용되어 왔다. 하지만 이는 진화론을 완전히 오해하는 일이다. 진화는 기본적으로 다양성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이다. 진화를 가져오는 원동력은 다양성 속에서 싹튼 수많은 돌연변이이며, 그 속에서 피어난 작은 차이들이 모여 우리는 낯선 환경에 적응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 그렇기에 다윈의 종의 기원은 동질성과는 대척점에 놓이는 것이다. 적자생존이나 자연선택 모두, 이를 뒷받침하는 다채롭고 풍부한 유전자풀의 존재를 전제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또한 진화를 열등에서 우월로 나아가는 단선적인 것으로 설명할 수도 없다. 진화는 세상에 가장 똑똑하거나 힘이 센 종만을 남기기 위한 선별 과정이 아니라, 그저 그 당시에 생겨난 변화에 가장 빠르게 적응한 종이 살아남는 것을 설명하는 이론일 뿐이다. 진화는 어떠한 목적도 가지고 있지 않으며, 그저 운이 좋은 개체가 생존할 수 있을 뿐이다.

데이비드 스타 조던은 어린 시절 다윈의 이론에 영향을 받았고, 자연스레 생명체 사이에는 계급이 있다는 사다리 이론을 믿게 된다. 그에 따라 우생학을 열렬히 지지했으며, 미국에서 우생학이 합법화되는 데에도 기여했다. 실제로 그 당시 생겨난 법이 사라지지 않고 남아 불과 십년 전에도 교도소의 여성들이 자기도 모르는 새 불임화 수술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다윈은 차별의 근거를 마련하고 자연에 위계질서를 부여하고자 한 것이 결코 아니었다. 생명체를 계급화하는 일은 무척이나 편리하지만, 다윈은 편리한 선 너머에 있는, 하나의 생명체라는 복잡하면서도 거대한 세계를 인식하는 것의 필요성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 책의 제목인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곧 이 책의 논리를 관통한다. 조던은 몇십년을 물고기 연구에 바쳤음에도,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았다. 범주는 세상을 인식하는 편리한 수단이지만 동시에 판단을 흐리게 만든다. 우리는 물 속에 산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너무나도 많은 물고기들을 ‘어류’라는 하나의 범주 안에 넣어버렸고, 그 결과 개개의 물고기들은 범주 속에 가둬진 채 상실되었다. 폐어와 연어, 그리고 소를 비교할 때 우리는 그저 물 속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폐어와 연어를 하나로 묶고, 폐어와 소의 관계는 어떠한지 고민하지 않는다. 하지만 폐어를 해부해보면 연어와는 달리 폐가 있기에, 소와 더 유사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결국, 범주화는 공통된 특성을 바탕으로 또 다른 대상을 예측하고 이해하기에 편리한 수단이지만, 동시에 대상을 지나치게 쉽게 판단하고 예측하게 만든다는 문제점을 안고 있는 것이다.

범주화는 차별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 차별의 씨앗은 언제나 범주화이다. 예를 들어, 인종차별의 경우 특정 인종이라는 이유로, 개개인의 개별성을 지우고 인종만으로 사람을 판단해 어떠한 특권이나 일상 속에서 그를 쉽게 배제한다. 물론, 모든 범주화가 차별로 이어지는 것도 아니며, 범주화는 이전의 경험을 바탕으로 대상을 신속하게 판단할 수 있도록 하는 유용한 방식이다. 하지만 범주화의 대상은 사고할 수 없는 존재나 일반적인 개념이어야지, 결코 사람이어서는 안 된다. 같은 범주 안에 있다고 해서 모두 같은 사람이 아니며, 사람에 대한 일반화는 편견을 낳고, 이는 차별을 합리적인 사고인 것처럼 포장하는 포장지가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알고리즘이 아니고 인간이기에, 특성들을 환원적으로 분석하고 공통점을 찾아내 취합하는 절차 없이, 그저 한 명 한 명의 사람으로 서로를 이해해야 한다. 사람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생명체를 이해하는 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우주에서 보면 하나의 티끌에 불과할지라도, 모든 생명체는 서로에게 다정한 주고받음이 되며 인간이 아닌 다른 생명체일지라도 함부로 그들에 대해 다 이해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니까 말이다.

그러한 점에서, 이 책은 믿음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믿는다’는 말에는 당연하게도 근거가 필요하다. 종교는 가장 흔히 ‘믿는다‘의 목적어로 쓰이곤 하는데, 그마저도 무턱대고 신을 믿는 것이 아니라 나름의 근거와 체계가 있으며, 그렇지 않다면 사이비 종교가 된다. 그렇지만 데이비드의 믿음은 달랐다. 자신의 믿음에 대한 어떠한 근거도 없이, 그저 믿기로 마음먹은 본인의 생각이 그 자체로 근거가 되었다. 작가는 데이비드가 “아무 약속도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서 희망을 품는 비결, 가장 암울한 날에도 앞으로 나아가는 비결, 신앙 없이도 믿음을 갖는 비결을 알려주진 않을까?”라는 기대를 갖고 그를 탐구하기 시작했었다. 개인적으로 이 문구가 무척 마음에 들었는데, 어떤 것을 믿기 위해서 신이나 거창한 세계관을 상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 새롭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믿는다’는 것은 ‘사실이다’와는 다른 말이기 때문에 반드시 설득의 절차가 필요하다. 참과 거짓의 영역이 아니라 나의 세계에 그것을 통합시킬 것인지를 결정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근거 없는 믿음은 위험하며, 잘못된 근거는 그보다 더 위험하다. 다윈의 진화론을 오해한 우리는 믿음에 대한 잘못된 근거를 제공하였다. 진화론에게서 다정함을 빼앗고, 세상을 우열로 나누었으며, 세상을 풍요롭게 만드는 개성을 ‘열등’이라고 이름 붙였다. 그러나 우리는 진화론으로부터 빼앗아간 다정함을 다시 돌려주어야 한다. 우리는 진화론을 통해 서로 공감하고 소통하며, 화합해야 한다. 서로를 범주화하지 않고 그 자체로 소중한 존재로 바라보아야 한다. 진화론이 가진 다정함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모든 존재는 그저 존재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세상을 복잡하고 신비로운 것으로 만들기 때문에, 그 자체로 소중해진다. 세상에 완전히 똑같은 개체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진화론적으로 우리 모두는 귀하다. 우리 모두는 자기만의 독특한 이름을 가지고 있고, 서로 다른 미소를 가졌다. 우리는 같은 학교에서 똑같은 전공을 가지고, 같은 강의실에서 수업을 들을지라도 각자 다양한 꿈과 미래를 가진다. 그리고 이러한 차이들이 모여, 서로 상호작용하며 세상을 더 크고 아름답게 만들 것이다. 이렇게 태어난 다양성은 또 다른 다양성을 낳는다.

결국 진화론이란, 우리가 가진 잠재성에 주목하는 학문이다. 각각의 생명체들은 각기 다른 잠재력을 가지고 있기에 세상은 더 다양해져야 하고, 우리는 서로 달라져야 하며, 서로의 진가를 알아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 시작은 진화론에 대한 오해를 해소하고, 우리에게 씌워진 범주화를 탈피하며, 진화론에게 다정함을 돌려주는 일이어야만 할 것이다.

우수 조*서 교육학과 도서: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
독후감: 너무 오랫동안 베스트셀러이고 싶었다, 그러지 않아도 됐음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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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롬을 처음 만난 건, 작년 가을이었다. 자유로움에 대해 한창 고민을 할 시기였는데, 때마침 독서모임에서 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읽게 되었던 것이었다. 그때 처음 마주한 프롬의 목소리는 마치 할아버지의 목소리처럼 느껴졌다. 노곤하게 들려오는 낮은 목소리, 그렇지만 결코 가늘지 않은. 이후 프롬의 책을 찾아다니며 읽었다. 일 년 사이 읽은 프롬의 책만 벌써 다섯 권째라니, 이 정도면 명예 손녀딸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프롬의 책을 읽을 때면 나의 삶을 스캐너로 스캔하는 기분이 든다. 평소 감추고 싶었던 나의 모습들까지 고스란히 드러나는 스캐너 안에서 나는 늘 부끄러워하지만, 평소엔 잘 들여다보지 않는 나의 부족한 부분을 볼 기회를 놓칠 수 없다는 듯, 붉어진 얼굴로 그 시간을 유유히 즐기기도 한다. 이 책도 역시 그랬다. 프롬의 다른 책들과 다름없이 나의 시간들을 돌아보게 해주었다. 다른 책들과 조금 다른 점이 있었다면, 실존적인 측면의 이야기가 조금 더 많았다는 것이었다. 다른 책에서는 평소 프롬이 정답을 하나로 두고 이야기하는 것을 멀리하는 만큼, 급하지 않은 속도로, 어쩌면 손에 잡히지 않을 것 같은 이야기들을 전하는 편이었는데,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에서는 – 다른 사람의 손으로 엮인 책이라 그런지는 몰라도- 조금 더 가까이에서, 내 삶과 더 가까운 이야기를 해주는 듯 느껴졌다. 다른 책과 이 책 중 무엇이 더 좋다 말하긴 어렵지만, 지금 이 순간 내게 더 와닿은 책은 이 책이었던 것 같다.​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에서는 ‘삶’에 초점을 두어 이야기를 하고 있다. 다른 동물의 삶이 아니라 ‘인간의 삶’에 대해 이야기 한다는 점에서 현대 사회의 사람들이 어떤 ‘존재’로서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그리고 그 삶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는지에 특히 주목하여 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이야기가 나오지만 가장 가슴에 사무친 부분을 고르라면, 행복을 성취해내기 위해 스스로를 상품으로 전락시켜 끊임없이 소비하려 하는 현대 사회의 인간들에게 프롬이 호통하는 부분을 고르고 싶다.

나는 꽤 오랜 시간 ‘괜찮은 사람’이고 싶었다. 괜찮은 사람이 아니라면 최소한 ‘점차 괜찮아지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늘 이리저리 바쁘게 뛰어다녔다. 고작 한 달 반이 지난 이번 학기에만 하더라도 학업에 더불어 두 개의 독서 모임과 두 개의 인문학 모임, 단대 기자단 활동과 영어 과외 아르바이트를 병행했고, 이러한 규칙적인 일정 외에도 혼자 불쑥 여행을 떠나거나 뮤지컬이나 연극을 보는 등 점점 더 나은 사람, 점차 반짝이는 사람이 되고자 끊임없이 노력했다. 자연스럽게도 사람을 만날 때마다 ‘너처럼 열심히 사는 사람을 처음 본다.’라는 말을 쉽게 들었고, 날 오래 봐왔던 사람들로부터는 마치 지금 이 시기가 ‘나의 전성기’ 같이 느껴진다는 말도 들었다. 내가 생각해도 정말 그래보였다. 내 삶의 전성기가 있다면 정말 딱 지금인 것만 같이 느껴졌다. 찬란하게 빛나는, 빠르게 성장하는 전성기. 내가 나의 삶을 써내려가는 작가라고 생각한다면, 내 삶이라는 제목의 책이 베스트셀러가 된 시기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난 이런 내 삶을 온힘을 다해 사랑하고 있다고 자신했다.

그렇게 정말 ‘괜찮은 사람’이 된 것만 같다는 생각에, 그 기쁨에 잔뜩 빠져 내 삶을 사랑하던 -사실은 사랑한다 ‘생각했을 뿐’이었던- 어느 날, 해야 할 일들이 겹겹이 쌓여 날 짓누르고 있음을 발견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시험 기간을 앞두고 있었고, 벌여놓은 일들 -날 더 괜찮은 사람으로 만들어 준다고 믿었던- 이 처리되길 기다리고 있었다. 지극히 평범한 인간으로서 육체적·정신적 에너지는 한정적인데, 이 많은 일을 다 해내려 하다 보니 마주한 일들에 하나둘씩 구멍이 생기기 시작했다. 독서모임에서 읽기로 한 책을 다 읽지 못했고, 발표 준비를 하느라 밤을 새우는 날이 반복되면서 수면 패턴이 망가졌으며, 사나흘에 한 번꼴로 비릿한 피 냄새와 함께 코피가 찾아와 주르륵 흐르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자기혐오와 검열이 시작되었다. 왜 나는 다 해내지 못하는가, 하고. 왜 나는 일을 저질러놓고 제대로 책임지지 못하느냐고. 왜 나는 이렇게 부족하냐고. 도저히 날 사랑할 수 없었다. 이렇게 부족한 날 어떻게 사랑할 수 있나 싶었다. 그런데 이러한 자기혐오와 검열보다 날 더 괴롭게 한 것은, 이러한 나를 향한 ‘온전하지 못한 사랑’이 생각해보면 일정 주기로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마치 도돌이표 같았다.

꾸준히 써온 일기장을 열어보니 지난 학기에도, 작년 이맘때에도, 열심히, ‘괜찮은 사람’이 되기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노력했던 나는 늘 어느 순간 갑자기 무너져 내려왔다는 걸 알게 되었다. 늘 나의 한계를 마주하고 힘들어했다. 그렇다 보니 이번에도 ‘역시’ 무너져 내린 난, 1년 뒤에도, 3년 뒤에도 내가 오선 위 도돌이표처럼 반복되는 삶을 그리고 있으면 어떡하나 하는 불안에 잠겨 더욱 일어나기 힘들었다. 찬란한 기쁨과 성취의 멜로디 뒤에 처참히 무너지는 실패의 멜로디가 계속 찾아올 거라 생각하니, 내가 여태껏 이뤄냈던 것들, 내가 삶을 사랑한다 믿었던 시간들은 머릿속에서 싹 사라지고 앞으로 내가 또 마주하게 될 어두운 시기만 미리 걱정되어 온몸이 뜨거워졌다가 차가워지기를 반복했다. 이러다 보면 어느 순간 내가 내 삶을 평생 사랑할 수 없을 것 같다 느끼는 순간이 올 것 같아서 무서웠다.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의 프롬은 이런 내게 다가와, 내가 하고 있다고 믿는 ‘삶에 대한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고 낮고 큰 목소리로 말했다. 스스로를 조금 더 잘 팔리는 ‘괜찮은’ 상품으로, 조금 더 큰 성과를 내는 ‘성능이 좋은’ 기계로 만들면서 이걸 사랑이라 착각하고 있는 것뿐이라고 말이다. 프롬의 책을 읽으면서 내가 상품화했던 나의 모습들이 하나둘씩 머릿속을 스쳐갔다. 여태 내가 사랑의 방식이라 믿고 행했던 많은 행동과 생각들이 사실은 사랑이 아니었을 수 있겠다는, 오히려 억압과 소외였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드니, 나 스스로에게 미안해졌다. 스스로를 사랑할 수 없는, 도돌이표를 걷는 삶이 될 거라 섣불리 판단했던 내가 오만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또 책 8장 <소비하는 인간의 공허함>에서는 인간과 소비 사이의 메커니즘과 그 사이에서 발생하는 공허의 감정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 중에는 ‘소비를 통해 우리는 수동적 인간이 될 뿐만 아니라 종속적인 인간이 된다. 불안해지는 인간은 소비한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나는 이 문장에서 프롬이 이야기 하는 ‘소비’가 꼭 물질적인 것에만 국한되어있는 내용은 아니라고 느꼈다. 즉 내가 나를 괜찮은 사람으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에 ‘선택’한다고 생각했던 많은 ‘경험’들도 사실은 불안으로부터 비롯된 ‘소비’로서 선택했던 것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소비는 사실 능동적 선택이 아니라 불안의 감정에 종속된 수동적인 선택이라는 점에서. 나를 또 다시 불안의 늪으로 넣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도 이어졌다. 다시 말해, 불안을 탈피하기 위해 괜찮은 사람이고자 노력하며 경험들을 소비했던 게 날 또 다른 불안에 빠트렸음을 알아채게 되었다.

 책을 읽은 뒤 스스로에 대한 죄책감과 후회에 빠져 허우적대는 내게, 프롬의 엄격하지만 또 다정한 목소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 잘못만은 아니다’는 메시지도 전달한다. 책의 7장 <기본 소득으로 자유를 얻으려면>에서는 오랜 시간동안 일하지 않는 자여, 먹지도 마라!’의 원칙이 인간을 지배해왔음을 이야기하고 있고, 책의 8장에서는 자본주의의 도래로 출세하지 못할 것이라는 불안, (중략) 남들이 이룬 것을 나도 이루지 못하면 배우자와 친구들이 패배자취급을 할지 모른다는 불안이 만연한 것으로부터 인간이 불안과 소외감을 느끼게 되었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러한 내용들은 어쩌면 현대 사회의 인간이 스스로를 도구화하는 흐름은 지극히 자연스러우며, 그 흐름 자체에 그저 흘러왔음에 있어서 스스로를 탓하기만 할 필요는 없다고 말하는 것처럼 내게 들렸다. 물론 이제는 내가 삶에 대한 사랑의 방식이라 믿었던 끝없는 스스로에 대한 상품화가 잘못되었음을 인식했기에, 조금은 다른 삶을 살 필요는 있겠지만 말이다.

나의 현실을 인식한 뒤 궁극적으로 스스로의 삶을 제대로 사랑하는 방법이 무엇인지 애타게 찾던 중, 프롬의 책의 서두에서 다음의 문장을 다시금 읽고 마음에 새기게 된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행복이 아니라 살아 있는 것이다.’ (책 1장 중) 삶을 사는 것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여태까지 나를 상품화 하면서까지 열심히 쫓았던 ‘행복’이 아니라 ‘살아있음’ 그 자체임을 피력하는 프롬의 말을 듣는 순간, 속에서 끓어오르던 불안이 고요해짐을 느꼈다. 내가 내 삶을 불행에 휩싸인 도돌이표라 느꼈던 것은, 삶을 제대로 사랑해 본 적이 없어서였다. 늘 행복만을 쫓는 것이 삶의 진정한 의미가 아님을 마주하는 순간 내가 믿어왔던 세상이 와장창 깨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그 깨짐이 슬프지만은 않았다. 오히려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갈 길이 열린 듯 느껴져 홀가분하고 설레기도 했다.

행복하지 않은 삶의 순간에 처참히 무너진 뒤, 일어날 힘이 없던 순간에 읽은 이 책 덕분에, 베스트셀러이고 싶었던, 베스트셀러가 되기 위해 노력하던 내 삶이 썩 ‘사랑스러운 삶’은 아니었음을 마주하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삶을 향한 사랑이라 불렀던 감정은 ‘사랑이고 싶었던’ 감정에 불과했으며, 사회가 부여한 상품적 가치로서의 인간에 부합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었음도 깨닫게 되었다. 앞으로도 어느 순간 내가 브레이크가 고장난 자동차처럼 행복이라는 공허한 도착지를 향해 무작정 달린다고 느껴질 때면 내가 달리는 길이 과연 삶을 사랑하는 길인지를, 그리고 내가 능동적으로 선택한 길이 맞는지를 잠시 멈춰 생각해보게 될 것 같다.

책에 나오는 책을 읽고서도 내가 똑같은 사람이라면 그 책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거나 내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것이다.’라는 문장을 빌려 이야기를 마무리 하자면, 책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는 참 쓸모 있는 책이었다. 이 책을 읽은 뒤 죽어있는 상품이나 기계로서가 아니라, 살아있는 반짝이는 인간으로서, 삶이 행복하지 않더라도 그 삶 자체를 온전히 사랑하는 사람에 한 걸음 가까워졌으니!

(*이탤릭체로 표현한 부분은 책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에서 인용한 부분이며, 명확한 쪽수 정보가 제공되지 않는 전자책을 구매하여 읽어본 탓에 인용한 문장에 대해 정확한 쪽수를 기재하지 못했음)

장려 문*은 윤리교육과 도서: 작별하지 않는다
독후감: 작별과의 작별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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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문득 이별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눈에 대해서도.

다소 거칠어진 가을바람을 가르며 걷다가, 생각했다. 지나가는 이 바람은 누구의 살갗을 건드려 나에게 왔는지, 그 사람의 행복을 빼앗아 왔는지 아니면 슬픔을 모아 기어이 눈비를 내리게 할지.

자연현상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벚꽃이 피었을 때 들떠서 두근거린다든가 여름밤 매미와 귀뚜라미의 공명 소리에 옛 추억을 떠올리고, 가을 새벽 쌀쌀한 공기에 괜한 울적함을 느끼거나 겨울에 내리는 눈을 보며 또다시 올 한 해를 생각하는 모든 시간들이, 어느 순간 싫어졌다. 감정을 느끼기 두려운 것은 삶에 의한 고통이거나 삶에 대한 사랑일 텐데, 어느 갈피도 잡을 수 없었다. 그러다 책을 읽으며 생각했다. 결국 사랑은 지극한 고통이고, 고통은 영원에 대한 사랑이라고. 그래서, 결국 나는 내 삶을 사랑하고 있다고, 영원처럼 빛나는 삶을 꿈꾸고 있다고.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를 도서관에서 빌려 처음 읽고 너무 깊고 진한 여운이 남아 다른 어떤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사실 그 처음을 읽는데도 몇 번을 멈춰 섰는지 모른다. 한 자리에 눌러앉아 몇 시간을 내리읽다 고개를 들어 창문을 보니, 어느새 바깥이 어둠에 잠겨 있었다. 그때, 눈을 보았다. 경하의 꿈에서 내리던 그 성근 눈이, 내 눈에 비쳤다. 10월에 눈이 올 리가 없지 하루 종일 고민하다, 결국 일과를 끝내고 집 가는 길에 서점에 들러 이 책을 구입했다. 그리고 읽고, 멈추고, 또다시 읽었다. 이 책을 읽는 나를 담은 벽에 비친 그림자가 그날의 이야기를 하는 인선의 그림자와 겹쳐질 때까지, 그리고 책을 읽는 나의 마음이 인선에게 닿을 때까지 읽고 또 읽었다.

책은 경하의 꿈 장면으로부터 시작된다. 눈 내리는 벌판 위 수천 그루의 검은 통나무들과 봉분들과 함께 경하가 서 있다. 그 벌판에 곧 밀물이 밀려와 아래쪽 무덤들이 물에 잠기기 시작한다. 위쪽에 묻힌 뼈만이라도 옮겨야겠다고 생각하지만 어떻게 손 쓸 새 없이 무릎까지 차오른 물을 가르며 달리다 꿈에서 깬다. 경하는 그것이 두 달 전 출간한 책의 내용인 도시의 학살에 대한 꿈이리라고 생각하고, 한때 사진과 다큐멘터리 영화 작업을 하다 어머니를 돌보기 위해 제주로 내려가 목공 일을 하는 친구 인선과 함께 그 꿈을 영상으로 담는 작업을 계획한다. 백 그루가 넘는 검은 나무를 심고 나무에 눈이 쌓인 모습을 두 눈으로 직접 마주해 그 악몽에서 벗어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그 뒤로 몇 해 동안 각자의 힘든 시기를 겪고 겨우 삶을 회복하는 사이 계획은 진전되지 못하고, 그 작업뿐 아니라 둘의 관계 또한 점차 희미해진다.

그러던 어느 겨울, 인선이 목공 작업 중 손가락이 절단되어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는 연락을 받고 급하게 도착한 병원에서 경하가 인선에게 받은 부탁은 제주 집에 혼자 남겨진 새를 돌봐달라는 것. 망설임 끝에 제주행 비행기에 오르지만, 제주는 때마침 거세게 몰아치는 폭설과 강풍에 휩싸여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발작적으로 찾아오는 고질적인 두통과 신경통에 시달리며 인선의 집까지 눈길에 오르고 산을 헤매던 중, 눈더미 속으로 미끄러져 눈과 어둠 속에서 고립된다.

그 이후의 이야기가 실제인지 경하의 무의식 속 환각을 그린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신형철 문학평론가가 이 책을 두고 ‘생사의 경계 혹은 그 너머에 도달하고서야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이만한 고통만이 진실에 이를 자격을 준다는 듯이, 고통에 도달하는 길은 고통뿐이라는 듯이.’라고 표현한 것처럼. 길고 고요한 투쟁의 서사를 읽기 위해서는 현실에 얽힌 복잡한 정념이나 양상으로부터 벗어나야 함을, 초연하고 숙연한 마음으로 바라보아야 함을 함의하고 있는 듯했다. 결국 인선의 집에 도착한 경하는 전혀 손가락을 다치지 않은 인선과 만나고, 고요한 촛불의 능선 아래에서 70여 년 전 제주 4·3사건을 겪은 인선 가족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리고 경하의 꿈에 대한 작업을 이루려던 곳, 인선 아버지의 옛 집터를 바라보는 눈더미 너머에 함께 누워있다가, 점차 쌓이는 눈 속에서 꺼져가는 불꽃과 함께 인선의 형상은 사라진다. 경하의 성냥이 다시 타오르는 것을 보지 못한 채로, 그 고동치는 꽃봉오리를 보지 못한 채로.

제주에서 태어나 부산으로 대학교에 오기 전까지 4·3사건에 대해 어른들이 이야기하는 것을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었다. 학교에서 한국사 시간에 근현대사 흐름의 일부로 잠깐 거치거나, 올해가 4·3사건의 몇 주년이니 어느 행사를 하거나 추념식을 한다는 상투적인 메시지를 들은 것이 다였다. 5·10 남한 단독 총선거 결의에 반대하여 좌익 세력과 일부 제주 주민들이 무장봉기하였고, 이를 미군정과 극우 청년들, 경찰들이 진압한 사건. 제주도, 그 사건의 중심지에서 나고 자랐음에도 고작 이 정도의 겉핥기식 정의 만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매년 4월 3일이 되면 왜인지 모르는 찜찜하고 불편한 마음이 드는 것은 사실이었다. 학교 안에서나 사회 속에서, 어딘가 가라앉고 우울한 분위기와 어정쩡하게 조심하는 언행들 속에서 4·3사건은 우리들 마음속에 다소 거북하고 찝찝한 형상과 느낌을 자아냈다. 제주도민으로서 괜히 그 뜻만은 잊으면 안 될 거 같아 한 번씩 찾아보고는 금세 잊어버리기의 의미 없는 반복. 작가 한강은 이렇듯 지나간 역사에 대한 우리의 무감각하고 냉담한 인식을, 무서울 정도로 강렬하고 솟구치는 감정을 통해 처절히 감각하고 느끼게 한다. 그 감각의 중심에 인선의 부모가 있다. 1948년 제주도에 사는 삼십만 명을 다 죽여서라도 공산화를 막으라는 미군정의 명령과, 이를 실현할 의지와 원한이 장전된 서북청년단과 군경들의 초토화 작전 속에서 그 삶을 견뎌야 했던 인선의 어머니와 아버지가 있다.

열아홉 살에 온 가족을 잃고 슬퍼할 겨를도 없이 십오 년을 형무소에서 보내야 했던 인선의 아버지. 바다 앞 해수욕장에서 총살된 젖먹이 여동생을 찾아다녔다던, 인선의 기억 속에서 고문 후유증으로 손을 떨고 협심증으로 널찍한 돌을 따뜻하게 데워 심장 위에 올리곤 했던 그가 있다. 그리고 그와 동시대에 살았던 인선의 어머니가 있다. 1948년 겨울 국민학교 앞 보리밭에서 사람들이 군경에 의해 대량 학살당했을 때, 죽은 사람들의 얼굴 위에 덮인 피어린 살얼음을 하나씩 걷어내며 엄마 아빠를 찾아다녔던 열세 살의 정심이 그 자리에 있었다. 피로 범벅된 어린 여동생을 업고 친척네 집까지 걸어가, 그렇게 하면 살아날까 자신의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내고 여동생의 입속으로 흘려보낸, 너무나도 어렸던 그녀가 있다. 인선은 어머니가 죽도록 싫었다고 했다. 구부정한 등과 끔찍하게 여린 목소리를 가진 그녀를, 악몽을 안 꾸게 해준다는 미신을 믿고 항상 요 아래 날카로운 실톱을 깔고 잤던 그녀를, 그렇지만 자주 악몽을 꿔서 숨을 죽여 몸서리를 치고, 들고양이처럼 이상한 소리를 내며 흐느껴 울던 그녀를 보고 있노라면 명치에서부터 훅, 하고 뜨거운 게 쉬지 않고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고 인선은 말했다. 내가 4·3 사건을 보며 느끼는 감정과 비슷한 걸까. 아니, 훨씬 그 이상일 거라고 생각했다. 역사를, 그중에서도 참혹하고 서슬 퍼런 과거를 마주하는 것은 굉장히 불편하고 버거운 일이다. 정심은 그 시대를 직접 몸으로 겪은 역사의 산증인이자 역사 그 자체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현재를 버텨내지만 과거를 잊지 못하고, 과거 속에서 현재를 살아간다. 그런 그녀를 옆에 둔 인선에게 그 과거의 아픔이, 고통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고통은 작별하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도, 공간과 반세기를 넘겨도 아픈 기억은 여전히 그들의, 우리의 마음속에 그 흔적을 남긴다.

인선이 정심에 대한 미움을 내려놓기 시작한 것은 형무소에 끌려가 행적을 알 수 없는 오빠를 찾기 위한 정심의 길고 고요한 싸움을 발견하게 된 이후다. 대구형무소에 이감되었다가 진주로 이송되었다는 명부를 구했지만, 찾아간 그곳에 오빠의 흔적은 없었다. 좌익으로 분류되어 검속된 보도연맹 가입자들을 형무소에 더 수용할 공간이 없게 되자, 기존에 있던 수감자들을 당시 폐광된 경산 코발트 광산에서 집단 총살했다. 그곳에서 죽은 사람들만 약 삼천오백 명. 정심은 알고 있었을 것이다. 오빠도 그 광산에서 총살되었음을, 아무 기록과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음을. 그러나 단 일의 희망, 먼지 한 톨 만큼의 가능성만 보일지라도, 정심은 포기하지 않았다. 직접 경북에 가서 신문을 구매해 관련된 모든 기사를 모아 스크랩하고, 대구 합동 위령제에 참가하고, 경북 지구 피학살자 유족회에 가입했다. 2000년대에 들어 광산 탐사가 시작되고, 수천 개의 뼈들이 발견되고, 유해들이 입구까지 차올라 흩어진 모습을 보기까지 정심은 멈추지 않았다. 대구 실종 재소자 제주 유족회를 따라 정기적으로 광산을 방문했다. 그때 정심의 나이가 일흔둘에서 일흔넷. 작별하지 않았다. 아픔을, 기억을 정심은 결코 놓지 않았다. 누구보다 강하게, 그리고 굳세게 정심은 살아 있었다.

결국 정심은 실패했다. 단 한 조각의 뼈도 찾지 못했다. 그리고 그녀가 끝내 무너지는 모습을 인선은 지켜봐야 했다. 밤마다 아이처럼 기어서 문턱을 넘어와 식탁 밑에 숨는 모습을, 짜고 끈끈한 그 손가락을 인선의 입에 물리고 얼굴을 쓰다듬으며 아이처럼 우는 모습을, 인선이 잠드려는 순간 흔들어 깨우며 도와달라고, 구해달라고 애원하다 겨우 잠드는 모습을. 그러다, 마치 밀물 때가 지나치게 긴 이상한 바다처럼, 다시는 바다가 빠져나가지 않는 것처럼, 정심은 깊은 수면 속으로 잠겼다. 끝끝내 사라졌다.

그러나,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마음, 이곳에 잊지 않은 사람을 간절히 생각하는 마음마저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 마음이 그렇게 정심에게서 인선에게로, 인선에게서 우리에게로 왔다. 기억해야 한다. 아픈 상처를 건드려 더 쓴 진물이 나오더라도, 그것이 날카로운 칼이 되어 아픈 곳을 다시 겨누더라도 떠올리고 새겨야 한다. 한강이 소재로 택한 ‘눈’은 과거와 현재를 잇는 매개물이다. 내린 눈은 소멸하지 않는다. 과거 땅에서 녹아 지하수로 흘러 들어가거나 공기 중으로 증발한 눈은 현재 다시 수증기가 되고 구름으로 상승하면서 바람으로, 비로, 눈으로 끝없는 순환을 이루며 우리에게 온다. 정심이 보았던, 그 차가운 얼굴 위에서 녹지 않았던 눈은 경하가 인선의 가족사를 마주했던 제주도에서 세디센 눈보라가 되어 흩날렸다. 마치 그 차갑고 날카로운 속성의 냉기를 경하에게 전하려는 듯이, 그리고 눈과 그 순환이 끊임없이 작용하는 것처럼 자신도 살아 있다고, 포기하지 않았다고 경하에게, 우리에게 말하려는 듯이.

작별하지 않았나. 우리는 그동안 얼마나 많은 것들과 소중한 의미들을 성가시다는 이유로, 떠올리면 아프다는 이유로 작별해왔을까. 그러나 고통은 곧 사랑의 다른 표현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사랑해서, 감정을 쏟아서, 그 감정을 다시 새기는 게 너무나도 아려와서, 보고 싶고 그리워서, 우리는 아프다. 그런데도, 결국 그 사랑에 손을 뻗어 기어이 고통을 견디는 것이 우리가 눈보라를 헤쳐가는 길이라고, 서로의 얼굴에 쌓인 눈을 닦아줄 수 있는 방법이라고 책은 말하는지도 모른다.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역사를 기억해내는 것, 아파하면서도 사랑하는 것, 작별하지 않음을 위하는 것, 작별에 대해 작별하는 것, 그것이 그들을 영원히 살아 있게 하고 우리를 영원히 살게 한다. 내가 삶에서 느낀 고통과 허무함은 삶에 대한 사랑이었다. 마지막 경하의 성냥 속 불꽃이 다시 타오를 때, 세상에서 가장 작은 새처럼 눈이 퍼덕일 때, 삶에 대한 사랑과 경외심을, 그 끈적임을 느꼈다.

지금도 눈이 내리고 있다. 그 눈이 바람으로 왔는지, 비로 왔는지, 햇빛 속 입자로 왔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것이 그들의 삶을, 그들에 대한 기억을 품고 왔다면 가만히 서서 그들을 느끼겠다. 그 아픔을 견디겠다. 어느 늦은 밤, 어딘가에서 부딪히고 온 것처럼 한쪽이 흐트러진 달을 보다가 생각했다. 그들이 왔구나. 그리고 그 순간 봄의 벚꽃이, 여름밤의 재잘대는 울음소리가, 가을 새벽의 쌀쌀한 공기가, 겨울의 소복한 눈이 다시 내게로 스며들어와 생생히 살아 있음을 느꼈다.

그들의 세계와 나는, 과거와 현재는, 결코

작별하지 않는다.

장려 김*민 디자인학과 도서: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독후감:질서’라는 허상 : 겸손한 태도와 세심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하는 책,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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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을까?

다들 어떻게, 무의미와 허무의 유혹을 이겨내고 존재의 무거운 의무를 선택해 짊어지는 걸까?

당신은 왜 죽음이 아닌 삶을 선택해 살아가기로 결정하는가?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과학 전문 기자 룰루 밀러가 170여 년 전 어류 분류학자였던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삶을 따라가는 전기적 성격을 띤 에세이다. 데이비드 스타 조던은 어류를 분류하고 이름 짓는 데에 평생을 바쳤고, 1891년부터 1913년까지는 자신이 쌓아온 명망을 바탕으로 스탠포드 대학의 창립 총장을 지냈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어린 시절부터, 그의 생애 궤적을 따라 점층적으로 흘러간다.

룰루 밀러가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 광적인 어류 분류학자였다는 이야기를 할 때 나에게는 어떤 기대감이 생겼다. 내가 몰랐던 세계를 그는 봤을 테니까, 정량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 것들로 세상의 비밀을 이 책이 알려줄 것 같았기 때문에.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길 위에 이정표가 되어줄 이야기들이 분명히 이 책 속에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페이지를 넘길수록 룰루 밀러의 이야기는 상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자연스러운 변화구처럼 느껴지다가도 어느 순간엔 방향을 종잡을 수 없는 럭비공처럼 느껴질 만큼 룰루 밀러의 이야기는 순간순간 조던의 이야기, 자신의 이야기와 세계의 이야기를 자유자재로 넘나든다. 영웅으로 추앙할 수 있을 것 같았던 데이비드 스타 조던은 사실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서 끔찍한 일을 저지를 수도 있는 사람이며, 자신의 가족에게마저 소홀했던 인물이고, 심지어 열광적인 우생학자였으며 ‘부적합’한 유전자를 제창하며 많은 사람의 삶을 파괴한 악인이었다는 사실로 뻗어나가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룰루 밀러는 ‘어류’가 견고한 진화적 범주가 아니라는 것, 그래서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기까지 이른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마침내 범주화할 수 없는 세계를 짚어 알려주면서 다양성에의 포용을 제안하고, ‘질서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으로 수렴한다.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 어류 분류에 평생을 바쳤던 것으로 서두를 열었던 책의 결론이라곤 믿기지 않을 정도의 이야기다.

그렇다면,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삶은 통째로 무의미했는가. 누구도 그렇게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어떤 부분에선 끔찍하게 일그러져 추악한 삶이지만, 결국 그는 숨 쉬는 동안 끊임없이 세계의 무의미에 저항했고 그것은 170여 년의 시간이 지나 1만 킬로미터 떨어진 지금 여기의 우리가 하고 있는 일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룰루 밀러가 데이비드 스타 조던 삶의 족적을 더듬어가며 그의 삶과 시련에 관해서 이야기할 때, 세상이 조던에게 안겨줬던 절망과 고난은 한 명의 인간이 감내하기에 어려운 일이라고 느꼈다. 여러 시련 속에서도 끈기 있게 자신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조던의 태도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생전의 그는 구부린 등으로 이름표를 바느질했겠지만, 분명 고고하고 꼿꼿하게 허리와 등을 펴 당당하게 걷는 인물이었으리라. 룰루 밀러 또한 그런 그의 태도에 매료되어 자신의 인생에 닥친 파고와 개인적 추락에 대한 해답을 조던에게서 찾고자 했을 것이다.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삶을 가치 있게 만들었던 것은 그가 평생을 매달렸던, 물고기의 목덜미에 이름표를 달아주는 일이 아니었다. 결론적으로 그가 가졌던 학문적 고결함이나 탁월함은 그의 성품에 묻혀 일순간에 생생한 빛을 잃는다.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삶을 가치 있게 만들었던 것은 그를 사랑하고 그의 죽음을 애도했던 사람들, 그의 곁을 지켰던 사람들이었다. 이 사실은 룰루 밀러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이 번잡하고 복잡한 세계, 질서란 허상이고 혼돈이 늘 우리의 머리맡과 발끝에 도사리고 있는 삶 속에서 그녀를 지탱하고 허무의 늪에서 구원한 것은 다름 아닌 사랑이었고 사람이었으니까.

누구에게나 살기로 결심하는 순간이 있다. 세계는 혼돈과 공허의 대결이고, 그런 어수선함 속에서도 심장의 근육으로 온몸에 피를 돌게 하고 허파에 공기를 채워 호흡하기를 반복하며 생을 이어간다는 것은 실로 결심이 필요한 일이다. 당신이 모르던 태고의 시절, 당신은 분명히 살기로 결심했을 것이다. 사람이 살기로 결심할 수 있는 이유는 생의 궁극적인 목적을 찾았기 때문도, 우리가 세상을 온전하게 이해할 수 있기 때문도 아니다. 당신 곁에 따뜻한 숨과 온기를 내어준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 당신의 눈앞에 단 하나의 진실이 있다. 모든 것은 혼돈에 파묻혀 있고, 모든 것은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방향으로만 뻗어나간다는 것. 무구한 시간 속에 찰나로 존재하기 때문에 세상에 어떠한 의미도 없는 존재라면, 그렇다면 우리의 삶은? 무한한 혼돈 아래 나약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 있는가. 룰루 밀러는 과학조차도 ‘진실을 비춰주는 횃불이 아니라, 도중에 파괴도 많이 일으킬 수 있는 무딘 도구’라고 말하고, 단어들을 늘 신중하게 다루는 것’을 요청한다. ‘우리가 세상을 더 오래 검토할수록 세상은 더 이상한 곳으로 밝혀질 것’이라며, ‘부적합하다는 판정을 받은 사람 안에 어머니가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잡초 안에 약이 있을지도 모른다. 당신이 얕잡아봤던 사람 속에 구원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세상을 구획하고 경계 짓는 것은 달리 말해 생각을 구획하고 경계 짓는 일이다. 바다를 호령하고 세상을 줄 세울 수 있다는 오만에서 벗어나, 당신의 존재를 지탱하는 것들에 귀 기울일 것. 편견 없는 눈으로 세상을 입체적으로 바라보기 위해 쉴 새 없이 노력할 것.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는 착각을 깨트리고 그 틈으로 찬란한 가르침을 채워주는 책이었다. 차가운 진리 속에서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와 생각을 일깨워준다.

룰루 밀러가 흔들리던 시절을 지나 마침내 스스로를 받아들이고 인정하게 되던 순간이 마음 깊이 와닿았다. 거대한 진리를 짊어진 이의 모습은 괴롭고 버거워 보일 줄 알았는데, 그녀는 어느 때보다도 자유롭고 평화로워 보였다. 진리는 감내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니까. 오랜 시간 존재의 의무가 무겁게만 느껴졌던 내게 룰루 밀러는 생명이란 어떤 축복이며 나와 당신을 지탱하고 있는 것은 무의미의 바닥이 아닌 맞잡은 손이라고 일러준다.

룰루 밀러는 우리가 세상에 빌린 시간과 생명으로 조금 더 겸손하고 세심하게 세상을 바라볼 수 없을지 묻고, 책을 덮는 순간에는 기꺼이 나 또한 그러한 태도로 살아가겠다 다짐하게 된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것들에 노여워하지 않고, 존재하는 것들을 온전히 포용할 수 있기를. 사랑과 사람으로 서로를 지탱하며 살아가기를.

장려 이*민 경제학부 도서: 천 개의 파랑
독후감: 자유로운 공존을 향한 푸른 질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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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음표.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내 마음속에 떠오른 것은 온점이 아닌 물음표였다. 이는 단지 예상하지 못한 결말 때문만은 아니었다. 평소에 접해 왔던 소설들은 대부분 그 여운을 담아 간직하는 것으로 마무리해 왔다면, <천 개의 파랑>은 마치 탁구를 치듯 그 내용에서 비롯한 여러 가지 가치에 대해 사유(思惟)할 기회를 나에게 되돌려 주었다.

사실 평소 과학 서적을 비교적 자주 접하지는 못했던 터라 다른 책들과는 조금 다른 궁금증을 가지고 독서를 시작하게 되었다. 먼저 비전공자에게는 자칫 생소할 수 있는 분야를 어떻게 풀어나갈지 궁금하였는데, 배경지식이 필요한 내용이 등장하게 되면 이해에 어려움을 느낄 독자들이 분명 존재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과학 기술만을 부각하기보다는 그 기술을 소재로 작가의 철학을 공유하고자 하는 기대심이 있었다. 또 쉽게 의미를 유추하기 힘든 제목도 호기심을 자극했다. 통상적으로 제목이 그 본질을 꿰뚫는 창이라고들 하는데, 이번 경우에는 제목이나 표지만으로는 좀처럼 내용을 종잡을 수 없었기에 더욱 흥미롭게 본작을 파고들 수 있었다.

작중에서 주인공이자 인간의 외형을 지닌 로봇인 휴머노이드 콜리는 경주마 투데이와 보경네 가족을 조우하게 되는데, 로봇이 인간 기수를 대신한다는 대목에서 로봇이 복싱 경기에 출전하는 영화 ‘리얼 스틸’을 떠올릴 수 있었다. 비록 종목은 다를지라도 로봇을 우리 세상의 스포츠에 안착시키고자 하는 시도가 비슷하게 느껴졌다. 또 콜리가 대화를 통해 새로운 단어를 알아 가며 다른 사람과 교감할 때 응용하는 장면에서는 마치 어린아이가 처음 언어를 접하고 학습하며 성장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더욱이 중간중간마다 서술 시점이 바뀌어 등장인물 각각의 내면을 세밀히 엿볼 수 있었기에 이러한 감동은 배로 느낄 수 있었다. 가끔은 마치 내가 실제로 콜리와 대화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나아가 작품을 읽어 가며 점점 확고해진 생각은 이 책을 ‘단순히 과학 소설로 정의하기 어렵다’였다. 좁게는 아픈 동물과 매몰찬 경영인들을 바라보는 수의사 복희의 심리 묘사에서부터 넓게는 콜리가 사람들과 대화하며 형용하는 사회의 어두운 일면까지. 전반적으로 등장인물들의 정서를 강조하고자 하는 작가의 의지를 실감할 수 있었다.

특히, 필자는 작품 속 등장인물들의 서사나 배경이 되는 사회의 모습이 공통적으로 ‘외로움’을 표상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외로움의 개념을 단순히 홀로 있을 때 느끼는 감정에 국한하지 않고, 하나의 사회 구성원으로서 느끼는 존재 가치에 대한 고찰이자 사회적 양상으로 넓혀서 이해하고자 했다. 사실 꾸준히 발전하는 기술, 증가하는 인구 밀집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문화 콘텐츠들 사이에서 어떻게 외로움을 느낄 수 있냐고 반문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발전의 산물을 모두가 향유하지는 못한다는 점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보경네 가족이 바로 이를 방증하는 사례라고 볼 수 있다. <천 개의 파랑>은 대화 능력을 갖춘 인공지능 로봇이 말을 타며, 단순하거나 위험한 직종들 또한 로봇이 대체할 정도로 발전한 사회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보경은 결국 남편을 화마 속에서 잃었고, 은혜는 현시대 휠체어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불편함에 기대어 살아왔으며 연재는 재능이 있음에도 부족한 여건으로 인해 꿈을 포기하고 무기력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시대는 빠르게 변화하여 가는데 이들은 소외되어 외로이 발버둥치는 것이다. 과연 이들이 제대로 된 소속감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고 볼 수 있을까? 투데이의 경우는 어떤가? 주요 등장인물들(투데이도 명백히 자아를 가진 존재이다) 중 유일하게 말을 하지 못하지만, 자유롭게 달릴 때면 그 누구보다 진정한 삶의 의미를 온몸으로, 단적으로 표출한다. 로봇인 콜리가 몸소 느낄 정도의 활기찬 기쁨의 떨림. 하지만 채찍이 등장하고, 기록의 멍에를 짊어지며 투데이는 고요해진다. 함께 ‘호흡’을 나누고 교감하는 상대가 사라지며 외롭게 달리는 것은 더 이상 투데이에게는 기쁨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비단 소설 속 가상 세계의 문제만이 아니다. 현대 사회에서도 우리는 충분히 유사한 요소들을 비추어 볼 수 있는데, 일례로 저자는 은혜를 통해 현대의 장애인들이 가지는 남모를 고충을 지적한다. 장애가 있는 경우 이를 멸시하거나 어떻게든 숨기려 들었던 과거와는 달리, 최근에는 장애를 다룬 드라마나 영화가 큰 인기를 구가할 정도로 시대적인 흐름은 바뀌어 가고 있다. 하지만 아직 우리의 의식은 그에 미치지 못하는 것 같다. 당사자의 의사를 묻지도 않고 휠체어를 무작정 밀어 주거나 물건을 옮기고, 이를 자랑스러워하는 경우들이 종종 보이고 있다. 장애가 없는 사람에게는 함부로 하지 못할 행동들이, 장애인들에게는 소위 ‘배려’나 ‘도움’이라는 명목으로 자행되는 것이다. 이를 보며 ‘폭력적 배려’라는 말을 떠올릴 수 있었는데, 전혀 어울리지 않는 두 단어이지만 작금의 세태를 꼬집는 비판으로는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여기에 심지어는 도심의 미관을 해친다는 이유만으로 시각장애인들의 눈이 되는 점자블록을 제거하거나, 이익 창출을 위해 장애를 희화화하는 영상물을 제작하는 등 대놓고 장애인들을 소외시키는 경우도 존재한다. “몇천만 원을 웃도는 기계 다리 부착 수술보다 더 필요했던 건 인도에 오를 수 있는 완만한 경사로와 대중교통을 누구의 도움 없이도 탈 수 있는 안전함이었다”라는 은혜의 말로 우리는 장애인들에게 진정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그들의 일상을 안전하게 보조하고 똑같은 소속의 구성원으로 대우하는 것. 하지만 대중은 앞에서는 장애인들을 배려하는 척 위선적인 모습을 보이고 뒤에서는 전혀 그들을 이해하려 들지 않는 이중적인 자태를 보인다. 그들은 장애를 개인의 비뚤어진 보람을 충족시키는 수단으로 사용하였으며, 그리고 그 결과로, 장애인들은 그들이 느끼는 불편함마저 도둑맞게 되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야 할까? 필자는 이에 대한 결론을 책의 결말 부분에서 정립할 수 있었다. 결말도 나에게는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는데, 분명 결말을 초반부터 접한 상태로 읽기 시작했음에도 부지불식간에 ‘투데이는 마지막 경주에서 천천히 달렸고 모두가 행복해지는’ 부류의 해피엔딩을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평소 내가 통상적인 소설들의 흔한 결말에 경도되어 있었기도 했고, 은연중에 작품에서 자주 등장하는 “우리는 모두 천천히 달리는 연습을 할 필요가 있다”라는 말을 의식했기 때문인 듯하다.

하지만 여기서 정말로 ‘천천히 달린다’라는 말이 단지 속도만을 의미하는 것일까. 단순히 앞만 보고 서둘러 달리지 말고, 천천히 달리면서 삶의 의미를 반추하여 되찾아 보라는 말은 아닐까? 투데이는 마지막 경주에서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혼자, 그리고 빠른 속도로 질주했지만 우리는 이를 두고 문자 그대로 해석하지 않는다. 콜리의 희생을 통해서 ‘진정한 의미의 살아간다는 것’을 간파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힘입어 투데이는 홀로 달렸으나 외롭지 않게, 빠르게 달렸으나 아프지 않고 자유롭게 본인의 황혼을 장식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각자 삶의 가치에 대해 끝없이 고민하며 살아가야 한다. 단순히 개인의 영달을 위한 고민이 아니라 타인과 공생할 수 있는 사회, 소외되는 이들이 양지로 나올 수 있는 공동선의 사회를 구성하기 위한 고민을 지속해야 한다. 물론 자본주의를 근간으로 한 우리 사회와 기술이 발전해 나가는 과정은 주로 다수를 주연으로 할 것임은 자명해 보인다. 하지만 소수를 경시하는 시류에만 편승한다면 언젠가 우리가 타고 가고 있는 사회는 반드시 무너질 것이고, 우리는 결국 아무런 대비 없이 낙마하게 될 것이다.

처음 <천 개의 파랑>을 펼쳤을 때의 기억이 다시 떠오른다. 처음 보경네 가족의 이야기를 마주했을 땐 마치 깨진 도자기를 보는 것 같았다. 모두 도자기의 한 부분인 것은 분명했지만, 세 명 모두 파편화되어 자기 자신의 고충에만 얽매여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콜리를 만나고 대화를 통해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 주며 외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나 역시 콜리의 이야기, 다시 말해서 저자의 역설(力說)을 통해 우리 사회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과 우리가 견지해야 할 자세에 대한 가치관을 확립할 수 있었다. 사전적으로도 ‘외로움’의 반대말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조금도 외롭지 않을 수는 없다. 하지만 소외되는 이들을 되돌아보고 스스로의 진정한 삶의 의미를 추구한다면 우리는 시나브로 더 자유롭고 눈부신, 파랑파랑한 하늘 아래에서 함께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장려 김*진 지역주민 도서: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독후감: 당신의 물고기를 놓아버리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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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인상>

많은 사람이 나처럼 상쾌한 자유를 맛보길. 이 책을 읽고 든 생각이었다. 후반부에서 느낀 상쾌함, 그것도 모자라 자유로워진 것 같기까지 한 내 감정을 다른 사람들도 느꼈으면 좋을 것 같기 때문이다. 태어나기를 슬프게 태어나는 사람들이 있다. 환경이 아니라 마음을 말하는 것이다. 날 때부터 마음이 연약한 사람들은 사소한 것에도 잘 상처받고 스스로 존재를 부정하기도 한다. 한 번 받은 상처에서 잘 헤어 나오지 못하는 그들은 자신의 약함을 스스로 잘 알고 있다. 그 약함이 주변 사람들을 지치게 하는 것도 역시 잘 안다. 저자 역시 내면에 슬픔이 도사리고 있었다. 자신과 언니 때문에 아버지가 지쳐가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처음으로 인생에서 도망가려고 했다. 삶을 포기하자는 선택이었다. 하지만, 그 도피는 실패로 끝났다. 도망마저 실패한 것을 깨닫자마자 눈에 보인 스티로폼 천장 타일. 그것을 본 그녀는 가장 먼저 굴욕감을 느꼈다. 자신의 나약함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도망하고자 한 그 나약한 용기조차 꺾여 버렸을 때 드는 가장 적절한 감정의 표현이 아닐까 싶다. 그녀는 대학에서 연인을 만나 적응하는 듯했으나 그녀의 본질적인 혼란, 그것을 해결할 수는 없었나 보다. 그녀는 계속 인생의 혼돈을 느꼈고 결국 연인을 배신하고 연인과 헤어졌다. 그녀는 안식처마저 없어지고 더욱 더 깊은 혼돈에 빠져버렸다. 그 무렵 그녀의 눈 앞에 나타난 사람이 ‘데이비드 스탄 조던’이다.

<두 사람의 집착>

무언가 도전하려고 할수록 불안감이 커지는 것을 경험한 적이 있는가? 진로가 되었든 꿈이 되었든 정해놓은 삶의 목표로 나아가는 과정은 순탄치 않다. 심지어 세상이 ‘너는 실패할 거야’, ‘좌절해!’라고 경고하는 듯 느껴지는 순간도 있다. 인생이란 혼돈 그 자체다. 그 혼돈 속에서 절망하거나 흔들리지 않고 계속 나아가는 사람 앞에서 우리는 경이를 느낀다. 자신의 깨져버린 물고기 샘플들 앞에서 묵묵하게 물고기에 이름표를 바늘로 박아 넣은 ‘데이비드’는 그녀가 경이를 느끼기에 충분했다. 나 역시, 그 사람이 궁금해졌다. 책을 다 읽으면 ‘데이비드’를 굳건하고 단단하게 만든 그 원동력이 무엇인지 알게 되고 나 역시 좀 더 강직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다.

두 사람의 집착에서 두 사람이란 데이비드 스탄 조던과 저자를 가리킨다. 데이비드는 물고기에, 저자는 물고기에 집착하는 데이비드에 집착했다. 여기서 집착이라는 표현을 쓴 이유는 두 사람 모두 어딘가에 몰두하는 것을 넘어서, 무언가가 나올 것임을 확신하는 듯 그 구멍만 계속 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데이비드의 집착은 점차 병적으로 비추어졌다. 흔들리지 않는 그의 모습에서 경이로움을 느꼈지만, 그를 좇을수록 그가 흔들리지 않고 그를 강직하게 만든 그 원동력을 찾을 수 있을지 의문만 든다. 우리는 세상의 혼돈 앞에서 가끔 무력함을 느낀다. 우리는 이 거대한 세계의 아주 작은 일부로서 혼돈 속에 쓸려 다니는 존재인 것만 같다. 이때 우리는 흔히 좌절감을 맛보고 무력해져 그대로 주저앉을 수 있다. 때로는 강박적인 수집으로 그 혼돈과 무력감에서 회피하기도 한다. ‘데이비드’는 방대한 자연 앞에서, 자신에게 혼돈을 주고 무력감을 안겨주는 자연 앞에서 당당히 앞으로 나아간 것이 아니었다. 강박이라는 안대로 눈을 가리고, 자신의 무소용을 없애는 데에 집중한 것 같다. 그의 집착이 강직함이 아닌 질병과 비슷한 무엇을 느끼게 한 이유다.

그렇다면 데이비드는 더는 내가 원하던 해답을 내줄 수 없었다. 저자 역시 데이비드를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잘못됨을 느낀다. 답을 얻을 수 있을지에 대한 불안감이 더해져 점점 절박해진다. 책을 읽다 보면 그 절박함에 따라가게 된다.

저자는 데이비드로부터 아무런 새로운 것도 얻어내지 못했다. 데이비드를 따라가 도착한 곳은 어릴 적부터 그녀는 이해할 수 없었던 아버지의 신념이었다. 그녀의 혼돈과 무력함은 아버지의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신념에서 출발했다. 그 신념에서 벗어나 무력한 나를 움직일 힘을 찾고자 데이비드를 따라갔으나, 데이비드가 데려온 곳은 7살 아버지와의 대화 장소였다. 결국 제자리, 그 어떤 것으로부터도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새로운 것은 없었다. 무언가를 발견할 것이라는 확신은 그렇게 무너졌다.

<집착에서의 탈피>

그녀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해답을 찾으려고는 하지만, 데이비드에 대한 시선은 경이에서 조금씩 변화한다. 인식의 변화로 그녀는 데이비드에게서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그의 모순을 발견한다. 바로 ‘자기기만’이었다. 데이비드의 자기기만과 오만함은 인간의 존엄함을 무시하고 인간을 수단화함으로써 우생학을 주장하기에 이른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오만을 복용함으로써 실패할 운명을 극복한다고. 생각건대 그는 오만이라는 약을 과다 복용해서 괴물 같은 모습이 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는 악당이었고 그녀는 실망했다. 하지만, 멈추지 않았다. 데이비드의 강박적인 목적의식은 혼돈을 접한 그 나름의 극복 방안이었을 것이다. 그 결과 수천 명의 ‘부적합’하다고 판단된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희망과 새로운 길을 주리라 생각되었던 그는 그저 추악하고 못된 악당에 불과했다. 그녀의 실망감은 읽는 나에게 고스란히 돌아왔다. 하지만, 그녀는 깨달음을 향해 다시 나아갔다.

그녀는 데이비드에게서 완전히 벗어나고서야 현실이 보였다. 그녀가 간절히 바라던 해답은 멀리에 있던 것이 아니었다. 긴 여행을 떠나 다시 집으로 돌아오니 답은 집에 있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녀는 스스로 속이고 있었다. 그런 자신을 다시 바라본다. 인생의 좋은 것들을 망친 것은 혼돈이 아니라 그녀 자신이었다.

삶은 혼돈이고, 혼돈 앞에서 그것을 극복할 방법은 없다. 그것을 깨닫는 것 자체가 혼돈을 받아들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혼돈을 이길 방법은 없고, 결국 모든 게 괜찮아질 거라고 보장해주는 안내자도, 지름길도, 마법의 주문 따위도 없다. 변화는 이 깨달음에서 시작한다.

<우리는 중요하다>

우리는 중요하다. 이 책이 해주고 싶은 한 마디는 바로 “우리는 중요하다!”라는 말일 것이다. 그녀는 “우리는 중요하지 않아!”라는 믿을 수 없던 아버지의 신념에서 벗어나 “우리는 중요해!”라는 깨달음을 얻었다. 우리는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중요하다는 역설 같은 진리에 도달한 것이다. 우주의 냉엄한 진실은 우리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끊임없이 알려준다. 이 진실을 무시하는 것은 장엄한 자연을 외면하고 집착과 잘못된 선택의 길을 걸은 데이비드 스타 조던과 같은 행동이다. 하지만, 자연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우리는 중요하지 않은 존재이기에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연에서 생물의 지위를 매기는 단 하나의 방법이란 결국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인간이라는 존재는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방식으로 이 지구에게, 이 사회에게, 서로에게 중요하다. 처음에는 ‘우리는 우주의 먼지와도 같은 존재이고 의미란 없다.’라는 말에 동의했다. 하지만, 이러한 무의미성을 오해하면 데이비드와 같은 오류에 빠지기 쉽다는 것도 책을 읽어 나가면서 깨달았다.

‘중요하다.’라는 것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자연은, 이 우주는 단순하지 않다. 복잡한 매커니즘으로 이루어진 자연은 단순하게 생물의 지위를 일열로 나열할 수 없게 되어 있다. 그것은 우리가 중요하다는 사실로 귀결된다. 여러 매커니즘으로 연결되어있는 이 생태계에서 인간은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방법으로 서로에게 중요하다. 우주는 우리에게 우리는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려주지만, 그 주장만을 고수하는 것이야말로 근시안적인 거짓말이다. 우리는 전혀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지위를 나열하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연결고리로 연결된 서로에게 그리고 스스로에게 중요하다.

애초에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았다. 어류라는 범주는 없었다. 데이비드에게 역경이 닥쳐올 때마다 의지했던 그 ‘어류’라는 세상은 존재한 적이 없었던 것이다. ‘어류’라는 범주는 세상이 보여주는 혼돈과 역경을 외면하고 회피하는 도피처를 상징한다. 우리는 혼돈과 역경을 경험하면서 무력감을 느끼고 피하고 싶은 간절함을 경험한다. 그 도피처에 매달리면 어떤 결말로 치닫는지는 데이비드의 사례로 잘 확인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결국 우리는 스스로 중요하다는 믿음을 가지고 인생의 혼돈 앞에 무너지지 않고, 그것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삶을 똑바로 바라보아야 한다. 이는 어려운 일이다. 사람은 계속 흔들리고 무너질 뻔하고 결국엔 피하고 싶어질 것이다. 그럴 때마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말을 떠올리는 것은 어떨까?

“성장한다는 건, 자신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말을 더 이상 믿지 않는 법을 배우는 거야.”

만일, 물고기 때문에 혼돈 앞에서 좌절감과 무력감을 느끼는 이들이 있다면, 이 책을 읽고 물고기를 놓아버리길 바란다.

장려 박*우 기계공학부 도서: 인플레이션
독후감: 왜 가만히 있으면 돈을 빼앗기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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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는 많은 업적을 남겨왔다. 모든 분야가 발전하고 세분화되면서 전문성이 증가했다. 그 덕분에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는 높은 품질의 여러 제품과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을 가능하게 해준 중심에는 돈이 있다. 이웃 사이, 마을 사이의 물물교환을 넘어서 전국 단위 거래, 세계 단위의 거래로 도약하는데에는 화폐가 큰 역할을 하고 있다. 물물교환의 약점을 타개해주는 매개변수인 돈은 신뢰로 이루어진다. 돈은 신뢰다. 서로가 종이에 써있는 액수의 가치를 인정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면서 경제의 규모는 커지고 더 많은 기회가 창출된다. 그리고 우리는 돈을 통해 우리가 원하는 것을 살 수 있고, 돈을 모으기도 한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사람들이 돈의 존재를 인정하고 이를 거래에 사용할 수 있으니까 화폐를 찍어낼 권력이 있는 사람은 화폐를 더 찍어내고 싶다는 욕망을 느끼지 않을까? 혹은 화폐를 위조하여 없던 가치를 생겨나게 하려는 사람이 생기지 않을까? 돈은 경제가 커지게 해준 고마운 존재이지만 동시에 돈의 신뢰와 가치의 속성을 악용한다면 경제를 꺼뜨릴 수 있는 양날의 검이다. 책 [인플레이션]은 ‘화폐의 발행이 증가함에 따라 돈의 가치가 떨어진다’는 내용을 바탕으로 인플레이션이 만든 부의 흥망, 인플레이션을 만든 요인들,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피해, 그리고 인플레이션에 대응하는 방법을 다룬다.

화폐 역사의 초기에 인간은 금,은과 같은 것을 돈으로 취급했다. 이들은 수량이 한정되어 있어서 실질가치를 지켜낼 힘이 있었고, 그래서 사람들은 이들을 돈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날 톰이라는 사람이 나쁜 마음을 먹는다. “금을 녹여 다른 싼 금속과 섞어서 돈을 만들까? 그러면 남은 금으로 차익을 벌 수 있겠네?”톰은 화폐로 유통되는 금을 사들인 후에 이들을 녹여버렸다. 그리고 다른 싼 금속과 금을 함께 섞어서 주조했다. 사람들은 톰이 만든 가짜 화폐를 진짜라고 생각했고 톰이 만든 화폐는 시중으로 흘러들어갔다. 톰은 여기서 욕심을 더 내어서 가짜 화폐 주조를 지속했고 시중에 화폐량이 계속 증가했다. 한정된 재화에 비해 화폐의 수가 많았기 때문에 재화의 가격은 계속 올랐고 사람들은 높아진 물가로 고통받았다. 하지만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 사람들은 돈의 모습이 예전과 다르다고 생각했고 누군가가 범행을 저질렀음을 알아챘다. 톰은 도망치려했지만 결국 붙잡혀 옥살이를 하게 된다. 국왕은 붙잡힌 톰의 행적을 듣고 이런 생각을 한다. “화폐를 무한정 생성한다면 국가의 빚을 탕감할 수 있겠는걸?” 국왕은 톰이 한 일에 한 수를 더 떠서 엄청난 계획을 세우게 된다. 금이나 은 같은 한정된 자원으로는 무한정 돈을 복사하기가 어려우니 종이돈을 만들 생각을 한 것이다. 국왕은 2년 후에 나라의 화폐를 종이돈으로 대체하는데 성공한다. 사람들은 국왕과 나라를 신뢰했기에 발행된 종이돈의 가치를 믿어주었다. 나라의 경제는 풍요로워졌고, 종이돈도 적절하게 유통되었다. 하지만 풍요로움은 머지않아 사치로 변질되고 국왕은 사치스러운 삶을 위해 돈을 마구 쓰기 시작한다. 국고가 점점 바닥나지만 국왕은 걱정이 없다. 돈을 찍어내면 되기 때문이다. 부패는 끝날 줄 모르고 돈은 계속 발행되었다. 다시 물가가 가파르게 오르고 풍요롭던 나라에 먹구름이 끼기 시작한다. 사람들의 삶은 다시 궁핍해진다. 올라갔던 입꼬리 대신 내려간 입꼬리가 더 많아진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노동자들은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 끝없는 인간의 욕심이 화폐를 끝없이 발행하게 만들었고 물가는 끝없이 올라갔다. 집단 분노는 사람들을 결집시켜 봉기를 일으키게 만들었고 국왕은 군중 앞에서 무릎을 꿇어야했다. 하지만 국왕을 쥐어짜도 사람들은 얻을 것이 없었다. 이미 경제가 망가진 후였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비극적으로 끝이 난다.

이 짧은 이야기는 인플레이션의 역사를 기억하기 쉽도록 내가 지어냈다. 화폐가 생겨난 이후로부터 위와 같은 비극적인 이야기는 비슷한 맥락으로 반복되어왔다: 정치인들의 욕심이 통화량을 늘리는데 일조했고 한 번 시작된 물가상승은 쉽게 멈추지 않는다. (저자가 책의 2부에서 ‘인플레이션이 만드는 5막 희곡의 세계’라는 이름으로 인플레이션 시나리오를 소개하니 내가 지어낸 이야기가 재미있었다면 한 번 읽어보길 바란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21세기에도 인플레이션이 존재한다. 정부는 국가를 위해 다양한 일을 하고 그 과정에서 돈을 지출한다. 돈을 많이 지출하다보면 빚이 쌓이게 되는데 이때 정부가 중앙은행에게 입김을 불어넣는다. “야, 돈 좀 풀어라.” 이게 무슨 말일까? 앞서 본 이야기에서 통화량이 증가하면 돈의 가치가 떨어진다. 그러면 국가가 진 빚의 가치도 떨어진다는 말이므로(빚도 돈이니까) 국가의 빚 부담은 줄어들게 된다. 그리고 줄어든 빚 부담은 국가의 구성원들에게 전가된다. 여기까지 책을 읽고 두 가지 생각이 연이어 들었다. 하나는 내가 국가의 성실한 일꾼이자 구성원이라고 생각하면, 내가 열심히 번 돈의 ‘가치’가 떨어지므로 같은 돈으로 더 적은 물건을 살 수밖에 없는 현실에 화가 날 것 같다. 다른 하나는 돈의 가치 하락을 피할 수 없다면 돈의 가치를 최대한 지키는 방향으로 대처하면 안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2020년 양적 완화로 풀린 유동성이 주식과 부동산, 코인 등으로 흘러들어간 모습을 보고 돈의 가치가 그곳으로 옮겨졌다고 생각했다. (두 번째 생각은 이 책의 4부에서 자산 인플레이션으로 다뤄진다.)

책의 4부를 읽고 자산 인플레이션이라는 단어를 알게 되었다. 간단히 말하면 인플레이션을 피하기 위해 사람들이 유가물에 투자하기 시작하고 유가물에 돈이 몰리면서 자산 인플레이션이 시작된다는 내용이었다. 저자는 자산도 인플레이션을 피할 수는 없지만, 인플레이션 전쟁에 대처할 수는 있다고 말한다. 그 시나리오를 설명하면, 자산 거품이 생기기 전에 자산에 투자하고 거품이 터지기 전에 이들을 처분하고, 거품이 생기기 전의 소비재에 투자하라는 것이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아쉬웠던 점이 있었다. [인플레이션] 책의 독자들 중 돈 공부를 하는 사람 혹은 관심있는 사람들이 많을텐데, 원론적인 이야기만 하다가 책이 마무리되어 아쉬웠다. 인플레이션의 역사를 배우고 인플레이션의 요인을 배우는 것은 결국 인플레이션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구체적인 방법을 알기 위함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책 [인플레이션]을 읽고 나는 원론적인 이야기에 살을 붙여줄 다른 책들을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그래야 인플레이션에 대응하는 법을 배울 수 있으니까) 다음 문단에서 내가 추가로 읽은 책의 내용을 쓰겠다.

먼저 ‘언제 시장에 들어가서 언제 나가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해결했다. [인플레이션]에는 거품이 생기기 전에 들어가서 거품이 터지기 전에 나가라고 설명하지만 이것만 읽어서는 언제 들어가서 언제 나갈지를 판단할 수 없다. 그래서 [투자와 마켓 사이클의 법칙]을 읽었다. 이 책을 통해 나는 시장은 사이클을 그리며 움직이고 사이클은 투자자들의 심리에 편승해 움직인다는 것을 알았다. 사이클의 개형은 고등학교 수학시간에 배운 증가하는 삼차함수와 일차함수가 3개의 교점을 만드는 모습이었다. 시장은 직선의 추세선을 따라 우상향해왔지만, 투자자들의 심리에 따라 추세선을 뚫고 내려가기도, 뚫고 올라가기도 한다. 그 흐름의 극단이 각각 고점과 저점을 형성하는데, 저점 부근에 도달했을 때의 신호로는 높아진 리스크 프리미엄(리스크가 큰 투자 항목의 이자보상이 커진다.), 뉴스를 읽었을 때 낙관론에 대한 회의와 비관론으로 도배가 되고 은행의 대출 창구가 닫히며 호황기에 능력 이상으로 채무를 졌던 부실기업들이 파산하는 빈도가 늘어나는 것 등이 있다. 추가로 부동산 사이클도 배웠는데, 건물을 짓는 기간이 길기 때문에 건물을 짓는 동안 호황기와 불황기가 바뀔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를 읽고 리드 타임(lead time)이 긴 업종의 경우, 불황기에 프로젝트가 중단되었던 것을 매수하여 완공이 될 때쯤이면 다시 호황기로 바뀔 수 있다는 통찰을 얻었다.

또다른 궁금증도 있었다. [인플레이션]에서 설명하기를 화폐는 각 국가별로 서로 다르고 각 국가가 고유한 화폐를 찍어낼 수 있다. 그리고 정치계의 탐욕으로 통화량 증가를 억제하지 못하고 해당 국가의 화폐 가치는 아래로 곤두박질 친다고 했다. 그 부분을 읽고 ‘통화량 증가로 인한 인플레이션을 최대한 피하자’라고 생각했지만, ‘근데 그걸 어떻게 알고 대처해?’라는 의문이 생겼다. 책 [인플레이션]에서 국가의 통화 건전성을 측정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다루지 않기 때문에 나는 이 질문을 해결하기 위해 정보를 찾아 나서야 했다. 나는 화폐가 각 국가별로 고유한 것이고 화폐를 남발할 수 있다면 이 또한 하나의 리스크이며 이는 인플레이션에 대응하는데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변화하는 세계 질서]라는 책을 읽어 지식의 부재를 채웠다. 이 책은 나의 시야를 넓혀 주었다. 국가의 흥망성쇠를 그리는 ‘빅 사이클’의 개념을 소개하고, 국가가 빅 사이클의 어느 단계에 있는지 18개의 결정 요인을 통해 분석할 수 있음을 알았다. 빅 사이클을 보면 처음에 교육 지수가 증가하고 그로 인해 경쟁력이 생기고 혁신이 발생하며 경쟁력이 증가한다. 증가한 경쟁력으로 무역이 활발해지고 세계의 자본이 몰려든다. 강해진 국가는 다른 국가의 돈을 빌릴 힘이 커지는데 이것이 국가의 부채를 증가시킨다.(강대국이 발행하는 채권은 인기가 많다. 해당 국가가 강대국인 동안은 망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인상 깊었던 부분은 ‘장기 부채 사이클’의 개념이었다. 국가가 강해진 만큼 신용을 많이 창출하고 주변국들로부터 빚을 많이 지게 되는데 국가의 부채가 지나치게 높아지면서 이를 탕감하기 위해 해당 국가는 돈을 더 많이 찍어내기 시작한다. 이로 인해 해당 통화의 가치는 떨어지고 장기 부채 사이클의 막바지로 갈수록 사람들의 삶을 궁핍하게 만든다. 해당 국가 통화를 외화로 보유하는 비율이 높은 기관이나 국가는 이러한 리스크를 함께 분담하는 꼴이 되고, 결국 피해도 같이 본다. 이 책을 통해서 어느 한 국가가 사이클의 어느 위치에 있는지 결정 요인으로 알아보고 만약 사이클의 쇠퇴기에 있다면 미래로 갈수록 해당 국가의 통화 남발과 인플레이션으로 리스크가 커질 수 있음을 공부했다. 그리고 상황을 수치로 보여주는 정보를 얻는 법도 알게 되었다.

책 [인플레이션]을 읽고 나는 책의 후반부가 내용이 빈약하다고 생각했다. 빈약한 내용은 궁금증이 생기게 했지만 내 궁금증을 해결해주지 못해서 한편으로는 내 앞에 벽이 하나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거기서 끝내지 않고 스스로에게 한 질문들을 해결하기 위해 다른 책을 검색해서 찾아 읽었다. 그 과정에서 내가 몰랐던 새로운 개념들도 많이 맞닥뜨려서 포기할까 생각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잠시 머리를 식혔다가 다시 시도하는 식으로 1000페이지가 넘는 다른 책들을 공부했다. 나는 독후감을 쓸 책보다 훨씬 더 많은 양의 다른 책을 읽고 독후감을 쓰는 내 모습이 새롭게 느껴진다. ‘과연 이게 제대로 된 독후감일까?’라는 생각도 했지만, 나는 이것이 진정한 독서임을 곧 깨달았다. 진정한 독서는 질문할 여지를 만들고, 질문을 따라 또다른 지식을 찾아가는 과정임을 이번 독후감을 통해 확신하게 되었다. 이 글을 읽은 분들도 꼬리에 꼬리를 무는 독서를 경험해보길 권한다.

장려 김*호 행정학과 도서: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
독후감: 뜨겁고 말랑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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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회는 한마디로 증오의 시대라 볼 수 있다. 전쟁, 환경오염, 기후변화, 인종갈등, 성별갈등, 세대갈등, 빈부격차, 자살 등 너무나 많은 사회문제가 우리의 현재와 미래를 위협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전쟁으로 가족을 잃는다.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인종차별, 성차별로 앓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디선가는 이상기후로 삶의 터전이 파괴되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사회로부터 외면받고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 이 모든 문제의 근원에는 증오가 뿌리박혀 있다. 우리는 왜 인류의 무궁한 기술적 발전에 앞서면서도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까? 이에 대해 에리히 프롬은 우리가 삶을 사랑하는 법을 잊고 삶에 무관심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거대한 사회문제 앞에서 개인은 한없이 작아지고 무력해진다. 거대한 사회문제를 떠나서도 사회 구조는 우리를 무력한 인간으로 만든다. 에리히 프롬은 개인이“자기 운명을 좌우할 힘이 전혀 없다”라고 말한다. 우리는 어쩌면 사회라는 거대한 기계의 차가운 부품으로 전락해버렸는지도 모른다. 고장이 나면 똑같은 부품으로 교체될 수 있는 그런 부품으로 말이다. 인간은 남들보다 더 좋은 부품이 되는 것이 중요해졌다. 경제적이고 효율적인 부품이 되길 강요받는다. 존재로서의 인간이 수단으로서의 인간으로 몰락해버린 순간이다. 이제 우리는 논리에 앞서 존재하지 않고, 존재에 앞서 논리가 있게 되었다. 인간이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몰락한 순간, 우리는 인간을 있는 그대로 바로 볼 수 없게 되었다. <인간은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다>에서 프롬은 현대의 중대한 첫 번째 과제로서 인간을 지성과 감성으로 가르는 이분법의 극복을 제시했다. 인간을 지성과 감성으로 가르는 이분법은 인간을 수단으로 보는 사고방식으로 이어진다. 더 좋은 부품이 되기 위해서는 지성을 가져야 한다. 그렇지 못한 인간은 부품이 될 수 없다. 성공적인 부품이 된 인간은 더욱더 차가워지고 단단해져야 한다. 더 경제적이고 효율적이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뜨겁고 말랑한 것을 버리고 차갑고 단단해져야 한다.

역설적이게 성공적인 부품이 된 자들은 무력하다. 그들은 무력을 알아차리지 못하기도 한다. 무력감은 상대에게 영향을 미칠 수 없다는 생각으로부터 유발된 감정이다. 그 대상은 인간이 될 수도, 사물이 될 수도, 자신이 될 수도 있다. 무력감이 심해질수록 반작용으로 대상을 통제하고자 하는 욕망이 강해진다. 따라서 현대의 인간은 무력감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인간 내면에 깊이 침투해 뿌리박은 무력감에서 분노가 탄생한다. 분노는 다시 불안을, 불안은 다시 무력감을 낳는다. 무력해질수록 불안해지고, 불안해질수록 무력해진다. 부품이 된 인간은 언젠가는 교체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없다는 불안감에 빠져있게 된다. 거대한 사회문제는 개인의 무력감을 더 키웠다. 수단이 된 개인은, 차갑게 굳어버린 개인은 더는 사랑할 수 없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사실 우리는 사랑하기보다는 증오하기를 더 좋아하기도 한다. 심지어는 그 대상이 우리 스스로일지라도 말이다. 인터넷에는 누군가를 비방할 목적으로 쓰인 글이 넘쳐난다. 연예인들, 스포츠인들은 매일 악성 댓글에 시달리기도 한다. 심지어 악성 댓글로 인하여 자살을 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사람들은 각종 커뮤니티에서 서로를 비방하고 비난한다. 지금도 우리는 증오의 대상을 찾아다니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간에. 당장 우리는 그 대상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면서 그것의 재판관이 되어 그들을 심판한다. 대상이 무엇인지, 누구인지는 단지 이름으로서 정의된다. 이름이 아니더라도 직업, 가족관계, 국적, 민족 등 대상 그 자체가 아닌 특징적 관계로서 정의되는 것이다. 에리히 프롬은 우리가 “구체적인 사람에게서 추상성을 본다”라고 한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을 ‘창의적’으로 봐야 한다 주장한다.

그가 말하는 ‘창의성’은 투영과 왜곡 없이 객관적으로 보고 대답한다는 뜻이다. 그는 책에서 장미를 보는 것을 예시로 든다. 장미를 보았을 때 우리는 생각한다. ‘이것은 장미네’ 혹은 ‘나는 장미를 보고 있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또는 ‘장미가 빨갛다’라든지 ‘장미가 예쁘네’하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때 우리는 장미를 창의적으로 바라본 것일까? 어쩌면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사실 우리가 생각한 것은 단지 장미 그 존재 자체의 구체성을 언어로 바꾸어 추상적으로 만든 것이다. 우리는 의식적으로 장미를 이해하고 그것을 언어화하였다. 그 장미는 ‘장미’로서, ‘빨간 꽃’으로서, ‘예쁜 꽃’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냥 구체적으로 지금, 그곳에 존재한다. 우리는 그것을 보면서도 보지 않는다. 우리는 그것을 생각할 뿐이다. 에리히 프롬은 우리가 대상을 완전하게 인식할 경우 추상이 없다고 한다. 즉 대상의 구체성과 유일성만 남는다는 것이다.

그 대상이 사람일 때도 다르지 않다. 우리는 길에서 낯선 사람을 마주친다. 아무 생각도 않고 지나갈 수도 있겠지만 그들이 입은 옷, 머리카락, 걸음걸이 등에 대하여 생각할 수도 있다. 만약 머리를 박박 깎고 염주를 든 사람을 마주치면 자연스레 그 사람은 스님이라 생각할 것이다. 우리는 그에게서 구체성이 아닌 추상을 본다. 새로운 사람을 알게 될 때를 가정해보자. 우리는 가장 먼저 이름을 묻는다. 다음으론 직업이나, 취미를 묻고 때론 가족관계를 물을 수도 있다. 그리고 다음에 만났을 때 그가 누구인지는 그의 이름이나 직업, 취미 등으로 기억된다. 이것은 지극히 당연하고 일반적인 일이다. 하지만 우리가 그를 언어를 넘어서 본 적이 있을까? 다시 말해 창의적으로 사람을 바라본 적이 있을까? 사람뿐만이 아니다. 그저 우리가 바라보는 것을 창의적으로 본 적이 있을까? 어쩌면 그것은 정말 어려운 일일 것이다. 습관적으로 대상의 이름을, 대상의 용도를, 대상의 특징을 언어로 정의할 것이다. 우리가 대상의 추상을 언어로 표현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우리는 대상을 창의적으로 보아야 한다.

비탈길에서 공이 굴러간다. 그것을 한 번 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두 번, 세 번 보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다. 그렇다면 열 번 보는 것은? 그것은 아마 조금 어려울 수도 있다. 백 번은 어떤가. 아마 비탈길에서 굴러가는 공을 백 번이나 보는 사람을 보고 우리는 인내심이 강하거나 미쳤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창의적으로 본다면 이것은 인내심이 강하거나 미친 것이 아니다. 비탈길을 공이 구를 때마다 그것은 구체적인 사건이고 유일한 사건이다. 비탈길에서는 공을 놓으면 굴러간다는 물리 법칙 뒤에 그것은 그저 구를 뿐이다. 자세히 바라보면 결코 완벽히 같은 사건이 아니다. 나무, 장미, 비둘기, 사람 모두 같다. 그들은 그저 존재할 뿐이다. 어떠한 추상에 의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사랑하기 위해 창의적이어야 한다. 에리히 프롬은 사랑이 대상과 하나 되는 것, 융합하는 것이라 한다. 프롬은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에서 사랑하기 위해“망상을 버리고 타인과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다는 것은 창의적으로 본다는 말과 같다. 창의적으로 볼 수 없는 사람은 사랑할 수 없다. 장미를 그 자체로 보아야 한다. 그래야만 장미를 사랑할 수 있다. 창의성은 보고 대답하는 것이다. 창의적이라면 대상을 보고 그것에 대답한다. 창의적으로 본다는 것은 그것에 꼭 맞게 응답하기 위한 조건이다. 그리고 대상에 꼭 맞게 응답하였을 때 보는 자와 보는 대상은 하나 된다. 지성으로, 합리적으로, 추상으로 대상을 보지 않고 감성으로, 온몸으로, 유일로서 대상을 볼 때 우리는 그것과 하나 되고 사랑한다.

사랑에는 대상이 필요하다. 대상이 없다면 그것을 창의적으로 볼 수도 응답할 수도 없고, 하나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사랑의 대상은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될 수도 있고, 무형의 무언가일 수도 있다. 지금 당장 내가 사랑하는 것을 떠올려보자. 그것은 가족일 수도, 연인일 수도, 비싼 신발일 수도, 아끼는 옷일 수도 있다. 바다를 떠올릴 수도 있을 테고, 푸른 하늘이나 낙조를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시를, 음악을, 철학자의 정신을 사랑할 수도 있다. 사랑의 대상은 정말 다양하고 무한하다. 하지만 ‘삶’을 떠올린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누구라도 삶을 문득 떠올리긴 쉽지 않다. 사실 사랑한다는 대상을 떠올렸을 때 그 대상이 삶이 되기는 쉽지가 않다. 진정으로 그것을 사랑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사실 ‘삶’이란 단어를 들으면 당장 나의 인생이 떠오르거나 ‘내가 살고 있다’라는 사실이 떠오른다. 아니면 죽음의 반대 정도가 떠오르기도 한다. 조금 더 생각해보면 다른 사람의 인생이, ‘다른 사람이 살고 있다’라는 사실 정도만 떠오른다. 에리히 프롬은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에서 삶을 “어쩔 수 없이 성장과 변화의 과정”이라고 정의한다. 나는 여기에 더 추가하고 싶다. 삶이란 뜨거운 것이고 말랑한 것이라고. 살아있는 것은 결코 차가운 것이거나 딱딱한 것이 아니다. 성장과 변화의 결과물도 아니다. 살아있는 것은, 삶은 뜨겁고 말랑하며 성장과 변화의 과정이다. 종종 이 사실을 잊는다. 특히 우리는 삶에서 결과를 보지 과정을 보지 못할 때가 많다. 완성된 삶은 없다. 그래서 우리는 삶을 사랑한다.

하지만 우리는 삶을 창의적으로 바라보지 못하기도 한다. 이것은 우리가 삶을 사랑하지 못하게 한다. 어쩌면 우리는 차갑고 단단한 것을 사랑하는 것 같다. 죽은 것을, 차를, 시계를, 무미건조한 관계를, 날카로운 금속을, 냉각된 두뇌를, 증오를 말이다. 계속해서 관계의 바다로 스스로를 던지고, 그 망망대해에서 갈 길을 헤매고 있다. 우리는 잔인하고 공허한 바다에서 ‘삶’을 볼 수도, 사랑할 수도 없게 된 것은 아닐까? 그러다가, 너무나 긴 시간 바다에 있다가 몸이 굳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죽은 것을 사랑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할 것이다. 삶을, 무엇보다도 삶을 사랑해야 한다.

어쩌면 우리는 삶을 사랑함으로써 간단히 해결할 수 있는 문제들에 고통받고 있는지도 모른다. 차갑고 딱딱하기 때문에 생긴 문제를 차갑고 딱딱한 것으로 풀어가려고 하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삶을 사랑하는 법을 완전히 잊었을지도 모른다. 에리히 프롬은 이런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무기력한 우리에게 한 가지 해답을 던지고 있다. 삶을 사랑하라고.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는 우리에게 진정으로 삶을 사랑하고 있는지 묻는다. 그리고 우리가 삶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면 그것을 깨닫게 하고 반성하게 한다. 사실은 그가 말한 ‘창의성’이나 ‘사랑’의 개념은 생소하고 현실과는 멀고 너무나 이상적이기도 하다. 모든 사람이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가? 라는 의문과 우려 이전에 개인적으로도 그가 말하는 ‘창의성’에 기반한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가능한지부터 묻게 되기도 한다. 그가 말하는 삶을 사랑한다는 것은 완전히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기계가 되는 것만큼 어려운 일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삶을 사랑할 수 있게 된다면 나는 분명 우리가 사는 세상이 더 좋은 세상으로 바뀔 것이라 믿는다. 지금까지 우리는 장미를 바라보는 법을, 뜨겁고 말랑한 것에 응답하는 법을, 삶을 사랑하는 법을 잊고 살아왔다. 때문에, 우리는 무기력하고 차갑고 딱딱한 기계가 되었다. 타인을 이름으로, 수단으로, 결과물로 바라보았다. 인간을 지성과 감성으로 나누어 놓고 싸우기 바빴다. 서로 증오하기 바빴다. 그 결과는 참혹한 현실로 되어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 죽은 것을 사랑하고, 삶을 증오하게 되었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비방하게 되었다. 장미를 창의적으로 바라보지 않고 꺾어서 응답했다. 이제는 반성해야 할 때이다. 타인을 이름으로, 수단으로, 추상으로, 결과물로 바라보고 무력하게 응답하지 않아야 한다. 이제는 증오를 멈추고 삶을 사랑해야 할 때이다. 이제는 창의적으로 장미를 보아야 할 때이다. 우리는 살아있기 때문이고, 삶이기 때문이고, 사랑해야 하기 때문이다.

장려 박*옥 지역주민 도서: 무엇이 옳은가
독후감: 무엇이 옳은지를 끊임없이 추구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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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안 엔리케스의 <무엇이 옳은가>라는 제목만 보면, 아마 어떤 것이 옳고 그른지에 대해 절대적인 지표나 기준에 대해 명쾌하게 알려주는 책일 것 같다고 예상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 책은 어떤 의미에서는 그 예상과 정반대의 내용에 상당수를 할애하고 있다. 동시에 궁극적인 의미에서는, 그 예상을 목표로 삼아 그 목표점에 도달하기 위한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다. 마치 이 책의 부제가 ‘궁극의 질문들, 우리의 방향이 되다’인 것처럼, 이 책은 옳음이라는 목표에 궁극적으로 다가갈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옳은 것을 추구하고 노력하며 실현하려는 경지에 최대한 가깝게 다가가거나, 적어도 현재보다는 덜 멀어질 수 있도록 말이다.

이 책은 과연 무엇이 옳은지에 대한 기준이나 인식은 끊임없이 변해왔다는 것을 거듭 강조한다. 그 현상은 비단 과거에 수없이 일어났을 뿐만 아니라, 아마 앞으로도 계속 일어날 것이다. 동시에 이 책은 그것이 불안정하거나 혼란스러운 현상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람들이 기존의 것을 답습하고 반복하기만 하는 데 안주하는 대신, 그 사회를 끊임없이 발전시키려고 노력하는 자세로 앞으로 나아간다는 신호처럼 여기는 분위기가 더 강하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점의 사회에서, 새로운 기술 등이 도입되면서 사람들이 혼란스러워하는 지점 등에 대해서 폭넓고 다양하면서도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다루고 있다. 그 주제에 대해 전혀 모르거나 얼핏 들어본 적은 없지만 진지하게 생각한 적 없는 사람도 논란 요소에 대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도록, 동시에 그 주제에 대해 진지하게 논의하고 싶은 사람에게는 보다 뚜렷하게 논란점을 정리하고 스스로 생각할 수 있도록 말이다.

예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새로운 기술이 발명되는 것에, 긍정적이고 편리한 면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지 않다면 적어도 흑백구도처럼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뚜렷하게 갈리기라도 한다면, 그 새로운 기술에 대해 평가하고 어떻게 대처할지 정하는 것이 얼마나 편해질까? 그렇다면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판단하는 것은 빠르고 정확하게 할 수 있는 일이 될 것이다. 맨손이어도 암기력만 있으면 충분히 할 수 있고, 스마트폰과 인터넷 등이 있는 시대라면 암기력조차 없어도 할 수 있는 일이다. 이미 정해진 기준을 충실히 따라가기만 하면 될 테니까.

그렇게 원하는 사람에게는 유감스럽게도, 현실은 그렇지 않다. 과거에도 종종 그랬고, 이 책에서 구체적으로 다루는 현재진행형인 여러 주제에 대해서도 그렇다.

<무엇이 옳은가>에서는 세부적으로 SNS 시스템이나 기술, 다양한 인공 기술 등을 구체적으로 언급한다. 과거에는 없다가 새롭게 개발된 기술이 어떤 것이며 어떤 원리인지, 어떤 기능을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이른바 과거의 윤리관이나 법적 기준에서 어떤 논란을 불러일으키며, 사람들이 불안해한다면 어떤 지점에서 왜 불안해하는지 등 다양한 영역에 대해 현실적으로 와닿는 내용을 풍부하고 생생하게 써내려간다. 그리고 그런 요소를 다루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이 책에서 다루고자 하는 궁극적인 질문을 향해 나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무엇이 옳은가? 그리고 우리는 과연 옳음에 얼마나 가깝게 다가가고, 적어도 더 멀어지지는 않을 수 있는 것인가?

새로운 기술이 생겨나면, 예전보다 편리해지는 일이 종종 있다. 동시에 아무리 편리해도, 처음 접하는 것이라 낯설면 그 자체로 심리적인 장벽처럼 여겨지는 경우도 종종 있다. 그 새로움이 기존에 옳다고 여겨지는 것과 충돌하는 새로움이라면, 이 상황은 더욱 심각해진다. 더 편리한 것을 택하는 게 아무래도 나을까? 하지만 그 신기술에 기존에 옳다고 여겨지는 관점에서 찜찜한 부분이 있다면?

한 번 고민하게 되면, 딜레마같은 의문이 연이어 줄줄이 파생된다. 부작용이나 악용 가능성이 있는 신기술에는 그 기술 자체를 막아야 바람직할까, 아니면 부작용을 방지하고 악용할 가능성을 막는 방법을 마련하는 것만으로 충분할까? 그런 규제를 만들면서 신기술의 효용은 취하려면, 과연 어느 정도의 규제가 적절할지 미리 파악할 수 있을까? 규제가 허술하면 오히려 부작용이나 악용 사례에 제도적 면죄부만 쥐어주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너무 강력하게 규제하면, 이 책의 ‘과도한 절차가 죽음을 부른다’챕터에서 말하는 것처럼 허가 및 신청 관련 절차가 너무 복잡해서, 사람을 살리기 위해 필요한 조치를 제때 적절히 하지 못하는 일이 생길 수도 있다.

기술적 영역을 벗어나 사회적 합의의 영역에 들어서면, 이 딜레마는 더욱 강화된다. 편리한 신기술에 사람들이 낯설어하거나 거부감을 느낀다면, 그 신기술을 택하지 않는 것이 옳은 것인가? 나아가 기존에 옳다고 여겨지는 개념과 충돌하는 요소가 많다면, 기존 인식에 신기술을 맞추는 것과 신기술에 맞춰 기존 인식을 바꾸는 것 중, 어느 쪽이 사회적으로 더 효용성이 높으며 사람들에게도 더 큰 이득이 되는 일일까? 기존 인식에 익숙한 사람들이 신기술을 거부하는 것을, 그저 발전을 가로막는 장애물쯤으로만 취급할 수 있다면 편리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많다. 그런 인식은 장애물일 수도 있지만, 쓰나미의 파도를 막는 튼튼한 제방 역할을 하며 쓰나미가 왔을 때 제방 안의 사람들을 보호하는 역할을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 일이고, 그에 따라 사람들이 적절하에 대처해야만 하는 일이다. 이 책에서 언제까지나 변함없이 절대적으로 옳은 것은 있기 힘들다고 말하는 것처럼.

이런 일은 과학 세계에서 아주 흔하다. 그리고 당대 과학 기술로 이른바 객관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물리, 화학 등의 영역이 아니라, 사회인식이나 윤리 등 무형적 영역에 들어서면, 이 질문은 더한층 강해지고, 이내 딜레마의 영역에 들어서게 된다. <무엇이 옳은가>는 바로 이 지점을 깊이 있고 다양하게 다룬다. 이 책에서 말하는 옳음의 기준이란, 절대적인 진리가 아니라, 그 시대 사람들이 합의한 사항에 가깝다는 것부터 시작해서 말이다.

이런 테마의 딜레마는 한국인 입장에서 특히 와닿는 요소가 많기에, 더욱 인상적으로 읽은 책이기도 하다. 한국에는 CCTV가 아주 많이 설치되어 있고, 전국민이 일련번호를 부여받는 주민등록번호 제도도 있다. 외국, 특히 사람의 자유를 중시하는 문화권의 나라에서는 이런 한국 제도를 보고 공권력이 국민을 감시하는 시스템처럼 여기면서 경악한다는 이야기도 종종 들린다. 하지만 막상 한국에서는 그걸 부당한 탄압처럼 여기는 목소리보다, 범죄 수사 등에 효율적이면서 민간인 입장에서는 보다 안전해지는 안전장치처럼 여기는 목소리가 훨씬 더 크다. 이런 한국의 분위기와 그걸 경악스러운 사생활 침해처럼 여기는 이른바 외국의 시선 중, 어느 쪽이 더 옳은지 우열 관계를 정하려는 것은 과연 얼마나 의미가 있을까? 개인적으로는 본질적으로는 환경에 따른 적자생존 원리나 다름없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싱그러운 나뭇잎이 무성한 곳에서는 초록색이 눈에 덜 띄고, 매연이 심한 곳에서는 검은색이 눈에 덜 띄는 것처럼, 환경의 전반적인 분위기에 따라 기준과 개념이 바뀌는 것이지, 우열을 정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이다. 그리고 이런 현상은 새로운 기술이 도입될 때마다,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을 일이다.

역사책 등 옛날 이야기를 다룬 책을 보면, 현대 기준으로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태연히 일어나거나, 때로는 권장되기까지 하는 일을 종종 접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중 상당수는 현대인 입장에서 비웃을 거리가 되기 십상이다. 그 대상은 나름대로 존경받던 사람의 행보일 수도 있고, 처음 발표될 때만 해도 큰 인기를 끈 신기술이나 신제품일 수도 있고, 한때 한 시대를 풍미한 이론이나 예술작품일 수도 있다. 세월이 흘러도 불멸의 고전처럼 찬양받는 경우도 있겠지만, 시대가 흐르고 인식이 바뀌면서 오히려 비판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그리고 인식이 바뀌는 경우의 상당 부분은 새로운 기술이 발명된 후, 그 기술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책에서 거듭 말하듯이, 이런 상황은 미래에서 현대를 바라볼 때에도 얼마든지 구현될 수 있다. 지금 우리의 생활 모습이 미래에는 어리석고 황당무계한 행동으로 손가락질받을 일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 일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그리고 이 책은 바로 그 지점을 예리하면서도 통렬하게 지적한다. 자, 이제 다시 생각하고 묻는다. 과연 무엇이 옳은가? 지금 옳은 것이 미래에도 옳다고 확신할 수 있는가? 조금만 생각하면, 그렇게 단언할 수 없다는 결론이 금세 나온다. 그리고, 이제 궁극의 질문에 도달한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 등에 대해 생각하고 논의하며 기준을 정립하는 것은 의미 없는 것인가? 언제 어떻게 뒤집힐지 모를 일이니까?

<무엇이 옳은가>를 읽으면서 공감한 사람이라면, 이렇게 말하게 될 것이다. 결코 그렇지 않다고 말이다.

이 책은 절대적으로 옳은 진리 같은 영역이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런 진리를 직접 제시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대신 일관되게 이야기한다. 그 시대에는 옳았지만 훗날에는 틀렸다고 여겨지며 인식이 바뀌는 일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고, 지금 우리가 진리처럼 여기는 대상도 아마 그렇게 될 거라고. 그리고 그처럼 기존의 인식이나 평가기준 등이 바뀌는 것이야말로, 사람들이 주어지는 것을 반복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스스로 생각하며 변화를 추구한다는 의미이며, 나아가 그 사회가 발전하고 있다는 표시나 다름없다. 그런 사회가 그렇지 못한 사회보다 시간이 흐르면 훨씬 더 발전하기 마련이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가 과거에서부터 그런 식으로 발전해온 결과이자 결정체나 다름없으며, 지금 우리가 그렇게 활동하기 위해 노력한다면 앞으로도 지금보다 조금씩 꾸준히 향상되게 될 것이다.

지금 옳다고 여겨지는 것을 바탕으로, 그 이전의 옛 시대와 옛날 사람들을 멍청하고 후진적이라고 비웃는 것은 아주 쉽고 간편한 일이다. 이미 정립된 것을 반복하고 따라하기만 하면 된다. 어떤 상품을 살지 스스로 고민하고 고르는 것이 아니라 정해진 규격품을 사면 되는 상황에서, 그 규격품을 구매하는 것만큼이나 손쉽다. 이미 만들어지고 제시된 길을 순순히 따라가기만 하면 되는 일이다. 그리고 그런 일이 지금 우리가 옳다고 여기는 분야에서 미래에 일어날 수 있다면, 지금 우리는 어떻게 해야 의미가 있는 걸까? 과거에 일어났던 현상을 마냥 비웃으면서 우월감을 느끼면 되는 걸까? 아니면 어차피 지금 진리처럼 여기는 것이 미래에는 언젠가 의미 없어질 거라고 환멸에 빠져, 현재 사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는 것을 중단하고 관심도 가지지 않아도 무방할까?

이 책은 우선, 우리가 지금 옳다고 여기는 것이 새로운 기술이 발명되면 얼마든지 폐기처분될 수도 있다는 걸 먼저 받아들이자고 말한다. 그리고 새로운 옳음이 받아들여지면서 폐기처분된 옛날 것을 마냥 어리석다고 비웃거나, 그것 자체를 무의미하다고 여기는 대신, 새로운 옳음의 가능성이 제시되는 상황에서 진지하게 대할 준비를 하는 것이 훨씬 발전적이고 의미 있는 행동이 될 것이다. 새로운 옳음이 제시되면 그냥 제시되는 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대처하는 것이 보다 바람직하고 의미 있으며, 사람들에게 널리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을 일일지에 대해서 말이다. 절대적으로 옳은 것은 없으며, 새로운 기술이 나온다면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는 마음가짐과 함께. 그런 태도야말로, 새로운 기술이 나오면 그에 맞춰 유기적으로 사회를 발전시키는 밑거름이 될 것이며, 이 책이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이다.

세월이 지나고 사회의 모습이 많이 바뀌게 되면, 이 책에서 다루는 구체적인 내용은 정보로서 가치를 잃게 될지도 모른다. 이 책에서는 지금 연구되거나 도입 단계에 들어선 여러 신기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 기술이 과거의 옛 유산이 되는 먼 미래에서는 역사적인 의미만 남게 될지도 모른다. 새로운 최신 기술이 나오면 그 이전 기술로 만들어진 물건은 졸지에 낡은 옛것 취급을 받게 되는 것처럼, 그리고 이 책에서 무엇이 옳은지는 변하기 마련이라고 끊임없이 말하는 것처럼. 하지만 설사 그렇게 되더라도, 이 책 자체가 의미 없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새로운 것이 나타났을 때, 그에 대해 어떻게 대하는 것이 보다 옳고 바람직한지 끊임없이 고민하며, 사람들과 의견을 나누고 수렴하며 합의하며 새로운 옳음의 기준을 수립하는 것이야말로, 사회가 발전하는 한 끊임없이 이어질 현상이자 끊이지 말고 이어져야 마땅한 일이기 때문이다.

Comments 8

김*수
2023년 01월 25일 11:19 오후

‘작별과의 작별을 위하여’ 독후감을 감명 깊게 읽었습니다. 글을 쓰신 문*은님이 제주도에서 나고 자라셨다 하니, 책을 좀 더 무겁게 느낍니다.
저희 외할머니께서 제주도 출신입니다. 외할머니께서 예닐곱 때 동굴에 숨곤 했었다는 얘기를 종종 하셨었습니다. 워낙 덤덤하게 말씀하셨기에, 그 무서움을 전 몰랐습니다. 그리고 그 배경이 제주 4·3 사건이라는 것도 고등학생이 되고 난 후 알게 되었습니다. 아픈 역사가 왜 교과서에 단 몇 줄밖에 되지 않았는지, ‘작별하지 않는다’를 읽으며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아픔을 삭인다고 아픔이 없어지는 건 아닌 거 같습니다. 오히려 아픔을 더 드러내야 하고, 더 지지받아야 하고, 그에 따른 정당한 보상도 이루어져야 합니다.
독후감에서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정심 – 인선 – 우리로 이어진다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자꾸 드러내야 우리에게로, 후손에게로 이어질 것입니다. 고통은 사랑이라고도 하셨습니다. 반대로 고통스럽지 않으면 우린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닐까요? 개인화되어가는 현시대에, 작별하지 않으려는 의식적인 노력을 함께하고자 합니다.

강*경
2023년 01월 25일 1:37 오전

독후감 ‘한 움큼의 하늘은 파랗지 않다’에서 소설 ‘천 개의 파랑’ 을 관통하는 주제를 자신의 어린 시절의 추억과 연관지어 풀어낸 것이 인상깊습니다. 글을 정말 잘 쓰셔서 마치 그 어린시절의 모습이 제 눈 앞에도 보이는 듯 했습니다. 각각의 존재는 개별자로 존재하면서, 다른 존재들과 어울리며 살아가야한다는 것을 제목인 ‘천개의 파랑’에 빗대어 표현하신 것도 매우 인상깊었고, 그렇게 읽으니 더욱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위 독후감뿐 아니라 모든 선정자분들의 글 잘 읽었습니다. 저도 책을 읽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책을 읽고 독후감을 써야겠다는 생각은 했지만 어떻게 써야할 지 몰랐는데, 당선작들을 찬찬히 읽으며 저도 어떤 방향으로 독후감을 써야겠다는 대략의 감이 잡힙니다. 앞으로는 책을 읽고 그것을 나의 언어로 바꾸는 연습을 거치며 저도 2023년엔 독후감 공모전에 도전해보고싶습니다. 선정자분들의 수상을 축하드리며, 좋은 글 감사합니다.

이*혜
2023년 01월 24일 9:33 오후

무엇이 옳은가 책 독후감이 인상깊다. 맞는 것이 아니면 틀린 것이고, 우열이 무조건적으로 정해져있다는 사고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항상 해왔다.
당선자분께서 작성하신 독후감에는 책의 내용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고, 책이 추구하는 방향성에 대해 알기 쉽게 설명해주셔서 꼭 책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은 세상을 바라보는 가치관을 바로잡는 길잡이가 되어줄 수 있을 것만 같다.

고*주
2023년 01월 21일 2:23 오후

인플레이션 책 독후감이 유용하다. 요즘에 물가상승 화폐가치하락으로 고통받고있다. 인플레 시기에도움이 되는 책이라 생각한다. 긴 책을 요약해준 독후감 리뷰가 고맙다. 독후감 말고 인터넷서점 책 리뷰끼리 비교해 보는 것도 재밌다. 근데 리뷰가
하나도 안 달린 책이많아서 아쉽다. 책을 안 사기도 하지만, 산 사람들의 일부만 리뷰를 남겨서 그런가보다.

박*나
2023년 01월 19일 8:34 오전

한강 작가의 ‘절멸하지 않는 삶에 대한 이야기’ 작별하지 않는다의 독후감이 가장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결국에 인간다움과, 사랑과, 연대와 작별하지 않아야 한다는 작가의 말처럼, 소감문 또한 작가가 강조하고자 하는 내용들을 차분하고 담담하게 기술하고 있어 인상적이었습니다. 제주4·3 사건과 더불어 광주 민주화 운동부터 형제복지원 사건까지 우리사회에서 수없이 자주 반복되고 있는 절멸에 대하여 언급했던 부분이 특히 좋았습니다. 오래도록 기억될 좋은 책을 선정해주시고 작가와의 북토크를 기획해 주신 도서관 관계자 분들과 가슴에 울림을 주는 서평을 남겨주신 당선자께도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습니다.

도*록
2023년 01월 19일 1:09 오전

도서 (인플레이션)에 대한 독후감이 저에게 가장 와닿았습니다. 저는 평소에 경제 관련 도서를 읽는 것을 좋아하는데 독후감의 제목인 ‘왜 가만히 있으면 돈을 빼앗기는가?’에 대해 요약해서 잘 알 수 있었고, 인플레이션이라는 책에 대한 매력을 잘 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독후감을 쓰신 분께서 독후감을 작성하기 위해 인플레이션이라는 책 외에도 많은 독서를 하셨다고 하였는데 독후감을 작성하기 위해서 많은 생각과 고민을 하셨다는 점이 인상 깊었고 저도 책이 이해가 되지 않을 때에는 포기하지 않고 꼬리에 꼬리를 무는 독서를 해야겠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좋은 독후감 감사합니다.

백*람
2023년 01월 18일 2:04 오후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에 대한 독후감 두개가 가장 눈에 띄는 것 같습니다. 혐오가 기저에 깔린 세상으로 변해가고 있는 현재, 그 대상은 아마 자신의 삶에 대한, 자신이라는 존재에게 까지 뻗어나가고 있습니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이 책이 우리에게 어떤 방향을 제시해주고 있는지, 자신에게 제시해준 방향은 어떠했는지, 이 책의 제목처럼 삶을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깨닫고 이를 자신만의 글로 잘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도 저 자신의 삶을 어떤 방식으로 사랑해주어야 하는지 고민하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윤*원
2023년 01월 14일 4:28 오후

천개의 파랑에 관해서 쓴 독후감이 저에게는 가장 인상 깊었습니다. 저자와의 만남에서 저자님이 직접 설명한 내용을 들었는데, 다른 사람은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다는 점을 알게 되었고, 저도 글쓴이 분의 생각이 와닿았고 공감이 많이 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