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해주세요 to post to this user's Wall.

  • 레비나스와 사랑의 현상학 작가 우치다 타츠루 출판 갈라파고스 님의 별점
    보고 싶어요
    (0명)
    보고 있어요
    (0명)
    다 봤어요
    (0명)
    언젠가 장 콕토는 프라도 박물관에 화재가 나면 어떤 작품을 구하겠느냐는 질문에 "프라도 박물관의 한 부분에라도 불이 붙으면, 나는 그 불을 구할 것이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애초에 던져진 질문 그 자체를 다시 질문에 부치는듯한 이 대답은 당황스러운 만큼 매력적이다. 하지만 이 대답이 "해부대 위에서 재봉틀과 우산의 기이한 만남"이 아름답다고 주장하는 부류(초현실주의)의 대답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이 이야기를 전하는 자 역시 그 부류의 일원인 살바도르 달리라는 점에서, 이 대답은 독창적이지만 그와 동시에 전형적이라고 생각되었고, 그후 이 이야기에 대해 다시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그런데 방금 레비나스를 말하는 이 책의 한 부분을 읽으면서, 잊힌 줄 알았던 장 콕토의 대답이 문득 다시 떠올랐고, 그 대답은 내게 새로운 의미로 다가왔다. 책의 부분은 다음과 같다.

    "레비나스 사고의 두드러진 특징은 하나의 정식이 제시되자마자 곧바로 그것에 이의를 제기하는 다른 언어가 용출한다는 '전언철회'의 무궁한 운동성 안에 있다. 싱싱하고 생성적이었던 사고가 견고하고 일의적인 언어의 틀 안에 고착되고 타성화되는 것을 레비나스는 거의 강박적으로 회피하려 한다. 사고를 끊임없이 '성운 상태'에 놓아두려는 바람은 거의 이 철학자의 숙업이었다. 이만큼 '고착되지 않는 것에 고착하는' 정신을 나는 일찍이 만난 적이 없다. 레비나스는 이것을 탈무드 랍비들의 '쟁론'의 태도로부터 이어받았다. (...) 그들의 대화는 어떤 논건에 결코 결론을 내지 않는 것을 목표로 전개되었다. 중요한 것은 결론을 얻는다든지 최종적 화해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미래의 율법수학자에게 개방상태로 열어두는 것이기 때문이다.
    (......) 레비나스가 동시대의 철학자와 나누는 대화도 본질적으로는 '마할로케트(쟁론)'의 전통을 물려받았다. 따라서 레비나스가 비판할 때조차, 그는 결코 그 누군가의 '숨통을 조이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레비나스가 비판하는 것은 어떤 학지를, 그것이 생성됐던 때의 싱싱한 상태로 되살리기 위한 것이다. 닫혀 있는 지의 체계에 생산적인 출입구를 확보하기 위함이다."

    프라도 박물관에 화재가 나면 어떤 작품을 구하겠느냐는 질문에 "그 불을 구하겠다"는 장 콕토의 엉뚱한 대답은, 얼핏 그 작품들이 모두 불에 타도록 두겠다는 말처럼 해석될 수도 있겠지만, 레비나스를 경유하면서 그 뉘앙스는 정반대가 되었다. 장 콕토는 박물관에 있는 작품들의 숨통을 조이려는 의도로 그런 대답을 한 것이 아니다. 그런 게 아니라, 그 작품이 생성됐던 때의 싱싱한 상태로 작품을 되살리기 위해, 그것들을 고착화하고 타성화하는 박물관이라는 견고한 틀로부터 비로소 숨통을 트이게 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이 대답을 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장 콕토는 질문이 내포하고 있었던 프라다 박물관이라는 권위적 타성에 맞서 '불'이라는 무궁한 운동성과 생명력, 그 자체를 구하고자 했던 것이다.
    더보기
    좋아요 1
    댓글 0
  • 자본론을 읽는다(두레신서 33) 작가 루이 알튀세르 출판 두레 님의 별점
    보고 싶어요
    (0명)
    보고 있어요
    (0명)
    다 봤어요
    (0명)
    알튀세르는 문제 설정과 인식론적 단절이라는 개념을 엥겔스가 마르크스의 『자본 Ⅱ』에 쓴 서문에서 영감을 받아 『자본론을 읽는다』, '2.6 『자본론』의 인식론적 명제'에서 정식화한다. 저번 모임에서 나는 '잉여가치' 개념에 대한 마르크스의 발견을 옹호하기 위해 엥겔스가 들었던 '산소' 개념 발견의 예시를 들었다. 그 예에서 산소를 최초로 추출한 것은 프리스틸리이지만, 라부아지에야말로 산소의 최초 발견자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에 대해 말했다. 아울러 최초의 추출자와 최초의 발견자를 보다 명확하게 구분하기 위해 라캉이 자신을 한 번도 탐구자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고 말한 사실에 이어 피카소의 다음과 같은 말을 언급했다: "저는 찾지 않습니다. 저는 발견합니다." 피카소의 표현에 따라 다시 정리하자면, 프리스틸리는 최초로 찾은 자인 반면, 라부아지에는 최초로 발견한 자다. 이 둘을 가르는 간극은 강조되어야 하는데, 왜냐하면 이 간극이야말로 우리가 "관료적 집단 같은 데" 소속되려 발버둥치는 대신 이곳에 온 이유를 보다 명확히 해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둘을 가르는 간극이란 무엇인가? 이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들리는 것과 들리지 않는 것, 사고될 수 있는 것과 사고될 수 없는 것을 가르는 선(랑시에르가 '감각적인 것의 나눔'이라 부르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우리는 통상 보이는 것만을 보며, 들리는 것만을 듣고, 사고될 수 있는 것만을 사고한다. 새로운 기체를 최초로 추출한 프리스틸리가 이를 예증한다. 프리스틸리는 자신이 발견한 것을 기존의 연소설 체계 안에서 설명하면서 이를 '탈연소기체'라고 부른다. 이 기체는 이전까지 추출된 적이 없었기에 새로운 것이지만, 기존의 연소설 체계로 환원된 결과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게 된다. 프리스틸리는 새롭게 추출된 것으로부터 자신이 기존에 보던 것을 그저 다시 보았을 뿐이다. 그에게 보이는 것은 언제나 보이고, 보이지 않는 것은 결코 보이지 않는다: "네가 이미 나를 발견하지 못했다면 나를 찾으려 할 수도 없을 것이다."(라캉) 하지만 새롭게 추출된 기체에 대해 전해 들은 라부아지에는 프리스틸리가 보지 못한 것을, 그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본다. 이는 놀라운 일이며, 가히 불가사의한 일이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걸까? 이는 우리가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에 대한 김병규의 비평글을 보고 느꼈던 충격과 유사한 것이 아닐까.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자들에 대한 우리의 충격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째서 그것이 가능한가를 밝히는 것이며, 나아가 우리가 그렇게 하는 일일 것이다. 이는 여러 측면으로 논의해야 할 까다로운 문제이지만, 우선 김병규의 글에서 그 단서를 찾아볼 수 있다. 바로 '주장하다'라는 단어 말이다. 주장할 수 없다고 생각되는 것들이 주장하는 소리를 듣는 이 신비한 사태는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기 위한 첫 단계다. '발견하다'라는 단어를 일상적인 용법과는 다르게 정의한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주장하다'라는 단어 역시 다르게 정의할 수 있다. 이는 보이지 않는 것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 보이는 표현이다. 그러므로 주장이란 이미 논의되고 합의되어 온 사항에 대해 말하는 것일 수 없다. 그러한 가짜 주장은 추출이나 찾는 것과 같은 차원에 있다. 반면 발견의 차원에 있는 주장은 우리의 논의와 합의의 질서, 즉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나누는 기존의 감각적인 것의 나눔을 깨트리면서 출현한다. 아니, 깨트린다는 표현은 우리의 경험을 고려해볼 때 대개 적절하지 못하다. 이 주장은 기껏해야 기존의 체계에 미세한 균열을 낼 수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간과하는 이 미세한 균열을 누군가는 주의 깊게 본다. 누군가는 주의 깊게 듣는다.
    더보기
    좋아요 1
    댓글 0
  • 원더스트럭(한정판)(양장본 HardCover)(전2권) 작가 브라이언 셀즈닉 출판 뜰북 레오파드 님의 별점
    3
    보고 싶어요
    (0명)
    보고 있어요
    (0명)
    다 봤어요
    (0명)
    브라이언 셀즈닉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토드 헤인즈의 영화 <원더스트럭>에는 데이비드 보위의 스페이스 오디티(Space Oddity)가 여러 번 흘러나온다. 우주에 성공적으로 올라갔으나 회로에 문제가 생겨 우주 미아가 된 톰 소령을 노래하는 이 음악에서 영화와 관련해 가장 인상 깊은 구절은 다음과 같다. “지금 문을 나서고 있다 / 그리고 난 가장 특이한 방법으로 떠다니고 있다 / 오늘따라 별들이 정말 다르게 보인다(I’m stepping through the door. And I’m floating in a most peculiar way. And the stars look very different today)”. 이 구절을 차례대로 살펴보자.

    <원더스트럭>은 서로 다른 시간대를 살아가는 소년 벤과 소녀 로즈의 이야기다. 1977년을 살아가는 소년 벤은 사고로 죽은 엄마의 유품을 뒤적이다가 생면부지인 아빠에 관한 단서를 발견한다. 그 단서인 킨케이드 서점에 전화를 걸려는 찰나 벼락이 내려쳐 벤은 청력을 잃지만 아빠를 만나기 위해 병원에서 빠져나와 뉴욕으로 향한다. 한편 1927년을 살아가는 소녀 로즈는 스타 배우인 엄마를 그리워하며 그녀를 다루는 기사들을 스크랩한다. 로즈는 선천적으로 소리를 듣지 못하지만 공연을 준비하고 있는 엄마를 만나기 위해 뉴욕으로 향한다. "I’m stepping through the door."

    번갈아가며 진행되는 두 이야기는 영화 기술의 역사적 변화에 따라 달리 표현될 뿐만 아니라 영화 그 자체를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1977년을 배경으로 한 벤의 이야기는 컬러 유성영화로 1927년을 배경으로 한 로즈의 이야기는 스코어가 곁들어진 흑백 무성영화로 그려진다. 서로 다른 시간대에서 독립적으로 진행되는 것처럼 보이는 두 이야기는 교묘한 편집으로 서로에게 틈입하기 시작하다 디오라마와 파노라마를 전시한 자연사 박물관과 퀸즈 미술관에 이르러 하나의 이야기가 된다. 할머니가 된 로즈와 소년 벤 그리고 흑인 소년 제이미가 퀸즈 미술관 옥상에 올라가 밤 하늘의 별을 바라보는 장면에서는 컬러와 흑백의 구분이 모호해지는 마법이 펼쳐진다. "And I’m floating in a most peculiar way."

    이 영화를 두고 단순히 ‘동화’라고 말하는 것은 적절치 않아 보인다. 물론 동화적이라고 부를 만한 요소가 없는 것은 아니다. 영화가 다루고 있는 환상적인 이미지, 갑작스러운 이야기 전개, 갈등의 원만한 해소, 희망을 노래하는 해피엔딩 등은 동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요소들이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이루어내는 연대는 현실적인 것이다. 사고로 청력과 엄마를 잃고 생면부지의 아빠를 찾으러 가는 소년, 선천적으로 소리를 듣지 못하는 자신을 억압하는 부모로부터 떠나려는 소녀, 아빠가 일하러 간 사이 내버려진 흑인 소년으로 이루어진 이 연대는 영화에서나마 동화적인 요소를 끌어와 이룰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우회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게 아닐까. 현실의 법칙을 따라서는 불가능한 이 연대를 영화에서나마 상상적으로 이루어내는 것은 단지 가벼운 일일까. 그러니 다르게 말해야 한다. <원더스트럭>은 동화적인 요소를 끌어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지만 필요한 연대를, 그 별을 다르게 보여주는 영화이다. "And the stars look very different today"
    더보기
  • 광학적 미디어 작가 프리드리히 키틀러 출판 현실문화 레오파드 님의 별점
    4
    보고 싶어요
    (0명)
    보고 있어요
    (0명)
    다 봤어요
    (0명)
    루터의 종교개혁은 구텐베르크의 인쇄술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인쇄술이 없었다면 종교개혁도 없었을까”라는 토마스 카우프만의 물음은 종교개혁의 정신을 확산시키는 데 있어 인쇄술이 미친 영향력을 가늠하게 한다. 인쇄술이 종교개혁에 미친 영향은 무엇일까. 성경이 대중적으로 보급되기 전에 신의 말씀을 듣고 신상을 볼 수 있는 곳은 제한적이었다. 신의 말씀은 사제의 입을 빌릴 수밖에 없었으며 신상은 한 곳에 붙박여 그 공간에 가지 않으면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사제와 교회는 그 자체로 권력이었고 평신도는 그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구텐베르크의 인쇄술 발명에 따라, 변덕스러운 사제의 말과 이동되지 않는 신상 대신에 신이 쓰셨다는, 저장과 이동이 가능한 책을 숭배하게 되었다. 평신도들은 자국어로 번역된 성경을 읽을 수 있게 되었고 사제와 교회의 권력은 상대적으로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종교개혁은 적어도 유럽 절반에 가까운 지역에서 중세 교회 의례와 그 모든 광휘를 혁파하고 그것을 대신해 성경을 내세웠다. 루터에 따르면, 누구나 성상 숭배나 교회 사역 없이도 “오로지 글로부터 오로지 신앙으로부터” 축복받을 수 있어야 했다.

    이에 따라 유럽의 나머지 절반은 루터의 성경에 맞서 새로운 전략적 미디어를 끌어온다. 바로 매직랜턴이다. 매직랜턴은 채색 그림이 그려진 유리 슬라이드를 렌즈 뒤에 놓고 양초나 램프 같은 인공 광원을 뒤에서 통과시켜 외부 스크린에 그 이미지를 투영하는 광학적 장치이다. 예수회 소속의 아타나시우스 키르허는 자신의 저서 『빛과 그림자의 위대한 예술』에서 매직랜턴을 종교적 모티프, 그 중에서도 특히 악마와 지옥의 이미지에 연결 짓고 있다. 종교개혁을 이끈 상징적 글자에 반종교개혁은 상상적 이미지로 응수하는 셈이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컴컴한 방에서 상영되는 그림자와 이미지는 햇빛 아래 생기는 그림자와 이미지보다 훨씬 무시무시하다. 이러한 예술을 통해서, 신을 믿지 않는 자들의 크나큰 악행이 쉽게 저지될 수 있을 것이다. 악마의 이미지를 거울에 던져 컴컴한 곳에 영사한다면 어떨까.”

    전략적 미디어로서의 인쇄술과 매직랜턴은 그 성격에서 큰 차이가 난다. 성경을 읽는 신도가 고정되어 있는 텍스트를 특정한 시공간에 구애받지 않은 채 혼자 읽는 반면에 매직랜턴으로 투사되는 이미지를 보는 신도는 어둠 속에서 무시무시한 이미지를 집단적으로 본다. 또 인쇄술로 대중화된 성경은 그 특성상 문자로 기록되기에 각 언어의 문법체계를 따르는 반면 매직랜턴으로 투사되는 상상적 이미지는 감각적이고 즉각적이다. 이미지는 성경에 대한 이해나 믿음이 없더라도, 언어의 문법체계를 익히지 못했더라도, 말 그대로 체험될 수 있다.
    더보기
  • 군주론(4판) 작가 니콜로 마키아벨리 출판 까치 레오파드 님의 별점
    4
    보고 싶어요
    (0명)
    보고 있어요
    (0명)
    다 봤어요
    (1명)
    이 책은 니콜로 마키아벨리가 자신이 속한 도시, 피렌체의 신생 군주, 로렌초 데 메디치에게 헌정한 책이다. 그러니 당연히 이 책의 상정된 독자는 로렌초일 것이다. 하지만 이는 이 책이 로렌초만을 위해서 쓰였다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가 될 수는 없다. 따라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물을 수 있다. '그는 누구에게 말을 걸고 있는가?' 이 물음과 더불어ㅡ특히 이 책이 고전으로 평가받는 바, 고전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와 관련해ㅡ이 책을 읽는 우리에게 중요한 물음이 떠오른다. '우리는 왜 우리와 상관없는 것처럼 보이는 이 책을 읽는가?' 그가 상정한 독자에 우리도 포함되어 있는가? 물론 그가 시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진 우리를 생각하면서 이 책을 썼을 리는 없다. 하지만 그 상정된 독자가 우리가 아닐지라도, 그가 우리에게 말을 걸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 여지가 있지 않을까? 이 책과 우리 사이의 거리는 어느 정도이며, 어떻게 이 거리에도 불구하고 서로 대화할 수 있을까? 흥미로운 건 고전을 대하는 우리의 이 문제가 동시에 군주론을 쓴 그의 문제였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처한 상황(이탈리아의 분열과 외세의 지배)과 도래하길 원하는 상황(이탈리아의 통일과 외세로부터의 구원) 간의 거리를 계측하고 어떻게 이 거리를 제거해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룩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차이가 있다면 같은 거리의 문제지만 후자는 욕망을 전제한 현재와 미래 사이의 거리인 데 반해, 전자는 그러한 욕망이 생성되기 이전의 관계이기에 계측할 거리조차 가늠되지 않는 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책을 덮어버리거나 아니면 책에서 우리를 자극하는 부분을 찾아야 하며, 그로부터 이야기는 시작될 수 있다. 즉, 내가 고전뿐만 아니라 어떤 책을 읽고자 할 때 우선 분명히 해야 할 것은, 바로 그것과 나의 거리를 설정하는 일이다. 거리는 곧 관계 맺음을 전제하기 때문에, 그 거리를 계측하고 좁히거나 넓혀 나가면서 책에 대한 나의 의견을 분명히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나와 일견 상관없어 보이는 책을 덮지 않고 굳이 읽고자 하는가? 이는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기를 배우고 실천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나에게 군주론은 지도(指導)의 지도(地圖) 혹은 지도(指導)를 위한 지도(地圖)다. 어떤 지도(地圖)? 외세의 지배로부터 이탈리아를 구원하는 길, 즉 아직 닿지 못한, 현실이 아닌 어떤 곳을 향한 시선과 그곳으로 가기 위한 지도다. 이는 일반적인 지도와는 다르며, 이를 그리기 위해서는 일반적인 지도 제작 방법과는 다른 방법이 요구될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마키아벨리는 그 지도를 어떻게 그릴 수 있었을까? "최근 일어난 사건들에 대한 지속적인 경험과 고대사에 대한 꾸준한 공부를 통해서 배운 위대한 인물들의 행위에 대한 지식"이 이를 가능하게 했는가? 그것만으로 충분한가? 만약 피에르 바야르의 '여행하지 않은 곳에 대해 말하는 법How to talk about Places you haven’t been'을 마키아벨리가 읽었다고 가정한다면? 마키아벨리가 그리는 공간place는 어떤 공간인가? 이 공간과는 다른 공간으로 가는 것 혹은 다른 공간에 대해 말하는 건 그의 진정한 문제가 아니다. 그의 문제는 이 공간을 다른 공간으로 바꾸는 것, 공간상으로는 같지만, 근본적으로 다른 그 공간으로 가기 위한 지도를, 그는 그리고 있는 것이다. 여기 없는 공간, 하지만 있어야 할 공간은 과거에서 찾아진다. 그는 모델로 모세, 키로스, 테세우스를 제시한다. 문제는 모세, 키로스, 테세우스가 처한 상황은 그것이 변화의 적기라는 점에서는 지금의 상황과 비슷할지언정, 구체적으로는 다르며, 무엇보다 모세, 키로스, 테세우스 같은 자가 지금 없는 것처럼 보인다는 데 있다. 따라서 마키아벨리는 로렌초에게(혹은 여타 군주들에게) 모세, 키로스, 테세우스가 될 것을 촉구하고 현재(그 당시) 처한 상황에 미루어 어떻게 그들이 될 수 있는지, 그러기 위해선 무엇을 알아야 하고, 또 해야 하는지를 알려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마키아벨리는 이곳이 아닌 (실제로는 있는) 다른 곳으로 가기 위한 지도를 그리는 게 아니라 이곳을 (아직 도래하지 않은) 다른 곳으로 바꾸기 위한 지도를 그리고 있다. 그럼 문제는 그 방법이다. 이를 마키아벨리의 문제와 군주의 문제로 나눠서 보자. 군주는 그가 제시한 지도상의 지점들을 그의 안내에 따라 거쳐 목표를 향해 가면 된다. 이는 별로 흥미로운 문제가 아니다. 흥미로운 건 마키아벨리가 어떻게 총체적 상, 즉 지도를 그리고 그 상의 몇몇 지점들을 그가 가야 할, 혹은 가지 말아야 할 지점들로서 특별하게 여기고, 군주에게 제시하느냐는 것이다. 여기선 두 가지 문제가 된다. 첫째로 지도 그리기. 둘째로 그것이 올바른 지도이자 갈 필요가 있는 곳을 안내하는 지도라는 것을 군주가 받아들이고 그 길을 걷도록 설득하는 것이다. 물론 둘은 연관되어 있고, 두 번째 문제는 설득과 설득을 위한 근거를 제시하는 것과 관련된다. 그렇다면 첫 번째 문제는? 이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일 것이다.
    더보기
  • 모던 타임스(양장본 HardCover) 작가 자크 랑시에르 출판 현실문화A 레오파드 님의 별점
    4.5
    보고 싶어요
    (0명)
    보고 있어요
    (0명)
    다 봤어요
    (0명)
    '예술과 정치에서 시간성에 관한 시론'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은 손바닥만한 크기에 200페이지 남짓의 짧은 분량이지만, 한 페이지를 넘기는 데는 엄청난 시간이 소요되는 그런 책이다(고유한 자신의 사상이 있는 책은 보통 그렇다. 한글로 써져 있지만 외국어라 생각하는 것이 심신 안정에 좋다.). 랑시에르의 '감각적인 것의 나눔'(혹은 책의 제목으로 번역된 '감성의 분할') 개념에 관심이 있다면 '감성의 분할'보다는 이 책을 읽는 걸 추천한다. 우선 번역이 너무나 깔끔하고 '감성의 분할'보다 더 쉬우면서도 주요 논의는 포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는 시간성 중에서도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으로 대표되는, 필연적 시간성으로부터 벗어날 방법에 관한 사유가 전개되는데, 이는 자유와 평등의 문제, 그의 용어로 표현하자면 감각적인 것의 재나눔의 문제로 이어진다. 특히 읽어보길 추천하는 건 1장의 시간, 내레이션, 정치와 4장 영화의 시간들인데, 1장은 그의 사상을 압축적으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고, 4장은 영화=시간이라는 정의의 계보에 새로운 선을 추가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더보기
  • 일본근대문학의 기원(가라타니 고진 컬렉션 4)(양장본 HardCover) 작가 가라타니 고진 출판 b 레오파드 님의 별점
    4.5
    보고 싶어요
    (0명)
    보고 있어요
    (0명)
    다 봤어요
    (0명)
    흔히 말하듯 내 인생을 어떤 기준의 전과 후로 나눠야 한다면, 물론 여러 기준을 정할 수 있겠지만, 신형철의 문학 비평집, '몰락의 에티카'를 읽은 나날들을 빼놓을 순 없을 것 같다. 그때부터 비평을 의식했으니까. 비평을 의식한다는 건, 나에게 가능한 모든 것에 대해, 심지어 무의식조차도 의식(하고자)한다는 것, 그것들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다급함을 느낀다는 것을 뜻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나에게 비평은, 세간의 편견과는 달리, 사랑의 방식, 오해를 살 수 있으니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사랑하는 방식이었다. 물론 신형철의 비평이 소위 '칭찬하는 비평'이라서, 혹은 '정확한 사랑의 실험'이라서 비평=사랑의 방식이라고 생각했을 가능성도 있겠지만, 그의 비평을, 아니 적어도 그의 최근 에세이만큼은 더 이상 긍정할 수 없다고 스스로 입장을 정했기에, 비평에 대한 이러한 정의는 단지 신형철의 비평에서 비롯된 것도, 그의 비평에만 국한되는 것도 아니다.
    가라타니 고진의 이 책 역시 비평이다. 즉, 그 역시 나름의 방식으로 사랑하고 있지만, 그 대상과 방식은 신형철의 그것들과 사뭇 다르다. 나아가 서로 대립한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애초에 '몰락의 에티카'가 고진의 '근대문학의 종언'에 대해 나름의 거부를 선언하면서 쓰였으니 말이다. 그 거부가 타당한 것인지 아닌지는 논외로 하고, 만약 신형철의 글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 이 책을 읽는다면 어떨까?
    우선 신형철의 글에서 기대할 수 있는 위로나 공감, 칭찬과 배려 같은 건 기대하지 않는 게 좋다. 고진은 솜씨 좋은 요리사처럼 잘 버려진 칼로 우리가 기대온 관념들, 예를 들어 '근대', '문학', '일본'(물론 이는 현재 존재하는 모든 네이션-스테이트, 즉 '한국'도 포함한다)을 해체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 역시 그 칼의 자장 안에 있다. 영화 장르로 비유해, 신형철의 글이 로맨스라면, 고진의 글은 스릴러나 서부영화랄까. 그러니 신형철의 글을 읽으며 사랑받기를 기대한 사람이라면 멀찌감치 떨어지시길.
    더보기
  • 예상 표절(패러독스 3) 작가 피에르 바야르 출판 여름언덕 레오파드 님의 별점
    4
    보고 싶어요
    (0명)
    보고 있어요
    (0명)
    다 봤어요
    (0명)
    예술과 비평의 관계는 오랫동안 논란거리가 되어 왔으나, 일반적으로 비평은 시간적으로나 위계적으로나 예술에 뒷서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즉, 비평가란 예술가가 되고 싶었으나 결국 그러지 못한 사람들이며, 그들이 하는 비평이란, 영감의 소산인 예술을 조악한 논리로 환원시키는 데 그친다는 것이다. 더욱 적나라하게 말해서, 비평은 예술에 기생하며 비평가는 현학적인 문체와 일상적으로 잘 쓰이지 않는 단어로 자신의 글을 점철하면서 예술을 접하는 일반 사람들을 배려하지 않는 파렴치한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아니, 그 전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대중적으로 영향력 있는 영화평론가(이동진이 평론가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는 여기서 다루지 않겠다)인 이동진이 봉준호의 영화, <기생충>에 대해 쓴 한 줄 평(“상승과 하강으로 명증하게 직조해낸 신랄하면서 처연한 계급 우화”)이 인터넷상에서 현학적이라고 논란이 되었다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예술과 비평의 관계가 어떻든 독자들의 눈높이에 맞지 않는 글은, 특히 그것이 비평이라면(영화 비평이라면 더더욱), 몰매의 대상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단순히 그 사람의 직업적 능력의 부족을 뜻하는 게 아니라 부족한 인성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선 최근 씨네플레이에 기재된 <조커> 찬반 논평에 달린 한 댓글을 인용하는 것으로 충분하리라 생각된다. “글을 보면 그 사람에 대해 어느정도 알 수 있다. 사람들이 알아듣기 쉽게 이야기를 풀어가는 사람은 남들에 대해 배려하고 공감하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많이 공부했다고 어려운 표현과 수사로 복잡한 글쓰기를 하는 사람은 공감은커녕 타인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을 거라고 생각된다. 그런점이 아주 잘 드러난 두 사람의 리뷰다.”(https://blog.naver.com/cine_play/221674806580) 여기서 핵심 단어는 공감인데, 대체로 비평은 공감에 반하는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공감의 위력이 오늘날의 사회에 너무나 커진 나머지, 이제 공감에 반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곧 타인을 무시하는 것으로 비추어질 정도다. 비평은 말할 것도 없다.

    예술과 비평의 관계에 대해 말하다가 이야기가 옆으로 새버렸는데, 이왕 이렇게 된 거 앞서 언급한 <조커> 비평에 대해 더 이야기해보자. 이 글은 박지훈과 김병규 두 영화평론가가 썼는데, 댓글에서는 유독 김병규에게 질타를 집중적으로 가하고 있다. 이유는 무엇일까? 댓글에서 누가 지적한 것처럼 정말 그의 글이 “대학 레포트라면 교수가 끝까지 읽지도 않을” 정도의 수준이라서? 정말 그렇다면, 비록 나의 성적이 F로 점철되거나 자퇴해야겠지만, 얼마나 좋을까. 황금 고블린의 뒤를 쫓듯, 교수의 뒤꽁무니를 쫓아다니며 수준 미달로 처리되어 아무렇게나 내팽개쳐진 글만 읽어도 거인의 어깨에 올라탄 난쟁이가 된 것처럼 세상이 재밌을 것이다. 그러나 그건 행복한 상상이고, 내가 생각하기에 김병규의 글이 더 욕을 먹는 이유는, 박지훈의 글과는 달리 그의 글이 더 예술에 가깝기 때문이다. 여기서 비평=예술이 성립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왜 김병규의 글이 예술에 가까운지는 여기서 밝힐 계제가 아니므로 일단 넘어가자. 중요한 건 이제 막 피에르 바야르의 책을 리뷰할 단계에 들어섰다는 점인데, 왜냐하면 그의 『예상 표절 』이 바로 비평=예술을 실천하고 있으며, 동시에 그 이론을 정립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이론이 초점을 맞추는 개념은 바로 이 책의 제목인 표절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듯 과거에 쓰여 지금 존재하는 작품에 대한 표절이 아니라, 거꾸로 미래에 존재할 작품에 대한 표절, 즉 예상 표절을 다룬다. 여기서 우리는 이 책이 꽤 흥미진진하면서 동시에 골치 아플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시간의 선형성, 즉 시간은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 미래를 향해 나아간다는 관념을 전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예상 표절을 다루는 이러한 비평을 예상 비평이라 부른다. 그런데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가 묻지 않을 수 없다. 그 가능성에 비평=예술의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되는데, 궁금하신 분은 직접 읽어보시길.
    더보기
    좋아요
    댓글 1
    • 저는 이 책을 읽지 않아서 글쓴이께서 의도하신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점 먼저 양해 부탁드립니다.
      ‘비평=예술’의 가능성에 대한 말씀에 공감하는 바가 큽니다.
      어떤 예술 작품의 예술성이 어디서 비롯되는지를 이해하거나 최소한 고민하지 않고 비평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예술 작품과 비평은 공통적으로 ‘예술은 무엇인가?’ 혹은 ‘예술은 어떠해야 하는가?’와 같은 일련의 형이상학적인 질문에 대답하려는 나름의 시도라는 점에서 동등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예술 작품은 작가가 선택한 매체를 통해 대답을 구현해내고, 비평은 언어라는 한계 속으로 형이상학을 끌어들인다는 점이 차이겠지요.
      김병규의 글이 더 예…[더 보기]

  • 내가 싸우듯이 작가 정지돈 출판 문학과지성사 레오파드 님의 별점
    3.5
    보고 싶어요
    (1명)
    보고 있어요
    (0명)
    다 봤어요
    (0명)
    백화점 직원, 기갑부대 병사, 헌병, 하인, 사제, 치안 요원, 커피 감식가, 역장, 장의사. 9개의, 아니 제목의 카페 웨이터까지 합해 총 10개의 직업. 그래, 정지돈은 10개의 직업을 가지고 있는 소설가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9개의 직업을 가지고 있는 카페 웨이터라고 해야 할까? 그는 카페 웨이터처럼 이런 저런 사람들을 만나고(책을 읽고), 이를 바탕으로 삶을 산다(글을 쓴다). 카페 웨이터는 백화점 직원, 기갑부대 병사, 헌병 등이 된다. 이 직업들에는 순서나 위계가 없다. 이것이 정지돈의 소설이자 삶(적어도 소설에서 드러나는)이다. 이렇게 말해볼까? 정지돈 안에서 구성한 정지돈 밖에서의 소설이자 삶이다. 또는 정지돈 밖에서 구성한 정지돈 안에서의 소설이자 삶이다. 다들 알고 있겠지만, 이 책을 읽는 방법은 36만 2,880개다. 이 책을 순서대로만 읽는 것은, 한 가지 방법으로만 읽는 것은 "역겨운 전체주의와 다를 바 없다".
    사실 정지돈은 사제나 장의사에 대해 잘 모른다. 정지돈은 사제나 장의사에 대해 잘 모르면서 사제가 되고, 장의사가 된다. 그러나 그것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정지돈은 읽지 않은 소설을 원작으로 영화를 만든 니콜라스 레이다(니콜라스 레이라고? 비교할 걸 비교하라는 비난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지만 어떤 의미에서 그렇다는 뜻이다). 읽지 않은 책을 사랑하는 것은 믿음의 문제다. 그는 말한다. "무언가를 읽었기 때문에 사랑한다면 그것은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또한 이렇게 말할 것이다. '누군가를 알기 때문에 그 사람이 된다면 그건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더보기
    좋아요 1
    댓글 2
    • 1 person 좋아요 님이 좋아합니다.
    • 어떤 내용인지 잘 가늠이 되진 않지만 ‘읽지 않은 책을 사랑하는 것은 믿음의 문제다’라는 말씀이 새롭게 다가오네요. 서평 감사합니다. 한 번 읽어볼게요!

    • 책 자체 보다는 스쳐지나간 니콜라스 레이가 인상적입니다. 어떤 감독님인지 작품 찾아보러 가야겠어요!

  • 비판이란 무엇인가? 자기 수양(미셜 푸코 미공개 선집 1) 작가 미셸 푸코 출판 동녘 레오파드 님의 별점
    4
    보고 싶어요
    (0명)
    보고 있어요
    (0명)
    다 봤어요
    (0명)
    『비판이란 무엇인가? 자기 수양 』은 미셸 푸코가 「비판이란 무엇인가?」(이하 「비판」)와 「자기 수양」이라는 제목으로 행한 두 강연을 그의 강의록과 녹취록에 근거해 재구성한 책이다. 「비판이란 무엇인가?」를 제목으로 한 강의는 1978년 5월 27일에 프랑스 철학회 주관으로 소르본에서 프랑스어로 진행되었고, 「자기 수양」을 제목으로 한 강의는 1983년 4월 12일에 미국 캘리포니아대학교 버클리캠퍼스에서 영어로 진행되었다. 이 두 강의에는 약 5년이라는 시간적 거리와 프랑스와 미국이라는 공간적, 언어적 거리가 있는 것이다.

    「비판」과 「자기 수양」은 그러한 각종 거리에도 불구하고, 범박하게 말해서 ‘우리는 누구이고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보편적 주제를 다룬다. 하지만 방점은 ‘누구’가 아니라 ‘어떻게 살 것인가’에 찍힌다. 푸코에게 우리가 ‘누구’인지는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비록 그의 작업이 오늘날의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어떻게 인식하는지를 권력, 진실 그리고 주체 간의 관계라는 틀로 설명하고 있지만, 결국 어떻게 살 것인가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그 핵심에 ‘비판’과 ‘자기 수양’이 있다. 간단하게 말해, ‘비판’은 “이런 식으로 통치받지 않는 기술”이고, ‘자기 수양’은 자기 자신과 관계맺는 기술이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덧붙이자면, ‘비판’은 ‘이런 식’으로 통치받지 않는 기술, 즉 통치의 어떤 방식을 거부하는 기술이지, 통치 그 자체를 거부하는 기술은 아니라는 것이다. 푸코에게 그것은 불가능할뿐더러 바람직하지도 않다.

    그렇다고 이 책이 자기 계발서나 사상의 강령 혹은 종교의 교리처럼 우리에게 그러한 기술들 중 어느 것이 유용하고 가치 없는 것인지를 선별해서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진 않다. 오히려 그러한 기술들이 어느 특정한 역사적 시기에 어떻게 형성되고 또 변형되었는지, 나아가 오늘날에는 우리가 어떤 기술들을 받아들이고 있으며 그 결과 자기 자신을 특정한 것으로서 만들어가는지를 밝힌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러한 분석 내용을 전달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자신이 어떻게 이를 분석하며 이러한 과정에는 어떤 문제들이 생길 수 있으며, 또 해결하지 못한 것은 무엇인지를 고백하며 독자(청자)에게 손을 내민다. 물론 이 독자(청자)가 일반 대중이라기보다는 자신과 연구를 같이 할 수 있을 잠정적 동료이긴 하지만.
    더보기
  •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패러독스 1) 작가 피에르 바야르 출판 여름언덕 레오파드 님의 별점
    3.5
    보고 싶어요
    (2명)
    보고 있어요
    (0명)
    다 봤어요
    (0명)
    도발적인 제목이 붙은 이 책에 대한 서평을 쓴다는 것은 곤란한 일이다. 이 책의 주제가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기인 만큼 서평을 쓰기 위한 독서는 이 책을 배신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 정도로 나쁜 사람은 아니다. 그러니 내가 이 책을 읽지도 않은 채 서평을 썼다고 비난하는 사람은 없길 바란다.

    사실 이 제목은 도발적인 만큼 전략적이다. 방점은 세 군데에 찍힌다. ‘읽지 않은’, ‘책’ 그리고 ‘말하는 법’. 적어도 이 책의 ‘화자’(명목상의 저자인 피에르 바야르가 아니라)에게는 ‘읽지 않은’ 책이 곧 그것에 대해 말할 수 없는 책인 것은 아니다. 지금 내가 그러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비록 그 책을 읽지 않았더라도 말할 수 있다. 이에 대해선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상황 하나를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올해는 한국영화가 100주년을 맞은 해이다(왜 갑자기 책에서 영화 얘기로 넘어가느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이 지금 다루는 주제는 읽지 않은, 더 포괄적으로 말해 직접 경험하지 않은 것일지라도 그것에 대해 우리가 충분히 말할 수 있다는 것이지, 책에 국한된 것은 아니다.). 그래서 한국영화에 대한 여러 행사가 진행되었는데, 강의에 결석하고 간 탓인지 그중 부산국제영화제가 개최한 기념 포럼이 기억에 남는다. 여기서 기조 발제자로 나선 이창동 감독은 한국영화 100주년을 기념하는 자리인 만큼, 거의 절반에 가까운 시간을 한국영화사에서 으레 가장 중요하다고 평가되는 두 영화, 즉 김도산 감독의 <의리적 구토>(1919)와 나운규 감독의 <아리랑>(1926)에 대해 말하는 데 할애했다. 이는 한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두 영화의 필름이 진작에 유실된 탓에 이창동 감독을 포함해 그 자리에 있던 누구도 두 영화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 사실을 몇 번 언급하면서도, 특히 <아리랑>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고백했는데, 이는 한국영화 베스트 1을 꼽아달라는 허문영 평론가의 질문에, 자신이 여태껏 보아온 그 수많은 한국영화를 뒤로하고 <아리랑>을 선택할 정도였다! 즉 이창동 감독은 보지 않은 영화에 대해 실컷 말한 것도 모자라 사랑 고백까지 하고 나선 것이다.

    다음으로 ‘책’. 여기서 대뜸 이 책의 비밀을 누설하고 싶은데, 사실 이 책은, 그 “논리적 속편”인 ?여행하지 않은 곳에 대해 말하는 법?에서 ‘화자’가 밝히듯이 칸트(와 더불어 프로이트)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다. 이 ‘책’이 바로 칸트의 초월론적 대상이라고 말할 것까지는 없겠고, 그냥 그것에 의해 우리의 인식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인식에 따라 그것이 결정된다고만 말해두면 될 것 같다(그러니 한편으로 이 책은, 책으로부터 자신이 결코 알지 못했던 어떤 지식을 얻고자 기대하는 독자의 환상을 깨버리는 잔인함을 숨기고 있다). 앞선 설명이 추상적으로 들릴 수 있으니 책의 사례를 들어보자. 1장인 ‘비독서의 방식들’에서는 폴 발레리, 몽테뉴와 더불어 로베르토 무질의 ?특성 없는 남자?와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이 다루어지는데, 그중 무질의 소설을 잠깐 살펴보자.

    ‘화자’는 이 소설에 등장하는 사서에 관심을 가지는데, 그 이유는 사서가 처한 문제와 그 해결이 우리에게 ‘책’이 무엇인지를 알려주기 때문이다. 사서가 처한 문제는 다음과 같다. 그는 350만 권의 장서를 보유하고 있는 사서로서, 그 모든 책에 대해 그것을 체계적으로 분류할 수 있을 정도로는 알아야 하는데, 살아생전에 결코 그 많은 책을 다 읽을 수 없다는 것이다(이는 부산대 도서관의 장서 수에 비하면 약 100만 권 더 많은데, 참고로 부산대 도서관에 있는 책을 하루에 한 권씩 읽는다고 하면, 다 읽기까지 약 6849년이 걸린다.). 사서는 이 문제를 능숙하게 해결해 도서관에 이미 있는 모든 책뿐만 아니라 새로 들어오는 모든 책 역시 제자리를 찾아준다. 그가 그럴 수 있었던 까닭은, 바로 그가 어떤 책도 읽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명제가 약간 전도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즉, 읽지 않은 책이라도 그것에 대해 말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대해 말하기 위해선(이는 사서의 경우 체계적 분류 작업에 해당한다), 절대 읽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책의 내용 속으로 코를 들이미는 자는 도서관에서 일하긴 글러 먹은 사람이오!”, 27쪽). 이는 350만 권의 장서를 눈앞에 둔 사서가 취할 수 있는 합리적인 태도라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한 권의 책을 펼쳐 읽는다는 것은 그 외의 모든 책을 당장은 덮어둔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런 식으로는 모든 책을 다뤄야 하는 자신의 일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없다. 그렇다고 그가 책을 전혀 읽지 않거나 도외시하는 것은 또 아니다. 그는 특정한 책이 아니라 책에 대한 책, 즉 한 책과 나머지 책 간의 관계를 밝혀주는 카탈로그를, 오직 그것만을 열심히 읽는다. 그는 모든 책을 사랑하지 하나의 책을 사랑하는 게 아니다. 따라서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죄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고 은근히 압박하는 우리 지식 사회의 터부와는 달리, ‘화자'는 이 사서에게 무죄를 선고한다(“그것은 무수히 많은 책 속에 침몰당하지 않기 위해 그 책들과 체계적으로 관계를 맺고자 하는 하나의 진정한 활동이다.”, 34쪽). 무질의 사서로부터 우리가 도출해낼 수 있는 결론은 다음과 같다. 요컨대 ‘책’이란 다른 책과의 관계를 통해 결정되는 것이지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 따라서 우리는 그 ‘책’을 읽지 않고도 그것에 대해 말할 수 있다. 물론 이는 읽지 않은 책에 대해선 말할 수 없다(나아가 말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을 반박하는 단편적인 결론일 뿐이다. ‘화자’는 이외에도 여러 예시를 통해 이 금기를 반박하는 여러 측면의 주장을 도출한다.

    마지막으로 ‘말하는 법’이야말로 ‘화자’ 자신이 이 책의 정수라고 밝히는 부분이다. 그 요령은 간단하다. 3장 ‘대처요령’의 하위 목록에 쓰여있는 대로, ‘부끄러워하지 말 것’, ‘자신의 생각을 말할 것’, ‘책을 꾸며낼 것’, ‘자기 얘기를 할 것’이다.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런 요령들이 단순한 처세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사실 이 책은 처세술을 다루기보단 새로운 독서 이론을 세우는 데 더 공을 들이며 처세술을 다루는 것처럼 보이는 3장 역시 이 새로운 독서 이론의 기반하에 제시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하게 다뤄지는 것은 독서의 창조성이다. ‘화자’는 만약 우리의 읽기가 독서/비독서로 분명하게 나뉠 수 없고 그 대상인 책마저 고정된 것이 아니라 다른 책들과의 관계, 그리고 우리의 욕망과의 관계 등에 따라 끊임없이 변하는 것이라면, 가능하지도 않은 소위 ‘정확한 독서’ 따위는 내버려 둔 채 오히려 창조의 발판으로 삼으라고 조언한다. 이는 책의 서두에서 인용된 오스카 와일드의 문장(“나는 내가 평문을 써야 하는 책은 절대 읽지 않는다. 너무 많은 영향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을 상기시키는데, 그는 ‘화자’가 제시하는 (비)독서가의 모범, (비)독서의 마스터이다.

    정리하자면, 책이라는 대상과 책을 읽는다는 행위는 모호하고도 유동적이며 따라서 가상의 실체를 좇아 정독이라는 착각과 그로부터 비롯되는 죄책감에 빠지느니 차라리 그로부터 거리를 두고 유희하며 자신의 창의성을 발휘할 기반으로 삼으라는 것이 이 책의 주제이다. 즉, 피에르 바야르의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은 “비독서의 좋은 점을 자랑하는” 책이자 독서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책이다.
    더보기
  • 레오파드 님이 그룹에 가입하셨습니다. 2019.04.27

    모두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