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살인자의 기억법 작가 김영하 출판 문학동네 hayul 님의 별점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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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부터 범상치 않은 이 얇은 책으로 김영하 라는 작가를 처음 접했다. 이년 전쯤엔 각색되어 영화로도 나왔으나 나는 책이 더 큰 충격으로 다가왔던 듯하다. 문장이 짧고 평이하기 때문에 책장을 넘기는 속도가 빠른 책이지만 속도에 집중해 질주하다 보면 어딘가에 추돌해 일그러지고 만다. 주인공과 함께. 망각에 부딪힌 우리의 기억들은 파편처럼 부서지고, 부서진 가운데는 공(空) 밖에 남지 않는다.
    주인공이 연쇄살인마라는 설정부터 이미 독자들의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지만, 가장 공포스러운 부분은 치매로 부서져가는 주인공의 기억이다. 주인공 병수는 기억을 잃지 않기 위해 메모를 하고 녹음기를 들고 다닌다. 하지만 점차 녹음을 해야한다, 메모를 해야한다는 생각조차 잊게 된다. 사실 있었던 것이 없어지고, 없어졌다는 사실조차 모르게 되는 일만으로도 무서운 일이지만, 병수와 독자를 가장 공포에 떨게 만드는 것은 병수의 모순되는 기억이다. 자신의 기억조차 믿을 수 없는 상황. 나의 감각과 인지가 어쩌면 완전한 허상일지도 모른다는 경악. 지금의 ‘나’가 ‘나’로 작동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과거에 대한 기억과, 이를 바탕으로 한 자신에 대한 정확한 인지, 그리고 미래에 대한 계획과 의지 같은 것들인데 치매는 이를 한번에 날려버린다. 그래서 존재는 더 이상 존재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게 고립에 고립이 계속되다 완전히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의 상태가 될 때까지 서술은 이어진다. 신이 연쇄살인마에게 내린 가장 가혹한 형벌일 것이다.
    중간의 반야심경 등에서의 인용구와, 다소 무미건조한 문체, 인물들의 설정이 잘 어우러져 여운이 오래 남는 책이었다. 책을 읽은지 오래되어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서평을 쓰기 위해 펼쳐본 구절에서마저도 압도적인 분위기를 풍겨오는 글이다. 조만간 다시 읽어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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